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64-5코스(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합덕수리민속박물관)

 

여 행 일 : ‘25. 2. 22( )

소 재 지 : 충남 당진시 면천면·순성면·합덕읍 일원

여행코스 : 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아미산몽산구절산입구(실제 출발)나산마을회관둔군봉석우리마을회관합덕수리민속박물관(거리/시간 : 19.3km, 실제는 구절산입구부터 14.85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다섯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충남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서해안고속도로 면천 IC에서 내려와 아미로(609번 지방도)를 타고 당진방면으로 3km쯤 들어오면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5코스) 안내도는 임도를 따라 300m쯤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아미산 산림욕장 앞에 세워져 있다.

 죽동마을에서 시작 당진 내륙의 산과 들을 누비다 합덕읍에 이르는 19.3km짜리 구간. 산길을 9km나 타는데다, 높지는 않지만 몽산과 둔군봉은 정상까지 찍어야하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런데도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 산길이 버겁지는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종점에 있는 합덕제수변공원 합덕성당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09 : 00  09 : 10. 트레킹을 나서기 전, 출발지(방문자센터)에서 당진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충정사(忠貞祠)’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고려 말의 무신이자 교동인씨(喬桐印氏) 중시조인 인당(印璫 ?~1356)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계단을 오르면 경모제(敬慕齋)가 맞는다. 조상을 공경하고 숭모하는 교동인씨 후손들의 정성이 집약된 재실이다. 경모제 앞에는 석성 부원군 인당장군추모비가 있고, 맞은편에는 첨의평리사사석성부원군인당장군추모비(僉議平理司事碩城府院君印堂將軍追慕碑)라는 더 큰 빗돌이 있다.

 외삼문인 정례문(整禮門)을 들어서면 충정사(忠貞祠)가 반긴다. 인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인당은 고려 충렬왕 때 태어나 공민왕까지 4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일생 동안 왜구와 홍건적을 무찔렀으며 서북면병마사 때는 쌍성(雙城)을 수복하고 파사부(婆娑府) 3()을 무찔러 참지정사가 되었다. 이에 원나라 황제가 국경 침입을 구실로 80만 대군으로 위협해 오자 공민왕이 인당으로 하여금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응원군을 보냈다. 이 싸움에서 인당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도 하고, 원나라의 문책 위협에 직면한 공민왕을 위해 인당이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인당 장군의 묘는 개성에 있고, 이곳에는 사당만 있다.

 09 : 20  09 : 40. 64-5 코스도 조금 줄여 걷는 대신, 당진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인 면천읍성 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물론 산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면천읍성(沔川邑城)에 도착하니 커다란 빗돌이 반긴다. 그런데 면()이 아닌 ()’의 터()란다. 맞다. 이곳 면천면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품은 지역으로, 과거 당진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백제 시대에는 '혜군(兮郡)', 통일신라 때는 '혜성군(兮城郡)'으로 불리었다. 고려와 조선 때도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충청도 조운(漕運)의 중심지로 전국에서 운반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1477(성종 8) 창고가 범근내에서 공세곶으로 이전되면서 마을은 활기를 잃었다. ! 곁에 있는 또 다른 빗돌은 시경의 한 구절에서 면천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적고 있었다. <면피류수 조종우해(沔彼流誰 朝宗于海), 넘쳐흐르는 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네>

 면천읍성은 1439(세종 21) 서해안으로 침입해오는 왜구를 대비하여 쌓은 평지읍성이다. 조선후기까지 이 지역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다. 당진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현장 중 하나였으며, 당진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치성과 옹성을 더한 전체 둘레는 약 1.5km, 순천의 낙안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고 쌓았다. 하지만 전국의 읍성들이 그러하듯이 유실되거나 철거되어 간신히 형태만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7년부터 복원을 시작 남문을 중심으로 일부 구간이 옛 모습을 되찾았고, 객사인 조종관,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작은 정자인 군자정 등이 새로 지어졌다.

 면천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豐樂樓). 둘레 1,558의 읍성은 적대 7, 옹성 1, 여장 56곳을 두었다. 안에는 동헌, 객사 등 8개의 관아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인 풍락루는 말 그대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붕괴 위험으로 철거(1943)되었던 것을 2007년 사진자료를 토대로 2층 누각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했다.

 객사인 조종관(朝宗館).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청에 전패와 궐패를 모셔 지방관이 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기도 했다.

 조종관 앞에는 한 눈에도 심상치 않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리한다. 수령 1,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비롭고 웅장하며 탄성이 절로 난다. 2016년 천연기념물(551)로 지정되었는데,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두 나무가 지지대에 의지한 채 서있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면 초록이파리로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들면서 환상적인 미태를 자랑한단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과 얽힌 전설도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복지겸 장군이 병을 앓자 그의 딸 영랑이 아미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고, 아미산에 활짝 핀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면천면 성상리)의 물로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다하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병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빚어진 술이 바로 면천 두견주이며, 그때 심은 은행나무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단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 말 지군사 곽충령이 못을 파 연꽃을 심었고, 1803년 면천군수 유한재가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정을 세워 군자정(君子亭)’이라 불렀다. ‘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면천읍성은 내포 문화숲길의 주요 기점이기도 하다. 내포불교순례길(6코스), 백제부흥군길(7코스, 8코스), 내포동학길(1코스) 등이 이곳을 출발 또는 도착 지점으로 삼고 있다.

 면천 100년 우체국 - 카페가 되다’. 천년 묵은 고을답게 면천에는 옛 모습을 오롯이 품고 있는 공간들이 많다. 슬레이트지붕을 뒤집어 쓴 미인상회가 대표적인데 일제강점기 때 우체국이었던 건물에 차린 카페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저곳에는 옛 우체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태원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법한 전화기와 낡은 우체통 등을 진열해 놓았다. 시간여행을 돕는다고나 할까? 하나 더. 우체통은 그 기능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카페 측에서 매월 마지막 날에 원하는 주소지로 편지를 부쳐준단다. 일종의 느린 우체통인 셈이다.

 60여 년 전에 지었다는 2층 가정집에는 독립서점 오래된 미래가 들어섰다. 대형 서점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립출판물을 상당수 갖추고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옛 막걸리집을 개조했다는 진달래상회도 눈길을 끈다. 소품 상점이라는데, 복지겸 장군의 전설에 나오는 두견주를 브랜드로 삼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둘 모두 문을 열기 전이라서 외관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 고을답게 버스정류장도 시()로 꾸며졌다. 이밖에도 면천에는 볼거리가 꽤 많다. 군현(郡縣)이었으니 향교가 있었을 것은 당연, 향교 앞에는 연암 박지원이 재임하면서 조성했다는 연못 골정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북학파 친구 홍대용의 시에서 따왔단다)’이라는 정자가 있다. 면천의 또 다른 우체국은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이 되었고, 농협의 창고였던 건물은 리모델링 후 청년창업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09 : 45  09 : 55. 다음은 무공사(武恭祠)’이다. 면천읍성에서 송악읍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 生歿年代 미상) 장군의 사당이다. 무공(武恭)은 복지겸의 시호(諡號)이다.

 복지겸은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로 고려를 건국한 4명의 1등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태봉(奉封)의 마군(馬軍) 장수로 있다가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배현경,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 뒤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주살하였으며 임춘길(林春吉)의 역모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994(성종 13) 태사로 추증되었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원래는 제단, 신도비, 태사사(太師祠)만 있었는데 2008년의 정비사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인 무공사를 중심으로 홍살문, ·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 후손들이 공부를 하거나 제사에 관한 일을 보는 추원재와 무영사, 숭모당, 신도비, 준공비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매년 복씨 문중에서 음력 10 1일에 제사를 지낸다.

 홍살문과 창의문, 정충문을 차례로 지나면 복지겸 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무공사(武恭祠)가 나온다.

 묘에서 내려다 본 유적지. 사당 앞에 내·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이 나란히 서있고, 마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추원재이다. 오른쪽에 있는 무영사는 내삼문에 가려져있다.

 묘는 뒤편 언덕에 있었다. 그런데 그 흔한 빗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복지겸의 말년 행적을 찾을 수 없는데다, 그의 죽음 또한 안개 속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럴듯한 봉분에다 석물까지 갖춘 번듯한 묘역(墓域)이지만 결국에는 허묘(虛墓)인 것이다.

 10 : 01. 실제 출발지인 구절산입구 버스정류장(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아미산과 몽산을 올랐었기에 이를 핑계 삼아 산길 구간을 생략했다. 대신 산악회의 도움을 받아 당진시의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 면천읍성과 무공사(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왔다.

 10 : 02. 원백석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두루누비 앱이 시점(아미산 산림욕장)으로부터 5.72km쯤 떨어진 곳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백제부흥군길(7코스)’이기도 하다. 합덕수리박물관에서 둔군봉과 구절산을 거쳐 면천읍성에 이르는 17.2km짜리 여정으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서기 660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이 참전했던 국제전이기도 했다.

 이정표가 내포 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내포지역의 고대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백제'. 한성백제 시기를 거쳐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내포지역은 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백제의 영토로 정체성을 지켜왔다.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백제부흥세력은 내포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백제부흥군길은 이런 역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뒤돌아본 풍경. 순성로(619번 지방도)와 함께 가는 수로(水路)가 고가도로를 연상시킨다. 고풍에 조형미까지 더해진 유럽의 수도교만큼은 아니어도 멋진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하긴 동급이었다면 퐁 뒤 가르(가르 교)’나 세고비아의 수도교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겠지?

 백제 부흥군이 되어 나지막한 구릉지를 넘는다. 그러자 망국의 병사들이 누비고 다녔을 들녘이 널찍하니 펼쳐진다. 백제 부흥전쟁의 시발점이 예산군(대흥면)의 임존성(任存城)이었고, 그 중심은 홍성군(장곡면)의 주류성(周留城)이었으며, 백촌강(白村江) 전투의 현장이 당진시(석문면·고대면)의 앞바다였다니 말이다.(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즈음 낙곡을 주어먹고 있는 엄청난 기러기 떼를 만났다. 저 먼 시베리아 대륙에서 훨훨 날아 한반도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이다. 대기는 차고 무쇠빛 하늘이 일상인 겨울이다. 하지만 반가운 생명들을 만났으니 이 정도 추위쯤이야 못 참겠는가.

 길은 드넓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토물들 대리들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인데,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擇里志)에서 말한 내포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오·병자의 두 난리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외지지만, 땅이 평평한데다 기름져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백제 부흥전쟁의 중심이었지만 이중환의 눈에는 마냥 평화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10 : 18. 백석리(白石里) 앞 도로변에는 작은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와 벤치를 구비해 마을 주민들의 쉼터도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농사일로 바쁜 주민들이 이곳까지 운동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10 : 21. 체육공원에서 만난 개울 수준의 남원천(南院川)’ 지류를 따라가다 아예 건너버린다.

 다리(이름이 없었다)를 건넌 다음에는 개울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10 : 26. 이번에는 남원천(南院川)’의 본류를 건넌다. 이 다리(이정표 : 둔군봉 3.96km/ 구절산입구 2.30km)도 역시 이름이 없었다. 하나 더. 남원천은 면천면 몽산의 남쪽 계곡에서 발원, 순성면·신평면·우강면의 들녘을 적셔주며 동진하다 우강면 부장리에서 남원포(南院浦)를 지나 삽교천으로 유입되는 23.24km 길이의 하천이다.

 다리 건너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몽산 아래서 백제부흥군길(7코스)을 만난 이후 줄곧 의지해 간다. 그렇다고 일치하지는 않는데 이곳이 그중 하나다. 이정표(백제부흥군길)가 왼쪽(둑길)을 가리키는데 반해, 서해랑길의 앱은 오른쪽으로 가라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누루누비 앱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둑길을 이용해 남원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이때 우리가 생략해버린 아미산 몽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참고로 면천의 진산인 몽산(蒙山 299.4m)에는 읍성의 외곽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된 석성인 몽산성이 있다.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싸웠던 백제 부흥전쟁의 전략적 요충지로 면천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산이다.

 잠깐의 부주의로 길을 잃기도 했다. 농로를 이용해 도로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아미산과 몽산을 카메라에 담다가 그만 들머리를 놓쳐버렸다.

 10 : 36. 우여곡절 끝에 남원로(2차선 도로)’로 올라섰다.

 서해랑길은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이별을 고한다. 그곳에 나산리(羅山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어르미산, 즉 어라산(於羅山, 98m)에서 이름을 빌려왔다는 마을이다. 회관 앞 빗돌은 그런 마을의 유래를 전해준다. 그 어라산을 지금은 함봉산이라 부른다나?

 나산리는 100m 내외의 산능선 사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산록지에 가옥들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 서해랑길을 그런 산간 마을을 향해 간다.

 10 : 40.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난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는 산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 길을 부흥군의 심정으로 걸어본다. 지체 높은 자들이야 죽거나 투항해 제 살길을 찾았겠지만, 전쟁에서 패한 군졸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았겠는가. 참고로 백제 부흥군은 동지끼리 서로 죽이는 내분으로 패망했다. 660, 소정방(蘇定方)의 주력군이 귀국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주류성으로 이동해 총사령부로 삼고, 662년 일본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귀국하자 백제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복신이 승장(僧將)인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임존성의 수비장이던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 흑치상지가 당나라 병력을 이끌고 임존성을 함락시켰으니 부흥군 스스로가 자멸한 셈이다.

 10 : 49. 고갯마루는 순성면과 합덕읍의 경계다. 서해랑길은 이 고갯마루에서 (왼쪽)능선을 따른다. 그 산길을 걸으며 부흥전쟁의 마지막을 떠올려본다. 백제부흥군의 총사령부였던 주류성은 663 9월 함락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부흥군의 당시 심정을 되짚어보자. <주류성이 항복하고 말았구나. 무어라 할 말이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 다시 와 뵐 수 있겠는가.>

 서해랑길은 능선을 따라간다. 잘 닦여있지는 않았지만, 길을 찾아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 구간. 그러니까 남원천에서 백제부흥군길과 헤어지고부터는 그 어떤 이정표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길이 나뉘는 곳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애매하다싶으면 어김없이 가이드리본을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둔군봉의 높이가 137.3m에 불과하다보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급경사 오르막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끔가다 만나는 응달은 걷기여행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연일 계속되던 맹추위가 살얼음을 만들었는데, 어젯밤 내린 눈이 그 위를 살짝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엉덩방아를 찧는 일행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는데, 큰 부상을 당한 이들이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끔은 조망이 트이기도 했다. 당진의 터줏대감인 아미산과 몽산은 물론이고 그 오른편에 들어앉은 순성면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당진시의 고층 아파트들도 자신도 있다며 능선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다.

 11 : 15. 그렇게 한참을 걷자 능선이 푹 꺼진다. 숲 사이로 민가가 보이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이던 산길은 이곳에서 정비한 흔적을 보인다. 자연석으로 계단을 만들었는가 하면, 길의 폭도 많이 넓어졌다.

 잠시 후 어느 문중의 묘역을 지나기도 한다. 둔군봉 구간에서는 이런 묘역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지기(地氣)가 솟아나는 명당이 많은 산이라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11 : 23. 묘역을 지나자 길은 한수 더 뜬다. 아예 임도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벚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서있는 것이 봄이면 상춘객들로 들끓을 수도 있겠다.

 11 : 26  11 : 32. 오랜만에 보는 이정표(둔군봉 1.15km/ 구절산입구 5.11km)가 반갑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임도와 헤어져 오솔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난 이정표의 방향을 잘못 읽은 탓에 잠시지만 임도를 따라가기도 했다.

 그러다 만난 저 시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지킬 게 얼마나 값나가는지 고화질 카메라로 녹화하고 있다며 겁까지 잔뜩 주고 있었다.

 이어지는 산길도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울창한 숲길을 걷는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구간이다. 조망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11 : 47. 벤치는 물론이고 정자까지 들어앉힌 쉼터(이정표 : 둔군봉 0.53km/ 구절산입구 5.74km)도 만날 수 있었다. 산행에 지친 걷기여행자들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시설이라 하겠다.

 이곳에는 도곡리 사지(寺址)’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도곡리에 두 개의 절터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하나는 마을 뒷산의 남쪽 기슭에 밭으로 쓰고 있는 300여 평의 터이며, 다른 하나는 둔군봉의 북쪽능선 서향사면 중상단부에 위치했단다. 해당 사지에서 다수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나?

 530m만 더 가면 둔군봉 정상이라던 쉼터(寺址) 이정표의 안내와는 달리 산길은 꽤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11 : 58. 변화 없는 산길이 지루해질 즈음 둔군봉(屯軍峰 137.3m)’에 올라섰다. 이름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산이다. 후백제 때 면천 쪽을 향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선 말기 동학혁명 때는 관군이 주둔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대를 주둔시킬만한 공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소대 규모의 참호나 들어설만한 공터에 정자 하나만 달랑 지어져 있을 따름이다. 견훤이 고려와 싸우기 위해 쌓았다는 성동산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6.60km/ 구절산입구 6.30km)가 가리키는 합덕수리민속박물관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나무계단이 만들어내는 나선형의 문양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구간이다.

 하산 길도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걷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12 : 24. 그렇게 내려선 면천로(70번 지방도)는 그냥 횡단해버렸다. 횡단보도가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다, 신호등까지 없어서 안전하게 건너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이다. 그래선지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5.19km/ 둔군봉 1.43km)도 곧장 건너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12 : 28. 농로를 따라 200m쯤 걷다가 석우2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석우천의 둑길을 타고 하류로 내려간다. 합덕읍 석우리에서 발원 동남쪽으로 흘러 옥금리에서 삽교천으로 합류되는 길이 9.5km의 지방하천이다.

 개울 건너에는 합덕산업단지가 있다. 29만 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일반산업단지인데 경기 악화 및 분양시장 위축,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인해 개발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12 : 33. 석우천을 따라 걷다보면 심심찮게 다리를 만난다. 그 첫 번째 다리가 석우교이다.

 다리 근처에 석우리(石隅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돌모루’, 마을 모퉁이에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석우리로 변했단다.

 계속해서 석우천을 따라간다. 도중에 지류를 합친 때문인지, 물길은 아까보다 많이 풍성해졌다.

 12 : 46. ‘운곡교로 석우천을 건넌다. 예당평야로(32번 국도)의 진출입로와 예덕로(40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다.

 교차로답게 오가는 차량 또한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신호등은커녕 횡단보도조차 없으니 문제다. 안전은 오롯이 걷기 여행자 몫이라는 얘기다.

 예당평야로의 운산2는 교각 사이로 지나간다. 그늘진 곳에는 평상이 놓여있었다. 인근 주민들의 참새방앗간 노릇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석우천은 이곳에서 또 다른 지류를 보태면서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석우천은 저런 지류들을 여럿 보탠다고 했다. 두산백과는 원석우천·소소천·북리천·박골천·쑥고개천·남리천 등 6개의 소하천을 나열하고 있는데, 어디를 이르는 지명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길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나무 한 그루 없던 길이 아름드리 벚나무가 일렬로 도열해 있는 풍치 넘치는 길로 변한 것이다.

 13 : 01. ‘운산로가 지나가는 성동교 자형으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다리를 건너지는 않는다. 초입에서 도로를 횡단한 다음 계속해서 강둑을 따라간다.

 왼쪽, 들녘 너머에는 합덕시가지가 놓여있다. 합덕은 본래 부곡(部曲)’이었다. 고려의 향··부곡은 노비와 양인 사이의 피차별 계층을 의미한다. 1298(충렬왕 24), 고을 사람 황석량이 원나라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합덕현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895(고종 32) 면천군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에는 읍()으로 승격되면서 면천면보다 오히려 더 번화해졌다.

 13 : 17. 보행자전용의 다리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수문(水門)을 만난다. 합덕제(合德堤)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시설이지 싶다. ‘합덕제 수변공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두루누비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란다. 하지만 나는 수변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을 것을 권해본다. ‘연꽃원 백련지’, ‘호중도같은 합덕제 수변공원의 주요 볼거리들을 눈에 담아가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둑길을 따라봤자 건조하기 짝이 없는 석우천과 다리(연호교·연지교) 말고는 볼만한 게 없다.

 합덕제는 연지, 혹은 연제라고도 불리는데 원래는 합덕평야를 관개하던 저수지였다. 길이 1,771m에 저수면적이 103ha나 되는 규모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농경지로 변해 제방만 길게 남아있다. 합덕제의 역사는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둔전을 개간하고 12,000명의 둔병과 말 6,000필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에 의해 저수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나? 제방의 서쪽 끝부분에 1800(정조 24)에 세운 개수비와 그 후에 세운 중수비가 있다고 했으나 찾아보지는 못했다.

 13 : 27. ‘호중도란다. 호수 속에 있는 섬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공섬인 모양인데 정자를 짓고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산책로를 만들어 주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백련지 쪽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연꽃 공주와 개구쟁이 개구리 조형물이 연못의 정체를 넌지시 알려준다.

 하지만 춘래불사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요즘이니 연꽃이나 개구리를 만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저 철새 떼를, 큰고니를 위시한 수많은 종류의 철새들이 연못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다. 그 종류나 수가 웬만한 동물원보다도 더 많아 보인다.

 백련지의 수변을 따라간다. 연꽃원의 사잇길이나 호중도 산책로를 이용해 종점인 수리민속박물관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 수변공원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알찬 볼거리를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이때 철새 떼로 한가득인 백련지가 자신의 속살까지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합덕제는 1900년 초까지는 하트 모양의 제를 갖고 있었단다. 하지만 1960년 초 합덕제가 폐지되면서 농지로 변했으며, 석우천이 합덕제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저수지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다 2005부터 당진시에서 제방을 복원하고 야외전시장을 조성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13 : 37. ‘연지교 (이정표 : 수리민속박물관 0.51km/ 둔군봉 6.12km)에서 석우천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합덕제의 제방을 따라 종점인 합덕수리민속박물관으로 간다. 하지만 저수지가 사라지고 없는데다, 둑 위로 널찍하게 길이 나있어 제방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구간은 버그네 순례길로 함께 쓰는 모양이다. 당진의 천주교 성지들을 하나로 이어놓은 일종의 순례길인데, 한국 천주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이 길은, 영성 여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것으로 알려진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합덕 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이자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버그내에서 유래했다.

 제방 오른쪽에는 농어촌 테마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합덕제는 조선시대 3대 방죽으로 전시에는 국가의 보급기지 평시에는 왕실의 곡간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1960년대 예당저수지 축조와 함께 농경지로 변해버린 합덕(연호)방죽을 당진시에서 7만평 규모로 정비해 연꽃방죽과 수리박물관, 생태체험센터, 농촌테마공원 등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초가정자와 디딜방앗간, 초가체험동, 분수대 등을 지어놓았다. 또한 합덕제의 기원 등 저수지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판으로 만들어 내방객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13 : 45  13 : 55. ‘합덕성당은 테마공원 뒤 언덕에 있었다. 합덕성당은 공세리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내포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공동체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 보다도 극심했으며, 그로인해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새로운 믿음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천주교는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이 됐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됐다.

 성당은 정면의 종탑이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건물의 전면에는 3개의 출입구와 3개의 창이 있는데 그 상부는 모두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되어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의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으며, 창의 아래 부분과 종탑의 각 면에는 회색벽돌로 마름모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역광이라서 facade는 제대로 찍지 못했다)

 성당 후면. 벽돌로 지은 저 건물은 1929년 페랭(Perrin, P., 白文弼) 신부가 지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벽돌조인데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145)로 지정되었으며, 각종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tvN ‘정년이의 촬영지인 성당 내부는 아치형 천정에 벽돌로 쌓은 열주가 좌우로 늘어서 있다. 지역 성당, 그것도 옛날에 지어진 탓에 그리 넓지는 않다. 화려하지 않은 스테인드글라스 등 전체적으로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뒤뜰에는 네 분의 순교비와 여섯 분의 순교자 묘가 있었다. 성 황석두 루카(1813-1866, 괴산군 장연면 출신으로 페롱권 신부와 성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서번역·출판 등의 일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에서 참수 당했다). 백문필 비리버(1885-1950, 합덕성당을 지은 분으로 한국전쟁 때 피랍 살해됐다)신부, 윤복수 레이몬드·송상원 요한(합덕성당의 평신도로 총회장과 사무장으로 임무를 다하던 중 한국전쟁 때 백문필 신부 피랍시 자진 동행하여 피살되었다)의 순교비와, 이 매스트르(1808-1857, 김대건·최양업·최방제 신학생의 스승으로 1852년 입국하여 전교하다 황무실 공소에서 선종했다)신부, 홍병철(랑드르, 1828-1863)신부, 백문필신부, 심재덕(마르코, 1908-1945, 백문필신부의 보좌신부)신부, 그리고 윤복수·송상원의 무덤이다.

 13 : 55. 성가정순례자의 집(성당의 부속건물)을 지나자 생태관광체험센터가 맞는다. 합덕제의 자연과 생태 부분을 특화시켜 실감영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체험관이다.

 야외 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 다섯 동의 초가에 들어가 제방다지기, 타작 및 농경기구, 도정기구, 수리기구 등 농경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했다. 굴렁쇠 굴리기, 가마타기, 지게지기, 디딜방아 찧기 등 60-70년대, 그것도 시골에나 볼 법한 풍경들이다.

 체험센터를 빠져나오니 연꽃방죽이 반긴다. 합덕제는 역사와 생태, 그리고 수변공원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연꽃방죽이 아닐까 싶다. 백련지, 연꽃원, 조선홍련지 등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연꽃방죽 천지다. 합덕제 연꽃은 조선시대부터 주요 식재료로 이용되어 온 기록들이 있단다. 방죽마다 연꽃들로 채워 넣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시원한 버드나무 숲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연꽃단지로 각광받고 있어 주말이면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14 : 01  14 : 15.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이다. 김제의 벽골제, 연안(황해도)의 남대지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저수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합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박물관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진 수리농경문화를 이해하고, 선조들의 지혜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은 두 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진다. 1전시실은 수리문화관으로, 합덕제의 기원과 축조기법·한국의 수리 역사·수리 도구 등을 전시한다.

 2전시실은 합덕과 당진 문화의 형성 배경과 합덕 지역의 국가유산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문화관이다.

 미니어처를 통해 합덕방죽과 구만리보의 축조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으며 튼튼한 제방을 만들기 위해 짚과 나뭇가지와 점토를 30cm 두께로 번갈아 가며 12m 높이까지 쌓아 올린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합덕제는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저수지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바닷물이 들어왔던 불모지를 일궈 농업생산량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으며, 저수지 형태 역시 구불구불한 형태로 만들어 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축조방식도 찰흙과 나뭇가지, 나뭇잎을 켜켜이 쌓아 만들어 공학적으로도 우수한 구조로 평가받는다. 세계관개시설물유산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서해랑길(당진 64-6) 코스 안내도는 수리민속박물관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구절산입구에서 출발 14.85km 4시간 10분에 걸었다. 5km도 넘는 산길 그것도 눈길을 걸은 데다, 합덕제수변공원의 볼거리들을 기웃거리느라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서해랑길 64-4코스(운산교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

 

여 행 일 : ‘25. 2. 8( )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및 당진시 용연동·대덕동·정미면·면천면 일원

여행코스 : 운산교수당2대운산교신성대학교용천교대덕공원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거리/시간 : 18.7km, 실제는 대운산교부터 14.85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네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운산교(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운암로(70번 지방도)를 타고 운산방면으로 1.5km쯤 들어오면 운산교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4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설치되어 있다.

 운산면소재지(용장리)에서 역천을 따라 내려가다 용천교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아미산 초입까지 가는 20.1km짜리 여정. 험하지는 않지만 산길을 7km나 타는데다,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도 없어 추천할만한 코스는 아니다. 난이도도 별이 4(전체 5), 어려운 코스로 분류된다.

 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정보 플랫폼)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서산 유기방가옥을 추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에서 2km 가까이나 떨어져 있어 쉽게 들러볼 수는 없다. 그래서 초반의 4km 정도를 생략하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여미리에 있는 유기방가옥을 다녀오기로 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느티나무(수령 250년의 보호수)가 반긴다.

 여미리는 달의 넉넉함을 나눌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하긴 늦봄인 사월 여미리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가장 아름답다 하여, 서산8경 중 5경인 여월미야(餘月美也)’에 꼽혔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마을 초입의 유상묵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2)’부터 먼저 둘러본다. 구한말인 1925년 종5품 벼슬을 지낸 유상묵이 운현궁(雲峴宮)을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야산을 배경으로 경사면에 기단을 쌓고 U자형으로 토담을 두른 후 안채와 사랑채를 들어앉혔다. 모티브로 삼았다는 운현궁과 어떻게 닮았는지가 궁금했지만, 문이 닫혀있는 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외관만 살펴보고 발길을 돌렸다.

 사랑채 대문에는 나전헌(螺田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유상묵의 손자인 유정로의 호라나? 안에는 일중 김충현(1921-2006)의 공산무인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를 비롯해 나전심경(螺田心畊), 향감여미(鄕感餘美) 등의 편액이 걸려있다고 한다.

 자형의 사랑채와 자형의 안채가 자형의 행랑채와 담장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출입문도 구별되어 각각 안대문과 사랑대문으로 출입할 수 있으며, 행랑채 익랑에 있는 중문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있다.(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유상묵 가옥에서 80m쯤 떨어진 곳에는 320년이나 묵었다는 거대한 소나무가 있다. ‘서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나이만큼이나 풍성한 품을 미륵불에 내어준다.

 소나무 그늘에는 고려(초기) 때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32)‘이 있었다. 높이가 307cm나 된다는 거대한 미륵불은 살찐 방형(方形)으로 근엄하다. 머리 위에는 화불(化佛)이 새겨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용장천(龍獐川)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수습·보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미륵불의 왼쪽 옆으로 난 샛길로 70-80m쯤 들어가면 선정묘(宣靖廟)‘가 나온다. 조선 정종의 4남 선성군(宣城君)과 배위 3명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왼쪽이 사당, 오른쪽은 재실인 선미재(宣美齋)‘이다. 두 건물 모두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홍살문과 외삼문을 차례로 지나면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맞는다. 경기도 파주에 있던 것을 후손이 끊기면서 다른 후손들이 살아가던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참고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성촌인 여미리는 경연참찬관을 지낸 이창주(李昌冑, 1567~1648)가 입향 시조이다.

 초입으로 되돌아오자 이번에는 달빛미술관이 맞는다. ‘우전 마진식이란 분의 개인 미술관으로, ·여름·가을·겨울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끔은 여미달빛음악회 같은 이벤트도 열린단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작품을 구경하지는 못했다.

 건물 밖도 전시장으로 꾸몄다. 대신 그림이 아닌 조각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런데 서산과 말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2주 전, ’해미 국제성지순례길을 답사할 때도 저런 말 조형물을 보았었다.

 여미리를 방문한 탐방객들의 느낌을 담은 글과 그림들을 타일로 제작해 벽화를 만들었다. 옆에는 신재 이원중의 여미가 어드메뇨 고향 한번 돌아보세!’란 시비도 세워져 있다.

 달맞이 동산이라고 했다. 정자에 올라 그 유명한 달빛을 구경해보란 모양이다. 참고로 여미리는 저 달맞이동산을 비롯해 석불입상, 성선군사당, 비자나무, 라전고택, 서암동천, 유기방가옥, 느티나무마당, 전라산 등을 ‘9으로 꼽고 있었다.

 마을 끝에는 여미리의 얼굴 마담격인 유기방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3)’이 있었다. ‘두루누비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꼽은 고택으로, 양지바른 산자락 남고북저의 지형에 건물을 앉히고 타원형 토담을 둘렀다. 가옥 좌측에는 지붕이 개량된 가랍집(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을 배치했다. 1919년에 지어졌는데, 서산지역의 전통 양반 가옥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고택은 자형 안채와, 동편에 담을 사이에 두고 자형의 사랑채, 그 앞에 자형 사랑 대문채가 자리한다. 안마당 서측에는 동향으로 작은 행랑채가 안마당을 감싸며, 대문은 누각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에서 작은 문으로 연결되는 사랑채에서는 한옥 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누각형 대문을 들어서면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 자형' 안채가 양반가다운 규모를 드러낸다. 안채 왼쪽에 행랑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마당을 가운데 둔 'ㅁ 자형'이다. 덕분에 크기가 상당한 가옥인데도 아늑한 인상이다.(구도가 안 맞아 다른 분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고택 곁에 있는 감나무(서산시 보호수)’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수령이 400년도 넘었다는데 높이가 13m나 된다고 했다.

 유기방 가옥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성인 기준 8천원이라니 제법 비싼 편이다. 하지만 수선화가 피어 있을 때만 받는다니 마음 놓고 들어가 볼 일이다. 대신 살림집을 겸한다니 주인장의 안정을 깨뜨리지는 말자.

 주막이란다. tvN 미스터 선샤인을 비롯해 KBS-2 직장의 신 붉은 단심’, MBC ‘연인’, SBS ‘꽃선비 열애사 등 수많은 드라마가 이 주막이나 고택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가옥 안내도는 수선화로 치장되어 있었다. 맞다. 유기방 가옥에서는 수선화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수선화 꽃밭에 둘러싸인 고택을 중심으로 열리는데, 만개한 수선화를 벗 삼아 마음껏 봄나들이를 즐길 수 있단다.

 유기방 가옥의 오른쪽 언덕에는 수령이 350년이나 된다는 비자나무가 있다. 입향조(이창주)의 증손인 이택(李澤, 1651-1719) 1675년 제주도에서 흙과 함께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세 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아 둘레 246cm에 높이가 20m나 되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다. 제주에서 군락을 이루는 비자나무는 전라도의 백양산과 내장산에서 자생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중부지방 이북은 이처럼 장수하는 고목이 흔치 않다니 충남 기념물(174)로 지정받을 만하다.

 유기방 가옥 앞에는 한 쌍의 해태상이 세워져 있었다. 저곳이 서산 아라메길’ 1구간인 천년미소길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서산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를 합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다. 1구간은 역사 유적지와 계곡, 산으로 이뤄진 친환경 트레킹 코스로 전라산·용현리 등을 거쳐 해미읍성에 이르는 20.1km 구간이다.

 09 : 50. 실제 출발지인 대운산교’. 첨부된 지도에서 탐방로가 ‘647번 지방도와 만나는 지점이다. ‘여미리를 둘러본 다음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덕분에 오늘은 정규코스에서 4.35km(두루누비 표기)를 단축해서 걷는 셈이 됐다.

 내포 문화숲길  원효깨달음길을 걷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포 문화숲길은 내포(內浦)의 역사·문화·생태를 아우르는 걷기 여행길이다. 서산·당진·홍성·예산 등 내포지역에 위치한 4개 시·군이 공동으로 조성·운영하는 숲길로 26개 읍면동, 121개 마을 총 320km를 지난다.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백제부흥군길, 내포역사인물길, 내포동학길 등 5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09 : 50. ‘역천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제방 위로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잠시 후 둑길(이정표 : 영탑사 9.14km/ 안국사지 4.45km)과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참고로 역천(驛川)은 서산시 가야산 석문봉에서 발원, 북으로 흘러가면서 서산(운산면당진(고대면·정미면)의 퇴적평야를 일군 뒤 서해로 유입되는 29.13Km 길이의 하천이다.

 원효깨달음길 내포불교순례길로 이름을 바꾸었나보다. 원효깨달음길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원효대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성찰과 깨달음을 얻는 길이다. 103.5,km 1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이곳이 7코스와 8코스의 경계지점인 모양이다.

 09 : 58.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검암천(劍岩川)’을 건넌다. ‘두루누비 대방교의 교각 침하로 위험할 수도 있다며 검암천교로 우회시키는 구간이다. 하지만 안내판은 차량통행만 금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검암천(劍岩川)은 당진시 아미산(峨嵋山)에서 발원 남서로 흐르다가 정미면에서 역천으로 유입되는 길이 8.96km의 하천이다.

 10 : 05. 또 다시 역천을 따라간다. 역천과 대방(大防)’ 들녘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10 : 12. ‘신성대학교로 들어가는 덕마교는 스치듯 지나간다. 때문에 대학교나 학사촌은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다리 건너에는 1995년에 개교한 신성대학교가 있다. 2007 4년제 학사과정을 인가 받아 전공심화학부를 열었다. 그래선지 전문학교에서 보아오던 물리치료학과와 치위생학과, 사회복지학과 등이 4년제로 편재되어 있었다.

 10 : 13. 역천은 덕마교를 이용해 건넜다. 하지만 이 다리도 중간이 움푹 꺼져 있었다.

 이후부터는 역천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왼쪽에는 모평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요리조리 꿈틀대는 역천의 물줄기가 빚어놓은 충적평야이다.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모평리(模坪里)’란 지명이 대모산(大模山) 기슭에 들어앉은 촌락이 드넓은 평야(平野)를 뜨락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10 : 30. ‘모평중보란다.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수중보(水中洑)라는 얘기일 것이다.

 10 : 37. 운평교. 저 다리를 건너 용연동으로 갈 수도 있지만, 탐방로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10 : 45. ‘용천교로 역천을 건넌다. 정미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저 다리를 기점으로 당진시내인 용연동으로 넘어간다.

 초입의 안내판은 양지말(역말)’의 유래를 전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 당진에는 순성역(順城驛)과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는데, 이곳 용연동이 흥세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역말이란다. 참고로 홍세역에는 역리(驛吏) 17명과 노() 2, () 2, 기마 4, 복마 4필이 있었다고 한다. 꼬맹이 역참(驛站)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우리가 흔히 쓰는 한참이나 간다라는 어휘는 이 역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알아두자.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를 한 참()’이라 했는데, 고려시대는 이 '한 참'의 거리가 100( 40km)에 이르렀다니 오죽이나 힘들었겠는가.

 역천의 상류 쪽 풍경.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는 용현보가 물길을 막고 있다. 참고로 역천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시흥도역승(時興道驛丞) 산하 7개 속역 중 하나인 흥세역(興世驛)’의 옆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하류 쪽 풍경. 저 물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석문호수를 만난다.

 10 : 49. 다리 건너 삼거리에서 역천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간다. 150m쯤 진행하면 또 다른 삼거리, 탐방로는 이곳에서 역천로를 벗어나 용연로로 들어선다. 옛날 흥세역이 있었다는 곳이기도 한다. 자연부락 이름도 역말(驛村)’로 불린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용연로를 따라간다. 오른편은 용연천’, 면천면(죽동리) ‘음고개에서 발원 서쪽으로 흘러 용천교 앞에서 역천에 유입되는 2.8km 길이의 하천이다.

 1975년에 문을 열었다는 용연초등학교도 험난한 세파를 배겨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학생 수 부족으로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진 유일의 공립 단설유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연1 마을회관. ‘용연(龍淵)’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큰 연못(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뭄이 있을 때 남쪽 이배산(利背山)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굴려서 용연에 떨어지면 비가 온다고 믿었단다.

 11 : 02. 2차선의 널찍한 용연로와 헤어진 다음, 1차선인 용란재길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사진에서 보이는 움푹 파인 능선안부를 넘어간다.

 탐방로는 이제 용란재길을 따라간다. 읍내동과 용연동 간을 잇는 1차선 도로다. 아까 삼거리에서 만났던 이정표(어름수변공원 3.13km/ 용천교 1.30km)를 시작으로 심심찮게 나타나는 내포불교순례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어름수변공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양지바른 산자락. 그럴듯하게 지어진 저 건물은 재사(齋舍)일까 아니면 살림집일까?

 11 : 18. 길은 해발 72m(핸드폰 앱)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용란재라고 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고갯마루 부근에서 만난 염수 분사장치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원격제어로 염수를 분사시킬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고개를 넘으면 대덕동이다. 당진 시내에 가까워졌는지 고층아파트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11 : 24. 아미로(609번 지방도)는 곧장 횡단해버린다. 이어서 자 모양으로 들녘을 가로지른다. ‘엘지시스템 에어컨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개울둑을 따르는데 이정표(어름수변공원 1.26km/ 용천교 3.18km)가 방향을 알려준다.

 11 : 29. 빌라촌 앞에서 양지말길을 만나 어름수변공원을 향해 간다. 왼쪽 산자락에 대덕맨션, 송정빌리지, 송정빌라 등 공동주택 단지가 여럿 들어서 있었다.

 잠시 후 임도가 시작된다. 당진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의 숲속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11 : 38. kakaomap은 이 일대를 봉암() 근린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어름수변공원, 버들수변공원, 여울수변공원과 연계 조성된 도심 근린공원으로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 내포 지역 지자체(서산·당진·홍성·예산)들이 불교 성지와 천주교 성지, 동학, 역사인물, 백제 부흥운동 등 수많은 흔적들을 옛길과 마을길, 숲길, 들길, 하천길로 연결한 길이 320km의 장거리 도보 트레일이다.

 50m쯤 더 걸으면 삼거리. 이정표(어름수변공원 0.46km/ 용천교 3.97km/ 아미산정상 6.87km)가 이제껏 함께 걸어오던 어름수변공원과 헤어지란다. 그리고는 아미산을 향해 걸을 것을 지시한다.

 탐방로는 근린공원답게 잘 닦여 있었다. 산책 나온 시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 도심에서 가까운 탓인지 능선에 농지나 농가가 들어서 있기도 했다.

 11 : 49.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이제 그만 임도를 벗어나란다. 임도가 넷으로 나뉘는 지점인데, 산길 하나를 더 내놓은 것이다.

 이정표(아미산 정상 6.4km/ 어름수변공원 0.9km)와 함께 세워놓은 안내판이 산길이 시작됨을 알려준다.

 도심 근교의 산답게 길은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하게 잘 닦여있는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었다. 시민들이 산책삼아 나서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이즈음 산비탈 반대편으로 풍요로운 당진의 들녘이 먼발치로 건너다보이기도 한다.

 12 : 00.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곳곳에 놓아둔 벤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12 : 05. 잠시지만 임도에 내려서기도 한다.

 12 : 08. 느닷없이 나타난 계단. 이정표(아미산정상 5.27km/ 어름수변공원 2.07km)가 계단으로 올라가란다.

 계단 위에는 대덕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대덕산(주민들은 그렇게 부르나, 검색되는 지도는 없다)에 조성된 공원으로, 풋살이나 농구를 즐길 수 있는 경기장에다 산책로, 벤치·파고라 같은 휴식시설 등을 가미해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대덕공원 표석과 조형물. 조형물은 가족나들이에 딱 좋은 공간이라는 자랑을 담았지 않나 싶다.

 12 : 17. 대덕공원 앞. ‘당진시 도로관리사무소 진입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올라간다.

 12 : 22. 눈티고개.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눈티고개. 새말에서 대덕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고 험하여 늦봄까지 눈이 녹지 않고 있다 하여 설티(雪峙눈틔고개·눈티고개 등으로 불린다는 곳이다.

 안내판은 면천군과 당진현을 잇는 가장 큰 대로가 이 고개를 지나갔다고 적었다. 군수나 현감이 다니던 길이라서 당진군에서 가장 큰 서낭당이 고갯마루에 있었단다. 눈이 오면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고 길을 닦는 부역에 동원된 주민들의 고층과 애환이 서려있는 고개이기도 하단다. 그들의 삶의 흔적과 염원이 깃든 돌탑도 있었다고 했으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널찍했다던 고갯길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산길은 여전히 고왔다. 하지만 경사는 아까보다 상당히 가팔라졌다.

 왼쪽 나뭇가지 사이로 당진시가지가 내다보인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것이 대도시의 풍모가 엿보인다. 1990년대 말 당진화력에 출장 왔을 때만해도 소읍에 불과했었는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에 딱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해있다.

 12 : 26. 공식적인 지명은 없었지만 공동묘지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아미산과 다불산이 조망된다. 두 산을 잇는 능선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명색이 산길인지라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금방 끝나기 때문에 버겁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64-4코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서해랑길의 이정표를 만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시설물에 붙여놓은 화살표식 엠블럼’, 그리고 이런 가이드 리본이 전부였다.

 12 : 37. 대신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계단을 놓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도록 했다.

 12 : 45. 운치어린 대나무 숲을 스치듯 지나치자,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삼거리(이정표 : 아미산정상 3.57km/ 어름수변공원 3.37km)가 맞는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지만 서해안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12 : 50. 산속으로 들어갈 것을 지시하는 이정표가 지금 우리가 백제부흥군길(8코스)’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홍성 오서산의 장곡산성(주류성), 예산의 봉수산 임존성을 거쳐 당진의 아미산까지 이어지는 '백제부흥군길'은 총 8개 코스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참고로 660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다시 시작되는 산길은 아까보다 많이 가팔라졌다. 오르내림도 상당히 커졌다. 당진시에서 가장 높은 아미산(350.9m) 자락에 들어섰다는 증거일 것이다.

 12 : 57.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이정표를 만났다. 가야할 방향(아미산 정상 2.85km)은 같은데, 반대방향인 어름수변공원(4.49km)’을 우리가 왔던 길이 아닌 능선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두루누비의 앱을 따라 왔는데도 말이다.

 13 : 07. 산길에서 나와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2.22km)를 가로지른다. 죽동2리와 성북2리를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음고개)인데 차량통행이 잦은 듯 바퀴자국이 여럿 나있었다.

 길은 건너편 아미산 자락으로 파고든다. 250m쯤 떨어진 산중턱의 민가까지 비포장 길(도로에 가까운)이 나있다.

 13 : 13. 민가에 딸린 정자 옆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13 : 15. 가파른 산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1.93km/ 몽산 4.05km/ 어름수변공원 5.41km)가 나타난다. 왼쪽은 64-5코스의 주요 기점 중의 하나인 몽산으로 연결된다. 64-4코스의 종점은 당연히 오른쪽으로 간다.

 13 : 23. ‘야외교실이란다. 체험학습이라도 하는 공간인 모양인데, 나로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실린 시판에 더 관심이 간다. 30년 가까운 공직생활 동안 늘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지표로 삼았었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동장군은 가실 줄을 모른다. 매일처럼 한파, 그것도 경보까지 발령하던 기상청이 어제는 이곳 서해안에 폭설이 내릴 거란 예보까지 덧붙였었다. 눈이 적게 내려 트레킹을 하는데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3 : 31. 아미산 쉼터. 아미산에 만들어놓은 여러 쉼터 중 하나로 산행을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채비하기 딱 좋은 곳이다. ‘백제부흥길의 주요 포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8코의 종점이자 9코스의 시점이다. 그래선지 이정표(아미산정상 1.2km/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7km/ 대덕공원 4.0km, 몽산 4.8km) 옆에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아미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1.2km로 다소 멀지만, 대신 가장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아미산 등산로 안내도.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방향으로 간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임도를 따라가면 된다.

 13 : 38. 서해랑길(64-5코스) 안내도는 아미산산림욕장 입구(이정표 :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26km/ 몽산 3.77km/ 아미산쉼터 0.5km)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두루누비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까지 조금 더 걸으란다. 자동차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64-5코스 답사 때는 이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13 : 41. 아미행복교육원. 당진교육지원청에서 운영하는 교육시설로, 폐교된 면천초등학교 죽동분교를 리모델링해 당진외국어교육센터로 활용하고 있단다. 원어민 교사가 이 지역 학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나?

 그러나 빗돌은 우리네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시인이자 서예가인 늘빛 심응섭 교수의 효행을 새겨놓았다. 한글문자조형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분이다.

 13 : 46.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4.85km 4시간에 걸었다. 7km나 되는 산길을 오르내린데다, 눈까지 쌓여있어 속도가 떨어졌던 모양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오늘만이 아니다. 내 생의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줄 것이다. 어느 날 작은 시험이 진행됐다. 주부에게 아주 친한 사람 20명을 적게 한 다음, 덜 친한 순으로 지워나가도록 했단다. 동료, 이웃, 친구 등이 차례로 지워져나갔다. 부모님을 지울 때는 오래 망설였다. 자녀를 지울 때는 아예 대성통곡을 하더라나? 맞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님은 세상을 떠날 것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만들어 부모 곁을 떠나간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함께 할 사람은 배우자뿐인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아내와 함께 한 하루였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서해랑길 64-2코스(부석버스정류장 - 해미읍성)

 

여 행 일 : ‘25. 1. 11()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인지면·해미면 일원

여행코스 : 부석버스정류장부석사도비산전망대모월저수지도당천해미천해미국제성지해미읍성(거리/시간 : 22.7km, 실제는 19.96km 5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두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부석 버스정류장(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32번 국도를 타고 서산까지 온다. 석림남부사거리에서 양열로(부석방면 4km), 예천교차로에서 649번 지방도(부석·안면 방면)로 옮겨 8km쯤 내려오다 부석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서해랑길(서산 64-1코스) 안내도는 부석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다.

 부석면소재지인 취평리에서 도비산을 넘은 다음 도당천을 따라 해미읍성까지 가는 22.7km짜리 여정. 길이가 조금 길지만 대신 부석사와 해미순교성지, 해미읍성 등 볼거리로 넘쳐나는 구간이다. 난이도는 별이 4(전체 5), 어려운 코스로 분류된다.

 12 : 42(1228). 계속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4-1코스를 마쳤지만 64-2코스 중 일부를 앞당겨 걸어두기 위해서다. 면사무소 방향으로 30m쯤 떨어진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부석사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12 : 47. ‘취평2 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취평리(翠坪里)를 구성하는 2개 행정단위 중 하나다. 취평리는 새말·성안·취개·톳굴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어느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서해랑길은 부석사길을 따라간다. 가로수삼아 심어놓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한 구간이다. 배롱나무의 꽃말은 부귀. 그래선지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선비들의 공간에 많이 심어왔다. 이 배롱나무 길도 그런 의미를 담았을지 모르겠다.

 12 : 52. ‘도곡지란다. 간척지에 물을 댄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얘깃거리나 볼거리를 갖고 있지 못한 저수지다.

 저수지 바로 위에서 동사(東寺)’로 가는 길이 나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저 암자를 경유한다. 그렇다고 저 길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부석사를 먼저 들른 다음 오솔길을 이용해 동사로 간다.

 12 : 58. ‘수도사는 먼발치에 두고 스치듯 지나간다. 궁중음식과 사찰음식의 대가로 알려진 수진스님이 주지로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서울 청룡사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별좌 시절 궁녀출신의 스님들과 인연이 닿아 궁중음식을 배웠다고 한다. 저지난달에는 ‘2024 수도사 사찰음식 대항연이란 문화행사까지 열었다나?

 하지만 수도사는 절간보다 절간 앞에 있는 잘 생긴 소나무가 더 눈길을 끌고 있었다. 몸이라도 불편하신지 철제 빔(beam)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법주사 앞의 정이품송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수도사를 지나면서 길이 가팔라진다. ‘도비산의 가슴 높이에 있는 부석사까지 올라가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도비산(島飛山, 352m)은 연암산(燕岩山), 팔봉산(八峰山)에 이어 서산의 셋째 봉우리이다. 바다 위를 날아가는() ()’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나?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도비산(桃肥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13 : 06. 한정식 명소라는 도비마루’. ‘부석사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다. 그런데도 사하촌(寺下村)이 따로 들어서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최근에 지어진 듯한 전원주택 몇 채와 음식점 두엇이 전부였다.

 13 : 08. 주차장. ‘도비산 탐방안내도 옆에 예쁘장한 빗돌 하나를 세워놓았다. ‘태종대왕 도비산 강무기념비.

 강무(講武)는 임금이 참여하는 군사훈련이다. 1416년 태종이 3남인 충령대군(세종)과 함께 7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했다는 것이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이곳에서 적의 동향을 살핀다는 의미였다나? 이 행사는 훗날 해미읍성 축성의 기초가 되었단다. 다음 해인 1417년부터 1421년까지 해미읍성을 축조하고, 덕산에 있던 충청 병마절도사영을 해미읍성으로 옮기게 된다.

 13 : 10.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문일지니,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털어내고 일심으로 부처의 진리를 생각하며 통과해보자.

 ! 일주문 앞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부석사 0.6Km/ 해넘이전망대 0.8Km/ 취평리 1.0Km)는 조망의 명소인 해넘이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려나감을 알려준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해넘이는 제켜두고 대신 해맞이 전망대만 들렀다 간다.

 13 : 19  13 : 43.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쯤 올랐을까 천년고찰 부석사(浮石寺)’가 얼굴을 내민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677(문무왕 17) 의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 말의 충신 유금헌(柳琴軒)이 창건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망국의 한을 품은 그가 물러나 이곳에다 별당을 지어 독서삼매로써 소일하였는데, 그가 죽자 승려 적감(赤感)이 별당을 사찰로 변조하고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섬이 마치 뜬 것같이 보인다며 부석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의상의 창건설은 영주에 있는 부석사의 창건설과 너무나 똑 같다.

 절 앞에 이르면 누각처럼 보이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공중에 걸려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 누각은 운거루(雲居樓)’라는 이름으로 현재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요즘에야 차와 다과를 파는 사찰이 흔해졌지만, 저곳은 오래 전부터 운영되어 온 사찰 다원계의 역사와 같은 곳이다.

 구름이 머무는 누각’.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난간(欄干) 가까이에 놓인 탁자에 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시다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난간 밖으로 천수만의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심검당 앞에 있는 약수로 목을 축인다. 이 약수는 우유약수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목룡장과 심검당이 줄을 잇는 건물의 모양이 흡사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그러나 내 눈에는 소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절을 다시 지은 무학대사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豕眼見唯豕)’고 했는데 아무래도 내 수준으로는 그런 현학적(衒學的)인 풍경을 그리기에 무리였던가 보다.

 금당격인 극락전(極樂殿)’.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는데, 금당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하지만 이곳 부석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근대에는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만공 대선사가 머물면서 수행·정진 했었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삼고, 좌우 협시로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89(숙종 15) 왕자의 탄생을 기념해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는 용봉사라는 절에 있었으나 1905년 이곳으로 옮겨 왔단다.

 요즘은 출가 권유도 MZ세대에 맞춰가는 모양이다. 젊고 잘생긴 스님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힙(hip)하게 달라진 출가 생활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불교는 좋지만 출가는 겁나는 젊은이들을 홀린다고나 할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사진도 눈길을 끈다. 지난 2012 10, 한국인 절도단이 일본 대마도 간논지(觀音寺·관음사)에서 국내로 이 좌상을 들여오다가 발각됐다. 이에 부석사는 ‘1330년경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에 있는 사찰에 봉안하려고 이 불상을 제작했다는 불상 결연문을 바탕으로 왜구에게 약탈당한 불상인 만큼 원소유자(부석사)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국가에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서주 부석사와 서산 부석사가 동일한 절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간논지가 1973년 일본 민법에 따라 불상 소유권을 취득했다고 판단했다. 불상은 내년 5월에 있을 반환을 앞두고 있는데, 부석사의 입장을 지지해달라는 모양이다.

 극락전 앞의 안양루(安養樓)는 서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단층짜리 건물에다 후면까지 막혀있어 누각의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한다. 하나 더. 불가에서 안양은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정토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맨 위쪽에는 산신각이 있고, 뒤로 돌면 만공토굴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곧장 올라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산신각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로지르면 마애불(2014년 석공예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대연 조각가가 조성했다)과 함께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애불 앞은 조망의 명소다. 서쪽 하늘 저 멀리 천수만을 품은 태안반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광경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하나 더. 저 들녘 어디쯤에는 전설 속의 검은여가 있을 것이다. 부석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부석이 부남대교 부근(부석면 대두리)에 있다니 말이다. 이 돌이 적돌만의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항상 떠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해서 부석(浮石)’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간척공사 이후 검은여 주변은 육지로 변했고 돌도 땅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바위를 지금도 신성하게 여기고 있단다.

 만공선사가 수도했다는 토굴(土窟)은 산신각 뒤 3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나 더. 부석사 투어는 만공토굴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그러니 천왕문으로 되돌아와 근처 오솔길(도비산둘레길)로 들어서서 서해랑길을 이어가야 한다.

 동사(東寺). 산악회는 64-2코스의 잔여 구간을 2주 후에 이어갔다. 하지만 난 9년 전에 이미 도비산을 샅샅이 누벼봤기 때문에 도비산 구간을 아예 생략해버렸다. 대신 옛 추억을 소환해 중요 포인트를 소개해 본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동사는 독립된 절이라기보다는 어느 절의 부속 암자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작다. 그래선지 편액도 동암(東庵)’으로 적고 있다. 동사의 창건 연대나 절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1619(광해군 11)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호산록(湖山錄)‘에 승려들이 동사의 그윽한 정취를 찾아 왔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지어진 사찰임은 분명하다.

 도비산은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해돋이 해넘이 등 특별한 행사는 열리지 않으나 사람들은 최고의 송구영신(送舊迎新) 여행지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서해랑길은 이중 해돋이전망대를 들렀다 간다. 첨부된 지도에 전망대로 표시된 곳이다.

 나무데크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전망대에 서면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천수만 간척지를 비롯하여 서산의 넓은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들녘너머로 희미하게 나타나는 고을은 아마 해미읍성일 것이다.

 이후는 임도를 따라 산동리(인지면)로 간다. 이때 오른편으로 널따란 들판이 펼쳐지는데 그 끄트머리에는 서산시가지가 똬리를 틀고 있다. 길이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는 점도 자랑거리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면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가면서 심신은 한없이 맑아진다.

 09 : 46(111). 실제 출발지인 야당천교(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2주 전, 64-1코스 때 부석사까지 2.8km를 더 걸었으니 오늘은 나머지 20km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도비산(9년 전 다녀왔었다) 구간을 생략하고 이곳부터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64-2코스는 18km만 걷는 모양새가 됐다.

 09 : 46. ‘야당천(野堂川)’의 둑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남정리에서 발원한 2.5km 길이의 야당천은 산동리에서 도당천으로 합류된다. 그나저나 지난밤 내린 눈이 발밑에서 뽀도독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덕분에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될 수 있었다.

 이때 도비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예로부터 저 산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1927년에 발간된 서산군지에 실려 있는 서산팔경 중 3경이 도비낙하(島飛落霞)인 것만 봐도 그 아름다움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2000년대의 새로운 서산팔경에서도 제7경으로 도비산 만하채운(島飛山 晩霞彩雲)을 꼽는다. 도비산의 저녁노을이 천수만 바닷물에 되비치면 하늘이 오색 노을을 꽃피우고 주위의 구름까지 주황색으로 물들인다나?

 09 : 53. 300m 남짓 걸었을까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종점 14.4km/ 시점 8.3km) 서해랑길과 만났음을 알려준다.

 09 : 56. 서해랑길은 계속해서 둑길을 탄다. 하지만 난 야당천을 건너기로 했다. 개울 건너에 있는 모월저수지를 조금 더 꼼꼼히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모월저수지’. 인지면 모월리(毛越里)’에 있는 관개용 저수지로 1982년 준공되었다. 서산A지구 간척지에 물을 대려고 축조했다는데, 수초가 무성한 것이 입질깨나 좋겠다. 맞다. 서산시 주최로 낚시대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게 볼만했는지 나들이 삼아 풍경을 감상하려는 사람들도 종종 찾는다나?

 10 : 05.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그리고는 함께 야당천을 건넌다.

 이후부터는 야당천을 따라간다. 둑 아래서 다른 물길을 보탠 탓인지 몸집이 제법 커졌다.

 길은 엄청나게 너른 들녘을 헤집으며 나간다. 그 유명한 서산A지구 간척지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저수지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직사각형의 저수지들이 여럿 포개지다시피 널려 있었다. 아니 저수지가 아니라 휴경지일지도 모르겠다. 서산시에서 철새의 쉼터로 제공하기 위해 휴경지에 물을 담아놓기도 한다니 말이다.

 10 : 26. ‘간월로1로 올라서니 이정표(종점까지 12km)가 반긴다.

 곧바로 도당천을 건넌다. 야당천이 도당천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잠수교가 놓여있다. 도당천(道堂川)은 음암면 도당리에서 발원하여 운산면을 지나 해미면 석포리에서 서해로 흐르는 15.2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이즈음 철새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난 구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곳 서산은 철새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 철새를 눈이 짓무르도록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이번 64-2코스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도당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제방 위로 도로가 나있다.

 철새가 이렇게 많을 수도 있을까?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철새 떼가 놓여있었다. 그것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다양한 철새들이. 맞다. 이곳 도당천은 왜가리, 백로, 가창오리, 가마우치 등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했다.

 저건 백조? 이곳은 간월호의 상류, 앞으로는 백조의 호수로 부르겠다며 넉살을 떠는데 도반 한 분이 고니라고 바로잡아 주신다.

 길은 이제 서산시의 시가지를 왼편 가까이에 끼고 간다. 도심 가까이라서 철새의 안정에 위해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감시 차량이 둑길을 순찰하고 있었다.

 도당천은 습지가 잘 형성되어 있었다. 그게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기도 한다.

 이 일대는 매년 황새를 비롯한 260여 종의 철새 수십만 마리가 찾아온다고 했다. 가끔씩 보이는 모래톱 근처에서는 흰 왜가리가 노닐고 있었다. 먹이를 잡기 위해 우뚝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고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늘과 물이 무척 깨끗해서 겨울이지만 짙은 색감과 청명함으로 상쾌하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철새들의 군무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농경지의 적막함 속에서 철새들의 날갯짓이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먼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은 겨울 풍경의 또 다른 그림을 완성시킨다. 들녘의 고요함과 철새들의 생동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겨울의 색다른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11 : 09. ‘청지천(靑之川, 또는 龍遊川)’이 합류되는 두물머리.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철새 무리가 눈길을 끈다. 서산시가지를 거쳐 왔는데도 물이 맑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음암면 대미산(台微山)에서 발원한 청지천은 상홍리와 서산시가지를 거친 다음 이곳에서 도당천에 흡수된다.

 두물머리를 지나서도 탐방로는 도당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강안을 따라 습지가 잘 발달되어 있어 곳곳에서 철새 무리를 만날 수 있다.

 11 : 27. ‘와당교를 지나면 군부대 망루. 이후부터는 사진촬영을 삼가기로 했다. ! 군부대 정문에서는 초병들의 살가운 인사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지난 달, ‘DMZ평화의길을 걷다가 만난 해병대 초병들과는 얼굴 표정부터가 사뭇 달랐다.

 정문을 지나고서는 군부대의 담장을 따라간다. 철책을 따라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11 : 50. 사진 찍기조차 불편한 군부대 지역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도당천 둑길을 전세 내 걸어간다. 툭 터진 시야에는 바라만 봐도 배부른 풍경이 한가득이다. 추수를 끝낸 황량한 들판이 도당천을 가운데 두고 광활하게 펼쳐진다.

 길은 아직도 철새들과 함께 간다. 하도 많이 만나서일까? 철새가 아닌 다른 볼거리를 찾아본다. 운이라도 좋으면 인공 둥지를 만날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수만을 찾는 황새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번식 공간으로도 활용된다고 했다. 생김새도 멋져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나?

 12 : 01. ‘신장천이 합류되는 두물머리. 1960년대까지만 해도 드나드는 어선들로 성황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덕지천동에 선적을 둔 12-15척의 고깃배가 칠산이나 연평도까지 고기잡이를 다녔으며, 새우젓배·황새기젓배 등 외지 생선배들도 끊임없이 드나들었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냇가는 고깃배는커녕 배가 다닐만한 물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12 : 12. 소하천에 길이 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150m쯤 더 걸으면 이정표(종점 5.1km/ 시점 17.6km)가 왼쪽을 가리킨다. 이즈음 벌판 뒤로 덕숭산과 가야산이 길게 이어진 금북정맥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가야산 아래 있는 도시가 해미이다.

 다리를 건넌 탐방로가 이번에는 들녘을 횡단해버린다. 가야산을 전면에 놓고 가는 길, 농경지 곳곳에 마시멜로처럼 보이는 하얀색 곤포사일리지가 놓여있었다. 새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물체로 보일 수도 있겠다.

 12 : 24. 또 다시 만난 도당천’. 길은 아직도 철새들과의 동행을 멈추지 않는다. 도당천을 국내 제일의 철새 탐조지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12 : 30. 도당천과 해미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가야봉 대곡리에서 발원한 해미천(海美川)은 유암리·저성리·조산리·전천리·응평리 등을 거친 다음 이곳에서 도당천으로 흡수된다.

 이후부터는 해미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해미천은 유속이 느리고 수초와 부유 물질이 많아 잉어와 같은 물고기들의 산란지로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흰꼬리좀도요, 노랑부리저어새 등 다양한 철새들이 매년 찾아온단다.

 12 : 34. ‘응평교로 해미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산시가지에서 가까운 탓인지 들녘에는 비닐하우스가 한가득이었다.

 13 : 00. ‘해미2’. 오는 길에 잠수교(12:56)를 만났었다. 서해랑길은 이 다리를 건넌다. 그런데도 이를 지나쳐버렸고, 그런 우리를 해미2가 맞는다. 이곳에서는 둔치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이 옳다. 반대편 둔치에 탐방로가 나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도 몰랐던 우리 일행은 인도가 따로 없는 4차선의 해미2를 위태롭게 건넜고, 골목(성지2)을 이용해 해미국제성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서 본 해미천’.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양쪽 둔치에 생태탐방로 및 자전거도로를 설치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친수(親水) 및 생활체육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13 : 07  13 : 46.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1800년대의 천주교 박해 때, 기록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 1천여 명이 사약·몰매·교수형·참수형·동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됐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뜨리는 수장형까지 자행됐다. 그렇다고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천주교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21년 국제순교성지로 지정했다. 국내에서 첫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다. 세계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인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등 3,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모범으로 인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해미천변 28400의 부지에 조성된 성지에는 대성당과 소성당, 진둠벙과 자리개돌, 무명순교자 묘, 순교탑 등이 들어서있다.

 먼저 성당부터 찾아봤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짧은 기도만 드리고 빠져나왔다. 수수하게 꾸며진 성당에는 성화 몇 점이 걸려있을 따름이었다.

 무덤을 형상화 했다는 순교자성지 기념관’. 순교자들의 희생과 역사를 전해주는 곳으로, 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안으로 들면 이곳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증거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라는 축복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2014 816,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  3위도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전시공간은 밧줄에 묶어 끌려가고 있는 조각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천주교는 1784(정조 8)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교회를 건립하면서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조선에 소개됐지만 이후 종교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790년에 시작된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현군 묘 도굴 사건 이후 정점으로 치달았다.

 순교자들의 유골. 당시 내포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단다. 그 숫자가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나? 기념관에는 여숫골에서 발견된 유골이 모셔져 있다.

 당시의 유물들은 물론이고, 조각·그림·사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천주교의 역사와 발굴과정 등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하나 더. 동구 밖 숲정이라 부르던 곳은 신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고 한다. 주민들에게는 그게 여수머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여우에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 '여숫골'이라 불렀단다.

 그중에서도 순교 장면을 담은 그림이 오랫동안 시선을 붙들어 맸다.

 고통 받는 순교자들의 조각상. 바로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파사드(Façade), 아니 멕시코시티 소우마야미술관에서 만났던 로댕의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을 떠올렸다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무튼 고통으로 일그러진 저 분들은 지옥이 아닌 천당으로 가셨을 게 분명하다.

 이젠 밖을 돌아볼 차례이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유해발견 터’. 해미성지는 신자를 잡아 고문하고 처형한 해미읍성과 사형장으로 이용했던 서문 밖 순교 터, 생매장 터인 이곳 여숫골  3개의 순교성지로 구분된다.

 신자들의 가슴과 머리를 으스러뜨리던 자리개돌’. 신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잔혹했다. 군졸들은 이들이 사용하던 성물을 밟게 하고 돌다리에 눕힌 뒤 커다란 돌로 내리쳐 돌다리를 도마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흘린 피가 해미천을 붉게 물들이며 거머리바위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진둠벙. 천주교인들을 빠뜨려 죽게 한 아픔이 깃든 곳으로, 자그마한 연못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두 여성(한 분은 성모인 듯)의 석상이 물에 반쯤 잠겨 있다. 당시 100년 가까이 사형장으로 이용되던 서문 밖 냇가는 민가와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다 수십 명씩 생매장하기 시작했단다. 군졸들은 생매장터로 가기 전 개울과 연결된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오랏줄에 묶인 신자들을 산 채로 수장시키기도 했단다. 훗날 이 둠벙은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죄인둠벙'으로 불리다 말이 줄어 '진둠벙'으로 바뀌었다. 그래선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모자상. 궁중복장으로 차려입은 게 눈길을 끈다. 성지순례 차원은 아니었지만 과달루페나 파티마 등 천주교 성지들을 꽤 여럿 둘러봤고,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서는 현지화 된 성모님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풍경을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니 이 아니 기쁠손가.

 맨 뒤에는 해미순교탑이 들어섰다. 무덤을 형상화 한 둥근 봉우리 위에 16m 높이의 흰색 탑이 세워져 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양새이다. 그 앞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앞쪽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세워져 있다.

 2014 8 16일 시복된 3위의 복자 상.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 정사박해의 여파로 1800 19일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10년간의 옥고 끝에 1814 1020일 해미옥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복된 이분들 말고도 해미에는 132명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13 : 46.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담았다는 조형물(생명의 나무)을 보는 것으로 성지 투어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는 조산2를 건너며 길을 이어간다. 다리 건너에서는 해미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간다.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벚나무가 늘어서있는 운치 있는 구간이다.

 이때 해미성당을 만날 수 있다. 순교자성지가 천주교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라면, 커다란 저 본당은 가톨릭의 현재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겠다.

 13 : 58. ‘해미교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서산의 제1경인 해미성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답게 소문난 맛집들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카페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옛날식 다방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분위기로 취향을 살린 커피전문점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있긴 하지만 교황 빵집도 그중 하나다. 서산육쪽마늘을 가미한 도넛 모양의 빵인데, 순교자성지를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드시고 가셨다며 자랑하고 있었다. 맛도 뛰어났다. 크루아상을 연상시키는 바삭한 페스츄리와 함께 고소한 마늘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14 : 02  14 : 35.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해미읍성(사적 제116)은 낙안·고창 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모습을 간직한 3대 읍성에 꼽힌다. 서해안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7(1417)부터 세종 3(1421)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 해미읍성은 서산시가 관광객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서산9'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는 것도 알아두자.

 정문인 진남문(鎭南門)’. 아치형의 성문(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형식의 팔작지붕 건물(정면 3, 측면 2)을 얹었다. 하나 더. 성 안쪽 문루에는 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리플렛은 1491(성종 22)에 중수했다는 기록이라며, ‘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라고 적고 있었다. 독자적인 연호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던 조선의 아픈 현실이랄까?

 성은 무척이나 넓어 보였다. 하긴 면적이 6만여 평이나 된다니 어련하겠는가. 성벽의 총 길이도 1.8km나 된다고 했다. 높이도 5m에 이른단다. 하지만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병영성의 모습이 사라졌었다. 그러다 1997년부터 발굴·복원이 이뤄져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해미읍성은 문화재이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성지로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읍성 한가운데 호야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박해의 증인처럼 서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다는 나무이다. 바로 옆에는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내포 일대의 천주교인을 잡아 가둔 원형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수령이 24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뒤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官衙)가 있다.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곳으로,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해(이를 겸영장이라 함) 지역을 통치했다.

 동헌(東軒).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 관료들이 회의를 하는 장면을 밀랍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도 한때 저 무리 중에 끼어있었을 것이다.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니 말이다.

 내아(內衙). 관리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미스터 션사인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인기 때문인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밖에도 서리의 집, 상인의 집, 부농의 집 등 조선시대의 민가 여러 채가 복원되어 있었다. 우리는 구경하지 못했지만, 민가에서는 지역 노인들이 직접 시연하는 다듬이질, 짚풀 공예, 삼베 짜기 등을 관람할 수도 있단다.

 카페 탱자성(해미읍성의 별칭) 사랑방도 눈에 띈다. 해미읍성역사보존회에서 운영하는 전통 주막인데, 기념품점과 연 판매소도 겸하고 있다. 아무튼 부침개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로 진동하는 주막은 해미읍성의 명소다. 도토리묵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지역 양조장의 막걸리를 음미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동헌 오른쪽에는 108계단이 놓여있었다. 백팔번뇌를 털어내듯 돌계단을 하나씩 세면서 오르면 정확히 108번째 계단 위에 있는 정자 '청허정'과 만난다.

 청허정(淸虛停)’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을 좌우로 거느린 언덕 한가운데에 서있다. ‘맑은 기운으로 욕심을 비우는 곳이라는 의미로, 1491(성종 22)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曺淑沂,1434-1509)가 지었다. 훈련을 하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문객들이 글을 짓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충청감사 조위(曺偉, 1454-1503)가 병마절도사 이손(李蓀, 1439-1520)에게 지어 올린 시가 명작으로 남아있다.

 동문인 잠양루(岑陽樓)’이다. 정문인 진남문, 서문(지성루), 북문(암문)과 함께 해미읍성의 사대문을 구성한다.

 14 : 38. 성곽을 빠져나와 공영주차장으로 간다. 그리고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6.96km 4시간 50분에 걸었다. 2주 전, 1구간 때 3.0km(1시간)를 더 걸었으니 19.96km 5시간 50분에 걸은 셈이다. 정규코스에서 5km 남짓이나 생략했는데도 말이다. 부석사와 순교자국제성지, 해미읍성을 둘러보느라 거리와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64-1코스(창리포구 - 부석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12. 28()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 일원

여행코스 : 창리항부남호 동안옻밭교차로봉락교차로대봉정교차로부석중학교부석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1.9km, 실제는 12.03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4-1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산남부·태안남부 구간(64-68코스 및 지선1-3)의 첫 번째 지선(창리항에서 삽교호함상공원까지 6개 코스로 이루어졌다)이기도 한데, 부남호의 동안을 따라 부석면소재로 가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창리 포구(충남 서산시 부석면 창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상촌교차로(29번 국도)에서 96번 지방도를 타고 태안·안면 방면으로 18km쯤 달리다 창리교차로에서 내려오면 된다. 서해랑길(서산 64-1코스) 안내도는 궁리항 공중화장실 앞에 설치되어 있다.

 궁리항에서 부남호의 동쪽 호숫가(東岸)를 따라가다 서산시의 내륙으로 파고드는 11.9km짜리 여정, 코스가 무척 짧은데다 부남호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그래서 꿈이 있다면 멈출 수 없다의 작가 이석암님의 제안으로 트레킹을 나서기 전 먼저 서산 버드랜드를 둘러보기로 했다. 64-1코스 시점인 창리항에서 2.1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산악회 황사장님의 배려로 버스를 이용해 다녀올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주사창(舟師倉, 수군의 무기를 보관하던 곳)’이었던 창리포구는 성황을 누리던 포구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현대건설의 간척사업 이후 반으로 쪼그라들었고, 게다가 도로까지 확장되면서 간월도, 궁리포구, 남당항 등에 모든 명성을 내주고 이제는 뒷전의 한적한 포구로 남았다.

 수많은 군선이 오갔을 바다는 이제 가두리낚시터 차지가 됐다. 바다낚시의 일종인 가두리낚시는 손맛과 입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통상 우럭을 많이 풀어주는데 농어나 참돔을 풀기도 한단다. 시간을 정해 물고기를 풀어주는데 배낚시보다 접근성이 뛰어난데다 입질까지 좋아 낚시가 처음인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09 : 25  10 : 05. 그렇게 도착한 서산 버드랜드’. 하지만 10시부터 입장이 가능하단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몽중루 작가님이 능력을 발휘해주셨다.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왔다는 점과 함께, 다음 일정에 쫓겨 개장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는 형편을 말씀드리고 관계자로부터 외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낸 것이다. 관계자들의 배려는 그뿐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가동시켜주는가 하면, 철새에 대한 설명까지 해줘 속속들이는 아니지만 버드랜드의 이모저모를 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천수만의 산을 형상화했다는 ‘4D 영상관’. 천수만의 철새를 주제로 한 영상을 입체감 있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개장 전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참고로 서산 버드랜드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천수만을 체계적으로 보전·관리하는 한편, 체험과 교육중심의 생태관광 활성화에 주력하고자 조성된 철새 생태공원이다. 철새를 주제로 다양한 볼거리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철새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탐조투어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철새들을 주제로 한 생태공원답게 곳곳에 철새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주변의 붉은 단풍과 어우러지며, 마치 꽃밭에서 춤을 추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하긴 화사하게 만개한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연상시키는 스프링 왈츠(Spring Waltz)’를 주제로 컬렉션을 연 주얼리 브랜드도 있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왈츠를 추듯. 새들도 눈보라 이는 하늘위에서 날개를 펴고 춤을 추는 모양이다. 맞다. 클래식 음악 중에도 새를 소재로 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스웨덴의 작곡가 요한 에마누엘 요나손의 뻐꾸기 왈츠는 이미 명곡의 반열에 올라있고, 차이콥스키의 고니의 호수도 엄청나게 유명하다. 비발디도 플루트 협주곡 홍방울새를 작곡했다지 않은가.

 들녘을 마주보는 언덕에는 오리·기러기 전망대가 걸터앉았다. 망원경까지 비치해 철새들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탐조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망원경을 통하면 물이 가득한 논에서 노닐고 있는 철새들도 구경할 수 있다. 철새의 안정적인 월동환경 제공을 위해 버드랜드에서 해오고 있는 노력의 결과다. 간척농지 경작 농가를 대상으로 생태계서비스 지불제 사업을 시행하는데, 참가자들은 벼를 수확한 후 내년 3 10일까지 철새의 먹이활동을 위해 볏짚을 남겨두거나 휴식지로 사용될 수 있도록 무논을 유지해야 한단다. 참가자에게 소정의 대가를 지급함은 물론이다.

 철새전시관도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천수만에 서식하는 큰기러기, 청동오리,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등 200여 종의 다양한 철새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관람객들은 친환경 전기차를 이용해 경내를 둘러볼 수 있단다. 버드랜드의 범위가 그만큼 넓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철새뿐만 아니라 숲, 갯벌, 논 등 다양한 자연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연중 운영하고 있단다.

 둥지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에는 각종 철새가 난다. 그 위에 올라탄 집사람. 활짝 웃는 것이 선녀라도 된 듯한 기분인가 보다.

 둥지전망대. 배를 형상화 한 하부구조물과 역동적인 회오리 모양의 상부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게 철새 알을 상징하는 다양한 크기의 원형 공간들과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해준다.

 관계자의 배려로 전망대까지 올라가 볼 수 있었다. 30m 높이의 전망대는 4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꼭대기인 4층은 실내 전망대다. 빙둘러가며 커다란 창을 내놓았는가 하면, 주요 포인트마다 망원경을 배치해 철새들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4층 내부 벽면. 서해안의 비경을 하나만 꼽으라면 서해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낙조를 꼽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저녁노을이 주는 특유의 쓸쓸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천수만은 거기에 철새의 군무까지 더했다. 보라!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전망대 조망.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해버린 검조도를 가운데 두고, 왼쪽은 토끼섬’, 그리고 오른편에는 창리포구가 있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서산A지구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오른쪽의 천수만과 함께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알려지는 곳이다. 천수만은 물살이 거칠지 않아 물고기가 풍부하다. 게다가 간월호, 부남호 주변의 대단위 간척지에는 추수 후에도 곡식들이 다량 남아 있다. 겨울 철새들의 먹이 조건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오는 이유다.

 반대 방향에는 부남호가 놓여있다.

 발아래 야외공원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가족, 연인, 친구 등과 함께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포토존으로 꾸며놓았다.

 3층은 창이 없는 전망대로 꾸몄다. 유리창 너머로 찍히는 사진이 싫은 사람들은 이곳으로 오면 된다. 대신, 낮아진 만큼 시야가 좁아진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10 : 14. 실제 출발지인 창리교차로’. 천수만로(96번 지방도)에서 무학로(649번 지방도)가 갈려나가는 지점으로, 서해랑길 64코스의 주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천수만로를 따라오던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교차로를 건넌 다음 창리 나루터로 간다.

 천수만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4차선 도로의 오른편 가장자리를 따라 자전거길이 따로 나있다.

 10 : 18. 잠시 후 도착한 현대 서산농장’. 64코스와 64-1코스가 나뉘는 지점이다. ‘창리포구를 빠져나온 서해랑길은 이곳을 기점으로 64코스는 서산B지구방조제 둑길로 가고, 지선인 64-1코스는 부남호의 동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그리고 태안·서산·당진의 해안선을 거치지 않은 채 서산·당진의 내륙 지역을 가로질러 아산시 84코스에서 원래의 길과 합류한다.

 이정표가 64-1코스의 시점인 창리포구에서 300m쯤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창리교차로에서 기록을 시작한 내 GPX 트랙에는 360m를 걸어왔다고 찍혀있다.

 현대서산농장 정문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간다. 농장 담장과 부남호의 가장자리 사이로 길이 나있다. 서해랑길의 지선을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서산에서 당진까지 6개 구간으로 나누어진 지선은 109km쯤 된다. 해파랑·남파랑·서해랑·DMZ평화의길 등 코리아트레일 중 본선에서 지선으로 연결된 별도의 길은 이곳이 유일하다.

 둑 모양으로 나있는 길은 비포장이다. 하지만 승용차의 교차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길이 1,228m의 서산B지구 방조제. 창리포구와 건너편 당암포구를 잇는 이 방조제는 천수만의 끝이기도 하다. 둑이 완공되면서 천수만의 내륙 쪽 일부가 담수호와 간척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야생생물 보호구역이란다. 맞다. 이곳 천수만은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이다. 요즘도 17만 마리의 철새가 관찰 된다고 했다. 지자체가 이를 놓쳤을 리가 없다. 서산시는 천수만의 다양한 철새와 간월암·부석사·해미읍성 등 주변 관광지를 함께 둘러보는 탐조투어를 운영한다고 했다. 참가자가 촬영한 사진 가운데 우수작품을 선정해 소정의 상품도 준단다.

 맞다. 부남호에서의 철새 조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하시라도 철새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사진이 별로여서 몽중루 작가님의 것을 빌려왔다.

 천수만 일원은 매년 11월과 12월에 철새가 가장 많이 머무른다고 했다. 국제보호종인 시베리아흰두루미, 가창오리와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 큰고니 등 희귀 철새들도 심심찮게 관측된단다. 겨울철 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이유다.

 철새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군무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호숫가 두어 곳은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철새들의 날갯짓을 실컷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눈에 들어오는 부남호(浮南湖)’는 호수라기보다 바다에 가깝다. 방조제 길이는 A지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호수는 간월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길은 어느 곳 하나 포장된 구간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는 자동차는 애물단지에 가깝다. 흙먼지만 흠뻑 선사해주고 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된 딱딱한 노면을 걸을 때보다 걷기는 한결 수월했다.

 오른편 울타리 너머는 온통 태양광 패널로 뒤덮여 있었다. 서산지역의 간척사업은 식량 자급이 강조되던 시절 농지 확보를 목표로 추진됐다. 하지만 세월 따라 음식문화가 변하면서 쌀은 남아돌았고, 거기다 소금기 많은 간척지라서 경제성까지 처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이 태양광발전사업이었고, 현대건설은 30만 평(여의도의 1/3 크기)에 가까운 부지에 국내 최대 태양광발전소를 건설했다. 22천 가구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단다.

 호수 건너편에는 관제탑까지 갖춘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에서 운영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타이어 테스트 트랙으로, 축구장 약 125개 크기의 부지(38만평) 13개의 다양한 트랙이 들어서있단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주관하는 운전 교육, 시승 프로그램인 HMG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도 저곳에서 진행하고 있단다.

 이 구간의 가장 큰 볼거리는 철새의 군무다. 또 다른 볼거리는 이따금 갈대와 같은 수초를 만나 눈길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꼼꼼히 살펴보지는 말자. 쓰레기로 뒤덮인 흉물스런 민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남호가 다시 바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2019년부터 수질이 6등급 이하로 악화되면서 담수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탓에 방조제 가운데를 헐어 바닷물이 드나들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간척사업 45년 만에 역간척사업으로 변해 세상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10 : 56. 그런데 부남호를 가로지르고 있는 저 둑의 정체는 대체 뭘까? 중간에는 잠수교 모양의 다리까지 놓여있다. 어쩌면 서산지구A·B방조제가 축조되기 전 주민들이 이용하던 농로를 겸한 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zoom)으로 당겨보니 다리 상판이 끊겨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행할 경우 호수로 빠지게 된다는 경고판이 초입에 세워져있었다.

 부남호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는 길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부남호도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 물길 두엇이 합쳐지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더 넓어진 느낌이다.

 11 : 03. ‘2-배수장에도 전망대가 세워져 있었다.

 부남호는 상류부로부터 유입되는 오염물질로 인한 수질악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그래선지 ‘2-배수장에서는 뭔지 모를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물관리자동화 시설이나 홍수·수질 예보·경보 시스템 같은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농업용수로도 못 쓸 정도로 수질이 악화되었다니 물고기라고 온전하겠는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는 저 꼬맹이 어선이 그 증거라 하겠다.

 호숫가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날 줄 모른다. 40분 이상을 걸어왔건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광활하기 짝이 없던 태양광발전소가 배수장을 경계로 끝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보다 더 넓은 농경지가 펼쳐진다.

 지난 2000년 현대건설은 자금난을 겪었었다. 그 해소의 일환으로 영농조합법인과 전업농에게 서산간척지 중 B지구 일부를 매각하기도 했다. 저 현수막이 그 증거다.

 11 : 17. 다리를 건넌다. 부석면의 너른 들녘을 적시며 흘러오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어깨를 맞대고 달려오던 부남호와는 이곳에서 헤어진다.

 이정표(종점까지 6.8km)가 이제 그만 봉락저수지 방향, 즉 내륙인 서산시의 산하 속으로 파고들란다.

 방향을 틀자마자 ‘3-배수장이 나타났다. 이곳도 역시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염 저감시설을 보강하는 공사가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는 하천의 둑길을 따른다. ‘서산B지구 방조제로 인해 생긴 너른 들녘을 양옆구리에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 B지구방조제로 인해 매립된 면적은 5,783헥타르(ha)라고 했다. 이중 농지는 3,745헥타르(11,328,625)란다. 여의도 면적이 290헥타르이니 여의도의 13배나 되는 농경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함께 가는 하천은 웬만한 강줄기에 못지않을 정도로 컸다. 하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저 들녘을 적셔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서산지역 간척사업은 한때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이나 지도를 바꾸는 등의 수식어까지 달고 다니지 않았던가.

 ! 들녘에 논두렁이 없다. 기계농이 아니면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로 농경지가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래 전, 비행기로 볍씨를 뿌리는가 하면, 농약까지 비행기로 쳐대던 뉴스를 보며 감탄해하던 일이 있었다. 그 뉴스의 생산지가 이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늘밭도 경계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산시에서 축제까지 연다는 서산6쪽마늘을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쪽저쪽 보시고, 서산6쪽마늘축제로 오세유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을 정도로 뛰어난 품종이라나?

 둑길이어선지 억새밭을 끼고 걷기도 한다. 가을철, 하얀 억새꽃이라도 흐드러지게 피면 또 하나의 풍성한 볼거리로 변할 게 분명하다.

 11 : 47. 봉락저수지에서 흘러오는 물길을 건넌다. 이정표가 종점까지 4.3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11 : 50. 조금 더 걷자 옻밭2교차로가 반긴다. 여기서 옻밭은 칠전리의 옛 이름이다. 옻나무밭이 많다고 해서 옻밭골, 옻밭말(漆田村), 칠전(漆田) 등으로 불리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옻 칠()’자가 일곱 ()’자로 바뀌어버렸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이제 ‘649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널찍하게 인도를 내놓았다.

 도로 건너.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물은 칠전리(七田里)’의 마을회관(경로당)이다. 부석면에 속한 법정리 중 하나로, 옻밭골·사기점·금곡·성절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그렇다면 저 마을은 옻밭골일 것이다. 이 교차로의 이름이 옻밭인 것을 보면 말이다.

 11 : 56. 이번에는 옻밭2교차로. 도로 표지판은 옻밭골로 연결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아니 신작로의 오른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도로의 버스정류장은 성절말, 승지골 등 다른 자연부락으로도 연결된다고 알려준다.

 교차로 근처에 칠전리사무소가 지어져 있었다. ‘칠전리 영농회라는 편액도 눈에 띈다. 경로당 기능이 없는 순수 사무실인 모양이다.

 봉락저수지는 스치듯 지나간다. 간척지 들녘을 적셔주는 물길의 원천으로, 월척을 노리는 프로 낚시꾼들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곳이다. 겨울철, 맹추위에 꽁꽁 얼어붙기라도 할라치면 얼음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단다.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부석면의 또 다른 법정 동리인 봉락리(鳳洛里)’. 검은돌·봉동·노라실·소댕이·장승배기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충남지역의 특징답게 어느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옛 이름이 적힌 마을 표석을 세우는 등 옛 지명 찾기에 힘을 쏟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충남에서는 여전히 1, 2, 3리로 통칭되는 행정 동리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 05. ‘봉락교차로를 지난다.

 도로 건너에는 봉락경로당이 들어서 있었다.

 12 : 10. ‘초당2교차로라고 한다. 하지만 초당이란 이름을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의 꿈속에 저장된 농촌은 대부분 낭만이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먹고 사는 게 우선이다. 스핑크스 고양이와 타조의 체험을 간판으로 내건 저 농장 & 카페도 그런 삶의 한 방편일 것이다.

 그런 현실을 타개하지 못할 경우 도태될 수밖에 없다.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는 저 주유소가 그 증거이다.

 12 : 15. 이번에는 초당1교차로를 지난다.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봉락리’, 갈려나가는 길도 지산리로 연결된다.

 봉락1의 마을회관도 노인정을 겸하고 있나보다.

 생강 한과 공장도 눈에 띈다. 서산 생강은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생강을 활용하는 서산 한과는 토종 생강을 곱게 갈아 일정 비율로 섞은 조청이나 물엿을 사용하기 때문에 맛과 향이 독특하다. 여기에 국산 참깨, , 백련초 등으로 각양각색의 한과를 만드는데, 한과 속살에 배어있는 생강 성분이 감칠맛을 더해줄 뿐 아니라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신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감기 예방 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12 : 20. ‘대봉정교차로는 회전교차로 형식을 취했다.

 서산농협의 농산물집하장이란다. 마늘, 양파, 배추 등 서산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류의 홍수 출하를 막음으로써 산지가격을 지지해보려는 시설쯤으로 보면 되겠다. 그나저나 면단위 집하장치고는 대단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부석면의 들녘이 그만큼 넓고, 생산되는 농산물의 양도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농민들의 삶도 그만큼 풍요로울 것이고 말이다.

 칠전리와 봉락리를 연이어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제 대두리(大頭里)로 넘어간다. 지형이 큰 머리처럼 생겼다는 마을로, 내건너·구억지·들마당·부엉굴(구억말사양골 등의 자연부락을 품고 있다.

 사양골지도 스치듯 지나간다. 간척지에 물을 대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는 저수지다.

 12 : 33. ‘대두교차로에서는 횡단보도를 건너 도심(부석면 소재지)으로 진입한다. 종점까지 0.6km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길가에 세워져 있다.

 건너편에는 1954년에 문을 열었다는 부석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전체 학생수가 100명도 채 안되지만, 사용하는 건물만큼은 대도시 중학교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12 : 40. 취평리(부석면 소재지)에 위치한 차부삼거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아니 시간이 너무 일러 64-2코스 중 일부(부석사까지)를 더 걷기로 했다. 22.7km나 되는 64-2코스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 싶은 간절함이라고나 할까?

 버스정류장 주변은 공중화장실까지 갖춘 쉼터 겸 소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서해랑길(서산 64-2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그나저나 64-1코스는 12.03km 2시간 30분에 걸었다. 상당히 빠른 속도다. 버드랜드를 들르지 않은 일행들을 따라잡으려고 발길을 서두른 데다. 추위에 쫓겨 간식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달려온 덕분일 것이다.

 

서해랑길 64코스(궁리항 - 태안관광안내소)

 

여 행 일 : ‘24. 12. 14()

소 재 지 : 충남 홍성군 서북면 및 서산시 부석면, 태안군 남면 일원

여행코스 : 궁리항서산A지구방조제간월교차로간월암창리교차로창리항서산B지구방조제태안관광안내소(거리/시간 : 13.2km, 실제는 15.03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4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산남부·태안남부 구간(64-68코스 및 지선1-3)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산군의 서쪽해안선을 따라 북서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1(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궁리항(충남 홍성군 서부면 궁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상촌교차로(29번 국도)에서 96번 지방도를 타고 안면방면으로 8km쯤 달리다가 궁리교차로에서 내려오면 된다. 서해랑길(서산 64코스) 안내도는 궁리 어판장 마당에 설치되어 있다.

 궁리항에서 서산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서진, ‘서산B지구방조제까지 가는 13.2km짜리 여정으로, 절반가까이를 방조제를 걸어야하는 유별난 코스이다. 하지만 철새를 실컷 구경할 수 있는가 하면, ‘간월암이라는 명소를 끼고 있어 심심해 할 틈이 없는 멋진 코스이기도 하다.

 어판장 지붕의 조각상. 낚시 명소인 궁리항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고기를 막 낚았는지 히트를 외치며 낚싯대를 잡아채는 아버지, 뒤에서는 어린 아들이 두 손 들어 환호성을 지른다. 어머니와 딸은 한 발 뒤에서 그 광경을 잔잔히 지켜보고 서있다. 정감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이라 하겠다.

 09 : 26. ‘남당항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어깨를 맞댄 바닷가는 선착장으로 변해있었다. 하시라도 입출항이 가능한 선착장이 버젓이 있는데도 말이다. 모래사장 위로 배를 끌어올리려면 꽤나 힘이 들었을 텐데도.

 도로변은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전망 데크에서 천수만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는가 하면, 인생샷이라도 건지라는 듯 저런 천국의 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서 바라본 궁리항’. ‘궁리(弓里)’란 지명은 포구의 모양이 활처럼 휘어있다는데서 유래했다. 천수만(淺水灣)의 포구답게 봄에는 꽃게와 주꾸미, 가을에는 대하와 꽃게, 겨울에는 간재미 등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방파제 끝에는 놀궁리 해상파크라는 해상 놀이공원이 들어섰다. ‘어촌뉴딜 300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공간인데 궁리라는 지명이 누군가의 재치가 더해지면서 놀 궁리라는 위트 넘치는 또 다른 지명으로 변했다.

 길은 서산 A지구 방조제를 향하여 간다. 길고도 긴 방조제의 둑 위로 도로(천수만로/96번 지방도)’가 나있기 때문이다.

 천수만 풍경. 이곳 궁리포구 일대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광활하면서도 잔잔한 천수만을 앞에 두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거기에 명품 낙조까지 더해지면서 홍성8의 한 자리까지 꿰차고 있다나?

 서산A지구 방조제 배수갑문.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월호의 수위를 조절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참고로 간월호(看月湖)는 천수만의 물길이 막히면서 생긴 인공호수이다. 1980 5월에 착공 1982 10월 서산시 부석면 창리와 홍성군 서부면 궁리를 잇는 서산A지구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면서 담수호가 형성됐다.

 09 : 38. 탐방로는 과학관교차로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배수갑문교를 건넌다. 서산A지구 배수갑문의 수로에 놓인 다리다. 이정표(종점 12.4km/ 시점 0.8km) 64코스의 하이라이트인 간월암까지 4.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다리를 건넌 다음, 이번에는 궁리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이후부터는 천수만로를 따라간다. 서산시 부석면(간월도리) 홍성군 서부면(궁리)을 잇는 방조제의 둑 위로 4차선의 도로(천수만로)를 냈다. 서해랑길은 도로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만들어놓은 자건거길을 빌려 쓴다.

 눈에 들어오는 간월호는 숫제 바다이다. 이곳 천수만은 철새들의 국제 정거장이다. 그중에서도 간월호 일대는 국내 최대 철새도래지로 꼽힌다. 철새들이 마음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인공 섬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때를 못 맞춘 탓인지 인공 섬은 물론이고 철새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09 : 55. 둑 중간쯤에는 철새 탐조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방조제의 준공과 함께 간월호 주변은 국내 최대의 철새도래지가 됐다. 매년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수십만 마리에 달하는 철새가 찾아온단다. 추수 후 농경지에 남겨지는 이삭과 호수에 서식하는 어류, 양서류 등이 월동 조류의 주 먹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철새탐조대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두고두고 회자될 건설사가 적혀있다. 1980년대 시작된 서산 간척지사업 7.7km의 방조제를 축조해 4,660만평의 간척지를 조성하는 대역사였다. 하도 대규모이다 보니 마지막 물막이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혔던 모양이다. 9m에 달하는 조수간만의 차와 초당 8.2m의 빠른 유속이 승용차만한 바윗덩어리조차 흔적도 없이 쓸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정주영 회장이 고철로 쓸 23만 톤급(길이 322m, 높이 27m) 폐유조선을 가라앉히는 공법을 생각해냈고, 그게 성공하면서 정주영 공법이란 이름으로 세계 토목건설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나?

 이후로도 둑길은 한참이나 이어진다. 하긴 방조제의 길이가 3km(A지구만)도 넘는다니 어련하겠는가.

 방조제가 끝나갈 즈음 만나게 되는 농경지. 논에 물이 잡혀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천수만 여행 때나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천수만을 찾은 철새들에게 먹이터와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수확을 마친 논에 물을 가득 채워놓는 것이다. 물론 정부에서 적절한 보상을 해주고는 있지만.

 10 : 13. 둑길을 걷다보면 길은 자연스레 홍성군에서 서산시 부석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방조제 끝에서 간월교차로를 만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계속해서 천수만로를 고집하는 자전거길과 헤어져, 해안도로(간월도2)를 새로운 길벗으로 삼기 때문이다.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자 화장실까지 갖춘 널찍한 주차장이 맞는다. 초입의 글자조형물이 간월도에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이제 길은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서산A지구방조제로 인해 물길이 끊긴 천수만을 눈에 담으며 걷는 구간이다.

 도로변에는 통창을 통해 천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뷰 맛집이 꽤 여럿 들어서 있었다. 무인 카페인 ‘Cafe 월도리684’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저곳은 커피보다 수제맥주에 특화되었나 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수만을 낀 도로, 곳곳에서 멋진 뷰가 터지는데 그냥 놓아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라는 듯 도로변을 따라 두어 곳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전망대에 오르자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천수만 건너편에서는 안면도가 수평선을 대신하고 있다. ! 물 빠진 해변에서 조개를 잡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보면 얕은 물에 들어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띈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간월도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스카이워크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10 : 27. ‘간월도 스카이워크는 곡선의 미를 한껏 살린 모양새이다. 좌우로도 모자라 상하로까지 곡선의 형태를 취했다.

 툭 터지는 조망을 실컷 눈에 담다보면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광장에 이른다. 그곳에는 예쁘장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보통 요물이 아니다. 동그라미 안에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간월암을 품을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 있는 명소로 꼽히는 이유이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햇살이 간월암 주변을 조명처럼 비춘다. 간월암은 분명 섬, 아니 돌섬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암자다. 하지만 지금처럼 썰물 때면 산봉우리에 걸터앉은 작은 암자가 된다. 아름다움에 신비함까지 더한 명소라고 보면 되겠다. ‘서산9 ‘3으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스카이워크를 빠져나오니 굴 따는 여인들 조형물이 반긴다. 하단에 적힌 글을 옮겨본다. 간월도 어리굴젓은 고려 말기부터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구전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간월도에서 난 어리굴젓을 진상했단다. 간월도의 굴은 자라는 과정이 특이하단다. 어릴 때는 돌과 바위에 붙어 석화(石花)로 자라다가 다 크면 떨어져서 갯벌에서 살아간다나? 그래서 토굴(土花)’로 불리기도 하는데, 육질이 단단하고 굴 특유의 바다냄새가 풍부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 굴로 젓갈을 담갔다니 임금님의 밥상에 올라가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10 : 32. 호로병의 목처럼 생긴 간월도(看月島) 입구. 간월도가 원래 섬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풍경이다. 맞다. 간월도는 천수만에 떠있는 작은 섬이었다. 안면도 북부를 관할하는 안면읍에 속해있었지만 1984년 천수만 일대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부석면과 육지로 이어지면서 서산시 부석면으로 편입됐다.

 간월도 입구는 굴탑을 중심으로 작은 광장을 만들어놓았다. 음식물을 소재로 한 유별난 기념탑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날 굴의 풍요를 위한 굴부르기제까지 지낸다고 한다. 100년 이상 이어져온다는 이 전통행사는 굴왕제 또는 군왕제로도 불리는데,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아낙네 들이 소복을 입고 마을 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해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 풍년 기원제를 지낸단다. 그런 다음 채취한 굴을 나눠 먹는다나? 이때 관광객들도 함께 즐길 수 있게 시식이 가능하단다. 굴 채취가 간월도 주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는지 알 수 있는 풍경이다.

 간월암은 서산, 아니 충남에서도 유명 관광지로 꼽힌다. 돌섬에 걸터앉은 사찰의 아름다움에 더해 선승(禪僧) 만공의 광복 기도발이 먹혔다는 소문 덕분이다. 그래선지 주차장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량들로 한 가득이다.

 10 : 36. 주차장을 지난 길은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 건너에 작은 섬이 있다. 아니 섬이라기에는 민망한 크기라, 커다란 암초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린다. 그 돌섬에 신비로운 사찰 간월암(看月菴)’이 있다. 물이 빠지면 암자까지 50m 정도 걸어서 들어갈 수 있지만 물이 차면 암자는 바다에 갇힌다. 암자가 바다 위에 떠있는 형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간월암이 더 신비롭게 보이는 이유이다.

 가람배치도. 사진처럼 바닷물이 차면 물 한 가운데에 둥둥 뜬 형상이 된다. 그나저나 간월암은 아담했다. 법당인 관음전을 비롯해 산신각과 용왕각, 범종각까지 전부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허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곳곳에서 만공선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간월암의 금당(金堂)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 대신 관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이다. ‘어떤 이야기든 다 들어준다는 관음보살은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자비의 화신이다. 원통전은 그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주원융통(周圓融通, 두루 막힘이 없는 상태)하게 씻어준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관음보살을 모신 건물을 관음전이라 칭하는 절들이 많단다. 하나 더. 금당에는 간월암이라고 적힌 편액이 하나 더 붙어있었다. 일주문이 하도 작다보니 편액을 붙일만한 공간이 없었나보다.

 법당에는 유형문화재(충남) 목조보살좌상 말고도 무학대사, 만공선사, 벽초대사(만공의 제자)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간월암은 무학대사가 달빛을 보고 득도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만공대사는 암자를 중건했다. 조선불교 초기의 대표적 선승인 무학대사와 근대불교 선종의 중흥기 법통을 이은 만공선사의 정신이 간월암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나 더. 만공스님은 만해스님이나 용성스님처럼 직접 독립운동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원에서 정진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선학원을 만들어 한국불교 말살 정책을 피던 조선총독부의 핍박에서 벗어나 독신 수행가풍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스스로를 인간 부처라 일컫고 근세 선불교의 중흥을 이끈 괴짜 스님 경허대사의 셋째 제자이기도한데, 조계종 최대 문중 중 하나인 덕숭문중은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으로부터 법맥(法脈, 스승과 제자로 엮어진 인맥)을 잇는다.

 범종각과 산신각이다. 산이 있을 리가 없는 이런 꼬맹이 돌섬에 산신각이라니. 만공선사에게 이 돌섬은 산하가 압축된 산수석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바닷가. 그것도 섬에 들어앉았으니 용왕각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그런데 용왕이 아닌 부처님이 용을 타고 있다는 게 특이하다. 바다에서 파도를 다스리고 사람을 지켜준다는 해수관음상도 눈에 띈다. 용왕각 곁에서 소원 초를 켜려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고 있었다.

 마당에는 덩치 큰 사철나무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안내판은 무학대사의 지팡이라고 알려준다. 무학대사가 간월암을 떠나면서 짚고 다니던 주장자(拄杖子, 수행승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뜰에 꽂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나뭇가지가 다시 살아나면 불교가 다시 흥하리라고 예언하셨다나?

 하지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은 폐사됐다. 잊혀진 이름이던 간월암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건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다. 수덕사를 중창하고 마곡사 주지를 지내던 만공선사(滿空禪師, 1871-1946) 간월암 고목나무가 다시 살아나 잎이 핀다는 소문을 듣고 간월암을 찾았다. 그는 고목나무에서 새파란 잎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보았고, 그곳에 머물며 암자를 짓고 손수 간월암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만공스님은 1942 8월부터 3년 동안 이곳에서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1000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도를 마치고 회황한 지 3일 만에 광복을 맞이했다나? 그런 이야기가 퍼지면서 간월암도 세간에 알려졌다. 그래선지 공양실 앞, 테라스풍의 공간에는 소원 연등이 덕지덕지 걸려있었다. 간절한 소원 하나 없는 중생이 어디 있겠는가. 만공선사의 소원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자신들의 바람도 이루지기를 비는 간절한 소원이 담겼을 것이다. 나도 빌어본다. 지친 몸과 마음의 무거운 짐들을 한꺼번에 다 내려놓는 올 한해가 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담장으로 다가가자 고요한 서해가 앞마당인 양 펼쳐진다. 저 멀리 고깃배 몇 척이 한가롭게 떠 있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스카이워크가 다가온다. 그 뒤로는 천수만의 남단이 드넓게 펼쳐진다. 간월도는 천수만의 북쪽 중앙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깝게는 궁리항과 홍성 스카이타워가 보이고,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천수만 입구의 보령화력발전소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간월암은 낮보다 저녁 무렵이 더 사람들로 붐빈다고 했다. 간월암을 배경으로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고 마침내 장엄하게 사그라드는 모습이 잊지 못할 감동을 준다나?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빌려왔다.

 10 : 48. 간월암에서 나와 왼쪽을 보면 긴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진행하는 등대 스탬프투어에 포함되어 있는 곳인데, 어둠이 내리면 방파제와 등대에 조명이 들어와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해준다고 했다.

 간월도항. 방파제는 물론이고 선착장과 물양장까지 갖춘 의젓한 항구이다. 거기다 썰물인데도 저렇게 물이 찰랑거리니 천혜의 항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꼬맹이 고깃배 열대여섯 척이 정박하고 있어 한산함 그 자체였다. 인근 수역에서 우럭·감성돔·농어 등이 잘 잡힌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10 : 55. ‘굴탑광장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관광 명소답게 도로변은 식당이 즐비했다. 하나같이 간월도 어리굴로 만든 영양굴밥을 메인메뉴로 내걸고 있다. 맞다. 굴은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선사시대의 조개더미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랜 세월 바닷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다. 갯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어 어려운 해루질 없이도 쉽게 채취할 수 있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청산별곡(靑山別曲)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식당이 아닌 곳에서는 어김없이 어리굴젓을 팔고 있었다. 좌판 덕장에서는 인근 해역에서 잡아 올린 생선이 꼬실 꼬실 말라가고 있었다.

 천수만은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라고 했다. 그만큼 먹을거리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런 풍경을 만난다. 저게 맹추위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네 밥도둑으로 변해간다.

 길은 천수만로(96번 지방도)’를 향해 간다. 그리고 간월·영농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 구간에서도 천수만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저 갯벌은 어민들의 일터다. 다 자란 굴이 돌이나 바위에서 떨어지면 그것을 주워온다. 뻘로 범벅이 된 굴은 저 갯샘에서 깨끗이 씻을 게고 말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길고 긴 방조제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 우리가 걸어가야 할 둑길이다. 그 시선 끝에는 토끼섬과 창리포구가 겹으로 놓여있다.

 11 : 10. ‘간월·영농교차로(이정표 : 종점까지 7.7km)’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런 다음 간월도리와 창리를 잇는 서산A-2지구 방조제를 탄다. 둑 위로 천수만로를 냈고, 서해랑길은 오른편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내놓은 자전거길을 빌려 쓴다.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 얼마나 넓은지 마한시대 이곳에 있었을 웬만한 나라 하나쯤은 너끈히 먹여 살릴 수도 있겠다. 그 끄트머리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은 도비산일 것이다. 서해랑길의 지선인 ‘64-2코스 답사 때 도비산의 허리 어림을 지나간다.

 도로변에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서산시를 상징하는 만년청(萬年靑)’이라는데, 내한성이 강하고 사계절 푸른 것이 변함없이 씩씩한 서산시민의 기상을 나타낸다나?

 들녘너머 야산에는 서산 버드랜드가 걸터앉았다. 이곳 천수만 일대는 우리나라 최고의 철새도래지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 철새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서산시에서 철새를 테마로 한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철새전시관, 4D영상관, 둥지전망대, 야외광장 등으로 구성되는데,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둥지전망대는 배를 형상화한 하부 구조물과 역동적인 회오리 모양의 상부 구조물이 철새 알을 상징하는 다양한 크기의 원형 공간들과 잘 어우러지는 전망대로 알려진다.

 11 : 41. 옛날 닭섬이라 부르던 곳에는 간월휴게소가 들어서 있었다. 주유소 말고도 식당 두엇이 있어 간월도나 창리포구로 이동하는 길에 들러 한 끼를 때우기 딱 좋은 곳이다.

 길은 버드랜드 교차로를 향해 간다. 도로 건너에는 천수만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주워온 듯한 바위들을 진열해 놓은 풍경인데, 그 뒤에서 토끼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건물에 쓰인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버드랜드가 가까워졌다. 서산 천수만에서 ‘2025 아시아 조류박람회(Asian Bird Fair 2025)’가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울산과 순천에 이어 국내 세 번째인데, 26개국 300명이 넘는 대표단과 연인원 1만 명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조류행사라고 한다. 저런 시설이 있었기에 유치가 가능했지 않나 싶다.

 천수만은 86 7 6029개체의 철새가 확인된다고 했다.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으며 날갯짓을 하는 저 철새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천수만을 따라가는 서해랑길은 곳곳에서 인간과 야생조류가 공존해나가는 가슴 따뜻한 풍경들을 보여준다.

 11 : 53. 버드랜드 진입로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다리 입구에 아라메길의 안내도와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라메는 바다의 순수한 우리말인 아라에 산의 우리말인 를 더한 합성어로 청정한 바다와 수려한 숲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서산시 전역에 17개 구간을 개설할 예정이라는데, 현재 1개 구간 5개 코스만 완성되었단다.

 버드랜드 조형물. 간척사업으로 인해 천수만 주변은 곳곳에 대단위 농경지가 조성됐다. 그 들녘에 추수 후 이삭이 남겨졌고, 거기에 수심 낮은 갯벌의 바다 생물들이 보태지면서 세계적인 철새도래지가 되었다.

 11 : 55  12 : 25. 굴다리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천수만로로 올라간다. 하지만 산악회에서 간월호(창리) 쉼터공원에 잠시 들렀다 가란다. 점심상을 차려놓았으니 끼니를 먼저 때우고 잔여구간을 이어가라는 것이다. 공원은 굴다리 위로 올라선 다음 횡단보도를 건너면 된다.

 공원에는 화장실과 배드민턴장 등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점심상은 차릴만한 주차장도 물론 갖추었다.

 간월도로 향하는 길목에 조성해놓은 공원(‘해당화공원으로도 불리는 모양이다)은 천수만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낮에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고, 저녁에는 노을빛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바닷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바다는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성으로 들어서면서 사라졌던 해식애가 다시 나타났는가하면, 잔물결조차도 일지 않는 천수만에는 바다낚시 좌대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공원 근처에는 파티엔이라는 카라반도 들어서 있었다. 뷰 맛집으로 소문난 곳인데, 부대시설인 카페의 외모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12 : 25. 굴다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후부터는 천수만로를 따라간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잇대어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 부남호 방향으로 간다.

 12 : 37. ‘창리교차로(이정표 : 종점까지 1.9km)’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어서 창리2을 따라 창리 포구로 간다. 포구 풍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천수만로를 따라갈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현대 서산농장 앞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12 : 43.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꼬맹이 고깃배 서너 척이 정박해있는 창촌나루터가 반긴다. 뒤로 보이는 구릉지대는 파티엔 카라반이 들어서 있는 검조도’,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섬이다.

 이후부터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바닷가, 그것도 포구를 낀 바닷가답게 회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12 : 47. ‘창리 선착장은 낚시꾼들 사이에서 소문난 곳이다. 선착장 근처에서 낚시를 즐길 수도 있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좌대 낚시의 재미에 푹 빠져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창리포구의 역사는 조선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군의 배를 매어두던 주사창(舟師倉)이 있었는가 하면, 왜구의 침략이 잦자 태종이 도비산에서 강무(講武, 왕의 앞에서 실시하는 훈련)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선착장이나 물양장 등 부대시설은 간월도항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묶여있는 배의 숫자나 크기는 간월도항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큼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우럭이나 참돔, 점성어 등이 잘 잡힌다고 했다.

 수산복합단지라도 조성했는지 회 타운도 따로 만들어놓았다. 주차장도 차들로 붐빈다. 간월도로 관광 오는 사람들이 먹거리는 이곳에서 찾는 모양이다. 아니 이곳에도 구경거리가 있다고 했다. 매년 정월 초사흗날 창리 영신제가 어촌계 주관으로 열린다는 것이다. 임경업 장군(1594-1646)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굿형 동제로, 300년 넘게 이어져오는 전통 행사라고 한다.

 창리포구 입구. 공중화장실 앞에 서해랑길 64-1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지선이라서 64코스의 종점에서 출발시킬 이유가 없었나 보다. 아무튼 2주 후에는 이곳에서 64-1코스를 시작하게 된다.

 서산64-1코스 안내도. 이곳 창리포구에서 출발 부남호의 동쪽 호안을 거쳐 부석버스정류장에 이르는 11.9km짜리 코스다.

 12 : 54. 창리포구를 빠져나와 천수만로(이정표 : 종점까지 0.7km)’로 올라선다. 서해랑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현대 서산농장 입구로 간다. 정주영 회장이 북한으로 1001마리 소떼를 몰고 간 일화가 깃든 곳으로, 지금은 당시 북으로 실려 갔던 한우의 후손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단다.

 서해랑길은 이제 서산B지구 방조제를 탄다. 초입에 부남호(浮南湖)의 배수갑문이 있다.

 서산B지구 방조제도 길이가 1.228m나 된다. 창리포구와 건너편 당암포구를 잇는 이 방조제는 천수만의 끝이기도 하다. 둑이 완공되면서 천수만의 내륙 쪽 일부가 담수호와 간척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부남호는 다시 바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방조제(1228m) 가운데 일부 구간을 헐어 바닷물이나 배가 드나들게 한다는 것이다. 2019년부터 수질이 6등급 이하(화학적 산소요구량 기준 10mg/L 이상)로 악화되면서 담수호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간척사업 45년 만에 역간척사업으로 변해 세상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13 : 08. 방조제 중간쯤, 그러니까 태안과 서산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태안군 관광안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 안내도(태안 65코스) 안내도는 관광안내소 곁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15.03km 3시간 30분에 걸었다. 간월암을 둘러보느라 지체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 빨리 걸은 셈이다. 하긴 날씨가 춥다보니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광안내소 옥상은 전망대로 꾸며져 있었다. 부남호와 천수만 방향에 망원경은 물론이고 조망도까지 세워 실물과 비교해가면서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천수만 풍경. 좌대낚시터 뒤로 보이는 섬은 황도(荒島)’인데, 연도교(連島橋)로 안면도(安眠島)와 연결된다. 본섬에 딸린 꼬맹이 섬이니 섬 속의 섬이라고나 할까? 곁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작은 솔섬이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오늘도 함께 걸었다. 부부(夫婦)란 결혼한 남편과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한자에서 부()는 지아비, ()는 지어미라는 뜻으로 둘이 나란히 서있는 형상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앞서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의 마음이 멀어져 다른 한 사람이 눈물을 훔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짝으로 생각하면서 함께 나란히 걸어야하는 이유다. 트레킹 덕분이지만, 오늘도 우리 부부는 그런 삶의 지혜를 실천할 수 있었다.

 

서해랑길 63코스(천북굴단지 - 궁리항)

 

여 행 일 : ‘24. 11. 9()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천북면 및 홍성군 서부면 일원

여행코스 : 천북굴단지홍성방조제모산도공원남당항남당노을전망대어사항속동해안공원궁리항(거리/시간 : 11.2km, 실제는 13.3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3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홍성군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천북굴단지 광장(충남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갈산면소재지(상촌리)로 들어온다. 갈산교차로에서 와룡로(남당리방면)를 타고 4km, 이호삼거리에서 40번 국도(남당·천북방면)로 옮겨 12km쯤 내려오면 천북굴단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굴단지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천북굴단지에서 홍성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궁리항까지 가는 11.2km짜리 여정으로, 남당항, 노을전망대, 홍성타워 등 곳곳에 볼거리가 널려있다. 도중에 들르는 포구에서 맛볼 수 있는 싱싱한 생선회는 여행의 또 다른 재미, 특히 어사항에서 구한 칠게 튀김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광장은 지난주에 끝난 굴 축제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고 있었다. 천북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굴의 뛰어난 맛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열어온 축제이다. 굴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을 최고로 치는데, 출하 초기에 맞추어 축제를 연다고 보면 되겠다.

 천북항. 며칠 전, KBS-2TV ‘생생정보통에서 이곳 천북굴단지가 소개됐었다. 어부는 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그물망에 가득 든 튼실한 굴을 건져내며 웃음꽃을 활짝 피웠었다. 하나 더. 새벽이면 굴세척과 선별작업으로 분주한 이색적인 풍경과도 마주할 수 있단다.

 10 : 23. 홍성방조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둑 위로 국도 40호선(홍보로)이 지나간다. 도로 양옆으로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천수만은 천북면 어민들의 보물 창고다. ‘바다의 보석이라는 석화(石花)를 무럭무럭 키워내니 말이다.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탁월한 품질을 자랑한단다. 식감이 쫄깃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 꼽힌다.

 오른쪽은 방조제를 막으면서 생긴 홍성호이다. 풍광이 뛰어난데다 붕어나 잉어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발길이 잦은 곳이다. 반면에 버려진 쓰레기와 불법어구로 인해 환경오염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지만.

 10 : 34. 홍성에서의 첫 만남은 수룡항이다. 포구에는 해양경찰의 수룡동파출소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수룡동마을은 홍성호의 안쪽 깊숙이에 있다. 그러니 홍성방조제로 인해 바닷길이 끊긴 어민들을 위해 새로 조성한 항구일 것이다.

 이어서 홍성교를 건넌다. 홍성방조제는 모산도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배수갑문은 그중 남쪽 방조제의 북단에 위치한다. 그 배수갑문에 놓인 다리가 홍성교이다.

 10 : 40.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있지만 모산도(茅山島)’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조망의 명소이니 꼭 들러보라던 지인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너스로 홍성방조제준공탑도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홍성교에서 150m쯤 북진하다보면, 도로변에 쳐놓은 철책을 1m쯤 띄운 다음 사철나무 숲 사이로 길을 만들어놓았다.

 10 : 43. 지인의 말대로 산마루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조망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은 모산도(茅山島), 이름처럼 산으로 이루어졌고 이곳은 그 꼭대기다. 하지만 고도계는 기껏 42m를 찍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주위가 제로 레벨이어서 사방으로 시야가 툭 트이는 것이다.

 방조제 끝에는 최근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다는 천북 굴단지가 놓여있다. 이를 가운데 두고 홍성호와 천수만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홍성호는 금리천(錦里川)의 하구역에 둑을 쌓아 만든 담수호이다. 아름다운 호수로 입소문을 탔지만 아쉽게도 역광이 망쳐버렸다. 참고로 금리천은 은하면(홍성군) 장곡리에서 발원 금국리·학산리·금곡리(결성면)를 지나 성남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길이 7.2km의 지방하천이다.

 방조제준공탑’. 1991-2001, 보령·홍성지구 대단위 농업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보령방조제와 홍성방조제를 쌓았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보령호와 홍성호이다. 이곳이 홍성인데도 보령·홍성방조제준공탑인 이유다. ! 옆에 풍력발전기도 세워져 있었으나 얘깃거리가 없어 생략했다.

 진입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김자 결성현감 승전지비(金滋 結城縣監 勝戰址碑)’를 만났다. 이곳 모산도(혹은 모산포)는 왜구의 노략질이 잦은 곳이었단다. 빗돌은 조선 태종 8(1408) 결성현감 김자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빗돌에 적힌 결성현은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이다. ‘홍성이라는 지명은 홍주와 결성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10 : 51. 다시 만난 국도.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모산도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널찍한 주차장 앞 솔숲에 쉼터 겸 정자가 놓여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아른거린다. 예전 이곳은 모산도(茅山島)’라는 섬이었다. 금리천이 황해와 만나는 지점에 방조제를 쌓으면서 육지가 되었다.

 공원에서의 조망도 빼어난 편이다. 천북굴단지에서 남당항까지 천수만의 너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천북이 굴 구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면, 반대편에 위치한 남당항(사진)은 대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10 : 54.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홍성호의 북쪽 방조제이다. 홍성방조제는 남·북 방조제를 합칠 경우 1,856m나 된다. 올망졸망한 섬들로 수놓인 천수만이 없었더라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긴 방조제다.

 천수만은 세계적 철새 도래지이다. 기러기·독수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생태적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저 고니(?) 무리는 그중 선발대일까?

 11 : 02. 홍성방조제는 북단에 있는 신리교차로에서 끝을 맺는다.

 홍성군은 이정표를 조금 다르게 운용하고 있었다. 종점과 시점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요 지점을 끼워 넣던 다른 지자체들과는 달리, ·종점은 하단의 지도에만 표시하고 날개부분에는 주요 지점들을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남당항을 바라보며 간다. 도로는 홍보로에서 남당관광로로 바뀐다.

 이때 천수만에서 죽도가 떠오른다. 5년도 더 전에 다녀왔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섬이다. 이름처럼 대나무가 많았던 섬, 두 개의 섬이 육계사주(陸繫砂洲)로 연결되어 있던 섬이다. 당시 기억을 잠시 빌려보자. <전망대에 오르면 하늘이 반, 바다가 반이다. 높이에 비해 전망이 시원하다는 얘기다. 천수만에 동동 떠있는 죽도는 자신보다 작은 11개의 섬을 거느린다. 올망졸망 새끼 섬들이 부러운 듯 그리운 듯 죽도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일부 섬은 물이 들고 남에 따라 가느다란 모래 띠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도 한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본섬의 서쪽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 충태섬이 내려다보이고, 북쪽 방향으로 띠섬(모도), 멍대기(명덕도), 오가리(큰오가도와 작은오가도), 전재기(전도) 등이 늘어서 있다. , 남쪽 끝섬으로는 지마녀, 움마녀, 제일 북쪽 섬으로 꼬장마녀 등이 있다. 마녀의 뜻은 만조시간이 긴 섬이라는 의미이며, 꼬장은 끝장 , 제일 북쪽의 끝을 의미한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육지의 맨 끝을 장식하고 있는 꽃섬이 눈에 들어온다. 지인으로부터 꼭 들러보라던 명소 중 하나이다.

 11 : 14. 작은 동네(‘소섬마을일 것이다)를 횡단하자 또 다시 바다가 나왔다.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꽃섬부터 일단 둘러보기로 했다.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빌던 당산(堂山)이었던 곳이다.

 당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굵직한 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제단 등 제사를 지낸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탐방로는 이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물 빠진 갯가를 따라 걷는 해안길은 정면에 남당항을 놓고 길을 이어간다.

 왼쪽으로는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천수만(淺水灣)은 안면도와 충청남도 해안선에 둘러싸인 만이다. 서산시·보령시·태안군·홍성군 등 4개 시군에 접하고 있으며 항구도 수십 개에 이른다.

 11 : 27. ‘남당항(南塘港)’에 이른다. 서부면 남당리에 있는 국가어항으로 남당이란 지명은 조선 영조 때 학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낙향하여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송시열·권상하의 학통을 이어 정통 주자학을 계승·발전시켰으나, 변화하는 시대(당시는 실학자들의 사회개혁론이 제기되던 시기였다)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해양분수공원이다. 남당항의 거대한 광장 한가운데 음악과 분수쇼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바닥 분수와 형형색색 무지갯빛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저곳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단다. 바닥분수에서 팡팡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흠뻑 맞은 아이들이 사방팔방 물총을 쏘아대며 물놀이를 즐긴단다.

 국내 최초의 해양형 네트 어드벤처라고 한다. 팡팡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면 두 눈에 천수만이 가득 담긴다나? 튀어 올라 가까운 죽도도 보고, 한 번 더 높이 튀어 오르면 저 너머의 안면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안에서는 아이들 두엇이 탄탄한 그물네트를 발판삼아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위아래 위위아래 박자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길은 방파제에 기대듯 내놓았다. 바닥을 형형색색의 꽃들로 채워 넣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하지만 분수 주변에 있다는 트릭아트는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니 있는 줄도 몰랐다. 일류의 포토죤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I  NAMDANG’. 이렇게 공들여서 포구를 꾸몄으니 사랑받을 만도 하겠다.

 작은 광장도 눈에 띈다. 방파제에 잇댄 작은 공간을 만들었으나, 힘들게 만들었을 그 공간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여행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비우듯 채워져 있는 공간에서 문득 도()까지 떠올렸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감각적인 멋이 뚝뚝 떨어지는 새조개 형상의 의자. 평생을 꽃띠로 살고자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정박되어 있는 배는 별로 없지만, 남당항은 현제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지 어선이 70척 이상이어야 지정받을 수 있다니, 천수만에서 가장 큰 어항으로 보면 되겠다.

 홍성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홍성 서해랑길 63코스 걷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당항 분수공원에서 출발 5km를 왕복하는 행사인데, 반려견과 함께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자에게는 기념품까지 준다고 한다.

 길은 자연스레 남당항 수산시장으로 이어진다.

 상가는 횟집 일색이다. 활어회에 해물탕, 칼국수 등 메뉴도 다양하지만 새조개를 팔지 않는 집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긴 새조개 축제까지 열리는 곳이니 어련하겠는가. 축제 때는 살이 통통하고 맛이 좋기로 이름난 천수만 새조개를 맛보러 전국 각지에서 미식가들이 몰려온단다.

 상가 앞 조형물.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상인 두엇이 담소를 나누다가 뭐처럼 생겼냐며 물어온다. ‘꽃게 발?’ ! 하며 도리질을 하는 그녀. 그리고는 남당항을 유명하게 만든 게 새조개 축제였다고 알려준다. 맞다. ‘남당항은 겨울 새조개 고장의 대명사로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10분 거리에 있는 죽도로 들어가는 여객선 선착장. 남당항에서 죽도까지는 40인승 홍주호가 하루 5회 왕복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엔 오전 10시 한 차례 추가 운항하고, 죽도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는 오후 5시다.

 11 : 43. 수산시장 뒤(이정표 : 종점까지 6.7km)에 이르면 남당항 구경은 끝난다. 활처럼 바다로 휘어나간 방파제 입구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은 또 다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해안은 웬만한 해수욕장은 저리가라다.

 홍성에는 해수욕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4년 전쯤 거친 돌부리만 가득했던 저곳에 많은 모래를 쏟아 부어 인공해변을 만들었단다. 모험이라 할 수 있는데 저렇게 모래가 유실되지 않고 남아있으니 성공한 셈이다. 오히려 바닷물이 드나든 자국까지 부드럽게 나있는 게 천연의 모래사장이 전혀 부럽지 않게 됐다.

 11 : 53. ’남당 노을전망대이다. 바다로 휘어진 길모퉁이에서 딱 그 모양대로 곡선을 그리며 돌출된 해상 전망대다. 금빛 모래사장 위로 붉은색 다리를 놓고 그 끄트머리에 전망대를 들어앉혔는데, 해질 무렵이면 천수만 바다와 물기 촉촉한 갯벌까지 한꺼번에 붉은 기운에 휩싸인다고 했다.

 옆에서 본 노을전망대. 길이 102m에 높이가 13m나 되는 다리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한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있어 걸을라치면 마치 하늘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바다 품은 작은 섬 그러나 천지가 선경인 섬, 죽도.  죽도 죽도록 사랑하란다. 맞다. 내가 기억하는 죽도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섬이었다. 참고로 죽도는 홍성군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일한 섬이다. 천수만(淺水灣)의 고요한 물결 위에 떠있 듯 자리한 본섬을 11개의 꼬맹이 섬들이 호위하는 모양새인데 그 자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덕분에 낭만과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다른 기억을 소환해보자. 죽도는 눈을 들이대는 곳마다 세외선경이 펼쳐졌었다. 꾸며놓은 솜씨도 최고였다. 그중에서도 옹팡섬·동바지·담깨비 등의 조망대에서 만난 캐릭터들은 백미였다. 최영·한용운·김좌진 등 홍성이 낳은 인물들을 모셨다. 그중에서도 담깨비조망대에서 만난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본군을 대파했던 청산리대첩의 주역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군이 아닌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나라보다 이념을 더 중요시하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를 빠져나와 다시 북진한다. 어느 기자는 이 구간을 임해관광도로로 적고 있었다. 그래선지 뷰가 좋은 카페나 음식점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띈다. 이 구간 어디서나 천수만 바다와 그 너머 안면도가 눈에 쏙 들어오기에 가능할 것이다.

 12 : 06.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어사항(於沙港)’에 이른다. 천수만에 기대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어촌이다. 앞에는 물고기가 많은 천수만이 있고, 주변 모래밭이 넓어 어사라는 명칭이 생겼단다.

 어사항 초입에서 만난 카페, 젊은이들로 붐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화려하게 치장된 여느 카페들과는 달리 단순하면서도 넓은 창으로 노을을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더 특이한 것은 최고의 로큰롤 앨범으로 꼽히는 비틀스의 8집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상호로 내건 것이다.

 밖에는 비틀즈의 11번째이자 마지막 음반인 ‘Abbey road’를 사진으로 제작 게시해 놓았다. 비틀즈의 음악 세계로 들어서는 가장 탁월한 시작점이 되어준 마지막 앨범으로 평가받는 앨범이다.

 12 : 09  12 : 18. ‘어사항은 인근 남당항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 하지만 이곳 또한 대하집산지다. 새조개도 흔하게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온통 칠게만 들어왔고, 그걸 튀김으로 부탁해서 챙겨왔다. 도반 한 분이 연태 고량주를 병째로 주겠다는데, 이만한 안주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후부터는 홍성스카이타워를 전면에 두고 간다.

 12 : 22 - 12 : 51. ‘어사리 노을공원’. 어사항 근처의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공원으로 산책로와 정자, 전망대, 광장 및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까 어사항에서 구입한 칠게 튀김에 반주를 곁들일 수 있는 좋은 쉼터가 되어주었다.

 노을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두 남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소중한 약속을 하는 모습을 담은 조형물(행복한 시간)이다. ’투조기법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낮에는 푸른 하늘빛을 담고 저녁에는 노을로 붉게 물드는 남녀의 얼굴을 보여준단다. 연인들이 바다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하늘빛을 담은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존도 만들어놓았다.

 남당항의 노을전망대보다 낮기는 하지만 이곳에도 노을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전망대 끝에 또 하나의 대를 세워 시야를 넓혔다. 천혜의 자원인 천수만 노을을 조금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전망대답게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천수만과 그 건너 안면도가 은밀한 속살까지 내보여준다.

 진행방향에는 홍성스카이타워가 놓여있다.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궁리항일 것이다.

 홍성군의 관광안내판은 ‘12을 꼽는다. 거기에 5(한우··새우젓·친환경농산물·한돈) 3(한우구이·대하구이·새조개 샤브샤브)를 추가하고 있었다.

 12 : 55. 다시 길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횟집타운이 조성되어 있었다. 생선을 공급해줄 포구도 없는데 말이다. 유난히도 해안선이 짧은 홍성의 특징이지 싶다. 실제 홍성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남당항을 얘기하면 금방 거기가 홍성이었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로 바다를 접한 면이 짧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홍성의 해변은 북쪽 궁리항에서 남쪽 홍성방조제까지 약 10km에 불과하다.

 이곳은 저녁노을의 명소. 먹거리에 눈요기를 보태라는 듯, 바닷가에 테라스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식탁까지 배치했다.

 13 : 00. ’어사교(이정표 : 종점까지 4.1km)‘를 건넌다. 어사지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어사리를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다리를 기점으로 거차리에 바톤을 넘겨준다.

 저것은 현대식 독살? ‘독살은 해변에 돌담을 쌓아 들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 때 잡는 원시어로 방법이다. 일종의 돌 그물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은 부표를 매단 그물이 독담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2차선의 도로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나있다.

 ! ‘화살나무도 열매를 맺는가 보다. 난생 처음 마주한 상황이니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연새골 선착장이 있는 이곳은 400m쯤 되는 해안선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상점이나 펜션이 일절 없는 조용한 해변공원이다. 그러니 삭막한 도로변을 떠나 잠시지만 숲길을 걸어보자.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멋진 풍차가 반긴다. 근처 숲에는 원두막도 들어서 있다. 가족단위의 피크닉을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로 하겠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조금 전 지나온 어사리노을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오른편에는 천수만 놓여있다.

 ‘13 : 13. 연새골선착장 진입로를 이용해 남당항로로 다시 올라왔다. 150m쯤 더 걸으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나,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조금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펼쳐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민들에게 갯벌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그러니 그 일터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어야만 한다.

 13 : 25. 그렇게 잠시 걸으면 속동해양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2.5km)’이 얼굴을 내민다. ! 오다가 만난 두리팜이란 건물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두리+농장?,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농산물을 길러,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농장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속동마을에서 만났으니 응당 속동 선착장이겠지?

 서해랑길은 이제 속동해안공원의 산책로를 따라간다. 500m쯤 되는 바닷가를 따라 좁고 길게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이즈음 모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육지와 연결되어있다.

 13 : 39. 길은 상황교 아래 나무다리를 지나 홍성스카이타워로 향한다. 옛 속동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어진 65m 높이의 타워는 기세도 당당하다. 올해 5월에 문을 열었는데도 이미 홍성의 랜드 마크로 자리를 잡았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면 죽도부터 멀리 안면도까지 천수만의 풍경이 두 눈에 와락 안겨 온다. 하지만 아래층에 있다는 실내전망대는 들러보지 못했다. 투명 강화유리가 깔린 스카이워크가 있어, 아드레날린이 확 솟구치는 아찔한 스릴을 즐길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도가 발아래 놓여있는가 하면, 호수를 닮은 천수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렬로 늘어선 것처럼 보였던 죽도와 이에 딸린 섬들이 앞뒤로 입체감을 드러낸다. 천수만 너머로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태안반도가 뻗어 있다. 높이만 살짝 바뀌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풍광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궁리항 쪽의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홍성의 해안은 궁리항에서 홍성방조제까지 이어진다. 관광지로 제법 알려진 남당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소박한 갯마을들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바다와 육지가 조화를 이루는 해넘이를 보여준다나?

 타워에서 내려오니 서해랑길 쉼터가 눈에 띈다. 홍성군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코리아둘레길 쉼터운영 및 지역관광자원 연계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선정됐다더니 그 일환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어반스케치 트래킹 체험인 나만의 노을 남기기’, ‘남당플로깅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했다.

 13 : 48.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기로 했다. , 아니 가슴에 담을만한 구경거리라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13 : 50. 꼬맹이 무인도인 모섬은 데크 로드로 연결되고 있었다. 간월암이 바라보이는 섬의 꼭대기까지 산책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간식을 먹느라 여유시간을 다 써버린 탓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13 : 55. ‘모도 앞에서 방향을 튼 길은 남당항로까지 다시 데려다준다.

 이 구간에도 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캠크닉(캠핑과 피크닉의 합성어) 성지로 알려지는 곳이다. 그래선지 텐트는 물론이고 캠핑카도 여럿 눈에 띄었다. 간이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펴고 노을을 감상하려는 이들일 것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해안도로를 벗어나 바닷가로 간다. 해안선을 따라 축대를 쌓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궁리항의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저 산봉우리는 풍섬이라고 했다. 개발 바람을 맞아 이미 육지가 되어버렸지만.

 14 : 17. ‘궁리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한적한 어촌 마을인 궁리포구는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이 평화롭다. 기다란 방파제로 연결된 선착장에는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싣고 온 고깃배가 수시로 들어온다. 하나 더. 궁리포구에도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바다 위에 놀궁리(’궁리항에서 놀자?) 해상파크를 만들어 색다른 낙조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궁리어판장은 낚시질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다. 이곳 궁리포구가 가족단위 낚시터로 그만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서해랑길(서산 64코스) 안내도는 보령해양경찰서 궁리파출소의 뒤쪽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3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62코스(충청수영성  천북굴단지)

 

여 행 일 : ‘24. 11. 9()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천북면 일원

여행코스 : 충청수영성보령방조제하만저수지사호회전교차로사기점저수지사호리 노두길천북굴단지(거리/시간 : 15.9km, 실제는 15.28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2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충청수영성 주차장(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서해안고속도로 광천 IC에서 내려와 광천읍까지 온다. 단아래사거리에서 21번 국도(보령방면으로 8km), 청소면의용소방대 앞에서 610번 지방도(도미항로)로 옮겨 7km쯤 들어오면 충청수영성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62코스) 안내도는 충청수영성의 서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천항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천북굴단지까지 가는 15.9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충청수영성(‘보령9경 더하기 7)과 사호리해안의 노두길, 천북굴단지 등이 꼽힌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물때에 맞춰 답사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바닷물이 차오르면 해식애를 낀 노두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 : 30. 충청수영성의 서문(西門)’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조선시대 서해 해군사령부였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대흥산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충청수영의 규모는 군선 142, 수군 8414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종 33(1896)에 폐영(廢營)됐다.

 뒤돌아본 서문. 충청수영성에는 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4곳의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문인 망화문만 홍예문 형태로 남아 있다.

 성곽은 대흥산의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됐다. 그러니 잠시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밖에 없다.

 서문을 들어서자 진휼청(賑恤廳, 도 문화재자료 제412)이 맞는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덕분에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으로 이루어진 내부구조는 고사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마저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참고로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수영이 폐쇄된 후 민가로 팔렸다가 1994년 다시 매입했다고 한다.

 충청수군의 군선과 수군들로 북적였을 오천항. 천혜의 입지 덕택에 오천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교역항 역할을 맡아왔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런데 포구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쩌면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임을 알리던 초입의 안내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면 다 돼!’를 외치던 그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에 나 역시 푹 빠져 있었으니까.

 영보정(永保亭)은 연산군 11(1504) 수사로 부임한 이량(李良)에 의해 세워졌다. ‘영원히 보전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忠君憂國之意)’도 담고 있단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채팽윤(蔡彭胤, 1669-1731) 호서의 많은 산과 물 중에 영보정이 가장 뛰어나다고 극찬했을 정도라나? 충청수영성이 폐쇄되면서 함께 사라졌으나 2015년 복원을 마친 덕분에 그 아름다움을 실제 체감해 볼 수 있었다.

 천상누대 화중강산(天上樓臺 畵中江山)’라고 쓰인 편액이 눈길을 끈다. ‘천상의 누대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지는구나.’ 영보정에서의 조망을 이 여덟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액의 자랑처럼 영보정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발아래로 광천천의 하구역이자 천수만 입구의 바다가 펼쳐진다. 충청수군의 군선들로 붐볐을 바다는 푸른 하늘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바다는 지금 자그마한 어선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10 : 40. 영보정을 지나온 길은 충청수영성의 성벽으로 향한다. 이어서 성곽을 관통하고 있는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를 횡단한다. 북문지(北門址)로 예상되는 지점인데, 충청수영성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성곽은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해 많이 훼손됐다. 그나마 성지(城址)나 그 주변 지형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가 보다. 국가 문화재(사적 제501)로 지정된 걸 보면 말이다.

 도로를 건너자 장교청(將校廳, 사진)’ 내삼문(內三門)’이 맞는다. 객사(장교청) 운주헌(運籌軒, 도 문화재자료 제411)’은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폐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이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삼문(위 사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은 수군절제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控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이다.

 장교청 앞의 선정비들. 충청수영성은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저 많은 빗돌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관할 해역이 북쪽 아산만에서 남쪽 금강 하구 장항만에 이르렀다.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250개나 된다.

 탐방로는 이제 성벽을 따라 간다. 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외축내탁(外築內托)의 축성술을 이용했다. 길은 그런 성벽 위로 나있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1509(중종 4)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서해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돌로 축성했다. 성벽은 길이가 1650m에 이른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걷지는 말자. 뒤돌아볼라치면 장교청과 영보정은 물론이고 성벽까지 충청수영성의 전모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충청수영성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과 백사 이항복도 영보정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했단다.

 탐방로는 산등성이를 따라간다. 성벽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 아니 그마저도 웃자란 잡초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10 : 46. ‘만경문(萬頃門)’이 있던 동문지(東門址). 안내문은 동문이 성벽 사이에 누각을 짓는 개거식(開拒式)이라고 적었다. 성문 가까이의 성벽에 돌출시켜 만든 적대(敵臺)’도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터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10 : 49. 동문지에서 바닷가로 내려간다. 이어서 소성2리 경로당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로 올라선다. 인도가 따로 없어 안전에 각별한 유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10 : 58. 보령방조제의 남단인 소성삼거리’.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충청수영 해안경관조망대가 있다는 것이다. 오천의 아름다움을 파노라마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는데 다녀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하나 더. 직진하면 도미부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정절사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역시 잠깐 다녀오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지만.

 서해랑길은 이제 홍보로(국도 40호선)’를 따라간다. 오천면과 천북면을 잇는 보령방조제의 제방 위로 동명의 차도가 나있다. 양옆에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 구간에서의 자랑거리는 조망이다. 둑길을 걸으며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보령호의 풍경을 색다른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천북마리나에 정박된 요트들의 이국적인 풍경도 함께 눈에 담을 수 있다.

 이즈음 천수만에 어깨를 기댄 충청수영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충청수영성은 안면도·원산도로 둘러싸인 천수만에서도 좁은 내만(內灣)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만 앞바다의 수심이 깊은 데다 서해안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다른 포구와는 달리 배가 드나드는 데 어려움이 없단다. 주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의 자연 지형까지 감안하면 천혜의 해군 요새라 할 수 있다.

 이곳은 낙조 감상의 포인트이기도 한 모양이다. 포토존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안내판은 또 정절의 상징인 도미부인의 설화를 바탕으로 주변 경관을 연계시킨 도미부인 솔바람길이 지나간다는 것도 살짝 귀띔해준다.

 오른쪽에는 보령호가 있다.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겼으니 당연한 지명이겠으나, 그 보령호가 광천천의 물길을 가로막은 내수면임을 감안하면 마땅치 않은 이름일 수도 있겠다. 하나 더. 호수 너머로 보이는 섬은 정절을 상징하는 도미부인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빙도(미인도)’. 도미부부가 태어난 곳으로, 백제 개루왕으로부터 수난을 당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한다.

 11 : 09. 배수갑문. 길이 1,082m(높이 20.7m)의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보령호의 담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수문이다.

 11 : 16. 도로를 따라 5-6분쯤 걸었을까. 서해랑길 표식이 오른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농로를 따라 들녘을 에둘러가는 구간인데, 속도를 올리기 딱 좋은 직선도로인데다 인도까지 없는 국도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오가는 차량들을 조심해서 걷기만 하면 되는데, 눈요깃거리도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깃거리도 없는 들녘을 일부러 에둘러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거리까지 1km 가깝게 단축할 수 있는데 뭘 망설이겠는가.

 예상대로 인도는 따로 없었다. 거기다 안전선이랄 수 있는 흰색 페인트 선의 바깥도 한 사람이 걸어가기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폭이 좁았다. 나를 믿고 따라오는 도반들에게 약간 미안할 정도로... 하지만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가 그 미안함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하만3’, 이즈음 오른쪽으로 두룽개들이 펼쳐진다. 서해랑길은 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있다.

 도로변에는 두만소류지라는 둠벙에 가까운 저수지도 있었다. 입질이 좋은지 강태공들 여럿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11 : 36. ‘하만3리 노인정에 이른다. 옆에 있는 천북농협 벼 건조·저장시설의 규모가 무척 크다. 천북면 주민들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43. ‘동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났다. 샛길(농로)이 국도를 가로지르는 간이 사거리인데, 이정표(종점 8.5km/ 시점 7.4km)는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도로를 건너면 대궁골(하만4)’. 전형적인 시골 풍경과 마주친다. 민가 대여섯 채가 산자락에 기대듯 들어섰는데, 마을 앞으로 산골 치고는 제법 너른 들녘이 풍요롭게 펼쳐진다. 널찍한 들녘은 인심까지도 넉넉하게 만드나보다. 주민 한 분이 처음 본 나그네에게 요기나 하라며 삶은 밤을 한 움큼이나 주셨다.

 11 : 59. ‘하만4리 노인정 앞에서 하학로로 올라선다. 아까 걸어왔던 홍보로(국도 40호선)’가 하만교차로에서 가지를 쳐놓은 지선이다. 보령과 홍성을 잇는 홍보로는 천북굴단지로 가고, 갈려나온 하학로는 이곳 하만4리 대궁골과 사호3리 짓개마을을 거쳐 천수만으로 나간다.

 12 : 06. ‘하만 회전교차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맨삽지(학성리)’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다녀올 수 있다는 몽중루 작가님의 조언에 귀가 솔깃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록암(고성)과 사도·추도·낭도(여수)에서 실컷 보았던 기억이 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2 : 10 - 12 : 20. ‘사호1 버스정류장. 걷기 여행자들에게 쉼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고 그 역할은 주민들의 참새 방앗간인 마을 정자가 대신해주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정자를 만나지 못한 경우에는 버스정류장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다.

 사호교차로부터는 사호장은로를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가을빛으로 가득한 농촌 마을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마을 앞. 추수가 끝난 들녘은 텅 비어있다. 아니 곤포사일리지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늦가을의 진풍경이라 하겠다.

 12 : 32. ‘사호축산(영농법인)’의 거대한 축사를 지나자 사기점저수지가 얼굴을 내민다. ‘사기점(사호1)’ 마을의 입구이기도 하다. ‘사기점(沙器店)’은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가마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단다.

 12 : 42. 서해랑길은 사호3 버스정류장 앞에서 차도(사호장은로)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천수만으로 간다. 들머리의 표지석이 사호3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짓개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뀐다. 농경지였던 들녘이 어느새 대하양식장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 했던가? 오늘도 난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대하양식장의 바닥이 비닐로 코팅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물만 빼면 대하를 쓸어 담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 방법인가.

 12 : 48. 대하양식장을 기웃거리다 작은 방조제(싯개 들녘을 만든) 위로 올라선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둑에는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km) 말고도 천북굴따라길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천북굴단지를 종점과 시점으로 각각 삼고 있으니 두 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천북 굴 따라 길은 장은리 천북 굴단지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학성리 맨삽지까지 천북면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놓은 길이 7.8km의 둘레길이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바닷가를 걸으며 굴을 길러내는 양식장을 가까이서 눈에 담을 수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걷기에 제격이다.

 12 : 54. 잠시 후, 나지막한 그러나 경사가 무척 가파른 산 하나가 앞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길은 오른쪽으로 나있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바닷가 방향이다. 해안선을 따라 데크 로드를 내놓았다.

 이곳은 물때에 따라 진행방향을 달리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출렁다리까지는 노두길을 걸어야 하는데 바닷물이 차오르면 통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초입에 우회로 안내 현수막을 설치하고 QR코드로 만조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 더. 간조 시각 전후로 2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걷기를 권한다. 바닷물은 생각보다 빠르게 차오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산자락과 바다의 경계를 따라 다리를 놓듯 길은 내놓았다

 천수만 입구 쪽 풍경이다. 건너편 학성리(천북면) 해안 앞에 작은 섬 하나가 오롯이 떠있다. 공룡발자국화석이 별견되었다는 맨삽지일지도 모르겠다. 보령시에서 공룡 테마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3 : 01 : 그렇게 얼마를 걷자 작은 포구가 길손을 맞는다. ‘사호3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열호동(烈湖洞, 우리말로는 여르문이)’인데, 안면도와 마주하는 해안에 포구가 들어서 있다.

 여르문이 마을 앞에서 바닷가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북진한다. 갯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어선지 바닷가를 따라 시멘트로 길을 내놓았다. 이곳은 그 유명한 천북 굴이 생산되는 곳이다. 주민들이 생산한 굴을 가득 실은 경운기들이 노두길을 따라 줄지어 나오는 풍경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본다.

 서해랑길은 이제 천수만의 해안사빈(海岸沙濱)을 따라간다. 같은 천수만인데도 앞서 오천항에서 보았던 바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선박들이 오가는 푸른 바다 대신 검붉은 갯벌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갯벌을 나누어놓은 저 경계표시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경지정리를 끝낸 농경지처럼 반듯하게 나누어놓았다. 갯벌도 구역에 따라 주인이 따로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각자의 구역에 돌과 자갈을 넣어 굴 생산을 하는 모양이고 말이다. 하나 더. ‘천북 굴은 줄에 매달아 기르는 남해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굴을 기른다고 했다. 갯벌에 돌을 넣거나 나무를 꽂는 방식으로 굴을 양식한단다.

 길은 침식해안을 따라간다. 이때 전국의 유명 바닷가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풍광이 펼쳐진다. 인근인 서산에도 황금산과 그 아랫자락을 에돌아가는 빼어난 풍광의 해안이 있다. 해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고 있는 곳, 그리고 파도와 몽돌의 절묘한 하모니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한 기경을 이곳에서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식애(海蝕崖)와 해식동, 파식대(波蝕臺), 간석지 등의 해안 지형이 번갈아가며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진풍경을 가슴에 담아가는 신선놀음은 15분 정도 계속된다. ! ‘천북 굴따라 길 중에서 순수하게 갯벌을 따라 걷는 구간은 5km 남짓 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해안은 온통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다. 해식작용으로 인해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파도가 만들어낸 동굴들로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13 : 19. 그렇게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하파동에 이른다. 사호3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인데, 마을 앞 바다가 육지를 향해 푹 파고들어와 작은 만()을 만들어놓았다.

 이때 옛 멋을 풀풀 풍기는 노두길이 나타나면서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오래전 바닷가 사람들은 섬과 섬, 또는 육지와 섬 사이 갯벌에 돌을 던져 징검다리 길을 만들었다. 돌을 던져 만든 그 노두길은 어촌 주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걷기 여행자들의 마음을 끌어 잇는다. 노두길은 하루에 두 번씩 사라졌다 생겼다 한다. 물이 차면 수평선 아래로 숨었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나타나는 신비함 때문에 호사가들은 기적의 여행길이라고도 부른다.

 공자님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배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일 것이다. 갯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민들의 목욕탕일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흘려버렸던 저 바닷가 저수조(‘갯샘이라고 했다), 실은 바다에서 캐온 조개류를 세척하는 용도였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지금의 나처럼..

 13 : 23. 건너편에서 다시 데크 로드로 올라간다. 아니, 길이라기에는 길이가 너무 짧았다. 쉼터를 겸한 전망대를 만들면서 바닥과 연결시키는 구간을 조금 길해 해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잘 단장되어 있었다. 데크 길은 흠하나 보이지 않고, 경관이 좋은 곳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곳에서는 너무 서두르지 말자. 벤치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잠깐의 여유라도 부려 볼 일이다.

 평생을 방년(芳年)’이고 싶어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자세부터 잡고 본다. 그러자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함께 하자며 우격다짐으로 달려든다.

 천북 굴따라 길의 종점인 맨삽지(학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유명하다. 2015 4, 30센티 안팎의 원형 발자국 화석 10여 개가 발견됐는데, 역사·지리적으로 가치가 높아 학계의 주목을 받는단다.

 데크 로드는 금방 끝났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또 다시 북진한다. 아까만치는 아니어도 눈요깃거리로 넘치는 구간이다. 작은 바위벼랑과 손바닥만 한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해안은 귀엽기까지 하다.

 13 : 32. ‘불모골이란다. 모래보다는 잔자갈에 가깝지만, 해변이 꽤 넓어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소문난 해수욕장이 하도 많은 보령이라서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해안에는 제철 만난 칠면초가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이다. 갯벌을 뒤덮고 있는 저 염생식물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해변은 가을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철 바닷가는 그래서 더 예뻐진다.

 13 : 34. 해변이 끝나갈 즈음(이정표 : 천북굴단지 1.8km/ 하파동 740m)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바위벼랑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에 잠기기 때문에 길을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계단 위에는 또 하나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난간에 서자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푸른 바다 위로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다닌다. 저 바다는 저녁에 방점을 찍는다고 했다. 아름다운 바다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이 장관을 이룬단다.

 걸어서 행복한 작곡가 정의송 영상 노래길이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정의송은 참아주세요(뱀이다), 빠이빠이야(소명), 어부바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킨 유명 작곡가이다. ‘보령에 가자(문희경 노래)’라는 노래도 지었다고 하더니, 이를 들려주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형물은 노래는커녕 전광판에 전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굴은 지방이 적고 미네랄이 풍부한 식품으로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이 최고의 상품으로 꼽힌다. 특히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많이 함유돼 있고 타우린도 많아 콜레스테롤과 혈압 저하 효능이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식감이 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도 손꼽혀 겨울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천북 굴을 즐겨 먹는다.

 이후부터는 숲속을 걷는다. 경사진 산비탈에 용케도 길을 냈다. 그것도 널찍하게

 13 : 39. 또 다시 내려선 해안(이정표 : 종점까지 1.5km) 아래사정이란다. ‘사호2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아래사정 앞 해변은 장은리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 지나간다. 그곳에 출렁다리가 놓여있었다.

 출렁다리를 건넌 다음 산속으로 들어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길을 내놓았는데, 다양한 화초들이 길가에서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숲속에 들어앉은 숙이뜰이라는 산채농장에서 심어놓았지 않나 싶다.

 개미취도 그중 하나다. 조경용보다는 척박한 땅의 녹화용으로 제격인 화초이다.

 13 : 52. 숲길을 빠져나오니 펜션단지가 반긴다. 비탈진 산자락에 숙박시설들이 꽉 들어차 있다. ‘천수만 관광휴양단지라고 한다.

 관광휴양단지답게 쉼터를 겸한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었다.

 드넓은 천수만에는 꼬맹이 섬들이 올망졸망 파도에 떠밀리고 있었다. 그 뒤는 안면도가 반도처럼 길게 뻗어나간다. 참고로 보령에는 16개의 유인도와 83개의 무인도가 있다고 했다.

 천수만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저 용()은 대체 뭘 상징하는 것일까.

 원래의 길은 관광휴양단지를 지나 천북굴단지로 간다. 하지만 새롭게 내놓은 굴따라길(서해랑길과 같이 쓴다)’은 바닷가 솔숲을 헤집으며 내놓았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면 지쳤던 심신이 상큼하게 되살아난다.

 소나무 그늘아래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하트모양의 박스 안에는 두 사람이 앉기 딱 좋은 그네를 배치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앉아 서쪽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랑 놀음이라도 해봄 직하다.

 14 : 01. 솔숲을 빠져나오니 천북 굴단지가 반긴다. 천북면 장은리 바닷가에 10개 동에 80여 개의 점포가 모여 있는데, 이곳에서 파는 굴 요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보령지역의 겨울철 대표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날씨라도 추워질라치면 제철 만난 굴이 미식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단지에 들어선 음식점들은 굴을 이용한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었다. 생으로 먹는 굴회, 굴 무침, 통통한 우윳빛이 나는 굴 찜, 굴 밥, 구워먹는 석화, 굴 전, 굴 칼국수, 굴 라면 등 굴의 독특한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을 살린 다양한 음식들이 여행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이곳에서는 매년 굴 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다음 주말(1116)부터 열린단다. 석화로 불리는 굴은 구워먹어야 제격이라고 했다. 굴 구이는 1990년대 초반 천수만 일대에서 채취한 굴을 주민들이 웅기종기 모여 구워먹으면서 시작됐다. 이게 별미로 알려지면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현재의 굴 축제 모태가 됐다.

 14 : 06. 천북굴단지 광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광장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5.28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집사람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뽀얗다. 맞다. 미네랄과 비타민으로도 부족해 타우린까지 풍부한 굴을 실컷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은 운 좋게도 종점이 천북 굴 단지였다. 그러니 어찌 굴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마음씨 좋은 황사장님이 생굴을 구입해 밥상에 올렸고, 도반 한 분은 갑오징어 회를 사왔다. 거기다 날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는 굴전을 챙겼다. 덕분에 영양가 많은 먹거리로 배를 채운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었다.

 

서해랑길 60코스(대천해수욕장  깊은골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10. 12()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신흑동·남곡동·대천동 및 주교면·오천면 일원

여행코스 : 대천해변대천항대천천 노둣길대천방조제안산마을사당골토정묘역깊은골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사당골까지 14.6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0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로 분류되나, 평지라서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들머리는 대천해수욕장(충남 보령시 신흑동)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36번 국도를 타고 대천해수욕장으로 들어오면 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머드광장의 바닷가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보령화력 입구(오천면 오포리)’까지 가는 17.2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대천해수욕장, 토정묘역 등이 꼽힌다. 하나 더, 물때를 못 맞춰 대천천의 노둣길을 못 건널 경우, ‘쇳개포구의 인도교까지 6km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10 : 13. 해수욕장과 상가 사이로 난 도로(해수욕장10)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바닷가 해송 숲을 따라갈 수도 있다. 조금 구불대기는 해도, 하트모양의 예쁜 통로 등 눈에 담을만한 조형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걷기 여행자들에게 더 선호되는 코스다.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서해바다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삽시도(揷矢島)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화살()을 꽂아놓은() 활처럼 생겼다는 섬이다.

 10 : 22. 잠시 후 분수광장에 이른다. 노을광장, 머드광장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의 핵심을 이루는 광장 중 하나로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개성 넘치는 사진을 찍기에 딱 좋다. 여름철에는 음악분수가 운영되는데, 저녁이면 현란한 조명까지 가미된단다.

 로봇을 닮은 우체동은 커도 너무 크다. 간절곶의 우체통보다도 더 크다나? ‘감성이란 이름표까지 달았는데, 거짓말 좀 보태 원룸으로 개조하면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겠다.

 10 : 24. 집트랙(Zip Trek) 탑승장. 바다로 돌진하는 듯한 오싹한 설렘을 선사해주는 집트랙은 액티비티 스포츠. 하지만 갈 길 바쁜 걷기 여행자들은 그저 눈으로 즐길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트레킹을 마치려면 말이다.

 서해랑길은 바닷가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스카이바이크 궤도와 함께 가는 멋진 구간이다.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을 오가는 전국 최초의 해상 레일 바이크로, 수면에서 8-15m 높이에 선로를 달아 바닷길을 달리게 했다.

 스카이 레일 위를 씽씽 달려가는 바이크, 40분간 2.3km를 왕복 운행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쌍쌍이다. 고로 스카이바이크는 연인끼리 즐기기에 딱 좋은 레저이다.

 집트랙은 왜 싱글을 고집했을까? 커플로 타는 곳도 있던데 말이다. 하나 더. 요 아래로는 보령 해저터널이 지나간다. 원산도까지 6,927m로 우리나라에서 가징 긴 해저터널이다. 원산도에서 안면도까지는 다리로 연결된다.

 아무튼 난 집트랙 탑승장에서 바닷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천항로를 따르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니 고갯마루에 있는 김성우장군전첩사적비(金成雨將軍 戰捷史蹟碑)’를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 더 옳겠다.

 10 : 27. 김성우(金成雨, 1327~1392)는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로 보령지역을 황폐화시킨 왜구를 격퇴한 무장이다.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아 광산김씨 입향 시조가 되었다. 이후 초토영전사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보령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정에서 부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김성우를 도운 신마가 나온 옥마봉, 보검이 나온 비도, 김성우의 군사가 들어온 군입포, 병사를 매복시킨 매복 등 김성우의 행적과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까지 보령 곳곳에 남아있다. 보령을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대천항로는 고개를 넘어 대천항으로 이어준다. 곧장 직진하면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10 : 34. 꽃게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사거리(이정표 : 종점 15.6km/ 시점 1.6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대천항4을 따라 동진한다.

 도중에 대천항연안여객선터미널 대천항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하도 여러 번 들렀던 곳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0 : 52. 강당마을. 신흑동(新黑洞) 최북단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앞바다에 조개··소라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군마루·절굴·거먹개 사람들이 넘어와 해산물을 잡아가고는 했단다. 현재도 김 양식 등 수산업에 종사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바닷가 외딴 마을은 현재 통나무 펜션단지로 변신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지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단다. 해안도로변에 위치해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계속해서 해안로를 따른다. 아니 도로변을 따라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이때 대천천의 하구역 풍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로 지금은 육지로 변해버린 송도(松島)’ 보령화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11 : 06. 같은 신흑동인 군헌(軍軒)마을에는 어촌유치(귀어)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농어촌 공동화(空洞化)’가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요즘. ()라고 해도 바닷가 외진 마을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추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체험장 옆 데크 전망대. 망원경 말고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한 줄기 쇠줄로 얼굴을 그린 조형물도 배치했다. 덕분에 밋밋할 수도 있는 해변 길이 감상의 포인트가 됐다. 분명 인위(人爲)인데도 배경으로 삼은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대천방조제와 보령화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죽도와 송도, 원산도 등 주변의 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만 좀 크게 뜨면 원산·안면대교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대천천의 하구역이 놓여있다. 대천방조제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탐방로는 이제 대천천(大川川)’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의 거대한 교각을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넝쿨장미로 치장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꽃이라도 필라치면 꽃 대궐에서 노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겠다.

 오월의 장미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10. 장미가 있을 리가 없다. 대신 송엽국(松葉菊)’이 만발해 있었다. 솔잎과 닮은 잎에 국화를 닮은 꽃이 핀다는 상록 식물이다. 잎 모양과 무리 지어 피는 모습이 채송화와 비슷해 사철채송화라고도 한다.

 11 : 20. ‘밤골마을 해변은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보령지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해안 곳곳에 사빈이 잘 발달되어있는 현상 말이다. 그 대부분은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은 대천해수욕장과 가깝다보니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남곡동(藍谷洞)’에 속한 자연부락인 밤골에는 리조트와 펜션, 카페,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유원지 수준이라고나 할까? 하긴 뻥 뚫린 시야로도 모자라 새하얀 모래사장까지 끼고 있으니 어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집도 눈에 띈다. 하지만 스머프가 이사를 가버렸는지 새로운 주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골마을 앞바다. 해망산 갯벌도 일반인에게는 금단의 땅인 모양이다. 어촌계에서 바지락 양식을 하고 있으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 저 벤치에 앉아 조개 캐는 주민들의 뒷모습이나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11 : 30  11 : 40. 이곳에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위한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벤치에 않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스머프네 집. 노을이 곱다고 알려진 ‘357카페라는데, 이곳 역시 영업은 하고 있지 않는 듯 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11 : 46. 내항동(內項洞)의 왕대골. 왕대산(王臺山, 122.7m) 자락의 마을인데, ‘밤골처럼 리조트와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다. 숫자는 작아도 규모는 밤골보다 훨씬 더 크다. ! 왕대산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넘기고 돌아오다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때 느닷없는 간판 하나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のや라는 일본어 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저걸 토모노야로 읽고 있었다. ‘친구며···’라는 뜻이라나? 건물의 외벽도 검정과 흰색이 대비되며 일본 전통 건축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본인들의 전용 호텔인가? 아니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숙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썩 흔치않은 풍경인데다, 얼마 전 광복절날 일장기를 내걸었던 지역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기에 심사는 편치 않았다.

 11 : 52. 서해랑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 앞에서 일단 멈춘다. 그리고는 잠수교(‘노둣길이라 부르기도 한다)를 이용해 대천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9.8km/ 시점 7.4km)가 세워져 있다.

 초입에 만조(滿潮) 때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대천천을 따라 대천3동까지 올라가 대천천 인도교를 건넌 다음, ‘대천1에서 대천천의 제방을 걸어 저 건너(잠수교 북단)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6.1km나 더 걸어야 한다니 서해랑길 60코스는 때를 잘 맞추어 걷는 게 필수라 하겠다.

 잠수교는 영농철 농기계의 통행을 위해 개설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판까지 입구에 붙여놓았다. 하지만 많은 차량들이 잠수교를 오가고 있었다. 덕분에 차량을 만날 때마다 다리 난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설 수밖에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 따깨비는 이 다리가 심심찮게 바닷물에 잠긴다는 증거다.

 ! 소라가 가득담긴 그물망이 바닷물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마침맞게 주위에는 사람도 없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는데, 저걸 가져다가 산악회에 부탁해 삶아달라고 해?

 대천천 하구역(河口域). ‘대천천(大川川)’은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에서 시작하여 궁촌동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길이 13.8km의 지방하천이다. 보령지역의 옛 이름 중 하나인 큰내(한내)’를 한자로 고치면서 대천천이 됐다. 하천은 크게 2개의 지류가 있는데, 한 지류는 오서산(烏棲山) 동남쪽에서 발원하고, 다른 한 지류는 성주산(聖住山) 줄기인 성태산(星台山)과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뒤돌아 본 잠수교. 그 뒤에는 아까 본 왕대산 말고도 해망산(海望山, 114.3m)’이 있다. 고려 말, 도만호(都萬戶) 김성우 장군이 병사로 하여금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는 산이다.

 11 : 59. 잠수교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9.4km)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대천방조제의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우레탄을 깐 탐방로를 곱게 내놓았다. 참고로 대천1동에서 시작되는 대천방조제는 대천2동과 주교면의 주교리(舟橋里) 및 은포리(隱浦里)를 거쳐 같은 주교면의 송학리(松鶴里)까지 이어진다. 길이 6.2km 1952년에 착공하여 1960년에 준공되었다.

 둑길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왼쪽으로는 대천천의 하구역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껏 등치를 부풀린 물줄기를 서해바다가 집어삼켜버리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제방에 쌓아놓은 저 돌탑들은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50m쯤 되는 간격으로 줄지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오른쪽으로는 봉당천 신대천 하구를 막아 조성한 거대한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뒤에서 솟아오른 봉대산(烽臺山, 233.3m)’은 동쪽으로 뻗어 태봉산(240m)’을 솟구친다. 군사시설인 봉수대 및 아현산성(我峴山城)을 각각 품고 있는 산들이다.

 12 : 16. 방파제가 90도에 가깝게 휜다. 대천1동과 송학리를 잇는 대천방조제는 이렇듯 중간쯤에서 크게 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농토를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의 결과일 것이다. 하나 더. ‘대천동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주교면(보령시)’에 바톤을 넘겨준다.

 이곳은 대천천의 하구역이 거침없이 폭을 넓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륙을 휘젓고 내려온 냇물은 이곳에서 드넓은 바다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저 강태공들은 대체 뭘 잡고 있을까? 낚싯대는 망둥어 낚기에도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이 뭣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도로변에 적치되어 있는 저 통들의 정체가 궁금해서 게시해봤다.

 코너를 돌아서자 해안도로에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있는가 하면 둑에는 무선방송장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주교마을(허락 없이 갯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을 세워놓았다)에서 뭔가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도로변에 조성된 공영주차장. 차선을 하나 더 만든 다음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만들어놓았다.

 반대편에는 바다를 향해 길게 줄을 매어놓았다. ‘해루질 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안전시설이다. 둑 위의 방송장비 또한 저들을 위해 설치했다. 조개채취 중 방향을 잃는 갯벌 고립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갯벌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조개를 캐고 있었다. ‘해루질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야외활동 중 하나로 꼽힌다. 거기다 조개까지 얻을 수 있으니 숫제 꿩 먹고 알 먹고이다. 하지만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물때와 지형을 미리 확인하고 안전장비를 착용하는 등 안전수칙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방조제는 이후로도 꽤 오래 이어진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억새꽃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12 : 42. 대천방조제는 주교배수갑문에서 끝을 맺는다. 둑길에서 내려선 탐방로는 대천방조제2를 건너 송학리로 들어간다.

 12 : 45. 다리를 건너 현장마을(버스정류장의 이름표)’로 올라선다. 송학리(3)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바지락마을이란다. 아니 황금이란 최상의 서술어까지 덧붙였다. 대체 바지락이 얼마나 많이 널려있기에 저런 표현까지 쓸 수 있을까?

 송학항도 이제껏 보아온 다른 포구들처럼 텅 비어있었다. 안내판에 그려진 배들은 마을 어디쯤에선가 출어의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경운기 꼬랑지에 매달려서...

 선착장 옆으로 나있는 갯길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머드 맥스라고 일컬어지는 경운기의 행렬이 펼쳐지는 곳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버스정류장에서 그 사진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방조제의 둑길 구간이 끝났는데도 도로는 아직까지 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아무튼 좁고 긴 백사장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이때 죽도(竹島)’가 눈에 들어온다. 시쳇말로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인데, 옛날엔 저 섬이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12 : 53. ‘송학2에 이른다. 마을 표지석은 이곳을 안산고내라고 적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밖산고내가 나온단다. ‘고내라는 마을이 안산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 마을 갯벌도 귀어·학습 체험장을 열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갯벌에 들어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 이곳 송학리는 조선시대부터 바지락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매년 5천 톤씩이나 생산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만큼이나 뛰어난 양식기술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품질 좋은 바지락을 시중에 내놓고 있단다.

 버스정류장을 치장하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머드 맥스(Mad Max)’를 연상시키는 갯벌을 질주하는 경운기들의 행렬이다. 사진은 주민들이 갯벌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담았는데, 이게 광활한 갯벌과 어우러지며 자못 비장감까지 불러일으킨다.

 13 : 03. 잠시 후 도착한 ‘(안산·고내)버스정류장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이 도로를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마을안길은 누빈 다음 안산마을에서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로 나온다. 오가는 자동차를 피할만한 공간(갓길)이 없는 협소한 도로를 피해 일부러 에둘러놓지 않았나 싶다.

 13 : 06  13 : 19. 우리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 채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그 위험에 대한 보상은 컸다. ‘산고래 하늘공원이라는 멋진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산고내(散古乃)’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뼈를 상했을 때 약재로 쓰는 돌(산골)이 채취된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엉덩이 대기가 부끄러울 만큼 예쁜 의자. 공원은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10분 정도를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조망도 자랑거리라고 했다. 맑은 날에는 효자도, 삽시도, 원산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그래선지 바다 쪽으로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죽도가 성큼 다가온다.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저유물 매장해역(사적 제321)’의 중심에 놓여있는 섬이다.

 1983년경 고려청자 등의 유물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1987년 수중발굴조사를 진행 32점의 상감청자를 비롯한 100여 점의 청자류를 수습했다. 13세기 또는 14세기, 전남 강진(대구면)이나 전북 부안(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보령발전본부를 당겨봤다. 보령지역의 발전소에서 전국전기생산량의 7.3%를 만들어내고 있단다.

 13 : 27.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오가는 차량을 주의해가며 10분 정도를 걸어 안산마을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안길로 에돌아 온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13 : 30. 잠시 후, 서해랑길이 또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와 헤어지란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예쁜 풍경을 보여주는 기존의 탐방로를 따를 것을 권한다.

 탐방로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오른편의 농경지가 갯벌보다 낮으니 방조제의 둑길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해안길 구간은 잠깐이면 끝난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고운 모래사장이 발아래 놓여있고, 그 너머로는 검붉은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13 : 33.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파고든다. 또 다른 마을을 에돌아가는 길이다.

 볼거리도 그렇다고 이야깃거리도 없는 마을길이 싫은 우리는 논두렁을 이용해 자 형의 구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송학천을 가로막은 방조제가 나타난다. 이 둑을 쌓음으로써 안쪽에 상당히 너른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오던 고정리 주민들에게 넉넉함을 가져다 준 풍요의 상징이다.

 송학천 배수갑문의 밖. 즉 송학천의 하구역이었음직 한 갯벌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충남의 바닷가에서 만났던 여느 포구들과는 달리 꽤 많은 배들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배를 올려둘만 한 공터가 없었나?

 13 : 40. 제방 끝에서 610번 지방도를 만났다. ‘토정로라는 이름이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향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사당골(고정2)’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고정리(高亭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사당골이란 한산 이씨 사당(祠堂)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래선지 마을 입구에 찬성공파(贊成公派)의 사당(高巒齋) 말고도 조상의 묘갈(墓碣)과 신도비(神道碑)가 즐비했다.

 13 : 46. ‘신보령발전본부 입구(화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松島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초입에 위치한 보령시민체육공원 주차장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종점인 깊은골에 주차 공간(점심상을 차릴 수 있는)이 없는 탓에 이곳에서 식사를 한 다음 잔여 구간은 버스로 이동하겠단다.

 종점으로 가는 도중 들른 토정선생 묘역’. 국수봉(187m)의 남쪽 산자락에 들어선 묘역에는 선생과 형제, ·비속 등 14기의 묘가 모셔져 있다. 선생의 학문과 전해지는 기이한 일화들로 인해 명당자리로 인식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단다.

 선생은 생전에 미리 를 정해두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해 형제분들과 함께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았다나? ‘토정비결(土亭秘訣)’까지 지은 현인이니 어련하겠는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정초가 되면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낡은 토정비결을 펼쳐들고 저마다의 괘를 뽑아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쳤다. 누군가 좋은 점괘가 나오면 함께 기뻐했고 나쁜 점괘가 나오면 서로 격려하면서 새해의 첫날을 보냈다. 그 시절 토정비결은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던 비밀의 열쇠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중기 학자로 천문·지리·의약 등에 능통하였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방랑하다 1573(선조6) 56세에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으로 백성의 가난해결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지어 빈민구제에 힘썼다고 한다. 1713(숙종3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대인설에 걸맞는 삶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 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만이 할 수 있다>

 넓적바위(簿石). 연당자락 바닷가에 놓여 솔섬목을 오가던 사람들의 쉼터로 사용되던 바위였으나, 토정선생이 타고 다니던 돌배라는 설이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돌의 존재로 인해 항해의 영웅이라는 설화 속 선생의 또 다른 인물상이 생겨났다나?

 고개를 넘어온 탐방로는 보령화력발전소 입구에 있는 깊은골 버스정류장 앞에서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보령 61코스)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곁에 세워져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종점에서 1.7km 정도 못 미친 사당골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그래선지 gpx트랙에 14.63km 3시간 20분에 걸었다고 나타난다.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하루 세끼를 차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야외활동까지 함께 해주는 집사람. 이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현대는 무목적·무감동·무책임·무관심이라는 ‘4()’ 병이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일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의 반대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이란다. 그러니 나에게 집사랑은 사랑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서해랑길 59코스(춘장대해수욕장 - 대천해수욕장)

 

여 행 일 : ‘24. 9. 28()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서면 및 보령시 웅천면·남포면·신흑동 일원

여행코스 : 춘장대해변부사방조제소황사구황교리노인회관소황리노인회관독산해변(실제 출발지)무창포해변용두해변대천해변(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14.80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9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28km라는 거리가 우습게 보였는지 별이 2(전체 5)로 분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관광공사 직원들은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들머리는 춘장대해수욕장(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 3km쯤 내려오다 비인교차로에서 607번 지방도로 옮겨 서면(춘장대해수욕장) 방면으로 7km쯤 들어오면 춘장대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59코스)안내도는 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다.

 춘장대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대천해수욕장까지 가는 28.1km짜리 긴 여정이다. ‘소황리 공군사격장 등 군사시설을 피해 내륙으로 에둘러가기 때문이다. 길기만 한 것이 아니다. 코스 대부분이 해변이나 제방을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최악의 코스로 분류된다. 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와 서해의 작은 섬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어 걷기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코스로 꼽힌다.

 산악회는 소황사구(小篁沙丘)’의 입구인 장안해변(이정표 : 종점 23.2km/ 시점 4.7km)’을 공식 출발지로 삼았다. 지난번 58코스 때 이곳까지 연장해서 걸었었기 때문이다. 춘장대해변에서 트레킹을 마친 우리부부는 유명 맛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로 인해 생긴 자투리 시간을 보냈었지만...

 부사방조제(扶士防潮堤) 준공기념탑. 서천군(서면) 도둔리와 보령시(웅천읍) 독산리를 잇는 3,474m 길이의 긴 방조제이다. 1997년 축조될 당시만 해도 웅천읍 일대의 농경지 보호가 임무였으나, 최근에는 낚시터로 더 각광을 받는단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바다낚시와 민물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서해랑길은 ‘607번 지방도(부사로)’를 따라간다. 이어서 황교리 소황리를 지나 독산해변으로 나온다. 하지만 산악회는 소황사구의 탐방로로 인도하고 있었다. 군사시설 때문에 평소에는 막혀있지만 주말에는 통행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소황사구를 꿰뚫으며 나아간다. 생태·보전지역이선지 데크 길을 따로 만들어 자연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였다. 하나 더. 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장안해수욕장으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이나 샤워장, 취사장 같은 편의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생태·보전지역에 따른 개발제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10 : 40. 실제 출발지는 독대섬 입구로 소황사구의 최북단이다. 첨부된 지도에서 부사호 위 역()으로 된 자의 상단, 뽈록하니 튀어나온 부분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소황사구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탐방로를 걸으면서 관찰 가능한 동·식물들을 살아있는 모래언덕으로 포장해서 전해준다. 다만 평일 사격훈련 시간 때는 탐방로 진입이 불가능하다나?

 독대섬은 바다에 산 하나가 떠있는 형상이다. 섬이면서도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데, 이때 맛조개와 돌게, 골뱅이 등을 잡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단다. 독대섬 앞바다에는 직언도, 황죽도가 일렬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평소에는 독대섬까지만 물이 빠지지만, 음력 보름과 그믐 전후로 직언도까지 물이 빠져 무창포의 석대도와 함께 신비의 바닷길이 연출된다.

 소황사구(장안해변). 다른 여행자들은 저 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참고로 소황사구는 길이 2.3km,  200m, 최고 높이 17.6m에 이르는 대규모 사구이다.

 독대섬을 가운데 두고 반대편에는 독산해수욕장(獨山海水浴場)’이 있다. 왼쪽은 소황사구, 오른쪽으로는 독산해변의 갯벌과 금빛 모래사장이 갈매기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지는 모양새이다. 해수욕장은 길이 1,500m,  100m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산해변 글자 조형물. 독산해변은 바다에 홀로 있는 산이라 하여 홀뫼해변이라고도 불린다. ‘독대섬의 생김새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싶다.

 10 : 42. ‘열린바다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주말이어선지 길가가 온통 주차장이다. 덕분에 우리를 실어다 준 버스가 회전을 못하고 후진으로 빠져나가느라 고생깨나 했다.

 해수욕장의 배후 숲에는 무료 캠핑장이 들어서있었다.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텐트가 꽉꽉 들어차있다.

 틈새를 마련 못한 사람들은 바닷가로 밀려난다. 하지만 조망만은 소나무 숲보다 한수 위다. 독산해변의 자랑거리인 낙조, 즉 잔잔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다만 뜨거운 햇살에 고생깨나 해야겠지만...

 모터 카약까지 끌고 온 낚시꾼도 보인다. 그만큼 어종이 풍부하다는 애기일 것이다.

 대어의 꿈은 백사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파도를 가르며 지나가는 보트까지도 끌어올리겠다는 듯 낚싯대 크기가 만만치 않다.

 10 : 50. 해수욕장을 빠져나와서도 열린바다로를 탄다. 길가에 들어선 빌라나 카페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아니 라바 카페 부근에서는 꼬맹이 섬과 여가 꾸미고 있는 빼어난 풍광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나 더. 독산해수욕장에서 시작된 열린바다로는 해안선을 따라 용두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서천에서 시작된 배롱나무 가로수길은 보령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여름 꽃 배롱나무, 그 붉은 유혹에 빠져본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열적이던 꽃이, 한발 물러서자 수줍은 아름다움으로 변해버리는 이중성의 꽃이다.

 11 : 04. ‘낙조공원이란다. 바닷가 쪽으로 작은 공간을 만들고 일몰을 상징하는 조형물 두어 점을 배치했다. 떨어지는 해를 편히 감상하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하지만 정비를 하지 않아 웃자란 잡목·잡초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11 : 08. ‘독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편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간다. 독산해변에서 무창포해변에 이르는 2km 구간도 군사시설을 피해 내놓은 우회로라고 보면 되겠다. 중간에 만났던 군의 해상침투훈련장 안내판이 그 증거일 것이다.

 11 : 13. 무창포해변에 도착하니 비체펠리스가 반긴다. 용평리조트가 처음 개발한 대형 해양리조트라고 한다, 참고로 무창포(武昌浦)’라는 지명은 무창(武昌)’의 서쪽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세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던 갯가의 포구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바닷가로 나가 닭벼슬섬으로 간다. 섬까지 탐방용 보행교가 놓여있다. 섬과 육지 사이 물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놓은 생태탐방로이다.

 초입에는 갯벌생태계복원사업 안내판과 함께 한국 새우양식 6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이곳 웅천지역에서 새우양식이 시작되었다나? ‘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배우고 간다.

 다리에서 본 무창포해수욕장’. 남북으로 뻗어나간 백사장 길이가 1.5km나 되는 기다란 해변을 끼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물이 잔잔하고 배후에 울창한 숲까지 끼고 있어 천혜의 입지조건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인근 대천해수욕장에 비해 많이 한산하며, 주로 종교단체·교육기관·기업체나 가족단위의 야영지로 이용된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담장처럼 생긴 돌무더기가 드러난다. 갯벌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고기를 잡던 전통 어구인 독살이 아닐까 싶다. 독살은 돌을 이용해 반원 형태로 쌓는 게 우선이다. 다음은 중앙에 대나무를 이용해 수문(水門)을 만들어 고인 물이 빠지도록 한다. 수문 앞은 물이 빠져도 고기들이 모여 놀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고여 있어서 물때에 무관하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왼쪽은 아까 지나왔던 독산쪽 해안이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과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들이 흡사 자갈밭을 보는 느낌이다.

 탐방로는 닭벼슬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낙조5 중 제5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서해바다와 무창포해수욕장은 물론 무창포타워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단다. 하나 더. 혹자는 독산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의 경계를 닭벼슬처럼 생겼다는 곶()으로 삼고 있었다. 독산 쪽에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저곳(직전 사진 참조)을 이르는 말일 게다. ‘닭벼슬섬이라는 지명은 곶()의 생김새에서 따왔을 것이고 말이다.

 11 : 19. 바닷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을 따라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에 포장길을 내놓았다.

 무창포의 빼어난 풍경화는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 ‘석대도(石臺島)’가 완성시킨다. 섬의 모양이 돌로 된 좌대(座台), 즉 석대(石臺)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구전(口傳)에 따르면 아기장군이 죽었을 때 황새가 떼지어 나타나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매월 두 차례 간조 시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은 진도와 더불어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물때가 맞지 않아선지 바닷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아쉬움을 안내판의 사진으로 달래본다.

 그래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모세의 지팡이로 달래볼 일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향하자 바다가 갈라지면서 길이 나타났다는 기적이자 구원의 지팡이다. ! 바닷가에 석대도 안내판과 함께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 및 시간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사리 때 열리는데, 5-6월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11 : 27. 중앙광장의 무창포를 상징하는 조형물은 이제 막 출범하려는 범선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리스본(포르투갈) 여행 때 만났던 대항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 Descobrimentos)’를 축소시켜놓았다고나 할까? 대항해시대의 항해왕자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의 도움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자리에다 세운 기념물인데, 무창포의 것에는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들의 조각이 빠져있다.

 신비의 바닷길 조형물은 전설 속의 아기장군을 형상화 했다. 바닷길을 걸으며 주울 수 있는 해삼(·조개·게 등도 함께 잡힌단다)’과 함께이다. 참고로 아기장군은 석대도에서 살던 해룡과의 줄다리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을 정도로 힘이 센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적(다른 전설들처럼)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석대도에서 해룡과 함께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장사였다.

 무창포 해역은 쭈꾸미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맞다. 올해 3월엔가는 KBS-2TV ‘생생정보에서 이곳의 쭈꾸미 샤브샤브를 소개한 일도 있었다.

 물빛정원이라는 분수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특히 스크린처럼 떨어지는 분수의 가운데를 뚫은 게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징검다리를 놓음으로써 신비의 바닷길을 연상하게 만든다.

 홍완기(1932-2004) 시인의 시비도 세워져 있었다. 그의 작품 무창포의 사랑이 새겨진 빗돌, 이력과 예순 살의 색신이 적힌 또 다른 빗돌, 시비건립 취지문 빗돌이 떼지어 있다. 참고로 홍완기는 별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곳(궁촌리)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나뭇꾼·엿장수·뱃사공·철도국(임시직원지방신문(견습기자승려 등을 전전하다 등단했다.

 낙조5 중 제1경이라는 무창포타워는 곁눈질만 하고 간다.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오르면, 황홀한 일몰을 볼 수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꼽힌다. 특히 해거름에는 노을 덕에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안성맞춤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굳이 올라가볼 필요까지 뭐 있겠는가.

 무창포는 해마다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열려왔다. 올해(24) 10 18일부터 20일까지 무창포해수욕장 일원에서 열린단다. 체험·공연·판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풀에 들어가 전어나 대하를 맨손으로 잡아보는 체험도 해보면서 말이다.

 관광객들과 함께 바닷가를 누비고 다닐 꼬마 열차도 길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11 : 38. 이제 무창포항으로 간다. 해안길은 중앙광장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계속된다.

 식당가를 끼고 나있어 구수한 음식냄새의 유혹을 참기 어려운 구간이기도 하다.

 음식점의 홍보는 백종원씨가 대세인가 보다. 그가 출연했던 SBS-TV ‘백종원의 삼대천왕에 대한 사진으로 식당 전체를 도배해 놓았다.

 11 : 43. 해변 끝에서 왼쪽(무창포항 방향)으로 간다. 이어서 외항과 내항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동산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상화헌(尙和軒)’. 많은 이들이 죽도에 있는 상화원으로 오해하는 곳이다. 함께 걷고 있는 이석암 작가님도 이해를 못하겠다며 일단은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본다. 하지만 상화헌 거품시대의 작가 홍상화가 집필할 때 머물렀던 곳으로, 한옥  ’, 그리고 만대루(안동 병산사원 것을 재현했단다), ‘작가의 집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북 카페이다.

 11 : 47. 수산물시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널찍한 주차장, 이어서 탐방로는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내항과 외항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낙조5 중 제3경이기도 하다. 고즈넉한 항구와 등대 3개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 다채로운 풍경 속의 일몰을 줄길 수 있단다.

 다리 위에서 본 무창포항’. 무창포항은 원래 내만(內灣) 입구에 남북으로 방파제를 쌓아 항구를 만들고, 사구 위에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부두) 시설을 조성했었다. 하지만 간조 때 항구의 바닥까지 갯벌이 드러나 배를 댈 수가 없자, 방파제 시설을 새로 설치하고 항구를 서쪽으로 옮겼다. 덕분에 간조 때를 제외하면 입출항이 가능해졌지만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재까지 준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내항은 천혜의 대피항이 되었다. 연근해에서 광어와 쭈꾸미, 갑오징어 등을 잡는 소형어선의 정박지로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11 : 52.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무창포항과 이별을 고한다. 80m쯤 더 걸어 관동교에 이르자 이정표가 아직도 9.7km나 남았다며 속도를 올리란다. 오늘의 이벤트로 삼은 해물요리를 느긋하게 먹고 싶다면 말이다.

 이후부터는 열린바다로를 따른다. 왕복 2차선의 널찍한 도로인데도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차량통행이 뜸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1 : 58  12 : 14. 충남수산자원연구소 뒤. 나지막한 고갯마루에는 쉼터를 겸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파고라 그늘에서 준비해온 간식에 막걸리 잔을 나누며 푹 쉬다갈 수 있었다.

 12 : 14. 다시 길을 나선다. 이즈음 대하양식장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방조제 안쪽 내수면에다 커다란 양식단지를 만들었다.

 12 : 23.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소공원. 이번에는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조각품까지 배치했다.

 조금은 조잡해보였지만(예술에 문외한이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원색적으로 표현된 탓인지 많은 여행자들의 소개 글에 올라오고 있었다.

 집사람이 부추꽃이란다. 선형으로 자라나는 잎사귀만 먹는 줄 알던 부추가 꽃도 피우는 모양이다. 그것도 저렇게나 예쁘게도 말이다.

 12 : 28. ‘월전교(이정표 : 종점 8.1km/ 시점 19.8km)’을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용두해수욕장(龍頭海水浴場)’에 이른다. 한적하지만 해수욕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해변을 갖고 있으며, 해변 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송림에는 숲속 야영장이 조성돼 있어 해수욕과 캠핑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캠핑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보령시 근로자종합복지관(동백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편리하게 숙박할 수도 있다.

 보령시 남서부 남포방조제의 남단에 위치한 용두해수욕장도 1,500m나 되는 기다란 백사장을 자랑한다. 미세한 입자의 알갱이로 이루어진 모래의 질도 뛰어나다. 거기다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까지 얕아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여행의 정석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백사장이 끝나갈 즈음 모래사장에 바위무더기가 널려있었다. 안내판이 신랑바위 각시바위임을 알려준다. 용두마을에 살던 처녀총각이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앞바다에 살던 용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모양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성주사의 무염스님에게 부탁했고, 용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용을 죽이고 총각과 처녀는 각시바위, 신랑바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나?

 장수바위 안내판도 눈에 띈다. 마을을 괴롭히던 탐욕스럽고 악덕한 용()을 물리친 장수의 말발굽 자국이 아직도 장수바위에 남아있단다. 하지만 어떤 게 장수바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랑바위 각시바위와 이명동암(異名同岩)일지도 모르겠다.

 12 : 37. 해변 끝에서 웃자란 잡초더미를 헤치며 오솔길로 들어선다. 바닷가에 들어선 요트경기장에 번잡함을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12 : 41. 오솔길을 빠져나와 남포방조제(藍浦防潮堤)’ 둑길로 올라선다. 남포면 월전리와 보령시 신흑동을 잇는 길이 3.7km의 둑으로, 서해로 유입되는 남포천을 막아 보령시 남서부 해안의 너른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시야가 툭 트이는 둑길은 일망무제의 조망을 보여준다. 조금 전 무창포 해안에서 눈여겨봤던 석대도가 요트경기장 뒤에서 고개를 내미는가 하면, 저 멀리 먼 바다에서는 호도, 녹도, ·소화시도 등 작은 섬들이 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풍경도 만만찮다. 광활한 남포평야 너머로 이름 모를 산들이 산그리메를 그리고 있다. 보령의 명산인 성주산과 옥마산, 오서산 등일 것이다.

 진행방향에는 과거 섬이었으나 방조제로 인해 육지로 연결된 죽도(竹島)’가 자리 잡고 있다. 죽도는 현재 섬 전체가 하나의 정원으로 꾸며졌다.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조성하면서 상화원(尙和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섬 둘레에 조성한 탐방로(2km)를 따라 걸으며 석양정원, 한옥마을, 전통혼례식장, 하늘정원 등을 구경할 수 있다.

 12 : 58. ‘상화원의 입구(이정표 : 종점 5.2km/ 시점 22.7km)를 지난다. 섬 전체에 올곧은 대나무가 울창했다는 죽도는 조개·꼬막·굴 등을 양식하면서 사는 전형적인 섬마을이었다. 그러나 육지와 연결되면서 민자 유치를 통한 죽도관광지 개발이 이루어져 각종 휴양시설을 갖춘 관광단지가 되었다. 2000년 죽도 섬 전체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고, 2013 3 상화원을 개원했다.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게 볼만했던 모양이다. 보령시에서 보령9경 더하기 중 제2으로 뽑아 놓았다.

 대천해변으로 가는 둑길은 멀고도 멀었다. 하긴 월전리에서 죽도 입구까지 걸어왔던 거리보다 배나 더 길다고 하니 어련하겠는가.

 13 : 29. 방조제 끝. 둑에서 내려오니 남포방조제 준공 기념비가 맞는다. 1999년 남포간척지 공사의 일환으로 방조제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빗돌일 것이다.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남포방조제는 끝을 맺는다.

 방조제에 갇힌 남포천(藍浦川)은 거의 바다 수준이다. 남포천은 보령시(남포면) 읍내리에서 발원 남포저수지와 소송리를 지나 삼현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길이 4.5km의 지방하천이다.

 13 : 42. ‘갓배교차로에서 광장진입로를 따라 500m쯤 걷다 첫 사거리(이정표 : 종점 2.4km/ 시점 25.5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천해수욕장으로 간다.

 13 : 50. 해수욕장이 들어선 신흑동(新黑洞)’으로 들어선다. 길은 충남대 임해수련원과 국군복지단 대천콘도의 사이로 난 골목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13 : 54. 이후부터는 해안산책로를 따라 머드광장으로 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로 포장길을 내놓았다. 하나 더. 보령시가지서 남서쪽으로 10km, 대천반도의 돌출부 끝에 위치한 대천해수욕장은 조개껍질로 덮여 있는 해안이 색다르다. 물은 그다지 맑지 않으나 수심이 얕고 수온이 알맞으며 밀썰물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이때 돌공원을 지나가니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돌들을 곁눈질이라도 하면서 걸어보도록 하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크고 작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다보도부터 저 멀리 호도·녹도·삽시도·불모도까지 수많은 섬들이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파도에 밀려 둥둥 떠다니고 있다. 맞다. 보령시는 원산도, 삽시도 등 70여 개의 아름다운 섬을 가진 섬의 도시다. 법정기념일인 섬의 날 기념행사가 충청남도 주관으로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이다. 해변의 길이가 자그마치 3.5km를 넘는다. 해수욕장은 1932년 경남철도주식회사의 승객유치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9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서해안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해수욕장이다. 최근에는 계절별 축제와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2022 8월 기준으로 연간 방문객 수가 1 200만 명에 이른다나? 특히 1998년부터 개최된 보령머드축제는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단다.

 대천해수욕장은 보령9경 더하기 중 제1경으로 꼽혀있다. 바다를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곳이자 사계절 축제의 현장이란다. ‘보령9경 더하기의 나머지는 죽도 상화원(2), 성주산자연휴양림(3), 개화예술공원(4), 무창포해수욕장(5), 외연도(6), 충청수영성(7), 냉풍욕장(8), 보령호(9)에 플러스로 오서산을 더했다. 남들이 다하는 8경으로는 턱도 없다는 듯이 9경으로도 모자라 하나를 더 보탰다.

 14 : 00. 해변을 따라 10분 남짓 걷다가 시민헌장탑이 있는 노을광장으로 올라간다. ‘구광장인 머드광장과 대비해 신광장으로도 불리는데, 젊은 층들이 선호하는 공간이란다. 하지만 화장실과 야외샤워장만 있고 실내수영장은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노을광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다를 향해 스카이워크도 만들어 놓았다. 편하게 앉아 노을을 감상하라는 듯 다리 아래는 관람석까지 갖추었다.

 14 : 06. 이후부터는 도로변 소나무 숲을 따라간다. 해변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빼어난 해수욕장의 조건에 걸맞게 각종 휴양·편의시설, 문화예술 공간을 서해안에서는 으뜸으로 갖추었다. 최근에는 각종 서비스시설의 고급화도 병행되고 있단다.

 숲이나 노변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조형물들을 들어앉혔다.

 보통 송림이나 사구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해수욕장들의 자연 친화적인 경치에 비하면 대천해수욕장은 도시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해수욕장을 끼고 바로 도회지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집과 높은 빌딩이 늘어서 있고, 곳곳에 광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갖가지 예술적인 조형물이 놓여 있다.

 14 : 13  15 : 13. 아무튼 우리가 바라던 대로 주어진 시간보다 1시간쯤 먼저 대천해변에 도착했다. 그 시간은 오롯이 먹는데 사용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박주를 나누면서 회포를 풀 수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특히 이곳 대천해수욕장은 키조개 삼합이라는 독특한 요리로 유명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해물상회’. ‘원조라는 수식어가 발길을 이끌어주었다.

 키조개 삼합은 바다와 육지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요리다. 대천 앞바다에서 잡은 키조개(관자)와 우삼겹(또는 차돌박이)에 채소를 섞음으로써 바다와 육지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복과 새우, 가리비 등 다른 해산물도 함께 나와 취향에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해서 먹는 재미도 있다. 참고로 키조개는 아연과 칼슘, 철 등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피로 해소와 간장 보호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맛과 건강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얘기다.

 15 : 15. 만남의 광장으로 빠져나와 종점인 머드광장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조형물이 늘어서 있었다. 잘 단장된 조각공원을 구경하는 느낌으로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사진의 배경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들을 만난다. 그러니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카메라 앞에 서보자. 인생샷이라도 한 장 건질 지 누가 알겠는가.

 15 : 30. 구광장이라고도 불리는 머드광장에 도착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4.80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걷기 버거울 정도로 여행자들을 괴롭히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머드광장에서 바라본 바다. 저 멀리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보인다. 때로는 신기루 현상으로 아득한 중국대륙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집사람 말고도 구우(舊友) 둘이 트레킹 후 소주라도 한잔 나누자며 함께 걸어주었다. 이런 게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장 바니에(Jean Vanier)’는 그의 저서 희망하는 사람들, 라르슈(Porte d'esperance)’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내 심장이 다른 사람의 심장 박동에 따라 고동치기까지, 그리하여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기까지 나 자신을 충분히 버리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니 몇 마디 담소를, 그것도 오가는 반주에 희석되어버릴 수도 있는 얘기 몇 마디를 나누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써버린 저 친구들은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거론한 책에는 1964년 파리 근교의 작은 집 라르슈(방주라는 뜻)’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필립, 라파엘 두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한 장 바니에. 그 집이 28개 나라에 103개의 공동체로 확산되기 까지, 고통 받는 많은 이들에게 바니에가 열어준 희망의 메시지가 따뜻하게 담겨 있다.

 

서해랑길 58코스(선도리 갯벌체험장  춘장대 해변)

 

여 행 일 : ‘24. 8. 24()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비인면·서면 일원

여행코스 : 선도리갯벌체험장월하성마을서울시연수원띠목섬해변공정마을홍원항춘장대 해변(거리/시간 : 11.7km, 실제는 14.46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8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선도리 갯벌체험장(충남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해본마린(보트 판매·수리업체)’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비인해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서천 58코스) 안내도는 선도리갯벌체험장 앞에 설치되어 있다.

▼ 선도리(갯벌체험장)’에서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춘장대해변까지 가는 11.7km짜리 여정이다코스 대부분이 바닷가를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다소 힘들 수도 있다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데다생태계가 잘 발달된 갯벌에서는 재수라도 좋으면 조개 한두 개 정도는 너끈히 주워들 수 있다.

 이곳 선도리해변은 전국 제일의 갯벌체험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접수창구 앞에 줄지어 늘어서있는 저 인파가 그 증거다.

 10 : 00. 해안산책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 쌍도(雙島)’가 눈에 들어온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과 천석지기 부잣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남녀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선도리 앞바다의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우뚝 솟아났다나?(갯벌체험장의 분위기 연출을 위해 지난 57코스 때 사진을 게시했다)

 진행방향에는 옥녀봉을 병풍삼은 월호리(월하성 어촌체험마을)’ 포구가 놓여있다.

 10 : 10. 해안에서 빠져나간다. 해안산책로도 이쯤에서 끝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10 : 12. ’갯벌체험로로 올라섰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갯벌체험로 배롱나무길(서천군 군도 5호선 종천면 장구리에서 시작해, 비인면을 거처 서면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로도 불린다. 서천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하다. 해안도로를 배롱나무 꽃길로 조성해 갯벌과 어우러지는 꽃무리의 운치를 보여준다.

 아재개그 하나.  배롱나무인지 아시나요?’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 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그걸 자랑하며 십일홍일 뿐인 다른 나무들에게 메롱하며 놀린 것이 시간이 자나면서 배롱으로 변했다나?

 10 : 23. 인생은 좋은 일로만 계속될 수는 없는가 보다. 비인천(庇仁川)을 가로지르는 쌍도교를 건넜다싶으면 이정표(종점 10.2km/ 시점 1.5km)가 이제 그만 배롱나무 꽃길과 헤어지란다.

 이정표가 서해랑길 본연의 임무를 되찾았다. 시점과 종점까지의 거리를 기본으로 인근의 주요 포인트를 추가했다. 하단의 지도에는 현재위치의 주소까지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방조제의 둑길을 따라간다. 길은 월하성 어촌체험마을로 이어진다.

 이즈음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 쌍도를 눈에 담을 수 있다. 그저 뭉툭한 모양새일 따름이었던 섬이 언제부턴가 고래와 거북 모양을 닮은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다.

 10 : 27. 바닷가 습지에는 조류관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니 무늬만 탐조대였다. 바다생물 관찰 사이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 구멍을 아래가 아닌 위에다 뚫어 놓은 이유는 대체 뭘까?

 안내판은 철새가 아닌 흰발농게, 갯게, 대추귀고둥 등 해양생물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반 폐쇄형 갯벌인 월호리 갯벌에 3종의 해양보호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특히 갯게는 서해안에서 유일한 서식지라고 한다.

 10 : 29. ‘해뜨는비치하우스 펜션’. 서해랑길(kakaomap)은 펜션 앞에서 직진이다. 하지만 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공식 사이트)’에서 배포한 트랙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우리 부부는 kakaomap을 따르기로 했다. ‘월하성 포구를 둘러본 다음 바닷가를 따라 띠섬목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10 : 32. 월하성 마을. 법정 동리인 월호리(月湖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화동·월하성·큰장굴) 중 하나로 달빛 아래 신선이 노는 것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신성지로 꼽히던 마을이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안해서인지 없던 것만도 못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10 : 35. 월하성마을 앞 풍경. 58가구 196명이 살아간다는 마을은 규모가 제법 컸다. 민박이나 펜션은 기본. 편의점에 식당(그것도 셋이나)까지 들어서 있었다.

 바닷가에는 철새나그네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충남 서천은 서해안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보령 땅과 경계를 이룬 부사호에서 전북 군산을 마주보고 있는 장항까지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 서천 철새나그네길이다.  5개 코스 37.8km에 이르며, 1코스(붉은낭만길) 8.8km, 2코스(해지게길) 5km, 3코스(나그네길) 14km, 4코스(윤슬길) 5km, 5코스(해찬솔길) 5km로 조성되어 있다.

 앞바다는 만 형태의 지형으로 수심이 얕아 갯벌이 잘 발달해있다. 썰물 때면 갯벌이 1km 가까이 드러난다. 또한 질퍽한 갯벌이 아니라 고운 모랫벌이라 움직이기도 편하다.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갯벌에 직접 들어가 바지락, 모시조개, 맛조개 같은 조개류를 채집하고 갯벌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월하성 포구의 어선들도 하나같이 물양장으로 올라와 있었다. 서천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나오다 보니 이젠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배는 경운기나 트랙터에 의해 바다로 옮겨진다. 저 배는 언제라도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 상태다. 아니 다른 배들도 출발선상에 선 달리기 주자들처럼 신호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길가에는 쭈꾸미 잡이용 소라껍데기가 줄에 묶인 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쭈꾸미는 낚시로 잡는 것보다 소라방 잡이 방식으로 잡는 것이 힘은 더 든다고 했다. 하지만 쭈꾸미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만큼 가격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저 길은 어선 전용이다. 어민들은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썰물 때는 경운기 뒤에 배를 싣고 이 길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운다. 이게 또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쳐지면서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나? 맞다.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로 배를 싣고 바다로 가거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싣고 나오는 경운기들의 행렬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10 : 43. 포구의 끝. 방파제 앞에는 어촌체험 안내소 겸 매표소가 있었다. 8월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이용한 월하성 횃불문화축제까지 열어가며 체험객들을 유치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때 배올리기 문화체험, 어부체험, 맨손으로 고기잡기 체험, 돌게잡이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월하성 마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모양이 달을 닮았다하여 달 아래 성 , ‘월하성(月下城)’이라고 부른다나? 해안가의 지형이 기러기 날개처럼 굽어졌다고 해서 월아성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1864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마을 서쪽에 월아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게 지금의 옥녀봉으로 추측되며 마을 이름도 이 월아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의 끝에는 봉긋하니 솟아오른 동산이 하나 있었다. 내가 띠섬으로 오해했던 섬이다. 주민들 말로는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육지로 변한 섬이라고 했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북쪽 해안. 저 해안선을 따라 띠섬목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 말로는 무릎까지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단다. 갯고랑이 제법 깊다는 것이다.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10 : 52. 마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월하성길을 따라 서울시 서천연수원쪽으로 간다.

 10 : 58. 고갯마루에서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8.7km/ 시점 3km)를 만났다. 그런데 옥녀봉(75.9m)으로 올라가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린 서울시 서천연수원으로 간다. 해안선을 따라가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띠섬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해안선을 따라가는 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옥녀봉을 넘는 서해랑길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11 : 09. 연수원 경내를 횡단해 바닷가로 내려선다. 건물들이 밀집해있어 길 찾기가 수월치는 않으나 연수원 이정표의 보존습지·모래톱마당·해변가 등을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더. 해안선을 따르는 이 구간은 밀물 때는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해변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연수원 식구들을 소화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널찍했다. 거기다 규사 성분의 모래사장은 한없이 보드랍다. 이런 고품격의 프라이빗 비치를 갖고 있는 서울시청은 대체 무슨 복일까? 서울 시내의 지하철역을 시작으로 독도 지우기를 나서고 있는 매국 행위는 토착 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데...

 가는 입자의 모래가 물에 다져진 탓에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바닥이 단단했다. 아니 발바닥으로는 폭신폭신한 촉감이 느껴져 온다.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로드 컨디션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띠섬은 육지와 3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 저 섬은 하루 두 번 썰물 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육지와 연결된다고 했다. 그래선지 바다에서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길은 갯바위지대로 연결된다. 위험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을만한 검붉은 바위들이 해안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갯바위는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흡사 조각전시장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TV 화면에서 살짝 스쳐지나가던 달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모두가 다 오밀조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험상궂으면서도 거대한 갯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살짝 비켜 지나가면 그만이었지만... 아무튼 모래해변은 모래해변대로, 갯바위는 갯바위대로 바다와 찰떡궁합을 이루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갯바위들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바다와 사랑에 빠져 지금과 같은 아기자기한 모양이 됐다. 그러다보니 해식지형의 변화과정도 살짝 엿볼 수 있다. 해안절벽이 침식을 거쳐 해식동굴로 변한... 저런 동굴들은 흐르는 세월과 함께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즉 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서천화력의 거대한 마천루도 시야에 잡힌다.

 11 : 14. 갯바위로 이루어진 모퉁이를 돌아서면 띠섬목이다. 이정표(종점 8.3km/ 시점 3.4km)는 월하성마을에서 이곳까지를 1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내 트랙은 1.4km를 찍는다. 해안선을 따르는 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서해랑길보다 더 길다는 얘기일 것이다.

 들일 나온, 아니 갯일 나온 어느 가족. 꽤 오래 버틸 요량인지 바닷가에 돗자리까지 펼쳐놓았다. 바리바리 싸온 간식도 펼쳐놓았음은 물론이다.

 띠섬목이란 지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 ‘띠섬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곧 띠섬목이 아니겠는가.

 이후부터는 띠섬목 해변을 따른다. 규사성분의 고운입자로 이루어진 백사장이 자랑인 해변이다. 배후에 울창한 송림까지 끼고 있으니 해수욕장 부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하지만 사유지인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즉 반도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해변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었다. 맞다. ‘띠섬목 해변은 그 길이가 4km나 된다고 했다. 물먹은 규사성분의 모래사장이 단단하게 굳어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딱딱하다는 것은 아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폭신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의 연한 움직임이 있었다.

 뒤돌아 본 띠섬’. ‘띠 모()’자를 써 모도라고도 하는데, 월호리에서 갯벌로 이어진 덕분에 갯벌체험장으로 이용된다.

 11 : 35  11 : 55. 바닥이 곱다고 뜨거운 태양열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나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스스럼없이 해송펜션으로 올라가버린다. 더 이상은 무리라면서 잠시 쉬어가자는 것이다. 덕분에 우린 다른 일행들과 함께 막걸리 잔을 나누며 20분 정도 푹 쉬어 갈 수 있었다.

 이 일대의 갯벌은 장벌어촌계 및 개인 소유의 양식장이라고 한다. 그러니 펜션손님이나 관광객들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조개를 채취해야 한단다.

 11 : 55. 다시 길을 나선다. 모래사장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았다.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고, 바지락·동죽··고동 등 그들이 거둔 수확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국물이 시원한 바지락, 구우면 더욱 맛있는 모시조개, 뽀얀 속살이 쫄깃한 돌조개 등 각양각색의 조개가 잘 잡힌다고 했다. 하지만 서천 갯벌체험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맛조개 잡기. 호미로 흙을 파낸 뒤 조개를 줍는 것과 달리 송송 뚫린 갯벌 구멍 안에 소금을 뿌리면 맛이 쏙 튀어나온다.

 맛조개 잡이는 삽과 소금만 있으면 충분하다. 펜션에서 장비를 빌려주고, 잡는 방법도 간단해서 아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먼저 삽으로 개흙을 살짝 걷어내고 구멍에 소금을 한 움큼씩 뿌려놓으면 소금의 짠 기운을 견디지 못한 맛이 마치 안테나를 올려 갯벌 위를 탐색하듯 고개를 살짝 내민다. 이때 맛을 억지로 잡아 빼는 것은 금물. 잘못하면 끊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반 이상 올라왔을 때 재빨리 낚아채야 한다.

 ! 모래사장이 거칠어졌다. 엊그제 지나간 태풍 종다리가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12 : 10. 해변은 배후 숲이 계속해서 따라온다. 울창한 송림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이룬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또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만큼 그늘이 절실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 그것도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모래사장을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숲에는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캠핑 사이트도 눈에 띈다. ‘해오름관광농원에서 만들어놓은 부대시설이다. 철새나그네길(3코스 : 해오름관광농원다사항) 걷기 여행자들이 기점으로 삼는 곳이기도 하다.

 12 : 16. 그 끝에는 해오름 모텔이 있었다. 서해의 푸른 경관을 두 눈에 담으며 잠들 수 있으니 하룻밤 머물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12 : 19. 길이 끊겨있어 다시 해변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더 모래사장을 걸어야만 했다.

 12 : 24. 드디어 도로(공암남촌길)로 올라섰다. 이후부터는 방파제의 축대 위를 걷는다. 축대의 높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음주 보행을 삼가야 하는 구간이다. 하나 더. 이 일대는 긴 벌판이란 뜻의 장벌로 불리기도 한다. 벌판이 하도 길어 가다가 쉬어갔다고 해서 쉬엄장벌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12 : 29. 해양재난구조대 앞에서는 도로 오른편으로 들어붙는다. 널찍하니 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12 : 30. 서도초등학교. 서해바다를 뜨락 삼았으니 입지조건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이번 종다리 태풍 때만 해도 학교 앞 도로가 통제되는 등, 기상이변 때마다 비상이 걸린다니 세상 일이란 마냥 좋을 수만은 없나보다.

 12 : 35. ‘신바람 난 찐빵·만두집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남촌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도둔리(都屯里, ’군사가 주둔하던 곶에서 유래된 지명)’에 속한 행정부락 중 하나로 도둔리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남촌마을 골목. 장방형의 마을을 남북으로 짧게 관통한다.

 요즘은 민박도 월 단위로 내주는 모양이다. 하긴 작년 코카서스 3국을 여행하면서 들른 조지아에서는 주민들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살기를 권하기도 했었다. 내가 수령하는 연금이면 호화롭지는 않아도 여유롭게 주변 나라들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12 : 37. 골목을 빠져나와 서면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도둔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인 공정마을(7)’로 들어선다. 마을에는 노인정(마을회관) 말고도 커뮤니티센터가 따로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춘장대역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맞다. 저곳에는 서천화력선(간치~동백정) 춘장대역(春長臺驛)’이 있었다.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관광열차(통통통 뮤직카페트레인)가 이곳까지 운행하기도 했으나, 2018년 서천화력선이 폐지되면서 2020년 춘장대역 커뮤니티센터로 변신했다.

 공정마을 뒤 언덕을 넘으면 요포마을(10)’이다. 참고로 도둔리는 1리 장벌, 2리 남촌, 3리 동리, 4리 아파트촌, 5리 중리, 6리 요치, 7리 정동, 8리 공암, 9리 홍원, 10리 요포 등 10개의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길가 화단에 설악초(雪嶽草)’가 화사하다. 회녹색의 잎이 나는데 가장자리가 흰색 테두리를 친 듯 하얗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본 꽃마저 온통 하얀 게 아닌가. ‘설악초(snow-on-the-mountain)’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란다.

 길은 이제 홍원항으로 이어진다. 서면에서도 제일 서단에 위치한 어촌마을로, 옛날에는 탄포라 불리었는데, 70년대 공정마을에서 분구하여 행정구역상 홍원리(도둔9)’가 되었다. 이쯤에서 팁 하나. ‘요포 마을회관을 지나면 두 곳에서 길이 오른쪽으로 나뉜다. 중간 기점인 홍원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곧장 오른쪽으로 가면 될 일이다. 이 경우 2km 정도를 단축하게 된다.

 12 : 59. ‘홍원마을(이정표 : 종점 2.4km/ 시점 9.3km)’에 이른다. 바닷가 마을이라서 90%가 어업에 종사하고 어선만도 60척에 이른단다. 그래선지 마을에서 열리는 풍어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고 있었다. 음력 1 7일에는 마을주민 2백여 명이 참여하여 마을의 안녕과 어민들의 안전사고 및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단다.

 서천 지명 탄생 600주년 기념 조형물. 1413(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모양이다. 참고로 서천은 마한시대의 비미국(卑彌國),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서천마산현(馬山縣:한산비중현(比衆縣:비인), 통일신라(西林郡·嘉林郡), 고려(知西州使·知韓州使) 등을 거쳐 조선 태종 때 서천군이 되었다. 그러다 1913년 서천군·한산군·비인군이 합쳐져 현재의 서천군이 된다.

 13 : 02. ‘홍원항은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1940년경 중국·일본 어선 4-5척이 갈치·조기 등을 싣고 입항하면서 어항이 형성되었는데, 그 후 꾸준히 늘면서 어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성어기에는 하루 150여척이 입·출항한다니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에서는 홍원항 자연산 전어·꽃게 축제(8.24-9.8)’가 한창이었다. 참고로 홍원항 근해에서는 전어·농어·꽃게 등이 많이 잡힌다고 했다. 특산물로는 앞바다에서 잡힌 멸치로 담근 액젓이 꼽힌단다. ’잡어 젓갈도 하나쯤 챙겨갈 만하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맨손 전어잡기 체험과 홍원항 보물찾기, 수산물 깜짝경매, 홍원항 수산물장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몽골텐트도 엄청나게 많이 쳐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썰렁한 풍경이었다. 비어있는 텐트가 보이는가 하면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전어회와 전어무침 등을 파는 저 음식코너가 그 썰렁함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50평도 더 되어 보이는 널찍한 매장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들어간 편의점 주인장은 음식을 식당에서 먹지 왜 광장에서 먹겠느냐며 에둘러 얘기했지만 말이다.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은 에어컨도 없는 노점보다는 초대가수의 열창에 더 이끌렸던 모양이다. 무대 앞 50석쯤 되는 객석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있었다.

 포구는 꽤 번화했다. 펜션이나 민박 등의 숙박업소와 횟집·식당들이 웬만한 도시의 번화가 못지않게 늘어서 있다. 맞다. 주말이면 외지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포구로 들어오며, 성수기에는 그 숫자가 5백여 대도 더 넘는다고 했다.

 13 : 16. 축제 구경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잔디광장(주차장이 들어있다)을 왼쪽에 끼고 나있는 요포길을 따라 북·동진한다.

 13 : 23. 마리나방파제 못미처 삼거리(이정표 : 종점 1.9km/ 시점 9.8km)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13 : 27. 고개 위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길은 아직도 요포길이다. ‘파도소리 카페 바다내음 캠핑장 등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오롯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조망의 명소들이 들어서 있는 구간이다.

 꽃범의 꼬리가 길가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꽃잎이 호랑이가 크게 입을 벌린 것 같은데다, 꽃대가 기다란 범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호랑이처럼 무섭지는 않고 오히려 화사한 분홍빛이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싶게 만든다. 꽃말은 청춘’, ‘젊은 날의 회상이다.

 고개를 넘는 도중 서해바다 쪽으로 시야가 트인다. 그런데 언덕 아래로 길이 나있는가 하면, 바다에는 산책용 다리까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아까 서해랑길이 방향을 꺾던 삼거리(마리나방파제 입구)에서 탐방로를 연결시키는 방법은 없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쯤에서라도 바닷가로 내려가도록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춘장대 해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리(‘도둔고지의 동쪽)와 중리(‘도둔고지의 중앙), 요치 등이 밀집해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로 도둔리는 신라시대 서림군의 비비현에 속하면서 마을이 시작됐다. 하지만 오랑캐들이 잦은 침범으로 고생깨나 했단다. 조선 세종 때는 만호(萬戶) 김성길이 아들 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왜적의 배 50여척과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다. 이곳에 바다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무찌르는 관방(官房)을 두었던 이유이다.

 13 : 41. 막바지에 이른 서해랑길은 춘장대 해변을 따라 북진한다. 이 구간을 걷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바닷가로 내려서서 모래사장을 걸을 수도 있고, 우리처럼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도 된다.

 안전지킴이용 전망대가 막혀있는 걸 보면 해수욕 시즌은 이미 마감되었나 보다.

 1.5km나 되는 긴 백사장을 자랑하는 춘장대해수욕장 1.5도의 완만한 경사와 얕은 수심, 잔잔한 파도 등 해수욕을 즐기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알려진다.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자연학습장 8선에 꼽히기도 했다. 1978년 서천화력발전소 건설로 동백정해수욕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면 도둔리 북서쪽 토지를 개발해 새로운 해수욕장을 조성했는데, 그곳이 오늘날 춘장대해수욕장이다. 춘장대란 이름은 이때 토지 문제를 너그럽게 해결해준 땅 주인의 호 춘장(春長)’에서 따왔다고 한다.

 춘장대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낙조라고 했다. 해무가 잦지 않은 여름이면 횃불처럼 타오르는 해넘이를 볼 수 있단다. 거기다 먼 바다에서 야간 조업을 하는 고깃배라도 지나갈라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진다고 한다.

 즐거운 어울림은 오뉴월 삼복더위까지도 날려버리나 보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씨인데도 23각 경기 삼매경에 푹 빠져있다.

 13 : 50. 캠핑사이트와 평상(대여를 하는 듯)이 늘어선 해안길을 따르다보면 중앙광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네덜란드에서나 볼 법한 초대형 풍차가 두 대나 세워져 있다. 그것도 날개까지 돌린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해변에 기념촬영용 문자 조형물을 설치해 인생샷 한 장쯤 건질 수 있도록 했다.

 13 : 56. 중앙광장에서 마을 쪽으로 한 브럭 더 걷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춘장대길8번길을 따른다. 이어서 150m쯤 더 걸으면 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는 서해랑길(보령 59코스) 안내도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은 14.46km를 찍고 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정규코스보다 3km나 더 걸었나 보다.

 하버드대학교에서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인생 궤적을 추적하며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원천은 바로 좋은 인간관계다. 외로움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로 요약했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할 수 있겠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하다며 항시 붙어 다니니 말이다.

 오늘은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사양하고 맛집을 찾았다. 춘장대 해변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이용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너 한쌈 나 한쌈에 들어가 메인 메뉴인 쌈밥을 먹었다. 맛집 검색에서 유일하게 5점 만점을 받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평은 틀림이 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주인장의 친절한 서비스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