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0코스(서망항-가치 버스정류장)

 

여행일 : ‘22. 8. 27(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및 지산면 일원

여행코스 : 서망항→팽목항→팽목방조제→마사마을→봉암저수지→하봉암마을→가치버스정류장(거리 및 시간 : 15.9km, 실제는 14.18km를 3시간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0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들길·산길·해안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걸으며 다양한 풍경들을 만난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닌 ‘팽목항’은 꼼꼼히 살펴봐야할 아픔의 현장. 산악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동석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마주보며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 들머리는 서망항(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진도읍 방면)를 타고 38km쯤 내려오면 ‘서망항’에 이르게 된다. 사진은 출발지 근처의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로 세월호 사고 때 한참 말이 많았던 곳이다. 참!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10코스)는 해경파출소 뒤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 ‘서망항’과 ‘가치마을’을 잇는 15.9km짜리 구간. 서해안의 특징인 바닷길에 더해 산길·들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걷는다. 덕분에 다도해의 멋진 풍광을 실컷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소박한 항구를 품은 마을들을 지나며 어촌의 삶을 엿볼 수도 있다. 반면에 무책임한 어른들로 인해 생때같은 어린 생명들을 잃은 ‘세월호’의 아픔을 되돌아보게 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 동쪽 방향, 그러니까 ‘서망 삼거리’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팽목항(출발지에서 1.3km쯤 떨어진 지점)’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세월호 기억관’에 들렀다가 출발지인 ‘마사 수문’으로 가려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는 팽목항에서 트레킹을 시작할 계획이다.

▼ 때문에 국민해양안전관은 차창너머로 보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양안전체험시설과 유스호스텔·해양안전정원(추모공원) 등으로 꾸며졌다는데, 그보다는 노란색 ‘맘’ 조형물이 더 눈길을 끈다. 국화꽃을 손에 들고 가슴이 뚫린 엄마 모습을 형상화했다. 상부좌대까지의 높이가 9m, 무릎부터 발끝까지의 높이는 3.5m로 참사 발생 시각인 ‘9시35분’을 의미한단다.

▼ 버스에서 내리니 ‘팽목항 대합실’이 반긴다. 조도나 관매도, 서거차도를 들어갈 때 이용하던 눈에 익은 시설이다. 그밖에도 관사도·소마도·대마도·모도·각흘도 등 진도군 관내의 모든 섬을 연결하는 여객선들이 이곳 팽목항에서 떠나고 들어온다. 참고로 팽목항은 세월호 침몰사고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 항구다. 사고 당시 구조된 생존자와 부상자를 받았고, 싸늘하게 식은 희생자들도 안아줬다. 세월호가 가져다준 슬픔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오늘도 슬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 대합실 옆의 ‘진도 국제항개발사업 조감도’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2019년까지 배후지를 조성하고, 2030년까지 국제항으로 개발하겠다는 청사진으로, 사업이 종료되면 팽목항 주변에는 산업시설, 복합휴양·펜션단지, 테마파크, 상업시설 등이 들어서게 된단다. 그런데 저게 청사진에서 끝나버릴 것 같다는 예감은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 ‘팽목항(현 진도항)’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가슴 한켠에 상흔처럼 새겨졌을 지명이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세월호 참사’를 품은 항구이기 때문이다. 항구 주변에는 당시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다. 가장 먼저 둘러봐야 할 곳은 ‘방파제’, 세월호와 관련된 각종 조형물들과 기억의 벽, 다녀간 이들이 남긴 추모의 리본,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신발 등 눈이 아닌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풍경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번쯤 둘러보고 누구나 갖고 있을 먹먹한 아픔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차분하게 고백해보면 어떨까.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형상화한 조형물. 그런데 ‘2014.415’라는 숫자에서 ‘5’자가 떨어져나가 버렸다. 세월호의 아픈 기억도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일까? 참! 조형물은 기다림의 의자와 세월호 참사지점이 그려진 지도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것으로 여겨지는 신발도 두엇 놓여있었다.

▼ 방파제에는 ‘기억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세월호 참사 1주년(2015.4.16.)을 맞아 높이 50㎝×길이 200m의 방파제에 세월호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새겨진 4,656장의 타일(도자기)을 붙였다.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는 어린이문학인들’이 전국 26개 지역을 돌며 글과 그림을 받았고 그 타일을 경기도 이천에서 구웠다.

▼ 방파제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두세 명이 전부인데, 그마저도 추모객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추모의 공간이 아니겠는가. 기다림의 의자에 앉아보고, 기억의 타일을 살펴보며, 참사의 현장 위치도도 헤아려본다. 그리곤 입술을 굳게 다물고 먼 바다를 응시한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보내면서.

▼ 200m쯤 되는 방파제의 한쪽 난간은 수천 개의 노란 리본(그 아래가 그림타일인 기억의 벽이다)과 종들이 매달려 있다. 그 리본을 따라가 빨간 등대, 이른바 ‘기다림의 등대’에 이르면 빨강 우체통이 반긴다. 세월호 사망자들에게 보낼 편지를 넣는 ‘하늘나라 우체통’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벤치’도 보인다. 하지만 선뜻 엉덩이를 내려놓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 방파제에 서면 참사의 현장인 ‘맹골수도’가 저만큼이다. 그날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듯 지금 그 바다에 바람이 분다. 그나저나 여덟 번의 아픈 4월이 지났다. 팽목항은 지금 밤낮으로 들리던 통곡소리가 사라졌고, 목탁소리나 찬송가도 없다. 자원봉사단체의 천막도 없어진지 이미 오래다. 그저 하얀 깃발과 노란 리본들만 혼령처럼 바람에 나부낄 따름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듯 휘날린다.

▼ 터미널 신축공사가 한창인 항구에는 ‘산타모니카호’가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도항과 제주항을 하루에 2회씩 오가는 쾌속 카페리라는데, 생김새부터가 커다란 등치에 비해 날렵하게 생겼다. 606명의 여객과 승용차 86대를 싣고도 42노트(시속 78km)의 속도로 달려 90분이면 제주도에 도착한단다. 덕분에 제주도가 당일 여행지가 되어버렸다.

▼ ‘세월호 팽목기억관’은 여객선터미널 공사현장 근처에 있었다. 참사 당시 아들·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곳, 결국은 분향소가 된 컨테이너다. 지금은 분향소와 유품, 관련 기록물 등이 그 참사를 기억하게 한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16일 발생했다. 인천-제주를 운항하던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진도군(조도면) 부근 해상. 이 사고로 승선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미수습자 5명 포함)했다. 탑승객 중 상당수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나이에 따라 생명의 ‘경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10대 후반에 불과한 단원고 학생들이 전체 사망자 중 82%라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부 매체의 ‘전원 구조’란 ‘오보’에 잠시나마 안도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접하고 ‘속았다’는 생각에 분개한 이들도 많았다. 거기다 구조된 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 원인을 떠나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기억관’은 방문자의 서명대가 있는 ‘복도’와 사고 당시 사망한 이들의 대형 사진이 걸린 ‘분향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향소 참배는 생략하고, 방명록을 적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기억관 앞에는 ‘가족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회색 바탕에 세월호 기적을 상징하는 ‘세월호 고래’와 시민들의 소원을 담은 노란 풍등을 그려 넣었다. 고래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배를 수면 위로 들어 올려주기를 바라는 마음 및 아이들이 고래를 타고 바다에서 나오는 기적을 바라는 간절함을 담았다고 한다. 풍등은 그걸 띄워 올린 추모객들의 마음을 담았다. 잊지 말자는 다짐과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 등등...

▼ 기억관 뒤 울타리에 걸린 노란 리본에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게 바닷바람에 리본이 나부낄 때마다 8년 전 그날의 슬픔과 아픔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미수습자를 가족 품으로’, ‘별이 되어 빛나소서’ 등 노란 리본에 새겨진 글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기억의 공간과 함께하기를 15분 여, 마무리되지 못한 아픈 상처를 숙제로 남겨놓은 채 길을 나선다. 이때 진도지맥의 마지막 봉우리랄 수 있는 한복산(漢福山, 231.6m)이 불쑥 솟아오른다.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지만 쉽게 오르내릴 수는 없을 듯...

▼ 걷다보면 꽤 많은 현수막을 만나게 된다. 그중 두엇은 미국 LA에서 온 추모객들이 내건 것이었는데, 4월16일을 잊지 않았고, 기억하고 행동하겠단다. 예! 저희도 마찬가지랍니다.

▼ ‘진도항 배후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널디너른 주차장 끝에는 ‘팽목(彭木)’마을이 있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마을 앞 사거리(약간 엇걸린 오거리이기도 하다)에서 왼편으로 간다. 참! 이때 마을을 관통해버릴 수도 있다. 이럴 경우 200m 정도가 단축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바닷가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팽목마을’이다. 이번에는 작은 포구까지 끼고 있다. 자신의 이름까지 빼앗긴 채, 죽은 듯 숨어있는 불쌍한 항구다. 아니 팽목항이 진도항으로 개명했으니, 이젠 ‘팽목항’으로 불러도 되겠다.

▼ 마을 앞에서 ‘팽목 바람길’ 팻말을 만났다. 팽목항을 기점으로 주변 마을과 바닷가·숲길·갈대밭을 끼고 한 바퀴 도는 13.5㎞짜리 둘레길이다. 팽목항에 들른 이들이 참배만 하고 떠나지 말고 진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고 한다. 걸으며 세월호를 기억하고 그간 참사 후유증으로 고통 받은 진도 주민들도 생각하자는 의미도 담겼다. ‘기억과 성찰의 도보여행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이다.

▼ 오늘 새벽, 집을 나서는 집사람이 바람막이 옷을 덧입는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다. 아니 가을의 전령사인 저 호박은 이미 만추까지 지났나보다. 넝쿨로는 제 한 몸을 못 이겨 받침대로 올라앉았다.

▼ 길을 나선지 23분, 탐방로는 바닷가로 나간다. 산자락과 진도항배후지 사이에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 8분쯤 더 걸으면 ‘팽목방조제’. 임회면 동쪽(팽목리)과 지산면 남쪽(마사리)을 이은 1,755m 길이(높이 4.7m)의 둑이다. 803번 지방도가 지나는 둑길은 임회면의 ‘진구지 수문(이정표 : 종점 12㎞/ 시점 3.9㎞)’에서 시작된다. 이어서 차량통행이 끊기다시피 한 한적한 도로를 따라 꽤 오래 걷게 된다.

▼ 이정표(마사수문 1.8㎞/ 갈대밭길 0.9㎞/ 팽목길 0.9㎞)가 ‘팽목 바람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관광 상품화’했다고나 할까? 휴양이나 관광 목적의 여행과 달리 역사적 사건, 특히 비극적인 역사를 추적하는 여행이 ‘다크 투어리즘’이니 말이다. 비극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려는...

▼ 방조제 너머 물가엔 갈대들이 춤을 추고 오후 햇살을 받은 물결은 은빛으로 일렁인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풍경이다. 참고로 1.8km의 방조제는 396ha나 되는 드넓은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대신 낙지·꼬막·장어 등 이 지역에서 많이 나던 해산물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단다.

▼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둑은 강태공 차지였다. 팽목항 인근 바다는 돔과 볼락, 우럭, 붕장어가 잘 잡힌다고 했다. 하지만 저 낚시꾼의 대답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입질 한 번 없다’였다.

▼ ‘와, 나비 떼 같아요!’ 방조제에서 합류한 집사람의 외침이다. ‘아니 저건 ‘나비 떼’가 아니라 ‘세 떼’라오’ 조도(鳥島) 인근의 섬들이라는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나비를 고집했다. 작은 물결에 사뿐히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이 은빛날개를 가진 나비 떼를 닮았다며... 맞다. 집사람은 아직도 감성을 잃지 않은 꽃띠 소녀였다.

▼ 20분 이상 걸어 도착한 방조제의 끝에는 ‘마사 수문’이 있었다. 이정표(종점 10.2㎞/ 시점 5.7㎞)는 죽도선착장이 있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마사마을이 있는 오른편을 추천한다. 지시를 따를 경우 2km가 넘는 산길을 오르내려야하기 때문이다. 5분이면 족한 거리를 50분이나, 그것도 죽도록 고행해가면서.

▼ 하지만 그런 정보를 몰랐던 우리 부부는 ‘죽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어서 해안도로를 5분쯤 더 걸으니 부교(浮橋)를 이용하는 작은 ‘선착장’이 나온다.

▼ ‘팽목 바람길’에서 내건 이정표(다순기미 소망탑 0.8㎞/ 마사수문 0.5㎞)는 이곳을 ‘마사 선착장’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구도(馬口島)’ 밖에 보이지 않는데 ‘죽도선착장’이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 선착장 한켠에는 멸치어장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솥이 걸려있었다. 서망항(또는 팽목항) 인근 바다는 ‘꽃게’ 주산지다. 통발로 잡은 꽃게를 ‘물칸통’에 담아 살려서 가져온다. 서망항이 꽃게잡이로 유명한 이유다. 그런데도 멸치를 삶는 시설이라니... 귀경해 알아보니 이곳에서도 멸치잡이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니 인근 조도에는 멸치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민들도 있단다.

▼ 나무계단을 오르자 숲길이 펼쳐진다. 가끔은 밧줄에 의지해야 할 만큼 비탈진 곳도 나오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경사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왼쪽 바다에선 파도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이 길은 마사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옛길인 바닷가 숲길이다. 잡풀과 관목이 무성했던 버려진 길을 동화작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정돈해 도보길을 냈단다.

▼ 그렇게 17분쯤 진행하자 시야가 트이면서 선착장(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죽도선착장’으로 적고 있었다)이 있는 ‘다신기미’가 나타난다. 다신은 따뜻하다는 뜻이고, 기미는 움푹 들어간 지형을 뜻하는 전라도말이란다.

▼ 인근 해역은 마사마을 어민들의 어장이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멸치와 ‘디포리(‘보리멸’의 전라도 사투리)를 잡았었단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멸치를 삶는 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옛 추억으로만 남은 듯, 정체 모를 시멘트 구조물만 여럿 보일 따름이다.

▼ 다신기미에는 ‘소망탑’이 세워져 있었다. ‘세월호 리본’을 형상화한 걸로 보아,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이미지 말고도 아직도 물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들을 담았지 않나 싶다.

▼ 다시 길을 나선다. 웃자란 풀숲 때문에 돌탑에 돌을 올려놓는 장면은 카메라에 잡지 못했다. 그 아쉬움은 ‘영원히 잊지 않을게’라는 다짐으로 달래본다.

▼ 초반과 달리 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가파른 구간이 많아진다. 그러다가 9분쯤 후 정체불명의 플라스틱 통이 매달린 삼거리를 만났다. 희미하나마 바닷가를 향해 길이 나있는 것이다.

▼ 길이 있으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덕분에 나는 최고의 전망대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야가 툭 트이면서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조도지구의 수많은 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조도면은 맹골군도의 저런 섬들 외에도 거차군도와 독거군도 등 수많은 섬들이 있다. 오죽했으면 ‘세 떼’가 섬의 이름으로까지 굳어졌겠는가. 참! 사람들이 머물다 간 흔적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일몰을 기다렸음직한...

▼ 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떠 있었다. 죽도·곽도·맹골도 등 유인도와 병풍도 등 여러 무인도 및 암초들로 이루어진 맹골군도(孟骨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저 흔적들은 섬들 사이로 지는 일몰을 찍기 위해 머물던 사진작가들이 남긴 게 분명하다.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해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기상청이 이 일대의 낙조를 한반도 최남단에서 만나는 최고의 낙조로 꼽았겠는가.

▼ 바닷가 해안절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 안내리본과 부표를 이정표 삼아 ‘팽목 바람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이 길을 기억과 상생을 위해 걷는다고 했다. 그는 또 아픔을 딛고 함께 가는 그 길, 바다도 바닷바람도 하늘도 나무도 풀도 모두 산 자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 17분쯤 더 걸으니 ‘잔등너머(이정표 : 종점 8㎞/ 시점 7.9㎞)’다. 예전에 말이 떨어졌다는 바닷가 낭떠러지가 요 너머에 있다고 한다. 아까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해안절벽을 말하는가 보다.

▼ 잔등너머를 지나자 숲길이 끝나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마사마을이 나타난다. 마을로 들어가는 구릉지는 온통 대파 밭이었다. 맞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이곳 진도는 우리나라 대파(겨울)의 40%를 생산한다. 그런데 문제는 가뭄에 내몰린 대파가 말라비틀어져 간다는 것이다. 김장철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걱정되는 이유다.

▼ 탐방로는 마사마을을 관통한다. 마사(馬紗)라는 이름대로 제주에서 서울로 보내는 말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말들이 머물던 ‘마장’과 인근 ‘모래해변’을 합쳐 ‘마사’가 됐단다.

▼ 마을을 빠져나오니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아까 지나왔던 ‘마사 수문’이 코앞에 놓여있지 않겠는가. 맞다. 도로(수마로 : 마사수문↔수양리 버스정류장)를 따르면 금방인데도, 탐방로는 산 하나를 에둘러 돌도록 만들었다. 그만큼 경관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도로(수마로)와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수마로 0.6㎞/ 잔등너머 0.7㎞)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최고의 쉼터이겠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서 오늘만큼은 사절이란다.

▼ 마사마을을 벗어나 10분쯤 걸었을까, 종점까지 6.7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이제 그만 농로로 들어서란다. ‘수마로’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정표(갈대밭길 0.8㎞/ 마사마을 0.6㎞)는 ‘팽목바람길’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리본을 달았다. 노란색은 세월호의 상징색이면서 대지와 흙의 색이기도 하다. 파란색은 팽목바람길에서 만나는 하늘과 바다를 의미한단다.

▼ 탐방로는 이제 너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간척사업’에 의해 생긴 들녘이다. 간척(干拓)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물론 대단위의 역사가 있긴 했다. 다만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됐기 때문에 지방 토호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에는 조생종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른 것도 아니다. 며칠 전 고흥(흥양농협)에서 배달되어온 쌀이 22년산 햅쌀이었으니 말이다.

▼ 600m 남짓 되는 농로의 끝에는 ‘지산보 양수장(이정표 : 종점 6.1㎞/ 시점 9.8㎞)’이 있었다. 팽목방조제가 만들어낸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이지 싶다. 하지만 안내판은 용도를 ‘배수장’으로 적고 있었다. 농경지 침수를 막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압이 380볼트나 되니 조심하란다.

▼ 양수장이 있으니 근처에 보가 있을 것은 당연, 웬만한 강보다도 더 넓은 수로가 있었다. 지금껏 함께 해온 ‘팽목 바람길’은 이곳에서 수로를 건넌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강둑을 따라 수로를 거슬러 올라간다.

▼ 이후부터는 수로를 오른편에 끼고 걷게 된다. 이때 하천변에 들어선 ‘갈대밭’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금강변의 신성리나 순천만의 갈대밭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할 정도로 드넓다. 하긴 ‘팽목 바람길’에서도 이 부근의 갈대밭을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있지 않았던가.

▼ 진행방향에서는 동석산(銅錫山)이 우뚝 솟아오른다. 높이라고 해봐야 200m를 겨우 넘기는 자그마한 산이지만, 수려함만 놓고 보면 세상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산이다. 수년 전에 올라본 경험에 의하면, 힘줄처럼 툭툭 불거진 암봉의 짜릿함과 함께 능선에서 펼쳐지는 장쾌한 조망이 압권이었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냅다 논두렁으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지름길을 찾아냈다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한다. 하지만 길은 끊겨 있었고, 곧바로 갈 수도 있던 길을 괜히 에둘러가는 꼴이 돼버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집사람이 즐거워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30분쯤 더 걸어 ‘심동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건넜다. 이곳에도 양수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걷는 내내 바라보던 종석산도 한층 더 가까워졌다. 종 여러 개가 붙어 늘어선 모양새다.

▼ ‘하심동’마을에 가까워지자 ‘동석산’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저 산은 험준한 산세로 인해 오랫동안 오를 수 없는 산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바위에 난간을 대거나 밧줄을 매고, 문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박아 접근이 가능해졌다. 아찔함을 맛보며 산을 오르겠다면 ‘종성교회(사진의 왼쪽)’로 가면 된다. 밧줄에 매달려 수직에 가까운 벼랑을 오르며 칼날 같은 능선을 곡예를 하듯 건너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 하심동마을을 스치듯 지난 둘레길은 이제 봉암저수지와 오봉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봉암저수지의 거대한 둑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이정표(종점 3,2㎞/ 시점 12.7㎞)가 세워진 삼거리에서 농로(왼쪽)로 들어섰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봉암저수지’로 올라선다. 붕어 낚시로 소문이 나서, 전국의 조사(釣師)들이 손맛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는 곳이다. 참고로 진도에서 가장 큰 봉암저수지는 1945년에 처음 축조됐다. 그러다가 1966년 팽목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늘어난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1979년 현재의 규모로 확장시켰다.

▼ 이후부터는 803번 지방도를 따른다. 봉암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아가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이렇듯 서해랑길은 바다와 산을 넘나들고 마을과 들판을 오간다. 그래서 사색의 길이 되고, 성찰과 치유의 길이 된다.

▼ 탐방로는 ‘하봉암(下蜂岩)’ 마을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가치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봉암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윗봉암’마을과 마주한다. 참! 마을회관은 둘레길 나그네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 하봉암은 진도에서 가장 큰 봉암저수지를 끼고 있다. 하지만 동석산과 큰산, 부흥산 등 200m 내외의 산들로 둘러싸여있어 논보다는 밭농사가 주를 이룬다. 그 밭에서 따온 고추를 다듬던 부부가 나에게 포즈를 취해주신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가가는 내가 기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 저수지 상류는 꽤 많은 왜가리들이 노닐고 있었다. 수초로 뒤덮인 물속에 물고기가 많은가 보다.

▼ 도로로 올라선지 20분, 느닷없이 나타난 이정표(종점 1.5㎞/ 시점 14.4㎞)가 다시 농로로 들어가란다. 그리고는 들녘 끝까지 간 다음 산자락을 따라 가치마을로 오란다.

▼ 하지만 우리 일행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가치마을이 보이는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이때 들녘 너머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림의 점정(點睛)은 검망산과 지력산의 거대한 암릉이 찍었다. 진도에서 그리는 풍경화는 저렇듯 암릉을 끼었을 때가 제격이다.

▼ 날머리는 가치마을 버스정류장(진도군 지산면 가치리)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걷자 ‘가치(加峙)’마을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보건소와 초등학교(폐교)가 있는가 하면, ‘서부마트’라는 점포까지 들어선 걸로 보아 지산면의 중심마을 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4.18km. 2km정도의 산길을 걸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도반들 대부분이 산길을 생략해버린 탓에, 엉겁결에 우리가 꼴찌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버스정류장 맞은편의 안내판 앞에 선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하지만 난 그 속에 숨겨진 근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서 걷다가 조금 나아졌던 무릎에 다시 이상이 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곳에 살아도 좋은 것을 먹어도 맘이 불편하면 행복이 아니라는, 이 세상의 무엇을 다 준대도 당신만은 못하다>던 테너 박종호의 ‘당신만은 못해요’를 떠올리며 10코스의 트레킹을 마무리 해본다.

 

서해랑길 9코스(남도국악원-서망항)

 

여행일 : ‘22. 8. 13(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일원

여행코스 : 귀성삼거리→상만마을→굴포마을(고산사당)→남선마을→동령개공원→남동마을(남도진성)→서망항(거리 및 시간 : 12km, 실제는 13.88km를 3시간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9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들길·임도길·해안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걸으며 다양한 풍경들을 만난다. 민초 보호를 위해 쌓은 남도진성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한 단면인 고산둑은 꼼꼼히 살펴봐야할 역사유적. 거기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천연기념물인 ‘상만리 구상나무’도 살펴볼 수 있다.

 

▼ 들머리는 귀성삼거리(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진도읍 방면)를 타고 내려오다 송월삼거리(임회면 봉상리)에서 좌회전하여 진도대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귀성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9코스)는 귀성마을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간 지점에 세워져 있다.

▼ ‘귀성삼거리(남도국악원)’와 ‘서망항’을 잇는 12km짜리 구간. 거리가 짧아 지난 번 8코스 때 자투리로 남겨두었던 7km를 보태기로 했으나, 귀성시간에 쫓겨 ‘여귀산’ 입구 돌탑공원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피서철 traffic jam 탓에 1시20분에야 들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이마저도 포기하고 정규 시작지점인 귀성삼거리에서 시작했다.

▼ ‘진도 다시래기’ 등 진도사람들의 한 맺힌 가락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는 남도국악원은 스치듯 지나간다. 국립국악원(서울)과 민속국악원(남원)에 이은 세 번째 국립국악원이라지만 일부러 들르지는 않았다. 음악에 문외한이 ‘진악당(국악 전용극장)’과 ‘달빛마당(야외공연장)’ 등을 처삼촌 벌초하듯이 둘러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시선을 들자 ‘아리랑 담배’ 문양으로 치장한 하얀색 건물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아리랑마을관광지의 랜드마크인 ‘아리랑체험관’일 것이다. 아리랑의 전체 맥락을 엿볼 수 있는 곳인데, 술꾼인 나는 부속건물인 ‘홍주촌’에 더 관심이 갔다. 홍주의 제조기법을 눈여겨 봐두었다가 손수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녀오지는 않았다. 숙박시설을 겸하는 홍주촌이 문을닫았다는 ‘즐산’님의 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영향이겠지만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오른편에서는 ‘귀성(貴星)마을’의 바닷가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남종화의 산실 ‘진도’를 대변하는 풍경이랄까? 그림 속 포구에는 꽤 많은 어선이 출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황금리’라는 본명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마을 앞 바다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고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황금리’로 불려왔었다니 말이다.

▼ 서쪽으로 난 경사로를 100m쯤 오르면 ‘귀성삼거리’. 서해랑길에서 9구간의 공식 들머리로 내세우는 지점이다. 귀성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아리랑마을’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별(吉星)처럼 귀(貴)한 땅이라는 지명에 발맞추기라도 하듯이 ‘아리랑’ 관광단지를 들어앉혔다는 얘기일 것이다.

▼ ‘상만마을’까지는 18번 국도를 따른다. 이 구간은 자동차와 사람으로도 모자라 자전거까지 공유하는 구간이다. 인류 번영의 최선 과제는 ‘공존’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짧은 구간에서나마 서로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온 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저 라이더들처럼...

▼ 잠시 후 ‘나절로 미술관’을 만났다. 한국화가 이상은씨가 폐교된 (구)상만초교를 개조해서 만든 미술관이다. 나절로는 미술관을 지은 이상은 화가의 호로 ‘스스로 흥에 겨워 즐거움’이란 뜻을 담고 있단다. 호처럼 자유분방한 내면적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곳이라나?

▼ 소정의 입장료(2천원)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상은 작가 본인은 물론이고, 한국화·서양화·조각 등 국내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미술품 구매도 가능하단다. 하지만 문외한이라서 이곳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 길을 나선지 12분쯤 되었을까 상만마을에 이르니 주변이 온통 대파 세상이다. 맞다. 이곳 진도는 우리나라 대파(겨울)의 40%를 생산한다고 했다. 그러니 겨울철에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들판을 초록 융단처럼 수놓을 것이다. 달착지근한 맛의 겉절이로 유명한 ‘봄동’과 함께...

▼ 빗돌에 적힌 이름이 눈에 익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70년대 ‘율산 신화’의 주인공 신선호(현 센트럴시티 회장)의 부친이 바로 ‘신형식(申衡植)’이기 때문이다. 율산(栗山)이란 회사 이름도 부친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무튼 자식 농사(나머지 자녀들도 대학교수·의사·은행장 등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이력들을 지녔다) 잘했기로 소문난 인물인데 그가 이 마을에 뭔가를 베풀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초입(이정표 : 종점 11.3㎞/ 시점 0.7㎞)에서 도로를 벗어나 들녘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저 마을에 천연기념물로까지 지정된 비자나무가 있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마을로 들어서니 거대한 몸집의 팽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마을의 역사가 144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니 저 나무의 나이 역시 만만찮을 것이다.

▼ 담벼락을 가득 채운 벽화가 나그네의 관심을 끌게 만든다. 노인들은 소나무 아래서 신선놀음에 푹 빠져있고, 마을은 씨름 삼매경인 젊은이들 차지다. 그런데 오층석탑은 보물찾기용에 불과한 걸까? 그림들 사이에 스리슬쩍 끼워 넣었다.

▼ 경사진 마을 길 끝자락에서 나이가 600살이나 된다는 비자나무를 만났다. 키 12m에 가슴높이의 둘레가 6.35m라니 거대하지는 않다. 하지만 유난히 옹골찬 수형을 가졌다. 키에 비해 굵직한 줄기는 물론이고 나뭇가지도 매우 촘촘하게 돋았다. 천연기념물(제11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비자나무는 총 3점(강진 삼인리·사천 성내리·진도 상만리)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비자나무숲 5곳은 통째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았단다.

▼ 비자나무는 스님들이 공들여 키우던 나무다. 영양이 풍부해 먹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 좋은 간식거리였고, 거기다 구충제 성분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비자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둬 절집 식구들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나무는 이제 마을의 정자나무로 살아간다. 십여 개의 벤치를 놓아 나그네의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 비자나무 뒤편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청재공파의 재실이라는 ‘성모사(誠募祠)’가 있었다. 하지만 ‘두문동 72현’ 박침의 손자 박심문을 중시조로 한 청재공파는 나주에 종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진도로 입도했다는 박용(박심문의 손자)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후손의 위패를 모시고 있을 것이다. 그게 궁금했으나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誠敬門)이 닫혀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몇 걸음 더 올라, ‘또 다시 그리운 그곳 돌아보니 구암사’라는 팻말에 홀려 ‘해탈문’을 넘어서니 ‘구암사(鳩巖寺)’가 얼굴을 내민다. 1930년대 옛 ‘상만사(上萬寺)’의 터에 새롭게 지었다는 사찰이다. 기록이 없어 이 역시 정확한지는 모른다. 하긴 태고종·법륜종 등 출처마다 소속 종단이 다를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헷갈리면 물어보는 게 상책, 절간 앞을 서성이는 승려차림의 남성에게 물어보니 앞뒤 싹 자르고 ‘조계종’이란다. 요즘 중들은 요렇게 싸가지가 없나? 손아래 사람에게 반말 듣는 게 싫어 더 이상의 질문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귀경해 알아보니 예산(충남)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었다.

▼ 절간은 단출했다. 극락보전을 가운데 두고, 대 아래 좌우에 청향당(淸香堂)과 요사(寮舍)를 둔 모양새다. 전남도 유형문화재(10호)인 ‘오층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단(2층)과 몸돌(5층), 지붕돌로 이루어진 이 돌탑은 고려 때 상만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단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 떨어진 ‘탑리’라는 마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4~15세기 무렵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도 적고 있었다.

▼ 절에서 빠져나오는데 일주문 대신 돌부처가 잘 가란다. 그 싸가지 없던 중에 대한 미안함을 담았다는 듯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다. 그나저나 장승에 가까운 해학을 담은 부처가 무척 귀엽다. 뭉툭한 코에 눈은 왕방울처럼 툭 튀어나왔고, 작다란 입은 미소까지 띤다. 사람들은 저런 석불을 ‘민불(民佛)’로 분류한다. 권위적인 부처님이 아니라 평범한 중생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면서...

▼ 마을을 둘러봤다면 이제 서해랑길로 되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렇다고 아까 헤어졌던 지점으로 되돌아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버스정류장(오른쪽)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100m쯤 걸으면 탐방로를 만나게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인데, ‘T’자형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 수로의 둑길을 따라 200m쯤 걸었을까 18번 국도로 올라서고, 이정표(종점← 10.6㎞/ 시점↓ 1.4㎞)의 지시대로 ‘상만3교’를 건넌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번에는 임도로 들어서란다.

▼ ‘S’자형 커브를 그려대는 임도는 가파르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오르막을 유지한다. 그리고 구릉지의 고개를 넘어 굴포해안으로 향한다.

▼ 임도로 길지 않았다. 8분 만에 또 다시 18번 국도로 내려선다. 이어서 이정표(종점← 10km/ 시점↓ 2㎞)의 지시대로 고산사당(고산둑)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 고개를 넘자 호리병을 연상시키는 ‘굴포만(屈浦灣)’이 얼굴을 내민다. 움푹 파고들어온 만(灣)의 길이가 긴데다 입구가 좁아 내부는 천혜의 항구가 된다. 그래선지 중만마을·신동마을·굴포마을 등 많은 어민들이 저 바다를 업으로 하며 살아간단다.

▼ 산경표의 기본원리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뜻이다. 18번 국도는 이를 알기라도 한 듯 바닷가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 코너에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임회면 헌복동과 서망항을 잇는 ‘진도 미르길(7개 코스 19.7km)’이다.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하는 오솔길이 마치 용(龍)이 승천을 준비하려고 움직이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서해랑길은 몇 곳에서 그 ‘미르(龍의 古語)길’과 겹친단다.

▼ ‘워따메~ 불 나부렀는갑다’. 해무에 잠긴 ‘굴포항’이 마치 연기에 휩싸인 듯한데, 그게 또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어준다. 하지만 어민들에게는 삶의 현장일 뿐이다. 짙은 안개에도 풍요를 찾아 쉼 없이 들락거린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해안을 따른다. 중만마을(상만리)에서 신동마을(백동리)을 거쳐 굴포리까지, 호리병처럼 움푹 파인 ‘굴포만’의 절반(1.4km)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바닷가에 매어놓은 저 줄은 빨래건조용일까 아니면 생선건조용일까? 궁금증을 못 참고 주민에게 물어보니 ‘無主先占’이란다. 전형적인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신동(하)마을에서 ‘고산 윤선도’를 만났다. 고향도,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등지고 칩거하던 보길도도 아닌데 웬 고산이란 말인가. 알고 보니 그가 이곳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모양이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방조제를 쌓아 농지를 조성한 다음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줘 농사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은공을 기리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감사제와 당제를 지내왔단다.

▼ 사당은 새로 지은 듯한 모양새다. 맞다. ‘배중손 사당’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고산사당은 그동안 불편한 동거를 해왔었다. 지난 1999년 지역 유지들이 삼별초 지휘관인 배중손 장군을 기린다며 당집이 있던 이곳에 배중손 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에 마을주민과 윤씨 종친회 등이 역사 왜곡이라며 반발, 소송까지 진행해 법원 조정을 통해 2003년 배중손 사당 이전에 합의했다.

▼ 경내에는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그의 대표작을 새긴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孤山 尹善道(1587-1671)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의 한사람이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삶은 짧은 관직생활과 긴 유배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 우리나라 ‘민간 간척사업 1호’라는 ‘고산둑’은 사당 앞에 있었다. 1650년 쌓았다는 방조제는 높이 3m에 길이가 380m나 된단다. 고산의 숭고한 마음을 하늘도 알았음인지 이곳을 훑으며 지나간 수많은 태풍에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 둑에서 내려오니 멋진 꽃길로 연결된다. 둑 아래는 무궁화를 바탕으로 사이사이 백일홍과 금계국이, 반대편에서는 코스모스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이 길은 ‘굴포삼거리’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고산들녘’의 젖줄인 하천(이름은 모르겠다)을 거슬러 올라간다.

▼ 이때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산 선생이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는 농지로 그 넓이가 무려 100ha에 이른단다. 고산은 저 농지를 굴포·남선·백동·신동 등 4개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져 농사를 짓게 했단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나눔 정신’이 아니겠는가.

▼ 둑길을 8분쯤 걷다가 이정표(종점← 9.4㎞/ 시점↓ 4.6㎞)가 가리키는 진도휴양림을 향해 방향을 꺾는다. 이때 앞서가던 집사람이 환호성을 질러대는 게 아닌가. 길가가 온통 ‘돌나물(또는 돗나물, 돈나물)’ 천지였던 것이다. 냉이·달래와 함께 봄나물 3총사로 꼽히는데, 특히 돌나물 나박김치는 봄의 미각을 돋우는 ‘엄지 척’의 별미다. 그동안 집사람이 담아주는 나박김치의 맛에 길들어온 나도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 18번 국도로 올라선 탐방로는 잠시 후, 이번에는 ‘남선마을’로 들어선다. ‘임회면 남단의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의 남선(南仙)마을은 굴포리(屈浦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이자, 고산선생이 토지를 나눠졌다는 4개 마을 중 하나이기도 하다.

▼ 하지만 마을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마을을 스치듯 지나 구릉지 위로 난 농로(이정표 : 종점 9㎞/ 시점 5㎞)로 올라선다. 이때 널디너른 고산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천천히 걸으며 고산의 나눔 정신을 음미하며 보자.

▼ 입추가 지난지도 6일, 물러갈 줄 모르는 삼복더위지만 다가오는 철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벼를 비롯한 곡식이 여무는 시기’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오곡 중의 하나인 기장이 이미 고개를 숙였다. 만주에서는 저걸로 황주(黃酒)를 빚는다던데...

 

▼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질매봉(259m)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난 번 8코스 때 거론했던 진도지맥의 마지막 구간(총 길이 47km를 3개 구간으로 나누어 답사하는 게 보통이다)에서 솟아오른 봉우리 중 하나로 멋진 산세에도 불구하고 지맥 종주꾼들이 아니면 별로 찾지 않는 편이다.

▼ 구릉지로 올라선지 10분. 헌칠한 장부형의 질매봉을 소재삼아 수묵화를 그리다보면 어느덧 ‘동령개 삼거리’에 올라선다. 운림산방에서 배운 남종화 기법으로 고산들녘의 포근함도 덧칠해봤음은 물론이다. 참! 삼거리 도로표지판에 적힌 ‘국립진도자연휴양림’을 깜빡 빼먹을 뻔했다. 4년 전에 들러본 경험으로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잔잔한 섬 풍경, 울창한 수목이 함께 어우러진 멋진 휴양지였다.

▼ 동령개 삼거리부터는 꽤 오래 국도를 따른다.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올라가는 모양새이지만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보도를 따로 내놓지 않았으니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어야 할 일이다.

▼ 하지만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독특한 소리로 마음을 다독여준다는 ‘동령개마을’ 해안과 선착장, 거기다 더해 ‘불무도’로 여겨지는 예쁜 섬까지 눈을 담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 7분쯤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 근처에 ‘동령개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경은 물론이고 정자까지 지어놓아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 일행도 역시 10여 분을 머물며 준비해간 간식 통을 비우고 갔다.

▼ 공원에는 시와 그림을 담은 빗돌들을 꽤 많이 세웠다. 이곳 진도는 예술의 고장, 특히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산실이다. 그러니 선비들이 좋아하던 사군자가 빠질 리가 없겠지?

▼ 빗돌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시인들의 시가 적혀있었다. 그중에서도 이향아 시인의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며’가 눈길을 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지금,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고나 할까? 여름 산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 물릴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에... 잠시 후 용혜원 시인의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공원의 시비는 시보다는 글씨를 쓴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 앗! 누드화까지. 서양화의 전유물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동양화로도 그려지는 모양이다. 그것도 그럴 듯하게.

▼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는 무궁화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진도군은 무궁화 선양운동을 꾸준히 전개해왔고, 그 결과 220km의 무궁화 꽃길과 동산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이 무궁화동산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고갯마루(이정표 : 종점← 5.6㎞/ 시점↓ 6.4㎞)에서 임도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이 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천둥산(198.9m)의 허리께를 헤집은 다음 남동마을 해안으로 연결된다.

▼ 임도는 관리청인 산림청의 품격에 걸맞게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숲도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처럼 빽빽했다. 그런 길을 10분 남짓 걸었을까 모퉁이를 만난 임도가 크게 방향을 튼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모서리 바위벼랑이 제법 그럴듯하다.

▼ 그게 지자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모퉁이에 돌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런데 2%가 부족하다는 이 느낌은 무슨 이유일까? 지리산둘레길을 걷다가 만난 돌 의자가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한두 개도 아닌 수십 개의 돌 의자 마다 명심보감용 글귀를 새김으로써 읽는 재미까지 더하던 지혜, 그게 바로 최근의 화두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 짜증스러울 정도로 무더운 여름날, 집사람을 미소까지 띄게 만든 건 대체 뭘까? 아니 트레킹 중에 채취한 ‘왕고들빼기’를 맛있게 먹어주는 서방님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서방님 바라기인 사랑꾼이니까. 내 초점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 임도는 35분이나 걸려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서 삼거리, 이정표(종점→ 3.8㎞/ 시점↓ 8.2㎞)는 남도진성(오른편) 방향으로 가란다. 참고로 왼편으로 가면 남동리 포구로 연결된다. 마을과 5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걸로 보아, 마을 앞은 배를 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 남도진성과의 첫 만남을 ‘선소(船所)’로 시작된다. 선소란 배의 출입과 건조 및 수리를 하던 곳이다. 수군의 필수시설이라는 얘기일지니, 남도포진의 축조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성곽에서 500m나 떨어졌다는 건 약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곽 앞까지 배가 들어갈 수 없어 별 수 없었겠지만... 참고로 남도진성은 15세기 초 전선이 배치되고 4개의 수군진이 설치되는 등 해안요새로 활용되었단다.

▼ 지난 8코스 때 만났던 죽림해안의 방풍림에는 못 미치겠지만 남동마을에서도 곰솔 숲을 만났다. 작지만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라면 그 용도나 규모가 만만찮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철갑옷을 입은 장수들처럼 일렬로 쭉 늘어서서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모래를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소금 물방울을 맞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으며...

▼ 남동리 앞바다는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이다. 그 안에 발달된 광활한 갯벌은 철을 가리지 않고 꿈틀대는 생명을 품는다. 그리고 척박한 인간의 삶에 풍요를 내어준다. 그뿐 아니다. 우리처럼 서해의 물길을 따라 걸으며 삶의 길을 찾아보려는 나그네들에게는 정신적인 풍요를 선사한다.

▼ 사대(射臺, 궁술 훈련장)를 지나자 쌍운교 너머로 ‘남도진성(南桃鎭城, 사적 127호)’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제주도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싸웠다는 곳이다. 아니 한참 이전인 백제(당시 진도에는 도산현과 매구리현이 있었다) 때 쌓았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13세기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로 인해 이 일대가 수시로 약탈당했고, 이에 세종 20년(1438년) 이곳에 해안방어 부대격인 수군만호부(萬戶府)를 창설한다. 그래도 피해가 이어지자 숙종 9년(1683년)에는 만호보다 상급부대격인 남도진(南桃鎭)을 설치한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본거지가 된다. 성곽은 조선 초기 축성당시 읍성 형태를 띤다.

▼ 3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남문(南門)이지만, 삼별초 당대의 기록이 모두 사라진 탓인지 성문은 편액 하나도 달지 못했다. 그래도 성문 앞에는 그럴 듯한 옹성(甕城)까지 두었다. 하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다.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야할 방패막(女牆)이 없어 옹성으로 나갔다간 적의 표적이 되기에 딱 좋겠다.

▼ 서문(西門)은 복원되지 못해 아예 이가 빠진 모양새다. 복원은커녕 터로만 남아있는 동문은 이보다도 못했다. 이렇듯 남도진성은 넓고 거칠었다. 부분적으로 공사하는 곳도 있지만, 문화재라는 게 늘상 수리하고 고치고 복원하는 게 일 아니던가.

▼ 안쪽에는 만호가 근무하던 관아와 내아, 객사가 복원되어 있었다. 지난 2010-2011년 동신대학교 박물관 주도로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시켰다고 한다. 발굴결과라고 해봐야 우물과 석축, 기와나 옹기·백자 조각, 상평통보가 전부였다지만... 망국과 함께 남도만호 역시 스러져갔고, 그들이 사용하던 변변치 못한 생활도구가 유구의 전부였던 셈이다.

▼ 600여m 길이의 성벽은 높이가 3m-4m로 일정하지가 않다. 높낮이가 불규칙적인 지형에 맞춰 쌓았기 때문이다. 특히 안쪽이 낮고 바깥쪽이 높은 점은 다른 성과 다른 또 다른 특징이다. 성벽에는 (동·서·남) 3개의 문과 4개의 치성(雉城), 그리고 4개의 수문(水門)을 두었다. 성 밖 동·남쪽으로는 해자도 길게 냈다.

▼ 남문을 빠져나오니 ‘단운교(單雲橋)’가 눈에 띈다. 해자(垓字) 역할을 하던 개울(세운천)에 놓인 2개의 홍교(虹橋,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213호) 중 하나이다. 무지개가 하나인 것이 단운교이고, 쌍으로 핀 것이 ‘쌍운교(사진 생략)’이다. 두 다리는 주변의 돌을 다듬지 않은 채로 사용한 게 특징이다.

▼ 성곽을 모두 둘러봤다면 이제 날머리인 서망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 길을 나서며 저 성에 살았을 민초들의 삶과 애환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삼별초·왜구·왜란 등을 생각하며, 전쟁도 침략도 없는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게 해준 조물주께 감사드려본다.

▼ 삼별초에 역사적 의의가 부여된 후부터 철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이 모여드는데, 어찌 특산품판매장 하나 없겠는가. 뭐라도 하나 살까 기웃거리는데 집사람이 옷소매를 잡아챈다. 4년 전 형제들과 함께 진도를 찾았을 때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특산품이라는 (건조)톳을 사서 형제들에게 나눠줬는데, 집에 와서 먹어보니 톳이 아니라 미역 자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 집 하나였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 성곽 밖에는 ‘전원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58개로 구획된 부지에 들어선 가옥은 25채 뿐, 목재를 쌓아둔 곳도 있는 걸로 보아 공사가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과 팽목항·남도국악원·미르길(산책로) 등의 접근성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니 한번쯤 묵어볼 만도 하겠다.

▼ 함께 걷던 ‘몽중루’님이 혹시 울면서 넘어왔냐며 너스레를 떠신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내 표정을 보더니, 우리가 방금 ‘천둥산 박달재’를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갯벌 너머 오른편 산봉우리가 바로 천둥산(198.9m)이란다. 맥없이 점잖은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에게도 유머스러운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 마을을 벗어나니 이번에는 ‘전남대학교 자연학습장’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하나같이 행락 차림이 아니겠는가. ‘학습장’이라고 해서 학습시설인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교직원들의 휴양시설이지 싶다.

▼ 남도진성에서 서망항까지는 2.8km나 된다. 줄곧 차도나 걸어야할 뿐 눈요깃거리라고 전무한 편이다. 그나마 햇볕까지 가려주지 못하니 여름철 코스로는 최악인 구간이다. 다들 축 늘어져서 걷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이지만 시야가 열리면서 남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점이다. 사자도와 불무도로 여겨지는 섬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곳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라는 걸 일깨워 준다.

▼ 남도진성을 나선지 30분, 서망항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고, 몇 걸음 더 걸어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0.5㎞/ 시점↓ 11.5㎞)에서 ‘서망항’으로 내려선다.

▼ 날머리는 서망항(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서망항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탐방로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마을표지석과 마을회관 앞을 지나면 곧이어 해안가에 이른다. 이어서 서망항에서 가장 큰 건물(진도항로표지사무소)로 가면 된다. 항로표지사무소 건물 근처가 날머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가어항인 서망항(西望港)은 가을 꽃게잡이가 풍어를 이루는 전국 꽃게 주산지다. 인근 조도 해역에 매일 40여 척이 출어해 1척에 200kg가량을 잡아 하루 위판량이 3t~5t에 달한단다. 또한 싱싱한 횟감과 수산물을 살 수 있는 수산물 시장과 맛집들도 있다.

▼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10코스)는 해경파출소 뒤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제시된 거리보다 1.88km가 더 많은 13.88km를 걸었다. ‘상만리 비자나무’를 다녀온 때문일 것이다.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 무더위였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지난 8코스의 생략부분은 ‘여귀산 돌탑길’을 살짝 엿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름 그대로 여귀산(女貴山) 아래에 돌탑들을 세워 조성한 길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귀산 남신과 여신의 전설을 돌탑의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옛날 여귀산을 중심으로 죽림쪽에는 남신, 탑립쪽에는 여신이 사이좋게 지냈는데,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남신이 여신을 지배하고자 일 년에 한 번씩 힘과 지혜를 겨루기로 했고, 지는 신이 이기는 신의 뜻에 따르기로 했는데, 여신이 계속 이기자 남신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시켜 여신의 탑을 파괴했고, 탑을 잃은 여신이 힘과 지혜를 쓰지 못해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남신과 여신을 화해했고, 마을 사람들은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돌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돌탑 주변엔 시비도 세웠다. 이 지역 문인들이 쓴 창작시라고 한다. 진도의 삼락(三樂) 중 하나인 서화(書畫)가 밖으로 튀어나왔다고나 할까? 남도 예술혼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 남종문인화의 산실인 운림산방의 맥이라고 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잘 그린 수묵화 몇 점도 바위 속으로 파고들었다.

▼ 고갯마루는 아예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詩야 그림아 바람과 놀자’.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바로 글씨와 그림, 노래가 그것이다. 그러니 이곳 여귀산 돌탑길에선 얕은 예술 지식을 함부로 꺼내놓지 말자.

서해랑길 8코스(운림산방-남도국악원)

 

여행일 : ‘22. 7. 30(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의신면과 임회면 일원

여행코스 : 운림산방→운림예술촌→옥대마을→의신면소재지→만길마을→원두마을→송정마을→죽림마을→탑립마을→귀성삼거리(거리 및 시간 : 24km, 실제는 돈지마을에서 죽림마을까지 10.58km를 2시간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8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김통정 장군의 퇴각로와 여러 곳에서 겹치는 아픈 역사의 길이다. 또한 돈지에서는 국견인 진돗개의 진수도 엿볼 수 있다.

 

▼ 들머리는 운림산방 주차장(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를 타고 진도읍으로 들어와 남동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왕온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운림산방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운림산방·첨찰산·쌍계사·상록수림 등이 있는 사천리 일대는 ‘사천관광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렇다고 관광진흥법에 근거한 관광지는 아니다. 그저 진도군이 관내 관광지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지리적 권역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 ‘운림산방’과 ‘구성삼거리(남도국악원)’를 잇는 구간으로 길이가 24km나 된다. 그래선지 산악회에서는 ‘죽림갯벌체험장’까지 16.5km만 걷겠단다. 나머지 7.5km는 9코스에 추가시키겠다며. 우리 부부는 그보다도 더 줄여 의신면소재지인 ‘돈지’마을에서 시작했다. 볼거리도 없는 산길보다는 역사유적지인 ‘왕온 묘’를 둘러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다. 거대한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호국정신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버스가 들어왔던 길(진도읍 방향)을 되돌아 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버스에 남았다. ‘왕온 묘’가 있는 삼거리(‘왕온로’와 ‘운림산방로’, ‘돈지로’가 나뉜다)까지 버스로 이동시켜준다는 황사장님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 코스를 단축하면서까지 둘러보고 싶었던 ‘왕온 묘(王溫 墓)’의 주차장에 도착하니 ‘왕무덤재(또는 왕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왕온’이 몽골 장수 홍다구에게 붙잡혔다는 곳이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용장성이 무너진 뒤 진도읍 방향으로 퇴각했으나 끝내 저 고개를 넘지 못했던 모양이다.

▼ 왕온은 ‘논수골(사천리 ‘사하마을’의 빗돌에 ’논수동‘이란 지명이 병기되어 있다)’에서 참살(慘殺) 당했다. 당시 고려군은 그의 참수를 반대했었다나? 목을 치느냐 마느냐로 논란을 벌였다고 해서 논수동(論首洞)이란 지명이 붙었고, 논수동 옆 개울은 삼별초군의 피로 물들었다고 해서 핏기내란 이름을 얻었다. 아무튼 그의 시신은 누군가에 의해 수습되었고 부근 산자락에 묻혔다. 이를 지자체에서 발굴해 역사유적지(기념물 제126호)로 보존·관리해오고 있다.

▼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석등으로 치장해 왕릉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맞다. 고려 정부로서는 반란군의 수괴(首魁)에 불과했겠지만 삼별초를 위시한 남녘 땅 사람들에게 ‘왕온’은 어엿한 왕(王)이었다. 진도를 황도(皇都)라 부르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니 말이다. 주변 섬과 육지를 공격해 터전을 넓혔음은 물론이다. 완도에 송징, 남해에 유존혁, 제주에 이문경을 보내 관리하기도 했다.

▼ 하지만 무덤은 ‘왕릉’으로서의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크기(직경 7m/ 높이 2.5m)도 작을뿐더러 석물도 보잘 것이 없었다. 무덤 앞 작은 문인석만이 연민을 자아낼 뿐이다. 참! 왕온의 묘 아래 2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무덤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묻혀있다고 한다.

▼ 실질적인 트레킹은 ‘의신119지역대’에서 시작했다. 돈지마을(의신면 소재지)의 뒤쪽으로 지나가는 18번 국도변에 위치하는데, 운림산방에서 시작된 서해랑길 8코스가 소방서 앞에서 마을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 이정표는 8코스의 길이를 24km로 적고 있다. 또한 이곳이 출발지에서 7.1km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된 죽림갯벌체험마을은 종점을 7km쯤 앞둔 지점이다. 결과적으로 9.8km만 걸으면 되는 셈. 모처럼 ‘느림의 미학’이라도 추구하며 걸어볼 일이다.

▼ 진도농협의 울금가공사업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울금(蔚金)’은 생강과에 속하는 ‘뿌리채소’다. 혈관청소와 염증치료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국산 생산량의 70%가 이곳 진도에서 생산된단다. 진도에서 생산되는 울금을 모아 상품화시키는 공장이라고 보면 되겠다.

▼ 울금은 항암과 항염증에 탁월한 ‘커큐민’ 성분이 다량 함유되었다는 뉴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 축적되는 독성을 분해한다는 연구도 나왔다. 각종 식중독 원인균인 살모넬라와 비브리오균 등의 생육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단다. 그러니 집산지인 이곳에 울금판매장 하나쯤 없겠는가. 울금 분말을 활용한 ‘스파’까지 만들어 힐링과 쇼핑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했다.

▼ 탐방로는 ‘돈지(墩地)’ 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돈지’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돈대(墩臺)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만큼 요충지였다는 얘기고, 그게 지금은 의신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마을 앞 들녘은 고려시대 삼별초의 최후 싸움터이기도 했다.

▼ 이곳 돈지마을은 진도의 4대 생활권 중 하나로, 진도읍장 다음으로 큰 ‘의신장(義新場)’이 열린다. 매달 1·6일에 장이 서는데, 의류·과일류·생선류·반찬류까지 다양한 거래가 이루어진단다. 김과 미역은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직거래가 이루어진다니 날짜를 맞추면 질 좋은 특산품도 사갈 수 있겠다.

▼ 앗!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나? 이런 시골에서조차 부부 공동으로 문패를 달았는데, 우리 집의 모든 재산은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있으니. 니것 내것 없이 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 돈지마을의 또 다른 명물은 ‘진돗개’다. 우리나라 개 중에서 진돗개가 한국인의 기질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아무리 잘 먹고 편한 환경에 보내주어도 원래의 주인을 찾아가는 충직성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복단할머니의 ‘백구’다. 대전으로 팔려갔다가 7개월 만에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돌아왔다. 길러준 주인을 잊지 못해 대전에서 진도까지 팔백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온 것이다. ‘백구테마센터’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일종의 기념관이다. 1층에 도·농 교류실과 북카페, 2층에는 다목적실(숙소 포함)을 배치했다.

▼ 운동장에는 ‘돌아온 백구’를 기념하는 여러 조형물을 세웠다. 백구는 1988년 돈지마을 박복단할머니 집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대전으로 팔려간다. 하지만 7개월 만에 뼈와 가죽만 앙상한 채로 300km를 걸어 주인에게 되돌아왔다. ‘한번 주인이면 영원한 주인’인 이야기가 알려지자 백구는 탁월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모 컴퓨터회사의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때 받은 모델료는 박 할머니의 식구가 사경을 헤맬 때 병원비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귀소본능에 충직성까지 더했다고나 할까? 요즘 정치인들에게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정치인들이 백구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 백구는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새끼까지 낳고 살다가 2000년 2월 13세의 나이로 주인 품에 안겨 숨졌다. 이런 백구의 얘기는 동화 ‘돌아온 진돗개 백구’와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로 세상에 알려졌고, 지금 우리가 둘러보고 있는 테마센터까지 세워졌다. 참! 그 옆에는 처녀의 몸으로 돈을 벌어 마을 발전을 위해 거금을 희사했다는 ‘희령 조희균여사’의 송덕비도 세워져 있었다.

▼ 종합안내판은 돌아온 백구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곳에서 열리는 논배미축제를 소개하고 있었다. 추수 후 논에서 즐기는 축제로, 짚공 차기·굴렁쇠 굴리기·벼가마 지고 달리기·논미꾸라지 잡기·물동이 이고 나르기·말뚝박기 등 어린 시절에 논배미에서 즐겁게 놀던 놀이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단다.

▼ ‘의신 들소리비’도 보인다. ‘의신들노래’는 지산면(진도군) 일원에서 불리던 남도들노래(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 51호)에 대비되는 노래로 의신면 일대에서 논일을 하면서 불렀다고 한다. 노래의 구성 등에 대한 설명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대체 뭔 소린지...

▼ 돈지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널따란 들녘의 한가운데로 향한다. 돈지벌판은 패퇴하던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게 또 한 차례 살육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는 시체가 널렸다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많은 시체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 요즘은 과학영농이 대세다. 생명공학을 활용한 품종개량, 농업기계화, 정보기술을 활용한 관리시스템 도입 등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일지니 저 깃발에 적혀있는 항공방제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돈지권역의 전원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돈지마을을 위시하여 향교마을, 옥대마을 중리마을을 포함하는데, 신비의 바닷길로 나가는 길목이며, 삼별초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 돈지들녘은 의신천(이정표 : 종점 15.6㎞/ 시점 8.4㎞)의 풍부한 물길이 흐르면서 옥토로 변한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에서 발원했으니 수량이 풍부할 것은 당연, 거기다 옥대천과 청룡천까지 보태 몸집을 부풀리며 들녘을 지나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의신천을 건너 만길재로 향한다. 이 길은 김통정장군의 퇴각로이기도 하다. 논수골과 돈지들녘에서 연이어 패한 김통정은 저 고개를 넘어 금갑진으로 가서 배를 구해 제주도로 탈출하고, 확인되지는 않지만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 첫 만남은 ‘궁녀둠벙(또는 여기·급창 둠벙)’이다. 김통정과 함께 퇴각하던 여기(女妓)·급창(及唱)·궁녀 등이 몽고군에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며 몸을 던졌다는 연못이다. 간척공사로 메워진 탓에 지금은 비가 와야 물이 차고 크기도 손바닥만 하게 변했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는 날이면 둠벙에서 여인네 우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나?

▼ 궁녀둠벙은 백제 멸망 때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에 비견(규모는 작지만 바위절벽도 있다)되는 전설을 지녔다. 그런 호재를 지자체에서 놓쳤을 리가 없다. 유형유산(4호)으로 지정한 다음 둠벙에 난간까지 둘러 보호하고 있었다. 쉼터용 정자(동백정)를 지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 5분쯤 걸어 올라선 고개는 ‘만길재(이정표 : 종점 14.9㎞/ 시점 9.1㎞)’이다. 삼별초의 궁녀들이 이 고개를 넘다 몽고군에게 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넘지 못했다는 마음 아픈 고개이다. 이 고개 너머에는 ‘부녀동(‘여인들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現 거룡리 ‘신정마을’이다)’이란 지명도 있다. 삼별초군이 함께 데려 갈 수 없는 부녀자들을 남겨놓고 갔다는 곳이다.

▼ 만길마을로 향한다. 김통정 군은 이 부근에서도 많은 시체를 남기며 패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지명이 ‘송장등(많은 시체가 널려있는 야산)’,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 송장등이란 지명 때문일까? 이 구간에서 우린 유난히도 많은 빗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7코스 때, 사우재실(祠宇齋室)이 줄을 잇던 용장마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 만길재를 넘은지 10분 만에 ‘만길(晩吉)’마을에 도착했다. 만길·도명·도목·도동·원두 등으로 이루어진 만길리(법정 동리)의 중심마을로, 낮은 구릉지 사이의 깊숙한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탐방로는 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참! 주의할 점도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곧장 직진하지 말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 마을을 빠져나와 100m쯤 더 걸었을까 삼거리와 마주했다. 도명마을과 원두마을로 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인데, 이정표(종점 14.1㎞/ 시점 9.9㎞)는 원두마을로 갈 것을 지시한다. 이어서 ‘신길 영농조합법인’의 창고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 고개를 넘자 ‘빈지머리들’이 널찍하니 펼쳐진다. 진도의 들녘은 저렇듯 야트막한 산과 산 사이에 발달되어 있다. 특히 남쪽의 들녘들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삼별초의 배중손장군이 진도에 진을 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웬만큼 모여 살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 널디너른 빈지머리 들녘을 횡단하자 ‘원두(元頭)’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만길리’에 속한 자연부락인데, 김통정의 군대는 이곳에도 흔적을 남겼다. 마을 앞 낮은 고개를 넘을 때 여몽연합군의 화살에 맞아 많은 말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사마골’, 사람도 지치고 말도 지쳤으니 날아오는 화살을 어찌 막았겠는가.

▼ 이 마을은 원래 남해와 접한 해안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조제가 축조된 후 마을 앞은 널따란 농경지가 되었다. 덕분에 폭우 때면 TV 카메라에 나타나기도 하는 침수지역이지만... 참고로 만길마을에서 원두마을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원두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송정저수지의 수로를 따라 높이 7.2m의 제방 위로 올라간다.

▼ 잠시 후 송정저수지(이정표 : 종점 12.6㎞/ 시점 11.4㎞)로 올라선다. 1926년에 축조되었다는 저수지는 무척 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풍경과는 다른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무기수 장씨의 16년’이란 부제로 내보낸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아내 살인혐의를 받아 무기 복역 중인 장동오에 대한 수사를 검증해본 시간이었다. 결론은 ‘수사결과를 못 믿겠다’이었을 게다.

▼ ‘이 멋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수면 위에 떠있는 저 시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혹시 ‘수질 측정’을 위한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2020년엔가 이곳 송정저수지의 수질이 농업용수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었으니 말이다.

▼ 송정 저수지 부근에는 폐허로 변한 집들이 몇 채 있었다. 공가가 늘어나는 현실은 이곳 진도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 저수지 상류는 18번 국도(이정표 : 종점 12㎞/ 시점 12㎞)가 지난다. 탐방로는 도로를 건너 송정들녘(kakaomap은 ‘당매들’로 적고 있었다)으로 들어선다. 활착을 끝낸 벼가 무럭무럭 자라는 논이 좌우로 드넓게 펼쳐진다. 그런데 저 논은 어떻게 물을 댈까? 저수지보다 한참이나 지대가 높은데...

▼ 고개를 갸웃거리다보면 어느새 ‘송정(松亭)’ 마을이다. 5개 자연부락(송정·오촌·죽청·탑곡·활곡)으로 이루어진 송정리(법정 동리)의 본 마을로, 지명은 소나무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정리의 특징은 낮은 산지로 둘러싸인 구릉지라는 점이다. 하지만 송정저수지에 접한 탓인지 이곳 송정마을은 논으로 둘러싸인 모양새다. 참고로 원두마을에서 송정마을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송정마을을 지나면서 주변이 온통 대파 밭으로 변한다. SBS ‘만남의 광장’에서 소개됐을 정도로 유명한 진도의 특산물이다. 그런데 ‘장마이되 장마답지 않은 장마철’이라던 어느 호사가의 말처럼 긴 가뭄에 지친 대파는 잎 끝이 누렇게 메말라간다. 오늘은 모처럼 비가 내린다. 이보다 거세지면 트레킹에 지장이 되겠지만, 이왕에 오는 비이니 수북하게 내려줬으면 좋겠다.

▼ 잠시지만 죽청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르기도 한다. 이곳 진도 아니 우리나라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고 싶은 길이다. 도로가 온통 꽃으로 치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목백일홍(배롱나무)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는데, 그 사이사이 백일홍과 금계국이 나도 있다며 활짝 미소를 보내온다.

▼ 탐방로는 이제 ‘매듭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부드럽게 너울대는 구릉지 위로 구불대며 흘러가는 농로가 참으로 매혹적이다. 아니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 구릉지라고 해서 논이 못 들어서겠는가. 물론 논에 댈 물부터 해결되어야겠지만. 그 해답은 ‘둠벙’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이 필요한 논농사를 위해 우리 조상들이 고안해낸 게 ‘둠벙’.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작은 웅덩이다.

▼ 둠벙으로도 해결 못하는 곳에는 밭벼를 심었다. 그런데 이삭을 내민 벼에 하얀 무엇이 붙어 있다. 벼꽃이다. 벼꽃은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흔들리며 제꽃받이로 나락을 여물게 한단다. 문득 흔들리는 벼꽃에서 3천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를 봤다던 어느 글이 떠올랐다.

▼ 고개를 오르다보면 들녘 너머에서 ‘죽청’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군락을 이룬 푸른 대나무가 지명으로 굳어졌다는데, 구릉지에 위치한 탓에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고 한다. 그게 요즘은 논농사보다 소득이 더 낫다지만.

▼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도로(이정표 : 종점 10.2㎞/ 시점 13.8㎞)에 올라선다. 상미마을(임회면 명슬리)과 죽청마을(의신면 송정리)을 잇는 2차선 도로(매실로)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임도로 들어선다.

▼ 이때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선 태양광발전소가 눈에 들어온다. 대학봉과 용수봉 잇는 능선의 남쪽 산비탈인데 크기가 만만찮다.

▼ 임도는 봉호산(193.2m)의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그래선지 생각보다 훨씬 가팔랐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대신 좋은 점도 많다. 곳곳에서 조망이 터지는가 하면 편백나무 숲을 옆구리에 끼고 걷기도 한다.

▼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매듭재’다. 임회면 명슬리와 용호리의 경계인 고갯마루로, 죽청마을(의신면 송정리)과 죽림마을(임회면 죽림리)을 잇는 임도가 지난다. 하지만 지명의 유래나 얽힌 사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 고개를 내려가자 커다란 시설단지가 나타난다. 10개도 넘는 사일로에다 조선소에서나 볼 법한 크레인까지 갖췄다. 양돈장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양돈장 근처 삼거리다.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갈림길이지만, 길을 잃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 카메라에 잡아봤다. 이정표(종점 9.3㎞/ 시점 14.7㎞)까지 세워져있었는데, 길이 헷갈린 이유를 모르겠다.

▼ 매듭재에서 10분. 무지개재에 올라섰다. 임회면 용호리와 죽림리의 경계이자, 죽청마을에서 시작된 입도가 이 고갯마루를 지나 죽림마을로 내려선다.

▼ 고갯마루에는 ‘진도지맥 무지개재, 105m)’라고 적힌 코팅지가 매달려있었다. 진도지맥(珍島枝脈)은 해남반도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에서 시작해 진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 47km의 산줄기다. 금골산·첨찰산·여귀산 등을 일구며 서망항까지 내려와 백도 앞 갯바위에서 그 맥을 다한다.

▼ 고갯마루를 지난 임도는 가파르게 내려선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평하게 변하더니 죽림갯벌을 향해 길게 이어나간다.

▼ 이 무렵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옅은 해무가 깔린 바다는 가히 몽환적이다.

▼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죽림마을에 이른다. 죽림리(竹林里, 법정 동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죽림·강계·동헌·헌복동·탑림) 중 하나다. 아니 본래의 죽림마을은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일대의 해안을 모두 묶어 법정단위인 ‘죽림’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날머리는 죽림어촌체험마을 안내센터

도로(국도 18호선)를 건너 동헌마을 쪽으로 향한다.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7.0㎞/ 시점 17.0㎞)는 어촌체험마을 안내센터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 죽림리는 농림수산식품부가 지정한 ‘어촌체험마을’이다.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갯벌을 체험하러 이곳을 찾는다. 무지개재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걸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50분 만이다. 앱이 10.58km를 찍고 있으니 모처럼 느긋하게 걸었나 보다.

▼ 안내센터 앞 바닷가에는 안내판을 내걸었다. ‘체험’에 ‘휴양’까지 더한 걸 보면 숙박시설을 갖추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조개잡이 체험은 강계마을과 동헌마을 사이의 갯벌에서 가능하다. 갯샘과 독살 체험도 할 수 있단다.

▼ 갯벌로 들어가는 입구는 조형물을 세웠다. 그런데 문설주 나무가 과일 대신 조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유전의 법칙’을 바탕으로 진화과정이 순환되다보면 과일나무에서 조개가 열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 죽림해안은 드넓게 열리는 갯벌이 큰 자랑거리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 양식업에 종사한단다. 10월부터는 김을 수확해야 하고 2월에 미역을, 5월 말에는 다시마를 거두기 시작해 7월까지 쉴 틈이 없단다. 여름 한때 잠시 쉬는 기간이지만, 이때는 또 어촌체험으로 분주해진다.

▼ 갯벌 탐방객들은 가족단위가 대부분이었다. 다들 소정의 입장료(성인 5천원, 학생 3천원)와 장비사용료(장화·호미·바구니 각 천원)를 냈음은 물론이다. 이용시간(간조시간 전후 1시간씩)과 채취량(빌린 바구니로 가득)에 대한 안내도 이미 받았을 것이다.

▼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갯샘’은 실물 대신 안내판으로 대신한다. 아이를 갖지 못하던 50대 여인이 샘물을 길어다 목욕물과 정화수로 사용한 뒤 아들을 얻었다는 신령스런 우물이다. 마침맞게 물도 빠져나갔지만 다가가보는 것까진 그만두기로 했다. 저 지난달 결혼기념 삼아 들렀던 제주도에서도 두어 번이나 구경했었기 때문이다.

▼ 보건소를 지나자 솔숲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일렬로 쭉 늘어선 곰솔이 철갑옷을 입은 장수들 같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 소금 물방울을 맞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다. 어촌이던 죽림마을은 400년 전 마을 앞에 논을 만들면서 농업이 시작됐단다. 하지만 바닷바람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고, 주민들은 바다와 농토 사이에 나무를 심었다. 그러니 농업을 위해 조성된 방풍림이 분명하다.

▼ 세월이 흘러 나무는 숲을 이뤘고, 지난 2005년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7년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으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소나무와 사람의 공존, 사람은 숲을 가꾸고, 숲은 논과 밭을 해풍으로부터 보호하고 갯벌에 놀러온 여행객들에게는 그늘을 제공해준다.

▼ 동쪽 해안, 즉 강계마을로 향했다. 죽림마을의 어선이 정박된 포구는 갯벌의 서쪽 끝,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야 만날 수 있다. 썰물에도 배가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가기 싫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강계마을 앞에 50m쯤 되는 방파제를 쌓아 배를 댈 수 있도록 했다.

▼ 방파제에 서자 갯벌 너머 멀리 금갑해변이 드러난다. 김통정 장군이 잔여 병력과 함께 배를 탔다는 금갑포구(金甲浦口)는 저 해변의 뒤, 그러니까 길쭉하게 삐져나온 곶을 가로질러야만 만날 수 있다.

▼ 강계마을에 이르니 죽림해안의 진경이 펼쳐진다. 접도가 반도처럼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그 사이 바다에는 우후죽순이라도 되는 양 크고 작은 섬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 해안의 동쪽 끄트머리, ‘강계마을’에는 조개구이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수익원은 굴이라고 한다. 주민들이 기른 굴을 구워주는 모양이다. 간단한 주류와 함께 굴을 넣은 전·라면·떡국 등을 사이드메뉴로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겨울이 제철인 듯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의 풍경이로다.’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김정호 선생이 진도홍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읊은 노래다. 그런 홍주를 제조하는 공장이 강계마을에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어 구입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애주가의 처임을 자부하는 집사람의 배경에 세우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서해랑길 7코스(용장성-운림산방)

 

여행일 : ‘22. 7. 23(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군내면·고군면·의신면 일원

여행코스 : 용장성→용장마을→성재→오일시(고군면)→죽제산 산림욕장→임도→헬기장→첨찰산(왕복)→운림산방(거리 및 시간 : 12.2km, 실제는 12.73km를 3시간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7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진도의 내륙을 걷는 이 코스의 주요 볼거리는 용장성과 운림산방, 호국의 충정과 남도 예술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단 첨찰산의 9부 능선을 넘어야 하는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 들머리는 용장성유적지 주차장(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를 타고 진도읍으로 내려오다 금골교차로(군내면 둔전리)에서 왼편 둔전길(같은 18번 국도다), 세등삼거리(군내면 세등리)에서 왼편 벽파진로, 용장삼거리에서 용장산성길로 옮기면 잠시 후 용장성유적지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을 이용(‘진도 용장성’을 입력)해 찾아갈 수도 있다.

▼ ‘용장성’과 ‘운림산방’을 잇는 12.2km짜리 구간으로 바다를 만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대신 높이가 485.2m나 되는 ‘첨찰산’의 9부 능선을 넘어야 한다. 난이도가 ‘최상(5등급 중 5번째)’인 이유일 것이다. 볼거리는 시종점인 용장성과 운림산방이 전부, 하지만 발품을 조금만 더 팔면 첨찰산 정상에서의 조망과 명량대첩에서 산화한 민초들의 묘역을 눈과 가슴에 담아갈 수 있다.

▼ 버스가 들어왔던 길(용장산성 길)을 되돌아 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용장성과 연동마을을 잇는 ‘삼별초 호국역사탐방길’의 3코스이기도 하다. 참! 용장성 입구 나뭇가지에 걸려있다는 ‘7코스 시작점’ 팻말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무심코 지나쳐버렸다는 게 옳을 표현이겠다.

▼ 길을 나서기 전, 배중손장군과 삼별초에 목례를 드려본다. 그들은 바다에선 보이지 않는 후미진 산속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높은 ‘망바위’에서 적의 침입을 관찰하면서 항몽 투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입도 9개월 만에 적들이 바다가 아닌 내륙의 우회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허를 찔려 그만 막을 내려야 했다.

▼ 출발지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 먼저 다녀간 이들을 당황시켰다던 개 사육장은 무사히 지나칠 수 있었다. 갈기를 세우며 덤벼든다던 문제의 개가 꼬리를 감추고 실실 내뺐기 때문이다. 양 손에 스틱을 움켜쥔 내 기세에 기가 꺾였는지도 모르겠다.

▼ 7분쯤 걸었을까 도로를 벗어난 탐방로가 용장마을(이정표 : 종점 11.8㎞/ 시점 0.4㎞)의 고샅길로 들어간다. ‘용장(龍藏)’은 ‘용을 품는다’는 뜻이고, 예로부터 용은 임금을 상징했다. 1270년 삼별초군을 이끈 배중손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한데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마을의 정자도 ‘삼별초정자’, 다른 하나는 ‘용장정자’였다.

▼ 마을가꾸기 사업은 현재진행형인가보다. ‘용장의 사계’를 담으려는 모양인데, 화폭만 만들어놓았을 뿐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아니 각자의 생각대로 그림을 그려보라는 차원 높은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 마을은 당산나무의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진도대교가 착공(1984)되기 전 진도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는 벽파항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그 덕에 용장리는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 되었다. 그러나 벽파항의 뱃길이 사라진 지금은 빛 바랜 사진속에서나 옛 영화의 흔적을 느낄 뿐이다.

▼ 당산나무를 끝으로 마을을 벗어난다. 그렇다고 그냥 떠나지는 말자. 마을 입구의 ‘오호순국지혼(嗚呼殉國之魂)’ 비석에 묵념을 드려보자는 얘기다. 한국전쟁 때 이곳 용장마을도 극한적 ‘Ideologie’를 피해가지는 못했단다. 좌우익의 충돌로 주민 백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중 좌익에 의해 희생된 83명을 추모하는 비이니 그냥 지나쳐서야 될 일이겠는가. 다만 1951년 10월에 세워지다보니 우익에 의해 희생된 30-40명이 빠져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위로도 함께 해주면 어떨까?

▼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탄다. 벽파진로(벽파진과 고군면 오일장을 잇는 2차선 도로)로 연결되는데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넓다.

▼ 마을의 역사는 사우재실(祠宇齋室)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문중마다 하나씩 만들었는지 여러 개가 보였는데, 은모사(恩慕祠)라는 재실은 규모까지 꽤 컸다.

▼ ‘이 뭐꼬?’ 샘이라기엔 엉성하고, 그렇다고 ‘둠벙’이라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다. 하지만 석축까지 쌓는 등 정성들여 판 흔적이 역력하다. 용장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저 우물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도로를 벗어난 탐방로가 임도(이정표 : 종점 11.1㎞/ 시점1.1㎞)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철천산(162.1m) 숲속으로 들어선다. 넓지만 다듬지 않은 거친 산길이다. 허리춤을 넘어설 정도로 웃자란 잡초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는다.

▼ 하지만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래 편백나무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아니던가. 오늘은 첨찰산 고갯마루를 넘어야하는 지난한 여정, 그에 필요한 원기를 미리 보충해보면 어떨까?

▼ 숲속으로 들어선지 5분 만에 고갯마루(Kakaomap은 ‘성재’로 표기하고 있었다)에 올라섰다. 100m 남짓의 나지막한 고개지만 민초들에겐 이마저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넘나들며 던져놓은 돌들이 모여 원뿔 모양의 돌무더기로 변했고, 서해랑길의 리본까지 더해지면서 이젠 서낭당이 되었다.

▼ 고개를 넘자 도평·송산(고군면)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6구간 때 만났던 둔전 들녘만은 못해도 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다.

▼ 길가 담배 밭은 담배 반 풀이 반이다. 잎도 따지 않은 채로이다. 담배는 판로가 보장된다. 봄에 모종을 옮겨 심으면 별로 할 일도 없다. 하지만 잎을 따는 게 고역이란다. 자라는 속도에 맞춰 따야할 뿐만 아니라 애기다루 듯이 해야만 상품성을 해치지 않는다나? 저 농부도 그게 힘들어 담배농사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 산길은 농로로 연결된다. ‘도평저수지’의 둑(이정표 : 종점 9.9㎞/ 시점 2.3㎞) 아래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널디너른 들녘으로 들어선다. 반대 방향은 ‘도론(道論)’ 마을로 간다. 소전 손재형선생이 써준 글씨로 인해 ‘도룡동(道龍洞)’이란 또 다른 지명을 얻었다는 마을이다.

▼ 저수지를 스치듯 지나친 탐방로는 이제 널따란 들녘, 그것도 한가운데를 헤집으며 지나간다. ‘여기가 섬이 맞아?’ 둘레길 도반의 넋두리처럼 들녘은 넓고도 또 넓었다. 맞다. 학창시절, ‘섬놈’이라며 놀리던 날 보고, 섬이라고 우습게 여기다간 큰 코 다친다며 겁을 주던 진도 출신 학우도 있었다.

▼ 요렇게 귀여운 이정표를 본적이 있나요? 농로의 가장 큰 특징은 표지기를 매달만한 지지대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알아서 가라고 할 수야 없는 노릇. 궁여지책으로 세워놓은 꼬맹이 이정표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준다.

▼ 들녘너머 산비탈에는 ‘평산(平山)’ 마을이 들어앉았다. 각양각색의 지붕이 알록달록 저마다의 빛깔을 뽐내고 있다.

▼ 탐방로는 차도(18번 국도)를 건너 농로로 간다. 하지만 난 또 하나의 볼거리를 찾아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우수영에서 눈여겨보았던 조형물들의 주인공, 즉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민초들의 묘역이 근처 도로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 ‘고성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그게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흔한 벚꽃나무가 아닌 것만도 고마운데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까지 선물하다니...

▼ 그 사이사이 무궁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진도에 359㎞의 무궁화길이 조성되어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는 섬내 어디를 가든지 국민의 얼이 깃든 백단심·홍단심·아사달 등 활짝 핀 무궁화를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었다. 무궁화 선양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나?

▼ 잠시 후 ‘정유재란 순절묘역(전남 문화재자료 216호)’에 도착했다.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조응량(曺應亮)을 비롯한 전사자들의 무덤 232기가 이곳에 모여 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서해를 거쳐 안으로 북상하려던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다. 전함 13척으로 왜군 전함 133척을 궤멸시키는 찬란한 승리였다. 명량대첩의 더 큰 의미는 인근지역 백성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승리라는 점이다. 그 전투에서 죽은 민초들이 이곳에 묻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16기의 사족(士族) 외에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란다. 하지만 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하나 더, 지구의 반대편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도 생각해보자.

▼ 묘역을 바라보다 두 번이나 외세에 의해 떼죽음을 당한 진도의 역사를 떠올려본다. 한번은 반란군인 삼별초를 도왔다는 이유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왜적들에게 보복 당했다. 오죽했으면 장례 치를 남자가 없어 여자들이 상여를 멨을까. 진도다시래기, 진도만가 등 진도사람들의 소리에서 한이 묻어나는 이유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4분쯤 걷자 ‘오일시 삼거리’가 나온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알려진 ‘모도’로 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이다. ‘피에르 랑디’의 기고로 세계적인관광지가 된 이 신비의 바닷길은 서해랑길에서 빠져있다. 일본의 NHK에서 세계 10대 기적의 하나로 꼽았을 정도인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4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장터’다. 이곳 ‘고성리’를 ‘오일시’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하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이다. 하지만 지붕까지 씌워놓은 장터는 텅 비어있었다. 정해진 날만 장이 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진도군에는 세 군데서 장이 섰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오일시(나머지는 진도읍장과 십일시장)인데, 경제 성장과 함께 장날이 추가되어 1·5일장이 되었단다.

▼ ‘고성(古城)’ 마을은 시골답지 않게 무척이나 컸다. 3층짜리 상가가 있을 정도니 면소재가 부럽지 않다. 하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고려 때는 진도읍성까지 있었다니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래선지 마을단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의원도 들어서 있었다. 아니 진료과목이 7개나 되는 종합병원이다.

▼ 마을을 빠져나와 고군면소재지로 연결되는 국도를 탄다. 이곳도 역시 은행나무로 가로수를 삼았다. 이 길은 명량대첩과 얽힌 또 하나의 유적과 연결되기도 한다. 전투에서 죽은 왜군의 시신이 조류에 밀려오자 주민들이 수습하여 묻어놓은 곳이다. 원수를 은혜로 갚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산의 이름까지도 ‘왜덕산(倭德山)’이 되었다.

▼ 100m남짓 걸었을까 길가 이정표(종점 7.2km/ 시점 5.0㎞)가 오른편으로 가란다. 바닷가가 서해랑길의 상징인데도 굳이 내륙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렇듯 7코는 단 한 번도 바다를 만나지 않는다.

▼ 홍천. 우리 부부의 농장이 있는 산골짜기에도 학교가 있다. 옛 초등학교를 개조하여 기숙사까지 거느린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학생 수가 급속히 줄어가는 요즘의 시골. 이를 타개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런 일환인지 고성초등학교에는 골프연습장까지 들어섰다. 골프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모아보려는 유인책일 수도 있겠다.

▼ 오늘은 대서(大暑), ‘염소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날이다. 반면에 수확의 계절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비닐하우스 앞에 쌓아놓은 저 고추가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도로를 벗어난지 10분, ‘장흥임씨’ 재실(齋室)이 얼굴을 내민다. 세장산(世葬山)에 잇대어 있는 걸로 보아, 문중 시제 때 사용하기 위해 지었지 않나 싶다. 하나 더. 장흥 임씨는 진양주(전남무형문화재 제25호)라는 가양주로 유명한 문중이다. 그 술이 해남에서 생산되기에 그쪽에 몰려 사는 줄 알았는데, 이곳 진도에서도 가세를 이뤄 살아가는 모양이다.

▼ 장흥임씨 재실을 지나면서 임도가 시작된다. 심하지는 않지만 오르막 경사를 어느 정도 유지한다.

▼ 임도 초입, 특이한 빗돌이 세워져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백파 녹지원-꽃매 휴양림’이란 제목의 시가 적혀있는데 글 솜씨가 여간 아니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요/ 붉게 붉게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오려는 봄철을 미리 알리는 것이 정말 꽃다운 꽃이리라>

▼ 임도를 따라 15분쯤 걷자 숲속에 가려있던 ‘죽제산 산림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해랑길은 이를 스치듯 지나치지만 우리 부부는 산림욕장으로 들어서기로 했다. 정자는 물론이고 음수대까지 갖추었으니 둘레길 나그네에겐 일류의 쉼터가 아니겠는가.

▼ ‘죽제산 산림욕장’은 지역주민들에게 편안하고 쾌적한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후박·동백·가시나무 등 난대림의 보고인 죽제산 자락에 물소리·건강·동백 등 너덧 개의 쉼터를 중심으로 등산로와 산책로를 개설했다.

▼ 산림욕장을 지나자 임도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편백나무 숲은 ‘건강쉼터’로 변신했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다. 그런 편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을 지자체에서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벤치 등의 편의시설들을 배치해 일류의 쉼터로 가꾸었다.

▼ 임도 특유의 지그재그로 춤을 춰대는 임도를 따라 30분쯤 진행했을까 분지형태의 언덕에 올라섰다. 첨찰산과 죽제산(424m)을 잇는 능선의 안부(이정표 : 기상대 1.5㎞/ 쉼터 0.3㎞)로 조망까지 터지는 것이 잠깐의 쉼터로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이어지는 임도는 조금 더 가팔라진다. 그리고 10분쯤 지난 곳에서 약간 어긋난 사거리(이정표 : 종점 2.6㎞/ 시점 9.6㎞)를 만난다. 서해랑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진도기상레이더관측소’로 향한다

▼ 사거리를 지나면서 길은 무척 가팔라진다. 무더위에 지친 탓인지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팔라졌다. 그런 오르막이 7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능선에 올라섰다. 첨찰산과 덕심산(398.9m)을 잇는 능선의 안부이자 고군면과 의신면의 경계이기도 하다. 탐방로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2.4㎞/ 진도기상대 1.0㎞/ 시점 9.8㎞)인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탄다.

▼ 100m 조금 못되게 오르자 헬기장이 나온다. 첨찰산 정상과 기상대가 자리한 동남봉(東南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즘도 활용을 하고 있는 지 잔디밭이 잘 손질되어 있다. 참! 주변 지세(地勢)가 반반한 것이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첨찰산성의 중심지가 이쯤이었을 듯도 싶다.

▼ 이정표(종점 2.3㎞/ 시점 9.9㎞)는 이곳에서 왼편 산비탈로 내려서란다. 하지만 우린 ‘첨찰산’으로 향했다. 또 다른 이정표(첨찰산 정상 0.1㎞/ 아리랑비 1.7㎞)가 고지가 코앞임을 알려주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쯤 치고 올랐을까 ‘첨찰산(尖察山, 485.2m)’ 정상이다. 맨 꼭대기는 원뿔형의 볼품없는 봉수대(烽燧臺) 차지다. 돌로 연대(烟臺)를 쌓고 그 위에다 수북하게 돌을 쌓아올렸는데, 봉수라기보다는 차라리 케언(cairn)에 더 가깝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의젓한 봉수였었다. 해남 관두산봉수로부터 여귀산봉수로 전달된 봉홧불을 해남 황원봉수에 중계하는 연변봉수(沿邊烽燧)였다. 진도군의 행정체계가 재정비되는 시기, 즉 조선 세종 대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에 폐지되었다.

▼ ‘진도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홍보용 문구를 첨삭한 정상표지석은 봉수대의 바로 아래에다 세워 놓았다. 첨찰산은 ’뾰죽할 첨(尖)‘에 ’살필 찰(察)‘자를 쓴다. 뾰쪽하게 생긴 산 정상부가 적의 동태나 지세를 살피기에 딱 좋겠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산의 정상에다 봉수대를 설치했었고, 산의 이름 또한 ’봉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름이 잔뜩 낀 오늘은 건너편에 있는 기상대만이 겨우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5년 전 찾았을 때만해도 진도의 산하와 다도해 풍광을 한눈에 쏙 담을 수 있었는데...

▼ 헬기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아리랑비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면 곧이어 첨찰산 특유의 상록수림이 시작된다. 숲은 어두컴컴할 정도로 짙다. 하지만 상큼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상쾌한 느낌을 주는 숲은 흔치 않다. 그러니 구태여 발걸음 재촉할 필요는 없다. 온몸으로 숲의 기운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아주 천천히 즐기듯이 말이다.

▼ 길은 무척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반석을 깔거나 돌계단을 쌓고, 그게 힘들 때는 나무계단을 놓았다. 계단에서 내려 ‘봉화골’로 들어선다. 코끝에 걸치는 공기가 신선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다. 산소음이온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숲이 하도 짙다보니 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는 것은 단점일 수도 있겠다.

▼ 내려오는 도중 복원된 숯가마를 만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도 숯을 구워냈는데, 이로 인해 재료로 사용되던 동백나무를 너무 많이 벌채하는 결과를 초래했단다.

▼ 내려오는 내내 상록수림이 펼쳐진다. 이마를 스쳐가는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눈도 호사를 누린다. 기름을 바른 듯한 녹색의 동백잎이 빛을 발하며 길손을 유혹한다. 계곡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돌들 사이로 낙숫물도 떨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바위를 에돌아 흐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그렇게 25분쯤 내려오면 개울을 건너게 되고, 이후부터는 경사가 많이 누그러진다. 하지만 바닥이 거칠기는 매한가지다. 이 구간에선 아치형 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 이정표를 겸한 구호지점표지판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기본 임무인 ‘구호지점 번호’말고도 주요지점까지의 거리(방향 포함) 및 주의해야 할 사항까지 적어 넣었다.

▼ 정상을 출발한지 50분. 지겹다싶을 정도로 길었던 산길이 끝나면서 ‘진도아리랑비 공원’에 내려선다. 공원은 5년 전 찾았을 때와 똑 같은 모습이다. ‘산천은 의구한데’라고나 할까? 하지만 다리(아리랑교) 앞에 세워져 있던 ‘진돗개 시범사육장‘ 입간판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다른 곳으로 옮긴 모양이다.

▼ ‘등산안내도’는 이곳을 날머리로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산행을 끝낸 뒤에 바라보는 지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이름처럼 공원에는 ’진도아리랑 비(碑)‘를 세워놓았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는 진도아리랑을 기념하는 비이다.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글씨와 그림,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글씨와 그림은 잠시 후에 들르게 될 운림산방에서 비롯된다. 나머지 하나인 노래가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진도아리랑은 정선, 밀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의 하나로 꼽힌다. 그 아리랑이 이곳 진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일상이란다. 밭일 하던 할머니도 장터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도 흥만 나면 어김없이 아리랑을 불러 젖힌다는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구성진 아리랑의 노랫가락에 녹이며 살아온 섬사람들의 삶이 바로 노래이기 때문이다.

▼ ‘양천허씨 입도조기적비’도 보인다. 양천허씨의 진도 이주는 23세손인 허대(許垈)에 의해서다. 광해군 때이다. 그건 그렇고, ‘진도의 양천허씨(陽川 許氏)는 빗자루나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소치를 중심으로 미산(米山)·남농(南農)·임인(林人)·임전(林田) 등 5대째 내리 화가를 배출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집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 이정표(종점 0.6㎞/ 시점 11.6㎞)가 가리키는 ’운림산방‘으로 향한다. 일차선 도로는 인도를 따로 두지 않았다. 아니 인도용 데크로드 설치공사가 한창이었다.

▼ 운림산방으로 내려가는 도중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사천이제’ 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걷자 남종화의 산실이라는 운림산방(雲林山房, 명승 제80호)에 이른다. 운림산방은 조선말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경사지를 다듬어 세웠는데 맨 위쪽에는 허련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있고 오른쪽 후면에는 사천사(斜川祠, 문중 제각)가 자리하고 있다. 소치가 머물던 살림집은 그 아래에 있다.

▼ 두어 번이나 들러봤던 운림산방은 밖에서 기웃거리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자 소치의 살림집이 눈에 들어온다. 1856년,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죽자 소치는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의 터전으로서 운림각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1893년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소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허형이 진도를 떠나면서 운림산방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게 된다. 그 후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피폐된 이곳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다시 사들였고 또 다른 아들 허건이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소치기념관(小癡記念館)은 옛 사진으로 대신한다. 기념관은 소치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소치가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세웠다. 영상실과 전시실로 구분되는데 영상실에서는 운림산방의 역사와 전경, 그리고 소치 허련의 작품과 화맥(畵脈)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리고 서화 전시실에서는 소치 가문(家門)이 이어온 남종화의 계보와 그들의 활동사항 등을 소개한다.

▼ ‘진도역사관’도 옛 사진으로 대신한다. 진도지역의 역사유물을 보존·전시하고, 진도의 민속과 자연환경 등을 소개하기 위해 지은 전시관으로, 선사/고대실·삼별초항쟁코너·명량대첩코너·유배문화실·향토문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도 향토작가전시실(기획전시실)에는 허백련·하철경·박행보 등 진도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실에서는 진도의 역사와 현황, 민속과 자연환경 등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 운림산방 앞에 위치한 남도전통미술관도 주요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지상 2층(지하 1층)의 규모로 전시실과 서화 체험실, 서화경매장, 수장고 등 부대시설이 있다. 미술관에는 소치 허련과 그 화맥을 이어 온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 할 수 있으며, ‘남도예술은행 미술품 토요경매’가 열리기도 한다.

▼ 날머리는 운림산방 주차장(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남도전통미술관을 빠져나오면 운림산방의 널찍한 주차장이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삼복더위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여정이 끝을 맺는다. 오늘은 12.73km를 3시간50분에 걸었다. 후반부(5km)가 임도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서해랑길(진도8코스)의 안내도는 쌍계사로 들어가는 일주문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기조차 힘겨운 나와는 달리 집사람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다. 500m에 가까운 ‘첨찰산’을 넘어왔는데도 말이다. 하긴 오일시에서 출발하도록 해 산행거리를 7km로 단축시켜 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서해랑길 6코스(녹진국민관광지-용장성)

 

여행일 : ‘22. 7. 9(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군내면 및 고군면 일원

여행코스 : 녹진 국민관광지→진도타워→무궁화동산→둔전방조제→벽파진→연동마을→용장성(15.5km, 실제는 16.11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진도의 바닷가를 걷는 이 코스의 주요 볼거리는 녹진관광지와 진도타워, 벽파진, 용장성 등 구국의 충정을 품은 유적지가 대부분이다. 진도의 아름다운 바닷가 풍광에 만족할 게 아니라 선조의 구국충정까지 가슴에 담아가는 여정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 들머리는 ‘녹진 국민관광단지’(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강진방면 2번 국도. 서호교차로(영암군 서호면 서호리)에서 49번 지방도(진도방면),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77번 국도(진도방면), 우수영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18번 국도로 옮겨 진도대교를 건너면 녹진 국민관광지에 이른다. 네비게이션을 이용(‘녹진국민관광단지’를 입력)해 찾아갈 수도 있다.

▼ ‘녹진관광지’에서 ‘용장성’에 이르는 15.5km 길이의 둘레길. 이 코스는 진도의 바닷가를 걷는다. 때문에 볼거리도 하나같이 바다와 관련이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진도의 바닷가 풍경은 물론이고, 녹진·벽파진·용장성 등 유적지들도 하나같이 바다를 건너오는 외적과 싸우던 역사의 현장이다. 난이도는 ‘상(5등급 중 4번째)’이다.

▼ 서해랑길은 ‘망금산(106.5m)’으로 오르란다. 이왕이면 꼭대기에 올라앉은 진도타워까지 구경하고 가란다. 하지만 난 ‘진도각 식당’ 오른편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속속들이 살펴본바 있는 진도타워보다는 새로운 볼거리를 찾아서이다.

▼ 식당 뒤 해안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산책로를 조성해놓았다는 것은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런 내 기대는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녹진 국민관광지’가 자랑하는 풍광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 머리 위로는 ‘진도대교’가 지나간다. 길이 484m에 너비가 11.7m인 이 다리는 한국 최초(1984년 개통)의 사장교로 알려진다. 교각을 세울 수 없는 여건(유속이 11.5노트로 동양에서 가장 빠르단다) 때문에 양쪽 해안에 강철교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사장교 형식을 취했다. 2001년에 제2진도대교가 개통되면서 국내 최초의 쌍둥이 사장교가 된다.

▼ 야외무대에 오르니 울돌목 건너 ‘우수영’이 코앞이다. 울돌목은 세계해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을 거둔 ‘명랑대첩’의 격전지이다. 지자체에서 이런 점을 부각시켜 울돌목 일대를 국민관광지로 지정,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 도로로 올라와 다시 탐방을 이어간다. 명량대첩의 격전지인 울돌목을 옆구리에 끼었다고 해서 이름까지도 ‘명량대첩로’다. 길가에는 펜션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울돌목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옛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가 보다.

▼ 이 길은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이기도 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관직에서 파직당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그가 군사·무기·군량·병선을 모아가며 명량해협으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역사스토리 테마 길로 조성했다. 구례(병사를 모음)를 출발해 곡성(군관들과 수군재건 협의), 순천(무기를 구하고), 보성(식량 선적), 장흥(해상출전을 결의), 강진(해상 기동추격전)을 거친 다음, 해남과 진도 사이의 바다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니 이 얼마나 비장한 마음가짐인가. 괴멸되다시피 한 조선 수군과 이순신을 마지막까지 버티게 할 수 있었던 좌표였을 것이다.

▼ 앗! 가슴 설레어 찾아온 ‘강강술래 터’가 주차장이라니. 탐방로까지 변경하게 만든 주범이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강강술래 터’는 정규 탐방로를 걸었을 때 만나게 된단다. 잘못된 지리정보(지도)가 원인이었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내 탓도 크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 명랑해협의 감시초소 역할을 했다는 망금산(望金山)의 ‘관방성(關防城 : 전라남도 기념물 제204호)’도 안내 빗돌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얼마쯤 가야할지를 모르니 어쩌겠는가.

▼ 최민식이 열연한 ‘명량(鳴梁)’을 보셨나요? 영화는 위급상황을 전하려는 민초들이 옷을 벗어들고 소리치던 바위를 클로즈업 시켰었다. 그 바위가 바닷가에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의 장면이 그려지는 바위가 나왔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작았지만...

▼ 건너편에 있는 섬은 ‘피섬’이란다. 원래 이름은 ‘어지바위’. 명량대첩 당시 수장된 일본 수군의 피가 바위로 스며들어 붉게 보인다고 해서 이름을 바꾸었다나?

▼ 바다라기보다 폭우 때의 강물에 가깝다. 물길이 소용돌이 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내린다. 그곳에 ‘조류발전소’가 들어앉았다. 발전량은 1천㎾급(400가구가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 아직 시험운용 중이나 장차 2만4천㎾까지 발전규모를 늘릴 예정이란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8분. 모퉁이를 돌아서자 항아리처럼 움푹 파인 만(灣)이 나온다. 그 안에는 진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갯벌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 안내판은 진도 갯벌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생물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 갯벌의 훼손을 방지하고 있단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지정되었다나?

▼ 안산호수공원·궁정동·정장리(계룡시)의 공통점은 무궁화동산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무궁화동산이 이곳 울돌목에도 조성되어 있었다. 아니 진도는 길가도 무궁화를 심었다. 무궁화가 진도의 가로수인 셈이다. 아무튼 공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궁화를 심었다. 시비(詩碑)·평화통일비·무궁화터널·정자·연못 등 시설도 두루 갖췄단다. 하지만 둘러보는 것까지는 사양키로 했다. 둔전방조제에서 오매불망 서방님을 기다리는 집사람이 있는 데야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 무궁화는 화려하거나 요염하지 않고 짙은 향기도 없다. 하지만 그 깨끗한 흰 꽃잎과 깊숙이 또렷하게 자리 잡은 붉은색 심문은, 가슴 속에 열정을 간직한 순결한 영혼을 연상케 한다. 조지훈이 ‘희디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줏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 읊은 이유일 것이다.

▼ 무궁화동산에서 ‘서해랑길’을 만났다. 시점까지는 2.2km. 해안도로를 따랐던 내 앱(산길샘)도 비슷한 거리인 1.94km를 찍고 있다. 정규 탐방로를 걸어온 선두대장을 이곳에서 만난 이유일 것이다.

▼ 망금산의 정상은 ‘진도타워’가 걸터앉았다. 2013년 같은 자리에 있던 녹진전망대를 허물고 타워(tower)를 새로 세우면서 진도의 랜드마크(landmark)로 탈바꿈했다. 높이 60m에 지하 1층, 지상 7층의 규모로 1층에는 안내데스크와 티켓부스가 있고, 진도의 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특산물 판매장이 마련되어 있다. 3층부터 5층까지는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다목적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 탐방을 생략한 진도타워는 4년 전의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설명도 당시의 것을 사용했다. 아래 사진은 타워 앞에 조성된 ‘승전광장’이다.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진도군민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조성된 광장으로, 여섯 개의 이순신장군 어록비(語錄碑)와 당시 해전의 장면을 연출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 다른 조형물에는 이순신장군과 함께 싸웠던 장수들의 초상화와 함께 약력을 적어 넣었다. 참! 이왕에 진도에 왔으니 최근에야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어란(於蘭)’이라는 충기(忠妓)에 대해 알아보자. ‘13대 133‘이라는 절대 불리의 여건에서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인의 한편에는 ‘어란’이라는 기생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왜군은 어란진에 주둔한 채로 출정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혀가 왜장 ‘칸마사가게(管正陰)’의 연인으로 있던 어란이 왜군의 출정 기밀을 이충무공에게 알림으로써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의 첩보로 인해 ‘칸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명량이 바라보이는 여낭터 벼랑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나라에는 충절을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와 함께 정유재란의 ‘3대 의녀’로 꼽고 있던데, 그 말에 공감이 간다.

▼ 7층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해협, 우수영 관광지를 한눈에 조망(사진은 생략)할 수 있다. 울돌목 방향에는 ’명랑대첩 해전도‘를 세워놓아 눈앞에 펼쳐지는 울돌목해협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반대방향으로는 진도의 들녘이 펼쳐진다. 널고 반반한 것이 섬 같아 보이지 않는다. 풍요로워 보인다는 얘기이다. 참! 한쪽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명랑대첩 승전관‘에 들어가 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명랑대첩 해전도’로 부족했던 부분을 메꿔주고도 남을 것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도로를 따를 수밖에 없던 탐방로가 가끔은 이렇게 방파제 위로 오르기도 한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갯벌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 이때 위에서 얘기하던 ‘갯벌 습지보호지역’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흡사 술래잡기라도 하는 양 파도에 떠다니는 자그만 섬은 ‘넙섬(右)’과 ‘굴섬(左)’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었으나 지금은 무인도로 버려져 있단다.

▼ 진도에는 ‘아리랑’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색소폰’이란 단어가 보무도 당당하게 옆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말이다. 진도색소폰연주협회가 ‘4인4색’의 버스킹공연을 해오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 눈에 들어오는 바다는 온통 양식시설 차지다. 가두리양식장이 종(縱)과 횡(橫)으로 반듯하게 열을 이루고 있다. 행여나 바람이라도 거세질세라 주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근심의 근원이기도 한 시설이다. 섬사람들에게 바람은 곧 풍파다. 어떤 삶에 풍파가 없으랴.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바람에 맞서 싸우기보단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풍요를 가져오게 되었고 말이다.

▼ 양식시설이 저리도 많은데 어찌 포구하나 없으랴. 그렇다고 배를 댈 수도 없는 곳에 선착장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부교(浮橋)를 놓음으로써 조수간만의 커다란 차이를 극복했다.

▼ 무궁화동산에서 25분. 아기자기한 바닷가 풍경에 푹 빠져 걷다보면 꼬맹이 동산 하나를 만난다. 탐방로는 동산 앞(이정표 : 종점 11.4㎞/ 시점 4.1㎞)에서 왼편 바닷가로 향한다.

▼ 바닷가에는 아치형 문이 만들어져 있다. ‘습지보호지역’이란 문패를 달았는가 하면, 안내판을 세워 눈앞에 펼쳐지는 갯벌에 대해 설명해준다. 습지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빼놓지 않았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다리를 놓았는가 하면, 그 끄트머리에는 전망대를 배치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갯벌을 관찰하게 하려는 안배일 것이다.

▼ 관람객이 없는 전망대는 낚시꾼 차지였다. 입질 끊긴지 오래이건만 낚싯대에서 눈길 한번 떼지 않는 그. 진정한 강태공의 뒷모습일 수도 있겠다.

▼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속살을 드러낸 갯벌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넓었기 때문이다.

▼ 산 위의 정자로 오를 수 있는 길이 나있지만, 왼편으로 난 데크 탐방로를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다시 도로(명량대첩로)로 올라선다.

▼ 서해랑길의 특징 중 하나는 이정표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서해랑길 고유의 리본(빨간색과 노란색이 한 쌍을 이룬다)을 촘촘히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 갯벌전망대를 빠져나온지 11분 만에 ‘둔전방조제(屯田防潮堤)’에 올라섰다. 군내면 둔전리와 고군면 오류리 사이에 축조한 방조제로, 1956년 1,116m 길이의 이 둑이 완공되면서 둔전리의 너른 들녘(219㏊)이 생겨났다. 참고로 둔전(屯田)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곳에 둔전이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벽파진에 주둔하던 군사들의 군량미를 이 마을에서 충당하지 않았나 싶다.

▼ 둑에는 ‘자귀나무’가 지천이다. 하도 많다보니 둑방길의 가로수가 되어버렸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분홍빛이 선명하게 공작새처럼 꽁지를 활짝 펼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이 자귀나무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잎에 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칭으로 나있는 이파리가 밤이 되면 합체가 되듯이 모아진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합혼수(合昏樹). 평생을 신혼부부처럼 살자는 우리 부부에게 딱 어울리는 분위기 아닌가.

▼ 둑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서쪽으로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진도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갯벌과 바다, 그리고 섬이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또한 만만치가 않다.

▼ 오른편도 드넓기는 매한가지다. 다만 갯벌 대신 들녘이 펼쳐진다는 게 다를 뿐이다. 지금 걷고 있는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겨난 들녘으로, 저곳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별도의 저수지를 만들었을 정도로 널따랗다.

▼ 첨탑처럼 솟아오른 금골산(金骨山·195m)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산세가 빼어나다고 해서 ‘진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리는 산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조각가가 바위에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산세을 볼 수 있단다.

▼ ‘저 집은 피난 다니느라 바쁘겠다.’ 함께 걷던 둘레길 도반이 혀를 끌끌 찬다. 맞다. 바닷가 갯벌을 마당삼은 저 집들은 파도만 조금 높아도 지정 대피소로 피신해야 할 것 같다.

▼ 방조제는 15분을 걷고 나서야 반대편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더운 여름날, 그것도 햇볕에 완전 노출되어 걷다보니 몸은 녹초가 되어버렸다. 지자체에서도 이를 눈치 챘나 보다. 배수관문 옆에 작은 공원을 만들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방조제 끝에서 다시 도로를 따른다. 바닷가를 떠난 길은 고개를 올라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串)으로 향한다. 그건 그렇고 오늘도 역시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약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까지 몰아내지는 못한다. 잠깐 쉬며 타월을 쥐어짜면 쏟아지는 땀방울이 한 됫박은 될 성 싶다. 삼복더위에 이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 곶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나타나는 바다. 이번에는 오류마을의 앞바다이다. 참! 이 길은 ‘진도 일주도로’이기도 하다. 진도 바닷가를 따라 한 바퀴 빙 도는 120km 길이의 순환도로로,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널리 입소문을 탔다. 이 길을 따르다보면 한국의 미(美)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케 해준단다. 맞다. 저렇게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어찌 입소문을 타지 않겠는가.

▼ 둔전방조제에서 35분. 801번 지방도에서 ‘오류삼거리’를 만난 서해랑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잠시 후 호국의 얼로 알려지는 ‘벽파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 몇 걸음 더 걷자 벽파마을의 버스정류장. 서해랑길은 그 맞은편에서 열린다. 초입에 ‘충무공전첩비’로 연결됨을 알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 야트막한 동산에 오르자 진도의 자부심이라는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진도출신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1956년 세운 빗돌이다. 빗돌은 귀부(龜趺)와 비문(碑文)으로 이루어져있다. 전첩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게 아니라, 현장의 바위를 깨고 쪼개 조각한 것이란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의 글을 서예의 대가 손재형이 썼는데, 888자 중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단다. 한 글자 한 글자 그 자체가 작품이라는 것이다.

▼ 전첩비에서 바위를 따라 내려오면 호국의 역사를 품은 ‘벽파정(碧波亭)’이 있다. 1207년(고려 희종3년) 벽파나루 언덕에 세운 이 정자는 ‘삼별초의 난’ 때 여몽연합군과의 회담장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16일 동안 머물면서 전략을 세우고 수군을 정비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요새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됐다고 한다. 그래선지 내부에 걸린 시판들도 하나같이 새 맛을 퐁퐁 풍기고 있었다.

▼ 정자 아래 ‘벽파항(碧波港)’은 진도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진도와 육지를 연결하던 나루터였다. 진도와 제주도의 관문이자 인근 해역을 지나는 모든 여객선이 들리는 거점 항구였단다. 하지만 요즘은 ‘불 꺼진 항구’라고 부른다나? 진도대교가 놓이면서 간선도로의 이정표에서도 찾기 힘든 항구로 쇄락했다는 것이다. 분주하게 오가던 여객선 대신 어선 몇 척만이 한가로운 풍경. 그게 바로 ‘벽파항’의 현실이 되었다.

▼ 집사람과 함께 정자에 올랐다. 그리고 준비해간 박주를 나눠 마시며 옛 사람들의 풍치를 따라봤다. 먼저 다녀간 시인묵객들이 읊조렸던 싯구를 따라하면서... 그 여운을 간직한 채로 다시 길을 나선다. 연동마을로 이어지는 방조제의 둑길을 따르면 된다. 참! 둑길에서 만난 ‘삼별초 호국역사탐방로’의 이정표(목섬 0.49㎞/ 벽파정 0.08㎞)를 깜빡 빼먹을 뻔했다. 같은 이름의 둘레길과 서해랑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 둑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왼편에는 감부도를 품은 벽파진 앞바다가 펼쳐진다. 1270년 삼별초를 실은 천여 척의 배가 들어왔던 곳이다. 또한 조선수군의 재건을 노리던 이순신이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바다이기도 하다.

▼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들녘은 농경지 대신 대하양식장이 들어앉았다. 대하양식은 90년대 말의 ‘소금수입 자유화’ 때 많이 늘어났다. 폐전을 원하는 일부 천일염 사업자들이 정부의 지원금을 종자돈 삼아 대하양식장을 열었는데, 그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수익성이 높아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방파제 끝에 이른 탐방로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4.7㎞/ 시점 10.8㎞)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연동마을로 곧장 들어가는 단조로움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작은 고개 하나만 더 넘으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경관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 선착장 조금 못 미치는 지점(이정표 : 종점 4.3㎞/ 시점 11.2㎞)에서는 오른편이다. 연동마을로 연결되는 이 길은 황폐화된 양식장을 만나기도 하지만, 부들과 연꽃이 군락을 이루는 아름다운 저수지를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 진도에 왔으니 천연기념물 53호인 진돗개를 만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갈기를 세우고 짖어대는 개는 무섭기 짝이 없었다. 충성심, 용맹함, 귀가본능이 탁월하다는 국견(國犬)이지만 내 앞에서 짖어대는 저 개는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할 따름이다.

▼ 선착장에서 10분.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연동마을이 나타난다. 진도로 들어온 삼별초군이 용장성으로 자리를 옮길 때가지 머물렀던 마을이라고 한다.

▼ 마을에 들어서니 대문에 매달린 예쁘장한 종이 눈길을 끈다. 이게 또 국기게양대와 세트로 묶여있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엿들은 말로는 이 마을 이장님이 개발한 초인종이라나? 공금까지 들여가며 집집마다 설치해 주었으나 호응을 별로였던 모양이다. 이미 떼어낸 집도 보였으니 말이다.

▼ 연동마을의 담벼락은 그림과 글로 채워져 있었다. 마을의 유래를 적었는가 하면, 연꽃이나 물고기 등 마을과 연관이 있는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잘 그리지도 그렇다고 구성도가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소박함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 ‘민족반역자 김일성을 때려잡자‘.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문구도 적혀있었다. 김일성은 1994년에 죽었다. 아들인 김정일도 2011년에 죽었고, 지금은 그의 손자 김정은이 정권을 잡고 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요즘엔 그 주기가 절반으로 단축되었다고도 한다. 강산이 6번도 더 변했으련만 이곳 연동마을 주민들의 반공의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 벽화에 홀렸음일까? 잠깐이지만 길을 잃고 마을안길을 헤맸다. 그러다가 임시로 내놓은 새로운 탐방로를 찾아내 다시 트레킹을 이어간다. 공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옛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연동마을의 자랑거리인 바닷가도 한번쯤 보고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연동마을은 흙 속의 진주라 할 만큼 갯벌이 좋아 낙지와 조개를 잡고 김 양식으로 살아가는 마을이다. 그 뒤로 너른 바다가 활짝 열린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대 선단이 쳐들어왔던 물길이다.

▼ 바닷가를 따라 잠시 걷던 둘레길이 오른편으로 향한다. 이정표(용장성 3.25㎞/ 연동마을 0.51㎞)는 ‘삼별초 호국역사탐방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100m 남짓 더 걸어 만난 또 다른 삼거리. 이곳에는 서해랑길의 이정표(종점 3.0㎞/ 시점12.5㎞)도 세워져 있었다. 아까 연동마을에서 헤어졌던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포장과 비포장을 반복하는 임도는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임도는 나그네에게 길을 내주면서도 그게 무료했던가 보다. 가다가 휘고 휘었다가는 오르막으로 달리고 다시 쉬엄쉬엄 평지로 늘어지며 장난치듯 십리 가까이를 그렇게 간다.

▼ 서해랑길은 이 구간에서 ‘삼별초 호국역사탐방로(1코스)’를 따른다. 지역에 산재해있는 호국의 역사를 품은 길들을 이어 역사학습과 체험이 가능하도록 조성한 탐방로이다. 최종 목적이야 걷기 여행객의 유치겠지만...

▼ 임도로 들어선지 40분. 산딸기를 주전부리삼아 올라선 고갯마루(해발 155m)는 쉼터를 겸하고 있었다. 곁에는 ‘성황당산성터’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읽을거리까지 제공한다.

▼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얼마쯤 내려왔을까 시야가 트이는가 싶더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용장골’이 나타난다. 용장골은 ‘삼별초의 난’ 때 새로 옹립한 왕의 궁전이 들어섰던 곳이다. ‘용이 숨은 곳’이라는 뜻의 지명과 역사가 딱 들어맞은 셈이다.

▼ 벌통이라고 해서 같은 벌통이 아닌가 보다.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난 벌통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꿀벌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왕성했다.

▼ 오늘도 다양한 야생화를 만날 수 있었다. ‘범부채 꽃’도 그중 하나다. 범부채는 잎보다 한참 높은 곳에서 꽃줄기가 올라온다. 그리고 범 무늬가 선명한 주홍빛 꽃이 하늘로 향한다. 꽃은 화려하다. 하지만 잎에 비하면 작고 단아하며 높은 꽃줄기에 몇 개만 피어나 전체적으로 고고하고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한국 자생식물이어서 일까?

▼ 고갯마루에서 내려선지 18분 만에 ‘용장성 유적지’에 닿았다. 이곳은 ‘삼별초의 난’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다. 강화도로 옮긴 고려 무신정권의 군인이자 경찰조직이었던 삼별초(三別抄)가 고려왕 원종이 원나라에 굴복해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반대하며,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지휘로 군사와 민초들을 이끌고 강도 외포리를 떠나 두 달 만에 진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에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고 제주도로 쫓겨 가기 전까지 짧은 기간(1270-1271) 동안 결사항전을 했었다.

▼ 유적지로 들어서자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동상과 삼별초추모관이 반긴다. 1270년 몽고와 강화를 맺은 고려 원종(元宗)은 강화도 피난살이를 정리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에 해산령을 내린다. 이에 반발한 배중손은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찾아들었고, 용장성을 거점으로 삼아 왕족인 승화후 온을 임금으로 세운다. 하지만 1271년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몽골의 연합군이 용장성을 점령했고, 살아남은 삼별초는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삼별초는 1273년 여몽연합군 1만 명의 공격을 받고 3년 만에 진압된다.

▼ 다음은 ‘고려항몽충혼탑(高麗抗蒙忠魂塔)’이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주인공은 물론 삼별초이다. 삼별초란 야별초의 좌ㆍ우 별초와 신의군으로 이뤄진 별초군을 총칭한다. 별초(別抄)는 임시 군대조직으로, 대몽항쟁기에 큰 활약을 했다. 최우 집권 초기에 횡행한 도적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했는데 이를 야별초라 한다. 그 뒤 인원이 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눴다. 이후 최항이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창설했다. 신의군은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로 구성됐다. 이들을 합쳐 삼별초로 구성한 것이다.

▼ 내친김에 ‘용장사(龍藏寺)’까지 올라가 봤다. 역사는 이 절을 항몽유적지(抗蒙遺蹟址)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절간은 당시의 것이 아닐뿐더러 위치도 다르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자. 너덧 채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절간의 얼굴마담은 금당인 극락전이 아니라 ‘염불당(念佛堂)’이었다. 고려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용장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오는 삼존불(石造藥師如來坐像이라고도 부르며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을 모셔놓았단다.

▼ 절간을 빠져나오자 길은 용장성(龍藏城, 사적 제126호)으로 이어진다. 아니 정확히는 삼별초가 왕으로 옹립한 ‘승화후 온(承化候 溫)’이 머물던 ‘궁궐’이 있던 자리다. 하지만 궁궐터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지형이다. 폭이 좁은데다 비탈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개의 단(段)으로 나눈 다음, 그 위에다 건물들을 들어앉혔단다. 그것도 북향으로...

▼ 날머리는 용장성유적지 주차장(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궁지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금방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6.11km. 무더운 날씨를 감안하면 엄청나게 빨리 걸은 셈이다. 3/1쯤 더 나간 지점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뛰다시피 걸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걷고 있을 그녀의 무료함을 하시라도 빨리 덜어주려면 뛰는 게 문제가아니라 날라서라도 가야하지 않겠는가.

▼ 완주를 증명해주는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07코스로 적고 있었다)는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이를 배경삼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집사람의 표정이 오늘따라 무척 밝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무릎이 아프다며 끙끙 앓는다. 이번 주부터는 대청호 둘레길이 시작되는데 이 일을 어찌할꼬.

서해랑길 5코스(원문버스정류장-녹진국민관광지)

 

여행일 : ‘22. 6. 25(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문내면과 진도군 군내면 일원

여행코스 : 산소버스정류장→송정마을→원동마을→장포마을→학동마을→우수영국민관광지→진도대교→녹진국민관광지(12km, 실제는 11.38km를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해남·영암구간(149.5km)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해남의 들녘을 걷는 이 코스의 주요 볼거리로는 우수영 및 녹진 국민관광지를 꼽을 수 있다.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해남군과 진도군에서 경쟁하듯이 유원지를 만들었다. 명량해전의 영웅인 충무공을 그 중심에 두었음은 물론이다.

 

▼ 들머리는 ‘원문버스정류장’(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강진방면 2번 국도. 서호교차로(영암군 서호면 서호리)에서 49번 지방도(진도방면),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77번 국도(진도방면), 우수영을 지나 사교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석교리)에서 빠져나와 801번 지방도를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문마을’의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네비게이션을 이용(‘원문버스정류장’을 입력)해 찾아갈 수도 있다.

▼ 5코스(안내도는 ‘해남 5코스’로 적고 있다)는 ‘원문버스정류장’에서 ‘녹진국민관광단지’에 이르는 길이 12km의 둘레길이다. 이 코스도 역시 해남의 들녘을 걷는다. 하지만 명량해전의 주 무대인 울돌목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덕분에 해남군과 진도군이 서로 경쟁하듯 만들어놓은 관광단지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 용암리(龍岩里)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신월마을 방향의 18번 국도 아래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신월마을은 일제강점기 ‘삼덕포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 이때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시멘트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널디 너른 해남 들녘에 농업용수를 대주는 수로(水路)다. 그런데 이게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넉넉하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를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그 웅장하면서 로맨틱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우리나라도 저런 것 하나쯤 가졌으면 좋겠다며 입맛을 다셨었는데, 저 수로도 잘만 다듬으면 명품경관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싶다.

▼ 실제는 사교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석교리)에서 시작했다. 집사람의 불편한 무릎을 감안해서다. 아니 눈요깃거리도 없는 구간을 줄이는 대신, 그 시간을 울돌목에 조성해놓은 관광단지에서 보내고 싶었다는 게 진짜 이유다. 꼼꼼히 둘러보다 충무공의 애국충정을 조금이라도 나누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 ‘명량로(우수영·진도 방면)’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5분쯤 지나 만나는 ‘송정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 도로를 벗어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송정마을’이 손짓한다. 법정 동리인 ‘석교리(石橋里)’에 속한 일곱 개(석교·심동·신창·일정·목삼·삼덕·송정)의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이다.

▼ 태극기와 지자체기가 함께 나부끼고 있는 송정마을회관은 어르신들의 쉼터를 겸한다. 무더위에 한파, 미세먼지까지 더한 것을 보면 냉난방은 물론이고 공기청정기까지 갖추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화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지자체들의 현실이지 싶다.

▼ 마을로 들어서니 능소화가 반긴다. 여름철을 상징하는 꽃이다. 사람들은 여름의 산하를 ‘초록의 바다’라 일컫는다. 하지만 여름이 깊어갈수록 그런 푸름은 서서히 지겨워진다. 대신 화사한 꽃이 그리워진다. 이때 꽃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주는 꽃이 바로 능소화이다. 그런 능소화가 고즈넉한 시골 담벼락에서 화사하게 피어났다.

▼ 마을 앞 전신주에서 ‘서해랑길’의 표식을 찾아냈다. 이제부터는 서해랑길의 표식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 마을 앞에서 왼편으로 진행한다. 원동마을 방향이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2주 전에 걸었던 4코스와는 사뭇 다르다. 간척지의 너른 들녘을 일직선으로 꿰뚫고 지나가던 4코스와는 달리 이번 5코스는 눈에 들어오는 길마다 아름답게 휘어져 있는 것이다.

▼ 길가 경작지도 논 대신 밭으로 바뀌었다. 그래선지 ‘둠벙’을 심심찮게 만난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 수확을 끝낸 배추밭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그런데 밭고랑에 버려진 건 김장용이 아닌 양배추다. 배추의 고장답게 봄철에는 양배추를 생산하는가 보다. 참고로 해남배추는 흰 눈이 쌓인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한겨울에도 아삭하고 신선한 김치를 담아먹을 수 있단다.

▼ 송정마을에서 9분. 둘레길은 아까 송정마을로 들어가면서 헤어졌던 ‘명량로’를 횡단한다. 해남읍과 우수영을 잇는 해남읍의 주요 간선도로(幹線道路)이다.

▼ 횡단지점에는 서해랑길의 이정표(우수영관광지↑ 9.3㎞/ 문내면사무소→ 4.2㎞)가 세워져 있었다. 5코스에 대한 안내(시·종점 거리)는 하단에 따로 적었다. 그런데 종점(녹진 관광지)으로 가는 도중 거치게 되는 우수영이 종점보다도 더 멀게(8.3㎞) 표기된 이유는 뭘까? 그나저나 출발지에서 이곳까지는 2.9km. 핸드폰의 앱은 1.14km를 찍고 있다. 출발지를 옮겨 1.7km를 단축시킨 셈이다.

▼ ‘해남은 논농사?’ 해남이 간척사업으로 생긴 고장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늘 걷고 있는 문내면은 대부분이 밭이고, 그 밭에서는 한겨울에도 푸른 배추가 자란다. 그게 하도 넓다보니 전국 최대 배추생산지가 되었고, 2006년에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농산물 지리적표시(제11호)’에까지 등록되었다.

▼ 구릉지의 언덕을 넘자 ‘원동(院洞)’ 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용암리에 속한 자연부락으로, 우수영과 원문에 기원을 둔 지명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하나 더. 이 마을에는 옛 추억을 불러일으킬만한 꼬맹이 정미소가 있으니 놓치지 말자.

▼ 하지(夏至)가 4일 전이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하지는 낮이 가장 길다. 일사 시간과 일사량도 가장 많은 날이다. 산하는 이미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과실은 저 복숭아처럼 하루가 다르게 여물어간다.

▼ 원동마을을 지나면서 주변 풍경이 확 바뀐다. 밭 일색이던 아까와는 달리 들녘이 온통 논으로 뒤덮였다. ‘해남이라고 해서 다 같은 해남이 아니다’라던 어느 글쟁이의 표현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다가가보니 자리를 잡아가는 모에 빨강색 우렁이 알이 매달렸다. 저 알에서 깨어난 우렁이들은 잡초를 방제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용 우렁이가 아닌 유기농 우렁이로 분류한다.

▼ 하지만 논농사 지역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논밭이 번갈아 나오다가 이내 고원을 연상시키는 구릉지로 올라선다. 그러자 강원도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확 펼쳐진다.

▼ 작물도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귀리를 심었다. 거친 식감으로 인해 국내 생산이 거의 끊겼다가, 타임지에 ‘건강에 좋은 10대 음식’으로 선정되면서 국내 소비 및 생산량도 조금씩 증가하고 있단다.

▼ 귀리로 뒤덮인 고개를 넘자 둘레길은 19번 국도의 굴다리를 통과한다. 그리고는 선두리의 들녘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만은 그대로다. 흔하디흔한 논이 이곳에서 만큼은 귀하신 몸으로 대접을 받는다.

▼ 지자체가 보여주는 호의는 둘레길 순례자들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다. 서해랑길을 걸으며 주의해야 할 내용을 꼼꼼히도 알려준다.

▼ 장포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 오늘의 주전부리도 역시 산딸기가 되어주었다. 걷는 도중 곳곳에서 산딸기 무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두 손 가득이 따더니 내 입에다 넣어준다. 그러자 새콤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행복하다.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 고개를 넘으니 드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하지만 용암방조제를 막아 생겨난 들녘은 벼 대신 갈대만 가득하다. 간척지를 조성한 뒤 염분을 빼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최상의 쌀을 생산하기 위한 과정이라 하겠다. 게르마늄 성분이 풍부한 간척지에서 생산된 쌀은 질뿐만 아니라 밥맛까지도 뛰어나다고 알려지니 말이다.

▼ 길가에 작년 가을에 생산된 볏짚이 수북이 쌓여 있다. ‘곤포 사일리지’가 개발되면서 퇴비로 여겨지던 볏짚이 이젠 가축의 사료로 변신했다. 비닐로 밀봉하고 혐기 발효를 유도하여 최고의 사료로 변신시킨 결과다.

▼ 기분 좋은 풍경만 마냥 펼쳐지는 건 아니다. 코끝을 찡그리며 염소 사육장을 지나는가 하면, 농경지를 침범한 태양광발전소가 싫어 눈살을 찡그리기도 한다.

▼ 말뚝 모양의 이정표(종점 5.1㎞/ 시점 6.2㎞)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장포마을’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만이다. 장포마을은 법정스님의 생가가 있는 ‘선두리(先頭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탓에 근처 ‘선두마을’에 편입되어 있단다. 회관만 덜렁하니 지어져 있을 뿐 마을 분위기가 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마을회관을 지나자 길이 2차선으로 넓어졌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뒤돌아보니 장포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집이라고 해봐야 대여섯 채가 전부. 옆 동네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겠다.

▼ 오늘처럼 장마 뒤끝에는 곡예에 가까운 걸음걸이도 필요하다. 질퍽거리는 흙탕물을 피하다보면 발은 어느새 길가 축대위로 옮겨간다. 그리고는 외줄 타는 광대처럼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 이번의 연못은 둠벙의 수준을 넘었다. 맞다. 5코스를 걷다보면 이 정도의 저수지를 여럿 만나게 된다. 학동저수지, 학동1저수지, 학동2저수지 등 이름표까지 당당하게 달았다.

▼ 장포마을을 지나자 한적한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부드럽게 너울대는 구릉지 위로 구불대며 흘러가는 농로가 참으로 매혹적이다. 6월이라 구릉지 대부분이 텅 비었지만,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이면 온통 푸른 배추밭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 학동마을을 250m쯤 남겨놓은 지점의 이정표(종점 3.7㎞/ 시점 7.6㎞)를 카메라에 담아봤다. 학동마을을 직진 방향에 두고, 둘레길을 오른편으로 우회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길은 학동마을에서 다시 만나고 있었다.

▼ 장포마을에서 20분. 둘레길은 ‘학동(鶴洞)’ 마을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고샅길을 따라 마을을 횡단한다. 학동마을은 김장용 배추로 유명하다. 해남의 겨울 배추는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문내면·황산면·화원면 등 화원반도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덕분에 해풍을 먹고 자라 식감이 좋고 미네랄이 풍부하며 달콤하고 고소한 향으로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학동마을의 배추밭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3일(KBS-1TV)’까지 촬영했겠는가.

▼ 큼지막한 규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마을은 회관을 두 개나 갖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무더위 쉼터’로 이용된다. 참고로 학동(鶴洞 또는 학골)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서 학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세가 학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고 할머니들의 자가용도 많이 바뀌었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던 분들이 언제부턴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 편의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췄으니 모터가 없는 수동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내리막길에서는 브레이크를 잡고, 걷다가 지치면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 그만이다. 마실 것? 의자 아래에 짐칸을 배치했으니 ‘걱정아 물러가라’이다.

▼ 마을 앞 비닐하우스는 농작물 대신 담뱃잎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수익성이 더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나저나 옛날에는 동네마다 가득가득 논과 밭을 채웠던 담배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옆집 순이네도, 뒷집 철수네도 모두 담배농사로 먹고 살았다.

▼ 마을을 빠져나오니 삼거리에서 ‘삼정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하지만 둘레길은 마을로 들어가지 말고 우회하라 이른다.

▼ 그러나 이 길도 ‘삼정마을’로 연결되고 있었다. ‘학동리(鶴洞里)’를 구성하는 4개의 자연부락(명안·삼정·충무·학동) 가운데 하나다. 다만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고 스치듯 지나친다.

▼ 언덕으로 오르면서 바다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해남반도에서 가지쳐나간 화원반도(花原半島)와 진도 사이의 바다, 즉 ‘명량해협’이다. 오른편에서 살짝 머리를 내밀고 있는 건 무인도인 ‘녹도(사슴섬)’일 것이다.

▼ 삼정마을을 지난 둘레길은 이제 임도를 따른다. 모처럼 만난 그늘진 길이다.

▼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지난번 드린 팁처럼 서해랑길은 앞사람과의 간격을 200m쯤 유지하며 따라가는 게 좋다. 앞사람의 동선을 잘만 감안하면 상당한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사람들처럼 오히려 고생을 더 하는 경우도 있다. 탐방로를 벗어나 왼편으로 이동했으나 지름길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는 사람들이다.

▼ 앞사람들을 타산지석삼아 오른편으로 향한다. 둘레길은 이정표(종점 1.6㎞/ 시점 9.7㎞)를 만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선다. 5코스 유일의 숲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 웃자란 잡초를 헤치며 고개를 넘자 잘 다듬어진 산책로가 나타난다. ‘명량대첩공원’은 이순신장군이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선을 막아 조선을 구한 ‘명량대첩’의 현장에 조성된 기념공원이다. 이색대첩비를 출발해 전망대를 거친 다음 해전사기념전시관까지 1.1km구간에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 데크 산책로를 따라 ‘우수영국민관광지’로 들어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만이다. 울돌목은 ‘정유재란 3대 수군 대승지’ 중 하나인 명량대첩의 격전지다. 세계해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11의 대승리를 거뒀다. 어느 지자체가 이런 호재를 그냥 지나치겠는가. 임진왜란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 일대를 성역화해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1990년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진도대교’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쌍둥이 다리로, 다리 북단(해남)에 ‘우수영국민관광지’, 남단(진도)에는 ‘녹진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 ‘이 뭐꼬!’ 이젠 식상해져버린 화두가 되었지만, 저 구조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2년 전쯤 공수훈련용 탑을 이색대첩비로 탈바꿈시켰다는 기사가 떴었는데, 저것 역시 공수훈련용의 시설이 아닐까?

▼ 몇 걸음 더 걷자 우수영 국민관광지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는 ‘이색대첩비’가 얼굴을 내민다. 너무나 유명한 이순신의 어록,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가 적혀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니 이 얼마나 비장한 마음가짐인가.

▼ 독특하게 생긴 조형물도 보인다. 이순신장군의 쇠사슬 전법에 사용한 ‘쇠사슬감기 틀’의 모형이란다. 해남과 진도 해안에 쇠사슬을 매어 놓고 일본 함선을 유인하여 급한 물살을 이용하여 쇠사슬을 양쪽에서 당김으로써 배를 전복시켜 격침시키고 빠져나온 함선들은 근접한 거리에 있던 조선수군이 섬멸시켰다고 하는 구전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근년 바닷가 바위에 박혀 있는 큰 쇠고리가 발견되었고, 당시 널리 사용된 기술과 장비를 참작하여 복원시켰다.

▼ 의병들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조형물도 여럿 보인다. 명랑대첩은 당시 해남과 진도의 해안지방 사람들이 수군과 함께 목숨을 바쳐 싸운 항쟁의 결과였다. 부자·형제, 이웃들이 끝까지 싸웠다며, 안내문은 적선에 포위된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구하다가 적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한 마하수와 네 아들, 낫과 곡괭이를 들고 싸우다 전사한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돌과 창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다가 전사한 오국신·오계적 부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었다.

▼ 폐선을 수리하고 있는 민초들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눈에 띈다. 칠천량의 패전 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아홉 척이 전부였다. 이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해 명량해전을 가능케 했던 이들은, 정충량, 김세호 등과 함께 혼신의 힘을 기울인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었단다.

▼ 수변무대를 지나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으로 간다. 사진의 오른편 건물(왼편은 케이블카 탑승장)인데, 정유재란 당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대첩의 역사와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꾸며져 있다. 건물 외형은 판옥선을 본떴다고 한다.

▼ 전시 공간은 옛 역사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꾸몄다. 1층은 명량해전 당일 치열한 전투상황을 알려주는 난중일기가 패널로 구성돼 관람객을 맞는 가운데, 명량대첩의 현장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4D영상관이 운영돼 직접 배를 타고 명량해전 격전의 현장을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 2층은 당시 사용하던 무기들을 전시했다. 또한 조선의 판옥선과 왜선을 재현해 조선 수군의 전력과 전술, 지형 등 승전 요소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 3층은 ‘세계 7대 해전’의 그래픽 패널, 명량대첩 승리의 숨은 주역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배의 변천과정도 엿볼 수 있다.

▼ 이제 외부를 돌아볼 차례다. 맨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는 생략. 그 아래의 ‘명량대첩탑’부터 찾았다. 왜적을 물리친 상황을 부조형식으로 기록해놓은 일종의 기념물이라 하겠다. 계단 아래에는 ‘회령포의 결의’란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명량해전을 코앞에 둔 시점. 회령포에 당도한 이순신이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관내 장수들과 더불어 최후의 결전을 맹세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 또 다른 ‘이순신 어록비’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말은 곡창지대인 호남이 왜적에 넘어가면 나라 전체가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이밖에도 임진·정유·병자란 구국공신충혼비와 뜻풀이까지 해놓은 어록비, 기념공원 조성비 등의 빗돌들을 곳곳에 세워놓았다.

▼ 명색이 국민관광지인데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울돌목은 물론이고, 진도대교와 진토타워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당에 들어앉았다.

▼ 바닷가에 선 이순신은 갑옷이 아닌 평복에 칼 대신 지도를 들었다. 무장의 기본인 어깨의 힘도 뺐다. ‘고뇌하는 이순신’이라니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을 숱한 좌절과 고뇌, 목숨을 건 전투, 그리고 펼치고자 하는 전술 등으로 고뇌하고 있는 이순신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 매표소 앞 광장에서는 공연이 한창이었다. 진도아리랑 등의 민요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있는데 내용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 광장 한켠은 체험마당 차지다. 장군복장으로 사진을 찍거나. 판옥선 만들기, 이순신 어록쓰기 등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먹거리가 빠질 수 있겠는가. 작은 식당가과 푸드 트럭이 들어섰는가 하면,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는 곳도 눈에 띈다.

▼ 우수영관광지와 진도타워를 오가는 해상케이블카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단다. 울돌목해협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하늘에서 역사의 현장인 명량해협을 온전히 볼 수 있단다. 특히 바닥이 투명한 크리스탈 캐빈을 탑승할 경우 영화 명량에서 놀라움을 선사한 울돌목 회오리를 발아래로 감상할 수 있다나? 진도대교의 미려한 자태와 보석처럼 빛나는 다도해도 함께 담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 30분 정도의 관광지 투어를 끝내고 진도대교를 건넌다. 길이 484m에 너비가 11.7m인 이 다리는 한국 최초(1984년 개통)의 사장교로 알려진다. 교각을 세울 수 없는 울돌목해협의 여건 때문에 양쪽 해안에 강철교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사장교 형식을 취했다. 2001년에는 제2진도대교가 개통되면서 국내 최초의 쌍둥이 사장교가 된다. 하나 더. 수문장은 지자체의 특징을 잘 살렸다. 우수영의 고장 해남은 거북선, 반면에 진도군에서는 진돗개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

▼ 북단의 바닷가에는 110m 길이의 스카이워크가 놓였다. 강강술래를 모티브로 삼아, 바닥을 투명유리로 깔고 직선거리로 32m까지 바다를 향해 띄우면서 스릴감을 극대화했다. 강화유리 위를 걸으며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눈과 귀로 느낄 수 있는데다 아슬아슬한 스릴감까지 더해져 우수영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단다.

▼ 다리 아래로는 ‘명량해협’이 펼쳐진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수로로 가장 좁은 부분은 폭 325m에 수심이 25m에 불과하다. 해류가 이 좁은 수로를 지날 때 격류가 부딪히며 천둥치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명량(鳴梁, 또는 울돌목)’이라 불린다. 그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적을 대파한 전투가 ‘명량대첩’이다.

▼ 다리 남단에는 ‘녹진국민관광단지’가 들어섰다. 해남구간의 종점이자 진도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녹진(鹿津)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2017년 둔전리 및 녹진리 일원 25만여㎡를 관광지로 지정받아 공공시설과 숙박시설, 상가시설, 관광·휴양·오락 시설을 조성해가는 중이다. ‘망금산’꼭대기 진도타워에서 이 광장까지 모노레일도 놓인단다.

▼ 널따란 광장의 한켠에는 ‘진도대교준공기념탑’이 자리를 차고앉았다. 이순신장군이 벼락같이 일본 해군을 무찌른 이곳에, 그로부터 387년 만에 다리가 놓였단다. 그러면서 이 다리는 해남과 진도를 이을 뿐만 아니라 이 겨레의 영원한 넋의 역사를 잇는 의미를 지녔다고 적고 있다.

▼ 녹진관광지에도 꽤 많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국조 단군상도 그중 하나다.

▼ 바닷가에는 ‘주말장터’가 들어섰다. 농수특산물 판매와 먹거리 장터, 공연마당 등이 열리는데,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장한단다. 참고로 진도는 ‘전복대파 꼬치구이’와 ‘울금 카페라테’가 특색 있는 음식으로 꼽히며, 홍주·구기자·울금·검정쌀·전복·미역 등의 특산물도 구입할 수 있다.

▼ 실물 크기의 판옥선도 전시해 놓았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으로 일본 함대를 격파하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2층 구조로 나무판자로 갑판 위에 집을 꾸몄다 하여 판옥선이라 명명됐고 대장선은 160명까지 승선할 수 있단다.

▼ ‘명량대첩 해전도’가 눈길을 끈다. 그림에는 홀로 왜군을 막아선 이순신의 배가 보이고 뒤쪽에 나란히 선 판옥선이 그려져 있다. 고군분투다. 원균의 패전으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된다. 이때 우리 수군이 보유한 배는 겨우 13척, 하지만 133척이나 되는 왜선을 무찔렀다. 명량대첩의 승리 비결은 신비의 울돌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오다가 서해로 빠져 나가면 해안 양쪽에 급경사가 생겨 빠른 급조류로 변하게 된다. 325m의 폭이지만 실제로 배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것은 40-50m에 불과하단다.

▼ 완주를 증명해주는 서해랑길 안내판은 18번 국도에서 광장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이 11.38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우수영관광지를 둘러보느라 그만큼 지체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코스를 줄여주었지만 집사람에겐 이마저도 무리였던가 보다. 우수영과 녹진 관광지를 꼼꼼히 살펴본다며 속도를 내더니만 집에 돌아와서까지 무릎통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다음 주말에 가려는 지리산둘레길은 난이도가 ‘상’으로 꼽힌다는데 어이할까나.

서해랑길 4코스(산소버스정류장-원문버스정류장)

 

여행일 : ‘22. 6. 11(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황산면과 문내면 일원

여행코스 : 산소버스정류장→초월마을→외입마을→춘정마을→옥동배수지→옥동마을→삼호마을→원문버스정류장(14.5km, 실제는 옥동마을까지 12.65km를 2시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해남·영암구간(149.5km)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코스는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전무하다. 그저 방조제와 간척지, 태양광발전소가 볼거리면 몰라도. 그래서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는 옥동방파제를 찾았고, 그곳에서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지닌 유적을 만날 수 있었다.

 

▼ 들머리는 ‘산소버스정류장’(해남군 황산면 한자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강진방면 2번 국도. 서호교차로(영암군 서호면 서호리)에서 49번 지방도(삼호·진도방면),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77번 국도(진도·완도방면), 우수영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선두리)를 지나 한자버스정류장에서 오른편 ‘한자길’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을 이용(‘산소버스정류장’을 입력)해 찾아갈 수도 있다.

▼ 4코스(안내도는 ‘영암 4코스’로 적고 있다)는 ‘산소버스정류장’에서 ‘원문버스정류장’에 이르는 14.5km의 둘레길이다. 농로 및 임도를 따라 걷는 코스라서 어렵지는 않지만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풍경이 전무하다는 게 단점이다. 간척이 만들어놓은 널따란 들녘과 그 안에 들어선 거대한 태양광발전소가 볼거리라면 몰라도 말이다.

▼ 인증에 필요한 둘레길안내도(해남 4코스)는 버스정류장에서 마을 쪽으로 70m쯤 떨어진 곳에 세워놓았다.

▼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 전신주에 4코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또 다른 표식이 매달려 있다.

▼ ‘산소(山所)’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산소마을은 법정마을인 한자리(閑子里)에 속한 4개의 자연부락(한자·산소·신정·징의) 가운데 하나다. 둘레길은 이 마을을 끝으로 한자리에서 호동리로 넘어간다.

▼ 산소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태극기’다. 마을회관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린다. 궁금증을 못 이겨 동네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상시 태극기 게양 시범마을’로 선정되었단다. 365일 내내 태극기가 휘날린다는 것이다.

▼ 계란을 판매한단다. 토종닭도 판단다. 그런데 닭은 세 마리뿐이다. 자기 먹기도 바쁠 텐데 남에게 팔게 있을까?

▼ 마을을 벗어나자 널따란 들녘이 펼쳐진다. 맞다. 이곳 산소마을은 평평한 구릉(평야)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해남에서 가장 먼저 어업조합이 설립되었을 정도로 소문난 어촌이란다. 특히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지주식 김은 옛날 맛을 그대로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수간만 차를 이용한 전통방식으로 생산하기 때문이란다.

▼ 둘레길 순례꾼들의 벗은 ‘이정표’다. 얼마나 걸었고, 또 얼마나 걸어야할지를 알려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하지만 집사람은 부담부터 되는가 보다. 하긴 무릎이 시원찮은 그녀에게 14.5km는 버거운 여정일 수도 있겠다.

▼ 서해랑길에서 ‘양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농로나 제방, 임도를 따르다보니 햇빛을 가려줄 게 일절 없기 때문이다. 오뉴월 뙤약볕을 견뎌내려면 양산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서해랑길 해남구간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사방이 온통 들녘뿐인 것이다. 나머지는 언덕 수준의 산. 뜀뛰기 한번이면 거뜬하게 넘어버릴 정도로 낮다.

▼ 또 다른 특징은 태양광발전소다. 간척사업으로 만들어낸 들녘을 따라 태양광 패널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물론 논농사보다 소득이 더 나아서 일 것이다. 하지만 ‘식량 안보’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는 요즘으로서는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다.

▼ 간척지의 특징은 자로 잰 듯이 구획정리가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 사이로 난 둘레길 역시 직선일 수밖에 없다. 이런 길을 계속해서 걷다보면 지루해지기 딱 좋다. 가끔은 이런 곡선구간이 나타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길을 나선지 25분 만에 ‘호동배수장’에 도착했다. 간척지인 ‘호동리(虎洞里)’ 들녘의 물길을 관리하는 배수갑문이다. 법정 마을인 호동리에는 호동마을, 한아마을, 신흥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들어서 있지만 둘레길은 마을안길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 배수장에서 바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아니 물이 빠져나갔으니 ‘망망 갯벌’이겠다. 그 중심에서 뽈록하니 솟아오른 건 죽도일 것이다.

▼ 배수장을 벗어난 둘레길은 다시 바다와 헤어진다. 그리곤 산자락의 아랫도리를 따라 내륙으로 들어간다.

▼ 산이 낮은데다 경사까지 완만하다보니 산자락은 대부분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물이 필요했을 게고, 둘레길은 생태연못을 연상시키는 저런 ‘둠벙’을 심심찮게 만난다. 이 또한 해남 들녘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경작이 불가능한 곳에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다. 각기 다른 모양의 패널이 눈길을 끈다. 지형에 맞게 조립해놓은 모양인데 얼핏 예술 작품을 보는 느낌이다.

▼ 가슴에 담을 게 별로 없으니 지루해질 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산딸기가 지천이니 쉬엄쉬엄 걸으면서 따먹어 볼 일이다. 주전부리로 이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 엊그제가 망종(芒種). 보리가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된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텃밭의 고추도 어른만큼 덩치를 키웠다. 오래 전 끄적거려봤던 자작시가 생각나 그 일부를 옮겨본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다들 들녘에 나간 빈자리만이 아이들을 반길 뿐/ 점심때 먹은 도시락은 기억에 없고 처마 밑에 매달린 대나무 광주리만 눈에 차 오른다./ 한걸음에 도착한 뒤안 옹달샘가/ 바닥에 깔린 보리 알갱이 하나라도 놓칠새라 조심스레 물에 인다./ 몽당 놋수저 움직임을 누가 볼새라/ 두입 걸러 한입 넣는 된장 입힌 풋고추의 얼얼함에 엉덩이 들썩거림은 차라리 추임새다./ 그나마 보리밥에도 정신없이 코 박던 옆집아이는 갈비뼈 앙상한 가슴에 배만 남산만 했다.>

▼ 옥수수도 수염을 달아 어른이 됐다. 홍천 우리 농장의 것도 저 정도 여물었겠지?

▼ 호동배수장에서 20분. 초월리에 들어섰다. 둘레길은 외입리(外笠里)의 3개 자연부락(외입·송청·초월) 가운데 하나인 이 마을의 골목길을 통과한다.

▼ ‘호박꽃도 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지만 양파는 그런 농담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 초월마을에도 말뚝 모양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4.1km나 걸었음을 알리는. 하지만 트레킹을 끝마치려면 아직도 10km나 더 걸어야 한단다.

▼ 마을 뒤 언덕을 넘자 또 다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둘레길은 이제 외입리의 들녘을 꿰뚫으며 나아간다.

▼ 들녘은 모내기를 거의 끝마쳤다. 하지만 수확기를 앞둔 밀밭도 심심찮게 보인다. 보리 수매가 폐지되면서 대체 품목으로 심기 시작한 ‘우리밀’이 이젠 자리를 잡아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들녘을 꿰뚫으며 난 길은 곳곳에서 나뉜다. 하도 많다보니 그때마다 이정표를 세우는 건 애초부터 그른 노릇. 가장 쉬운 표식인 리본까지도 매달 수 없는 곳도 심심찮게 만난다. 이럴 때는 한번쯤 바닥을 살펴보자. 서해랑길 특유의 방향표식이 반긴다. 노란색이 정방향. 군청색은 반대방향이다.

▼ 이 뭐꼬? 처음 보는 꽃이라는 집사람의 호들갑에 카메라에 담아봤지만 무슨 꽃인지 도통 모르겠다.

▼ 길은 대부분 들녘의 한가운데를 꿰뚫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지평선 못지않게 광대한 느낌을 준다. 들녘은 끝없이 넓고 산줄기는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배수장이 얼굴을 내민다. 이번에는 ‘연당’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연당리(蓮塘里) 들녘을 적셔주는 물길을 관리하는 배수갑문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이곳에서 또 다시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진도를 바라보는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해남의 뭍을 건너편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송청마을로 향하는 길. 바닷가 너른 터에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다. 옛날 같으면 천일염 생산이 한창이었을 게다. 이렇듯 해남의 염전은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그게 해남의 김치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라고 한다. ‘청정 소금으로 만든 청정 김치’라는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지 않을까 해서다. 답은 ‘더 이상의 태양광발전소’는 ‘노’가 아닐까?

▼ 8분쯤 더 걸어 송청마을에 들어섰다. 200-300년 된 소나무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해서 ‘송청(松靑)’이란 지명을 얻었단다. 그나저나 마을은 너른 평야지대에서 도톰하게 솟아오른 구릉지에 걸터앉은 모양새이다. 하지만 간척사업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의 실제 사례라고나 할까?

▼ 마을안길을 지나 고개를 넘자 또 하나의 자연부락. 아니 이곳도 역시 송청마을이다. 그건 그렇고 마을안길을 지나다 넉넉한 인심을 만날 수 있었다. 동네 어르신 두엇이 막걸리를 마시다가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불러 세우는 것이다. 갈 길이 바빠 권하는 술잔을 마다했지만, 그네들의 보태준 행복 바이러스만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 옛 향기를 퐁퐁 풍기는 집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담장과 구분이 되지 않는 집은, 담장처럼 흙과 돌을 이용해 외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씌웠다.

▼ 밭을 가로지르는 둘레길 도반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서해랑길의 또 다른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팁 하나. 서해랑길은 앞사람과 200m쯤 떨어져서 뒤따르는 게 가장 유리하다. 길이 하도 구불구불해서 아래 사진처럼 가로지를 경우 꽤 많은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다.

▼ 10분쯤 더 걸으면 이번에는 ‘외입마을’이다. ‘외입’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에 있는 갓을 씌운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이 바위의 바깥에 해당한다고 하여 ‘바깥 갓바우’라 부르다가 한자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외립(外笠)’으로 변했단다.

▼ 마을회관은 어르신들의 놀이터다. 그래서 ‘경로당’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얻었다. 그런데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났던 경로당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곳은 남녀를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물까지도 달리 쓰고 있었는데, 이곳은 남녀를 별도로 구분해놓지 않았다. ‘성추행’이라는 사회적 화두에서 그만큼 자유롭다는 얘기가 아닐까?

▼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의 저서 가운데 ‘행복한 맛 여행’이 있다. 여행의 행복을 맛에서 찾았음이리라. 맞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오디를 따먹느라 정신이 없는 저 여인네들은 그 진리를 증명하고 있나보다. 그네들의 얼굴에 함박꽃이 활짝 피어나는 걸 보면 말이다.

▼ 마을 앞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외입저수지’가 있었다. 산자락을 끼고 있지 않아 아름다운 풍경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강태공들에게는 제법 이름을 알린 낚시터다. 월척 참붕어와 떡붕어의 입질이 잦고, 재수라도 좋으면 팔뚝만한 잉어까지 건져 올릴 수 있단다.

▼ 저수지 상류의 정자는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도 쉼터가 되어준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간식도 먹을 겸해서 올라서니 쉼터로는 이만한 곳도 없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렇게 시원한데야...

▼ 해남군에서 설치한 서해랑길 이정표다. 상단에 지명과 거리가 표시된 방향표식을 달았고, 하단에는 보드에다 4코스를 선으로 그려 넣었다. 하지만 방향표식은 서해랑길과 비서해랑길이 구분되지 않고, 하단의 지도도 시점과 종점까지의 거리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어낼 수 없다. 길 찾기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정표라고나 할까?

▼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호남 제조업의 대부랄 수 있는 ‘이훈동(李勳東)’씨의 공적비가 눈에 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조선내화(용광로 등 높은 온도에서 버틸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벽돌을 만든다)의 회장이자 전남일보를 설립한 기업인이었다. 고향 땅에 기부를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이곳 외입마을에서 태어났던 모양이다.

▼ 둘레길은 이제 춘정마을을 향해서 간다. 10분 남짓의 거리에 불과하지만 이 구간은 들녘길이 아닌 호젓한 임도를 따른다. 덕분에 잠시지만 그늘도 만나게 된다.

▼ 고개를 넘자 ‘춘정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법정 마을인 부곡리(富谷里)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자연부락(부곡·신곡·소정·춘정·성산) 가운데 하나이다.

▼ 잠시지만 버스정류장(춘정)부터는 2차선 도로(부곡길)를 따른다. 하지만 인도를 따로 내놓지는 않았다. 가끔가다 지나다니는 차량이 거칠 것 없이 속도를 내니 주위를 살피면서 걷기로 하자.

▼ 도로를 벗어난 둘레길은 또 다른 들녘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두랑영농조합법인’의 커다란 창고를 스치듯 지나 옥동저수지(둑 아래를 살짝 지나가기 때문에 저수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로 다가간다.

▼ 이 구간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지평선이 가물거리는 들판과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아득한 직선로다. 바닷가에 방조제를 쌓아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만든 갯벌을 간척해 바둑판 형태의 곡창지대를 일궈냈다. 그 곡창지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은 자연스럽게 직선이 된다.

▼ 연으로 가득한 논이 눈에 띈다.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자생한다고 해서 ‘연꽃 연(蓮)’자에 ‘연못 당(塘)’자를 붙였다는 ‘연당마을(연당 들녘은 아까 지나왔다)’이 아닌데도 말이다. 연을 길러 얻는 수익이 쌀농사보다 더 알차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1km가 넘는 농로길 중간에 있는 노루목산(해발 34m)은 국내유일의 금광이 있다. 아니 인근 모이산을 비롯해 충북(4곳)과 경남(2곳)에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곳을 빼면 그 양은 극히 미미하단다. 하긴 국내 생산량의 95%인 200㎏을 매년 생산한다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금을 얻기 위해서는 굴진(굴착)-측량-금맥발견-발파-채광-금광석 운반-선광(選鑛, 캐낸 금광석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잡석을 고른)-제련(製鍊, 금괴를 만드는 작업)의 과정을 거친다. 노루목광산에서는 선광까지만 이루어지며, 선광을 끝낸 정광(精鑛·금·은 등을 포함한 금속가루)은 제련업체로 보내져 금·은, 기타 금속으로 분리되어 금괴로 만들어진다.

▼ 너른 들녘 너머로 나타나는 마을은 옥동리의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인 ‘옥연마을’일 것이다.

▼ 농로의 끄트머리(옥동리 마을회관을 1.7km쯤 남겨놓은 지점이다). 바다와의 경계는 배수갑문이 맡았다. 이름표는 붙어있지 않았지만 옥동들녘의 문지기이니 응당 ‘옥동배수장’이겠지? 참고로 춘정버스정류장에서 이곳까지는 28분이 걸렸다.

▼ 방조제로 올라서자 널디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 건너 맞은편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부곡리 땅이다. 그 오른편에 진도가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 배수장을 지난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크게 휜다. 그리고는 옆으로 누운 ‘U’자 모양으로 크게 한 바퀴를 돈다. 그게 싫었던 우리 일행은 바닷가를 따르기로 했다. 토목공사가 한창이라 조금 위험했지만 200m 이상을 단축시킬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손가.

▼ 해안가 모퉁이를 돌자 다시 둘레길과 만난다. 이어서 임도를 따라 옥동마을로 향한다.

▼ 이때 커다란 대하양식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90년대 말쯤 일 것이다. 소금수입의 자유화와 함께 염전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당시 폐전을 원하는 일부 천일염 사업자들이 정부의 지원금을 종자돈 삼아 대하양식장을 열었는데, 저것도 그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 진행방향 저 멀리에는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 ‘옥매산’이 놓여있다. 그 아래 비탈진 곳에는 ‘삼호마을’이 자리 잡았다. 둘레길은 저 마을의 앞을 지난다.

▼ 배수장을 지나친지 23분 만에 ‘옥동(玉洞)’ 마을에 닿았다. 법정마을인 옥동리(玉洞里)를 구성하는 세 개의 자연부락(옥동·옥연·삼호) 가운데 하나로. ‘옥(玉)+동네(洞)’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이 옥(玉)이 생산되는 옥매산 아래에 자리 잡았다.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 이정표도 ‘옥공예체험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 이제 옥동마을과 삼호마을의 경계랄 수 있는 도로(‘삼원길’로 801번 지방도의 옥동버스정류장에서 옥동선착장을 잇는다)까지 나가기만 하면 된다. 다리가 불편한 집사람을 위해 콜택시를 불러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둘레길에서 1km쯤 벗어난 곳에 위치한 ‘옥동방파제’를 둘러보고 싶은 내 바램이 더 컸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유적이 있다는데 어찌 놓칠 수가 있겠는가.

▼ 마을을 빠져나오다 안타까운 현장을 만났다. 널디너른 남새밭에 말라비틀어진 배추가 한가득인 것이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수확을 포기한 농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옥매산’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이었다. 일제가 군수품인 알루미늄 제련의 원료로 쓰이는 명반석(백반석)을 얻기 위해 개발, 산봉우리가 깎여나가 협곡이 됐을 정도로 많이 캐갔다. 저곳은 또 일제강점기 국내 강제동원 중 가장 큰 규모의 동원지로 알려진다(자세한 얘기는 아래서 전하겠다). 그런 아픈 역사를 간직한 옥매산의 산자락에서는 아직도 채광이 한창이었다. 도자기 원료로 쓰이는 납석을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 택시에서 내리니 널따란 광장이 반긴다. 선착장(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옥동방파제’자 적고 있다)에 딸려있으니 ‘물양장’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하지만 이곳은 강제징용에 의해 희생된 ‘옥매광산’ 광부들의 넋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더 유명하다. 해남군민 1인이 1만원씩을 내는 모금행사를 벌여 1400여만 원의 기금을 모았고, 그 돈을 종자돈 삼아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세웠다. 이런 사연은 tvN의 ‘유퀴즈 온 더 블록’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진행자인 유재석과 조재호가 성신여대 서경덕교수와 함께 이곳을 찾아 당시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전한바 있다.

▼ ‘임이여 영원하라’는 주제의 5.5m 높이 추모조형물은 배 모양으로 생겼다. 광부들이 타고 돌아오던 배를 상징할 것이다. 희생된 118명의 광부를 상징하는 같은 숫자의 원구는 수직으로 세웠다. 죽고 나서야 고향의 품에 안긴 광부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을 담았단다.

▼ 추모비의 뒤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옥매광산에서 채취한 맥반석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전 저장하던 창고란다. 7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아픈 수탈의 역사를 잊을 수 없다는 듯 아직까지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 안내판은 ‘옥매광산’에 대한 역사를 담았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이 지역의 광부들은 강제로 제주도로 끌려가 굴을 파는 일에 동원되었다. 해방을 맞아 어렵사리 구한 배를 구해 고향으로 돌아오던 도중 청산도(완도군) 앞바다에서 배가 화재로 바다에 가라앉으면서 118명의 광부들이 목숨을 잃는다. 이후 유가족들과 지역민들에 의해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이곳에 세워졌다.

▼ 방파제 쪽으로 나가자 ‘혈도(피섬)’가 눈에 들어온다. 정유재란 당시 이곳 명랑해협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조선수군과 왜군 사상자들이 흘린 피가 만(灣)으로 흘러들면서 땅까지 선연한 핏빛으로 물들였다 해서 ‘피섬’이란 지명이 생겨났고 한다. 우리를 실어다 준 택시기사는 또 다른 얘기를 전해주었다. 명랑해전에서 대패를 당한 왜군이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 줄도 모르고 저 섬에 숨어들었다가 조선수군에 의해 전멸을 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왜군이 흘린 피가 섬을 핏빛으로 물들였다나?

▼ 바닷가에 서면 놀라운 장관을 볼 수 있다. 맞은편으로 진도가 길게 드리워져 있고, 그 남쪽으로는 수평선 아득한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해남과 진도 사이에는 점점이 뜬 섬들이 호기심과 그리움을 자아낸다.

▼ 줌을 당겨보니 진도의 ‘타위 전망대’가 고개를 내민다. 울돌목 조망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 트레킹 날머리는 원문버스정류장(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4코스의 종점인 원문버스정류장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다. 집사람의 무릎을 핑계 삼아 3km 정도를 덜 걸은 셈이다. 아니 볼거리도 없는 잔여구간을 포기하는 대신 역사유적지를 둘러봤으니 그게 더 알찬 일정이었지 싶다. 그나저나 오늘은 2시간 50분을 걸었다. ‘산길샘 나들이’ 앱은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며 12.65km를 찍고 있다.

▼ 정류장 옆의 민가. 입구를 갖가지 꽃과 작은 소품들로 아름답게 치장했다. 이 부근이 정유재란 때의 대승지인 ‘울돌목’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돌로 만든 배까지 전시해 놓았다. 그렇다면 저 배는 판옥선이 분명하다. 13척의 조선 수군이 330여 척의 왜선을 괴멸시킨 명량해전에는 거북선이 참여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서해랑길 3코스(영터버스정류장-산소버스정류장)

 

여행일 : ‘22. 5. 28(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화산면·황산면 일원

여행코스 : 영터버스정류장→명성·가좌임도→고천암방조제→고천암자연생태공원→한자리방조제→산소버스정류장(14.7km, 실제는 한자리방조제까지 11.54km를 3시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해남·영암구간(149.5km)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주요 볼거리는 ‘고천암방조제’와 ‘고천암 자연생태공원’이 전부라 할 정도로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하지만 다리품을 조금 더 팔아 ‘관두산’에 오르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비경들을 만날 수 있다.

 

▼ 들머리는 ‘영터버스정류장’(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강진·무위사 IC에서 내려와 목포방면 2번 국도. 잠시 후 월산교차로에서는 13번 국도. 해남·완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화산면진입로’에서 우회전하여 화산면소재지(방축리)까지 온다. 77번 국도(황산 방면)로 옮겨 들어가다 재동마을 조금 못미처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왼편 ‘풍혈길’로 옮기면 관동마을에 이어 ‘영터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옛날 해진성관(海珍城館, 제주를 드나들던 사람들을 위한 숙박관소)과 영(營)터가 있던 곳이다. 하지만 관동방조제가 건설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단다.

▼ 3코스는 ‘영터버스정류장’에서 명성·가좌 임도와 고천암방조제(생태공원)을 지나 ‘산수버스정류장’에 이르는 14.7km의 둘레길이다. 임도와 농로, 제방을 따라 걷는 코스라서 어렵지는 않지만 고천암방조제와 생태공원을 빼면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풍경이 없다. 하지만 다리품을 조금 더 팔아가며 관두산에 오를 경우 상황을 확 바뀌어버린다. 풍혈과 던바위·샘, 봉화대터 등 의미 있는 곳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까지 지정되어 있겠는가.

▼ 서해랑길 안내도와 이정표(종점 14㎞/ 시점 0.4㎞)는 관동방조제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바닷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트레킹도 역시 이곳에서 출발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북쪽), 그리니까 ‘관동리(關東里) 포구’쪽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진행방향에 모자를 쓴 것처럼 생긴 바위봉우리가 보이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이처럼 관두산은 옛날 대륙을 오가던 배들의 이정표였었다. 산은 저처럼 그 모습 그대로인데, 바다는 지금 완전히 달라졌다.

▼ 해무가 깔린 바다에는 다섯 개의 섬(상마도·안도·중마도·하마도·서당도)이 두둥실 떠있다. 옛날 제주에서 건너온 어승마(御乘馬)가 한양으로 올라갈 때까지 원기를 회복하던 곳이다. 1702년 ‘탐라순력도’는 임금이 탈 어승마 20마리를 비롯해 총 433마리를 진상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바다를 건너오는 말의 먹이를 준비하고 공마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마을이 ‘도회지(都會地)’였다. 그게 강진·해남·영암에 있었고, 그때 싣고 온 말이 쉬던 곳이 저 섬들이었다.

▼ 바닷가는 질 좋은 모래사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갯벌투성이인 남해안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해수욕장으로 개발하지는 않은 듯 편의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 첫 번째 삼거리에서 오른편 임도로 올라선다. 곧장 진행하면 ‘관두리 선착장’. 관두리방조제가 생기면서 새로 조성된 포구라고 보면 되겠다. 제주도와 중국(송나라)을 오가는 배들이 정박하던 국제무역항 관두량(館頭梁, 현재의 관동리 일대)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대동지지(1865), 동국여지승람(1481) 등의 문헌은 고려시대 중국의 남경을 왕래하던 개항지로 해남의 남쪽 4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관동-명성 임도’를 따른다. 이곳에서 시작해 명성마을까지 이어지는데 길이는 2.8km쯤 된다.

▼ 길을 나선지 8분(앱은 0.65km를 찍고 있다). 앞서가던 일행들이 웅성거리는 게 보인다. 관두산을 오르느냐를 두고 망설이는 사람들일 것이다. 길이 나있지는 않지만 관두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치고 올라야하기 때문이다. 내 선택은 물론 관두산 등산이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국가산림문화자산(산림과 함께 살아온 선조의 생활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생태적·경관적·정서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유·무형의 자산)’으로 지정된 비경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망설이겠는가.

▼ 관두산을 오른 다음 다시 되돌아올 필요는 없다. 봉수대와 풍혈, 던바위·샘, 난간절벽, 삼형제바위 등 관두산이 품은 비경들을 샅샅이 살펴본 다음 명성리 방향으로 내려가면 서해랑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멋진 경관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길은 흔적조차 없었고, 잡목과 가시나무, 넝쿨식물 등 장애물들이 첩첩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퀴거나 찔리고, 거기다 싸대기 두어 대는 각오해야 ‘감(甘)’을 만날 수 있다.

▼ 능선까지의 거리가 짧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악전고투를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고와진다. 길이 널찍해졌을 뿐만 아니라 중요 지점에는 국가지점표지판까지 설치해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

▼ 정상으로 가는 도중 심심찮게 시야가 열린다. 이때 관동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1967년 화산면 관동리와 평호리를 잇는 관동리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그 옛날 바다는 육지로 변했고, 방조제 인근에 있던 관(館)터와 영(營)터는 민가와 공장이 들어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해남에는 저곳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대 해양도시가 곳곳에 있단다.

▼ 아래서 올려다본 관두산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조금 심했을 뿐 오르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철제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그게 불가능한 곳에는 굵은 밧줄을 매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 능선에 올라선지 15분(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만에 관두산(館頭山,178m)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표지기(산꾼들이 등정 기념으로 매달아놓은 리본)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이정표(풍혈 0.6㎞/ 땅꼭재 1.1㎞)와 삼각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봉수대(해남 향토문화유산 29호)가 있었다. 세종 때 쌓은 봉수로 멀리 서남해의 왜구들이 넘나드는 것을 조망하여 서울 쪽으로 봉화를 중계했었단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이웃 진도와 서남해 바다를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관두산봉수의 흔적은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때 초축되어 남으로 갈두산, 서로는 진도 첨찰산에 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먼저 오르는 도중 보았던 관동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진 채로이다. 그 뒤에는 달마산을 품은 ‘땅끝기맥’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리자 이번에는 해무 속에 잠긴 진도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전산수화 속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 조망을 즐기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서니 헬기장이 나온다. 군사정권 시절 이 시설을 만들기 위해 봉수대의 돌들을 헐어냈다니 역사를 말살시킨 원흉이라 하겠다.

▼ 길은 짙푸른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같은 상록수가 대부분. 남쪽 해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소사나무도 심심찮게 보인다.

▼ 조금 더 내려가니 ‘안부사거리’. 고맙게도 이정표(난간절벽↑ 0.4㎞/ 풍혈← 0.43㎞/ 던바위·샘· 30m/ 정상·봉화대터↓ 0.1㎞)와 탐방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참! 삼형제바위를 찾는 사람들도 꽤 되는 모양이다. 안내판의 하단에 거리 및 방향 표시를 따로 해두었다.

▼ 이 안내판 때문에 난간절벽을 걸어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풍혈과 난간절벽을 서로 엇갈리게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실제는 난간절벽을 지나 풍혈로 갈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 먼저 오른편 ‘던바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30m쯤 들어가자 바위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흡사 지붕의 처마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것이 비바람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지자체에서는 던바위 앞 널따란 공터에 돌탑을 쌓고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바위틈에서 떨어진 물이 모여 작은 샘을 이룬다.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은 그대로가 약수다. 이 약수는 기도에 영험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돌탑에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걸려 있었다.

▼ 동굴에서의 사진은 안에서 밖을 향해 앵글을 맞춰야 제 맛이다. 이때 함께 산을 오른 둘레길 도반의 모습이 주인의 허락도 피사체에 들어와 버렸다. 나름대로 산에 대한 이력을 인정받는 나보다도 한 수 위의 능력을 자랑하는 분이다.

▼ 던바위 옆에는 진짜 샘도 있었다. 이 샘은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똑같은 수위를 유지한단다. 산의 정상 어림에 그것도 산세도 그리 크지 않은 곳에 저럼 샘이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풍혈’쪽으로 향했다. 일행 두엇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없어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하지만 관두산의 또 다른 명소인 ‘난간절벽’은 길이 어긋나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낙화암을 무색케 할 만큼 깎아지른 절벽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거기다 난간에라도 올라서면 바다가 눈앞에 잡힐 듯 가슴을 죄게 한다는데 말이다.

▼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풍혈사거리’가 나온다. 이정표(해안로/ 대상절벽/ 풍혈/ 정상·봉화대터)는 우리가 걸어온 방향을 ‘절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왼편은 ‘풍혈’. 오른편은 ‘대상절벽’이란다. 그렇다면 난간절벽 코스를 이용해도 풍혈에 이를 수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억울하다.

▼ 삼거리에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돌탑들이 모여 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하다. 얼마나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저리도 공들여 쌓아올렸을까?

▼ 몇 걸음 더 걸으니 큰 바위들이 서로 엇갈리게 쌓여있는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이곳 관두산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게 만든 장본인인 ‘풍혈(風穴)’이다. 화산활동 과정에서 깨진 큰 바위들 틈에 크고 작은 동굴들이 만들어졌고, 암반 틈새로 흘러들어간 빗물이 데워지면서 수증기로 변해 이 동굴을 통해 올라온단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이곳 말고도 풍혈이 여럿 있다. 그중 여름철에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곳으로는 대두산(전북 진안)의 풍혈냉천(風穴冷泉)과 울릉도의 도동풍혈, 밀양 얼음골, 빙계계곡(경북 의성)의 빙혈(氷穴)이 유명하다. 겨울철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곳은 이곳 관두산 풍혈과 구병산(충북 보은), 작약산(경남 김해)의 풍혈이 있다. 이중 대두산 풍혈냉천과 구병산 풍혈, 도동 풍혈을 ‘3대 풍혈’로 꼽는다.

▼ 풍혈(風穴)이란 여름에는 찬 공기가 나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구멍을 말한다. 이곳 ‘관두산 풍혈’은 여름에 찬바람이 나오기보다는 겨울에 더운 바람이 나오는 구조다. 지하로 유입된 물이 지하의 열원에 의해 데워져 수증기가 되고, 이 수증기가 관두산을 이루는 암석의 틈새를 통해 올라오는 현상으로 추정된단다.

▼ ‘관두산 풍혈’의 얼굴마담은 ‘용굴’이다. 영하의 추운날씨에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용이 숨을 뱉어내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건 그렇고 ‘용굴’에 들어간 둘레길 도반의 첫마디는 ‘애계! 하나도 시원하지 않잖아?’였다. 맞다. 더운 바람이 나오는 관두산 풍혈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만나야 제격이다.

▼ 용굴 안에 있는 좁은 구멍. 그러니까 돌을 던지면 풍덩하는 소리가 났다는 그 구멍을 찾다가 포기(안 보이니까)하고 나오려는데 들어올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도반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게 또 풍취가 있는 그림이 되는 게 아닌가. 맞다. 동굴은 안에서 밖을 향해 찍어야 제 맛이다.

▼ 풍혈은 ‘용굴’말고도 10곳이 더 있다. 아래 사진처럼 꼬맹이 풍혈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풍혈 주변은 겨울철에도 17∼20도 가량의 온도를 유지한단다. 고사리 및 이끼류가 많이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 다음 볼거리인 ‘삼형제바위’까지는 꽤 멀다. 길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스런 잔소리를 서너 번이나 듣고 나서야 삼형제바위에 이를 수 있었다. 바위는 그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고만고만한 바위 세 개가 비스듬히 서있는데, 애달픈 옛이야기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 갑자기 가팔라진 산길을 따라 5분쯤 내려왔을까 아까 헤어졌던 임도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관두산을 다녀오느라 시간이 지체된 탓에 일행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 집사람을 뒤쫓아 발걸음을 서두르는데 왼편으로 시야가 툭 트인다. 물 떠나가는 바닷가에 증도가 외롭다. 아니 꼬맹이 섬을 끼고 있으니 꼭 외롭지만은 않겠다.

▼ 임도가 끝나면 명성마을의 널따란 들녘. 서해랑길의 이정목(종점 11㎞/ 시점 4㎞)이 반긴다. 그런데 내 앱은 3.4km를 찍고 있다. 관두산을 오르느라 고생했지만 대신 거리는 0,6km가 단축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적 작업이 한창인 물류창고가 나오는데, 꼭 남의 집 앞마당을 통과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작업자의 친절한 안내가 아니었더라면 난감한 상황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방조제에 올라서니 물 빠진 바닷가에 흔치 않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구를 잔뜩 실은 무동력선들이 흡사 섬이라도 되는 양 바닷가에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 방조제가 방조제 같지 않다는 느낌은 왜일까? 바다를 막는 큰 그림이 아니라, 바닷물이 넘쳐들지 못하게 해안에 둑을 쌓은 수준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로인해 작은 토지가 생겨났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 둑길을 지난 둘레길은 명성마을(관동리)로 들어선다. 이어서 마을을 스치듯 지나치며 무학마을(가좌리)로 향한다.

▼ 6분쯤 더 걸으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둘레길은 이곳에서 임도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대월산(130m)의 허리께를 따라 난 임도를 따른다.

▼ 임도의 길이는 1.98km. 명성마을에서 시작해 대월산을 에두른 다음 가좌마을로 내려선다. ‘가좌-명성임도’로 명명된 이유일 것이다.

▼ 임도의 특징대로 길은 삭막한 편이다. 거기다 널찍하다보니 그늘을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여름철 뙤약볕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다.

▼ 가끔가다 시야가 트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때 해무에 잠긴 진도가 자태를 드러낸다. 그 사이에는 ‘증도’가 있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대월산이 바닷가에 떨쳐놓은 한줌의 땅처럼...

▼ 길가에 터를 잡은 집주인은 가로수 하나 없는 임도가 못내 서운했던가 보다. 수십 개의 고무 다라이(표준어인 ‘대야’로는 그 느낌 전해지지 않아서)를 길가에 펼쳐놓고 수련(睡蓮)을 키운다. 수련이 꽃을 피우는 여름철에라도 찾아오면 또 다른 멋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다.

▼ 17분을 걸어 임도를 빠져나오니 또 다른 방조제가 반긴다. 이렇듯 해남의 해안가 들녘은 너나없이 방조제로 바다와 경계를 삼는다. 그저 국가차원의 대단위 사업인지, 아니면 주민들의 손에 의해 오래전 만들어졌는지가 다를 뿐이다.

▼ 물 빠진 바닷가에는 잘생긴 섬 하나가 들어앉았다. ‘중도’란다. 조금 전에 보았던 섬은 ‘증도’. 헷갈리기 딱 좋은 이름들이다.

▼ 방조제 끄트머리에서 바닷가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가좌마을(可座里)을 향해 나아간다. 이때 썩 반갑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선 곳이 하필이면 농경지였기 때문이다. ‘식량 안보’.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 농로를 따라 18분쯤 걸었을까 구릉형의 산지에 들어앉은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정표(종점 6.3㎞/ 시점 8.5㎞/ 가좌리마을회관 560m)까지 세워놓았을 정도로 중요한 지점인데 마을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자연부락마다 표지석을 세워 마을 자랑을 하고 있던 지리산 둘레의 마을들에 비해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서해랑길의 길안내 표식이 한꺼번에 모여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고개를 넘으면 ‘고천암방조제’가 나온다. 그 둑길을 걷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으로부터 이곳 해남의 특징을 들을 수 있었다. ‘산야해(山野海)’의 고장. 즉 산(두륜산과 달마산)과 야(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너른 들녘) 그리고 해(절반에 가까운 군 경계가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난 ‘삼인행 필요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의 진리를 오늘도 절감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풍경을 이곳 ‘고천암 방조제’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 왼편에는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진도가 가로막았다지만 바다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삼위(山野海) 일체의 하나(海)가 되었다.

▼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나머지 둘이 펼쳐진다. 고천암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이 지평선을 연상시킬 정도로 드넓게 펼쳐지는데, 그 뒤를 두류산과 미륵산 등 해남의 명산들이 떠받치고 있다.

▼ 방조제가 끝나갈 즈음 ‘징의항’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징의리 어민들을 위한 포구지만, 선착장은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남해안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 물 빠진 바다는 시커먼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내게는 갯벌로 보이는 저 바다는 어민들에는 생업의 터전이자 평생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생명줄이다. 그래서 가끔은 안쪽에서 흘려보내는 담수 문제로 농민들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 잠시 후 배수갑문이 나오면서 방조제는 끝을 맺는다. 눈에 들어온 갑문은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하긴 저수량이 1만 7,103㎥나 되는 고천암호의 수위를 조절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팁 하나. 이곳 배수갑문은 옛날 ‘구수(口水)나루’로 불리던 곳이다. 새벽이면 해파리·돌김·숭어·병어·간재미 등 징의도에서 잡히는 풍부한 해산물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물이 드나드는 입’이라는 뜻의 이 나루터에 배수갑문이 생겼으니 옛사람들의 혜안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 배수갑문에는 ‘금보다도 더 귀하신 실뱀장어’의 현실을 보여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실뱀장어는 ‘연어’와 반대로 어미가 바다에서 산란하면 강으로 돌아와 산다. 그 새끼가 들어오는 길목에 불법(허가받지 않은 채로)으로 안강망(鮟鱇網)을 치는 행위를 하지말자는 것이다. 적발될 경우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해지지만 고수익(하루에 수백만 원도 더 번단다)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 ‘고천암호’는 한자리(閑子里, 황산면)과 율동리(栗洞里, 화산면)을 잇는 1,874m 길이의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담수호다. 호수의 면적은 6.65㎢(약 202만평)로 갈대숲을 비롯한 습지가 잘 발달되어 철새들이 즐겨 찾는다. 내사리 일원의 갈대숲이 특히 유명한데, 갈대탐방로에 들어서면 사방을 에워싼 갈대숲에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란다. 영화 ‘서편제’와 ‘살인의 추억’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고천암호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방조제 내 간척지에서 본격적으로 쌀농사를 시작하면서 철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겨울에 들어서면 전 세계 가창오리의 95%가 이곳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그밖에도 황새나 저어새 등 천연기념물들도 이곳에서 월동을 한단다. 한꺼번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가창오리 떼의 군무가 특히 유명한데, 해남군에서는 ‘고천후조(庫千候鳥)’라는 이름을 붙여 해남8경 중 으뜸으로 꼽는다.

▼ 배수갑문을 지나면 황산면 ‘한자리’. 트레킹을 시작하고 2시간 40분 만에 도착한 이곳에는 한국농어촌공사의 ‘고천암관리소’가 들어서 있다. 이는 곧 국가차원에서 호수를 관리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고천암(庫千巖)’은 생태공원 맞은편의 산처럼 생긴 거암으로, 천석 벼를 쌓은 창고 모양이란 뜻이란다. 방조제가 생긴 이후 주위가 비옥한 평야로 변하자 주민들은 ‘천개의 창고를 채울 수 있는 곡창’으로 해석한단다. 선견지명이 담긴 지명이라 하겠다.

▼ 관리소 앞은 ‘자연생태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바닥분수가 있는 에코센터, 철새와 고천암호의 낙조를 즐길 수 있는 조류관찰센터와 조류탐조대, 고천암호 갈대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갈대탐방로 등이 들어서있다. 하지만 둘러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겨울철이 아니면 철새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공원을 대표하는 조형물은 ‘가창오리’다. 실물을 쏙 빼닮은 조형물을 설명판과 함께 곳곳에 세워놓았다.

▼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길가 징의리(澄衣里) 들녘은 모내기를 거의 끝냈다.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소만(小滿)이 지난지도 벌써 일주일. 부지런한 농부들에게는 모내기를 끝마치기에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 둘레길은 징의마을(작은재)을 향해 나아간다. 이곳 징의리는 원래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7년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아직도 이곳을 '징의도'라고 부른단다.

▼ 그렇게 18분쯤 걷자 77번 국도(이정표 : 종점 2.5㎞/ 시점 12.3㎞)에 올라선다. ‘송호해변’에서 북상하는 이 국도는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총연장이 1,258km나 된다. 여행자에게는 ‘77’이라는 도로번호만 봐도 반가운 것이, 바다가 지척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바다는 명량해협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다. 그 초입에 아름다운 섬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준도’라는 이름의 섬이다.

▼ 이곳에서도 태양광발전소를 만났다. 그런데 아까 ‘명성리’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범위가 넓다. 널디너른 간척지가 온통 태양광 패널로 덮여있는 것이다. 농사가 힘들다는 것은 나도 안다. 태양광발전이 고수익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 넓은 농토에 태양광발전소를 만들다니 해도 너무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않았던가.

▼ 날머리인 산소버스정류장을 2.5km쯤 앞둔 지점(징의버스정류장)에서 트레킹을 마감하기로 했다. 무릎이 시원치 않은 집사람을 배려해서이다. 친환경소금을 생산한다는 염전이나 밀·보리가 익어가는 간척지의 목가적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1.54km. 관두산을 올랐던 점을 감안하면 꽤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날머리인 ‘산소(山所)’ 마을까지는 콜택시를 이용했다. ‘산소마을’은 한자리(閑子里)에 속한 4개의 자연부락(행정단위인 한자리, 산소리, 신정리, 징의리) 가운데 하나다. 평평한 구릉평야가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소리는 해남에서 제일 먼저 어업조합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 종점으로 표시된 ‘산소버스정류장’이다. 하지만 서해랑길 안내판은 정류장에서 80m쯤 떨어진 삼거리에 세워놓았다. 삼거리가 3코스와 4코스의 시·종점이지만 특별히 내세울만한 시설물이 없다보니 이 버스정류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나보다.

▼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은 ‘산소항’에서 먹었다. 밥 먹을 장소를 찾던 회장님이 발품을 팔아가며 찾아낸 곳인데, 덕분에 우린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한껏 여유를 부려가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지주가 숲을 이루는 바다는 지주식 김을 주제로 한 어촌체험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김 채취와 제조과정을 전통방식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갯벌에 생육하는 망둥어·낙지·농게·굴·꼬막 등을 관찰하는 갯벌체험도 가능하단다. 참고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지주식 김은 조수간만 차를 이용한 전통방식으로 생산해 옛날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단다.

서해랑길 1코스(땅끝탑-송지면사무소)

 

여행일 : ‘22. 4. 23(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일원

여행코스 : 땅끝탑→송호해변→황토나라 테마촌→송종마을→송지저수지→마련→소죽리→송지면사무소(거리/시간 : 14.9km/ 실제는 마련마을까지 11.55km를 3시간 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그 서해랑길이 시작되는 1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러진 해남구간(131.3km)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주요 볼거리는 ‘땅끝마을’과 ‘송호해안’. 땅끝마을은 1986년 국민관광단지로 지정되면서 세간의 입소문을 탔다. 90년대 초반에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소개되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 들머리는 ‘땅끝항 여객선터미널’(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강진·무위사 IC에서 내려와 목포방면 2번 국도. 잠시 후 월산교차로에서는 13번 국도. 해남·완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남창교차로(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서 우회전하여 77번 국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땅끝마을’에 이르게 된다. 코스 출발점은 63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땅끝탑’이지만 차량의 진입이 불가능하므로 실제 트레킹은 여객선터미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서해랑길’은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시작해 인천 강화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그리고 작은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의 걷기 여행길이다. 때로는 썰물로 바닥을 훤히 드러내는 개펄을 따라 걷고, 때로는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을 따라 걷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은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앞에서 쉬어가도 그만이다. 이 길에서는 내륙 깊숙이 발달한 만과 아름다운 섬, 광활한 개펄, 인간의 삶에 풍요를 내어준 바다를 실컷 눈에 담게 된다.

▼ 1코스는 ‘땅끝탑’에서 시작해 송호해변과 황토나라테마촌을 지나 송지면사무소에 이르는 길이 14.9km의 둘레길이다. 산길과 농로, 마을안길을 따라 걷는 코스라서 어렵지는 않지만 ‘황토나라테마촌’을 지나면서부터는 주변 풍경에 변화가 없어 지루해진다.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마련마을까지만 걷고 나머지 구간은 택시를 이용했다.

▼ 여객선터미널의 옆. 널따란 광장에는 ‘빗돌’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한반도 최남단. 땅끝’란 글씨는 원로 서예가인 ‘장전 하남호’가 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땅끝’은 오른쪽 해안을 따라 한참을 가야만 만날 수 있다. 비의 하단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이유이다.

▼ 바닷가로 나가자 꼬맹이 바위섬인 ‘맹섬’이 얼굴을 내민다. 일출이 일품인 저곳은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떼 지어 몰려드는 해돋이 명소이기도 하다, 두 섬의 사이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하기 때문이다.

▼ 아래 사진은 상황설명을 위해 빌려왔다. 하지만 이런 사진을 찍으려면 1년에 딱 2번(2.15-22, 10.23-30) 기회에 맞추어 와야만 한단다.

▼ 또 하나의 볼거리인 ‘형제바위’가 얼핏 하롱베이의 ‘키스바위’를 닮아보였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특히 앞의 것은 야류지질공원(대만)의 ‘여왕머리 바위’, 즉 고대 이집트의 ‘네페르티티 여왕(Nefertiti, BC1370-1330)’의 머리를 쏙 빼다 닮았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먼 바다에서 몰아쳐온 해풍과 파도에 시달리며 깎이고 닳은 해식작용의 결과다.

▼ 주차장 위에 있다는 ‘희망의 공원’은 선두대장의 뒤꽁무니를 따르느라 아예 들러보지도 못했다. ‘희망의 손’과 ‘희망의 종’이 대표적인 볼거리라기에 다른 분의 것을 잠시 빌려왔다. 두 손을 마주 보게 조각한 ‘희망의 손’은 땅끝을 찾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는 김용준 조각가의 작품이다. ‘희망의 종’은 미래의 희망인 사람과 나무를 형상화하여 사랑과 소망을 담았다. 이를 치면 희망이 다가온단다.

▼ ‘사자봉’ 방향의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계단을 오르면 ‘땅끝’의 지리적 현황을 적은 안내판이 반긴다. ‘신동국여지도’의 만국경위도는 우리나라 전도의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단’에서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삼천리금수강산’으로 표현했다.

▼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맹섬횟집 앞 느티나무도 범상치 않다. 나무 아래에 연인들을 위한 맞춤형 그네까지 만들어놓았다. ‘바람도 맛있는 땅끝 해남’이란 부제를 달았다.

▼ 마을을 벗어날 즈음 모노레일 승강장이 나온다. ‘땅끝전망대’까지는 모노레일을 타고 6분, 걸어서는 40분 정도 걸린다. 내 기억으로는 9층 높이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훌륭했었다. 해남 앞바다는 흡사 커다란 호수 같았고, 그 위에 보길도·노화도·추자도 등 수많은 섬들이 겹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로 올라가 조망을 즐긴 다음 나무계단을 이용해 ‘땅끝탑’으로 내려오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코로나 펜데믹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쳤던 모양이다.

▼ 승강장 앞 광장에는 포토죤을 만들어놓았다. 뭔가 새로운 것을 위해 찾아 온 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땅끝은 새로운 출발점에 선 사람들에게 결의와 다짐의 기회를 준다. 사업을 새로 시작하거나, 상급학교 입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는가 하면, 새해 새 희망을 다짐하는 장소로도 애용된다.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결단코 땅끝만 한 곳이 없다.

▼ ‘땅끝탑’으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모노레일 승강장. 그런데 ‘땅끝탑’의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떡하니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정비(땅끝탑 촬영을 위한 경간이 짧아서 이를 개축한단다)를 위해서인데, 2022년 6월에 새로운 조망시설이 갖춰질 예정이라고 한다.

▼ ‘땅끝탑’도 세월의 무게를 거스를 수는 없었나보다.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를 헐고 그 자리에 스카이워크를 짓는단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기상(기존의 것은 뱃머리에 서서 바다를 응시하는 항해왕자 엔리케를 연상시켰었다)보다는 최근의 트렌드인 스릴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참! 여기서 팁 하나. 아래 사진의 뱃머리에서 오른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의 튀어나온 바위가 한반도의 실제 ‘땅끝’이란다. 아무도 알아채주지 않는 저 바위가 이 땅의 진정한 끄트머리이자 시발점이다.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북위 34도17분21초.

▼ 길은 한마디로 잘 닦여있다. 보도블럭·보드·황토 등 지형에 맞춰 길을 내었는가 하면, 탐방객들의 건강을 위해 ‘발 안마 길’까지 만들었다. 파고라나 정자를 지어 쉼터를 겸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 시판을 읽으면서 걷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해남문학회 회원들의 작품을 게시했는데 그 숫자가 만만치 않다.

▼ 바다에는 철부선이 오간다. 땅끝항과 노화도(蘆花島)의 산양항 사이를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웬만한 파도나 해무에는 지장을 받지 않는단다.

▼ ‘땅이여! 기의 문을 여소서’라는 시비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땅끝 기가 뭉쳐 있는 곳/ 바다와 육지가 처음 만나는 곳/ 그곳에 서다/ 태초 때부터 숱한 사연을 간직한 이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었던 곳/ 아~ 땅이여! 하늘이여!/ 문을 여소서/ 땅끝은 끝이자 시작이다/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희망/ 그 희망이 이뤄지는 곳…> 이 얼마나 주옥같은 글귀들인가?

▼ 시비에서 계단을 오르자 길이 둘(이정표 : 땅끝탑↑ 130m/ 전망대→ 400m/ 땅끝마을↓ 500m)로 나뉜다. 오른편의 나무계단은 사자봉 정상의 전망대로 연결된다. 서해랑길의 출발점인 땅끝탑은 물론 직진하면 된다.

▼ 길을 나선지 20분 만에 ‘땅끝탑’에 도착했다.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인 땅끝마을은 그 자체가 한반도 최남단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돛을 펼쳐놓은 것 같은 삼각뿔 모양의 ‘땅끝탑’이다. 북위 34도17분21초, 걸어서 더 나아갈 곳이 없는 곳이다. 전에는 그 옆에 놓인 나무계단을 이용해 해안가로 내려설 수도 있었다. 지금은 비록 눈요기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 서해랑길(1코스)의 시작점인 땅끝탑은 ‘땅끝 천년숲 옛길’, ‘코리아트레일(구 삼남길)’ 등 여러 걷기 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각각의 둘레길을 안내하는 표지판과 리본이 설치되어 있다. 참! 서해랑길과 남파랑길이 이곳에서 갈라진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땅끝 해남’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널따란 평야나 바닷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해남 땅은 끄트머리까지 산맥이 치닫는다. 그 산맥을 따라 내놓은 걷기 길이 ‘땅끝 천년숲 옛길’이다. 총 52㎞의 옛길을 정비해 땅끝길(15.5km)과 미황사역사길(20km), 다산·초의교류길(15.5km) 등 3개 코스로 나누었다.

▼ ‘코리아트레일(구 삼남길 : 옛 사람들이 땅끝마을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을 재현해놓았다)’ 안내판은 땅끝마을 주변의 탐방로를 소개한다. 하지만 민간이 만든 이 트레일은 6개 광역시도와 27개 시·군·구를 통과한다. 정약용 등 역사 인물들의 유배길이자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옛길인 갈재와 누릿재를 넘어 11곳의 향교, 13곳의 전통 5일장, 6곳의 양조장 등을 경유한다. 또한 숭례문(국보 1호) 등 100여 곳의 역사 유적지와 함께 아름다운 마을길·농로·숲길·탐방로 등 다양한 길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연결했다.

▼ ‘서해랑길’ 이정목(땅끝탑에서 23m지점)을 기준삼아 트레킹을 시작한다. ‘땅끝탑’부터는 보드워크(Boardwalk)와 오솔길을 번갈아 걸었다. 탑까지 오면서 먼 바다를 바라봤다면 이후부터는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걷는 사람도 뚝 끊겨버린다. 서해랑길이나 땅끝산책로가 아직은 입소문을 덜 탄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에겐 더 좋은 환경이 되었다. 집사람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삼천리금수강산 이야기를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남한의 광역지자체뿐만 아니라 까맣게 잊고 살던 북한의 도(道)까지 더했는데, 남한과 경쟁이라도 하듯 특별시(평양)·직할시(개성·남포)로도 모자라 황해도와 함경남도, 평안북도는 아예 둘로 나눴다. 이중 함경남도에 나뉜 양강도를 게시해본다. 백두산이 속해있는 도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해 있다. 두 강이 흐른다고 해서 ‘양강도(兩江道)’가 되었단다. 소재지는 ‘혜산시’이며, 유적지로는 갑산읍성, 삼수읍성의 4개 문루 중 하나인 조일문, 망화루, 괘궁정, 중흥사 등이 있단다.

▼ 탐방로는 ‘갈두산(葛頭山)’을 에둘러가는 모양새이다. 그러다보니 모퉁이를 만나기도 한다. 그중 하나를 돌아서자 바위벼랑 위에 전망대 하나가 걸터앉았다. 전망대로 연결되는 길은 거의 잔도(棧道) 수준. 처마에 들어붙은 제비집을 연상시키는 전망대와 함께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 서해랑길과 동행하고 있는 이 길은 ‘땅끝 산책로’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그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 전망대를 들어앉혔다. 첫 번째 만남은 ‘사자끝샘 쉼터’. 대(臺)를 바다를 향해 내어 만들어 전망대를 겸하도록 했다.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을 세워두는 친절도 놓치지 않았다.

▼ 쉼터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 왔을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다. 그 사이 바다에는 전복·다시마·미역 양식이 한창이다. 열을 맞춰 떠있는 궤와 붉고 하얀 부표가 양식장임을 말해준다.

▼ 탐방로에는 데크와 흙길을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흙길이 기본. 길을 내기 힘들 정도로 비탈진 곳에는 데크로 길을 만들었다. 두 번째로 만난 쉼터는 ‘당할머니 쉼터(갈산마을 당할머니의 얘기다)’. ‘학도래지 쉼터(천연기념물로까지 지정될 정도로 많은 학이 찾아왔었단다)’가 뒤를 잇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 조금 더 걷자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라는 ‘연리지(連理枝)’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50-60년쯤 묵은 ‘때죽나무’가 만들어낸 걸작인데,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있는 여느 연리지와는 달리 이곳은 오른쪽 나무줄기와 왼쪽 나뭇가지가 붙은 게 조금 특이하다.

▼ 연리지의 고사는 후한 말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됐다. 효성이 지긋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단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다정한 연인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당나라 시인 백락천(白樂天)에 의해서다. 백락천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으며,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연리지’를 빌어 노래했다.

▼ ‘달뜬봉 쉼터(중리마을의 샘과 뒷산을 소재로 삼았다)’에 이어 나타난 ‘댈기미 쉼터’는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곳이니 사랑이 성사되길 빌어보라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둥글둥글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있다는 ‘댈기미 해안’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돌을 주워 사자봉을 향해 소원을 빌면서 바다로 던지면 된단다. 단, 주변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또한 이곳의 조약돌을 소중히 간직했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건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 저 어디쯤에 ‘댈기미 해안’이 있다고 했다. 그 해안에는 ‘소원돌’이 이 세상 소원의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했다. 저마다의 소원이 다른 것처럼 그 소원을 품은 돌들도 그 색깔과 모양이 제각각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찾아보지는 못했다.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해서다. 자갈밭에 누워 파도에 떼밀려 돌 구르는 소리. 저마다 품고 있는 소원을 말하듯 또르르 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오토캠핑리조트↑ 2.1㎞/ 전망대→ 0.7㎞/ 땅끝탑↓ 0.6㎞)에 닿았다. 탐방안내도는 이곳을 ‘자갈밭삼거리’로 적고 있었다. ‘댈기미 해안’ 근처에 위치한 삼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은 찾을 수 없었다.

▼ 이후로도 몇 개의 쉼터를 더 만난다. ‘사자포구 쉼터(미황사의 창건설화가 서린 포구 얘기다)’와 ‘불무청 쉼터(송종마을 골짜기에 있었다는 대장간이야기이다)’와 ‘난대림 쉼터(갈산마을의 난대림)’ 등 땅끝마을 주변의 볼거리들이 빠짐없이 나열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7분. 산비탈을 따르던 탐방로가 임도로 내려선다. 군부대 앞 작은 공터에는 농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젊음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젊은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 군부대 앞에서 숲길이 끝나고 대신 황톳길(일부는 시멘트 포장)이 펼쳐졌다. 황토가 깔린 구간은 짧지만 강렬했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발바닥에 전해지는 듯했다.

▼ 이후부터 길 찾기는 리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주황색과 노란색 리본이 한 쌍을 이루는데, 둘레길 곳곳에 촘촘히 매달려 있어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을 준다.

▼ 그렇게 10분쯤 걷자 ‘땅끝 바다낚시터 & 글램핑’이 얼굴을 내민다. 낚시를 활용하는 새로운 레포츠 분야로, 남해바다를 베개 삼아 글램핑을 할 수 있어 가족나들이에 제격이라고 한다.

▼ 낚시터 앞바다에는 양도(羊島)가 두둥실 떠올랐다. 염소를 방목하던 섬이라는데, 육지(해남)에서 건너뛰기 한번이면 이를 거리지만 완도군(군외면 당인리) 소속의 유인도이다. 서너 명의 주민이 전복양식 등을 하며 살아가는데, 물이 나지 않아 생활용수를 해남 땅에서 길어다 사용하고 있단다.

▼ 잠시 후 도착한 갈산마을에는 커다란 ‘포구’가 있었다고 한다. 바닷일 나가는 뱃사람들이 무탈을 빌며 제를 지내던 당집(‘갈산할매’를 모신다)까지 있단다. 하지만 둘레길 나그네들이 눈에 담을 수 있는 건 낚시터가 전부일 따름이다. 참고로 갈산마을 앞바다는 ‘울돌목 물살도 울고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세다고 한다. 또 ‘죽음의 고비’를 뜻하는 ‘사재끝’이 땅끝에 있어 제를 지내야 안심하고 지날 수 있었단다.

▼ 갈산마을은 방풍림으로 후박나무를 심었나보다. 아름드리 후박나무가 바닷가를 향해 도열해있는데, 수십 아니 수백 년은 족히 묵은 듯 그 굵기가 장난이 아니다.

▼ 마을 앞 팽나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둘레를 장정 두엇이 팔을 옆으로 뻗어야 할 만큼 굵은 팽나무가 흡사 뒷짐진 수호신처럼 길가에 늘어서 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매는 신령과는 자못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 마을안길에서 서해랑길의 두 번째 ‘이정목’을 만났다. 시점과 종점을 화살표로 나타낸 다음, 그곳까지의 거리를 적었다. 화장실의 위치와 거리까지 표시한 독창성이 돋보이는 시설물이다.

▼ ‘코리아 트레일’의 표식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정방향은 진녹색. 역방향은 붉은색으로 표시한다. 반면에 서해랑길의 방향 표시는 정방향을 노란색, 역방향은 군청색으로 하고 있었다.

▼ 드넓은 마늘밭을 지나면 고갯마루 언저리에서 유럽풍의 가옥(땅끝 방갈로펜션)을 만나고, 고개를 넘자 이번에는 ‘땅끝 오토캠핑장’이 얼굴을 내민다. 카라반과 ‘데크 및 파쇄석’ 사이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송호해수욕장을 앞마당 삼을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입소문을 타면서 캠핑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 캠핑장을 스치듯 지나치면 ‘송호해변(松湖海邊)’이다. 해변에는 해수욕장이 들어서있다. 너비 200m에 길이가 2km나 되는 백사장을 지자체에서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수심이 얕은데다 경사까지 완만하다는 데야... 아래 사진은 해변의 끄트머리쯤에서 만난 포토죤이다.

▼ 송호해변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울창한 해안방풍림이다. 백사장 뒤로 나이가 100년도 넘는 소나무 약 600여 그루가 들어서 있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전라남도기념물(제142호)로까지 지정되었을 정도다. 하긴 오죽했으면 지명까지 ‘송호(松湖)’가 되었겠는가. 소나무가 많다는 것에 더하여 바다가 호수같이 잔잔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니 말이다.

▼ 해변을 걸으며 바라보는 풍경도 만만치 않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섬에서부터 멀리 그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는 섬까지 아기자기한 바다 풍경이 멋지다.

▼ 해변에는 디자인(솔방울이 매달려있는 것이 송림을 의식한 듯)이 예쁜 분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기발한 발상이지 싶다. 물놀이를 마친 뒤 따로 샤워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

▼ 오랜 세월 강한 바닷바람을 맞았을 텐데도 소나무는 여전히 늠름하다. 하지만 개중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도 있었다.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누워버렸다.

▼ 간조 때문인지 백사장은 너른 모래운동장으로 변해있었다. 그 백사장에서 아이들과 아빠가 웅크리고 앉아 무엇인가 하고 있다. 평화로우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풍경이다.

▼ 송호해변의 끝에 위치한 보건진료소의 뒷산으로 올라가 생태탐방로를 따른다. 생태라는 이름에 걸맞게 울창한 숲이 만들어내는 터널을 내내 걷게 된다.

▼ 송호해변에서 땅끝황토나라테마촌까지 이어지는 생태탐방로는 ‘꼼지락 캠핑’이란 부제를 달았다. 꼼지락거리며 걸어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숲이나 바닷가 또는 황톳길에서 꼼지락꼼지락 놀며 실컷 웃다보면 힐링은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겠는가.

▼ 앞서가던 사람들이 나무계단을 오른다. 군 시설물로 사용하던 벙커를 개조에 ‘전망대’로 꾸몄다. 벙커의 상부에 난간을 두르고 벤치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망대 위로 올라가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조금 전 송호해변에서 간식으로 준비해간 막걸리를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 벙커는 규모가 꽤 컸다. 초소 근무(병장 제대지만 한국군에서는 6주 밖에 생활해 보지 못했다)를 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문이 6개나 되는 걸로 보아 최소한 분대 단위는 머물렀을 것 같다.

▼ 걷는 게 다가 아니고 읽는 재미도 있다. 나무의 이름과 특징을 적은 안내판을 곳곳에 세워놓았다.

▼ 하도 많아서 모두를 읽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궁금하게 여겨오던 나무(까마귀쪽) 하나를 머릿속에 담을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이때 좀 특이하게 생긴 방파제(바닷쪽에 별도의 방파제가 있다)가 얼굴을 내민다. 아까 생태탐방로에서 본 지도에는 저 시설을 ‘독살(石防簾)’로 적고 있었다. 돌로 담을 쌓은 뒤 밀물과 썰물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견고하게 만든 독살은 난생 처음이다. 거기다 둑과 둑 사이의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고기는 어쩌란 말인가.

▼ 이곳의 바다도 역시 양식시설로 꽉 차버렸다. 외형으로 보아 전복과 다시마를 기르는 모양이다. 참! 이쯤에서 의문점 하나. 해남의 3대 브랜드 상품 가운데 하나라는 ‘김’ 양식장은 왜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나머지 둘(딱 10만석만 한정 생산하는 땅끝햇살 쌀, 당도 높은 건강식품 해남황토 고구마)이야 내륙에서 기른다지만 말이다.

▼ 바닷가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땅끝 황토나라테마촌’이 자기도 있단다. 2만7천 평(87,740㎡)이나 되는 너른 부지에 들어선 이 시설은 숙박과 체험을 함께할 수 있는 황토문화체험센터와 수변공원, 천연잔디구장 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최대 6인까지 지낼 수 있는 대형 카라반을 비롯해 250석 규모의 오토캠핑장은 소나무 숲속과 바닷가에 잇닿도록 설계됐다.

▼ 가족단위 여행에 최적화된 시설은 ‘땅끝 해남을 리폼하다’라는 주제로 설계됐단다. 해남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황토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그래선지 들어선 건물들이 하나같이 빨강 일색이었다. 거기에 숲과 바다를 덧입혔다고 보면 되겠다.

▼ 야영사이트(숲속 캠핑장) 지역의 다람쥐(대나무로 만든 조형물)는 도토리를 주워 먹느라 부산하다. 참! 작년엔가는 이 캠핑장에서 ‘반려견과 함께하는 생태캠핑’이 열리기도 했었다. 저런 콘셉트(concept)를 바탕으로 행사를 기획하지 않았을까 싶다.

▼ 탐방로는 황토나라테마촌을 잠시 빠져나오기도 한다. 작은 포구(송호항이라고 했다)로 내려섰다가 해안도로를 따라 ‘땅끝해안로(국도 77호선)’로 나간다. 그게 싫으면 꽃밭으로 치장된 테마촌의 안길을 이용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 황토나라테마촌을 빠져나오자 ‘송호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오른편은 1코스의 거리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이용하는 단축코스로 송호해변으로 연결된다. 이정표(송종마을회관 1㎞/ 송호리사무소 0.8㎞)는 탐방로가 송종마을회관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 ‘땅끝해안로’를 따라 송종마을로 향한다. 걷는 도중 부티를 내려는 듯한 ‘밀양박씨 세장산’과 어마어마한 규모의 태양광발전소를 눈에 담기도 한다.

▼ 탐방로는 ‘청우물산’ 앞(이정표 : 송종마을회관 0.5㎞/ 황토나라테마촌 0.8㎞)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해안으로 나간다. 차량이 질주하는 ‘해안땅끝로’를 피해 바닷가로 우회시키는 모양새이다. 이후부터의 사진은 둘레길 도반(道伴)들의 것을 빌려왔다. 카메라 조작을 잘못했던 탓인지 사진이 온통 흙색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 바닷가까지 나간 탐방로는 다시 내륙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송종마을 선착장이 멀리 보이는가 하면, 썰물 때마다 바닷길(주민들은 또 하나의 ‘모세의 기적’이라 부른단다)이 열리는 ‘증도’가 눈에 들어온다. 참! 그 뒤로 보이는 건 죽도(대섬)라고 했다.

▼ 그끄제(4.20)가 곡우(穀雨).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절기다. 선현들의 지혜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봄 가뭄에도 불구하고 들녘의 보리는 잘 익어가고 있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 송종해변도 역시 울창한 송림을 배경으로 삼았다. 하지만 텅 비어있는 게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지는 않았나보다.

▼ 바닷가를 스치듯 지나치자 이번에 송종마을(송호리)가 나타난다. 청우물산에서 농로로 내려선지 정확히 10분 만이다. 탐방로는 마을회관을 왼편에 끼고 도는 모양새이다. 마을안길을 지나도록 설계되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난 그냥 도로(땅끝해안로)로 올라서버렸다. 볼거리 없는 골목길에 대한 매력을 잃었다고나 할까?

▼ 도로를 따라 300m쯤 걸었을까 탐방로가 다시 농로로 들어선다. 다만 이번에는 오른쪽이다. 이 구간(마봉·송종길)은 마련마을까지 이어지는데, 차량이 씽씽 달리는 국도(77호선, 땅끝해안로)를 피해 길을 에둘러 내놓지 않았나 싶다.

▼ 10분쯤 더 걸어 ‘송지저수지’에 도착했다. 소중산(236m) 자락에 들어선 저수지로, ‘상수원 보호지역’이라는 안내판겸 경고판을 매달고 있었다. 담수된 물을 정수장에서 처리해 마을에 공급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저수지를 왼편 옆구리에 끼고 이어지는 길은 조금 지루한 편이다. 철망과 잡목, 산죽이 겹으로 쌓이면서 저수지를 보는 맛까지 없애버렸다. 저수지를 지났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경사 없는 길이라서 걷기에 편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고개를 넘는데 ‘달마고도’라고 쓰인 말뚝이 눈에 띈다. 달마산 아래 ‘미황사’에서 시작하는 달마고도는 ‘천년의 세월을 품은 태고의 땅,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을 주제로 2017년 개통한 둘레길이다. 생태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곡괭이·호미 등 사람의 힘으로만 1~4코스까지 총 17.74㎞의 길을 닦았단다.

▼ 송종마을을 출발한지 1시간. 송지면소재지와 도솔봉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마련마을’에 닿았다. 1코스의 종점인 송지면사무소까지는 아직도 4km쯤 더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무릎이 시원치 않은 집사람에 대한 작은 배려이다.

▼ 마련마을 앞 삼거리에 서자 달마산이 조망된다. 이곳에 달마산에 대한 안내판을 세운 이유이지 싶다. 하지만 아랫도리가 잘려나간 탓에 완전치 못한데, 완성된 달마산을 보고 싶다면 ‘마봉2저수지’까지 조금 더 걸어야만 한다. 참고로 ‘달마산’은 달마대사가 머물렀던 숭산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송에서 표류해 온 배의 한 고관이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만한 땅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 날머리는 송지면사무소(해남군 송지면 산정리)

송지면사무소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서해랑길 안내판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스탬프보관함이 보이지 않는다. 서해랑길은 스탬프 대신 안내판 하단의 QR코드를 핸드폰으로 찍어 홈페이지에서 인증 받는 방식이란다. 번거로움이 싫어 완주 인증을 하지 않는 나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이겠지만, 아날로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또 다른 나에는 꽤 낯선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