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57코스(와석 마을회관  선도리 갯벌체험장)

 

여 행 일 : ‘24. 7. 27()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마서면·종천면·비인면 일원

여행코스 : 와석마을회관장구2리 마을회관당정1다사항비인해변선도리갯벌 체험장(거리/시간 : 15.9km, 실제는 13.76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7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와석마을회관(충남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IC에서 내려와 4번 국도를 타고 서천읍으로 들어온다. 서천교차라에서 21번 국도(홍성·보령방면으로 3km), 당정교차로에서 617번 지방도(마서·당정리방면으로 3.4km), 한성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km쯤 들어오면 와석마을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7코스) 안내도는 마을회관(노인정) 앞에 설치되어 있다.

 송석리(와석마을)’을 출발, 서천군의 서쪽 해안을 걸어 선도리(갯벌체험장)’까지 가는 15.9km짜리 여정이다. 리아스식 해안의 곶()을 떠나 들녘을 걷는 구간이 유난히 많아, 서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예쁜 풍경화 말고도 드넓은 서천의 너른 들녘에서 풍요를 만끽하며 걷는다.

 서해랑길은 해안길을 따라 송석항으로 간다. 걷기 여행자들의 발걸음도 마서면에서 종천면을 향해 간다. 그러자 아목섬이 길 떠나는 나그네들을 향해 아쉬움의 솟짓을 보내온다. 섬의 모양이 거위의 목처럼 생겼다는 섬으로, ‘아항도(鵝項島)’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목섬은 모새의 기적이 연출되는 섬이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길이 만들어지면서 섬까지 연결된다. 이때 조개류나 해삼 등 짭짤한 수확도 거둘 수 있음은 물론이다.(아래는 지난번 56코스 답사 때 찍은 사진이다)

 송석항 쪽 풍경. 방파제가 있는 곳이 송석항. 그 오른쪽 산기슭이 슴갈목(원래 섬이었다)’, 중앙에 끼어있는 낮은 산은 갈무산이다.

 10 : 20. 실제 출발지인 (해창마을)버스정류장. 원래 출발지에서 2.6m쯤 떨어진 지점인데,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경보까지 내려졌다)에 놀라 거리를 조금 단축했다. 아니 57코스의 특징이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바닷가와 들녘만 걷는 특징으로 인해 구간 전체가 오뉴월 뙤약볕 이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10 : 20. ‘장천로(617번 지방도)’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해창 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한성리(漢城里)’를 구성하는 자연마을(한성·해창·골패·마동) 중 하나로, ‘해창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해창(海倉, 군수 물자와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했다.

 10 : 24. 대한불교삼론종 소속이라는 약사암’. 참고로 삼론종(三論宗)’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중국에서 체계화해 성립한 종파이다. 인도 대승불교에는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두 흐름이 있었다. 이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관불교는 삼론종(三論宗), 유식불교는 법상종(法相宗)이 됐다. 대한불교삼론종은 1989년 대산(大汕) 이혜봉(李惠鳳) 스님이 창종했다. 여기서 삼론(三論)은 중관파의 주요한 세 논서, 즉 용수의 중론(中論), 12,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등을 말한다.

 10 : 24. 판교천은 배수갑문 위로 난 도로(장천로)를 이용해 건넌다. 참고로 판교천(板橋川)은 서천군(판교면) 복대리 무량골에서 발원 남쪽으로 흐르다가 종천면 장구리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16.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판교천의 하구역(河口域). 해창마을의 포구를 겸하는가 보다.

 10 : 28. 판교천에서 100m쯤 더 걷다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장촌길40번길)로 들어간다. 이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외국인 걷기여행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온다. 흔치않은 풍경이라 하겠다. 여성이 이국의 낯선 땅을, 그것도 외진 들녘을 혼자서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10 : 33. ‘장구2 마을회관. 장구리(長久里)는 지형이 장구처럼 곶을 이루고 있다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갯장구, 뭍장구, 이재민촌, 후촌, 참샛골 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 ‘2의 자연부락 이름은 무엇일까? 그게 궁금해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주민을 붙들고 물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장구2’. 동네의 규모를 좁히고 또 좁혀가도 그의 입에서는 장구2만 되풀이 될 따름이었다. 우문현답인지 현문우답인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헷갈린다.

 서천군에서는 분리수거장을 깔끔으로 부르나 보다. 예쁜 이름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관리하고 있었다.

 관상용으로만 알았던 백년초를 이 마을에서는 재배하고 있었다. 맞다. 백년초를 대표적인 회춘푸드라고 하지 않았던가. 노화 방지와 질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면서 말이다. 하나 더. ‘본초강목에는 기의 흐름과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독을 풀어 주며 심장과 위통 개선, 기관지 천식 등에 이로운 약초로 기록돼 있다.

 마을을 둘러싼 들녘이 무척 넓다.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 안내판은 장구2 풍성한 마을로 소개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이제 종구3를 향해 간다. 푸름으로 가득한 들녘을 횡단한다고 보면 되겠다.

 들녘은 사방팔방으로 논만 드넓게 펼쳐진다. 그러니 쉴 만한 곳이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벌판 한가운데 파란색까지 칠한 귀여운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들에서 일하는 분들이 잠시 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일까? 아니 길가는 나그네들을 배려한 쉼터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장구3라고 써놓은 나무 벤치는 이 마을이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가를 말해준다.

 10 : 48. 서해랑길은 종구3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화산(200.5m)을 병풍삼아 들어앉았는데, 그 오른쪽 어디쯤에 장구리성지가 있다고 했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산성인데 고려시대 이전의 성으로 추정된다나?

 이곳에도 벤치가 놓여있었다. 이정표(종점 11.7km/ 시점 4.2km)도 눈에 띈다.

 10 : 50. ‘장천로(617번 지방도)’로 다시 올라선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무척 예쁘게 다가오나 서해랑길은 이를 따르지는 않는다. 곧장 횡단해 당정리 들녘으로 나간다. 하나 더. 코스를 단축하고 싶다면 판교천 갑문에서 이곳까지 도로를 따라오면 된다.

 당정리 들녘(‘물거내들로도 불린다)으로 들어간다. 비닐하우스 앞으로 당정천이 흐른다.

 10 : 52. ‘당정천이란다. 종천면 종천리에서 발원 남쪽으로 흐르다가 장구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4.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11 : 00. 이번에는 갯벌체험로(이정표 : 종점 10.7km/ 시점 5.2km)’로 내려선다. ‘물거내들의 끝, 구릉지 앞(이정표 : 종점 11km/ 시점 4.9km)에서 왼쪽으로 방향으로 튼 다음 충서로319번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갯벌체험로 배롱나무길(서천군 군도 5호선 종천면 장구리에서 시작해, 비인면을 거처 서면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로도 불린다. 서천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하다. 해안도로를 배롱나무 꽃길로 조성해 우리의 전통건축과 어우러지는 꽃무리의 운치를 보여준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 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탐방로는 배롱나무 꽃길을 만나자마다 헤어져버린다. 그리고는 당정1를 향해 구릉지로 올라간다.

 11 : 08. 여염집처럼 지어진 당정1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당정리(堂丁里)는 대부분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골뜸·뚜두렁이(당곡삼막골(산막) 등이 있는데, 이곳 당정1리는 삼막골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마을회관에서 오솔길로 바꿔 탄다. 시멘트포장길이 반듯하게 나있으나 구태여 에둘러갈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11 : 11. 당정1리 마을은 언덕의 남과 북에 나뉘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또 다른 삼막골 마을이라 할 수 있겠다.

 마을 앞 모정을 지나 당정리 들녘으로 들어간다.

 여름철을 만난 정미소는 낮잠 잘 일만 남았다.

 11 : 16.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이정표 : 종점 9.6km/ 시점 6.3km)가 이번에는 들녘을 횡단한다. 이때 썩 편치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익성이 더 뛰어나는지는 몰라도 농경지까지 훼손해가며 들어선 태양광발전소는 언제 봐도 눈에 거슬린다.

 11 : 23. 종천천(鍾川川)을 건넌다. 판교면(서천군) 상좌리를 기점으로 하여 종천면 종천리에 이르는 1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중류에 종천저수지, 장항저수지 등이 있어 종천평야와 당정평야를 관개한다.

 다리를 건너면 종천리(鐘川里)’ 땅이다. 하지만 취락지구로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들녘만 지나간다. 참고로 이곳은 토정(李之菡) 선생이 찾던 명당자리가 있다는 곳이다. 그래선지 냇물에 물이 흐를 때 가끔 종소리가 울리기도 한단다.

▼ 11 : 27. 들녘의 끝(이정표 종점 8.7km/ 시점 7.2km)에서 산자락(봉산, 124.4m)과 마주친 길이 좌우로 나뉜다서해랑길은 왼쪽(충서로)으로 간다이때 당정리 들녘을 만들어낸 종천방조제가 기다랗게 눈에 들어온다.

▼ 11 : 34. ‘다사2마을로 들어섰다서쪽과 남쪽을 서해에 접하고 있는 다사리(多沙里)’는 모래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하지만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다사리 해변은 백사장 대신 검은 갯벌만 한가득이었다.

▼ 11 : 41. 마을 뒤 언덕을 넘으니 다시 바다가 우리를 기다린다보령해경 다사출장소가 발아래에 놓였는가하면 다사항’ 전체가 한눈에 조망된다.

▼ 11 : 44. ‘다사2마을회관 앞에서 갯벌체험로(이정표 종점 7.2km/ 시점 8.7km)’를 다시 만났다그런데 배롱나무 꽃길로 단장되어 있던 아까와는 달리 이곳에는 해송(海松)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었다하나 더. ‘구수메라는 식당 간판이 이곳 다사2리의 또 다른 지명이 구수메임을 알려준다.

▼ 탐방로는 갯벌체험로를 그냥 가로질러 버린다그리고는 해안도로(갯벌체험로44번길)를 따라 다사항으로 간다항아리처럼 내륙을 향해 움푹 들어온 다사리 해변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어촌체험관광안내소. ‘다사리도 어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저 안내소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고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다는 것은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예산 낭비일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나 혼자만의 기우이기를 바래본다.

 어항을 끼고 있어선지 길은 대체로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도로변에 어망을 널어놓았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통발이 수북이 쌓여있다.

 이곳은 쭈꾸미를 소라껍질로 잡는가 보다. 쭈꾸미 잡이용 소라껍데기가 줄에 묶인 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쭈꾸미는 낚시로 잡는 것보다 소라방 잡이 방식으로 잡는 것이 힘은 더 든다고 했다. 하지만 쭈꾸미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만큼 가격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11 : 55. 다사항(多沙港). 바다보다 뭍으로 올라와있는 배들이 더 많다. 서천지역에 들어오면서부터 눈에 띄는 이색적인 풍경이다(지난 56코스 때 만난 주민은 금어기라서 하릴없어진 배가 쉬는 중이라고 했다). 아무튼 물양장에는 경운기와 트랙터도 쉬고 있었다. 언제든지 바다를 향해 배를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사항은 남쪽의 송석항과 마주보면서 큰 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갯벌 너머로 송석항과 갈무산, 그리고 아목섬이 조망된다.

 서천갯벌은 습지보호지역(습지보전법에 의한) 및 람사르습지(국제 환경협약)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11 : 57. 이후부터는 해변산책로를 따른다. 다사항에서 장포항까지 바닷가를 따라 멋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지난 2009년 서천군이 연안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해놓은 명품 둘레길이다.

 다사항 근처의 독살’. 독살은 의 사투리인 과 사냥을 뜻하는 의 합성어로, 바다에 돌을 둥글게(또는 ‘V형으로) 쌓아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잡는 가장 원시적인 포획방법이다. 남해에서는 석방렴(石防簾)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직도 많은 곳에서 이런 원시어업이 이루어지고 있단다. 특히 태안군에서는 30여 곳이나 행해지고 있다나?

 시선을 조금 옮기자 서해바다가 아득하다. 바다 건너로 보이는 섬은 개야도와 죽도가 아닐까 싶다.

 산책로는 돈 깨나 쏟아 부은 흔적이 역력했다. 생김새도 다양한 파고라나 의자는 물론이고, 특이한 조형물들까지 세워 탐방객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하지만 조성만 해 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듯, 무너지기 직전인 시설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하나 더. 최근에 철거(보수가 아닌)를 했는지 바다 쪽 안전펜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소라껍데기 조형물. 저 안에 들어가면 파도소리가 들릴까? ‘바닷가 작은 집(저자 : 케빈 헹크스)’에서 할머니는 소라 껍데기는 누군가의 작은 집이었다고 손녀에게 일러준다. 그러자 소녀의 상상력은 주황색 둥그런 방이 있는 집, 하얗고 올록볼록한 집, 반짝이거나 빛바랜 집을 만들어냈고, 나중에는 그 안의 풍경까지로 발전한다. 소라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둥근 껍데기 속에 꼬마유령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12 : 06. 어떤 용도인지는 몰라도, 갯바위 지대에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는 방파제도 만들어놓았다.

 방파제는 전망대로 변신해 있었다. 세 방향으로 툭 트이는 서해바다를 편하게 구경하라는 듯 돌의자까지 놓아두었다. 구호장비를 비치하고 사방에 금줄까지 둘러 안전을 확보했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해변산책로를 따른다. 이후부터는 장포리 해안을 앞에 두고 걷게 된다.

 12 : 10. 갯바위를 등받이 삼아 힐링하고 있는 저 조각상은 다사리 해안산책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지 않나 싶다. 최고로 편한 자세로 서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처가 산책로(갯바위로 도배된) 곳곳에 널려있다는 특징 말이다.

 힐링하는 조각상이 있던 곳. 혹자는 저곳을 다사곶이라 부르고 있었다.

 12 : 12. ‘다사곶 모퉁이를 돌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뀐다. 바닷가가 갯바위나 갯벌이 아닌 모래사장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오른쪽 사구(沙丘)에는 캠핑하기 딱 좋은 송림도 들어앉았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는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와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꼭 다시 찾아올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나?

 이곳도 역시 멋진 산책로가 나있었다. 야자매트를 바닥에 깔아 모래가 신발 속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가 하면, 바닷가 비탈진 곳에는 해당화를 심어 꽃길로 탈바꿈시켰다. 해당화는 꽃 대신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그러니 제 철도 모르고 피어난 저 꽃은 본의 아니게 귀하신 몸이 된다.

 순비기나무도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통기성이 좋은 자갈밭이나 모래사장, 특히 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라니 당연하다 하겠다. 아무튼 순비기나무는 모래 위를 기어 다니면서 터전을 넓혀 방석을 깔아놓듯이 펼쳐나가므로 덩굴식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무가 분명하단다.

 해변 한가운데, 기다랗게 설치된 저 목책은 거친 파도를 잠재우기 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저렇게 좋은 모래가 파도에 휩쓸려나가는 건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탐방로는 모래사장으로 내려서기도 한다. 질 좋은 모래사장을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모래사장은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었다. 규사 성분을 띄었는지 발자국도 찍히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12 : 25. 이때 장포해안의 명물인 옵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장포리 곶()의 끄트머리에 갯바위 몇 개가 뾰쪽하니 솟아올랐다. 그게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바위라고도 불린단다.

 바위의 생김새는 자못 빼어나다. 하지만 옵바위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그 형태보다 바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 때문이라고 한다. 바위 위에다 떨어지는 해를 걸쳐놓기라도 할라치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 풍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옵바위 주변은 조개를 잡는 탐방객들로 한가득이었다. 이 지역에서 많이 난다는 동죽이라도 잡나보다.

 옵바위를 실컷 구경했다면, 이제 서해랑길로 돌아갈 차례이다. 모래사장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 해변에는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포장마차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영업을 하지 않는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정표가 철새나그네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19 : 29. 다사리 해안산책로를 빠져나와 갯벌체험로(이정표 : 종점 4.5km/ 시점 11.4km)’로 다시 올라선다. 이어서 방조제를 건너 장포리로 넘어간다.

 방조제 아래 바닷가는 장포리 어민들의 포구를 겸하는가 보다. 선착장이나 물양장 등 포구다운 시설이 일절 없는데도, 격식을 갖춘 다사항보다도 더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육지 풍경도 볼만하다. 소유를 표시하는 알록달록한 깃발들로 무당집 같다.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에는 대하양식장이 집단으로 들어서 있었다. 수많은 수차가 물살을 일으키는 풍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2 : 33. 방조제를 건너자마자 ‘Sea Garden 펜션 앞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1 마을회관으로 연결된다)로 들어선다. 걷기 여행자들의 안전을 위한 배려로 보이는데, ‘갯벌체험로의 통행량이 적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다. 이로 인해 한참이나 에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 : 36. 100m 남짓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4.1km/ 시점 11.8km)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어서 조금 더 걸어 장포2로 들어간다. 참고로 서해와 접한 장포리(長浦里)’는 자연마을로 지리실과 장진개, 산적말 등이 있다. 이곳 ‘2 지리실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의 흙이 몹시 질퍽거린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농로를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자락과 농경지 사이로 길이 나있다.

 12 : 45. ‘장포1버스정류장에서 다시 갯벌체험로를 만났다. 하지만 탐방로는 도로로 올라서지 않은 채 방향을 틀어 장포1 마을로 들어간다.

 그렇다고 마을을 누비지는 않는다. 60m쯤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3km/ 시점 12.9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포성대교회쪽으로 간다.

 장포1리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 바닷가로 간다. 참고로 마을에는 포성대교회가 있었다. 이로보아 이곳에 장포리산성이 있었지 않나 싶다. 앞바다의 장진(長津)을 감시하고, 포루의 역할을 담당했다는데 지금은 남벽 일부만 남아있단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포성대(浦城臺)’가 되었다고 한다.

 13 : 56  13 : 03. 길은 또 다시 갯벌체험로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종점인 선도리갯벌체험장을 향해간다. 그렇다고 무작정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개만 돌려도 이곳 비인해변의 최고 볼거리인 할미바위를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도에 씻기고 씻긴 모습이 할머니를 닮아서일까?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섬을 할미섬이라 불렀다. 할머니가 홀로 살다가 죽어 섬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단다. 하나 더. 할미섬은 낙조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할미섬 뒤로 넘어가는 불덩어리 같은 낙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소문났다.(내 사진이 별로여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13 : 04. 할미섬이 만들어내는 멋진 풍광에 취해 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갯벌체험로를 따라 북진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는 게 아닌가. 기상청은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저녁 무렵처럼 어둑해져 버린다.

 13 : 06.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데크로 만들어놓은 할미섬전망대가 나온다. 잡초가 무성한 전망대로 올라서니 할미섬이 가까운 바다에서 포즈를 취해준다. 할미섬은 밀물에는 바위 윗부분만 드러나고, 썰물에는 해안과 갯벌로 연결되는 갯바위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쌍도가 눈에 들어온다. 57코스가 끝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개를 넘어온 서해랑길은 선도리에 바톤을 넘겨준다. ! 넘어오는 도중에 쌍도 창문가(雙島 昌文家)’라는 정체 모를 저택을 만나기도 했다. ‘창성할  글월 이니 어느 문학가의 집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이 부근 민가의 처마에서 소나기를 피하느라 5분쯤 쉬기도 했다.

 13 : 17. 선도리3리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 1.5km/ 시점 14.4km)에는 노거수 한 그루가 커다란 등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늘이 필요했던지 주민들이 나무 아래에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방향을 꺾어 바닷가로 간다.

 13 : 21. 선도2리에 도착한 다음에는 비인해변의 해안길(갯벌체험로564번길)을 따라 북진한다. 비인해변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이용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 별미 중의 별미로 알려지는 칼국수 맛에 해변을 바라보며 먹는 분위기까지 곁들여지는 맛의 핫 플레이스로 알려진다.

 ! ‘당산바위를 깜빡 빠뜨릴 뻔했다. 비인해변의 남쪽 초입에 있는 갯바위인데, 바위틈에서 해송 세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게 영락없는 분재다. ‘철모바위라고도 불리는데, 군인들이 쓰는 철모에 위장용 나뭇가지를 꽂아놓은 형상이라나? 아무튼 이곳은 아침 일출과 저녁 일몰 사진을 찍기에 좋은 장소로 알려진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기다란 해변을 이룬 선도리갯벌체험장이 펼쳐진다. 그 한가운데 비인해변의 명물인 쌍도가 놓여있다. 두 개의 작은 섬은 물이 빠지면 하나의 섬이 됐다가 물이 차면 두 개의 섬이 된다. 70m 정도 떨어져 있는 두 섬은 둘이면서 하나인 부부를 닮았다. 선도리 쪽에서 보면 왼쪽 섬은 거북모양이고, 오른쪽 섬은 고래모양이란다.

 비인해변의 장점은 울창한 송림을 배후 숲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그 숲에 야영장을 열었다. 그리고 청소비라며 소정의 이용료를 받는다.

 13 : 26. 비인해변은 여느 유명해변에 못지않게 잘 꾸며 놓았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라 이곳저곳 금줄을 쳐놓았다. 뭔가 또 주민들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지적이라도 받았던 모양이다. 공사만 해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말이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너무했다. 바닷가이니 여름철이 성수기일 텐데 하필이면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이곳 역시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서천갯벌에 포함되어 있다. 서천 군민들이 개발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낸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비인해변을 왼쪽에 끼고 북진한다. 비인해변은 길이 2.km에 폭이 700m인 광활한 해수욕장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썰물 때면 2km나 갯벌이 펼쳐진단다. 덕분에 해수욕과 갯벌 체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단다.

 시선을 조금 비틀면 선도리갯벌체험장이 드넓게 펼쳐진다. 선도리는 원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해변에 물막이용 방파제가 세워진 뒤 모래가 쓸려나가 백사장이 많이 줄었다. 하나 더. 비인해변의 갯벌은 모래가 섞인 모래갯벌이라 장화를 신지 않고도 걸을 수 있다.

 13 : 41. ‘선도리갯벌 글램핑장이란다. 숙소 말고도 바닷가에 광장과 야외무대를 만드는 등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선도리 갯벌체험마을이라는 입간판도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13 : 46. 선도리 갯벌체험장 입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끝난다. 앞바다의 쌍도로 연결되는 노둣길의 초입으로 보면 되겠다.

 쌍도는 섬으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과 천석지기 부잣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남녀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선도리 앞바다의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우뚝 솟아났다나? 그러자 고래와 거북 모양을 닮은 두 개의 섬을 후대의 사람들이 쌍도(雙島)라고 불렀단다. 지자체에서 이런 관광 호재를 놓쳤을 리가 없다. 러브() 조형물을 세우고 전설까지 적어 넣었다.

 비인해변은 갯벌체험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갯벌이 하도 넓다보니 다녀오는 게 만만찮았던 모양이다. 트랙터를 개조해 체험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하긴 쌍도까지만 해도 거리가 300m나 되는데, 그 너머로도 한참이나 더 펼쳐지는 갯벌을 어떻게 걸어 다닐 수 있겠는가.

 서해랑길(서천 58코스) 안내도는 갯벌체험장 입구(검문소까지 지어놓았다) 뒤편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7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린 날씨를 감안하면 무리하게 속도를 냈지 않나 싶다.

 카메라 앞에 선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웃는 얼굴은 타인의 마음도 열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무장해제 시킬 수 있으며,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도 있다. 그런 집사람이 늘 함께 해주기에 난 언제나 행복하다.

 

서해랑길 56코스(장항도선장 입구 - 와석마을 노인회관)

 

여 행 일 : ‘24. 7. 13()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장항읍 및 마서면 일원

여행코스 : 장항도선장장항송림산림욕장솔리천교옥남1백사마을하소마을와석마을(거리/시간 : 14.2km, 실제는 15.88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6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장항 송림산림욕장과 매바위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장항도선장 입구(충남 서천군 장항읍 신창리)

서천-공주고속도로 동서천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타고 장항방면으로 달리다가 하구둑사거리에서 68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항읍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6코스) 안내도는 장항도선장 입구, 육교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장항 도선장을 출발, 서천의 서쪽 해안을 걸어 송석리(마서면)’까지 가는 14.2km짜리 여정이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길을 산들바람까지 맞아가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으로, 서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예쁜 풍경화는 덤이라 할 수 있다.

 10 : 02. ‘장산로(68번 지방도)’를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가 담벼락은 홍보의 장이다. 타일 벽면을 화선지삼아 금강하굿둑 철새도래지, 춘장대해수욕장, 문헌서원, 희리산자연휴양림 등 서천팔경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넣었다.

 10 : 12. ‘장항항(長項港)’은 스치듯 지나간다. 1938년 개항하여 장항공단의 배후시설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곳에도 뜬다리부두(浮棧橋)’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군산항처럼 일제가 농산물 침탈을 목적으로 만든 역사적 시설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4차선의 장산로 왼쪽으로는 철로가 함께 간다. 장항역과 장항항·장항공단을 잇던 철로로 장항역이 새 역사로 이전하면서 열차 운행이 끊겼으나, 철로는 녹이 슨 채로 남아있었다. 열차 운행시간 안내판이나 차단기 등 옛 시설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10 : 23. 발아래로 천리길을 내달려온 금강이 거센 기세로 서해와 몸을 섞는다. 그 연안에 아담한 공원(안내판은 친수서설이라고 적었다)이 조성되어 있었다.

 뒤돌아본 장항항’.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꽤 크다. 이웃한 군산항과 연계하는 군장항 건설사업이 진행된 결과일 것이다.

 10 : 26. ‘LS메탈() 장항공장 앞을 지나간다. 우리에게 장항제련소(長項製鍊所)’로 더 익숙한 곳으로, 1936년 일제가 국내의 비철금속(··동 등) 수탈을 위해 세운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LS메탈(이정표 : 종점 12.5km/ 시점 1.7km)’ 앞에서 도로를 벗어난다. 그리고 샛길인 화송길로 들어간다.

 10 : 28. ‘LS메탈 맞은편에는 후망산(後望山, 90.1m)’이 있다. ‘LS메탈의 거대한 굴뚝이 올라앉은 전망산과 마주보는 모양새인데, 그 산등성이에 장암진성(長巖鎭城)’이 들어앉아 있다.

 조선 중종 9(1514)에 쌓은 진성(鎭城)으로, 성벽은 해발 443m 사이의 산 구릉과 해수면에 임해 석축으로 만들어졌다. 둘레는 640m(동서 190m, 남북 100m).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소의 문지가 있단다. 현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10 : 31. 68번 지방도(장산로)와 다시 만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잠시지만 장산로 101번길을 따라간다. 담양이나 곡성, 진안의 메타세쿼이아 길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의 풍치를 자랑하는 멋진 구간이다.

 10 : 34. 널찍한 도로를 벗어나 들길(이정표 : 종점 11.9km/ 시점 2.3km)로 들어선다. 갈대가 무성한 습지 사이로 오솔길이 나있다.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는 옛날 해수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게 물길이 막히면서 자연스레 습지로 변했다. 습지 너머 전망산(前望山, 56m)’이 자신도 보아달라며 고개를 내민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장항제련소의 거대한 굴뚝과 함께이다.

 10 : 41. 불 꺼진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벗 삼아 걷기를 7. 장항송림산림욕장의 널따란 (4)주차장에 이른다.

 서천 송림마을의 솔바람 숲 1954년 장항농고 학생들(5·6) 2년생 묘목을 식재하면서 조성됐다고 한다. 바닷가 모래날림과 바람으로부터 장항농고와 주변 마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단다. 현재 70년생 곰솔(해송)  12,000본과 그 아래서 자라고 있는 맥문동 등 초화류가 서해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생태공간을 이룬다. 2019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서천은 왜 ‘9을 고집하는 것일까? 다른 지자체들은 다들 팔경이라며 대표 볼거리 여덟 곳을 뽑는데도 말이다. 서천을 구경하고 구미당기는 ‘Good을 사가라는 홍보용 멘트인 ‘9()·9()·9()’이라면 몰라도 따로 사용할 경우에는 ‘8으로 통일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서해랑길 고유의 제대로 된 이정표(종점 11.4km/ 시점 2.8km)를 만날 수 있었다. 시점 및 종점의 방향과 거리에 더해 근처 주요 기점까지 표시해 놓았다.

 솔숲으로 들어선다. 6만평에 가까운 숲은 어른의 허리통만큼이나 굵직굵직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있다. 5km쯤 된다는 산책로는 그런 숲속을 사통팔달로 헤집는다. 마음 내키는 길을 골라잡아 반대편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면 소나무의 피톤치드와 서해의 선선한 바람과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지며 심신은 저절로 힐링이 된다. 때라도 잘 맞추면 맥문동의 보랏빛 향기에 젖어볼 수도 있다나?

 10 : 49. 장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장항 스카이워크’. 높이 15미터의 공중 산책로인 스카이워크는 서천의 펄과 바다와 녹음을 한데 아우르는 전망대다. 드넓게 펼쳐지는 서해바다와 서천갯벌 풍광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발아래에 울창한 송림 숲이 있어 힐링을 선사한다. 또한 백제와 일본, 신라와 당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전 역사 탐방도 겸할 수 있다.

 스카이워크는 15m 높이의 아찔한 하늘길이다.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을 발아래에 두고 걷는다. 시선은 서천 바다의 멋진 풍경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하늘 길의 끄트머리에 이를 즈음 기벌포 해전 전망대라고 적힌 표지판과 맞닥뜨린다. 기벌포는 서천 남서쪽에 걸친 장항읍 일대의 옛 지명으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을 수호하던 관문이었다. 백제는 관문인 기벌포를 적군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에는 나라가 망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트린 신라와 당 연합군이 한반도 패권을 두고 반목해 벌인 최후의 해상 전투도 바로 여기서 펼쳐졌다.

 250m 길이 스카이워크의 끝은 전망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망원경까지 설치해 탐방객들의 조망을 도와준다.

 전망대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금강하구와 서해바다, 그리고 근대 산업중흥을 이끌었던 장항제련소까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군산시가지와 새만금방조제도 희미하나마 조망할 수 있었다.

 시선을 비틀자 이번에는 작은 섬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유부도와 유자도, 그 오른쪽은 큰대죽섬과 작은대죽섬, 그리고 묵도일 것이다. 그밖에도 꽤 많은 섬들이 서해바다를 마치 돛단배라도 되는 양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11 : 03.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서면 이번에는 서천갯벌이 맞아준다. 멸종위기 철새 17종과 각종 저서동물 181종이 서식하는 자연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2021년 전북 고창갯벌 등 3곳의 갯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참고로 서천갯벌 개발 대신 보전을 택해 지켜낸 소중한 자산이다. 매립과 개발이냐, 생태와 보전이냐의 갈림길에서 서천은 생태와 보전을 택했다. 고심 끝에 내린 판단이 옳았음을 유네스코가 증명해 준 셈이다.

 저 갯벌에는 동죽·맛조개·고동·소라·돌게 등 수많은 갯벌 생물이 서식한다고 했다. 조개갈퀴나 호미 등으로 표면을 걷어내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잡을 수 있어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즐거운 여름을 선사해 준단다. 갯벌에서 노닐고 있는 수많은 저 인파가 그 증거라 하겠다.

 바닷가에서 올려다본 스카이워크. 15m나 되는 허공에 매달려 있지만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강화유리처럼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소재로 바닥을 깔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11 : 06. 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소나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내놓은 산책로는 여간 고운 게 아니다. 보드라운 흙길(맨발로 걷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에다 방문객들이 소나무 숲에서 편안한 힐링 타임을 가질 수 있도록 벤치, 정자, 운동시설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었다.

 장항송림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맥문동이다. 19(5 7500)의 소나무 숲에 600만 본을 식재,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 자랑거리를 지자체에서 놓칠 리가 없다. 맥문동에 대한 설명으로도 모자라 권혁춘 시인의 시비까지 세워놓았다. 매년 8월말에서 9월초에는 맥문동축제도 열린다고 했다.

 송림이 끝나갈 무렵, 잠시지만 해변을 따라 걷기도 한다. 그런데 갯벌을 두부 자르듯이 나눠가며 울타리처럼 쳐놓은 저 목책은 용도가 대체 뭘까?

 솔숲에는 캠핑장도 들어서 있었다. ‘솔바람캠핑장이라는데 작은 도서관도 눈에 띈다. 갯벌체험으로도 모자라 독서까지 즐길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하지만 텐트가 듬성듬성 들어선 것이 입소문은 아직 덜 탄 모양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서천의 갯벌은 멸종위기 철새 17종과 각종 저서동물 181종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래선지 둘레길의 이름까지도 철새 나그네길이란다.

 11 : 19. 송림을 벗어나 장항산단로로 내려선다. 바닷가에 걸터앉은 송림 캠프에서 구수한 파전 냄새로 나그네를 홀리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초반부터 막걸리로 목을 축일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로를 따라 70m쯤 걷다가 왼쪽으로 난 골목(장항산단로11번길)로 들어선다. 이정표(종점 9.7km/ 시점 4.5km)가 길을 안내해 준다.

 소서(小暑)가 지났다지만 초복(初伏)은 이틀 뒤에나 우리를 찾아온다. 삼복더위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상이변은 삼복보다도 더 높이 수은주를 끌어올렸고, 들녘의 고추는 저렇게 빨갛게 익어간다.

 11 : 24. 마을길을 지나 송림리의 북쪽 해안에 이른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송림리 곶()을 가로질러 왔다고 보면 되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솔리천 배수갑문을 만난다.

 ()의 끄트머리로도 길이 나있었다. 널따란 물양장까지 갖춘 선착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3층의 갯골어울림센터(어민회관인 듯)가 서천군의 개발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솔리천이란다. 장항읍 창선리에서 발원해 송림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3.67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솔리천은 수만 마리의 도요새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강하구에 위치한 유부도와 함께 도요새 서식의 핵심지역으로 꼽힌다.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노랑부리백로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11 : 32. 솔리천 방조제를 지나 옥남1(‘솔리마을일 것이다)로 들어섰다. 이어서 마을안길(옥남길)을 따라 북진한다. ! 이 마을에 장항 국가생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시골인데도 여러 동의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솔리(率里)’는 옛날에 부자가 계속해서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이후부터는 마을길과 들길을 번갈아가며 걷는다. 축사와 비닐하우스 등 전형적인 시골풍경이 연이어 펼쳐지는 구간이다.

 녹음방초(綠陰芳草)의 계절. 그 푸름 속에서 빨갛고 노란 칸나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저런 칸나 꽃밭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넓이도 관상용이라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넓었다. 구근 채취를 목적으로 재배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칸나의 구근은 지혈·소종·항암·항염에 효능이 있다고 했다. 류마티스관절염·학질·산증·각기·부스럼 등의 치료제로도 쓰인단다.

 도깨비 가지도 연보라 빛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냈다. 청초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으나, 실제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식물로 농민들에게는 기피 대상이다.

 저 망고수박 밭은 이번 장마의 피해? 아니면 수확을 끝낸 뒤 남은 이삭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군침이 도는 풍경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따 먹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이즈음 눈에 들어오는 건물 하나. 태양광 패널을 머리에 이고 있는데, 생김새가 자못 괴이하다.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어촌체험 관련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들녘과 바닷가를 함께 끼고 있으니 체험장으로 이만한 곳도 없지 않겠는가.

 11 : 52. 옥남리에서 남전리로 넘어오자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도로변에 주차장에서나 볼 법한 차량방지턱이 줄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55. 잠시 후 백사마을로 들어선다. 법정 동리인 남전리(南田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서쪽 바닷가에 모래가 많다고 해서 백사장 또는 백사정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서해랑길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 바닷가로 나가봤다. ‘백사장(白沙場)’이란 별칭까지 갖고 있다면 그만한 볼거리가 있지 않겠는가. 맞다. 이곳은 고려 말기의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백사정(白沙亭, 지금은 터만 남아있단다)이란 정자를 짓고 안빈낙도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하얀 모래밭에 우뚝 솟은 정자라나?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해안은 하얀 모래 대신 시커먼 갯벌만 가득했다. 옛날 이곳을 찾은 선비들이 바닷가를 거닐며 글을 읽고 시를 지었다고 했는데, 저런 갯벌을 보고 시를 지을만한 흥취가 났을까 싶다.

 대신 갯벌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습지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데크 탐방로라도 만든다면 탐방객들을 유치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백사마을은 해안가와 맞닿은 나지막한 구릉지에 기대듯 들어서 있다. 서해랑길은 마을 뒤 구릉지(이정표 : 종점 6.4km/ 시점 7.8km)를 넘어간다. 바닷가로 길을 내는 게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12 : 05. 고개를 넘은 서해랑길은 자연스레 바닷가로 향한다. kakaomap는 이곳을 삼바골로 적고 있었다. 농경지로 개간된 골짜기라고 보면 되겠다.

 12 : 12. 그렇다고 무작정 진행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중간에 논두렁을 이용해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어야하니까 말이다(해안길을 따로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표지기(리본)을 잘 찾아가며 진행할 일이다.

 앞장불산의 능선은 임도를 따라 넘는다. 울창한 숲속으로 길이 나있어 오늘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에 제격인 구간이다.

 12 : 21. 능선을 넘으면 신창동(新艙洞)’이다. 법정 동리인 월포리(月浦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선창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그래선지 바닷가를 따라 수산업체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월포선착장으로 내려서서 해안길을 따라 북진한다.

 이즈음 매바위공원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들쑥날쑥 하는 것이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12 : 27  12 : 49. 하릴없는 배들이 낮잠을 자고 있는 물양장(이정표 : 종점 5.1km/ 시점 9.1km)’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정자의 그늘에다 바다에서 냉장고 바람까지 불어오니 이만한 쉼터가 없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느긋하게 쉬어갈 수 있었다.

 12 : 49. 2차선의 마서로를 따라 100m남짓 걷다가 왼쪽으로 나뉘는 소로(같은 마서로이지만 1차선)로 들어선다.

 12 : 51. ‘죽산배수갑문교를 건너면 커다란 저수지가 얼굴을 내민다. 오른쪽에는 대규모 태양광발전단지가 들어서 있다.

 염전 아니면 양식장이 있었을 법한 곳에 들어선 대규모 태양광발전소.

 12 : 58. 하소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정표(종점 4.4km/ 시점 9.8km) 1km쯤 더 걸으면 매바위공원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참고로 하소마을은 직진해야 만날 수 있다.

 13 : 01. ‘하소길을 만나자 이번에는 대하양식장이 길손을 맞는다.

 단지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데, 개개의 방죽마다 수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13 : 07. 민가 몇이 듬성듬성 들어서있는 하소마을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해안길을 따라 매바위공원으로 간다. ! ‘하소라는 지명은 지형이 소처럼 생긴 소매 아래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했다.

 13 : 12. 잠시 후 도착한 하소마을 선착장’.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56코스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매바위 공원이 왼쪽에 있기 때문이다.

 매바위란 공원 이름은 공원 한가운데 있는 집채만 한 저 갯바위에서 따온 것이다. 매를 닮아 그렇게 부른다는데, 둥근 바위의 형상에서는 매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매를 꼭 닮았던 이 바위는 어느 해인가 태풍으로 목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탐방로는 공원을 한 바퀴 빙 둘러 나있다. 공원은 이런 산책로 말고도 조형물과 구름다리, 정자, 나무 덱 등으로 잘 꾸며져 있다. 하지만 공원 이름을 적은 팻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은 흠이라 하겠다. 차량용 내비게이션이나 포털사이트 전자지도로는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지자체가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널리 알리는 것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다.

 공원은 조망의 명소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갯벌과 함께 까마득한 갯벌 가운데로 이어지는 길이 드러난다. 이 일대의 갯벌은 죽산리 어민들이 관리하는 바지락·가무락·동죽·굴 양식장이라고 한다.

 공원 앞 갯벌에는 칼바위, 먹섬, 한목 등의 이름을 가진 갯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그 뒤로 길게 늘어진 섬은 임가르매(가르마를 탄 것처럼 생겼다나?)’일 것이다. 하나 더. 이곳은 썰물 시간이 해지는 시간과 맞아떨어지는 날에 찾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드넓은 갯벌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 풍경 한가운데로 들어가, 일몰과 겹치는 저 바위들을 배경으로 삼으면 인생 사진 몇 장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공원에는 매의 형상을 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없는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원을 조성한 취지를 감안했었더라면, 틀림없이 목이 떨어나가기 전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13 : 24. 선착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길을 따라 북진한다.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선박들이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구간이다. 바다에 있어야 할 배들이 하나같이 뭍으로 올라와있는 것이다. 주민들 말로는 금어기(禁漁期)’라서 발이 묶인 탓이라고 했다. 하나 더. 금어기가 해제되면 저 배들은 경운기에 이끌려 바다로 간다.

 뒤돌아 본 매바위 공원’. 선착장에서 갯벌로 나가는 길이 살짝 드러난다. 썰물 때의 뱃길이라고 보면 된다. 갯벌이 드러나 배를 띄울 수 없으니 경운기에 배를 싣고 갯벌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우는 것이다.

 13 : 36. 그렇게 한참을 걷자 또 다른 선착장(이정표 : 종점 2.2km/ 시점 12km)이 나온다.

 아목섬(거위의 목처럼 생겼단다)’ 방향. 반짝이는 갯벌 한가운데로 잔돌이 깔린 길이 이어져 있다. 죽산리의 어민들은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썰물 때는 경운기 뒤에 배를 싣고 이 길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운다. 이게 또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쳐지면서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나? 맞다.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로 배를 싣고 바다로 가거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싣고 나오는 경운기들의 행렬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선착장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숲속으로 들어간다. 녹슨 어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조금은 어수선한 풍경을 보여준다.

 13 : 41. 청해수산 앞에서 마서로783번길을 따라 하소마을로 간다. 죽산리에 속한 자연부락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죽산교회가 큼지막하게 들어서있다. 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이 하소마을, 왼쪽은 상소마을이라고 한다.

 13 : 44. 하소마을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농로를 탄다. 죽산리 들녘을 벗어나 송석리의 드넓은 들녘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54. 서해랑길은 동지산 마을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가 56코스 종점인 와석마을로 간다. 하지만 난 그보다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종점이 코앞인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조상의 얼이 깃는 보호수라고 했다. 그래서 소중히 관리해오고 있단다. 그런데도 수령이 322년이라는 팽나무는 죽어 있었다.

 14 : 02. 송석리 와석마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마을에 넓은 바위가 누워있다고 해서 눈돌로 불리다가 한자화되면서 와석이 되었다. 서해랑길(서천 57코스) 안내도는 마을회관(눈돌노인회관) 맞은편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5.88km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어느 현인은 친구를 일러, 힘들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 말을 편견 없이 끝까지 들어주고, 외롭고 쓸쓸할 때 나의 허전함을 채워주며, 내가 잘못할 땐 뼈아픈 충고도 가리지 않는, 늘 따뜻한 눈길로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내게 둘도 없는 친구가 분명하다. 더불어 그런 친구를 둔 나는 분명 성공한 인생이다.

 

서해랑길 55코스(진포 해양테마공원-장항도선장 입구)

 

여 행 일 : ‘24. 6. 29()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장미동·경암동·내흥동 및 충남 서천군 마서면·장항읍 일원

여행코스 : 진포해양공원서래포구경암동 철길마을진포 시비공원금강하구언김인전공원평화공원장항도선장(거리/시간 : 14.9km, 실제는 15.8km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5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금강 하구역의 남·북쪽 연안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전북특별자치도(군산시)에서 충청남도(서천군)로 넘어가면서 진포해양태마공원과 서래포구, 경암동 철길마을, 진포시비공원, 김인전공원 등 주요 볼거리들을 차례로 만난다. 난이도는 별이 하나(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진포 해양테마공원(전북 군산시 장미동)

서천-공주고속도로 동서천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타고 장항방면으로 달리다가 원수교차로에서 4번 국도(군산방면), 동백대교를 건너자마자 21번 국도(시청방면)로 옮긴 다음 내항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곧이어 해양테마공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군산 55코스) 안내도는 2 부잔교 앞에 설치되어 있다.

 진포 해양테마공원을 출발, 금강 하구역의 남·북쪽 연안을 걸어 장항 도선장에 이르는 14.9km짜리 여정이다. 오르내림이 일절 없는데다, 산들바람까지 맞아가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강 건너로 펼쳐지는 예쁜 풍경화는 덤이라 할 수 있다.

 10 : 10. 내항 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곳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인 진포대첩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50척의 배로 왜선 500척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선지 해양테마공원을 조성하고 육··공군의 퇴역 군장비 13 16대를 전시하고 있었다.

 1번 부잔교(浮棧橋, 뜬다리부두). 부잔교는 밀물 때 다리가 수면에 떠오르고 썰물 때는 수면만큼 내려가는 수위에 따라 다리의 높이가 자동 조절되는 선박 접안시설물이다. 3t급 배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이 다리를 통해 쌀 등이 일본으로 반출됐었다. 일제강점기 4기였으나 지금은 3기만 남아 있다.

 4200 t급 위봉함(676)은 아예 관람시설로 꾸몄다. 지하 2, 지상 4층의 거대한 선체 안에 병사들의 생활상을 그려 볼 수 있는 각종 용품들을 전시 재현하는 등 체험 위주의 전시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창고도 헐지 않은 채로 그냥 놓아두었다. 아니 안내판과 함께 안중근 의사가 쓴 大韓國人이라는 글씨를 적어 넣어 일제 침탈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해준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타이틀전에서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씨가 경기 직후 어머니와의 통화 때 외쳤던 일성이다. 하지만 군산시에서는 동향 출신의 복서 김득구가 하고 싶었던 말로 표현했다. 1982년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팰리스 호텔에서 열린 레이 맨시니와의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KO당하면서 숨을 거둔 비운의 복서이다.

 10 : 21. ‘째보선창(군산 내항)’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선지 그 어디서도 어항의 모양새가 그려지지 않는다. 참고로 째보선창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됐고,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서도 일제가 이곳을 통해 쌀을 수탈해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째보는 언청이를 이르는 우리말이다. 와이(Y)자로 살짝 째진 강언덕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포구가 언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에 힘센 째보가 살았는데 부둣가에서 노점 등에게 자릿세를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째보 객주가 사는 선창이라는 것이다.

 군산시가 운영하는 군산 비어포트는 맥주 마니아들 사이에는 핫 플레이스로 소문이 자자하다. 시는 째보선창에 있는 옛 수협어판장을 개조해 2021년 수제맥주 공동양조장 및 체험판매장으로 문을 열었다. 아울러 옥구 들녘에 맥주보리 전용 재배단지를 조성하고, 수제맥주에 최적화된 품종(광맥)을 재배했다. ‘보리 재배-맥아 가공-맥주 양조-판매 등 수제맥주 일괄 생산·판매체계를 갖춘 것이다. 지난 주말 54코스 때 만났던 ‘2024 군산 수제맥주&블루스 페스티벌도 그런 일환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어항으로 개발된 째보선창은 일제강점기 번영을 누렸고, 해방 이후에는 동부어판장이 그 명성을 이어왔다. 하지만 근해어업 환경이 바뀌면서 그동안 침체해왔다. 이를 고민하던 군산시가 2018년부터 이 일대에서 째보스토리1899’라는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했단다. 군산항이 문을 연 1899년부터의 역사를 담자는 뜻이라고 한다.

 10 : 26. ‘해망로(21번 국도)’로 빠져나와 왼쪽으로 간다.

 이때 몽깃돌 길을 걸어보자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몽깃돌이란 밀물과 썰물 때 배가 밀려나가지 않도록 배꼬리에 다는 돌을 말한다. 몽깃돌을 매단 배들로 넘쳐나던 째보선창이, 지금은 폐선이 나뒹구는 생기 잃은 공간으로 변해버렸단다. 그러면서 잠자던 어선이 몽깃돌을 걷어 올리고 다시 바다로 나가듯, 몽깃돌길을 걸어보자는 것이다. 그게 바닷길이 아닌 어촌의 골목길이긴 하지만...

 군산 시간여행 마을이란다. 옆에는 군산시간여행 1930´s’란 문구도 보인다. 옛 도심의 활성화에 고심하던 군산시는 2018년부터 이 일대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해왔다고 한다. 그 사업이 만들어놓은 모던 타임즈 투어를 해보라는 모양이다.

 10 : 29. 경포천의 서래교 입구 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해망로를 따라간다.

 10 : 31. 몇 걸음 더 걷다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난 골목(서래5)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근대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옛 풍물을 담은 저 벽화가 군산 시간여행 마을에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만신집도 시간여행에서 만나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가 보다.

 저 이발관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을까? 간판에 전화번호까지 내걸었지만 내부는 불이 꺼져있었다.

 도시재생사업이 만든 변신? 철판 울타리가 중동 지역을 소개하는 홍보의 장으로 바뀌었다. ‘중동(仲洞)’ 1980년대까지 동부어판장의 배후 지역이었다. 신영동에서 금암동 째보선창까지 이어지는 어업관련 및 상거래 지역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내항의 기능약화로 어업관련시설은 사라지고 공설시장 배후지역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고 있단다.

 서래포구 마을도 중동의 행정구역 안에 들어있다는 얘기겠지? 맞다. 서래포구(경포)는 지금의 중동로터리 부근이었다. ‘슬애포구로도 불리는데 슬애란 서래의 군산식 발음으로 서울로 가는 포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걸 한자화하면서 경포(京浦)’가 되었다.

 서래포구 상인 벽화.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수공업 생산이 다양해지면서 상품 유통이 활성화되었고, 더불어 서래포구와 서래장터도 수공업자와 상인들의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개화기의 집배원(당시는 체전부라고 불렀다)과 어머니(모성애를 물씬 풍기고 있는)의 벽화도 눈에 띈다.

 10 : 34. 벽화와 사진 등의 게시가 끝나는 서래5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서래안2로 들어간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당산제당(堂山祭堂)’이 맞는다. 중동당제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군산 유일의 동제(洞祭), 주민의 안녕과 복을 축원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해오고 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농토는 대부분 주택단지가 되었으나, 어업은 지금도 주민들의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가 조형물이 서래포구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와 죽성포(째보선창)가 있었다. 개항(1899) 전후만 해도 군산의 민간무역은 경포(서래장터)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국권피탈(1910) 이후 일제가 장재시장을 개장하고 죽성포(째보선창)를 근대식 어항으로 조성하면서 경포는 장시와 포구 기능을 죽성포로 넘겨주게 된다.

 경포천과 서해안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서래포구는 오랫동안 뱃길의 요지로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근해어업 환경의 변화를 피해가지는 못했나 보다. 노후화된 포구는 활력을 잃었고, 선착장에는 꼬맹이 어선 십여 척이 쉬고 있을 따름이다.

 10 : 40. 카페와 식당들이 여럿 늘어선 포구길을 지나 경포천을 건넌다. 하나 더. 옛날 이 거리는 간판도 없는 오두막 분위기의 대폿집(선술집)이 즐비했단다. 허술한 목로주점으로 지게꾼과 구루마꾼들은 막걸리 한 사발로 하루의 고단함을 달랬다나?

 잠시 후 군산천연가스발전소 앞을 지나는데, 발전소(서부발전)에서 세워놓은 시설물 몇 개가 눈길을 끌게 만든다. 풍력발전시설과 태양광발전시설을 한 몸에 품었으니 소형이지만 복합발전소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10 : 46. ‘진포사거리에 이르러 횡단보도를 연이어 건넌다. ‘구암3.1 진포로 자 모양으로 가로지른다.

 경암동 철길마을로 진입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철길을 따라 걸으며 옛 풍경을 감상한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군산 원도심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어 군산 시간여행 마을이라 부른다. 이곳 경암동 철길마을도 그중 하나다.

 나로서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가깝게는 2년 전 이맘때쯤 찾아왔었다. 대형마트 건너편,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그 뒷골목은 지금도 현란한 간판과 호객행위를 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가게의 모양새도 예전과 똑 같았다.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상품은 거의 없고, 그저 기억의 저편에서나 나올 법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골목은 옛날 군산역과 북선제지 공장만 오가는 화물기차를 위한 철도였다. 그 당시 철길 주변은 논밭이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철길 바로 옆에 오두막집을 지었고, 선로에서 겨우 1미터도 안 되는 거리만큼 떨어져 지은 무허가 집들이 늘어나 동네가 되었다. 2008년 기차는 운행을 중단했다. 하지만 철길마을 사람들은 기차가 사라진 철길 옆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옛날 교복으로 갈아입고 철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골목은 가득 찼다. 그런데 너나없이 불량스러운 폼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학창시절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불량학생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다.

 골목은 옛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가게들도 옛날 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열차와 당시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한 모형들이 더욱 더 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복원된 군산역. 기존의 철길에 옛것을 보존하려는 저런 노력들이 더해지면서, 철길마을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원하는 이들의 성지가 된다. 그리고 드라마 고맙습니다와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의 주인공들이 철길마을의 선로 위를 걸었고,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철길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0 : 57. 연안사거리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조촌로를 따라 금강으로 간다. 6분 후쯤 만나게 되는 강변삼거리에서는 강변로로 옮겨 동진한다. 6차선 도로에 통행량까지 많으나 도로 가장자리에 보도가 따로 나있어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11 : 04. 하지만 강변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을 벗어나 샛길(외산4)로 들어갔다. ‘구암역사공원을 들러보기 위해서이다. 역사공원이 들어선 구암산(龜岩山, 34m)’은 한강이남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특히 구한말 선교사들이 정착하면서 세워진 구암교회는 군산 3.5만세운동의 발화지점이다.

▼ 아쉽게도 그런 내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역사공원이 위치한 구암산까지의 거리가 만만찮은데다, 공원을 둘러본 다음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결국 군산 3.5운동의 진원지라는 구암교회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2018년에 건축된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에 볼거리가 제법 많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11 : 13. 다시 강변로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강변로를 따라간다. 금강 물길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11 : 16. ‘구암천(주민들의 귀띔이었으나 맞는지는 모르겠다)’을 건너자마자 강변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강변에 잇대어 내놓은 산책로를 따라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즈음 금강의 하구역이 함께한다. 발아래로 천리길을 내달려온 금강이 거센 기세로 서해와 몸을 섞고, 강 건너 충남 서천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산책로와 강변로 사이의 공간은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구불길 안내석도 눈에 띈다. 금강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비단강길(공주산군산역)’이 이곳을 지나간다면서, 강물이 흐른 세월만큼이나 전설과 역사, 자연과 생태를 두둑이 품은 구간의 특징을 알려준다.

 11 : 41. 그 공간에는 진포 시비공원(鎭浦詩碑公園)’도 들어서 있었다.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비석에 새겨 전시해놓은 공원으로, 서해랑길이나 구불길을 여행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휴식의 공간이자 군산 시민의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비는 공원 곳곳에 들어서있었다. 1.5-2.5m 크기의 자연석에 신석정(부안), 이병훈(군산), 고은(군산) 등 전북 출신을 포함한 국내 시인 14명과 외국 시인 6명의 작품을 새겨 넣었다. 평소에도 좋아하는 시들이라서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가다 그만두기로 했다. 42점이나 되는 시를 일일이 음미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序詩를 올려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30년 가까운 공직생활, 아니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늘 되새기던 금과옥조(金科玉條).

 워즈워드는 저 시보다도 그의 생가가 더 생각난다. 몇 번의 영국출장. 한번은 워드워즈의 생가를 둘러보고파 글라스미어지방의 원더미어 호수를 찾았었다. 그리고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단체에서 18세기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던 워즈워드 생가를 만났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하룻밤을 묵으며 거닐었던 원더미어 호숫가가 더 많이 저장되어 있다. 호젓함에 가슴을 떨며 울먹이던...

 시비공원을 지나자 등치를 한껏 키운 금강 하굿둑이 성큼 다가온다. 전북을 떠날 때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46. ‘금강체육공원을 지난다. 축구장은 하나인데 야구장은 정규 규격 말도도 자그맣지만 두어 개나 더 갖고 있다. 군산 시민들이 바라보는 야구의 위상을 실감케 해주는 풍경이라 하겠다.

 11 : 52. 야구장 끄트머리에서 습지에 발이 묶인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군산 장애인체육관이 커다란 몸집을 드러낸다. 장애인체육관과 발달장애인 평생학습관으로 꾸며졌는데, 장애인들의 신체 기능회복이나 재활뿐 만아니라 체계적 평생교육을 통한 통합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단다.

 산책로 좌우로는 거대한 습지가 펼쳐진다. 연안(沿岸)의 습지는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습지 안에 탐방로를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1 : 57. 잠시 후 도착한 금강 시민공원에는 진포대첩기념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이용한 함포로 왜구 500여척을 무찌른 최무선(崔茂宣, 1330-1395)의 진포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1999년 개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인데 돛을 상징하는 큰 화강암 날개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두 조형물이 만나는 가장 높은 곳에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쳐부순 화포가 하늘을 향해 화구를 겨누고 있다.

 진포대첩사적비도 눈에 띈다. 진포대첩이란 고려말 군산에서 있었던 전투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우왕 6 8월 왜선 500여척이 진포에 침입하였다. 이때 침입한 왜구는 최소 2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때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이 최무선이 설계한 80여척의 병선과 역시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적을 소탕했다.

 12 : 06. ‘강변로로 빠져나와 금강시민공원을 왼쪽에 끼고 돈다. 그러자 금강 하굿둑이 길손을 맞는다. 길이 401km의 금강 하구를 막아 건설한 둑으로, 담수된 물은 전북 및 충남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금강 주변지역의 홍수 조절도 주요 기능 중 하나다.

 도크(dock)로 여겨지는 시설이 있는 걸 보면 작은 선박의 출입도 가능한 모양이다. 밀물 때 하부갑문을 열어 배를 도크 안으로 들이고, 하부갑문을 닫은 다음 상부갑문을 서서히 개방해서 수위를 맞추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1,841m의 제방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교량역할을 한다. 배수갑문만도 20(714m)에 이른다.

 둑에는 도로 말고도 철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장항선을 연장시킨 이 철길은 군산을 지나 익산에서 전라선과 합쳐진다.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하긴 도에서 또 다른 도로 넘어가는 여정이 어디 그리 수월하겠는가.

 12 : 29. 하굿둑 북단에는 금강하구둑관광지가 들어서 있었다. 사계절썰매장과 바이킹, 회전목마 등 놀이시설이 있는 드림랜드와 게임월드, 자동차극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식당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에게 안성맞춤형 관광지로 꼽힌다.

 관광지 맞은편은 김인전 공원이다. 이 고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인전(金仁全, 1876-1923)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선생의 흉상과 건립기비,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서천(舒川)에서 태어난 김인전 선생은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교육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우는가 하면, 영명학교에 재직 중이던 1919년에는 군산의 ‘3.1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22년 임시의정원 의장에 올랐고, 독립운동의 활성에 온 힘을 쏟으며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1923 5월 과로로 사망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에는 중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초입의 관광안내도. 서천군 관광은 ‘9()·9()·9()’으로 집약된다. 서천을 대표하는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살거리를 각각 9개씩 선정해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서천을 구경하고 구미당기는 ‘Good을 사가라는 것이다.

 공원 안쪽에는 국민여가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금강을 뜨락 삼았으니 입지조건은 좋은 편, 하지만 물가인데도 물을 접할 수 없다는 점은 흠으로 작용한다. 그래선지 잔디밭에 이동식 물놀이장을 만들어놓았다.

 탐방로는 강변을 따라 간다. 이때 만나게 되는 캠핑사이트는 쉼터 겸 전망대로 안성맞춤이었다. 강둑에 테라스처럼 걸쳐놓은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기 때문이다.

 발아래서 금강이 거센 기세로 서해와 몸을 섞는다. 그 너머로는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군산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12 : 38. 잠시 후 장산로로 올라서서 55코스의 종점인 장항도선장을 향해 간다. 이때 고려 해도원수 나세 진포대첩비 안내판이 눈에 띈다. 나세(羅世, 1320~1397)는 원나라에서 온 귀화인으로, 1380년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진포해전에 참여했고, 심덕부·최무선 등과 함께 왜구를 쳐부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전이지만 최무선의 공적을 기리는 군산과는 달리 이곳 서천에서는 나세의 공적을 더 크게 보는 모양이다.

 도로 건너는 당선리(堂仙里)’. 마을 뒤에 당산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마을 앞에 정자에 산책로까지 갖춘 소담스런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장산로를 따라간다. 당선리를 지나자 금강이 몸집을 한껏 부풀렸다. 강인 듯, 바다인 듯, 구분이 안 되게 너른 연안은 이제 갯벌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 갯벌에 누운 채 물이 차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어선도 여러 척 눈에 띈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금강하굿둑이 성큼 다가온다. 하굿둑 뒤로 보이는 산. 즉 기상관측소의 레이더가 걸터앉은 봉우리는 오성산일 것이다. 소설 탁류의 저자 채만식이 임피팔경(臨陂八景)’ 중 하나인 오성낙조(五聖落潮)’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며 조망을 즐겼다는 산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래선지 나라꽃 무궁화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무궁화(無窮花) 끝없이 핀다는 꽃의 특성에서 유래했다. 100일 동안 매일 새 꽃이 줄기차게 피어나는데, 여기에 풍족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고자하는 우리 민족의 바람을 더했다고 한다.

 음식문화 특화거리 조형물. 머리글 삼아 적어놓은 라온제나가 눈길을 끈다. ‘라온제나 기쁜 나, 즐거운 우리를 뜻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금강 풍경을 감상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다보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즐겁고 기쁜 하루가 될 것이라는 암시가 아닐까 싶다.

 조형물의 예고대로 큼지막한 음식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하지만 대부분이 해산물 요리 전문점이라서 메뉴의 선택은 자유롭지 못해 보였다.

 맛있는 음식거리로 입소문이라도 탔는지 음식점의 주차장마다 차량들로 가득 찼다.

 ! ‘백악관이 망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선거로 시끄러운 미국인데, 백악관까지 저렇게 문을 닫아버렸으니 차기 당선자는 어디로 들어갈까?

 12 : 58. 평화공원. 금강과 도로(장산로) 사이는 이렇듯 녹지 공간으로 놓아두었다. 가끔은 이런 작은 공원들을 들어앉혔음은 물론이다.

 공원 안에는 월남참전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운 서천지역 참전유공자들의 위훈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차도와 보도가 너무 가까워진 곳에는 이렇듯 또 하나의 길을 내놓기도 했다.

 녹지 공간 곳곳에는 조형물을 배치했다. 누가 만들었고, 또 무엇을 나타내고 싶었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 하나쯤 세워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풍경이다.

 13 : 01. ‘송내천을 건너 장항읍으로 들어선다. 갈대만이 무성했던 긴 목에 시가지가 들어섰다고 해서 장항읍(長項邑)’이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 푸름으로 물든 강변의 갈대밭그 뒤에는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군산시가지가 길게 늘어서있다그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서래야는 서천군 농산물의 대표 브랜드이다. ‘넓은 들에 비옥한 토지라는 의미로 서천군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 브랜드로 사용되고 있다. 한자(舒來野)로 풀면 서천에서 온 좋은 농산물이 된다나? 엄격한 품질관리를 거친 농산물만 출하시키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13 : 33. 서해랑길은 동백대교의 아래를 지난다. 55코스를 동백대교 남단 근처에서 시작했으니, 다리 남단에서 시작해 북단으로 온 셈이다. 지척에 두고도 자 모양으로 멀리 에돌아왔다고 보면 되겠다.

 다리 근처에는 동백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세멀부락이라는 표지석도 눈에 띈다. 원수리(元水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세멀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 뒤로 보이는 저 산은 왕제산이 분명하다. 옛날 백제왕이 내려와서 제사를 지냈다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산이다.

 13 : 39. 동백대교를 지나면서 장항시가지로 진입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장항중학교 앞을 지나간다.

 이즈음 만나게 되는 방음벽. 축대를 홍보의 장으로 삼았다. 마량리 동백나무숲 등 서천의 8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아까 서천군으로 들어오면서 눈여겨봤던 관광안내판과 다른 게 아닌가. 2018년 서천군은 문화관광 콘텐츠를 구축하면서 ‘9()·9()·9()’를 선정했다. 하지만 기존의 서천팔경에 하나를 더하지 않고, 두 곳은 바꾸기까지 했다. 둘 모두 군에서 추진한 결과물이니 관광객들을 위해서라도 조정이 이루어졌어야 하지 않나 싶다.

 13 : 38. ‘장항항(長項港) 물양장은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있었다. 하지만 꼴갑축제까지 열리는 명소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운이라도 좋아 갓 잡아 올린 꼴뚜기나 갑오징어 회라도 맛볼지 누가 알겠는가.

 길 건너 담벼락의 벽화가 눈길을 끈다. 다가가보니 늙은 노동자의 노래 가사가 적혀있다. 노인의 구부정한 등이 세월의 무게를 겨우 버티고 있는 듯한데, 자존심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아 보인다. 삶의 무게를 지팡이에 의존하고 있지만 손주 손목잡고 금강산 구경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나? 내 또래의 늙은이들에게 딱 어울리는 가사가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늙은 군인의 노래와는 어떤 관계지?

 13 : 54. 잠시 후 도선장 입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도선장은 이제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추억 속의 공간은 직장인과 통학생으로 항상 붐볐다. 지역 주민들의 발이었던 도선은 황포돛배를 시작으로 경남환·경남호·군산호·서천호·금강호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루 이용객이 수천에서 수만을 헤아리는 시절도 있었으나 2009년 운항이 중단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6코스) 안내도는 육교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아래 사진은 출발지에서 찍은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앱이 15.8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이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내부 관람시설이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서해랑길 54코스(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진포 해양테마공원)

 

여 행 일 : ‘24. 6. 22()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옥산면·지곡동·나운동·송풍동·월명동·장미동 일원

여행코스 :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은파 호수공원월명호수삼일기념탑월명동사무소군산근대화거리진포해양테마공원(거리/시간 : 11.6km, 실제는 14.42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4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군산시가지를 관통해 금강 하류에 있는 군산 내항까지 가는 여정이다. 은파호수공원과 월명공원, 근대화거리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3(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중간에 두어 번 산길을 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들머리는 외당마을 버스정류장(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새만금방면으로 달리다가 당북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이어 지곡지구 아파트단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군산 54코스) 안내도는 단지 맞은편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다.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을 출발, 군산 시내를 횡단해 군산 내항에 이르는 11.6km짜리 여정이다. 중간에 산길을 오르내린다고는 하지만, 별 어려움이 없는데도 거리가 무척 짧은 편이다. 막바지에서 만나게 되는 근대화거리의 각종 전시관들을 빠짐없이 돌아보면서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마음을 다잡아보라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10 : 23.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어서 아파트단지의 사잇길(외당원길)을 따라간다. 왼편은 옥산면이나 반면에 오른편은 지곡동이니 면계(面界)를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10 : 27. 아파트단지 끄트머리(숲속유치원 앞)에서 나지막한 언덕을 넘는다. 1차선 도로인데도 오가는 차량이 많아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10 : 37. 고개를 넘자마자 은파호수공원이 맞는다. 입구의 서해랑길 이정표(물빛다리 2.2km/ 외당마을정류장 1.3km)’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은파호수공원 안내도를 먼저 살펴보면 어떨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고로 은파호수의 본래 이름은 미제지(米堤池)’이다. 우리말로 풀면 쌀뭍방죽이 된다. 쌀이 많이 생산되도록 주변 들녘에 물을 대주는 방죽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 부부는 오른쪽(주차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은 에돌아가겠지만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종점까지의 거리표시 하나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이정표 자체를 믿지 못했다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10 : 40.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는 정자. 이곳에서는 왼쪽 습지공원으로 가볼 것을 권한다. 습지 생태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건너편에서 서해랑길을 다시 만난다. 그런 다음 호수에 놓인 저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되돌아오면 된다. 하나 더. 은파호수는 햇빛이 내려쬘 때가 제격이라고 했다. 햇살이 호수 위에 하얗게 부서지면 은파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리는 비를 멈추게야 할 수 없는 노릇. 햇살 대신 빗줄기가 만들어내는 파랑에 만족하면서 걷기로 했다.

 다리는 호수를 가로지른다. 그렇다고 곧장 건너지는 않는다. 중간에 좌우로 날개를 달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호수를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건 그렇고 경관 좋은 곳에서는 빗줄기도 문제가 되지 않는가 보다. 작은 우산 하나 쓰고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호수의 낭만이 더욱 짙어진다.

 10 : 45. 이후부터는 오른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리아스식 호안을 따라 널찍하니 산책로를 내놓았다. 바닥에는 야자매트까지 깔아 질퍽거릴 염려도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푹 빠져보라는 모양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은파호수가 드넓게 펼쳐진다. 1931년 일본인들이 금강 하구의 습지와 미등록 농지 등을 탈취하여 불이농장(不二農場)을 만들고 수리조합을 구성하면서 축조했단다. 아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미제지(米堤池)’가 나오니 생성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걸 일본인들이 증축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부근에 미원동(米原洞미성동(米星洞미장동(米場洞미룡동(米龍洞) 등 미()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많을 정도로 쌀 생산에 큰 도움을 준 저수지였음은 확실하다.

 걷다보면 지명을 알리는 안내판을 심심찮게 만난다. ‘개정지는 야외 부엌(정지)을 말한단다. 사창에 벼와 쌀의 입출고가 빈번하면 일손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고, 늦가을에서 이른 봄까지 개정지를 마련해 일꾼들의 밥을 짓던 곳이라나? 다른 안내판에서는 용처(龍處, 방죽의 水源)와 사창골(社倉을 두고 방아를 찧어가던 곳)에 대한 내용도 엿볼 수 있다.

 호수의 면적 1.72. 크지만 그렇다고 거대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호안 길이는 10.2km나 된단다. 그만큼 굴곡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책로는 그런 굴곡들을 다 이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가끔은 이렇게 허리를 무찌르다시피 지나기도 한다.

 그러니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굴곡으로 내려설 것은 당연. 이렇듯 인공호수는 리아스식 호안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물을 가두면서 수면이 높아지고, 산봉우리와 산등성이가 물에 잠기면서 섬이나 곶으로 변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걸 라 하는데, 방죽 둘레에 굽은 귀가 많다고 해서 아흔아홉 귀 방죽라 부르기도 했단다. 옛날 한 아기장수가 미제방죽을 서울 터로 만들려고 100귀로 만들면 밤에 한 귀가 무너지곤 해서 도로 아흔아홉 귀가 돼버려 끝내 실패하고 울면서 떠났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그만큼 방죽에 굴곡이 많고, 지형을 따라 보여주는 경관도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위에는 연 잎이 무리지어 떠 있었다. 여름마다 백련, 수련, 노랑어리연이 만개한다는 연꽃자생지일지도 모르겠다.

 11 : 07. 요것조것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캐노피(canopy)가 쳐진 광장에 이른다. ‘물빛다리 동단에 조성해놓은 바닥분수이다. 하지만 장마철이라선지 물은 내뿜고 있지 않았다.

 은파호수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물빛 다리를 건넌다. 길이 370m에 너비가 3m인 보도 현수교로, 다리 위에서 호수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야간에는 연출된 아름다운 빛을 비추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준단다.

 다리는 건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입체미를 두어 걷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양 옆으로 고저가 있는 길을 따로, 그것도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다.

 물빛다리는 현수교(懸垂橋)’로 분류된다. 하지만 양쪽 주탑(柱塔)에서 늘어뜨린 케이블에 행거케이블을 연결시키는 다른 현수교들과는 달리 이곳은 가운데에 주탑을 세우고 양옆으로 케이블을 늘어뜨리는 형식을 취했다.

 주탑 아래는 아예 사랑의 공간으로 꾸몄다. 하트 조형물을 세우고 사랑의 열쇠를 매달 수 있도록 했다. 연인들은 자물쇠를 걸고 두 손을 꼭 잡는다.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소서. 기도하듯 주문을 외운 다음 열쇠를 호수로 힘껏 던져버린다. 열쇠가 없으니 자물쇠는 영원히 봉인될 것이고 우리 둘의 사랑도 끝이 없겠지?

 눈에 들어오는 호수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호수 둘레 따라 푸른 자연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빗줄기 따라 물결이 찰랑찰랑 흔들릴 때마다 더위는 저만치 물러가고, 호수는 낭만이 차오른다.

 다리는 애기바우·중바우·개바우에 대한 설화를 배경으로 형상화했단다. 설화를 바탕으로 진입부에 놀이마당, 중간부에 주탑, 종점부에 사랑의 터널을 꾸몄다고 한다. 그 설화는 대충 이렇다. 옛날 방죽 근처에 마음씨 고약한 구두쇠 영감이 살았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청하자 흙과 돼지 똥을 뿌리며 내쫓았다. 이를 본 마음 착한 며느리가 시주하니 스님이 극락왕생하려면 아들을 업고 이 집을 떠나되, 뒤를 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는 정든 집과 가족 생각에 뒤돌아보았고, 그러자 일대가 물로 뒤덮이면서 며느리는 죽고, 스님과 아들, 강아지는 바위가 됐다는 슬픈 이야기다.

 음악분수는 은파의 특성과 이미지를 반영한 꽃잎 형태의 분수로 매회 20분씩 하루 8회 운영된다고 했다. 저녁이면 음악에 조명까지 더해지면서 여름철 더위를 한꺼번에 날려버린단다.

 오리 모양의 배를 타고 은빛 물결을 가르며 떠다니는 기쁨도 놓칠 수 없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탓인지 보트장의 오리보트와 모터보트는 오실 줄 모르는 손님만 하염없이 기다린다.

 11 : 13. 다리 건너에는 물빛다리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음식단지에 들러 전라도 음식의 풍미를 즐길 수도 있고, 물빛공연장에 앉아 수시로 열린다는 국악 등의 공연을 구경할 수도 있다.

 사랑의 문이란다. 물빛다리를 사랑이라는 콘셉트로 꾸몄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빛다리 조형물. 은파라는 명칭의 은()은 사랑의 빛(희망)이고 파()는 풍요의 물을 나타낸다고 적었다. ‘풍요와 미래, 사랑과 희망을 테마로 삼아 군산시민의 따뜻한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다나?

 한국농촌공사의 ‘100주년 기념탑’. 미제지의 용수는 우리나라 최초 수리조합 설립의 근거가 됐다고 한다. 미제(米堤)와 선제(船堤, 제방과 방수로만 남은 채 개답해 농지로 이용하고 있다)를 관개에 이용하기 위해, 근대 수리사업의 계기가 마련된 1906년의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1908 12 8일 탁지부(지금의 재경부에 해당)로부터 허가받아 설립됐는데 이것이 옥구서부수리조합이다. 조선인이 주도한 이 수리조합은 조합원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몽리(蒙利) 구역의 70가 조선인 소유였다는 점에서 다른 수리조합들과 사뭇 구별된다. 그런 역사성 때문에 이 조합의 설립일을 오늘날 농어촌공사의 시작으로 삼고 있다.

 11 : 19. 이번에는 서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그윽한 숲 향기가 어우러지면서 가슴속까지 뻥 뚫리게 해주는 산책로는 구불구불 이어진다. 그러니 군산의 명품 걷기 길인 구불길에 포함되어 있음은 당연. 5코스인 물빛 길이 이곳을 지나간다.

 11 : 26. 은파시민공원에 이르면서 은파호수와의 동거는 끝난다. 참고로 은파호수는 원래 농업용 저수지였다. 그러다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면서 기능을 바꿔 주변 산과 함께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이후 순환도로, 물빛다리, 음악분수, 인라인스케이트장, 생활체육장, 보트장 등을 조성해 도심 속 쉼터로 꾸몄다.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지역자원 콘테스트에서 전국 100대 관광 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민공원의 끄트머리는 수많은 탑들이 숲을 이룬다. 2010년 연평도에서 복무하다 순직한 해병대  문광욱 일병의 흉상을 중심으로 현충탑(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29명이 전사한 군산사범학교 학생들을 기린다)’,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월남 참전 기념탑’, ‘6·25전쟁 참전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일종의 현충시설 단지라고 보면 되겠다.

 11 : 30. 공원을 벗어나 대학로로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지도(첨부 된)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새로운 트랙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해랑길 표지기는 양쪽 모두에 걸려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뭔가의 문제로 코스를 바꾸었다면 표지기 또한 떼어버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 모른 우리 부부는 지도에 표시된 대로 한원컨벤션센터(예식장인 듯)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kakaomap에서 이미 로드 뷰까지 확인해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0m쯤 올라가다 트랙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 나왔다. 아무래도 코리아둘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DMZ평화의길)의 공식 홈페이지가 더 정확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함께 걷던 80대 노익장 부부는 옛 코스를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아무런 문제없이 해당 구간을 지날 수 있었다고 했다.

 11 : 37. 공원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학로를 따라간다. 6차선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인도와 자전거길이 따로 만들어져 있으니 알아서 선택하면 된다.

 11 : 48. ‘나운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공단대로(6차선 도로)’를 따른다. 코너에 있는 등산용품점(Black Yak)을 참조하면 되겠다.

 11 : 56. 터널 모양의 동물이동통로 앞에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구불길(6코스인 달밝음길’)의 방향표지판과 함께 서해랑길 표지기가 매달려 있다.

 탐방로는 꽤 가파르게 올라간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나무계단까지 설치해놓았다.

 오른쪽은 상수도 나운배수지’. 태양광 패널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배수지를 덮고 그 위에 태양광발전소를 만든 모양이다. 유휴시설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발상이 아닐까 싶다.

 12 : 04. 차도(월명공원2)로 내려서서 월명공원으로 진입한다. 길이 오솔길에서 아스팔트 포장길로 바뀌었다. 잘 닦인 이 공원길은 산자락 옆구리를 타고 가다 월명호수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안내판이 월명공원으로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월명공원2을 따른다. 은파호수 공원에 이어 이번에는 군산의 또 다른 관광지인 월명공원을 횡단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선지 주변은 정리정돈이 잘 된 느낌이다. 산뜻하게 뚫린 산책로는 기본, 편백나무 등으로 울창한 숲은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12 : 14. 월명호수가 얼굴을 내민다. 호숫가로 내려가는 산책로도 만들어져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저 수변길은 일상에 지친 답답한 가슴을  뚫어버리기에 딱 좋다. 하지만 내려가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근대화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아니 3년 전쯤 가족들과 함께 이미 둘러봤으니 또 가볼 필요가 없어서이다.

 편백나무 숲속에는 작은 독서실까지 들어앉혔다. 괜찮은 아이디어라 하겠다. 심신을 맑게 해주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로 알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12 : 29. 호수를 왼쪽 허리춤에 끼고 숲길을 따르다보면 점방산 밑에 자리한 청소년수련관을 만난다. 탐방로는 수련관 앞에서 2차선 도로(청소년회관로)를 만나 오른쪽으로 간다.

 송풍동(반대편은 소룡동)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숲속(월명호수1)으로 들어간다.

 12 : 38. 염불사(念佛寺).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로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그저 일제 때 산재당으로 불렸고,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재를 지내고 갔다고 전해질 따름이다. 그래선지 안내판은 절의 역사보다는 절이 품은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전북 문화유산자료)’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명나라 시대의 티베트 불상과 조선시대의 불상 양식이 적절하게 혼합된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단다.

 12 : 41. 잠시 후 월명산(101.3m)과 장계산(108.3m)을 잇는 능선의 안부로 올라선다. 길이 사통팔달로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수시탑과 월명호수, 월명동사무소로 각각 이어지는 길 말고도, 월명산과 장계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이곳에서 나뉜다.

 고갯마루에는 군산 3·5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삼일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한강이남 최초의 3·1만세 운동지인 군산에서는 1919 3 5일 첫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총 28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참여한 인원도 37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3 5일에 일어났지만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맥락에서 ‘3·1 운동이라 부른단다.

 월명동사무소 방향으로 내려간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난 길은 얼마나 오래 묵었던지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나무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있다.

 12 : 52. 월명동에서의 첫 만남은 동산교회’. 탐방로는 이제 군산의 옛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시가지 곳곳에 들어서 있으니 하나도 빼먹지 말고 꼼꼼히 둘러보도록 하자.

 군산체육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은 아니다. 하지만 김완수 관장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군산 복싱의 전설이다. 동양챔피언에 오르면 최고 스포츠스타로 대접받던 시절.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2회 아세아 아마복싱선수권대회(1965)’에서 한국은 8체급을 석권한다. 그중 3(서상영, 박구일, 황영일)이 김완수관장의 지도를 받은 군산체육관 소속이었다.

 기적으로 불리며 세간을 놀라게 했던 체육관은 지금 포토 죤이라는 임무를 하나 더 보탰다. ‘군산관광 포토투어의 한 지점이 되어 오가는 관광객들을 맞는다.

 몇 걸음 더 걸어 동국사길로 나오면 평화의 박물관이 반긴다. 평화라는 주제를 갖고 전시가 이루어지는 독특한 공간이다. 무기로 평화를 지키는 군사안보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의 기록이라나? 하지만 힘없는 평화는 바람 앞의 등불일 뿐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들여다볼 가치조차 없는 기록들이다. 박물관 앞에 전시해놓은 꽃마차(전국의 분쟁현장을 누비던 차량이 낡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조형물로 꾸며놓았다)’만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떠나버리는 이유이다.

 13 : 00.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동국사가 나온다.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 6월에 창건됐다.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 금강선사란 포교소로 개창했고, 1913년 현 위치로 옮겨와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정부로 이관됐다가 1955년 불교전북교당이 인수하면서 동국사로 개명했다. 1970년 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붕이 높고 단청을 하지 않은 절집은 대웅전과 요사채가 복도로 연결된 점이 이채롭다. 누군가는 대웅전 지붕이 에도막부 시대 쇼군(장군)의 투구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글쎄다.

 경내에는 일본 조동종 운상사 주지 일호창황의 주도로 건립했다는 참사비(懺謝碑)’가 세워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참회하는 조동종의 참사문을 발췌해서 새겼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군산시민과 일본인들이 성금을 모아 제작했다는 평화의 소녀상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동국사 앞에서 만난 근대화 거리’ 안내판. 17개의 주요 포인트들을 지도에 표시하고,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을 3개 코스로 나누어 소개해준다.

 평화의 박물관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후부터는 일본식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바둑판식 거리를 둘러보며 걷는다.

 13 : 03. 첫 만남은 군산 항쟁관이다. 일제강점기 항거의 현장을 재현한 기념관이라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라지만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내부관람은 포기하기로 했다.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5 대한독립 만세운동은 물론이고, 1920년대의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 등에 대한 자료도 살펴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항쟁관 부근은 맛의 거리로 꾸며져 있었다. 군산은 과거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이는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이 지역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월명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군산 부윤 관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총괄하던 군산부 부윤(시장)이 생활하던 곳으로, 1930년대 건축한 일본 고민가 형태의 근대건축물이다. 해방 후에도 1990년 초까지 시장 관사로 사용됐다.

 이후부터는 구영6을 따른다. 옛 멋을 퐁퐁 풍기는 건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예쁘장한 골목이다.

 예스런 길을 걷다보면 눈에 띄는 간판마저도 고상해진다. ‘당신이 나보다 행복하길 바래’. 수제 전통차 한 잔에 행복을 듬뿍 담아주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미랑(오래된 친구의 집을 뜻한단다)’은 군산시에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다. 군산에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 많다는 점을 감안 한 블럭을 통째로 일본식 집을 지어놓았다. 그러니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하룻밤 보내보는 것도 여행의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대시설인 고우당 찻집에서 배달시킨 전통차에 담소까지 곁들이면서...

 길을 걷다보면 군산시의 야무진 노력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홍보에 대한 노력도 그중 하나다.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근대화를 중심으로 알리고 있다.

 월명동사무소의 저 조형물은 ‘3·5 독립 만세운동을 형상화 한 모양이다. 아니면 1905년 을사늑약 때 스승인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 의병장일 수도 있겠고...

 군산상고 야구부도 역사적 가치로 충분하다.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1-4로 끌려가고 있었다. 9회 말 군산상고 선두타자 김우근이 안타로, 고병석과 송상복이 볼넷을 얻어 만루가 됐다. 김일권이 몸에맞는볼로 출루하며 한 점 따라붙고, 양기탁의 적시타로 4-4 동점을 이뤘다. 2사 만루에 김준환이 끝내기 좌전안타를 날려 역전승(사진)을 거뒀다. 그 뒤에도 군산상고는 유독 짜릿한 역전승이 많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역전의 명수라고 불렀다.

 시계 바늘을 일제강점기로 되돌려 놓은 저 조형물도 훌륭한 볼거리이다. 사내아이가 사탕을 빨아먹으며 심부름 가는 여자아이를 놀리는 모양새인데, ‘그때 그 시절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일제강점기의 옛 가옥인지, 아니면 새로 복원해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닭요리 전문점인데, 비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 한 잔하기 딱 좋은 곳이란다. 복고풍의 인테리어가 술맛을 북돋아준다나?

 국제반점 짬뽕의 도시 군산에서도 소문난 맛집으로 꼽힌다. 비를 맞아가면서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저 관광객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군산 짬뽕의 역사는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일으켰다. 개항 후 화교들은 짬뽕의 원조 격인 초마면(炒碼麵)을 만들어 팔았다. 초마면은 해물과 고기, 다양한 야채를 기름에 볶아 닭이나 돼지 뼈로 만든 육수를 넣고 끓인 다음 면을 넣어 말아 먹는 요리다. 고춧가루 대신 후춧가루만 넣어 먹었다. 이때만 해도 흰 국물이었다. 한국인 입맛에 맞게 고춧가루를 넣으면서 빨간 국물인 짬뽕이 됐다.

 이성당은 줄이 더 길었다. 대전에 '성심당'이 있다면 군산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이 있다. 지난해 매출(266억원)도 동네 빵집 매출액 순위에서 성심당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이성당은 1945년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제빵 기구를 사용해 빵을 만든 것이 시초다. 이곳에서 만드는 단팥빵은 빵 마니아들 사이에서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하는 빵으로 꼽힐 정도다. 요즘은 야채빵을 찾는 마니아들이 더 많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맞다. 우리 부부의 입에도 야채빵이 더 맞았다.

 근대 쉼터’. 우수저류소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쉼터로 공연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듯 계단식 관람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근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등을 패러디한 벽화도 몇 점 눈에 담을 수 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우리 동네 미술)의 일환으로 그렸다는 군산 사람들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초원사진관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이다. 제작진이 마땅한 촬영지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다 겨우 발견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실제 사진관은 아니고 시나리오에 맞게 개조한 것인데, 촬영이 끝난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복원했다. 내부에는 촬영당시 사용된 사진기와 선풍기 등 소품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영화 팬들의 추억을 자극한다.

 맞닿게 조성해놓은 영화거리도 눈요깃거리로 넘친다. 군산은 영화 촬영의 메카로 알려진다. 마더, 아저씨, 박하사탕, 장군의 아들, 타짜 등 많은 작품들이 촬영됐다. 거리를 누비다보면 영화 속 주인공이 품은 간절한 사랑이야기와 수많은 감성포인트에 공감할 것이다.

 13 : 43.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골목을 누비다보면 어느덧 해망로에 이른다. ‘근대화 거리라는 애칭답게 일제강점기의 건축물들이 몰려있는 곳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미즈카페’.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건물(무역회사)이라서 적산가옥을 찬찬히 구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어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란다. 자그마한 정원을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적산가옥은 장미갤러리이다.

 그 옆에는 아이보리색 외관에 초록색 지붕을 한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 등록문화재 제372)’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일본 지방은행으로 조선에서는 1890년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전국에 지점을 개설했는데 군산은 1907년 일곱 번째 지점으로 건립됐다. 하나 더. 이 은행은 일본인들이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갈취하는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 농민들에게 토지를 담보로 고리대금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은행은 일본인들의 배를 불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현재는 근대미술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옛 건물의 특징을 살린 갤러리로 꾸민 다음 군산시민들이 기증한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진행한다. 미술품 전시 외에도 별실을 활용해 일제수탈사 사진전’, ‘18은행 건물 역사 전시 등도 열린단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조선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374,  근대건축박물관)’을 만날 수 있었지만, 다리가 아프다며 중간에서 쉬고 있는 집사람을 생각해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탐방로에 접해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군산의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 중이다. 군산시민들의 물품 기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로비에 들어서면 일제가 대륙에 진출할 목적으로 건설한 어청도등대가 반겨준다. 조선시대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수송하기 위한 조창이 있던 경제적 요충지였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할 무렵에는 무역항으로서 황금빛 미래도 꿈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로 왜곡된 성장을 겪는다. 근대화의 상징인 기찻길이 놓이고 신작로가 뚫렸지만, 일제의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박물관은 해양물류역사관, 근대생활관,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기획전시실(사진)은 다양한 테마전시를 수시로 교체·전시하여 방문객의 꾸준한 관심을 유도하는 공간이다. 또한 해양물류역사관에서는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군산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해 볼 수 있다.

 근대생활관에는 일제강점기 군산의 다양한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홍풍행(鴻豊行)은 화교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었다고 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미두장으로 등장하는 군산미곡취인소도 눈에 띈다. 군산 최고 번화가였다는 영동상가 맞은편에는 산비탈로 쫓겨난 도시 빈민이 거주하던 토막집이 있어 대비된다.

 독립영웅관은 군산에서 호남 최초로 일어난 3·1만세운동과 악질적인 일본인 농장을 대상으로 벌인 옥구 농민 항쟁을 다룬다. 그래선지 만세운동을 재현한 퍼포먼스도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군산세관(국가지정 사적 제545)’으로 간다. 1899년 군산항을 개방한 이후 인천세관 관할에 있던 군산세관은 1906년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 이 건물을 완공한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건축 재료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었다. 이 같은 양식은 서울역과 한국은행 등 단 3곳뿐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의 곡물을 수탈하는 역사적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후대에 교훈을 준다. 그래선지 내부를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시대별 수입·수출 품목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방이후-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20년 단위로 전시되어 있다. 2000년대에 와서야 전기·전자 제품과 자동차 등 익숙한 제품들이 눈에 띄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군산의 역사와 문화는 박물관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축산리 유적과 산북동의 공룡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548)’ 등을 복원해 놓았다. 1944년 군산항의 제지공장에서 사용하던 초대형 천장 크레인도 눈에 띈다.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인 째보선창(군산 내항)’쪽으로 간다. 이때 장미공연장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옛 미곡창고를 리모델링해 다목적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장미라는 이름은 군산항을 포함한 일대의 지명에서 따왔다. 장미동하면 얼핏 꽃을 떠올리지만 전혀 다른 의미다. 곳간의 ()’과 쌀의 ()’가 합쳐져 쌀 창고를 뜻한다. 마을 이름에 쌀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공연장은 장편소설 탁류의 등장인물들 동상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군산을 알리는데 탁류만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천 출신 정주사는 군산에 가면 번듯한 직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에 가족을 데리고 똑딱선에 오른다. 정주사는 이 화려한 근대도시에서 재산을 모두 잃고, 딸 초봉마저 팔아넘기듯 고태수에게 시집보낸다.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진 초봉의 운명처럼 일제강점기 군산은 절망의 밑바닥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종점인 진포해양테마공원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축구장 하나쯤 되는 구역에 울타리를 두르고 ‘2024 군산 수제맥주 블루스 페스티벌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100m 더 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구불길(6-1, 탁류길) 안내판이 눈에 띈다. 구불길은 총 11개 코스(188.4km)가 만들어졌다. 이중 탁류길은 도심 복판에 만들어진 골목길이다. 길이는 6km, 근대역사박물관을 출발해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중심으로 골목마다 역사의 현장이 숨어 있다.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의 배경지(도심)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둘러보는 시간여행지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14 : 20. 트레킹이 종료되는 진포해양공원에 이른다. ··공군의 퇴역 군장비 13 16대를 전시하고 있는 공원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인 진포대첩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50척의 배로 왜선 500척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째보선창(군산 내항)에는 일제강점기 3t급 기선이 접안하던 부잔교(뜬다리부두)가 아픈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부잔교는 밀물 때 다리가 수면에 떠오르며 썰물 때 수면만큼 내려가는 수위에 따라 다리의 높이가 자동 조절되는 선박 접안 시설물이다. 3t급 배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이 다리를 통해 쌀 등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현재 전체 4기 중 3기만 남아 있다. 부잔교 준공식에 참가한 사이토 총독이 ,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이라며 경탄했다는 일화가 근대 군산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2 : 25. 서해랑길(군산 55코스) 안내도는 2번 부잔교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4.42km를 찍고 있으니 엄청나게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월명공원에 들어서면서부터 회한의 역사를 되뇌며 걸었으니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만 생각하고, 내 이야기만 하며, 상대 의견은 묵살하라’. 미국의 한 신문에서 비참해지는 방법이라는 기사를 실으며 제시한 10가지 방법 중 첫 번째다. 이걸 반대로만 살아간다면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걷기 여행에서 우리 부부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나대는 나, 반면에 체력이 약한 집사람은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려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똑 같은 상황이 발생했고, 이때 위의 방법을 떠올렸으면 좋았으련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때문에 집사람의 고운 얼굴에서 짜증어린 표정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고사성어를 떠올리며 오늘 하루를 반성해본다.

 

서해랑길 53코스(새창이 다리-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6. 8()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대야면·회현면·옥산면 일원

여행코스 : 새창이다리(서단)금광교차로옥성마을(실제 출발지)광지산마을회현면사무소군산호수백석마을외당마을(거리/시간 : 19.6km, 실제는 11.84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3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만경강의 둔치를 따라가다 하구역 직전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만경강변의 갈대밭과 군산호수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3(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19km가 넘는 거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들머리는 새창이 다리(군산시 대야면 복교리)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712번 지방도를 타고 김제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만경대교 직전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신촌마을(복교리)’이 나온다. 마을 앞에 새창이 다리가 있고, 서해랑길(군산 53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세워놓았다.

 만경강 하류 새창이 다리에서 시작해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옥산면 당북리)’까지 19.6km를 걷는다. 만경강 하구의 둔치를 따라 걷다 드넓은 옥구들녘을 거쳐 군산 시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난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로 옥성마을에서 시작했다. 첨부된 지도의 744번 지방도와 서해랑길의 붉은 선이 만나는 지점 오른쪽에 있는 삼거리이다.

 10 : 44. 실제 출발지는 신기촌 버스정류장(군산시 회현면 금광리)’으로 삼았다. 윗 이빨을 4개나 뽑고 인공 뼈까지 이식한 게 월요일이라서 무리한 운동을 삼가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내 의지를 꺾지 못한 의사선생님도 가능한 한 거리를 줄여야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트레킹을 허락해주셨다.

 10 : 44. 수로(水路) 옆 둑길을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따라갈 수도 있었으나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수로를 가운데 두고 내놓은 둑길을 따르기로 했다.

 10 : 48. 잠시 후 이른 옥성마을’. 전봇대에 매달린 노랑·빨강 리본이 서해랑길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참고로 해파랑길은 빨강·파랑, 남파랑길은 노랑·파랑이다). ‘두리누비에서 제공한 트랙은 53코스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8.13km로 찍고 있었다. 반면에 내 앱은 0.24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그러니 53코스는 정규 코스의 60%쯤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옥성마을 표지석. 법정 동리인 금광리(金光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월평·월평2·원당·광지산·금당·신기촌·옥성·옥흥·옥삼) 중 하나이다. 주민들은 만경강 하구에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지에서 보리와 쌀 위주의 농업을 위주로 살아간다.

 탐방로는 수로를 따라 조금 더 간다. 비가 오시려는지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비가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이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들어맞는 것일까? 하지만 고맙게도 하늘은 우리 편이었다. 빗방울이 잠시 떨어지더니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10 : 50. ‘남평 문씨(南平文氏)’ 제각

 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가로질러 금광리(회현면)의 너른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우렁이 농법은 한때 친환경 벼 재배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었다. 아니 요즘도 우렁이 방사에 대한 뉴스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화학 제초제 대신 물속의 풀을 먹는 데는 우렁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수로의 벽에 우렁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들녘은 모내기가 한창이다. 하지만 곡식 낱알을 누렇게 매단 채로 남아있는 곳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채종포(採種圃)’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은 품종을 하이스피드로 적고 있었다. 경영비를 절감해보려는 축산농가에서 하이스피드라는 사료용 귀리를 심었고, 또 최고의 종자를 얻기 위해 수확시기를 맞추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이스피드 고숙기(낱알이 완전히 익는 시기)’에 채종해야 발아율이 가장 높아진다니 말이다.

 11 : 00. ‘광지산 마을에 이른다. 아니 동구 밖에 있는 버스정류장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동서로 뻗어나가는 도로(‘회미로’, 회현면의 옛 이름이 회미였단다)를 따라 같은 금광리의 광지산, 금당, 원당, 월평 등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서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만경강유역의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수확한 쌀은 옥토 진미라는 브랜드로 시장에 나온다.

 11 : 06. 광지산마을의 북쪽 끝에는 두릉 두씨(杜陵 杜氏)’ 문중 제각이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두릉두씨 시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낸 두경령(杜慶寧)’이다. 타 세력에 밀린 그가 일족과 함께 고려의 궁지현(조선시대의 만경현)으로 이주했고, 이를 안 조정에서 만경지역 일부를 식읍으로 하사하며 두릉군으로 삼았단다. 두경령의 11세손인 두승손(杜承孫)이 만경에서 옥구로 이주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옥산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는데, 이곳 광지산마을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금광리에서 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도 민가 몇 채가 들어섰다. 광지산마을의 윗뜸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본뜸보다도 더 오래된 듯 당산목으로 여겨지는 팽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등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팽나무 뒤로 보이는 지성어린이집도 나그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궁전을 커다랗게 지어놓았다. 하지만 난 담벼락에 붙어있는 풍경화에 더 관심이 간다. 대체 어디에 있는 산이기에 저런 멋진 풍경을 보여줄까?

 11 : 10. 고개를 넘으면 대정리(大政里)’이다. 회현면의 소재지답게 건물의 등치부터가 달라진다. 2층은 기본. 3층짜리도 흔하고, 귀하지만 고층이랄 수 있는 4층 건물도 눈에 띈다.

 탐방로는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711번 지방도(회현로)를 따라간다. 길가에 늘어선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농협 등 공공시설들이 이곳이 회현면의 행정 중심임을 알려준다. 음식점·편의점·상점은 물론이고 카페까지 들어서있는 게 면소재지치고는 제법 번화하다는 느낌을 준다.

 회현면사무소. 회현면(澮縣面)의 옛 이름은 회미현(澮尾縣)이다. 백제의 부부리현이었던 것을 통일신라의 경덕왕이 개칭했다. 고려 때까지 회현현(澮縣縣)으로 남아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옥구군 장면 풍면이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나누어진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이 통합되어 옥구군 회현면이 된다. 현재 8개 법정 동리(월연리·금광리·대정리·세장리·고사리·학당리·원우리·증석리)를 관할한다.

 11 : 14. 회현사거리. 비석이 3개이니 비석군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문종철이라는 면장의 청직기념비를 가운데 놓고 양옆에 다른 이(인터넷에서도 조회가 되지 않는)의 영세불망비와 기념비를 세웠다.

 건너편에는 회현중학교가 있다. 무작정 교정으로 들어가는 게 싫어, 문지기 삼아 세워둔 장승만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떴다. 아니 장승에 쓰인 나를 무엇에 쓸까’, ‘어떤 세상을 만들까의 의미를 가슴에 담아왔다. 그리고 그 뜻이 회현중학교 학생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빌어줬다.

 11 : 20. 회현초등학교.

 11 : 22. 회현초등학교의 담장 끝. 삼거리에서 711번 지방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서기길을 따른다. 모퉁이의 청암산 생태학습장(1km)’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서기마을(대정리)은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담쟁이넝쿨을 뒤집어쓰고 있는 창고형 건물에 더 눈길이 갔다. 공생(共生)을 아는 놈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도 엉겨서 살아가지 진까지 빨아먹지는 않으며, 줄기를 움푹 패게 만들지만 죽이기까지는 않는 것이다. 벗하며 즐길 줄 안다고나 할까?

 옥산저수지로 들어가는 1km 정도의 구간은 도로 확포장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건 그렇고, 비 멎은 하늘은 언제 빗줄기를 뿌렸냐는 듯이 싱그러운 햇살을 내보낸다. 맑고 푸른 게 영락없는 가을하늘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공활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부작사부작 걸어보자. 마침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까지 빼어나지 않는가.

 이때 청암산(118.8m)’이 눈에 들어온다. 군산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산은 원래 취암산(翠岩山)’이었다. 푸르다는 의미인데. 일제강점기에 푸를 청()’자를 써서 청암산으로 이름을 둔갑시켰다나? 아무튼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저 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구슬처럼 예쁘다고 해서 옥산이란 지명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옥산(玉山)’이란 지명은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옥구현의 다른 명칭인데, ‘대려골 북쪽, 꼭대기에 흰 돌이 있다는 작은 산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11 : 30. ‘죽동마을에 이른다. 세장리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죽동·신성동·사오개·가운데뜸) 중 하나로 마을이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댓골로 불리다가 죽동이 되었다.

 이왕에 들렀으니 죽동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쯤 들어보면 어떨까? 주차장 옆에 마을의 유래를 담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마을은 한때 80여 세대 400여 명이 살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농촌 공동화현상을 피해가지 못해 한적한 시골마을로 전락했던 모양이다. 최근 은퇴자 및 자녀를 관내 초·중학교로 입학시키고자하는 학부모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옛 영화를 되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사오갯 샘이라고 한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타 지역 사람들까지 물지게를 지고 찾아와서 물을 길어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는 소문난 우물이다. 해방 직후 콜레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죽동마을에서는 일절 해를 입지 않았는데, 주민들은 사오갯 샘 덕분으로 믿고 있다나?

▼ 11 : 37. 마을 뒤 고개(‘사오개가 아닐까 싶다)는 온통 대나무 숲으로 뒤덮여있다그 대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나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군산시의 명품 걷기 길인 구불길을 만나는 지점으로이와 관련된 안내판들을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세워놓았다.

 군산호수를 도는 방법은 구슬뫼길(구불 4), 수변길(13.8km), 청암산 등산로( 7km) 등 세 가지가 있다. 이중 수변길이 등산로보다 두 배 가까이 긴데, 이는 리아스식 호숫가를 굽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게 될 구슬뫼길(구불4)’은 수변길과 청암산 등산로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어나간다. 어느 구간에서는 그 길을 따르기도 한다.

 이곳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눈길을 끈다. ‘사오개는 옥산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회현면 대정리·월연리·세장리 사람들이 옥산이나 군산으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6척 이상의 큰 길이 시내까지 연결되어있었으나 1939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대부분 물속에 잠겨버렸단다.

 이 사진은 군산시청을 나무라기 위해 게시했다. 서해랑길의 이정표이니 가장 필요한 것은 종점과 시점까지의 거리다. 그런데도 앞뒤 주요 포인트만 표시했다. 그러니 대체 얼마를 걸어왔고, 또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 할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단의 지도라도 옳게 표시했으면 좋았으련만 시점 및 종점까지의 거리 대신 위 방향표지판에 적힌 거리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군산 지역에서 만난 이정표는 모두가 다 이러니 문제다. 30만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는 큰 도시답지 않은 행정이라 하겠다.

 이후부터는 구슬뫼길(구불4)’을 따라간다. 어느 선답자는 청암산 등산로를 따르면 빠르긴 하나 호수의 그윽한 맛을 느끼기 어렵고, 수변길은 편하지만 호수의 다양한 표정을 엿볼 수 없다고 했다. ‘구슬뫼길은 그런 두 길의 장점을 합쳐놓았다니 이를 따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나 더. 구슬뫼길의 길이는 수변길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난이도는 약간 더 높단다. 청암산 등산로와 만나려고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 종종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탐방로에 들어서는 순간 서해랑길 표식은 사라져버린다. 대신 구슬뫼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해준다. 참고로 구슬뫼길은 쉬지 않고 걸어도 6시간 이상 걸리는 긴 코스다. 그래서 사람들은 옥산저수지 주변을 도는 3-4시간짜리 단축 코스를 선호한다. 옥산저수지 둘레만 그려놓은 저 안내도가 그 증거이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아가는 산책로는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숫가 습지로도 길을 냈다. 다리를 놓듯 테크로드를 조성,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자연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가끔은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전망대에 서자 발아래까지 다가온 호수가 살갑게 맞는다. 수면 위는 초록의 연꽃잎으로 한가득이다.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인 가시연꽃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군산호수는 가시연꽃의 주요 서식지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개화시기(7-8)가 아니어선지 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가시가 돋은 긴 꽃대와 자줏빛 꽃이 무척 아름답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호숫가 곳곳에는 쉼터를 배치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에 벤치는 기본, 심지어는 그네형의 의자까지 만들어놓은 곳도 보인다.

 강의실을 연상시키는 의자 배열이 생태학습장이 아닐까 싶다. 안내도에 나와 있던 습지관찰원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오랜만에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로 했다. 6km 이상이나 코스를 단축해서 시간까지도 느긋한데 구태여 서두를 일이 없지 않겠는가. 덕분에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호수와 주변 숲의 그윽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시야가 열리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구슬뫼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나무 숲을 걷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가고 또 가도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1930-1940년대, 만경강 하구에는 민물고기나 바닷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촌마을이 있었다. 그들은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죽동마을로 몰려왔고, 댓금 흥정이 끝나면 대나무 다발을 바리바리 실은 달구지를 몰고 흙먼지 폴폴거리는 길을 되돌아갔단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고기잡이 방식인 쑤기놓기에 대나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민들은 대나무를 잘라 팔면 논농사로 얻는 소득보다 대여섯 배나 더 많이 벌 수 있었다나? 당시 대나무 군락이 얼마나 넓게 분포되었을 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얘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사연을 품은 대숲이니 무작정 통과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듯 작은 공간을 만들고 청암정이란 정자를 들어앉혔다. 빙 두른 판넬은 생태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청암산과 옥산저수지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소개하고 있다.

 청암산 둘레길의 지도는 큐알 코드로도 받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니 어슬렁어슬렁 걸어보란다.

 문제는 나 하나쯤이야이다. 누군가 죽순에 손을 댔던 모양이고, 참다못한 지자체는 저런 팻말을 매달아놓았다. 나무껍질이나 식물을 무단채취 말라는...

 잠시 후, 이번에는 왕버드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물과의 친화력이 강한 나무라서 계곡의 하류나 호숫가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풍경이기도 하다. 깊은 물속에서도 썩지 않고 잘 자라는 특성 덕분이다.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나서 일부러 심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호수가 품었을 때를 제일로 친다.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거기다 아침 안개라도 피어오를라치면 그 풍경은 창조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작품으로 승화된다.

 다시 나타난 대나무 숲.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솟아오른 대나무 숲길. 깊은 호흡 두어 번이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맑아진다. 이산화탄소를 몽땅 빨아들이고 산소를 품어내는 대나무 숲의 효능 때문일 것이다. 하나 더. 안내도는 이곳을 죽림원으로 적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나무 숲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담양의 죽녹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 자신감은 안내판에서도 확인된다. 대나무의 음이온 샤워로 걱정과 긴장을 풀 수 있는 청암산 죽향길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마다 최고의 포토존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아까보다 더 울창해진 대숲은 비밀의 숲이란 밀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군가는 이 숲을 정돈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었다. 담양 죽녹원이나 울산의 십리대숲 등 잘 가꿔진 대숲들의 조형미에 견주지 못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외려 그 덕에 한결 자연스럽고 웅숭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가 섞인 풍경이 이채롭기 짝이 없다.

 몇 걸음 더 걸어 만나는 또 하나의 전망대. 안내도는 이곳을 수변생태관찰장으로 적고 있다. 습지가 잘 발달된 곳으로 곤충과 야생화, 새들이 공생하는 체험학습장이다.

 안내판은 호수와 접한 어림을 연못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청암산에서 유일하게 연중 물이 마르지 않는 습지를 이용한 생태연못으로, 군산호수에 서식하는 수생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단다.

 맨발로 걷고 있는 여행자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만큼 길이 곱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 포토존도 만들어 놓았다. 구슬뫼길을 다녀간 여행자들의 앨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소이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냉큼 사랑마크부터 만들고 본다. 그걸 본 나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채로 카메라에 주워 담는다.

 숲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호숫가의 가장 큰 단점은 길이 질퍽거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들뫼길에서는 그런 걱정은 놓아도 된다. 조금이라도 질퍽거릴라치면 맷돌모양의 석판을 징검다리처럼 놓았고, 그로도 안 될 경우에는 데크로드를 설치했다. 각종 편의시설도 눈길을 끈다. 노란색 안내판하며 둥근 통나무의자, 나이테가 선명한 널빤지 모양의 긴 의자, 녹색 화살표가 선명한 빨래판 모양의 이정표 등 세심하게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쉼터도 각양각색이다. 정자나 파고라는 기본. 특이하게도 대나무를 엮어 만든 곳도 눈에 띈다. 잠시나마 급할 것 없이 살아가던 원시인이 되어. 시간에 쫒기지 말고 푹 쉬다 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12 : 41. 구불구불, 한없이 구불대던 숲길을 빠져나와 둑으로 올라선다. 초입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구불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구불길은 군산시에서 조성한 둘레길이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수풀이 우거진 길을 여유·풍요·자유를 느끼며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여행길로 만들겠다는 게 조성 목적이다. 모두 11개 코스로 나뉘는데 비단강길·햇빛길·큰들길·구슬뫼길·물빛길·달밝음길·탁류길·고군산길 등 이름만으로도 정겹다. 그중 옥산저수지를 에둘러 돌아가는 구슬뫼길은 구불길의 정수 중 하나로 꼽힌다. 서해랑길은 이 구슬뫼길의 일부 구간을 따라 걷는다.

 길이가 400m쯤 되는 저수지 제방을 따라간다. 군산호수(옛 옥산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성됐다. 공업용수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다. 1963년에는 군산의 제2수원지 노릇을 하느라 상수원보호구역에 지정됐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출입도 통제됐다. 그러다 2008, 45년 만에 상수원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호수를 에둘러 아름다운 수변길이 조성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구슬뫼길(구불4)’은 옥산저수지의 호숫가를 에돈다. 한자이름 구슬 옥()’ 뫼 산()’을 순우리말로 바꿔 브랜드를 삼았다. 거리는 18.8km. 군산역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이영춘 박사 고가와 옥산저수지 등을 지나 남내마을까지 간다.

 둑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탐방객들을 위해 망원경까지 배치했으니 잠시 머무르며 조망을 즐겨보자.

 난간에 서자 옥산저수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뒤로는 청암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가지런히 도열하고 있다. 저수지에 물이 차면서 산 중턱까지 물에 잠긴 산은 산봉우리들만 동글동글하게 남았다. 그걸 구슬이라고 본 사람들은 옥산이란 지명을 만들어냈고.,.

 물억새 사이를 걸어볼 수도 있다. 둑 아래 억새밭을 조성하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지금은 허리춤에도 못 미치지만 늦가을쯤이면 흐드러진 억새꽃이 장관을 이룰 게 분명하다.

 12 : 52. 제방 끝(군산역에서 출발한 구슬뫼길로 봤을 때는 수변길의 초입이 된다)에는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청암산이 좋다는 글자 조형물을 중심으로 대나무로 만든 대형 오리, 토끼와 거북이 등 여러 조형물을 배치했다. 가장 큰 볼거리로 꼽히는 가시연꽃은 아예 쉼터로 만들어놓았다.

 전국은 요즘 맨발걷기 열풍으로 뜨겁다. 맨발로 걸으면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늘면서 각 지자체마다 각자의 특성에 맞는 맨발 길을 조성하느라 부지런을 떤다. 하긴 맨발 걷기가 발바닥의 신경을 자극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체내 독소배출이나 불면증 개선, 치매 예방 등에 도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싱족(earthing+)’까지 등장할 정도이니 군산시라고 해서 별 수 있겠는가.

 12 : 57. 저수지 아래는 양수장관리사무소가 들어서 있었다. 사무소 마당은 화장실까지 갖춘 대형주차장으로 꾸몄다. 시골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다소 생뚱맞게까지 보이지만, 이는 옥산저수지의 호반을 따라 내놓은 걷기 길이 그만큼 많이 입소문을 탔다는 증거이도 하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걸어온 구슬뫼길 전북천리길에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다. 군산시의 걷기 여행길 중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전북천리길은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 가치, 이야기가 있는 길을 엄선해 선정한 명품 둘레길이이다. 14개 시·군에서 3-4개씩 선정했는데, 각 길들은 해안길·강변길·산들길·호수길로 구분되며 짧게는 두세 시간에서 길게는 대여섯 시간을 걷는다. 현재 44개 노선 405km의 길이 개통되어 있다.

 12 : 59. 서해랑길은 이제 옥구평야를 향해 달려간다. ‘새만금이 아닌 기존의 들녘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옥산면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른쪽에는 옥산면 소재지인 옥산리의 여로마을이 있다. 왼쪽은 같은 옥산리인 대려마을’, 드넓게 펼쳐지는 석교들 너머에서는 군산시가지의 고층빌딩들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눈에 들어오는 석교들도 무척 넓었다. 옥산저수지에서 시작 경암동에서 금강에 합류되는 경포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이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탐방로는 농로를 빌려 쓴다. 대려마을 앞에서 잠시 차도로 올라서기도 하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농로로 내려서버린다. 그 길의 양옆으로 옥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지평선으로 대변되던 김제들녘,  징게 맹게 외배미들 만큼은 아니어도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눈이 모자라 다 볼 수 없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평야지대에서 수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래선지 농로 옆에는 수로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었다. 수로의 크기가 조금씩 다를 뿐...

 이름도 생소한 송엽국(松葉菊)’이란다. 솔잎 모양의 입에 꽃은 국화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꽃말은 나태 또는 태만. 연분홍(자주색과 흰색도 있다)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꽃이 너무 아름다워 꽃에 푹 빠져서 나태해진다나?

 그제가 망종(芒種)’ 수확한 보리가 밥상에 올라오고 보리를 베어낸 논에 모내기를 한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들녘은 이미 모내기가 끝나간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 ‘부지깽이도 나와서 돕는다라는 속담까지 오가는 농번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니 지금이야 기계가 다 해주니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 이맘때는 들판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댔다. 어린 모를 찌고 모심기를 시작하면 한 손에 막걸리 주전자를, 머리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못밥을 이고 오던 우리네 어머니도 있었다. 이젠 그런 정다운 풍경들이 사라졌지만, 올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해 본다.

 13 : 37. 길고도 길었던 농로는 백서마을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는다. 법정 동리인 당북리(堂北里)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부락(원당·백석·한림·석교·건니법·동숙·뒤미티·들랑뒤·새터·서숙·서원뜸·옥석) 중 하나다. ! 걷다가 마주치는 상황, 즉 방향을 꺾는다던지, 옥구선 철도의 아래를 지난다던지 등 너절한 설명은 생략했다. 이 구간은 앱을 보거나, 서해랑길의 리본을 찾아가며 걷는 게 최상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백석로를 따라간다. 2차선에다 심심찮게 차량이 오가지만 보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13 : 46. 국도 21호선(새만금북로)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면 원당마을이다. 당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에 불과하지만 역사는 모체인 당북리보다 더 오래됐다. ‘당북(堂北)’이란 지명이 원당(元堂)’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13 : 51. 당북초등학교.

 13 : 58. 잠시 후 지곡동 지구 아파트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1.84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의사의 권유를 핑계 삼아 거리를 단축했고, 그로 인해 생긴 여유시간을 느림의 미학으로 소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보다 40분이나 먼저 도착했지만...

 서해랑길(군산 54코스) 안내도는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삶은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항상 선택이 수반된다어떤 길을 갈 것인지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오늘 우리 부부가 함께 걸었던 여정도 그런 결정 중 하나였다그 여정에 배려와 사랑이 넘쳤기에 훗날 인생을 복기할 때 아름다운 추억만 새록새록 돋아나지 않을까?

 

서해랑길 52코스(심포항-새창이 다리)

 

여 행 일 : ‘24. 5. 25()

소 재 지 : 전북 김제시 진봉면·만경읍·청하면 및 군산시 대야면 일원

여행코스 : 심포항진봉산망해사국사봉관기마을화포마을만경 낙조전망대새창이다리(거리/시간 : 18.4km, 실제는 19.35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2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시종일관 동진평야 및 만경평야의 들녘,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만경강변의 갈대밭을 바라보며 걷는 여정이다. 망해사와 만경 낙조전망대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그보다는 지평선이라는 이국적인 풍경에 더 감명을 받게 된다.

 

 들머리는 심포항(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 IC에서 내려와 711번 지방도를 4km쯤 달려 만경읍으로 온다. ‘만경여중 앞 로터리에서 10시 방향 702번 지방도로 옮겨 11km쯤 내려오면 심포항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 안내도는 포구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만경강 하류의 심포항에서 시작해 새창이 다리(옛 만경대교)’까지 18.4km를 걷는다. 들길과 산길, 그리고 방조제(새만금 간척사업 이후로는 의미가 사라졌다)를 걸으나 전체적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난이도는 별이 3(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낮기는 하지만 산을 2개나 넘기 때문일 것이다.

 심포항(深浦港)’은 동진강과 만경강을 양쪽에 낀 진봉반도의 끝자락. 그러니까 두 강이 합쳐지면서 서해바다와 마주하는 곳에 위치한 어항이다. 옛날에는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드는 큰 어항이었다고 하나,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바다가 담수호로 변하면서 이젠 한적하기 짝이 없는 포구로 변해버렸다. 10척도 안 되는 꼬맹이 어선이 정박해있고, 분주히 오갈 어부들 대신 갈매기 몇 마리가 한가하게 날고 있다.

 10 : 55. 강변도로(심포6)을 따라 만경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변에는 꽤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있었다. 수많은 어선이 드나들던 심포항의 옛 영화를 소환시켜준다고나 할까?

 강변에는 글자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이게 영어가 아닌 한글이어서 더 호감이 간다.

 11 : 02. 잠시 후, 이정표(망해사 1.3km)가 이제 그만 진봉산으로 올라가란다. 이렇듯 52코스는 들길과 둑길에 둔치로도 모자라 산길까지 오르내리는 고단한 여정이다.

 이때 만경강의 하구역이 눈에 들어온다. 새만금방조제로 가로막힌 강은 거대한 담수호로 변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만들어진 습지와 함께 사람들에게 멋진 눈요깃거리로 제공된다.

 심포항도 낙조로 유명했던가 보다. 하지만 막상 살펴보면 낙조에 대한 설명은 한마디도 없고, 심포항의 유래와 주변 갯벌 얘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새만금 바람길 안내도도 눈에 띈다. 자연 생태와 농촌 풍경이 잘 어우러진 김제시 진봉면 일대의 옛 바닷가에 조성해놓은 10km 길이의 걷기 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적과 관광지를 연계시켰는데, 새만금 간척사업이 완공되고 나서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새로운 대륙을 눈에 담는 즐거움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진봉산(進鳳山)’은 높이라고 해봐야 73.2m에 불과하다. 하지만 들머리의 해발이 1m이다보니 무시할 일은 아니다. 침목계단을 두어 곳이나 놓아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숲길은 초입 구간을 빼놓고는 무척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이 경사까지 거의 없는데, 울창한 솔숲은 솔향기로는 부족하다며 피톤치드까지 듬뿍 선물해 준다. 덕분에 김제까지 내려오면서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싹 날아가 버렸다.

 11 : 14  11 : 16. 7km 전방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쫓아가느라 진봉산 정상은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그리고 3층 규모의 진봉망해대를 만나고 나서야 눈치 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볼 수야 없는 노릇. 그냥 전망대로 올라가고 본다.

 이곳에서도 글자 조형물을 만났다. 김제가 새만금의 중심도시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새만금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담수호를 배경으로 삼았다.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망해대라는 이름대로 서해바다(지금은 담수호로 변한)가 드넓게 펼쳐진다. 오늘은 해무로 시야가 흐리지만, 쾌청한 날에는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멀리 떠 있는 고깃배 등 바다 풍경과 만경평야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 11 : 18. 산에서 내려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남촌(南村) 곽경열(郭京烈, 1901-1968)’ 선생의 추모비를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애국투사로 정부로부터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분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잠시 들러 감사의 묵념을 드리기로 했다.

 1901(고종 28) 요 아래 남상마을(진봉면 심포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5 15세의 어린 나이에 항일 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에 가담해 활동을 시작했다. 친일 부호 처단, 일본 헌병소 무기탈취, 군자금 모집 등의 활발한 활약을 펼치다 체포되어 전주감옥에서 3년의 옥고를 치른다. 1929년 풀려났으나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11 : 19. 다시 길을 나선다. 오랜만에 만난 서해랑길 이정목이 벌써 1.6km나 걸어왔다고 알려준다(그러나 종점까지는 아직도 16.8km나 남았다). 아무튼 탐방로는 이곳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두곡서원(杜谷書院)’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두곡서원은 봉호(鳳湖) 강원기(康元紀, 1423-1498)가 거처하던 곳에 지은 서원으로, 강원기 말고도 포은 정몽주와 난계 함부림을 함께 배향하고 있단다. 야은 길재 및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유풍을 크게 진작시킨 성리학자인데, 조선 태조 때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만경현(지금의 진봉면 심포리)에 정착하면서 고려 때부터 이어오던 세 가지 폐단을 고쳐주었고, 지역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589(선조 22)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삼폐(三弊)란 봉화산 봉수대의 운영경비, 300필의 공마, 6,000편의 숫돌을 나라에 바치는데 따른 주민들의 고통이다. 이걸 그의 제자(당시 전라관찰사였던 李芝老)를 시켜 임금에게 청했고, 그 결과 말 기르는 것은 제주도로, 봉수대는 부안 계화도로, 그리고 숫돌 제작은 태인으로 옮겨가게 되었단다.

 봉화산 숲길 안내도도 눈에 띈다. 그런데 광활방조제에서 석치제방까지 이어지는 코스가 새만금 바람길과 중첩된다는 느낌이다. 바람길에 포함된 산자락(봉화산·진봉산·국사봉·나성산)에 나있는 숲길 구간을 이르는 브랜드이지 싶다.

 11 : 20.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는 또 다른 삼거리에서는 오른쪽이다. 하지만 난 왼쪽으로 간다. 그리고 140m쯤 더 들어간 곳에서 망해사(望海寺)’를 만났다. 671(문무왕 11)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로, 왕조의 부침에 따라 성쇠를 거듭하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1589(선조 22) 진묵 대사(震默大師)가 중창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낙서전·삼성각·종각·청조헌(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격인 극락전은 올해 4월에 불에 타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망해사는 깎은 듯이 세워진 기암절벽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진묵스님이 지었다는 낙서전(樂西殿, 전라북도 기념물)’은 그 벼랑에 걸터앉았다. 스님이 낙서전을 짓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팽나무 두 그루를 벗 삼아. 하나 더. 매향비도 찾아볼 수 있다. 매향이란 1000년 뒤에 꺼낼 것을 기약하며 바닷물과 계곡수가 만나는 곳에 향나무를 묻어 복을 빌고 미륵불이 출연하기를 기원하는 불교 의식이다. 그 기원과 향을 묻은 자리를 기록한 비석이 매향비이다.

 망해사는 서해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망해사란 이름대로 서해바다 쪽으로 시야가 툭 트이는 덕분이다.

 11 : 29. 망해사 입구로 되돌아와(11 : 26) 이번에는 서해랑길을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전망대에 이른다. ‘녹색명소 전망대라는데 사진 찍기 딱 놓은 곳이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저 녹색 습지를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이곳 역시 낙조의 명소로 알려진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일몰은 가히 일품이라고 했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아예 강변으로 내려서버린다. 장마 때는 여전히 물길이 길을 넘나드는 곳이다. 이렇듯 52코스는 산길과 들길, 둑길, 둔치로도 모자라 심지어는 이런 강바닥까지 내려서서 걷는 게 특징이다.

 길은 웃자란 갈대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 길을 따라 늘어선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나그네의 발길을 인도해준다. 하나 더. 바닥에는 야자매트를 깔아놓았다. 습지의 최대 단점인 질퍽거림을 없애주었으니 그저 주변 풍광에 취해 걸어볼 일이다.

 바람개비로 터널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새만금 바람길이란 브랜드에 걸맞는 조형물이라 하겠다.

 갈대 숲길의 끄트머리쯤에서 전북천리길의 스탬프보관함을 만났다. 자연생태계를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이 트레킹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전북특별자치도의 걷기 여행길이다. 해안길·산들길·강변길·호수길 등으로 나뉘는 14개 시· 44개 노선을 모두 합치면 405km쯤 된단다. ‘새만금바람길도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11 : 39. ‘전선포 제방에 올라서자 닻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이곳에 포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수준점(水準點)으로 여겨지는 시설도 눈에 띈다. 동진 들녘의 물길을 만경강으로 연결시키는 저 배수갑문과 관련된 시설이지 싶다.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이곳은 고군산열도와 계화도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어선의 닻을 내리던 항구였다. 왜구와 싸우기 위해 배(戰船)를 배치시키던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하다. 봉화산 정상의 봉화대에서 보내오는 신호에 따라 군선으로 왜적을 물리치던 곳이라고 해서 전선포(戰船浦)’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1920년대 일본인들이 제방을 쌓고부터는 과거의 흔적이 사라져버렸다.

 탐방로는 이제 둑길을 따라간다. 길게 뻗어나가는 제방을 가운데 놓고 농경지와 습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옛 전선포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범위가 넓다.

 오른편으로는 동진평야가 펼쳐진다. 이웃하고 있는 만경평야와 함께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해주는 곳이다. 이곳이 아니면 우리나라 그 어디서도 지평선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들녘이 누렇게 익어간다. 4주 전(2주 간격으로 서해랑길을 답사해오는데, 지난 51구간은 개인사정으로 참석을 못했다)만 해도 청보리가 바람에 살랑이던 들녘이 오늘은 황금빛으로 물들어있다.

 왼쪽으로는 만경강이 흘러간다. 하지만 둑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옛날 이 둑의 아래는 강물이 아닌 바닷물이 넘실거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11 : 44. 제방의 끄트머리에서 이번에는 국사봉(61.3m)’으로 오른다. 참고로 이 능선에는 국사봉 말고도 나성산(60.9m)과 이성산(61.9m)이 있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길이 나뉘고 있었다. ‘봉화산 숲길 이정표는 나성산(1.3km 전방)으로 올라가란다. 하지만 서해랑길 표식은 국사봉의 아랫도리를 헤집는 오솔길을 따르란다.

 길은 국사봉과 나성산의 2부쯤 되는 산허리를 에돌며 나간다. 군인들의 경계근무지였던 숲길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니 철책은 거두어간지 오래고, 지금은 옛 초소만 폐허처럼 남았다. 리모델링해 놓는다면 걷기여행자들에게 좋은 볼거리 겸 배울거리가 되어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작은 오르내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길은 가파른 경사지를 꿰뚫으며 나있다. 때문에 가끔은 위험스러워 보이는 구간도 지난다. 하지만 목제 또는 철제로 난간을 설치해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11 : 56. 막바지에 이른 나성산 자락길은 그윽한 대나무 숲속을 지나 다시 한 번 강변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고사(古沙)마을 갈림길(이정표 : 인향마을 1.0km/ 고사마을 0.2km/ 전선포 1.0km)을 지난다.

 12 : 07. 탐방로는 석치 배수갑문이 수문장을 자처하는 둑길로 올라선다. ‘인향(仁香)마을 입구(12 : 02)를 거쳐서 왔다. 이정표(석소마을 1.2km/ 인향마을 0.5km)는 이곳이 석치(石峙) 마을로 연결되는 갈림길임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석치 제방의 둑길을 따른다. 둑길은 시대를 뛰어넘는 두 간척지를 양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재미를 선사한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들녘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진 간척지, 반면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왼쪽은 최근 만들어진 새만금간척지이다.

 전선포 제방처럼 이곳에서도 지평선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들녘의 이름은 동진평야에서 만경평야로 바뀐다. 호남정맥의 묵방산(538m)에서 갈라져 나온 모악지맥(母岳支脈)’이 조금 전 지나온 나성산·국사봉으로 이어져 오는데, 이 산줄기가 동진강과 만경강의 수계를 나누기 때문이다. 하나 더. 조정래는 대하소설 아리랑의 첫 장에서 만경평야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광활한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게 외배미들이라고 불렸다. 이곳이 김제 만경평야이며 호남평야의 한 축이다> 더 이상의 추가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한 표현이라 하겠다. 참고로 외배미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 트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에 서면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

 만경강 습지는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물줄기가 얼마나 멀찍이 물러났는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공자님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오늘도 증명되었다. 난 보리짚이나 밀짚이 사료로 사용된다고 믿었고, 그 증거로 보리밭 사이사이 쌓여있는 곤포사일리지를 들었었다. 그런데 함께 걷던 젊은 도반이 이즈음 들녘에서 만나는 곤포사일리지 속에는 목초가 들었다는 것이다.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보니 들녘에 보리밭 말고도 목초지가 많이 있었고, 곤포사일리지는 그 둑에 쌓여있는 게 아닌가.

 12 : 21. 제방 끄트머리에는 석소(石所)마을이 있었다. 옛날 질 좋은 숫돌이 나왔다는 마을로, 칼과 창을 가는 숫돌을 매년 5천 편씩이나 만들어 공물(貢物)로 바치던 역사적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한 폐해가 커지자 아까 두곡서원 부분에서 얘기하던 강원기(康元紀)의 노력으로 숫돌 제작은 태인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또 다시 이어지는 긴 제방. 초입에 석소 배수갑문이 있다. 안내판은 이곳을 진봉 방조제라 적고 있었다. 원래부터 김제는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넓은 평야지대였다. 일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식량 수탈의 목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였고, 1924년 진봉방조제를 완공해 1,928ha의 농경지를 만들었다. 방조제는 크게 진봉지구와 심포지구로 나뉘는데, 이곳은 고사리 지선이라고 한다.

 누렇게 익은 보리와 밀로 가득한 황금벌판에 하나의 점처럼 들어선 연꽃 방죽이 이색적이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연꽃의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다. 또한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고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물 밖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구원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지며 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하지만 저 논의 주인은 수확한 연뿌리나 연밥의 시세에 더 관심이 갈 것이다.

 몸매가 부풀려진 만경강은 습지로도 부족했던지 울창한 숲까지 들어섰다. 옛날 바닷물이 들락거리던 때는 섬이었을 것이다.

 12 : 31, 진행방향에 놓인 교회를 스쳐지나가면서 관기마을로 들어선다. 고사·인향·석치·석소·관기·평동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고사리의 중심이자 진봉면의 관청소재지이기도 하다. ‘관기(館基)’는 조상의 선견지명이 빚어낸 지명이다. ‘관청의 터라는 이름대로 일제강점기 옮긴 지서를 시작으로 다른 곳에 있던 행정관서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교회 앞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11.4km)가 이제 그만 새만금바람길과 헤어지란다. 바람길 이정표도 다른 방향인 진봉면사무소를 가리키고 있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만경 낙조전망대 쪽으로 간다. 잠시지만 마을안길을 걷는다. 걷기 여행자들에게 길을 내준 주민들의 안정을 지켜주기 위해서 정숙보행이 필요한 구간이다.

 마을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둑길이 기다린다. 수로(대덕제수문관기수문)의 둑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농로가 나있다. 수로는 꽤 컸다. 물가에서 졸고 있는 꼬맹이 어선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안내판은 이 수로를 간사지 어업계에서 관할하는 하천이라고 적고 있었다. 간사지란 간석지(干潟地)의 비표준어이다. 밀물 때에는 물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갯벌을 말한다. 이게 간척사업으로 인해 들녘으로 변했고, 이때 만들어진 인공수로가 어업을 영유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금주 월요일(20)은 만물이 점차로 생장하여 가득 차게 된다는 소만(小滿)’이었다. 그래선지 만경 들녘은 들일 나온 농부들로 분주했다.

 농작물은 파종-성장-수확이라는 순환과정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저 모내기 현장은 삶이 시작되는 첫 단계이다. 하지만 또 다른 삶은 이미 막바지에 와 있었다. 얼마나 부지런한 농부였으면 노지 고추가 따 먹을 수 있을 만큼이나 자랐을까?

 만경평야는 지평선이라는 단어의 참뜻을 알게 해줄 정도로 드넓다. 그것도 살짝살짝 고개를 내미는 구릉지 말고는 모두가 다 농경지다. 그래선지 시선이 옮겨가는 곳마다 수로가 따라다닌다. 간선 수로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가지를 쳐가면서 점점 가늘어진다. 그게 실핏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수로 곳곳에 낚시꾼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입질은 괜찮나요?’, ‘씨알이 굵은가요?’ 입에 발린 말을 건네 보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기 다 도망가게 웬 소란이냐는 듯 오히려 분위기만 싸늘해졌다. 문득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만났던 낚시꾼이 생각난다. 그 날도 오늘과 똑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그리고 난 팔뚝만큼이나 큰 생선을 선물 받을 뻔 했었다. 여행 중이라서 뜻만 받겠다며 사양했지만 낚시질을 멈추어가면서까지 대화에 응해주던 튀르키예인들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옛 사람들은 낚시꾼을 강태공이라 불러왔다. 고기와 함께 세월을 낚는다며... 하지만 요즘 낚시꾼들은 오직 고기만 낚는 모양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로는 만경강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밀물 때면 바닷물로 차오르던 강은 지금 온통 습지로 변했다. ! 수로를 메우다시피 하고 있는 갈대숲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가을철이면 또 하나의 명소로 변신할 수 있겠다.

 길바닥에는 길뚝개꽃이 무리지어 피어났다. 한국의 야생화는 무리지어 피어날 때 제멋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안개꽃만큼이나 작은 꽃들이 뭉쳐있는 게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다. 그걸 접사로 찍다보니 요렇게 변해버렸지만...

 서해랑길은 진봉면에서 만경읍으로 넘어온다. 그러자 들녘은 더 펑퍼짐해진다. 심심찮게 떠오르던 구릉지의 둔덕마저도 이젠 사라져버렸다. 하긴 오죽했으면 김제에서 지평선축제까지 열리겠는가. ‘2024 Pinnacle Awards and Asia Festival City Conference’에서 베스트 교육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

 소만(小滿)이 지난 농촌은 색깔부터가 달라진다. 초록의 보리와 밀들이 누렇게 익어가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수확을 시작했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 ‘부지깽이도 나와서 돕는다는 계절이다. 하지만 걷기 여행에 나선 집사람에겐 사진 찍기 딱 좋은 풍경일 뿐이다.(농작물 피해가 없도록 고랑에서 찍었다)

 13 : 06. ‘간선수로답게 수문의 규모가 제법 크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대덕제 수문일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은 외지인들이 간선수로(관기수문대덕제수문)에서 낚시하는 걸 금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각망(角網, 길그물의 끝에 직사각형의 통그물을 설치하여 어군이 길그물을 따라 통그물 안으로 유도되도록 하여 대상물을 포획하는 방법) 어업 허가를 받아놓은 구역이라면서.

 13 : 27  13 : 37. 둑길은 계속된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간선수로만 따르는 것은 아니다. 지선도 따라다니다 가끔은 아래 사진처럼 수로를 건너기도 한다. 마침맞게 그곳에 쉼터용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느긋이 쉬다 갈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새만금 광역탐방로를 걷고 있는 모양이다. 토정마을(만경읍)에서 심포마을(진봉면)까지 이어지는 둘레길, 자연경관이 우수한 만경강 유역을 보려고 찾아온 걷기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새만금배후도시 개발지역 주변에 길이 12.5km의 탐방로를 개설했단다.

 13 : 47.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라간다. 그러다가 2차선 도로인 화포로로 올라섰다싶으면 어느새 화포마을에 이른다. 화포·창자·장흥·토정 등으로 이루어진 화포리(火浦里)’의 중심마을이다. ‘화포(火浦)’란 지명은 진묵대사(震默大師)가 태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불개·불거(佛居불포(佛浦)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처 불()’자를 불 화()’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참고로 진묵대사는 1562(명종 17)에 태어나 1633년 열반에 들기까지 살아 있는 부처로 일컬어지던 고승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거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 받기도 한다.

 동구 밖에는 1870년에 세워졌다는 평산신씨 충효열 정려각이 있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려는 정판이 걸려 있고 안에다 비석을 세웠다. 하지만 정판이 낡고 글씨가 번져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비문(평산신씨 충효열지비)이 한글로 적힌 게 눈길을 끈다. 저 빗돌을 세우던 당시는 너나없이 한자로 적었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만경의 진관포 어부의 딸로 태어난 신성녀는 농촌 출신인 이독금(李禿金)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맹인이었고 시어머니는 앉은뱅이였단다. 거기다 남편마저 일찍 보내고 10대 청상과부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을 수절하면서 날아가는 오리라든지 동절기에 잉어라든지 또 죽순이라든지 시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지성을 다하여 봉양한 후 일생을 마치자 나라에서 효부 열녀비를 세워 주었단다.

 탐방로는 화포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구릉지 모퉁이를 돈 다음, 둑길을 따라 만경강으로 다가간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먼 거리지만 심심찮게 뽕나무를 만날 수 있었고, 주렁주렁 매달린 잘 익은 오디를 따먹으며 가게 해주면서 오히려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14 : 12. 느닷없이 나타난 자전거길’. 새만금광역탐방로가 시작되는 토정마을은 오른쪽으로 간다. 하지만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4,4km)는 자전거길을 따르란다.

 20m쯤 더 진행했을까 길가에 도톰하니 언덕 하나가 솟아올랐다. 김제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중 첫손에 꼽힌다는 만경 낙조전망대이다. 서해랑길은 저곳을 비켜 지나간다. 하지만 볼거리가 제법 많은 곳이니 꼭 올라가보도록 하자.

 언덕 꼭대기에는 만경정(萬頃亭)’이 지어져 있었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만경강의 대표적인 쉼터이니, 느긋이 쉬다가 낙조까지 구경하고 가라는 모양이다.

 먼저 만경강부터 가슴에 담아둔다. 그리고는 액자형 포토존 안에 그런 풍경을 차곡차곡 넣는다. 김제의 옛 지명인 만경(晩景)은 만()이랑이나 되는 논을 이르는 말이다. 그 많은 논에 물을 대는 저 만경강은 들녘의 온갖 생물을 기르는 젖줄이다.

 만경강 얘기는 안내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만경강은 황금빛 들녘과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의 강이란다. 과거에는 호남의 정취가 머물었고, 나루터를 통해 문물이 오가던 소통의 중심지였다. 그게 지금은 보호종의 서식처이며 희귀 철새가 날아드는 생태계의 통로가 되었다. 그런 만경강의 비경 8곳을 선정했으니 바로 만경팔경이란다.

 이곳은 만경강의 아름다운 노을을 구경할 수 있는 제1 만경낙조라고 한다. 하지만 빗돌은 낙조(落照)가 아니라 낙조(落潮)로 적혀있다. 담당자의 실수로 여겨지는데 빨리 고쳐졌으면 좋겠다. 저녁노을 조망의 명소에서 썰물을 바라보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겠는가.

 만경강 이야기는 빗돌에도 담았다. 본래 이름은 사수(泗水)’라고 한다. 공자의 고향 곡부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 풍패 지역에도 동명의 강이 있단다. 이중 하나를 벤치마킹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주차장은 자동차 캠퍼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탐방로 주변의 다른 주차장들도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하긴 경관 좋고 한적한데다가 수돗물 사용이 가능한 화장실까지 갖추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차박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되돌아온 탐방로에는 안도현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지만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이리중학교에서 근무까지 했으니 전북특별자치도와 인연이 깊다면 깊은데, 그가 만경강 노을이란 시를 지었었나 보다.

 또 다른 저 시비는 누구의 작품을 실었을까? <노을빛 그리움으로 물드는/ 강둑에 갈대들이여/ 그리움에 흔들려라/ 굽이치는 만경강따라/ 내 마음도 흘러가리>

 이후부터는 만경강 자전거길을 따른다. 오른쪽에서는 자동차도로가 나란히 달려온다. 만경강을 끼고 있어 경관도 빼어난 편이다. 하지만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만났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해 자동차도로로 피해주는 자전거가 있는 반면, 덜 떨어진 오토바이 한 대가 맞은편에서 씽씽 달려오는 게 아닌가.

 만경강은 갈대로 가득 차있다. 강변으로 길이 나있기 때문에 웃자란 갈대에 가려 물줄기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14 : 37. 강을 통째로 삼켜버리다시피 하고 있는 갈대밭은 만경강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지자체가 그걸 버려둘 리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습지를 관찰해보라는 듯 데크로드를 설치했다.

 그 끄트머리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조성된 44km의 만경강 자전거길에는 이렇듯 전망대, 쉼터, 화장실 등 각종 편의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14 : 58. 청하대교 아래. 오는 도중 흐드러지게 피어난 금계국을 희롱하느라 집사람의 발걸음이 더디어졌나 보다. 나 역시 그런 집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고. 그러다 80대 중반의 둘레길 도반에게 추월당했다. 아니 서해랑길의 51개 코스를 이어오는 동안 예외 없이 나보다 먼저 종점에 도착하신다.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노익장을 자랑하는 그 분의 체력은 부러울 수밖에 없다.

 15 : 06. 신창마을에 이른다. 동지산리(東芝山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1905년경 일본인 중시가 시장마을(동지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에 살면서 군산으로 가기 위해 나룻배를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새로 생긴 나루터라는 뜻에서 새창이로 부르다가 신창으로 고쳤다. 가을이면 전국 최대의 망둑어 낚시터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만경팔경의 제2경인 신창지정(新倉之情)’의 현장이기도 하다. 팔각정 앞에 안내 빗돌을 세우고 그 사연을 적어 넣었다. 나루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이곳을 오고가던 사람들과 문물이 남기고 간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나?

 정자에 오르자 풍요의 강이라는 만경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새창이 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 앞 강변에는 꼬맹이 어선 두어 척이 매어있어 이곳이 새창이 나루터(新倉津)’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만경강의 대표적인 포구로 서해로부터 고산포·동자포·춘포를 물길로 연결시키며 번성을 누렸었다고 한다.

 신창마을 앞에 기다란 다리가 세 개나 놓여있다. ‘새창이 다리 711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만경대교’,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의 서해만경강교이다. 서해랑길은 이 가운데 새창이 다리를 건너 군산 땅으로 넘어간다.

 새창이다리의 옛 이름은 만경대교’. 일제강점기인 1933년 기존 가교의 안전문제와 김제-군산 간 수송상 편의를 위해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다리(전주 남부시장에 1922년 건설한 싸전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라고 한다. 아니 김제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더 옳겠다. 세월이 흘러 교통량이 늘고 다리가 낡으면서 1998년 이웃에 새로운 만경대교를 놓고, 옛 다리는 보행자 전용으로 리모델링해 세상에 내놓았다.

 김제시는 다리를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금산사(사적 제496)와 수류성당(1895년 문을 연 천주교 성당), 금산교회(1905년 미국 선교사 테이트가 지었다), 증산법종교(강일순 증산교 창시자의 무덤이 있는 종교 성지) 등의 종교 성지를 비롯해 김제지평선·하소백련·진봉보리밭 등의 축제를 소개하고 있다. 김제 농·특산물이나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와 아리랑문학마을 같은 요즘 뜨고 있는 명소는 덤이다.

 하류이어선지 만경강 물줄기가 등치를 한껏 부풀렸다.

 다리는 딱 중간에서 김제와 군산이 갈리고 있었다. 그런데 군산 땅으로 넘어오자마자 다리 풍경이 확 바뀌어버린다. 벤치와 화단으로도 부족해 홍보판까지 설치해 놓았던 김제와 달리 군산은 손을 하나도 대지 않은 채로 방치하고 있었다.

 대신 다리 아래 둔치를 멋진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새창이 연꽃마당이라는데 공중에서 보면 연꽃이 심어진 저 연못들이 합쳐지면서 한반도 모양을 이룬다고 한다.

 15 : 20. 다리 건너에 만들어놓은 쉼터를 겸한 관망대에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9.35km를 찍고 있다. 나지막하지만 산을 두 개나 넘었음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7km나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느라 뛰다시피 걸었던 결과일 것이다.

 군산시는 다리 대신 이곳에다 홍보용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안내판은 새창이다리 이야기 새창이 이야기’, 새창이연꽃마당 이야기를 담았다. 나머지 둘은 동아일보 기사(1933 10 7일자와 같은 해 8 4일자)를 나누어 () 만경대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오늘도 집사람은 든든한 내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니나의 첫 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르다.’로 시작된다. 모든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럼 행복한 가정과 인생을 살고 싶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종교와 철학이 찾고자 하는 숙제일 것이다. 우리 부부는 사랑과 배려에서 행복을 찾아간다. 한쪽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상대방은 기꺼이 함께 해준다. 그래서 오늘도 트레킹을 함께 했고, 웃고 떠들며 행복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서해랑길 50코스(부안군청-동진강 석천휴게소)

 

여 행 일 : ‘24. 4. 27()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동진면 및 김제시 죽산면 일원

여행코스 : 부안군청석정문학관상리마을고마제 수변산책로궁월마을장등마을동진강 석천휴게소(거리/시간 : 11.1km, 실제는 11.94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0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지난 49코스처럼 내륙의 들녘을 걷는다. 서해랑길답지 않게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석정문학관과 고마제 수변산책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들머리는 부안군청(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3km쯤 내려오다 신운교차로에서 빠져나와 부령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부안군청이 나온다.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청사와 주차타워를 연결하는 공중다리 아래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마지막 여정. ‘서해랑길 본연의 임무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들녘을 걸어 김제 땅으로 들어간다. 평지에다 거리까지 짧아서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11 : 04. 트레킹을 시작한다. 서해랑길은 군청 앞에서 당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간다. 하지만 난 서쪽에 있는 서문안 당산으로 간다. 명색이 도로의 이름까지 된 기념물(국가 민속문화유산) 120m 거리에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1689(숙종 15) 서문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서문안 당산은 쌍으로 된 솟대당산(돌 짐대)’ 돌장승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는 서문으로 통하는 길 양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이곳으로 옮겼단다.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솟대의 일종이다. 그래선지 돌 짐대에 바다 쪽을 바라보는 오리가 올라앉았다. 이는 화재로부터 부안 읍내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이에 반해 장승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나무나 돌로 세워 놓은 민간 신앙물이다. 이곳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 쌍으로 세워져 있다. 하나 더. 매년 정월 초하룻날 밤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동문안과 남문의 당산을 이곳으로 모신다고 한다. 이곳 서문안 당산이 주신이기 때문이란다.(1978년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11 : 09. 이번에는 군청길을 따라 소우라는 일식당을 찾아간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 학수(박정민)가 좋아한 미경(신현빈)의 피아노학원으로 등장하는 집이다. 그런데 건물이 있어야할 자리에 난데없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오래된 주택을 식당으로 꾸몄다고 했는데, 군청에서 도심 가꾸기사업이라도 펼쳤던 모양이다.

 아무튼 메밀국수와 덮밥 말고도 서브 메뉴로 커피를 내놓는다고 해서, 커피라도 마시며 영화의 분위기를 잠시 느껴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부안읍에는 두 주인공이 밤거리를 거니는 장면에 등장하는 물의 공원도 있다. 물고기가 다이빙하는 듯한 분수 조형물 주변으로 물이 흐르는 거리를 조성해 놓았다.(사진은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11 : 11  11 : 14. 아쉬운 발걸음을 부안 역사문화관으로 옮긴다. 근대 건축물인 옛 부안금융조합(대한민국 근대유산 등록문화재)을 리모델링하여 2021 12월 문을 열었다. 우리 같은 외지인들에게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지역민들에게는 자긍심과 애향심을 높여주기 위해서이다. 지역 주민들의 문화활동 공간으로도 활용된다니 복합 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관은 고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지나, 고려의 도자기 문화와 조선 후기의 동학농민혁명까지 부안의 역사를 담아낸 상설전시실과 다양한 주제의 전시와 문화 활동을 위한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한말의 큰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소개하는 코너도 있었다. 부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12년 부안의 계화도에 정착하여 19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그가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그가 죽었을 때 장례를 따르는 제자들로 계화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나? 하지만 그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巴里長書, 儒林에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기획전시실에서는 김억 작가의 목판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변산의 변화무쌍함을 나무의 질감으로 표현하는 작가라는데, 외변산·내변산·직소폭포·마을모정 등을 담은 목판화 8점을 전시해 놓았다. 소개 글은 우리가 익히 봐온 자연과 풍광을 그의 칼로 손끝 여문 장인처럼 동화 속으로 이끌어준다고 적었다.

 11 : 14.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당산로를 따른다. 군청삼거리(11 : 18)에서는 석정로를 따라 왼쪽으로 간다.

 11 : 21.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동문안 당산이 맞는다. 돌로 만든 오리 조각을 돌기둥 위에 얹혀 놓은 돌 짐대(당산)와 돌장승 한 쌍(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민간신앙 유적이다. 이곳도 서문안 당산처럼 머리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오리가 앉아있다.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임무도 같다. 하나 더. 동문안 당산은 본래 부풍현의 동쪽 문인 청원루(淸遠樓) 안쪽에 있었다. 그러다 새롭게 도로가 개설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근처에 또 하나의 솟대당산(짐대)이 세워져 있었다. 네모진 나무기둥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는데, 그 꼭대기에 오리가 걸터앉았다. 하단은 새끼줄로 묶고 접신이라도 하려는 듯 창호지를 매달았다. 부안읍 당산제는 새끼를 꼬아 만든 줄로 줄다리기를 하고, 그게 끝나면 돌기둥에 새끼줄을 돌려 감는 당산 옷 입히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산제가 다시 부활되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으뜸 오일뱅크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한 쌍의 장승이 자리한다. 상원주장군은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으며 주먹코에 다문 입, 얼굴 양옆의 큰 귀가 인상적이다(안내판은 제주의 돌하루방을 닮았다고 적었다). 마주보는 하원당장군은 얼굴의 이마에 백호(白毫,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가 있고, 매우 크게 표현된 퉁방울눈을 가졌다.

 길은 한마디로 예뻤다. 아니 내가 본 부안은 읍내 전체가 아름다웠다. 곳곳에 들어선 소공원과 길가 화단에선 철쭉과 작약 같은 예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건물들도 계획도시의 느낌이 물씬 풍길 정도로 하나같이 깔끔했다.

 그런 길을 걷다 만난 신선마을 표지석’.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으로 시작되는 시 化石이 되고 싶어가 적힌 팻말도 눈에 띈다. 작가 이름은 빼먹었지만 시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신석정 시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는 시인의 생가가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30.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석정문학관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마침맞게 서해랑길도 그쪽으로 인도한다. 아니 서해랑길이 아니더라도 꼭 들러봐야만 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나 5·16 군사정권 같은 암울했던 시기에도 지조를 잃지 않았던 지식인을 어디 그리 흔하게 만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신석정은 친일 문학지 국민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청탁서를 찢고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한 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절필을 선언한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초입에서 만난 창작놀이터’. 지역 내 관광자원에 스마트폰을 이용한 미션게임을 접목한 놀이 공간이다. 주제에 맞는 미션게임을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 즐기며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게임과 함께 천연화장품, 비누 등을 만들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11 : 32 - 11 : 39. 몇 걸음 더 걸으면 석정문학관이다. 한국 시문학의 대가 신석정(辛錫正, 1907-1974)의 청초한 인품과 시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2011년 문을 열었다. 1층의 전시관에는 5권의 대표시집과 유고 시집, 집필 원고 등 500여 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2층은 북카페로 문학관을 찾는 이들의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우리에게는 ‘()夕汀으로 더 익숙한데, 이는 시인의 아호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1층 전시관은 신석정 시인의 유품 500여 점이 전시된 상설전시관과 시인의 지인들 사진과 친필 서한 등을 전시한 기획전시실로 나누어져 있다. 세미나실은 시인의 생애 영상물을 관람하고 문학 관련 세미나를 여는 공간이다.

 촛불’·‘슬픈 목가’·‘대바람 소리  5권의 대표시집, 유고시집, 친필원고, 유품 등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로 신석정은 김영랑·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39년 첫 시집인 촛불을 발간하면서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1931년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가담한 신석정은 그해 시문학 동광에 시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를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정지용·이광수·한용운 등과 교유하게 된다. 그러다 부안으로 내려와 뒤뜰이 넓은 초가를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고 이름 짓고, 낮에는 고구마밭을 일구고 밤에는 독서와 시작에 매진한다. 이 무렵 아직 등단하지 않은 서정주가 찾아오면 문학에 대한 얘기를 밤이 이슥토록 이어갔다고 한다.

 11 : 39 - 11: 42. 문학관을 빠져나오면 맞은편에 선생이 살았다는 신석정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1930년대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이끌던 신석정은 부안 동중리에서 태어나 1952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시인의 첫 시집 촛불(1939)’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1947)’가 이 집에서 탄생했다.

 석정은 첫 시집을 내면서 청구원 주변의 산과 구름, 멀리 서해의 간지러운 해풍이 볼을 문지르고 지나갈 때 얻은 꿈 조각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집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 집의 뜨락은 지금 기우는 해’, ‘고운 심장 등 시인의 작품을 담은 시비들 여럿이 지키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철제로 제작한 시판들로 나머지 여백을 채웠다. 그중 산의 서곡(1967년 출간)’에 실렸던 한줄기 불빛은이라는 시를 게시해 본다.

 11 : 43. 문학관 앞에서 골목길(선은2)을 따라 선은마을로 들어간다. 그러자 엄청나게 큰 한옥이 얼굴을 내민다. 한옥체험을 운영하고 있는 이갑수 고택이라고 한다. 이곳 선은(仙隱)’ 선비들이 숨어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했다. 그 마을에 조선 말기에 이주해온 전주 이씨들의 오래된 고택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부안의 전통한옥마을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 들어가 볼 이갑수 고택과 연이어 들릴 이승호 고택도 그중 하나이다.

 문간채를 지나자 안채가 반긴다. 목재의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형상을 살리는 등 간결미와 자연미가 돋보이는 7칸 겹집의 한옥이다. 오른편에는 한옥체험을 하러 찾아온 사람들이 이용하는 사랑채도 있다. 한옥임에도 최신식 주방은 물론이고 화장실은 샤워시설까지 갖추었단다. 문간채에는 단체를 위한 넓은 방도 있다고 했다. ! 이갑수 고택은 이연재(夷然齊, 자연과 더불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곳)’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11 : 45. 고택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골목이 하나 나뉘고 있었다(서해랑길은 직진한다). 50m쯤 떨어진 곳에 독립운동가인 운암 이승호(雲岩 李承鎬, 1890-1966)’ 선생의 고택이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어가 보자.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3,600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하였고, 지역에서는 빈민 구휼에 앞장섰다. 이 일이 알려져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대문이 있다. 대문을 지나자 이번에는 옛 티를 퐁퐁 풍기는 안채가 7칸 겹집의 거대한 몸집을 드러낸다. 안채는 문간채보다 조금 더 높다. 덕분에 오랜 세월을 버텨온 색 바랜 마루로 올라서면 집안의 구조뿐만 아니라 부안읍내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이갑수 고택에 비해 관리가 잘 안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당 건너에서는 열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방을 거느린 별채가 횡으로 늘어서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도 지어져 있다.

 약간 비탈진 곳에 들어앉은 선은마을은 나지막한 야산이 뒤를 에워싸고, 앞으로는 드넓은 부안평야가 펼쳐지는 모양새이다. 큰 부자가 많이 나는 전형적인 명당의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거대한 고택들은 물론이고, 새로 지은 주택들도 하나같이 여느 부잣집 부럽지 않게 크고 멋졌다.

 11 : 53. 서해랑깅은 마을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그리고는 품고 달려온 바톤을 동진면(내기리)에 넘겨준다. 이어서 상소산과 망월산을 잇는 구릉지의 산자락을 따른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신록의 푸르름이 펼쳐지는 기분 좋은 숲길이다.

 11 : 58. ‘봉황교차로 부근에서 국도 30호선(변산바다로)를 만나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30호선을 국도 23호선(부안로)으로 연결시키는 접속도로의 옆길(내기·상리길)를 따라 잠시 간다.

 12 : 03.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서해랑길 리본이 안내해준다)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상리마을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12 : 07. ‘상리마을을 지난다. 내기리(內基里)에 속한 3개 행정부락(상리·신흥·신리) 중 하나로 주변에 내기평야가 있어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단다. 2014년경부터 날아든 백로가 지금은 수천마리로 늘어나 이를 보러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마을이기도 하다.

 풍성한 상차림을 꿈꾸는 집사람의 손길은 오늘도 바쁘다. 논에 미나리가 자라고 있다며 부지런히 뜯어대는데, 이를 본 동네 아주머니가 농약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며 말린다. 하지만 흐르는 물속에 한 이틀 담가두면 괜찮다는 집사람. 그리고 그 미나리는 부침개로 변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서재의 책상에 올려져있다. 막걸리 한 병과 함께...

 상리마을을 지나 잠시지만 숲길을 걷는다. 연록의 싱그러움을 맘껏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백로 떼가 펼치는 군무를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날아다니는 백로 떼가 주변경관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동양화를 심심찮게 연출해낸다.

 숲은 소나무로 울울창창했다. 그런 숲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백로 떼가 생활하고 있었다. 수천마리가 숲에 둥지를 틀면서 마치 산 천체가 흰 꽃이 핀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백로는 하얀 겉모습 때문에 예로부터 선비의 상징처럼 묘사되며 길조로 여겨진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고 한다. 산성을 띤 분비물로 인해 나무가 고사하고, 토양이 황폐화 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12 : 19. 숲속을 빠져나오니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7.7km/ 시점 3.4km)가 세워져 있다. 이후부터는 2차선 도로인 동진남로를 따른다.

 잠시 후 내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신흥마을을 지난다. 아니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고 마을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신흥마을 앞으로 표기한다.

 도로변에 위치한 쌍구제는 물 대신에 창포만 한가득이다. 그래도 뭔가 볼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안쪽 가장자리에 전망데크까지 만들어놓았다.

 12 : 24. 쌍구제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진남로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소로(오봉길)을 탄다. ‘오봉마을로 연결된다는 얘기겠지? 하지만 kakaomap은 입구의 버스정류장을 쌍구로 적고 있었다.

 12 : 30. 그렇게 잠시 걷자 50코스의 자랑거리인 고마제(雇馬堤)’가 얼굴을 내민다. 고마 지구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1958)한 큼지막한 저수지로 3 8200의 저수량을 자랑한다. 제방도 높이 8.5m에 길이가 746m나 된단다. 하나 더. ‘고마(雇馬)’라는 지명이 재미있다. 저수지 확장공사를 하는데, 그 생김새가 말발굽을 닮았었다나?

 농업생산 기반시설인 고마제는 그동안 잡풀만 무성했다고 한다. 그러다 2022년 군민과 관광객들에게 힐링 친수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농촌테마공원을 조성했단다. 계절장터·광장·화장실 등 기초생활기반시설과 뽕체험장·생태체험장·쉼터·산책길 등 체험·휴양시설과 농산물판매시설을 갖췄다.

 서해랑길은 이제 고마제 수변산책로를 따른다. 아니 전체는 아니고 서·북쪽 모서리쯤인 이곳에서 시작해 동·북쪽 모서리쯤까지 2/3쯤 걷게 된다. 참고로 산책로는 저수지의 호반(가끔은 가로지르기도 하지만)을 따라 한 바퀴 돌도록 나있다. 길이는 5.7km.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둘레둘레 해찰도 해가며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젊은 연인들이라면 여기다 30분 정도 더 보태야 한다. 아름다운 경관에다 곳곳에 만들어놓은 조형물을 벗 삼아 사진도 찍어두어야 하니 말이다.

 탐방로는 저수지를 한 바퀴 돈다. 그 바깥으로 고마제윗길 고마제로 같은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산책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며 쉬엄쉬엄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산책로 곳곳에 광장이나 쉼터를 조성해놓았는가 하면,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카페도 여럿 들어서 있다.

 위에서 예기했다시피 산책로는 호숫가 경관 좋은 곳에 쉼터나 광장을 들어앉혔다. 그래선지 이정표는 현재위치를 표기한 다음 앞뒤 쉼터까지의 거리를 적고 있었다.

 탐방로를 걸으며 생태관찰은 물론이고, 멀리 보이는 풍경까지 한눈에 담아볼 수 있으니 힐링 산책길이라 할 수 있겠다.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자연과 여유로움을 벗 삼아 시간을 보내니 이 아니 힐링이겠는가.

 12 : 35. 첫 만남은 고마 광장이다. 호숫가에 꽃밭이 딸린 널따란 광장을 조성해놓았다. 주변에 샤스타데이지라도 심었는지 안내판까지 세워두었지만 샤스타데이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쯤 사진 찍기 딱 좋은 하얀 꽃망울을 내밀고 있을 텐데...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천국의 계단 조형물이 샤스타데이지를 대신하겠단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에 가길 원한다. 계단의 끝에 문까지 달아놓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저 계단을 올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나 나올법한 분위기를 느껴보자.

 호숫가 길이 끊기는 곳에는 나무다리를 놓아 산책로를 연결했다. 가끔은 예쁜 나무다리로 저수지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게 고마제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결 돋보이게 만든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사방으로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것도 무척 아름다운 그림으로다.

 고마제는 늪지형 저수지라서 바닥이 완만하고 수심이 고르다고 했다. 거기다 수초까지 우거져 붕어와 잉어 등이 많이 잡힌단다. 세월이라도 낚으려는 듯, 하릴없이 찌만 응시하고 있는 강태공에게 넌지시 물으니 입질만 좋은 게 아니라 씨알까지 굵다는 대답이 금방 돌아온다. 호반 곳곳에 들어앉은 저 많은 낚시꾼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이분은 아예 살림살이를 통째로 옮겨왔나 보다. 얼마 전에 본 신문의 사회면이 떠오른다. 저수지마다 낚시꾼들의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로 몸살을 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분만이라도 아니온 듯 다녀가셨으면 좋겠다.

 12 : 46. 두 번째로 만나는 방죽 쉼터에는 정자와 함께 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식물 안내판’. 샤스타데이지 대신 이번에는 노랑꽃창포와 수크렁, 벌개미취를 담았다. 이 근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수변산책로 바깥으로 고마제윗길 고마제로 같은 도로가 지나간다. 잠시지만 도로를 따라가기도 한다. 하나 더. 산책로 길섶은 꽃밭으로 꾸몄다. 거기서 철쭉과 샤스타데이지, 작약 같은 화초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는다. 맞다. 부안군청은 농촌테마공원을 만들면서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도록 수변공원을 꾸몄다고 했다. 개화시기를 조절해 수목 및 초화류를 식재함으로써 계절에 따라 생동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단다.

 12 : 51. ‘고마 장터에 이른다. 지역 특산품을 파는 계절장터가 열리는 곳이다. 그래선지 단체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자나 벤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도 완벽하게 갖췄다.

 카페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지역 언론은 그 이유를 접근성에서 찾고 있었다. 부안 읍민들이 산책삼아 찾아오기에는 너무 멀다는 것이다. 일부러 승용차를 몰고 와야만 하니 누가 찾겠느냐며 테마공원 조성사업을 비판하고 있었다.

 12 : 53 - 13 : 05. ‘농촌테마공원 조성사업은 고마저수지 전체를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산책로 곳곳에 쉼터나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경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 벤치, 조형물 등을 배치했다. 덕분에 이곳에서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의미심장한 조형물.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가 가는 곳이라면 ()도 꼭 간다? 둘이 마주보며 오래오래 간직해둘만한 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호숫가에 뽕체험장까지 있다기에 누에고치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못줄을 감아놓은 것이란다. ‘못줄은 모를 일정한 간격으로 띄어서 심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마다 붉은 표시를 해 놓은 줄을 말한다. 나무토막에서 풀린 못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농부들은 일제히 열을 맞춰 못줄 앞에 선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못줄에 매달린 붉은 작은 띠 위치에 모를 심었다. 모를 다 심으면 못줄자비가 줄을 다음 위치로 옮긴다.

 이번에는 물위를 걷는다. 누구처럼 공중부양을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지자체에서 호수에 다리를 놓는 멋을 부렸다. 그나저나 다리 건너에도 못줄을 감아놓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둘을 연결시키는 이 다리는 못줄이 된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못줄다리가 됐다.

 산책로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배롱나무가 아닐까 싶다. 일본인지 한국인지도 모르게 만드는 벚꽃나무가 아닌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데, 붉은 꽃이라도 피우면 그야말로 천상의 길이 될 수도 있겠다.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 꽃을 피우면, 산천초목이 모두 초록 세상이라서 배롱나무 꽃이 한층 더 돋보일 테니 말이다.

 대나무쉼터와 은사시나무군락,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근 수양버들을 차례로 지난다. 리아스식 호안이라서 아름다운 경관을 수시로 만나는데,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았다.

 길가 뽕나무에서는 오디가 알알이 영글어간다.

 13 : 35. ‘솟대 다리가 또 다시 호수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직선이던 못줄다리와는 달리 이번에는 물고기처럼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간다. 다리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물고기 조형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솟대다리라는 이름처럼 수많은 솟대들이 다리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안내판은 벽송대사의 구부러진 지팡이를 모티브로 솟대를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 위의 물고기 조형물은 생명력 있는 역사적 숨결과 어머니에 대한 숨결을 자연의 화려한 색상으로 표현했단다. 참고로 벽송 지엄(碧松 智嚴)’ 스님은 이곳 부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을 잇는 큰 스님 가운데 한 분으로, 스승인 벽계 정심(碧溪 正心)’ 스님이 도를 깨우쳐주기 위해 ! 내 법 받아라!’는 고함과 함께 주먹을 불쑥 내민 일화로 유명하다.

 수변산책로의 대미는 나무다리가 장식한다. 호숫가 길이 끊기는 곳에 다리를 놓아 산책로를 연결했다.

 13 : 46. 길었던 수변산책로는 알땅 카페에서 끝을 맺는다. 참숯불가마찜질방을 부대시설로 두고 있는데, 커피를 마시며 새만금을 이야기하기에 딱 좋다는 홍보문구를 내걸었다. 하나 더. 커피에 디저트를 곁들일 수 있는데, 당일 3만원 이상 결재시 롯데시네마의 전국 400개 개봉관에서 이용 가능한 영화티켓 한 장을 준단다.

 이곳에도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었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천국의 계단을 놓고, 옆에서는 자전거가 하늘로 올라간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는 듯이.

 카페는 이벤트가 꼭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분위기를 퐁퐁 풍기고 있었다. 스페인의 구엘공원(Park Güell)’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 담장도 그중 하나다. 당시의 기억을 소환해보자. 가우디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기도 한 곡선의 미가 파도를 치듯 물결을 이루는 벤치는 한마디로 동화적이며 환상적이다. 아랍식의 이국적인 면모와 미래적인 이미지까지 동시에 담고 있단다. ‘까탈루나 스타일이기도 한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인데 하나하나의 파편들이 모여 일정하면서도 창의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13 : 52. ‘동진남로를 따라 궁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장등리(長登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장기·궁월·청운·장등) 중 하나로 마을 지형이 활 궁()’자를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궁상이라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태가 달같이 변했다며 달 월()’자를 써 궁월(弓月)이 되었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왼쪽 샛길로 들어간다. 영신교회를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산길과 들길을 누비던 서해랑길은 이제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순수한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함께 걸어온 구릉지는 그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황토색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도 이미 8일이 지났다. 들일 나온 농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13 : 57. 평야지대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난 삼거리.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종점은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도 이정표(종점 2.5km/ 시점 8.6km)는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14 : 05. 들녘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장등마을은 장등리(長登里)의 중심 부락이다. 김제나 전주 등 외지에서 부안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는 동진나루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그 자리에 지금은 동진대교가 놓였다) 옛날부터 큼지막한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철종(哲宗) 때 이곳에서 부안민란(扶安民亂)’이 일어나기도 했단다.

 마을안내판은 장등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망기산의 줄기가 내려와 장기마을과 청운마을을 거쳐 장등마을에서 끝을 맺었다고 하여 긴 장()’, ‘오를 등()’ 자를 써서 장등(長登)이라 하였다나? 참고로 청운마을에는 조선시대 출장 온 관원들이 묵어가던 동진원(東津院)’, 그리고 부안에서 김제·전주·서울로 이어지는 통로인 장기마을에는 동진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고샅길을 걸어 마을을 횡단한다.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주민들의 안정을 헤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가도록 하자.

 14 : 09. 마을정미소를 마지막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잠시 후 국도 23호선(부안로)를 만난다. 하지만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횡단하지는 못하고 도로 아래로 난 농로를 따라간다.

 300m쯤 더 걸으면 국도 아래로 굴다리가 뚫려있다. 이때 앞서가던 집사람이 느닷없이 만세를 부르는 게 아닌가. 종점이 다와 간다는 안도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굴다리를 지나서도 한참이나 더 농로를 따른다. 이번에도 국도 아래로 길이 나있다. 참 도중에 또 다른 굴다리(신설도로 아래)를 통과하기도 한다.

 들녘은 온통 초지로 덮여있었다. 목초(牧草)를 베어놓은 곳도 보인다. 저장을 위해 건조시키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14 : 21. ‘동진대교로 올라서면서 부안과 이별을 고한다. 예로부터 부안은 맛, 풍경,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하여 변산삼락(邊山三樂)’으로 불리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도 <어염시초(물고기·소금·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봉향하기 좋으니 생거(生居) 부안이로다>라고 했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부안과 헤어져 이제 김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리 갓길을 따라 걷다보면 중간쯤에서 동진강(東津江)’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정읍시 산외면의 상두산(象頭山, 575m)에서 발원해 김제평야를 지나 황해로 흘러드는 44.7km 길이의 강이다. 상류 지역은 도원천이라고 불리며, 칠보면(정읍시)에서 칠보천을 합친 이후 하폭이 넓어지면서 동진강이 된다.

 다리 건너 휴게소는 지평선 새마루란 이름표를 달았다. 김제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으로는 이만한 게 없겠다. 2012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옛 동진강휴게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2층 건물에 식당과 카페, 편의점, ·특산물판매장이 입주한단다. 부대시설로 쉼터와 주차장, 공원, 산책로 등은 이미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백제 비류왕 27(330)에 축조된 벽골제(碧骨堤, 사적 제111)’는 김제의 자랑거리로 우리나라 저수지의 효시다. 고대 수리시설 중 규모도 가장 크다. 지자체에서는 그걸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로변에 벽골제의 수문 조형물과 함께 설명을 담은 빗돌을 세워놓았다.

 14 : 30. 국도를 사이에 두고 지평선 새마루 휴게소와 마주보고 있는 동진강 석천휴게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길을 나선지 3시간 20분 만인데, 앱이 11.94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나 더. 석천휴게소는 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는지 뼈대만 앙상했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건너편 동진휴게소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집사람이 웃는다. 한 점의 티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여행, 아니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다 보니 잡다한 일상의 걱정들까지도 훌훌 떨쳐버렸나 보다. 언젠가 웃음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발표한 어릴 때는 하루에 평균 400~500번을 웃다가 장년이 되면서 하루 15~20번으로 줄어든다.’는 웃음에 관한 연구결과이다. 그런데 웃음을 잃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험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들 가운데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어느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인간의 걱정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걱정들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것이 40%이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 30%,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닌 작은 것이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것이 4%’라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과 웃음, 그리고 마음의 평화까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지금 96%의 필요 없는 걱정들을 내려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비록 잠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왕에 내려놓았으니 까짓 거 다시 집어들 필요가 있을까? 그냥 오래오래 저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서해랑길 49코스(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청)

 

여 행 일 : ‘24. 4. 1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하서면 및 부안읍 일원

여행코스 :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노계마을등용마을석하마을구암리 지석묘군분장마을장서마을대초마을매창공원서림공원부안군청(거리/시간 : 19.2km, 실제는 13.86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9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아홉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새만금을 멀찍이 뒤로 밀어내며 동쪽 내륙으로 들어간다.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부안의 명기를 기리는 매창공원과 서림공원, 구암리 지석묘군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들머리는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18km쯤 내려오다 백련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단지 맨 안쪽 월포마을 경로당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랑길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평야지대를 걷는다. 평지를 걷지만 19.2km나 되는 길이가 부담스러웠던지 난이도는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다.

 실제 출발은 ‘705번 지방도(변산로)’ 석하마을 버스정류장(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성 문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숨결을 조금 더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이정표(종점 13km/ 시점 6.2km)는 우리가 1/3이나 단축해서 걷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너무 많이 줄어드는 게 아쉽지만, 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11 : 41. 석하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법정 동리인 석상리(石上里) 8개 행정부락(청일·반암·구암·용와·석상·석하·마전·운암) 중 하나로, ‘석하란 마을 뒷산에 있는 애기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바위 인근에 있는 마을(‘돌마리 또는 돌마을’) 아래뜸이라고 해서 석하(石下)로 불린다는 것이다.

 11 : 48. 석하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는 또 다시 도로로 올라선다. 벚꽃으로 단장한 도로는 변산로에서 고인돌로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부안의 명소 중 하나인 구암리 지석묘군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들녘 너머에서 악어산(48.7m)’이 고개를 내민다. 뒤는 석불산(289.7m)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도로변에서 만난 만첩홍매화’. 매화인데 붉은 겹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후기의 원예가 유박(柳璞 : 1730-1737)은 화암수록(花庵隨錄)에서 매화는 비스듬히 뻗은 여윈 가지에서 성글게 나온 녹악(綠萼) 단엽백매(單葉白梅)를 최고로 치며 천엽(千葉)은 속된 티가 나므로 운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박처럼 고매한 품격을 지니지 못한 내 눈에는 만첩홍매가 모든 매화 중에서 가장 예쁘게만 느껴진다.

 11 : 50. 잠시 후, 도로를 벗어나 석상(石上) 마을로 들어간다.(초입에 마을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석상리(石上里)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돌마리 웃뜸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다.

 마을 입구에는 지석묘만큼이나 오래 묵어 보이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노거수(老巨樹)이니 다 같이 아껴주자는 안내문까지 달았다. 그런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석상마을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구암마을로 간다. 석상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구암(龜巖)’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는 고인돌에서 유래했다. 고인돌의 생김새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12 : 00  12 : 05. ‘구암리 지석묘군(사적 제103)’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고인돌 주변의 민가를 없애고 잔디를 깔아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했다. 너른 주차장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지석묘(支石墓)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탁자처럼 생긴 북방식과 바둑판 모양인 남방식이 있는데,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받힘돌이 있는 남방식이라고 한다. 원래 13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10기만 남아 옛 얘기를 전해준다.

 고인돌은 10기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덮개돌(上石)을 여러 개의 고임돌(支石)이 받혀주는 모양새이다. 바둑판식 지석묘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덮개돌 아래에 몇 개의 주상(柱狀) 또는 판상(板狀) 고임돌을 외연을 따라 세운 것으로, 그 자체가 무덤방(石室)의 역할을 한단다.

 요것은 영락없는 탁자다. 그래서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곳에 고인돌 찻집을 차리고 싶다고 적었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가을이면 고인돌 위에 고추를 널어놓았었다니 말이다.

 12 : 06. 도로(고인돌로)로 빠져나와 구암교 영은천(靈隱川)’을 건넌다. 내변산 입구 우슬재와 하서면 옥녀봉 분지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청호저수지 남쪽, 하서면 언독리와 행안면 삼간리 경계지점에서 주상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하나 더. 다리건너 도화사거리에서는 직진이다. 하지만 지방도는 705번에서 736번으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상서초등학교는 잘 가꾸어진 공원을 연상시킨다. 교정에 힐링 숲길을 조성하고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함께 기린, 얼룩말 등의 조형물을 세워 자연학습 공간으로 꾸몄다.

 구암교에서 상서면으로 들어선 고인돌로는 면소재지를 향해 달려간다.

 왼쪽으로는 하서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게 한 근원일 것이다. 저런 평야지대가 있었기에 지석묘를 축조할 만한 세력이 웅거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오른쪽에는 도화(봉암)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통정리(通井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통정·성암·신성·도화·풍랑·수련) 중 하나로 부안의 너른 들녘이 품은 마을답지 않게 명덕산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12 : 17. 버스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고인돌로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봉야로를 따라 분장(分章)’ 마을로 간다.(삼거리의 도로표지판은 장동 방향으로 적고 있었다) 법정 동리인 장동리(長東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장동·장서·분장) 중 하나이다.

 도로(봉야로)를 가운데 두고 통정리(왼쪽)와 장동리(오른쪽)가 나뉜다. 아래 사진은 통정리의 자연부락인 성암마을이다. 반대편에는 장동리 소속의 분장마을이 있다.

 12 : 26. (분장마을)버스정류장과 양곡보관창고를 차례로 지나면 수로(水路). 서해랑길은 이 물길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수로의 둑을 따라간다.

 12 : 28. 잠시 후, 평야지대를 만나면서 수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들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이 구릉지인데 반해 오른편으로는 푸름으로 물든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진다.

 12 : 32.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작은 마을 하나가 반긴다. 하지만 마을은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사철을 맞아 들일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덕분에 난 마을 이름도 알아보지 못한 채 장서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구릉지와 농경지를 양쪽에 낀 들길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생과 사는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 민들레는 그 차이마저도 없애버렸다. 꽃과 홀씨가 한데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봄바람 불고 들녘에 아지랑이 아롱거리면, 길가에 무심하게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야생화 한 송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을 흔든다. 그래서일까? 문득 박미경이 부른 발라드곡 민들레 홀씨 되어의 가사가 떠오른다. <-전략- 우리는 들길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외로운 맘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지 후략->

 12 : 42. 1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장서마을이 반긴다. 장동리(長東里)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장동리의 옛 이름은 장다리(長橋里)’였다. 마을 옆 두포천(斗浦川)을 오가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민들이 두포천을 건너기 위해 섶다리를 놓았는데, 큰비가 오거나 해일이 닥치면 이 섶다리가 부서져 숙명처럼 다시 만들어야 했고, 지명도 긴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다리라 불렀단다. 1935년 두포천 하구에 갑문이 설치되고 농경지가 안정되면서 마을이 확장되었고, 이때 서쪽으로 형성된 새로운 마을이 장서(長西)’로 불리게 된다. 장교가 장동(長東)’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2 : 44. 장서마을 앞에서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농경지 사이로 난 들길을 따른다.

 좌우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녘은 온통 푸름에 젖어있다. 인근 목장에서 기르는 초지일 것이다.

 들녘 곳곳에는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듯 하나같이 최신식 시설을 갖추었다. 덕분에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데도 분뇨 냄새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료용 초지도 많지만 푸름의 대부분은 청보리 몫이다. 시선을 따라 초록빛으로 물든 청보리 물결이 가득 일렁인다. 5월에 수확하는 청보리는 4월에 한창 물이 올라 청록의 봄을 알려준다.(사진은 보리를 다치지 않으려고 고랑에서 찍었다)

 들녘이 넓어서인지 물을 대는 수로도 하천만큼이나 넓다. 물막이도 바닷가 간척지의 배수관문을 연상시킨다.

 12 : 57. ‘주상천(舟上川)’을 건넌다. 두포천(斗浦川) 또는 목포천(木浦川)으로도 불리는데,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벌치 계곡에서 시작해 주산면·행안면·하서면을 지나 계화면(의복리) 돈지갑문에서 서해안 새만금으로 유입되는 길이 18.4km의 지방하천이다.

 대초양수장. 농경지에 물을 대려면 양수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상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주상천을 건너면서 행안면에 바톤을 넘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행안면의 들녘은 무척 넓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행안면에서의 첫 만남은 야룡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대초리(大草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대초·송호·송서·야룡) 중 하나로, 늦깎이 등단 시인으로 시선을 모은 왕정순(79) 할머니가 사는 고을이기도 하다. 2022 문해, 지금 나는 봄이다라는 시로 전라북도 도지사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시 부문 전북문단 신인작품상을 받아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13 : 18.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13 : 16). 이어서 만나게 되는 도로(순환북로)는 그냥 횡단해버린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농로를 탄다.

 13 : 2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도로(봉야로)에서는 오른쪽으로 간다. 도로를 따라 부안 방향으로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23. ‘원일볼트라는 제조공장 앞에서 도로(봉야로)를 벗어나 왼쪽으로 들어간다. 대초마을로 들어가는 길인데, 초입의 주영목장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13 : 26 - 13 : 41. 대초마을 동구 밖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은 경기장에 운동기구, 거기다 정자까지 갖추었으니 도시 부럽지 않은 시설이다. 덕분에 우린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13 : 43.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대초리(大草里)의 중심이랄 수 있는 대초마을에 이른다. 예로부터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마을이다. 조촌(棗村) 혹은 대추멀이라고 불리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마을 크기와 발음 표기상의 편의를 감안 대추 대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대초마을 경로당.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엄청나게 굵은 팽나무가 건물을 감싸주고 있다. 서해랑길은 이 경로당 앞 골목으로 빠져나간다.

 들녘은 부지런한 농부들로 그득했다. 논에 물을 대고, 밭은 갈아둔다. 돌아오는 농번기를 대비하는 평화로운 농촌 충경이라 하겠다.

 13 : 50. 2차선 도로(행안중앙로)를 횡단하면 신월경로당에 이어 신월마을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신기리(新基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신월·청교·안기·계시) 중 하나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로 불리다가 신월(또는 신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3 : 56. 또 다른 2차선 도로(신기신월로)를 횡단하면 길은 재내마을로 이어진다. 법정 동리인 진동리(眞洞里) 6개 행정부락(남산·지석·행산·신목·순제·재내) 중 하나다. 이 마을은 시멘트 건물 위에 별도의 지붕을 올린 정자가 눈길을 끌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지붕이 위태위태한데도,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고나 할까?

 서해랑길은 재내마을을 왼쪽으로 에두른 다음 작은 고개를 넘는다.

 14 : 03. 고개를 넘어 월륜길로 내려선다. 그곳에 1941년에 개교했다는 행안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도 부침의 세월을 겪었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어 한때 폐교 위기에 까지 몰렸으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 이를 타개했다. 부안읍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유치했다나?

 14 : 10  14 : 32. 행안초교사거리(로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매창로를 따른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명답게 도로도 4차선으로 바뀌어 있다. ! 로터리 부근 진동공원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점심을 먼저 먹은 다음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라는 모양이다.

 14 : 45. 매창로를 따라 걷길 13. ‘매창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3.2km)’에 이른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여류문장가로 유명한 부안의 명기 이매창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매창의 묘와 시비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매창(李梅窓 : 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이름은 계생 또는 향금이라 했으며, 자는 천향이고 호는 매창이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한시에 뛰어났으며 가무도 잘했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또한 시조에도 능하여 그의 작품이라 전하는 시가 수십 편에 이르는데 그중 이화우는 이별을 노래한 으뜸 시로 꼽힌다.

 1592, 20살 무렵의 매창은 촌은 유희경(劉希慶 : 1545-1636)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이귀와 허균과도 깊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갓 스무 살이 된 매창은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 같은 나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홀로 남겨져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린다. 봄비처럼 흐느끼는 이화우(梨花雨)’  배나무 꽃비는 그런 매창의 처지를 읊지 않았을까 싶다.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잊혀져가는 사랑을 애태우는...<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그밖에도 억고인(憶故人), 증취객(贈醉客), 병중(病中) 등 매창의 여러 시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연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규원(閨怨)’도 그중 하나다. 사랑하는 그 마음 바다처럼 깊은데 소식은 끊어지고 긴긴 밤에 애간장만 탄다나?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애끓는  말로는 할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남아 세였고나/ 생각나는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유희경과 매창은 2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의병을 일으킨 유희경과 이별하게 되었고 매창이 37세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유희경은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천민의 너울에서 빠져나온 행운아다. 그러나 유희경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까지 끊을 수 있겠는가. 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우(梧桐雨)’란 시로 남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허균(許筠 : 1569-1618)의 시도 눈에 띈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 7월이었다. 허균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가던 중,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때 매창을 만나게 된다. 이후 10년간의 교류가 이어진다. 허균의 문집에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후세 문인들도 그녀를 기리고 있었다. ‘매창 뜸이란 시를 지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 1891-1968)도 그중 하나이다. <-전략-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 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삼을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겼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았다>

 정비석(鄭飛石 : 1911-1991) 매창묘를 찾아서라는 글을 썼다. <-전략-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움을 품고 죽어간 지 3 60여 년 후인 이 날에 60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후략->

 유희경과의 슬픈 사랑을 남긴 채, 매창은 37세를 일기로 동고동락하던 거문고와 함께 잠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 뜸이라고 부른다. 묘는 소박한 묘비와 상석이 석물의 전부였다. 그러나 알 만한 이들은 오석비신에 팔작지붕을 얹은 근사한 묘비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그의 인품과 시를 사랑하는 선비와 풍류가에 의해 세워지고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 더. 정비석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부안군에서 다른 묘들을 이장하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 매창의 묘만 남겨두었단다.

 공원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매창의 묘와 시비 외에도 매창테마관, 습지공원, 어린이놀이터, 농구장, 운동기구 등이 들어서 있었다. 부안의 출향 인사들이 세운 부사(扶士)의 탑도 눈에 띈다.

 15 : 06. ‘매창테마관 2층의 한옥으로 지었다. 1층은 전시관이고 2층은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기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매일 10시에 개관해 5시에 문을 닫는다. 하나 더. 사람들은 매창을 사랑의 화신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트() 조형물을 배경삼아 사진부터 찍어두고 테마관으로 들어가 보자. 화사하게 핀 튜립이 당신의 사랑을 한껏 축복해줄 것이다.

 매창테마관의 현판, ‘매창화우상억제(梅窓花雨相憶齋)’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이란 뜻으로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가 짓고 썼다고 한다.

 전시관은 4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풍경에 그녀의 대표적 시문을 감상할 수 있게 했고, 이어 매창의 생애, 매창이 남긴 작품 감상과 매창집이 남긴 의미 등을 알아보는 순서로 꾸몄다. 맨 마지막엔 디지털 포토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만일 58편의 작품이 담긴 매창집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매창을 알 수도 없었겠지? 매창은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을 따름이다. 부안현의 아전들이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던 것들을 모아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후세에 전해진다. 3부를 간행했는데, 2부는 서울 간송미술관에 1부는 미국 모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단다.

 내가 좋아하는 매창의 시 춘사(春思, 봄날의 그리움)’가 적혀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삼월이라 동녘바람이 불어/ 곳곳마다 꽃이 져 흩날리네/ 상사곡 뜯으며 임 그리워 노래해도/ 강남으로 가신 임은 돌아오시질 않아라>로 읊는다. 나 같으면 단숨에 부안으로 달려왔을 텐데...

 테마관 뜨락에서 만난 글자 조형물. 매창을 낳은 고장답게 바람 부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등 부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함께 들어 행복한 소리이자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 표현했다.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직도 새 맛을 퐁퐁 풍기는 각종 시설물들은 물론이고, 산책로에는 나무와 꽃들을 식재하고 곳곳에 조형물과 쉼터를 설치했다. 밤이 되면 조명이 켜져 운치 있는 야간 산책도 가능하단다. 그런 여건을 살려 매년 5월 이곳에서 부안 마실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15 : 18. 매창공원을 빠져나와 도로(오리정로)를 건너면 부안예술회관이다. 문화·예술 공연시설로 1층은 300명 수용의 다목적 강당과 전시실, 2층은 499석의 공연장과 회의실·연습실·분장실 그리고 3층은 조명실과 영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15 : 23. 조금 더 진행해, ‘번영로를 가로지르면 이번에는 부안중학교가 반긴다. 이정표가 종점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5 : 29. 부안중학교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상소산(上蘇山, 114.9m)’이 고개를 내민다. 조선시대 부안현의 진산으로 한국지명총람에는 삼국통일 당시 당나라 소정방이 진을 쳤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상소산(소정방이 오른 산)이란 지명과 어울리는 얘기이다. 하나 더. 저 산에는 부안현의 사묘 중 고을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공원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저 가운데에 서면 천사로 변할 테니 최고의 포토죤이라 하겠다.

 15 : 30. 서해랑길은 서림공원(西林公園)으로 들어간다. 1848년 부안 현감으로 부임해 온 조연명에 의해 숲이 조성되었는데, 관아 주변의 성황산이 황폐한 것을 보고 동네 유지 33인으로 삼십삼수계(三十三修稧)’를 조직하여 나무를 심고 서림정이라는 정자도 건립했다. 이후 이필의 현감이 부임해 왔을 때 숲이 다시 황폐해져 있어 앞서의 를 다시 부활시켜 숲을 가꾸면서 오늘의 서림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서림(西林)이란 부안 관아의 서쪽에 있는 숲이라는 뜻이다.

 서림공원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가 나무를 심고 가꾼 데서 시작됐다. 반대편 산자락에 있는 임정유애비(林亭遺愛碑)에는 두 현감의 서림 숲 조성과 서림정을 건립하여 가꾼 것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관의 주도 하에 가꾸어진 서림공원은 2016년 산림청의 국가산림문화자산에 지정된바 있다.

 15 : 34. 조금 더 걷자 gpx트랙이 이제 그만 산책로(임도)를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편백나무 숲속으로 인도한다. 수십 년은 족히 묵은 듯 어른의 몸통만큼이나 굵은 편백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멋진 구간이다. 울창한 숲속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벤치까지 놓아 힐링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15 : 39. 정상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었다. 종합안내도에 아래 전망대로 표기된 곳인데, 조금이라도 더 낳은 조망을 보여주려는 듯 이층으로 올렸다.(내 사진이 역광이라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전망대에 오르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부안읍내는 물론이고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산하의 속살까지 샅샅이 보여준다.

 계화면 방향은 아예 막힘이 없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만 했다는 새만금의 드넓은 들녘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서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5 : 44. 반대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서면 다시 산책로를 만난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포커스만 잘 맞추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오른쪽 산자락에는 부안 향교가 들어앉았다. 1414(태종 14) 창건된 부안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선조 33)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확장을 해 오늘에 이른다.

 서림공원에도 매창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백운사에 걸어 올라가니/ 절은 흰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구름을 쓸지 말아요/ 마음 또한 흰구름과 함께 한가로운 것을...> 그런데 저 백운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절일까?

 시비 근처. 매창의 시처럼 예쁜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묵객이라면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란 이미지도 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나?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새색시의 붉은 볼처럼 고운 꽃들만 눈에 차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이 고장 출신인 백양촌 신근의 시비도 보인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을 예찬하는 시이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 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 옵니다 후략->

 15 : 53.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왼쪽은 성황사와 윗전망대로 연결된다)으로 간다. 이정표는 트레킹이 종료되는 부안군청까지 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잠시 후 만난 혜원사(慧圓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924년 해인사 삼선암 승려 지승이 세웠다. 서외리(부안읍)에 인법당을 세우고 청일암이라 했다. 1970년 현 위치로 옮겨왔고 1999년에는 혜원사로 이름까지 바꿨다. 금당인 극락전을 위시해 인법당·산신각·무구원·마하문화원 등의 전각을 거느리고 있다.

 15 : 58. 서림정(西林亭)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이 33인으로 시계(詩契)를 결성하여 건립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건물은 없어졌고 그 터에 근래에 새로 지었다. 노휴재(老休齋, 조선 후기의 경로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상소산도(上蘇山圖)’에 조선시대 당시의 서림정과 상소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는 옛 부안 현감들의 송덕비 등 부안지역과 관련한 각종 비석들이 서있다. 현감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 임정유애(林亭遺愛) ()도 찾아볼 수 있다

 석암(石菴) 정형태(鄭㺾兌) 기적비 춘헌(春軒) 이영일(李永日) 송덕비도 눈에 띈다. 하지만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암각서(巖刻書)는 찾지를 못했다. 19세기 중엽-20세기 중엽 부안 지역의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어, 지은 시나 글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사랑나무란다. 맞다. 100년 넘은 서어나무 두 그루가 한 몸처럼 붙어 있으니 연리목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 한 몸이 되었다고 해서 연리지(連理枝)’라고도 부른다. 특히 한 쪽씩 날개를 가진 비익조(比翼鳥)’와 더불어 남녀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사랑과 결혼, 화합 등의 상징이자 좋은 조짐으로 여긴다.

 16 : 12. 활 쏘는 사람들이 무예수련을 했다는 심고정(審固亭)’ 터를 지나면, 잠시 후 부안군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3.86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매창의 숨결을 느껴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군청과 의회 건물을 잇는 공중통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부안군청에서 만난 평화의 소녀상은 낯선 모습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느 소녀상들과는 달리 서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단발하기 전의 긴 머리로, 침탈받기 전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소녀로 표현했다. 발은 맨발이다. 우리나라가 주권을 잃었다는 것과,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단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내 맘에 드는 나로 바뀐다.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지금 하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난 성공한 사람이 분명하다. 나를 믿고 따라주는 집사람이 늘 곁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서해랑길 48코스(변산해수욕장-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여 행 일 : ‘24. 3. 2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및 하서면 일원

여행코스 : 변산해수욕장(사랑의 낙조공원)대항리 패총새만금홍보관소광교차로비득마을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거리/시간 : 10.2km, 실제는 11.30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8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북쪽해안과 새만금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옛날은 해안선이었다)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새만금간척박물관과 새만금홍보관,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하나 더, 초반(새만금홍보관까지)은 변산마실길의 1코스(조개미 패총길)와 겹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들머리는 사랑의 낙조공원(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25km쯤 내려오다 방포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변산해수욕장이다. ‘오토캠핑장 바로 앞에서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사랑의 낙조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부안48코스) 안내도는 팔각정 옆에 세워놓았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북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아니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인해 절반은 들녘이 되어버렸다. 길이는 10.2km, 짧은 거리인데다 평탄하기까지 해서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내가 보기에는 1개만으로도 충분했지만...

 11 : 00. 해안선에 잇대어 내놓은 2차선 도로(변산로)를 따라 동·북진(·北進)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탁 트인 서해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지만, 해무가 짙은 탓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1 : 07. 잠시 후, 왼쪽으로 나있는 오솔길로 내려간다.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3층 건물을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된다.

 이정표(종점까지 9.2km) 48코스의 시점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내 앱은 0.4km를 찍는다. 48코스 안내도를 사랑의 낙조공원에 설치해놓은 탓에 0.6km를 줄여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지난 47코스 때 그만큼 더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11: 10.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앞에는 대항리 패총(大項里 貝塚)’이 있었다.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조개류를 잡아먹고 버린 껍질이 쌓여 생긴 조개무덤(조개무지)을 말한다. 조개무지 앞에는 안내판을 세워 발굴과정 및 출토된 유물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한술 더 떠본다. 외국처럼 발굴 당시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위에 강화유리를 덮어놓았더라면 조금 더 생생하게 패총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항리 패총은 1967년에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다. 1981년에는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개무지의 크기는 사방이 10m 내외이며, 두께는 60cm라고 한다. 조개무지 속에서 옛사람들의 생활쓰레기인 뗀석기(打製石器) 5점과 빗살무늬토기 조각 2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선사시대에 이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단다.

 패총 앞은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해양연구센터에서 밭두렁을 타고 온 서해랑길은 야트막한 구릉(丘陵)을 넘는다. 황토 구릉지로 유명산 해제반도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진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마늘·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고 했다.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저 밭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11 : 15. 구릉지를 넘어 해무(海霧)가 짙은 바닷가로 내려선다. 해식애의 기암절벽이 눈길을 끈다는 해변이다. 하지만 오늘은 짙은 물안개가 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 물안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주니까 말이다.

 서해의 맑고 깨끗한 바닷물과 자욱한 물안개가 어우러져 더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해무는 바다에서 끼는 안개다. 따뜻한 해면의 공기가 찬 해면으로 이동할 때 해면 부근의 공기가 냉각되어 생기는 안개다. 하긴 그끄제가 봄을 나눈다는 춘분(春分)’이 아니었겠는가.

 도대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 사람들은 대개 망망대해를 보고 그런 표현을 쓴다. 하지만 오늘은 해무에 잠겨있는 저 바다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고운 해변을 안마당처럼 차지하고 있는 저 건물은 모나코 모텔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시끄럽던 시절, 홍해(이집트)의 휴양지인 후루가다에서 머물던 나는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지로 고민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당시 머물던 ‘Desert rose’라는 리조트의 시설들, 그중에서도 투숙객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해변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는데, 한국에도 저런 숙박업소가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11 : 20. 서해랑길은 백사장 끝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초입의 이정표가 변산마실길 1코스(조개미 패총길)의 종점인 새만금 간척박물관까지 2.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병사들이 해안선 감시를 하며 거닐던 교통호를 따라 간다. 바닷가에서는 철조망이 따라온다. 1960-70년대 심심찮게 넘어오던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기 위해 쳐놓은 시설물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옛 경비초소를 만난다. 1970년대 중반, 지역 예비사단에서 만기제대 절차를 밟다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소식을 접했었다. 그렇듯 당시는 북한 특수공작원들에 대한 방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던 시절이었다. 쓰러져가는 저 시설물에서 흉흉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시 바닷가. 하지만 이번에는 바닷가로 내려서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간다.

 그렇다고 바닷가 풍경까지 놓치는 것은 아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멋진 풍광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이정목이 변산마실길 1코스인 조개미 패총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만금간척박물관에서 변산해수욕장을 거쳐 송포항에 이르는 길이 5km의 둘레길이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야산길과 바닷길을 선택하여 걷을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1 : 27. ‘대항교차로(30번 국도에서 변산로로 내려오는 지점)’ 앞에서 변산로로 올라온 다음 잠시 도로를 따라간다.

 도로 아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닷가 벼랑 위로 축대를 쌓고, 바다를 향해 난간을 덧대고 있다. 잔도(棧道)처럼 아슬아슬한 길을 새로 내려는 모양이다.

 변산로는 보도(步道)가 따로 없다. 때문에 여행자들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에서 내려와 공사가 한창인 울퉁불퉁한 탐방로를 따라 걷는다.

 탐방로는 국도 30호선(70호선 병행)’의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번 구간(48코스)은 유난히도 자주 국도의 위아래를 횡단하면서 이어진다.

 탐방로는 교각 아래를 통과한 다음에도 한참을 더 들어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간 합구마을(대항리)’ 앞바다를 한 바퀴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산촌과 어촌이 절며하게 어우러진 합구마을은 본래 백합 등 조개가 풍성한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합구(蛤九)’라는 지명도 조개가 아홉 개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요즘은 어업의 비중이 많이 낮아졌다. 그러니 한적하고 운치 있는 바다를 낀 농촌마을 쯤으로 치부해두자.

 뒤돌아본 국도 30호선. ‘조개미교의 반원형 교각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합구마을의 동구 밖까지 밀려온 바닷물은 썰물 때가 되면 저 다리 아래를 지나 바다로 되돌아간다. 참고로 조개미는 합구마을의 옛 이름이다.

 11 : 37. 탐방로는 잠시 변산로로 올라선다. 그리고 100m쯤 걷다가 변산해수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정표(종점까지 7.2Km)가 새만금홍보관까지 1.3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지점이다. 참고로 해수찜이란 해수의 염도차를 이용해 몸속 노폐물을 배출하고, 해수에 녹아있는 각종 이로운 미네랄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해 찜질을 하는 곳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다시 바닷가. 저 갯벌은 죽합이 지천이라고 했다. 죽합은 모양이 대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맛조개라고도 불린다. 호주머니에 소금 한 주먹 갖고 가서 타원형의 구멍에 살짝 뿌리면 백합이 기어 나온단다. 삽이나 호미로 잽싸게 파서도 잡을 수 있단다. 하나 더. ‘개불이 먹고 싶으면 동그란 구멍을 파보라고 했다.

 이후부터는 해안가 벼랑 위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서해바다가 심심찮게 내다보이는 기본 좋은 구간이다.

 11 : 42. 전망 좋은 곳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이 근처에서 영화 변산이 촬영되기도 했단다. ‘고향이라고 해준 것도 없으면서 발목은 드럽게 잡네!’ 짝사랑 선미(김고은)의 꾐수에 낚여 고향으로 내려온 학수(박정민). 이준익 감독의 변산은 빡세지만 스웩 넘치고, 부끄럽지만 빛나는 청춘을 그린 영화이다.

 난간에 서면 시야가 뻥 뚫린다. 비안도와 두리도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으면 그 너머에 있는 고군산군도까지 조망된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짙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계속해서 해안가 오솔길을 탄다. 옛날 병사들이 경계를 하면서 오가던 교통호가 세월의 무게를 못 견디고 걷기 나그네들의 탐방로로 변했다.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는 이 구간도 코발트빛 서해바다를 마음껏 즐기며 걸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그런 호사를 앗아가 버렸다. 오솔길 아래의 기암괴석 해안을 눈에 담을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1 : 49. 그러다 올라선 공터는 운동장보다도 더 컸다. 그런데 중장비가 오가는 걸 보면 뭔가 새로운 변신을 위해 공사 중인가 보다. 맞다. kakaomap은 이곳을 새만금챌린지 테마파크로 적고 2026년에 준공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변산마실길 1코스의 명물인 꽃동산을 갈아엎고 있는 거나 아닐까? 봄이면 샤스타데이지의 순백 꽃물결이 일렁인다는 그 꽃동산말이다. 해질 무렵 서해낙조와 함께 즐기면 무릉도원에 온 듯한 황홀경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공터의 막바지. 진행방향 저만큼에 새만금간척박물관이 놓여있다.

 옛말처럼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가 보다. 공터를 빠져나오니 바닷가에 꽃동산 안내판이 나뒹굴고 있다. 주변에는 변산마실길과 변산애향숲 빗돌도 널브러져 있었다.

 11 : 55. ‘간척박물관을 코앞에 둔 지점. 바닷가로 내려가 역방향으로 걸어간다. 변산반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병풍바위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아니 물안개로 뒤덮인 몽환적인 바닷가를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보라, 물안개가 피어오른 저 풍경, 몽유도원도의 실경이 아니겠는가.

 두어 구비 모퉁이를 돌자 신비한 색깔의 바위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서로 마주선 두 바위가 찾아온 이들을 호위라도 하려는 듯 좌우로 도열해 있다. 그런데 검은색의 흔한 갯바위인 바다 쪽 바위와는 달리, 육지 쪽에 있는 바위는 색깔도 기이하고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높이 9-10여 미터에 길이가 60m쯤 될까? 바다를 향해 쏟아지는 폭포처럼 생겼는데, 그게 병풍으로 보인 사람들도 있었나 보다. 언제부턴가 병풍바위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온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물안개는 신비로움을 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해준다.

 백사장에는 바람이 만들어놓은 물결무늬가 선명했다. 시간이 난다면 바다로 더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듯. 갯골 웅덩이에서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한 작은 생명들이 유영하는 광경이라도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12 : 03. 새만금시설지구 초입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있다. 묵정마을의 어민들이 사용하는 시설인 듯한데, 꼬맹이 어선 몇 척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평화의 사절단처럼 물때를 기다리며 숨을 고른다.

 12 : 05 - 12 : 20. 시설지구에서의 첫 만남은 새만금 간척박물관이다. 새만금과 우리나라의 간척뿐만 아니라 세계의 간척역사, 기술, 미래가치까지 재조명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023 8, 3층 규모로 문을 열었는데, 3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실을 중심으로 교육실, 체험실, 영상관, 수장고, 야외광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국내외 간척사를 배울 수 있는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여러 점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만금을 바라보다’, ‘새만금 평화의 휴식’, ‘새만금 바람의 소리를 듣다’, ‘새만금 교육의 자리 등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각각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래 사진의 조형물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포토 죤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도 여럿이다.

 상설전시실은 바다·갯벌·사람, 세계 및 한국의 간척, 새만금의 혁신 등을 주제로 다양한 콘텐츠가 구성돼 있으며, 새만금의 발전과정을 담은 고지도와 각종 민속품 등 6000여 점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관람은 간척의 과거·현재·미래를 차례로 보여주는 동선을 따라가면 된다.

 바닷일은 전통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개양할미 당집(그림) 옆에는 용왕제 때 쓰는 다양한 깃발과 도구들도 전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바닷가에서는 띠배를 만들어 바닷물이 들어차면 먼 바다로 띄워 보내며 마을주민들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용왕제를 열곤 했다.

 소금도 바다와는 불가분의 관계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재원 중 일부를 염전에서 마련했단다. 그래선지 옆에다 옛날 전통방식으로 천일염을 채취하는 과정과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았다.

 물안개와 조개잡이 삼매경인 아낙내들이 어우러지는 조합이 한 폭의 수묵과로 그려진다.

 12 : 22.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새만금방조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군산시 비응도동에서, 고군산군도의 신시도를 거쳐, 부안군(변산면) 대항리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이다. 길이는 33.9km, 2위인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보다 1.4km 더 길다고 한다. 1991 11월 착공돼 2010 4 29 19년 만에 준공되었다.

 12 : 25  12 : 37.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만금홍보관으로 간다. 한국농어촌공사(새만금사업단)에서 운영하는 홍보시설로 새만금 건설과 관련된 역사기록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새만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고 보면 되겠다.

 3층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 새만금의 광활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군산을 향해 길게 뻗어나가는 저 방조제는 바닥(평균)  290m(최대 535m)에 평균 높이(평균) 36m(최대 54m)라고 한다. 길이는 위에서 얘기한 대로 33.9km이다. 끝이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선지 시야가 닿지 않는 거리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여의도의 140배나 되는 바다를 땅으로 만드는 거대한 사업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19년간의 새만금 방조제 축조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자연의 힘을 이기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세계적인 간척 기술로 마침내 새만금 간척 사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3층의 홍보관은 기획전시실·상설전시실·홍보영상관·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은 전망대가 있는 3층에서 무장애(無障礙)의 동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도록 했다.

 사업은 방조제와 간척지 조성이 마무리될 때까지 약 2 9,0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으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환경오염 문제로 간척사업에 대한 찬반 논란이 빚어지면서 물막이 공사를 남겨둔 시점에서 공사가 2차례 중단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한국 간척기술의 발전사, 국토이용 상의 문제, 간척사업 추진현황, 수질개선 대책, 주요 철새도래지 등에 관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새만금은 만경평야의 자와 김제평야의 자에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의 자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다. 만경·김제 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만금지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미니어처도 전시하고 있었다.

 12 : 37. 관람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정문에서 왼쪽으로 200m쯤 걸으면 홍보관교차로이다.

 새만금 간척지(정확히는 새만금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왼쪽 옆구리에 새만금간척지의 들녘을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왼쪽으로는 새만금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맞다. 새만금간척사업은 측량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저 멀리 지평선은 그야말로 수평이다. 문득 영화에서 본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들녘이 떠오른다. 저런 광활함이면 말 타고 한없이 달려 말뚝 박고 내 땅이요를 외쳐볼 만하다. 참고로 새만금간척사업으로 군산시·김제시·부안군 공유수면의 401(토지 283, 담수호 118)가 육지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여의도 면적의 140)에 이르는 면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도 10 140에서 10 541 0.4% 늘었단다.

 12 : 50 - 13 : 05, ‘묵정교차로에서 30번 국도의 새만금교 아래를 통과하면 직소천(直沼川)’을 만난다. 변산면 중계리에서 발원하여 진서면 석포리, 변산면 중계리를 지나 변산면 대항리에서 새만금 담수호로 흘러드는 20.6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직소천에 있는 아홉 곳의 절경을 봉래구곡(蓬萊九曲)’으로 부를 정도로 상류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묵정교차로 잔디밭에서 간식을 먹느라 15분 정도 쉬었다.

 변산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변산교로 직소천을 건너면서 하서면(下西面)으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자동차전용도로인 30번 국도의 보조용 도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도로변 소공원에서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는 꽃 중 가장 붉은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청순해 보여 아가씨나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꽃샘바람에 붉게 물든 아가씨의 얼굴색을 닮았다나? 꽃말도 수줍음이라고 한다.

 13 : 13. ‘소광교차로에서는 국도(변산바다로)를 횡단한다. 통행량이 많아서인지 횡단보도 표시는 물론이고. 교통섬에 교통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종점까지 4km)가 새만금홍보관에서 1.7km를 걸어왔음을 알려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매향비가 반긴다. 매향비(埋香碑)는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바닷가에 향을 묻고 세우는 비()를 말한다. 국내 최상급 바지락 생산지였던 부안의 옛 해창(海倉) 갯벌에 그런 향을 묻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갯벌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빗돌 뒤, 들녘의 초입에는 엄청나게 많은 장승이 늘어서 있었다. ! 이곳에서 해창갯벌 장승제가 열린다고 했다. 해창갯벌 및 새만금 이전의 모든 갯벌은 막혔지만 마지막 남은 수라갯벌. 여전히 40여 종의 멸종위기 생명들이 살아 있는 그곳을 보존하자고 외치는 환경단체들이 여는 행사다. 장승을 통해 자신들의 소망을 듣는다며 작년 여름에도 장승 8개를 추가로 세웠다는데, 그런 행사를 20년이나 해왔다니 저 정도 숫자는 능히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3 : 18. ‘잼버리 1란다. 실패의 대명사로 낙인찍혀버린 ‘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저 안쪽 들녘에서 열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2023.8.1-12(12일간) 열린 잼버리대회는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는 대혼돈의 잼버리가 되어버렸었다. 하지만 내 탓이요보다는 여야 정치권과 정부 부처, 전라북도 간의 책임 공방만 치열했었다. 그 현장이 바로 저 다리 건너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리 건너에는 잼버리기반공사 철거작업 안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시작 첫날부터 쏟아진 잼버리에 대한 비난은 전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그 비난은 대회 장소를 잘못 고른 것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준비 부족에서 원인을 찾고 싶다.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자연재해도 문제였지만, 더러운 화장실과 곰팡이 핀 음식 등 주인의식은 눈꼽만큼도 없는 행사준비가 대혼돈을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준비만 철저했더라면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자립심을 높이는 스카우트 운동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가 또 이디 있겠는가.

 탐방로는 해창쉼터(13 : 26)’를 만나기도 한다. 옛 해창갯벌을 회상이라도 해라는 듯 공터 가장자리에 벤치 몇 개를 놓아두었다. 하지만 광활한 들녘이 무슨 볼게 있겠는가. 그냥 지나쳐버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30번 국도의 비득치교가 나타난다. 탐방로는 저 다리 아래(이정표 : 종점까지 3km)를 지나간다.

 변산반도에는 계절별로 주꾸미, 전어 등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그 가운데서도 청정갯벌에서 나온 백합과 바지락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그 백합으로 만들어낸 백합죽은 변산이 자랑하는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다. 부안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백합죽은 인근 식당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데, 백합 조갯살을 잘게 썰어 넣고 약간의 참기름과 깨소금만으로 간을 해 끓여내기 때문에 백합 고유의 담백한 풍미가 일품이다.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그저 30번 국도를 오른편에 끼고 가다가, 왼편으로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34. 백련리(白蓮里)의 자연부락인 비득치 마을은 자자손손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온 어촌이다. 부안 출신 김민성 시인이 <전략- 확 짠 내가 스며오는 속에/ ‘오오매 으쩐 일이데여!’ 반가워하며/ 내 손을 덥썩 잡는 새포댁의 손/ 소당깨만 한 까칠까칠한 손 -후략>이라며 읊던 새포댁의 손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동향의 김교서 시인은 비득치에 가면이란 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새만금방조제가 놓이면서 바닷가 마을이 아닌 변산 밑의 산골마을로 변해버렸다.

 잼버리 행사장의 시설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듯 들녘에는 중장비가 오가고 있었다. 방조제가 놓이기 전만 해도 저곳은 갯벌이었다. 칠산바다 물고기들이 산란하러 모여들고, 질 좋은 백합과 바지락이 지천이었단다. 멀리 남반구 뉴질랜드에서 북반구 툰드라까지 약 3Km를 오가는 도요물떼새 등 철새의 휴게소이기도 했다. 법정 보호종만 해도 40여 종에 이르렀다나?

 13 : 44.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바람 모퉁이가 나오는데, ‘야방 모퉁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야방은 주변 지역을 훤히 잘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라서, 임진왜란 때 밤에 야방을 섰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 특징을 살리려는 듯 잼버리 야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잼버리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다목적 광장, 팔각정, 전망대, 주차장, 안내센터, 화장실, 조형물 등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자동차전용도로가 중간에 놓여있어 가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대회가 실패로 끝나서인지 펄럭이고 있어야 할 만국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국기를 보며 나라 이름을 알아맞히는 재미가 쏠쏠한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문득 유럽 연수 때 각국을 돌아다니며 삼색으로 된 국기들을 대비해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프랑스·이탈리아·아일랜드·벨기에 등은 세로 삼색기인데 색깔만 다르다. 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헝가리 등 가로 삼색기인 나라는 더 많다.

 13 : 48. 잠시 후 백련마을(어촌계 회관)’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백련리(白蓮里) 9개 행정부락(삼산·금광·노계·금산·월포·신촌·문수·백련·대광·비득·소광) 중 하나로, ‘백련이라 지명은 변산의 의상봉과 와우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수동 계곡 아래에서 못을 이루는데, 그 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났다는 데서 유래했다.

 버스정류장은 광고판을 겸하고 있었다. ‘부안 정명 600주년(2016)’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선정한 9가지 볼거리·살거리·먹거리를 부안 9()·9()·9()’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는다.

 13 : 56.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풍력발전기가 고개를 내밀면서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테마파크 입구의 보리밭. 아직은 키가 무릎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하지만 달포만 더 있으면 싱그러운 빛깔로 일렁이는 보리의 군무를 보게 될 것이다. 보릿대가 살랑댈 때마다 풋내음이 퍼지고, 쏟아지는 봄볕 튕겨내며 싱그러운 빛깔로 반짝이는 어느 봄날.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13 : 59. 테마파크 입구 삼거리. 이정표(종점까지 1km)가 함께 걸어온 변산로와 헤어지라고 한다. 이정표의 지시대로 신재생에너지로로 들어가자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가 반긴다. 테마 체험단지, 실증 연구단지, 산업단지가 함께 입주해 있어 연구개발에서 생산, 교육, 홍보까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전국 최초의 신재생에너지 복합단지다. 참고로 신재생에너지는 재생에너지와 신에너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재생에너지는 햇빛··바람·생물유기체 등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이르고, 신에너지는 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 기존의 화석연료를 변환시켜 이용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하나 더. 신재생에너지의 특징은 환경 친화성과 비 고갈성이다. 원자력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두다.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2009년 공사를 시작해 2011년 완공했다. 중심 시설인 테마체험관(위 사진의 오른쪽 건물)’은 즐기면서 학습할 수 있는 에듀테인먼트 시설로 8개 분야(태양열·태양광발전·바이오매스·풍력·소수력·지열·해양에너지·폐기물에너지)의 재생에너지와 3개 분야(연료전지·석탄액화가스화·수소에너지)의 신에너지 및 그린하우스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난해한 에너지의 원리도 놀면서 익히면 더 즐거워진다나? 쓰레기나 돼지똥, 소똥이 전기가 된다면 어린이들이 믿겠는가. 그런 에너지의 변화를 말로 설명해봤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재생에너지·수력·화력·태양열 등 머리로만 이해하던 에너지의 원리를 만지고, 움직이고, 게임하면서 알아차리게 해 준다고 했다. 알아두면 좋을 지식들을 재미있는 놀이에 담아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단다.

 14 : 15. 테마 체험단지와 실증 연구단지를 지나 산업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코너에 월포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는 사거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경로당의 맞은편, 도로 건너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11.30km가 찍혀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새만금 박물관과 홍보관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나 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그것도 시점에서 종점까지 풀코스로 말이다. 코스가 짧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집사람의 건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다른 소원이 뭐냐고 또 다시 물으신다면 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시면 난 또다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건강의 대상은 내가 아닌 내 집사람이라고 공손히, 그러나 또렷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서해랑길 47코스(격포항  변산해수욕장)

 

여 행 일 : ‘24. 3. 9()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격포항(금정모텔 앞)채석강격포해수욕장수성당적벽강하섬전망대성천항고사포해수욕장송포항변산해수욕장 사랑의 낙조공원’(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5.64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변산마실길(2·3코스)과 겹친다고 해서 마실길 위의 세계지질공원으로도 불린다.

 

 들머리는 격포항(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내려오다 종암교차로(변산면 마포리)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격포로로 들어오면 잠시 후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7코스) 안내도는 닭이봉전망대의 입구 근처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네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길이는 13.9km,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산길을 연상시키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기 때문에 결코 쉽다고 볼 수는 없다.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 이유일 것이다.

 10 : 41. 탐방로는 2차선 도로인 방파제길을 따라 북쪽으로 간다. 전망대가 있는 닭이봉(鷄峰. 85m)’을 오른쪽으로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나는 반대 방향인 격포항 쪽을 선택했다. 물 때(썰물)가 맞은 덕분에 세계적 지질명소인 채석강을 둘러볼 수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10 : 44. 채석강으로 가는 길. 왼쪽은 격포항이다. 격포(格浦)는 일찍이 수군(水軍)의 요새지로서 별장이나 첨사가 주둔했다. 조선시대는 전라우수영 관할 격포진이 있었다. 지금은 서해안권의 대표 국가어항으로 개발되어 있어 다양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청정해역을 품고 있어 봄 주꾸미, 가을 전어를 비롯해 갑오징어, 꽃게, 백합, 바지락 등 사시사철 다양한 수산물들을 만날 수 있는 풍요로운 항구다.

 채석강(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3)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면 방파제 위에서 자그마한 공원을 만난다. ‘채석강 갤러리라는데, 부안군에서 석재로 만든 각종 조형물들로 예쁘게 꾸며놓았다. 다양한 대리석 작품들에 채석강과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격포항 종합안내 변산팔경 등의 관광홍보판과 함께 어항이용안전수칙 등의 안전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채석강을 구경할 때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10 : 47. 방파제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채석강(彩石江)이 모습을 드러낸다. 20m 높이의 해안절벽은 중생대 백악기( 7천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책 수십만 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시루떡 같다고도 한다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서 그 형상도 달리 나타나는가 보다. 참고로 원래의 채석강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놀던 중국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강이다.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에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그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이태백처럼 술 한 잔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침식에 의해 층을 이룬 절벽 아래로 편마암층이 닳고 닳아 벼루처럼 반들반들하고 닭이봉 아래의 층암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바위절벽을 움푹 파고 들어간 해식동굴에서 만나는 해넘이도 장관이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으니 참조한다.

 해식동굴은 인생샷을 건져보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 바다 쪽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서 눈길을 끈다. 해식절벽이 저런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 채석강은 '연인과 함께 가면 사랑이 깨진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고 한다. ‘돌 깨는 작업장인 채석장(採石場)’과 소리()가 같아서였을 것이다. ‘채석장 돌이 깨지듯 사랑이 깨진다.’고 여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70~80년대 만 해도 이곳은 사랑이 무르익는 곳이었다. 이곳에 놀러왔던 연인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놓쳐버리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귀가를 못한 젊은 남녀들이 따로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다. 하여간 그로 인해 결혼까지 간 커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11 : 02.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앞에 서면 켜켜이 쌓인 세월과 자연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해안가 바닥은 끝없는 바위멍석을 깔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데다 높낮이 차가 있어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게 1.5km쯤 되는 암반지대를 진행하면 격포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난 오른편 나무계단으로 오른다. ‘서해랑길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11 : 06. 호텔과 음식점들이 들어서있는 골목을 지나 격포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해수욕보다는 오히려 채석강과 서해안의 일몰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인데, 500m 길이의 백사장이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으며, 경사가 완만해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딱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 호텔, 리조트, 펜션, 캠핑장, 음식점, 카페, 수산시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 없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늘이 편치 않은 빈약한 배후 숲은 단점이라 하겠다.

 11 : 09. 백사장을 지나 반대편 갯바위에 오르면 인어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노을공주로 불리는 인어인데 걸쭉한 얼굴이 공주보다는 왕비에 가깝다. 이 인어상은 31년 전, 격포 앞바다의 대 참사(292명이 사망한 서해페리호 침몰사고)를 겪은 후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나? 하나 더. 이 인어상은 격포 앞바다의 석양이 진홍빛으로 물들면 은빛 비늘을 자랑하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도 갖고 있단다.

 그 위에는 해넘이 채화대가 있다. 1999 12 31, 새천년을 맞이하는 국가행사를 하면서 마지막 햇빛으로 해넘이 성화에 불을 붙였다는 곳이다. 이 성화는 다음 날 일출 행사에서 얻은 성화와 합쳐진 뒤 새천년 영원의 불 보관함에 간직되어오고 있으며, 각종 대회의 성화에 불씨로 제공되고 있단다. 참고로 영원의 불 보관함은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 옆에 있다.

 바다 건너에는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위도(蝟島)’가 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풍경 등 천혜의 경관을 갖고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 홍길동전에서 꿈꾼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다. 그 앞에 떠있는 꼬맹이 섬 임수도는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몸을 던진 임당수로 구전되는 곳이다.

 11 : 16. 채화대에서 빠져나와 ‘SONO Belle Hotel & Resort’ 옆으로 난 소로를 따르면 2차선 도로인 변산해변로(이하 변산 해안도로’)’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간다. 하지만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11 : 21. 4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12.1km/ 시점 1.8km)가 수성당까지 0.6km가 남았다며 왼쪽으로 난 소로(죽막길)로 들어가란다.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의 정문 앞 삼거리이다.

 11 : 25. 조금 더 걸으면 서해생명자원센터(한국수산자원공단)에 이어 죽막마을이 나온다. 서해랑길은 마을 앞 개천가를 따라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에서 만난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해안가 200m의 지정구역 안에 132그루가 자란다)’. 안내판은 이 숲이 천연기념물(123)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지역이 후박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서 식물분포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나? 그나저나 후박(厚朴)하다는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이름대로 후박나무는 후박한 나무이다. 약재, 목재, 염색재로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다 내준다.

 후박나무군락지 옆 너른 공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뭔가를 심으려는 듯 밭갈이를 해놓았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식재한다고 했으니 유채 씨라도 뿌리려나 보다.

 11 : 29. 공터를 가로지르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58호인 수성당이다. ‘죽막동 유적이라는 이름의 사적(541)으로도 보호받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란다.

 수성당(水聖堂)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미와 그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신 제당으로 조선 순조 1(1801)에 처음 세웠다. 지금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참고로 개양할미는 수성당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은 뒤 일곱 딸은 각 도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깊이를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수성당은 아홉 여신이 좌정해 있다 하여 구낭사라고도 한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하여 어부를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한다는 바다의 신이다. 때문에 이 지역 어민들은 개양할미를 정성껏 모셔왔다. 요즘도 정월 열나흘 날에 계양할미에게 치성을 드리는 수성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풍어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공동제사이다.

 수성당 앞에서의 조망. 아까 채화대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달라진 게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일몰도 변산팔경의 으뜸인 격포낙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조선의 빼어난 풍광 10경으로 뽑은 그 변산 낙조말이다.

 수성당을 나오면 산책로는 시누대 숲길로 이어진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시누대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그 숲속으로 터널형의 산책로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나있다.

 전망 좋은 곳에는 포토죤까지 만들어놓았다. 온 서해가 다 보일 정도로 막힘이 없는데, 이를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찍으라는 듯 액자 조형물을 세워두었다.

 11 : 39. 시누대 숲을 빠져나오면 길은 적벽강(赤壁江)’으로 이어진다. 채석강과 더불어 국가 명승(13)’으로 지정된 곳이다. 용두산(龍頭山)을 에도는 2km의 해안선을 따라 펼치는 붉은 절벽은 채석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더했다고나 할까? 참고로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가 황주로 유배를 가서 빈한한 삶을 살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는 적벽강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검붉은 색을 띤 암반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니 적벽강의 백미는 석양 무렵이라고 했다. 바위 단애가 진홍색으로 물들며 장관을 이룬단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 해안의 자갈 구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귓가를 때린다. 달빛에 술상을 마주한 소동파가 읊조리는 싯구라도 되는 양...

백악기 후기, 거대한 호수 아래 퇴적된 격포리층이 지질운동으로 솟아올랐다 침식되면서 적벽강이 만들어졌단다. 퇴적암인 셰일과 화산암인 유문암의 경계 부분에 성질이 다른 두 암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페퍼라이트는 적벽강을 대표하는 지질구조이다.

 글자 조형물은 우리가 변산 마실길 3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적벽강 노을길로 포장된 3코스는 성천항에서 격포항까지의 구간으로 변산마실길의 백미다. 길은 줄곧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데 변산반도의 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 그리고 바닷길이 드러나는 하섬과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지를 품고 있다. 특히 이 구간을 걷다가 만나는 노을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알려진다.

 11 : 42. 서해랑길은 적벽강의 해식 단애 위를 따라간다.

 덕분에 적벽강의 빼어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변산의 해안은 모래와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멋들어진 기암들이 수문장처럼 바다와 뭍의 경계를 지킨다. 이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서쪽으로 향하다 순식간에 서해 바다로 몸을 숨긴 덕분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산줄기가 물속으로 잠수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하나 더. 사람들은 내륙의 산줄기를 내변산’, 해안을 외변산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아두자.

 11 : 46. 조금 더 걸어 도착한 또 다른 적벽강 생태탐방로 입구. 아름다운 변산 앞바다와 함께 커다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안내판은 적벽강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었다.

 안내판은 페퍼라이트, 주상절리, 단층, 돌개구멍 등 다양한 지질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려가 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4km 전방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 : 49. 적벽강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변산 해안도로를 만난다. 그리고는 꽤 오래 이 도로를 따라간다.

 변산해안로라는 이름대로 도로는 바닷가를 따라간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가 확 트인다. 이 무렵 나그네들은 하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12 : 09. 도로변에 있는 마실길의 반월안내소에 도착하면 회화나무 고목이 나그네를 반긴다. 안내판은 ‘500여 년 전 부안 현청 동헌에 심어졌던 것으로 수령이 다하여 그 몸통을 수거·보관해오다 변산마실길 반월안내소를 개소하면서 수명을 다한 고목이지만 향토의 애환을 지켜온 수혼을 변산 마실길의 수호신으로 삼아 탐방객의 안녕을 빌고자 세워 두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나 더. 안내소 옆에 변산 아으리랑 노래비와 하섬 부근에서 해양자원을 조사하다 숨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 연구원들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도록 하자.

 12 : 15. 도로에서 내려와 오솔길(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5km)을 따른다. 이후부터 길은 변산 해안도로와 해안 숲길, 바닷길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하섬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도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TV만 켜면 방송은 온통 남녘의 꽃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힌 저 매화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탐방로는 바닷가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 나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곶부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

 12 : 20. ‘변산 해안도로와 만나는 지점(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2km)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용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드라이브 스루로 여행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전망대에 서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이곳 부안에는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수식어들이 참 많다. ‘변산삼락(邊山三樂)’도 그중 하나인데, ·풍경·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저런 풍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바닷가 오솔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책로라기보다 등산로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47코스의 난이도가 별이 3개로 평가되는 이유일 것이다.

 길은 시누대라고 하는 해장죽(海藏竹) 숲속을 헤집기도 한다. 터널이 만들어내는 빛의 조화로 인생 사진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는 구간이다.

 바다로 눈을 돌리자 하섬이 부쩍 가까워졌다. 사당도와 석도, 비안도 등 주변의 섬들도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 더. 육지에서 1km가량 떨어진 하섬은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무렵 썰물 때가 되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2~3일간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백합·꼬막 등 해산물을 줍는 진풍경이 펼쳐진단다.

 12 : 47. 산길 느낌의 탐방로를 따라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해안초소에 이른다. 변산반도의 해안을 지키던 옛 군사시설을 전망대 겸 쉼터로 바꾸어 놓았다. 쉼터는 꽃을 들고 프러포즈를 하는 남성의 조형물을 세워 가슴 설레는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탐방로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그래선지 해안절벽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이 구간은 철조망에 걸린 팻말을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유수불부(流水不腐)’ 같은 사자성어가 있는가 하면, 청춘이 기생을 안으면 천금이 건불이라는 유머 넘치는 글귀도 눈에 띈다.

 12 : 51.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계단을 설치했고, 작은 개울이라도 만날라치면 어김없이 다리를 놓았다. 이뿐 아니다. 작고 예쁜 해변은 나무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갈 수도 있도록 했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하섬이 성큼 다가온다.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는 하섬은 새우가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새우 하()를 썼다. 그러다 원불교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바다에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꽃 하()’자로 바꿔 사용한다고 했다. 그나저나 눈에 들어오는 하섬은 여느 섬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바다가 하섬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전설이 만들어낸 길이다. 옛날 옛적에 육지에서 노부모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와 부모님이 탄 고깃배가 하섬까지 떠내려가서 돌아오지 못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용왕님께 빌고 빌어 용왕님이 바닷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교통호를 따르다보니 군의 옛 시설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군인들이 떠난 뒤, 초소와 녹슨 철조망만 남아있던 초병의 길 변산 마실길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12 : 58. 그렇게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하섬 전망대. ‘변산 해안도로의 도로변, 하섬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로 지나가는 탐방로에는 커다란 대리석 조형물을 세워 이곳이 변산 마실길임을 알린다.

 마실길 나그네들을 위한 전망대도 빼먹지 않았다. 또 하나의 전망대를 탐방로에 걸쳐놓았다. 그나저나 산길을 걷다가 바다에 둘러싸인 하섬을 만나니 눈이 절로 시원해진다. 하지만 하섬은 눈으로 즐기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을 위한 원불교 신도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단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뻗어나가는 오솔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저 능선을 넘으면 성천항으로 연결되는 산비탈이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오솔길은 한 명씩 차례로 줄을 서서 가야 할 만큼 비좁다.

 13 : 15. 길을 나선지 2시간 35. 변산마실길 2코스(적벽강 노을길)의 시점인 성천항에 도착했다. 포구의 초입, 유유동천(遊儒洞川)의 배수갑문 못미처 갈림길에 변산마실길 안내도와 이정표(송포항 5.0km/ 격포항 9.0km), 그리고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6km)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변산면 운산리에 위치한 성천항(成川港)’은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5개 지방어항(곰소항·궁항항·송포항·식도항·성천항) 중 하나다. 연근해 어업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질산어장에서 주로 전어와 갈치를 잡는다.

 성천항은 바다낚시의 명소인 듯. 동호인들이 버스까지 끌고 와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창에 그려놓은 물고기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들어 맨다. 저 낚시꾼들은 물고기를 낚자마자 뼈만 남기고 회를 떠서 먹어버리는 모양이다.

 13 : 20. 포구의 모퉁이(이정표 : 종점까지 5.2km)를 돌아서면 고사포해수욕장이 길손을 맞는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모래밭이 가장 길다는 해변으로, 그 길이가 무려 2Km에 이른다고 한다. 잠시지만 모래사장을 걸어본다. 누군가 그랬다. 물 빠진 변산의 해수욕장에 들어서면 신발은 벗어두자고.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를 걷는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종착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을 뿐...

 고사포해수욕장의 백사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물이 깨끗하고 수온이 적당해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근거리에 있는 하섬은 물론이고,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고사포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파도소리에 더해진 솔바람소리가 인상적인데, 그 숲속에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다. 솔숲 앞으로는 드넓은 서해바다가 부드럽게 펼쳐진다. ‘! 좋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멋진 해변이라 하겠다. 그래서일까?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소나무 숲에는 꽤 많은 텐트가 쳐져 있었다.

 13 : 39. 서해랑길은 해수욕장을 지나 맞은편 산자락(이정표 : 종점까지 3.7km)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병사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하섬이 바라보이는 갯바위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내려가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니 탐방로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13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수많은 펜션들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운산교차로를 스치듯 지나면 서해랑길은 마리나, 헤이데이, 그랑메종, 보보스, 바라한 등 서구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펜션들로 가득한 저 마을을 관통한다.

 13 : 55. 펜션지구의 뒤 작은 고개를 넘자 양어장으로 여겨지는 시설이 나타났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으로 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정자까지 지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주변은 기암괴석으로 가득했다.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아무렇게나 다듬어진, 태고의 신비스러운 흔적을 여기서도 본다. 역광으로 인해 어둑해진 풍광이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함께 걷던 80대 도반의 손가락 끝에는 거북바위가 걸려있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정자에 올라본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한반도가 품은 작은 반도 변산은 서해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췄다. ‘서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유다.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해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저런 명소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모실길 노선안내판이 우리가 지금 변산 마실길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구간은 철책 초소길을 따라가며 자연적으로 조성된 상사화 군락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송포항에서 출발해 솔향기 가득한 숲길과 붉노랑상사화 군락지, 금빛모래의 고사포해수욕장을 거쳐 옥녀가 머리를 감았다는 성천포구에 이르는 길이 4.8km의 코스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교통호를 따라간다. 바닷가 산비탈에 쳐놓은 녹슨 철조망도 함께 따라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벌거벗은 구릉지도 만난다. 그곳에는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실길은 이렇듯 봄의 유채꽃에서 겨울의 눈꽃에 이르기까지 사계절 내내 꽃들이 활발하게 피어난다.

 14 : 14. 나무로 만든 출렁다리를 건넌다. 작지만 탄력이 있어 출렁거림이 남다른 곳이다.

 14 : 20. 시야가 툭 트이는 널따란 구릉지는 상사화 군락지로 조성해 놓았다. 매년 늦여름(8월말부터 9월초) 샛노란 붉노랑상사화와 함께 순백의 위도상사화가 곱게 피어난단다. 때를 잘 맞추면 푸른 파도와 함께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나?

 어떤 이는 이곳을 샤스타데이지 꽃밭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봄에 이곳을 찾으면 상사화 대신 샤스타데이지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이한단다.

 붉노랑상사화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땐 잎이 없어 잎은 꽃을, 꽃은 잎을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꽃이다. 평소에는 연한 노란색이지만 직사광선이 강한 곳에서는 붉은빛을 띤다고 해서 붉노랑상사화란 이름이 붙여졌다. 만개 때는 껑충한 연초롱 꽃대 끝에 왕관처럼 얹혀진 노랑 꽃술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조망도 좋다.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수많은 섬들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해안은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선지 부안의 바닷가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할퀴어지고 뜯기고 긁힌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탐방로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곶부리를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한적한 오솔길은 사색하기 딱 좋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는 맑아지고 맘속의 모난 돌도 둥글둥글 다듬어진다.

 14 : 25. 모퉁이를 돌아서자 반원형의 전망대가 잠시 들렀다가란다. 다리 모양의 대를 세우고 그 위에다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서자 변산해수욕장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나로서는 옛 추억을 소환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35년쯤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서른의 중반 무렵, 가족들과 함께 저곳에서 하계휴가를 보냈었다. 당시 아버지가 잡아온 바지락과 백합으로 술국을 끓였고, 그걸 반주삼아 마신 술로 나는 얼큰하게 취했었다. 그날 밤. 판소리랍시고 흥얼대는 내 술주정을 늦게까지 들어주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바다 건너 저 멀리서는 새만금 방조제와 고군산군도가 자신도 한번 보아달란다.

 1960년대 전후 북한의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했다는 녹슨 철조망은 이제 소망의 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조개껍데기나 판자에 나름대로의 소원을 적었는데, 남녀의 이름과 함께 하트() 표식을 넣은 게 가장 많이 눈에 띈다.

▼ 안내판은 이 부근을 붉노랑상사화의 자생지라고 했다(9월 무렵)를 잘 맞추면 샛노랗게 핀 상사화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단다하지만 3월 초인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대신 복수초가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있었다이른 봄소식은 복수초의 노란 꽃잎에서 온다고 했다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활짝 핀 복수초에서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14 : 31. 변산해수욕장의 남단과 맞닿아있는 송포항(松浦港),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또 다른 지방어항이다. 이곳도 성천항처럼 칠산어장을 주요 어장으로 삼아 전어와 갈치 등을 잡는다. 참고로 송포(松浦)는 지지포라는 곳에서 살던 어느 선비가 이곳 소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14 : 36. 변산해수욕장은 송포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작된다.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변산해수욕장은 서해안 3대 해수욕장(대천·변산·만리포)’ 중 하나로, 희고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2km 길이의 사빈과 배후의 소나무 숲이 한데 어우러지며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백사청송(白沙靑松)의 해변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백사장도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란다.

 탐방로는 해수욕장의 배후 솔숲으로 나있다. 변산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 중 하나로 1933년에 개장했다. 배후 솔숲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에는 수많은 시판(詩板)이 늘어서 있었다. 이 지역 출신의 작가들인지 하나같이 부안의 산하를 노래하고 있다. 맞다. 이곳 부안은 시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던 명기 매창(梅窓)이 있었는가 하면, 현대에 와서는 서정시인 신석정(辛夕汀)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변산반도와 채석강 등 부안의 주옥같은 산하를 빼어난 문장으로 풀어냈었다.

 글자조형물은 파도를 담았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지역 예술가가 만든 조형물이란다. 제목은 꿈꾸는 물고기’. 변산과 관련된 주제인 물고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다채로운 포토존과 조형물들이 해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해파랑길 안내책자나 kakaomap 47코스의 종점을 변산해수욕장의 버스정류장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47코스와 48코스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헷갈려하는데 두루누비에서 다운받은 앱이 사랑의 낙조공원까지 조금 더 가라고 알려준다.

 14 : 52.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 이정표가 당신은 이미 48코스를 400m나 걸어왔다고 알려준다.

 변산해수욕장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굳힌 사랑의 낙조공원은 꽤나 긴 계단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첫 만남인 전망대를 겸한 작은 광장에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며, 한 쌍의 하트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트는 반쪽만 만들어 놓았고, 비워진 반쪽은 탐방객들의 사랑 표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석양 무렵 이 조형물에 대칭으로 신체를 맞출 경우 인생사진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아래(다섯 번째)에 게재되어 있는 해넘이 안내판을 보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로마의 명물인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을 닮은 조형물도 눈에 띈다.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플루비우스의 얼굴)이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입에다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Pluvius)’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왔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난간에 서면 변산해수욕장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런데 생경스럽다는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맞다. ‘변산해수욕장이 서해라고 해서 갯벌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시커먼 갯벌 대신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이 들락거릴 때도 흙탕물 대신 쪽빛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공원에서 바라본 해수욕장의 배후 풍경. 변산해수욕장은 노을이 머무는 사계절 관광지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었다. 오토캠핑장을 시작으로 전기시설이 가능한 야영장(80), 스토리센터, 노을바라기(전망대), 비치가든(물놀이장), 노을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놓았다.

 하트 손이란다.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가 손인데 사랑의 첫 단계가 손잡기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까지 손을 잡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남자와 여자의 손으로 하트를 조각했단다. 사랑의 약속이 깨지지 않고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증사진 하나쯤 남겨보면 어떨까?

 사랑의 낙조공원 해넘이 안내판. 월별 해넘이 위치와 일자별 해넘이 시각을 담았다. 노을에 대해서는 최적의 뷰를 보여주는 곳이니 부안의 멋진 노을을 듬뿍 담아가라고 한다.

 15 : 02. 서해랑길 안내도(부안 48코스) 사랑의 낙조공원의 진입광장 남쪽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5.64km를 찍고 있으니 상당히 더디게 걸은 셈이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오솔길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여행과 레포츠에 푹 빠져있는 나. 집사람은 그런 내가 좋다며 항상 함께 해준다. 이런 생활 패턴이 우리 부부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다. 미국 대중문화계의 스타이자 코미디의 전설로 불리는 조지 번스 100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인 앨런과 함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고,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