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25코스(매당마을-신안젓갈타운)

 

여행일 : ‘23. 3. 11()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과 신안군 지도읍 일원

여행코스 : 매당노인회관매안마을큰부수막들방조제황토펜션명양마을해제·지도연륙교봉황산임도신안젓갈타운(거리/시간 : 17.8km/ 17.99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해제반도의 구릉지와 해안을 이어 걷는다. 덕분에 무안을 상징하는 드넓은 갯벌과 특산물(양파·마늘·양배추)로 덧씌워진 들녘, 그리고 신안의 다도해 풍광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주요 볼거리로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배암 혓바닥과 신안의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한 거북섬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매당마을(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신안(지도·임자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천장교차로(해제면 천장리)에서 왼편 창매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당 마을에 이르게 된다. 초입에 있는 노인회관이 25코스의 시작점이다. 참고로 법정 동리인 창매리 3개 취락(聚落 : 창산·매당·매안) 중 하나인 매당마을은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된다고 했다. 명당이 와전되어 맹당(孟堂)으로, 이후 맨댕이로 불리다가 한자화하면서 매당(梅堂)으로 고쳐졌단다.

 해제면 매당마을(창매리)에서 시작해 지도읍 신안젓갈타운(읍내리)에서 끝나는 17.8km짜리 코스로 해제반도(海際半島)의 구릉지와 해안, 그리고 지도(신안군)의 해안과 임도를 따라 걷는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출발지를 따로 잡아봤다. 시점에서 4km쯤 전방에 위치한 황토골휴게소에서 집사람을 출발시키고, 시점에서 출발한 내가 뒤를 쫓는 형식을 취했다.

 마을회관을 빠져나오자마자 길이 나뉜다. 서해랑길은 도로(창매로)를 놓아두고 바닷가를 향해 내려간다. 25코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작점 표지판은 이정표(황토골휴게소 4.4, 종점 16.7) 옆의 전신주 기둥에 매달려있다.

 서해랑길을 제켜놓고 도로를 따라본다. 동네 수문장을 자처하고 있는 노거수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매화정이란 정자까지 품은 저 팽나무(군의 보호수이다)는 수령이 29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나무 앞에 선돌까지 모셔놓은 걸 보면 마을에서 당산나무로 모신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당산나무로 모시던 버드나무가 태풍에 쓰러지자 나무 옆에서 수호신처럼 서있던 바위를 이곳으로 옮겨놓았단다.

 50m쯤 더 걸으면 광산김씨삼강려라는 제각도 만나볼 수 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배출한 ··의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원래는 각각 다른 시기에 정려로 포상 되었으나 1946년에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호은처사광산김공경모비, ‘회산처사김공강학비’, ‘효자김공치선실적비’, ‘창와김선생유적비도 눈에 띈다. 이 마을에서 학문이 뛰어난 이들을 배출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면 3(측면 1)의 맞배지붕 제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병자호란 때 전사한 김득남(金得男, 1828년에 정려) 충의(忠義) 1891년에 정려를 받은 김성경 및 김철현의 효행(孝行), 김득남 의처 밀양김씨(1870년에 정려) 열행(烈行)은 어디서 엿볼 수 있다는 말인가. 혹시나 해서 제각 곁에 세워놓은 빗돌을 살펴봤으나 관련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제각까지 살펴본 다음 서해랑길로 합류한다. 이때 매당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머우섬이 눈에 들어온다. ‘개구리섬(蛙島)’으로도 불리는데, 동백나무가 무성해서 한때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유지로 변해버렸다나?

 탐방로는 이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배암 혓바닥(또는 뱀머리)’을 바라보며 간다. 매당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와도(蛙島)’ 쪽으로 뻗어나간 지형이 마치 뱀이 개구리()를 잡으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란다.

 갯벌은 온통 푸른 해초로 뒤덮여 있다. 매당마을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고마운 색깔이라 하겠다. 저 갯벌(‘정챙이이란 지명을 지녔다)에서 채취되는 감태가 무안에서 가장 질이 좋다니 말이다. 한때는 한 사람이 하루에 20동 이상씩 따오기도 했단다. 그밖에도 무안에서 가장 질 좋은 석화와 낙지를 잡아 높은 수익을 올린다고 했다.

 방조제를 따라 100m쯤 걷다가 매안마을로 향한다. 이때 허천들이란 들녘을 걷게 되는데 물이 하도 귀해서 비가 내려도 물을 쑥 빨아들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이라고 해서 하등 다를 게 없었단다. 공동우물의 수량이 적어 늘 줄을 서서 사용해야 했고, 가뭄이라도 들면 십리나 떨어진 창산 마을 뒤까지 가서 양동이로 물을 길러 와야 했단다.

 허천들에서도 무안의 특산품인 마늘과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한겨울 맹추위를 굳건히 버텨낸 양배추는 수확이 한창이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2. ‘매안 마을회관 뒤 도로(이정표 : 종점 15.4/ 시점 1.3)에서 특이한 표석을 만났다. 매안마을과 매당마을을 함께 담음으로써 경계석을 겸하게 했다.

 매안마을을 빠져나와 구릉지 위를 걷는다. 이때 하늘이 반, 나머지 반은 바다나 땅이 채워준다는 해제반도의 독특한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20분 정도 걸어 매안마을 구간을 빠져나오면, 탐방로는 또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방조제 위를 걷는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는 경고방송이 들려오지 않겠는가. CCTV가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쓰레기 버릴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란다. 하긴 바닷가라고 해서 무단투기를 하는 못난 놈들이 없겠는가.

 길고 긴 방조제를 걷다보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얘외다. ‘배암 혓바닥이라는 신비로운 풍광을 계속해서 옆구리에 끼고 가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널따란 들녘(‘큰부수막 들 노갱이 들이 잇따라 나온다)이 펼쳐진다. 그 끄트머리에는 창매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창산(蒼山)’마을이 철마산(지형이 말 형상으로 생겼단다)을 배경삼아 들어섰다. 어촌이었을 마을은 이 방조제가 쌓이면서 이젠 산촌으로 변해버렸다.

 서해랑길은 둘레길 나그네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라이더 한 명이 지도로 들어가는 연륙교에 이를 때까지 나타났다 사라기지를 반복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방조제를 1km쯤 걸었을까 무안한옥리조트라는 커다란 펜션단지가 나타난다. 서해랑길은 바닷가에 접해있는 이 숙박시설의 앞마당을 횡단한다.

 참새골황토펜션으로도 불리는 이 숙박시설은 전통 한옥의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데다, 바닷가에 접해있다는 특이성으로 인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는 중이라고 했다. 노래방, 찜질방 바비큐장은 물론이고 널따란 수영장까지 갖췄다.

 펜션 앞 바다에 물이 빠져나가면 드넓은 갯벌은 체험장으로 변한다고 했다. 갯벌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저 길은 체험 참여자들을 위해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잡아온 해산물은 바비큐 장에서 구우면 되고, 반주 삼아 마신 술에 얼큰해졌다면 부대시설인 노래방이라도 찾아볼 일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배암 혓바닥이 얼굴을 내민다. 사두(蛇頭)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최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을 지어 거주하고 있단다.

 참새골펜션에서 8. 탐방로는 24번 국도로 올라선다. 그리고 잠시지만 이 도로(해제·지도로)를 따른다.

 국도에서 만나게 되는 휴게소의 이름도 역시 황토골이다. 해제반도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눈에 띄는 낱말인데, ‘황토가 무안의 자랑거리로 굳어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힐링이 세간의 화두로 굳어지면서 황토의 건강 효용성 또한 부각됐고...

 휴게소에서 우린 무안의 내로라는 자랑거리를 엿볼 수 있었다. 초의선사 탄생지와 노을길 등 서해랑길을 걸어오면서 만난 명소들은 물론이고, 밀리터리테마파크와 전통생활문화테마파크, 도리포, 식영정 등에 대한 자랑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탐방로는 휴게소를 왼편에 끼고 돈다. 그리고는 임도를 따라 또 다른 해안으로 나아간다. 이 구간에서도 우린 해뜰목황토펜션이란 꽤 그럴 듯한 숙박시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역 브랜드(황토)로도 모자라 해뜰목이라는 의미(해돋이)를 추가시켰다.

 임도를 지나서 다시 만난 바다도 역시 탄도만이다. 보여주는 풍광 또한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배암 혓바닥이 노리고 있는 게 개구리섬이 아니라 탄도인 것이다. 뱀이 삼키기에는 너무나 큰 섬일 텐데도...

 이번에도 방조제를 따른다. 이렇듯 무안의 해안은 해남과 함께 간척사업의 명소로 꼽힌다. 덕분에 들쭉날쭉해야만 할 리아스식 해안이 직선으로 변해버렸다. 혹자는 자연스러운 멋이 사라져버렸다며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그 또한 삶의 한 방편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양월리로 들어선 탐방로가 아까와는 또 다른 풍경을 선보인다. 창매리 해안을 장식해오던 와도(개구리섬)가 사라진 대신, ‘밤섬(栗島)’이 새로운 풍경화의 화룡점정으로 들어앉았다. 물이 들면 밤송이처럼 보인다는 꼬맹이 섬인데, 풍수적으로는 자물쇠의 형국을 하고 있단다.

 율도를 향해 쭉 뻗어나간 저 길도 노두(路頭)라 부를 수 있으려나? 갯벌에 놓은 어민들의 작업도로 말이다.

 방조제를 10분쯤 걷다가 명양마을(이정표 : 종점 10.6/ 시점 6.1)’로 들어간다. 해제반도의 끝에 위치한 마을로 명양이란 지명은 마을 옆을 흐르는 해협(지도와의 사이)의 물살이 거센데서 유래됐다.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돌목처럼 커서 울두 또는 울띠라 불리다가 한자화하면서 명양(鳴洋)이 되었다.

 마을을 관통해 해제·지도로로 올라섰다. 이 구간에서 우린 산들밥상이라는 소고기 샤브샤브전문점을 만날 수 있었다. 무안지역에서는 맛집으로 소문났다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이곳 해제반도는 전형적인 구릉지. 농사를 지을 물이 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 방편으로 만들어진 게 둠벙’, 얼마나 물이 절실했으면 한 방울의 물도 아까워 바닥에 비닐까지 깔았을까 싶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5.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제반도와 지도를 잇는 연륙교(내 눈에는 방조제로 보였다)가 얼굴을 내민다. 1975년 저 다리가 놓이면서 무안군과 신안군이 서로의 어깨를 맞대게 됐다. 300m 길이의 다리 2개가 놓였는데, 해안 쪽 다리(제방)는 농·어민의 생활도로로 쓰이며 안쪽은 국도가 지나간다.

 우리가 건너고 있는 이 해협은 2의 울돌목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고 한다. 좁은 해협으로 칠산바다와 목포앞바다의 물이 서로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난파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는 해제면소재지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나? 그게 이 연륙교가 놓이면서 이젠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건너편의 또 다른 연륙교로는 국도 24호선이 지나간다. ! 반대편 연륙교도 이곳처럼 둑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름만 다리이지 실제는 방조제인 것이다. 그런데도 둘 사이의 공간을 객토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고 싶었을 텐데...

 물살이 거세다는 것은 물길이 깊다는 증거다. 그래선지 썰물 때인데도 불구하고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자동선착장(진변마을 쪽에 하나가 더 있다)의 배들도 하시라도 떠날 채비를 마쳤다. !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자동선착장에는 임자-지도-목포항을 운항하는 여객선이 들렀다고 했다. 300m 거리의 무안 해제를 연결하는 나룻배도 수시로 다녔단다. 하지만 세월의 뒤안길에 선 지금은 어민선착장으로 겨우 항구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도로 들어서니 팔각정이 잠시 쉬어가란다. 진변마을 주민들을 위한 쉼터겠지만,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도 최고의 쉼터가 되겠다.

 다리 건너 진변마을에 이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직진은 지도읍시가지로 가는 길, 서해랑길은 태천마을 방향(왼쪽) 동천길을 따른다. 하나 더, 삼거리 오른편에는 지도체육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300m쯤 걷다가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효지방조제를 따라 누동마을 쪽으로 간다.

 둑길을 걷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밤섬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매령산과 바다를 향해 쭉 뻗어나간 배암 혓바닥을 배경삼은 풍경이 아까보다 훨씬 고와졌다. 섬의 주위를 푸른 바닷물로 덧칠해놓은 덕분이지 싶다.

 옥색 바다에 떠있는 가두리양식장도 잠깐의 눈요깃거리가 된다. 행여나 바람이라도 거세질세라 주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근심의 근원이기도 한 시설이다. 섬사람들에게 바람은 곧 풍파다. 어떤 삶에 풍파가 없으랴.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바람에 맞서 싸우기보단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풍요를 가져오게 되었고 말이다.

 오른쪽으로는 간척사업이 빚어놓은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즈음 우린 중산동과 효지마을 등 자동리에 속한 자연부락과 함께, 봉황산과 선봉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서해랑길은 두 산의 사이로 난 임도를 따른다.

 눈이 호사를 누리며 600m쯤 걷다가 효지2저수지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다와 헤어져 내륙으로 파고든다.

 마을(‘쩍골마을이 아닐까 싶다)을 가로지르다 지극히 예스런 풍경을 만났다. 돌과 흙으로 벽을 쌓아올린 다음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장식이라곤 틀도 없는 문이 전부, 그 소박함이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줬나 보다.

 마을을 빠져나와 또 다시 동천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누동마을 방향(왼쪽)으로 70m쯤 걷다가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부터 서해랑길은 3km쯤 되는 임도를 따른다.

 봉황산(165.5m)과 선봉산(121.5m) 사이로 난 임도는 순하기 짝이 없었다.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다 경사까지 완만했기 때문이다. 하긴 임도의 길이가 3.1km나 되는데 반해, 가장 높은 지점의 높이가 101m에 불과하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는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곳곳에서 트이는 조망 덕분에 다각적으로 펼쳐지는 지도의 풍경을 두루두루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농업회사 법인인 하늘애‘. 그 뒤로 보이는 게 선봉산인데 121m 높이의 산답지 않게 우뚝 솟아올랐다.

 태천리 해안에 설치된 풍력발전기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 뒤로는 다도해가 펼쳐진다. 비파섬과 선도, 병풍도일 것이다. 봉황산 임도는 이렇듯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내륙에는 오룡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자동리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자동·자서·효지·오룡·중산동) 중 하나로, ‘오룡(五龍)’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용 다섯 마리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 꿈틀거린다는 경칩(驚蟄)이 지난지도 벌써 5일이나 됐다. 남녘땅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진지도 이미 오래, 산수유축제와 매화축제는 이미 시작됐고, 다 다음 주쯤이면 벚꽃축제도 열릴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들꽃 하나쯤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겠는가.

 40분이나 걸어서야 봉황산 임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선 도로변 텃밭에는 양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확이 한창인 농부 앞에서 우린 부부싸움까지 할 뻔했다. 트레킹을 마치려면 아직도 5km 이상 걸어야하는데 양배추 한 포기 얻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귀경해서 가장 질 좋은 양배추를 사드리겠노라며 달랬지만 자칫 무거워진 배낭을 짊어지고 쩔쩔 맬 뻔했다.

 이 뭣꼬?’ 갈대처럼 생겼는데 꽃은 영 딴판이다.

 400m쯤 도로(동천길)를 따르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해안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길고 긴 오룡방조제의 둑길을 걷는다.

 이때 천사섬 신안의 진면목을 살짝 엿볼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섬들이 바다에 늘어섰다. 소도·연도·마산도·고이도·매화도 등등 그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숨이 차오른다.

 오른편에는 오룡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겨난 간척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들녘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오룡마을의 앞에 펼쳐져 있으니 오룡 들판쯤으로 해두자.

 농자천하지대본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나 보다. 들녘의 많은 부분을 태양광발전소가 차지하고 있었다. ‘식량 안보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하지만 옛 사람들은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그러다보니 일직선으로 뻗어나갔어야 할 방조제가 저렇듯 바다를 향해 배불뚝이처럼 밀고 나갔다.

 방조제와 들녘 사이에는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들녘 곳곳에는 저수지도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가 보다. 길고 긴 가뭄은 논바닥을 저렇듯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버렸다.

 반대편의 갯벌에는 또 다른 문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도 주변의 갯벌은 농게가 주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저 갯벌은 농게 가족의 삶의 현장이자 삶의 흔적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10, 배불뚝이처럼 튀어나온 광정리 백양들을 지나자 종점인 지도시가지가 더 또렷해졌다. 이제 종점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갯길이 또렷해졌다. ‘생명의 땅 갯벌을 보듬은 실핏줄로, 바닷가 사람들은 갯벌과 마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저 실핏줄을 통해 자연과 소통해왔다.

 신안의 갯벌은 생명의 땅으로 알려진다. 그만큼 많은 식생을 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저 갈매기들도 그중 일부분을 담당할 게고 말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지도읍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를 굳힌 거북섬이 눈에 들어온다. 본도와의 간극을 없애버린 긴 목교가 눈길을 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35. 신안젓갈타운에 도착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25코스의 종점이다. 하지만 그 전에 거북섬부터 둘러보자. 신안군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다는데 거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거북섬은 해상탐방로가 놓임으로써 관광지로 변했다. 썰물 때, 그것도 갯벌에 무릎까지 빠질 각오를 해야 들어가 볼 수 있었던 섬이, 마법 같은 나무다리를 놓아 밀물 때도 섬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500m쯤 되는 거리를 부담스러워 할 필요도 없다. 중간 중간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쉬어가면 될 일이다.

 인생샷을 원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갯벌의 한가운데, 그것도 바닷물에 최대한 다가간 곳에 그네를 설치해 푸른 바다를 배경삼아 그네를 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갯벌 차지가 됐다. 밀물 때가 가까워졌는지 움푹 팬 갯고랑 사이로 조금씩 물이 차오르면서 농게와 짱뚱어가 부산하다. 또 다른 풍경도 보인다. 무리를 지어 말라비틀어진 저 식생들은 대체 뭘까? 무안·신안의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칠면초는 분명 아닌데...

 6분 남짓 걸어 거북섬에 이른다. 눈에 들어오는 섬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거짓말 좀 보태면 주먹만 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품은 내력만큼은 심상치가 않았다. 탐방로 전체에 식생매트를 깔았음은 물론이고, 해양생물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편안한 쉼터도 만들어두었다.

 길 끝에서 만난 섬은 귀여운 거북이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실제로 거북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지 거북이 조형물에다 섬의 지도를 그려 넣었다. 거북섬에도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기본은 277m 길이의 순환코스(해안을 따를 수도 있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정상에 올라앉은 정자에 들러 피톤치드를 들이키며 힐링을 만끽할 수도 있다.

 거북섬에서의 조망도 거침이 없다.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묵화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부근은 특히 해넘이가 곱다고 소문났다. 밀물 썰물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된단다. ‘놀멍 때리기 딱 좋다나? 그래선지 해변에 저런 의자를 꽤 여럿 놓아두었다.

 관광지로 육성했으니 어찌 포토죤이 빠지겠는가. ‘천사섬이란 신안군의 브랜드처럼 수많은 섬들을 액자 속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거북섬을 빠져나오자 신안젓갈타운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전국 최대의 젓새우 생산지이자, 국내 최초의 천일염 생산지인 신안군에서 만들어놓은 젓갈 전문시장이다. 젓갈 등 수산물 판매장 20개소와 젓갈의 저장·숙성을 위한 저온저장시설, 전시·홍보관 등이 갖춰져 있다.

 젓갈타운 앞에는 신안 갯벌의 상징인 농게를 형상화한 대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붉은 발 농게는 한쪽 집게발이 자신의 몸집만큼 커다란 게 특징으로 농발이, 황발이 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암컷은 양쪽 집게의 크기가 똑같지만 매우 왜소하다. 수컷은 한 쪽 집게는 암컷과 같지만 다른 쪽은 거대하여 갑각 길이보다도 더 길다.

 지도갯벌 글자조형물과 신안갯벌의 표석도 보인다. 신안 하면 역시 갯벌이다. 다도해형 갯벌로 불리는 신안갯벌은 1,100.86 면적의 갯벌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을 시작으로 국내외를 비롯한 수많은 보호지역 지정을 통해 갯벌을 보호·관리해 왔다. 1호 도립공원·습지보호지역·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람사르습지 등등. 이를 알리고 싶었음이리라.

 날머리는 송도교(신안군 지도읍 읍내리)

몇 걸음 더 걸으면 지도와 송도를 잇는 연도교인 송도교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7.99km이니 꽤 빨리 걸은 셈이다. 4km이상 앞에서 출발시킨 집사람을 따라잡으려 서둘렀던 게 원인이지 싶다.

서해랑길 24코스(봉오제마을-매당마을)

 

여행일 : ‘23. 2. 25()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현경면·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봉오제마을곡지마을홀통해변가입마을물암마을금산방조제백동마을창산마을매당마을(거리/시간 : 20.5km/ 실제는 홀통해변부터 15.42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4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해제반도의 구릉지와 해안을 이어 걷는다. 덕분에 무안을 상징하는 드넓은 갯벌과 특산물(양파·마늘·양배추)로 덧씌워진 들녘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주요 볼거리로는 윈드서핑지로 소문난 홀통유원지를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봉오제마을(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를 빠져나와 77번 국도를 따라 신안(압해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용정교차로(현경면 용정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봉오제 마을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 버스정류장이 24코스의 시작점이다. 참고로 봉오제란 지명은 마을 뒤 봉대산에 있었다는 옹산봉수대(甕山烽燧臺)에서 유래했다.

 현경면 봉오제마을(용정리)에서 시작해 해제면 매당마을(창매리)에 이르는 20.5km짜리 코스로 해제반도(海際半島)의 구릉지와 해안을 따라 걷는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초반 6km를 생략하고, 주요 볼거리인 홀통유원지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혼자서 완주하는 것보다 부족하더라도 함께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버스에서 내려 탄도만부터 카메라에 담고 본다. 물 빠져나간 바다는 시커먼 갯벌이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물고기가 숨어든다는 어은도(漁隱島)’는 졸지에 육지가 되어버렸다. 그럼 그 많은 고기는 어디로 가서 숨어있을까?

 실제 출발지는 홀통선착장’, 현경면의 서쪽 끄트머리에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홀통’, 그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축구장 크기만 한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다.

 선착장에는 무안군해양스포츠센터와 초당대학교의 해양스포츠연구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윈드서핑대회가 열린다는 현수막도 눈에 띈다. 탄도만의 잔잔한 물결에다 맑은 물빛, 거기에 바람까지 쉬지 않고 불어준다니 무동력 윈드서핑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바다는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물빛이다. 저리도 물빛이 고우니 원드서핑 마니아들이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선을 조금 옮기자 탄도가 눈에 들어온다. 무안에서 하나뿐이 유인도로, 그게 의미가 컸던지 만()의 이름으로까지 굳어졌다.

 바람이 무척 거세다. 오늘따라 인지는 몰라도 집사람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하긴 이곳은 윈드서핑의 명소, 그렇다면 저 정도의 바람은 항시 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캠핑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어선 몇 척이 물이 차오를 때만 기다린다. 하릴없는 어부는 지금쯤 아내가 운영하는 횟집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홀통은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때문에 겨울철 비수기에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단다. 주변 해송 숲은 캠핑마니아들로 늘 붐비고, 둘레길 나그네들도 심심찮게 지나간다. 그러니 음식점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입소문을 탄 카페도 있었다. ‘cafe water front’가 그 주인공으로 무안이나 목포지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view’가 좋은 곳으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했다.

 작은 고개를 넘자 카페에 노래연습장까지 딸린 홀통캠핑장이 반긴다. 호리병 목처럼 잘록한 땅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갯벌, 반대편에는 모래사장이 형성돼 있다. 해변과 닿아있는 저 솔숲은 캠핑장으로 이용된다. 코로나에 시달리는 요즘은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공간에서 프라이빗한 여가를 즐기는 ‘()캠핑이 주목받는다고 했다. 그래선지 유원지 숲속은 가족단위 캠핑마니아들로 붐비고 있었다.

 캠핑장 앞은 또 다른 선착장. 그 너머로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가족단위 캠핑마니아들의 조개잡이 체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캠핑장의 샤워시설이 잘 되어 있으니 갯벌에 뒹굴면서 조개를 잡아도 된다나?

 이때 오류리로 뻗어나가는 기다란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봉오제마을에서 출발한 24코스는 곡지마을을 거친 다음 저 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온다.

 이후부터는 홀통길을 따른다. 홀통해안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2차선 도로를 냈다. 때문에 하얀 백사장이 발아래 깔려있는데도 내려가 볼 수는 없었다.

 백사장 너머로는 탄도만의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반대편에는 해송 숲이 가로수처럼 도열해 있다. 누군가는 이런 풍경을 남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적고 있었다.

 길가 안내판은 홀통이 호리병처럼 삐죽하게 튀어 나온 땅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적었다. 긴 백사장과 울창한 해송 숲은 휴양지로 딱 좋고. 물이 맑고 수심이 낮은데다 파도까지 잔잔해 윈드서핑 같은 해양스포츠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단다.

 홀통해변도 해넘이의 명소로 알려진다. 지난 번 23코스처럼 밀물 때는 바다가 붉게 물들고 썰물 때는 갯벌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황홀하게 반짝인다고 했다. ‘놀멍 때리기 딱 좋다나? 해변에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구간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3구간이기도 하다. 삽다리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해 홀통해수욕장·가입마을·물암마을을 거쳐 무안생태갯벌센터에서 끝을 맺는 9km 길이의 둘레길인데, 그중 일부(오류동 앞 해안물암마을)가 서해랑길 24코스와 겹치는 것이다.

 해변으로 내려서니 곱디고운 백사장이 양옆으로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간다(사진은 해수욕장 방향). 이왕에 내려왔으니 모래사장을 꼭 걸어보길 권한다. 고운 모래를 밟는 느낌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직접 와서 느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극히 서해다웠다고나 할까?

 바람이 얼마나 거셌으면 펜션의 이름까지 ‘wind’로 시작되겠는가. 하긴 윈드서핑 대회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는가. 그것도 윈드서핑·패들링·카이트보딩 등 종목별 참여 선수가 300여명이나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홀통길은 우릴 마산리 선착장으로 데려다준다. 현경면 오류리에서 마산리로 넘어온 것이다. ‘마산(馬山)’은 조선시대에 말목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네이버의 지식백과는 마을형국이 동으로 초장(草場), 서로 방마형(芳馬形)이라는 데서 찾고 있었다.

 선착장 위는 홀통교차로이다. 이정표(종점 12.2/ 시점 8.3)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24번 국도를 따르란다.

 다행히도 가드레일 밖으로 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300m를 채 못가 길이 없어져버린다. 그리고 서해랑길 표식(리본)을 통해 국도를 건너도록 인도한다.

 덕분에 길을 잘못 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지레짐작으로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 구릉지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이다. 흡사 고속도로라도 되는 양 오가는 차량은 씽씽 잘도 달리는데 보행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억울할 것은 없었다. 구릉지에서 무안을 압축해 놓은 풍경, 즉 끝도 없이 펼쳐지는 채소밭을 만났기 때문이다.

 무안은 한국에서 양파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다. 전국 양파생산량의 20% 이상이 무안에서 나다보니 여기서는 소도 양파를 먹는단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양파로 만든 특수사료를 소에게 먹인다는 것이다. 덕분에 몸에 좋은 불포화지방산과 필수지방산이 일반 한우고기보다 많다고 한다.

 또 하나의 특산물로 뿌리를 내린 양배추 밭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겨울철 강추위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을 저 양배추는 출하가 가능할까? 그러고 보니 언론에 가격폭락으로 인해 밭뙈기로 계약을 했던 중간상인이 연락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었다.

 해남(화원반도)처럼 이곳 무안(해제반도)에서도 심심찮게 둠벙을 만날 수 있었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구릉지 너머에선 함해만(또는 함평만)이 드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전형적인 내만(길이 17km, 최대 폭 1.8km)이다. 아무튼 바닷가에 이른 우린 서해랑길(33코스) 특유의 방향표시를 발견했고, 이 표식을 보고나서야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24코스는 북서쪽(가입마을 방향)이 분명한데도, 서해랑길 표식은 자꾸 남동쪽(마산마을 방향)으로 가라했기 때문이다.

 바닷가 안내판은 무안갯벌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안내판 아래 방파제에 붙어있는 방향표시가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함해만은 탄도만과 함께 무안갯벌의 양대 축을 이룬다. 이곳도 갯벌습지보호지역(1) 및 갯벌도립공원(1)로 지정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08년에는 람사르습지로도 지정됐다. 생물 다양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덕분이다. 실제로 무안갯벌에는 칠면초·갯잔디 등 47종의 염생식물과 250종의 저서생물이 서식한다. 또한 혹부리오리·알락꼬리마도요 등 52종의 철새가 찾는 곳이기도 하다.

 되돌아 온 국도. 이번에는 해제·지도 방면의 도로변을 걷는다. 둘레길 나그네들을 위한 보행로는 따로 없다. 그런데도 오가는 차량들은 고속도로처럼 씽씽 잘도 달려댄다. 목숨이 위협받는 구간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걸을 일이다.

 조심조심 15분쯤 걸으면 가입리 버스정류장’. 이정표(종점 10.7/ 시점 9.8)는 이곳에서 가입마을로 들어가란다.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더라도 물암마을로 갈 수는 있다. 거리도 1km정도 단축된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도로를 피해 가입마을까지 에둘러가도록 해놓은 모양이다.

 나지막한 구릉지를 넘으면 가입마을’. 가입(加入)이란 지명은 조금 더 들어가야 마을을 볼 수 있다는 뜻의 더드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금 전 고개를 넘어올 때의 상황을 이른다고나 할까? 아무튼 상주주씨 집성촌인 저 마을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310)로 유명하다. 입향 시조인 주근봉이 심었다는데, 수령이 400년도 넘었단다. 하지만 살펴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가장 아름다운 팽나무라는 별호로도 모자라 삼년에 한 번씩 볏집 옷까지 해 입혀왔다지만, 2001년 수형이 크게 훼손된 데다 목질부의 부패까지 심하다는 이유로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서해랑길은 가입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들어 폐교된 수암초등학교 옆 구릉지로 오른다. 참고로 저 학교는 1969년 주씨 문중에서 기부한 땅에다 현경초등학교 수암분교로 문을 열었고, 1974년에는 수암국민학교로 승격까지 했으나 주민 감소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1996년 문을 닫았다. 현재 대안학교로 변신하기 위해 리모델링 중이란다.

 갈림길 초입에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에서 세운 이정표가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문화부가 자연경관이나 역사·문화 자원이 뛰어난 도보여행길 중 가볼 만한 곳을 지정해 지원하던 사업으로. 해남 땅끝길,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의 토지길, 안동 유교문화길 등 명성이 자자한 둘레길들이 이 탐방로에 포함되어 있었다.

 구릉지를 넘으면 이번에는 물암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유월리(柳月里)에 속한 자연부락(오류·용산·물암·언창·월암·유투) 중 하나로, 현경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해제면에 바톤(baton)을 넘겨준다. 참고로 물암(勿岩)’이란 지명은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 물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함해만 건너에는 영광의 랜드 마크인 칠산타워가 우뚝하다. 그 앞은 2019년에 개통한 칠산대교’. 영광군(염산면 옥실리)과 무안군(해제면 송석리)을 잇는 바다 위 다리다. 길이 1.82km의 저 다리는 공사 중 무너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었다.

 물암마을은 당난구지 한뿌리로 나뉘는데, 서해랑길은 마땅히 어려움을 구할 수 있다는 당난구지(當難求地)’부터 들른다. 당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구함을 받았다는 길지이기도 하다. 마을 안길을 지나다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하늘님을 모신 나는 스스로 조화를 정하여 평생 잊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에 맞도록 행한다는 민족종교의 본주문(本呪文)이 벽에 적혀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5. 당난구지를 지나면 물암마을회관(이정표 : 종점 9.0/ 시점 11.5), 물암마을(유월3)을 구성하는 당난구지 한뿌리는 회관 앞을 지나는 24번 국도를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뉜다.

 도로를 건너면 한뿌리 마을이다(사진은 마을을 빠져나오다 촬영했다). ‘한뿌리(一根)’란 지명은 마을 뒤 잿등(소나무가 울창했다는 언덕)의 맥이 바다를 향해 하나로 쭉 뻗었다는 데서 유래되었고 한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 지형이 한발로 찌는 방아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를 찾기도 했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다시 만난 탄도만이 반갑다며 손짓한다. 24코스의 대부분은 이처럼 탄도만의 해안을 걷는다. 그러니 함해만과의 짧은 외도를 즐긴 후 본가로 되돌아온 셈이다.

 바다에 떠있는 저 섬이 물바위(水巖)’가 아닐까 싶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부인이 애기를 업은 채 돌이 되었다는 전설의 바위다. 아내의 혼이 바위가 되었다며 넋바위(魂巖)’로도 불리는데, 부부간의 정이 시원찮은 아낙내들이 저 바위를 찾아가 넋두리를 하거나 쓰다듬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서해랑길은 이제 해안선을 따른다. 탄도만을 옆구리에 끼고 걷다가 방해물이 가로막으면 내륙으로 에돌아간다. 저 앞에 보이는 마갑산(또는 마실산)이 첫 번째 장애물이라 하겠다. 해변에는 용유어촌계장이 내건 경고문도 눈에 띈다. 어업면허를 받은 어촌계 어장으로 고동··꼬막·바지락 등을 양식하고 있으니 사전승인 없이 채취를 금한다는 내용이다.

 500m남짓 걷다가 해안을 버리고 내륙으로 들어선다. 마갑산 해안에 길을 낼 수가 없기에 국도(24)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온다. 바다를 그리워하며...

 구릉지로 오르자 생소한 모양새의 한옥 한 채가 얼굴을 내민다. ‘물바우 황토펜션이라는데 한옥은 단층이라는 고정관념을 확 깨버렸다.

 펜션을 지나자마자 24번 국도로 내려선다. 이어서 도로변을 200m쯤 걷게 되는데, 이때 무화과 가판대가 눈에 띈다. 제철이 아니어서 진열대만이 외롭지만 이곳에서도 무화과를 재배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도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많이. 하긴 이곳 무안은 무화과의 본고장인 영암의 옆 고을이 아니겠는가.

 잠시 후 횡단보도를 이용해 국도(해제·지도로)를 건너니 해제 8명당 중 하나라는 기룡마을(용학4)’ 입구다. 그렇다고 기룡마을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은 국도의 우측 아래로 나있는 농로를 따른다.

 이 구간에서 우린 멋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를 만난다. ‘꿈의 드라이브 코스로 소문난 담양의 메타세쿼이아길 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금산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도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600m쯤 농로를 걷다가 그 끄트머리에서 국도를 건넌다. 기룡마을의 터줏대감 함평모씨의 선산인 마갑산(馬甲山)을 왼편에 끼고 에둘러가는 모양새인데, 무안만민교회의 입간판을 기점으로 삼으면 되겠다.

 도로 건너 들녘에는 드론실기장이 들어서 있었다. 이론 수업을 마친 마니아들이 이곳에서 실습을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초당대학교(무안 소재 대학으로 백제약품 계열) 항공드론과 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실습장이 될 수도 있겠다.

 몇 걸음 더 걸어 금산방조제로 올라선다. 해제면 용학리에서 시작해 죽도를 거쳐 천장리에 이르는 길고 긴 국가관리 방조제이다. 참고로 무안은 해남 못지않게 간석지(干潟地)가 발달돼 있다. 농지를 만들기 위한 간척사업도 해남에 뒤지지 않는다. 인근 지도(신안군)가 간척을 통해 육지로 연결되었을 정도인데, 이곳 금산방조제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둑으로 올라서니 가락회관(마실횟집)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마침 요기할만한 곳을 찾던 지라 냉큼 다가가 봤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무안에서만 볼 수 있다는 귀하신 몸, ‘나무젓가락을 만나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다. 일회용품 사용 금지와 함께 나무젓가락도 식당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산낙지를 파는 식당에서만은 예외란다. 미끌미끌 살아 꿈틀대는 세발낙지를 쇠젓가락으로 먹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쩌겠는가. ! 살아 꿈틀대는 세발낙지가 징그럽다면 기절낙지 낙지 오롱구이를 추천한다.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대섬강은 흐름을 멈추고 호수로 변했다. 거기에 습지까지 품게 되면서 드넓은 농경지의 젓줄이자 철새들에게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우리가 찾은 날에도 오리를 비롯한 철새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눈이라도 돌릴라치면 갯벌낙지의 보고라는 탄도만이 아스라하다. 오른쪽 홀통(현경면 오류리)에서 시작된 해안이 마산마을과 가입마을을 거쳐 물암마을로 이어진다. 참고로 탄도만은 무안군 운남면·망운면·현경면·해제면과 신안군의 지도읍에 둘러싸인 넓은 만()으로 2008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으며, 전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생명의 땅이기도 하다.

 금산방조제의 중간 어림에 들어앉은 대섬(竹島)’에는 선착장이 들어서 있었다. 물길이 튼실해서인지 포구에 정박해있는 어선도 많았고, 그 크기도 다른 선착장들보다 월등히 커졌다.

 물양장에서 낯선 풍경을 만났다. 많은 배들이 뭍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수리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하다.

 대나무가 많다는 대섬(竹島)은 풍수상 말의 구시통에 해당된다고 했다. 명당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만민교회(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교회가 아닐까 싶다)에서 울타리를 쳐놓았기 때문이다.

 이정표(종점 5.6/ 시점 14.7)의 지시대로 반대편 방조제를 걷는다. 천장리(泉壯里)의 백동마을 방향이다.

 드넓은 갯벌은 풍경 또한 걸작이다. 검은 갯벌을 옅은 초록이 뒤덮고 있다. 가을철에는 저 위로 붉게 물든 칠면초가 덧씌워진단다. 이때 만들어지는 풍경, 즉 초록과 붉은 풀밭이 무언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나?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23. 800m쯤 더 걷다가 바다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백동마을을 향해 구릉지로 올라간다. 이때 동구 밖에서 정자나무로 둔갑한 멀구슬나무의 멋진 풍모를 엿볼 수 있다.

 백동(栢洞)’이란 지명은 마을에 잣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탐방로는 백동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저 스치듯 지나갈 따름이다. 때문에 한국전쟁 때 희생된 주민 148명을 기리는 위령비는 둘러볼 수 없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에 묵념이라도 드렸으면 좋았으련만...

 백동마을 역시 구릉지에 걸터앉았다. 그 위를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길은 또 다른 백동마을로 나있다. 백동마을이 2개의 자연부락(백동 및 가실)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어떤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탐방로가 마을을 살짝 비켜나있어 확인해볼 수도 없었다.

 아무튼 탐방로는 해안으로 곧장 내려가는 지름길을 버리고, 마을을 에둘러서 간다. 땅이 바다만큼 낮아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이 절반이라는, 풍경으로만 따진다면 하늘이 열 일을 한다는 무안의 이국적인 멋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답다고 해서 가슴 아픈 현장이 없겠는가. 지난 해 양배추(배추 포함) 농사는 작황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생산과잉이 되면서 가격하락이 뒤따랐고, 많은 농가들은 밭을 갈아엎는 아픔을 겪었다. 저 농부는 끝까지 버텨보다 이제야 갈아엎고 있나 보다.

 잠시 후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내륙을 향해 동그랗게 파고들어 온 창매리(蒼梅里)의 해안선을 따라 탐방을 이어간다. 아니 방조제 아래로 난 농로를 한참 걷고 난 뒤에야 해안으로 올라선다. 이 구간에서 우린 탄도만의 풍경을 새롭게 담는다. 배를 드러낸 갯벌에 누워있는 어선들, 시선을 조금 옮기면 바다 건너 홀통해변의 전체적인 풍광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다가온다.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저 길도 노두(路頭)라 부를 수 있으려나? 갯벌에 놓은 어민들의 작업도로 말이다. 아무튼 바닷물에 잠겼던 길이 드러나 있기에 갯벌로 내려서봤다. 이곳이 칠면초의 군락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해살이 풀이어선지 칠면초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짭조름한 맛을 느껴보려고 했는데 아쉽다.

 해안선을 따르던 탐방로가 또 다시 내륙으로 파고든다. 백동마을 앞 해안에서 1km쯤 떨어진 지점인데, 중매산으로 가는 바닷가에 길이 나있지 않은 모양이다. 이어서 200m쯤 더 걸어 창산마을 앞 도로(이정표 : 종점 2.6/ 시점 17.9)로 올라선다.

 창선마을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나친다. ‘창산(蒼山)’이란 지명처럼 푸름으로 가득한 철마산(지형이 말 형상으로 생겼단다)을 배경삼아 마을이 들어섰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8. 서해랑길은 이제 창매로를 따라간다. 24코스의 종점인 매당마을까지 이어지는 2차선 도로이다. 이 구간을 걸으며 우린 문드러져가는 배추밭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작황이 좋아도 걱정, 나빠도 걱정이라던 어느 농부의 넋두리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600m쯤 더 걸으면 창매교회’, 이정표(종점 1.9/ 시점 18.6)는 버스정류장(창매리) 앞에서 도로를 벗어나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4코스 종점까지 도로가 뻥 뚫렸는데도 중매산을 에둘러가는 임도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밭두렁을 따라 굽이굽이 휘도는 오솔길이 저리도 고운데, 삭막한 도로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탄도만을 위에서 바라보는 호사까지 누리지 않겠는가.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동그랗게 휘돌아나가는 탄도만의 끝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이 빠지고 민낯을 드러내는 저 갯벌은 어부에게는 생명의 땅이다. 대바구니를 짊어진 남정네들은 삽으로 갯벌을 파헤쳐 낙지를 잡고, 아낙들은 밭을 매듯 갯벌에 쪼그려 앉아 호미로 조개를 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바닷물이 밀려온다.

 임도로 들어선지 20분 남짓. 중매산(또는 매령산)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양지바른 산자락에 걸터앉은 매당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맹당으로 시작해, ‘맨댕이를 거쳐 현재는 매당(梅堂)’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탄도(炭島)까지 물러났던 바닷물이 회색빛 갯벌을 야금야금 점령해오고 있다. 그러자 물이 빠지면 걸어서도 들어갈 수 있다는 꼬맹이 개구리섬(蛙島)’이 바다 위로 떠오른다. 운이라도 좋으면 모세의 기적을 카메라에 담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조금 늦었나보다.

 마을로 들어서니 잘 생긴 팽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팽나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나무다. 그래선지 서해랑길을 걷다보면 저런 팽나무를 심심찮게 만난다. 한편 팽나무는 포구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 매당마을도 의젓한 포구다. 그러니 정자나무 역할을 하는 팽나무 한두 그루 어찌 없겠는가.

 날머리는 매당노인회관’(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그리고 끄트머리쯤에 위치한 매당노인회관 앞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고로 매당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명당으로 알려지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마을에서도 매령산으로 기우제를 지내러 왔다는 것이다. 하늘이 감응이 빠를 정도로 산의 기운이 좋았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로 명당으로 불리다가, ‘맹당을 거쳐 현재의 이름인 매당으로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서해랑길 안내도(무안25코스)는 노인회관 옆 민가의 담벼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찍 거리가 15.42km이니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강풍으로 인해 떨어진 체감기온을 끌어올리려고 속도를 냈던 모양이다.

서해랑길 23코스(운남정류장-봉오제마을)

 

여행일 : ‘23. 2. 11()

소재지 : 전남 무안군 운남면·망운면·현경면 일원

여행코스 : 운남(삼거리) 버스정류장저동마을두곡마을성동마을송현마을조금나루낙지공원송정마을봉오제마을(거리/시간 : 19.5km/ 실제는 송현교차로부터 13.77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3코스를 걷는다. 6로 이루어진 목포·무안남부구간의 마지막 구간이기도 하다. 무안군의 서쪽 들녘과 해안을 이어 걷는데 중간에 조금나루라는 명소를 지나게 된다. 운남면(왼편)과 현경면(오른편) 사이에 놓인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이때 끝 간 데 없이 너른 바다를 양옆에 끼고 걷는다. 낙지와 조개류가 지천으로 널려있다는 황금어장이라니 운 좋으면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도 있겠다.

 

 들머리는 운남(삼거리) 버스정류장(무안군 운남면 연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를 빠져나와 77번 국도를 따라 신안(압해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팔학교차로(운남면 동암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운남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면사무소 다음의 버스정류장(삼거리) 23코스의 출발지점이 된다.

 운남면사무소에서 시작해 망운면을 거쳐 현경면(봉오제)에 이르는 19.5km짜리 둘레길로 초반부는 주로 들길, 후반부는 해안길을 걷게 된다. 이중 후반부(조금나루부터)는 무안의 명품 둘레길인 노을길로 포장되어 있다.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초반부를 생략해버린 이유이다. 거리가 너무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송현교차로(조금나루에서 3km쯤 전방)에서 시작하는 지혜로 대신했다.

 23코스의 안내도와 이정표(종점까지 19.7km)는 버스정류장(삼거리) 뒤편 공터에 세워져 있다.

 실제 출발지는 송현교차로(무안군 망운면 송현리), 오늘도 집사람에 대한 배려가 먼저이다. 불편한 무릎을 핑계 삼아 초반부를 생략하고 출발지(운남면사무소)에서 6km쯤 떨어진 송현교차로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77번 국도를 타고 무안방면으로 나가다 조금나루 방향으로 빠져나오면 된다.

 이곳은 송현마을. 집채보다도 더 큰 빗돌이 남도낙지1번지라며 너스레를 떤다. 맞다. 이곳 송현마을 주변 갯벌은 남도 최대의 낙지어장으로 꼽힌다. 특히 타 지역의 낙지와는 달리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게 일품이라나?

 조금나루길을 따라 200m쯤 걸으면 송현보건진료소’, 송현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챙겨주는 곳이겠지만, 나에게는 서해랑길과의 첫 만남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계속해서 조금나루길을 따른다. 송현4리의 자연부락인 유종동(儒宗洞, 오른쪽)과 성동(왼쪽)을 양옆에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성동(星洞)’ 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원래 이름은 서은동(鼠隱洞), 마을 지형이 쥐가 숨어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송현교회 앞마당의 물렛(문랫)도 눈여겨볼만 하다. 한때는 마을에서 제사까지 지내오던 신석(神石)이었다니 말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3. 탐방로는 도로(조금나루길)’를 벗어나 농로로 들어선다. 초입에 신창맹씨 세장비(新昌孟氏 世葬碑)’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맹씨의 유래와 이 마을 입향조 맹윤창의 사적을 기술했는데, 맹씨는 김해김씨(마을에는 통훈대부김진관유허비도 있다)와 함께 송현마을의 양대 성씨이다.

 송현마을로 가는 길, 해남의 화원반도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전체가 구릉지인 것이다. 하지만 배추 일색이던 해남과는 달리 이곳은 사방이 온통 마늘과 양파 밭 일색이었다.

 마늘과 양파는 무안의 양대 특산물이다. 황토의 게르마늄과 바닷가 해풍, 온난한 겨울철 등 삼박자가 어우러지면서 명품 구를 만들어내는데, 이게 크고 튼실한 것은 물론 고유성분도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단다.

 현대인의 삶은 경제를 바탕에 둔다. 농민이라고 해서 남의 집 불구경이겠는가. 농작물의 전유물이던 땅을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는 저 잔디밭이 그 증거라 하겠다.

 그렇게 10분쯤 걷자 송현(松峴, 송현4)’마을에 이른다. 송현(솔고개 또는 솔재)이란 지명은 소나무가 많은 고개 아래의 동네라는 데서 유래했다. 경작지 확장을 위해 나무를 베어버린 탓에 지금 민둥이 되어버린 마을 뒤 고개에 소나무가 울창했다는 것이다. 그림자만 해도 200평이 넘었다는 마을 앞 소나무는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온 다음 이번에는 마을 앞 해안을 따라 조금나루로 간다. 시와 그림으로 도배된 방파제를 끼고 걷는 멋진 구간이다. 이때 송현마을을 대변하는 문장 하나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

 마을 앞 선착장에는 낙지잡이 삼매경인 어부를 그렸다. 송현마을은 앞뒤가 바다라는 게 특징이다. 이 바다에 물이 빠지면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드러난다. 배를 몰지 못하는 때다. 그렇다고 어부들이 놀 리가 있겠는가. 어부들은 이때도 바다에 나가 촉촉한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는다.

 조개잡이는 동네 아낙들 몫인가 보다. 조개잡이에 한창인 그녀의 뒤로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마을의 특산물인 낙지는 시()로도 얼굴을 내민다. 황성신 시인의 작품이라는데, 그는 노을’, ‘바다 등 갯마을 풍경에 어울리는 작품들을 여럿 적어놓았다. 불경에 나오는 명심보감용 문구들도 심심찮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마을 앞은 넓디너른 갯벌이다. 그러나 예전엔 모래사장이었다고 한다. 물이 빠지면 거대한 모래 운동장으로 변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었고 주민들은 모래밭에서 공을 차고 씨름도 했단다. 그게 건축자재로 모래를 퍼가면서 이제는 코앞까지 펄이 됐다. 지형은 변했어도 갯벌은 여전히 풍성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갯벌 곳곳에 흩어진 어선들은 물이 차오르기만 기다린다. !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조금나루는 방파제(주민들이 해모가지라 부른다는 제방일지도 모르겠다)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맞다. 예전의 조금나루는 조금 때는 육지와 연결되지만 평시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작은 섬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방파제가 놓이면서 이제는 의젓한 육지가 되었다.

 바다는 이제 양옆으로 펼쳐진다. 운남면 앞바다 일색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오른편에서 탄도만이 새로운 풍경으로 추가된다.

 초입의 표지석이 조금나루에 들어왔음을 알린다. 조금나루는 현재 유원지로 개발되어 외지인들을 유혹한다. 여름철에는 피서객들로 붐비기도 한단다. 아니 옛날에도 여긴 사람들로 붐볐다고 했다. 조선시대는 징수한 세곡을 영광목관으로 보내던 주요 항구였고, 조금 때면 칠산바다의 고기잡이배들이 들어와 쉬어가던 곳이었단다.

 서해랑길은 이제 조금나루의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왼쪽의 갯벌 너머는 운남면(같은 무안군 소속)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운남반도의 북쪽, 내리에서 동쪽으로 휘도는 해안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 조금나루의 중간쯤에 들어선 송현항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2020 어촌뉴딜 300사업에 선정되어 현재 정주여건 개선공사(선착장·선양장 정비, 부장교 설치)가 진행 중이란다. 참고로 어촌뉴딜 사업은 가기 쉬운 어촌’, ‘찾고 싶은 어촌이라는 주제로 낙후된 어촌과 어항 300개를 현대화해 어촌의 경쟁력을 새롭게 키우는 정책이다.

 현대인들은 조그만 낭비도 허용하지 않는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까지 한 점도 놓치지 않겠다며 만들어놓은 저 풍력발전기(운남면 내리)가 그 증거다.

 모퉁이(근처 이정표 : 시점 9.5/ 종점 10)를 돌자 이번에는 조금나루 선착장이 나온다. 너른 선착장에는 대합실까지 들어서있었다. 탄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루에 한 차례 왕복하지만 물때에 따라 유동적이란다)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공사가 한창이어선지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이곳도 역시 중장비가 바쁘게 움직인다. ‘송현항과 같은 공사가 한창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어울림-송현과 자연을 잇다라는 catchphrase로 추진되고 있는 이 공사는 마을+주민, 주민+방문객의 어울림을 기본으로 한단다. 삶의 근간인 마을과 바다를 주민들의 쉼터 및 쾌적하고 안전한 일터로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안내판은 조금나루에 대해 알려준다. ‘조금나루에서 조금(반대어는 사리이다)’은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때인 음력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이르는 순 우리말이다. 그런 조금에도 이곳에서는 나룻배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주민은 조금 때 물이 빠지면 마을 앞 섬인 탄도와 선도로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는 데서 유래를 찾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무안의 명품 둘레길인 노을길을 따른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확 달라진다. 탄도만을 북쪽으로 휘돌아가는 해안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코앞에 있는 탄도는 물론이고 신안의 선도와 지도까지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조금나루의 해안사구 해송 숲, 소나무 숲 사이로 여기저기 캠핑을 즐기는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들어앉았다. 가족단위 여행지로 이미 입소문을 탔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썩 넓지는 않지만 모래사장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으며, 갯벌에서는 게 고동 낙지 등을 잡는 갯벌체험도 가능하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모래 유실로 시달리는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갯고랑 너머로 낮고 길쭉한 섬 하나가 보인다. 무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인도인 탄도. 조금나루에서 2.5km쯤 떨어진 작은 섬으로 50여 명이 살고 있단다. ‘숯섬이라는 의미로 탄도(炭島)라 표기하지만, 무안문화원은 여울섬을 뜻하는 탄도(灘島)가 더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섬의 크기로 봤을 때 숯을 만들 만큼 나무가 많았다고 보기 어렵고, 서해로 이어지는 물목이어서 예전부터 여울도로 불렸기 때문이란다.

 송현마을 입구 삼거리(이정표 : 유종동 1.5/ 송현/ 조금나루)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유종동 방향)으로 간다. 참고로 조금나루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30분이 걸렸다.

 낙지와 어패류가 지천이라는 갯벌은 생태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주민에게는 물론 삶의 현장이다. 초입의 안내판은 낙지산란장에 대해 적고 있었다. 하지만 게시된 그림처럼 생긴 시설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내판이 위치를 잘못 잡은 듯하다.

 관광안내도 앞에는 어르신용 보행기가 세워져 있었다. 갯벌로 내려가는 시멘트길 끄트머리에는 그보다 많은 보행기가 머무른다. 조개잡이 나온 어르신들이 몰고나온 모양인데, 어촌 역시 고령화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도로변 방파제에는 염생식물인 칠면초를 그려놓았다. 칠면초(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가 널리다시피 한 인근 갯벌을 나타내고 싶었음이리라. 칠면초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 예쁜 가을철에 다시 찾아오라며...

 어장 근처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왼쪽은 해안길. 하지만 도로공사가 끝나지 않은 탓인지 서해랑길은 구릉지 위를 걷는다. 무안 북쪽에서 탄도만을 향해 바늘처럼 솟은 작은 반도의 등허리를 밟는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노을길 도로변은 해당화 꽃밭으로 가꾸고 있었다. ‘국화인 무안군 군화를 해당화로 바꾸기라도 하려는 걸까?

 낮은 구릉지를 넘다가 팽나무 숲을 만났다. 매년 정월 대보름 당산제를 모시는 숲으로, 이때 송현마을의 입향조가 정착할 때 심은 팽나무가 신목(神木)이 된단다.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 갯벌과 하늘이 반반이다. 땅도 바다만큼 낮아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이 절반이다. 노을길에서는 어디를 둘러봐도 저런 풍광이 펼쳐진다.

 어촌뉴딜 300사업과는 다른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무안 유일의 유인도인 탄도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사로, 해저 암반층을 굴착한 다음 3,090m나 되는 상수도관을 묻는다고 한다.

 잠시 후 낙지공원(이정표 : 시점 12.3/ 종점 7.2)’에 이른다. 무안의 특산물인 낙지를 알리고자 조성된 캠핑 공원으로 전망대와 무인카페, 카라반, 야영데크 등으로 이뤄진 일종의 유원지이다. 밤에는 공원 전체가 은은한 경관조명으로 물들기도 한단다. 참고로 송현교차로(트레킹 출발지)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공원 한가운데는 14m 높이의 낙지 모양 전망대가 자리한다. 낙지 머리를 흐느적거리는 여섯 개의 다리가 받치는 형상이다. 그나저나 계단을 타고 올라 잔잔한 서해를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니 한번쯤 올라볼 일이다.

 바다생물 모양의 창밖으로 탄도만의 광활한 풍경이 펼쳐진다. 유리창의 얼룩이 시야를 방해하는 건 약간의 흠, 하지만 해안선과 나란히 늘어선 모래사장과 그 안쪽으로 펼쳐지는 갯벌은 자랑거리다.

 여섯 개의 다리 가운데 두 개는 미끄럼틀로 만들었다. 조망을 즐긴 다음 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며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낙지전망대를 오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듯, 데크 전망대를 따로 만들어놓았다. 물위를 걷는 듯한 스릴까지 덧대놓은 전망대에 서자 탄도만의 광활한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그네 비슷한 놀이기구는 물론이고, 바닷가를 암시하는 듯한 조형물도 여럿 세워두었다. 그런데 저 조형물은 대체 뭘 나타내고 있을까? 갯벌로 소문난 무안의 바닷가이니 조개나 낙지를 잡는 어부들을 형상화했을지도 모르겠다.

 쉼터도 낙지모양으로 만들었다. 내부는 무인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야영장에는 선인장(백년초) 꽃밭도 조성되어 있었다. 조금나루의 모래사장에 지천으로 널려있었다는 선인장 군락을 재현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낙지공원 양쪽으로는 해송 숲과 백사장이 길게 이어진다. 일몰 시간에 맞추면 숲속에 앉아 낭만적인 일몰도 감상할 수 있단다. 그 노을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둘레길 브랜드(노을길)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믿거나 말거나이다.

 노을길에 대한 안내도도 보인다. 조금나루 해변에서 출발해 현경면의 봉오제에 이르는 8.9km짜리 해안길이란다. 이 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적한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덕분에 무안의 어촌과 갯벌의 전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을길로 나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유종동(송현4)’의 마을 뒤 능선인 중구등이 오른편으로 펼쳐진다. 나지막한 구릉지이지만 망운면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라고 한다.

 77번 국도에 다가간 다음 목서리로 넘어간다. 이때 대섬(竹島)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름은 자라섬이었는데 섬에 시누대가 무성해지면서 대섬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참고로 목서리는 목관(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이 주재하던 관청으로 현 망운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해랑길은 목서리의 6개 자연부락 중 장재·내덕·외덕 마을의 해안을 지난다.

 움푹 파인 해안선은 들어갈수록 육지는 멀어지고 갯벌은 그만큼 더 넓어진다. 바다가 땅에 갇히고 땅이 바다에 포위된 형국이다.

 갯벌을 빠져나오는 저 어부들의 어구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누군가의 입을 빌려본다. 바다는 부족하지만 궁핍의 자국은 없다고. 가지지 못해 안달하기보다는 모자라는 대로 만족하는 여유가 어부에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줌으로 당겨보니 섬이 둘로 나뉘었다. 기존의 대섬에다 오강섬이 추가된 것이다. 오강처럼 작은 섬이지만, 주민들이 노두(路頭)로 연결시킨 덕분에 외지에서 온 가족단위 소풍객들이 자주 찾는단다. 아무튼 두 섬의 사이로 낙지산란장이 들어서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안지역의 농토는 거의가 붉은 황톳빛이다. 노을길 가꾸기 사업의 일환인지는 몰라도 그곳에 유채가 심어져 있었다. 봄이면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맞다. 이곳은 볼거리가 많기로 소문난 둘레길이다. 해질 무렵 서정이 사무치게 아름다워 노을길로 부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2. 장재마을 갈림길(이정표 : 시점 14.3/ 종점 5.2)에 닿았다. 77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면 장재마을(목서리), 서해랑길은 국헌횟집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국헌횟집 근처 바닷가에는 장재선착장이 들어서 있었다. 꼬맹이 어선 두엇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작은 포구다. 그래선지 어민들의 쉼터도 컨테이너박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해안에 잇대어 내놓은 도로를 따른다. 오가는 차량이 없어 탄도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두루두루 살피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하지만 그늘이 없어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다.

 대섬과 요강섬(‘오강섬이라고도 한단다)이 부쩍 가까워졌다. 그러자 대섬이 등치를 한껏 부풀린다. 맞다. 대섬은 한때 사람이 살았었고, 당시 사용하던 옹달샘도 남아있다고 했다.

 잠시 후, 또 다른 선착장을 만났다. 최근에 새로 만든 모양인데, 내덕마을 해안이니 내덕선착장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내덕마을 해안의 방파제도 벽화를 그려놓았다. 그나저나 노을길은 만남의 길, 자연행복 길, 노을 머뭄 길, 느리게 걷는 길 등 4개의 산책로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송림숲 공원, 낙지공원, 전망대 쌈지공원 등도 끼워 넣었단다. 그렇다면 이 구간은 어느 산책로에 포함됐을까? 이를 알리는 안내판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2. 바닷가에 조성된 쉼터를 만났다. 노을길은 이렇듯 중간 중간에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서해바다와 갯벌이 어우러지면서 더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런 쉼터에서 감상하는 노을과 석양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란다.

 작은 공원(이정표 : 시점 16.3/ 종점 3.2)도 조성되어 있었다. 잘 지어진 정자는 물론이고, 데크 산책로까지 보탰다. 노을길 안내도에 그려져 있던 외덕 해안공원이 아닐까 싶다.

 이 즈음 물고기가 숨어든다는 어은도(漁隱島)’가 눈에 들어온다. 이를 줄여 요즘은 엄섬으로 부른단다. 갯고랑에 그림자를 드리운 어은도를 끼고 이어지는 해안의 바위는 유암포(기름바위). 썰물 때 물이 흘러내리면 모양이 기름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외덕마을 해안을 지나 송정리로 들어간다. 망운면에서 현경면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바닥이 보도블럭으로 바뀌어 있다.

 엄섬과 대섬, 그리고 요강섬이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묵화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참고로 이 부근은 해넘이가 곱다고 소문났다. 밀물 때는 바다가 붉게 물들고 썰물 때는 갯벌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황홀하게 반짝인단다.

 서해랑길은 하수장마을(송정1)을 스치듯 지나간다. 원래 이름은 수장(水長), 마을 앞 우물의 수질이 좋고 양이 풍부하다는 데서 유래됐는데, 1970년대 24번 국도가 마을을 가르고 지나가면서 상수장과 하수장으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3. 고급어종인 바리류(다금바리, 농성어 등)의 종묘양식장을 지나면 송정마을 어장이다. 바다는 한창 물이 차오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바다로 나가고 싶은 어부는 이미 배에 올라 출어를 준비한다.

 갈대밭도 눈에 띈다. 순천만이나 강진만의 갈대밭처럼 광활하지는 않지만 풍경화 한 폭을 그려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맞다. 노을길은 탄도만이 갖고 있는 저런 풍광, 즉 천혜의 갯벌과 모래해안, 송림숲 거기에 노을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조성됐다.

 탐방로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린다. 그리고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23코스의 종점인 봉오제 마을이 불쑥 떠오른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해제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봉오제 마을을 지난 탄도만 해안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가 오류리 검무산 아래 해안으로 쑥 물러난다. 무안의 또 다른 명소인 홀통해변은 그 해안이 다시 한 번 튀어나온 지점에 놓여있다.

 날머리는 봉오제 삼거리(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문 닫힌 낙지 전문식당 회랑낙지랑을 지나면 현해로로 올라서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봉오제 삼거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봉오제 봉대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대산(옹산이나 봉오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래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서해랑길(무안 24코스) 안내도는 삼거리 조금 못미처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3.77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코스가 쉬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서해랑길 20코스(청계면사무소-용동마을)

 

여행일 : ‘23. 1. 14()

소재지 : 전남 무안군 청계면 및 망운면 일원

여행코스 : 청계면사무소복룡마을강정마을톱머리해변무안공항두모마을용동마을(거리/시간 : 18.7km/ 실제는 복룡마을에서 무안공항까지 8.18km 2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0코스를 걷는다. 6로 이루어진 목포·무안남부구간의 세 번째 구간이기도 하다. 무안군의 서쪽해안을 걷는 이 구간은 복룡마을 벽화나 톱머리해안의 다도해 풍광을 빼면 볼만한 게 없다. 걷는 도중 무안의 별미인 낙지를 맛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랄까?

 

 들머리는 청계면 복합센터’(무안군 청계면 도림리)

서해안고속도로 일로 IC를 빠져나와 815번 지방도, 구암삼거리(청계면 청계리)에서 국도 1호선(무안·나주방면)으로 옮기면 잠시 후 도림리에 이르게 된다. 청계면사무소의 소재지이다. 서해랑길(무안 20코스) 안내도는 청계면 복합센터 앞에 세워져 있다.

 청계면 복합센터를 출발해 톱머리해변과 무안공항을 거쳐 망운면 용동마을(송현리)에 이르는 18.7km짜리 둘레길. 그러나 우리부부는 앞뒤를 빼버리고 복룡마을에서 무안공항까지 8.18km만 걸었다. 하지만 20코스를 대표하는 볼거리 톱머리해변과 복룡마을 벽화를 눈에 담았으니 볼만한 것은 모두 본 셈이다.

 20코스의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은 복합센터 앞 전신주에 매달려 있다.

 실제 출발지는 청운로(청계교차로망운면 목서리) 상에 있는 복룡마을(청계면)’ 버스정류장으로 삼았다. 연골주사까지 맞아가며 따라나선 집사람에게 18.7km는 다소 무리였기 때문이다. 완주가 일상화 된 나로서는 다소 서운한 일이지만 눈요깃거리 없는 내륙구간을 생략했으니 억울하지는 않다. 더구나 단축으로 인해 생긴 자투리 시간을 무안의 별미 낙지를 먹는데 썼으니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나 할까?

 핸드폰에 깔아놓은 ‘GPX 트랙 복룡교차로로 가란다. 하지만 난 복룡마을(교회 앞을 지난다)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으뜸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담장을 온통 벽화로 채워 넣었다는데 한번쯤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복룡마을(‘용수동 또는 장자산으로도 불린다)로 들어서자 잘생긴 용() 한 마리가 길손을 맞는다. 용이 엎드려 쉬는 형상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표현한 모양이다.

 마을회관의 담벼락은 듬직한 한우가 차지했다. 그나저나 저 벽화는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단다. 빛의 반사를 통해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빛나 야간 운행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볼거리에 안전사고 예방까지 더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인 셈이다.

 나머지 담벼락은 어린이들 차지다. 말뚝박기(말타기)와 딱지치기, 널뛰기 등 옛 추억을 소환시키는 놀이들을 그려놓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아이는 동무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창문을 기어오른다. 행여 어른들이 눈치라도 챌세라 조심조심.

 벽화의 대미는 90년대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 캐릭터. ‘K-드라마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던 오징어 게임에서는 술래 로봇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벌이는 극한 게임, 참가자들은 영희(로봇)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동안 움직이고 고개를 돌리면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방식으로 5분 안에 결승선을 통과해야만 했다.

 영희 캐릭터 앞에서 만난 이정표(톱머리해수욕장 6.6km)는 종점까지 13.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5.5km를 단축한 셈이다. 아니 이미 0.5km쯤 걸어왔으니 오늘 걷게 될 거리는 13.7km쯤으로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실개천을 따라간다. 개천가를 따라 농로가 나있는데, 아까 복룡마을로 들어오면서 살펴봤던 벽화들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15분 만에 출발지점(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방향인 복룡교차로로 간다.

 교차로에서는 두이아스콘의 거대한 시설물을 바라보며 직진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5. 강정마을 앞 오거리에 이른다. 길이 네 갈래로 나뉘어 다소 헷갈릴 수도 있으나 이정표(종점까지 12.1km)가 설치되어 있으니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참고로 직진 방향의 두 길은 모두 해안로(825번 지방도)’로 연결된다.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태천(台川)’ 마을이 놓여있다. 법정 동리인 강정리에 속한 2(강정·태천)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뒷산인 고림봉 봉대산으로도 불리는데, 조선시대 주요 통신수단이었던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무안에는 봉대산 4개나 있단다.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마을 앞 들녘은 끝 간 데 없이 드넓었다. 맞다. 예전에 이 마을은 풍요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김이 무럭무럭 날 정도로 부자마을 이었다는 것이다. 주변 마을에서 쌀을 빌리러 오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마을들이 더 잘 사는 곳이 되어버렸다나?

 양파 밭이랍니다.’ 마늘과 양파를 헷갈려하는데 집사람이 잎의 생김새부터 다르다면서 꼼꼼히도 알려준다. 첫째 무안은 양파의 전국 최대 생산지라서 양파를 빼놓고는 무안을 말할 수 없단다. 둘째는 품질. 비옥한 황토 들녘에서 자란데다, 풍부한 일조량과 해풍으로 다져져 육질이 단단할 뿐만 아니라 먹으면 단맛까지 난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마을회관 옆으로 난 고샅으로 들어서는데,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없었다.

 마을 뒤 고개(‘국수댕이 잔등이라 부르고 있었다)를 넘어가면 ‘815번 지방도를 마주한다.

 폭넓은 도로(4차선) 아래로 난 굴다리는 다용도인가 보다. 우리 같은 나그네들에게는 보행로이지만, 인근 농민들에게는 훌륭한 농자재 창고가 되어주고 있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직진은 폐교된 청계서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농산물종합가공지원센터(농산물 가공제품을 생산판매 하고자 하는 농업인의 창업 인큐베이팅 역할)를 거쳐 도대리로 연결된다. 서해랑길은 왼편,  815번 지방도의 옆으로 난 농로를 따른다. ! 오른편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어버리는 길이니 염두에 두지도 말자.

 탐방로는 도대(道垈)’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교회의 첨탑이 흡사 랜드마크라도 되는 양 우뚝 솟아오른 마을이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절골’, 마을에 절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해당화가 많다며 해당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 마을 중앙으로 길이 나면서 도대(刀垈)’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도대(道垈)’로 변했다.

 이번엔 양파와 함께 무안 농산물의 양대 축을 이루는 마늘밭이란다. 저 마늘은 한때 내 지우를 힘들게 만들기도 했었다. 중국산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 뒤이은 중국의 보복조치(한국산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 수입 중단)로 인해 고뇌를 거듭하던 지우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5. 탐방로는 도대교차로를 지난다. 또 다시 만난 ‘815번 지방도의 아래를 지나간다.

 이정표(종점 9.4/ 시점 9.3)는 이곳 도대교차로 20코스의 중간 지점임을 알려준다.

 250m쯤 더 걸어 방조제로 올라선다. 방금 지나온 도대리 앞 들녘, 즉 오래 전 염전이 있었을 법한 염밭들(염전이 있는 들녘)은 저 방조제가 놓이면서 이제 광활한 농경지로 변했다.

 탐방로는 이제 방조제(둑 아래로는 도로가 나있다)를 따라간다. 바다와 들판 모두 넓고 산줄기는 멀찍이 물러나 앉아서 지평선길 못지않게 광대한 느낌을 준다.

 오른편은 무안컨트리클럽이 들어섰다. 안개가 거의 없고 일조량이 풍부해 사계절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곳이다. 거기다 광주-무안 간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접근성까지 자랑한다. 특히 바다와 어우러지게 조성된 SEASIDE 54홀 코스는 저마다의 독특한 특성과 묘미로 골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단다.

 바다 건너는 운남면(이곳 망운면에 속해 있다가 1983년 독립했다). 다음 구간(21코스)은 저 해안선을 따라 나있다.

 무안의 자랑거리는 단연 갯벌이다. 국내 1호 갯벌습지보호지역(2001)이고, 연안습지로는 국내 두 번째 람사르(Ramsar) 습지(2008)’. 기운 세기로 정평이 난 세발낙지와 운저리’(문절망둑의 사투리) 등의 계절 별미가 저 풍요로운 갯벌에서 나온다.

 작은 배수갑문을 지나 망운면(피서리)으로 들어선다. ‘톱머리란 지명을 만들어낸 곳이다. 방파제로 육지와 가까스로 연결되는 땅끝이 토끼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나? ‘() 머리로 불리다가 언제부턴가 톱머리로 변했단다.

 오른쪽에는 창포호(저 안쪽에 무안에서 가장 큰 호수가 있다)’가 있다. 망운면에서 흘러온 물줄기(이름은 알 수 없었다)와 청계면에서 흘러나온 물줄기(태봉천)가 피서리(망운면)와 도대리(청계면) 사이에서 합쳐져 톱머리 앞바다로 흘러드는데, 이 하천을 방조제로 막아 만든 인공호수가 창포호이다. 천연기념물인 황새와 독수리가 발견돼 세간의 이목을 끌었는가 하면, 수달과 삵 등 멸종위기 동물이 다수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배수갑문을 지나면 도로(청운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서해랑길이란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양 바닷가를 따른다. 그 초입(이정표 : 종점 8.6/ 시점 10.1) 멀구슬나무 그늘 아래에 간식 먹기 딱 좋은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후부터는 바닷가를 따라 난 오솔길을 걷는다.

 이때 자연미를 퐁퐁 풍기는 포구를 만났다. 그 흔한 방파제 하나 없다보니 배도 바닷가 나뭇가지에 매어놓았다.

 오솔길을 빠져나오자 기다란 방조제가 어서 오란다. ‘톱머리라는 지명을 낳게 한 방조제로, 낚시꾼들에게는 소문난 놀이터가 되어준다. 입질이 좋을 때면 들어앉을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낚시꾼들로 붐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낚시용 무동력선까지 띄워 놓았다. 참고로 이 부근은 망둥어(전라도에서는 운저리 문저리로 불린다) 낚시 포인트이나, 숭어의 입질도 심심치 않단다.

 방조제의 끝에는 톱머리항이 들어섰다. 무안군수가 관리하는 지방어항으로, 십여 척의 어선이 전부인 작은 포구이다.

 하지만 물양장만큼은 여느 국가어항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무안의 대표 볼거리를 그려 넣은 관광안내도도 눈에 띈다. 서해랑길 20코스는 그중 톱머리해변을 포함하고 있다.

 선착장 끝에는 비행기를 쏙 빼다 닮은 조형물이 서 있었다. 무안국제공항 인근이라는 지역적 특색을 투영시켰다는 등대. 하지만 비행기는 대각선이 아닌 수직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방조제를 걸어오는 내내 우주선으로 오해했던 이유일 것이다.

 안내판은 오색 관광조명을 가미했다는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덕분에 야간에 해안도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밤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단다.

 포구를 지나 톱머리 해안으로 간다. ‘피서리(皮西里)’, 즉 피란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지명만큼이나 안온한 느낌을 주는 해안이다. 국정이 혼란하고 민심이 소란했던 조선 중엽 안정적인 삶을 찾아 떠돌던 이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피세(避世)가 피서(皮西)로 변한 이유나 시기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때 거무스름한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갯벌 풍경은 무안의 자랑거리다. 갯벌을 뒤덮은 염생식물 칠면초(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무안 전역도 가을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철 무안은 그래서 더 예뻐진다고 한다.

 바닷가를 따라 호텔과 리조트, 펜션 등 다양한 숙박업소들이 들어서 있다. 음식점과 카페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톱머리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한데다 물까지 맑아 가족단위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백사장 뒤로는 200년 이상 된 곰솔이 숲을 이루고 있어 피서객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해수욕장의 하이라이트는 곰솔이 아닐까 싶다. 줄지어 늘어선 굵직한 소나무가 백사장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향토사학자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개발로 인해 규모가 확 줄어들어버렸다면서 말이다. 예전에는 인근 학교에서 소풍 장소로 즐겨 찾았을 정도로 곰솔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피서객들을 위한 정자도 심심찮게 보인다. 바닷가에 잇대어 지어놓은 것이 소나무 그늘만으로는 피서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곳은 원래 반도모양의 곶()이었다고 한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반도의 특성을 잃어버렸지만 원래는 마을 앞뒤로 모래톱이 쌓여 있었단다. 당시만 해도 왕모래로 덮여있던 뒤편이 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다나?

 백사장의 품격은 리조트 앞에서 완성된다. 아까 호텔 앞에서 시작된 넓이 100m의 백사장이 1km를 달려와 이곳에서 대미를 장식한다.(전체 길이는 2km쯤 된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운남면의 구릉지 위로 해가 떨어질 때면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게 타오른다고 한다.

 톱머리해변을 빠져나오면 ‘815번 지방도를 만난다. 하지만 탐방로는 바닷가를 조금 더 고집한다.

 그렇다고 바닷가에 잇대어 나있지는 않으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자.

 대신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을 만날 수 있었다. 김유정의 동명 소설에 반해 좋아하게 된 꽃이다. 나를 쏙 빼다 닮은 덜 떨어진 주인공 와 점순이가 부둥켜안고 쓰러지는 ending scene이 되어 준 꽃밭이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 더, 김유정이 적은 노랑 동백꽃의 실제 정체가 생강나무꽃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그렇다고 좋아했던 걸 무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또 다시 ‘815번 지방도(청운로)’로 올라섰다. 이로보아 서해랑길 20코스는 청운로를 수시로 오르내리며 이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 이 일대는 단감 생산지로 유명하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당도와 빛깔에서 단연 으뜸이며 옛날엔 임금님께 진상까지 되었단다.

 이때 선두대장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보다 5km를 더 걸었으니 6km/h의 속도로 걸어온 셈이다. 한 갑자를 훌쩍 넘긴 나이에 뛰다시피 걸을 수 있는 그의 체력에 경의를 표해본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해오는 나로서는 강 건너 불구경이지만.

 오른편은 무안국제공항. 호남권 유일의 국제공항이나 2021년 기준 국내 공항 중 운항편수가 가장 적은 공항이라고 한다. 하나 더, 무안공항은 순수 민간공항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차단막이 쳐져있지 않아 사진촬영이 가능했다.

 6분쯤 더 걸으니 무안 갯벌낙지직판장이 잠깐 들렀다 가란다. 기운 세기로 유명한 세발낙지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낙지는 무안의 5 중 하나,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일단은 들어가고 본다. 소주를 반주 삼을 안주는 물론 낙지볶음(난 날것을 회피하는 편이다)’, 서울보다 조금 비쌌지만 갓 잡아 올린 낙지를 쓴다니 어쩌겠는가. 그나저나 안주발을 받아선지 은 그 이름처럼 술술 잘도 넘어갔다.

 날머리는 용동마을(무안군 망운면 송현리)

나머지 구간(5km)은 음식점 사장님의 트럭을 이용해서 왔다. 시나브로 마시다보니 얼큰하게 취해버렸고, 주변 풍광을 가슴에 담을 수조차 없게 몽롱해져버렸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8.17km를 걸었다. 20코스가 18.7km이니 절반도 못 걸은 셈이다. 낮술에 취해버린 탓이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빼먹었으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 했다. 아니 오늘뿐만 아니라 우리부부는 항상 붙어 다닌다. ‘Dirty is out of the place’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는 진리를 자기 자리를 벗어난 더러움을 빌어 얘기한다. 즉 논밭에서는 꼭 필요한 흙이 집안에서는 깨끗하게 닦아내야 하는 골칫덩어리로 변한다고나 할까? 맞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그 자리를 지킬 때 아름다운 본질을 지켜나갈 수 있다. 우리 부부에게는 그 자리가 서로의 곁이 아닐까 싶다.

서해랑길 19코스(용해동사무소-청계면사무소)

 

여행일 : ‘22. 12. 10()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용해동·석현동·대양동과 무안군 삼향읍·청계면 일원

여행코스 : 용해동사무소삼향동사무소마동마을마갈마을복룡마을월호마을도림천청계면사무소(거리/시간 : 16km/ 실제는 초의선사유적지부터 13.52km 3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9코스를 걷는다. 6로 이루어진 목포·무안남부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목포의 도심에서 출발하는 이 구간은 무안의 바닷가와 드넓은 들녘을 지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하지만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초의선사라는 걸출한 선승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은은하게 우러나는 다향을 바닥에 깔고서...

 

 들머리는 용해동 행정복지센터(목포시 용해동 98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TG를 빠져나와 국도 1(2)호선을 타고 고하도 방향으로 10km쯤 내려오다 산정교차로(목포시 연산동)에서 용당로로 옮겨 2.2km정도 들어오면 용해동 행정복지센터에 이른다. 서해랑길(무안 19코스)의 안내도는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목포시의 북서쪽 외곽과 무안군의 남부 해안을 걷는 코스이다. 이 코스의 특징은 다도해의 멋진 풍광과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드넓은 들녘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초의선사유적지와 오승우미술관이라는 보너스까지 받아들 수 있다. 우리 부부는 도심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초의선사유적지를 꼼꼼히 둘러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실제 출발지는 초의선사유적지(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 위치하며 입장료는 없다)

식상한 도심구간을 생략하고, 탐방로를 살짝 비켜난 초의선사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초의선사의 출생지인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생가를 비롯해 그와 관련된 유적(일지암·용호정)과 전시시설(박물관·기념관), 다성사(사당) 등을 세워 다인들의 순례성지로 자리매김 시켰다. 그나저나 주차장에서 바라본 봉수산(烽燧山 204.4m)이 여간 범상한 게 아니다. 옛날에는 저 암봉 위에 봉수대, 그 아래에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암자의 스님이 물에 빠진 초의선사를 구해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투어는 대각문(大覺門)’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헌종이 내린 사호(賜號)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선사에서 따왔다. 이곳에 온 사람들 모두가 깨달음을 얻으라는 격려도 담았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탐방로를 가운데 두고 소박한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분을 기리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차밭을 지나면 초의선사의 동상, 그냥 지나치지 말고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게송(偈頌)으로 전한바 있는 선사의 기풍을 살짝 엿보고 가자. <두륜산 마루턱에서 주먹을 불끈 세우고/ 푸른 바다 비탈에서 코를 비비네/ 홀로 무외(無畏)의 광명을 크게 베풀며/ 달을 가리켜 모든 어둠을 깨뜨리누나/ ()의 땅이건 고통(苦痛)의 바다이건 가리지 않고/ 한 부처님의 마음을 죄다 가졌네/ 정명(正明) 보살의 말없는 게송이여!/ 허공을 때리는 법계(法界)의 소리여!/ 부처에 들고 또 다시 마군(魔軍)에 드니/ 다만 자기만 아는 웃음소리/ 살 고양이, 쥐잡는 지혜처럼/ () ()이 서로 어우러져/ 봄바람 한 소식에 온갖 꽃이 피어/ 밝고 밝음이 오늘에 이르렀구려>

 일지암(一枝庵)은 해남 대흥사의 것을 본떴다고 한다. ‘풀 옷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검소함과 간결함, 선사의 깊은 삶의 자세까지 배어 있는 암자다. 그런데 현판에 암자 암()’이 아닌 뚜껑 암()’자를 쓴 이유는 뭘까? 하나 더, 암자 옆에는 어린 초의선사가 또래 아이들과 놀았다는 초의암(草衣岩)’도 있었다. 해변에서 잡을 물고기를 말리거나 조개를 구워먹던 놀이터였단다.

 초의선사기념관은 차의 성인(茶聖)’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 근처 숲속에는 세심헌(洗心軒)’이란 초가도 있었다. 안내판은 초의선사가 말년에 온갖 번뇌를 다 놓아버리려고 지은 쾌년각(快年閣)’을 본떴다고 적었다.

 안에는 선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과 활동상황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해놓았다.

 다성사로 오르려면 빗돌에 인사부터 드려야 한다. 왼편의 ‘13대 초의대종사(十三代 艸衣大宗師)’는 대흥사의 13대 대종사였다는 뜻, 오른편의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종사(大角登階普濟尊者 草衣大宗師)’ 55(1840) 때 헌종으로부터 받은 사호(賜號)라고 한다.

 돌계단을 오르면 다성사(茶聖祠)’. 초의선사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선사가 탄생한 음력 45일을 기해 헌다제(獻茶祭)’를 모신다. 열반한 8월 초2일에도 헌다제를 봉행한단다. 사당은 개방되어 있었다. 일반 추모객들에게도 헌다의 예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안에는 선사의 상()과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초의선사는 1786(정조10)에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한 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수행하면서 선()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겼다. 그로 인해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대선사이자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당 오른편에는 동다송 비(東茶頌 碑)’를 세웠다. 초의선사가 지은 31( : 한시의 여섯 형식 중 하나) 동다송은 차의 역사·유래·전설, 차를 만들고 마시는 법, 차를 마신 사람들 이야기, 차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하나 더, 사당 왼편에는 초의선사 추원비(草衣禪師 追遠碑)를 세웠다. 이밖에도 유적지 경내에는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조선 차 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 차에 대한 문화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차 전문 박물관이다. 참고로 초의선사는 우리 차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중국 다경요채를 초록,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다신전(茶神傳)’을 썼고, 이어서 이 책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우리 풍토와 기후에 맞게 쓴 글()을 추가해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안에는 조선시대 사용하던 차 도구를 시대별(조선 이전, 조선 전기, 조선 중기, 조선 후기)로 전시하고 있다. 중국의 차 도구와 조선시대 차 문화를 기록한 도서도 전시했다.

 용호백로정(蓉湖白鷺亭)은 용산(서울)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는 추사의 정자로 용호(蓉湖)란 용산의 옛 지명이다. 백로가 오락가락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백로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자의 터도 사라지고, 그저 기록으로만 전하던 것을 이곳에 복원해 놓았다. 초의선사는 용호정에서 두 해나 머물렀다고 한다.

 교육관인 초의선원(草衣禪院)은 밖에서 보면 1층이지만 내부는 2층으로 되어있다. 1층은 인간세상을 나타내고, 2층의 다실공간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1층에서 2층의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은 구름계단으로 33천의 하늘나라를 의미해서 구름무늬를 조각했다. 그밖에도 선사의 생애를 나타내는 문양들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 초의선원 마당의 차 따르는 조형물은 한번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일여(一如)의 미()’ 禪茶一如(선다일여)’로 귀결된다. 선과 차가 하나로 귀결되니 참선을 모르면 은은한 다향(茶香)의 맛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차로 마음을 씻어내듯 고요히 생각에 잠겨보자. ()의 경지는 몰라도 살짝 엿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마당에는 투호놀이, 지게지기, 절구치기, 고리던지기 등 전통놀이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선사의 생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지었단다. 당사자가 살아생전에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다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선사는 저 집에서 열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나주 운흥사로 출가했단다.

 보제루(普濟樓)는 초의선사의 차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의 보제는 헌종이 선사에게 내려준 호인 대각등계 보제존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초의선사 탄생 22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2층을 합한 면적을 222평으로 지었다나?

 다음 방문지인 오승우 미술관으로 이동하는데, 방금 전 둘러봤던 전각들에 뒤지지 않는 전통 한옥이 눈에 띈다. 간판을 내걸지 않아 용도는 모르겠지만 하룻밤 묵어가기 딱 좋겠다.

 유적지 입구에는 오승우 미술관이라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서양화단의 원로이자 한국판 르느와르(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불리는 오승우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십장생 시리즈’, ‘한국의 100산 시리즈’, ‘동양의 원형 시리즈 등 오 화백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단다.

 미술관 앞 공터에는 그의 아들인 오상욱이 조각한 천축 가는 길이 세워져 있었다. 미래를 향하여 먼 길을 떠나는 구도자의 걸음에는 미래의 희망이 있다나? 참고로 오 화백의 부친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오지호(고향인 화순에 미술관이 있다) 화백이다. 거기에 아들인 오상욱까지 조각가의 길을 걸으면서 3대가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또 다른 작품은 사진 찍기 딱 좋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얼굴 큰 남자들은 사양. 조그만 구멍에 꽉 차버릴 테니 말이다.

 미술관에서 나오면 도로가 둘로 나뉜다. 정답은 오른편, 1km쯤 떨어진 바닷가에서 서해랑길과 만난다. 하지만 난 반대방향을 선택했다. 19코스의 유일한 항구인 마동항을 눈에 담아보기 위해서이다.

 내륙의 국도(1호선) 방향으로 200m쯤 걷자 그린빌리지로 이어지는 삼거리. 방향만 보고 들어섰다가 금방 되돌아 나왔다. 숯불구이 촌닭으로 소문난 조선시대라는 식당이 서해바다 뷰가 좋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는 정보만 부여안고서...

 200m남짓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삼연기업의 건물을 기점 삼아 오른편 마동길로 들어선다. 진행방향의 산마루에 마을(‘그린빌리지라는 전원주택단지) 하나가 걸터앉아 있다면 길을 제대로 찾은 셈이다.

 ! 한적한 바닷가에서 히든싱어를 보게 되다니. ‘히든싱어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와 그 가수의 목소리부터 창법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창능력자가 노래 대결을 펼치는 신개념 음악 프로그램이다. 각 편에서 주인공을 이겼던 모창가수들이 이젠 콘서트까지 열고 있는 모양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 마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왕산리(旺山里) 7개 자연부락(평산·왕산·금동·마동·마갈·동뫼·덕산) 중 하나로 바다를 끼고 있어 어촌으로 분류된다. 거기다 방조제 축조로 들녘까지 드넓어지면서 요즘에는 풍요의 상징으로 변했다. 참고로 마동(馬洞)’이란 지명은 삼향읍의 주산인 봉수산에서 내려다봤을 때 마을의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바닷가로 나오니 기다란 둑이 건너편 목포시(대양동)를 연결시킨다. 혹자는 중등포방조제라 불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전국의 마룻금을 손바닥 읽듯 하는 그는 또 월산동마을과 중반마을(표석은 분명 마동마을이었다)을 잇는다면서 그 안쪽도 중등포 들녘(들녘 안쪽에 중등포마을이 실제 존재한다)’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후로는 마동길을 따른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두둥실 떠다니는 다도해의 멋진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명품 해안길이다.

 이때 코스모스악기 연수원이 눈에 띈다. 세계적 브랜드의 악기와 부품 등을 독점 수입·판매하는 회사인데, 자체브랜드(Kingstone, Harrison )로 제작도 한다더니 그 생산 공장이 목포지역에 있는가 보다.

 마동항은 곁눈질, 즉 지나는 길에 살짝 엿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어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인근에 항구다운 항구가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방조제. 서해랑길 나그네들은 저 방조제에 복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복구마을 앞 바다를 막았다는 의사표시일 것이다.

 방조제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오른편,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 너머로 삼각뿔을 쏙 빼다 닮은 봉수산이 솟아올랐다. 이름처럼 저 산에는 1898(고종 35)까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는 조형미 뛰어난 압해대교가 바다를 가른다. 목포와 압해도(신안군청이 새로 들어섰다)를 연결하는 닐센아치(다리 상판을 케이블로 매달아 하중을 아치에 전달) 형식의 연륙교이다.

 복구(福口)’ 마을은 스치듯 지나친다. 그러다 다 쓰러져가는 폐가 두어 채를 만났다. 서해바다 뷰가 뛰어난 왕산리는 전원주택지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불편함이 싫어 도시로 떠나가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꽃까지 떠났겠는가. 서리 맞은 산국이 떠나버린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복구마을을 빠져나오면 크고 작은 섬들로 가득한 다도해 풍광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그 오른편 산자락은 최근 들어선 듯한 전원마을 차지다.

 마동마을에서 15, ‘825번 지방도(왕산로)’로 올라섰다. 아까 오승우미술관 앞에서 헤어졌던 도로인데, 복구마을의 진입로 역할을 하는 듯, 삼거리에 버스정류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5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9.3/ 시점 7.5)가 도로를 벗어나란다. GPX트랙은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도 된다는데, 굳이 돌아가라는 이유는 뭘까? 그것도 짧다고는 하지만 오르막길일진데...

 100m쯤 올라갔을까 새로 들어선 듯한 전원주택단지가 얼굴을 내민다. 허투루 지어진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하나하나가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무안군에서 저 마을(도로변 버스정류장은 마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 구경을 마친 서해랑길은 다시 도로(왕산로)로 내려선다. 하지만 100m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도로를 벗어나버린다.

 그렇다고 눈요깃거리까지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이 지점은 서해바다의 뷰가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발아래로 꼬맹이 닭섬이 새벽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목을 세우고, 그 뒤의 갓섬(사유지라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압해도가 나타난다. 이게 오른편의 가란도 그리고 왼편의 압해대교를 품으면서 아름다운 풍경화로 승화된다.

 825번 지방도와 헤어진 탐방로는 이제 왕산로(1차선 도로)’를 따라 마갈마을로 간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시골길이다.

 그렇다고 다도해의 멋진 풍광까지 사라질 리가 있겠는가. 아까 도로가에서 보았던 경관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지대가 높아진 탓인지 닭섬과 갓섬이 훨씬 더 또렷해졌다.

 이곳 무안은 영암과 어깨를 맞댄 형세다. 그래선지 영암의 주요 특산물인 무화과가 눈에 띄기도 했다. 하긴 초록동색(草綠同色)’이란 사자성어도 있지 않겠는가.

 12분쯤 걸어 왕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마갈마을로 들어섰다. 마갈(馬葛)이란 지명은 좀 엉뚱한 데가 있다. 지형이 갈마음수(渴馬飮水)’, 즉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인데서 유래됐다. 그러다 말이 목이 말라 죽었다는 속설로 인해 한때 목마를 갈()’ 대신 칡 갈()’ 자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목마를 갈()’을 사용한다나?

 마을을 관통한 탐방로는 나지막한 고개(kakaomap 검동재라 적고 있었다)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 ‘마갈마을에서 19코스의 후반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마을회관 앞 이정표(종점 8.5/ 시점 8.3)가 딱 중간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검동재(‘마갈 잔등이라 부르기도 한단다)’에 올라서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봉수산으로 연결됨을 알리는 이정표가 초입에 세워져 있었다. 아까 초의선사유적지에서도 봉수산 등산로가 보였었는데...

 검동재 너머는 지산리(복룡마을)’이다. 봉수산의 북쪽 자락에 들어앉은 삼향농공단지로 대변되는 곳이다. 무안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농공단지로, 연간 생산액이 800억 원에 이르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단다.

 길가 제이러브 팜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 catchphrase로 내건 체험농장이다. 강냉이·호박·고추·완두콩 등의 재배나 수확, 가공에 대한 체험은 물론이고 수확된 농작물의 구매도 가능하단다.

 복룡마을은 법정 동리인 지산리(芝山里)’를 구성하는 6(복룡·월호·지산·곽단·노재동·장곡) 자연부락 중 하나다. 복룡(伏龍)이란 지명도 역시 지형에서 유래됐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지맥이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데 그 형상이 마치 용이 엎드리고 있는 듯 했단다.

 옛 이름은 마장촌(馬場村)’. 옆 마을인 월호 마을과 함께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복룡마을에서 말을 기르고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마을 표석에도 말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복룡마을을 빠져나오니 월호저수지가 반긴다. 월호앞뜰(‘해지안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아니 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더 넓은 들녘에 물을 대기 위해 쌓은 저수지이다.

 월호저수지 아래. 잘 가꾸어진 양 갈래의 길이 산뜻한 인상을 준다. ‘행복 홀씨 안내판도 눈에 띈다. 주민들 스스로 마을을 아름답게 가꿔 민들레 홀씨처럼 행복을 퍼트리자는 의미의 행복 홀씨 입양사업에 동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월호(月湖)’ 마을은 이름부터가 서정적이다. 하지만 원래 이름은 한인촌(漢人村)이었다고 한다. 한나라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그러다가 하인촌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지형적 특성을 따 월호로 바꾸었단다. 간척사업이 있기 전, 밀물 때가 되면 마을 앞 넓은 들에 물이 차 마치 호수처럼 보였는데, 거기다 동산에 달이라도 떠오를라치면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마을가꾸기 사업의 흔적인 듯 월호마을의 담벼락도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 깃발을 내걸고 사물놀이가 한창이다. 월호리가 신명나는 마을임을 알려주려 했다나? 맞다. 이 마을은 명절날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 강강수월래 놀이를 하는 풍습이 전해진다고 했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금동마을로 연결되는 도로(지산길)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이때 눈에 익은 풍광이 펼쳐진다. 해남구간의 화원반도를 걸으면서 만났던 이색적인 풍경, 즉 구릉지가 이곳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해남은 푸른 배추가 한 가득이었는데, 이곳은 텅 비어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작은 소류지도 만날 수 있었다. ‘둠벙에서 소류지로 크기만 달라졌을 뿐. 이 또한 해남에서 눈여겨봤던 익숙한 풍경이다. 다만 메마른 구릉지에 물을 대던 해남과는 달리 이곳은 요 아래에 있는 논에까지 물을 대느라 몸집을 부풀렸을 것이다. 아무튼 큰 덩치 덕분에 세월을 낚는 강태공까지 덤으로 품었다.

 저수지 아래로 내려서자 꽤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지금이야 옥토로 변했지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만 해도 이곳은 바닷물이 넘나들었다. 이 일대에서 나던 금동머리 감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뽑히기도 했단다.

 이후 300m는 들녘의 가장자리를 따른다. 농경지와 산자락 사이로 농로(중산길)가 나있다. 그러다 지산천을 만나면 쌍 다리 중 하나를 건너면 된다.

 탐방로는 이제 지산천의 제방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이런 둑길은 19코스의 종점인 도림리까지 계속된다.

 오른편으로는 지산리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요 아래 도림천의 하구둑이 축조되면서 생겨난 저 들녘은 지산리를 넘어 청계리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큰 지산천이 그보다 더 큰 도림천을 만나면, 물길은 아예 호수처럼 넓어져버린다. 아니 도림천 하구에 쌓아올린 복길방조제가 만들어놓은 인공호수일지도 모르겠다.

 두물머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승달산에서 발원 ‘S’자로 굽이굽이 흐르며 드넓은 들녘을 적셔온 도림천은 이곳 복길리(청계면)와 왕산리(삼향읍) 사이에서 몸집을 크게 부풀린 다음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이 일대는 갈대가 장관이다. 하천 양쪽 둔치를 따라 길고 넓게 분포되어 있다. 금강(신성리)의 갈대숲만은 못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바람에 속도가 붙었던지 갈대밭이 서걱서걱 소리를 낸다. 이리저리 춤추는 갈대 너머로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물결이 은은한 빛을 내며 일렁인다. 그저 말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힘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들녘은 호남고속철도 2단계(고막원-목포 구간) 공사가 한창이었다. 건설역군들에게는 휴일조차 없나보다.

 중간에 청계천(도림천으로 합수되는 지점)을 만나 가로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저 오른편 제방에서 왼편 제방으로 옮겼다는 것만 다를 뿐.

 지산천에서 둑길로 올라선지 1시간(4.3km).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오던 탐방로는 도남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선다. ! 다리를 건너다 해안길로 우회해 온 일행을 만났다. 탐방로를 벗어나 서해안을 따르다가 도림천 하구둑을 건너고, 계속해서 복길리 해안을 올라가다 남성동삼거리에서 도림리로 들어왔단다. 훨씬 유익했다는 그의 자랑을 들으며 우리 국토의 둘레를 따라가는 코리아 둘레길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기껏해야 면소재지인데 도림리(道林里)는 규모가 꽤 컸다. 길거리도 면소재지치고는 꽤 번화한 풍경을 보여준다. 어쩌면 목포대학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풍경이지 싶다.

 도심의 대형교회에 못지않은 크기를 자랑하는 청계중앙교회를 지나면 곧이어 국도 1호선(영산로)을 만난다. 건너편은 목포대학 정문. 하지만 탐방로는 도로를 건너지 않고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날머리는 청계면복합센터(무안군 청계면 도림리 439-2)

방향을 틀자마자 청계면복합센터가 얼굴을 내민다. 19코스가 종료된다는 얘기다. 오늘은 13.52km 3시간 20분에 걸었다.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초의선사유적지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서해랑길(무안 20코스) 안내도는 복합센터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했다. 활짝 웃는 그녀를 보다 문득 만남의 의미를 고민해본다. 정채봉 작가의 에세이 만남은 만남을 다섯으로 나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는 생선 같은 만남’,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려지는 꽃송이 같은 만남’, 힘이 있을 때는 지키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는 건전지와 같은 만남 등등. 하지만 나에게 집사람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고 싶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는... 반면에 그녀에게 난 만나면 좋고, 함께 있으면 더 좋고, 헤어지면 늘 그리운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실제는 100m남짓 더 걸어 청계면사무소 앞에서 마쳤다.

서해랑길 18코스(목포지방해양수산청-용해동주민센터)

 

여행일 : ‘22. 11. 26()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옥암동·용해동·산정동·만호동·죽교동·연산동·용해동 일원

여행코스 : 목포지방해양수산청갓바위삼학도유원지노적봉낙조대(유달산)해상케이블카(주차장)용해동주민센터(거리 및 시간 : 18km, 실제는 해상케이블카 주차장까지 14.02km 4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8코스를 걷는다. 6로 이루어진 목포·무안남부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목포의 도심을 횡단하는 이 구간은 서해랑길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의 하나로 알려진다. 바닷가와 유달산(둘레길)을 걸으며 목포를 대변하는 기암괴석(갓바위·노적봉 등)과 함께 크고 작은 섬들이 떠다니는 다도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들머리는 목포지방해양수산청(목포시 옥암동 110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내려와 영산로’, 석현삼거리에서 녹색로로 바꿔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 이르게 된다.

 목포시의 외곽을 반 바퀴쯤 도는 코스다. 바닷가와 유달산의 허리를 에도는 둘레길을 걸으며 다도해의 풍광은 물론이고, 기암괴석(달바위·노적봉·일등바위·삼등바위)과 근대역사문화거리 같은 수많은 명소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삭막할 수밖에 없는 도심구간을 지나기도 한다. 우리 부부가 케이블카승강장에서 트레킹을 끝마친 이유이다.

 서해랑길(목포 18코스) 안내판은 해양수산청의 정문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지도에 미개통구간이라는 17코스가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산악회에서는 현재 임시노선인 15·16코스와 미개통인 17코스를 코스가 확정된 다음 이어가겠다고 했는데...

 영산강 하구둑 쪽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편은 삼향읍에서 흘러온 하천, 왼편에는 목포지방해양수산청(미항초등학교와 풍경채아파트가 뒤를 잇는다)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관광입국(觀光立國)’이 나랏일만은 아니다. 산업기반이 취약한 목포로서는 관광에서 대안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줄을 이어 서있는 저 홍보용 조형물은 그 노력의 일환일 것이고 말이다. 목포9경 등 내노라는 명소 사진을 게시해 외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하천이 끝나는 바닷가에는 출렁다리가 바다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자전거 및 보행자 전용의 현수교인 이 평화의 구름다리를 건너면 하당 평화광장으로 연결된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물결 하나 일지 않는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아니 영산강의 하구역(河口域)이다. 전라남도를 횡단해 온 영산강이 바다처럼 등치를 부풀리며 기수역(汽水域)을 펼치는 곳이다.

 이후부터는 영산강 하구역을 왼쪽 옆구리에 차고 걷는다. ‘갓바위 달맞이공원에서 평화의 구름다리까지 1.2km 구간으로, ‘연인의 거리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전국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널찍한 공원 주변은 멋진 카페와 식당, 숙박시설로 가득하다. 여기에 유람선과 분수, 평화광장 무대 등을 한데 엮여 시너지효과를 높이고 있다나?

 이름에 걸맞게 거리는 온통 하트형 조형물로 꾸며져 있었다. 특히 바다를 향한 사랑의 문,  러브게이트는 인생 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는 최고의 포토죤이다. 바다분수를 배경으로 촬영한 인증샷을 온라인과 SNS에 올려 목포 홍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작품이란다.

 길거리에 나선 노점상도 하나같이 연인들을 위한 콘셉트이다. 가장 큰 관심일 인연은 타로나 사주에서 찾는다. 인연이 맺어졌다면 다음은 즐길 차례. ‘달고나 뽑기 풍선 터뜨리기 등 쌍쌍이 놀기에 부족함이 없는 꺼리들이 길가에 줄을 잇는다.

 젊은이들을 유혹하려는데 해양레저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카약과 SUP패들보드, 래프팅보트, 제트보트, 제트스키 등을 무료로 체험해 볼 수도 있도록 했다. 하지만 겨울의 초입이어선지 체험장은 텅 비어있었다.

 거리의 백미는 단연 춤추는 바다분수’, 최대 분사높이가 70m에 달하는 이 분수는 세계 최초의 초대형 부유식 음악분수라고 한다. 밤이면 감미로운 선율과 화려한 빛, 거대한 물줄기 춤에 맞춰 레이저쇼와 공연이 펼쳐진단다. 관람객의 신청곡을 받고, 사연을 소개하거나 프로포즈 이벤트도 진행된다니 초호화판 물놀이인 셈이다.

 30분 정도 걸어 갓바위 지구에 이를 수 있었다. ()처럼 내륙을 향해 파고들어온 바다에는 꽤 많은 어선이 정박하고 있다. 선착장까지 만들어져 있는 걸 보면 인근 주민들의 포구로 이용되는 모양이다.

 갓바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달맞이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 조형물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입구에는 갓바위(천연기념물 제500)’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유헌 시인의 시비(詩碑)도 눈에 띈다. ‘갓바위 전설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았다. <남자가 흐느낀다/ 바다에 빠져 휘청거리고 있다/ 달빛의 무게에 출렁다리 흔들리고/ 가로등 속삭임에 불빛 안은 불면의 밤/ 불효를 후회하며 슬픔에 젖어 있다> 참고로 갓바위에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한 한 젊은이의 정성이 깃든 전설이 전해진다. 영산강을 지나가던 부처님과 아라한이 놓고 간 갓이 돌로 변하였다는 또 다른 전설도 있다.

 갓바위는 바닷가에 터를 잡았다. 때문에 배를 타지 않고서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9년 해상보행교가 만들어지면서 걸어서도 그 잘생긴 외모를 보게 됐다. 하나 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다리가 흔들거려 스릴까지 더해진단다. 하지만 그로 인해 통행이 금지될 수도 있다니 바람을 마냥 좋아할 일만도 아닐 것 같다.

 조망대에 서자 갓바위가 그 전모를 드러낸다. 기괴하게 생긴 암벽이 바닷가에 늘어서있는 것이다. 저 놀라운 정경은 수천 년에 걸친 침식의 결과물이란다. 화산활동에 의해 솟아나온 분출물들이 쌓여 깊은 층의 응회암(화산재가 암축되어 형성된 부드러운 암석)이 되었는데, 이 응회암이 풍화되면서 현무암 등 좀 더 단단한 암석덩어리보다 침식 속도가 빨라지면서 저런 모양새로 변했다는 것이다.

 갓바위라는 지명을 만들어낸 바위는 왼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게 버섯으로 보이니 문제다. 카파도키아(터키) 파샤바 계곡에서 만났던 강렬한 풍경이 떠오른 게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꼭대기에 뚜껑이 달린 원뿔형의 바위기둥들을 보고 나는 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느낌이었다. 하긴 벨기에의 작가 피에르(Pierre Culliford)’ 개구쟁이 스머프(The Smurfs)’ 속 버섯 집을 그려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난 개구쟁이 스머프의 모델하우스를 보고 있는 셈인가?

 서해랑길은 이제 입암산(笠岩山)을 바라보며 간다. ‘갓바위를 한자로 바꿔놓은 산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산의 생김새가 삿갓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해안선을 따라 데크 탐방로가 놓여있으니 이를 따르면 될 일이다. 하나 더, 목포팔경 중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는 저 산에 반사되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다.

 목포 문인들의 시를 음미하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목포가 자랑하는 풍경이나 역사를 시로 읊었다.

 이후의 구간은 문화의 거리로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사진 속 건물목포문예역사관·목포자연사박물관·목포생활도자박물관·남농기념관·목포문화예술회관·목포문학관·목포옥공예전시관 등 내노라는 문화예술관들이 길(남농로) 양옆에 도열해 있다. 그런데도 둘레길 나그네인 나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시간이 빠듯하니 어쩌겠는가.

 목포자연사박물관은 공룡화석·동식물·광물 등의 자료와 서남권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목포생활도자박물관 생활 속 공예문화를 알려준다는 취지로 지난 2006년 개관했다.

 남농기념관은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이 건립한 미술관이다. 안에는 추사 김정희가 해동 제일인자라고 까지 극찬한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2)의 작품을 비롯해 미산 허영, 남농 허건, 임전 허문, 오당 허진 등 운림산방 5대에 걸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단다.

 목포문화예술회관은 예향 목포의 대표적 문화공간이다. 6개 전시실과 698석의 공연장이 최신설비를 갖추고 있단다.

 문화의 거리에서는 육교(문화예술회관과 문학관을 잇는다) 하나까지도 예술적이다. 화살 시위가 당겨진 형상이라는데, 경관조명이 가미돼 저녁이면 문화타운에 또 하나의 볼거리로 변신한다나?

 목포는 대한민국 대표 맛의 도시를 자부한다. 그리고 세발낙지·홍어삼합·민어회·꽃게무침·갈치조림·병어회(준치무침·아구탕(우럭간국 등을 목포9()’로 내놓았다. 모처럼 찾아온 목포이니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맛을 봐야겠는데, 주어진 시간이 빠듯하니 어찌할꼬.

 문화의 거리를 벗어나 이번에는 안장산(68.1m)을 바라보며 간다. 이번에도 왼편에 영산강 하구역을 끼고 가는 형세다.

 덕분에 갈대로 가득한 습지도 만날 수 있었다. 순천만처럼 드넓지는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 제일중학교 앞 사거리에서는 왼쪽 삼학로를 따른다. 왼편에 남항(南港)을 끼고 걷는 모양새지만 항구가 눈에 들오지는 않는다.

 오른편은 목포 시가지, 중앙 타운으로 연결되는 지역답게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적으로 지어졌다. 특히 저 장례식장은 유럽의 여느 궁전보다도 더 멋진 외모를 지녔다.

 15분쯤 더 걸어 도착한 대삼학교 앞에는 삼학도(三鶴島)가 시작됨을 알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한 청년을 사모한 세 여인이 죽어 학이 되었고, 그 학이 떨어져 죽은 자리가 섬이 되었다는 삼학도 세 개의 섬은 다리로 이어져 있다.

 하천처럼 보이지만 저건 인공 수로(탐방로는 수로의 왼쪽으로 나있다)이다. 삼학도는 1968-1973년 섬 외곽에 둑을 쌓고 안쪽 바다를 메워 육지로 변했다. 하지만 공장과 주택이 난립하면서 자연환경이 크게 훼손되고 섬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다가 지난 2000년 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섬 복원과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고, 뭍으로 변한 섬 사이에 저런 수로를 파 분리하는 등 2,242m의 수로를 만들었다. 수로 위에는 10개의 다리를 설치해 시민이 섬에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수로를 따라 삼학도로 들어간다. 첫 만남은 이난영공원(‘이난영 나무로 명명된 배롱나무로 다시 태어나 유달산과 목포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대삼학도 중턱에 잠들었다)이 조성되어 있는 대삼학도이다. 삼학도 지구에는 대삼학도말고도 소삼학도·중삼학도 등 2개의 섬이 더 있는데, 이들은 아담한 다리로 연결된다.

 삼학도는 현재 공원으로 꾸며졌다. 덕분에 그럴듯한 조형물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뿐 아니다. 봄이면 튤립, 여름철 해바라기, 가을의 코스모스, 겨울 동백까지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탐방객들을 맞아 준다고 한다.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도 들어서 있었다.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을 받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기념관은 전시동과 컨벤션 동으로 구분된다. 전시동은 대통령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영상실, 1-4전시실, 대통령집무실 등으로 구성됐다.

 절개되고 매립돼 흔적만 남아있던 소·중 삼학도는 복원된 섬이다. 흙을 쌓아 산 형태를 만들고 곰솔 등의 나무들을 심었다. 소삼학도 옆 바닷가는 목포어린이바다과학관이 차지했다. ‘바다를 테마로 바다상상홀·깊은바다·중간바다·얕은바다·바다아이돔 등 5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바닷가에는 파크골프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파크골프(park golf)란 나무로 된 채를 이용해 역시 나무로 만든 공을 쳐 잔디 위 홀에 넣는, 말 그대로 공원에서 치는 골프놀이이다. 장비나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세게 휘둘러도 멀리 안 나가는 까닭에 최근 부쩍 인기가 높아진 레포츠이다.

 탐방로는 수로를 따라 이어진다. 섬이되 섬이 아닌지도 이미 오래인 삼학도지만, 공원으로 복원하면서 수로를 만들었고, 다리를 놓아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연결시켰다. 덕분에 개성이 강한 다리의 모양새를 구경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예술의 도시답게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어놓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원은 쓰레기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청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유물을 수거하고 있는 저런 젊은이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이 오히려 소음공해일 것 같아 그냥 지나쳤지만, 늦게나마 해양소년단원들에게 찬사를 보내본다.

 삼학도를 빠져나와 늦부지런이 한창인 코스모스에 눈맞추다보면 서해랑길은 항구를 감싸듯이 안으며 왼쪽으로 돈다. 여기서 팁 하나, 목포의 찬란했던 영광을 곁눈질해보고 싶다면 그냥 직진해 볼 일이다. 목포의 산 증인이랄 수 있는 목포역 목포오거리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센터에서는 1897년 개항해 교역·물류·교통의 중심지로 전국 3대항’, ‘6대 도시의 영광을 누렸던 목포의 옛 역사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목포오거리에서는 한국 청년과 일본 청년들의 격렬한 패싸움이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한다. 한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의 경계라서 일본 청년들이 한국 처녀를 희롱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자로 돌아선 서해랑길은 이제 항구와 상가를 양옆에 끼고 간다.

 목포항은 항구도시 목포의 저력과 풍경을 담는다. 어선이 줄지어 늘어선 부둣가는 그물과 부표 등의 어구와 육중한 닻이 점령하고, 선상에서는 외국인으로 보이는 선원들이 출어 준비에 한창이다. 저들도 목포의 눈물을 알까? 그게 무든 대수겠는가. ‘사공의 뱃노래 가물가리며~’를 내가 흥얼거리면 될 일을...

 마리나(marina)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도 이미 3만 불을 넘겼다. 고소득 국가그룹(세계은행 분류)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바닷가에서의 부의 척도는 요트가 아니겠는가. 마리나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저 요트들이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잠시 후 나타난 목포종합수산시장 홍어의 거리라는 부제를 달았다. 간판도 아예 홍어로 내걸었다. 언젠가 홍어 먹기에 도전하는 외국인을 볼 기회가 있었다. ‘버킷리스트의 하나라던 그는 삭힌 홍어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안에 밀어 넣고는, 비강에 이어 기도까지 자극하는 맛에 헛기침을 뱉어내며 보는 이들을 웃겼었다. 하지만 홍어에 불가근(不可近)’의 원칙을 고수하는 난 홍어의 퀴퀴한 향에 놀라 뛰다시피 지나치고 말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20. 목포항의 또 다른 시장인 항동시장에 이른다. 종합수산시장과 함께 목포항의 양대 축을 이루는 시장이다.

 목포는 항구다?’ 맞다. 목포항은 목포의 산업과 미식의 원천이다. 다양하고 싱싱한 수산물이 항구에 집결돼 일련의 산업을 이끈다. 항동시장도 그중 한 축을 담당한다. 하지만 서해랑길 나그네에게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으로 더 주목을 받는다. 탐방로가 항동시장에서 50m쯤 떨어진 곳(이정표 : 종점 9.3/ 시점 8.7)에 위치한 보리밥 골목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골목에는 추억의 옛날 보리밥을 브랜드로 내건 식당들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보리밥골목으로 항동시장을 관통하자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살짝 비켜가는 곳(이정표가 알려준다)에는 소년 김대중 공부방도 있다. 김대중의 유년시절 공부방을 복원, 각종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단다.

 집사람이 치켜든 손가락 끝에는 오우가(五友歌)’가 걸쳐있었다. 윤선도는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를 읊었지만, 나는 배추도 아닌 것이 상추도 아닌 것이로 대신한다. 배추가 분명하건만 잎을 하나씩 따 먹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상추였다.

 오르막길의 끄트머리서 목포진 역사공원을 만났다. 목포진(木浦鎭) 1439(세종 21) 전라수영의 4개 만호진 중 하나로 설치했다. 이후 수군 주둔의 필요에 따라 1501년 수군진성을 쌓았으나, 1895년 고종 칙령으로 폐지됐다. 그러다가 복원과정을 거쳐 2014 120년 만에 역사공원으로 변신했다.

 내삼문을 지나 객사로 들어선다. 전면 5칸에 측면 3칸인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이다. ‘목포지관(木浦之館)’이란 현판은 목포의 객사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객사 뒤 언덕은 석축을 둘러 전망대로 만들었다. 의자를 놓아 시민들에게는 휴식공간으로 제공된다.

 전망대로 오르면 이름에 어울리는 풍광이 펼쳐진다. 시야가 툭 트이면서 목포시가지는 물론이고 저 멀리 남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유달산과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의 조망은 특히 일품이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돋보인다.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가며 보는 재미를 더했다.

 언덕에서 내려오면 근대역사문화 공간(국가등록문화재 제718)’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목포진부터 근대의 관공서·주거·상업시설 등 풍부한 역사문화자산이 밀집해있는 지역으로 노동운동·소작쟁의·항일운동 등 일제강점기 때 민중의 저항이 펼쳐진 공간이다. 3대항 6대도시였던 과거 목포의 역사가 응축돼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대역사관 1으로 단장 된 구 일본영사관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 다음 행선지인 노적봉으로 가려면 저 건물을 지나가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목포의 근대 역사·문화를 엿볼 수 있도록 그 공간을 에둘러 간다.

 첫 만남은 일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다. 지금은 근대역사관 2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수난의 역사와 1920년대 말 목포의 모습을 옛 사진과 각종 자료를 통해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했다.

 옛 건축물들은 만호동 및 유달동 일원에 분포되어 있다. 골목이면 골목, 거리면 거리마다 저마다 의미를 지닌 건물이 즐비하다. 등록된 문화재만도 21개에 이른다고 한다.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하나 더, 목포시는 저 문화유산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부흥기로의 도약을 꿈꾼단다.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그 시절 가장 번창했던 상가, 그리고 다양한 삶이 묻어 있는 적산 가옥들이 즐비하다. 그래선지 카페로 탈바꿈한 적산가옥도 눈에 띈다.

 역사문화공간을 에두른 서해랑길은 아까 바라보던 구 일본영사관(근대역사관 1) 앞으로 온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입구에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해놓았다. 안에는 알찬 정보가 가득하단다.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부터 억압받은 내용과 일본군에 항거한 목포의 의병 이야기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나?

 근대역사관(1)을 스치듯 지나 노적봉으로 향한다. 오르막 경사가 상당히 심하나 버겁다싶은 곳에는 나무계단을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용했다는 노적봉 앞에 선다. 저 바위봉우리를 짚과 섶으로 둘러 군량미가 산더미같이 쌓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하고 적을 공략했다고 전해진다.

 서해랑길은 저 계단을 올라 유달산(정확히는 유달산 둘레길로 연결된다)으로 간다. 하지만 트랙 확인을 방심한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는 유달로를 따라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둘레길 도반들까지 모시고서... ! 반대편으로 가면 물지게를 진 옥단이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옥단이는 물이 귀하던 시절 지게로 집집마다 물을 날랐다는 실존 인물이다. 그녀가 누비고 다녔다는 목포의 심장, 목원동 골목을 따라 100년의 근대 문화·역사를 전하는 옥단이길이 조성됐다.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에 유달산의 명물인 대학루를 뜨락의 정자삼은 멋진 주택도 구경할 수 있었다. 건물의 외벽은 조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돈도 돈이겠지만 저걸 쌓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꼬?

 길을 잘못 들어선 걸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20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가파르게 올라간다.

 골목으로 들어선지 5.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학암사 (이정표 : 아리랑고개 0.5/ 유달산휴게소 0.3)에서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이후부터는 유달산 둘레길을 따른다. 유달산둘레길이란 목포 제1으로 꼽히는 유달산을 한 바퀴 도는 코스다. 유달산주차장을 출발해 목포시사달성사특정자생식물원조각공원어민동산봉후샘낙조대아리랑고개수자원 뚝방길학암사유달산휴게소를 거쳐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길이는 6km쯤 된다.

 산속인데도 길은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주민들이 선호하는 산책코스인지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 누군가는 이 구간을 법정스님의 등굣길이라고 했다. 상업학교(현 전남대 상과대 전신) 시절 스님이 이 길을 따라 학교를 오갔다는 것이다.

 7분쯤 걸으면 옛 2수원지에 닿는다. 1912년에 축조된 우리나라 최초의 산림 내 조성된 수원지(국가산림문화자산 지정)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류지역의 식수를 공급을 위해 지어져 1985년까지 사용됐다. 이후 장기간 방치되다가 2014년 개설된 둘레 길에 편입돼 친수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암벽 폭포와 생태연못을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유달산둘레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스토리텔링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곳곳에 스토리보드를 세워 옛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그 자신감은 유달산둘레길의 첫머리를 이야기가 있는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스토리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도 엿볼 수 있었다. ‘채석장’, 그것도 소꿉장난이나 했을 법한 작은 작업장까지도 얘깃거리로 등장했다.

 명품 둘레길로 가꾸려는 지자체의 노력도 돋보인다. 이곳은 따뜻한 남쪽 나라. 조그만 빈 터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동백나무를 심고 가꾸어가고 있었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5. 낙조대(落照臺)에 도착했다. 이름처럼 석양이 아름다워 절경 중의 절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저 멀리 다도해 섬들이 바둑알처럼 알알이 박히는데, 그 사이로 해라도 떨어질라치면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낙조대를 유달산둘레길 8 중 제3경으로 꼽는다.

 정자에 오르면 고하도와 목포대교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웃자란 소나무가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려 풍경사진은 조망도로 대신했다). 저 어디쯤으로 떨어지는 다도해 해넘이는 유달산 풍경의 백미로 꼽힌다. 그뿐 아니라 목포8경인 고하도 용머리를 돌아오는 만선의 깃발(龍塘歸帆)과 푸름의 기개가 넘치는 고하도의 곰솔(高島雪松)도 감상할 수 있단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유달산이 성큼 다가온다. 유달산에는 유난히 바위가 많다. 거대한 바위의 주름진 표면과 빛깔이 코끼리를 닮은 코끼리 바위, 마치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을 한 장수바위, 모양이 각기 다른 바위들을 바라보며 이름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나?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느껴지지 않아 걷기에 딱 좋다.

 봉후샘은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유달산 봉우리의 뒤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봉후마을’, 이 마을에 식수를 제공해주던 샘이 봉후샘이다. 그러다 1982년 유달산공원화사업으로 주민들은 떠나갔고, 사용자를 잃은 봉후샘은 이제 빈 두레박만 매단 채 둘레길 나그네들에게 쉼터가 되어준다.

 스토리보드는 봉후마을 주민들이 소를 길러 생계를 유지했다고 전한다. 지자체는 이를 더 실감나게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꼴 먹이러가는 아이의 조형물을 세워 옛 추억을 소환하게 만든다.

 시야가 트일라치면 북항(北港)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 뒤로는 다도해 섬들이 바둑알처럼 박혀있다. 유달산 신선들이 섬들을 바둑알 삼아 바둑을 즐겼을 법하다.

 다 내려왔나 싶던 둘레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이제 그만 내려가고 싶은데도 말이다.

 둘레길이 지겨워질 즈음 어민동산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덕산삼거리 0.3/ 어민동산 0.1/ 일등바위 1.3)을 만났다. 유달산을 끝으로 트레킹을 마칠 요량이니 이곳에서 어민동산으로 내려가면 수월해진다. 하지만 대중교통의 이용이 더 편한 덕산삼거리로 간다.

 200m쯤 더 걷게 되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넉넉했다. 북항과 그 너머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걷는 내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걸어 유달로에 내려섰다. 삼거리(이정표에 적혀있던 덕산삼거리일지도 모르겠다)인 이곳에서 서해랑길은 오른편(북항 방향)으로 간다.

 북항으로 가는 도중 목포의 명물인 해상케이블카 북항 스테이션을 만났다. 저곳을 출발한 캐빈은 유달산 이등바위와 일등바위를 눈앞에 선사하며 유달산스테이션을 지나 고하도스테이션을 향해 바다 위를 빠르게 날아간다. 최고 높이 155m, 총길이 3.23로 국내 최장 해상케이블카라고 한다.

 트레킹은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400m쯤 더 걸은 다음 어반호텔 앞 삼거리에서 마쳤다. 이후 구간은 시가지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맨날 보고 또 걸어야만 하는 시가지를 걷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나저나 오늘은 14.02km 4시간20분에 걸었다. 2.5km정도의 산길을 걸었다고는 하지만 험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서해랑길 13코스(우수영관광지-학상 마을회관)

 

여행일 : ‘22. 10. 22(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문내면 및 화원면 일원

여행코스 : 우수영관광지→청룡산→명량대첩비→양정마을→임하도 갈림길→예락마을→용정교→학상마을회관(거리 및 시간 : 16.5km, 실제는 13.16km를 3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3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해남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서해랑길의 특징인 바닷길에 더해 산길·들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걷는다. 덕분에 다도해의 멋진 풍광과 함께 해남의 풍요로운 들녘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의 유적지 중 하나인 우수영에서는 이순신장군의 애국충정에 더해,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까지 살짝 엿보게 된다.

 

▼ 들머리는 학상 마을회관(해남군 화원면 산호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49번 지방도와 77번 국도를 이용 장춘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장춘리)까지 온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개초길(장춘교차로↔화원면 화봉리)’로 들어서면 오래지 않아 ‘학상마을’에 이르게 된다. 사실 이곳은 13코스의 들머리가 아니다. 산악회에서 주차 여건을 감안 들·날머리를 바꿨고, 덕분에 들머리였을 우수영관광지가 졸지에 날머리로 변해버렸다.

▼ ‘우수영관광지’에서 출발해 ‘학상마을’에 이르는 16.5km짜리 구간이다. 하지만 산악회 결정으로 시·종점이 뀌었다. 우리 부부는 한술 더 뜨기로 했다. 집사람의 부실한 무릎을 핑계 삼아 3km를 줄여 ‘예락1방조제’를 들머리로 삼았다.

▼ 남쪽 방향의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예락1 지방관리방조제’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위한 내 배려지만, 이면에는 지루할 수밖에 없는 들녘 구간을 살짝 지나쳐버리겠다는 내 얄팍함이 숨어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 실제 출발지는 ‘예락1 지방관리방조제’. 문내면 예락리와 무고리 사이 바다를 막은 방조제인데, 현재 개·보수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 방조제로 막히면서 옛 하천(서심원천)은 자연스레 담수호로 변했다. 그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 이정목은 출발지를 변경한 내 결정이 3km를 거저먹었음을 알려준다.

▼ 반대편 바다에는 멋진 동산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산자락에 지중해풍의 마을을 품고서. 기획 당시부터 지중해식으로 디자인을 통일시켰다는 ‘무고마을’일 것이다. 이국적인 정취가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 참! 길을 나서기 전에 길을 찾는 방법부터 알아두자. 서해랑길의 방향표식은 노란색(정방향)과 군청색(역방향)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니 역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오늘은 군청색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으면 된다.

▼ 해남의 특징은 유난히도 간척지가 많다는 점이다. 예락1방조제가 만들어낸 예락리 들녘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확을 끝낸 저 들녘에서 거둬들인 벼는 대체 얼마나 될까?

▼ ‘농업은 과학입니다’. 시사 프로그램 패널(panel)들이나 들먹이던 얘기가 아닌지도 이미 오래다. 요즘은 거기에 ‘경제성’이라는 개념 하나를 더 보탰다. 그러니 벼농사보다 경제성이 뛰어난 작물이 있다면 갈아타는 게 정석일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저 비닐하우스가 그 증거일 테고 말이다.

▼ 안에서는 부추처럼 생긴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소금기가 남아있는 간척지에서 자생하는 ‘세발나물(잎이 가늘다는 뜻으로, 가는 줄기가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이라는데, 지난 2006년 해남에서 최초로 재배에 성공했다나? 덕분에 바닷가 주민들이나 먹어보던 겨울철 별미가 도시인들의 밥상에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요게 각종 비타민·무기질·섬유질이 풍부한데다, 칼슘·칼륨·천연미네랄까지 다량 함유한 게 알려지면서 수요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단다. 하긴 면역력을 높여주는 건강식품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 만추를 걷는 나그네에게는 수확기가 지난 감까지도 그림이 된다.

▼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본보기? 기생으로도 부족해 숙주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 길을 나선지 30분. 지형이 그물질하는 것처럼 생겼다는 ‘예락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예락리(曳洛里)의 4개 자연부락(예락·동리·양정·임하) 중 하나로, 대외적으로는 해남 천주교의 시발지로 유명하다. 1904년 우수영 관아의 좌집사 김병범·김보현·박내국 등이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해남 가톨릭이 시작되었다. 그 흔적은 1923년에 지은 ‘예락공소’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한다.

▼ 예락마을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다. 때문에 간척지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마을을 지나면서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구릉지가 바닷가까지 드넓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 밭은 온통 배추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속이 차오른 것들로. 김장배추의 35%를 생산하는 해남 배추의 위세가 느껴지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 전에도 얘기했듯이 해남에서는 심심찮게 ‘둠벙’을 만난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 ‘침대만 과학’이 아니라 요즘은 ‘영농도 과학’이다. 그러니 농가의 펌프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둠벙’에서 끌어올린 물은 저런 스프링클러를 통해 밭작물에 공급된다.

▼ 강원도의 고랭지를 연상시키는 구릉지는 바닷가까지 계속된다. 해남의 자랑인 배추밭도 끊어질 줄 모른다. 해남배추의 특징은 흰 눈이 쌓인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겨울에도 아삭하고 신선한 김치를 담아먹을 수 있단다.

▼ 바닷가를 따라 난 803번 지방도로 내려서자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이름만큼이나 수많은 섬들이 눈앞에 쫙 깔려있다. 상태도·장산도·안좌도 등 큼지막한 섬들이 여러 새끼 섬들을 꼭 껴안고 있는 모양새다.

▼ 왼쪽 방향으로 잠시 걷자 삼거리(우수영과 임하도가 좌우로 나뉜다)가 나타났다. 임하도 쪽으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 탐방로는 임하도로의 초대를 사양하며 왼편 바닷가를 따른다.

▼ 바닷가로 나가자 ‘임하교(林下橋)’가 눈에 들어온다. 임하도는 1986년 방조제 형태의 다리로 놓이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저 다리는 조류의 흐름을 트기 위해 옛 다리를 헐고 2010년 새로 건설했단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남 복 터진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복 터진 마을’이란 해남군이 개발을 위해 그 지역의 역사·문화·농업 자원을 활용하면서 내건 ‘브랜드’이다. 그 대상은 ‘예락마을’. 천혜의 개펄과 그 곳에서 생산된 토판염·세발나물 등 다양한 농수특산물, 주민 간 끈끈한 믿음(천주교)이 있는 복 터진 마을이란 속뜻을 담았다.

▼ 건물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민물장어·닭구이·하모샤브샤브·장어탕 등을 파는데,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성업 중이라고 한다. 참! 예락마을의 특산품인 ‘세발나물’도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 식당을 지나 방조제 제방을 걷는다. 길이가 500m도 넘는 거대한 규모지만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해남의 드넓은 땅은 대부분 ‘간척사업’에 의해 생겨났다. 간척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물론 대단위의 역사가 있긴 했다. 다만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됐기 때문에 지방 토호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 해남의 명문가인 ‘해남윤씨’도 간척사업으로 논을 일구어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

▼ 오른편으로는 다도해의 풍광이 펼쳐진다. 왼쪽은 진도, 오른쪽은 장산도일 것이다. 그 사이 상·하태도를 배경삼아 마진도·백야도·족도·평사도·고사도 등 자잘한 섬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 왼편은 방조제가 만들어 놓은 ‘담수호’. 가을의 전령인 억새를 배경삼은 호수와 들녘이 한 폭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방조제가 끝나갈 즈음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담수호 대신 나타난 저 붉은 풀밭은 대체 뭘까? 오래 전 증도에서도 저와 비슷한 풀들을 보았는데, 안내판은 무기질과 미네랄이 풍부한 ‘함초’라고 적고 있었다. 함초의 ‘함’은 짠맛을 의미한다. 소금을 흡수하면서 자라나 고혈압과 당뇨에 효능이 큰 것으로 알려진다. 아닐 것이다. 소금보다도 값이 더 나가는 함초를 저렇게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겠지?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임하교에서는 30분). 양정마을로 들어섰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예락리’로 편입되면서 4개 자연부락 중 하나가 됐다. 취락은 구릉지에 분포하지만 바다를 끼고 있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단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임하도(林下島)’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임하’라는 지명처럼 울창한 산림(곰솔이 주를 이룬단다)으로 인해 유명해진 섬이다. 섬은 낮고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졌다. 주민들의 생업이 농업과 어업을 동시에 하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인 이유이다.

▼ 양정마을 주변도 배추밭 일색이다. 하지만 ‘세발나물’을 기르는 듯한 비닐하우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세발나물’의 본명은 ‘갯개미자리’. 바닷가 땅이나 염전 주변 등 소금기가 있는 곳에서 자라는데, 푸른 잔디를 연상시키는 외관과 달리 짠맛이 돌면서도 약간 단맛이 난다. 요즘 트렌드인 ‘단짠(달고 짜고)’을 갖추었다고나 할까?

▼ 마을 뒤 ‘양정길(2차선 도로)’을 가로지른다. 바다가 보이는데도 사방은 온통 배추밭뿐이다. 그렇다면 ‘1% 명품소금’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천일염은 대체 어디서 생산된단 말인가. 전통방법(갯벌을 단단히 다지는 토판염)으로 생산되는 귀하신 몸으로 도시의 고급식당에나 납품된다던데...

▼ 해남의 구릉지를 걸을 때는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채소밭 사이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 밭에서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 스프링클러 물줄기가 언제 나에게로 향할지 누가 알겠는가.

▼ 양정마을은 천혜의 자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선지 구릉지를 지나 만나게 되는 드넓은 들녘에서는 벼 수확이 한창이었다.

▼ 염전이었던 듯한 너른 들녘에는 태양광 패널이 한 가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성을 쫒아가겠다는데 뭐라 하겠는가마는 내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이 꼭 아니어도 요즘은 식량에까지 ‘안보’라는 개념이 붙는다. 그만큼 자원이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력은 효율이 좋은 원자력 등에서 얻고, 염전이나 평야에서는 그에 맞는 자원을 획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 양정마을 앞 바다는 숭어·도미·갑오징어가 잡힌다고 했다. 채취되는 낙지·모자반·다시마 등도 가계 소득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어부는 대체 무엇을 잡고 있는 중일까? 내 눈에는 망중한을 즐기는 강태공쯤으로 보였지만...

▼ 작은 고개를 넘자 규모가 제법 큰 축사가 길을 막아선다. 그리고는 이정표(시점 7㎞/ 종점 12㎞)를 이용해 바닷가로 우회시킨다. 그렇다고 꼭 따를 필요는 없다. 빙 돌아가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축사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된다.

▼ 이정표의 지시대로 바닷가로 나섰다. 모퉁이를 돌아서 만난 바다는 양식시설로 한 가득이다. 한마디로 바다목장이라고나 할까? 전복으로 여겨지는 양식장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있는가 하면, 뗏목 같은 부대시설과 채취선 등이 뒤엉키면서 어수선한 풍경도 함께 연출한다.

▼ 숫제 바다목장의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특산물인 전복은 기본, 전복의 먹이사슬인 다시마양식장이 함께 들어섰는가하면, 김발을 매달기 위해 세운 지지대까지 눈에 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시설물은 우수영 인근 해역에서 성행한다는 광어양식장?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전복의 달인, 오션’ 간판을 내건 양식장(성패가 될 때까지의 양식 및 수확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이 얼굴을 내민다. 흔하디흔한 전복양식장이 뭐가 새롭겠는가마는 열대성식물로 치장된 주택이 이색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 주택 옆에는 전복 종자를 키운다는 비닐하우스가 여러 동 들어서 있었다. 전복 양식장은 어린 전복을 키우는 ‘육상수조 치패장(아래 사진)’과 바다의 가두리양식 성패장으로 이루어진단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양정마을에서는 50분), ‘서외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뒷산은 전라우수영 수군진성의 성지였다는 ‘망해산(73.7m)’이다. 전라우수영은 최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535호)로 승격·지정됐다.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니 이젠 성역화작업만 남았다. 발굴조사를 위해 파헤쳐진 저 산자락은 그 현장이다.

▼ 서외마을은 ‘우수영문화마을’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서해랑길 특유의 이정목(시점 5.6㎞/ 종점 13㎞) 말고도 ‘Soul project’지도와 벽화, 시비(초등학생이 지은 시를 적었다)가 세워져 있었다.

▼ 마을길은 직진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의 표식은 왼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또 다른 이정표(망해루← 363m/ 방죽샘↑ 186m)는 아예 다음에 만나게 될 유적지의 이름까지 적어놓았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산자락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무릎이 부실한 집사람에겐 곧장 직진해 충무사로 오도록 이르고 말이다.

▼ 하지만 망해루로 오르는 탐방로가 막혀있었다. 전라우수영(사적 535호)의 정밀발굴조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란다. 그렇다고 고지가 눈앞인데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길의 형편도 살펴볼 겸 산속으로 들어선다.

▼ 그런 내 판단은 옳았다. 발굴조사 현장은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로 인해 훼손된 구간도 모래주머니를 쌓거나 야자매트로 덮어 위험요소를 없앴다.

▼ 그렇게 8분쯤 진행하자 드디어 ‘망해루(望海樓)’. 망해산의 정상에 있는 전라우수영의 망루로 성(城)과 함께 성루로 건설되었다. 1665년 무렵 지어졌으나 그간 소실되었다가 발굴조사로 그 면모가 밝혀졌고, 이어서 2006년에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참고로 전라우수영에는 망해루 외에도 구 충무사의 남장대인 정해루(靜梅樓)와 북장대가 더 있었다고 한다.

▼ 이름과는 달리 망해루는 조망이 꽉 막혀 있었다. 하지만 우수영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운동기구를 배치했는가 하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섬을 의인화 한 초등학생의 시도 눈길을 끌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우수영 오일장(805m 전방)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이어서 길고 긴 통나무계단을 내려서자 ‘북문길(이정표 : 오일장 525m/ 망해루 280m)’. 길가 정자가 잠시 쉬어가란다.

▼ 803번 지방도(우수영로)를 건넌다. 이어서 궁전아파트 옆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오일장’이 나타난다. 서외마을로 들어선지 25분 만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 시장이 있다. 시장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며 또한 정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때(4일과 9일)만 잘 맞추면 해남의 특산물을 제 값에 살 수 있다. 하지만 장날이 아니면 장터는 텅 빈 공터로 남는다. 그러니 장날을 미리 확인해보고, 아니라면 트레킹 코스를 살짝 바꿔보면 어떨까? 망해루에서 내려와 803번 지방도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면 탐방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 ‘오일장’부터는 마을길을 따른다. 상점과 음식점, 금융기관 등이 몰려있는 우수영의 번화가이다. 간판을 기웃거리며 5분쯤 걷자 나지막한 동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꼭대기에는 ‘명량대첩비’를 모신 ‘비각’이 올라앉았다. 명랑대첩비는 숙종 14년(1688년) 동외리(문내면)에 세워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강제로 뜯겨져 서울 근정전에 묻혀 있던 것을 1950년 주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아왔다. 그러나 원래 자리가 아닌 청룡산(학동리)에 옮겨놓았다가, 2011년에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나라 빼앗긴 설움을 온몸으로 버텨낸 불굴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 비각 안에는 명량대첩비(보물 503호)가 들어있다. 이 빗돌은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승전비이다. 이순신이 원균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기고,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 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으로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무용담을 담았다. 당시 대제학이었던 이민서가 비문을 지었고, 본문은 명필로 이름난 판돈녕부사 이정영의 글씨로 새겨졌다. 상부는 소설 ‘구운몽’의 저자인 김만중의 글씨라고 한다.

▼ 건너편에는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들어앉았다. 둘 사이의 광장에는 옛 충무사에서 함께 옮겨 온 비석이 늘어섰다.

▼ 충무사(忠武祠)는 임진왜란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충무공 헌창(軒敞) 사업이 활발하던 1964년 명량대첩비가 있던 학동리에 세웠던 것을 2017년 이곳으로 옮겼다. 영정을 모시는 제각 등에 제한됐던 옛 충무사와는 달리 사당, 동·서무, 외삼문과 강강술래마당 등으로 확대되었음은 물론이다.

▼ 사당에는 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어떠한 느낌으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옛 충무사에 걸려있던 것(김은호 화백이 그렸다)을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 유적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탐방로를 따른다. 그리고 100m쯤 더 걸어 우수영의 동문을 상징화 했다는 조형물을 만났다. 이정표(법정스님 생가↑ 488m/ 동헌터→ 133m/ 명랑대첩비↓ 118m)는 사거리인 이곳에서 곧장 직진하란다. 하지만 난 오른편을 선택했다. 100m 남짓만 걸으면 ‘동헌터’를 만날 수 있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내 선택은 후회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동헌터’로 여길만한 공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볼 수밖에...

▼ 그러다가 문내면생활문화센터를 만났고, 직원으로 여겨지는 분으로부터 문화센터 부근 전체가 ‘동헌터’였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직진한다. 이어서 건물의 외벽과 담장을 벽화로 빼곡히 채워 넣은 아름다운 골목을 걷는다.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마을길로, 벽화·아트카페·생활사박물관·강강술래 아트로드·시(詩) 조형물 등 다양한 볼거리로 꾸며졌다니 천천히 걸으며 마음껏 음미해 볼 일이다.

▼ 이순신장군의 시도 눈에 띈다.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 바다에다 맹세하니 바다 속의 용도 감동하여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오르고, 산에다 맹세하니 초목도 놀라 소스라치네)로 시작되어 수이여진멸 수사불위사(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 : 원수들을 모조리 쓸어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내가 죽어도 무슨 여한이 더 있겠는가?)로 끝을 맺는다. 전장에 나서야 하는 마음가짐을 담은 ‘천보서문원 군저북지위(天步西門遠 君儲北地危)와 고신우국일 장사수훈시(孤臣憂國日 壯士樹勳時)’가 생략되었지만 이순신장군의 우국충정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 주민이 떠나버린 낡은 흙집은 문내면의 특산물인 목화로 만든 포목을 판매하던 ‘면립상회(面立商會)’로 탈바꿈했다. 안에 생활유품이 전시되어 있다니 일종의 생활사박물관인 셈이다. 영업이 중단된 현대부동산도 ‘복덕방’이라는 강강술래를 체험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 쌈지공원이 들어섰는가 하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낮게 이어진 지붕 밑 담벼락에는 명량의 역사에서부터 이어져온 우수영 사람들의 사연이 벽화로 담겼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사람들이 ‘부산에 감천이 있다면 해남에는 우수영이 있다’고 외치는 이유일 것이다.

▼ ‘정재 카페’도 눈여겨 볼만하다. ‘정재’는 부엌을 부르는 전라도 사투리. 우수영을 왕래하던 뱃사람들의 쉼터가 되어주던 ‘제일여관’의 부엌이 커피 향 가득한 카페로 바뀌었다. 작고 허름한 옛 부엌처럼 보이지만 부뚜막과 식초병·소쿠리·부엌살림 같은 옛 생활용품으로 꾸며놓아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짬을 내서라도 한번쯤 찾아볼만한 이유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법정스님 마을도서관’이 나온다. 스님이 태어난 터를 새롭게 꾸미면서 만든 공공도서관이다. 마을도서관 외에도 법정스님의 어록이 담긴 포토존, 생가터 기단 등이 함께 조성됐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이곳(문내면 선두리 우수영마을)에서 태어났다. 2010년 길상사에서 세수 79세(법랍 56세)로 입적하기까지 맑고 향기로운 삶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 떠난 우리 시대의 청빈한 스승이었다.

▼ 생가 터는 빈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스님이 부르짖던 ‘무소유’를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 무체(無體)가 유체(집)를 대신하고 있었다. 스님의 저서 ‘물소리 바람소리’에 나오는 글귀를 싣고서.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생가 터 위로 오르면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이 우리를 맞이한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스님의 말씀과 함께. 그 앞에는 불일암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나무의자를 본뜬 의자를 배치했다.

▼ 스님의 자필 비문도 눈길을 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법정스님이 ‘숫타니파타’를 해설하여 만든 책, 법정스님의 뜻대로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어진 책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 언제부턴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래 코뿔소의 뿔이 하나이듯, 우리네 삶의 수행도 홀로 해볼 일이다.

▼ 우수영항, 우수영 마을은 서남해의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라우수영이 설치되었다. 현재도 수륙을 잇는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제주를 오가는 정기 항로가 운영되고 있다.

▼ 문화마을은 ‘점빵’도 탄생시켰다. 1960~1980년대 동네 골목길에는 어디나 구멍가게인 ‘점방’이 있었다. 점방은 과자와 사탕, 아이스크림뿐 아니라 소주·콩나물·설탕·라면·비누 등 모든 생활용품의 보고였다. 또한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장소를 넘어 지역의 사랑방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했다. 하지만 골목 곳곳에 편의점이 들어오면서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갔고, 이제는 도심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점방이 문화마을과 함께 다시 태어나 어릴 적 소중한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해준다.

▼ 포구 앞 벽화로 채운 가림막이 문화마을의 끄트머리임을 알려준다. 아니 우수영의 입구이니 문화마을이 시작을 알려준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안내자는 물론 명랑해전의 영웅 이순신장군이다.

▼ 우수영을 빠져나오자 ‘선두리’ 마을표지석이 이별을 고한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강강술래길’의 산길구간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수영의 꽃이라며 강강술래를 소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처럼 위장하여 옥매산을 빙빙 돌며 군사가 많은 것처럼 인해전술을 펼친 유래가 있다며.

▼ 데크로드를 2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충무사연리지 198m/ 우수영항 464m)가 18번 국도의 아래로 들어가란다. 서해랑길은 옛 충무사와 연리지를 구경시킨 다음, 청룡산을 넘어 우수영관광지로 이어진다.

▼ ‘학동리’ 표지석이 세워진 다리 아래는 두어 개의 표지판이 길손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중 1962년에 지어져 20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갈 때까지 이순신장군의 위패를 모셨던 옛 ‘충무사’는 ‘강강술래길’로부터 소개를 받는다. 참고로 ‘강강술래길’은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과 조선 수군의 본영이었던 전라우수영을 잇는 길이다. 걸음마다 충무공과 조선 수군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 갯벌의 무늬가 하도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용(龍)을 쏙 빼다 닮았다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잘 생긴 용 한 마리가 하늘이 아닌 육지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 고개를 돌리자 우수영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라 우도 수군의 본영이었던 우수영은 일제와 해방·건국을 거치면서도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진도대교가 놓이면서 유동인구가 확 줄어들었고, 아는 사람만 찾는 곳으로 변했었다. 그러다가 영화 ‘명량’의 성공으로 이제는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됐다고 한다.

▼ 강강술래길(서해랑길과 겹친다)이 아닌 ‘명량로(옛 18번 국도인 듯)’를 따르기로 했다. 이미 걸을 만큼 걸어온 집사람이기에 산등성이를 넘어야하는 코스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이다. 그렇다고 나 혼자서 산길을 탈 수야 없지 않겠는가.

▼ 날머리는 우수영관광지(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8번 국도를 따라 걷다 진대대교 앞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 우수영관광지(단지 안 풍경은 지난 번 5코스 때 소개했다)이다. 13코스의 시점이었으나 역으로 걸은 덕분에 졸지에 종점이 되어버린 지점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13.16km를 걷는데 3시간 20분이 걸렸다. 볼거리가 제법 많았는데도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난이도가 낮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서해랑길’은 민관의 협력으로 이루어 낸 윈윈(win-win)의 대표적인 사례다. 지역 주민은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지자체는 나그네가 헤매지 않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니 그에 대한 감사는 여행자들의 몫이다. 우리 부부가 특산물판매점을 찾았던 이유이다. 그리고 김치·젓갈·미역 등 해남의 특산물을 두둑이 챙겼다. 거기다 점심까지 현지 식당에서 때웠으니 인사치례를 한 셈일까?

서해랑길 10코스(서망항-가치 버스정류장)

 

여행일 : ‘22. 8. 27(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및 지산면 일원

여행코스 : 서망항→팽목항→팽목방조제→마사마을→봉암저수지→하봉암마을→가치버스정류장(거리 및 시간 : 15.9km, 실제는 14.18km를 3시간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0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들길·산길·해안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걸으며 다양한 풍경들을 만난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닌 ‘팽목항’은 꼼꼼히 살펴봐야할 아픔의 현장. 산악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동석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마주보며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 들머리는 서망항(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진도읍 방면)를 타고 38km쯤 내려오면 ‘서망항’에 이르게 된다. 사진은 출발지 근처의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로 세월호 사고 때 한참 말이 많았던 곳이다. 참!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10코스)는 해경파출소 뒤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 ‘서망항’과 ‘가치마을’을 잇는 15.9km짜리 구간. 서해안의 특징인 바닷길에 더해 산길·들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걷는다. 덕분에 다도해의 멋진 풍광을 실컷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소박한 항구를 품은 마을들을 지나며 어촌의 삶을 엿볼 수도 있다. 반면에 무책임한 어른들로 인해 생때같은 어린 생명들을 잃은 ‘세월호’의 아픔을 되돌아보게 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 동쪽 방향, 그러니까 ‘서망 삼거리’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팽목항(출발지에서 1.3km쯤 떨어진 지점)’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세월호 기억관’에 들렀다가 출발지인 ‘마사 수문’으로 가려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는 팽목항에서 트레킹을 시작할 계획이다.

▼ 때문에 국민해양안전관은 차창너머로 보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양안전체험시설과 유스호스텔·해양안전정원(추모공원) 등으로 꾸며졌다는데, 그보다는 노란색 ‘맘’ 조형물이 더 눈길을 끈다. 국화꽃을 손에 들고 가슴이 뚫린 엄마 모습을 형상화했다. 상부좌대까지의 높이가 9m, 무릎부터 발끝까지의 높이는 3.5m로 참사 발생 시각인 ‘9시35분’을 의미한단다.

▼ 버스에서 내리니 ‘팽목항 대합실’이 반긴다. 조도나 관매도, 서거차도를 들어갈 때 이용하던 눈에 익은 시설이다. 그밖에도 관사도·소마도·대마도·모도·각흘도 등 진도군 관내의 모든 섬을 연결하는 여객선들이 이곳 팽목항에서 떠나고 들어온다. 참고로 팽목항은 세월호 침몰사고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 항구다. 사고 당시 구조된 생존자와 부상자를 받았고, 싸늘하게 식은 희생자들도 안아줬다. 세월호가 가져다준 슬픔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오늘도 슬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 대합실 옆의 ‘진도 국제항개발사업 조감도’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2019년까지 배후지를 조성하고, 2030년까지 국제항으로 개발하겠다는 청사진으로, 사업이 종료되면 팽목항 주변에는 산업시설, 복합휴양·펜션단지, 테마파크, 상업시설 등이 들어서게 된단다. 그런데 저게 청사진에서 끝나버릴 것 같다는 예감은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 ‘팽목항(현 진도항)’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가슴 한켠에 상흔처럼 새겨졌을 지명이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세월호 참사’를 품은 항구이기 때문이다. 항구 주변에는 당시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다. 가장 먼저 둘러봐야 할 곳은 ‘방파제’, 세월호와 관련된 각종 조형물들과 기억의 벽, 다녀간 이들이 남긴 추모의 리본,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신발 등 눈이 아닌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풍경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번쯤 둘러보고 누구나 갖고 있을 먹먹한 아픔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차분하게 고백해보면 어떨까.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형상화한 조형물. 그런데 ‘2014.415’라는 숫자에서 ‘5’자가 떨어져나가 버렸다. 세월호의 아픈 기억도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일까? 참! 조형물은 기다림의 의자와 세월호 참사지점이 그려진 지도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것으로 여겨지는 신발도 두엇 놓여있었다.

▼ 방파제에는 ‘기억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세월호 참사 1주년(2015.4.16.)을 맞아 높이 50㎝×길이 200m의 방파제에 세월호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새겨진 4,656장의 타일(도자기)을 붙였다.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는 어린이문학인들’이 전국 26개 지역을 돌며 글과 그림을 받았고 그 타일을 경기도 이천에서 구웠다.

▼ 방파제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두세 명이 전부인데, 그마저도 추모객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추모의 공간이 아니겠는가. 기다림의 의자에 앉아보고, 기억의 타일을 살펴보며, 참사의 현장 위치도도 헤아려본다. 그리곤 입술을 굳게 다물고 먼 바다를 응시한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보내면서.

▼ 200m쯤 되는 방파제의 한쪽 난간은 수천 개의 노란 리본(그 아래가 그림타일인 기억의 벽이다)과 종들이 매달려 있다. 그 리본을 따라가 빨간 등대, 이른바 ‘기다림의 등대’에 이르면 빨강 우체통이 반긴다. 세월호 사망자들에게 보낼 편지를 넣는 ‘하늘나라 우체통’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벤치’도 보인다. 하지만 선뜻 엉덩이를 내려놓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 방파제에 서면 참사의 현장인 ‘맹골수도’가 저만큼이다. 그날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듯 지금 그 바다에 바람이 분다. 그나저나 여덟 번의 아픈 4월이 지났다. 팽목항은 지금 밤낮으로 들리던 통곡소리가 사라졌고, 목탁소리나 찬송가도 없다. 자원봉사단체의 천막도 없어진지 이미 오래다. 그저 하얀 깃발과 노란 리본들만 혼령처럼 바람에 나부낄 따름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듯 휘날린다.

▼ 터미널 신축공사가 한창인 항구에는 ‘산타모니카호’가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도항과 제주항을 하루에 2회씩 오가는 쾌속 카페리라는데, 생김새부터가 커다란 등치에 비해 날렵하게 생겼다. 606명의 여객과 승용차 86대를 싣고도 42노트(시속 78km)의 속도로 달려 90분이면 제주도에 도착한단다. 덕분에 제주도가 당일 여행지가 되어버렸다.

▼ ‘세월호 팽목기억관’은 여객선터미널 공사현장 근처에 있었다. 참사 당시 아들·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곳, 결국은 분향소가 된 컨테이너다. 지금은 분향소와 유품, 관련 기록물 등이 그 참사를 기억하게 한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16일 발생했다. 인천-제주를 운항하던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진도군(조도면) 부근 해상. 이 사고로 승선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미수습자 5명 포함)했다. 탑승객 중 상당수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나이에 따라 생명의 ‘경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10대 후반에 불과한 단원고 학생들이 전체 사망자 중 82%라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부 매체의 ‘전원 구조’란 ‘오보’에 잠시나마 안도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접하고 ‘속았다’는 생각에 분개한 이들도 많았다. 거기다 구조된 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 원인을 떠나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기억관’은 방문자의 서명대가 있는 ‘복도’와 사고 당시 사망한 이들의 대형 사진이 걸린 ‘분향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향소 참배는 생략하고, 방명록을 적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기억관 앞에는 ‘가족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회색 바탕에 세월호 기적을 상징하는 ‘세월호 고래’와 시민들의 소원을 담은 노란 풍등을 그려 넣었다. 고래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배를 수면 위로 들어 올려주기를 바라는 마음 및 아이들이 고래를 타고 바다에서 나오는 기적을 바라는 간절함을 담았다고 한다. 풍등은 그걸 띄워 올린 추모객들의 마음을 담았다. 잊지 말자는 다짐과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 등등...

▼ 기억관 뒤 울타리에 걸린 노란 리본에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게 바닷바람에 리본이 나부낄 때마다 8년 전 그날의 슬픔과 아픔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미수습자를 가족 품으로’, ‘별이 되어 빛나소서’ 등 노란 리본에 새겨진 글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기억의 공간과 함께하기를 15분 여, 마무리되지 못한 아픈 상처를 숙제로 남겨놓은 채 길을 나선다. 이때 진도지맥의 마지막 봉우리랄 수 있는 한복산(漢福山, 231.6m)이 불쑥 솟아오른다.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지만 쉽게 오르내릴 수는 없을 듯...

▼ 걷다보면 꽤 많은 현수막을 만나게 된다. 그중 두엇은 미국 LA에서 온 추모객들이 내건 것이었는데, 4월16일을 잊지 않았고, 기억하고 행동하겠단다. 예! 저희도 마찬가지랍니다.

▼ ‘진도항 배후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널디너른 주차장 끝에는 ‘팽목(彭木)’마을이 있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마을 앞 사거리(약간 엇걸린 오거리이기도 하다)에서 왼편으로 간다. 참! 이때 마을을 관통해버릴 수도 있다. 이럴 경우 200m 정도가 단축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바닷가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팽목마을’이다. 이번에는 작은 포구까지 끼고 있다. 자신의 이름까지 빼앗긴 채, 죽은 듯 숨어있는 불쌍한 항구다. 아니 팽목항이 진도항으로 개명했으니, 이젠 ‘팽목항’으로 불러도 되겠다.

▼ 마을 앞에서 ‘팽목 바람길’ 팻말을 만났다. 팽목항을 기점으로 주변 마을과 바닷가·숲길·갈대밭을 끼고 한 바퀴 도는 13.5㎞짜리 둘레길이다. 팽목항에 들른 이들이 참배만 하고 떠나지 말고 진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고 한다. 걸으며 세월호를 기억하고 그간 참사 후유증으로 고통 받은 진도 주민들도 생각하자는 의미도 담겼다. ‘기억과 성찰의 도보여행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이다.

▼ 오늘 새벽, 집을 나서는 집사람이 바람막이 옷을 덧입는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다. 아니 가을의 전령사인 저 호박은 이미 만추까지 지났나보다. 넝쿨로는 제 한 몸을 못 이겨 받침대로 올라앉았다.

▼ 길을 나선지 23분, 탐방로는 바닷가로 나간다. 산자락과 진도항배후지 사이에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 8분쯤 더 걸으면 ‘팽목방조제’. 임회면 동쪽(팽목리)과 지산면 남쪽(마사리)을 이은 1,755m 길이(높이 4.7m)의 둑이다. 803번 지방도가 지나는 둑길은 임회면의 ‘진구지 수문(이정표 : 종점 12㎞/ 시점 3.9㎞)’에서 시작된다. 이어서 차량통행이 끊기다시피 한 한적한 도로를 따라 꽤 오래 걷게 된다.

▼ 이정표(마사수문 1.8㎞/ 갈대밭길 0.9㎞/ 팽목길 0.9㎞)가 ‘팽목 바람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관광 상품화’했다고나 할까? 휴양이나 관광 목적의 여행과 달리 역사적 사건, 특히 비극적인 역사를 추적하는 여행이 ‘다크 투어리즘’이니 말이다. 비극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려는...

▼ 방조제 너머 물가엔 갈대들이 춤을 추고 오후 햇살을 받은 물결은 은빛으로 일렁인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풍경이다. 참고로 1.8km의 방조제는 396ha나 되는 드넓은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대신 낙지·꼬막·장어 등 이 지역에서 많이 나던 해산물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단다.

▼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둑은 강태공 차지였다. 팽목항 인근 바다는 돔과 볼락, 우럭, 붕장어가 잘 잡힌다고 했다. 하지만 저 낚시꾼의 대답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입질 한 번 없다’였다.

▼ ‘와, 나비 떼 같아요!’ 방조제에서 합류한 집사람의 외침이다. ‘아니 저건 ‘나비 떼’가 아니라 ‘세 떼’라오’ 조도(鳥島) 인근의 섬들이라는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나비를 고집했다. 작은 물결에 사뿐히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이 은빛날개를 가진 나비 떼를 닮았다며... 맞다. 집사람은 아직도 감성을 잃지 않은 꽃띠 소녀였다.

▼ 20분 이상 걸어 도착한 방조제의 끝에는 ‘마사 수문’이 있었다. 이정표(종점 10.2㎞/ 시점 5.7㎞)는 죽도선착장이 있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마사마을이 있는 오른편을 추천한다. 지시를 따를 경우 2km가 넘는 산길을 오르내려야하기 때문이다. 5분이면 족한 거리를 50분이나, 그것도 죽도록 고행해가면서.

▼ 하지만 그런 정보를 몰랐던 우리 부부는 ‘죽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어서 해안도로를 5분쯤 더 걸으니 부교(浮橋)를 이용하는 작은 ‘선착장’이 나온다.

▼ ‘팽목 바람길’에서 내건 이정표(다순기미 소망탑 0.8㎞/ 마사수문 0.5㎞)는 이곳을 ‘마사 선착장’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구도(馬口島)’ 밖에 보이지 않는데 ‘죽도선착장’이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 선착장 한켠에는 멸치어장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솥이 걸려있었다. 서망항(또는 팽목항) 인근 바다는 ‘꽃게’ 주산지다. 통발로 잡은 꽃게를 ‘물칸통’에 담아 살려서 가져온다. 서망항이 꽃게잡이로 유명한 이유다. 그런데도 멸치를 삶는 시설이라니... 귀경해 알아보니 이곳에서도 멸치잡이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니 인근 조도에는 멸치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민들도 있단다.

▼ 나무계단을 오르자 숲길이 펼쳐진다. 가끔은 밧줄에 의지해야 할 만큼 비탈진 곳도 나오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경사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왼쪽 바다에선 파도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이 길은 마사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옛길인 바닷가 숲길이다. 잡풀과 관목이 무성했던 버려진 길을 동화작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정돈해 도보길을 냈단다.

▼ 그렇게 17분쯤 진행하자 시야가 트이면서 선착장(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죽도선착장’으로 적고 있었다)이 있는 ‘다신기미’가 나타난다. 다신은 따뜻하다는 뜻이고, 기미는 움푹 들어간 지형을 뜻하는 전라도말이란다.

▼ 인근 해역은 마사마을 어민들의 어장이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멸치와 ‘디포리(‘보리멸’의 전라도 사투리)를 잡았었단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멸치를 삶는 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옛 추억으로만 남은 듯, 정체 모를 시멘트 구조물만 여럿 보일 따름이다.

▼ 다신기미에는 ‘소망탑’이 세워져 있었다. ‘세월호 리본’을 형상화한 걸로 보아,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이미지 말고도 아직도 물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들을 담았지 않나 싶다.

▼ 다시 길을 나선다. 웃자란 풀숲 때문에 돌탑에 돌을 올려놓는 장면은 카메라에 잡지 못했다. 그 아쉬움은 ‘영원히 잊지 않을게’라는 다짐으로 달래본다.

▼ 초반과 달리 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가파른 구간이 많아진다. 그러다가 9분쯤 후 정체불명의 플라스틱 통이 매달린 삼거리를 만났다. 희미하나마 바닷가를 향해 길이 나있는 것이다.

▼ 길이 있으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덕분에 나는 최고의 전망대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야가 툭 트이면서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조도지구의 수많은 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조도면은 맹골군도의 저런 섬들 외에도 거차군도와 독거군도 등 수많은 섬들이 있다. 오죽했으면 ‘세 떼’가 섬의 이름으로까지 굳어졌겠는가. 참! 사람들이 머물다 간 흔적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일몰을 기다렸음직한...

▼ 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떠 있었다. 죽도·곽도·맹골도 등 유인도와 병풍도 등 여러 무인도 및 암초들로 이루어진 맹골군도(孟骨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저 흔적들은 섬들 사이로 지는 일몰을 찍기 위해 머물던 사진작가들이 남긴 게 분명하다.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해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기상청이 이 일대의 낙조를 한반도 최남단에서 만나는 최고의 낙조로 꼽았겠는가.

▼ 바닷가 해안절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 안내리본과 부표를 이정표 삼아 ‘팽목 바람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이 길을 기억과 상생을 위해 걷는다고 했다. 그는 또 아픔을 딛고 함께 가는 그 길, 바다도 바닷바람도 하늘도 나무도 풀도 모두 산 자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 17분쯤 더 걸으니 ‘잔등너머(이정표 : 종점 8㎞/ 시점 7.9㎞)’다. 예전에 말이 떨어졌다는 바닷가 낭떠러지가 요 너머에 있다고 한다. 아까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해안절벽을 말하는가 보다.

▼ 잔등너머를 지나자 숲길이 끝나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마사마을이 나타난다. 마을로 들어가는 구릉지는 온통 대파 밭이었다. 맞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이곳 진도는 우리나라 대파(겨울)의 40%를 생산한다. 그런데 문제는 가뭄에 내몰린 대파가 말라비틀어져 간다는 것이다. 김장철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걱정되는 이유다.

▼ 탐방로는 마사마을을 관통한다. 마사(馬紗)라는 이름대로 제주에서 서울로 보내는 말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말들이 머물던 ‘마장’과 인근 ‘모래해변’을 합쳐 ‘마사’가 됐단다.

▼ 마을을 빠져나오니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아까 지나왔던 ‘마사 수문’이 코앞에 놓여있지 않겠는가. 맞다. 도로(수마로 : 마사수문↔수양리 버스정류장)를 따르면 금방인데도, 탐방로는 산 하나를 에둘러 돌도록 만들었다. 그만큼 경관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도로(수마로)와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수마로 0.6㎞/ 잔등너머 0.7㎞)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최고의 쉼터이겠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서 오늘만큼은 사절이란다.

▼ 마사마을을 벗어나 10분쯤 걸었을까, 종점까지 6.7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이제 그만 농로로 들어서란다. ‘수마로’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정표(갈대밭길 0.8㎞/ 마사마을 0.6㎞)는 ‘팽목바람길’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리본을 달았다. 노란색은 세월호의 상징색이면서 대지와 흙의 색이기도 하다. 파란색은 팽목바람길에서 만나는 하늘과 바다를 의미한단다.

▼ 탐방로는 이제 너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간척사업’에 의해 생긴 들녘이다. 간척(干拓)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물론 대단위의 역사가 있긴 했다. 다만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됐기 때문에 지방 토호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에는 조생종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른 것도 아니다. 며칠 전 고흥(흥양농협)에서 배달되어온 쌀이 22년산 햅쌀이었으니 말이다.

▼ 600m 남짓 되는 농로의 끝에는 ‘지산보 양수장(이정표 : 종점 6.1㎞/ 시점 9.8㎞)’이 있었다. 팽목방조제가 만들어낸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이지 싶다. 하지만 안내판은 용도를 ‘배수장’으로 적고 있었다. 농경지 침수를 막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압이 380볼트나 되니 조심하란다.

▼ 양수장이 있으니 근처에 보가 있을 것은 당연, 웬만한 강보다도 더 넓은 수로가 있었다. 지금껏 함께 해온 ‘팽목 바람길’은 이곳에서 수로를 건넌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강둑을 따라 수로를 거슬러 올라간다.

▼ 이후부터는 수로를 오른편에 끼고 걷게 된다. 이때 하천변에 들어선 ‘갈대밭’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금강변의 신성리나 순천만의 갈대밭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할 정도로 드넓다. 하긴 ‘팽목 바람길’에서도 이 부근의 갈대밭을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있지 않았던가.

▼ 진행방향에서는 동석산(銅錫山)이 우뚝 솟아오른다. 높이라고 해봐야 200m를 겨우 넘기는 자그마한 산이지만, 수려함만 놓고 보면 세상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산이다. 수년 전에 올라본 경험에 의하면, 힘줄처럼 툭툭 불거진 암봉의 짜릿함과 함께 능선에서 펼쳐지는 장쾌한 조망이 압권이었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냅다 논두렁으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지름길을 찾아냈다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한다. 하지만 길은 끊겨 있었고, 곧바로 갈 수도 있던 길을 괜히 에둘러가는 꼴이 돼버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집사람이 즐거워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30분쯤 더 걸어 ‘심동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건넜다. 이곳에도 양수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걷는 내내 바라보던 종석산도 한층 더 가까워졌다. 종 여러 개가 붙어 늘어선 모양새다.

▼ ‘하심동’마을에 가까워지자 ‘동석산’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저 산은 험준한 산세로 인해 오랫동안 오를 수 없는 산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바위에 난간을 대거나 밧줄을 매고, 문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박아 접근이 가능해졌다. 아찔함을 맛보며 산을 오르겠다면 ‘종성교회(사진의 왼쪽)’로 가면 된다. 밧줄에 매달려 수직에 가까운 벼랑을 오르며 칼날 같은 능선을 곡예를 하듯 건너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 하심동마을을 스치듯 지난 둘레길은 이제 봉암저수지와 오봉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봉암저수지의 거대한 둑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이정표(종점 3,2㎞/ 시점 12.7㎞)가 세워진 삼거리에서 농로(왼쪽)로 들어섰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봉암저수지’로 올라선다. 붕어 낚시로 소문이 나서, 전국의 조사(釣師)들이 손맛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는 곳이다. 참고로 진도에서 가장 큰 봉암저수지는 1945년에 처음 축조됐다. 그러다가 1966년 팽목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늘어난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1979년 현재의 규모로 확장시켰다.

▼ 이후부터는 803번 지방도를 따른다. 봉암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아가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이렇듯 서해랑길은 바다와 산을 넘나들고 마을과 들판을 오간다. 그래서 사색의 길이 되고, 성찰과 치유의 길이 된다.

▼ 탐방로는 ‘하봉암(下蜂岩)’ 마을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가치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봉암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윗봉암’마을과 마주한다. 참! 마을회관은 둘레길 나그네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 하봉암은 진도에서 가장 큰 봉암저수지를 끼고 있다. 하지만 동석산과 큰산, 부흥산 등 200m 내외의 산들로 둘러싸여있어 논보다는 밭농사가 주를 이룬다. 그 밭에서 따온 고추를 다듬던 부부가 나에게 포즈를 취해주신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가가는 내가 기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 저수지 상류는 꽤 많은 왜가리들이 노닐고 있었다. 수초로 뒤덮인 물속에 물고기가 많은가 보다.

▼ 도로로 올라선지 20분, 느닷없이 나타난 이정표(종점 1.5㎞/ 시점 14.4㎞)가 다시 농로로 들어가란다. 그리고는 들녘 끝까지 간 다음 산자락을 따라 가치마을로 오란다.

▼ 하지만 우리 일행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가치마을이 보이는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이때 들녘 너머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림의 점정(點睛)은 검망산과 지력산의 거대한 암릉이 찍었다. 진도에서 그리는 풍경화는 저렇듯 암릉을 끼었을 때가 제격이다.

▼ 날머리는 가치마을 버스정류장(진도군 지산면 가치리)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걷자 ‘가치(加峙)’마을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보건소와 초등학교(폐교)가 있는가 하면, ‘서부마트’라는 점포까지 들어선 걸로 보아 지산면의 중심마을 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4.18km. 2km정도의 산길을 걸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도반들 대부분이 산길을 생략해버린 탓에, 엉겁결에 우리가 꼴찌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버스정류장 맞은편의 안내판 앞에 선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하지만 난 그 속에 숨겨진 근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서 걷다가 조금 나아졌던 무릎에 다시 이상이 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곳에 살아도 좋은 것을 먹어도 맘이 불편하면 행복이 아니라는, 이 세상의 무엇을 다 준대도 당신만은 못하다>던 테너 박종호의 ‘당신만은 못해요’를 떠올리며 10코스의 트레킹을 마무리 해본다.

 

서해랑길 9코스(남도국악원-서망항)

 

여행일 : ‘22. 8. 13(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일원

여행코스 : 귀성삼거리→상만마을→굴포마을(고산사당)→남선마을→동령개공원→남동마을(남도진성)→서망항(거리 및 시간 : 12km, 실제는 13.88km를 3시간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9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들길·임도길·해안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걸으며 다양한 풍경들을 만난다. 민초 보호를 위해 쌓은 남도진성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한 단면인 고산둑은 꼼꼼히 살펴봐야할 역사유적. 거기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천연기념물인 ‘상만리 구상나무’도 살펴볼 수 있다.

 

▼ 들머리는 귀성삼거리(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진도읍 방면)를 타고 내려오다 송월삼거리(임회면 봉상리)에서 좌회전하여 진도대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귀성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9코스)는 귀성마을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간 지점에 세워져 있다.

▼ ‘귀성삼거리(남도국악원)’와 ‘서망항’을 잇는 12km짜리 구간. 거리가 짧아 지난 번 8코스 때 자투리로 남겨두었던 7km를 보태기로 했으나, 귀성시간에 쫓겨 ‘여귀산’ 입구 돌탑공원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피서철 traffic jam 탓에 1시20분에야 들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이마저도 포기하고 정규 시작지점인 귀성삼거리에서 시작했다.

▼ ‘진도 다시래기’ 등 진도사람들의 한 맺힌 가락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는 남도국악원은 스치듯 지나간다. 국립국악원(서울)과 민속국악원(남원)에 이은 세 번째 국립국악원이라지만 일부러 들르지는 않았다. 음악에 문외한이 ‘진악당(국악 전용극장)’과 ‘달빛마당(야외공연장)’ 등을 처삼촌 벌초하듯이 둘러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시선을 들자 ‘아리랑 담배’ 문양으로 치장한 하얀색 건물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아리랑마을관광지의 랜드마크인 ‘아리랑체험관’일 것이다. 아리랑의 전체 맥락을 엿볼 수 있는 곳인데, 술꾼인 나는 부속건물인 ‘홍주촌’에 더 관심이 갔다. 홍주의 제조기법을 눈여겨 봐두었다가 손수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녀오지는 않았다. 숙박시설을 겸하는 홍주촌이 문을닫았다는 ‘즐산’님의 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영향이겠지만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오른편에서는 ‘귀성(貴星)마을’의 바닷가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남종화의 산실 ‘진도’를 대변하는 풍경이랄까? 그림 속 포구에는 꽤 많은 어선이 출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황금리’라는 본명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마을 앞 바다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고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황금리’로 불려왔었다니 말이다.

▼ 서쪽으로 난 경사로를 100m쯤 오르면 ‘귀성삼거리’. 서해랑길에서 9구간의 공식 들머리로 내세우는 지점이다. 귀성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아리랑마을’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별(吉星)처럼 귀(貴)한 땅이라는 지명에 발맞추기라도 하듯이 ‘아리랑’ 관광단지를 들어앉혔다는 얘기일 것이다.

▼ ‘상만마을’까지는 18번 국도를 따른다. 이 구간은 자동차와 사람으로도 모자라 자전거까지 공유하는 구간이다. 인류 번영의 최선 과제는 ‘공존’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짧은 구간에서나마 서로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온 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저 라이더들처럼...

▼ 잠시 후 ‘나절로 미술관’을 만났다. 한국화가 이상은씨가 폐교된 (구)상만초교를 개조해서 만든 미술관이다. 나절로는 미술관을 지은 이상은 화가의 호로 ‘스스로 흥에 겨워 즐거움’이란 뜻을 담고 있단다. 호처럼 자유분방한 내면적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곳이라나?

▼ 소정의 입장료(2천원)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상은 작가 본인은 물론이고, 한국화·서양화·조각 등 국내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미술품 구매도 가능하단다. 하지만 문외한이라서 이곳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 길을 나선지 12분쯤 되었을까 상만마을에 이르니 주변이 온통 대파 세상이다. 맞다. 이곳 진도는 우리나라 대파(겨울)의 40%를 생산한다고 했다. 그러니 겨울철에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들판을 초록 융단처럼 수놓을 것이다. 달착지근한 맛의 겉절이로 유명한 ‘봄동’과 함께...

▼ 빗돌에 적힌 이름이 눈에 익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70년대 ‘율산 신화’의 주인공 신선호(현 센트럴시티 회장)의 부친이 바로 ‘신형식(申衡植)’이기 때문이다. 율산(栗山)이란 회사 이름도 부친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무튼 자식 농사(나머지 자녀들도 대학교수·의사·은행장 등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이력들을 지녔다) 잘했기로 소문난 인물인데 그가 이 마을에 뭔가를 베풀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초입(이정표 : 종점 11.3㎞/ 시점 0.7㎞)에서 도로를 벗어나 들녘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저 마을에 천연기념물로까지 지정된 비자나무가 있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마을로 들어서니 거대한 몸집의 팽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마을의 역사가 144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니 저 나무의 나이 역시 만만찮을 것이다.

▼ 담벼락을 가득 채운 벽화가 나그네의 관심을 끌게 만든다. 노인들은 소나무 아래서 신선놀음에 푹 빠져있고, 마을은 씨름 삼매경인 젊은이들 차지다. 그런데 오층석탑은 보물찾기용에 불과한 걸까? 그림들 사이에 스리슬쩍 끼워 넣었다.

▼ 경사진 마을 길 끝자락에서 나이가 600살이나 된다는 비자나무를 만났다. 키 12m에 가슴높이의 둘레가 6.35m라니 거대하지는 않다. 하지만 유난히 옹골찬 수형을 가졌다. 키에 비해 굵직한 줄기는 물론이고 나뭇가지도 매우 촘촘하게 돋았다. 천연기념물(제11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비자나무는 총 3점(강진 삼인리·사천 성내리·진도 상만리)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비자나무숲 5곳은 통째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았단다.

▼ 비자나무는 스님들이 공들여 키우던 나무다. 영양이 풍부해 먹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 좋은 간식거리였고, 거기다 구충제 성분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비자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둬 절집 식구들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나무는 이제 마을의 정자나무로 살아간다. 십여 개의 벤치를 놓아 나그네의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 비자나무 뒤편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청재공파의 재실이라는 ‘성모사(誠募祠)’가 있었다. 하지만 ‘두문동 72현’ 박침의 손자 박심문을 중시조로 한 청재공파는 나주에 종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진도로 입도했다는 박용(박심문의 손자)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후손의 위패를 모시고 있을 것이다. 그게 궁금했으나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誠敬門)이 닫혀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몇 걸음 더 올라, ‘또 다시 그리운 그곳 돌아보니 구암사’라는 팻말에 홀려 ‘해탈문’을 넘어서니 ‘구암사(鳩巖寺)’가 얼굴을 내민다. 1930년대 옛 ‘상만사(上萬寺)’의 터에 새롭게 지었다는 사찰이다. 기록이 없어 이 역시 정확한지는 모른다. 하긴 태고종·법륜종 등 출처마다 소속 종단이 다를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헷갈리면 물어보는 게 상책, 절간 앞을 서성이는 승려차림의 남성에게 물어보니 앞뒤 싹 자르고 ‘조계종’이란다. 요즘 중들은 요렇게 싸가지가 없나? 손아래 사람에게 반말 듣는 게 싫어 더 이상의 질문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귀경해 알아보니 예산(충남)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었다.

▼ 절간은 단출했다. 극락보전을 가운데 두고, 대 아래 좌우에 청향당(淸香堂)과 요사(寮舍)를 둔 모양새다. 전남도 유형문화재(10호)인 ‘오층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단(2층)과 몸돌(5층), 지붕돌로 이루어진 이 돌탑은 고려 때 상만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단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 떨어진 ‘탑리’라는 마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4~15세기 무렵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도 적고 있었다.

▼ 절에서 빠져나오는데 일주문 대신 돌부처가 잘 가란다. 그 싸가지 없던 중에 대한 미안함을 담았다는 듯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다. 그나저나 장승에 가까운 해학을 담은 부처가 무척 귀엽다. 뭉툭한 코에 눈은 왕방울처럼 툭 튀어나왔고, 작다란 입은 미소까지 띤다. 사람들은 저런 석불을 ‘민불(民佛)’로 분류한다. 권위적인 부처님이 아니라 평범한 중생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면서...

▼ 마을을 둘러봤다면 이제 서해랑길로 되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렇다고 아까 헤어졌던 지점으로 되돌아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버스정류장(오른쪽)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100m쯤 걸으면 탐방로를 만나게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인데, ‘T’자형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 수로의 둑길을 따라 200m쯤 걸었을까 18번 국도로 올라서고, 이정표(종점← 10.6㎞/ 시점↓ 1.4㎞)의 지시대로 ‘상만3교’를 건넌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번에는 임도로 들어서란다.

▼ ‘S’자형 커브를 그려대는 임도는 가파르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오르막을 유지한다. 그리고 구릉지의 고개를 넘어 굴포해안으로 향한다.

▼ 임도로 길지 않았다. 8분 만에 또 다시 18번 국도로 내려선다. 이어서 이정표(종점← 10km/ 시점↓ 2㎞)의 지시대로 고산사당(고산둑)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 고개를 넘자 호리병을 연상시키는 ‘굴포만(屈浦灣)’이 얼굴을 내민다. 움푹 파고들어온 만(灣)의 길이가 긴데다 입구가 좁아 내부는 천혜의 항구가 된다. 그래선지 중만마을·신동마을·굴포마을 등 많은 어민들이 저 바다를 업으로 하며 살아간단다.

▼ 산경표의 기본원리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뜻이다. 18번 국도는 이를 알기라도 한 듯 바닷가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 코너에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임회면 헌복동과 서망항을 잇는 ‘진도 미르길(7개 코스 19.7km)’이다.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하는 오솔길이 마치 용(龍)이 승천을 준비하려고 움직이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서해랑길은 몇 곳에서 그 ‘미르(龍의 古語)길’과 겹친단다.

▼ ‘워따메~ 불 나부렀는갑다’. 해무에 잠긴 ‘굴포항’이 마치 연기에 휩싸인 듯한데, 그게 또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어준다. 하지만 어민들에게는 삶의 현장일 뿐이다. 짙은 안개에도 풍요를 찾아 쉼 없이 들락거린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해안을 따른다. 중만마을(상만리)에서 신동마을(백동리)을 거쳐 굴포리까지, 호리병처럼 움푹 파인 ‘굴포만’의 절반(1.4km)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바닷가에 매어놓은 저 줄은 빨래건조용일까 아니면 생선건조용일까? 궁금증을 못 참고 주민에게 물어보니 ‘無主先占’이란다. 전형적인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신동(하)마을에서 ‘고산 윤선도’를 만났다. 고향도,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등지고 칩거하던 보길도도 아닌데 웬 고산이란 말인가. 알고 보니 그가 이곳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모양이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방조제를 쌓아 농지를 조성한 다음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줘 농사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은공을 기리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감사제와 당제를 지내왔단다.

▼ 사당은 새로 지은 듯한 모양새다. 맞다. ‘배중손 사당’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고산사당은 그동안 불편한 동거를 해왔었다. 지난 1999년 지역 유지들이 삼별초 지휘관인 배중손 장군을 기린다며 당집이 있던 이곳에 배중손 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에 마을주민과 윤씨 종친회 등이 역사 왜곡이라며 반발, 소송까지 진행해 법원 조정을 통해 2003년 배중손 사당 이전에 합의했다.

▼ 경내에는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그의 대표작을 새긴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孤山 尹善道(1587-1671)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의 한사람이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삶은 짧은 관직생활과 긴 유배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 우리나라 ‘민간 간척사업 1호’라는 ‘고산둑’은 사당 앞에 있었다. 1650년 쌓았다는 방조제는 높이 3m에 길이가 380m나 된단다. 고산의 숭고한 마음을 하늘도 알았음인지 이곳을 훑으며 지나간 수많은 태풍에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 둑에서 내려오니 멋진 꽃길로 연결된다. 둑 아래는 무궁화를 바탕으로 사이사이 백일홍과 금계국이, 반대편에서는 코스모스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이 길은 ‘굴포삼거리’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고산들녘’의 젖줄인 하천(이름은 모르겠다)을 거슬러 올라간다.

▼ 이때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산 선생이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는 농지로 그 넓이가 무려 100ha에 이른단다. 고산은 저 농지를 굴포·남선·백동·신동 등 4개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져 농사를 짓게 했단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나눔 정신’이 아니겠는가.

▼ 둑길을 8분쯤 걷다가 이정표(종점← 9.4㎞/ 시점↓ 4.6㎞)가 가리키는 진도휴양림을 향해 방향을 꺾는다. 이때 앞서가던 집사람이 환호성을 질러대는 게 아닌가. 길가가 온통 ‘돌나물(또는 돗나물, 돈나물)’ 천지였던 것이다. 냉이·달래와 함께 봄나물 3총사로 꼽히는데, 특히 돌나물 나박김치는 봄의 미각을 돋우는 ‘엄지 척’의 별미다. 그동안 집사람이 담아주는 나박김치의 맛에 길들어온 나도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 18번 국도로 올라선 탐방로는 잠시 후, 이번에는 ‘남선마을’로 들어선다. ‘임회면 남단의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의 남선(南仙)마을은 굴포리(屈浦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이자, 고산선생이 토지를 나눠졌다는 4개 마을 중 하나이기도 하다.

▼ 하지만 마을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마을을 스치듯 지나 구릉지 위로 난 농로(이정표 : 종점 9㎞/ 시점 5㎞)로 올라선다. 이때 널디너른 고산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천천히 걸으며 고산의 나눔 정신을 음미하며 보자.

▼ 입추가 지난지도 6일, 물러갈 줄 모르는 삼복더위지만 다가오는 철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벼를 비롯한 곡식이 여무는 시기’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오곡 중의 하나인 기장이 이미 고개를 숙였다. 만주에서는 저걸로 황주(黃酒)를 빚는다던데...

 

▼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질매봉(259m)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난 번 8코스 때 거론했던 진도지맥의 마지막 구간(총 길이 47km를 3개 구간으로 나누어 답사하는 게 보통이다)에서 솟아오른 봉우리 중 하나로 멋진 산세에도 불구하고 지맥 종주꾼들이 아니면 별로 찾지 않는 편이다.

▼ 구릉지로 올라선지 10분. 헌칠한 장부형의 질매봉을 소재삼아 수묵화를 그리다보면 어느덧 ‘동령개 삼거리’에 올라선다. 운림산방에서 배운 남종화 기법으로 고산들녘의 포근함도 덧칠해봤음은 물론이다. 참! 삼거리 도로표지판에 적힌 ‘국립진도자연휴양림’을 깜빡 빼먹을 뻔했다. 4년 전에 들러본 경험으로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잔잔한 섬 풍경, 울창한 수목이 함께 어우러진 멋진 휴양지였다.

▼ 동령개 삼거리부터는 꽤 오래 국도를 따른다.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올라가는 모양새이지만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보도를 따로 내놓지 않았으니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어야 할 일이다.

▼ 하지만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독특한 소리로 마음을 다독여준다는 ‘동령개마을’ 해안과 선착장, 거기다 더해 ‘불무도’로 여겨지는 예쁜 섬까지 눈을 담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 7분쯤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 근처에 ‘동령개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경은 물론이고 정자까지 지어놓아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 일행도 역시 10여 분을 머물며 준비해간 간식 통을 비우고 갔다.

▼ 공원에는 시와 그림을 담은 빗돌들을 꽤 많이 세웠다. 이곳 진도는 예술의 고장, 특히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산실이다. 그러니 선비들이 좋아하던 사군자가 빠질 리가 없겠지?

▼ 빗돌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시인들의 시가 적혀있었다. 그중에서도 이향아 시인의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며’가 눈길을 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지금,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고나 할까? 여름 산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 물릴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에... 잠시 후 용혜원 시인의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공원의 시비는 시보다는 글씨를 쓴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 앗! 누드화까지. 서양화의 전유물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동양화로도 그려지는 모양이다. 그것도 그럴 듯하게.

▼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는 무궁화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진도군은 무궁화 선양운동을 꾸준히 전개해왔고, 그 결과 220km의 무궁화 꽃길과 동산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이 무궁화동산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고갯마루(이정표 : 종점← 5.6㎞/ 시점↓ 6.4㎞)에서 임도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이 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천둥산(198.9m)의 허리께를 헤집은 다음 남동마을 해안으로 연결된다.

▼ 임도는 관리청인 산림청의 품격에 걸맞게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숲도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처럼 빽빽했다. 그런 길을 10분 남짓 걸었을까 모퉁이를 만난 임도가 크게 방향을 튼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모서리 바위벼랑이 제법 그럴듯하다.

▼ 그게 지자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모퉁이에 돌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런데 2%가 부족하다는 이 느낌은 무슨 이유일까? 지리산둘레길을 걷다가 만난 돌 의자가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한두 개도 아닌 수십 개의 돌 의자 마다 명심보감용 글귀를 새김으로써 읽는 재미까지 더하던 지혜, 그게 바로 최근의 화두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 짜증스러울 정도로 무더운 여름날, 집사람을 미소까지 띄게 만든 건 대체 뭘까? 아니 트레킹 중에 채취한 ‘왕고들빼기’를 맛있게 먹어주는 서방님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서방님 바라기인 사랑꾼이니까. 내 초점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 임도는 35분이나 걸려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서 삼거리, 이정표(종점→ 3.8㎞/ 시점↓ 8.2㎞)는 남도진성(오른편) 방향으로 가란다. 참고로 왼편으로 가면 남동리 포구로 연결된다. 마을과 5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걸로 보아, 마을 앞은 배를 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 남도진성과의 첫 만남을 ‘선소(船所)’로 시작된다. 선소란 배의 출입과 건조 및 수리를 하던 곳이다. 수군의 필수시설이라는 얘기일지니, 남도포진의 축조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성곽에서 500m나 떨어졌다는 건 약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곽 앞까지 배가 들어갈 수 없어 별 수 없었겠지만... 참고로 남도진성은 15세기 초 전선이 배치되고 4개의 수군진이 설치되는 등 해안요새로 활용되었단다.

▼ 지난 8코스 때 만났던 죽림해안의 방풍림에는 못 미치겠지만 남동마을에서도 곰솔 숲을 만났다. 작지만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라면 그 용도나 규모가 만만찮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철갑옷을 입은 장수들처럼 일렬로 쭉 늘어서서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모래를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소금 물방울을 맞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으며...

▼ 남동리 앞바다는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이다. 그 안에 발달된 광활한 갯벌은 철을 가리지 않고 꿈틀대는 생명을 품는다. 그리고 척박한 인간의 삶에 풍요를 내어준다. 그뿐 아니다. 우리처럼 서해의 물길을 따라 걸으며 삶의 길을 찾아보려는 나그네들에게는 정신적인 풍요를 선사한다.

▼ 사대(射臺, 궁술 훈련장)를 지나자 쌍운교 너머로 ‘남도진성(南桃鎭城, 사적 127호)’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제주도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싸웠다는 곳이다. 아니 한참 이전인 백제(당시 진도에는 도산현과 매구리현이 있었다) 때 쌓았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13세기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로 인해 이 일대가 수시로 약탈당했고, 이에 세종 20년(1438년) 이곳에 해안방어 부대격인 수군만호부(萬戶府)를 창설한다. 그래도 피해가 이어지자 숙종 9년(1683년)에는 만호보다 상급부대격인 남도진(南桃鎭)을 설치한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본거지가 된다. 성곽은 조선 초기 축성당시 읍성 형태를 띤다.

▼ 3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남문(南門)이지만, 삼별초 당대의 기록이 모두 사라진 탓인지 성문은 편액 하나도 달지 못했다. 그래도 성문 앞에는 그럴 듯한 옹성(甕城)까지 두었다. 하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다.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야할 방패막(女牆)이 없어 옹성으로 나갔다간 적의 표적이 되기에 딱 좋겠다.

▼ 서문(西門)은 복원되지 못해 아예 이가 빠진 모양새다. 복원은커녕 터로만 남아있는 동문은 이보다도 못했다. 이렇듯 남도진성은 넓고 거칠었다. 부분적으로 공사하는 곳도 있지만, 문화재라는 게 늘상 수리하고 고치고 복원하는 게 일 아니던가.

▼ 안쪽에는 만호가 근무하던 관아와 내아, 객사가 복원되어 있었다. 지난 2010-2011년 동신대학교 박물관 주도로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시켰다고 한다. 발굴결과라고 해봐야 우물과 석축, 기와나 옹기·백자 조각, 상평통보가 전부였다지만... 망국과 함께 남도만호 역시 스러져갔고, 그들이 사용하던 변변치 못한 생활도구가 유구의 전부였던 셈이다.

▼ 600여m 길이의 성벽은 높이가 3m-4m로 일정하지가 않다. 높낮이가 불규칙적인 지형에 맞춰 쌓았기 때문이다. 특히 안쪽이 낮고 바깥쪽이 높은 점은 다른 성과 다른 또 다른 특징이다. 성벽에는 (동·서·남) 3개의 문과 4개의 치성(雉城), 그리고 4개의 수문(水門)을 두었다. 성 밖 동·남쪽으로는 해자도 길게 냈다.

▼ 남문을 빠져나오니 ‘단운교(單雲橋)’가 눈에 띈다. 해자(垓字) 역할을 하던 개울(세운천)에 놓인 2개의 홍교(虹橋,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213호) 중 하나이다. 무지개가 하나인 것이 단운교이고, 쌍으로 핀 것이 ‘쌍운교(사진 생략)’이다. 두 다리는 주변의 돌을 다듬지 않은 채로 사용한 게 특징이다.

▼ 성곽을 모두 둘러봤다면 이제 날머리인 서망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 길을 나서며 저 성에 살았을 민초들의 삶과 애환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삼별초·왜구·왜란 등을 생각하며, 전쟁도 침략도 없는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게 해준 조물주께 감사드려본다.

▼ 삼별초에 역사적 의의가 부여된 후부터 철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이 모여드는데, 어찌 특산품판매장 하나 없겠는가. 뭐라도 하나 살까 기웃거리는데 집사람이 옷소매를 잡아챈다. 4년 전 형제들과 함께 진도를 찾았을 때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특산품이라는 (건조)톳을 사서 형제들에게 나눠줬는데, 집에 와서 먹어보니 톳이 아니라 미역 자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 집 하나였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 성곽 밖에는 ‘전원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58개로 구획된 부지에 들어선 가옥은 25채 뿐, 목재를 쌓아둔 곳도 있는 걸로 보아 공사가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과 팽목항·남도국악원·미르길(산책로) 등의 접근성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니 한번쯤 묵어볼 만도 하겠다.

▼ 함께 걷던 ‘몽중루’님이 혹시 울면서 넘어왔냐며 너스레를 떠신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내 표정을 보더니, 우리가 방금 ‘천둥산 박달재’를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갯벌 너머 오른편 산봉우리가 바로 천둥산(198.9m)이란다. 맥없이 점잖은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에게도 유머스러운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 마을을 벗어나니 이번에는 ‘전남대학교 자연학습장’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하나같이 행락 차림이 아니겠는가. ‘학습장’이라고 해서 학습시설인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교직원들의 휴양시설이지 싶다.

▼ 남도진성에서 서망항까지는 2.8km나 된다. 줄곧 차도나 걸어야할 뿐 눈요깃거리라고 전무한 편이다. 그나마 햇볕까지 가려주지 못하니 여름철 코스로는 최악인 구간이다. 다들 축 늘어져서 걷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이지만 시야가 열리면서 남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점이다. 사자도와 불무도로 여겨지는 섬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곳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라는 걸 일깨워 준다.

▼ 남도진성을 나선지 30분, 서망항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고, 몇 걸음 더 걸어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0.5㎞/ 시점↓ 11.5㎞)에서 ‘서망항’으로 내려선다.

▼ 날머리는 서망항(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서망항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탐방로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마을표지석과 마을회관 앞을 지나면 곧이어 해안가에 이른다. 이어서 서망항에서 가장 큰 건물(진도항로표지사무소)로 가면 된다. 항로표지사무소 건물 근처가 날머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가어항인 서망항(西望港)은 가을 꽃게잡이가 풍어를 이루는 전국 꽃게 주산지다. 인근 조도 해역에 매일 40여 척이 출어해 1척에 200kg가량을 잡아 하루 위판량이 3t~5t에 달한단다. 또한 싱싱한 횟감과 수산물을 살 수 있는 수산물 시장과 맛집들도 있다.

▼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10코스)는 해경파출소 뒤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제시된 거리보다 1.88km가 더 많은 13.88km를 걸었다. ‘상만리 비자나무’를 다녀온 때문일 것이다.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 무더위였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지난 8코스의 생략부분은 ‘여귀산 돌탑길’을 살짝 엿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름 그대로 여귀산(女貴山) 아래에 돌탑들을 세워 조성한 길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귀산 남신과 여신의 전설을 돌탑의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옛날 여귀산을 중심으로 죽림쪽에는 남신, 탑립쪽에는 여신이 사이좋게 지냈는데,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남신이 여신을 지배하고자 일 년에 한 번씩 힘과 지혜를 겨루기로 했고, 지는 신이 이기는 신의 뜻에 따르기로 했는데, 여신이 계속 이기자 남신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시켜 여신의 탑을 파괴했고, 탑을 잃은 여신이 힘과 지혜를 쓰지 못해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남신과 여신을 화해했고, 마을 사람들은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돌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돌탑 주변엔 시비도 세웠다. 이 지역 문인들이 쓴 창작시라고 한다. 진도의 삼락(三樂) 중 하나인 서화(書畫)가 밖으로 튀어나왔다고나 할까? 남도 예술혼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 남종문인화의 산실인 운림산방의 맥이라고 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잘 그린 수묵화 몇 점도 바위 속으로 파고들었다.

▼ 고갯마루는 아예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詩야 그림아 바람과 놀자’.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바로 글씨와 그림, 노래가 그것이다. 그러니 이곳 여귀산 돌탑길에선 얕은 예술 지식을 함부로 꺼내놓지 말자.

서해랑길 8코스(운림산방-남도국악원)

 

여행일 : ‘22. 7. 30(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의신면과 임회면 일원

여행코스 : 운림산방→운림예술촌→옥대마을→의신면소재지→만길마을→원두마을→송정마을→죽림마을→탑립마을→귀성삼거리(거리 및 시간 : 24km, 실제는 돈지마을에서 죽림마을까지 10.58km를 2시간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8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김통정 장군의 퇴각로와 여러 곳에서 겹치는 아픈 역사의 길이다. 또한 돈지에서는 국견인 진돗개의 진수도 엿볼 수 있다.

 

▼ 들머리는 운림산방 주차장(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를 타고 진도읍으로 들어와 남동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왕온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운림산방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운림산방·첨찰산·쌍계사·상록수림 등이 있는 사천리 일대는 ‘사천관광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렇다고 관광진흥법에 근거한 관광지는 아니다. 그저 진도군이 관내 관광지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지리적 권역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 ‘운림산방’과 ‘구성삼거리(남도국악원)’를 잇는 구간으로 길이가 24km나 된다. 그래선지 산악회에서는 ‘죽림갯벌체험장’까지 16.5km만 걷겠단다. 나머지 7.5km는 9코스에 추가시키겠다며. 우리 부부는 그보다도 더 줄여 의신면소재지인 ‘돈지’마을에서 시작했다. 볼거리도 없는 산길보다는 역사유적지인 ‘왕온 묘’를 둘러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다. 거대한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호국정신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버스가 들어왔던 길(진도읍 방향)을 되돌아 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버스에 남았다. ‘왕온 묘’가 있는 삼거리(‘왕온로’와 ‘운림산방로’, ‘돈지로’가 나뉜다)까지 버스로 이동시켜준다는 황사장님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 코스를 단축하면서까지 둘러보고 싶었던 ‘왕온 묘(王溫 墓)’의 주차장에 도착하니 ‘왕무덤재(또는 왕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왕온’이 몽골 장수 홍다구에게 붙잡혔다는 곳이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용장성이 무너진 뒤 진도읍 방향으로 퇴각했으나 끝내 저 고개를 넘지 못했던 모양이다.

▼ 왕온은 ‘논수골(사천리 ‘사하마을’의 빗돌에 ’논수동‘이란 지명이 병기되어 있다)’에서 참살(慘殺) 당했다. 당시 고려군은 그의 참수를 반대했었다나? 목을 치느냐 마느냐로 논란을 벌였다고 해서 논수동(論首洞)이란 지명이 붙었고, 논수동 옆 개울은 삼별초군의 피로 물들었다고 해서 핏기내란 이름을 얻었다. 아무튼 그의 시신은 누군가에 의해 수습되었고 부근 산자락에 묻혔다. 이를 지자체에서 발굴해 역사유적지(기념물 제126호)로 보존·관리해오고 있다.

▼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석등으로 치장해 왕릉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맞다. 고려 정부로서는 반란군의 수괴(首魁)에 불과했겠지만 삼별초를 위시한 남녘 땅 사람들에게 ‘왕온’은 어엿한 왕(王)이었다. 진도를 황도(皇都)라 부르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니 말이다. 주변 섬과 육지를 공격해 터전을 넓혔음은 물론이다. 완도에 송징, 남해에 유존혁, 제주에 이문경을 보내 관리하기도 했다.

▼ 하지만 무덤은 ‘왕릉’으로서의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크기(직경 7m/ 높이 2.5m)도 작을뿐더러 석물도 보잘 것이 없었다. 무덤 앞 작은 문인석만이 연민을 자아낼 뿐이다. 참! 왕온의 묘 아래 2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무덤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묻혀있다고 한다.

▼ 실질적인 트레킹은 ‘의신119지역대’에서 시작했다. 돈지마을(의신면 소재지)의 뒤쪽으로 지나가는 18번 국도변에 위치하는데, 운림산방에서 시작된 서해랑길 8코스가 소방서 앞에서 마을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 이정표는 8코스의 길이를 24km로 적고 있다. 또한 이곳이 출발지에서 7.1km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된 죽림갯벌체험마을은 종점을 7km쯤 앞둔 지점이다. 결과적으로 9.8km만 걸으면 되는 셈. 모처럼 ‘느림의 미학’이라도 추구하며 걸어볼 일이다.

▼ 진도농협의 울금가공사업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울금(蔚金)’은 생강과에 속하는 ‘뿌리채소’다. 혈관청소와 염증치료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국산 생산량의 70%가 이곳 진도에서 생산된단다. 진도에서 생산되는 울금을 모아 상품화시키는 공장이라고 보면 되겠다.

▼ 울금은 항암과 항염증에 탁월한 ‘커큐민’ 성분이 다량 함유되었다는 뉴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 축적되는 독성을 분해한다는 연구도 나왔다. 각종 식중독 원인균인 살모넬라와 비브리오균 등의 생육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단다. 그러니 집산지인 이곳에 울금판매장 하나쯤 없겠는가. 울금 분말을 활용한 ‘스파’까지 만들어 힐링과 쇼핑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했다.

▼ 탐방로는 ‘돈지(墩地)’ 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돈지’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돈대(墩臺)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만큼 요충지였다는 얘기고, 그게 지금은 의신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마을 앞 들녘은 고려시대 삼별초의 최후 싸움터이기도 했다.

▼ 이곳 돈지마을은 진도의 4대 생활권 중 하나로, 진도읍장 다음으로 큰 ‘의신장(義新場)’이 열린다. 매달 1·6일에 장이 서는데, 의류·과일류·생선류·반찬류까지 다양한 거래가 이루어진단다. 김과 미역은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직거래가 이루어진다니 날짜를 맞추면 질 좋은 특산품도 사갈 수 있겠다.

▼ 앗!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나? 이런 시골에서조차 부부 공동으로 문패를 달았는데, 우리 집의 모든 재산은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있으니. 니것 내것 없이 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 돈지마을의 또 다른 명물은 ‘진돗개’다. 우리나라 개 중에서 진돗개가 한국인의 기질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아무리 잘 먹고 편한 환경에 보내주어도 원래의 주인을 찾아가는 충직성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복단할머니의 ‘백구’다. 대전으로 팔려갔다가 7개월 만에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돌아왔다. 길러준 주인을 잊지 못해 대전에서 진도까지 팔백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온 것이다. ‘백구테마센터’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일종의 기념관이다. 1층에 도·농 교류실과 북카페, 2층에는 다목적실(숙소 포함)을 배치했다.

▼ 운동장에는 ‘돌아온 백구’를 기념하는 여러 조형물을 세웠다. 백구는 1988년 돈지마을 박복단할머니 집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대전으로 팔려간다. 하지만 7개월 만에 뼈와 가죽만 앙상한 채로 300km를 걸어 주인에게 되돌아왔다. ‘한번 주인이면 영원한 주인’인 이야기가 알려지자 백구는 탁월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모 컴퓨터회사의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때 받은 모델료는 박 할머니의 식구가 사경을 헤맬 때 병원비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귀소본능에 충직성까지 더했다고나 할까? 요즘 정치인들에게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정치인들이 백구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 백구는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새끼까지 낳고 살다가 2000년 2월 13세의 나이로 주인 품에 안겨 숨졌다. 이런 백구의 얘기는 동화 ‘돌아온 진돗개 백구’와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로 세상에 알려졌고, 지금 우리가 둘러보고 있는 테마센터까지 세워졌다. 참! 그 옆에는 처녀의 몸으로 돈을 벌어 마을 발전을 위해 거금을 희사했다는 ‘희령 조희균여사’의 송덕비도 세워져 있었다.

▼ 종합안내판은 돌아온 백구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곳에서 열리는 논배미축제를 소개하고 있었다. 추수 후 논에서 즐기는 축제로, 짚공 차기·굴렁쇠 굴리기·벼가마 지고 달리기·논미꾸라지 잡기·물동이 이고 나르기·말뚝박기 등 어린 시절에 논배미에서 즐겁게 놀던 놀이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단다.

▼ ‘의신 들소리비’도 보인다. ‘의신들노래’는 지산면(진도군) 일원에서 불리던 남도들노래(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 51호)에 대비되는 노래로 의신면 일대에서 논일을 하면서 불렀다고 한다. 노래의 구성 등에 대한 설명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대체 뭔 소린지...

▼ 돈지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널따란 들녘의 한가운데로 향한다. 돈지벌판은 패퇴하던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게 또 한 차례 살육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는 시체가 널렸다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많은 시체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 요즘은 과학영농이 대세다. 생명공학을 활용한 품종개량, 농업기계화, 정보기술을 활용한 관리시스템 도입 등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일지니 저 깃발에 적혀있는 항공방제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돈지권역의 전원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돈지마을을 위시하여 향교마을, 옥대마을 중리마을을 포함하는데, 신비의 바닷길로 나가는 길목이며, 삼별초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 돈지들녘은 의신천(이정표 : 종점 15.6㎞/ 시점 8.4㎞)의 풍부한 물길이 흐르면서 옥토로 변한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에서 발원했으니 수량이 풍부할 것은 당연, 거기다 옥대천과 청룡천까지 보태 몸집을 부풀리며 들녘을 지나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의신천을 건너 만길재로 향한다. 이 길은 김통정장군의 퇴각로이기도 하다. 논수골과 돈지들녘에서 연이어 패한 김통정은 저 고개를 넘어 금갑진으로 가서 배를 구해 제주도로 탈출하고, 확인되지는 않지만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 첫 만남은 ‘궁녀둠벙(또는 여기·급창 둠벙)’이다. 김통정과 함께 퇴각하던 여기(女妓)·급창(及唱)·궁녀 등이 몽고군에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며 몸을 던졌다는 연못이다. 간척공사로 메워진 탓에 지금은 비가 와야 물이 차고 크기도 손바닥만 하게 변했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는 날이면 둠벙에서 여인네 우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나?

▼ 궁녀둠벙은 백제 멸망 때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에 비견(규모는 작지만 바위절벽도 있다)되는 전설을 지녔다. 그런 호재를 지자체에서 놓쳤을 리가 없다. 유형유산(4호)으로 지정한 다음 둠벙에 난간까지 둘러 보호하고 있었다. 쉼터용 정자(동백정)를 지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 5분쯤 걸어 올라선 고개는 ‘만길재(이정표 : 종점 14.9㎞/ 시점 9.1㎞)’이다. 삼별초의 궁녀들이 이 고개를 넘다 몽고군에게 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넘지 못했다는 마음 아픈 고개이다. 이 고개 너머에는 ‘부녀동(‘여인들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現 거룡리 ‘신정마을’이다)’이란 지명도 있다. 삼별초군이 함께 데려 갈 수 없는 부녀자들을 남겨놓고 갔다는 곳이다.

▼ 만길마을로 향한다. 김통정 군은 이 부근에서도 많은 시체를 남기며 패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지명이 ‘송장등(많은 시체가 널려있는 야산)’,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 송장등이란 지명 때문일까? 이 구간에서 우린 유난히도 많은 빗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7코스 때, 사우재실(祠宇齋室)이 줄을 잇던 용장마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 만길재를 넘은지 10분 만에 ‘만길(晩吉)’마을에 도착했다. 만길·도명·도목·도동·원두 등으로 이루어진 만길리(법정 동리)의 중심마을로, 낮은 구릉지 사이의 깊숙한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탐방로는 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참! 주의할 점도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곧장 직진하지 말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 마을을 빠져나와 100m쯤 더 걸었을까 삼거리와 마주했다. 도명마을과 원두마을로 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인데, 이정표(종점 14.1㎞/ 시점 9.9㎞)는 원두마을로 갈 것을 지시한다. 이어서 ‘신길 영농조합법인’의 창고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 고개를 넘자 ‘빈지머리들’이 널찍하니 펼쳐진다. 진도의 들녘은 저렇듯 야트막한 산과 산 사이에 발달되어 있다. 특히 남쪽의 들녘들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삼별초의 배중손장군이 진도에 진을 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웬만큼 모여 살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 널디너른 빈지머리 들녘을 횡단하자 ‘원두(元頭)’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만길리’에 속한 자연부락인데, 김통정의 군대는 이곳에도 흔적을 남겼다. 마을 앞 낮은 고개를 넘을 때 여몽연합군의 화살에 맞아 많은 말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사마골’, 사람도 지치고 말도 지쳤으니 날아오는 화살을 어찌 막았겠는가.

▼ 이 마을은 원래 남해와 접한 해안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조제가 축조된 후 마을 앞은 널따란 농경지가 되었다. 덕분에 폭우 때면 TV 카메라에 나타나기도 하는 침수지역이지만... 참고로 만길마을에서 원두마을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원두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송정저수지의 수로를 따라 높이 7.2m의 제방 위로 올라간다.

▼ 잠시 후 송정저수지(이정표 : 종점 12.6㎞/ 시점 11.4㎞)로 올라선다. 1926년에 축조되었다는 저수지는 무척 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풍경과는 다른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무기수 장씨의 16년’이란 부제로 내보낸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아내 살인혐의를 받아 무기 복역 중인 장동오에 대한 수사를 검증해본 시간이었다. 결론은 ‘수사결과를 못 믿겠다’이었을 게다.

▼ ‘이 멋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수면 위에 떠있는 저 시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혹시 ‘수질 측정’을 위한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2020년엔가 이곳 송정저수지의 수질이 농업용수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었으니 말이다.

▼ 송정 저수지 부근에는 폐허로 변한 집들이 몇 채 있었다. 공가가 늘어나는 현실은 이곳 진도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 저수지 상류는 18번 국도(이정표 : 종점 12㎞/ 시점 12㎞)가 지난다. 탐방로는 도로를 건너 송정들녘(kakaomap은 ‘당매들’로 적고 있었다)으로 들어선다. 활착을 끝낸 벼가 무럭무럭 자라는 논이 좌우로 드넓게 펼쳐진다. 그런데 저 논은 어떻게 물을 댈까? 저수지보다 한참이나 지대가 높은데...

▼ 고개를 갸웃거리다보면 어느새 ‘송정(松亭)’ 마을이다. 5개 자연부락(송정·오촌·죽청·탑곡·활곡)으로 이루어진 송정리(법정 동리)의 본 마을로, 지명은 소나무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정리의 특징은 낮은 산지로 둘러싸인 구릉지라는 점이다. 하지만 송정저수지에 접한 탓인지 이곳 송정마을은 논으로 둘러싸인 모양새다. 참고로 원두마을에서 송정마을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송정마을을 지나면서 주변이 온통 대파 밭으로 변한다. SBS ‘만남의 광장’에서 소개됐을 정도로 유명한 진도의 특산물이다. 그런데 ‘장마이되 장마답지 않은 장마철’이라던 어느 호사가의 말처럼 긴 가뭄에 지친 대파는 잎 끝이 누렇게 메말라간다. 오늘은 모처럼 비가 내린다. 이보다 거세지면 트레킹에 지장이 되겠지만, 이왕에 오는 비이니 수북하게 내려줬으면 좋겠다.

▼ 잠시지만 죽청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르기도 한다. 이곳 진도 아니 우리나라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고 싶은 길이다. 도로가 온통 꽃으로 치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목백일홍(배롱나무)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는데, 그 사이사이 백일홍과 금계국이 나도 있다며 활짝 미소를 보내온다.

▼ 탐방로는 이제 ‘매듭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부드럽게 너울대는 구릉지 위로 구불대며 흘러가는 농로가 참으로 매혹적이다. 아니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 구릉지라고 해서 논이 못 들어서겠는가. 물론 논에 댈 물부터 해결되어야겠지만. 그 해답은 ‘둠벙’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이 필요한 논농사를 위해 우리 조상들이 고안해낸 게 ‘둠벙’.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작은 웅덩이다.

▼ 둠벙으로도 해결 못하는 곳에는 밭벼를 심었다. 그런데 이삭을 내민 벼에 하얀 무엇이 붙어 있다. 벼꽃이다. 벼꽃은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흔들리며 제꽃받이로 나락을 여물게 한단다. 문득 흔들리는 벼꽃에서 3천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를 봤다던 어느 글이 떠올랐다.

▼ 고개를 오르다보면 들녘 너머에서 ‘죽청’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군락을 이룬 푸른 대나무가 지명으로 굳어졌다는데, 구릉지에 위치한 탓에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고 한다. 그게 요즘은 논농사보다 소득이 더 낫다지만.

▼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도로(이정표 : 종점 10.2㎞/ 시점 13.8㎞)에 올라선다. 상미마을(임회면 명슬리)과 죽청마을(의신면 송정리)을 잇는 2차선 도로(매실로)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임도로 들어선다.

▼ 이때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선 태양광발전소가 눈에 들어온다. 대학봉과 용수봉 잇는 능선의 남쪽 산비탈인데 크기가 만만찮다.

▼ 임도는 봉호산(193.2m)의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그래선지 생각보다 훨씬 가팔랐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대신 좋은 점도 많다. 곳곳에서 조망이 터지는가 하면 편백나무 숲을 옆구리에 끼고 걷기도 한다.

▼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매듭재’다. 임회면 명슬리와 용호리의 경계인 고갯마루로, 죽청마을(의신면 송정리)과 죽림마을(임회면 죽림리)을 잇는 임도가 지난다. 하지만 지명의 유래나 얽힌 사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 고개를 내려가자 커다란 시설단지가 나타난다. 10개도 넘는 사일로에다 조선소에서나 볼 법한 크레인까지 갖췄다. 양돈장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양돈장 근처 삼거리다.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갈림길이지만, 길을 잃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 카메라에 잡아봤다. 이정표(종점 9.3㎞/ 시점 14.7㎞)까지 세워져있었는데, 길이 헷갈린 이유를 모르겠다.

▼ 매듭재에서 10분. 무지개재에 올라섰다. 임회면 용호리와 죽림리의 경계이자, 죽청마을에서 시작된 입도가 이 고갯마루를 지나 죽림마을로 내려선다.

▼ 고갯마루에는 ‘진도지맥 무지개재, 105m)’라고 적힌 코팅지가 매달려있었다. 진도지맥(珍島枝脈)은 해남반도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에서 시작해 진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 47km의 산줄기다. 금골산·첨찰산·여귀산 등을 일구며 서망항까지 내려와 백도 앞 갯바위에서 그 맥을 다한다.

▼ 고갯마루를 지난 임도는 가파르게 내려선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평하게 변하더니 죽림갯벌을 향해 길게 이어나간다.

▼ 이 무렵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옅은 해무가 깔린 바다는 가히 몽환적이다.

▼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죽림마을에 이른다. 죽림리(竹林里, 법정 동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죽림·강계·동헌·헌복동·탑림) 중 하나다. 아니 본래의 죽림마을은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일대의 해안을 모두 묶어 법정단위인 ‘죽림’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날머리는 죽림어촌체험마을 안내센터

도로(국도 18호선)를 건너 동헌마을 쪽으로 향한다.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7.0㎞/ 시점 17.0㎞)는 어촌체험마을 안내센터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 죽림리는 농림수산식품부가 지정한 ‘어촌체험마을’이다.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갯벌을 체험하러 이곳을 찾는다. 무지개재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걸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50분 만이다. 앱이 10.58km를 찍고 있으니 모처럼 느긋하게 걸었나 보다.

▼ 안내센터 앞 바닷가에는 안내판을 내걸었다. ‘체험’에 ‘휴양’까지 더한 걸 보면 숙박시설을 갖추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조개잡이 체험은 강계마을과 동헌마을 사이의 갯벌에서 가능하다. 갯샘과 독살 체험도 할 수 있단다.

▼ 갯벌로 들어가는 입구는 조형물을 세웠다. 그런데 문설주 나무가 과일 대신 조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유전의 법칙’을 바탕으로 진화과정이 순환되다보면 과일나무에서 조개가 열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 죽림해안은 드넓게 열리는 갯벌이 큰 자랑거리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 양식업에 종사한단다. 10월부터는 김을 수확해야 하고 2월에 미역을, 5월 말에는 다시마를 거두기 시작해 7월까지 쉴 틈이 없단다. 여름 한때 잠시 쉬는 기간이지만, 이때는 또 어촌체험으로 분주해진다.

▼ 갯벌 탐방객들은 가족단위가 대부분이었다. 다들 소정의 입장료(성인 5천원, 학생 3천원)와 장비사용료(장화·호미·바구니 각 천원)를 냈음은 물론이다. 이용시간(간조시간 전후 1시간씩)과 채취량(빌린 바구니로 가득)에 대한 안내도 이미 받았을 것이다.

▼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갯샘’은 실물 대신 안내판으로 대신한다. 아이를 갖지 못하던 50대 여인이 샘물을 길어다 목욕물과 정화수로 사용한 뒤 아들을 얻었다는 신령스런 우물이다. 마침맞게 물도 빠져나갔지만 다가가보는 것까진 그만두기로 했다. 저 지난달 결혼기념 삼아 들렀던 제주도에서도 두어 번이나 구경했었기 때문이다.

▼ 보건소를 지나자 솔숲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일렬로 쭉 늘어선 곰솔이 철갑옷을 입은 장수들 같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 소금 물방울을 맞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다. 어촌이던 죽림마을은 400년 전 마을 앞에 논을 만들면서 농업이 시작됐단다. 하지만 바닷바람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고, 주민들은 바다와 농토 사이에 나무를 심었다. 그러니 농업을 위해 조성된 방풍림이 분명하다.

▼ 세월이 흘러 나무는 숲을 이뤘고, 지난 2005년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7년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으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소나무와 사람의 공존, 사람은 숲을 가꾸고, 숲은 논과 밭을 해풍으로부터 보호하고 갯벌에 놀러온 여행객들에게는 그늘을 제공해준다.

▼ 동쪽 해안, 즉 강계마을로 향했다. 죽림마을의 어선이 정박된 포구는 갯벌의 서쪽 끝,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야 만날 수 있다. 썰물에도 배가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가기 싫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강계마을 앞에 50m쯤 되는 방파제를 쌓아 배를 댈 수 있도록 했다.

▼ 방파제에 서자 갯벌 너머 멀리 금갑해변이 드러난다. 김통정 장군이 잔여 병력과 함께 배를 탔다는 금갑포구(金甲浦口)는 저 해변의 뒤, 그러니까 길쭉하게 삐져나온 곶을 가로질러야만 만날 수 있다.

▼ 강계마을에 이르니 죽림해안의 진경이 펼쳐진다. 접도가 반도처럼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그 사이 바다에는 우후죽순이라도 되는 양 크고 작은 섬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 해안의 동쪽 끄트머리, ‘강계마을’에는 조개구이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수익원은 굴이라고 한다. 주민들이 기른 굴을 구워주는 모양이다. 간단한 주류와 함께 굴을 넣은 전·라면·떡국 등을 사이드메뉴로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겨울이 제철인 듯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의 풍경이로다.’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김정호 선생이 진도홍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읊은 노래다. 그런 홍주를 제조하는 공장이 강계마을에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어 구입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애주가의 처임을 자부하는 집사람의 배경에 세우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