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64-5코스(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합덕수리민속박물관)
여 행 일 : ‘25. 2. 22(토 )
소 재 지 : 충남 당진시 면천면·순성면·합덕읍 일원
여행코스 : 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아미산→몽산→구절산입구(실제 출발)→나산마을회관→둔군봉→석우리마을회관→합덕수리민속박물관(거리/시간 : 19.3km, 실제는 ‘구절산입구’부터 14.85km를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총 6개) 중 다섯 번째 구간을 걷는다.
▼ 들머리는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충남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서해안고속도로 면천 IC에서 내려와 아미로(609번 지방도)를 타고 당진방면으로 3km쯤 들어오면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5코스) 안내도는 임도를 따라 300m쯤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아미산 산림욕장’ 앞에 세워져 있다.
▼ 죽동마을에서 시작 당진 내륙의 산과 들을 누비다 합덕읍에 이르는 19.3km짜리 구간. 산길을 9km나 타는데다, 높지는 않지만 몽산과 둔군봉은 정상까지 찍어야하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런데도 난이도는 별이 3개(전체 5개), 산길이 버겁지는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종점에 있는 ‘합덕제수변공원’과 ‘합덕성당’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09 : 00 – 09 : 10. 트레킹을 나서기 전, 출발지(방문자센터)에서 당진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충정사(忠貞祠)’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고려 말의 무신이자 교동인씨(喬桐印氏) 중시조인 인당(印璫 ?~1356)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 계단을 오르면 경모제(敬慕齋)가 맞는다. 조상을 공경하고 숭모하는 ‘교동인씨’ 후손들의 정성이 집약된 재실이다. 경모제 앞에는 석성 부원군 인당장군추모비가 있고, 맞은편에는 첨의평리사사석성부원군인당장군추모비(僉議平理司事碩城府院君印堂將軍追慕碑)라는 더 큰 빗돌이 있다.
▼ 외삼문인 정례문(整禮門)을 들어서면 충정사(忠貞祠)가 반긴다. 인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인당은 고려 충렬왕 때 태어나 공민왕까지 4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일생 동안 왜구와 홍건적을 무찔렀으며 서북면병마사 때는 쌍성(雙城)을 수복하고 파사부(婆娑府) 3참(站)을 무찔러 참지정사가 되었다. 이에 원나라 황제가 국경 침입을 구실로 80만 대군으로 위협해 오자 공민왕이 인당으로 하여금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응원군을 보냈다. 이 싸움에서 인당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도 하고, 원나라의 문책 위협에 직면한 공민왕을 위해 인당이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인당 장군의 묘는 개성에 있고, 이곳에는 사당만 있다.
▼ 09 : 20 – 09 : 40. 64-5 코스도 조금 줄여 걷는 대신, 당진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인 ‘면천읍성’과 ‘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물론 산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면천읍성(沔川邑城)에 도착하니 커다란 빗돌이 반긴다. 그런데 면(面)이 아닌 ‘군(郡)’의 터(趾)란다. 맞다. 이곳 ‘면천면’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품은 지역으로, 과거 당진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백제 시대에는 '혜군(兮郡)', 통일신라 때는 '혜성군(兮城郡)'으로 불리었다. 고려와 조선 때도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충청도 조운(漕運)의 중심지로 전국에서 운반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1477년(성종 8) 창고가 범근내에서 공세곶으로 이전되면서 마을은 활기를 잃었다. 참! 곁에 있는 또 다른 빗돌은 시경의 한 구절에서 ‘면천’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적고 있었다. <면피류수 조종우해(沔彼流誰 朝宗于海), 넘쳐흐르는 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네>
▼ 면천읍성은 1439년(세종 21) 서해안으로 침입해오는 왜구를 대비하여 쌓은 평지읍성이다. 조선후기까지 이 지역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다. 당진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현장 중 하나였으며, 당진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치성과 옹성을 더한 전체 둘레는 약 1.5km, 순천의 낙안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고 쌓았다. 하지만 전국의 읍성들이 그러하듯이 유실되거나 철거되어 간신히 형태만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7년부터 복원을 시작 남문을 중심으로 일부 구간이 옛 모습을 되찾았고, 객사인 조종관,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작은 정자인 군자정 등이 새로 지어졌다.
▼ 면천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豐樂樓). 둘레 1,558m의 읍성은 적대 7곳, 옹성 1곳, 여장 56곳을 두었다. 안에는 동헌, 객사 등 8개의 관아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인 풍락루는 말 그대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붕괴 위험으로 철거(1943년)되었던 것을 2007년 사진자료를 토대로 2층 누각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했다.
▼ 객사인 조종관(朝宗館).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청에 전패와 궐패를 모셔 지방관이 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기도 했다.
▼ 조종관 앞에는 한 눈에도 심상치 않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리한다. 수령 1,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비롭고 웅장하며 탄성이 절로 난다. 2016년 천연기념물(제551호)로 지정되었는데,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두 나무가 지지대에 의지한 채 서있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면 초록이파리로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들면서 환상적인 미태를 자랑한단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과 얽힌 전설도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복지겸 장군이 병을 앓자 그의 딸 ‘영랑’이 아미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고, 아미산에 활짝 핀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면천면 성상리)의 물로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다하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병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빚어진 술이 바로 ‘면천 두견주’이며, 그때 심은 은행나무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단다.
▼ 은행나무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 말 지군사 곽충령이 못을 파 연꽃을 심었고, 1803년 면천군수 유한재가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정을 세워 ‘군자정(君子亭)’이라 불렀다. ‘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면천읍성은 ‘내포 문화숲길’의 주요 기점이기도 하다. 내포불교순례길(6코스), 백제부흥군길(7코스, 8코스), 내포동학길(1코스) 등이 이곳을 출발 또는 도착 지점으로 삼고 있다.
▼ ‘면천 100년 우체국 - 카페가 되다’. 천년 묵은 고을답게 면천에는 옛 모습을 오롯이 품고 있는 공간들이 많다. 슬레이트지붕을 뒤집어 쓴 ‘미인상회’가 대표적인데 일제강점기 때 우체국이었던 건물에 차린 카페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저곳에는 옛 우체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태원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법한 전화기와 낡은 우체통 등을 진열해 놓았다. 시간여행을 돕는다고나 할까? 하나 더. 우체통은 그 기능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카페 측에서 매월 마지막 날에 원하는 주소지로 편지를 부쳐준단다. 일종의 ‘느린 우체통’인 셈이다.
▼ 60여 년 전에 지었다는 2층 가정집에는 독립서점 ‘오래된 미래’가 들어섰다. 대형 서점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립출판물을 상당수 갖추고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옛 막걸리집을 개조했다는 ‘진달래상회’도 눈길을 끈다. 소품 상점이라는데, 복지겸 장군의 전설에 나오는 두견주를 브랜드로 삼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둘 모두 문을 열기 전이라서 외관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 문화 고을답게 버스정류장도 시(詩)로 꾸며졌다. 이밖에도 면천에는 볼거리가 꽤 많다. 군현(郡縣)이었으니 ‘향교’가 있었을 것은 당연, 향교 앞에는 연암 박지원이 재임하면서 조성했다는 연못 ‘골정지’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북학파 친구 홍대용의 시에서 따왔단다)’이라는 정자가 있다. 면천의 또 다른 우체국은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이 되었고, 농협의 창고였던 건물은 리모델링 후 청년창업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 09 : 45 – 09 : 55. 다음은 ‘무공사(武恭祠)’이다. 면천읍성에서 ‘송악읍’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 生歿年代 미상) 장군의 사당이다. 무공(武恭)은 복지겸의 시호(諡號)이다.
▼ 복지겸은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로 고려를 건국한 4명의 1등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태봉(奉封)의 마군(馬軍) 장수로 있다가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배현경,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 뒤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주살하였으며 임춘길(林春吉)의 역모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994년(성종 13) 태사로 추증되었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원래는 제단, 신도비, 태사사(太師祠)만 있었는데 2008년의 정비사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인 무공사를 중심으로 홍살문, 내·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 후손들이 공부를 하거나 제사에 관한 일을 보는 추원재와 무영사, 숭모당, 신도비, 준공비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매년 복씨 문중에서 음력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 홍살문과 창의문, 정충문을 차례로 지나면 복지겸 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무공사(武恭祠)가 나온다.
▼ 묘에서 내려다 본 유적지. 사당 앞에 내·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이 나란히 서있고, 마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추원재이다. 오른쪽에 있는 무영사는 내삼문에 가려져있다.
▼ 묘는 뒤편 언덕에 있었다. 그런데 그 흔한 빗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복지겸의 말년 행적을 찾을 수 없는데다, 그의 죽음 또한 안개 속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럴듯한 봉분에다 석물까지 갖춘 번듯한 묘역(墓域)이지만 결국에는 허묘(虛墓)인 것이다.
▼ 10 : 01. 실제 출발지인 구절산입구 버스정류장(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아미산과 몽산을 올랐었기에 이를 핑계 삼아 산길 구간을 생략했다. 대신 산악회의 도움을 받아 당진시의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 면천읍성과 무공사(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왔다.
▼ 10 : 02. ‘원백석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두루누비 앱이 시점(아미산 산림욕장)으로부터 5.72km쯤 떨어진 곳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백제부흥군길(7코스)’이기도 하다. 합덕수리박물관에서 둔군봉과 구절산을 거쳐 면천읍성에 이르는 17.2km짜리 여정으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서기 660년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이 참전했던 국제전이기도 했다.
▼ 이정표가 ‘내포 문화숲길’ 중 ‘백제부흥군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내포지역의 고대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백제'다. 한성백제 시기를 거쳐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내포지역은 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백제의 영토로 정체성을 지켜왔다.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백제부흥세력은 내포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백제부흥군길은 이런 역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 뒤돌아본 풍경. 순성로(619번 지방도)와 함께 가는 수로(水路)가 고가도로를 연상시킨다. 고풍에 조형미까지 더해진 유럽의 수도교만큼은 아니어도 멋진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하긴 동급이었다면 ‘퐁 뒤 가르(가르 교)’나 세고비아의 ‘수도교’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겠지?
▼ 백제 부흥군이 되어 나지막한 구릉지를 넘는다. 그러자 망국의 병사들이 누비고 다녔을 들녘이 널찍하니 펼쳐진다. 백제 부흥전쟁의 시발점이 예산군(대흥면)의 임존성(任存城)이었고, 그 중심은 홍성군(장곡면)의 주류성(周留城)이었으며, 백촌강(白村江) 전투의 현장이 당진시(석문면·고대면)의 앞바다였다니 말이다.(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이즈음 낙곡을 주어먹고 있는 엄청난 기러기 떼를 만났다. 저 먼 시베리아 대륙에서 훨훨 날아 한반도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이다. 대기는 차고 무쇠빛 하늘이 일상인 겨울이다. 하지만 반가운 생명들을 만났으니 이 정도 추위쯤이야 못 참겠는가.
▼ 길은 드넓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토물들’과 ‘대리들’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인데,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擇里志)에서 말한 내포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오·병자의 두 난리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외지지만, 땅이 평평한데다 기름져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백제 부흥전쟁의 중심이었지만 이중환의 눈에는 마냥 평화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 10 : 18. 백석리(白石里) 앞 도로변에는 작은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와 벤치를 구비해 마을 주민들의 쉼터도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농사일로 바쁜 주민들이 이곳까지 운동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 10 : 21. 체육공원에서 만난 개울 수준의 ‘남원천(南院川)’ 지류를 따라가다 아예 건너버린다.
▼ 다리(이름이 없었다)를 건넌 다음에는 개울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 10 : 26. 이번에는 ‘남원천(南院川)’의 본류를 건넌다. 이 다리(이정표 : 둔군봉 3.96km/ 구절산입구 2.30km)도 역시 이름이 없었다. 하나 더. 남원천은 면천면 ‘몽산’의 남쪽 계곡에서 발원, 순성면·신평면·우강면의 들녘을 적셔주며 동진하다 우강면 부장리에서 남원포(南院浦)를 지나 삽교천으로 유입되는 23.24km 길이의 하천이다.
▼ 다리 건너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몽산’ 아래서 백제부흥군길(7코스)을 만난 이후 줄곧 의지해 간다. 그렇다고 일치하지는 않는데 이곳이 그중 하나다. 이정표(백제부흥군길)가 왼쪽(둑길)을 가리키는데 반해, 서해랑길의 앱은 오른쪽으로 가라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 누루누비 앱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둑길을 이용해 남원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 이때 우리가 생략해버린 ‘아미산’과 ‘몽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참고로 면천의 진산인 몽산(蒙山 299.4m)에는 읍성의 외곽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된 석성인 몽산성이 있다.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싸웠던 백제 부흥전쟁의 전략적 요충지로 면천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산이다.
▼ 잠깐의 부주의로 길을 잃기도 했다. 농로를 이용해 도로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아미산과 몽산을 카메라에 담다가 그만 들머리를 놓쳐버렸다.
▼ 10 : 36. 우여곡절 끝에 ‘남원로(2차선 도로)’로 올라섰다.
▼ 서해랑길은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이별을 고한다. 그곳에 ‘나산리(羅山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어르미산, 즉 어라산(於羅山, 98m)에서 이름을 빌려왔다는 마을이다. 회관 앞 빗돌은 그런 마을의 유래를 전해준다. 그 어라산을 지금은 ‘함봉산’이라 부른다나?
▼ 나산리는 100m 내외의 산능선 사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산록지에 가옥들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 서해랑길을 그런 산간 마을을 향해 간다.
▼ 10 : 40.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난 임도로 들어선다.
▼ 임도는 산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 길을 부흥군의 심정으로 걸어본다. 지체 높은 자들이야 죽거나 투항해 제 살길을 찾았겠지만, 전쟁에서 패한 군졸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았겠는가. 참고로 백제 부흥군은 동지끼리 서로 죽이는 내분으로 패망했다. 660년, 소정방(蘇定方)의 주력군이 귀국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주류성으로 이동해 총사령부로 삼고, 662년 일본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귀국하자 백제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복신이 승장(僧將)인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임존성의 수비장이던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 흑치상지가 당나라 병력을 이끌고 임존성을 함락시켰으니 부흥군 스스로가 자멸한 셈이다.
▼ 10 : 49. 고갯마루는 순성면과 합덕읍의 경계다. 서해랑길은 이 고갯마루에서 (왼쪽)능선을 따른다. 그 산길을 걸으며 부흥전쟁의 마지막을 떠올려본다. 백제부흥군의 총사령부였던 주류성은 663년 9월 함락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부흥군의 당시 심정을 되짚어보자. <주류성이 항복하고 말았구나. 무어라 할 말이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 다시 와 뵐 수 있겠는가.>
▼ 서해랑길은 능선을 따라간다. 잘 닦여있지는 않았지만, 길을 찾아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 이 구간. 그러니까 남원천에서 ‘백제부흥군길’과 헤어지고부터는 그 어떤 이정표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길이 나뉘는 곳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애매하다싶으면 어김없이 가이드리본을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둔군봉의 높이가 137.3m에 불과하다보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급경사 오르막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 가끔가다 만나는 응달은 걷기여행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연일 계속되던 맹추위가 살얼음을 만들었는데, 어젯밤 내린 눈이 그 위를 살짝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엉덩방아를 찧는 일행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는데, 큰 부상을 당한 이들이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 가끔은 조망이 트이기도 했다. 당진의 터줏대감인 아미산과 몽산은 물론이고 그 오른편에 들어앉은 순성면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당진시의 고층 아파트들도 자신도 있다며 능선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다.
▼ 11 : 15. 그렇게 한참을 걷자 능선이 푹 꺼진다. 숲 사이로 민가가 보이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이던 산길은 이곳에서 정비한 흔적을 보인다. 자연석으로 계단을 만들었는가 하면, 길의 폭도 많이 넓어졌다.
▼ 잠시 후 어느 문중의 묘역을 지나기도 한다. 둔군봉 구간에서는 이런 묘역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지기(地氣)가 솟아나는 명당이 많은 산이라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 11 : 23. 묘역을 지나자 길은 한수 더 뜬다. 아예 임도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벚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서있는 것이 봄이면 상춘객들로 들끓을 수도 있겠다.
▼ 11 : 26 – 11 : 32. 오랜만에 보는 이정표(둔군봉 1.15km/ 구절산입구 5.11km)가 반갑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임도와 헤어져 오솔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난 이정표의 방향을 잘못 읽은 탓에 잠시지만 임도를 따라가기도 했다.
▼ 그러다 만난 저 시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지킬 게 얼마나 값나가는지 고화질 카메라로 녹화하고 있다며 겁까지 잔뜩 주고 있었다.
▼ 이어지는 산길도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울창한 숲길을 걷는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구간이다. 조망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 11 : 47. 벤치는 물론이고 정자까지 들어앉힌 쉼터(이정표 : 둔군봉 0.53km/ 구절산입구 5.74km)도 만날 수 있었다. 산행에 지친 걷기여행자들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시설이라 하겠다.
▼ 이곳에는 ‘도곡리 사지(寺址)’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도곡리에 두 개의 절터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하나는 마을 뒷산의 남쪽 기슭에 밭으로 쓰고 있는 300여 평의 터이며, 다른 하나는 둔군봉의 북쪽능선 서향사면 중상단부에 위치했단다. 해당 사지에서 다수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나?
▼ 530m만 더 가면 둔군봉 정상이라던 쉼터(寺址) 이정표의 안내와는 달리 산길은 꽤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11 : 58. 변화 없는 산길이 지루해질 즈음 ‘둔군봉(屯軍峰 137.3m)’에 올라섰다. 이름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산이다. 후백제 때 면천 쪽을 향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선 말기 동학혁명 때는 관군이 주둔했다고 한다.
▼ 하지만 군대를 주둔시킬만한 공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소대 규모의 참호나 들어설만한 공터에 정자 하나만 달랑 지어져 있을 따름이다. 견훤이 고려와 싸우기 위해 쌓았다는 성동산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6.60km/ 구절산입구 6.30km)가 가리키는 합덕수리민속박물관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나무계단이 만들어내는 나선형의 문양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구간이다.
▼ 하산 길도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걷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 12 : 24. 그렇게 내려선 면천로(70번 지방도)는 그냥 횡단해버렸다. 횡단보도가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다, 신호등까지 없어서 안전하게 건너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이다. 그래선지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5.19km/ 둔군봉 1.43km)도 곧장 건너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 12 : 28. 농로를 따라 200m쯤 걷다가 ‘석우2교’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석우천’의 둑길을 타고 하류로 내려간다. 합덕읍 석우리에서 발원 동남쪽으로 흘러 옥금리에서 삽교천으로 합류되는 길이 9.5km의 지방하천이다.
▼ 개울 건너에는 ‘합덕산업단지’가 있다. 29만 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일반산업단지인데 경기 악화 및 분양시장 위축,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인해 개발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 12 : 33. 석우천을 따라 걷다보면 심심찮게 다리를 만난다. 그 첫 번째 다리가 ‘석우교’이다.
▼ 다리 근처에 ‘석우리(石隅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돌모루’, 마을 모퉁이에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석우리로 변했단다.
▼ 계속해서 ‘석우천’을 따라간다. 도중에 지류를 합친 때문인지, 물길은 아까보다 많이 풍성해졌다.
▼ 12 : 46. ‘운곡교’로 석우천을 건넌다. 예당평야로(32번 국도)의 진출입로와 예덕로(40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다.
▼ 교차로답게 오가는 차량 또한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신호등은커녕 횡단보도조차 없으니 문제다. 안전은 오롯이 걷기 여행자 몫이라는 얘기다.
▼ 예당평야로의 ‘운산2교’는 교각 사이로 지나간다. 그늘진 곳에는 평상이 놓여있었다. 인근 주민들의 참새방앗간 노릇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 석우천은 이곳에서 또 다른 지류를 보태면서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석우천은 저런 지류들을 여럿 보탠다고 했다. 두산백과는 원석우천·소소천·북리천·박골천·쑥고개천·남리천 등 6개의 소하천을 나열하고 있는데, 어디를 이르는 지명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 길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나무 한 그루 없던 길이 아름드리 벚나무가 일렬로 도열해 있는 풍치 넘치는 길로 변한 것이다.
▼ 13 : 01. ‘운산로’가 지나가는 ‘성동교’는 ‘⊂’자형으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다리를 건너지는 않는다. 초입에서 도로를 횡단한 다음 계속해서 강둑을 따라간다.
▼ 왼쪽, 들녘 너머에는 합덕시가지가 놓여있다. 합덕은 본래 ‘부곡(部曲)’이었다. 고려의 향·소·부곡은 노비와 양인 사이의 피차별 계층을 의미한다. 1298년(충렬왕 24), 고을 사람 황석량이 원나라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합덕현’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895년(고종 32) 면천군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에는 읍(邑)으로 승격되면서 면천면보다 오히려 더 번화해졌다.
▼ 13 : 17. 보행자전용의 다리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수문(水門)을 만난다. 합덕제(合德堤)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시설이지 싶다. ‘합덕제 수변공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 두루누비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란다. 하지만 나는 수변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을 것을 권해본다. ‘연꽃원’과 ‘백련지’, ‘호중도’같은 합덕제 수변공원의 주요 볼거리들을 눈에 담아가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둑길을 따라봤자 건조하기 짝이 없는 석우천과 다리(연호교·연지교) 말고는 볼만한 게 없다.
▼ 합덕제는 연지, 혹은 연제라고도 불리는데 원래는 합덕평야를 관개하던 저수지였다. 길이 1,771m에 저수면적이 103ha나 되는 규모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농경지로 변해 제방만 길게 남아있다. 합덕제의 역사는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둔전을 개간하고 12,000명의 둔병과 말 6,000필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에 의해 저수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나? 제방의 서쪽 끝부분에 1800년(정조 24)에 세운 개수비와 그 후에 세운 중수비가 있다고 했으나 찾아보지는 못했다.
▼ 13 : 27. ‘호중도’란다. 호수 속에 있는 섬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공섬인 모양인데 정자를 짓고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산책로를 만들어 주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 백련지 쪽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연꽃 공주와 개구쟁이 개구리 조형물이 연못의 정체를 넌지시 알려준다.
▼ 하지만 춘래불사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요즘이니 연꽃이나 개구리를 만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저 철새 떼를, 큰고니를 위시한 수많은 종류의 철새들이 연못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다. 그 종류나 수가 웬만한 동물원보다도 더 많아 보인다.
▼ 백련지의 수변을 따라간다. 연꽃원의 사잇길이나 호중도 산책로를 이용해 종점인 ‘수리민속박물관’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 수변공원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알찬 볼거리를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 이때 철새 떼로 한가득인 ‘백련지’가 자신의 속살까지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합덕제는 1900년 초까지는 하트 모양의 제를 갖고 있었단다. 하지만 1960년 초 합덕제가 폐지되면서 농지로 변했으며, 석우천이 합덕제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저수지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다 2005부터 당진시에서 제방을 복원하고 야외전시장을 조성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 13 : 37. ‘연지교’ 앞(이정표 : 수리민속박물관 0.51km/ 둔군봉 6.12km)에서 석우천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합덕제의 제방을 따라 종점인 ‘합덕수리민속박물관’으로 간다. 하지만 저수지가 사라지고 없는데다, 둑 위로 널찍하게 길이 나있어 제방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 이 구간은 ‘버그네 순례길’로 함께 쓰는 모양이다. 당진의 천주교 성지들을 하나로 이어놓은 일종의 순례길인데, 한국 천주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이 길은, 영성 여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것으로 알려진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합덕 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이자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버그내에서 유래했다.
▼ 제방 오른쪽에는 ‘농어촌 테마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합덕제는 조선시대 3대 방죽으로 전시에는 국가의 보급기지 평시에는 왕실의 곡간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1960년대 예당저수지 축조와 함께 농경지로 변해버린 합덕(연호)방죽을 당진시에서 7만평 규모로 정비해 연꽃방죽과 수리박물관, 생태체험센터, 농촌테마공원 등을 조성했다.
▼ 공원에는 초가정자와 디딜방앗간, 초가체험동, 분수대 등을 지어놓았다. 또한 합덕제의 기원 등 저수지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판으로 만들어 내방객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 13 : 45 – 13 : 55. ‘합덕성당’은 테마공원 뒤 언덕에 있었다. 합덕성당은 공세리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내포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공동체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 보다도 극심했으며, 그로인해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새로운 믿음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천주교는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이 됐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됐다.
▼ 성당은 정면의 종탑이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건물의 전면에는 3개의 출입구와 3개의 창이 있는데 그 상부는 모두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되어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의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으며, 창의 아래 부분과 종탑의 각 면에는 회색벽돌로 마름모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역광이라서 facade는 제대로 찍지 못했다)
▼ 성당 후면. 벽돌로 지은 저 건물은 1929년 페랭(Perrin, P., 白文弼) 신부가 지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벽돌조인데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제145호)로 지정되었으며, 각종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 tvN ‘정년이’의 촬영지인 성당 내부는 아치형 천정에 벽돌로 쌓은 열주가 좌우로 늘어서 있다. 지역 성당, 그것도 옛날에 지어진 탓에 그리 넓지는 않다. 화려하지 않은 스테인드글라스 등 전체적으로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 뒤뜰에는 네 분의 순교비와 여섯 분의 순교자 묘가 있었다. 성 황석두 루카(1813-1866, 괴산군 장연면 출신으로 페롱권 신부와 성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서번역·출판 등의 일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에서 참수 당했다). 백문필 비리버(1885-1950, 합덕성당을 지은 분으로 한국전쟁 때 피랍 살해됐다)신부, 윤복수 레이몬드·송상원 요한(합덕성당의 평신도로 총회장과 사무장으로 임무를 다하던 중 한국전쟁 때 백문필 신부 피랍시 자진 동행하여 피살되었다)의 순교비와, 이 매스트르(1808-1857, 김대건·최양업·최방제 신학생의 스승으로 1852년 입국하여 전교하다 황무실 공소에서 선종했다)신부, 홍병철(랑드르, 1828-1863)신부, 백문필신부, 심재덕(마르코, 1908-1945, 백문필신부의 보좌신부)신부, 그리고 윤복수·송상원의 무덤이다.
▼ 13 : 55. 성가정순례자의 집(성당의 부속건물)을 지나자 ‘생태관광체험센터’가 맞는다. 합덕제의 자연과 생태 부분을 특화시켜 실감영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체험관이다.
▼ 야외 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 다섯 동의 초가에 들어가 제방다지기, 타작 및 농경기구, 도정기구, 수리기구 등 농경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했다. 굴렁쇠 굴리기, 가마타기, 지게지기, 디딜방아 찧기 등 60-70년대, 그것도 시골에나 볼 법한 풍경들이다.
▼ 체험센터를 빠져나오니 연꽃방죽이 반긴다. 합덕제는 역사와 생태, 그리고 수변공원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연꽃방죽’이 아닐까 싶다. 백련지, 연꽃원, 조선홍련지 등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연꽃방죽 천지다. 합덕제 연꽃은 조선시대부터 주요 식재료로 이용되어 온 기록들이 있단다. 방죽마다 연꽃들로 채워 넣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시원한 버드나무 숲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연꽃단지로 각광받고 있어 주말이면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 14 : 01 – 14 : 15.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이다. 김제의 벽골제, 연안(황해도)의 남대지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저수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합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박물관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진 수리농경문화를 이해하고, 선조들의 지혜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 박물관은 두 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진다. 제1전시실은 수리문화관으로, 합덕제의 기원과 축조기법·한국의 수리 역사·수리 도구 등을 전시한다.
▼ 제2전시실은 합덕과 당진 문화의 형성 배경과 합덕 지역의 국가유산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문화관이다.
▼ 미니어처를 통해 합덕방죽과 구만리보의 축조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으며 튼튼한 제방을 만들기 위해 짚과 나뭇가지와 점토를 30cm 두께로 번갈아 가며 12m 높이까지 쌓아 올린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합덕제는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저수지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바닷물이 들어왔던 불모지를 일궈 농업생산량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으며, 저수지 형태 역시 구불구불한 형태로 만들어 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축조방식도 찰흙과 나뭇가지, 나뭇잎을 켜켜이 쌓아 만들어 공학적으로도 우수한 구조로 평가받는다. 세계관개시설물유산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 서해랑길(당진 64-6) 코스 안내도는 수리민속박물관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구절산입구에서 출발 14.85km를 4시간 10분에 걸었다. 5km도 넘는 산길 그것도 눈길을 걸은 데다, 합덕제수변공원의 볼거리들을 기웃거리느라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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