서해랑길 34코스(상수장마을-돌머리해변)

 

여행일 : ‘23. 8. 12()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현경면과 함평군 함평읍 일원

여행코스 : 상수장마을송정교차로하수장마을유수정마을외현화마을내현화마을파도목장돌머리해변(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현경면사소부터 14.62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4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함해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무안군에서 함평군으로 간다. 덕분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해만의 비경들을 곳곳에서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전천후 풀장 등 다양하게 꾸며진 돌머리해안은 잠시 쉬었다가기에도 충분하다.(이 후기도 무안문화원의 자료가 많이 활용됐습니다)

 

 들머리는 상수장마을(무안군 해제면 송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송정교차로(해제면 송정리)에서 현해로(해제방면)로 옮겨 400m쯤 들어가면 상수장(3)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150m쯤 들어가면 24번 국도의 가드레일에 닿는다. 서해랑길(무안 34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가드레일 아래에 세워져 있다.

 해제반도의 동쪽 해안(함해만과 면한)을 따라 걷는 17.2km짜리 코스이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코스를 조금 단축했다. 5.7Km를 줄인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시간을 감안 현경면소재지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럴 경우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는 현경면 소재지인 외반리(버스정류장)에서 출발했다. 77번 국도에서 곧바로 서해랑길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접근성에 대한 설명이 난감해 거리를 조금 늘리기로 했다.

 11 : 45. 815번 지방도(장군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때 5층짜리 아파트가 눈에 띈다. 이곳 외반리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55, 현경중학교를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77번 국도가 나타난다.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으로 gpx트랙은 시점까지의 거리를 4km로 찍고 있다. 하지만 내 앱은 0.7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쫒아낸다더니, 약하디약한 집사람에게도 내 코스를 3.3km나 줄여줄 능력이 있었나 보다.

 서해랑길은 국도 아래로 난 소로를 따른다.

 200m쯤 걷다가 굴다리 근처(이정표 : 종점 12.6km/ 시점 4.6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곳은 황토로 유명한 해제반도.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온통 푸름으로 물들었다. 무안의 또 다른 특산물인 고구마와 콩이 무럭무럭 자라면서 본래의 황토색을 덮어버렸다. 맞다. 무안은 요즘 구릉지마다 고구마 밭의 긴 이랑들이 줄지어 펼쳐진다. 지난 겨울 양파 밭이 그렇더니, 이 여름엔 또 고구마 밭들이 붉은 황토색 밭을 온통 푸르게 뒤덮어 버린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유수정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평산리(平山里) 4개 자연부락(원평산·평림·통정·유수정) 중 하나로 유수정(流水亭)이란 지명은 감방산 아흔아홉 구비에서 흘러내린 물이 평산을 지나 마을 앞으로 흘러간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해방 전까지 마을 뒤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게 시원한 정자구실을 톡톡히 한다며 ()’ 자를 붙였다나?

 마을회관 앞 빗돌은 마을의 유래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200년쯤 전 장흥고씨가 터를 잡았고, 이후 여러 성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커졌단다. 빗돌은 또 장흥고씨 후손들이 마을 앞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고, 임야를 개간하면서 마을을 부촌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마을을 벗어나자 널따란 들녘이 펼쳐진다. 무안문화원은 고기주라는 이가 서해바다라는 식당이 있는 곳에서 노두목까지 제방을 막았다고 적고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들녘 덕분에 부촌이 되었다며 마을 주민들은 칭송하고 있었다.

 들녘의 끝, 그러니까 건너편 구릉지 아래에도 작은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무안문화원의 자료에서 본 저건너란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확인해볼까 민가를 기웃거리는데, 누렁이 두어 마리가 단체로 짖어대는 게 아닌가. 아서라. 난 그저 마을 이름이 궁금했을 따름이란다.

 12 : 16. 길을 나선지 30, 815번 지방도의 평산4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평산4리는 유수정마을의 행정단위이니 유수정의 입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이곳에서 함해만과의 첫 대면이 이루어진다. 바닷가에는 흰발 농게(수컷의 하얗고 큰 집게발이 특징)’ 대추귀 고둥(주둥이 쪽이 사람 귀처럼 생겼고, 전체적으로는 대추를 닮았다)’의 집단 서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멸종위기 야생 생물 2급이니 무단 채집이나 쓰레기 투기를 금지한단다.

 잠시지만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집사람은 출발도 하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낭군과 함께 걷겠다며 2.4km쯤 뒤에서 출발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바다는 온통 황토색깔이다. 맞다. 이곳 함해만은 자연 침식된 황토와 사구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 특이성을 인정받아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지난 2001년 전국 최초 습지보호지역지정, 2008년 람사르습지 등록, 같은 해 6월에는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함해만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하며 200m쯤 걷다가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때 해제반도의 전형적인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양파 수확이 끝나고, 속살을 드러낸 농토가 온통 황토색이다. 얼핏 보기에도 한없이 부드럽고 기름지다. 그러다보니 저 땅은 언제나 푸름을 물든다. 늦가을 무와 배추 수확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어도 일대 들판은 푸른빛이 펼쳐진다. 대파와 양파, 마늘이 황톳빛 들판을 뒤덮기 때문이다.

 구릉지에서의 둠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구릉지는 농업용수 확보가 생명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팠다. 얼마나 물이 절실했으면 한 방울의 물도 아까워 바닥에 비닐까지 깔았을까 싶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했다. 이를 알리는 입추도 며칠 전에 지났다. 수확을 마친 저 참깨 단이 그 증거라 하겠다.

 구릉지를 헤집는 탐방로는 요리조리 잘도 방향을 튼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게 서해랑길의 가장 큰 장점이니 말이다. 서해랑길의 방향표식과 리본으로도 모자라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까지 가야할 길을 알려준다.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 웃자란 잡초로 뒤엉킨 밭이지만 금화규가 어여쁜 꽃을 피워냈다. (항산화·항바이러스·항알레르기·항균) 작용에 뛰어난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약초이다. 하지만 기르는 게 쉽지는 않은 듯. 동네 할머니는 어렵사리 씨앗을 구해 심었는데 자라라는 약초 대신 잡초만 한가득이라며 입을 석 자나 내밀고 있었다.

 12 : 38. 2차선 도로인 현화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300m쯤 떨어진 외현화마을 입구까지 이 길을 따라간다.

 길가에 효부 금성나씨 기행비가 세워져 있었다. 여자들에 대한 칭송은 열부(烈婦), 즉 남편에 대한 순종과 수절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도 이 빗돌은 효부로 적었다. 그게 특이해 자료를 찾아봤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외현화마을(현화1) 입구. 버스정류장에 적힌 로두목이란 지명이 눈길을 끈다. 두음법칙을 적용 노두목으로 적는 게 보통일 텐데, 누군가의 위트가 더해지면서 정감어린 지명으로 변했다. 하나 더, 여기서 노두(路頭)는 갯벌을 건널 때 발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놓은 징검다리를 말한다. 그러니 저 로두목마을은 바닷가일 게 분명하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외현화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동리인 현화리(玄化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외현화·청룡·내현화·성자동·절동·노두목) 중 하나이다. 새터와 구터로 이루어진 마을은 지형이 게()의 형국이란다. 구터와 새터가 게의 두 발이고 마을 앞에 있는 두 개의 선독이 게의 눈에 해당된다나? 하나 더, 옛날에는 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주민들은 게가 거품을 품을 수 있어 당시는 부자마을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닷물이 끊기면서 게의 거품이 일어나지 않아 마을도 가난하게 되었단다.

 동구 밖에는 전주최씨 삼강문이 들어서 있었다. 삼강(三綱)이란 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강조한 세 가지 덕목(··)이다. 이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병조참판을 역임한 제남을 충()으로, 지극한 효성으로 하늘의 감응을 이끌어낸 달신과 그의 아들 상효를 효(), 그리고 열()은 상효의 부인인 죽산안씨가 주인이다. 안씨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전염병으로 위독하자 허벅지살을 베어 약제로 사용함으로써 병을 낳게 하였단다. 삼강문 안에는 이를 기리는 2기의 비석이 있다.

 길가에 유정각을 지어 주민들뿐만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쉼터로 제공하고 있었다. 문객들로 붐비던 옛날이 그리웠나 보다. 참고로 조선 말, 최동현( : 노강)이란 선비가 이 마을에 살았더란다. 덕분에 그에게 배움을 원하는 수많은 인재들로 마을은 항상 붐볐고, 고을에 원님이 부임할 때는 직접 노강 선생을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을 정도였단다.

 건너편 구릉지에는 제각이 들어앉았다. ‘미수목란(난초가 필락말락 하는)’의 형국에 지었다는 전주최씨 제각 목란재가 아닐까 싶다. 이 집안에서 고시 합격자를 5명이나 배출했다니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탐방로는 구터를 지나 새터로 간다. 이어서 벽화로 치장된 마을안길을 지나 뒤편 들녘으로 빠져나간다. 원픽한 예쁜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딱 좋은 구간이다.

 마을 앞에 서있는 저 바위가 게의 눈에 해당된다는 선독일지도 모르겠다. 뜬 눈에 해당된다는 새터의 그 바위 말이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현화리의 주산인 태통산(兌通山, 55.1m)’을 에둘러 간다. 추석 때 현화리의 주부들이 저 산에 모여 강강수월래를 하며 정을 확인했단다. ‘화합의 장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정상 부근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풍치가 대단히 좋았다고 전해진다.

 12 : 58.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2, 탐방로는 내현화마을에 이른다. 와우형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지형이 주민들의 넉넉한 심성을 만들어주었다는 마을로, 조선시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의 제자 김석구(金錫龜(호는 玄圃) 배우고 익히며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하며 이곳에 터를 잡았단다.

 ! 내가 동경해온 풍경이 아닌가. 취선루(醉仙樓), 이백(李白)만 술과 달을 희롱하는 게 아니라는 저 배포가 부럽기만 하다. 벽에 적힌 싯구도 감성 풍부한 나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 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 흘렸더니 아! 빛나던 사랑이더라>

 마을 앞 팽나무 그늘에는 정자가 들어앉았다. 유리문을 달아 신발을 벗어야만 이용할 수 있던 외현화마을과는 달리 이곳은 통째로 개방되어 있다. 덕분에 우린 걸터앉은 채로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며 푹 쉬어갈 수 있었다.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긴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덕분에 할머니들의 생활도 많이 바뀌었다. 먼저 밀고 다니던 유모차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자가용으로 바뀐다. 편의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췄으니 모터가 없는 수동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그러던 것이 요즘은 모터까지 달아 젊은이들의 승용차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은포 김영원이란 이의 기행비도 눈에 띈다. 마을의 양대 성씨인 김해김씨가 낳은 효자로, 무안군청 홈페이지는 그의 효행을 친병에 상분하고 정간에 애훼과인하다고 적고 있었다.

 이번 구간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시설물들을 자주 활용하게 된다. 무안지역은 갯벌 낙지길을 브랜드로 내세우는데, 그중 평산4리 버스정류장에서 해운보건소까지의 1구간(마을과 들녘 : 9.3km) 대부분이 서해랑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15분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4분쯤 더 걸어 현화로(이정표 : 종점까지 8.2km)’로 올라선다. 만나는 지점에 생록동의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곧바로 횡단해 생록동 마을을 향해 간다. 사슴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고 해서 그런 지명을 얻었다.

 4분쯤 더 걸으면 삼거리, 왼쪽은 생록동으로 이어지는 길,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간다. 이정표는 4.5km 전방에 후동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이때 현화리의 나머지 자연부락들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감방산(259m) 자락에 들어앉은 구산마을과 성자동마을이다. 현화4리에 속한 작은 부락들로 감방산 아래 815번 지방도(장군로)를 사이에 두고 내현화 마을과 마주보는 형세이다.

 탐방로는 들녘을 향해 나아간다. 눈에 익숙한 구릉지가 아닌 걸 보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

 이 동네는 마음 고운 이들로 가득한 가 보다. 길가에까지 꽃밭을 만들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예쁜 낮달맞이꽃을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었다.

 생록동 삼거리에서 8. ‘광덕1교로 현화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하천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하천변에는 야관문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원래 이름은 비수리’, 잘게 썰어 술로 담가 먹는데, 이게 남자의 정력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약재명인 야관문(夜關門)으로 세간에 입소문을 탔다.

 야관문의 약효를 의심하면서 걷길 8. ‘약효가 없다로 결론이 날 즈음 함해만에 이른다. 물 빠져나간 바닷가에는 꼬맹이 고깃배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주인을 모시고 고기잡이 나갈 물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방의 안쪽, 한때 양식장이었을 법한 연못은 방치되고 있었다. 대하양식장으로 그만이겠는데도 말이다.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건너편 해제반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맑고 고운 황토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맞은편 해제반도까지 짧은 곳은 7km, 먼 곳은 11km까지 드넓은 갯벌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다. 갯벌은 하루 두 번 물이 들고 나면서 스스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6시간마다 스멀스멀 갯골을 기어오른 바닷물은 다시 눈에 띄지 않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를 반복하면서 갯벌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는 저런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느긋이 쉬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눈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계단 모양으로 만든 방조제도 눈에 띈다. 단에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게 또 자다르(크로아티아)에서의 추억을 소환시킨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바다 오르간(Moske Orgulje)’인데, 그곳도 역시 돌로 만든 방파제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았었기 때문이다. 파도가 일렁이면서 이 구멍으로 물결이 밀려들어가고, 이게 방파제 밑의 공기를 밖으로 밀어내면서 오르간처럼 소리를 내는 것이다. 파도의 크기와 속도에 따라 다른 음을 내는 것은 물론이다.

 바닷가 갈대밭은 가을철이면 또 다른 볼거리로 제몫을 할 수도 있겠다.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갈대꽃만으로도 아름다울 텐데, 그 너머로 해제반도의 빼어난 풍경까지 더해진다면 이 아니 아름답겠는가.

 눈의 호사는 10분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향한다.

 잠시 후 2차선 도로인 해운로로 올라선다. 이정표는 34코스의 종점인 돌머리해변까지 5.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4 : 00.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만에 갯벌체험과 낙농체험을 함께 할 수 있다는 파도낙농체험농장에 도착했다. 치즈만들기, 젖소 젖짜기 등 다양한 낙농체험 프로그램으로 억대 농외소득을 올리는 알짜 목장이라고 한다. 농촌 살림도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목장의 끄트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는 1.7km전방에 있는 후동마을을 가리킨다. 서해랑길도 이를 따르면 된다.

 탐방로는 바닷가를 향해 간다. 하지만 바다를 코앞에 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겨난 들녘으로 들어선다.

 들녘에 들어선 길은 요리조리 잘도 방향을 튼다. 이유는 단 하나, 해운천과 자명천에 놓인 다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이 구간은 서해랑길의 표식에 더해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파도목장에서 21, ‘해운1로 해운천을 건넌 다음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오리농장이 줄을 잇는 구간이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바닥을 드러낸 담수호(?)가 떡하니 길을 막는다. 탐방로가 내륙을 향해 방향을 틀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자명천을 건넌다. 이름조차 없는 이 다리가 군경계이다. 무안군을 누비던 서해랑길이 이 다리를 건너 함평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4 : 30. 잠시 후 바닷가에 이르니 다리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공사 중이기는 하지만 건너다닐 수는 있는 것이다. 이는 아까 파도목장에서 내려와 해안선을 따라 이곳으로 와도 된다는 얘기가 된다. 괜히 알바를 했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진행방향 저 멀리서 34코스가 종료되는 돌머리해안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함평 땅에서 만난 갯벌은 아까와는 많이 다르다. 맑고 고운 황토색이 아니라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변함없이 아름답다.

 모래톱이 고와 카메라에 담아봤다. 모래톱(沙濱)은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인해 생긴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해안을 말한다. 그게 오래가면 비진도처럼 두 개의 섬이 하나로 이어지기도 한다.

 해안길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걷는 게 썩 편하지는 않았다.

 목적지인 돌머리해안이 많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빙 둘러 가야하기 때문에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면서도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까 해안에 올라선 후로 35분이나 더 걸어야만 했다.

 갯벌은 온통 구멍투성이다. 맞다. 이곳 함해만에는 해양수산부 지정 해양보호생물인 흰발농게, 대추귀고둥을 비롯한 250종의 저서생물이 살아간다. 또한 칠면초, 갯잔디 등 47종의 염생식물, 혹부리오리, 알락꼬리마도요 등 약 52종의 철새 등 많은 생명체가 이곳 갯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15 : 06. 드디어 종착지인 돌머리해안에 도착했다. 첫 만남은 ‘Stone Dahlia’ 호텔&리조트이다. 해안선을 따라오면서 랜드마크삼아 방향을 잡았던 건축물로, 객실에서의 프리미엄급 spa ocean view, 거기에 갯벌체험이 더해지면서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리조트 앞 갯벌은 게나 조개, 해초류 등을 직접 잡아볼 수 있는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나보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노두 주변에서 뭔가를 잡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띈다.

 탐방로는 리조트의 왼쪽 옆구리 쪽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걸어보기로 했다. 기껏해야 30m쯤 걷다가 광산김씨세장산 빗돌 앞에서 탐방로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잘 생긴 거북이 한 마리를 포획할 수 있었다. 보라. 바닷가 해식애 속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있는 저 거북이를.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모퉁이를 돌면 전망대가 반긴다. 아니 3층 높이에 조망대가 있으니 전망타워로 불러도 되겠다. 트레킹의 막바지, 이미 바닥을 보이는 체력 때문에 3층 높이의 계단은 다소 부담스럽다. 하지만 함해만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내 예상은 옳았다. 일망무제의 조명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내륙을 향해 항아리처럼 파고들어온 함평만이다. 그 건너는 해제반도, 폭이 불과 400m 정도인 송정리 땅으로 인해 뭍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

 저 멀리 함해만 입구에는 칠산대교가 놓여있다. 함해만은 반 폐쇄적인 특성을 지닌다. 면적이 344(길이 17km/  1.8km)쯤 되는데, 입구에서 영광의 칠산 바다를 만난다. 길이 109.2km의 해안선이 원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맨 오른쪽에는 백사장의 길이가 1Km쯤 된다는 해수욕장이 들어앉았다. 아니 돌머리지구 연안유휴지 개발사업(85억 원이나 들였단다)’이 만들어낸 일종의 유원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수욕장 일대에 해변탐방로·갯벌탐방로·어린이풀장·해수풀장·오토캠핑장 등 친서민 휴양시설을 조성했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듯 정자를 지어놓았다. 눈요깃거리로 예쁜 돌탑도 쌓아올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함평만 생태보존기념비’, 함평 땅에 들어서더니 함해만이 함평만으로 둔갑해버렸다.

 그 옆에는 어린이 물놀이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워터버킷·워터슬라이드 등을 갖춰 해수욕과는 다른 재미를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돌머리해수욕장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썰물 때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닷물을 끌어와 인공풀장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무려 7480나 된단다. 건강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해수를 교체해준다니, 피서객들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서해의 특징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것이다. 그런 서해에서도 가장 큰 곳을 고르라면 단연 이곳 돌머리해안이 꼽힌단다. 그런 특징을 살리기 위해 만든 게 갯벌탐방로이다. 해수풀장 근처에서 405m의 탐방로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다. 그 끝에는 물이 차면 보이지 않는 암초가 있다고 한다. 이 암초를 돌머리라고 부르는데, 이게 해안의 이름이 됐다.

 해안은 거의 유원지 수준이다. 샤워장·취사대·매점 등 편의시설을 두루두루 갖췄는가 하면, 원두막과 야영장 등 웬만한 유명 관광지가 부럽지 않게 잘 꾸며 놓았다. 하긴 깨끗한 갯벌, 아름다운 낙조, 상쾌한 소나무 숲이 부각되면서 전국 청정해수욕장 20에 선정되기도 했다니 어련하겠는가.

 물이 빠져나간 해수욕장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생태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에서 게, 조개 등이 살아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마음 내키면 직접 잡아볼 수도 있다. 또 전망대 쪽으로 가면 자연산 석화(이 지역에서는 이라 부르기도 한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갯바위도 만나게 된다.

 서해랑길 35코스(함평)의 안내판은 해수풀장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부근에 편의점이 있어 맥주 두어 캔(집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챙기는 행운까지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4.62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33코스(무안 황토갯벌랜드-상수장마을)

 

여행일 : ‘23. 7. 29()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과 현경면 일원

여행코스 : 무안 황토갯벌랜드수암교차로가입마을마산마을성재동용정골두동마을석북마을수양촌상수장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9.9km, 실제는 13.20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2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해제반도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다. 덕분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해만의 비경들을 빠짐없이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마산마을 부근에서는 함해만과 탄도만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진풍경을 마주하기도 한다.(이 후기는 무안문화원의 자료가 많이 활용됐습니다)

 

 들머리는 무안 황토갯벌랜드(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오른쪽 만송로로 들어오면 잠시 후 황토갯벌랜드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무안 33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입구의 무안갯벌센터 표지석 옆에 세워놓았다.

 해제반도의 북쪽 해안(함해만과 면한)을 따라 걷는 19.9km짜리 코스이다(돌출된 곶부리 모두를 걷지는 않는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코스를 조금 단축했다(홀통과 마산리 사이 검은 점이 찍힌 곳에서 시작). 거기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두동마을과 석북마을도 둘러보지 못했다.

 실제출발지는 홀통교차로(현경면 마산리)’. 홀통유원지로 들어가는 입구로 지난 24코스 답사 때 이곳을 지나가기도 했었다. ! 주민들은 이 부근을 배나무정(梨木亭)’으로 부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버린 배나무 씨가 자라난 곳으로 예전에는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었다나?

 마산마을을 정면에 놓고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00m쯤 걷다가 삼거리에서 왼쪽 농로로 접어든다.

 그렇게 6분쯤 걸어 방조제에 이른다. 함해만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24코스 때 길을 헤매다가 방향표시가 왜 거꾸로 되어있지?’를 외쳤던 지점이기도 하다. 하나 더, 앱은 이곳이 출발지에서 4.35km 떨어진 지점이라고 한다. 그러니 오늘은 15.5km만 걸으면 된다.

 정규탐방로를 만났으니 기념사진부터 한 장. 마침맞게 무안갯벌을 자랑하는 안내판이 둑에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 아래로 보이는 저 방향표시를 보고 24코스 때 헷갈려했었다.

 둑으로 올라서자 조롱박처럼 생긴 바다가 펼쳐진다. 가입리 곶부리()와 마산리 곶부리가 빚어 놓은, 함해만 속의 작은 만()이다. 그런데 갯벌이 검지 않고 붉은 게 아닌가? 맞다. 이곳은 황토로 유명한 무안의 해제반도이다.

 둑길(아래로 나있다)을 따라 걸으면서 33코스의 탐방이 정식으로 시작된다. 마산마을을 부티 나게 해준 고마운 둑이다. 간척으로 인해 생긴 토지가 많아 현경면에서 첫째가는 부자마을이란 소리까지 들었다니 말이다.

 잠시 후 도착한 방조제 끝(이정표 : 시점 4.5km/ 종점 15.4k), 서해랑길은 함해만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내륙에 들어앉은 마산마을을 향해 내닫는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 법정 동리인 마산리 2개 자연부락(마산·신기) 중 하나인 마산마을에 이른다. 마산(馬山)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 주변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많단다.

 이 마을은 효자·효열비나 공덕비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열각(旌烈閣)을 포함하여 22개나 세워져 있단다. ‘함평이씨세거지(이 마을은 광산김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빗돌이 수문장 노릇을 하는 동구 밖에서도 3개를 만날 수 있었다.

 서해랑길은 마을 고샅길로 들어간다. 하지만 관통하지는 않고 마을 뒷산인 비룡산을 오른편에 끼고 한 바퀴 돈다. 마을을 관통하면 거리가 훨씬 단축되겠지만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해만의 풍광을 구경해보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때 느닷없이 펼쳐지는 진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해제반도를 감싸는 두 개의 바다가 한꺼번에 펼쳐지는 것이다.

 일단 탄도만부터 주워 담고 본다. 무안군 운남면·망운면·현경면·해제면과 신안군의 지도읍에 둘러싸인 넓은 만()으로 2008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으며, 전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생명의 땅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는다. 탄도만과 함께 무안갯벌의 양대 축을 이루는 해안이다. 이곳도 갯벌습지보호지역(1) 및 갯벌도립공원(1)으로 지정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08년에는 람사르습지로도 지정됐다. 생물 다양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덕분이다. 실제로 무안갯벌에는 칠면초·갯잔디 등 47종의 염생식물과 250종의 저서생물이 서식한다. 또한 혹부리오리·알락꼬리마도요 등 52종의 철새가 찾는 곳이기도 하다.

 전망 좋은 언덕. 노거수 아래는 쉼터로 변했다. 응접실용 소파를 놓아둔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비경을 느긋하게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조선 유학의 거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인이 이곳 마산마을을 열었다더니, 그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예()를 발로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비룡산을 한 바퀴 에돌아가는 탐방로는 임도다. 그러다보니 약간은 가파른 구간도 나타난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가입리의 곶부리가 눈에 들어온다. 함해만에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저런 곶부리가 수없이 많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마산마을의 곶부리가 함해만의 중심을 향해 뻗어나간다.

 임도를 빠져나오면 또 다시 마산마을을 만난다. 아까 마을을 관통했을 경우 이곳으로 나오게 된다.

 비닐하우스의 변신. 작물의 보금자리가 건조장으로 변했다. 온도 조절이 필요 없어진 농작물은 노지로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고추·쪽파 등 최근 거둬들인 수확물들이 차지했다.

 이곳에도 방조제가 축조되어 있었다. 하긴 현경면 제일의 부촌이라는 얘기가 허투루 생겨났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 부근에서 최근의 농촌 현실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15명 정도의 주민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새참을 먹는데, 주고받는 언어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큰 무리는 당연히 한글, 하지만 베트남어로 얘기를 주고받는 무리도 대여섯 명은 족히 되겠다. 이주 여성들의 숫자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얘기가 아닐까?

 아름다운 풍경은 흔하디흔한 들꽃까지도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나 보다. 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란다는 것 말고는 관심 밖의 들꽃이었는데, 오늘따라 저렇게 아름다운 걸 보면 말이다. 해녀들이 내는 숨비기 소리까지 떠오르게 만들면서...

 천일홍(千日紅)도 그 빼어난 자태를 뽐낸다. 꽃의 붉은 기운이 1000일이 지나도록 퇴색하지 않는다는, 예로부터 불전을 장식하는 꽃으로 애용되어 왔을 정도로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

 서해랑길은 마산마을의 곶부리 앞(이정표 : 종점까지 13.2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용정리로 넘어가는 구릉지 위로 오른다. 이때 해초랑이라는 건조해산물 유통회사(사진 속 건물)가 눈에 띈다. 바닷가다운 풍경이랄까?

 구릉지를 넘자 또 다른 해안이 얼굴을 내민다. 마산리와 용정리 사이의 해안으로 그 끄트머리에서 용정리 곶부리가 바다를 향해 달음박질을 친다. 무안지역의 또 다른 볼거리인 용정리 곰솔(전남기념물 제176)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즈음 길은 평야지대로 들어선다. 구릉지만 내내 걷다가 만나는 들녘이 생경스런 풍경으로 다가온다.

 가슴 아픈 풍경도 눈에 띈다. 방송은 온 나라를 괴롭히던 장마가 남부지역, 특히 해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전했었다. 34코스는 그 해제반도를 걷는다. 그래선지 당시 만들어진 상처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 신기마을 갈림길(이정표 : 종점까지 11.6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7분쯤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24번 국도가 얼굴을 내민다.

 조금 더 걸어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탐방로는 24번 국도를 왼쪽에 놓고 나란히 간다.

 길가 빗돌이 눈길을 끈다. ‘송암거사’. 빗돌까지 세웠을 정도로 명망 높은 인물인 듯한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빗돌은 웃자란 잡초 무더기에 묻혀버렸다. 그나저나 이 지역은 거사(居士)’라는 호칭이 유행인가 보다. 아까는 낙헌거사라고 적힌 빗돌도 보았었다.

 그렇게 10분 남짓 걷자 2차선인 성재길을 만나고, 이 길을 따라 24번 국도의 아래를 지난다. 용정리 곶부리(끝에 월두마을이 있다)를 향해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성재마을’. 법정 동리인 용정리(龍井里)’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새터·용정골·월두·성재동·봉대) 중 하나로,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 곶의 초입에 해당한다. 성재동(成才洞)이란 지명은 땅이 기름지고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얼음 막걸리로 목을 축이다가 문득 전해오는 노랫가락 하나를 떠올려본다. <먹고가자 성재동/ 어야디야 달머리/ 가갸거겨 두동/ 깔끔하다 신촌/ 뺐다박았다 용정골/ 건방지다 수양촌> 성재동 주민들의 어진 성격이 잘 나타나있는 노래라 하겠다. 맞다. 이 마을은 배고픈 길손을 그냥 보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넉넉한 인심을 자랑한단다.

 계속해서 성재길을 탄다. 그리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1차선으로 바뀌었다.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에 김해김씨 삼현파(용정가문)’의 가족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다. 참고로 삼현파는 김수로왕의 49세손 김관(고려 고종·충목왕 때 사람)이 기세조(1)  파시조이다. 남의 집안 묘역이 뭐가 중요할까마는 하도 반듯하게 써져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선대부(2), 통정대부(3) 등 빗돌에 적힌 품계들이 하나같이 당당하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듯.

 고개를 넘으면 내용마을(용정골에 속한 자연부락)’, 하지만 서해랑길은 내용마을로 들어가지 않는다. 갈림길(이정표 : 종점까지 9.0km)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용정골로 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0. 용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용정골에 이른다. ‘용정이란 지명은 마을 앞 용샘에서 따왔다. 서해의 용이 승천하려다 샘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형국이란다. 용정골은 무안군 제일의 쪽파 생산지로 알려진다. 외지와 계약재배를 통해 주민들의 소득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단다.

 마을회관 건립 기념비는 마을의 유래와 함께 김해김씨의 내력을 주저리주저리 읊고 있었다. 삼현파의 13세손 김문암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생겨났단다. 이 마을이 김해김씨의 집성촌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월두마을(용정리 곶부리의 끝자락에 들어앉았다)로 연결되는 2차선 도로를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아니 100m쯤 따라다가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갈라져나가는 농로로 들어선다.

 갈림길 초입.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가 눈에 띈다.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역사 자원을 특성 있는 이야기로 엮어 국내외 탐방객들이 느끼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하는 사업으로, 무안군은 갯벌 낙지길을 브랜드로 내세운다. 그중 월두마을에서 송정리 버스정류장까지의 2구간(11km)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이 지점부터 서해랑길과 정확히 일치한다.

 서해랑길은 이제 용정리에서 수양리로 넘어간다. 길은 바닷가에 인접해 나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온통 황토색으로 물든 구릉지다. 해제반도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이즈음 가슴속에 꼭꼭 담아두고 싶은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함해만이 용정리와 수양리 곶부리 사이를 항아리 모양으로 움푹 파고들어온 것이다. 거기에 꼬맹이 섬 두어 개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길은 또 다른 구릉지를 넘는다. 해제반도는 땅도 바다만큼 낮아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이 절반이다. 풍경으로만 따진다면 하늘이 열 일하는 곳이다.

 폭우와 강풍을 몰고 온 장마가 온 나라를 헤집고 지나갔지만, 그런 땅에서도 살아남은 생명은 계절에 맞춰 익어가고 있었다. 그래.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가 다음 주 아니겠는가.

 멋들어지게 지어진 한옥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저 저수탑(貯水塔)도 구릉지의 전형적인 풍경 중 하나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둠벙)을 팠다. 그 마저도 어렵다면 저런 저수탑이라도 만들어 물을 대야하지 않겠는가.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5. 2차선 도로인 팔방길로 내려선다. 수양리 곶부리의 끝자락에 위치한 두동마을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한다.

 이때 수양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장마철 폭우 때문인지 물이 온통 황토색을 띠고 있다.

 5분쯤 걸었을까 석북마을 버스정류장에서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직진해 두동마을로 간다. 참고로 서해랑길의 가장 큰 장점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걷기길 여행자들의 가장 큰 걱정(혹시 길을 잃지 않을까 하는)이 이곳에서는 남의 집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난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다. 코스를 단축하려는 이들의 뒤를 무심코 따르다가 그만 서해랑길 표식을 놓치는 우를 범해버렸다.

 길을 잘못 들어선지 5,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왼쪽은 석북마을로 이어진다. 우린 갈림길을 무시하고 2차선 도로(석북길)를 따라 직진했다.

 5분쯤 더 걸어 만난 삼거리에서 아까 놓쳤던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석북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우리와 헤어진 서해랑길은 수양리 곶부리를 한 바퀴 에돌아 이곳으로 온다. 이때 수양리(垂楊里) 3개 자연부락(수양촌·석북·두동) 중 두동마을과 석북마을을 지나게 된다.

 이정표(종점까지 3.5km)는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섰었음을 확실히 알려준다. 방향표시 날개가 좌(시점(종점)로만 달려있고, 우리가 걸어온 방향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좌우로 상당히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요 어디에 방조제가 축조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대부분에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이곳 해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는 저 물고기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니, 흐름을 멈춘 저런 웅덩이쯤이야 물이 끓는 수준이 아닐까?

 그렇게 15분쯤 걸어 수양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수양촌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소양촌’. 소를 기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다가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아 수양촌(垂楊村)으로 고쳤다고 한다. 수양촌은 부자마을로 유명하다. 하지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초근목피로 삶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둑을 쌓아 농지가 마련됐고, 지하수가 개발되면서 삶이 확 바뀌었단다. 거기에 주민들의 부지런함이 보태졌음은 물론이다.

 여름철 마을회관은 주민들의 피서지로 변한다. 정부가 지원해준 냉방시설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게 오늘처럼 살인적인 무더위에는 여행자들의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목이라도 축일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데 잠시 쉬어가라며 자리까지 내준다. 덕분에 얼음처럼 차가운 정수기 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마을에는 한마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정자와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회관 앞 팽나무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늘 아래 팔각정을 짓는 기지를 발휘했다. 덕분에 둘레길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쉼터가 되어준다.

 마을 주변은 비닐하우스로 한 가득이다. 안에서는 고소득 작물인 참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여성들 할일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마을은 1970년대 80년대 농민운동의 발상지였다. 특히 1988년 전국을 뒤흔들었던 고추파동이 이 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현실참여도 활발해 2000년대 들어서는 마을의 임원들이 대부분 여성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또 다시 길을 이어간다. 이때 무안의 특산품인 고구마 밭 너머로 함해만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이제껏 보아오던 황토색 갯벌이 아니라,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호수다. 참고로 함평과 해제 사이의 함해만(咸海灣)은 칠산 바다의 좁은 입구로 막힌 호수 같은 바다다. 그 바다에 물이 빠지면 황토색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참솔고 버섯농장이란다. 스마트팜 재배로 상위 1%, 천 개의 표고버섯 중 몇 개만 자라나는 백화고를 재배한다나? 희소가치만큼이나 특별한 효능으로 암, 면역질환 환자들의 필수 섭취 대상 1호라고 한다.

 수양촌을 부촌으로 만들어준 들녘을 지난다. 이때 갈림길을 여럿 만나지만 이야기가 있는 생태탐방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면 길을 놓칠 일은 없다.

 코스 막바지에 이른 서해랑길은 24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지나 송정리로 들어간다. 이때 만나는 굴다리는 2, 첫 번째 굴다리는 그냥 지나친다. 코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방 쪽으로 간다.

 굴다리를 지나 구릉지 위로 오른다. 24번 국도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150m쯤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야기가 있는 생태탐방로의 이정표(송정리 버스정류장 50m/ 수양마을 1.8km)는 이곳에서 오른쪽(송정리 버스정류장 방향)으로 가란다. 하지만 이를 무작정 따라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방향표지판은 없지만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정표에 나타난 버스정류장을 33코스의 종점으로 삼고 있는 kakaomap을 절대 따르지 말라는 얘기다.

 날머리는 무안방향 24번 국도의 송정교차로에서 300m쯤 못 미친 지점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50m쯤 걸으면 24번 국도의 아래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그러나 기점을 삼을만한 구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300m를 더 가면 송정교차로가 나온다는 국도 표지판이 전부다.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4코스)와 이정표(종점까지 17.1km)는 국도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3.20km가 찍혔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상황에서 시간당 4km를 걸었으니 무리하게 걸은 셈이다.

서해랑길 32코스(매곡마을 삼강공원-무안 황토갯벌랜드)

 

여행일 : ‘23. 7. 22()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매곡마을외분마을염전입석마을송계마을도리포항망대봉범바위산삼복산노문마을무안황토갯벌랜드(거리/시간 : 17.5km)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2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아홉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이번도 역시 바닷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해안길이 대부분, 여기에 5km 정도의 산길이 보태진다. 난이도에 별이 셋(5개 중에서)이나 붙어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칠산 앞바다와 함해만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리포, 황토갯벌랜드가 더해지는 등 볼거리가 많아 힘들다는 느낌이 들 여유도 없다.

 

 들머리는 매곡마을(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77번 국도(영광방면)로 바꿔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학천교차로(해제면 용학리)에서 805번 지방도(해제·지도방면), 원일아파트(해제면 양매리) 앞 삼거리에서 매곡·내분길(오른쪽)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곡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무 32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마을 앞 삼강공원에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닷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17.5km짜리 둘레길이다. 해제반도의 동북쪽으로 돌출된 곶()을 한 바퀴 도는 모양새, 하지만 우린 트레킹을 시도조차 못한 채 포기하고 말았다. 폭우경보(시간당 45나 내린단다)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초속 10m의 바람은 우산까지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집스레 강행했던 도반 한 분은 폭우로 인해 생긴 웅덩이에 빠져 고가의 DSLR 카메라를 망가뜨리는 불상사를 초래하기도 했다.

 트레킹은 고사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것조차 버거우니 어쩌겠는가. 버스를 탄 채로 도리포항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니 트레킹을 강행한 일행 2명을 중간지점에서 낚아채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더 계속할 경우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니 억지로라도 포기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완주도 좋지만 안전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도리포는 유원지. 그러니 소문난 맛집 하나쯤 없겠는가. 인터넷에 심심찮게 뜨는 횟집에 자리를 잡고 점심부터 먹고 본다. 여름이 제철인 농어를 안주삼아 술을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 할까? 30명이 넘는 인원의 염원이 하늘에까지 닿았음인지 점심이 끝날 즈음 비가 그쳐주었다. 비록 잠시였지만... 아무튼 비가 뜸해진 틈을 타 도리포 일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도리포는 함해만(흔히 함평만이라 부른다)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이 일대는 조차가 심해 좋은 포구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나마 항만 구실을 하는 곳이 도리포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도리포와 영광 향화도를 잇는 칠산대교가 놓이면서 여행객의 발길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도리포 인근 해역은 사적 제395호로 지정된 고려청자 매장지이다. 왕실과 관아에서 사용하기 위해 강진 가마터(대구면 사당리 미산부락)에서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1995년을 시작으로 세 차례의 발굴을 거쳐 639점의 고려청자(분청사기로 넘어가는 시기)를 건졌다고 한다. 바닷속 갯벌이 해저유물을 저장하는 진짜 수장고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도리포는 해제반도에서 동북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곶에 위치한 항구다. 바다 건너 영광(염산면 향화도) 땅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놓은 다리가 칠산대교’. 왕복 2차선, 길이 1800m로 지난 2019년 말 개통됐다. 저 다리가 개통되면서 양 지역은 차량 이동 시간이 크게 단축됐고, 생활편의도도 그만큼 크게 향상되었다.

 무안 땅에 웬 영광군의 관광안내도? 그나저나 동해는 일출이 서해는 일몰이 아름답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이 둘을, 특히 바다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곳 도리포가 딱 그런 곳이란다. 함해만(흔히 함평만이라 부른다)을 배경으로 뜨는 해를 보고, 오후에 칠산 앞바다로 지는 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널따란 광장 근처, 바닷가에는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갯바위(살아서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환생바위로 불린다) 하나가 오롯이 솟아올랐다. 방파제로 연결시켜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꼬맹이 섬인데, 관광객들을 위한 볼거리를 조성해놓았으니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내가 찍은 사진이 좋지 않아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렸다)

 꼭대기는 망부석 차지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여인의 형상인데, 서해 먼 바다로 고기잡이 떠난 낭군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있지 않나 싶다. 맞다. 이곳 도리포는 내해(內海)인 함해만에서 서해바다로 나가는 관문, 고기잡이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다 망부석이 된 여인이란다.

 망부석 아래 석판에는 백창석 전 무안문화원장의 사랑이여 그리움이여라는 시가 적혀 있었다. <바닷물에 씻어내고/ 별빛으로 밀려온 설움/ 퍼렇게 멍든 가슴 갈매기 벗삼아/ 기다려 온 천년 세월/ 두 손 꼬옥 잡고 맹세한 약속/ 칠산바다 노을에 달라진 그리움/ 도리포 환상바위 위에/ 새겨놓은 애달픔 하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천 년을 기다려온 사연을 담았다나?

 망부석과 시비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환생바위에서 자라고 있는 팽나무에 행운을 비는 나무라는 스토리텔링을 입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로 내놓았다. 작달막하지만 수령이 200년도 넘는 무안군의 보호수라고 한다.

 내만에는 도리포 항이 들어앉았다. 참 도리포 인근해역은 참숭어가 많이 잡힌다고 했다. 보리가 익는 시기(5)가 제철이라고 해서 보리 숭어라는 별명이 붙은 생선이다. 자산어보는 고기 맛이 달고 깊어서 물고기 중에 최고로 적고 있다. 하지만 횟집의 수족관에는 숭어가 없었다. 하긴 살이 무른데다 갯벌 냄새까지 나는 여름철 숭어를 누가 사먹겠는가.(‘여름철 숭어는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분에 우린 자연산 농어와 광어를 반반으로 섞어 먹었다.

 도리포항의 등대는 단순한 등대 기능에 해양관광자원 기능을 보탰다. 이 지역의 대표 수산물인 갯벌 낙지(쫄깃한 맛과 게르마늄 갯벌의 향으로 전국 최고의 브랜드와 명성을 자랑한다)’를 형상화 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을 소개하기 위해 칠산 앞바다(섬은 닥나무가 많이 난다는 닥섬’)의 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도리포의 동쪽과 서쪽으로 발달한 저 갯벌에서는 일찍부터 김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주식으로 곱창김을 생산하는데, 일반 김보다 채취 횟수가 적어 대량 생산이 어려운 반면 김 값이 훨씬 좋단다.

 32코스의 종점인 무안 황토갯벌랜드로 가는 여정 또한 산악회 버스가 대신 해줬다. 그러다보니 32코스는 버스로 시작해 버스로 끝나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공짜로 코스를 완주했다고나 할까? 아니 미완의 코스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 같다.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3코스)와 시작점 표지판은 황토갯벌랜드로 들어가는 초입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32코스 종점이 황토갯벌랜드의 부대시설인 황토찜질방 근처로 검색된다. 코스 변경이 최근 이루어졌지 않나 싶다.

 덕분에 남아도는 게 시간. 그 시간을 이용해 황토갯벌랜드를 둘러보기로 한다. 지난 2006년 무안황토갯벌센터로 처음 문을 연 갯벌랜드는 국내 최대(총면적 42)의 갯벌 테마파크다. 무안갯벌을 배경으로 과학전시관, 해상안전체험관, 갯벌체험장, 캠핑장 등이 펼쳐져 있다.

 첫 만남은 해상안전체험관이다. 해상재난과 안전사고 등 긴급상황 발생 시 대처능력을 향상하고 안전의식을 고취시키는 서남권 유일의 안전체험관이다. 연면적 1091 2층 건물에 다양한 체험시설(가상현실·침수차량 탈출·바닷가생활안전·구명보트·심폐소생술·선실탈출)을 갖추고 있다.

 시간에 쫓긴 탓에 실제 체험은 사양. 안전의식을 얻어가는 선에서 만족해본다. ‘I will survive’, 미국 가수 글로리아 게이너의 노래로 더 친숙하지만, 살아남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더욱이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라는 전제조건이 주어진다면....

 갯벌랜드는 1천만 평도 넘는 대단위 테마파크이다. 하지만 어느 곳 하나 허투루 방치된 곳이 없었다.

 그러니 포토 존이 빠질 리가 있겠는가. 핑크 뮬리(Pink muhly)도 그중 하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 꽃밭으로 조성했던 지자체들이 다시 제거하는 해프닝까지 벌였던 식물이다. 그게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포토 존으로 되살아났다.

 핑크 뮬리(Pink muhly)는 가을이 제철이다. 가을이면 분홍색 꽃이 풍성하게 피기 때문이다. 때를 못 맞췄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황토와 편백나무를 베개 삼아 아름다운 갯벌을 바라다보고 즐길 수 있는 숙박시설도 자랑거리 중 하나다. 황토이글루, 황토움막, 방갈로, 카라반 등 형태도 다양하다. 캠핑가족들을 위한 오토캠핑장과 카라반사이트도 널찍하니 마련되어 있었다.

 편의시설로는 황토찜질방, 샤워장, 바비큐장 등을 꼽을 수 있다. 황토찜질방은 힐링 명소로도 입소문을 탔단다. 황토방·편백방·소금방·산소방 등을 갖춘 데다 동시에 112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단다.

 황토찜질방 곁에는 낙지광장이 있다. 무안의 대표 특산물인 낙지를 광장의 이름으로 삼으면서 디자인 또한 낙지 모양으로 했다. ! 조금 더 가면 문형렬분재역사관과 분재공원, 생태갯벌과학관이 나오지만 주어진 시간에 쫓겨 포기하기로 했다.

 광장 근처에도 다양한 포토 존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고기를 형상화한 저 조형물도 그중 하나다.

 무안지역의 갯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짱뚱어도 포토 존으로 되살아났다.

 이제 갯벌을 체험해 볼 차례다. 갯벌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1.4의 탐방다리(갯벌탐방로)를 놓았다.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덤이라고 한다.

 검은 비단으로도 불리는 무안갯벌은 갯벌 특유의 아름다움과 생물 다양성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그러니 이를 배경삼은 포토 존 하나쯤 없겠는가. ‘사진 찍을래? 고래고래^^’라는 멘트가 귀엽다. ‘그래그래를 젊은이들의 용어인 고래고래로 바꾼데 더해 아예 조형물까지 고래로 바꿔버렸다.

 망둥어나 농게 등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무안의 갯벌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미리 알아두라는 모양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테니까...

 데크 탐방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하긴 길이가 1.4km나 된다니 어련하겠는가.

 탐방로는 데크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갯벌 위로도 노두길처럼 길은 내놓았다. 농게들의 먹이활동과 짱뚱어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귀여운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오늘은 시간당 40의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 일행이 트레킹을 포기해야만 했을 정도로... 그래선지 시뻘건 황토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있었다. 갯벌 중에서도 무안의 갯벌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저 황토 때문일 것이다.

 요기조기 기웃거리며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막혀있다. 위험하니 넘어가지 말란다. 아니 기대지 말란다. 기댈만한 것도 없는데...

 탐방다리가 하도 길다보니 완성시키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금줄이 너머 구간은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무작정 앞만 보며 걷는 우는 범하지 말자. 다양성을 자랑하는 무안 갯벌이 발아래로 펼쳐지니 말이다. 참고로 무안갯벌 250종의 저서생물, 칠면초와 갯잔디 등 56종의 염생식물, 혹부리오리 등 52종의 철새들이 찾는 생태계 보물창고다. 전국 최초 갯벌습지보호지역 제1, 람사르습지,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갯벌탐방로의 하이라이트는 일출전망대(안내도에 그렇게 적혀있었다)’이다. 함평만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한 지점에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서면 물결 잔잔한 함해만이 넓게 펼쳐지고 그 뒤로 함평과 무안의 야산들이 남북 방향으로 줄지어 달린다. 이곳도 일출의 명소로 알려진다. 건너편 야산 위로 솟아오르는 해가 일품이라는 것이다.

 전망대에는 바다헌장비가 세워져 있었다. 국전 특선작가인 김오성씨가 제작했다는데, 한 쌍의 남녀가 돌고래가 미는 선박을 타고 노를 저으며 파도를 헤쳐 나아가는 형상이다. 해양개척 정신과 해양강국 실현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뭍으로 되돌아갈 때는 다리가 아닌 바닥(썰물 때만 길이 나타난다)을 걸었다. 이왕에 물때를 맞췄으니 조금 더 가까이에서 갯벌을 느껴봐야 하지 않겠는가.

 갯벌은 무안의 대표 염생식물인 칠면초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칠면초(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무안 전역도 가을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고 했다. 가을철 무안은 그래서 더 예뻐진다나? 그런데도 갯벌은 이미 붉게 물들었다. 무안의 갯벌은 욕심쟁이인 모양이다.

 일출전망대 부근은 흰발 농게의 집단서식지이다. 덕분에 한쪽 집게만 큰 농게들을 실제로 볼 수도 있다. 도구를 지참했을 경우 갯벌체험도 가능하단다. , 물때표를 참고해 안전한 시간에만 체험을 해야 하며, 정해진 구역에서 관찰만 가능하다(수집 및 채취 금지)

 갯벌을 벗어날 즈음 낙지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이왕에 왔으니 낙지라도 먹고 가라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낙지를 날로 먹는 탕탕이, 양념을 바른 낙지를 나무젓가락에 끼워 돌돌 말아서 구워낸 낙지호롱이, 심심함 속에 숨어있는 얼큰함과 시원함이 일품인 연포탕, 새콤한 낙지 초무침 등 다양한 낙지요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무안이니까.

 체험을 마친 탐방객들을 맞아주는 건 세족장이다. 먼저 발을 씻은 다음 샤워장으로 가란다. 이때 주의할 점도 있다. 갯벌 생태계 보호를 위해 세척제 사용은 금지다. 물을 아껴 쓰는 건 기본.

 편의시설 중 하나인 농게 쉼터는 문이 닫혀있었다. 하긴 폭우경보가 내려진 날씨에 여유롭게 쉬다 갈 사람들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서해랑길 31코스(수포마을회관-매곡마을 삼강공원)

 

여행일 : ‘23. 7. 8()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수포마을석산마을감정마을송전마을백학마을백학산 임도백림사대사리입구슬산마을사야마을내분마을매곡마을(거리/시간 : 13.1km/ 실제는 13,27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1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백학산 임도를 빼고는 대부분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로 이어진다. 주요 볼거리로는 백학산 임도에서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과 감정마을 곰솔, 매곡마을 삼강공원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77번 국도(영광방면)로 바꿔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학천교차로(해제면 용학리)에서 805번 지방도(해제·지도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포마을(臨水里의 자연부락)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1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마을회관에 기대듯 설치해놓았다.

 서해랑길 중 가장 짧은 코스 중 하나(13.1km). 거기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를 따르는 여정이라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백학산 임도(2km)’도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데다, 꼬맹이 섬들로 가득 찬 서해바다나 길가 야생화 등 주변이 온통 아름다운 풍광들로 치장되어 있어 오히려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으로 변해버린다.

 버스정류장 맞은편으로 난 마을안길로 들어서면서 트래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옛날 이곳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수포(水浦)’라는 지명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조답이라는 방죽이 있었는데 두렛물이랄 정도로 수량이 많아 인근 간척지의 농업용수로까지 사용했단다. 덕분에 인근에서 가장 부촌으로 소문났었다나?

 5분쯤 걸어 마을 뒤 구릉지를 넘자 민대들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어서 805번 지방도(봉대로)로 내려선다.

 석포마을(돌과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을 지나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11.2/ 시점 0.9)에서 도로를 벗어난다. 서쪽 바닷가를 향해 널찍하니 쭉 뻗어나간 농로를 따르면 된다.

 이 일대는 민대들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석산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조씨 문중의 민대라는 홀로 된 여자가 마을의 부족한 농토를 보충하기 위해 막은 간척지라고 한다. 19세기 말 무안의 동학군들이 훈련을 받던 연병장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염해에 강한 목화를 기르기도 했단다.

 저 들녘 너머에는 아시래라는 염전이 있다고 했다. 본동(석산마을)에서 볼 때 아스라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지명인데,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들어서 있단다. 하지만 옛날 저곳에는 화렴(火鹽, 불꽃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진다.

 석산마을로 들어가기 전 애송재(愛松齋)라는 제각을 만났다. 석산마을의 터줏대감인 해주최씨 문중의 사당이라는데, 근래(1985)에 지어져서인지 사당이라기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까운 모양새이다.

 아시래 잔등으로 여겨지는 곳(무안향토사연구소에서 얘기한)에는 정자와 당산나무가 서 있었다. 원래의 아름드리 당산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죽고, 새로 돋아난 나무가 대신 그 자리를 지키는데도 신기(神氣)는 여전한 모양이다. 아직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니 말이다. 봄철, 당산나무의 잎이 어떻게 피는가를 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던 풍속을 지켜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몇 걸음 더 걸어 석산마을로 들어선다. 법정 동리인 석룡리(石龍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석산·용흥·감정) 중 하나로 석산(石山)’이란 지명은 동네 어귀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마을 앞 방정각(芳井閣)’이란 정자는 주민들의 식수원이던 방정샘에서 빌려왔다. 지금은 지하수 개발로 그 기능을 잃었으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단다. 동학군들이 마셨다고 해서 동학샘으로도 불린다.

 방정각은 천객만래(千客萬來)’라는 편액도 달았다. 기웃거리던 나는 문득 천상운집(千祥雲集)’을 덧대본다. 온갖 좋은 기운이 구름처럼 모이고 수많은 귀한손님이 이 마을을 찾아온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마을 앞에는 해주최씨 삼의사 숭모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의사란 농학혁명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처형당한 민제 최장현(崔璋鉉)과 청파 최선현(崔善鉉), 춘암 최기현(崔寄鉉)을 말한다. 이 마을에 살던 삼형제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인근 장정들을 모아 봉기했고, 마을 앞 들녘에서 동학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추모비는 삼의사의 생애와 동학혁명 당시 활동내용을 후세에 전해준다.

 마을회관에 이르니 돌뫼동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마을의 유래와 지세 등을 시로 읊었다. 부정과 외세에 맞선 동학혁명의 역사도 빠졌을 리가 없다.

 7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감정마을이다. 석룡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감정(甘井)이란 마을 앞 샘물을 마신 인근 원갑사의 노승이 물맛이 참 좋다고 한데서 유래됐다. 하긴 물이 귀한 바닷가를 지나다 한 모금 얻어 마셨으니 얼마나 달고 시원했겠는가. 지금이야 민대들이라는 너른 들녘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거렸다니 말이다. 동구 밖 어림인 개어덕도 바닷가와 관련된 지명이란다.

 마을 앞에는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175) 곰솔이 있다. 입향 시조가 전염병을 예방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심었다는데, 수형이 제대로 잡혀 무안의 기념물 중 가장 잘 생겼다고 한다.

 수령이 400년이나 되다보니 영험해졌나보다.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준단다. 감정마을의 신목(神木, 매년 2월 초하룻날 당제를 지낸다)이 된 이유다. 하지만 썩 편치 않은 경고판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외지인들은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것은 서로 나누는 게 배달민족의 미풍양속이 아니었던가?

 이 마을에는 담양전씨 삼강비라는 빗돌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 순국한 전준엽(田俊燁, 1806-1882)과 그의 처인 연안차씨의 열행(烈行) 그리고 전성기(田聖淇, 1865-1950)의 효행을 기리는 비이다.

 마을 앞에는 석룡저수지가 있다. ‘민대들의 넓디넓은 들녘은 간척사업에 의해 태어났다. 소금기로 찌든 간척지는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석룡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0. 감정마을을 빠져나와 805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전 찍고 부산이라던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내려와 버린다.(전신주에 서해랑길 방향표식이 붙어있다)

 서해랑길은 이제 구릉지로 올라선다. 상품성 떨어지는 양파가 길가에 나뒹구는 구간이다. 맞다. 이 부근은 알아주는 조생양파 생산지라고 한다. 사질양토와 해양성 기후 등 지역적 특성 덕분에 양파의 맛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단단하고 아삭하며 즙이 풍부하단다. 그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이삭을 줍는 둘레길 나그네들이 두엇 보였다.

 5분쯤 소요되는 구릉지를 넘자 송전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동리인 학송리(鶴松里)를 구성하는 2개의 자연부락(송전·학암) 중 하나로 송전(松田)이란 지명은 울창한 소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주민들은 봉대산 기슭에 소쿠리처럼 들어앉은 마을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이라고 했다. 이때 물은 옛날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락거렸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또한 열부가 많음을 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고 있었다. 토지가 비옥해 먹고사는 게 풍부한데다, 주민들이 서로를 아껴주기 때문에 혼자된 여자가 재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해랑길은 이제 이름값을 해보려는 모양이다. 학송리 앞 서해바다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고대하던 일은 쉽게 이루지지는 않는 법, 엊그제 시작된 장맛비가 길을 방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둘레길 나그네들은 수로에서 평균대 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학송리 앞 들녘, 그 너머로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백학마을로 가는 도중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그렇게 10분쯤 걷자 또 하나의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백학마을이란다. 법정동리인 대사리(大士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신사·백학) 중 하나인데, 농토가 협소한 탓에 마을이 3개로 나누어져 있다더니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참고로 백학(白鶴)이란 지명은 뒷산인 백학산에서 따왔다. 하나 더, 이 마을은 해제의 8명당(花蟹弄珠, 捶馬渡江, 天馬施風 , 梅花落池, 玉女彈琴, 白鶴歸巢, 將軍大座, 九龍爭珠)  백학귀소의 명당 터로 꼽히고 있었다. 백학귀소는 백학이 집으로 돌아오는 형국을 뜻한다.

 마을을 지나자 탐방로는 백학산 자락의 아랫도리를 따라 이어진다. 왼편은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 하지만 웃자란 갈대가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소담스런 방죽들이 줄을 잇는다. 널브러져 있는 시설들로 보아 양식장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왜 문을 닫았을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55분 만에 첫 대면한 바닷가. 감정마을(시점에서 3km쯤 되는 지점)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바닷가가 경치까지 하도 곱다보니 인생샷이라도 하나 건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30년쯤 전까지만 해도 앞바다에 황금어장이 형성되었었다는 백학포구일지도 모르겠다. ‘구래포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철마다 칠산 바다의 낙월군도 사람들이 찾아와 땔감이며 식량 등을 준비해갔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고 한다. 주막이 4곳이나 되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선착장 끄트머리에는 다드락섬이라는 앙증맞은 섬 하나가 놓여있다. 섬으로 연결되는 저 노두길은 날마다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나? 썰물 때 물이 차오르면 물속에 길이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선착장(이정표 : 종점까지 7.5km)을 지난 서해랑길이 이번에는 백학산(126.3m) 자락으로 파고든다. 주민들 말로는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의 자연경관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내놓은 일주도로라고 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그에 합당한 유인책이 필요한 법. 무안군은 그 첫째로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 자연경관을 꼽았다. 2% 부족한 것은 흐드러지게 피는 동백꽃으로 채우고 싶었나 보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굵직한 동백나무가 줄지어 길손을 맞는다.

 ! 사과 닷!’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동백나무에 꽃 사과를 쏙 빼닮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저 열매로 기름을 짰었다. 그 기름을 머리에 바른 아낙네들은 참빗으로 곱게 빗은 다음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었다.

 빼어난 풍광의 다도해를 뜨락 삼은 언덕, 그곳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예쁜 집이 들어앉았다. 그게 부러웠던 내 입에선 홍천의 농장을 팔아 이곳으로 이사오자가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집사람의 표정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다.

 백학산 자락을 에두르는 임도는 관광자원화가 주된 임무다. 그러니 벤치 하나 놓아두지 않았겠는가. 하나 더,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낙조가 국내 제일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진도의 세방낙조보다도 한수 위라는 것이다.

 ·소 각시도와 상·하 낙월도, 임병도 등 크고 작은 섬들로 가득 찬 칠산 앞바다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완전한 게 어디 있겠는가. 바다는 그 부족분을 김 양식장의 지주로 메꾸고 있었다. 물결모양으로 겹겹이 늘어선 지주들이 조물주가 그린 풍경화에 방점을 찍는다.

 오늘도 반가운 이들이 남긴 흔적을 만났다. 서해랑길을 함께 시작했는데, 어느덧 한참이나 앞서가고 있다.

 길섶에는 원추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예덕나무 꽃도 심심찮게 보인다. ! ‘쑥부쟁이 꽃을 눈에 담는 행운도 누렸다. 가을에나 만날 수 있는데...

 엉겅퀴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임도를 빠져나오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칠산 앞바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후부터는 둘레길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 임도를 빠져나온 발걸음은 자연스레 백림사(대한불교조계종)’로 향한다. 해수관음상이 칠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경내를 오가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한적한 산사치고는 제법 붐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여염집 느낌이 강한 전각들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사찰일 게 분명하다.

 백림사 부근에서 바라본 함해만(또는 함평만)과 칠산대교, 이 또한 흔치않게 아름다운 풍광이다.

 8분쯤 더 걸어 대사길로 내려선다. 805번 지방도와 대사선착장을 잇는 도로로 최근 2차선으로 확·포장됐다. 도로변 이정표는 종점까지 4.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선착장으로 가는 옛 도로를 잠시 따르다가 이번에는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구릉지로 오른다. 이렇듯 이 일대는 높은 산지가 없고 고만고만한 언덕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그 너른 땅이 농지로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도 이곳 무안의 특징이라 하겠다.

 구릉지 오른편은 신사마을이다. 대사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데 서해랑길은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구릉지를 넘으면 대사리 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4km). 신사마을 부촌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둑길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둑 아래로 난 농로를 따른다. 덕분에 난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평만(함해만) 풍경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부지런한 농부는 오뉴월 삼복더위도 두렵지 않나보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한낮, 그것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인데도 밭일이 한창이다. 수확을 끝낸 양파 밭에서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중일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 서해랑길은 또 다시 805번 지방도와 만난다. 신사마을의 입구(표지석은 대사리로 적고 있었다)라서인지 삼거리에 버스정류장(신사)이 설치되어 있었다.

 100m쯤 도로를 따르다가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로 들어선다.

 이번에도 길은 구릉지로 연결된다. 아니 숲이 우거진 게 영락없는 산이다.

 고갯마루의 숲속 터널을 지나면 슬산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덕산리(德山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슬산·내분·사야) 중 하나로, ‘슬산(瑟山)’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옥녀봉(봉대산의 맥을 잇는다)에서 유래됐다. 마을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지형이라는 것이다. 해제면의 8명당 중 하나인 옥녀탄금의 명당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입구에는 이홍복(李弘福)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함평 이씨의 선조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인근 쥐머리산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기도 했단다.

 함평이씨와 함께 마을의 세거 씨족인 함평노씨(고려 문하시중 노목을 시조로 모신다) 한림공파 슬산종가의 서당이란다. 옥녀탄금형의 명당에 장춘오헌을 짓고 때론 북벌을 상소하고 때론 서당을 열어 계몽에 앞장서 온 가문이란다. 하지만 서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라고나 할까?

 동구 밖(이정표 : 종점까지 2.3km) ‘해당화도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을 만 했다. 때를 못 맞춘 탓에 연분홍빛 꽃무리는 보지 못했지만 윤기가 자르르 한 황적색 열매가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805번 지방도. 이곳에서 의외의 풍경을 만났다. 오가는 차량이 하나도 없는 벽지 도로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신호는 점멸’, 저게 제대로 된 신호를 보낼 때도 있을까?

 마을입구(신호등 사거리) 안내도는 소풍(笑豊)의 명소란 부제를 달았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소풍(消風, 학생들이 좋아하는)’이 아니다. ‘웃을  풍성할 자를 썼다. 웃음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거나 횡단하지 않는다. 도로에 발을 걸치자마자 다시 내려와 슬산저수지의 둑길을 걷는다.

 둑길 끝에는 나주정씨절효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후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무안문화원의 자료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둑길 끄트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민가 두어 채가 전부인 작은 마을(분재와 묘목을 기르는 농원이 볼만하다) 뒤 고개를 넘는다. 그러자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평탄한 구릉지의 초록 밭들과 녹음 짙은 산자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그 너머로는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40. 구릉지를 넘어 사야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샛들’, 슬산과 내분마을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잇들이란 의미인데 이게 음차되면서 사야(沙野)’로 변했다. 다른 해석도 있다.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그 바닷물에 유난히도 많은 모래()가 밀려왔다는 것이다.

 사야마을과 내분마을 사이 구릉지, 거대한 팽나무(당산제를 지낸다는 신목일지도 모르겠다) 한 그루가 내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늘에 평상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내분마을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노릇까지 톡톡히 수행하는 모양이다.

 사야마을에서 5분쯤 거리에 내분마을이 있다. ‘내분(內盆)’이란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지형이 소쿠리형으로 멀리서 보면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 마을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 일대를 지칭하던 분매동을 위치에 따라 외분·내분·매곡으로 나눠부른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하자.

 고삭을 지나는데 금줄을 쳐놓은 이 눈에 띈다. 주민들이 샘거리제를 지낸다는 그 영험한 샘일지도 모르겠다. 샘을 메우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상사가 마을에 자주 일어났고, 이에 놀란 주민들이 다시 복원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더니 그치더란다.

 내분마을의 마을회관(이정표 : 종점 0.4km)을 지나자 드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양매제방(내분제방이라고도 함)을 쌓아 만든 들녘인데, 탐방로는 이 들녘의 상부 어림을 가로지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양매마을’. 법정 동리인 양매리(兩梅里) 5개 자연부락(매곡·토치·외분·양간양간2)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분매동(盆梅洞)이었다, 마을 지형이 와우형인데 매화까지 많았다나? 그러다가 양대 씨족 중 하나인 광산김씨 측에서 파평윤씨가 주로 살던 분매동과 구분하기 위해 매곡(梅谷, 입향조의 아들인 김득남을 모시는 사당이 매곡사이다)’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날머리는 삼강공원(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매곡마을 앞에는 삼강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강(三綱)이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즉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부모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러니 매곡마을에 이를 몸소 실천한 조상들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광산김씨 충렬문(光山金氏 忠烈門)’ 광산김씨 7효열각(光山金氏 七孝烈閣)’이 그 증거다. 정려편액(旌閭扁額) 2점이 걸려있는 충렬문(정려각)은 충의공 득남(병자호란 때 순국)과 부인인 밀양김씨를 그리고 효열각에서는 문중에서 배출한 5효자 2열부의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이들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기 위한 삼강비(三綱碑)는 충열문과 칠효열각 사이에 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빗돌은 어딘가로 떠나가고 빈 전각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분매동의 역사를 적은 유래비도 눈에 띈다. 첫발을 디딘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가 주를 이룬 가운데, 나중에 들어온 파평윤씨 가문을 살짝 끼워 넣었다.

 삼강공원은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분매동에는 파평윤씨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그러니 그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2코스 이정표는 삼강공원 앞, 팽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27km,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평지에 가까운 길이 그만큼 수월했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 사진은 시점(수포마을)의 안내도(무안 31코스)를 게시했다.

서해랑길 17코스(세한대학교-목포지방해양수산청)

 

여행일 : ‘23. 5. 27()

소재지 : 전남 영암군 삼호읍과 목포시 옥암동 일원

여행코스 : 세한대학교대불방조제산호양수장농업테마공원농업박물관영산강하구언목포지방해양수산청(거리/시간 : 11km/ 12.14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해남·영암 구간의 열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그동안 임시 구간(2개 코스)으로 운영해오다 2022 12 솔라시도 대교가 개통되면서 3개 코스로 새롭게 포장해 개통했다. 17코스의 특징은 영산호와 함께한다는 점이다. 처음에서 끝까지 영산호의 하구언(河口堰)과 둑길 등을 따라 걷는다. 주요 볼거리로는 영산호의 아름다운 풍광과 농업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목포지방해양수산청(목포시 옥암동 110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내려와 영산로’, 석현삼거리에서 녹색로로 바꿔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지방해양수산청은 해양수산부 소속으로, 부산·인천·여수 등 해안지역에 설치되어 각 지역의 항만 운용과 개발, 해양환경 보전·관리 따위의 사무를 맡아본다.

 새롭게 단장된 3개 코스 중 마지막으로 구간 전체가 영산호와 함께 한다고 보면 되겠다. 영산호의 둑길과 하구언 등 코스 전체가 평지인데다 코스 길이(11km)도 짧아 난이도는 최하이다. ! 17코스의 시점은 세한대학교이다. 하지만 우린 산악회 사정으로 인해 종점인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서 출발 세한대학교까지 거꾸로 걸었다.

 통일대로를 따라 전남도청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목포지방해양수산청의 담벼락을 오른쪽에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25호 광장 교차로에는 인공폭포가 조성되어 있었다. 도로를 새로 내면서 생긴 절개지 경사면을 활용해 높이 30m(너비 10m)의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인터넷과 우편을 통한 명칭공모를 통해 만남의 폭포라는 이름도 얻었다.

 통일대로와 교차되는 녹색로는 예쁘장하게 생긴 육교로 건넌다. 6차선 도로(녹색로)의 교통 흐름을 막지 않으려는 목적이겠지만, ‘만남의 폭포라는 볼거리를 한눈에 쏙 담을 수 있는 전망대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만남의 폭포 반대편. 영산강 하구언(河口堰)을 향해 뻗어나가는 녹색로가 시원스럽다.

 육교에서 내려와 녹색로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이때 낭만 항구 목포의 여러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갓바위 근대역사관 같은 목포를 대표하는 경관들을 사진에 담아 도로변에 게시했다.

 잠시 후 만난 영산강 하구언(河口堰), 둑으로 올라가기 전 왼쪽으로 자전거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영산강 수계지도를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영산강 발원지인 가마골 용소(전남 담양군)’까지 자전거길이 나있지 않나 싶다.

 영산호 주변은 금계국(金鷄菊)이 만개해 있었다. 요즘은 전국 곳곳에서 저런 군락지들을 만나게 된다. 외래종인줄로만 알아 온 내 앎이 잘못된 것일까?

 하구언(河口堰)에 올라선다.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삼호읍) 나불리 사이의 영산강 하구를 가로막아 만든 4,351m 길이의 제방으로, 이 둑으로 인해 영산강과 황해가 분리되면서 영산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겨났다.

 둑길을 걷다보면 남악신도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남도청의 청사가 무안군(삼향읍)으로 옮겨오면서 생겨난 일종의 복합 행정타운이다.

 하구언이라는 게 본디 바다와 강의 경계, 그래선지 심심찮게 해당화가 눈에 띈다. 옛 사람들은 해당화를 여인으로 심심찮게 둔갑시킨다. 그게 여염집 여인이 아니라 요염한 기생이었지만. 하지만 난 함께 걷고 있는 집사람을 해당화에 비유하고 싶다. 내 눈에 비친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예쁘니까. 꽃 중의 꽃이라고나 할까?

 둑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희미해져 무엇을 그렸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혈세까지 들여가며 꾸며 놓았다면, 때맞춰 보수를 해나가는 게 옳지 않을까?

 목포와 영암의 경계지점 빗돌에는 명심보감용 글귀가 적혀있었다. ‘모든 권리는 의무의 이행에서’, 봉사단체인 국제와이즈멘의 지역 클럽에서 세웠지 않나 싶다.

 이곳이 영산호(榮山湖)’임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띈다. 영산강지구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목포시(삼향동)와 영암군(삼호면 나불리) 사이에 길이 4,351m(높이 20m)의 하굿둑이 건설됨으로써 생겨난 담수호(34.6)이다. 매년 반복되는 홍수와 염해의 피해를 막기 위해 1981년 쌓았다.

 조금 더 걸어 배수갑문(排水閘門)을 만난다. 집중호우를 대비해 증설했다는데, 비상하는 새의 모습을 형상화했단다. 새롭게 도약하는 영산강 하굿둑의 비전을 상징하고 있다나?

 다음은 농어촌공사(영산강사업단) 사옥이다. 옆에는 기존 배수갑문과 신규 배수갑문의 화합을 상징한다는 58m 높이의 타워를 세워 랜드 마크로 삼았다. 꼭대기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오르면 서해바다와 영산강에 대한 조망이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진단다. 홍보전시관은 물론이고 주변에 잔디광장이나 포토존 같은 편의시설도 만들어 놓았다니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농어촌공사의 사옥이 들어선 곳은 섬이었었나 보다. 인공 섬이라 부르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은데, 그곳에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너머 영산호의 수면을 영산철교가 가로지른다. 대불공단의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불선 철도인데, 제 기능을 못해 2010년에 운영이 중단됐다고 한다.

 둑길은 이제 서호대교로 인계된다. 오른편에는 기존의 배수갑문 8개가 들어서있다. 참고로 배수갑문은 방조제로 인해 갇힌 내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시설물로, 밀물 때 바닷물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역할도 한다.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 영암 땅으로 들어선다. 하구언 둑길을 걷는 데는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앱은 2.4km를 찍는다. 자료는 길이를 4,351m로 적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서해랑길의 특징 중 하나로 꼽아도 좋을 만큼 자주 만나게 되는 멀구슬나무를 오늘도 만났다. 그게 오늘은 꽃까지 활짝 피워 올렸다. 맞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농가의 늦봄(田家晩春)’에서 멀구슬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라고 읊지 않았던가. 하지가 다음 달 21일이니 멀구슬나무도 지금쯤 라일락처럼 향기를 내뿜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암 땅에 들어서니 무화과 조형물이 반긴다. 무화과는 영암의 얼굴마담으로 꼽히는 특산품, 우리나라 무화과의 90%가 생산될 정도이니 어찌 조형물 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중생에 불과한 난 나뭇잎 치마를 두른 아담과 이브의 모습부터 떠올린다. 선악과를 따먹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 그네들이 무화과의 잎을 엮어 알몸을 가렸다고 했으니까.

 기암괴석과 금계국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한국가스공사는 사무소의 사옥보다 부대시설이 더 시선을 끈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예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용도는 모르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0. 17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전라남도 농업박물관에 도착했다. 농업박물관은 말 그대로 농업에 대한 박물관이다. 지난 1993년 농업과 농경문화를 전시하는 농업 전문박물관으로 개관했다. 현대화 물결 속에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 농경문화 유산을 연구·수집·보존·전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옛 모습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 박물관의 정문안내소가 매표소로 오해받기 딱 좋게 생겼으나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으니 부담 없이 들어가면 된다.

 농업박물관은 크게 남도 생활민속관과 농경 문화관, 쌀 문화관 그리고 농경문화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대시설로는 전통 초가, 야외전시장, 작은 동물원, 농업테마공원 등이 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일단은 인증사진부터 찍고 보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양이 모양의 귀여운 포토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가 눈길을 끈다. 얼마나 오래된 나무를 옮겨왔으면 아직까지 밧줄에 의지하고 있을까. 참고로 이 박물관은 1993 9 24일 개관했다.

 첫 만남은 부대시설 중 하나인 작은 동물원이다.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공간으로 토끼··오리·염소·진돗개 등 가축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옆에는 야외전시장이 있었다. (물레·물통·연자·디딜)방아와 수차, 뒤주, 모정 등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시설들을 복원해 놓았다.

 전시물 중 하나인 물레방아.

 마을 공동체 신앙물인 산신당·성황당·장승·솟대 등도 전시되어 있다.

 세 번째 만남은 농경문화체험관이다. 조상들이 사용해오던 민속 생활용품 및 재래 농경도구 등을 관람객들이 직접 만져보거나 사용해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추억을 남기기 위한 기념촬영은 기본, 투호나 윷놀이 등의 전통 놀이도 집접 해 볼 수 있다.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로 놀이를 해볼 수 있으며, 진열된 옷은 착용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전통놀이나 생활방식을 알려줄 수 있으니 어린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남도 생활민속관이다. 남도민의 전통 생활상과 민속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남도의 주거생활과 의식주, 공예, 문화 등이 소개되어 있다.

 가옥의생활식생활공예민속신앙의 순서로 둘러보는 게 바람직한 동선이지 싶다.

 안으로 들자 초가 일색인 농촌마을이 맞는다. 순천의 낙안읍성이 아닐까 싶다. 한 해의 1/4 정도를 국내외 여행으로 소일하는 나로서도 낯선 풍경이라서 세 번이나 다녀왔고, 그 풍경은 내 뇌리 속에 생생히 저장되어 있다.

 남도의 전통가옥을 세트장으로 만들고, 그 안에 밀랍인형을 배치해 그네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의생활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찌 먹는 문제가 빠질 수 있겠는가.

 다섯 번째 만남은 농경문화관이다. 하지만 건물의 현판은 농업박물관으로 적혀있었다. 이 건물이 전라남도농업박물관의 메인 전시장, 즉 본관이 아닐까 싶다.

 안으로 들어서자 촌부들의 일상을 담은 조형물이 맞는다.

 농경문화관은 1, 2층으로 나뉜다. 하지만 전통혼례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층에 전시되어 있다.

 농경의 역사(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농경문화 발달사), 농경의 사계(농촌의 옛 풍경과 농경생활 모습), 공동체문화(농경과 관련된 놀이, 신앙공동체) 등을 실물과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준다.

 선사시대의 농기구부터 각종 농경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다. 농악을 위한 유물들도 눈에 띈다.

 전시장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가상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쌀 문화관’. 말 그대로 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평소 너무나 쉽게 먹고 있는 쌀이 어떻게 자라고 어떤 품종이 있고, 또 과거에는 쌀을 어떻게 수확하고 가공했는지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은 우리 겨레와 함께 해온 쌀 농업의 중요성과 가치를 일깨우려는데 방점을 찍었다. 쌀을 주제로 쌀의 역사, 쌀의 일생, 쌀의 문화를 알려준다.

 방앗간, 쌀집 등 갖가지 쌀과 관련된 생활상을 밀랍인형으로 꾸며놓은 덕분에 둘러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생명의 땅 전남의 쌀 제품 홍보도 하고 있었다.

 박물관 투어(둘러보는데 35분이 걸렸다)를 마치고 쌀 문화관 옆 후문으로 나오면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이어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보초를 서고 있는 농업박물관 마실길로 올라선다.

 영산호관광지의 관광자원 및 생태자원을 활용해 만든 산책로로 농업박물관과 농업테마공원을 오솔길로 연결시켰다. 농업박물관을 찾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농업테마공원으로 유도하려는 의도로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입구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꽃길을 따른다. 나지막한 산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하는 오솔길인데, 꽃무릇·맥문동·영산홍·백철쭉 등 꽃나무들을 많이 심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 않았나 싶다.

 작은 숲속 키 작은 나무 사이로 난 길을 200m쯤 걷다가 오른편 산봉우리로 오르니 꼭대기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니 이번에는 전망대(마실길 안내도에 표기되어 있던 트리하우스가 아닐까 싶다)가 반긴다. 농업테마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2층 높이의 대를 올렸다. 전망대는 의자를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농업테마공원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영산호와 남악신도시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뒤돌아 본 전망대, ‘취사금지 및 야영금지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는데도 주변 원두막들은 하나같이 고기 굽는 냄새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17코스 시점(6km를 남겨놓았단다)을 향해 쉼 없이 진행해버린 이유이다.

 점심때가 넘었는지라 간식을 먹을 만한 장소를 찾아봤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온 나들이객들이 주변 원두막을 빠짐없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랑길은 농업테마공원을 가로지른다. 이 공원은 농업을 주제로 한 체험공간이다. 138,612의 부지에 농업광장·생태연못·친환경농업 관찰학습장 등의 시설이 들어있다. ‘선농단이란 시설도 눈길을 끈다. 왕이 몸소 밭을 갈며 신농(神農)에게 제사하고 후직(后稷)을 배향했다는 곳이다.

 벼한살이 체험장에서는 밀(또는 보리)을 심었던가 보다. 널따란 들녘이 온통 타작을 마친 밀대로 뒤덮여 있다.

 공원의 끄트머리에는 영산재(榮山齋)’라는 고급 한옥호텔이 들어섰다. 안과 밖이 통하고, 몸과 영혼이 엮이는 게 한옥의 특징이라고 한다. 영산재는 그런 옛 것의 장점을 살리고, 현대적인 시설을 접목시킨 전혀 새로운 개념의 호텔이란다.

 농업테마공원을 벗어나 둑길(이정표 : 17코스 시점까지 5.6km)로 올라선다.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막히고 인공호수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제방이다. 이 둑이 쌓이면서 나불도 일대에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조성됐다.

 이때 영산호의 선상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동력수상레저면허를 취득하려는 사람들이 찾는 곳인데, 1층은 연수 및 시험장이고 2층이 카페로 운영되고 있단다. 흔들리는 선상에서 커피 한 잔으로 즐기는 낭만?

 나불도의 들녘, 저 곤포사일리지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보리까지 수확을 끝마친 시기에 설마 볏짚이 들어있지는 않겠지? 참고로 이곳 나불도(羅佛島)는 영암군에 딸린 6(나불도·외도·문도·구와도·고마도·서도)의 유인도 중 하나(가장 큰)였다. 하지만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막힌 지금은 저렇게 너른 농경지로 변해있다.

 왼편으로는 영산호가 펼쳐진다. 제방과 강 사이에는 습지가 형성됐다. 과거에는 영산강 하구의 갯벌이었으나 하굿둑이 축조되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고 한다.

 인동초(忍冬草) 군락지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고 김대중대통령이 곧잘 인동초에 비유됐었고, 그의 고향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신안군이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곳이 영산강종주 자전거길임을 알리는 말뚝도 눈에 띈다. 담양댐에서 영산강하구언에 이르는 길이 133km의 자전거길인데, 그게 이 둑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럼 아까 하구언의 목포 쪽 입구에서 만났던 그 자전거길 안내도와는 어떻게 다를까?

 나불도 들녘과 영산호를 양쪽 옆구리에 낀 둑길은 꽤 오래 이어진다. 3.5km나 되다보니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산호의 아름다운 풍광으로도 부족해 호남 제일 기경으로 소문난 월출산을 앞에 두고 걷다보면 지루하기는커녕 한눈 팔 잠깐의 틈도 허락되지 않는다.

 옛말에 곡식은 부지런한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야 모내기를 하고 있는 저 농부는 어떨까? 부지런한 농부가 심은 벼들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자랐는데...

 둑길로 올라선지 30, ‘산호양수장(이정표 : 17코스 시점까지 3.4km)’에 이르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제껏 걸어오던 길(차량통행이 가능한)이 제방 아래로 내려가는데도 자전거길은 계속해서 둑길을 고집하는 것이다. 서해랑길 나그네들이야 물론 자전거길을 따른다.

 10분쯤 더 걷자 자전거길이 제방 아래로 내려가면서 아까 헤어졌던 길과 합류된다. 제방 위는 흙길로 변하면서 걷는 게 조금 불편해졌다. 하지만 조망을 위해 그냥 둑길을 걷기로 했다.

 이즈음 영산호를 가로지르는 무영대교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국내 최초로 5개 주탑이 연속으로 연결된 엑스트라 도즈교(Extradsed Bridge : 사장교와 거더교의 장점을 접목시킨 교량)’이다. 그 뒤는 영암의 또 다른 명산인 은적산일 것이다.

 길이 거칠지만 예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제법 빈번했던 모양이다. 제방에 기댄 둔치에 쌈지공원까지 만들어 놓았다. 인적이 끊긴 지금은 잡초 속에 묻혀버렸지만...

 서해랑길은 이제 영산호와 영암호를 잇는 물길 대불 수로의 오른쪽을 걷는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다리(수로교) 부근을 빼면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지극히 밋밋한 구간이다. 하지만 도로변의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는 재미는 나름대로 쏠쏠했다.

 두 번째 다리를 지나면서 대불수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른편에는 세한대학교의 교정이 펼쳐진다. 교사는 물론이고 축구장·야구장·골프연습장 등 다양한 시설들을 지녔다. 하지만 주말이라선지 시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불수로의 둔치에도 쌈지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금계국이 활짝 핀 공원은 아예 꽃밭으로 둔갑했을 정도, 하지만 사람은 흔적조차 없다. 주말을 맞은 대학생들이 집에라도 다니러 간 모양이다.

 날머리는 세한대학교 입구(영암군 삼호읍 산호리)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세한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대불교차로’. 그곳에 17코스의 시점인 세한대학교 영암캠퍼스 정문이 있다. 세한대학교(世翰大學校) 2개의 캠퍼스가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이곳 삼호읍의 호등산(虎嶝山, 126.8m) 자락 풍광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방대학교의 학생 수가 감소되는 최근의 추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서해랑길(영암 17코스)의 안내도는 세한대학교 정문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2.14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하지만 수치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17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농업박물관을 얼마만큼 꼼꼼히 둘러보느냐에 따라 소요시간이 결정될 테니까 말이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극찬에 이끌려 공도교 배수갑문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영산호와 영암호의 물 흐름을 조정해주는 갑문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몽중루님의 글로 대신한다. <명품 갑문이 나온다. 공도교 1.2교와 겹치는 수직과 수평 형 두 개의 갑문이 그것이다. 이 중 서쪽에 있는 수평 갑문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수평 갑문이다. 반원 형(半圓形)의 수평을 이루는 갑문을 지탱하는 철 구조물이 인상 적이었다.>

서해랑길 30코스(점암선착장-수포마을회관)

 

여행일 : ‘23. 6. 24()

소재지 : 전남 신안군 지도읍 및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점암선착장소금출저수지취동마을서동마을참도선착장내양마을임치마을수포마을(거리/시간 : 17.2km/ 소금출저수지부터 14,29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0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이 농로와 마을안길을 따라 걷는 평지로 되어 있으며, 참도 선착장부터 박동산 입구까지는 방조제를 따라 걷게 된다. ‘1004의 섬으로 대변되는 신안의 수많은 섬들을 눈과 가슴에 담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들머리는 점암선착장(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로 들어온다. 계속해서 24번을 타고 임자도 들어가다 점암교차로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점암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0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여객선터미널 옆에 설치되어 있다.

 지도와 해제반도(일부)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다. 구간 길이는 17.2km, 하지만 3km를 줄여 소금출저수지(자그맣게 회색 칠해진 곳)’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서동마을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지루해 할 수밖에 없는 시간. 즉 뒤따라오는 나를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내 작은 배려이다.

▼ 선착장 위로는 임자대교가 지나간다지도(감정리)와 임자도(진리)를 잇는 4.99km짜리 연도교(連島橋)아니 정확히는 지도와 임자도 사이 수도라는 꼬맹이 섬을 잇는다(때문에 임자1로도 불린다). 길이는 750m, 수도와 임자도는 1,135m짜리 임자2로 연결된다두 다리의 길이를 합치면 1,885m, 여기에 수도를 지나는 구간과 임자대교를 연결하기 위해 확장된 도로 구간까지 합치면 4.99km가 된다.

▼ 선착장은 텅 비었다여객선은커녕 자그만 고깃배 까지도 자취를 감췄다여객선터미널도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2021년 3월 임자대교가 개통되고 두 섬을 오가던 뱃길이 끊기면서 나타난 서글픈 현실이다뱃길과 관련된 부대시설들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다그래서일까지중해풍으로 지어놓은 화장실이 더욱 애틋하게 보이는 건.

▼ 그런데도 주변은 제법 번화한 풍경이다너른 주차장과 버스매표소(대합실), 두엇의 횟집민박집매점이 아직까지 남아있다하지만 주차장은 텅 비었고 횟집에도 손님이 없다연륙교의 편리함이 만들어낸 서글픈 한 단면이랄까?

 실제 출발지는 소금출 저수지 부근 도로변으로 삼았다(‘두순재 뒷산의 아랫도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30코스의 시점인 점암선착장에서 3km쯤 떨어진 지점으로, 한시라도 서방님과 떨어지지 않겠다며 따라나선 집사람에 대한 내 작은 배려이다. 혼자 걷는 게 서툰 집사람을 어찌 장시간 방치할 수 있겠는가.

 2차선 도로인 봉리길 아래로 소금출저수지가 보인다. 이곳 신안의 들녘은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소금기로 찌든 땅은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저 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잠시 후 시야가 열리면서 푸름으로 뒤덮인 불취들이 내려다보인다. 취동마을 앞 제방의 축조와 함께 생겨난 들녘으로, 제방 너머로는 신안의 자랑거리인 갯벌이 그 광활한 자태를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 바닷가에 위치한 취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리(鳳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봉동·심동·서동·황금·취동·죽곡·칠이지·참동·원동) 중 하나로 마을 북쪽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막힘없이 바람이 마을로 불어온다 하여 불 취()’자를 넣어 지명을 만들었다.

 마을을 지나 방조제로 올라선다. 300m쯤 되는 구간인데, 이때 ‘1004의 섬 신안의 진면모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임자도를 비롯해 어의도, 만지도, 작도 등 신안의 수많은 섬들이 조망된다.

 바다 건너에는 임자도(荏子島)’가 있다(섬이 낮아 여러 개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의 섬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섬 전체가 튤립으로 뒤덮인다는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나 같은 중생들에게는 전장포(사진의 한가운데 푹 꺼진 곳일 듯)’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 새우젓의 60~70%가 생산된다니 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겠는가. 새우를 숙성시키던 토굴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체험 및 볼거리로 제공된다나?

 거북이 닷!’ 갯바위가 갯벌을 헤집으며 솟아오르는 거북이를 쏙 빼다 닮았다. 그 뒤의 섬은 어의도(於義島)’이다. 섬의 지형이 늘어진 형상이라고 해서 느리섬이나 느리로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어의도가 됐다. 저 섬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충무공은 왜구들과 싸울 때 어의도를 전략적인 기지로 이용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된 조선 수군을 이 해역에서 재건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조망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마치기라도 했다는 듯, 서해랑길은 둑 아래로 내려가 내륙으로 파고든다.

 취동마을에서 16분쯤 걸으면 서해랑길은 다시 봉리길로 올라선다. 그곳에서 봉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서동마을을 만났다. 옛날 이곳에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고 해서 서당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고치면서 서동(書洞)’으로 변했다.

 신안군의 버스정류장 부스는 뭘 형상화하고 있는 걸까. 설마 홍어는 아니겠지? 신안을 대표하는 경관이나 특산물을 이미지에 담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서해랑길은 서동마을을 관통한다. 마을표지판 앞에서 골목으로 들어서서 황톳빛으로 물든 작은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자연부락, 이곳 역시 서동마을이란다. 황톳빛 구릉지를 사이에 두고 양쪽 비탈에 대칭을 이루며 민가가 들어선 모양새이다.

 특이한 마을 구조는 정자까지도 사이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에서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같은 나그네들도 생수 한 모금 나눠 마시며 쉬어갈 수 있었다.

 서동마을을 빠져나오면 기다란 둑이 기다린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방조제는 분명 아닐 터, 어쩌면 저 멀리 보이는 방조제가 새로 놓이면서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옛 방조제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서동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생긴 둑일지도 모르겠고...

 서동 들녘의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기 위해 축조된 서동저수지는 물 반에 갈대가 반이다. 겨울철이면 남녘으로 날아가던 철새들이 잠시 들렀다 갈 수도 있겠다.

 오른편으로는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겨난 농경지(봉리간척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하긴 서동마을을 비롯해 원동·본동·참도 마을 주민들이 저 들녘과 발을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300m쯤 되는 둑길이 끝나자.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어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서동마을(버스정류장)에서 16. 서해랑길은 또 다시 2차선 도로(아까와는 달리 참도길이다)로 올라선다. 그곳에는 참도(站鳥)’마을이 있었다. 어의도와 포작도 주민들이 쉬어가던 곳(지명에  자를 쓰는 이유다)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참동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기억해두자.

 갈림길로 빠져나와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때 참도선착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뒤돌아보면 봉리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지도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섬이 크다보니 산은 필수(호남정맥의 줄기인 봉대지맥이 흐른다). 그 사이사이에 논과 밭이 적절한 비율로 어울리고 있다.

 이후부터는 구릉지 위를 걷는다.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황토색이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는데, 그래선지 밭이랑에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양파가 내버려져 있었고, 그런 양파를 이삭 삼아 줍는 나그네들도 몇 보였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5. ‘참도선착장에 닿았다. 인근 섬들의 관문 역할을 하는 포구로 참도라는 지명처럼 어의도와 포작도 같은 섬 주민들의 참새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단다. ! ‘참도는 원래 섬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초기 지도와 연결되면서 육지가 됐단다.

 포구에는 식당도 들어서 있었다. 둘레길 나그네들이 식사할 요량으로 곁눈질 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래 전에 폐업했는지 건물이 통째로 비어있었다.

 선착장에는 섬사랑 3가 함께 갈 손님들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차도선인 저 배는 60명의 손님을 태우고 포작도와 어의도를 오간다. 이밖에도 점암선착장과 목섬, 재원도 등 북부권 작은 섬들을 하루 두 차례 오간다고 했다.

 참도의 또 다른 선착장에는 여러 척의 어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건너편 포작도와의 사이 해협에서는 더 많은 배들이 물이 더 차오르기만 기다린다. 그래야 고기잡이를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선착장을 빠져나온 서해랑길은 이제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거꾸로 된 자 모양의 이 방조제는 길이가 무려 1km에 이른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거리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하나같이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방조제 오른쪽에는 염전이 들어섰다. 증도에서 만났던 태양염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하지만 구릿빛 어깨에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어야 할 염부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배출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미리 청정 소금을 사두겠다는 민심 때문에 소금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줌이라도 더 많이 생산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일까?

 나머지 공간에는 대하양식장이 들어섰다. 1997년 우루과이라운드 발효를 계기로 산업자원부는 폐 염전정책을 시행한다. 수입소금이 들어오면서 서해안에 산재하던 천일염 생산지도 급격히 줄게 돼 신안·영광 등 일부 서남해안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당시 염전을 그만둔 사업자들이 새롭게 시작한 것이 대하양식장이다. 정부는 그런 이들에게 시설자금을 지원했었고...

 참도선착장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대포작도는 나지막하면서도 펑퍼짐한 것이 여간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해산물을 보자기에 싸는 모양으로 생겼다는 뜻의 보작도’, ‘포작도(包作島)’라는 지명이 붙여진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나란히 서있는 2개 섬의 형태가 포알처럼 뾰족뾰족 나와 있어 그 중 큰 섬을 대포작도’, 작은 섬을 소포작도라 했다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대포작도와의 사이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던 시절 섬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던 것은 갯벌뿐이었다고 한다. 갯벌을 막아서 농사를 지었고, 또 갯벌에서 소금을 얻으면서 삶을 영위했단다. 그 갯벌이 지금은 칠면초로 뒤덮였다. 해마다 7번씩 옷을 갈아입는다는 염초식물이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가을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미리 찾아온 오뉴월 삼복더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해협에 떠있는 꼬맹이 어선들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저 바다는 새우와 민어가 주로 잡힌다고 했다. 인근에 위치한 전장포가 새우잡이로 유명했듯, 어의도 또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사이 새우잡이 어선의 파시가 형성됐다고 한다.

 둑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아니 간척사업으로 생겨난 제방이 아니니 해안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겠다.

 참도마을(봉리)과 가정마을(내양리) 사이의 자그만 들녘인 여끝들을 지나자 작은 선착장이 나타난다. 가정마을(산자락에 가려진 탓인지 마을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앞에 있으니 가정선착장으로 부르면 되겠다. 참고로 가정마을은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가재모양이라고 해서 가재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가정(佳亭)’이 됐다.

 갯벌에 꽂혀있는 저 지주와 어망은 독살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돌이나 장대를 이용해 갯가에 안팎을 경계 짓는 담장을 두르고 간조와 만조의 물때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 말이다. 어부는 밀물에 멋모르고 독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생선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어부들의 쉼터는 서해랑길 나그네들에게도 자리를 내주었다.

 또 다시 나타나는 길고 긴 제방. ‘내양리에 놓인 둑이니 내양리방조제 쯤으로 기억해두자. 600m쯤 되는 이 구간에서 우린 대·소 포작도와 앞·밖 갈우도를 조망해 볼 수 있다.

 오른쪽, 널디너른 간척지는 태양광 패널로 한 가득이다. ‘농자천하지대본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나 보다. ‘식량 안보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이익을 찾아 투자하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이라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풍경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개운치 못했던 뒤끝이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칠면초가 만들어내는 붉은 빛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그 감동에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린다.

 방조제를 지난 서해랑길이 느닷없이 산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임도가 나있으니 말이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숲으로 인해 생기는 그늘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고나 할까?

 임도를 따라 박동산(59.2m) 능선을 넘자 내양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내양·외양·묘두·가정·적동·송항·둔곡) 중 하나로 강산나루 안에 있다고 해서 안나루구지로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하면서 내양(內楊)’으로 바뀌었다.

 내양마을은 녹색 농촌체험마을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마을 앞 너른 들녘이 온통 노란 유채꽃밭으로 변한단다. 노란색으로 물든 들녘을 걸어보는 건 기본. 농작물 수확이나 메주·흑두부 만들기도 가능하단다. 갯벌에서는 전통 고기잡이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삭막하기 짝이 없는 풍경만 펼쳐진다. 아니 푸름으로 물들고 있어야 할 들녘이 온통 태양광 패널로 뒤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 내양마을 앞 도로(805번 지방도)에 내려선다. 담장처럼 쌓아올린 양파 망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10m쯤 걷다가 건너편 태양광발전 단지로 들어선다.

 태양광발전단지를 지나면 간척사업으로 만들어낸 들녘. 길 양옆으로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판이 줄지어 늘어섰다. 부지런한 농부의 논에서는 벼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자랐는데도...

 잠시 후 도로 느낌의 둑으로 올라선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을 가로지르는 방조제이다. 아니 바다 쪽으로 더 나가면 또 하나의 방조제가 나오니 그저 둑길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하나 더, 이 둑은 무안과 신안의 군계(郡界)이다. 신안군이 끝나고 이제 무안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둑의 양옆 옛 해협은 담수호로 변해있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의 저 해협은 진도의 울돌목만은 못하지만 2의 울돌목이라 불릴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고 하다. 하지만 몇 곳에 둑이 쌓이면서 지금은 저런 담수호로 남아있다.

 서해랑길은 또 다시 둑길을 탄다. 지도를 육지화(陸地化)하면서 간척지와 물길을 구분하기 위해 쌓은 둑이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끝 간 데 없이 넓다. 저 들녘은 1975년 지도(신안군) 연륙사업의 결과로 생겨났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의 양옆에 물막이 제방을 쌓고 국도 24호선과 지방도 805호선을 냈다. 더불어 주변 갯벌을 매립함으로써 237(지도읍 820·해제면 1217)의 농경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1km쯤 걷자 배수갑문이 나온다. 지도를 연륙화하기 위해 쌓은 북쪽 제방의 부속시설이다.

 배수갑문과 그 옆의 방조제 위로는 2차선 도로(805번 지방도)가 나있다. 아까 내양마을 앞에서 계속해서 도로를 탔다면 이곳으로 나왔을 것이다. 이 경우 서해랑길 30코스는 1km 남짓 단축된다.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단축코스를 권하고 싶다.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난 농로를 따른다. 오른쪽에는 전남 3갑사 중 하나인 원갑사가 자리를 튼 강산(129.6m)이 있다. 길은 강산의 산자락과 서해바다를 양옆에 끼고 나있다.

 길가 농경지에서는 단호박 수확이 한창이다. 설탕이나 시럽의 첨가 없이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내는 식재료로 우리 집 식탁에도 가끔씩 올라오는 채소다. 그런데 작업자가 외국인 일색 아니겠는가. 일손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농·어촌 현실, 그 대안으로 외국인 계절노동자를 들여온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고추도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가 그끄저께였으니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절이 하도 하 수상하다 보니, 때 이른 무더위에 농작물이 헷갈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또 다른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임치들녘을 만들기 위해 쌓아올린 방조제일 것이다.

 왼쪽은 서해바다, 바다가 항아리라도 되는 양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오른쪽은 방조제로 인해 생겨난 습지다. 습지는 갈대로 한 가득이다. 갈대가 꽃을 피우는 가을철이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게 분명하다. 거기에 철새들의 군무까지 더해진다면 더없이 환성적일 텐데...

 길이가 400m쯤 되는 방조제의 끝에 이르면,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내륙으로 파고든다. 그곳에서 임치마을을 만났다. 법정 동리인 임수리(臨水里)’를 구성하는 3(임치·수포·석포) 자연부락 중 하나로 임치(臨淄)’라는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 따왔다고 했다. ‘()’처럼 생겼다나? ‘삼 수()’변에 꿩 치()’이니 꿩을 닮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마을 진입로는 꽃으로 단장됐다. 지도를 대표하는 유채꽃은 아니었지만... 참고로 ‘1004섬 신안은 꽃으로 대변된다. 압해도의 애기동백부터 선도의 수선화, 임자도의 튤립, 지도의 유채꽃, 도초도의 수국, 홍도의 원추리, 병풍도의 맨드라미, 안좌·박지도의 라벤더까지, 사계절 내내 형형색색의 꽃으로 섬이 물든다.

 그중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를 담아봤다. ‘수레국화인데 가을하늘( 雅號)을 닮은 파랑색(프러시안 블루)이 너무 좋아서다. 꽃말은 행복감’, 아내와 함께 걸으며 느끼는 내 심정을 어찌 그리 잘 표현해주고 있을까.

 하지만 마을회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행여 말동무라도 만날세라 전동 휠체어에 의지해 마실 나왔다는 할머니는 나그네와 나누는 말 한마디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노인들만 남았다는 농촌 현실은 이미 흘러간 옛 얘기란다. 그 노인들이 이제 마을회관에 나올만한 기력까지 없어져 버렸단다.

 마을에는 임치진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라우도(全羅右道)의 도만호진(都萬戶鎭)으로 목포진·다경포진·법성포진·검모포진·군산포만호진을 관할하는 주진이었으며, 군선도 중선 8척에 별선이 12, 군사도 1,055명이나 배치되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단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 난중일기에 병신년(1596) 98일 임치진성에 들러 첨사인 홍견(洪堅)에게 방비책을 물었다고 적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100m쯤 들어갔어도 성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1685년부터 1873년 사이 세웠다는 역대 첨사들의 선정비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은 동령재를 넘는다. 고개 너머의 작은 취락도 임치마을(‘동령재마을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이라고 한다. 이쯤에서 여담 하나. ‘임치(臨淄)’는 제나라의 수도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산동성, 그곳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제() 나라가 있었다.

 임치마을을 빠져나와 수포마을로 간다. 수포들녘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농로를 따른다. 참고로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바닷물이 깊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바닷가 마을을 물이 많다는 의미로 수포(水浦)’라 불렀다.

 들녘 너머에서 작은 마을 몇이 고개를 내민다. 임수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석포마을과 석룡리의 자연부락인 석산마을이 아닐까 싶다.

 날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그렇게 10분쯤(임치마을에서) 걷자 수포마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4,29km가 찍혀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무더운 날씨였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르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난이도 낮았다는 얘기도 된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부부를 일심동체라고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방향을 향해 서로 도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때 사랑 한 술은 필수겠지요. 부부 싸움은 물론 안 됩니다. 승자가 누가 되든 남은 반쪽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현자들은 이런 싸움을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그리스 북부 피루스왕이 다스리던 강대한 나라가 로마와의 전쟁에는 이겼으나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국력을 소비한 탓에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서해랑길 15코스(당포버스정류장-달도교차로)

 

여행일 : ‘23. 4. 29()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화원면 및 산이면 일원

여행코스 : 당포버스정류장월하마을마천마을마산제별암마을금호갑문금호마을달도교차로(거리/시간 : 13.6km/ 14.13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해남·영암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그동안 임시 구간(2개 코스)으로 운영해오다 2022 12 솔라시도 대교가 개통되면서 3개 코스로 새롭게 포장해 개통했다. 아무튼 이 코스는 금호방조제와 화원반도의 구릉지를 걷는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눈요깃거리가 없다. 그저 들길과 마을길을 걸으며 지역 주민들의 삶을 기웃거려보는 게 다라고나 할까?

 

 들머리는 당포버스정류장(해남군 화원면 월호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49번 지방도를 타고 화원반도로 들어온다.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국도 77호선(매월리 방면)으로 옮기면 오래지 않아 당포마을에 이르게 된다. 77번 국도변에 있는 버스정류장이 15코스 들머리이다.

 새롭게 단장된 15코스는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자주 걸어야한다는 편치 않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위험표시 교통표지판을 지도에 그려 넣었다. ‘느낌표가 들어간 지점이 도로와 만나는 지점이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서해랑길(해남 15코스) 안내도는 당포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시작점 표지판은 그 옆의 전봇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월호정미소의 맞은편으로 난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를 따를 경우 양화마을로 가버리니 주의한다. 화원반도와 인근의 섬 주민들이 땅끝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송지면의 땅끝이 위도 상으로 한반도(육지)의 최남단이라면 화원반도의 땅끝은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육지의 가장 끝이란다. 실제 금호방조제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해남읍에서 버스로 1시간이나 소요되는 외진 곳이었다.

 바다를 향해 일직선의 수로가 나있다. 꽤 너른 것이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 또한 그만큼 넓다는 얘기일 것이다.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이 그 증거다. 푸름으로 덧씌워진 농경지가 바다를 향해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간다. 넓다는 들판도 저 멀리 산이 막아서는 이 땅에서는 흔치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저런 풍경, 즉 소실점으로 모아드는 아득한 직선로가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현실에서 그런 광경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해랑길은 월하마을을 빙 돌아 관광로(국도 77호선)’로 연결된다. 이때 양배추로 한가득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 해남은 월동배추로 유명하다. 전국의 대도시로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주민들에게 고소득을 안겨주는 고소득 작물의 대열에 요즘은 양배추가 낀 모양이다.

 그 옆에서는 보리가 익어간다. 호사가들은 사시사철 푸르른 들녘을 화원반도의 특징으로 꼽는다. 월동배추가 끝나면 보리가 초록빛 바다를 연출하고, 연이어 감자와 고구마 순이 돋아나며 화원반도는 일 년 내내 녹색의 꿈이 익어간다는 것이다. 그 같은 초록빛깔의 향연을 감상하는 게 화원반도 여행의 매력이란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 ‘월하(月下)’마을로 들어선다. 3개의 자연부락(당포·월하·수동)으로 이루어진 월호리(月湖里)의 으뜸가는 마을로 다라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쌀농사보다는 배추와 양파를 더 많이 재배한단다.

 마을을 지나서도 주변 풍광은 변하지 않는다. 배추밭과 보리밭이 탐방로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을 꽉 채운다.

 들녘의 트랙터는 빗줄기가 반가운가 보다. 시름없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쉬고 있다. 하긴 비가 내려야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운명이니 어쩌겠는가.

 그렇게 5분쯤 걸어 국도 77호선(관광로)’에 올라선다.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2/ 시점 1.5)와 마을 표지석이 이곳이 월하마을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따른다.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을 피해 걸어야하는 위험스런 구간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우측통행이라는 정부의 지침을 비웃으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지침에 따르면 달려오는 차량을 뒤에 두고 걸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교통사고가 잦은데 달려드는 차량이 보여야 피해볼 시도라도 해볼 게 아닌가.

 주변 풍광까지 삭막한 건 아니다. 스위스의 산간지방에서나 볼 법한 목가적인 풍경이 좌우로 펼쳐진다.

 월하마을에서 15. 월호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수동(水洞)’마을 입구에 이른다. 그렇다고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저 멀리서 눈인사만 하고 슬그머니 지나친다.

 위험천만인 도로를 꽤 오래 걸어야 했다. 조바심 때문에 하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서해랑은 도로를 따라 1,7km나 이어지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가는 게 아닌가. 도로 개설 때 생긴 절개지가 온통 등나무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그게 연자줏빛 꽃을 피워내면서 진하면서도 향긋한 향기를 보내온다. 덕분에 비로 인해 찌뿌둥해진 심신이 한결 나아질 수 있었다.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고갯마루(이정표 : 종점 10.4/ 시점 3.2)에 올라선 탐방로가 도로를 벗어난다.

 저 이정표는 대체 뭘 알리고 싶었을까? 하단의 서해랑길 안내도(종점 10.4/ 시점 3.2)가 무색하게도, 상부는 서해랑길과는 무관한 방향표지판을 매달고 있다.

 서해랑길은 이제 마산리로 들어선다. 그리고 임도를 따라 마천마을로 간다. 법정 동리인 마산리(馬山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마천·마산) 중 하나로, 마천(馬川)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말의 형국이고,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엄청난 크기의 노거수 한 그루가 시선을 꽉 채워버린다. 마천마을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같은 화원반도라고 해서 보여주는 풍경이 다 같지는 않았다. 그동안 걸어왔던 황산면이나 문내면은 산다운 산이 없는 구릉지 일색이었다. 그런데 반도의 끝자락인 화원면은 곳곳에서 산봉우리가 솟아올랐다. 그중에서도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추락했던 운거산은 318m에 이를 정도로 높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마천(馬川)’마을에 들어섰다. 탐방로는 월호마을처럼 마을을 관통해버린다. 이처럼 15코스는 만나는 마을마다 관통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사항 하나, 서해랑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주민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마을을 지날 때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주의해가며 걷도록 하자.

 ! 마천마을을 그냥 벗어나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18년 전, 그러니까 1993년 발생했던 아시아나항공 추락사고 현장이 이 마을 부근(운거산)이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들은 진입로가 없는 가파른 산중턱까지 올라 부상자를 구했다. 항공유 유출로 2차 폭발이 예상됐지만 주민들은 부상자를 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기억은 마천숭의관(馬川崇議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항공기 사고 이후 세간의 이목은 마천마을로 집중되었고, 주민들은 청와대로부터 초청을 받기도 했다. 에이스침대 창업자 고 안유수 회장이 지어준 저 건물도 그 헌신에 대한 보답이다. 에이스침대는 이후에도 건물의 유지(보수관리(운영비)를 지원해오고 있단다.

 당시 사고는 탑승객 116(승객 110명과 승무원 6)  68명이 사망하고, 44명이 중상을 입었다. 저 위령비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탑승객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

 신한국의 표상, 사랑의 마천마을이란 대형 빗돌도 보인다. 사고 때 헌신적인 인명구조 활동을 벌였던 주민들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여기서 신한국은 김영삼 대통령의 캐치 프레이즈 신한국 창조에 나오던 신조어, 항공기 사고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때 일어났다는 얘기일 게고 말이다.

 박경완 기자 산화불망비는 기자단체에서 세운 빗돌이다. 사고 당시 광주(무등일보)에서 근무하던 그는 자원해서 사고현장으로 달려왔고, 다음 날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전남사진기자회는 매년 추모제를 갖고 박경완보도사진상을 제정 기자정신이 돋보이는 후배기자들을 표창해 오고 있다.

 마천마을이 낳은 서정시인 박성룡(1934-2002)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대표 시 풀잎을 그의 약력과 함께 적어놓았다. 참고로 1930년 이곳 마천마을에서 태어난 박성룡 시인은 이한직·조지훈 시인의 추천을 통해 문학예술지에 등단하였으며, 풀잎·화병정경·과목 등 유려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자연을 제재로 깊이 있는 통찰의 시를 추구하며 자신만의 조어를 동원해 시의 깊이와 상상력을 더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네들의 헌신을 살펴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15구간의 특징 중 하나는 관광로(국도 77호선)를 반복해서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곧장 가지를 않고 조선소길까지 에둘러서 가고 있었다.

 농로를 따라 6분쯤 걸어 조선소길(이정표 : 종점 8.9/ 시점 4.7)’에 올라선다. 화원반도의 끝자락을 따라 내놓은 도로로 화원 조선산업단지를 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탐방로는 이제 조선소길을 따라 관광로로 간다. 2차선이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이 드물어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이곳에서 집사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3km쯤 전방에서 출발했음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따라잡았다. 나물을 뜯느라 더뎌진 집사람의 발걸음 덕분일 게다.

 마산저수지는 구경만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쓰레기 투척이나 시설의 무단사용은 물론이고, 물놀이나 고기잡이도 금지한다는 해남군수의 날선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10분쯤 더 걸어 또 다시 관광로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왼쪽, 그러니까 목포 방향으로 간다. 하나 더, 이곳은 그동안 걸어오던 마산리가 끝나고 영호리가 시작되는 지점(이정표 : 종점 8.4/ 시점 5.2)이기도 하다.

▼ 여섯 달 만에 돌아온 해남, 이 지역 특유의 이정목이 반가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시점과 종점, 그리고 근처 주요 포인트를 가리키는 방향표시가 한 면을 장식한다. 다른 한 면은 시점과 종점의 거리를 적었다.

 이번은 도로를 따르지 않는다. 50m쯤 걷다가 농협창고 옆에서 농로로 들어선다.

 길가에는 무화과 농원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옆 고을인 영암의 특산물이지만, 이곳 해남에서도 재배지를 늘려가는 추세라고 한다. 하긴 여왕의 과일(클레오파트라가 즐겨 먹었단다)’로 까지 불리는 과일이니 어디 지역을 가려가며 재배하겠는가.

 오랜만에 보는 담배 밭이 옛 추억을 소환시킨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가득가득 논과 밭을 채웠던 담배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옆집 순이네도, 뒷집 철수네도 모두 담배농사로 먹고 살았다.

 농로(저상길) 저상마을(양짓몰)’을 스치듯 지나간다. 법정 동리인 영호리(靈湖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구지·장재·저상·별암) 중 하나로. ‘저상이란 지명은 예전에 마을에서 모시를 많이 심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천가를 걸으며 올려다본 저상마을.

 농협창고에서 저상마을 쪽으로 들어선지 15. ‘저상길 농로를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영호길로 올라섰다. 마을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저상마을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영호길은 별암마을(영호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 앞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하지만 탐방로는 마을을 거쳐 가도록 나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영호로이다. 이와는 별도로 4차선인 관광레저로가 별암선착장을 향해 시원스럽게 달려간다.

 군인들이 사용하던 콘센트막사를 닮은 저 건물은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카페다. 차와 식사를 파는데, 함께 운영하고 있는 펜션(뒤로 보이는 건물)은 뛰어난 뷰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란다.

 이곳은 바닷가. 자동차 보다 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가 보다.

 화원 조선산업단지로 가는 산단로의 아래를 지나자 별암선착장’, 화원반도의 끝자락이자 금호방조제의 남쪽 끝에 위치한 선착장(이정표 : 종점 5.3/ 시점 8.3)이다. 저 선착장은 목포에 근접해있던 이곳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당시는 사람과 농수산물을 실은 배가 하루에도 수십 척씩 드나들었다고 한다.

 목포행 여객선이 드나들던 선착장은 금호방조제가 생기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방조제를 따라 4차선 도로가 뻥 뚫렸으니 여객선이 다닐 이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깃배는 여전히 드나들고 있으며, 그 덕분에 횟집과 낚시가게들이 포구의 명맥을 근근이 이어간다.

 금호방조제(錦湖防潮堤)를 걷는다. 해남군의 화원면과 산이면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이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금호도는 육지로 다시 태어났다. 방조제는 2개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해랑길은 1방조제(별암마을산두마을)부터 먼저 걷는다.

 영산강 하구로 나아가는 바다에는 수많은 배들이 떠있다. 금호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저 바다는 우리나라 최대의 낙지 산지였다. 주민들은 아침마다 양동이에 가득 담아 공판장에 내다 팔았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자식들의 학비를 댔다.

 방조제의 끝은 금호갑문이다. 바다를 막아 생긴 호수, 금호호의 인공 물길인 갑문이다.

 금호갑문을 지나면 금호1교차로’. 탐방로는 이곳에서 4차선 도로(관광레저로)를 건넌다. 이런 곳에서의 안전은 나그네 몫이다.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으나 이를 지키지 않는 인간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란 신호를 보고 건너던 우리 앞을 속도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지나가는 못된 놈이 있었다.

 도로 건너에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방조제공사가 마무리 된 것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금호호라고 적힌 빗돌을 세워놓았다. 참고로 금호호는 따뜻한 기온과 넓은 갯벌로 인해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이다. 이러한 요건은 다양한 새들을 모여들게 한다. 겨울이면 수많은 철새들이 따듯한 남쪽나라로 가기 위해 기착지 삼아 이곳에 들른단다.

 서해랑길은 산두버스정류장(‘산두마을 표지석도 눈에 띈다)에서 도로(관광레저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산두마을 방향으로 50m쯤 들어가다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를 따른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단지 고속도로처럼 씽씽 달려대는 자동차들이 부담스러워 에둘러가며 길을 내놓았지 않나 싶다.

 반원(半圓)을 그리던 탐방로가 다시 도로변(관광레저로)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풍림농산이라는 특산물판매점 앞에 데려다 놓는다. 당도가 높기로 소문난 해남의 꿀 고구마라도 사가라는 모양이다. 최근 수확량을 늘려가고 있는 무화과까지 끼워서...

 천년초 송편도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토종 선인장인 천년초는 면역력 향상과 세포 활성화 작용을 하는 페놀성분과 항산화항염의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풍부해 관절염 등 염증성질환 개선에 큰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나처럼 관절이 시원찮은 노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니 어찌 관심이 쏠리지 않겠는가.

 가게를 기웃거리게 만든 탐방로는 또 다시 도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섬의 중앙에 들어앉은 금호마을로 향한다.

 도로와 헤어지고 10. 고개 하나를 넘자 금호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금호리(錦湖里) 2개 자연부락(금호·산두)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속금(束金)’이었다. 목화를 생산하여 돈을 묶는다는 뜻이란다. 그러나 100년쯤 전 마을의 부흥을 예언한 어느 학자의 말에 따라 바다경치가 비단자락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고,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의미의 금호(錦湖)’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이때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었을 정미소가 고즈넉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수십 년 동안 마을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을 정미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옛 추억을 소환해주기에 충분했다.

 2018년에 폐교되었다는 금호분교(산이 서초등학교)는 뭔가(체험 또는 복지시설)를 위해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책 읽는 소녀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이 마을은 여성 전용 경로당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옛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성추행의 여파가 이곳 섬마을까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다.

 보건진료소도 들어서 있었다.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저 들녘 너머, 호수 반대편에는 공룡들의 땅이 있을 것이다. 방조제 축조로 물높이가 낮아지면서 새롭게 드러난 공룡·익룡·새 발자국 화석산지다. 우항리(황산면)에 위치한 그 화석산지에는 세계 최초·최고·최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세계 최초로 동일 지층에서 여러 종의 화석이 발견되었고, 20~35에 이르는 익룡의 발자국 크기도 세계 최대다. 83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성년도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로 꼽힌다.

 금호마을에서 나오면 또 다시 관광레저로, ‘금호2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금호2방조제로 올라간다.

 오늘은 사슴과 구름이라는 아호를 쓰는 저 둘레길 도반과 함께 걸었다.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열정을 갖고 있는 분, 그녀는 15구간에 이어 16·17구간을 내일까지 마치겠다며 트레킹을 이어가고 있었다.

▼ 금호2방조제는 동금달도(naver map에 적힌 지명이다)’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둑을 펼쳐놓은 모양새이다이 방조제에 금호1방조제와 영암방조제를 더하면 영암·금호방조제가 된다영암군 삼호읍과 해남군 화원면을 연결하는 4.3km 길이 방조제로 농경지와 수자원 확보를 위해 1985년에 착공하여 1996년에 완성되었다.

 저만치 앞 바다에 흐릿한 섬(신도)의 흔적이 가물가물 가라앉은 듯 보인다. 마치 수반 위에 놓인 운치 있는 자연석 수석(壽石)처럼 고요한 바다 속에 잠겨 있다.

 동금달도를 지나갈 때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변을 걷기도 한다. ‘코리아 둘레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상황이랄까? 고속도로처럼 속도를 내며 스칠 듯 지나가는 차량들이 너무 무서웠기에 하는 말이다.

 방조제는 산이반도로 연결된다. 영암호와 금호호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이다. 그나저나 이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여름철이면 방조제 앞이 강태공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것이다. 떼를 지어 올라오는 갈치를 잡기 위해서다. 호수에서 자란 회류성 어류들은 8월이면 바다로 나간다. 이때 배수 관문에서 빠져나오는 치어를 먹이삼아 갈치가 떼를 지어 올라온다고 한다. 먼 바다로 나가야 만날 수 있는 갈치를 제방에 앉아 낚는 장면은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란다.

 바다 건너 거대한 시설단지는 현대삼호중공업이 아닐까 싶다.

 방조제의 끄트머리는 달도갑문이 장식한다. 금호호의 또 다른 물길이다.

 날머리는 달도교차로(해남군 산이면 구성리)

달도갑문을 지나면 곧이어 달도교차로’, 트레킹은 교차로 건너 광장에서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1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임시노선이었을 때의 15코스는 달도교차로에서 곧장 영암방조제로 가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선보인 15코스는 횡단보도를 건너 산이반도로 들어온다.

 산이반도는 솔라시도(Solarseado)’라는 기업도시로 새롭게 태어나는 중이라고 했다. 보성그룹이 전라남도·전남개발공사와 함께 친환경 미래형 도시로 개발하고 있다나? 데이터센터 유치가 계획대로 이뤄지면 아시아를 대표하는 데이터센터 파크로 자리매김 될 전망이란다.

 서해랑길(해남·영암 16코스) 안내도는 교차로에서 솔라시도CC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 28코스(증도면사무소-증도관광안내소)

 

여행일 : ‘23. 4. 22()

소재지 : 전남 무안군 증도면 일원

여행코스 : 증도면사무소상정봉오산마을검산마을해저유물발굴기념비방축마을구분포저수지증도관광안내소(거리/시간 : 16km/ 16.43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증도의 절반 정도를 느리게 둘러보는 코스다. 문준경 전도사 순례길을 따라보는가 하면, 해저유물인양지에서는 700년 전의 못 이룬 항해를 아쉬워해본다. 거기에 드넓은 갯벌과의 한판 씨름은 덤이다. 물 빠진 갯벌도립공원은 짱뚱어·농게·칠게 등의 향연이 펼쳐지고, 반대편 간척지에서는 왕새우가 팔짝팔짝 하늘을 향해 뛰어오른다. 단 슬로시티라는 슬로건에 맞게 천천히 걷는 것은 필수. 그래야 숨겨진 보물들을 챙겨갈 수 있으니까.

 

 들머리는 증도면사무소(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로 들어온다. 지도사거리(지도읍 읍내리)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기면 송도 사옥도를 거쳐 증도로 들어간다. 곧이어 만나는 소금특산물판매소 앞 삼거리에서 문준경길로 직진하면 잠시 후 증도면사무소에 이른다. 서해랑길(신안 28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면사무소의 왼편에 설치되어 있다.

 증도는 느리게 둘러보는 섬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답게 모든 것이 더디게 흘러간다. 초반의 상정봉 구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전부가 평지길이니 그처럼 걷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드넓은 갯벌과 다도해의 섬들을 눈에 담으며 느릿느릿 걸어볼 일이다.

 서해랑길 안내도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면사무소의 뒷산인 상정봉으로 오른다고 보면 되겠다. 해발이 127m 밖에 되지 않는 야산이지만 증도의 주산이라니 무시하지는 말자. 참고로 증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돈대봉(墩臺峰, 137m)이라고 한다.

 60m쯤 들어갔을까 느티나무 아래로 오솔길이 나있다. 초입에 상정봉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초입의 산죽지대를 벗어나자 시야가 확 트인다. 이곳 증도는 슬로시티, 걷기 편하다고 무작정 걸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왼편에 펼쳐지는 풍경이 사뭇 빼어나기 때문이다. 너른 들녘의 안쪽 귀퉁이에 증동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들녘 너머에는 우전해수욕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조금 더 올라 임도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상수원 물탱크가 나오고, 이곳에서 염산(또는 광암)으로 가는 길이 오른쪽으로 나뉜다.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산길은 급경사로 변한다. 그러나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고 길가에다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힘이 들 경우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2. 나무계단이 끝나면 쉼터를 겸하고 있는 널따란 헬기장이 나온다. 남쪽 방향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장소라는 증거일 것이다. 상정봉에서, 아니 증도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이니 서둘지 말고 조망을 즐겨볼 일이다.

 전망대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갯벌에 놓인 짱뚱어다리. 그 너머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태평염전과 한반도 모양의 숲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허리가 잘리지 않은 통일된 한반도다. 우전해변의 배후 숲이 한반도를 빼다 닮은 것이다. 그 고즈넉한 풍경이 언젠가 사진전에서 눈길을 끌던 작품을 빼닮았다. 아름답다는 얘기다.

 조망을 즐기다가 메모지를 꺼내든다. 구간별 소요시간을 적기 위해서다. 그러다 문득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배낭 속에 넣어 버린다. 이곳은 슬로시티,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이행해 볼 기회였던 것이다. 대신 문준경 전도사가 순교 직전 드렸다는 기도문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본다. 다행이도 그 기도문엔 내가 할 수 없는 행동,  원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난 역사인식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이 아니니까.

 느긋하게 조망을 즐기다가 정상으로 향한다. ‘기도바위 가는 길의 방향표시를 따르면 된다. ! 문준경 전도사의 제자인 이판일 장로(한국전쟁 때 순교했다)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는 게 좋겠다.

 평평한 능선길을 잠시 걸으면 문준경 전도사(1891~1950)’의 기도터가 나온다. 암태도에서 태어난 그녀는 17세에 지도읍 정씨가문으로 시집갔다. 이때 목포 북교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1931년에는 서울의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사역자의 길에 들어섰으며 1933년 임자도의 진리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신안군 21개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국전쟁 때 좌익세력에 의해 순교했다.

 기도터에는 보혈이라는 시() 한 수가 적혀있었다. 덧붙인 문구로 보아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바위에서 문준경 전도사가 기도를 드렸던 모양이다. 참고로 보혈(寶血)이란 인류의 죄를 구속(救贖)하기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피를 말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녀의 순교를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나 더, 증도는 주민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토테미즘이 강한 일반적인 해안지방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특징이다. 이게 다 한국 최초의 여성 기독교 순교자라는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문준경 전도사의 제자이자 이판일 장로의 아들이라는 이인재 목사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헬기장과 대동소이하다)을 즐기다보면 어느덧 상정봉(上正峯, 127.7m) 정상이다. 정상은 의외로 허접했다. 봉우리의 한가운데에 박혀있는 삼각점과 이정표(짱뚱어다리 1.9Km/ 염산 3.0Km/ 면사무소 1.1Km)만 보일뿐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산세(山勢)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하긴 구릉지 비슷한 산에서 특별한 볼거리를 찾는 것 자체가 잘못일 것이다.

 낮다고 해서 옛이야기 하나 갖고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옛날 세상이 홍수로 뒤덮였을 때 이곳 증도도 물속에 잠겼는데 오로지 상정봉 정상만이 덜 잠겼다고 한다. 그때 물위에 드러난 정상의 모습이 상여(喪輿)를 닮았다고 해서 상정봉(喪頂夆)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정봉(上正峯)으로 불리고 있다. 상여의 뜻을 내포한 산의 이름이 주민들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아까 헬기장에서 보던 조망이 다시 한 번 펼쳐지기 때문이다. 아니 서쪽 방향의 조망은 헬기장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증도에 들어오기 전, 지인으로부터 꼭 둘러보라고 추천받은 명소가 서너 곳 있다. 이곳 상정봉도 그중 하나다. 증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한반도 모양으로 생긴 우전해변의 해송 숲은 절대 놓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검산마을, 서해랑길은 보물섬길로 연결되는 왼쪽이다. 하산 길 또한 곳곳에서 조망이 트인다. 우전해변의 해송 숲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그보다는 점점이 흩어져 있는 다도해의 풍광이 더 눈길을 끈다. 다만 가파른 내리막길이 무릎이 시원찮은 이들을 괴롭히는 구간이기도 하다.

 가파른 계단길만 지나면 길은 고와진다. 잔디로 뒤덮인 산길이 폭신폭신하기만 한데 거기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보물섬길에 내려서게 되고,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포장도로를 따른다. ‘모실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구간이라 하겠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런 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도로를 따라 7분쯤 걷다가(중간에 방축리로 가는 도로가 나뉘기도 하지만 무시한다) ‘희망민박을 끼고 차도를 벗어나 해안으로 간다. 왼쪽 방향이다.

 잠시 후 이른 바닷가에는 오산(吾山)’마을이 들어앉았다. 법정 동리인 방축리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방축·검산·오산·염산) 중 하나로, 예전에는 수문개로 불리었다. 마을 앞에 배가 드나드는 수문개가 있었다고 해서다. 그러다 집이 다섯 채인데다 길까지 다섯 갈래로 나뉜다고 해서 오산으로 바꾸었다.

 바다는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증도의 갯벌은 물이 완전히 빠져도 표면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찰기로 윤이 나는 갯벌에 주변의 산과 마을, 하늘빛까지 고스란히 투영된단다.

 마을을 지나 썬 코스트 리조트로 간다. 이어서 리조트 후문으로 들어선 다음 숙소 지역을 관통해버린다. 리조트로 봐서는 고개를 내두르기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주인이나 투숙객들 모두 시도 때도 없이 지나다니는 트레커들을 좋아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리조트를 벗어나자 정자까지 갖춘 멋진 해변이 얼굴을 내민다.

 해변의 규모는 작았다. 하지만 잔잔한 파도나 모래의 질만큼은 여느 유명 해수욕장에 뒤질 게 없었다. ‘썬 코스트 리조트가 유명세를 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저런 멋진 해변을 자기 것처럼 품고 있는 리조트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해변에는 리조트에서 만들어놓은 그네가 차오르는 바닷물에 아랫도리를 적시고 있었다.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그네, 거기에 어여쁜 여인이라도 걸터앉는다면 인생샷 한 장쯤은 너끈하지 않겠는가.

 홍보용 입간판이 배웅하는 리조트의 초입에서 아까 헤어졌던 보물섬길 차도를 다시 만난다. 이어서 세목섬이 들어앉은 다도해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검산마을로 향한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야자수가 이국적인 멋을 선사하는 멋진 구간이다.

 텅 빈 선착장 너머로 보이는 섬은 세목섬’. 특별한 볼거리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밋밋한 섬이다. 그저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바닷길이 매일 열린다는 것 말고는...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모퉁이를 돌아 검산(劍山)’마을로 들어선다. 아까 지나왔던 오산마을처럼 방축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 이름은 만들이었다. 마을 앞바다에 고기떼가 가득하다는 뜻이란다. 그러다 해적과 도둑으로 인해 마을이 피폐해지자 시주 나온 중의 의견에 따라 검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단다.

 탐방로는 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동구 밖(‘프롬 휴 펜션 방향)에 세워진 비석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임신방액석(壬申防厄石)’, 돌에 새겨진 대로 액을 막기 위해 임신년에 세운 빗돌이다. 마을에 도둑떼의 출몰이 잦자 노승의 제안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면서 저 빗돌을 세웠다는 것이다.

 탐방로로 되돌아와 노인 회관으로 간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해저유물을 최초로 발견·신고한 최형근씨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집 앞에는 검생이의 달이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검생이의 달 1990 KBS-2TV에서 방영된 드라마로 1976년 당시 해저 유물 발굴이 이루어진 검산(일명 검생이) 마을에서 보물과 관련된 마을 사람들 사이의 소동을 다룬 작품이다. 보물 소동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탐욕과 애증을 그려냈다.

 검산마을에서의 마지막 투어는 검산항이다. 증도에서 가장 큰 포구인데다 보여주는 풍경까지도 빼어나다니 어찌 거를 수 있겠는가. 해넘이가 무척 고운 곳으로도 입소문을 탔다고 한다. 밀물 때는 바다가 붉게 물들고 썰물 때는 갯벌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황홀하게 반짝인단다. 때문에 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진작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나?

 항구는 자그만 돌섬까지 방파제를 쌓고 그 안쪽에 선착장을 만들었다. 파도가 거친 날 어선의 피항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파시가 열리지 않았을까? 유홍준 작가가 소개한 목넹기가 이 부근이라고 했었는데... ‘목넹기 갈보야 뛰지 마라. 우네기(조기잡이 배) 떠나면 너나나나..’로 시작되는 그 목넹기 말이다.

 저 사진작가는 뭘 기다리고 있을까? 일몰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니,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해가 오메가라도 그려주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신안군 소속의 문화관광해설가 이종화씨는 바다로 떨어지는 해가 오메가 글자처럼 반사되어 보이는 현상을 오메가 일몰로 표현하면서 선택받은 자만이 볼 수 있다고 적고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 ‘신안 해저유물 발굴해역에 이른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방축반도로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해저유물발굴기념비 낙조전망대’, ‘700년 전의 약속(소단도의 카페·해저유물전시관)’ 등이 들어서 있다.

 그 초입은 주차장 차지다. 하지만 ‘700년 전의 약속이 공사 중이어선지 널디 너른 주차장은 자동차 대신 어망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4km쯤 앞서 출발한 집사람을 이곳에서 따라 잡았다. 아니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해풍과 햇볕에 말라가고 있는 생선이 욕심이라도 났던 모양이다. 그녀의 관심이 온통 건정에 쏠려있는 걸 보면 말이다. 참고로 우럭··참조기 등을 손질하고 염장한 다음 해풍과 햇볕에 말리면 건정이 된다.

 대단도와 증도 사이 해협에 꽂혀있는 저 지주들은 독살이 아닐까 싶다. 명덕섬과 대단도 사이로 들어온 바닷물이 독살을 지나 소·대단도 사이로 빠져나가는데, 함께 들어온 물고기가 저 독살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 물고기를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나? 참고로 독살이란 바닷가에 돌을 쌓거나 대나무 등을 엮어 만든 발을 설치하고, 밀물 때 물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이다. 증도에서는 갯벌에 대나무로 만든 독살을 일자로 길게 설치하는 방식을 사용한단다.

 건너편 소단도에는 특이한 외모를 지닌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유물과 함께 발견된 송·원대의 무역선, 즉 보물을 실었던 선박을 본 떠 지었다고 한다. 건물은 보물섬(Treasure Island)’이란 명찰을 내민다. 아니 서두에 적힌 ‘700년 전의 약속이 본명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특이한 외모의 건물을 머리에 인 섬이 그림처럼 고운데, 거기에 작은 섬들까지 합쳐지면서 그 자태는 한층 더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승화한다.

 건물은 일층은 카페, 이층에는 자그마한 박물관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 보물선 안에는 도자기 2661, 동전 28018kg, 금속제품 729, 석제품 43점 등이 실려 있었는데, 이중 170여 점이 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단다. 박물관에는 유물들 외에도 보물선 인양 당시의 사진들도 전시해 놓았다.

 박물관 옆에는 배의 갑판(甲板, deck) 모양으로 생긴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돛대(mast)까지 갖춘 의젓한 갑판이다. 갑판에 서면 유물을 건져 올렸다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그 왼편에는 대단도와 내갈도, 외갈도 등 비슷비슷하게 생긴 작은 바위섬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진입로 보수공사가 한창인 ‘700년 전의 약속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8년 전 모실길을 답사하면서 찍었던 사진을 게시한 이유다. 그 아쉬움은 공사현장의 가림막을 살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는 ‘1004섬 신안 보물섬(Treasure Island) 증도의 풍경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소단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700年 前의 약속이라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소단도에 들어선 보물선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원나라 상인이 일본에 전해주기로 한 약속. 지켜지지 못한 그 약속이 우리에게는 어부지리가 되었지만...

 조금 더 걸어 만난 갈림길에서는 바다를 향해 간다. 서쪽 끝의 바닷가 벼랑 위에 해저유물 발굴기념비가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작정 빗돌 앞에 서는 우()는 범하지 말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나서 역사의 현장에 이르러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침 초입에 어디서 어떤 유물들이 발견되었는지, 또 그 유물을 실은 배는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초입에 신안 섬 자전거길(증도 구간은 2코스이다)’의 안내도와 스탬프 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관광안내소에서 시작해 원점으로 돌아오는 회귀형 코스(48km, 4개 인증센터)로 증도의 얼굴마담인 갯벌과 소금꽃 핀 염전, 보물선을 건져 올린 해저유물발굴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청정의 공기를 마시며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에 선정되기도 했다.

▼ 해저유물발굴비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바닷가 풍경, 해식애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제법 볼만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발굴된 유물의 중요성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빗돌의 크기도 대단했다. 참고로 신안해저유물은 1975년 도덕도 앞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중국도자기가 걸려 올라오면서 최초로 발견됐다. 이후 청자·백자·동전·생활용품 등 23천여 점에 달하는 해저유물이 1984년까지 발굴됐다. 이 신안해저유물 발굴은 동양문화사 연구에 길이 빛날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발굴해역도 국가사적 제274호로 지정됐다.

 해저유물 매장해역 안내판 옆에는 슬로시티 보물찾기 호핑투어에 대한 안내판이 스탬프통과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증도에서 발견된 700년 전 보물들을 찾아 8개 숨은 명소를 관광한다는 컨셉으로 진행되는 스탬프 투어다. 느리게 보고, 천천히 걷고, 즐거운 체험을 하면서 보물을 찾아보라는 모양이다.

 빗돌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먼저 와있던 서해랑길 도반들이 바닷가로 더 나가보란다. 천애의 바위절벽 위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는데, 그곳에서 빗돌이 명시하고 있는 유물 발굴지가 어디쯤인지를 직접 가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망대에 서자 서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바다에는 청자 모양의 부표 하나가 떠있었다. 청자화병 등 23,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된 지점임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란다.

 눈길을 살짝 돌리면 이 지역 해안선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 침식을 마친 리아스(Rias)식 해안절벽이 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그 아래 갯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자신도 보아달라며 울부짖는다.

 소단도·대단도·내갈도·외갈도 등 꼬맹이 섬들이 일렬로 늘어선 반대편 풍경도 만만찮다. 바위투성이 섬에서 자라는 생명체는 차라리 경이. 작달막한 해송이 갖은 풍파를 다 이겨내며 꿋꿋이 자라고 있는 모습에서 생명의 강인함을 느끼게 된다.

 도로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해안일주도로를 따른다. 증도의 자랑거리인 모실길’ 1코스인 노을이 아름다운 사색의 길이기도 한데, 이름 그대로 고즈넉한 해안 길을 걸으며 사색하기 딱 좋은 코스로 알려져 있다.

 몇 걸음 더 걷자 또 하나의 전망대가 나온다. 나무로 만든 전망대가 바닷가 벼랑에 기대듯 매달려있다. kakaomap에서 낙조전망대로 적고 있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주워 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어 보이니 말이다.

 지금은 대낮. 해 떨어지는 시간에 맞추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대신 먼 바다로부터 몰려온 거친 파도가 빚어놓은 절경을 눈에 담으면 되니 말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곶()이 온통 깎아지른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손색이 없다.

 이 구간은 두어 곳에서 산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정표(글자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았지만)는 물론이고 초입에 쉼터용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맞다. 증도펜션민박 홈페이지는 이종화 문화관광해설가의 말을 빌려 바다 위에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섬들, 산 위에서 보이는 수려한 풍광, 황금빛 노을과 서해낙조 등 아름다운 경관을 보유한 멋진 등산로라고 적고 있었다.

 두어 개의 작은 해수욕장도 눈에 띈다. 증도 주민들이 하트해변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목넘어·가운데·옥송구지 등 3개의 장불(‘장불은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밭(또는 갯벌)’의 전라도 방언이다)이 그려내는 선이 영락없는 하트()’라는 것이다. 모래사장 위쪽에 민물이 있는가하면, 썰물 때는 갯벌에서 낙지나 소라·고동 등을 잡을 수 있어 가족 단위 피서지로도 그만이라고 한다.

 김 양식용 지주 너머로 도덕도(‘도둑섬으로도 불리며 오른편은 호감섬’)가 떠 있다. 지금은 빈집 한 채만이 외로운 무인도지만, 한때는 14가구가 거주하면서, 초등학교 분교와 경찰서 초소까지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목포로 연결되는 여객선이 기항했을 정도라나?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채석장도 내다보인다. 지금은 산림복구까지 끝났지만, 저런 채석장이 있었기에 증도의 수많은 간척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처럼 생긴 모퉁이를 돌아서자 이번에는 만()처럼 움푹 들어간 해안선이 길손을 맞는다. 그곳에 푸른솔이라는 펜션이 들어서 있었다. 별장으로 지어진 것을 독채로 빌려준다는데, 여행 마니아들 사이에서 프라이빗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있단다.

 이즈음 방축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옛 이름은 방죽끼미’, 마을에 큰 방죽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러다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 섬이 많다 하여 방축으로 개명했단다. 방축·오산·염산·검산 등으로 구성된 방축리의 중심마을이기도하다.

 마을 앞 해변은 웬만한 유명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았다. 300m 남짓의 백사장은 흡사 밀가루라도 되는 양 보드랍기 짝이 없고, 그게 울창한 송림까지 끼고 있다. 방축(防築)이라는 마을 이름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 하겠다.

 해변의 끝은 시가 있는 공원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놓았다. 하지만 풍선처럼 생긴 기구(漁具가 아닐까 싶다)만 매달려 있을 뿐, 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시를 지어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방축마을을 지나 임도로 들어선다. 걷는 내내 다도해의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적당히 굽이치는 찻길을 따라 고도를 높이니 아기자기한 바다 풍광이 발아래 깔렸다. 도덕도·호감섬·대섬·부남섬 등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사이좋게 늘어선 모습이 무척 곱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 ‘나룻구지라는 작은 선착장에 이른다. 이종화 문화관광해설가는 이 부근을 목넹기(모실길안내도는 향월포로 표기)’로 적고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로 막힌 바다가 호수를 연상시킨다면서 말이다. 맞다. 자은도와 증도를 아우르는 이 일대의 바다에는 철마다 조기·민어를 쫓는 수백 척의 배들이 오갔다고 한다. 뱃사람의 돈을 쫓아 술과 색시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서해에 비바람이 들이치는 날이면 임자도의 타리파시와 더불어 가장 소란스럽던 항구였다고 한다. 잡아온 고기는 부산이나 시모노세키로 보내질 때까지 얼기설기 지은 생선창고로 옮겨졌고, 그물을 손질하는 사이 바다에서 먹을 쌀··땔감을 실었고, 짬이라도 나면 색시를 품었다.

 모퉁이를 돌아 임도를 빠져나오면 기다란 방조제가 반긴다. ‘장성저수지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니 장성방조제 쯤으로 기억해두자. 아니면 방축마을 곁이라는 핑계를 대며 방축방조제라 우겨도 될 일이다.

 방조제 안쪽은 대하양식장이 들어서 있었다. 탐방로는 양식장의 안쪽을 에두르며 나있다. 하지만 난 방조제 둑을 따라간다. 양식시설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일부러 에둘러 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방조제를 선택한 덕분에 500m 정도를 단축할 수 있었다.

 왼쪽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아니 시선의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임자도가 들어앉았다. 그 왼편에는 대섬과 부남섬. 저런 섬들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기에 방축이라는 지명을 낳았고, 사람들은 저 바다를 바다호수라 부르기도 한다.

 방조제를 지나면 또 다시 임도로 올라선다.

 6분쯤 더 걸어 염산 방조제로 내려선다. 간척지의 안쪽에 들어앉은 염산마을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나저나 이 구간은 방조제로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방축마을 방조제에서의 경험을 살려 주변을 살펴봤지만 잡초만 무성할 뿐 길은 나있지 않았다. 방조제 안쪽으로 난 농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인공 습지는 웃자란 갈대로 가득했다. 가을에 찾으면 염산마을이 자랑하는 볼거리로 등장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염산(廉山)’ 마을의 옛 이름은 산너머이다. 산너머에 마을이 있다 해서인데, 언제부턴가 산 좋고 밭이 기름지다 하여 염산으로 개칭했다.

 바닷가 방조제와 그 안쪽의 농로. 그 농로의 좌우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둠벙과 논이 펼쳐진다. 신안에 속한 섬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염산방조제를 지나면 돈대봉 임도가 시작된다. 그 초입에 작은 모래해변이 형성됐는데, 주민들이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듯 어선 두어 척이 모래사장에 올라앉아 있었다.

 돈대봉(墩臺峰)의 허리께를 에둘러가는 임도는 길이가 2km쯤 된다. 하지만 가슴에 담을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갖고 있질 못하다. 그저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임도가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20. 임도를 벗어나자 구분포 방조제가 반긴다. 방조제 아래에 들어선 엄청난 규모의 대하양식장이 눈길을 끄는 지역이다. 하지만 kakaomap에서 포인트로 삼고 있는 구분포저수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하양식장을 지나 또 다른 임도로 들어선다. 서해랑길 28코스의 대부분은 증도자전거길과 겹친다.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에 꼽혔을 정도로 라이더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을 탄 코스이다. 덕분에 라이딩을 즐기는 젊은이들과 살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구간은 신안군이 자랑하는 명품 둘레길인 모실길  노을이 아름다운 사색의 길(1코스)’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길가에 돌탑을 쌓는 등 탐방로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게 10분 남짓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증도대교가 얼굴을 내민다. 사옥도(沙玉島)와 증도(曾島)를 잇는 1,964m 길이의 아치형 연도교이다.

 3~4분쯤 더 걸어 광암 들녘에 내려선다. 이어서 수로 곁으로 난 농로를 따라 805번 지방도로 간다. 화사하게 피어난 유채꽃 향기가 고갈된 체력까지 보충해주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농로 왼편, 그러니까 광암 방조제가 있는 쪽으로도 꽤 너른 농경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지대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곳 증도가 풍요로 넘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눈앞에 펼쳐지는 저런 풍경은 보고 그 누가 섬이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날머리는 증도 관광안내소(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10분 조금 못되게 들녘을 걷자 805번 지방도(지도·증도로)에 올라서고 곧이어 관광안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신안29코스) 안내도는 슬로시티보물찾기 호팅투어 스탬프 함과 함께 관광안내소 곁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6.4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 주었다. ‘너와 나가 아닌, ‘우리이길 원하기에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현상이다. 다시 태어나도 내 아내의 남편이 되고 싶다던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처럼 그 세상이 어떠하더라도 아내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난 천만 번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내 아내와 함께하고 싶다. 세상사 힘들기만 한데, 고집스런 꿈을 찾아가는 날 믿고 따라주며 그 꿈이 이루어지길 빌어주는 여자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서해랑길 27코스(태평염전-증도면사무소)

 

여행일 : ‘23. 4. 8()

소재지 : 전남 무안군 증도면 일원

여행코스 : 태평염전소금밭전망대갯벌도립공원대초마을우전해수욕장한반도 해송숲짱뚱어다리증도면사무소(거리/시간 : 14.3km/ 15.79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증도의 2/3정도를 느리게 둘러보는 코스다. 소금 창고가 가지런히 늘어선 태평염전에서는 작은 금덩어리들을 만나고, 광활하게 펼쳐지는 갯벌도립공원에서는 물이 빠지면 짱뚱어·농게·칠게 등의 향연이 펼쳐진다. 한반도를 닮았다는 해송 숲(10만여 그루가 자란다)과 드넓은 갯벌 위로 내놓은 짱뚱어다리를 걷기기도 한다. 단 슬로시티라는 슬로건에 맞게 천천히 걷는 것은 필수. 그래야 숨겨진 보물들을 챙겨갈 수 있으니까.

 

 들머리는 태평염전(신안군 증도면 대초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로 들어온다. 지도사거리(지도읍 읍내리)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기면 송도 사옥도를 거쳐 증도로 들어간다. 잠시 후 유명관광지가 부럽지 않은 태평염전(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360)에 닿는다. 시작점 표지판은 염전의 입구, 슬로시티를 홍보하는 안내판 기둥에 매달려 있다.

 증도는 느리게 둘러보는 섬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답게 모든 것이 더디게 흘러간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멀다. 태평염전은 국내 최대 규모(여의도 면적의 2배란다),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갯벌도립공원은 바다를 향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한반도를 닮은 숲도 해송이 10만 그루가 넘고, 짱뚱어를 형상한 목교도 472m나 바다를 가로지른다. 주어진 시간은 빠듯한데 어떻게 느릿느릿 걷느냐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어갈 수 있는 것을...

 길을 나서기 전 염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그럼 초입에 세워놓은 태평염전 100배 즐기기 안내판부터 살펴보자. 박물관에서 시작해 염생식물원·천일염결정지·소금가게 등을 거친 다음 소금동굴체험에서 끝나는 총 10개 코스로 이를 모두 둘러볼 경우 행복이 백배로 불어나게 된다나?

 입구 왼편에는 초창기의 창고(석조)를 전시관으로 단장해놓은 소금박물관이 있다. 소금의 역사·문화는 물론이고, 미네랄과 천일염 등 소금에 대한 유익한 정보와 소금 장인들의 일상과 천일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지만 시간이 없어 들어가지는 못했다. 박물관 옆에 있다는 체험장은 아예 둘러보지도 못했다. 장화를 신고 고무래로 대파질을 하는 과정이야 TV에서 자주 봐왔으니 그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맞은편에는 소금향을 간직한 솔트카페(Salt Cafe)’가 있다. 예전 소금을 배로 실어 나르던 항구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카페로, 중도의 소금을 외지로 실어 나르던 항구의 기억을 간직한 추억의 장소이자 기억의 공간이라 하겠다. 카페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솔티미네랄라떼, 소금아이스크림, 함초쿠기 등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커피의 향은 살리고 쓴맛은 줄인 커피와 소금의 달콤한 어울림, 커피의 향긋함과 천일염이 품은 미네랄의 조화가 솔티미네랄라떼 한잔에 가득히 녹아있단다.

 소금가게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갯벌은 세계 5대 갯벌중의 하나다. 특히 증도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모래가 적은 진펄로 최고 수준의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때문에 태평염전에서 나오는 천일염은 바닷물, 양수와 유사한 미네랄 성분비로 자연의 밸런스와도 가깝다. 또 대표적 염생식물인 함초를 인위적으로 제거하지 않고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생산한 소금은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소금전망대로 가는 길목에서는 소금아이스크림 함초차도 판다. 꼭 맛봐야 하는 신안의 대표 먹거리이자, 딴데 가면 안 판다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6년쯤 전 로마에 갔을 때도 저런 상술에 홀려 젤라또를 사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염생식물원에 들어가 볼 차례다. 참고로 태평염전은 1953 6·25전쟁 후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고 소금생산을 늘리기 위해 조성된 염전이다. 전증도와 후증도를 둑으로 연결하고 그 사이 갯벌에 조성됐다.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형의 1공구가 북쪽에, 2공구가 남쪽에, 남북 방향으로 3공구가 있다. 이후 정부가 민간사업자에게 영업권을 넘기면서 몇 차례 염전의 주인이 바뀌었다.

 염생식물원(鹽生植物)은 갯벌 미네랄을 먹고 자라는 건강한 염생 식물들이 군집을 이루는 곳에 조성했다. 바다의 홍삼으로 알려진 함초(퉁퉁마디)를 비롯해서 겟메꽃·해당화·칠면초 등 100여 종의 식물들이 이곳에서 생장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안내판을 읽으며 220미터의 목조 관찰데크를 걸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새로운 앎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신안 문인들의 작품을 읊조려보면 될 일이고...

 때는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었다. 5일만 지나면 천지가 상쾌하고 맑은 공기로 가득해진다는 청명(淸明). 그래선지 함초(퉁퉁마디)와 칠면초로 붉게 물들어있어야 할 갯벌은 거무티티한 자색으로 퇴색해버렸다. 함초와 칠면초는 염분이 있는 갯벌과 습지에서 생육하는 한해살이풀로 생장 초기에 녹색이었던 함초는 가을이 되면 붉은색으로 바뀌고 칠면초의 꽃은 8~9월에 펴 차차 자주색으로 변한다.

 소금밭낙조전망대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전망대로 연결되는 나무계단 옆에 서해랑길 신안 27코스의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나무계단에 이어서 나타나는 통나무계단. 지자체는 계단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나 보다. 중간 중간에 올라온 계단의 숫자와 소모한 칼로리를 적은 안내판을 세웠다. 감소된 스트레스의 양과 연장된 수명을 숫자로 적었다. 전망대까지 오르면 10분을 더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초입에서 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전망대에 올라선다. 증도가 세계슬로시티로 지정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태평염전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버지봉의 능선, 해발 50m 높이의 구릉지에 세워져 있다. 2007년 국제슬로시티연맹은 증도를 아시아에서 처음 슬로시티로 지정하며, 인류의 생명을 위해 갯벌 염전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그 가치를 인정했단다.

 전망대에 서자 태평염전과 염생식물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바둑판처럼 연결된 소금밭에 세모난 지붕 창고들이 쭉 늘어섰고, 그 뒤로 바다가 이어지는 아득한 풍경이다. 그러자 슬로시티의 한 템포 더딘 심호흡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온다. ! 오른편 저 어디쯤에는 증도대교가 놓여있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나몰라하며 빠르게 오가는 차들로 넘쳐나는...

 다시 길을 나설 차례, 하산은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이번에는 침목계단이 ‘805번 지방도(지도·증도로)’로 연결해준다.

 도로로 내려서자 샛노란 유채 꽃밭이 길손을 반긴다. 유채꽃은 봄을 알리는 얼굴마담. 2월 무렵 꽃망울을 열기 시작해 4월이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노란빛 꽃구름에 안긴 인생 사진을 찍기에 딱 좋은 시기이라 할 수 있겠다. ! 꽃밭의 둑을 따라 모네의 연인길도 나있었다. 안내판은 앞서가는 연인(까미유)을 불러 뒤돌아보는 그녀와 아들 장의 모습을 그린 모네(프랑스의 인상파 창시자)’처럼 함께 간 이를 부른 다음 이 장면을 인생사진으로 남겨보라고 권한다.

 탐방로는 이제 ‘805번 지방도(지도·증도로)’를 따른다. 3공구(염전)의 소금창고(목조)를 옆구리에 끼고 걷다보면 생각 없이 스쳐 지나던 염전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세월에 빛바랜 나무 창고와 소금을 싣고 오가던 수레(플라스틱 수레로 바뀐 게 조금 아쉽지만)가 낯설게 다가선다. 하나 더, 저 창고 가득 쌓인 천일염은 한때 천시 받던 염부들의 땀방울로 얻어낸 귀한 결과물이다. 국내 생산 천일염 가운데 6%가 이곳에서 나온다.

 창고 뒤로는 3공구의 증발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저곳에서 생산되는 갯벌천일염은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소금의 0.1%에 불과한 희소한 보물이라고 한다. 미네랄이 풍부해서 쓴맛이 없고 단맛을 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게랑드 소금보다도 우수성을 인정받는단다. 게랑드 소금보다 칼륨은 3, 마그네슘은 2배 이상 많다는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0. 탐방로는 ‘805번 지방도(지도·증도로)’와 헤어져 왼편 돌마지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돌마지 마을을 경유해 바닷가로 간다.

 예로부터 전남지방 해안가에는 건정이라 불리는 생선이 있었다. 우럭··참조기 등을 손질하고 염장한 다음 해풍과 햇볕에 말리면 건정이 된단다. 내 어릴 적, 심심산골의 양반가 종갓집이던 우리 제사상에 올라가던 생선이다. 아니면 귀한 손님이 올 때나 꺼내 양념을 해서 구워먹거나 탕으로 해서 먹었을 정도로 귀하디귀한 생선이었다. 그걸 신안지역에서 재현하여 신안 건정 하늘물고기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단다. ‘시간이 말린 생선의 맛이란 너스레를 떨면서... 직판에 체험까지 더한다기에 잠깐 들러보고도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하니 어찌할꼬?

 그렇게 몇 14분쯤 걷다보면 기다란 방조제로 올라선다. 왼쪽 답사도(kakaomap의 지명)와 오른쪽 대술웅도를 잇는 긴 방조제이다. 이때 대술웅도(지금은 육지)와 화도·석섬 등이 조망된다.

 왼편으로는 신안의 자랑거리인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유네스코(UNESCO)는 저처럼 아름다운 섬과 갯벌 그리고 염전으로 이뤄진 신안군의 해양환경을 신안 다도해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오른편은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 그곳에는 대하양식장이 들어섰다. 1997년 우루과이라운드 발효를 계기로 산업자원부는 폐 염전정책을 시행한다. 수입소금이 들어오면서 서해안에 산재하던 천일염 생산지도 급격히 줄게 돼 신안·영광 등 일부 서남해안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당시 염전을 그만둔 사업자들이 새롭게 시작한 것이 대하양식장이다. 정부는 그런 이들에게 시설자금을 지원했었고...

 800m쯤 되는 방조제의 끝(‘대술웅도 해변길 입구)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그런데 서해랑길의 주황색 방향표시가 양 방향 모두를 가리키니 문제다. 코너에 세워놓은 수릉섬 길 이정표(덕정마을/ 돌마지마을/ 화도마을)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해답은 방조제에 붙여놓은 안내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왼쪽 해안으로 가는 방향이 정규 코스인데, 만조 등 기상악화 때는 오른쪽 산 아래 길로 우회하라는 것이다. 하나 더, 어디로 가다라도 대술웅도를 반 바퀴 돌아 다시 만나게 된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썰물 때이니 망설일 일도 없다. 냉큼 바닷가로 내려서 물 빠진 갯벌을 걷는다. 그리고 대술웅도의 해안을 돌아 화도 노두길로 간다.

 잠시 후 화도로 들어가는 노두길로 올라선다. 노두는 개펄 위에 돌을 놓아 건너다니던 징검다리다. 바다와 바다 사이에 어민들이 다닐 수 있게 만든 통로로 물이 차면 사라지고 물이 빠지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화도 노두길은 의젓한 도로(그것도 2차선). 두 차례 확장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단다. 밀물 때면 지금도 바닷물 속에 잠긴다고 해서 아직까지 노두길로 불린다나?

 초입에는 신안 섬 자전거길 안내판(스탬프보관함과 함께)이 세워져 있었다. 장혁과 공효진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고맙습니다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인다. 수혈 실수로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와 그의 엄마인 미혼모 연신의 이야기가 마음 아프게 또는 따스하게 그려진 드라마였었다.

 2013년 증도 일원은 신안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면적은 144.0(육지 0.737, 해면 143,263).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대한민국 서남해안 갯벌의 생태적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체계적인 보존과 지속가능한 이용 도모한다는 목적에서다. 그나저나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선생의 말처럼 저 조형물의 색깔이 조금 밝은 색이면 어땠을까?

 길이가 1200에 이른다는 노두길 너머로 화도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섬의 모양이 바다 위의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을에 해당화가 가득하다는 섬으로, 국립해양조사원에서 2021 바다 갈라짐의 명소로 추천했던 섬이기도 하다. 하나 더, ‘고맙습니다의 영신과 봄이가 살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시간을 쪼개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화도 전체가 일몰의 명소로 알려져 있으니 해넘이 시간에 맞추면 더 좋겠고...

 갯벌은 온통 구멍투성이다. 짱뚱어, 칠게, 농게 등 갯벌 생물들이 들락거리면 뚫어놓은 삶의 현장이자 생명의 길이다.

 조금 더 돌면 공중화장실이 있는 갈림길(아까 헤어졌던 우회로와 만난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바닷가와 헤어진다. 그리고 오른쪽의 들녘을 돌아 덕정마을로 간다.

 들녘을 지난 다음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덕정(德鼎)’ 마을이 놓여있다. 법정 동리인 대초리를 구성하고 있는 5개 자연부락(대초·덕정·화도·등선·장고) 중 하나로 전증(일명 앞시루)과 후증(일명 뒷시루)이 있어도 솥이 없으면 물을 담을 수 없다 하여 솥 정()’자를 붙여 덕정이라 하였단다.

 이 마을은 순흥 안씨의 집성촌인 모양이다. 문중 세장산(世葬山)을 마을 앞에 놓고, 반듯하게 지어진 찬성공파 사당과 추모관을 배경으로 삼았다.

 경로당 외벽에서 마을 주민들의 행복한 표정을 읽는다. ‘행복이 내린다니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 잘 왔어요라는 문구도 보인다. 자신들의 행복을 길손들에게도 나누어주겠다는 얘기겠지?

 덕정마을을 빠져나오면 805번 지방도,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150m쯤 도로를 따른다. 대초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대초(大棗)’ 마을을 앞에 두고 걷는 모양새이다.

 탐방로는 대초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이때 마을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대초리교회가 눈길을 끈다. TV의 해외여행 코너에서나 볼 법한 기괴한 생김새다. 인도네시아 편에서 본 건물을 쏙 빼닮았는데, 한국전쟁 때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가 3번째로 개척한 교회라고 한다. 한국철도의 국내기독교 유적지를 둘러보는 기독교 성지순례 탐방 열차 코스에도 포함된 교회라고 한다.

 마을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언덕을 넘어간다. 이어서 805번 지방도를 가로지르면서 바닷가로 나아간다.

 이 구간에서 난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을 만났다. 사진 전문가들 사이에서 떠돌던 얘기. 즉 개개로는 보잘 것 없지만 무리지어 피어날 때는 그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한국 야생화 꽃밭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곳이다. 먹는 나물로만 알았던 냉이가 저렇게도 예쁜 꽃을 피워낼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0. 우전방조제(신산경표에서 옮긴 지명)로 올라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태양광발전소’. 그런데 패널이 씌워져 있지 않은 건 무슨 이유일까? 정권이 바뀌면서 신·재생에너지가 뒷전으로 밀려났는지도 모르겠다.

 왼쪽은 드넓은 갯벌. 물 빠진 바다지만 다도해의 풍광을 여실히 보여준다. 화도를 위시해 석섬·가운데섬·끝섬·비겨섬·갈매섬 등 수많은 섬들이 바닷물이 아닌 갯벌에 둥둥 떠다니는 풍경이 극히 이질적이다.

 증도의 봄은 노란색일 수도 있겠다. 유채꽃이 저 드넓은 들녘을 온통 샛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증도의 유채꽃은 최근에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게 올해는 더 늘어났나보다.

 방조제를 빠져나오다 잠깐 헤매기도 했다. 서해랑길의 특징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도 갈림길이 많다보니 가끔은 헷갈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놓친 표식을 다시 확인해보는 편이 낫다. 리본 등의 표식이 하도 촘촘히 세워져 있어 금방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방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농로에서 방향을 꺾어 우전마을 방향의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우전(羽田)’ 마을(사진은 우전해수욕장 주차장)로 들어선다. 예전에는 기러기 떼가 한 겨울을 지내고 간다 하여 깃밭(일명 길밭)’이라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우전으로 변했다.

 우전해안에는 갯벌박물관이 들어서 있었다. 지상3(지하1)의 규모로 국내 최대이자 최초의 갯벌생태 교육공간이라는데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06년 개관한 박물관에서 우린 갯벌의 탄생과정과 우리나라 갯벌의 모습, 갯벌에 사는 여러 생물들에 대한 전시를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신안군의 아름다운 섬과 갯벌에 대한 홍보영상물을 수시로 상영한다.

 박물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전호남 수석전시관도 들어가 보자. 증도 출신인 전호남씨가 한 평생 모아온 수석 671점을 기증함으로써 만들어진 소중한 공간이다.

 전시관에는 그가 기증한 수석 300여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었다.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우전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푸른 해송 숲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진 4km나 되는 드넓은 은빛 백사장이 자랑거리인 해수욕장이다. 파란 바다와 숲의 정취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우전해수욕장은 증도의 대표적 해변이다. 백사장 길이가 무려 4km가 넘는다. 백사장의 모래는 아주 하얗고 가늘다. 결이 고운 밀가루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천연규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물의 깊이도 적당하단다. 특히 짚풀로 만든 비치파라솔은 동남아 휴양지 같은 이국적 풍경을 선사한다. 여름 시즌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일 것이다.

 왼쪽을 바라보면 유럽의 근사한 리조트를 쏙 빼닮은 건물들이 보인다. ‘엘도라도라는 전망이 좋은 리조트이다. 엘도라도는 보물섬·황금도시를 뜻한다. 낙조와 일출을 다 볼 수 있다고 해서 꽤나 유명세를 탄다는데, 모든 객실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오션 뷰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빚어낸 아픈 상처도 엿볼 수 있었다. 피서객을 위한 시설물들이 물의 흐름을 바꿨고, 그 물길은 모래사장을 하염없이 파먹어간다.

 이젠 해수욕장의 배후 숲을 걸어볼 차례다. 한반도 속 또 하나의 작은 한반도를 이룬, 해송 숲속에 내놓은 천년의 숲길은 증도여행의 필수 코스다. 이 구간은 증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모실길의 제3코스인 천년의 숲길이기도 하다. ‘갯벌박물관에서 짱뚱어다리까지로 그 거리가 총 4.6km에 이른다.

 숲길 초입에 철학의 길이라는 문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슬로시티이니 느릿느릿 느림의 미학은 기본. 거기에 사색을 즐기며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천년의 숲길은 백사장의 뒤편으로 나있다. 때문에 발이 푹푹 빠지기도 하지만 낭만이 넘치는 길이다. 이런 길은 짱뚱어다리까지 4Km나 이어진다. 그렇다고 이 모든 길을 완주할 다 필요는 없다. ‘모실은 마을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로 마실과도 같은 뜻이다. 그러니 모실길은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가듯 걸어야 한다. 마음 내키는 곳에서부터 원하는 곳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며 경치를 즐기면 그만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망각의 길이란 문이 길손을 맞는다. 뭘 잊으라는 얘기일까? 그나저나 사목사목 걷다 보면 어느새 한껏 여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도시의 삶에서 오염됐던 시간이 비로소 본래대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이곳 증도는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다. 이런 곳에서까지 발걸음을 제촉할 이유는 없다.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쫒아보자. 그러다 포토죤이라도 만나면 인생샷 하나 건지면 될 일이고...

 느리게 걷기의 방점은 우전해변에서 만나는 일몰이라고 했다. 저 플라스틱 의자가 그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서해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해를 주워 담기 딱 좋은 곳에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우전해변 중간쯤에서 만난 백사장. 모래가 유독 고운 저 백사장은 썰물 때면 개펄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개펄은 마사지를 즐기기에 적합한 성분들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해서 매년 게르마늄갯벌축제까지 열린단다.

 별자리 보기 체험장은 등받이벤치까지 갖추었다. 지극히 편한 자세로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 많은 별자리들을 무슨 수로 아느냐고? 벤치 옆에 계절별 별자리를 그린 안내판을 세워두었으니 그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길가 곳곳에는 시비(詩碑) 등 읽을거리까지 챙겨놓았다. 나무 사이로 내다보이는 바다를 감상하며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비(사진은 이해인 수녀의 바다일기’)에 적힌 시들을 읽어보기도 한다. 이런 재미가 있어 사람들은 트레킹에 열광하는가 보다.

 지자체는 걷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라며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모래의 입자가 밀가루처럼 고우니 맨발로 걸어보란다. 저런 숲길은 걷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다. 바람결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그득하다. 건강한 기운으로 충만한 초록색 숲길에 기분 좋은 솔향까지 보태진다. 이런 게 바로 힐링(healing)이 아니겠는가.

 우전해안이 끝나갈 즈음 바닷가로 내려가 봤다. 그리고 바닷가를 따라난 길을 따라 짱뚱어다리로 간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으나 모래의 유실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사제(말뚝을 일렬로 박았다)가 눈길을 끌고 있었다.

 우전해안의 끝은 짱뚱어해수욕장이 장식한다. 널따란 주차장은 물론이고 해수풀장·샤워장·몽골텐트촌·야영장 등 편의시설을 두루두루 갖춘 명품 해수욕장이다. 하지만 5년 전 들렀을 때 눈여겨봤던 와싱톤야자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당시에도 대부분이 죽어가고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20. ‘짱뚱어다리는 광활한 갯벌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든다. 나무와 철재로 만든 이 예쁜 다리는 다리 아래에서 짱뚱어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닷물이라도 빠져나가면 갯벌 위로 새겨진 굽이굽이 흐르는 물곬을 눈으로 쫓으며 어슬렁어슬렁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나?

 다리 아래로 물이 넘실거리는 걸 보면 물때를 잘 맞춘 모양이다. 바닷물이 가득한 만조(滿潮) 때 찾아와야 짱뚱어다리의 진면모(眞面貌)를 제대로 볼 수 있다니 말이다. 마치 바다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말이다. 바닷물이 빠졌다고 해서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단다. 배를 드러낸 갯벌에서 이곳 증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갯벌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입에 커다란 조형물(造形物)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먼저 ‘2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만들고, 그 아래에 ‘1004’라는 글자모양을 배치했다. 이곳 증도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관광지 100에서 두 번째로 꼽힌바 있다. 또한 증도는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천사의 섬 신안군에 소속된 하나의 섬이다. 고로 저 조형물은 천사의 섬 증도가 한국인들이 두 번째로 가보고 싶어 하는 섬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셈이다. 이 외에도 증도는 CNN에서 선정한 외국인들이 꼭 가봐야 할 50에도 뽑힌바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다리로 오르기 전, 읽어볼 게 하나 더 있다. 입구에 세워놓은 빗돌들인데, 이곳 증도에 살고 있는 각종 생물들을 빠짐없이 비석에다 새겨놓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과 같이 알고 나서 해변을 걷는다면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시사철 관광객이 몰려드니 푸드 트럭 하나쯤 어찌 없겠는가. 아니 냉장고에 비치파라솔까지 갖춘 의젓한 간이식당이다.

 짱뚱어다리는 철제구조에 나무널판을 댄 모양새다. 만조 때 이 다리에 서면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 들고, 썰물 때는 갯벌 생명체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갯벌에서 2m쯤 위로 놓인 다리를 걷다가 중간에 갯벌로 내려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중간지점 두 곳에는 섬 모양의 갯벌 관찰대도 만들었다.

 오늘처럼 물이 차오르지 않는다면 갯벌체험은 다리에 올라서자마자 시작된다. 짱뚱어다리 주변, 즉 우전해변 북쪽 끝에 약 429(128만평)의 갯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갯벌을 탐방할 수 있도록 갯벌 위에 놓은 다리가 증도의 명물로 자리 잡은 짱뚱어다리인 것이다. 다리를 따라 걸으며(조망대도 따로 만들어두었다) 칠게·농게·짱뚱어 등 다양한 갯벌 생명들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툭 튀어나온 저 부분이 짱뚱어의 머리쯤 되겠다. 짱뚱어는 눈이 툭 튀어나온 철목어(凸目魚)로 머리는 크고 그 아래는 납작하다. 옛날 어린 시절 눈이 왕방울 만하게 튀어나온 친구 녀석들을 짱뚱어라고 놀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짱뚱어의 머리 부분을 지금 넘어가고 있는 셈이다.

 다리에서면 증도의 자랑거리인 갯벌(지금은 물이 넘실거리지만)을 실컷 볼 수 있다.  472m의 짱뚱어다리는 128만 평이나 되는 저 갯벌을 가로지른다.

 뒤돌아보면 한반도를 닮았다는 해송 숲의 절반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50여 년 전 증도 사람들은 북서풍(모래날림)을 막기 위해 우전리 해변에다 소나무(곰솔 또는 해송이라고도 부른다)를 심었다고 한다. 방풍림(防風林) 및 방사림(防沙林)의 용도다. 이 숲이 울창해지면서 그 모습이 한반도의 지형을 빼다 닮아 증도의 명물이 되었다. 그리고 저 숲은 한반도 해송공원이란 예쁜 이름까지 얻었다. 또한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인 공존상을 받기도 했다.

 다리 건너에도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다리를 암시하는 짱뚱어 조형물. 그 옆에는 증도에 명품 자전거길이 나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자전거 조형물을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다. 이름도 생소한 순비기 전시관도 눈길을 끈다. 순비기(herb)는 바닷가 모래땅에서 넝쿨을 뻗으면서 자라는 허브라고 한다. 증도면에서는 순비기로 천연염색을 해서 스카프나 베개 등을 만들어 팔고 있단다.

 ! 우리 동네가 왜 이곳에? 함께 걷던 일행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가수인 강남이 이곳 증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단다.

 철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특산품판매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뭐라도 하나 살까 기웃거리다가 그만 둔다. 5년 전 형제들과 함께 진도를 찾았을 때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산품이라는 (건조)톳을 사서 형제들에게 나눠줬는데, 집에 와서 먹어보니 톳이 아니라 미역 자른 것이었으니 얼마나 속상했겠는가. 그게 우리 집 하나였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특산품 판매장을 지나면 섬이 아닌 듯 섬인 증도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섬답지 않게 너른 들녘이 펼쳐지는 것이다. 탐방로는 이 들녘을 지나 증도면사무소로 간다.

 종점이 코앞. 주어긴 시간까지 30분 정도가 남았으니 먹거리를 찾아볼 자투리시간이 생겼다. 마침 이곳 증도는 짱뚱어탕으로 유명하지 않겠는가. 맛집으로 소문난 안성식당에서는 반주로 낚지볶음까지 추가할 수 있단다. 그런데도 독감과 헤어지지 못하고 빌빌대는 형우군은 술도 없는(독감 때문에 술은 엄두도 못 낸단다) 안줏거리가 웬 말이냐며 손사래를 치는 게 아닌가. 술 없이 짱퉁어탕이라도 먹으면 될 일을 고집이라니...

 날머리는 증도면사무소(신안군 지도면 중동리)

마을을 지나면 상정봉(127m) 앞 비탈진 언덕에 걸터앉은 증도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은 15.79km를 찍는다.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서해랑길 25코스(매당마을-신안젓갈타운)

 

여행일 : ‘23. 3. 11()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과 신안군 지도읍 일원

여행코스 : 매당노인회관매안마을큰부수막들방조제황토펜션명양마을해제·지도연륙교봉황산임도신안젓갈타운(거리/시간 : 17.8km/ 17.99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해제반도의 구릉지와 해안을 이어 걷는다. 덕분에 무안을 상징하는 드넓은 갯벌과 특산물(양파·마늘·양배추)로 덧씌워진 들녘, 그리고 신안의 다도해 풍광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주요 볼거리로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배암 혓바닥과 신안의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한 거북섬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매당마을(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신안(지도·임자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천장교차로(해제면 천장리)에서 왼편 창매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당 마을에 이르게 된다. 초입에 있는 노인회관이 25코스의 시작점이다. 참고로 법정 동리인 창매리 3개 취락(聚落 : 창산·매당·매안) 중 하나인 매당마을은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된다고 했다. 명당이 와전되어 맹당(孟堂)으로, 이후 맨댕이로 불리다가 한자화하면서 매당(梅堂)으로 고쳐졌단다.

 해제면 매당마을(창매리)에서 시작해 지도읍 신안젓갈타운(읍내리)에서 끝나는 17.8km짜리 코스로 해제반도(海際半島)의 구릉지와 해안, 그리고 지도(신안군)의 해안과 임도를 따라 걷는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출발지를 따로 잡아봤다. 시점에서 4km쯤 전방에 위치한 황토골휴게소에서 집사람을 출발시키고, 시점에서 출발한 내가 뒤를 쫓는 형식을 취했다.

 마을회관을 빠져나오자마자 길이 나뉜다. 서해랑길은 도로(창매로)를 놓아두고 바닷가를 향해 내려간다. 25코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작점 표지판은 이정표(황토골휴게소 4.4, 종점 16.7) 옆의 전신주 기둥에 매달려있다.

 서해랑길을 제켜놓고 도로를 따라본다. 동네 수문장을 자처하고 있는 노거수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매화정이란 정자까지 품은 저 팽나무(군의 보호수이다)는 수령이 29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나무 앞에 선돌까지 모셔놓은 걸 보면 마을에서 당산나무로 모신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당산나무로 모시던 버드나무가 태풍에 쓰러지자 나무 옆에서 수호신처럼 서있던 바위를 이곳으로 옮겨놓았단다.

 50m쯤 더 걸으면 광산김씨삼강려라는 제각도 만나볼 수 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배출한 ··의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원래는 각각 다른 시기에 정려로 포상 되었으나 1946년에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호은처사광산김공경모비, ‘회산처사김공강학비’, ‘효자김공치선실적비’, ‘창와김선생유적비도 눈에 띈다. 이 마을에서 학문이 뛰어난 이들을 배출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면 3(측면 1)의 맞배지붕 제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병자호란 때 전사한 김득남(金得男, 1828년에 정려) 충의(忠義) 1891년에 정려를 받은 김성경 및 김철현의 효행(孝行), 김득남 의처 밀양김씨(1870년에 정려) 열행(烈行)은 어디서 엿볼 수 있다는 말인가. 혹시나 해서 제각 곁에 세워놓은 빗돌을 살펴봤으나 관련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제각까지 살펴본 다음 서해랑길로 합류한다. 이때 매당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머우섬이 눈에 들어온다. ‘개구리섬(蛙島)’으로도 불리는데, 동백나무가 무성해서 한때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유지로 변해버렸다나?

 탐방로는 이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배암 혓바닥(또는 뱀머리)’을 바라보며 간다. 매당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와도(蛙島)’ 쪽으로 뻗어나간 지형이 마치 뱀이 개구리()를 잡으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란다.

 갯벌은 온통 푸른 해초로 뒤덮여 있다. 매당마을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고마운 색깔이라 하겠다. 저 갯벌(‘정챙이이란 지명을 지녔다)에서 채취되는 감태가 무안에서 가장 질이 좋다니 말이다. 한때는 한 사람이 하루에 20동 이상씩 따오기도 했단다. 그밖에도 무안에서 가장 질 좋은 석화와 낙지를 잡아 높은 수익을 올린다고 했다.

 방조제를 따라 100m쯤 걷다가 매안마을로 향한다. 이때 허천들이란 들녘을 걷게 되는데 물이 하도 귀해서 비가 내려도 물을 쑥 빨아들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이라고 해서 하등 다를 게 없었단다. 공동우물의 수량이 적어 늘 줄을 서서 사용해야 했고, 가뭄이라도 들면 십리나 떨어진 창산 마을 뒤까지 가서 양동이로 물을 길러 와야 했단다.

 허천들에서도 무안의 특산품인 마늘과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한겨울 맹추위를 굳건히 버텨낸 양배추는 수확이 한창이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2. ‘매안 마을회관 뒤 도로(이정표 : 종점 15.4/ 시점 1.3)에서 특이한 표석을 만났다. 매안마을과 매당마을을 함께 담음으로써 경계석을 겸하게 했다.

 매안마을을 빠져나와 구릉지 위를 걷는다. 이때 하늘이 반, 나머지 반은 바다나 땅이 채워준다는 해제반도의 독특한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20분 정도 걸어 매안마을 구간을 빠져나오면, 탐방로는 또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방조제 위를 걷는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는 경고방송이 들려오지 않겠는가. CCTV가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쓰레기 버릴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란다. 하긴 바닷가라고 해서 무단투기를 하는 못난 놈들이 없겠는가.

 길고 긴 방조제를 걷다보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얘외다. ‘배암 혓바닥이라는 신비로운 풍광을 계속해서 옆구리에 끼고 가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널따란 들녘(‘큰부수막 들 노갱이 들이 잇따라 나온다)이 펼쳐진다. 그 끄트머리에는 창매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창산(蒼山)’마을이 철마산(지형이 말 형상으로 생겼단다)을 배경삼아 들어섰다. 어촌이었을 마을은 이 방조제가 쌓이면서 이젠 산촌으로 변해버렸다.

 서해랑길은 둘레길 나그네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라이더 한 명이 지도로 들어가는 연륙교에 이를 때까지 나타났다 사라기지를 반복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방조제를 1km쯤 걸었을까 무안한옥리조트라는 커다란 펜션단지가 나타난다. 서해랑길은 바닷가에 접해있는 이 숙박시설의 앞마당을 횡단한다.

 참새골황토펜션으로도 불리는 이 숙박시설은 전통 한옥의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데다, 바닷가에 접해있다는 특이성으로 인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는 중이라고 했다. 노래방, 찜질방 바비큐장은 물론이고 널따란 수영장까지 갖췄다.

 펜션 앞 바다에 물이 빠져나가면 드넓은 갯벌은 체험장으로 변한다고 했다. 갯벌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저 길은 체험 참여자들을 위해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잡아온 해산물은 바비큐 장에서 구우면 되고, 반주 삼아 마신 술에 얼큰해졌다면 부대시설인 노래방이라도 찾아볼 일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배암 혓바닥이 얼굴을 내민다. 사두(蛇頭)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최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을 지어 거주하고 있단다.

 참새골펜션에서 8. 탐방로는 24번 국도로 올라선다. 그리고 잠시지만 이 도로(해제·지도로)를 따른다.

 국도에서 만나게 되는 휴게소의 이름도 역시 황토골이다. 해제반도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눈에 띄는 낱말인데, ‘황토가 무안의 자랑거리로 굳어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힐링이 세간의 화두로 굳어지면서 황토의 건강 효용성 또한 부각됐고...

 휴게소에서 우린 무안의 내로라는 자랑거리를 엿볼 수 있었다. 초의선사 탄생지와 노을길 등 서해랑길을 걸어오면서 만난 명소들은 물론이고, 밀리터리테마파크와 전통생활문화테마파크, 도리포, 식영정 등에 대한 자랑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탐방로는 휴게소를 왼편에 끼고 돈다. 그리고는 임도를 따라 또 다른 해안으로 나아간다. 이 구간에서도 우린 해뜰목황토펜션이란 꽤 그럴 듯한 숙박시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역 브랜드(황토)로도 모자라 해뜰목이라는 의미(해돋이)를 추가시켰다.

 임도를 지나서 다시 만난 바다도 역시 탄도만이다. 보여주는 풍광 또한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배암 혓바닥이 노리고 있는 게 개구리섬이 아니라 탄도인 것이다. 뱀이 삼키기에는 너무나 큰 섬일 텐데도...

 이번에도 방조제를 따른다. 이렇듯 무안의 해안은 해남과 함께 간척사업의 명소로 꼽힌다. 덕분에 들쭉날쭉해야만 할 리아스식 해안이 직선으로 변해버렸다. 혹자는 자연스러운 멋이 사라져버렸다며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그 또한 삶의 한 방편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양월리로 들어선 탐방로가 아까와는 또 다른 풍경을 선보인다. 창매리 해안을 장식해오던 와도(개구리섬)가 사라진 대신, ‘밤섬(栗島)’이 새로운 풍경화의 화룡점정으로 들어앉았다. 물이 들면 밤송이처럼 보인다는 꼬맹이 섬인데, 풍수적으로는 자물쇠의 형국을 하고 있단다.

 율도를 향해 쭉 뻗어나간 저 길도 노두(路頭)라 부를 수 있으려나? 갯벌에 놓은 어민들의 작업도로 말이다.

 방조제를 10분쯤 걷다가 명양마을(이정표 : 종점 10.6/ 시점 6.1)’로 들어간다. 해제반도의 끝에 위치한 마을로 명양이란 지명은 마을 옆을 흐르는 해협(지도와의 사이)의 물살이 거센데서 유래됐다.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돌목처럼 커서 울두 또는 울띠라 불리다가 한자화하면서 명양(鳴洋)이 되었다.

 마을을 관통해 해제·지도로로 올라섰다. 이 구간에서 우린 산들밥상이라는 소고기 샤브샤브전문점을 만날 수 있었다. 무안지역에서는 맛집으로 소문났다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이곳 해제반도는 전형적인 구릉지. 농사를 지을 물이 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 방편으로 만들어진 게 둠벙’, 얼마나 물이 절실했으면 한 방울의 물도 아까워 바닥에 비닐까지 깔았을까 싶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5.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제반도와 지도를 잇는 연륙교(내 눈에는 방조제로 보였다)가 얼굴을 내민다. 1975년 저 다리가 놓이면서 무안군과 신안군이 서로의 어깨를 맞대게 됐다. 300m 길이의 다리 2개가 놓였는데, 해안 쪽 다리(제방)는 농·어민의 생활도로로 쓰이며 안쪽은 국도가 지나간다.

 우리가 건너고 있는 이 해협은 2의 울돌목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고 한다. 좁은 해협으로 칠산바다와 목포앞바다의 물이 서로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난파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는 해제면소재지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나? 그게 이 연륙교가 놓이면서 이젠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건너편의 또 다른 연륙교로는 국도 24호선이 지나간다. ! 반대편 연륙교도 이곳처럼 둑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름만 다리이지 실제는 방조제인 것이다. 그런데도 둘 사이의 공간을 객토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고 싶었을 텐데...

 물살이 거세다는 것은 물길이 깊다는 증거다. 그래선지 썰물 때인데도 불구하고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자동선착장(진변마을 쪽에 하나가 더 있다)의 배들도 하시라도 떠날 채비를 마쳤다. !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자동선착장에는 임자-지도-목포항을 운항하는 여객선이 들렀다고 했다. 300m 거리의 무안 해제를 연결하는 나룻배도 수시로 다녔단다. 하지만 세월의 뒤안길에 선 지금은 어민선착장으로 겨우 항구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도로 들어서니 팔각정이 잠시 쉬어가란다. 진변마을 주민들을 위한 쉼터겠지만,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도 최고의 쉼터가 되겠다.

 다리 건너 진변마을에 이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직진은 지도읍시가지로 가는 길, 서해랑길은 태천마을 방향(왼쪽) 동천길을 따른다. 하나 더, 삼거리 오른편에는 지도체육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300m쯤 걷다가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효지방조제를 따라 누동마을 쪽으로 간다.

 둑길을 걷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밤섬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매령산과 바다를 향해 쭉 뻗어나간 배암 혓바닥을 배경삼은 풍경이 아까보다 훨씬 고와졌다. 섬의 주위를 푸른 바닷물로 덧칠해놓은 덕분이지 싶다.

 옥색 바다에 떠있는 가두리양식장도 잠깐의 눈요깃거리가 된다. 행여나 바람이라도 거세질세라 주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근심의 근원이기도 한 시설이다. 섬사람들에게 바람은 곧 풍파다. 어떤 삶에 풍파가 없으랴.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바람에 맞서 싸우기보단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풍요를 가져오게 되었고 말이다.

 오른쪽으로는 간척사업이 빚어놓은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즈음 우린 중산동과 효지마을 등 자동리에 속한 자연부락과 함께, 봉황산과 선봉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서해랑길은 두 산의 사이로 난 임도를 따른다.

 눈이 호사를 누리며 600m쯤 걷다가 효지2저수지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다와 헤어져 내륙으로 파고든다.

 마을(‘쩍골마을이 아닐까 싶다)을 가로지르다 지극히 예스런 풍경을 만났다. 돌과 흙으로 벽을 쌓아올린 다음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장식이라곤 틀도 없는 문이 전부, 그 소박함이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줬나 보다.

 마을을 빠져나와 또 다시 동천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누동마을 방향(왼쪽)으로 70m쯤 걷다가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부터 서해랑길은 3km쯤 되는 임도를 따른다.

 봉황산(165.5m)과 선봉산(121.5m) 사이로 난 임도는 순하기 짝이 없었다.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다 경사까지 완만했기 때문이다. 하긴 임도의 길이가 3.1km나 되는데 반해, 가장 높은 지점의 높이가 101m에 불과하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는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곳곳에서 트이는 조망 덕분에 다각적으로 펼쳐지는 지도의 풍경을 두루두루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농업회사 법인인 하늘애‘. 그 뒤로 보이는 게 선봉산인데 121m 높이의 산답지 않게 우뚝 솟아올랐다.

 태천리 해안에 설치된 풍력발전기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 뒤로는 다도해가 펼쳐진다. 비파섬과 선도, 병풍도일 것이다. 봉황산 임도는 이렇듯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내륙에는 오룡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자동리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자동·자서·효지·오룡·중산동) 중 하나로, ‘오룡(五龍)’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용 다섯 마리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 꿈틀거린다는 경칩(驚蟄)이 지난지도 벌써 5일이나 됐다. 남녘땅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진지도 이미 오래, 산수유축제와 매화축제는 이미 시작됐고, 다 다음 주쯤이면 벚꽃축제도 열릴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들꽃 하나쯤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겠는가.

 40분이나 걸어서야 봉황산 임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선 도로변 텃밭에는 양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확이 한창인 농부 앞에서 우린 부부싸움까지 할 뻔했다. 트레킹을 마치려면 아직도 5km 이상 걸어야하는데 양배추 한 포기 얻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귀경해서 가장 질 좋은 양배추를 사드리겠노라며 달랬지만 자칫 무거워진 배낭을 짊어지고 쩔쩔 맬 뻔했다.

 이 뭣꼬?’ 갈대처럼 생겼는데 꽃은 영 딴판이다.

 400m쯤 도로(동천길)를 따르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해안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길고 긴 오룡방조제의 둑길을 걷는다.

 이때 천사섬 신안의 진면목을 살짝 엿볼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섬들이 바다에 늘어섰다. 소도·연도·마산도·고이도·매화도 등등 그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숨이 차오른다.

 오른편에는 오룡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겨난 간척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들녘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오룡마을의 앞에 펼쳐져 있으니 오룡 들판쯤으로 해두자.

 농자천하지대본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나 보다. 들녘의 많은 부분을 태양광발전소가 차지하고 있었다. ‘식량 안보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하지만 옛 사람들은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그러다보니 일직선으로 뻗어나갔어야 할 방조제가 저렇듯 바다를 향해 배불뚝이처럼 밀고 나갔다.

 방조제와 들녘 사이에는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들녘 곳곳에는 저수지도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가 보다. 길고 긴 가뭄은 논바닥을 저렇듯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버렸다.

 반대편의 갯벌에는 또 다른 문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도 주변의 갯벌은 농게가 주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저 갯벌은 농게 가족의 삶의 현장이자 삶의 흔적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10, 배불뚝이처럼 튀어나온 광정리 백양들을 지나자 종점인 지도시가지가 더 또렷해졌다. 이제 종점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갯길이 또렷해졌다. ‘생명의 땅 갯벌을 보듬은 실핏줄로, 바닷가 사람들은 갯벌과 마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저 실핏줄을 통해 자연과 소통해왔다.

 신안의 갯벌은 생명의 땅으로 알려진다. 그만큼 많은 식생을 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저 갈매기들도 그중 일부분을 담당할 게고 말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지도읍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를 굳힌 거북섬이 눈에 들어온다. 본도와의 간극을 없애버린 긴 목교가 눈길을 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35. 신안젓갈타운에 도착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25코스의 종점이다. 하지만 그 전에 거북섬부터 둘러보자. 신안군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다는데 거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거북섬은 해상탐방로가 놓임으로써 관광지로 변했다. 썰물 때, 그것도 갯벌에 무릎까지 빠질 각오를 해야 들어가 볼 수 있었던 섬이, 마법 같은 나무다리를 놓아 밀물 때도 섬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500m쯤 되는 거리를 부담스러워 할 필요도 없다. 중간 중간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쉬어가면 될 일이다.

 인생샷을 원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갯벌의 한가운데, 그것도 바닷물에 최대한 다가간 곳에 그네를 설치해 푸른 바다를 배경삼아 그네를 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갯벌 차지가 됐다. 밀물 때가 가까워졌는지 움푹 팬 갯고랑 사이로 조금씩 물이 차오르면서 농게와 짱뚱어가 부산하다. 또 다른 풍경도 보인다. 무리를 지어 말라비틀어진 저 식생들은 대체 뭘까? 무안·신안의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칠면초는 분명 아닌데...

 6분 남짓 걸어 거북섬에 이른다. 눈에 들어오는 섬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거짓말 좀 보태면 주먹만 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품은 내력만큼은 심상치가 않았다. 탐방로 전체에 식생매트를 깔았음은 물론이고, 해양생물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편안한 쉼터도 만들어두었다.

 길 끝에서 만난 섬은 귀여운 거북이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실제로 거북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지 거북이 조형물에다 섬의 지도를 그려 넣었다. 거북섬에도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기본은 277m 길이의 순환코스(해안을 따를 수도 있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정상에 올라앉은 정자에 들러 피톤치드를 들이키며 힐링을 만끽할 수도 있다.

 거북섬에서의 조망도 거침이 없다.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묵화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부근은 특히 해넘이가 곱다고 소문났다. 밀물 썰물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된단다. ‘놀멍 때리기 딱 좋다나? 그래선지 해변에 저런 의자를 꽤 여럿 놓아두었다.

 관광지로 육성했으니 어찌 포토죤이 빠지겠는가. ‘천사섬이란 신안군의 브랜드처럼 수많은 섬들을 액자 속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거북섬을 빠져나오자 신안젓갈타운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전국 최대의 젓새우 생산지이자, 국내 최초의 천일염 생산지인 신안군에서 만들어놓은 젓갈 전문시장이다. 젓갈 등 수산물 판매장 20개소와 젓갈의 저장·숙성을 위한 저온저장시설, 전시·홍보관 등이 갖춰져 있다.

 젓갈타운 앞에는 신안 갯벌의 상징인 농게를 형상화한 대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붉은 발 농게는 한쪽 집게발이 자신의 몸집만큼 커다란 게 특징으로 농발이, 황발이 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암컷은 양쪽 집게의 크기가 똑같지만 매우 왜소하다. 수컷은 한 쪽 집게는 암컷과 같지만 다른 쪽은 거대하여 갑각 길이보다도 더 길다.

 지도갯벌 글자조형물과 신안갯벌의 표석도 보인다. 신안 하면 역시 갯벌이다. 다도해형 갯벌로 불리는 신안갯벌은 1,100.86 면적의 갯벌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을 시작으로 국내외를 비롯한 수많은 보호지역 지정을 통해 갯벌을 보호·관리해 왔다. 1호 도립공원·습지보호지역·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람사르습지 등등. 이를 알리고 싶었음이리라.

 날머리는 송도교(신안군 지도읍 읍내리)

몇 걸음 더 걸으면 지도와 송도를 잇는 연도교인 송도교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7.99km이니 꽤 빨리 걸은 셈이다. 4km이상 앞에서 출발시킨 집사람을 따라잡으려 서둘렀던 게 원인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