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45코스(곰소항 회타운  모항 해수욕장)

 

여 행 일 : ‘24. 1. 27()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진서면 및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곰소항 회타운작도마을관선마을왕포마을작당마을변산자연휴양림모항해수욕장(거리/시간 : 14.7km, 실제는 15.81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생태계의 보고인 곰소만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서해바다로 나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곰소 나룻산공원 및 모항 광맥계를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곰소항 회타운(고창군 진서면 곰소리)

서해안고속도로 줄포 IC에서 내려와 710번 지방도를 타고 줄포로 온다. 줄포사거리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부안방면으로 2km, 영전사거리(부안군 보안면)에서 30번 국도로 옮겨 격포방면으로 7km쯤 달리면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곰소복지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면 수산물판매센터가 나온다. 서해랑길(부안45코스) 안내도는 센터의 뒤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두 번째 여정.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곰소만의 해안선을 따라 서해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길이는 14.7km, 작은 오르내림이 있는 산자락을 헤집기도 하지만 거리가 짧은 탓에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10 : 35. ‘곰소항길을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젓갈상점과 건어물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곰소항으로 들어오는 수산물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맞다. 곰소항은 하루 130여척의 어선들이 드나들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다고 했다. 그로 인해 국내 최대의 젓갈시장을 비롯해 수산시장과 건어물시장 등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갈치의 새끼인 풀치라고 했다. ‘갈치의 원말은 칼치. 칼 모양을 닮은 고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갈치의 새끼는 풀치가 되었단다. 작고 기다란 게 풀잎을 닮아서라나? 그러니 이 자라 이 되는 셈이다.

 10 : 41. ‘곰소항은 전북특별자치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큰 어항이다. 바다를 지키는 가장 오래된 수군의 중심 진영(검모포)이기도 했다. 일제 때는 인근에서 수탈한 각종 농산물과 군수물자가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해방 후에는 칠산어장의 조기잡이 배를 비롯한 주변의 고기잡이배들이 몰리던 수산물 집산지였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구를 떠올리게 만든다. 꼬맹이 어선 20여 척이 물이 차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10 : 44  10. 49. 잠시 후 나룻산 공원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공원을 우회해 간다. 하지만 일단은 나룻산으로 올라가 보자. 서해바다에 덧댄 곰소만에 대한 조망이 일품이라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공원 앞 조형물은 을 형상화했다. ‘곰소라는 지명을 모티브로 삼았을 것이다. 포구(옛날엔 섬이었다) 앞에 있었다는 깊은 소()에서 곰소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니 말이다. 이 소를 여울개라고도 하는데 칠산바다의 수호신인 개양할머니가 이곳을 건너 다 무릎까지 빠졌다는 전설도 있다.

 정상에는 워털루 평원 사자의 언덕( Butte du Lion)’을 연상시키는 원뿔형의 봉우리를 쌓아놓았다. 규모야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지만... 아니 사자 대신 조명등을 꼭대기에 앉힌 것과 오름길을 계단 대신 무장애 길로 만든 것도 다른 점이었다.

 바위절벽에는 범선을 걸쳐놓았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게 저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려는 부안 군민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뱃머리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곰소항의 전체적인 풍경은 물론이고, 저 멀리 곰소만의 터줏대감 죽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거기다 작은 고깃배들이 하얀 물살을 가르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10 : 53. 입구까지 되돌아 올 필요는 없다.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곰소항 젓갈단지로 연결된다. 이쯤에서 팁 하나. 젓갈단지에 들르면 천일염으로 곰삭힌 맛깔스런 곰소젓갈을 맛볼 수 있다. 맛이 있으면 두어 통 사와도 될 일이고 말이다. 나야 지난번 44코스 때 한보따리 사갔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지만... 참고로 곰소는 강경, 광천, 소래포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젓갈 생산지다.

 젓갈단지를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닷가. 이번에는 벚꽃나무 가로수 길을 따른다. 나른한 봄날 마파람에 꽃비라도 날릴라치면 장관을 이루겠다.

 10 : 58. 30번 국도(청자로)로 올라서 격포항 방면으로 간다. (진서리·유천리·용계리·반암리) 도요지 등 이곳 부안지역이 우리나라 청자(초기) 생산의 메카였던 사실이 도로 이름에까지 나타난다.

 잠시 후 청자로는 길이가 300m쯤 되는 방조제를 건넌다. 이 방조제 덕분에 오른편에 커다란 인공호수가 만들어졌다. 주변에 대하양식장이 들어서있는 걸로 보아 바닷물을 가두어두고 있는 모양이다.

 왼쪽으로는 곰소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영광굴비로 잘 알려진 칠산바다의 한 자락이 내륙 깊숙이 들어온 천혜의 입지조건으로 한때는 최대의 조기잡이 어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곰소나 줄포 외에도 사포, 후포 등 여러 포구가 발달했었다.

 11 : 04. 방조제를 건너면 작도마을’. 법정 동리인 진서리(鎭西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구진·연동·진동·진서·백포·작도) 중 하나로 진서리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 ‘작도(作陶)’,  그릇을 만드는 마을이라는 이름대로 고려시대 때 이 마을에서 고려청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40개소의 가마가 있었다는 진서리 요지(鎭西里窯址)’는 현재 사적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1: 08. 곰소초등학교에 이어 나타나는 작도마을 경로당’. 서해랑길은 경로당 건물을 왼쪽에 끼고 90도로 방향을 튼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12.7km/ 시점 2km) 말고도 부안마실길의 이정표(모항 갯벌체험장 10.4km/ 곰소염전 2.3km)를 따로 세웠다. 두 길이 함께 쓰는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우리는 지금 부안마실길의 7코스인 곰소 소금밭길(왕포곰소염전, 12)’을 걷는 중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곰소만과 어깨를 맞대고 걷는다. 진행방향에 놓인 죽도를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 내가 잘못 보았나? 인삼을 산삼의 사촌쯤으로 여겨왔기에 산자락이나 구릉지에서 기르겠거니 했었다. 실제 인삼의 주산지도 진안이나 금산, 풍기 등 내륙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바다에서 10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인삼을 기르고 있으니 어찌 생소하지 않겠는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다른 방조제들과는 달리 이곳(‘석포방조제라고 했다)은 한없이 구불대는 감입곡류의 하천을 닮았다. 대자본에 의한 계획적인 간척사업이 아니라 주민들이 손수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 똥섬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똥섬이 되었을까? 저렇게 예쁜 섬을 두고 말이다.

 이번에는 바다를 향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파고 들어갔다. 한 평이라도 더 넓히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지 싶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곰소만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서해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바다에는 죽도가 두둥실 떠오른다. 곰소만 안쪽에 들어있다고 해서 내죽도(고창 앞바다의 외죽도와 대비된다)’라고도 불리는데, 사리 때는 갯벌을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단다.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 지금은 곰소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트레킹을 시작했던 곰소항이 실루엣 처리되어 고개를 내민다.

 물 빠진 바다에는 고깃배가 낮잠을 잔다. 물이 들면 부지런을 떨어야겠지만, 썰물 때면 하릴없어진 고깃배에 휴식의 여유가 주어진다. 그 한가로운 풍경에 반한 우리 같은 나그네들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기 바쁘고.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 너머에서는 내변산의 험상궂은 능선이 일렁인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관음봉(424m). 그 아래에 천년고찰 래소사가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11 : 35. 방조제를 잘 따르던 탐방로가 느닷없이 내륙으로 방향을 튼다. ‘마실길 이정표(왕표/ 곰소)도 오른편을 가리킨다. 방조제 끝에서 길이 끊긴 탓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썰물일 때는 바닷가를 따라 관선마을로 갈 수도 있다. 관선마을 위 국도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모험심이 강한 일행 몇 명은 길이 아닌 그 길로 가로질러 오기도 했다.

 이즈음에서 코스를 단축한 집사람을 만났다. 석포마을에 있는 무하리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가까운 서해랑길 접점까지 나와 있었다.

 11 : 38. 석포마을 방향으로 300m쯤 걸었을까, 길가에 둘레길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30번 국도로 올라간다.

 오르막길.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간척사업이 만들어 낸 석포리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간이 지닌 무궁무진한 능력에 감탄하며 조금 전 걸어온 궤적을 눈으로 그려본다. 그러자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는 후미그룹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11 : 42. 서해랑길은 도로로 올라서마자 다시 헤어지란다. 이정표(종점까지 9.7km)도 왼쪽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정표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관선헌(觀仙軒)’이란 저 빗돌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초입에는 관선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안내판은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마다 설치되어 있었는데, 45코스의 특징 중 하나로 꼽을 수도 있겠다.

 11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국도. 곧은길을 놓아두고 굳이 에둘러 돌아오도록 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관선헌(觀仙軒)’의 정체를 알려준 것도 아니고.

 왼쪽 발아래에는 관선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운호리(雲湖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마동·중마동·작당·왕포·소운호·운호·관선) 중 하나로 안내판은 풍수지리에서 지명의 유래를 찾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 장삼바위와 시루봉이 있는가 하면, 목탁바위·바리바위·북바위·목탁채바위 등 지형이 스님이 불공드리는 형상이라서 관선이라 불리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가는 설명이겠지만, 옛 지명인 관선불(觀仙佛)’로 대비해보면 고개가 끄덕거려 질 것이다.

 이 뭣꼬? 산비탈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이게 전철 역사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모양새이다. 이름은 아예 읽을 수도 없게 만들어버렸다. 공사가 한창이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곰소만에 대한 뷰가 뛰어난 곳이니 카페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도로변의 명품 소나무에다 곰소만의 뷰까지 더해진다면 부안의 핫 플레이스로 등장할 게 틀림없다.

 11 : 50.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운호방조제로 내려간다. 그 초입, ‘마실버스 운행시간표까지 매단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관선마을과 왕포마을을 이어주는 운호방조제’. 길이가 600m나 되는 이 방조제가 운호마을의 드넓은 앞들을 만들어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검은 갯벌을 드넓게 펼쳐낸다. 석포에서 관선을 거쳐 왕포에 이르는 저 갯벌은 관선불갯벌로도 불리는데, 예로부터 갯살림이 풍성하기로 유명했단다.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관선불의 어전(漁箭,어살) 어업이 등장한다나? 지금 저 갯벌에는 굴이 잔뜩 널려있단다. 그런데 이게 바위에 붙지 않고 펄 속에 박혀 자라는 탓에, 바위에 붙어 자라는 굴보다 대여섯 배나 크고, 맛과 영양 면에서 월등하단다. 썰물 때 햇볕을 많이 쬐는 데다 주변 갯벌이 기름지기 때문이란다.

 오른편은 운호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이다. 그 뒤로는 내변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그 중심에 놓인 건 아마 신선봉(488m)일 것이다.

 만조 때의 곰소만은 하얀 안개 가득하다고 했다. 이게 어선들을 안아주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단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온통 시커먼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12 : 00. 운호방조제의 끝. 이정표(종점까지 8.4km)가 언덕으로 올라가란다.

 언덕으로 오르면 바다전망대 펜션’. 탐방로는 펜션의 뒷마당을 지난다. 이어서 감나무 과수원의 사잇길을 지나 왕포마을로 간다.

 12 : 08. 탐방로는 왕포마을을 횡단한다. 예쁜 벽화로 치장된 고샅을 빠져나오면 마을 어귀에 널따란 광장(이정표 : 7.8km)이 조성되어 있다. 깔끔한 화장실에다 정자가 두 개나 들어서있는 게 둘레길 나그네들의 쉼터로 안성맞춤이겠다.

 마을 앞은 포구가 들어섰다. 접안되어 있는 배들의 숫자나 크기도 시골마을 치고는 제법 크다. 맞다. 1970년대만 해도 이곳 왕포항은 가장 잘나가는 어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는 수백 척의 어선들이 모여서 풍어성시를 이루었다. 그래서 포구 이름도 인근 바다에서 고기잡이로는 으뜸이라는 뜻에서 왕포(王浦)’가 되었다고 했다. 용왕님도 (그 풍요로움에) 쉬어가는 마을이라나?

 채널A’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 시즌 5’가 왕포항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값비싼 감성돔과 국민횟감인 대광어(넙치)가 깜짝 잡히기도 했지만 낚시의 대상 어종은 칠산바다의 특산물인 조기였다. 그런 조기 조형물이 포구로 나가는 초입에 설치되어 있었다.

 작은 부두를 오른편에 끼고 트레킹을 이어나간다. 선착장 왼쪽의 조그마한 다리 아래를 통과해 들어온 배들이 정박해있다. 그러니 그 하나하나가 손바닥만 할 수밖에...

 12 : 18. 다시 국도(청자로)로 올라왔다. 다음에 닿게 될 작당마을이 코앞이지만 바닷가에 길을 낼 수 없었음이리라.

 12 : 22. 작당마을로 내려가는 길 초입에는 마을표지석과 함께 부안마실길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마을까지는 400m쯤 더 걸어야 한단다. 하나 더. 조금 전 지나온 왕포마을에서 시작된 마실길 6코스 이정표(왕포마을에서 0.75km)는 종점인 갯벌체험장까지 5.4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2 : 27. 작당마을에 이른다. 운호리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작당(鵲堂)‘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까치집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곳은 한때 조기잡이 활황으로 북적거리는 선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약 스무 가구 정도만 살아가고 있는 조촐한 마을이 되었다.

 작당마을 포구는 수로와 연결된 갯길을 활용하고 있었다.

 마을 앞 갯벌은 2018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극중 학수와 용대가 갯벌에서 싸우는 장면이 저곳에서 촬영됐다. 하지만 안내판 하나 없으니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을 극히 드물 것이다. 옛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갯벌에는 김 양식시설로 여겨지는 지주만 늘어서 있을 따름이었다.

 12 : 32. 작당마을 고샅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로 올라선다. 이때 ‘600’이란 숫자로 디자인 된 (작당)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1416년 둘(부령현과 보안현)로 나뉘어있던 지역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부안현으로 탄생되었음을 자축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주민들은 또 부안에 오시면 오복이 가득하다는 슬로건 부래만복(扶來滿福)’을 외치고 있었다.

 추억을 나누며라는 카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차도 마시Go, 그릇도 사GO, 추억도 나누GO’라는 홍보문구로 유혹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카페이니 커피는 기본. 거기에 더해 정성들여 다린 28년 전통의 대추차를 팔고 있단다.

 12 : 36. 잠시 후 도로에서 내려서서 짧은 방조제를 걷는다. 칠산바다 말고는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없다.

 방조제 끝에서 산으로 올라간다. 이어서 무장공비가 출현하던 시절 해안초소에서 사용하던 참호를 따라 진행한다.

 당시 사용하던 벙커도 눈에 띈다. 사용을 안 한지 오래됐지만 개·보수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요즘처럼 남북이 으르렁대는 하 수상한 시기에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누가 알겠는가.

 전북 천리길 스탬프함이 자신도 좀 봐달란다. 옆의 이정표는 부안마실길에서 세웠다. 서해랑길의 변산반도 구간은 이렇듯 여러 종류의 둘레길과 사이좋게 나눠쓴다.

 12 : 43. 이번에는 마동방조제를 걷는다. 이처럼 곳곳에서 방조제를 걷는다는 것 또한 45코스의 특징 중 하나이다. 하나 더. 마실길 안내판은 마동(馬洞)’ 마을의 유래를 옛날 선비가 이곳을 유람하던 중 유유동의 말재(말등모양)를 넘어 마동을 지나다 말이 쉬기에 알맞다고 했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이즈음 최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노을경관쉼터가 눈에 들어온다. 국도 30호선 쌍계재에 지어놓은 쉼터용의 3층짜리 전망대이다. 발아래에 있는 변산자연휴양림과 곰소만에 더해 서해바다까지 조망된다는 곳인데, 특히 해질 무렵이면 환상의 서해바다 일몰이 펼쳐진단다.

 오른쪽. 방조제가 만들어 낸 간척지는 대하양식장으로 가득했다. 수량이 제법 풍부한 마동천이 흐르니 농경지로 손색이 없겠건만. 자본주의의 생리는 돈이 더 되는 대하양식장을 만들어냈나 보다.

 ! 게 닷!’ 집사람이 호들갑을 떤다. 그녀의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 검은 점으로 나타나던 것들이 뭔가에 놀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맞다. 바닷물이 먼 바다로 빠져나간 곰소 갯벌은 지금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됐다. 진흙에서 고개를 내민 갯것과 그 갯것들을 잡으려는 또 다른 것들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살아보려는 희발농게의 종종걸음과 먹잇감을 노리는 바닷새의 저공비행이 교차하는 삶의 현장.

▼ 방조제 끝에는 쌍계재 아홉구비 길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45코스의 또 다른 이름이고여기서 말하는 쌍계재는 전망대가 지어져 있는 저 위의 고갯마루를 이른다.

 12 : 53. 방조제 끝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마실길은 왼쪽 해안(시멘트포장까지 되어 있다)을 따르라는데 서해랑길 표식(리본)은 산비탈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일단은 이정표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고나서야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걸 알았다. 하나 더. 만조(滿潮) 때 바닷물에 길이 잠기기 때문에 길을 에둘러 내놓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또 다른 방조제(무척 짧다)를 지나자 안내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부안 마실길 6코스(쌍계재아홉구비길)의 쌍계재 아래에 2.2km의 새로운 코스를 조성해놓았다는 것이다. 기존노선에 추가하면 순환코스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순환이 필요가 없는 나는 기존 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신우대 숲이 길손을 맞는다. 눈에 들어오는 신우대는 우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크고 굵었다. 그게 하도 울창하다보니 길은 터널처럼 나있다. 이런 길을 걷는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신우대 숲길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조금만 떨어져도 앞사람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쯤해서 팁 하나. 사람 키를 넘는 대나무는 신우대이고 키가 무릎 근처에 오는 대나무는 조릿대다. 신우대는 옛날에 화살을 만드는 데 썼다. 산죽(山竹)이라 부르는 조릿대로는 소쿠리를 만들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조릿대와 신우대를 병용하여 쓰기도 한단다.

 이즈음에서 만난 마동 해안경비초소는 아예 눈요깃거리로 만들어놓았다. 6.25전쟁 이후 1970년대 해안선을 통해 무장공비가 침투함에 따라 이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마동초소는 변산 내륙지역으로의 침투를 방호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내무반을 중심으로 상황실 등이 설치된 장병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바닥 곳곳에 바위가 돌출되어있어 걷는 게 썩 편하지 않은 구간이다. 하나 더. 진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즈음에서 변산면에 바톤을 넘겨준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변산 자연휴양림이 고개를 내민다. 지난 2016년 이틀 밤을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숲과 바다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입소문을 믿고 찾아왔었고, ‘부안 마실길’ 4~6구간을 걸어보기도 했었다.

 숙소인 산림문화휴양관과 수영장, 생태습지관찰원 등의 시설을 갖춘 변산 자연휴양림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휴양림이다. 덕분에 모든 객실에서 아름다운 서해를 바라볼 수 있다. 날이 어둑해지면 맞은편 고창 심원면의 불빛이 오징어 어선의 집어등처럼 황홀경을 연출해주기도 한다. 가벼운 산책도 가능하다. 휴양림 뒤편으로 솔향기와 피톤치드가 가득한 솔바람 숲길 3km가 조성돼 있다.

 휴양림 앞을 지나서 또 다시 숲속으로 든다. 아까와는 달리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된다. 하나 더. 휴양림에 세워놓은 모실길 이정표는 시점인 갯벌체험장까지 1.8km가 남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서해랑길 종점은 갯벌체험장에서도 2km가까이 더 가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곰소만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굽이가 큰 만()은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를 조성했고, 경제적 가치가 적은 저런 꼬맹이 만들은 자연 그대로 놓아두었다. 덕분에 우린 경관 좋은 해변을 걸어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방호용 철조망은 그대로 놓아두었다. 때문에 탐방로는 저런 개구멍을 통과할 수도 있다. 철조망 너머 군 초소가 눈에 띄기도 한다. 단장이 되어있지 않아 흉물스러운 몰골이다. 철조망에는 군 작전지역이므로 승인되지 않은 접근을 금지한다.’는 경고푯말까지 붙어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준다.

 해안초소의 안내판은 초소 주변을 정비한 후 보존해오고 있다 했다. 그렇다면 가리비 껍데기로 치장된 저 철도망도 그 일환일지 모르겠다. 아니면 마실길을 아끼는 어느 독자지가가 만들어놓은 예술성 깊은 작품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13 : 38. 규모가 제법 큰 해변도 만나게 된다. 양 옆이 해식애로 이루어져 경관까지 빼어나다. 탐방로가 아닌데도 해변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가장자리는 모래가 아닌 각양각색의 조개껍질 부스러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걸 본 집사람의 방심이 동했나보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제니라도 되는 양 하얀 조개껍질을 공중에 흩뿌린다. 맞다. 나에게 그녀는 영원한 제니. ‘알리 맥그로우보다도 더 예쁜...

 13 : 48. 저 멀리 내변산의 울퉁불퉁한 암릉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으면 마실길은 금강가족타운이란 펜션에 이른다. 탐방로는 펜션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객실이 많음은 물론이고, 널따란 야외수영장과 족구장, 씨름장까지 갖추고 있는 펜션이다.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니 갯벌체험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하지만 인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그러고 보니 그 넓던 야외수영장도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산길을 탄다. 하지만 큰 오르내림이 없어 힘들지는 않다. 길이 또렷한데다 곳곳에 마실길 표식이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면 잃은 사람이 더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락무극(長樂無極, 즐거움이 오래 계속해서 끝이 없다)’ 같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명심보감용 판자들을 읽어가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2016년도 때보다 그 숫자가 확 줄어든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게 아쉬워 당시 끄적거렸던 글을 소환해본다. ‘당신을 기다릴 것 같아요’, ‘결코 안 갈 것 같던 시간도 가고, 절대 안 올 것 같던 시간도 온다. 시간은 글쎄도 설마도 없다.’는 등 판자의 뒷면에 적혀있는 글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라는 술타령은 실소까지 짓게 만들고 있다.

 13 : 58. 산자락 오솔길을 지나면 작은 방조제가 나온다. 둑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에는 모항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에서는 갑남산의 산줄기가 나타난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이 나름대로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 둑에는 데커레이션(decoration)용인지 폐 선박이 놓여있었다. 덕분에 난 철판이 아닌 플라스틱으로도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4 : 02. 또 다시 국도(30호선)로 올라선다. 언제부턴가 도로 이름이 청자로에서 변산로로 바뀌어 있다. 변산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길가 2개나 되는 변산마실길 안내판은 하나같이 마실길이 부안의 지질명소들을 지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세계지질공원이라는 부연설명까지 한다. 여기에 모항 광맥계가 포함되어 있음도 알려준다. 하지만 모항의 최고 볼거리인 해골바위에 대한 안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갑남산 아래는 김해 김씨 문중의 제각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지난 44코스 때 고창 땅에서 만났던 빗돌처럼 세장산(世葬山)’ 대신 세천(世阡)’을 새겨 넣었다. ‘뫼 산()’ 대신 두렁 천()’자를 썼으니 선산을 산이 아닌 밭의 가장자리에 썼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네 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에 터를 잡고 세거(世居)하면서 앞들에서 농사짓고 뒷산에 장사(葬事)하며 살아왔다.

 14 : 06. 잠시 후 국도와 헤어져 왼편 바닷가로 향한다. 서해랑길 이정표는 종점까지 1.4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같은 장소인데도 모항해수욕장까지는 1km가 남았단다. 서해랑길이 해안을 따라 에둘러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일정한 돈을 내고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모항갯벌체험장이란다. 펜션과 식당에다 체력단련장과 야외공연장, 인공폭포 등의 부대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갯벌체험을 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겨울철이라서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음이리라.

 갯벌체험장 앞 갯벌. 영역을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빙 둘러 돌담을 쌓아놓았다. 아니 독살 체험을 위한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어망이다. 사람들은 퍼덕이는 물고기를 그저 주워들기만 하면 되고...

 진행방향 저만큼에 모항이 보인다. 이름(실제는  자를 쓴다)처럼 어머니의 품같이 아늑한 어촌마을이다. 1999 12 31 새천년을 잇는 영원의 불씨를 채화했던 곳이라고 한다. 자 그럼 모항으로 들어가 보자. 시인 안도현은 말대로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체험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바다의 위에다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가 나온다. 모항 앞바다의 갯벌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하지만 시설노후로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며 입구를 막아버렸다. 예산 낭비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이왕에 혈세를 들여 지어놓았으면 제대로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탐방로는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제켜두고 해안을 따라간다. 이때 만나게 되는 모항경로당에는 엄마품 건강센터라는 부속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엄마 품처럼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돌본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14 : 21. 모항(茅項) 포구는 그냥 지나친다. 크지도 그렇다고 빼어난 볼거리도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하나 더.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네’. 한 무명 래퍼가 고향인 변산으로 내려가 겪는 우여곡절을 그린 영화 변산에 등장하는 대화다. 영화 속에서 모항은 두 주인공이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공간으로 나온다. 그게 저 어디쯤일지도 모르겠다.

 포구를 스치듯 지나온 탐방로는 이제 모항 해나루 가족호텔의 뒤 해안선을 따라간다. 바닷가를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해식애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닷가는 거대한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로 모항 광맥계로 불리는 곳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생선뼈 화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진짜 생선뼈 화석은 아니다. 후기 백악기, 부안에서는 굉장히 큰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당시 마그마와 함께 분출된 화산재들이 사면을 따라 흐르면서 빠르게 퇴적되고 굳었다. 화산재들이 다져지는 과정에서 심부에서는 균열을 따라 열수가 흐르고 광물을 성장시켜 지금과 같은 석영맥이 형성되었다.(전북서해안 국가지질공원 지질명소 홈피에서 발췌·정리)

 누군가는 채석강에서 이어진 해안절벽을 모항 주변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생각하는 바위(또는 해골바위)’로 가족호텔 근처 바닷가로 내려가면 만난다. 하지만 난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해버렸다. 그런 바위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방문한 내 잘못이니 어쩌겠는가.(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렸다)

 전망 좋은 곳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서해에 대한 조망을 즐기라며 망원경까지 배치했다.

 정자에 오르자 칠산바다가 성큼 다가온다. 저 바다는 한때 황금어장이었다. 황금갑옷 입은 장수처럼 산란기를 앞둔 노란 조기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조기잡이 안강망 배들은 더 이상 칠산바다를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칠산바다가 텅 빈 것은 아니다. 많은 뱃사람들은 여전히 칠산바다에 의지해 살아간다.

 14 : 31. ‘모항해수욕장에 이른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듯한 오래 묵은 해송들이 지금은 피서객들의 편안한 쉼터로 변해있는 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도현 시인의 모항 가는 길이 유명세를 타면서 변산반도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안 시인은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반도를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라고 표현했다. 아무튼 보드랍기 짝이 없는 모래사장과 멋진 노송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경관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이 해수욕장은 국토해양부에서 최우수 청정 해수욕장으로 선정(2010)한바 있다.

 이 해송 숲은 모항해수욕장의 랜드마크(landmark)이기도 하지만 전국 사진작가들의 일몰 포인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14 : 37. 해수욕장 입구의 모항 갯벌체험장 조형물에 이별을 고하고 주차장으로 간다. 이어서 모항갯벌해수욕장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놓은 서해랑길(부안 46코스) 안내판을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5.81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산길 구간이 썩 편치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오늘도 사랑하는 집사람과 함께 걸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고 단언했고,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또한 약보보다 식보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가 낫다고 주장했다. 이로보아 걷는 게 좋다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한가 보다. 그러니 어찌 걷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거기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곁에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서해랑길 44코스(사포마을 버스정류장-곰소항 회타운)

 

여 행 일 : ‘24. 1. 13()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흥덕면 및 부안군 줄포면·보안면·진서면 일원

여행코스 : 사포버스정류장후포마을시아농장줄포만 갯벌생태공원구진마을곰소항 회센터(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5.76km 3시간 3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4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줄포만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해제반도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 곰소염전 등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사포마을 버스정류장(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TG를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타고 줄포·부안 방면으로 5km쯤 달리다가 신기삼거리(흥덕면 사포리)에서 좌회전, ‘후포로 2km 남짓 들어오면 사포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4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첫 번째 여정. 드넓은 줄포만의 남·동쪽 해안선을 따라 고창에서 부안 땅으로 넘어간다. 길이는 14km, 거리가 짧은데다 평지로 이루어져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10 : 22. 2차선의 찻길인 후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길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이기도 하다. 1894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 등지에서 머물렀으나 후임 군수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했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3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한다. 이게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 당시 목숨을 걸고 내달렸을 선현들의 뜻을 떠올리며 걸어보면 어떨까?

 10 : 26. 잠시 후 후포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후포리(後浦里) 4개 자연부락(대촌·용머리·후서·후포) 중 하나로 마을 앞에 개가 있다고 해서 뒷개 또는 후포(後浦)라 하였다. 그래선지 북쪽 갯가에는 예전 소금을 굽던 염판도 있다고 했다. 아무튼 이정표(종점 13.7km/ 시점 0.3km)는 버스정류장(후포)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란다.

 마을 앞. 파도가 넘실거렸을 바다는 이제 들녘으로 변했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드나들었을 돛단배도 지금은 없다. 대신 맹추위에 할 일을 잃어버린 트랙터가 낮잠을 잔다. 기지개를 펼 봄날을 기다리며.

 그 갯벌이 그리운 이도 있었나 보다. 마을 앞에 대하양식장을 지어 옛 향수를 소환시켰다. 이왕이면 당 할머니에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지냈다는 해신제까지 복원시켰더라면 하는 바람은 나 혼자만의 푸념일까?

 10 : 28. 옛날, 돛단배가 드나들었을 갯고랑은 배수갑문이 떡하니 가로막았다. 참고로 줄포만 깊숙이 들어앉은 후포마을은 예로부터 조운활동이 활발한 포구였다. 내륙에서 산출되는 물산을 집결시킨 후, 선박을 이용해 개성이나 한양으로 운송하던 물류의 전진기지(海倉)였다. 운송되어 온 물자도 후포를 통해 내륙으로 옮겨질 정도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수로를 건너 후포리에서 신덕리(新德里)’로 들어간다. 이어서 방조제를 쌓아 만든 자그만 들녘을 가로지른다.

 10 : 40. 대단위 목장지대를 지난다. 수북이 쌓여있는 곤포 사일리지로 보아 소를 기르는 게 분명하다. kakaomap 시아농장이라고 적고 있으나 이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떼가 머물렀을 축사는 텅 비어있었다. 소가 없으니 이를 관리할 사람들도 필요 없었나보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적이 가져갈 물건 하나 없겠는가. 사람이 오갈 때마나 사납게 짖어대는 저 개가 증거다.

 길은 이제 나지막한 산릉으로 올라간다. 산이라 해봐야 해발이 50m도 못되고, 대개는 밭으로 개간한 낮은 구릉지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다. 구름처럼 뭉실뭉실한 지형이다.

 이후부터는 구릉지 위를 걷는다. 그리고는 한동안 낮고 완만한 언덕을 쉼 없이 타고 넘는다.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황토색이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는데, 그래선지 양파 밭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땅 반에 하늘이 반인 구릉지는 지금 보리가 주인이다. 소한·대한의 맹추위가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그리고 4-월에는 푸릇한 청보리가 6월이면 황금빛으로 익어갈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흔히 보아오던 세장산(世葬山)’이 아니라 세천(世阡)’이란다. ‘뫼 산()’ 대신 두렁 천()’자를 썼으니 선산을 산이 아닌 밭의 가장자리에 썼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네 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에 터를 잡고 세거(世居)하면서 앞들에서 농사짓고 뒷산에 장사(葬事)하며 살아왔다.

 길은 경사가 20도를 넘는 구릉지를 넘기도 한다. 붉은 빛으로 뒤덮인 저 황토지대는 고창 사람들의 농가 소득을 증대시키는 원천이다. 지금은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제 구릉지를 내려서서 목우(牧牛)’마을로 간다. 법정동리인 신덕리(新德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목우·상연·하연·언안·연장·용소·원덕) 중 하나인데, 탐방로는 마을을 먼발치에 두고 들녘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줄포만과 바다 건너 변산반도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우뚝 선 산릉이 길게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이렇듯 고창의 북쪽해안은 갯벌과 더불어 변산반도의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어 좋다. 첩첩이 쌓인 산들이 거리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거리가 멀수록 더 옅은 빛깔을 띠고 있어 입체감이 살아난다.

 목우마을 앞 들녘. 탐방로는 농경지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리고 농로의 끝자락에서 고창을 벗어나 부안 땅으로 들어간다.

 11 : 00. 작은 개울을 건너면 부안(줄포면 우포리) 땅이다. 탐방로는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울창한 갈대숲을 옆구리에 낀 멋진 구간이다.

 갈대가 키 높이로 자라 은근한 낭만 풍경이 연출된다. 하지만 갈대숲의 백미는 낮이 긴 여름철이다.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노을과 실바람에 흔들리는 잎새가 매혹하기 때문이다.

 그 안쪽 들녘에서는 철새가 난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습지와 갈대숲, 농경지가 더해지면서 철새들의 쉼터가 되었나보다.

 농경지를 지나 구릉지로 올라간다. 붉은 색에 가깝던 고창과는 달리 누런 황갈색으로 변했다.

 11 : 09. 구릉지에는 선양저수지가 있었다.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척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소중한 수원이다.

 11 : 15. 농로를 겸한 임도를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생태공원로(이정표 : 종점까지 9.3km)’로 올라선다.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때 줄포지역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발아래에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이 들어앉았다.

 11 : 21. 잠시 후 만난 삼거리.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직진, 하지만 부안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을 둘러보려면 오른편으로 가야한다. 하나 더. 서해랑길을 따르더라도 생태공원에 이르기는 매한가지다. 정문 대신 후문으로 들어간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정표(종점 8.8km/ 줄포만 생태공원 0.4km/ 시점 5.2km)는 줄포만 생태공원에 잠시 들렀다가란다.

 11 : 25. 하지만 난 서해랑길을 따르기로 했다. 이어서 조금 더 걸어 바닷가에 이른다. 곧게 뻗은 방조제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줄포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오른쪽의 습지에는 갯벌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줄포만 위에 다리 형태로 놓인 생태관찰로는 갯벌 생물을 관찰하기 딱 좋은 곳이다. 계단이 놓여있어 갯벌로 내려가 직접 관찰해 볼 수도 있다.

 부안도 역시 갯벌의 고장이다.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휘어진 활처럼 거대한 해안선(대략 178)을 그리는데, 그 대부분에 넓고 진득한 갯벌이 발달했다. 특히 변산반도 남단의 줄포만은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받았다. 2010년에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기도 했다. 칠면초와 나문재·갈대 같은 염생식물을 비롯해 100종이 넘는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물 빠진 바다에는 갯고랑이 나타난다. 바다와 마을을 이어주는 실핏줄로 바닷물이 밀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썰물 때 끊어질 듯 가느다란 생명줄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다. 한때 저 길은 돛단배의 나들이 길이도 했다. 토사가 쌓이면서 이제는 뱃길이 끊겨버렸지만...

 11 : 30. 이제 갯벌생태공원을 둘러볼 차례이다. 한동안 쓸모없는 땅처럼 여겨졌던 갯벌 저류지를 친환경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공원이다. 갯벌의 퇴적작용으로 줄포는 상습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제방을 쌓은 것이 시민의 쉼터로 자리 잡았다. 제방을 쌓은 이후 안쪽의 20만평 저류지는 갈대와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루면서 자연스레 생태늪지로 발전했다. 이걸 친자연환경적인 생태공원으로 가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다양한 체험거리와 체육시설, 캠핑장, 산책로는 물론이고, 숙박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가족, 연인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준다.

 안으로 들어가면 10만평에 달하는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지그재그 나무데크, ‘S’자 나무데크 등 다양한 길을 따라 갈대 사이를 거닐 수 있다. 하지만 이 부근에 있었다는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촬영 세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국적인 풍치를 물씬 풍긴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줄포에 왔으니 사진 한 장쯤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내 마을을 알아차렸는지 갈대밭에 글자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공원 안 수로에서는 물놀이 체험도 가능하다.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물길인데, 이 수로를 보트를 타고 돌아볼 수 있다.

 바둑 테마공원이란다. 부안이 고향인 한국 현대바둑의 아버지 조남철 국수를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 문득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바닷가, ‘불바르 공원(Bulvar Park)’에서 만났던 체스 판이 생각난다. 저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직접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입체화시킨 게 눈길을 끌었었다. 우리도 한번쯤은 시도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공원은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의자 하나까지도 돌을 쪼아가며 예술성을 가미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코끼리 조형물이 혼란을 주기도 한다. 공원의 2개 연못과 3개의 동산에는 20여종의 자생화초류 염생식물과 6종의 민물고기, 야생화 등이 터를 잡고 산다고 했다. 운이 좋으면 오소리나 재두루미, 백로, 바다오리 등의 야생동물도 볼 수 있단다. 그렇다면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다는 그 야생동물을 조형물로 만들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11 : 50. 다시 바닷가로 돌아와 이번에는 둑길을 따른다. 줄포의 침수를 대비하기 위해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연장 975m의 방조제를 쌓았다.

 왼쪽은 줄포만. 추위 탓인지 갯벌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니 시심(詩心) 하나 불러올만한 풍경도 잡히지 않는다. 밀물에 쫒긴 아낙들이 바지락이 가득 든 플라스틱 통을 들거나 머리에 이고 갯고랑을 따라 한 줄로 걷는 모습이 한 편의 서사시이자 한 폭의 풍경화라는데도 말이다.

 11 : 52. 방조제는 전망대 기능까지 수행하도록 했다. 도로변에 흙을 도톰하니 쌓아올려 대를 만들었다. 갯벌생태공원의 전모를 한꺼번에 살펴보라는 모양이다.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부안이라는 문자 조형물을 세워 사진 찍기 딱 좋도록 했다.

 언덕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발아래 놓인 습지는 물론이고 저 멀리 줄포시가지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곰소만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줄포는 한때 서해안 어업의 중심지였다. 조기의 3대 어장 중 하나인 위도가 가까이 있어 만선이라도 되면 줄포 또한 성황을 이루었단다. 그러나 갯벌의 퇴적으로 수심이 얕아지는 바람에 1938년 항구의 기능을 가까운 곰소항에 넘겨줬고, 90년대의 폐항을 거쳐 지금은 완전히 내륙의 땅이 되어버렸다.

 이즈음 마실길 팻말이 눈에 띈다. 명품 산책로로 꼽히는 부안 마실길은 새만금전시관에서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에 이르는 부안 땅을 둘로 가른다. 8개 코스(66km) 변산 마실길 6개 코스(97km) 내륙 마실길로 나뉘는데, 코스마다 붙여진 이름만으로도 탐방을 대신한다. 이중 8코스인 청자골 자연생태길은 이곳 갯벌생태공원에서 곰소염전에 이르는 11km 구간이다. 참고로 마실은 마을을 뜻하는 방언이지만 마실간다는 말로도 자주 쓰인다. 이때 마실은 이웃집으로 놀러가거나 가까운 곳으로 바람 쐬러 간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다니듯이 걸어보자.

 11 : 58. 방조제 끝, 공터는 작은 공원으로 꾸몄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는가 하면, 눈요깃거리 삼아 등대도 세워두었다.

 이후부터는 최근(2023 10) 개설된 신작로가 길을 안내한다. ‘분탕골로라는데 부안군환경센터의 오른쪽으로 지나간다.

 12 : 09. 잠시 후 방조제로 올라선다. 이어서 둑길을 따라 보안면(유천리)으로 들어간다. 둑 아래로는 2차선 도로인 분탕골로가 함께 간다.

 드넓은 신창들녘을 적시며 흘러온 신창천(버드내·줄내·남포천)은 하천이라기보다는 저수지에 가깝다. 방조제에 가로막힌 물을 두 개의 배수갑문을 통해 줄포만으로 흘려보내는데, 일정량을 항시 가두어두고 있는 모양이다.

 바닷가 간척지나 담수호는 빼놓을 수 없는 겨울철새 도래지다. 신창천 저류지에서도 철새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참고로 국립생물자원관의 2021~22년 겨울철 조류 센서스 결과에 의하면 부안군은 계화조류지, 동진강, 고부천 일원을 중심으로 황새, 흰꼬리수리 등 53 155,264여 마리의 철새가 겨울을 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매년 시행해오고 있다는 겨울철새 먹이주기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철새 무리는 하늘에서도 관찰할 수 있었다. 철새 도래지의 장관은 해가 뜨고 질 무렵 노을진 오렌지빛 하늘을 무대 삼아 펼치는 철새 떼의 현란한 군무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직접 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옛 사람들은 저 바다를 웅연조대(雄淵釣臺)’라며 변산팔경(邊山八景)’의 첫 번째로 꼽았다. 줄포만에 떠있는 어선에서 밝히는 불빛이 물에 어리는 풍경과 어부들이 낚싯대를 둘러메고 뱃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장관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려주는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안의 바닷가를 걸으며 느낀 첫인상은 돈을 쏟아 붓듯이 치장했다는 점이다. 그런 예산을 조금 할애해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안내판 두어 개쯤 만들어두었으면 어땠을까? 보는 재미에 읽는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찾는 이들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갯벌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둑을 쌓아 양식장을 만들었다. 대하양식장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바닷물고기를 기르는 듯한 양식장도 눈에 띈다.

 신창들녘 너머는 유천마을일 것이다. 마을 뒤 구릉지에 세계적인 고려 상감청자를 구워 낸 사적 제69 유천리 도요지(扶安柳川里陶窯址)’가 있다.

 12 : 21  12 : 40. ‘분탕골로는 방조제 끝에서 유천·호암로로 바뀐다. 이어서 호암마을(유천리)을 스치듯 지나간다. 도로 전체를 공원으로 꾸며놓은 멋진 구간이다. 덕분에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푹 쉬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많은 배수갑문을 만난다. 부안의 들녘 대부분이 간척사업에 의해 생겨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간척(干拓)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대단위의 역사는 민간자본이 형성된 일제강점기부터라고 보면 되겠다.

 13 : 02. 배수갑문이 가둬놓은 물길(다리가 놓였다)을 건너면 신복리(新福里) 땅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사장교 형식의 신활교로 만화천(萬花川)을 건넌다.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듯한 버팀기둥의 생김새가 눈길을 끄는데, 그게 한쪽뿐이라서 공사를 하다 만 느낌을 준다. ‘미완성 아닌 미완성이 주는 헷갈림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갯고랑을 따라 바다로 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방조제로 둘러싸인 들녘을 가로지른다. kakaomap은 이 구간을 구진길로 적고 있었다.

 이 구간에서도 갈대밭을 만날 수 있었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줄포만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갈대꽃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이 뭣꼬!’ 스님들의 화두만큼이나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보리밭으로 보이는 들녘에서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철새들로부터 보리밭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몸부림이라고 했다. 철새들이 보리의 잎은 물론이고 뿌리까지 다 먹어치우고 있지만, 철새보호구역에다 멸종위기의 철새들이라 포획할 수도 없어 깃발로 쫓아볼 따름이란다. 효과는 없었지만...

 13 : 20. 시쳇말로 호적초본에 잉크도 안 마른 신작로를 건너 구진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진서리(鎭西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구진·연동·진동·진서·백포·작도) 중 하나로, 천마산을 머리로 하고 남향으로 자리한 바닷가 마을이다. 구진(舊鎭)이란 이름 그대로 옛날 이곳에는 수군(水軍) 진이 있었다고 한다. 거무진이나 검모포(黔毛浦), 또는 검모포진(黔毛浦鎭)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마을의 오랜 역사는 마을 뒷산의 느티나무가 전해준다. 수령이 800년에 가깝다니 그동안 민초들의 겪었던 고난을 지켜봤을 터다. 거기다 나무는 영험하기까지 하단다. 나뭇가지라도 함부로 꺾으면 마을에 동토가 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마을 당산제의 대상이 될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안내판은 마을의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고려 말 여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역할을 했던 곳이 구진 마을이란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결정하고 고려로 하여금 전함과 수송선, 식량 등 모든 군사물자를 준비케 했다. 그 결과 이곳 검모포와 천관산(전남 장흥)에서 전국의 3 5백여 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크고 작은 전함 900척을 불과 넉 달 만에 건조했단다. 하나 더. 옆의 빗돌이 전하는 줄포만 탐방로는 대체 뭘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비슷한 시설도 보지 못했는데...

 13 : 32. 탐방로는 30번 국도인 청자로로 올라선다. ‘청자라는 도로명은 진서리에 있는 도요지(陶窯址, 사적 제70)로부터 얻어온 지명일 것이다. 11세기 후반에서 13세기까지 고려청자를 구워내던 다수의 가마가 이 부근 구릉지에 있었다니 말이다. 변산 재목창의 땔감과 질 좋은 자토(瓷土), 거기에 줄포항이란 조운로까지 갖췄으니 도자기 생산지로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도로 건너 곰소염전 7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부안의 유일한 염전이다. 곰소만의 주력 항구이던 줄포항이 토사로 메워져 입출항이 어려워지자, 1936-1938년 진서리(연동마을) 앞에 있던 범섬과 웅연도을 구진마을과 작도리로 연결하여 곰소항을 조성하면서, 그 내부 연동리 쪽으로 곰소염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46년의 일인데 당시만 해도 소금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전매품이었다.

 겨울철 염전은 길고 깊은 잠을 잔다. 때문에 염전 본연의 풍경, 즉 뜨거운 태양 아래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소금가루가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염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는 해의 노을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그네들의 구릿빛 피부는 언감생심이라 하겠다.

 안내판은 단짠단짠 곰소염전 방문기라며 곰소염전의 단맛이 나는 소금을 소개하고 있었다. 허영만의 만화를 영화화한 식객의 무대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인다. 한편 tvN 예능프로그램 일로 만난 사이에서도 소개됐다. 2019년 유재석과 임원희, 지창욱이 함께 곰소염전에서 일을 했다. 소금 모으기·나르기·포장하기 등 힘든 노동을 치르면서 단짠 케미를 보여주는데, 유재석은 당시 단짠단짠의 조화로 식혜와 낙지젓갈을 함께 먹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해안생태·문화탐방로는 귀여운 장승을 마스코트로 삼았다. 변산반도는 산세가 빼어나고 해안 경치도 아름다운 곳. 반도 전체가 국립공원이다. 그래선지 서해랑길 등 다양한 걷기 코스가 마련돼 도보여행에 맛들인 이들이 몰려든다. 해안생태·문화탐방로도 그중 하나이다.

 맞은편에 있는 슬지제빵소는 이색 찐빵을 판매하는 핫플레이스다. 지역에서 나는 팥으로 만든 찐빵과 소금커피가 입소문을 탔다. 이쯤해서 의문점 하나. ‘찐빵과 커피의 조화가 상상되시나요?’ 우선 찐빵은 팥을 직접 만들기 때문에 많이 달지 않고 건강한 맛이란다. 또한 시그니처 커피인 곰소 소금커피는 아이스라테 커피에 흑당과 발효소금 시럽을 섞어 단짠단짠한 맛이 일품이란다. 그게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나?

 곰소로 가는 해안도로 주변은 양식장이 수도 없이 많다. 그 대부분은 대하 양식장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근에는 왕새우 직판장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부안에서 가장 친근한 해산물은 바지락이다. 새만금방조제 사업 이후 종적을 감춘 백합과 달리, 바지락은 지금도 부안 갯벌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인삼을 곁들인 바지락죽, 갖은 야채와 고춧가루 양념으로 버무린 회무침 등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13 : 45. ‘곰소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진서리 앞바다의 곰섬을 중심으로 동쪽의 범섬과 연동, 서쪽의 까치섬과 작도리를 잇는 제방을 쌓아 육지로 만들면서 곰소항 일대가 축조되었다. ‘곰소(熊淵)’란 지명은 곰처럼 생긴 두 개의 섬 앞에 깊은 소()가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과거 소금을 곰소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웅연(熊淵), 웅소(熊沼), 웅연도(熊淵嶋) 등으로도 불렸다. 2009 1 1일 진서면 진서리에서 면소재지가 있는 곰소리가 독립된 법정리로 분리·설치되었다.

 이정표(종점까지 1.4km)는 번거로운 시가지를 피해 바닷가로 우회시킨다. ‘서해랑길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거대한 팽나무 고목이 바닷가 공터에서 자라고 있었다. 44코스를 걸어오는 동안 꽤 많은 당산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저 나무도 어딘가에서 자라던 당산나무를 범섬공원 근처로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곰소만(곰소에 왔으니 이제 줄포만에서 벗어나야겠지?)에 어깨를 맞댄 부지는 널따란 광장을 중심으로 공연장과 회센터, 젓갈센터 등 여러 시설들을 들어앉혔다. 전라북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큰 어항의 위세를 이어가기 위한 야심찬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젓갈 발효축제 알주꾸미 축제 등의 축제도 이곳에서 열린다.

 바닷가로 나가면 곰소만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국의 갯벌은 모두 일곱 군데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있다. 서해 북쪽부터 송도, 대부도, 서천, 고창·부안, 무안, 증도, 순천만·보성 갯벌 등이다. 이중 고창·부안 갯벌의 면적이 45.5로 가장 넓다.

 축제가 잦으니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은 당연. 이들을 위한 포토죤을 만들어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중 하나가 곰소역이다. 열차가 다닌 일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다닐 일이 없는 곳에 철로를 깔고 역사를 지었다. 뜬금없는 발상이지만 사진 찍기에는 딱 좋았다.

 철로의 매력 포인트는 선로 위로 올라가 중심을 잡아보는 맛이 아니겠는가.

 탐방로는 바닷가를 따라 곰소항으로 간다. 이때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난다. 바닷가답게 돌고래나 소라 같은 바다 생물들을 조형물로 제작해 전시했다.

 잘못된 표기라고 지적했던 글자 조형물이다. ‘C’가 아니라 ‘G’가 되어야 한다며 혀를 차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 선생이 낚시꾼을 포함시키면 ‘G’자가 된다고 알려주신다. 작가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왕새우는 곰소항의 또 다른 특산물이다. 오늘도 수많은 대하양식장을 만났었다.

 곰소항은 하루 130여척의 어선이 드나들 정도로 활기를 띤단다. 최근에는 젓갈로도 유명해졌다. 곰소항의 풍부한 수산물에 미네랄 풍부한 곰소염전의 소금이 더해져 맛좋은 젓갈이 생산된단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오징어젓갈에 가리비젓갈까지 각단지게 챙겨본다.

 곰소항에 가까워지자 죽도(竹島)’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곰소는 예전에 섬이었다고 한다. 1938년 작도와 웅도를 잇는 제방을 쌓으면서 육지가 됐다. 덕분에 과거 선인들이 묘사하던 웅연도(態淵島 : 곰섬) 앞바다 풍경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곰소항은 빼어난 일출과 일몰의 풍경을 자랑하며 장관을 이룬다.

 14 : 10. 곰소항 조금 못미처에 있는 회센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부안 45코스) 안내도는 회센터 뒤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35분을 걸었다. 앱이 15.7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43코스(선운산 버스정류장-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12. 23()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부안면·흥덕면 일원

여행코스 : 선운산 버스정류장연기제질마재진마마을(서정주 생가)신기마을반월마을상포마을김소희 생가사포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21.1km, 실제는 미당시문학관부터 11.61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3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미당 시문학관, 김소희 생가 등을 꼽을 수 있다.(이 글은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들머리는 선운산 버스정류장(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와 22번 국도를 타고 법성포·상하(선운사) 방면으로 달리다가 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잠시 후 선운사 입구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고창43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3개 코스(4143코스, 49.9km)로 이루어진 고창구간의 마지막 여정이다. 이름처럼 고창 갯벌을 따라 북상하던 서해랑길(41코스)이 느닷없이 방향을 틀어 선운산 자락을 헤집더니(42코스, 선운산을 샅샅이 뒤져본 적이 있기에 생략했다), 43코스에서 다시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간다. 길이는 21.1km, 초반에 소요산 임도를 끼고 있어선지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다.

 선운산으로 가는 입구.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2023년을 맞아 예쁜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원래 꽃으로 장식된 아치였는데, 이게 영하 10도를 훌쩍 내려가는 동장군에 눈보라까지 몰아치다보니 콘크리트를 쏟아 부은 구조물로 변해버렸다.

 선운산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암석들이 곳곳에서 수직 암벽을 이룬다. 그중 한 곳에서 송악(천연기념물 제367)’이 자란다. 송악은 나무나 바위를 붙들고 자라는 일종의 덩굴 식물이다. 제주라면 밭담이나 숲 등 흔하게 보이지만 적어도 육지에는 귀하신 몸이다.

 10 : 48. 실제 출발은 선운리(부안면)에 있는 선운리 삼거리에서 했다. 21.1km나 되는 거리는 물론이고, 계속된 폭설주의보로 눈이 수북이 쌓여있을 게 뻔한 산길(임도를 따를 수도 있다) 구간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8km를 단축하는 셈이 됐다.

 이후의 답사도 서해랑길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바닷길보다 김성수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 같아서다. 삼거리에 세워놓은 해안문화 마실길 안내도를 따르면 되는데, 이 마실길은 이곳에서 출발해 김성수 생가와 김소희 생가를 거쳐 목우마을까지 간다.

 길을 나서기 전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미당시문학관으로 향하는데 전면에 소요산(逍遙山 444.2m)’이 놓여있다. 서해랑길은 저 산의 허리 깨로 난 임도를 따라 이곳으로 온다. 그러다 중간에서 길마재란 고갯마루를 넘는다. ‘길마란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키는 우리말. 서정주 시인이 1975년 펴낸 대표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는 길마가 구개음화가 안 된 상태로 굳어지면서 질마가 됐다.

 10 : 51-11 : 12. 첫 만남은 미당시문학관’. 삼거리에서 바람개비가 인도하는 대로 80m쯤 들어가면 나온다. 선운분교(봉암초등학교) 폐교 후 건물을 개보수해 2011년 문을 열었다. 미당의 유족들이 기증한 4,000여 점의 유품 전시공간이 있고 미당과 그의 시를 소개하는 영상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다.

 미당의 대표 시는 冬天’? ‘국화 옆에서로만 알아오던 내 설익은 앎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문학관 표지석 오른편에 떡하니 앉아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실루엣 처리된 미당이 맞는다.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이란다. 하지만 시성(詩聖)으로까지 추앙받던 시인은 친일파로 낙인찍혔고, 그런 다음에는 손님으로 들끓던 미당시문학관도 찾는 발길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벽면은 미당과 가족, 친지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미당을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니 그의 약력도 빠질 리가 없다. 벽면에 질마재의 유년시절과 퇴학당한 소년(·소년기), 방황과 열정의 천재적 개성출현(청년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한국 시문학의 대표작들(중년기), 만족 없는 탐구, 세계여행과 산 이름 외우기(노년기) 등 유·소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공간 대부분은 미당의 주옥같은 작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구들을 음미하며 미당을 키웠다는 바람을 만나보면 어떨까? 우리네 빈 가슴이 그 바람으로 채워질지 누가 알겠는가.

 패널이나 액자 등 작품을 전시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심지어는 유리로 터널을 만든 다음 대표작들을 그 벽면에 적고 있었다.

 미당의 남현동(서울) 자택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미당 문학 마지막 30(1970-2000)의 산실이란다. 운보가 그린 미당 초상화, 남정 박노수 화백의 시화, 가야금, 친필이 들어있는 도자기, 세계 125개국을 집고 다녔던 지팡이가 생전 그의 일상생활의 취향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육필 원고도 눈에 띈다. 이밖에도 그동안 발간됐던 작품집, 서간, 낙관, 늘그막에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을 모자·담배파이프·지팡이 등도 진열되어 있다. 참고로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2000 10 63년을 함께 산 부인이 세상을 뜨자 곡기를 끊고 그해 12월 하늘로 돌아갔다. 미당은 10대의 습작 시기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로병사에 따르는 온갖 감정이 실린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미당의 시와 삶은 후배 문인들의 시선을 통해 전해준다. 고은, 이어령, 김춘수 등 쟁쟁한 이름들이 빈 여백을 가득 메운다.

 옥상 전망대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미당을 오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작품들도 만난다. 1943년부터 1944년 미당이 썼던 친일의 글에 관해 감추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명확하게 드러내어 방문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종천친일파(從天親日派)’라는 자기변명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옛 학교 건물과 잘 어울리는 새 건물은 5층으로 지어졌다. 미당의 작품과 자료들은 각 층의 전시실로도 부족해 계단의 벽에까지 걸려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음미해가며 오르다보면 어느덧 옥상 전망대.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미당이 잠들어 있다는 안현마을의 뒷산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대신 창문을 통해 변산반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11 : 12. 문학관 옆 질마재권역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체험관광과 도농교류, 주민소득 등 다양한 분야의 개발을 추진하는 본부쯤 되는데, 진마마을·서당마을·신흥마을(선운리)과 안현마을(송현리)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단다. 이들의 노력으로 샘과 도깨비집 등 서정주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장소와 소재가 옛날처럼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문학관과 문화센터의 경계에 놓여있는 저 자전거 조형물은 무엇을 전하고 싶을까?

 2차선인 질마재로(소요산 방향)’를 따라 100m쯤 가다 첫 삼거리에서 진마안길로 바꿔 마을로 들어간다. ‘미당 서정주가 태어나 자랐다고 해서 미당길로 불리다가 서정주의 친일행적과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찬양이 알려지면서 이름까지 빼앗긴 서글픈 길이다.

 11 : 18. 잠시 후 진마마을 어귀에서 서해랑길을 만났다. 서해랑길 트랙은 8.8km를 찍는다. 내 앱은 0.8km, 정확히 8km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곳 진마마을(선운리) 질마재 시인마을로도 불린다. 시인 서정주가 나고 자란 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도 그가 지은 산문시집 질마재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서 꾸며놓았다.

 당산나무 아래, 바위를 다듬어 만든 조형물이 눈에 띈다. 이후 길 따라 걷다보면 이런 조형물들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미당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산문시를 주제로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미당이 환갑에 펴낸 시집 질마재 신화는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미당 특유의 언어로 되살린 것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제 마을 주민이었으며, 시집에 나오는 외가 터는 물론이고 서당·빨래터·우물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웃돔샘도 복원해 놓았다. 삼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으로 미당은 이 샘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간통사건과 우물이라는 시를 썼다. ! 근처에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도깨비와 부자 된 설막동이네의 도깨비집도 있다는데 들러보지는 못했다. 때문에 나무로 조각된 여러 형상의 도깨비들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도깨비집이 복원되어 있다는 걸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불찰을 탓할 따름이다.

 정떼는 방법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란다. <모시밭골 감나무집 과부는 마흔에도 눈썹이 쌍긋한 제물향이 스며날 만큼 이뻤었는데. 여러 해 동안 도깨비 사잇서방을 두고 전답 마지기가 좋아 사들인다는 소문이 그윽하더니. 어느 저녁엔 대사립문에 인줄을 느리고 뜨끈뜨끈 맵고도 비린 검붉은 말피를 쫘악 그 언저리에 두루 뿌려놓았습니다>

 상가수(上歌手)의 소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조형물은 나무에 살짝 가려있다.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기상청은 연일 한파의 맹공을 외쳤었다.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수은주가 되돌아오지를 않는다면서. 그런 추위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고드름이 만들어내는 진풍경. 흡사 주렴을 늘어뜨린 것처럼 매달려 있는 저런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11 : 24. 잠시 후 만난 미당의 생가. 미당은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아홉 살 무렵 보통학교에 입학하려고 인근의 줄포로 이사했다. 1942년 부친이 죽은 후 친척이 개조해 거주하다 1970년경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 2001년에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면 4, 측면 2칸의 초가지붕 본채, 정면 3, 측면 2칸의 헛간이 있는 초가지붕 아래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생가 곳곳에는 그의 시와 글을 세긴 빗돌을 세워놓았다. 건물의 벽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동천, 국화 옆에서 등 그의 대표시를 적은 아크릴 판이 곳곳에 붙여져 있다.

 서정주 시인의 생가 바로 옆에는 우하당(又下堂)’이란 현판이 걸린 작고 아담한 기와집 두 채가 서 있다. 이곳에서 미당의 동생이자 시인인 서정태 옹이 살았었다. 그는 우리 나이 여든 일곱부터 질마재가 한눈에 보이는 미당 생가 옆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홀로 시를 쓰며 지냈다. 그리고 아흔을 넘겼어도 꼿꼿했던 당신은 2020 3월 돌아가셨다.

 선운리 마을회관  질마재권역 시문학체험관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문이 열렸다고 해도 체험을 해볼 여유는 없었겠지만.

 뒤돌아본 시인의 마을’. 길이 실개천을 따라 마을을 관통하도록 나있다.

 동구 밖 장승이 눈길을 끈다. 마을은 저렇듯 잘 가꾸어져 있다. 축제의 고장 고창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고창은 1월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선포식을 시작으로 3월 벚꽃축제, 4월 청보리밭축제, 5월 바지락페스티벌, 6 (복분자·수박·갯벌)축제, 7월 한여름 밤의 페스타 등이 쉼 없이 이어졌다. 마케팅 전략도 뛰어나다. 8 고창으로 여름휴가오세요’, 9~10 단풍이 피어나는 가을, 고창으로 오세요’, 11~12 겨울의 특별한 기억, 설창 고창에서 함께해요처럼 시기와 테마에 맞는 맞춤형으로 전개한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질마재 시인마을 복합문화공간’. 문화 공간 외에도 카페와 책방(북 카페)이 들어서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11 ; 35. ‘선운리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따른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서해랑길 대신 해안문화 마실길을 걸어보기 위해서다.

 11 : 39. 잠시 후 안현(鞍峴, 길마재 밑에 있는 마을이란 뜻)’ 마을에 이른다. 동구 밖 표지판은 안현 돋음볕마을로 적고 있었다. ‘처음으로 솟아오르는 햇볕이란 뜻을 담은 애칭이란다. 이 마을은 국화 옆에서로 대변된다. 서정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마을 뒷산에 국화꽃을 심고, ‘100억 송이 국화축제를 여는가 하면, 담벼락을 국화꽃으로 채워 넣었다. 2008년에는 SBS ‘패밀리가 떴다의 촬영지가 되면서 전국적인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안현마을은 국화마을로 통한다. 애칭처럼 모든 집 담과 지붕에 국화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다. 송주철 공공디자인연구소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모티브로 그린 벽화라고 한다.

 마을 앞. 간척으로 인해 생긴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연이어 며칠을 내린 폭설 때문이지 세상은 온통 하얗다. 그 너머에서 변산반도가 성큼 다가온다. 아름답다.

 11 : 58. ‘신기마을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송현리(松峴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고잔·안현·신기) 중 하나다.

 버스정류장 옆 이정표(김성수생가 1.2km/ 김소희생가 11.7km/ 손화중피체지 0.6km/ 미당시문학관 1.7km)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해랑길(김소희생가)로 되돌아가란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해안길보다는 문화재인 인촌 김성수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버스정류장 맞은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인 손화중 피체지(孫華仲 被逮地)’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고창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손화중은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대표적인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꼽힌다. 나주성 싸움에서 패한 뒤 도망 다니던 손화중이 이 근처 이씨 재실에 숨어 있다가 재실지기의 고발로 체포당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화중 스스로가 재실지기에게 자신을 고발하여 상금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2 : 03. 잠시 후 이번에는 와우형 지형이라는 고잔마을을 지난다. 소의 머리, 등허리, 꼬리에 해당하는 모양이 남향으로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마을이다. ‘당산굿 줄다리기로도 유명한데, 줄을 잡아당겨야 누워 있는 소가 일어난다고 하여 줄 당기는 것으로 정성을 들인다고 한다.(사진은 마을경로당)

 계속해서 ‘734번 지방도를 따라 북향한다. 길은 인촌로란 이름표를 달았다. 인촌 김성수의 생가로 이어지는 길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하나 더. 인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면서 길의 이름 또한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진마마을의 미당길과는 달리 인촌로는 아직까지 본래의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12 : 10.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인촌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인촌·봉오·죽도·고당 또는 할미당)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이곳에 있다. 김성수의 인촌(仁村)’이란 호는 그가 태어난 이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동구 밖 정자나무는 하나가 아니고 두 그루나 된다. 소나무(수령 224)와 느티나무(수령 231)로 수종이 다르지만 하도 오래 묵다보니 굵기가 장난이 아니다. 둘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늘에 참새방앗간인 정자(仁村亭)까지 지어놓았다.

 12 : 16. 300m쯤 들어갔을까 솟을대문의 거대한 저택이 반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정치·언론·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의 생가이다. 또한 김성수와 동생이자 민족자본 육성의 대표자인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1896-1979)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봄, 이 고장을 휩쓴 화적떼의 행패로 부안군 줄포로 이사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여 보존해 오다 1977년 김연수가 옛 모습 그대로 보수·복원했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태어난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화려한 이력을 적고 있었다.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동아일보, 삼양사, 중앙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경영해왔단다. 하지만 전라북도 기념물(39)임을 알리는 공식 안내판에는 그네들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적고 있었다. 맞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김성수는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 편에 섰다. 막대한 국방헌금을 냈고 전쟁을 미화하는 시국강연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일제의 전쟁 동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조선 청년들의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언론에 여러 차례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 미군정의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선임되는가 하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우익의 거물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다 6.25 전쟁의 혼란 속 부통령으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작은댁(수당 김연수의 옛집) 사랑채. 1903년 김성수의 친부인 지산(芝山) 김경중(金璟中)이 지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사랑채 앞에 작은 아들인 김연수와 함께 김경중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풍수전문가들의 얘깃거리로 자주 등장하는 이 있다. ‘진응수(進應水)’로 길지의 증거가 되고 그러한 땅은 삼정승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를 그 증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김연수의 아들인 김상협 국무총리는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언제 태어나게 될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일 따름인데...

 문간채를 지나면 작은댁 안채. 188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樂薺) 김요협(金堯莢)이 건립했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마루에는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자 20대 및 21대 국회의원인 정운천씨가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놓여있었다. 김성수와 친척인 그는 김성수가 설립한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김성수처럼 정치가의 길을 걷고 있다.

 작은댁과 큰댁은 통로문으로 연결된다. 외부로는 솟을대문을 따로 두었다. 인촌 생가는 긴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다 낮은 담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큰댁, 남쪽에는 작은댁을 배치했다. 한 대지에서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생가 규모도 커서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거주 환경 및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단다.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이 지었다는 문간채를 지나면 큰집 사랑채. 1879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참고로 좁은 의미의 김성수 생가는 이곳 큰댁을 말한다. 김성수의 큰아버지(김기중)과 아버지(김경중)가 한 울타리 안에서 위채와 아래채로 나누어 살았는데, 김성수가 아들이 없는 김기중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이다. 김경중의 집은 작은 아들인 김연수가 물려받았음은 당연하다.

 사랑채 앞의 동상.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김상만의 부인 고현남, 김상만,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 순이다. 참고로 김상만(1910~1994)은 인촌의 장남으로 해방 이후 동아일보 사장, 국제신문협회 본부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또 다른 문간채를 지나면 큰댁 안채. 186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생가는 아름다운 굴뚝과 꽃담도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다. 기와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패턴이 얼마나 많은지를 자랑하려는 듯 보무도 당당히 서있다.

 12 : 37. 도로(734번 지방도)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북쪽 방향이다.

 12 : 45. 8분쯤 후 도착한 농원마을은 법정 동리인 상암리(象岩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석암·원당·쥐섬·농원·신농원·반월·상포) 중 하나로, 1954년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원(農園)을 조성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은흥촌(恩興村)’으로도 불리는데 초등학교(봉암)와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12 : 48-12 : 58. 마을에 들어서니 봉암삼거리건강원 주인아주머니가 커피를 대접하겠다며 붙잡는다. 여섯이나 되는 인원이 부담스럽지도 않는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따끈따끈한 국산차를 대접한다. 객지에서 살다가 귀향했다는 50대 주부인데 자신의 고향을 찾은 외지인들이 고마워서 무언가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따뜻한 인심에 이끌려 한참이나 한담을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섰다.

 12 : 59. 상암 보건진료소를 지난다.

 왼편에는 상암저수지가 있다.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척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소중한 수원이다.

 북진(北進)을 고집하던 도로가 농원마을을 지나면서 동진으로 바뀐다.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들어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 어디쯤에서 서해랑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13 : 15. 내 예상은 옳았다. ‘신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부안면소재지로 가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버리고 바닷가로 나아가는 수앙·신촌길을 따르기로 했다.

 하룻밤 머물러보고 싶을 정도로 잘 지어진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나는 홍천 농장에 저런 한옥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아직까지도 서울 근교의 산속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한옥에 대한 로망까지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사거리(13:22)에서는 오른쪽이다. 사포리를 향해 바닷가로 가는 길(사포상암로). 진행방향 저 멀리에 거대한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게 방장산이라는 것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도움을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오래전이지만 지금처럼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철에 저 산을 올랐었다. 하지만 지리에 어두운 난 산만 내려오면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금방 잊어버린다.

 순백의 들녘 너머는 곰소만(고창에서는 줄포만이라고 할 것이다). 그 뒤를 변산반도의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받쳐주는데, 저 봉우리 사이 계곡 어디쯤에 전나무길이 일품인 내소사가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철새 무리가 떼를 지어 하늘을 난다. 맹추위에 쫓겨 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14 : 06. 드디어 서해랑길과 마주한다. 줄포만에 이른 것이다. 정확히는 갈곡천의 하구역(또는 汽水域)쯤 되겠다. 갈곡천(葛谷川)은 고창 신림면(가평리)의 방장산에서 발원하여 부안면 중흥리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15.77km 길이의 하천이다. ! 오는 도중 양지바른 곳에 앉아 20분 동안이나 새참을 즐기기도 했다.

 서해랑길 표식은 자전거도로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과 저전거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향을 헷갈리게 만드는 못된 이정표(상암리와 김소희생가의 방향을 바꿔놓았다)도 눈길을 끈다.

 이후부터는 갈곡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도 아닌 것이 강도 아닌 것이 몸집만 몽땅 부풀려놓았었던 모양이다. 양안에 방조제를 쌓아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길은 그 방조제 위로 나있다.

 이즈음 우린 유난히도 많은 저수지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수인지 아니면 담수인지는 몰라도 크고 작은 저수지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서해랑길을 만나면서 고창 갯벌을 마주한다. 고창 갯벌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연유산이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갯벌 면적은 55.31. 고창갯벌센터가 있는 만돌 해변(41코스)에서 시작해 부안 땅 앞까지다.

 길은 갈곡천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천은 거슬러 올라갈수록 몸매를 줄여나간다. 그러더니 이내 갯고랑으로 변해버린다.

 14 : 15. 수양배수장. 둑을 쌓아 들녘을 만들어내는 간척사업에서 빠질 수 없는 시설이다.

 오른쪽으로는 그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종점에 가까워지면서 갈대꽃의 군무가 길손을 반긴다. 맞다. 43코스의 종반은 아름다운 갈곡천을 따라 걸으며 갯벌과 갈대를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갈대 너머로 내장산이 거대한 몸짓을 드러내면서 춤사위에 흥을 돋운다.

 오늘은 폭설주의보에 잔뜩 쫄아 코스를 1/3이나 줄였다. 그런 결정이 마음까지도 한껏 여유롭게 만들었나보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마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되는 걸 보면 말이다.

 갈대로 한가득인 갈곡천 갯고랑 너머로는 후포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우리가 따르고자 했던 해안문화마실길은 저 마을을 지나 목우마을까지 간다.

 14 : 30. 아까 갈곡천의 하구역에서 헤어졌던 사포·상암로와 다시 만났다. 길가 이정표(김소희생가 0.2km/ 부안면방향/ 미당시문학관 13.2km)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갈곡천을 건너란다.

 갈곡천에는 배수관문이 설치되어 다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바다와 경계를 나누는 셈이다.

 배수갑문은 전망대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줄포만을 향해 나아가는 갯고랑이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조류 관찰대도 만들어 놓았다. 맞다. 이곳 갈곡천에는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인 황새, 매와 2급인 검은목두루미, 말똥가리, 새홀리기 등 7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침수지는 갈대만 무성할 뿐 텅 비어 있었다. 전문가들이 확인했다던 그 철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4 : 35. 서해랑길 표식이 사포마을에 잠시 들렀다가란다. 김소희 명창의 생가가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느냐면서. 맞다. 고창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김소희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유명한 명창이다. MZ세대들에게야 낯설겠지만 우리네 소리를 좋아하는 장년층에게는 요즘의 아이돌만큼이나 인기가 높았었다. 하나 더. 이밖에도 고창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 선생과 그가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이 태어나 곳이기도 하다.

 생가는 정면 4, 측면 한 칸의 ''자형 안집과 헛간채로 이루어진 초가집이다.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먹고살만한 살림살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진마마을에서 살던 서정주의 집만큼은 아니었던 듯. 같은 초가집이지만 격자무늬 방문을 달았던 서정주의 집과는 달리 김소희의 집은 소박한 띠살문을 달았다. 우리네 기억속의 고향집처럼...

 문루 중앙. 편액 대신 사진을 걸었다. 문득 김소희의 판소리에는 희다가 겨운 백자의 옥빛이 어려 있다던 미당 서정주의 칭찬이 떠오른 것은 그녀의 단아한 얼굴 때문이었을까?

 1917년 이곳에서 태어난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본명은 김순옥)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국악에 입문했다. 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기악을 두루 배우면서 명창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창극좌 입단(1937)여성국악동호회 조직과 한국민속예술학원 창설(1945)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 지정(1964)국악협회 이사장(1993) 등을 거치면서 일생을 국악 발전에 바쳤다. 1995년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길은 우리를 사포마을로 인도한다. 법정 동리인 사포리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사포·고사리바탕·새터·술항골·회목) 중 하나로 사포(沙浦)’라는 지명은 갯가에 모래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다. 어선의 접안이 편리해서 19세기까지 흥덕골에서 거둬들인 세미를 쌓아두던 창고가 들어서 있는 등 호황을 누렸으나 토사의 유입으로 폐항(廢港)되었다고 한다.

 14 : 45. 사포경로당과 반석교회를 차례로 지나면 어느덧 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서해랑길 43코스의 여정은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부안 44코스) 안내도는 정류장에 기대듯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1.6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미당 시문학관과 김성수 생가, 김소월 생가 등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버스정류장 뒤에는 무명의병충의위령탑이 들어서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의 조총·화총에 맞서 죽창·화살로 싸우다 전멸한 무영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최일수라는 독지가가 세운 탑이란다.

 그 옆에는 해주최씨 가문에서 삼강문을 세워놓았다. 삼강(三綱)이란 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강조한 세 가지 덕목(··)이다. 이 집안은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 최서생을 충(), 그의 아들인 기종을 효(), 그리고 열()은 서생의 부인 문화유씨를 내세운다. 화순에 살던 유씨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인 기종과 종인 순동을 데리고 70여 킬로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 아들을 순동에게 부탁한 다음 사진포(사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유씨의 열행비 옆에 노비 순동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지독한 감기로 요 며칠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받는 것보다는 더 많이 베푸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미국 코넬대학 교수이자, 인간생태학분야의 최고권위자인 칼 필레머(Karl Pillemer)’의 주장을 실천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서해랑길 41코스(구시포해변-심원면사무소)

 

여 행 일 : ‘23. 11. 11()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구시포해변명사십리해변동호해변서해안바람공원람사르고창갯벌센터심원면사무소(거리/시간 : 19.7km, 실제는 명사십리해변에서 갯벌센터까지 14.77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1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의 서쪽 해안을 따라 걷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명사십리해변과 장호해변, 바람공원, 갯벌식물원 등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구시포해수욕장(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내려와 15번 지방도(아산방면), 대동교차로에서 733번 지방도(해리방면), 지로삼거리에서 22번 국도(법성포방면), 상하교차로에서 다시 733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시포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고창41코스) 안내도는 군청 이동봉사실 앞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고창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구간 거리가 19.7km로 다소 긴 편이나, 전체가 평지길이라서 걷는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난 5km쯤 단축해 법장천 배수갑문(지도에서 두 번째 파인 지점)부터 걸었다. 12km를 한도로 걷고 있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다. 이런 엄동설한에 혼자 걷는 시간이라도 줄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구시포 해변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해넘이라고 했다. 저물어가는 해가 가막섬에 걸치면서 만들어내는 노을은 우리나라 최고의 일몰 명소로 손색이 없단다. 그런데 그 가막섬이 방파제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산악회 버스를 타고 들어온 가막섬에는 항구가 들어서 있었다. 조수간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바다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고나 할까? 하지만 난 와인 잔을 형상화 한 등대가 더 흥미롭다. 이곳 고창은 복분자의 고장. 등대는 복분자로 만든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으로 가득 채워놓은 모양새이다.

 그런데 저 호랑나비 조형물은 무엇을 의미는 걸까? 어쩌면 이곳 고창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임을 알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올해 봄 호랑나비가 보여주는 자연의 신비, 호랑나비야 돌아와라는 주제로 호랑나비에 관한 전시회까지 열리지 않았던가.

 해상펜션이란다. 다른 지역은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주로 갯벌체험을 온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머문다고 한다. 아늑하게 생긴 돔 안에 취침·취사 시설은 물론이고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갑판에서 바비큐 파티까지 가능하다나?

 또 하나의 포인트인 장호 갯벌체험장은 출발지로 가는 도중 차를 잠시 멈추고 둘러봤다. 위도를 마주보고 있는 장호마을 앞바다 갯벌은 마을 어촌계 소유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활동은 많은 부분에서 제약을 받는다. 소정의 금액을 낸 이들만 너른 갯벌에서 큼지막한 동죽조개를 캐고, 단단한 모래사장에서 승마체험을 할 수 있다.

 해변으로 내려서자 명사십리로 불리는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자를 대고 그린 듯한 직선의 길이가 무려 8.5km에 달한다니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 특징인 서·남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라 하겠다. 덕분에 해변승마를 즐기려는 승마동호인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바닥이 단단한데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해변이 길기까지 해 말을 타고 달리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장호마을에는 외승 체험이 가능한 해변승마클럽도 있다.

 해변은 각종 체험을 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고 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모래사장은 텅 비어있었다. 하나 더, 백제시대 상로현이었던 이 지역은 신라시대인 757(경덕왕 16) ‘장사현으로 이름을 바꾼다. 연안에 길고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길 장()’ 모래 사()’를 썼다. 그게 인근 무송현과 합쳐지면서 무장현이 됐고,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지고 상하면 해리면이 됐지만...

 장호어촌 체험마을은 이곳(주민들은 해변쉼터라 부른다) 말고도 갯벌체험장(마을에 있다)과 명사십리 해양파크를 포함한다. 체험활동도 조개채취나 승마체험 말고도 어망체험이나 후릿그물체험, 고개껍질꾸미기, 새우잡이 등이 진행된다.

 12 : 18-20. 실제 출발지는 법장천 배수갑문’. 41코스 시작점(구시포)에서 5.5km쯤 떨어진 지점으로, 12km를 한도로 트레킹을 이어가고 있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참고로 집사람은 시작점에서 9.3km쯤 떨어진 전북수산기술연구소에서 출발했다.

 길가 이정표는 서해랑길이 국가생태문화탐방로와 함께 쓰고 있음을 알려준다.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고창군을 구석구석 돌아 볼 수 있는 탐방로로 내륙습지인 운곡습지와 연안습지인 고창 갯벌습지, 고창읍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창 고인돌유적지 등을 걸으며, 고창의 역사와 문화, 생태계가 공존하고 있는 자연환경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오른편은 법장천(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의 유수지. 방조제에 갇힌 물길은 꽤 넓은 호수를 만들었다. 그 뒤로는 방조제를 쌓아 만든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12 : 20. 북쪽으로 난 명사십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참고로 법장천 배수갑문은 상하면과 해리면의 경계이다. 상하면의 장호리에서 해리면의 사반리로 넘어간다. 그러니 41코스의 상하면 구간은 버스로 이동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 구간은 걷는 내내 소나무 숲과 함께한다. 명사십리 해변은 개방형 조간대(朝間帶)라고 한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모래 공급이 쉬워 바닷가에 풍성사구가 형성됐다. 이 해안사구에 방풍림 역할을 하는 해송 숲이 들어섰는데, 도로가 이 숲을 헤집으며 나있는 것이다.

 12 : 31. 명사십리를 포함하는 이 구간은 조망 좋기로 입소문을 탔다. 저녁이면 바다는 노을로 덧씌워지기까지 한단다. 그런 명소를 지자체가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곳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객들을 끌어 모은다.

 난간에 서면 확 트인 바다와 어우러지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때만 잘 맞추면 저 멀리 위도 너머로 떨어져가는 해를 볼 수도 있단다. 온 세상을 물들여버리는 저녁노을은 덤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저 멀리 변산반도가 놓여있다. 하나 더. 이곳도 역시 해변이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모래의 질도 특이하다고 했다. 다른 곳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게 아니라, 판판하게 다져진 게 걷기에 딱 좋단다.

 도로 주변 곳곳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펜션들도 명사십리 해안도로를 꾸며주는 멋진 풍경이 된다.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을 베개 삼아 하룻밤 동화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겠다.

 12 : 41. 서해랑길을 걷다보면 각 지역에서 대표 음식을 만난다. 그동안 목포의 홍어를 비롯 증도 짱뚱어, 무안 낙지, 영광 굴비 등을 만났었다. 일부는 어떤 형태로든 조금씩 맛까지 보면서 지나왔음은 물론이다. 이곳 고창은 장어라고 했다. 그래선지 길가 곳곳에 장어집이 들어서 있었다.

 저건 상부마을(광승리) 포구쯤 되겠다. 물양장은 물론이고 선착장까지도 갖지 못했지만, 꼬맹이 어선 몇 척이 출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다. 이 일대는 칠산어장의 배후지역으로 예로부터 조기, 꽃게 등 어족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2 : 46. ‘명사십리 해양파크라고 한다. 인근 동호·구시포해수욕장 등 관광지와 연계한 어민 소득 창출을 위해 세운 시설로, 갯벌체험 후 씻는 샤워장이나 공연장 말고도 냉동창고 등 수산물 처리가공시설과 수산물 판매장, 횟집, 토산품 판매점 등을 갖추었다. 일종의 어촌 종합유통센터라고나 할까?

 2009년 문을 열었다는 해양파크는 수산물처리가공시설과 수산물판매장, 횟집 등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근처에 포구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공사가 한창인 저 방파제가 그 대안이 아닐까 싶다. 어선의 접안이 가능해질 테니 말이다.

 12 : 50. 조금 더 걷자 길이 바닷가를 떠난다. 그리고는 내륙의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 좋은 바닷가를 놓아두고 에둘러 돌아가는 이유가 뭘까?

 12 : 54. 이유는 간단했다. 바닷가에 들어앉은 저 전북 수산기술연구소’. 저렇게 큰 시설이 바닷가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3 : 05. ‘동호해변에 이른다. 줄포만(곰소만)과 맞닿아 있는 해안으로 백사장을 따라 늘어선 수백 년 된 해송 숲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탐방로는 명사십리로를 따른다. 하지만 난 조망도 즐길 겸해서 해변을 걸어볼 것을 권해본다. 백사장과 해송 숲 사이에 야자매트를 깔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계속해서 위도가 따라온다. 거기에 쌍여도(미여도)’가 빈 여백을 채운다. 명사십리에서 첫 선을 보일 때만 해도 점으로 나타나더니 어느새 몸집을 부풀렸다.

 해수욕장에 가까워지자 조금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와 백사장, 관광객 시설, 상가 등의 순서로 돼 있는 여느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이곳은 상가는 저 안쪽에 있고 상가와 백사장 사이를 소나무 숲이 메우고 있었다. ‘숨겨진 해수욕장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 입구의 안내판을 한번쯤 살펴보고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깜빡 빼먹을 뻔 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이 지역 유일의 해신당인 영신당을 살펴볼 수 있다.

 국민여가캠핑장이란다. 해변 레저는 자동차 캠핑이 대세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내려갈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에도 숲속 곳곳에 캠핑족들이 들어가 있었다. 텐트는 웬만한 방갈로 저리 가라는 크기. 저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는 물론, 그릴, 휴대용 냉장고, 조명까지 없는 게 없다고 했다.

 동호해수욕장은 드넓은 백사장을 자랑한다. 백사장 남쪽 끝에 있는 수산기술연구소까지의 거리는 약 1.5km.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백사장 뒤쪽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다 수심이 0.5~1.5m로 어린이들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어 가족 피서지로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세면대와 화장실, 민박, 식당 등의 편의시설도 여느 유명 해수욕장에 못지않게 잘 갖추어져 있다.

 동호해변의 갯벌은 동죽과 바지락이 지천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해수욕장의 조형물도 동죽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바닷가로 나가본다. 맞은편에는 위도와 쌍여도(미여도), 북쪽으로 뻗어나간 해수욕장의 끝에는 외죽도가 놓여있다. 부안면 앞바다에 떠있는 내죽도에 대비되는 이름으로 대죽도 소죽도로 구성된다. 간조 때 갯벌이 드러나면 걸어서도 섬에 들어갈 수 있단다.

 동호해변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모래찜질하기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 피부병과 신경통 환자들이 많이 찾아온단다. 그래서일까? 해수욕장 주변의 시설지구는 성업 중이었다. 민박과 펜션 등 숙박업소는 물론이고, 음식점에 카페까지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들어섰다. 모두 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체험센터를 지나자 굴을 뚫고 있었다. 탐방로는 터널 앞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하지만 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영신당이 있을 밥한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길을 찾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길이 웃자란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여 통행이 불가능하니 문제다.

 그나마 친절한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지자체의 게으른 행정에 툴툴거리는데 마실 나온 주민이 동호마을 쪽으로 100m쯤 더 가면 길이 잘 나있다고 알려준다.

 13 : 27.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100m쯤 더 가니 구동호마을’. 초입에서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어서 200m쯤 올라가니 조성공사가 한창인 전망공원이 나온다.

 13 : 30. 전망공원의 중심은 원형전망대이다. 돌출된 암벽지대에 2층의 메인 건물을 짓고, 바다를 향해 길게 대를 쌓았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동호해안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탐방로 조성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100m쯤 더 걷자 숲속에 숨어있던 영신당이 얼굴을 내민다. 이 고장 유일의 해신당으로, 해마다 풍어와 어민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단다.

 사랑꾼인 집사람은 오늘도 바쁘다. 4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은 양지바른 곳에서 냉이를 캐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나와 잠깐 캤다는데 벌써 한 움큼이다. 서방님 밥상에 올릴 생각에 추위까지도 잊었나보다.

 13 : 42. 10분 남짓의 시간을 투자해 전망공원과 해신당을 둘러본 다음 구동호마을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동호리(冬湖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지만, ‘옛 구()’자가 좁은 의미의 동호리였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동호리는 가재지(歌子洞구동호(舊冬湖남부(南部삼양동(三養洞신동호(新冬湖)  5개의 행정리와 가재지·신흥·구동호·남부·삼양동·신동호·소리개 등 7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에는 동백정(冬柏亭)’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동호마을의 옛 이름인데 마을에 동백나무가 무성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이후 변산반도 방향의 바다가 호수처럼 보인다하여 호수 호(‘)’자를 덧대 동호(冬湖)’가 되었단다. 이곳 동호가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동서남북의 동호(東湖)가 아닌 동백 꽃 바다가 된 이유이다.

 동호항은 먼발치서 바라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응룡(상하면 계산서원 배향)의 발자취가 서린 포구다. 고창지역에서 모은 군량미를 이곳 동호항을 통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산성으로 보냈다고 전해진다.

 13 : 46. 동호마을 앞에서 방조제 둑길을 탄다. 흐드러지게 핀 갈대꽃이 길손을 반기는 아름다운 구간이다.

 오른편은 온통 대하양식장이다. 반면에 왼쪽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변산반도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13 : 55. 77번 국도(동호로)로 올라선다. 한반도의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L"자형으로 이어지다보니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나 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국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줄포만에 떠있는 저 섬의 정체는 뭘까? 파도에 깎여나간 듯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가 만조의 바다를 뚫고 솟아올랐다.

 14: 00. 삼양동(三養洞) 마을에 이르자 동호 배수갑문이 얼굴을 내민다. 선착장은 없지만 이 부근은 삼양동 어민들의 포구로 이용된다.

 14 : 03.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동호교차로에는 유리창까지 두른 정자 외에도 간척지준공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해리천 하구에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만든 걸 기념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참고로 해리천(海里川)은 무장면 월림리 산기슭에서 발원해 해리면을 관류, 심원면 궁산리까지 14.1km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서해랑길 이정표가 변신을 했다. 시점과 종점을 먼저 적고, 그 하단에 다음 행선지를 적던 기존과는 달리, 이번 코스의 것들은 다음에 만나게 될 주요 포인트만 적고 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도가 개선이 아니라 개악으로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동호교차로에서 국도를 벗어난 탐방로는 이제 애향갯벌로를 탄다. 초입의 700m구간은 방조제. 배수갑문이 두 개나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 더. 해리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방조제를 건너 심원면(고전리)으로 간다.

 아니나 다를까 간척사업은 엄청나게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게 유수지와 습지로 방치되고 있었다. 고창군 전체가 생물권보전지역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습지는 새들의 낙원이 되었다. 텃새와 철새가 함께 관찰되는데, 우리가 간 날에는 왜가리와 오리가 떼를 지어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얼굴을 내민다는 황새는 눈에 띄지 않았다.

 왼쪽으로는 줄포만이 펼쳐진다. 아니 줄포만의 입구쯤으로 보는 게 옳겠다.

 14 : 12. 방조제 끝에는 고창컨트리클럽이 있다. ‘+3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골프장으로, 정규 18홀 외에 12’ 3홀을 더 두어 성수기 등 경기 지연 시 고객 불만을 해소시켜준다고 했다. 18홀 플레이만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골퍼에게는 멋진 보너스가 될 것이고.

 국가생태문화탐방로 이정표는 오른쪽에 삼양염전이 있음을 알려준다. 삼양사의 창업주인  김연수(金秊洙)씨가 창업한 천일염전인데, 이 일대의 염전이 하도 넓다보니 마을의 이름까지도 염전마을(심원면 고전리)’이 되었단다. 주민들은 빛나는 순백의 소금밭 풍경을 일러 고창 속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부르고 있었다.

 14 : 15. 몇 걸음 더 걷다가 소나무 숲(이정표 : 바람공원 2km/ 동호해수욕장 2.5km)으로 들어간다. 방풍림으로 조성해놓은 것 같은데,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소나무들이 해안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다. 길은 숲속을 요리조리 다니다가 바다 쪽으로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검은머리 물떼새 형상을 한 방향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참조롱이·큰고니·노랑부리저어새 등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답게 고창 갯벌을 찾아오는 철새들을 모티브로 삼아 이정표를 만들고 있었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멋졌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테크 로드를 내놓았는가 하면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쉬엄쉬엄 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거기다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놓아 읽을거리까지 제공한다.

 이 멋고?’ 낯선 풍경 하나가 길 걷던 중생에게 화두로 다가온다. 바닷가에 길게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중간의 한 지점을 터 바닷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어 봐도 그 용도가 감도 잡히지 않는다.

 14 : 25. ‘서해안 바람공원에 닿았다. 이름대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서해안의 일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으로, (바람 및 해넘이)광장, 산책로, 전망대,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전망대에 오르자 외죽도(外竹島)의 두 섬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줄포만의 안쪽, 깊숙이 들어앉은 내죽도(內竹島)’에 대비되는 지명으로 대()죽도와 소()죽도를 포함한다. 또 하나. 소죽도는 무인도인 반면 대죽도는 1가구 1명이 거주하고 있단다.

 바람을 상징하는 풍차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도 날개가 미동조차 않는 돌지 않는 풍차. 그래서일까? 문득 사랑도 했다. 미워도 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로 시작되는 문주란의 노래가 떠오른다.

 바람개비도 여러 개 장착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 지역은 바람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 소형 풍력발전기를 배치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친환경 분산형 전원 확대와 지자체 에너지전환 주도에 발맞추는 한편, 주변 공공시설에도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난간에 매달린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부근 해안에 길이 1.3km( 40~70m) 쉐니어(chenier)’ 지형이 발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쉐니어란 태풍이나 조류에 의해 갯벌위에 모래와 자갈이 육지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퇴적지형을 말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섬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바다는 만조에 가깝게 물이 차있다. 그러니 바다와 바다 사이에 모래톱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만 펼쳐질 따름이다. 더 놓은 곳에 올라야만 쉐니어를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또 다시 숲속을 걷는다. 제방의 둑처럼 도톰하니 솟아오른 부분을 따라 1.4km 정도의 산책로가 나있다. 둑의 양옆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가히 최고의 산책로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호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야간 산책을 위한 조명공사를 하느라 길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덕분에 도로(애향갯벌로)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2차선이지만 가장자리를 따라 보도를 따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새옹지마라고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대신 눈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오른쪽에 갈대로 가득한 습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 45. 이번에는 세계자연유산인 고창갯벌을 홍보하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2층의 대를 세우고 그 위해 하얀 그늘막이 있는 전망대를 얹었다.

 전망대에 오르면 건장한 수탉과 암탉 그 뒤를 졸졸 따르고 있는 병아리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근처에 계명산(雞鳴山)’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계명산에서 닭이 울면 중국 땅에서도 들린다고 했으니 말이다.

 만돌마을과 그 주변에 있는 명소들은 만화로 전하고 있었다. 그 구심점인 고창갯벌을 빼먹었을 리가 있겠는가. ‘람사르 습지이면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 핵심지역이고, ‘세계자연유산 등재예정구역이기도 하단다.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소 죽도는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위도와 쌍여도 등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만조 때라서 전망대의 주제인 고창 갯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망대가 전하고자 했던 계명산 7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앞에 대를 쌓고 또 하나의 전망대를 얹었다. 이곳과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14 : 51. 잠시 후 도착한 계명산 전망대. 관찰데크 아래 공간은 솟대와 농게 등의 조형물 차지다. 계단 등의 이동 공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망둥어, , 저어새 등 고창 갯벌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을 이야기판으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이곳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담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외죽도, 염전과 김양식장, 계명산, 만돌마을, 고창갯벌에 관한 얘기들을 가슴속에 담아갈 수 있다.

 앙증맞은 벤치가 눈길을 끈다. 어미고래와 아기고래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듯이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어미고래의 얼굴표정이 자상하기 그지없다.

 난간에 서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만조인데도 이작도의 풀등처럼 모래톱이 물에 잠기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아까 확인해보지 못했던 움직이는 섬 쉐니어(chenier)’가 아닐까 싶다. 1800년 전부터 형성된 모래 퇴적층이라는데, 양쪽 끝부분이 해안선 방향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고 1967년 처음 관측한 이래 육지 방향으로 조금씩 모래층이 이동하고 있으며 그 모습도 수시로 변한단다.

 이곳도 풍차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지는 않기는 마찬가지다.

 14 : 56. ‘계명산 28.9m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로 레벨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10층짜리 건물의 옥상에 올라간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렇게 올라선 정상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 보면 주민들의 쉼터를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계명산(雞鳴山)’ 닭이 우는 산이란 뜻을 지녔다. 옛날에는 달구지로 불리기도 했단다. 아무튼 이곳에서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중국에 까지 갔다고 한다. 만돌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산동성 옌타이(煙臺)까지는 대략 390km. 닭 울음소리가 그 멀리까지 갔다는 것은 만돌마을 사람들의 기개와 마을 번영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봐야 한단다.

 반대편으로 난 침목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만돌마을이다. 만돌(萬突)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지명이다. 장차 굴뚝이 만 개가 솟을 것이라는 예언에서 유래했단다. 마을은 앞으로 드넓은 줄포만(곰소만)이 펼쳐져 있고 대죽도와 함께 멀리 부안군까지 바라볼 수 있어 섬과 갯벌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해질 무렵 펼쳐지는 낙조가 일품으로 알려진다. 천일염 체험, 조개잡이 체험, 고기잡이 체험, 갯벌 버스타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참여할 수 있단다.

 15 : 00. 마을 앞, 탐방로는 동화속의 네덜란드를 연상시키는 둑길을 따른다. 줄포만과 마을 사이에 둑을 쌓고 그 위에 길을 냈다. 그런데 마을과 갯벌의 높이가 비슷한 것이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바다건너 저 멀리 변산반도의 높은 산들이 반긴다. 변산반도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다. 지금은 까마득히 보이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도달해 있을 것이다.

 15 : 12. 마을을 벗어나 드넓은 들녘으로 간다. 아니 방조제 안쪽이긴 하지만 크고 작은 저수지가 길 양옆으로 줄을 잇는 구간이다.

 왼쪽, 호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큰 저 저수지의 용도는 대체 뭘까?

 바람 많은 들녘. 그 한가운데를 지나다 만난 염전은 우릴 색다른 풍경 속으로 인도한다. 소금은 햇볕과 바람을 먹고 자란다. 좋은 햇빛과 좋은 바람이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소금밭은 지금 긴 낮잠을 잔다. 뜨겁게 내리 쬘 내년의 뙤약볕을 기다리며...

 15 : 26. 전망타워 비슷한 시설이 보이는가 싶더니 고창 갯벌식물원의 입구에 이른다. 청정지역 고창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갯벌의 고장이다. 2007년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받은 이래, 2011년 람사르 갯벌습지, 2013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2021년에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에까지 등록됐다. 그러니 어찌 습지식물원 하나쯤 만들어두지 않았겠는가.

 갯벌 습지에는 아까 보았던 전망타워 외에도 생태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함초와 칠면초, 나문재 등 70여 종의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룬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 고창의 해안은 천연의 해안선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갯벌이었다고 한다. 그게 갯벌에 대한 이용이 많아지면서 축제식 양식장으로 변했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갯벌이 훼손되면서 갯벌 환경 또한 변해갔다. 이곳 갯벌식물원도 축제식 양식장으로 이용되다가 버려진 것을 지자체에서 둑을 터주면서 생태계를 되살렸다고 한다. 바닷물이 다시 흐르면서 칠면초, 해홍나물, 퉁퉁마디 같은 염생식물들이 다시 자리를 잡더란다.

 옛 방파제의 벽화는 어촌의 풍경을 담았다. 동네 아낙네들이 조개를 캐느라 여념이 없다.

 간척지에 들어선 태양광발전소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태양광 모듈의 생김새로 보아 태양의 이동에 맞추어 회전할 수 있지 않나 싶다.

 15 : 40. ‘람사르 고창 갯벌센터에 이른다. 고창 갯벌은 주민들에게는 매번 밟는 땅이자 매일 아침 보는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고창을 방문한 이방인들에게는 밟아보고 싶은 땅이자 경험해보고 싶은 곳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갯벌에 들어가는 우는 범하지 말자. 갯벌을 훼손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방인들을 위해 저런 센터를 세웠지 않나 싶다. 갯벌의 생태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갯벌식물원을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갯벌생태 해설 프로그램도 신청할 수 있다니 말이다.

 15 : 42. 갯벌센터의 뒤쪽. 너른 주차장 한켠에 서해랑길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문제는 서해랑길 안내도가 그 옆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원래의 안내도(고창 42코스) 1km쯤 더 걸어야 하는 심원면사무소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데도 말이다.

 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뽑아왔다는 산악회장의 너스레가 아니더라도 이쯤에서 트레킹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구간을 이곳에서 시작하겠다는데 일부러 면사무소까지 찾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14.77km를 걸었다고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40코스(법성포-구시포)

 

여 행 일 : ‘23. 11. 11()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법성 버스정류장검산마을홍농읍사무소상삼마을하삼마을고리포구시포해변(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4.2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0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지역(4km)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보안지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한다. 고창 땅에 있는 고리포와 구시포를 빼면 내놓을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들머리는 법성 버스정류장(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22번 국고로 바꿔 법성포까지 온다. 복용삼거리에서 좌회전 842번 지방도(영광로)로 옮기면 잠시 후 법성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40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놓았다.

 이번 구간은 전라 남·북도의 경계를 넘는 구간이다.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 구간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하지만 의미에 비해 볼거리는 빈약하다. 보안구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다시 만난 고창에서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길이는 13.7km,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짧은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2(5개 가운데)인 이유일 것이다.

 11 : 15. ‘법성3 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갯벌을 돋우어 조성한 뉴타운(2009년 포구 앞, 속칭 걸레바탕을 매립한 뒤 공모로 뽑은 지명이다)과 구도심을 연결한 몇 개의 다리 중 하나이다.

 물 빠진 법성포 앞바다는 갯벌만이 시커멓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저곳은 호수처럼 변한다고 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탓에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 되어왔던 이유이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데다, 다른 곳에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들이 들어서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해버렸다.

 11 : 18. 다리 건너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은 굴비의 고장답게 이름까지도 굴비로이다. 무늬만 굴비인 게 아니다. ‘굴비를 브랜드로 내건 도로답게 들어선 음식점이나 건어물가게의 이름도 하나같이 굴비를 내걸었다.

 영광군은 신재생에너지 산업클러스터를 꿈꾸는 고장이다. 우리나라의 4개 원자력발전단지 중 하나가 이곳 영광에 있는가 하면, 드넓은 바닷가를 따라 태양광발전단지와 풍력발전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하지만 영광의 주민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해 세종시 정부청사 앞으로 달려가자는 걸 보면...

 에이~ 조기가 아니라 갈치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다리(보행교인 한두름교’)를 덧씌운 조형물이 갈치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각설하고 간이 잘 된 영광굴비는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질이 좋은 소금으로 염장하기 때문이란다. 재료가 되는 조기도 중요하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마다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고, 이게 최고의 굴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대부분이 잡혀버린다. 요즘은 수산시장을 돌며 사들인 조기가 굴비의 원료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염산면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으니 가히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그래선지 조형물도 굴비 일색이다. 그러니 어찌 굴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屈非)’는 고려시대 이자겸(李資謙, 미상~1126)이 만들었다. 딸 셋을 하나는 16대 예종(睿宗), 나머지 둘은 예종의 아들(자신에게는 외손자)인 인종(仁宗)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묘한 족보를 만들어버린 인물이다. 그가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하며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단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11 : 25. 두 번째 다리(법성2) 앞에서 굴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연우로로 들어간다. 도심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 조형물로 치장된 첫 번째 다리(한두름교)는 보행자 전용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은 법성포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이다. 보은의 두꺼비 전설이 있는 철비’, 조선시대 동헌 등 주요 관아와 객사, 수령들의 선정비, 전라지역 12고을의 조창 터,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56일 동안 머물렀던 하촌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며 낙향한 훈련도정 이척이 지은 제월정(영호정)’ 등을 만나볼 수 있다.

 11 : 26. 행운당(도장집) . 일행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춘 채 핸드폰의 앱을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좋은 길을 놓아두고 골목(행운당과 수산물가공업체인 해미락굴비수산의 사이)으로 들어서라는 서해랑길의 방향표시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골목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에 비례하듯 경사도 가팔라져 간다.

 11 : 30. 오름길의 막바지에서 엄청나게 굵은 느티나무(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1.0km)를 만났다. 나이도 법성포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듯. 이런 볼거리를 그냥 놓아 둘 지자체가 아니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이곳은 법성포 시가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저 느티나무에 달이 걸리는 진풍경도 넘볼 수 있단다

 11 : 32. 842번 지방도(연우로)가 지나가는 동짓재(‘동깃재로 부르는 지역민들도 있었다)’에 올라선다. ‘법성포 12 중 일곱 번째인 동령추월(東嶺秋月)’, 즉 가을철에 뜨는 둥근 달이 빼어나다는 고갯마루이다.

 11 : 33. 도로로 내려서지는 않는다. 인의산(165.3m) 방향(오른쪽)의 언덕길로 잠시 진행하자 이 고장 출신 애국지사의 충용비(忠勇碑)가 얼굴을 내민다. 한국전쟁 때 법성면 일대의 수복을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려 광주로 가는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방위군 소위의 충용을 기리는 빗돌이다.

 빗돌을 살펴본 다음 탐방로에서 잠시 벗어나본다. 굵직굵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것이 도로 건너에 있는 법성진 숲쟁이의 연장이 아닐까 싶다. 숲의 내력은 지난 39코스 때 설명했었다.

 혜원 신윤복 선생이 그렸답니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이 일러주신다. 담벼락에 그려진 민속화가 김홍도의 작품인줄로만 알았다. 민속화는 무조건 김홍도라는 내 선입견 탓이었고, 그런 무지를 그가 정정해 준 것이다. 덕분에 난 오늘도 새로운 앎을 얻어간다. 공자님의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가 실감나는 하루라 하겠다.

 11 : 36. 서해랑길은 842번 지방도(연우로)를 가로지른다. 이정표(종점까지 12.6km) 말고도 영광굴비특품사업단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영광굴비홍보전시관(문이 닫힌 듯해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른편에는 서호농악회관이 들어서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영광법성포단오제의 난장트기 행사 때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단체일 것이다. ‘서호란 이름은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법성포 앞바다의 별칭에서 따왔을 것이고...

 두 건물의 사잇길로 들어서자 폐허로 변한 마을이 나타났다. 하필이면 이런 황량한 풍경 속으로 길을 냈을까?

 폐촌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밭에서는 알알이 여문 콩깍지가 타작을 기다린다.

 왼쪽에는 검산제가 있다. 갈대밭과 수림을 배경삼은 풍경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한 저수지이다. 둑 너머에서는 영광대교가 자신도 있다며 좀 보아달란다.

 11 : 42. ‘검산(撿山)’ 마을에 이른다. 도로(연우로)변에 버스정류장과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빠져나오자 검산마을 경로당’. 쉼터용 정자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하지만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그럴 여유는 없다.

 널디 너른 들녘이 마을 앞으로 펼쳐진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풍요의 상징이다. 그 너머 바다, 홍농읍과 백수읍 사이 해협을 영광대교가 가로지른다.

 11 : 47. 정자를 지나 200m쯤 더 걸었을까 홍농읍과 법성면의 경계를 가르는 구암천이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종점까지 11.7km)는 둑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란다.

 전남방조제로 물길이 막힌 구암천(龜岩川)’은 너른 유수지로 변해있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습지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참고로 구암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과치제에서 발원하여 두암저수지를 지나 전라남도 영광근 홍농읍 칠곡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총연장 15.29km의 지방하천이다.

 구암천에는 홍농교가 놓여있다. 법성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다리를 건너 홍농읍으로 들어간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에 입간판까지 세워놓았다.

 그렇다고 홍농교를 건너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은 옛 다리인 연우교를 이용한다. 1981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홍농교가 놓이면서 효용가치를 잃은 연우교는 상판에 흙을 쌓은 도로공원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연우(蓮牛)’라는 이름은 이 고장 출신으로 박정희정권 때 내무부장관을 지낸 박경원(朴璟遠)’의 호에서 따왔다. 고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던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지역민들 사이에 회자된다고 했다.

 안내판은 이곳이 줄 나룻터였음을 알려준다. 연우교가 놓이기 전, 1910년대부터 1971년까지 주민들은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고 한다. 강 양편을 잇는 밧줄을 뱃사공이 끌어당기면서 나아가는 나룻배이다. 그 나룻배를 복원했다며 하단에 이용수칙까지 적어놓았다. 하지만 나룻배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무심한 지자체가 게으르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나룻배를 없애려면 안내판까지 함께 치웠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52. 다리 건너(이정표 : 종점까지 11.1km)에서 왼쪽 강둑을 탄다. 잠시 후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농로를 따른다.

 12 : 01. ‘자 모양으로 난 길을 8쯤 걸으면 ‘842번 지방도’. 도로 양옆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가 걸어왔던 곳에 신흥(新興) 마을’, 그리고 진행방향에는 같은 상하리(4) 월봉(月峰) 마을이 있단다.

 잠시 후 이른 월봉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10.5km)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영광군청은 월봉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서 찾고 있었다. ‘미역섬이라 불러오다 박도섬 등으로 바뀌었다고도 했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이곳이 섬이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월봉마을을 감싸듯이 돌아 나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홍농읍이 놓여있다. 그런데 고층아파트들이 울쑥불쑥 솟아오른 게 시골 소읍치고는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원자력발전소가 만들어 낸 변화가 아닐까 싶다.

 12 : 07. 저 거대한 시설은 농협의 벼 건조·저장센터라고 했다.

 저장센터 앞 버란계(버스정류장), 어느 선답자는 군청에까지 연락해 이곳의 정확한 지명이 벌안개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벌의 안쪽에 잇는 갯가라는 뜻일 게다.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고, 바닷일을 업으로 살던 어부들의 안식처였던 포구도 있었다나?

 우람하게 치솟은 해주아파트를 오른편에 두고 하봉마을(상하2)’로 간다. 봉대산(峯大山) 아래에 위치하면서 망덕산(望德山) 줄기를 따라 위에 위치한 마을을 상봉(上峯),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하봉(下峯)이라 부른단다.

 마을길은 꽃밭으로 꾸며졌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인가 보다.

 12 : 25. 홍농로(이정표 : 종점까지 8.7km)로 올라서 홍농읍 저잣거리를 걷는다.

 12 : 27. 잠시 후 다온누리아파트 앞에서 도로를 건너 하봉마을로 간다. 다음 블록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상하길을 따른다. ! 아까 도로로 올라오기 전에 만난 농기계 보관창고에도 하봉이란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하봉마을의 중심가쯤 되겠다.

 이 길(상하길)은 행정타운인가 보다. 파출소와 읍사무소는 물론이고 초·중학교가 모두 이 거리에 들어서있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농협의 간판이 조금 이상하단다. ‘지명을 브랜드로 내거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굴비를 얼굴마담 삼았다는 것이다. 맞다. 영광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영광서 사게 되면 오만 원짜리도 영광굴비가 된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자린고비도 영광에서는 남의 집 얘기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나저나 자린고비라는 뜻을 집사람은 알기나 할까? 반찬이 아까워 천장에 생선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요즘 내 연금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상점 대부분이 문이 닫혀있다. 요즘 TV만 켜면 불경기라는 뉴스가 뜨는데, 그 현장이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매서운 한파에 경기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12 : 35. 홍농초등학교의 담벼락. ‘인성이 실력이다라는 휘호가 눈길을 끈다. 맞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고루한 사고발상은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잠시 후 만난 홍농중학교의 담벼락에선 장미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장미까지도 철이 바뀐 줄을 모르나 보다.

 12 : 41. 도심을 빠져나오면 확·포장공사가 한창인 홍농로와 마주한다.

 한수원사택 입구이기도 한 이곳에는 ‘119 안전센터가 들어서 있다. 2년 전, 봉대산과 금정산을 답사하러 왔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어느새 현대적인 외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참고로 봉대산에는 백수 구수산의 고도도 봉수대(古道島 烽燧臺)’에서 신호를 받아 상하면(고창군)의 고리포봉수대로 전하던 봉수대가 있었다. 고려 성종(981) 때 시작되어, 조선 중종 때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성포의 조창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이후부터는 영광(한빛)원자력발전소로 가는 홍농로를 따른다. 도중에 영광승마원과 영광테마식물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도 한다.

 12 : 51. 서당마을 앞 진덕삼거리에서는 한빛원자력본부 방향 직진이다. 오른쪽(구시포 방향의 진덕로’)으로 가면 더 가까운데 도로를 피해 우회시킨다. 참고로 서당(書堂)이란 지명은 1870년경 밀양박씨의 입향조가 문맹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옛 서당은 현재 문중 재실로 변했단다.

 10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난 농로로 들어간다.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7.4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런데 어느 축산농가 앞에서 길이 곤포 사일리지로 막혀있는 게 아닌가. ‘럼피스킨이라는 소 피부병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12 : 55. 조금 전 헤어졌던 진덕로(이정표 : 종점까지 6.2km)’를 다시 만났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삼마을로 간다.

 잠시 후 진덕리(眞德里)에 속한 자연부락 상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9km)에 이른다. 영광군청은 상삼(上三)’이란 지명의 유래를 삼밭(蔘田)에서 찾고 있었다. 남원 땅에서 들어온 남양방씨가 삼밭을 경작했는데, 이 삼밭의 위에 마을이 위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이름인 자가 인삼 삼()’이 아니고 석 삼()’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13 : 10. 상삼마을부터는 밭과 논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렇게 12분쯤 더 걸으면 하삼마을이다. 영광군청은 이 마을도 역시 삼밭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옥녀가 머리를 산발한 지형의 옥녀산발 마을이 삼() 재배면적이 늘어나면서 삼밭 또는 갯삼밭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이게 또 마을의 위치로 인해 삼밭 아래란 의미의 하삼(下三)’이 되었고.

 하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1km)은 개짓는 소리로 요란했다. 크고 험상궂게 생긴 개들이 이집 저집에서 윽박지르듯 짖어댄다. 개집이 천정까지 철망으로 막혀있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된다.

 13 : 15. 마을을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진덕로2(이정표 : 종점까지 4.6km)’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농로를 이용해 건너편 들녘으로 간다.

 동아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수확을 끝낸 들녘은 텅 비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곤포 사일리지조차도 논두렁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13 : 21. 전라 남·북도의 경계에 놓인 자룡천의 강둑(이정표 : 종점까지 4.2km)에 올라선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참고로 자룡천(紫龍川)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흐르다 용대저수지를 지나 자룡리에서 서해로 스며드는 길이 6.13km의 지방하천이다.

 방조제에 막힌 자룡천은 유수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13 : 26. 진덕리(영광군 홍농읍)과 자룡리(고창군 상하면)의 앞바다를 막은 동아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7km)’에 올라섰다. 둑 위로 2차선의 해안도로가 지나간다. 하나 더,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둑길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동아배수장 앞에서 바라본 바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와 안쪽에다 펑퍼짐한 바다를 만들어놓은 것이 영락없는 호로병인데, 바닷물이 들어오는 저 주둥이 부분도 남북으로 나뉜단다. 왼쪽은 전라남도(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반면에 오른쪽은 전라북도(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땅이다. 하나 더, 갈대밭이 들어선 바닷가는 철새도래지인 듯. 꽤 많은 왜가리들이 먹이활동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13 : 33. 500m쯤 되는 방조제가 끝나면 길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왼쪽 구시포 쪽으로 간다.

 가시연꽃길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가면 용대 가시연꽃군락지가 나온다고 알려준다. 고창군에서 자연환경과 문화역사 자원을 담아 만든 예향천리마실길  10코스인 가시연꽃길(13km)이 이곳으로 지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36. 300m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번에도 왼쪽(구시포 방향)으로 간다. 다만 길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뀔 따름이다.

 이곳에서는 ‘12일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기네 식당에서 촬영했다는 듯 거북선 숯불풍천장어라는 상호를 두드러지게 적어놓았다.

 이후부터는 바닷가를 따른다. 철제 난간까지 두른 멋진 산책로가 고리포까지 나있다. 하지만 길이 널찍한 것은 흠이 될 수도 있겠다. 승용차는 물론이고 트럭까지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륙 방향, 1km도 더 되는 구간은 대하양식장 천지다. 소금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저곳에 염전이 들어서있었지 않나 싶다.

 습지를 가득 메운 갈대밭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아니 근처에서 노닐고 있는 왜가리까지 더해줄 경우 흔치 않는 풍경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바닷가 안내판은 고리포마을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쳐놓은 저 그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호리병처럼 생긴 내만을 한 바퀴 둘러놓은 것 같은데...

 13 : 56. 바닷가로 내려선지 21. ‘고리포(古里浦)’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고리포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다. 마을은 봉군들이 머무르면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고리포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m 지점의 안산(120m)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문헌은 영광군 홍농산(弘農山, 지금의 봉대산일 것이다)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소응포 봉수로 전달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포구 앞, 작은 모래섬이 천혜의 항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맞다. 고리포는 현 고창 지역의 포구 중 유일하게 그 위치가 이동되지 않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포구라고 했다. 입지여건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10척도 못되는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란다.

 고리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숯불풍천장어는 거북선을 독채로 전세 냈다. 민박이 가능한 맛집으로 잔잔한 바다냄새와 함께 커다란 지붕이 열리며 파란 하늘을 덤으로 볼 수 있는 고창의 핫 플레이스라고 한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카메라 셔터 한번 누르고 그냥 지나칠 따름이다.

 고리포를 지난 서해랑길은 주씨고개를 향해 가파르게 치고 오른다. 주씨고개는 40코스에서 가장 높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14 : 06. 고갯마루를 넘자 발아래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1800년 무렵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구시포(仇時浦)’는 염전을 일구기 위해 설치한 수문의 모양새가 소의 구시통(구유의 방언)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에 뽑히기도 했다.

 14 : 16. ‘구시포 해변(仇時浦 海邊)’은 고창 제일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명사가 십리에 펼쳐지는데다 송림까지 우거져 오토캠핑과 가족단위 캠핑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해수욕장은 길이 1.7km에 폭이 2m인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송림이 뒤를 받치는가 하면, 나지막한 야산이 아늑하게 모래사장을 감싼다. 갯벌 한 점 없이 고운 백사장이 특히 돋보이는데, 바닷물이 빠지면 모래가 단단해져 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가족단위 피서지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하겠다.

 이곳은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변 바로 앞에 바다낚시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가막섬이 떠 있는데, 그 뒤로 펼쳐지는 저녁노을이 가히 일품이라고 한다.

 저 갈매기들은 인간과의 공생을 추구하고 싶은 모양이다. 관광객들이 다가가도 도망가지를 않고 자리만 잠깐 내주고 있었다.

 관광객들에 더해 캠핑족까지 몰려드는 곳에 어찌 조형물이 없겠는가. 움직임을 멈춘 그네는 생물권보전지역,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람세스 습지 같은 고창의 명소들을 가리키는 방향표지판까지 매달고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이들을 기다린다.

 ‘I  구시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토 죤이다. 이곳 구시포는 tvN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 시즌3의 첫 촬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만큼 화면발이 받쳐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시포항은 여느 항구와 달리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가막도(可莫島)’라는 섬에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항구에 비해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선이 입·출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또한 항구를 와인 잔 모양으로 넓게 정비하면서 바다로 뻗은 800m의 긴 제방과 등대, 전망데크, 트릭아트, 공원 등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쾌적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14 : 30. 서해랑길(40코스)은 고창군청의 이동봉사실 앞에 이르면서 끝을 맺는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2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클라이드 M 네레모어는 그의 저서 행복에로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행복한 삶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조차 없다. 사랑하는 집사람이 하루 24시간으로도 부족하다며 내 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서해랑길 39코스(답동마을-법성포)

 

여 행 일 : ‘23. 10. 28()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및 법성면 일원

여행코스 : 답동 버스정류장가자봉노을전시관영광대교백제불교 최초도래지법성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3km, 실제는 노을카페부터 16.28km 4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9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코스 대부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백수해안도로를 따른다. 덕분에 동해를 닮았다는 서해바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해거름이 아니어서 백수해안도로의 하이라이트인 노을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들머리는 답동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백수읍 홍곡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겨 백수읍까지 온다. 대전리교차로에서 우회전 7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면 잠시 후 답동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38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이번 구간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 중 아홉 번째라는 백수해안도로를 주축으로 한다. 그저 초반 4.5km를 해안도로 대신 구수산의 능선으로 바꾸고, 후반부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를 구경시키는 정도라고나 할까? 길이는 16.3km, 4.5km가 산길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4(5개 가운데)나 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 걷게 될 백수해안도로 1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자연경관 최우수상을 받았단다. 이름조차 낯선 상인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4개 유형(시가지역사문화농산어촌·자연)의 뛰어난(건축물·공공공간·주변환경 등이 종합적으로 잘 어우러진) 경관을 발굴·홍보하기 위해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기획한 행사라고 했다.

 동해 같은 서해의 최고 해안길이란다. 동해의 파도, 청청한 남해, 서해의 끝없는 갯벌로 대변되는 우리네 바다는 어디가 더 좋다고 평할 수 없을 만큼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서해바다는 쓸쓸한 갯벌이 질펀하고, 사연을 간직한 섬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야 하며, 안내판에서 저런 표현은 사라져야만 한다.

 11 : 50. 트레킹은 백암 해안전망대에서 시작했다. 영광에서 노을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39코스 시점에서 77번 국도(홍농 방향)를 따라 2km쯤 가다 ‘Cafe 노을로 내려가면 된다. 참고로 이곳 백수(白岫)’는 아흔아홉 개의 산봉우리를 이르는 지명이다. 그런 특징을 직접 느껴보라는 듯 39코스의 초반은 구수산 줄기인 가자봉과 뱀골봉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난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이미 답사를 마친 길을 또 다시 걷기보다는 백수해안도로의 명소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포장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건너자 ‘Cafe 노을이 나온다.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커피가 일품으로 알려진 곳이다. 서해바다를 마당삼은 덕분에 최고의 오션 뷰를 보여준단다.

 맞다. 카페에서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영화 마파도의 촬영지인 동백마을’. 바다를 내려다보며 밭일을 하던 장면 등이 저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절벽 같은 길을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은, 어느 집에서나 문을 열면 비경의 바다와 바로 마주할 수 있단다. 영화촬영지가 된 이유일 것이다.

 반대편에는 가자골이 있다. ‘백수해안공원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해안전망대라는 이름을 낳게 한 정자는 바다와 맞닿은 벼랑 가장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다가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자를 에워싼 잡목들이 서해바다에 대한 조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망은 카페 주변에서 실컷 즐기도록 하자.

 12 :00. 전망대를 빠져나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재골(백암리1)’에 이른다. 영화 황해에서 하정우가 살인청부 받은 인물의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만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던 시골 버스승강장이 이곳일 것이다.

 12 : 00-12 : 10. 가재골(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백수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왜구에게 붙잡힌 어부를 기다리다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모자바위도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지나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난간에 서면 칠산도와 안마도, 송이도 등 칠산 앞바다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이곳은 전설이 빚어놓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어부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촛대를 들고 나가 바닷가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돌이 됐다. 바다에서 익사한 남편은 거북이가 됐고, 촛불을 보고 바닷가로 돌아와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보라! 거북이 한 마리가 촛대처럼 생긴 바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지 않는가.

 벼랑에 걸치듯 내놓은 계단도 놓치지 말자.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고두섬 같은 또 다른 볼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안공원의 얼굴마담격인 모자바위(母子岩)’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를 업은 엄마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공자는 나이 70이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종심(從心)이라 했다. 하지만 칠십에 이른 나에게 도란 아직도 남의 얘기일 따름인가 보다.

 12 : 18.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어 대리골(백암리1)’에 이른다.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대나무를 다리로 착각해서 교동(橋洞)’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이곳은 영화 황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하정우가 하룻밤을 묵어갔던 민박집인데 지금은 동명(황해)의 펜션으로 변해있다. 그저 영화 초반 스치듯 지나가던 고두섬만이 옛 모습 그대로라고나 할까? 퀭한 얼굴로 아침밥을 먹던 하정우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사진은 사라져버린 울주횟집(현 황해펜션) 대신 고두섬을 배경삼은 프로방스 펜션&글램핑을 게재했다.

 바다 건너 송이도에 고두섬 끝이라는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송이도에 삼천갑자 동방삭을 능가하는 고두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곳 백수해안에서 뜀박질 한 번으로 송이도에 이를 정도로 도력이 엄청났다나?  고두섬을 당시 그가 발판으로 삼았었을 지도 모르겠다.

​▼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입소문을 탄 백수해안도로는 연간 방문객이 76만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니 주차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안내판은 칠산갯길 300  2코스인 노을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법성포터미널에서 출발 영산성지·모래미해수욕장·열부순절지 등을 거쳐 동백마을에 이르는 23.39km의 둘레길이다.

 12 : 24. 이번에는 순아골이란다. 백암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다.

 12 : 32. ‘Farm Voree(‘rural convergence industry’로 포장했지만 카페가 옳다)’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백수해안도로는 정말 아름다웠다. 바다를 끼고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도 그렇거니와 앞바다도 거칠 것 하나 없이 탁 트여 파란 수평선만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게 약간은 흠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커피 향 가득한 작은 도서관 뭉클이란다. 1층은 카페와 도서관, 2층은 테라스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커피 향을 즐기며 독서를 즐겨보라는 듯. 하지만 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이제나저제나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쩌겠는가.

 12 : 40. 덕산마을 앞 삼거리에 이른다. ‘홍농읍으로 연결되는 77번 국도는 직진, 백수해안도로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곳은 구수산의 산줄기를 넘어온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로로 내려서는 지점에 구수산등산로 안내판과 함께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1.8km/ 시점 4.5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 걸은 내 트랙에는 3.68km가 찍혀 있었다.

 서해랑길은 덕산마을(대신리)을 거쳐 정유재란열부순절지(旌酉再亂烈婦殉節地)’로 간다. 그렇다고 트랙을 꼭 따를 필요는 없겠다. 곧장 순절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는데 구태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붉은 양귀비가 매혹적이라던 주변이 온통 황량한 풍경으로 변해있는 게 아닌가. 꽃이 시들자 내년을 기약하며 밭을 갈아엎었나 보다.

 사적비를 기웃거리다 도해문(蹈海門)’으로 들어가니 모열사(慕烈祠)가 반긴다. 칠산바다에 투신한 아홉 열녀를 기리는 사당이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에 살던 동래정씨(東萊鄭氏진주정씨(晋州鄭氏) 문중의 부인들이 전쟁을 피해 지금의 묵방포(墨防浦)까지 왔으나 결국 왜적들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1681(숙종 7) 나라에서는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비각(碑閣)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 옥개석을 올렸다. 바다를 배경으로 오른쪽에 8열부의 비각, 왼쪽에 정등(鄭燈)의 처 밀양박씨의 비각이 같은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열부순절지(이정표 : 종점까지 11.5km)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런 다음 데크 로드를 따라 스카워크로 간다. 줄을 지어 늘어서있는 검붉은 갯바위에 걸치듯 길을 내놓았다.

 험상궂지 않다고 해식애가 아니겠는가. 천년 세월 모진 풍파를 견디다보니 영험함까지 띠게 되었나 보다. ()라도 받으려는 듯 푸짐하게 상까지 차려놓은 무당이 뭔가를 열심히 빌고 있었다.

 12 : 48. 다시 올라선 도로(해안로). 도로변 공터에서 주말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지역 특산물로 여겨지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힘이라도 실어주려는 듯 천빛예술봉사단이 공연으로 흥을 돋운다.

 12 : 50. 스카이워크 형식으로 지어진 노을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스카이워크의 끝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이라는 멋진 조형물이 장식하고 있었다. ‘칠산바다의 상징인 괭이갈매기(천연기념물 제389)의 날개를 형상화한 최고의 포토 스팟이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백년해로의 기원을 담았다니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생샷 하나 건져보면 어떨까.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선지 시선이 수평선과 일직선이다. 문득 아까 혀를 차게 만들던 동해바다답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주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안마군도의 섬들이 아스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야를 가리는 섬 또한 서해바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야할 방향의 언덕은 카페와 펜션으로 한 가득이다. 이곳 백수해안도로가 그만큼 유명세를 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언덕을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영광의 아름다운 노을 풍경을 전시하고 있는 노을전시관이 놓여있다.

 노을전시관 부근 바닷가, 갯바위에 걸터앉은 대신등대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낭만적인 노을을 볼 수 있는 해넘이 명소다. 곁에 노을전시관을 두었을 만큼 낙조가 아름다워 관광객뿐만 아니라, 등대를 배경으로 노을 사진을 찍으려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13 : 05-13 : 10. 노을전시관은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전시관이다. 노을의 원리부터, 노을 사진, 노을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등을 모두 보여주는 오로지 노을을 위한, 노을에 의한 공간이다.

 노을이 생기는 원리는 물론이고, 노을을 테마(사진·음악·문학)별로 나누어 전시했는가 하면, 빛의 색·성질·산란 등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빛의 과학적 이해를 도와주는 학습장이라고나 할까?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2)도 만들어놓았다. 탁 트인 칠산바다에 가라앉는 붉은 해를 비롯해 주변 경관을 구경하기 딱 좋겠다.

 전시관 앞.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로 널리 알려진 가수 조미미의 노래비가 있었다. 뒷면은 대표 앨범 3장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았다. 조미미는 1947년 영광에서 태어났고, 1965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남진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가수였으며, 후덕한 외모와 맑은 목소리로 '바다가 육지라면' '단골손님' '서산 갯마을' '해지는 섬포구' 등 섬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근처 광장에서 후배 가수들이 버스킹을 열고 있었다. 저 젊은이들은 조미미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을까?

 13 : 15. 노을전시관부터는 데크로드를 걷는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노을 종을 만났다. 노을이 되어 어머니 곁을 지키는 효심을 담은 종이다. 구전에 따르면 먼 옛날 도음소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비바람이 심한데도 아들은 소금가마를 지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에 소금이 녹아버렸고, 아들은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을 더 바깥에서 머물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급기야 아들을 찾아 나섰고,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대로 돌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약을 지어 돌아오던 이들이 돌이 돼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구슬프게 울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아들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믿는단다.

 한 번 치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면 행복할 일이 생긴다는 스토리를 입혔다. 다만 칠 때마다 맥놀이를 들어야 한단다. 여기서 맥놀이는 몸으로 종의 진동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자물쇠도 눈에 띈다. 노을종을 친 다음 소원을 담아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놓으면, 웃음·사랑·행복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나?

 오랜만에 보는 멋진 안내도이다. ‘백수해안 노을 길 지도를 바탕삼아, 꼭 찾아봐야 할 주요 포인트는 사진까지 게시했다. 다음 행선지의 거리를 하단에 적음으로써 이정표의 기능까지 더했다.

 ! 벌통이다 이를 본 동갑네기 도반은 벌통을 따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서라. 오래전 일이지만 산청의 석대산에서 말벌에 쏘였었고, 고통과 염증에 시달리던 난 식사까지 거른 채 산청의료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탐방로는 너무 높지 않은 해안절벽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 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차라리 생경스럽다. 저 멀리 서너 개의 작은 섬이 수평선을 갉아먹고 있을 뿐 갯벌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동해바다와 서해바다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13 : 28- 13 : 46. 모처럼 만난 전망대. 하지만 누군가의 돗자리가 다가가는 걸 부담스럽게 했다. 하긴 우리 역시 간식을 먹느라 벤치 하나를 독차지해버렸지만...

 칠산정(백수해안도로 최고의 전망대라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아래 설치된 목책산책로인 건강365계단 1 365일 건강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오르는 계단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강해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바닷가 벼랑을 따라 잔도처럼 길을 냈다. 바위절벽은 아니어도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찔하다.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길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이다. 하지만 바닷가에 널린 기암괴석들도 그에 못지않은 매력을 준다. 일상에 지친 가슴을 뻥 뚫어지게 만든다고나 할까?

 산책로는 생태탐방로를 겸한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숲속에서 자라는 여러 식물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털머위 꽃도 그중 하나이다.

 이 길은 백수해안 노을길로 불린다. 곳곳에서 석양이 만들어내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두어 곳에 바다로 내려가는 길과 함께 해안 절벽 끝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14 : 03. ‘도음소도(주민들은 돔배섬이라고 한다)‘를 마주보는 모퉁이를 돈다. 이어서 법성포로 연결되는 내만(內灣)으로 들어서자 바다 건너 금정산 자락이 해안풍경과 함께 조망된다. 참고로 도음소도는 도 닦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올 때 불상을 처음 내려놓았던 곳으로 알려진다.

 내만이어선지 파도가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서해답지 않게 놀라울 만큼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에 떠 있는 돔배섬(왼쪽에서 살짝 머리만 내미는 곳)과 괭이섬(가운데), 쥐섬(작은 바위섬)까지, 곱디고운 풍광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다.

 14 : 09. 천천히 바다 풍광을 즐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삼미랑 어촌체험관에 닿는다. 카페와 펜션을 함께 운영하는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길에서 만난 둘레길 나그네의 말에 의하면 서해랑 카페를 겸하기 때문에 두루누비 회원이 들르면 5천원 상당의 커피를 제공한다고 했다.

 14 : 10-14 : 15. 70m쯤 더 걸어 도착한 8주차장’. 바다를 향해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포토 죤도 세 개나 배치했다. 눈앞에 펼쳐질 풍경을 믿고, 바라보고, 사진 찍어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전망대 아래는 방파제 등대(칠산타워를 형상화했단다)가 있는 대신항이다. 대신마을 어민들은 저 포구에서 배를 타고 칠산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늦봄부터 여름까지는 민어와 백합, 가을에는 꽃게와 새우가 잡힌다고 했다. 일부 어민들은 낚싯배를 운영해 짭짤한 소득을 올리기도 한단다.

 난간에서면 두고두고 꺼내볼만한 빼어난 풍경이 펼쳐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작은 물굽이()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대신항 너머로 나타나는 영광대교는 차라리 덤이다.

 대신항으로 내려서면, 탐방로는 또 다시 데크 로드로 연결된다. 호리병처럼 내륙으로 파고든 칠산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14 : 26. 데크로드와 이별을 고한다. 이후부터는 도로(해안로)를 따른다.

 14 : 30. 잠시 후 도착한 대초마을 앞 삼거리. ‘옥당박물관이 잠깐 들렀다가란다. 아주 오래된 토기와 석기가 전시돼 있으며, (동국·해동)통보에서부터 1·5원짜리 지폐까지 화폐의 역사도 함께 엿볼 수 있단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영광의 얼굴을 빛낸 사람(수은 강항, 소태산 박중비, 공옥진)에 대한 기록도 만날 수 있다나?

 편액 없는 제각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으면. 이후부터는 영광대교를 마주보며 걷게 된다.

 영광대교는 영광군 백수읍과 홍농읍을 잇는다.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두 읍간의 이동시간이 20분 이상이나 단축되었다고 한다.

 영광대교 부근은 도로 확·포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 다리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모래미해수욕장이 있었다. 해안선이 짧은데다 폭까지 좁지만, 백사장의 모래가 곱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기에 들러보지는 않았다.

 다리 남단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광대교 표지돌과 기념조형물(영광의 속뜻인 신령스러운 빛을 형상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박경숙 시인의 영광대교를 적은 시비를 세워놓았다.

 14 : 51. 2016년에 준공했다는 영광대교를 건넌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인 주경간격이 320m에 달하는 현수교이다.

 15 : 00.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4.5km)에서 빠져나와 국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숲속을 헤집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15 : 08. 목맥마을(木麥, 홍농읍 칠곡리)  목넹기 방조제로 내려선다. 1925년 전남농장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해서 전남방조제로도 불리는데 둑 위로 도로(칠곡로)가 나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까지 4.1km) 앞에서 도로를 횡단해 습지로 내려선다.

 탐방로는 목맥마을과 자갈금마을(법성면 진내리)을 잇는 목넹기 방조제를 따른다. 아니 둑 아래, 그러니까 제방과 유수지 사이에 보행로를 따로 내놓았다.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모래등 들에는 갈대가 한가득인 유수지가 들어섰다. 고창 땅에서 흘러온 구암천이 방조제에 막히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범위도 무척 넓었다. 그런 장점을 지자체가 놓칠 리가 없다. 데크 탐방로가 갈대밭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유수지에는 꽤 많은 철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담수호와 넓은 농경지가 풍부한 먹이를 제공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15 : 17. 제방 끝(이정표 : 종점까지 3.5km)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자갈금 어민들이 사용하는 선착장일 것이다. 참고로 오래 전, 고깃배 선단이 들어오면 법성포 물길의 입구이던 목넹기에 파시가 선다고 했다. 그 목넹기가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탐방로는 이제 데크 로드를 따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로 간다.

 15 : 27. 잠시 후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 이른다. 법성포(法聖浦) 불법(佛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이곳 법성포에 발을 디디며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테마파크를 조성해놓았다.

 도래지에는 고대 인도의 탁트히바히 사원 주탑원을 본떴다는 탑원((塔園)을 비롯해 간다라유물관(2~5세기 불상·불전도·부조 등을 전시), 간다라 양식의 사면대불상, 부용루(참배 및 조망용 누각) 등이 들어서 있다. 찬란한 간다라 불교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탐방로는 탑원의 뒤 언덕(이정표 : 종점까지 2.6km)을 넘는다. 그리고는 숲쟁이 꽃동산을 헤집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꽃과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 법성포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 할 수 있는 구간이다.

 15 : 43. 울창한 숲과 꽃, 거기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포구를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주차장(이정표 : 종점까지 2.2km)이다. 아니 온갖 이름 모를 꽃들로 단장된 것이 꽃동산의 연장이라 함이 더 옳겠다.

 15 : 47. 주차장을 지나 잠깐이지만 숲속으로 난 데크로드를 따른다. 이어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정표 : 종점까지 2.1km)으로 들어선다. 물론 주차장 사잇길이나 메인도로(백제문화로)를 따라도 된다.

 몇 걸음 더 걸어서 만난 법성사의 담벼락은 다양한 바닷속 풍경을 담았다. 절간답게 부처님도 빼놓지 않았다. 하나 더, 이곳(법성진성 조형물이 세워진 지점)에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들머리에 법성진성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함께 세워놓은 조형물이 조금 이상하다. ()이 아니라 포구를 드나들었음직한 돛단배를 형상화했다.

 길이 왜 이따위야?’ 오솔길의 형편은 고창에서 왔다는 둘레길 나그네의 한마디로 대변된다. 이정표 등의 특별한 표식이 없는 들머리는 찾기조차 힘들었고(‘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가는 사람이야 문제없겠지만), 정비되지 않은 산길은 웃자란 잡초 때문에 걷는 게 영 사나웠다.

 15 : 53. 오솔길을 빠져나오니 전망대를 겸한 이층의 누각이 반긴다. 그 앞에 이정표(종점까지 1.9km) 법성진성 안내판을 세웠다. 진성(鎭城)은 지방의 각 진영을 성벽으로 둘러싼 방어용 시설이다. 법성진성은 전라도 일대의 세곡을 모으던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인 1514년에 축조했다. 내부에는 동헌, 객사 등 관아시설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관련된 창고시설도 있었다고 한다.

 법성진성(전라남도 기념물)의 성곽을 따라간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성벽에는 축성에 동원된 전라도 관내 군·현의 이름과 쌓은 길이, 그리고 축성책임자·재정담당자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했다. 하나 더, 300m도 채 되지 않는 성벽을 걷는데 12분이나 걸렸다. 주위가 온통 달래 밭이었기 때문이다. 서방님께 달래장을 만들어 올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16 : 08.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쟁이(이정표 : 종점까지 1.5km)’로 내려선다. ‘숲쟁이란 숲정이의 사투리이다. 남도에서 쟁이 ’, 다시 말해 성()을 뜻하는 어휘로도 쓰였다. 그러니 숲으로 된 성으로 보면 되겠다. 맞다. 숲쟁이는 1514년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법성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숲으로, 법성진성의 북벽과 연결되어 동쪽으로 이어진다. 남도의 대표 숲으로 인정받아 1988년 전라남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명승 제22로 승격되었다.

 숲쟁이는 방풍림의 역할을 수행한다. 포구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은 덤이다. 2006년에는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에 지정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단오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3, 2009년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등 각종 민속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진내리의 고샅길을 걷는다. ‘서해랑길의 특징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조작 실수로 두루누비(코리아둘레길) 앱을 활용할 수 없었던 나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서해랑길 리본을 확인하며 걷다가 삼거리와 마주쳤는데, 갈려나가는 골목의 초입에 있어야 할 리본이 직진방향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100m남짓 걷다가 되돌아오기는 했지만(리본이 보이지 않아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더덩실 더덩실, 벽화 속 주민들은 풍물놀이 삼매경이다. 조선 중기에 시작되었다는 법성포 단오제, 그 행사의 한 장면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16 : 18. 골목을 누비다가 비석군(碑石群)’을 만났다. 이곳 법성진성을 다스리던 관리(수군절제사나 첨사였을 것이다)들을 칭송하는 빗돌인데, 앞에 주인공의 약력과 공적을 적어놓은 게 특이했다. 부근에는 독립운동가인 고경진선생의 생가 터도 있었고, 법성진성이 축성된 지 500년이나 되었음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띄었다.

 굴비의 본고장답게 셀 수 없이 많은 굴비판매장과 굴비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법성1를 건넌다. 갯고랑 건너는 갯벌을 메워 만든 인공 섬이다. 현재 뉴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곳 법성포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조창(漕倉)이 개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 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 갔다고 한다. 조창과 조운(漕運)의 기능은 이 마을을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까지 번성시켰다. 하지만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저런 작은 어선들만이 정박해있을 따름이다.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바다와 맞닿은 도로를 따른다. 뉴타운답게 굵직굵직한 건물들이 도로변에 들어서 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법성포 앞바다는 호수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대서호(大西湖)’로 불린다고 했다. 또한 중국의 동정호에 버금가는 풍광을 보여준다고 해서 소동정(小洞庭)’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 지금은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매어있는 배들이 하나같이 작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억새꽃이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린다. 맞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10일 밖에 남지 않았다.

 법성포 조형물은 굴비 두름을 담았다. 황금빛 조기들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굴비로 새롭게 변신하는 고장. 문헌에 나오는 법성포의 내력들도 함께 적어 넣었다. 하나 더. 굴비라는 이름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인종 때 법성포로 귀양 온 이자겸이 그 맛에 반해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된 도리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녀 굴비(屈非)’라고 불렀다고 한다.

 16 : 35. 법성 버스정류장에 이르면서 39코스 걷기가 종료된다. 서해랑길(영광 40코스) 안내판은 터미널 왼쪽 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6.28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누군가 그랬다. 영광 법성포에서 거시기 해지면 굴비에 잎새주 한 잔을 하라고. 술을 마시지 않는 여자들도 멜랑꼴리해진 마음이 중화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종점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안함을 글로서나마 집사람에게 전해본다.

서해랑길 37코스(합산마을 버스정류장-하사6구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9. 23()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및 백수읍 일원

여행코스 :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월평항두우리 염전당두마을상정마을창우항하사6구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9.7km, 실제는 15.35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7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걷는다. 장점은 볼거리로 넘친다는 것. 칠산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은 기본,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염전과 드넓은 갯벌을 가득 채운 풍력발전기는 양념이다. 거기에 백바위해변의 빼어난 경관이 방점을 찍는다.

 

 들머리는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22번 국도와 808번 지방도, 77번 국도를 갈아타고 들어오다 양일마을 경로당(염산면 봉남리)’ 앞에서 칠산로5로 옮기면 잠시 후 합산마을에 이른다. 서해랑길(영광37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염산방조제와 칠산로5길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번 구간도 간척사업과 인연이 깊다. 방조제의 둑길이 아니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염전이나 들녘을 횡단한다. 거리는 다소 긴 19.7km, 그게 부담스러운 나는 택시를 불러 5km(집사람은 7.5km)를 이동(같은 코스로)했다. 하지만 5만원이란 거금을 지불했으니 권장할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실제 출발지는 운곡마을(雲谷, 염산면 야월리) 앞 방조제(첨부된 지도에서 야월리 서쪽 해안의 툭 튀어나온 지점). 37코스의 시점에서 4.87km쯤 떨어진 지점이다. ‘월평항에서 2.5km쯤 더 나간 지점이기도 한데, 칠산갯길 300(천일염길)의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나 현 위치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안내판 너머로 검붉은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사리 때는 10km나 떨어진 각씨도까지 경운기를 타고 가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간척사업이 빚어놓은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바둑돌처럼 놓인 비작도를 위시한 작은 섬들, 그 섬들을 잇는 방조제가 바둑판의 선이라도 그리는 양 여백을 가득 채운다.

 칠산바다 갯벌은 지금 가을빛으로 물든 칠면초로 한가득이다. 그 뒤로는 작은 섬들이 둥둥. 이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 그림을 보기 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곳까지 왔다. 집사람을 핑계 삼아 생략해도 될 것을 5만원의 거금까지 들여가면서 말이다.

 11 ; 47. 방조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가음산(206.2m)을 정면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염산면의 해안은 간척사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앞바다의 작은 섬들을 줄줄이 방조제로 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때 생긴 들녘은 대부분 염전. 이게 또 경제성을 잃으면서 대하양식장으로 업종을 바꿨다.

 왼편은 칠산바다의 갯벌, 그런데 바다의 폭이 100m도 채 되지 않는다. 항아리처럼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염전에서 사용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가음산 자락의 농경지. 누렇게 익은 벼가 게으른 농부를 애타게 부른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 한 염전이 뒤를 잇는다. 가을볕 아래 소금 알갱이가 알알이 영글어간다. 영광의 대표적 풍경의 하나라 하겠다. 참고로 영광 앞바다에 펼쳐진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라고 했다. 생산되는 소금도 미네랄이 풍부해 질 좋은 소금으로 정평이 나 있단다.

 12 : 09. 내만처럼 파고들던 바다가 방조제(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6.8km)를 만나면서 끝난다. 저 둑을 경계로 야월리에서 두우리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저수지다. 저 물은 염전에 생명수로 공급된다.

 저수지에서 턴을 한 탐방로는 다시 방조제를 따른다. 바다를 향해 되돌아오는 모양새라고 하겠다.

 둑길을 200m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니 두우리의 염전 단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지명(地名) 자체가 이미 소금 산(鹽山)’인 곳, 얼마나 소금밭이 컸으면 칠산 바닷물이 70리길을 들고 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첫 만남은 영백염전이다. ‘1회 전국 염전콘테스트에서 영예의 대상까지 수상한바 있는 50년 전통의 전통갯벌염전으로 소금 모으기, 운반하기, 수차 돌리기 등 염전 체험도 가능하단다.

 소금은 4월부터 10월까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매일 생산되는 건 아니고, 소금 알갱이가 영글어야 거두어들일 수 있다. 소금밭 두렁을 서성이는 저 염부는 그 때를 헤아리고 있을 게고...

 염전이 단지를 이루다보니 군내버스도 정기적으로 다닌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드문 듯 버스정류장은 오토바이 차지가 되어버렸다.

 길 양옆으로 소금밭이 도열해 있다. 염전이 단지를 이루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화학물질 오염원인 농지와 거리를 둘 수 있어 친환경 소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야 칼슘·칼륨·마그네슘 등 필수 미네랄 함량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다는 한국산 천일염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음식의 깊은 맛을 위해서는 국산 천일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그게 저 소금밭에서 염부들의 노력을 보태가며 얻어지는 것이다.

 이 지역의 염전은 바닥을 타일이나 옹기로 깐 장판염이라고 한다. 햇빛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염 염전은 크게 저수지와 증발지, 결정지로 구분된다. 염도 35(퍼밀·1000분의 1)의 바닷물이 각 구획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되고 염도는 높아진다, 결정지에 이르면 200 이상의 염도를 지닌 바닷물에서 소금 결정이 생성된다. ‘꽃이 핀다고 표현되는 이 단계까지 오는 데 약 1개월이 걸린단다.

 비작도 쪽으로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런 풍경은 사진작가들에게 훌륭한 낚시감이 된다. 해가 뜨고 질 무렵 염전 풍경을 렌즈에 담고 있는 사진작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양 옆구리에 염전을 낀 길은 1.4km나 이어진다. 하도 길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맞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영광은 신안에 이어 지역 대표 천일염 생산지 중 하나다. 천일염 전국 소비량 기준 약 17~18%가 생산된다. 오죽했으면 면의 이름까지 소금 산(鹽山)이 되었겠는가.

 12 : 32. 정자 둘이 나란히 서있는 둑에 올라섰다. 정자 뒤, 길게 뻗어나가는 방조제 끄트머리에는 비작도가 놓였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꼬맹이 섬이다. 그 오른편으로는 칠산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함평만을 벗어난 바다는 썰물이 한창인지 갯벌이 하늘 끝에 닿았다. 간척지도 망망한 염전. 저절로 가슴이 시원해진다.

 저 갯벌은 국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등이 매기는 갯벌 평가에서 매년 1위를 차지한단다. 겨울 북풍이 불 때 격한 파도가 치면서 바다 밑 뻘을 모두 쓸어가고, 다시 봄부터 새로운 뻘이 내려앉는 지형적 특징 덕분이라나?

 방조제를 따라 당두마을로 간다. 소금밭과 갯벌을 양옆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두우리의 저 싱싱한 갯벌은 영양가 높은 플랑크톤이 풍성해서 고기 떼가 몰려오고, 어패류도 쑥쑥 자란다. 봄에는 실뱀장어, 여름~가을엔 숭어와 새우 꽃게, 가을부터 늦겨울까진 김장용 새우가 잡힌다.

 생태계 복원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도 보인다. 모래 날림으로 인한 염전 피해와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퇴사울타리와 대나무 방풍책을 설치했다. 자생 수목인 해송으로 방풍림도 조성했다. 그런 노력이 인정받아 산림청 주최 전국 우수 산림생태복원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간척지 방향은 옷을 바꿔 입었다. 소금밭을 지나자 진초록 대파 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생명력 넘치는 푸른빛이다.

 당두마을로 가는 방조제는 꽤 길었다. 덕분에 우린 서해바다를 실컷 보게 된다.

 서해바다는 다도해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보여준다. 섬 십여 개가 군데군데 보일 뿐 나머지는 일직선의 수평선이다. 그 많던 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위해 섬과 섬을 연결했고, 그 결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잃었다.

 12 : 53. 배수갑문을 지나 두우리 어촌마을체험관에 이른다. ‘두우리 8km나 되는 해안선을 자랑한다. 바닷물이 많이 빠지면 7~12km나 걸어 나갈 수 있는 갯벌도 자랑거리다. 그러니 많은 주민들이 어촌계를 중심으로 갯벌을 부치며 살아갈 것은 당연. 그런 삶은 1973 KBS TV 연속극 두우리 녀석들로 소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체험관은 문이 닫혔다. 그 이유는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앞 갯벌에서 갯벌양식장 환경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합의 지속적인 자원관리를 위해 무단출입을 금한다니, 어찌 체험객들을 받을 수 있겠는가.

 체험관 앞,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9.9km/ 시점 9.8km) 37코스의 반을 걸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난 5km를 택시로 이동했다. 그러니 이제 시작인 셈이다.

 12 : 56. 200m 남짓 더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칠산갯길 300 이정표는 두우리해수욕장까지 1.07km 밖에 남지 않았다며 곧장 가란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당두마을’. 천일염으로 유명한 두우리(斗牛里) 3개 자연부락(당두·상정·창우) 중 하나로, 마을 뒷산이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닭머리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당두(堂斗)’로 변했다. 그 왼쪽은 상정마을이다. 마을이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정자와 같다고 해서 상정(上亭)’이란 지명을 얻었다.

 13 : 00. 77번 국도로 올라서 상정마을을 관통하는데 이때 원불교 마크가 눈에 띈다. 맞다. 영광은 원불교의 발상지다. 박중빈 대종사의 생가인 구호동 집터를 비롯해 기도터였던 마당바위,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노루목대각지까지 모두 영광에 있다.

 시골 마을치고는 제법 번화한 모양새이다. 펜션과 민박에 식당, 마트까지 갖출 것은 다 갖췄다. 백바위해수욕장과 인접해있다는 지리적 요건이 작용했을 것이다.

 상정마을 버스정류장. ‘실뱀장어 채포 허가권에 대한 해양수산부 답변이 붙어있었다. 민물에서 사는 뱀장어는 연어와 달리 바다에서 산란한다. 때문에 장어 양식장에 공급할 치어(실장어)를 바다에서 잡아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그물(낭장망 어구)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답변이다. 아무튼 실장어잡이는 불법이 성행한다고 했다. 실장어 가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모기장 같은 극도로 촘촘한 그물을 사용해 실장어뿐 아니라 모든 치어를 깡그리 잡아버린다는 것이다.

 상정마을 정자는 칠산바다에 대한 조망이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칠산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그렇다면 자리를 잘못 잡았다. 도로 건너의 바닷가 언덕에 얹어놓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상정마을을 지나 백바위 해변까지는 기분 좋은 산책로였다. 77번 국도(칠산로)의 갓길에 나무데크를 깔았다.

 중간에 전망대까지 만들어두는 세심함도 엿보인다. 칠산바다를 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인 듯, 하지만 웃자란 잡목이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다.

 13 : 14. 빼어난 경관으로 입소문을 탄 백바위해수욕장에 이른다. 입구의 울창한 노송 숲은 자랑거리, 백사장도 제법 넓은데다 모래 입자가 무척 곱다. 덕분에 모래사장이나 갯벌에서 씨름·닭싸움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갯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아이들도 좋아한단다. 영광군에서 천일염·갯벌축제를 연다니 일부러라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겠다.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아름다운 경관만이 아니다. 모래사장 너머의 갯벌은 호미로 헤집는 자리 어디서든 백합과 고둥이 나올 만큼 생태가 건강하다고 했다.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저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그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해변은 자동차 캠핑족들로 붐볐다. 그동안 서해랑길을 걸으며 이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 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칠산바다가 그만큼 곱다는 얘기가 아닐까?

 백사장 너머,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바위가 눈길을 끈다. ‘백바위(白巖)’라는 지명을 낳게 한 풍경이다. 해안가에 거대한 흰 바위 무리가 갯벌 쪽으로 길게 뻗어 나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바위 끝에 올라앉은 정자가 풍치를 더해준다. 이곳 백바위해안은 낙조의 명소라고 했다. 정자와 한데 어우러지는 낙조의 색감도 훌륭하지만, 인적을 드물어서 감동적인 낙조풍경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란다.

 백바위는 예쁘장한 나무다리로 연결되고 있었다. 조형미 넘치는 아치를 배경삼은 사진을 남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 참고로 백바위는 무슨 특별한 전설이 있는 게 아니다. 바닷가에 둘러싸여 있는 바위가 하얀색을 띠고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

 13 : 24. 또 하나의 다리(조금 전보다 한참이나 작다)를 건너자 백암정(白巖亭)’이란 정자가 반긴다. 쉼터는 기본, 낙조를 바라보는 전망대를 겸했다. 거기에 뒤로 물러설 경우 낙조 풍경의 중심이 된다니 이만하면 다목적 정자라 하겠다.

 정자에 오르면 저 멀리 크고 작은 섬들이 아스라하다. 맞다. 두우리 앞바다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볼거리다. 마을 앞 10~20km 안에 영광굴비가 잡히는 칠산도, 한국관광공사가 아름다운 섬으로 꼽은 송이도, 영화 마파도 촬영장소인 각이도 등 20여개의 유·무인도가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난다. 영광 앞바다는 산처럼 보이는 일곱 개의 저 섬들이 있다하여 칠산바다가 되었다. 그 바다는 조기들의 고향이었다. 3월에서 4월 무렵, 산란을 위해 회유하는 조기 떼들로 바다는 넘실거렸고, 전국의 어선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물 반에 고기 반, 사흘 동안 조기를 잡아 평생을 먹고 산다는 '사흘칠산'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자를 빠져나온다. 하지만 다리 건너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커다란 백바위를 우회해 숲속으로 들어선다.

 13 : 30. 잠시 후 임도(이정표 : 종점까지 8.3km)로 올라 뒷산(81.6m)을 에도는 해안도로를 탄다. 이때 칠산바다의 고운 풍광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마침 오가는 차량도 없으니 실컷 눈에 담으면 될 일이다. 오죽 안 다녔으면 칡넝쿨이 도로 가운데까지 퍼졌을까.

 호젓하고 편안한 길은 주변까지 꽃밭으로 만들었다. 노란 금계국과 하얀 들국화가 더미를 이룬다. 그게 아스라이 펼쳐지는 바다와 함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게 바로 칠산이란 지명을 낳게 한 섬들이다. 그런데 섬이 여섯 개 뿐이다. ‘마음씨가 고운 사람에게만 일곱 개로 나타난답니다.’ 젊은 도반이 너스레를 떤다. 그럼 난 마음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닌가 보다.

 고개를 돌리자 백암정이 눈에 들어온다. 백바위 해변은 노을이 없는데도 충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하얀 바위가 넓은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흡사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뒷산 자락의 바닷가, 나 홀로 외로운 등대도 잠깐으로 볼거리로는 충분하다. 높이 11.5m(직경 1.8m)의 흰색 원형강관조로 인근을 항해하는 어선의 주·야간 항행지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13 : 45-59. 뒷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 끝자락에 정자가 걸터앉았다. 칠산바다와 백수읍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쉼터 겸 전망대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가져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칠산바다 조망, 하늘과 바다를 반반으로 나누는 선, 그 위에 고만고만한 섬 여섯 개(정확히는 일곱 개)가 놓여있다. ‘! 피라미드처럼 생겼네?’ 코로나의 만연으로 입국 여부가 불투명하던 시절, 우리부부는 이집트를 여행 중이었다. 당시 기자지역의 사막에서 바라보던 피라미드가 문득 떠올랐나 보다.

 백수읍 갯벌에 늘어선 풍력발전기 무리도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들녘을 가득 메우며 단지를 이룬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14 : 02. 임도를 벗어나 창우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이 푸른 바다(칠산바다)에 둘러싸여있다 하여 푸를 창()’자를, 소를 닮았다는 마을 뒤 한우산에서 소 우()’자를 따와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잠시 후 이른 창우항(이정표 : 종점까지 6.5km)’은 바다를 삶의 현장 삼아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선착장이다. 하지만 널찍한 물양장에다 크레인을 두 대나 갖춰 웬만큼 크다는 항구가 부럽지 않다. 커다란 창고와 어민회관도 눈에 띈다. 지역맞춤형 소득증대사업인 어촌뉴딜 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선착장에는 꽤 많은 고깃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인근 해역에 조기·꽃게·가오리·서대·새우 등 바다자원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맞나보다.

 창우항을 지나면 불갑천의 둑길을 탄다. 널따란 갯벌 위로 둑길이 뱀처럼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다. 갯벌 사이 고인 물에 햇살이 비치자 물고기 비늘처럼 번쩍인다.

 창우항을 돌아온 갯골은 깊고 긴 물 빠진 갯고랑을 불갑산 자락까지 끌어간다. 그래서 하천의 이름까지 불갑천이 되었다. 이즈음 갯벌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흰 갈매기 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갈대가 아니라 억새랍니다 둑길의 자취까지 지울 듯 잠식해오는 웃자란 억새를 갈대라고 했다가 집사람에게 초본(草本) 교육을 톡톡히 받았다.

 드넓은 갯벌은 온통 풍력발전기 차지다. 백수읍 하사리와 염산면 두우리의 국공유지 20여만 평에 해상풍력발전을 중심으로 에너지 융복합 산업플랫폼을 구축한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해상풍력발전이란 풍력 터빈을 호수나 피오르 지형, 연안 같은 수역에 설치해 그 곳에서 부는 바람의 운동에너지를 회전날개에 의한 기계에너지로 변환해 전기를 얻는 발전방식을 일컫는다.

 저 강태공은 시간이 아니라 운저리(‘망둥어 꼬시래기로도 불린다)’를 낚는 중이라고 했다. 36구간의 무미건조했던 대화가 떠올랐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한마디 더 건네 본다. ‘그럼요. 얼마나 맛있고 식감이 좋은데요’. 회로도 먹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불갑천이 좁아지더니 소하천으로 변했다. 아니 저건 염전에서 사용할 바닷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일종의 수로이다. 아무튼 건너편에서 둘레길 도반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출발지 부근처럼 이곳도 자 모양으로 길이 굽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니 염전이 들어서 있는 게 당연. 소금 만들기가 끝물이어서 일까? 염전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저 소금밭에는 흰 소금 대신 붉은 칠면초가 자라고 있을 게다. 쓸쓸한 분위기로 대변되는 염전의 겨울 풍경...

 14 :37. ‘자형 수로의 끝(이정표 : 종점까지 4.3km)에 이른다. 저 둑을 경계로 서해랑길은 송암리(같은 염산면)’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커다란 저수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 역시 염전에 공급할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곳. 거기에 대하양식까지 겸하고 있는 듯 통발모양의 어망이 쳐져 있었다.

 저수지를 지난 서해랑길은 이제 반대편 둑길(이정표 : 종점까지 4.1km)을 탄다.

 영광은 ‘Green Energy’의 메카다. 원자력에 풍력, 태양광까지 탈 탄소를 위한 발전시설을 모두 갖췄다. 나머지 2%는 조력(潮力)으로 채워 넣으면 완벽해지지 않을까?

 태양광발전소와 농경지 사이를 걷던 서해랑길이 다시 둑길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풍력발전기 사이사이를 걷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다가가 본 발전기는 멀리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구조물이다. 누군가는 저 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불갑천 주변은 저수지나 염전, 양어장, 수로가 많다. 그래서 사방 천지가 물이다. 물에 비치는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15 :02. 탐방로가 함께 걸어온 불갑천과 헤어지잔다. 그리고 이정표(종점까지 2.5km)가 가리키는 들녘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또 다른 들녘을 횡단한다.

 15 : 14. 77번 국도(이정표 : 종점까지 1.6km)에 닿았다. 영광풍력발전() 사옥이 있는 지점이다. 영광풍력은 국내 최대 규모인 140MW(메가와트)급의 서해안 윈드팜(Wind Farm)’이다. 72천 가구가 사용 가능한 26MWh(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함으로써, 111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단다.

 탐방로는 국도로 올라서지 않은 채 왼쪽 아래로 난 소로를 따른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었다. 그 끝에서 불갑천을 만났기 때문이다. 불갑천의 물길은 분명 좁았다. 그렇다고 건너 뛸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러니 애초부터 다리를 건너는 게 옳은 선택일 것이다.

 불갑천과 맞닥뜨린 우린 다리(불갑천교)로 올라갈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길을 만들었고, 가드레일을 넘어 다리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염산면과 백수읍의 경계를 이루는 다리 아래로는 불갑천(佛甲川)’이 흐른다. 불갑면 자비리의 노은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유입되는 길이 32.5km의 물줄기이다.

 15 : 28.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난 농로로 빠져나간다. 가드레일을 잘라 통로를 만들었는가 하면,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0.9km)까지 세워놓았다. 이럴 거라면 애초부터 다리 위로 인도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누렇게 익은 벼들로 한껏 풍성해진 들녘을 양옆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15 : 40. 하사리(下沙里)의 자연부락인 염전마을(하사6)’에 이르면서 37코스는 끝을 맺는다. 1952년 염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하나 더, 종점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마을 노인정이 위치하고 있어 트레킹 날머리로는 이만 곳이 없었다.

 서해랑길(영광 38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농로가 백수로와 맞닿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칠산갯길 300의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염전길에서 백합길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15.35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36코스(향화도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

 

여행일 : ‘23. 9. 9()

소재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향화도항염전(옥실리)신흥마을내묘마을설도항합산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4.13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6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시종여일 걷는다. 이때 물때에 맞춰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갯벌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자칫 지루하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칠산바다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눈요깃거리로 삼다보면 트레킹은 어느새 끝을 맺는다.

 

 들머리는 향화도항(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읍으로 들어온다. 신풍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22번 국도(함평방면), 종산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808번 지방도(염산방면), 봉전교차로(염산면 상계리)에서 77번 지방도(해제방면)를 번갈아 타며 30km쯤 들어오면 향화도항에 이른다.

 칠산바다의 해안선, 아니 방조제의 둑길을 걷는 14km 길이 코스다. 오늘은 전 구간을 다 걸어보기로 했다. 앞세운 집사람과의 거리는 3km, 조금만 재촉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서해랑길(영광 36코스) 안내도는 칠산 갯길 300 탐방안내도와 함께 버스정류장(칠산타워) 옆에 세워져 있다.

 11 ; 28. 향화로를 따라 포구를 벗어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200m쯤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13.7km/ 시점 0.3km)에서 방향을 틀어 방조제로 간다.

 이때 칠산바다에 떠있는 목도가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또 둘이 하나로 돌아오는 요술 섬이다.

 옥실리 앞바다, 무동력선 여러 척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바다를 삶의 현장삼아 살아가는 어부의 작업장이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대무마을(옥실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서해랑길 36코스는 이런 방조제들을 번갈아가며 걷는 여정이다.

 고개를 돌리자 향화도항이 눈에 들어온다. 칠산대교가 놓이면서 항구는 제 기능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영광권역 해안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칠산타워만큼은 요지부동이다. 함평만과 칠산바다가 한꺼번에 조망되는 높이 111m의 전망대에 올라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들녘은 아직도 염기가 다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웃자란 갈대가 숲을 이룰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다.

 방조제가 끝나자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방조제는 아니지만 해안을 따라 길이 나있다.

 이즈음에서 우린 닭섬(kakaomap 닥섬으로 적었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닭을 닮았다는 섬이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섬은 민닭섬이다. 등대 위로 떨어지는 일몰로 유명한 곳이다.

 11 : 40. 길이가 700m쯤 되는 두 번째 방조제는 송촌마을(옥실리) 앞을 지난다.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은 염전으로 가득하다. 맞다. 영광군의 염전은 568ha로 전남 서남해안 염전(3007ha) 중 신안군 다음으로 많다. 소금도 전남 전체 생산량의 19%를 차지한다. ‘소금 염(), 뫼산()’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근원이기도 하다.

 토판염전으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흙판에서 소금을 만드는 친환경적인 토판염은 장판염전에서 추출한 소금보다 미네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염도가 낮은 데다 맛도 순해 요리에 그만이다. 그러나 장판염보다 품이 많이 들고 생산 날 수도 훨씬 짧아 수지 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한다.

 후쿠오카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 때문에 시끄러운 요즘. 사재기로 인해 금값이 된 소금은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그런데도 저 소금밭은 왜 놀리고 있는 것일까? 경제성을 이유로 토판염전이 장판염 생산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공간은 대하양식장 차지다. 오래 전, 소금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값싼 중국산 소금에 밀린 많은 염전이 문을 닫는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당시 선택했던 대체업종이 바로 저 대하양식이었을 것이다.

 왼쪽으로는 칠산 바다가 펼쳐진다. 연평도와 더불어 그 옛날 조기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1 : 50. 방조제는 장고도(이정표 : 향화도에서 2.67km)’를 만나면서 끝난다. 간척사업이 바닷가 작은 섬을 뭍으로 연결시켰다. 하지만 비탈이 심했던지 길은 신흥마을 쪽 내륙으로 에돌아간다.

 칠산 갯길 300의 탐방안내도가 눈에 띈다. 전국에 번지고 있는 걷기 열풍에 동참한 영광군이 조성한 둘레길이다. 모두 5개 코스(굴비길·노을길·백합길·천일염길·불갑사길)로 나뉘는데, 이중 불갑사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해랑길과 일치한다. 하나 더, 오늘은 4코스인 천일염길(향화도항-설도항-야월리염전-백바위해수욕장)’을 따라 걷게 된다.

 잠시 후 옥실4에 이른다. kakaomap 신흥마을로 표기하고 있으나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신옥·와룡·내묘·송정·미동·소무·송촌·대무)에는 끼지 않는다. 새로 생긴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은 꽤 넓은 담수호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칠산대교와 칠산타워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향화로2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가다 한우사육장인 성율농장(이정표 : 향화도에서 2.9km)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넘어 또 다른 방조제로 올라선다.

 꼬맹이 방조제를 지나면,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아니 곶부리와 곶부리를 잇는 게 방조제일지니 반대편 곶부리를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쥐섬이 눈에 들어온다. 생긴 게 쥐를 닮았는지는 몰라도, 생쥐만큼이나 작은 섬이다. 땅 투기로 뜨겁던 시절, 친구는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를 가보지도 않은 채 샀었다. 지금까지도 애물단지로 남아있다던 섬이 저런 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 : 08. 미동마을 앞 방조제로 올라선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방조제는 꽤 너른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미동마을과 송정마을 등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도 둘이나 된다.

 입질은 자주 있나요?’. ‘이제 막 왔답니다’. ‘뭐가 잘 잡히는가요?’. ‘안 잡아봐서 몰라요’. 강태공의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무미건조한 대화가 되어버렸다. 4년쯤 전 튀르키예의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만난 강태공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었고, 당시 난 팔뚝만한 물고기를 선물로 받기도 했었다.

 방조제가 끝나고 잠시지만 해안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잠시 후 해안에 다시 닿는다.

 12 : 20.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칠산갯길 300에서 이정표(장고도에서 2.96km)를 세워놓았다. 산자락을 향해 길이 나있는데도 서해랑길 방향표시는 오른쪽으로 가란다. 길이 끊겨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집사람을 따라잡은 기념으로 한 컷. 활짝 웃는 게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녀 뒤로 칠산바다가 펼쳐진다. 칠산바다는 꽃게··조기·새우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어족자원을 자랑한다. 이들은 아까 거론한바 있는 천일염과 만나 젓갈·굴비 등 2차 가공품으로 재탄생되어 영광 수산업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서해랑길은 바닷가와 이별을 고한다. 장고도에 이어 두 번째인데 내묘마을(옥실리)’을 향해 내륙으로 파고든다.

 썩 넓어 보이지는 않은 간척지는 갈대로 한가득이다. 아직도 염기가 덜 빠져나간 모양이다.

 잠시 후 이른 내묘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고양이 머리를 닮았다 하여 괴머리라 불렀으며, 그 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묘라 부른다.

 그렇지 않아도 꼬맹이 마을인데, 두어 곳은 아예 폐가로 방치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전라도를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움 인정과 풍요로운 자연을 보고 팔불여(八不如)를 말했다. 그중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영광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저런 풍경이라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일런지도 모르겠다.

 마을 뒤 고갯마루를 넘으면 또 다른 방조제가 반긴다. 길이가 1.5km나 되는 긴 방조제다.

 12 : 39-49. 둑길이 하도 길다보니 쉼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저런 정자가 세 개나 길손을 맞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에 논농사로 업을 삼는 신옥마을과 신오마을 등 옥실리와 오동리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앉았다.

 일주일 후면 추분(秋分). 둑길도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가을의 전령 인 물억새, 가을이 깊어갈수록 색이 짙어진다는 갈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KBS-2TV 건강 혁명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도 눈에 띈다. 2년 제작 과정의 장기 프로젝트로, 전국에서 모집된 30여명의 당뇨 환자들이 매월 23일의 캠프를 차리고 설도항의 아름다운 해변을 걸으며, 운동법·식습관·생활습관 등의 미션 수행을 통해 당뇨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공유하던 프로그램이다.

 13 : 02. 젓갈 생산지로 유명한 설도항(雪島港)’으로 들어선다. 멸치며 민어, 조기 등 수산물을 깔아놓은 좌판이 주욱 늘어서 있고 갈매기들이 자유로이 유영하는 작은 포구다. 하나 더, 설도는 원래 와도(臥島, 사람이 누워있는 모양새란다)라는 조그만 섬이었다. 1930년께 설도관문이 건설되면서 육지의 바닷가로 변했다. 이 와중에 누운섬 눈섬이 되었고, 이게 또 한자로 변환되면서 설도(雪島)로 굳어졌다.

 자그마한 포구는 선착장도 아담하다. 하지만 통통배부터 중형의 고기잡이배까지 정박하고 있는 어선의 크기나 숫자는 서해안답지 않게 컸다. 인근 어장에서 잡히는 수산물의 양이 그만큼 짭짤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설도는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6.25 전쟁 중 공산당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됐다. 그 현장에 기독교인 순교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독교인 순교탑을 세워 놓았다.

 설도항은 젓갈 생산지로 유명하다. 고만고만한 젓갈 가게들이 줄지어 섰다. 하지만 내 집에 들든 네 집에 들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호객행위가 없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 구입해도 맛과 가격이 같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여담 하나, 옛날 농사와 고기잡이를 함께 해야 하는 갯마을 어머니들에게 반찬 마련은 이중고였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미리 반찬을 만들어 놓을 수도 없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젓갈이다. 새우·송어 등 재료가 흔했고, 거기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설도항의 명물 젓갈타운은 고깃배 모양으로 따로 지었다. 앞바다에서 잡히는 새우·꼴뚜기·조개·멸치 등 각종 수산물에 천일염으로 간한 다양한 젓갈을 팔고 있음은 물론이다. ‘잡젓도 그중 하나. 황석어젓·밴댕이젓·곤어리젓으로 잡젓을 만들고, 풋고추를 담가 석 달 정도 숙성시킨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밥도둑이 따로 없단다.

 수산물판매센터는 젓갈타운과 함께 설도항의 주축을 이룬다.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신선한 활어와 꽃게·왕새우·낙지 등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안강망이나 닻자망으로 잡은 수산물을 수협을 거치지 않고 어민들이 직접 판매하기 때문이다.

 입주 상점들은 하나같이 영세했다. 커다란 수족관으로 치장된 다른 수산시장들과는 달리 작은 고무통들만 눈에 띈다. 그나마 수산물을 반도 채우지 못했다.

 13 : 10.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염산방조제의 둑길을 걷는다. 직진으로 뻗은 길은 차 한 대가 다닐 정도로 좁기 때문에 앞뒤로 오가는 자동차를 유의해 다니는 편이 좋다.

 이 구간은 자전거로 달려 볼 수도 있다. 염산면사무소에 비치된 약정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자전거(안전모와 무릎보호대 포함)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 사전예약도 가능하단다. 참고로 자전거 둘레길은 설도항에서 봉양들까지의 방조제(7km)와 염전 및 청보리밭을 감상할 수 있는 농어촌도로(5km)를 합쳤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덧 남도의 바다가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젓갈과 자연산 횟집으로 유명한 설도항에서의 먹거리는 덤이다.

 오른쪽으로는 방조제를 쌓아 만든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 봉덕산(295.6m) 자락에는 염산면 소재지인 봉남리가 들어앉았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봉남평야가 펼쳐진다. 1930년대 설도를 사이에 두고 옥실리와 야월리 방향으로 각각 방조제를 쌓았다. 이때 저 들녘이 생겨났고, 설도는 섬에서 육지로 바뀌었다.

 봉양들로 가는 방조제를 걷는다. 바다를 향해 줄곧 달린다고나 할까? 하나 더, 이 구간 역시 건강 혁명의 촬영지이다.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길가 들녘에서 생산되는 찰쌀보리·새싹보리·보리빵과 영광의 특산물인 청보리 한우·굴비 등이 제공됐다.

 졸지에 한나라의 공주로 둔갑해 남흉노로 시집가던 왕소군은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고 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유래다. 하지만 난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를 외친다. 여름철에 피어야할 금계국이 입추가 내일모래인데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봄꽃인 민들레도 한 몫을 거든다. 하지만 국내 산천을 접수해버렸다는 서양민들레가 아닌 순수 토종민들레로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꽃받침(총포)이 뒤로 젖혀져 있지 않고 곧게 감싸고 있으면 토종민들레라고 하지 않았던가.

 얼마쯤 걸었을까 농경지가 끝나는가 싶더니 들녘이 온통 물 밭으로 변해버렸다. 커다란 합산제를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저수지들이 줄을 이룬다. 양식시설이 집단으로 들어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40. 지자체도 이때쯤이면 다리가 뻐근해질 것임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정자를 지어 잠시 쉬어가도록 했다. ! 이곳은 단축코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점이기도 하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을 에돌지 않고 간척지 들녘을 횡단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1.5km 정도가 단축된다.

 단축코스에 대한 유혹을 겨우 떨쳐내고 이정표(종점 4.8km/ 설도항 2.3km)가 가리키는 종점 방향으로 간다. 집사람은 물론 단축코스를 선택했다.

 이즈음 썩 내키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간척지에 그보다도 더 넓어 보이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한 결정이겠지만, 원자력을 축소하면서까지 장려된 점은 분명 문제다. 이는 발전단가를 상당히 높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시선을 조금이라도 옮길라치면 저만치 눈앞에는 어김없이 칠산타워가 놓여있다. 맞다. 이곳 영광의 랜드마크는 칠산타워라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아무리 해안 길을 빙글빙글 돌아도 눈앞에서 칠산타워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둑에 걸쳐놓은 저 시설의 용도는 대체 뭘까. 칠산바다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전망대일지도 모르겠다.

 발아래는 끝없는 갯벌, 뻘 바다에 올라앉은 어선, 너른 개펄에 놓인 통발과 행여나 통발에 걸릴까 집게발 들고 조심조심 오가는 게들을 관찰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밋거리일 것이다.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다. 그나저나 가을이 무르익어가나 보다. 공활한 하늘은 푸름을 한껏 자랑하고, 쏟아지는 햇살은 화사했다. 그 푸름에 바다가 더해진다. 그러자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이 티가 되어버린다.

 간척지가 하도 넓다보니 대하양식장도 단지를 이루고 있다. 다른 지역의 양식장들과는 달리 대하를 잡는 통발 모양의 어망도 눈에 띈다.

 바다에 타워와 다리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14 : 08. 드디어 바다를 향한 긴 여정이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저곳(둘레길 자전거여행 안내도는 합산항으로 적고 있었다)을 반환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끄트머리에는 선착장(이정표 : 봉양들 3.16km/ 설도항 4.36km)이 만들어져 있었다. 쉼터용 정자도 들어섰다. ‘월봉마을 어민들을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정박하고 있는 배는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 건너는 무안군(해제면) 도리포, 그 사이에 김 양식을 위해 세운 지주가 숲을 이룬다. 맞다. 도리포 인근 갯벌에서는 일찍부터 김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주식으로 곱창김을 생산하는데, 일반 김보다 채취 횟수가 적어 대량 생산이 어려운 반면 김 값이 훨씬 좋단다.

 이후부터는 조개산(118.2m)을 전방에 두고 걷는다. 대하양식장과 태양광발전소 등 아까 합산항으로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역순으로 펼쳐진다.

 집사람과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던 둘레길 도반을 따라잡았다. 80대 중반을 바라보는 연세이신데도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신다.

 건너편에는 37코스가 지나가는 월평항이 있다.

 길은 가음방저수지와 내남저수지, 봉양저수지로 연결되는 수로형 내만의 둑길을 따라간다.

 트레킹이 막바지에 이르자 마음부터 여유로워진다. 그러자 누렇게 물들어가는 봉남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저런 들녘이 있었기에 영광이 ‘4()’의 고장으로 불렸을 게고 그 속에 쌀이 끼어 있을 것이다.

 조개산(118.2m)이 성큼 다가왔다. 그 앞이 종점인 합산마을이다. 1927년 간척지가 조성되고,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생긴 마을이다. 봉남리(奉南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동촌·내남·합산·설도·한시·봉전) 중 하나로 합산(蛤山)’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조개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했다.

 14 : 42. 합산갑문을 지나 합산마을 앞 도로(칠산로5)에 이르면 트레킹이 끝난다. 염산방조제의 끝이자 버스정류장(합산마을)에서 100m쯤 떨어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GPX트랙이 14.1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영광 37코스) 안내도는 방조제와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하나 더, 시작점 표시판은 안내도 기둥에 매달려 있다.

서해랑길 35코스(돌머리해변-향화도항)

 

여행일 : ‘23. 8. 26()

소재지 : 전남 함평군 함평읍·손불면 및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돌머리해변주포항대발마을석계마을농암마을월천방조제안악해변함평항향화도항(거리/시간 : 19km, 실제는 첨단양식장부터 13.47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5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함평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함평군에서 영광군으로 간다. 덕분에 함평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트레킹 내내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주요 볼거리로는 안악해변의 꽃밭과 칠산타워의 조망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돌머리 해수욕장(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따라 함평방면으로 2km쯤 내려오다 양림교차로(함평읍 진양리)에서 주포로로 옮겨 4.5km쯤 들어가면 돌머리해수욕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무안 35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해수풀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해제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걷는 19km 길이의 코스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6Km를 줄여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첨부된 지도의 석창리)’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산악회의 배려로 중요 포인트인 돌머리해변과 주포항을 둘러봤으니 봐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고 보면 되겠다.

 이동 중 들른 주포(酒浦), 옛 이름은 주항포(酒缸浦, 1865년 간행 대동지지 지명), 1900년대 초부터 주포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막이 많은 포구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주포방조제가 건설되고 구주포가 포구의 구실을 못하게 되자 신설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서해에서 잡은 수산물의 집산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단다. 그러니 주막이 많았을 것은 당연, 하지만 어선이 대형화 되는 1955년 이후 점차 사양화되어 폐항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1962년 돌머리해수욕장 개장으로 횟집이 늘어나면서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곳에서만 잡히는 엽삭(곰삭은 엽삭젓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단다)’이란 특이한 물고기가 있었다고 했다. 황실이(강달이준치·조기(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등도 주포항으로 모였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서너 척의 어선이 매어져 있을 뿐 한적하기 짝이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구가 떠오를 정도로...

 쇠락한 포구의 물양장은 텅 비었다. 하지만 옛날, 특히 배가 들어온 날의 주포는 북적거렸다고 한다. 만선의 풍어를 알리는 배는 오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주머니가 두둑한 어부들로 붐비던 주포는 술과 음식이 넘쳐나고 노랫소리가 드높았단다. 주포의 이름에 술 주()’자가 박혀있는 이유일 게다.

 돌머리해수욕장이 개장된 뒤로 찾는 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지자체가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수산물 직거래장터를 열었다. 그 옛날 주포를 먹여 살리던 뱃사람들 대신, 이젠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린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 난간에 서면 함평만의 풍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35코스가 시작되는 돌머리 해안은 물론이고, 그 너머로 서해랑길을 답사하면서 걸었던 현경면과 해제면의 해안, 즉 곶부리로 점철되던 아름다운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석창리를 에돌아가는 해안이 있다. 중앙에 보이는 산은 두류봉’, 그 왼쪽 끝을 돌꼬리(돌고지)라 부른다고 했다. 석창리의 포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포구의 오른쪽은 주포방조제다. 동쪽 깊숙이 파고든 함해만을 가로막은 방조제로 이로 인해 장교리(함평읍)과 궁산리(염산면)에 드넓은 들녘이 만들어졌다. 저 방조제는 수랑개라는 지명을 만들기도 했다. 바다를 막은 간척지의 진흙탕 즉 질흙 투성이 갯가로 발이 술술 빠지는 수렁의 갯가라는 뜻이다.  수랑개 술항개를 거쳐 주포가 되었다는데. 낭만적인 이름으로 이보다 더한 이름이 있을까 싶다.

 포구 근처에는 한옥 전원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의 볼거리(함평만의 황홀한 낙조)와 놀거리(돌머리해수욕장), 먹거리(식당·카페)를 연계시킨 체류형 관광단지로, 50여 동의 한옥 가운데 30여 동이 민박으로 쓰이고 있단다.

 주포방조제 끄트머리에는 함평의 명물 해수찜 마을(손불면 궁산리)이 있다. 유황이 함유된 돌을 소나무로 달구어 데운 물로 찜질을 하는 곳인데, 함평의 바닷가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간요법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해수찜은 따뜻한 물이 담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아니다. 해수에 뜨겁게 달군 유황석을 넣은 물에서 나온 증기로 몸을 데우고, 그 물에 적신 수건을 몸에 덮는 방식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한 해수탕과는 완전히 다르다. 피부질환·신경통·당뇨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의 해수찜은 세종실록의 도자기 가마를 이용한 한증법을 계승·발전시켰다고 한다. 가열한 유황석을 쑥·삼못초·뱀딸기풀 등의 약초가 담긴 해수탕에 넣어 데워진 물로 찜질하는 것. 뒤뜰 아궁이에서 갓 구워낸 유황석을 넣은 탕의 온도는 섭씨 7080. 온도가 내려갈 때까지 수건에 물을 적셔 찜질한다. 이렇게 하면 온천과 약찜의 효능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실제 출발지는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함평군 손불면 석창리)’이다. 돌머리해수욕장에서 811번 지방도를 타고 손불 방면으로 6km쯤 오면 나온다.

 11 : 20. 서쪽, 그러니까 함평만을 향해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정표에 적힌 첨단 양식장 300m쯤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담수어 양식단지, 첨단시설을 갖춘 입주업체들은 식품안전관리시스템인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적용업소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위해 물질이 섞이지 않은 담수어(장어)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에는 둥근 반지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양식장에서 기르고 있는 장어를 형상화했는데, ‘대지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참고로 뱀장어는 함평군의 군어이다. 함평군은 이밖에도 군 나비인 호랑나비와 은행나무·춘란·비둘기 등을 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갖고 있다.

 줌을 당기자 돌머리해안이 성큼 다가온다. 둥그렇게 울타리를 쳐놓은 곳은 낙지 산란장(낙지목장이란 이름표를 달기도 한다)’일 것이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갯벌낙지의 보존을 위해 낙지 산란장 조성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단다.

 서해랑길은 함평면의 해안선을 따라간다. 그리고 종점인 향화도항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바닷가와 헤어지지 않는다. ! 앱은 서해랑길과 만나는 이곳을 시점에서 6.13km쯤 떨어졌다고 표시한다. 집사람 덕분에 오늘도 6km 정도를 단축한 셈이다.

 갯벌은 아직도 황토색이다. ‘황토 랜드라는 브랜드는 무안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함평의 바다도 맑고 고운 황토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물때를 맞춰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11 : 35. 해안선을 따라 700m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아니 둑길 옆에 월천항으로 가는 811번 지방도를 새로 내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왼편 둑길을 따른다.

 들녘 너머는 석계마을’. 법정 동리인 석창리(石倉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석계·해창·대발·농암·대덕·해안) 중 하나로, 군유산과 두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이 마을 돌꼬리로 유유히 뻗어 나가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이 시냇물 같은 형국이라 하여 석계(石溪)’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금 더 걸으면 석창리 어민회관이 있는 돌고지 선착장이다. 35코스의 시점인 돌머리와 상대되는 지명으로 돌머리와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돌꼬리(또는 돌고지)’로 불린다고 한다. 함평의 구릉지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두 곶(), 즉 돌머리와 돌꼬리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선착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석계마을과 농암마을을 거쳐 산남리 방조제로 연결된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공사 중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기는 했지만 산남방조제로 가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돌꼬리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도로가 온통 헤집어져 있다. 하지만 바닷가를 따라 난 옛길이 선명해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눈을 들자 석창리 앞바다의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 갯벌은 석화가 지천이라고 한다. 석화는 해풍에 맛을 키우고 갯벌의 영양분을 빨아 제 살을 불린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석화는 바다의 인삼로 불릴 만큼 영양이 높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 때면 맛과 영양이 최고에 달해 이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나?

 11 : 54. 정자가 길손을 맞는 산남방조제(석창리-산남리-월천리를 잇는다)’에 이른다. 초입의 이정표는 종점(칠산타워)까지 1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함평만해안도로는 서해랑길 5코스처럼 돌머리해안과 영광군 칠산대교를 잇는다. 함평만의 수려한 경관과 명품 해상교량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명품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을 얻었다.

 이제 산남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도 45분이나 걸린 엄청나게 긴 방조제이다. 이 방조제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생 김연수가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삼양사라는 회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월천리 백옥과 석창리 농암 간 3.8km의 둑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시작해 1933년에 완공된 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400정보(町步)나 되는 손불간척지가 생겨났으니, 그게 바로 산남리의 저 너른 들녘이다. 이후 갯땅은 농토가 되었고, 지금은 고소하고 쫀득한 맛좋은 함평 간척지 쌀이 생산된다. 하나 더, 산남리 마을에는 1970년대 초 꽃반지 끼고의 가수 은희가 만든 문화공간 민예학당이 있다. 자연재료를 활용한 디자인 제품, 천연염색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잠시 들려도 좋을 것이다.

 반대편은 함평만의 드넓은 갯벌,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경사가 완만해 석화()와 바지락, 낙지 등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석화(石花)’는 바위에 붙어 있는 모습이 '꽃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코끝이 알싸할 정도로 찬바람이 불 때부터 맛이 들기 시작해 12월이면 절정에 이른다. 농한기의 귀한 소득원이기도 하다.

 갯벌에 쳐놓은 저 그물망의 정체는 대체 뭘까? ‘개막이일지도 모르겠다. 조석간만의 차가 클 때 갯벌에 그물을 쳐 놓고 밀물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갇히도록 하는 전통 고기잡이다.

 12 : 18 - 12 : 48. 방조제의 중간쯤에서 만난 정자, 끝이 보이지 않는 둑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이라서 더욱 반갑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 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30분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갯벌이 하도 넓다보니 그 사이로 강처럼 물길이 나있다.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생김새로 봐서는 낙지 산란장 같은데... 이곳 함평만이 세발낙지의 본고장이라니 말이다. 세발낙지는 발이 세 개여서가 아니라 가늘어서 붙은 이름이다. 갯벌에서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한 낙지는 일하다가 쓰러진 소를 일으킨다고 할 만큼 원기를 북돋아 주는 해산물로 알려져 있다. ‘바다의 산삼 혹은 노다지라고도 불린다.

 13 : 07. 길고 긴 방조제의 끝은 일공구(이정표 : 종점까지 7.1km)’이다. 맨 처음 공사를 시작한 곳이어서 일공구라 한다는데, 위에서 얘기하던 삼양사의 간척공사 산물이다. 하나 더, 향토사 공부를 한다는 김경수씨는 간척공사 이전에는 이곳이 백옥동(白玉洞) 마을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일공구에도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갯벌에 기우뚱 몸을 기대고 있는 고깃배도 여럿 보인다. 포구에는 잡아온 물고기를 파는 횟집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간척공사 때 이곳은 각처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뿌리는 돈으로 늘 흥청거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 같은 둘레길 나그네들이나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 되어버린 셈이다.

 신옥교라는 무지개다리를 이용해 월천저수지(손불간척지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건넌다. 한가하게 날개짓을 해대는 서너 마리 갈매기의 환송을 받으며...

 ‘1공구라는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양, 포구는 아직도 새로운 방파제를 쌓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공구부터는 월천방조제를 걷는다. 일공구에서 안악에 이르는 이 방조제는 2000 8월 태풍 프라피룬으로 유실되었다.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을 때 거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는 해당화 6만여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라고나 할까?

 13 : 22. ‘안악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월천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안악(雁岳)이란 지명은 雁來基(안래기 안애기)’ 또는 雁落(안락 안악)’이 변형된 것이란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기러기와 인연이 많은 모양이다.

 월천방조제가 끝나는 곳에는 작은 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5.7km)이 조성되어 있었다. 큼지막한 빗돌이 방금 전 월천방조제를 걸었고,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안악마을임을 알려준다.

 안악마을의 포구는 작다. 시쳇말로 주먹만 하다고나 할까? 정박하고 있는 어선도 주먹만 한 보트 두어 척이 전부다. 하지만 횟집에 펜션까지 들어서있으니 먹거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함평만 갯벌에서 나오는 싱싱한 숭어·세발낙지·보리새우 등은 여름철 미각을 돋운다고 하지 않던가.

 포구에는 소녀상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함평만의 부드러운 곡선이 주는 안정감과 미래를 지향하는 함평의 기상을 형상화 했단다. 거기에 국민가수 이미자가 노래한 섬마을 선생님에 나오는 총각선생님에 대한 섬 처녀의 간절한 기다림을 담았단다. 그럼 이곳 안악마을이 원래는 섬이었다는 얘기일까?

 섬마을 선생님 노래비도 눈에 띈다. 10년쯤 전 대이작도를 답사하다 섬마을 선생님과 관련된 관광지를 만났었다. 1967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섬마을 선생님의 촬영지라면서 이미 폐교된 초등학교를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노래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고나 할까?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안악해수욕장. 200m 길이의 결 고운 백사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감싼다. 그 숲에는 썬 베드를 놓아 피서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했다. 백사장에는 규모는 작지만 전천후 인공해수풀장도 만들었다. 명품 피서지로 만들려는 지자체의 노력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화이트 정원(‘해름애 언덕’, ‘바람의 언덕으로도 불린다)’은 안악해변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농산어촌 활력화 경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수국·팜파스그라스·코스모스 등 여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꽃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싱그러운 여름 수국은 시들어가는 중, 대신 팜파스그라스가 나그네의 동심을 소환시킨다. 깃털모양의 풍성한 이삭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데, 거기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기까지 해 여간 신비로운 게 아니다.

 그밖에도 보라색 버들마편초가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버들잎처럼 좁은 잎 모양 형태와 긴 꽃대 끝에 꽃이 달려서 마편 즉 말채찍처럼 생겼다고 해서 버들마편초란 이름을 얻었다.

 해당화는 일종의 보너스다. 해안가 도로변에서 만나게 되는데,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금물투성이의 모래땅에 뿌리를 묻고 살아간다.

 꽃밭에서의 힐링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진행방향에 칠산대교를 놓고 걷게 된다.

 함평만 해안도로는 황혼 무렵의 해넘이가 자랑거리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해제반도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이 짙은 감흥을 선사한단다. 하지만 지금은 벌건 한낮, 일몰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13 : 46. 이번에는 학산리(鶴山里) 앞 방조제를 걷는다. 1930년경 목포사람 정태성이 막았다고 한다.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둑을 쌓은 이의 이름을 따 정태성농장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300m 남짓의 둑이 만들어낸 들녘치고는 꽤나 넓다. 그 너머 산자락에는 학산리의 자연부락인 지호(芝湖) 마을과 평산(平山) 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한없이 구불대는 함평만의 해안선을 따라 종점인 향화도항으로 간다. 문득 이은상 시인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가 떠오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칠산대교가 코앞인데도 걷고 또 걸어도 이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함평만은 육지에서 흘러 내려온 흙이 퇴적돼 만들어져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보고다. 수심이 깊지 않고 조차가 크고 조류 소통이 좋아 갯벌이 발달했다. 덕분에 주민들은 갯벌에 기대어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잡고, 김 양식을 하며 생활해왔다. 갯벌을 막아 농지를 조성하고 염전을 만들기도 했다.

 해안선은 곳곳에서 구불댄다. 해변에 바짝 붙어 구불구불 이어진 이 길은 한결 운치 있다. 옛 사람들은 그런 지리적 여건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방조제를 쌓았고, 주민들은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간다.

 바다는 김 양식장의 지주로 한 가득이다. 갯벌에 저런 기둥들을 세우고 김을 매달아 양식한다. 바다 건너 도리포 곱창김의 주산지로 알려진다. 그만큼 청정해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해역을 끼고 있는 함평에서도 곱창김을 양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식은 바다에서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해수를 저장해두는 저 저수지는 동성수산과 손불수산에서 양식업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잠시 후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808번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온 함평항길이 해안도로와 만난 것이다.

 함평항으로 가는 길,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들이 의외로 많다. 근처에 함평항이라는 틀이 잡힌 포구가 있는데도 말이다. 함평항이 항구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14 : 26. 함평항에 도착했다. 원래 이름은 해은항’, 해은마을(함평군 손불면 학산리)에 있는 포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까지 어업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고, 2006년에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이 되었다. 하지만 여객선은 들르지 않는다. 아니 들러본 적도 없고, 그저 인근 어민들의 선착장으로만 활용되어 왔었다. 그게 해안도로가 건설되고, 국가어항으로의 승격을 목표로 시설을 확충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부두는 웬만한 축구경기장보다도 더 넓었다. 하긴 국가관리 연안어항으로의 승격을 위해 명칭까지 바꿨다니 어련하겠는가. 해양 마리나 시설, 항로준설, 연안정비 등 개발 사업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편의점이 들어서 있었다.

 널찍한 잔디공원에서 ‘HAM PYEONG’이라고 적힌 커다란 전시물이 반긴다. 이곳 함평항은 해넘이의 명소 중 하나다. 조형물 곁에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전망대를 지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저 멀리 육지와 섬의 실루엣, 이 둘을 이어주는 칠산대교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거기다 일몰까지 더해지면 조물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단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옥실 방조제를 지나 영광 땅(염산면 옥실리)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이 방조제가 함평과 영광의 군 경계인 셈이다.

 푸름으로 뒤덮인 옥실리 들녘과 새하얀 철새가 만들어내는 조화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칠산대교가 바다를 가른다. 호리병처럼 생긴 함해만의 주둥이이자, 해제반도가 끝나는 북쪽의 도리포와 영광군 염산면의 향화도 사이에 놓은 다리다. 왕복 2차선, 길이 1800m로 지난 2019 12월에 개통됐으며, 그 덕분에 양 지역은 차량 이동 시간이 70분에서 5분으로 단축돼 생활편의가 크게 향상됐다.

 옥실방조제의 끄트머리에도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고깃배보다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무동력선들이 더 눈길을 끄는 포구이다.

 선착장을 지나자 칠산대교가 머리맡으로 다가온다. 35코스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함평만의 입구, 바다가 깊어졌나보다. 고기잡이에 한창인 어선들이 꽤 많다.

 14 : 56. 날머리인 향화도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들어서자 111m의 높이를 자랑하는 칠산타워가 시야를 꽉 메워버린다. 전남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로, 영광군의 11개 읍면이 하나로 화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전망대에 오르면 칠산대교와 인근의 섬과 바다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서해랑길 안내도(영광 36코스)는 향화도항의 입구, 버스승강장 옆에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함평만이 함평군과 무안군을 아우르는 큰 항아리라면 이곳 향화도항과 도리포 유원지는 그 항아리의 주둥이다. 지명에서 드러나듯 섬이었단 향화도(向化島)는 간척사업에 의해 육지가 됐고, 항구가 들어서면서 송이도와 낙월도를 잇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3.47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점을 감안하면 무리한 속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서해랑길 34코스(상수장마을-돌머리해변)

 

여행일 : ‘23. 8. 12()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현경면과 함평군 함평읍 일원

여행코스 : 상수장마을송정교차로하수장마을유수정마을외현화마을내현화마을파도목장돌머리해변(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현경면사소부터 14.62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4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함해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무안군에서 함평군으로 간다. 덕분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해만의 비경들을 곳곳에서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전천후 풀장 등 다양하게 꾸며진 돌머리해안은 잠시 쉬었다가기에도 충분하다.(이 후기도 무안문화원의 자료가 많이 활용됐습니다)

 

 들머리는 상수장마을(무안군 해제면 송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송정교차로(해제면 송정리)에서 현해로(해제방면)로 옮겨 400m쯤 들어가면 상수장(3)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150m쯤 들어가면 24번 국도의 가드레일에 닿는다. 서해랑길(무안 34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가드레일 아래에 세워져 있다.

 해제반도의 동쪽 해안(함해만과 면한)을 따라 걷는 17.2km짜리 코스이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코스를 조금 단축했다. 5.7Km를 줄인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시간을 감안 현경면소재지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럴 경우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는 현경면 소재지인 외반리(버스정류장)에서 출발했다. 77번 국도에서 곧바로 서해랑길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접근성에 대한 설명이 난감해 거리를 조금 늘리기로 했다.

 11 : 45. 815번 지방도(장군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때 5층짜리 아파트가 눈에 띈다. 이곳 외반리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55, 현경중학교를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77번 국도가 나타난다.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으로 gpx트랙은 시점까지의 거리를 4km로 찍고 있다. 하지만 내 앱은 0.7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쫒아낸다더니, 약하디약한 집사람에게도 내 코스를 3.3km나 줄여줄 능력이 있었나 보다.

 서해랑길은 국도 아래로 난 소로를 따른다.

 200m쯤 걷다가 굴다리 근처(이정표 : 종점 12.6km/ 시점 4.6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곳은 황토로 유명한 해제반도.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온통 푸름으로 물들었다. 무안의 또 다른 특산물인 고구마와 콩이 무럭무럭 자라면서 본래의 황토색을 덮어버렸다. 맞다. 무안은 요즘 구릉지마다 고구마 밭의 긴 이랑들이 줄지어 펼쳐진다. 지난 겨울 양파 밭이 그렇더니, 이 여름엔 또 고구마 밭들이 붉은 황토색 밭을 온통 푸르게 뒤덮어 버린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유수정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평산리(平山里) 4개 자연부락(원평산·평림·통정·유수정) 중 하나로 유수정(流水亭)이란 지명은 감방산 아흔아홉 구비에서 흘러내린 물이 평산을 지나 마을 앞으로 흘러간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해방 전까지 마을 뒤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게 시원한 정자구실을 톡톡히 한다며 ()’ 자를 붙였다나?

 마을회관 앞 빗돌은 마을의 유래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200년쯤 전 장흥고씨가 터를 잡았고, 이후 여러 성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커졌단다. 빗돌은 또 장흥고씨 후손들이 마을 앞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고, 임야를 개간하면서 마을을 부촌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마을을 벗어나자 널따란 들녘이 펼쳐진다. 무안문화원은 고기주라는 이가 서해바다라는 식당이 있는 곳에서 노두목까지 제방을 막았다고 적고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들녘 덕분에 부촌이 되었다며 마을 주민들은 칭송하고 있었다.

 들녘의 끝, 그러니까 건너편 구릉지 아래에도 작은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무안문화원의 자료에서 본 저건너란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확인해볼까 민가를 기웃거리는데, 누렁이 두어 마리가 단체로 짖어대는 게 아닌가. 아서라. 난 그저 마을 이름이 궁금했을 따름이란다.

 12 : 16. 길을 나선지 30, 815번 지방도의 평산4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평산4리는 유수정마을의 행정단위이니 유수정의 입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이곳에서 함해만과의 첫 대면이 이루어진다. 바닷가에는 흰발 농게(수컷의 하얗고 큰 집게발이 특징)’ 대추귀 고둥(주둥이 쪽이 사람 귀처럼 생겼고, 전체적으로는 대추를 닮았다)’의 집단 서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멸종위기 야생 생물 2급이니 무단 채집이나 쓰레기 투기를 금지한단다.

 잠시지만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집사람은 출발도 하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낭군과 함께 걷겠다며 2.4km쯤 뒤에서 출발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바다는 온통 황토색깔이다. 맞다. 이곳 함해만은 자연 침식된 황토와 사구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 특이성을 인정받아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지난 2001년 전국 최초 습지보호지역지정, 2008년 람사르습지 등록, 같은 해 6월에는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함해만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하며 200m쯤 걷다가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때 해제반도의 전형적인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양파 수확이 끝나고, 속살을 드러낸 농토가 온통 황토색이다. 얼핏 보기에도 한없이 부드럽고 기름지다. 그러다보니 저 땅은 언제나 푸름을 물든다. 늦가을 무와 배추 수확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어도 일대 들판은 푸른빛이 펼쳐진다. 대파와 양파, 마늘이 황톳빛 들판을 뒤덮기 때문이다.

 구릉지에서의 둠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구릉지는 농업용수 확보가 생명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팠다. 얼마나 물이 절실했으면 한 방울의 물도 아까워 바닥에 비닐까지 깔았을까 싶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했다. 이를 알리는 입추도 며칠 전에 지났다. 수확을 마친 저 참깨 단이 그 증거라 하겠다.

 구릉지를 헤집는 탐방로는 요리조리 잘도 방향을 튼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게 서해랑길의 가장 큰 장점이니 말이다. 서해랑길의 방향표식과 리본으로도 모자라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까지 가야할 길을 알려준다.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 웃자란 잡초로 뒤엉킨 밭이지만 금화규가 어여쁜 꽃을 피워냈다. (항산화·항바이러스·항알레르기·항균) 작용에 뛰어난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약초이다. 하지만 기르는 게 쉽지는 않은 듯. 동네 할머니는 어렵사리 씨앗을 구해 심었는데 자라라는 약초 대신 잡초만 한가득이라며 입을 석 자나 내밀고 있었다.

 12 : 38. 2차선 도로인 현화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300m쯤 떨어진 외현화마을 입구까지 이 길을 따라간다.

 길가에 효부 금성나씨 기행비가 세워져 있었다. 여자들에 대한 칭송은 열부(烈婦), 즉 남편에 대한 순종과 수절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도 이 빗돌은 효부로 적었다. 그게 특이해 자료를 찾아봤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외현화마을(현화1) 입구. 버스정류장에 적힌 로두목이란 지명이 눈길을 끈다. 두음법칙을 적용 노두목으로 적는 게 보통일 텐데, 누군가의 위트가 더해지면서 정감어린 지명으로 변했다. 하나 더, 여기서 노두(路頭)는 갯벌을 건널 때 발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놓은 징검다리를 말한다. 그러니 저 로두목마을은 바닷가일 게 분명하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외현화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동리인 현화리(玄化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외현화·청룡·내현화·성자동·절동·노두목) 중 하나이다. 새터와 구터로 이루어진 마을은 지형이 게()의 형국이란다. 구터와 새터가 게의 두 발이고 마을 앞에 있는 두 개의 선독이 게의 눈에 해당된다나? 하나 더, 옛날에는 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주민들은 게가 거품을 품을 수 있어 당시는 부자마을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닷물이 끊기면서 게의 거품이 일어나지 않아 마을도 가난하게 되었단다.

 동구 밖에는 전주최씨 삼강문이 들어서 있었다. 삼강(三綱)이란 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강조한 세 가지 덕목(··)이다. 이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병조참판을 역임한 제남을 충()으로, 지극한 효성으로 하늘의 감응을 이끌어낸 달신과 그의 아들 상효를 효(), 그리고 열()은 상효의 부인인 죽산안씨가 주인이다. 안씨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전염병으로 위독하자 허벅지살을 베어 약제로 사용함으로써 병을 낳게 하였단다. 삼강문 안에는 이를 기리는 2기의 비석이 있다.

 길가에 유정각을 지어 주민들뿐만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쉼터로 제공하고 있었다. 문객들로 붐비던 옛날이 그리웠나 보다. 참고로 조선 말, 최동현( : 노강)이란 선비가 이 마을에 살았더란다. 덕분에 그에게 배움을 원하는 수많은 인재들로 마을은 항상 붐볐고, 고을에 원님이 부임할 때는 직접 노강 선생을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을 정도였단다.

 건너편 구릉지에는 제각이 들어앉았다. ‘미수목란(난초가 필락말락 하는)’의 형국에 지었다는 전주최씨 제각 목란재가 아닐까 싶다. 이 집안에서 고시 합격자를 5명이나 배출했다니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탐방로는 구터를 지나 새터로 간다. 이어서 벽화로 치장된 마을안길을 지나 뒤편 들녘으로 빠져나간다. 원픽한 예쁜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딱 좋은 구간이다.

 마을 앞에 서있는 저 바위가 게의 눈에 해당된다는 선독일지도 모르겠다. 뜬 눈에 해당된다는 새터의 그 바위 말이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현화리의 주산인 태통산(兌通山, 55.1m)’을 에둘러 간다. 추석 때 현화리의 주부들이 저 산에 모여 강강수월래를 하며 정을 확인했단다. ‘화합의 장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정상 부근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풍치가 대단히 좋았다고 전해진다.

 12 : 58.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2, 탐방로는 내현화마을에 이른다. 와우형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지형이 주민들의 넉넉한 심성을 만들어주었다는 마을로, 조선시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의 제자 김석구(金錫龜(호는 玄圃) 배우고 익히며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하며 이곳에 터를 잡았단다.

 ! 내가 동경해온 풍경이 아닌가. 취선루(醉仙樓), 이백(李白)만 술과 달을 희롱하는 게 아니라는 저 배포가 부럽기만 하다. 벽에 적힌 싯구도 감성 풍부한 나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 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 흘렸더니 아! 빛나던 사랑이더라>

 마을 앞 팽나무 그늘에는 정자가 들어앉았다. 유리문을 달아 신발을 벗어야만 이용할 수 있던 외현화마을과는 달리 이곳은 통째로 개방되어 있다. 덕분에 우린 걸터앉은 채로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며 푹 쉬어갈 수 있었다.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긴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덕분에 할머니들의 생활도 많이 바뀌었다. 먼저 밀고 다니던 유모차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자가용으로 바뀐다. 편의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췄으니 모터가 없는 수동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그러던 것이 요즘은 모터까지 달아 젊은이들의 승용차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은포 김영원이란 이의 기행비도 눈에 띈다. 마을의 양대 성씨인 김해김씨가 낳은 효자로, 무안군청 홈페이지는 그의 효행을 친병에 상분하고 정간에 애훼과인하다고 적고 있었다.

 이번 구간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시설물들을 자주 활용하게 된다. 무안지역은 갯벌 낙지길을 브랜드로 내세우는데, 그중 평산4리 버스정류장에서 해운보건소까지의 1구간(마을과 들녘 : 9.3km) 대부분이 서해랑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15분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4분쯤 더 걸어 현화로(이정표 : 종점까지 8.2km)’로 올라선다. 만나는 지점에 생록동의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곧바로 횡단해 생록동 마을을 향해 간다. 사슴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고 해서 그런 지명을 얻었다.

 4분쯤 더 걸으면 삼거리, 왼쪽은 생록동으로 이어지는 길,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간다. 이정표는 4.5km 전방에 후동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이때 현화리의 나머지 자연부락들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감방산(259m) 자락에 들어앉은 구산마을과 성자동마을이다. 현화4리에 속한 작은 부락들로 감방산 아래 815번 지방도(장군로)를 사이에 두고 내현화 마을과 마주보는 형세이다.

 탐방로는 들녘을 향해 나아간다. 눈에 익숙한 구릉지가 아닌 걸 보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

 이 동네는 마음 고운 이들로 가득한 가 보다. 길가에까지 꽃밭을 만들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예쁜 낮달맞이꽃을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었다.

 생록동 삼거리에서 8. ‘광덕1교로 현화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하천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하천변에는 야관문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원래 이름은 비수리’, 잘게 썰어 술로 담가 먹는데, 이게 남자의 정력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약재명인 야관문(夜關門)으로 세간에 입소문을 탔다.

 야관문의 약효를 의심하면서 걷길 8. ‘약효가 없다로 결론이 날 즈음 함해만에 이른다. 물 빠져나간 바닷가에는 꼬맹이 고깃배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주인을 모시고 고기잡이 나갈 물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방의 안쪽, 한때 양식장이었을 법한 연못은 방치되고 있었다. 대하양식장으로 그만이겠는데도 말이다.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건너편 해제반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맑고 고운 황토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맞은편 해제반도까지 짧은 곳은 7km, 먼 곳은 11km까지 드넓은 갯벌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다. 갯벌은 하루 두 번 물이 들고 나면서 스스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6시간마다 스멀스멀 갯골을 기어오른 바닷물은 다시 눈에 띄지 않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를 반복하면서 갯벌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는 저런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느긋이 쉬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눈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계단 모양으로 만든 방조제도 눈에 띈다. 단에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게 또 자다르(크로아티아)에서의 추억을 소환시킨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바다 오르간(Moske Orgulje)’인데, 그곳도 역시 돌로 만든 방파제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았었기 때문이다. 파도가 일렁이면서 이 구멍으로 물결이 밀려들어가고, 이게 방파제 밑의 공기를 밖으로 밀어내면서 오르간처럼 소리를 내는 것이다. 파도의 크기와 속도에 따라 다른 음을 내는 것은 물론이다.

 바닷가 갈대밭은 가을철이면 또 다른 볼거리로 제몫을 할 수도 있겠다.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갈대꽃만으로도 아름다울 텐데, 그 너머로 해제반도의 빼어난 풍경까지 더해진다면 이 아니 아름답겠는가.

 눈의 호사는 10분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향한다.

 잠시 후 2차선 도로인 해운로로 올라선다. 이정표는 34코스의 종점인 돌머리해변까지 5.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4 : 00.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만에 갯벌체험과 낙농체험을 함께 할 수 있다는 파도낙농체험농장에 도착했다. 치즈만들기, 젖소 젖짜기 등 다양한 낙농체험 프로그램으로 억대 농외소득을 올리는 알짜 목장이라고 한다. 농촌 살림도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목장의 끄트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는 1.7km전방에 있는 후동마을을 가리킨다. 서해랑길도 이를 따르면 된다.

 탐방로는 바닷가를 향해 간다. 하지만 바다를 코앞에 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겨난 들녘으로 들어선다.

 들녘에 들어선 길은 요리조리 잘도 방향을 튼다. 이유는 단 하나, 해운천과 자명천에 놓인 다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이 구간은 서해랑길의 표식에 더해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파도목장에서 21, ‘해운1로 해운천을 건넌 다음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오리농장이 줄을 잇는 구간이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바닥을 드러낸 담수호(?)가 떡하니 길을 막는다. 탐방로가 내륙을 향해 방향을 틀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자명천을 건넌다. 이름조차 없는 이 다리가 군경계이다. 무안군을 누비던 서해랑길이 이 다리를 건너 함평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4 : 30. 잠시 후 바닷가에 이르니 다리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공사 중이기는 하지만 건너다닐 수는 있는 것이다. 이는 아까 파도목장에서 내려와 해안선을 따라 이곳으로 와도 된다는 얘기가 된다. 괜히 알바를 했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진행방향 저 멀리서 34코스가 종료되는 돌머리해안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함평 땅에서 만난 갯벌은 아까와는 많이 다르다. 맑고 고운 황토색이 아니라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변함없이 아름답다.

 모래톱이 고와 카메라에 담아봤다. 모래톱(沙濱)은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인해 생긴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해안을 말한다. 그게 오래가면 비진도처럼 두 개의 섬이 하나로 이어지기도 한다.

 해안길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걷는 게 썩 편하지는 않았다.

 목적지인 돌머리해안이 많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빙 둘러 가야하기 때문에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면서도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까 해안에 올라선 후로 35분이나 더 걸어야만 했다.

 갯벌은 온통 구멍투성이다. 맞다. 이곳 함해만에는 해양수산부 지정 해양보호생물인 흰발농게, 대추귀고둥을 비롯한 250종의 저서생물이 살아간다. 또한 칠면초, 갯잔디 등 47종의 염생식물, 혹부리오리, 알락꼬리마도요 등 약 52종의 철새 등 많은 생명체가 이곳 갯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15 : 06. 드디어 종착지인 돌머리해안에 도착했다. 첫 만남은 ‘Stone Dahlia’ 호텔&리조트이다. 해안선을 따라오면서 랜드마크삼아 방향을 잡았던 건축물로, 객실에서의 프리미엄급 spa ocean view, 거기에 갯벌체험이 더해지면서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리조트 앞 갯벌은 게나 조개, 해초류 등을 직접 잡아볼 수 있는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나보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노두 주변에서 뭔가를 잡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띈다.

 탐방로는 리조트의 왼쪽 옆구리 쪽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걸어보기로 했다. 기껏해야 30m쯤 걷다가 광산김씨세장산 빗돌 앞에서 탐방로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잘 생긴 거북이 한 마리를 포획할 수 있었다. 보라. 바닷가 해식애 속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있는 저 거북이를.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모퉁이를 돌면 전망대가 반긴다. 아니 3층 높이에 조망대가 있으니 전망타워로 불러도 되겠다. 트레킹의 막바지, 이미 바닥을 보이는 체력 때문에 3층 높이의 계단은 다소 부담스럽다. 하지만 함해만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내 예상은 옳았다. 일망무제의 조명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내륙을 향해 항아리처럼 파고들어온 함평만이다. 그 건너는 해제반도, 폭이 불과 400m 정도인 송정리 땅으로 인해 뭍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

 저 멀리 함해만 입구에는 칠산대교가 놓여있다. 함해만은 반 폐쇄적인 특성을 지닌다. 면적이 344(길이 17km/  1.8km)쯤 되는데, 입구에서 영광의 칠산 바다를 만난다. 길이 109.2km의 해안선이 원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맨 오른쪽에는 백사장의 길이가 1Km쯤 된다는 해수욕장이 들어앉았다. 아니 돌머리지구 연안유휴지 개발사업(85억 원이나 들였단다)’이 만들어낸 일종의 유원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수욕장 일대에 해변탐방로·갯벌탐방로·어린이풀장·해수풀장·오토캠핑장 등 친서민 휴양시설을 조성했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듯 정자를 지어놓았다. 눈요깃거리로 예쁜 돌탑도 쌓아올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함평만 생태보존기념비’, 함평 땅에 들어서더니 함해만이 함평만으로 둔갑해버렸다.

 그 옆에는 어린이 물놀이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워터버킷·워터슬라이드 등을 갖춰 해수욕과는 다른 재미를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돌머리해수욕장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썰물 때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닷물을 끌어와 인공풀장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무려 7480나 된단다. 건강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해수를 교체해준다니, 피서객들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서해의 특징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것이다. 그런 서해에서도 가장 큰 곳을 고르라면 단연 이곳 돌머리해안이 꼽힌단다. 그런 특징을 살리기 위해 만든 게 갯벌탐방로이다. 해수풀장 근처에서 405m의 탐방로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다. 그 끝에는 물이 차면 보이지 않는 암초가 있다고 한다. 이 암초를 돌머리라고 부르는데, 이게 해안의 이름이 됐다.

 해안은 거의 유원지 수준이다. 샤워장·취사대·매점 등 편의시설을 두루두루 갖췄는가 하면, 원두막과 야영장 등 웬만한 유명 관광지가 부럽지 않게 잘 꾸며 놓았다. 하긴 깨끗한 갯벌, 아름다운 낙조, 상쾌한 소나무 숲이 부각되면서 전국 청정해수욕장 20에 선정되기도 했다니 어련하겠는가.

 물이 빠져나간 해수욕장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생태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에서 게, 조개 등이 살아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마음 내키면 직접 잡아볼 수도 있다. 또 전망대 쪽으로 가면 자연산 석화(이 지역에서는 이라 부르기도 한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갯바위도 만나게 된다.

 서해랑길 35코스(함평)의 안내판은 해수풀장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부근에 편의점이 있어 맥주 두어 캔(집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챙기는 행운까지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4.62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