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화누리길 15코스-2(인제 북면길)
여행일 : ‘23. 12. 3(일)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일원
여행코스 : 원통교→어두원교→한계삼거리→정자문교차로→12선녀탕 주차장→만해마을→용대교차로→도적소교차로→미시령 옛길→미시령(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도적소교차로에서 12선녀탕 주차장까지 역방향 13.07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를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 들머리는 설악산 미시령탐방지원센터(인제군 북면 용대리)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면으로 올라오다 ‘한계교차로’에서 46번 국도(고성방면)로 옮긴다. 이어서 ‘용대삼거리’에서 56번 지방도로 옮겨 속초방면으로 조금 가다 ‘도적소교차로’에서 미시령 옛길로 빠져나오면 구절양장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기어올라 미시령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고갯마루에 들어선 ‘설악산국립공원 미시령탐방지원센터’가 15코스의 종점이자 16코스의 시작점이다.
▼ 북면 소재지(원통리) ‘원통교’에서 시작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도적소교차로에서 옛길을 따라 ‘미시령’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구간거리는 자전거길 답게 28.1km. 라이더들이야 우습겠지만 걷기 여행자들이 하루에 걷기에는 벅찬 거리다. 때문에 우린 절반으로 나눠 오늘은 ‘십이선녀탕 주차장’에서 미시령까지 걷기로 했다. 하나 더. 출발지와 도착지의 고도차로 인한 난이도를 줄이기 위해 미시령부터 역방향으로 걸었다.
▼ 미시령 정상에 있던 옛 휴게소는 지금 ‘설악산국립공원 미시령탐방센터(백두대간과 미시령의 역사와 문화를 과거와 현재의 사진 자료로 전시하고 있다)’로 옷을 바꿔 입었다. 널디너른 주차장은 전망대로 변했다. 훼손돼있던 주변 산자락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 난간에 서면 ‘성인대(신선대)’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금이야 이 일대가 모두 설악산으로 분류되지만, 오래전에는 미시령을 기준으로 북측은 금강산 권역으로 분류했다. 그러니 고성군(토성면)에 위치한 신선봉(1,212m)은 금강산의 남쪽 끝자락에 해당한다.
▼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짙은 연무에 갇혀버린 속초 시가지와 동해가 어렴풋이 나타난다. 반면에 속초로 내려가는 ‘미시령 옛길’은 또렷한 편이다. 미시령(826m)은 예부터 진부령·대간령·대관령 등과 함께 관동지역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였다. 그럼에도 길고 험준해서 열고 닫기를 거듭했다. 고려 때 폐했다가 조선 성종 24년(1493) 다시 개척해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불렸고, 조선 말에 다시 폐쇄됐다가 1960년경 재개통됐다. 이후 1971년 인제와 양양을 잇는 한계령 도로, 2007년 미시령터널, 최근에는 서울-양양고속도로까지 뚫리면서 이제는 호젓한 도로로 남았다.
▼ 미시령(彌矢嶺) 표석은 건너편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미시령은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사이에 위치한 고갯마루이다. 인근의 다른 고개에 비해 높고 경사가 가파른 편이므로, 고개를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뜻의 ‘미시령(彌時嶺)’에서 유래된 지명이지 않나 싶다. 기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彌時坡嶺)·연수령(延壽嶺)·연수파령(連壽坡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황철봉을 거쳐 마등령, 공룡능선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막혀있었다. 국립공원 특별보호지역으로 지정해 2026년까지 출입을 금한단다. 그런데 그 시작년도가 2007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백두대간을 이어오던 내 발목을 붙잡던 2003년의 출입금지는 대체 무슨 근거였을까? 아무튼 황철봉 구간 말고도 신선봉, 대간령을 거쳐 진부령으로 가는 구간까지 막아놓았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평화누리길은 인제 방면 ‘미시령 옛길’을 따라 내려간다. 폭설이라도 내릴라치면 제설보다는 차량통행을 막아버릴 정도로 가파른 경사를 자랑하는 구간이다. 아무튼 난 옛길의 내리막 구간을 생략하기로 했다. ‘도적소교차로’까지 3km를 생략한 대신 그 시간에 이 지방 대표 먹거리인 ‘황태구이’를 먹어보기 위해서이다. 반주로 소주 한 병쯤 겻들일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 9 : 58. 실제 출발지는 ‘미시령터널’ 입구 ‘도적소교차로’. 3.69km 길이의 터널로 들어가는 56번 지방도와 미시령 옛길이 헤어지는 지점이다. 참고로 ‘도적소(盜賊沼)’는 미시령의 큰 고개 아래서 둥지를 틀고 있던 도적들이 미시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빠뜨려 죽였다는 물웅덩이(沼)다.
▼ 9 : 58. 굴다리를 빠져나와 용대삼거리 방향(왼편에 ‘봉평막국수’라는 음식점이 있으니 참조한다)으로 나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자동차 전용도로인 56번 지방도(미시령로)와는 별개로 자전거 길을 따로 내놓았다.
▼ 왼쪽으로는 ‘미시령계곡’이 흐른다. 미시령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도적폭포’에서 요 아래 용대삼거리까지 4.8km에 걸쳐 흐르는데,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의 맑고 깨끗한 계곡물과 물놀이하고 쉴 수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는 개울이다.
▼ 10 : 04. 화장실을 개방형으로 내놓은 ‘선바위 카페’는 겨울방학 중이란다. `23.11.10부터 `24.1.30까지라니 곰처럼 긴 겨울잠이라도 자나보다.
▼ 하지만 그 곰은 동굴로 들어가지 않은 채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연석이 분명하겠건만 곰을 닮아도 너무 빼다 닮았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계곡 위로 삐죽하게 솟아 홀로 서 있는 듯한 바위가 보인다. 용대마을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선바위(立石, 지역민들은 ‘촛대바위’라 부르기도 했다)’이다.
▼ 줌으로 바라본 ‘선바위’
▼ 이후부터는 ‘미시령계곡’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적폭포와 선바위를 끼고 있으며, 울창한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무더운 여름철에도 전혀 더위를 느낄 수 없다는 곳이다.
▼ 난간에 매달린 리본은 지금 우리가 ‘인제천리길’의 일부 구간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인제 천리길’이란 인제 젊은이들이 옛사람의 자취·역사·문화가 서린 길들을 걷기 좋게 연결해놓은 길이다. 잊혀진 마을들을 잇는 옛길과 숨겨진 자연 비경을 간직한 산길은 그 길이가 400km 남짓 된다니 말 그대로 ‘천릿길’이다.
▼ 탐방로는 굴다리를 두어 번 통과한다. 56번 지방도가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횡단보도를 낼 수 없었음이리라.
▼ 10 : 22. ‘미시령 설악집’은 황태와 오징어 직판장이다. 아니 산나물과 목청꿀 같은 지역특산품은 물론이고, 미역·다시마에 명란·창란·오징어로 만든 젓갈까지 판단다. 하지만 나그네의 눈에는 주위를 포위하다시피하고 있는 ‘황태덕장’이 더 눈길을 끈다. 그리고 저런 풍경은 용대리 구간을 걷는 동안 끊임없이 얼굴을 내민다.
▼ 이곳 용대리는 한국 최대의 황태덕장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황태의 70%를 차지한단다. 용대리에서 황태덕장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라고 한다. 그 당시 함경도 청진 등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하나둘 덕장을 세웠는데 지금은 강원도의 명물이 된 것이다.
▼ 10 : 24. 자동차 전용도로로 올라설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창암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수교’ 옆에는 ‘군부대진입교’라는 자전거용 다리를 새로 놓았다.
▼ 10 : 31. ‘백골병단 전적비’가 오른쪽 350m 지점에 있음을 알린다. 한국 최초의 유격대로 창설된 817명의 백골병단 대원들은 설악산에서 적을 교란함으로써 아군 작전에 기여하는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들을 기리고 순국 산화한 장병의 명복을 빌고자 비를 건립했단다.
▼ 10 : 42. ‘용대교차로’에 이른다.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가는 46번 국도와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가는 56번 지방도가 나뉘는 지점이다.
▼ 교차로 아래에 이정표 몇 개를 세워놓았다. 그런데 ‘DMZ 평화의길’과 ‘강원도 평화누리길’의 방향표시가 서로 다른 게 아닌가. 맞다. 그동안 함께 해오던 두 길이 이곳을 기점으로 평화의길은 진부령으로, 그리고 평화누리길은 미시령으로 간다.
▼ ‘미시령 옛길’ 이정표는 장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보다. 하나 더. 용대관광지에서 미시령 정상까지 15.4km 구간을 ‘미시령 옛길’이라 부르는 모양이고.
▼ 일단은 진부령 방향, 즉 ‘용대3리’로 들어간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인제지역의 끝자락인 용대3리는 황태마을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선지 이곳에서 황태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금년 5월에도 ‘황태와 자연의 조화로운 향연 용대리’라는 주제로 방문객들의 오감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었다. 특히 축제기간 내내(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가마솥 황태국’도 시식할 수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만 하겠다. 거기다 상설 장터에서 시중가보다 할인된 특별한 가격으로 황태를 구입할 수 있다지 않는가.
▼ 마을 뒤편에는 90m 높이의 ‘매바위’가 있다. 매바위는 현재 인공폭포를 만들어놓았다. 봄·여름·가을 내내 시원한 물줄기를 뽐내고, 겨울철에는 빙벽타기대회가 개최되는 등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건너편 바위봉(위 사진)은 ‘용바위’일 것이다. 용대리의 옛 이름인 ‘용의터’, ‘용대동(龍垈洞)’은 용(龍)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저 바위의 아랫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 10 : 47.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인제읍 방향으로 난 ‘황태길’를 따른다. 왕복 2차선의 차도이지만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위험하지는 않다.
▼ 옥수골(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는 마을) 앞 북천(北川)에는 꼬맹이 섬이 있었다. 물굽이가 요리조리 용트림을 하다가 작은 땅덩어리 하나를 하천 가운데 남겨놓았다. 그 섬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면서 일류의 쉼터가 되었나보다. 육지와 섬을 잇는 출렁다리까지 놓은 걸 보면...
▼ 10 : 50. 황태구이 전문점인 ‘소풍’이란다. ‘북설악 황토마을(전통 한옥 여섯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의 향토음식점이라는데 강원도의 전통 양식인 너와를 얹은 건물이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한옥체험마을 한식당으로 된장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단다.
▼ 이 음식점은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착한 식당’이라고 했다. 30년이 넘는 종자된장과 종자간장, 그리고 밭에서 직접 기르는 채소를 식재료로 사용한단다. 부속건물 앞에 줄지어 놓인 저 항아리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 백담마을로 가는 길.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만만찮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북천 물줄기 따라 바위절벽이 늘어서는가 하면, 길가 곳곳에 들어서 있는 황태덕장은 차라리 덤이다.
▼ 덕장은 텅 비어있었다. 할복을 마친 명태는 지금 12월 말쯤 찾아오는 추위를 기다리며 냉동실에서 낮잠을 잔다. 하지만 때가 되면 명태는 코를 꿰고, 덕걸이 작업을 거쳐 한파 속에서 누렇게 익어갈 것이다. 참고로 용대리 일대는 겨울 내내 맹추위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썩 좋지 않은 환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그런 기후가 국내 최대의 황태덕장을 만들어냈다. 명태는 거는 즉시 얼어야만 물과 함께 육질의 양분과 맛이 빠져나가지 않는데, 이곳은 밤 평균기온이 두 달 이상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며 계곡에서 늘 바람이 불어오는 등 천혜의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운동기구까지 갖춘 길가 쉼터는 ‘DM Z평화의길’ 표지판을 내걸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최근의 화두처럼 너무 서두르지 말고 느긋이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 11 : 04. ‘백공미술관(佰貢美術館)’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서울대 출신이자 검사출신의 법조인이었던 백공 정상림씨가 세운 미술관이다. 이름이야 조금 낯설지만 우리나라 근대(19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획전시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심심찮게 선보인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먼저 뜨락에 만들어놓은 조각 공원부터 살펴본다. 널찍한 잔디밭에는 꽤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리아 조각상 등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라는데 문외한이라서 그 가치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 안에는 속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박동국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발길 따라 잉태한 풍경 Ⅶ’이라는 주제 아래 백두산이나 북미, 동유럽 등 여행지에서 남긴 스케치 소품까지 꽤 많은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 그중에서도 인제의 명물 자작나무를 비롯해 강원지역의 자연과 사계를 담은 작품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이쯤에서 전문가의 평을 들어보자 <특히 자작을 그린 시리즈 ‘자작, 하얀 영혼의 실루엣’에 계절감과 다양한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푸른 하늘과 흰 자작의 대비, 강렬한 자줏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작, 노랑과 초록으로 싱그러운 자작 등이 다양한 색채로 관객을 맞는다.>
▼ 200호 이상 되는 대작도 전시해 놓았다는데, 아무래도 동양화처럼 그려놓은 저걸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또 다른 평도 빌어보자. <소나무를 사실적으로 그린 ‘고수(固守)’ 시리즈도 눈에 띈다. 또 둥근 달이 뜬 밤하늘 아래 웅장한 울산바위, 흰 눈 쌓인 내린천, 속초 장사항, 고성 아야진, 정박한 배와 우두커니 서 있는 등대 등 그가 몸담아 온 강원의 자연이 캔버스로 들어왔다.>
▼ 11 : 10.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불쑥 솟아오른다.
▼ 보건복지장관이 딱 좋아할만 한 풍경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해도 아이는 하나만 갖는다는데, 저 숲속의 소나무들은 절반 정도가 한 뿌리에서 줄기가 둘이나 자라고 있으니 말이다.
▼ 11 : 21. ‘화운당’이란다. 조금 전 들렀던 ‘백공미술관’ 관장인 박종용 화백의 호가 화운당이었으니 그의 아틀리에일지도 모르겠다.
▼ 11 : 24. 텅 비어있는 저 ‘하늘황태덕장’도 조금 더 추워지면 명태가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참고로 옛말에 ‘맛 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는 명태’라고 했다. 서민들이 즐겨 먹는 생선으로 명태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양한 요리로 서민들의 밥상을 책임지는 명태지만,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 8년(1871)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에 명태라는 이름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명천에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있었는데 어떤 물고기를 낚아 주방 일을 맡아 보는 관리로 하여금 도백에게 바치게 했다. 도백이 이를 아주 맛있게 먹고 이름을 물으니 모두 알지 못하였다. 도백은 태씨 성의 어부가 잡은 물고기이니 이를 명태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 ‘하늘’이란 덕장 이름은 뒷동산에 있는 ‘풍력발전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드니 풍력발전기 몇 기가 거대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 11 : 32. 아치형 조형물이 ‘황태마을’을 지나고 있음을 알린다(제대로 걸었더라면 저건 황태마을의 입구가 된다). 황태마을이 백담사 오르는 길 즈음부터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삼거리 바로 뒤쪽까지를 통칭하는 지명이라니 말이다. 참! 이왕에 시작했으니 조금 더 살펴보자. 명태의 생물은 생태라고 한다. 곧바로 얼리면 동태가 되고, 바짝 말리면 북어가 된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 황태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검게 변하면 먹태라 불린다. 명태를 반쯤 말린 것은 코다리, 명태 새끼를 말린 것은 노가리가 된다. 이밖에도 말리는 정도와 잡히는 계절, 또는 잡는 도구에 따라 백태, 흑태, 깡태, 꺽태, 강태, 망태, 조태, 왜태, 막물태, 사태, 오태, 피태라는 이름으로 달라진다. 명태가 이리도 이름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물고기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 탐방로는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내설악의 수많은 산봉들을 바라보며 간다. 이곳은 ‘황태길’. 못다 한 황태 얘기나 해보자. 황태는 잘 말려지면서 황금빛을 띈다. 황태를 만들다 조직 질감에 실패한 건 ‘파태’, 색이 어두운 검정이 된 걸 ‘흑태’라고 한다. 또 날씨가 짓궂어 얼지 않고 말라 버리면 ‘깡태’, 너무 추워서 녹지 않은 채 허옇게 말라 버리니 ‘백태’이다. 그러니 황태는 사람이 덕장에 걸고, 바람이 구름을 타며 요리하는 하늘이 정하는 자연의 산물이다.
▼ 고개를 돌리자 풍력발전단지가 성큼 다가온다. 하지만 바람이 제법 부는데도 대부분이 날갯짓을 멈춘 채 태업중이다. ‘용대풍력단지 북부보전센터’라는 표지판이 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 입구에 세워져있었는데, 그 ‘보전센터’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 11 : 42. ‘백담사입구 사거리’에 이른다. 소문난 황태 맛집이 꽤 여럿 있다는 곳이다. 황태는 깊은 맛은 물론 타우린과 베타인 성분이 풍부해 간 해독과 피로회복에 좋으며 지방·콜레스테롤 함량이 낮아 혈액순환을 원활히 돕고 심혈관 질환개선에 좋다. 거기다 이곳은 전국 황태의 70%를 생산한다는 용대리. 그러니 어찌 황태 맛집이 흔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질 좋은 명태를 손끝이 아플 정도로 춥고 바람 많은 겨울철에 덕장에 걸어 말리면 햇볕에 녹고 다시 얼기를 약 3개월. 노랗게 속을 채운 황태는 시원한 속풀이 국으로도 좋고 고소한 구이로도 그만이다.
▼ 백담마을 조형물은 여의주를 문 쌍룡(雙龍)을 담았다. 용대리(龍垈里) 북쪽, 길 양쪽의 쌍룡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용대리의 지명을 나타냈지 않나 싶다.
▼ 마을을 홍보하는 안내판도 빼놓지 않았다. 설악산 자락의 마을로, 백담사를 타고 내려오는 영실천(백담계곡)을 끼고 있단다.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야생화마을은 다양한 체험과 축제를 통해 힐링촌으로 진화하는 중이란다.
▼ 그런데 마을회관 앞 뜨락에 난데없는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는 게 아닌가. 아니 이곳 인제(麟蹄)의 지명을 뜻풀이 해놓은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 인제가 말발굽처럼 생겼다고 해서 ‘기린 麟’자에 ‘발굽 蹄’자를 쓰고 있다니 말이다.
▼ 11 : 50. ‘내가평교’를 건넌다. 내설악에서 흘러온 ‘영실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 다리 밑 영실천은 꽁꽁 얼어붙었다. 내설악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영시암(永矢庵)에서 모인다고 해서 ‘영시천(永矢川)’이라고도 불린다는 저 하천은 요 아래서 북천으로 합류된다.
▼ 11 : 54. 잠시 후 나타나는 ‘구만2교’를 지나자 도로변이 온통 ‘오토캠핑장’ 천지다. 이 부근이 ‘구만동 계곡’이라는 아름다운 경관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구만동’이란 지명은 구만이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구만동계곡은 미시령계곡과 백담계곡이 합쳐져 흘러 내려오는 큰 계곡으로, 백담사와 12선녀탕 사이 약 3km 구간을 이르는 지명이다. 맑고 깨끗한 계곡물과 울창한 솔밭, 멋진 암반이 조화를 이루어 여름철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 ‘라때’로 불리는 나 같은 꼰대에게는 한겨울 캠핑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요즘 텐트는 웬만한 방갈로 저리 가라는 크기라고 한다. 그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는 물론, 그릴, 휴대용 냉장고, 조명까지 없는 게 없다고 했다.
▼ 건물의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음식점(설산하우스)이라는데 간판을 걸려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넋두리 하나. 사실 난 황태구이 안주삼아 소주 한잔 걸치려고 남들보다 3km를 줄여서 걷는 중이다. 하지만 느림보 나그네에겐 그마저도 호사였던가 보다. 한참이나 뒤에서 출발한 둘레길 도반들이 스치듯이 추월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주변 풍광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담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 참! 백담사입구 사거리를 지나면서 도로는 이름을 바꿨다. 황태마을과 함께 ‘황태길’이 끝났고, 이제 ‘만해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 12 : 10. ‘구만교’ 앞에서 왼쪽(만해마을)으로 방향을 튼다. 자전거길 이정표가 용대삼거리에서 5.4km쯤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 ‘DMZ 평화의길’ 팻말이 아직까지는 ‘평화누리길’과 함께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두 길은 용대삼거리에서 헤어진다.
▼ ‘카페 아니오니’라고 한다. 직접 로스팅 해준다는 커피도 커피지만 갓 구워낸 빵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난 몇 걸음 들어가다가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아까운 시간을 소모시킬 정도의 뷰가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용대리의 또 다른 특징은 ‘마가목’이 아닐까 싶다. 마가목 나무를 아예 가로수로 심어놓았다. 약효가 좋은 마가목 나무의 효능과 효과를 알리는 마가목축제도 열고 있다고 했다.
▼ 12 : 21.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도로변에 마련된 널찍한 주차장에 이른다. 인제군에서 야심차게 조성해놓은 문화·예술 컴플렉스에 도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여초서예관, 한국시집박물관, 만해문학박물관 등이 도로변에 줄지어 있다.
▼ 첫 만남은 ‘여초서예관(如初書藝館)’이다. 한국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 1927-2007)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단일 서예관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라고 한다. 800평쯤 되는 2층 건물에 상설·기획전시실, 체험실, 세미나실 등의 각종 편의시설과 함께 관련 도서 및 소장품 6,386점과 서예작품 1,133점을 전시하고 있다.
▼ ‘여초(如初)’는 ‘처음과 같다’는 뜻을 지닌다. 김응현의 증조부는 경술국치와 일제의 회유에 항거해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이다. 조부인 동강(東江) 김영한(金寗漢)도 일제의 작위를 거부하고 은거했다. 그런 가문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우국충정을 끝가지 지켜간다는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 선생의 약력부터 살펴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답게 화려한 경력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하나 더. 선생의 형제들도 명성이 자자한 서예가들이다. 세 형인 경인(褧人) 김문현, 일중(一中) 김충현, 백아(白牙) 김창현도 서예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김충현은 김응현과 더불어 한국 현대 서예계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 먼저 ‘생애관(生涯館)’부터 둘러본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교도 서울에서 다녔고, 활동도 서울에서 했다. 그러다 말년인 1999년 구룡동천(북면 한계2리 구룡계곡 일원)으로 내려와 8년 동안 생활하다 2007년 작고했다. 선생의 기념관을 인제군에다 지어놓은 이유이다.
▼ 안에는 글을 쓰던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손으로 직접 쓸 수밖에 없는 장르답게 책상에는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다.
▼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다는 선생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패널을 통해 만날 수 있다.
▼ 선생의 작품은 2층에서 만난다. 조부(김영한)에게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운 그는 10대 후반에는 조부가 구해 온 한·위 시대의 법첩을 중심으로 서법을 연마했다. 이를 바탕으로 15세 때부터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숙명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성균관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한문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1956년 김충현·노수현·김서봉·민태식과 함께 서예 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를 창립했다.
▼ 그는 한자의 5체(五體 : 篆書·隸書·草書·行書·楷書)에 모두 정통했다고 평가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북위체에 기반 힘 있고 호방한 예서와 해서에 특출한 것으로 평가되며, 역시 자유롭고 막힘없는 필치의 행서와 초서 작품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03년에 완성한 광개토대왕비문은 필생의 역작으로 손꼽힌다.
▼ 12 : 38. 다음은 ‘한국시집박물관’이다. 한국 근현대기의 시집(詩集)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2014년 개관했다. 1층에는 시집을 대여해 읽을 수 있는 ‘작은 도서관’과 다양한 체험학습 공간이 있으며, 2층에는 1900년~1970년대까지의 근현대기에 출판된 시집을 연대기로 전시한 상설 전시실과 시를 짓고 낭송하는 체험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 안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숲속부터 거닐어보면 어떨까? 혼자 걸어도 좋고, 함께 걸으면 더 좋은 소나무 숲을 ‘소나무 숲을 거닐며 시인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꾸며놓았다. 윤동주, 박목월, 김소월 등등 당신이 평소에 동경해오던 시인과 대표시를 읽으며 메마른 가슴을 따뜻하게 힐링할 수 있을 것이다.
▼ 1층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어, 로비 서가에서 선택한 시집을 읽으면서 시의 정서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벽면에 적힌 시들을 읽어보는 것도 잠깐의 재미로는 충분했다. 우리가 자라오면서 심심찮게 흥얼거렸을 법한 국민 시들이 벽면에 빼곡히 적혀있다.
▼ 2층으로 올라가니 ‘인제문인시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무릉도원, 참선의 공간 등으로 인제의 아름다운 경관을 읊은 시인묵객들의 운문 20편을 인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예가들이 써서 전시하고 있었다.
▼ 상설전시실은 시문학사의 흐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시집과 문학자료를 190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 단위로 나누어 실물과 영상으로 전한다. 근대시 성립(1900-1910 : 이광수, 최남선), 독자적 자유시(1920 : 한용운, 김소월), 모더니즘 시의 성립(1930 : 김영랑, 정지용), 해방공간의 민족시( 1940 : 조지훈, 박두진), 전후시의 정신적 분화(1950 : 박인환, 구상), 순수시와 참여시(1960 : 신경림, 고은), 삶의 현실과 시적 변용(1970 : 오세영, 황동규)
▼ 박물관은 국내외 시인 및 소장가들이 기증한 10,000여권의 시집을 소장하고 있단다. 그중에는 1921년 펴낸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1921년 펴낸 조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 정지용 시집(1935년, 1946년), 김립 시집(1939년), 이육사 시집(1946년) 등 희귀 시집 100여권이 포함되어 있다.
▼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에 대한 일화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시설은 시 낭송 비디오를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부스라고 했다. 소파 벽면에 비디오를 만드는 방법이 잘 안내되어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보면 어떨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한 나그네야 그냥 떠나올 수밖에 없었었지만...
▼ 12 : 52. ‘만해마을’에 이른다.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강점기 겨레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어 준 만해 한용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만해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이후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이곳에 만해마을이 세워진 이유이다.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운영하고 있어 ‘동국대학교 만해마을’로 불린다.
▼ 숙박시설인 ‘설악관’을 지나면 ‘만해문학박물관’이 얼굴을 내민다. 만해마을을 상징하는 박물관은 넓고 깨끗한 벽면을 따라 한용운의 삶과 ‘님의 침묵’을 비롯한 만해의 작품세계, 당시의 시대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전시하고 있다.
▼ 박물관 입구. 만해의 좌상이 반긴다.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겸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며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바탕은 승려에서 출발한다.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는 한편,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품은 뜻을 깊고 길게 울리라는 듯 시를 적은 징을 가지런히 걸어놓았다. 이어서 ‘風霜歲月 流水人生’이라는 만해의 친필이 반긴다. 그 아래는 두 줄의 짧은 글로 만해의 일대기를 적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다’라는 만해의 법문도 눈에 띈다. 소소한 자유와 평화로운 일상이 만해선사가 추구하던 삶의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 1층의 상설전시실에는 만해의 친필 서예와 작품집, 그리고 ‘연보로 본 만해선사의 생애’와 ‘주제로 본 만해선사의 삶’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만해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잡지들의 창간호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하나 더. 유리창 너머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만해선사(동상)도 만날 수 있었다.
▼ 전시관은 만해의 친필 원고, ‘님의 침묵’이 실렸던 시집 등 눈여겨보아야 할 자료들이 차고 넘친다. 이왕에 왔으니 어릴 적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외울 수밖에 없었던 ‘님의 침묵’이나 어느 해 정월 초하루에 적었다는 ‘조선 청년에게’라는 글 등도 한번쯤 읊조려 보자. 그러다보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를 읊은 듯한 ‘모기’라는 시도 눈에 띌 것이다.
▼ 만해와 조선일보의 관계도 전한다. 그는 만년에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머물렀다. 일본에 대한 만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선총독부 쪽으로는 창문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 동료이자 친구였던 최린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곧바로 인연을 끊었을 정도로 매국에 대한 태도가 단호했다. 그런 그가 친일파로 지목받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는 교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심우장을 지을 때는 방응모로부터 도움도 받았단다. 그게 아쉬움으로 남는 건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커다란 종과 북이 매달려 있다. ‘범종루(梵鐘樓)’로 법당의 네 가지 주요 물품인 범종·운판·목어·홍고 등을 비치하는 사찰당우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누각을 기본으로 전통양식의 지붕에다 단청을 입히는 여느 사찰들과는 달리 콘크리트골조 기둥에 최소한의 비가림 지붕만 얹었다.
▼ 보현보전(普賢寶殿)은 한술 더 떴다. 뼈대만 앙상한 전각에는 부처님조차도 모셔놓지 않았다.
▼ 청소년들이 지은 시에 빠져보는 즐거움도 있다. 청소년평화생명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현수막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 만해마을의 정문은 ‘경절문(涇截門)’이란다.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단호히 물리치고 지름길로 곧바로 들어가는 문이란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터득하여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법문이라나? 하지만 중생에게는 벽면에 걸린 동판이 더 눈길을 끈다. 29개국 55명의 외국 시인과 255명의 한국 시인 작품 등 310편의 시를 동판에 새겨, 세계평화를 희구하는 모든 시인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 13 : 14. ‘만해교’를 건너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드넓게 펼쳐진다. ‘용대숲으로’라는 청소년 수련시설에서 운영하는 숲 놀이터로 그네나 트리클라이밍, 숲 밧줄놀이 등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아름드리 소나무로 가득한 숲을 오른편에 끼고 에돌아간다.
▼ 아쉽게도 숲은 문을 닫아걸었다. ‘송홧가루 날려 길손 붙잡는다’며 소나무 숲을 찬미한 이가 있었다. 소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는 사람들을 순화시킨다. 때문에 숲에 들면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혼자 앉은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소나무 숲이 ‘쉼표’가 되는 이유다. 그러기에 문 닫힌 소나무 숲이 더욱 아쉬워졌다.
▼ 위에서 얘기한 ‘(주)용대숲으로’에서는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신청을 받고 있었다. 밧줄을 타고 나무 위로 오르는 트리클라이밍(물론 안전장비를 착용한다), 그네다리나 바이킹해먹 같은 ‘숲 밧줄놀이’,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여 지정된 지점을 통과하고 목적지까지 완주하는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자전거 가이드투어 등이 진행된단다.
▼ 북천의 물줄기는 나름대로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한여름 장마철이 3개월이나 지났으니 이제 갈수라 할 수 있다. 계곡을 품고 있는 설악산의 산줄기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웃 숲속 야영장에서는 아예 ‘장박’을 모집하고 있었다. 관광지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알박기’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 13 : 26. 12선녀탕 입구의 윗남교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07km,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도중에 만난 미술관과 박물관 등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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