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길 2구간(들녘길)
여행일 : ‘24. 1. 20(토)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및 백운면 일원
여행코스 : 마령면사무소→원평지마을→계남마을→방화마을→백마교→평장마을→영모정→신전마을→상백마을→중백마을→백운면사무소(거리/시간 : 14.7km, 실제는 원평지마을부터 12.21km를 3시간 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 들머리는 마령면사무소(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9km쯤 내려오면 ‘마령사거리’에 이른다. 좌회전해 200m쯤 들어오면 마령면사무소이다. 2구간(들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 진안에서 가장 넓다는 마령 들녘과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를 넘는 14.7km짜리 구간이다. 운치 있는 계곡에 자리한 옛 정자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톡톡하다. 난이도는 ‘보통’.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원평지’ 마을에서 걷기 시작했다.
▼ 10 : 28. 실제 출발지인 ‘원평지마을’. 마령면 청사 소재지인 평지리(平地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 부락(사곡·석교·송내·원평지·평산) 중 하나로 면사무소(평산마을 소재)에서 동남쪽으로 1.6km쯤 떨어진 들녘에 위치한다.
▼ 첫 만남은 ‘의사둔암오기열기적비(義士遯菴吳基烈紀蹟碑)’. 소중한 현충(顯忠) 시설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자신을 희생해가며 나라를 지킨 저런 이들이 아니었다면, 웰빙·힐링을 외쳐가며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있는 우리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둔암(遯菴) 오기열(吳基烈) 선생은 진안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한 달 후인 4월 6일 전영상·김구영·황해수 등과 함께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독려하는 격문을 작성·게시하였으며, 장날에 다시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 제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체포되어 전주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에는 ‘영풍정(迎豊亭)’이란 정자가 들어앉았다. ‘풍년을 맞이한다’는 이름대로 발아래로 펼쳐지는 너른 들녘에서 해마다 풍년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 10 : 32. 마을 앞 도로변(국도 30호선)에는 효자 오성복(吳成福, 1795~?)의 정려(旌閭)가 있었다. 오성복은 1871년(고종 8) 정려를 받았다. 정려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오성복 지려(孝子 贈 童蒙敎官朝奉大夫吳成福之閭)’라 새겨져 있다. 그의 조상인 오빈(吳玭)의 정려도 눈에 띈다.
▼ ‘진안군사(鎭安郡史)’는 ‘친상(親喪)에 여묘(廬墓)했기에 마령면 평지리에 7세조 ‘오빈’과 함께 정려했다’고 적었다. 참고로 오빈(吳玭, 1547~1593)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일하다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가 싸웠고, 1593년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들어가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 절간의 일주문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문도 눈길을 끈다. 어느 대갓집(마을 앞 너른 들녘에 걸맞는)에서 위세삼아 짓지 않았을까 싶다.
▼ 10 : 35. 마을 앞 ‘원평지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계로’를 따라간다. ‘진안고원길’은 영풍정에서 농로를 이용해 섬진강변으로 가지만, 정자까지 다시 돌아가는 게 싫어 곧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 이때 마령면의 너른 들녘이 좌우로 펼쳐진다. 이곳 ‘평지리’는 평지를 이루는 넓은 분지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름대로 평지리는 농경지가 산지보다 많은 군내 유일한 지역이다. 섬진강 상류 지역으로 강 주변에 높이 300m의 충적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 10 : 42. ‘계남교’를 건너기 직전. 둑길을 타고 온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났다.
▼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다리를 건너란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하나 더. 이정표는 마령면사무소(2구간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3km로 적고 있다. 내 핸드폰의 앱은 1km를 찍는다. 그러니 14.7km에서 2km를 단축해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의 본류가 흘러간다. 백운면 신암리 ‘대미셈’에서 발원해 백암리에서 ‘백운동천’, 운교리에서 ‘상표천’과 ‘마치천’을 합쳐 몸집을 불린 다음 이곳으로 왔다. 그래선지 상류인데도 강폭이 넓고 수량도 풍부했다.
▼ 천변에는 길이가 140m쯤 되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보이는 마이산의 광대봉이 화산 형국이라 이를 가리기 위해 조성했다는데, 강줄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톡톡히 수행한단다.
▼ 불교는 민간신앙과 불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태고종은 특히 더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사천왕상 대신 장승이 대문을 지키고 있는 ‘광명사’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었다.
▼ 마을 앞에는 전행권(全幸權)의 처 ‘동래 정씨’의 효열비와 김상섭의 처 열녀 ‘김해 김씨’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네들의 행적도 적혀있었지만 읽어보지는 않고 그냥 지나친다.
▼ 10 : 49. 탐방로를 겸한 도로(운계로)는 강변과 헤어져 ‘내동산’쪽으로 방향을 튼다. 잠수 후 만나는 정자(‘望雲亭’이란 편액을 달고 있었다) 앞에서는 계남마을로 들어간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볼 것을 권한다. 진안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로 알려진 ‘계남정미소’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도로변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계남정미소’는 녹슨 함석지붕에 허름한 벽체가 예전 정미소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쌀 대신 추억을 찧는다며 ‘공동체 박물관’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옛날 정미소가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했듯 이곳이 마을의 기억을 보존하고 나누는 공간이 되기를 원해서라나? 이름 그대로 농촌마을에서 대부분 사라져가는 오래된 정미소를 새롭게 복원해 문화체험과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마을 주민들의 묵은 앨범에서 꺼낸 빛바랜 사진과 집안 깊숙이 처박혀 있던 오래된 물건들을 모아 전시해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계남정미소는 전주에 사는 사진작가 김지연씨의 개인 소유라고 한다. 2005년 다 쓰러져가는 작은 정미소를 사들여 수리한 다음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김씨는 구식 이발관, 정미소, 새마을운동의 유산인 근대화상회(구멍가게) 등 사라져 가는 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해 온 사람이란다.
▼ 10 : 52. 정자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로 들어간다. 첫 만남은 ‘농업인건강관리실’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계남마을 경로당. 법정 동리인 계서리(溪西里)의 4개 행정 부락(방화·계남·오동·서비산) 중 하나인 계남마을의 원래 이름은 스님이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고 해서 ‘신앙골’이었다. 그러다 큰 시냇물이 남쪽으로 흐른다는 이유로 ‘계남(溪南)’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 마을 고샅을 횡단한 탐방로는 내동산 방향으로 오름짓을 한다.
▼ 10 : 55- 10 : 59. 잠시 후 도착한 또 다른 자연부락(계남마을의 ‘윗뜸’ 정도로 치부해두자). 작은 저수지를 발아래 두고 예닐곱 채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탐방로는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어떨까? ‘래산사’라는 또 하나의 현충시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 ‘래산사(萊山祠)’는 수당(修堂) 정종엽(鄭鐘燁.1885-1940)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항일의병결사인 임자밀맹단에서 활동한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유림회가 지난 1957년에 세웠다. 시설로 사위동, 서원동, 수당선생 유적비, 관리사, 도장각(강당), 외삼문 등을 두고 있다.
▼ 앙지문(仰止門, 시경에 나오는 문구로 ‘큰 산을 우러르며 큰 뜻을 따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을 들어서면 사당(萊山祠)이 나온다. 참고로 수당 정종엽은 이석용 의병장과 항일의병 활동에 동참했다. ‘임자동밀맹단(임자년인 1912년 겨울에 만들어진 비밀단체)’에 가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그 후 창씨개명 반대 및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 1940년 사망하였다. 2003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도장각(道長閣)’이 있다. 선생이 근방의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던 강당으로 1932년에 건립했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사당 앞에는 ‘애국지사수당정선생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 10 : 59. 사당을 빠져나와 다시 길을 나선다. ‘방화마을’까지는 농로를 따른다.
▼ 11 : 01. 잠시 후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최근에 지은 듯 시쳇말로 잉크도 안 마른 정자도 잠시 쉬었다가라며 손짓한다. 방화마을에서 내동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들머리이다.
▼ 이곳은 ‘마이산’으로 대변되는 진안 땅. 그래선지 마이산의 핫 플레이스인 ‘탑사’에서나 볼 법한 돌탑을 쌓아놓았다.
▼ 이왕에 왔으니 ‘내동산 등산로 안내판’도 한번쯤 살펴보자.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성수면 구신리 원구신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馬靈)’이 됐다고 전해진다.
▼ 13 : 03. ‘방화마을’에 이른다. 계서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방아다리’였다. ‘교리(橋里)’라고도 불리었는데 ‘침교(砧橋)’라는 택지가 있다고 해서다. 그러다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방아다리’의 ‘방아’가 방화(訪花)가 되었단다.
▼ 이 마을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수많은 정자 중 하나다. 이렇듯 2구간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쌍계정·만취정·영모정·미룡정’처럼 강가 풍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섰고, 마을에도 주민들의 쉼터를 겸한 정자를 어김없이 지어놓았다.
▼ 마을 담벼락은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쯤에서 아쉬운 점 하나. 이곳 방화마을은 1구간에서 만났던 ‘마이산 부부공원’의 주인공, 즉 부부의 생년월일이 같은 시인인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 부부가 살던 곳이다. 그러니 저 담벼락은 부부의 시와 관련된 벽화로 채워 넣었어야 하지 않을까?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진안고원 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내동산의 산자락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걸어온 길과 마령의 풍성한 벌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11 : 17. 호젓한 산길을 걷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9.9km/ 마령면사무소 4.8km). 탐방로는 임도를 버려두고 들녘을 향해 방향을 튼다. 이어서 2차선 도로(운계로)를 건넌 다음(11 : 23) 널찍한 들녘을 가로지른다.
▼ 11 : 27. 들녘의 끝에서 섬진강(데미샘에서 흘러내려오는 본류다)을 만났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바위벼랑을 가슴에 담는다.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의 지질 명소인 ‘운교리 삼각주퇴적층’이다. 1억 년쯤 전, 자갈·모래·진흙 등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라는데, 절벽의 줄무늬(층리)가 한쪽 방향으로 경사진 것이 눈에 띈다. 진안 분지에 퇴적물을 공급한 환경과 역사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질자원이다.
▼ 그 절벽에 처마의 제비집처럼 ‘쌍계정(雙溪亭)’이 매달려 있었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우(李友禹) 등이 발의해 세운 누정으로 쌍계동 천현계(雙磎洞天賢稧)의 계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naver 지식백과’는 쌍계정이란 이름의 유래를 백운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합수지점은 이곳에서 800m쯤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쌍계정' 사진.
▼ 탐방로는 이제 ‘삼계석문천변길’을 따라 백마교로 간다. 강변 너른 모래톱에서는 무성한 갈대의 누렇게 바랜 잎새와 갈꽃이 비바람에 출렁인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삼각주 퇴적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난다.
▼ 지질공원의 안내도와 함께 ‘운교리 삼각주 퇴적층’에 대한 설명판도 세워놓았다. 덕분에 강 너머의 거대한 바위절벽을 이룬 삼각주 퇴적층을 설명판과 비교해가며 관찰할 수 있다. 참고로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에는 진안의 마이산·운일암반일암·구봉산·천반산·운교리삼각주퇴적층 등 5곳, 무주의 외구천동·적상산천일폭포·오산리구상화강편마암·용추폭포·금강벼룻길 등 5곳이 포함되어 있다.
▼ 절벽에 걸터앉은 정자 한 채가 보인다. ‘만취정(晩翠亭)’이다. ‘송객정(送客亭)’으로도 불리는데, ‘진양 하씨’의 오형제인 하호(河灝)·하선(河璿)·하욱(河昱)·하식(河湜)·하봉(河鳳)이 순조 연간에 방화 마을로 이사 온 뒤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나그네를 환송한다’는 의미의 ‘송객정’은 다섯 형제의 선조인 하연(河演, 1376~1453)이 놓아주었다는 다섯 마리 잉어에서 유래했단다.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문신인데, 전라도관찰사 때 지방순시를 하다가 황룡 꿈을 꾸었고, 다음 날 하인이 잡아 온 다섯 마리의 잉어를 놓아주었다는 설화이다. 하연은 이 다섯 마리 잉어가 용으로 변신해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황룡오리출상원도(黃龍五鯉出象源圖)’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만취정' 사진.
▼ 11 : 36. 백마교(白馬橋)로 섬진강(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6km)을 건넌다. 다리 이름은 내동산의 별칭인 ‘백마산’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내동산의 산줄기가 요 어디쯤에서 섬진강 물속으로 잠긴다니 말이다. 하나 더. 백마교를 경계로 마령면에서 백운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 섬진강 너른 모래톱에는 비바람에 출렁이는 갈대만 무성했다. 하지만 가을철 갈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 탐방로는 잠시 2차선 도로(운계로)로 올라선다. 아니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길이 나있다. 하나 더. 그 사이 공간에는 전영태라는 옛 면장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전영태’씨는 백운면장 말고도 매사냥으로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 20호로 지정된 분이다. 백운에서 시작된 물줄기와 노촌에서 영모정을 거쳐 오는 물이 합수되는 곳에 ‘모운정(慕雲亭)’이라는 정자를 짓기도 했다.
▼ 11 : 40. 2차선 도로인 ‘운계로’는 ‘원운1교’를 건넌다. 하지만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즈음 정면(동쪽)으로 우뚝우뚝 서있는 1천m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때 아닌 비바람이 눈에 들어올 만한 것을 모두 삼켜버린다.
▼ 이후부터는 ‘마치천(馬峙川)’의 둑길을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백운면의 북쪽에 있는 ‘성수산’에서 발원한 마치천(상류의 천변에 있던 ‘마치’라는 마을의 이름을 빌렸다나?)은 노촌리·평장리 들녘을 적신 뒤, 운교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 11 : 43. 3분쯤 더 걸어서 만난 다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1km).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 길의 정체성에 부합시킨다며 최근 코스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옛 코스는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원운마을로 간다. 하지만 새로운 코스는 계속해서 마치천의 강둑을 따른다. 덕분에 코스는 12.9km에서 14.7km로 늘어났다.
▼ 11 : 54. 마치천을 건너(11 : 46), 이번에는 널디너른 평장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30번 국도를 건너면 잠시 후 ‘하평장(또는 평가)’ 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7.1 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평장리(平章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상동·정동·평가) 중 하나로, ‘평장’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 평장사를 지낸 이거(李据)와 그의 증손인 이행전(李行典) 두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마치천과 세동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가 저리도 넓으니 그만한 인물이 능히 태어날 만도 하겠다.
▼ 탐방로는 마을을 횡단한다. 요즘에야 누리기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우리네 선조들은 자연 속에 집을 지었다. 정자나무가 길손을 맞고,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에는 작은 꽃들이 대문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실개천이나 꽃들은 없지만 구불구불 휘어지며 이어지는 고샅길을 걸으며 옛 풍치를 소환해 본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2차선 도로인 ‘평노길’이 길손을 맞는다. 탐방로는 이 길을 따라 동진한다.
▼ 지난 1992년 문을 닫은 옛 평장초등학교 건물은 2018년 ‘진안고원학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새로운 시도를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소규모학교 시설을 지어 드론체험관(드론교육, 드론체험, 드론스포츠)을 만든단다. 잘 보존되어 있는 소나무 숲을 활용해 자연 숲 놀이공간도 조성한다나?
▼ 12 : 04. ‘상평장(또는 상동)’ 마을에는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그만큼 큰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12 : 05. 보건진료소 바로 위에서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 소로(상평장길)으로 들어간다. 노촌리의 ‘하미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 중간어림에서 ‘영모정’이라는 고풍스런 정자를 만날 수 있고...
▼ 영모정으로 가는 길. 낙락장송 몇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이어서 울창한 숲길이 우리를 영모정으로 안내한다. 이 숲은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누리상(네티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길 아래로는 ‘섬진강의 제1지류인 상표천(또는 미재천)’이 흐른다. 백운면 노촌리 덕태산 줄기에서 발원한 상표천 물줄기는 ‘노촌호’에서 머물렀다가 평장리와 운교리를 거쳐 당산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된다.
▼ 12 : 12. 숲길은 ‘신의련(愼義連, 1546-1606)’의 유적지로 길손을 인도한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왜적의 손에서 지켜낸 효자로 유명하다. ‘거창 신씨’를 중심으로 원노촌(元蘆村) 마을 사람들이 홍수를 방지할 목적으로 조성한 숲속에 정려를 모시는 효자각(孝子閣), 추모비를 비롯한 비석군(碑石群). 영모정(永慕亭) 등이 들어서 있다.
▼ 1801년(순조 1)에 세운 효자각(孝子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주위에 담장을 둘렀다. 안에는 비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현판이 걸려 있었다. 효자각 내 현판은 ‘증수의부위 효자 신의련지려(贈修義副尉 孝子愼義連之閭)’라고 쓴 다음 신의련의 사적을 자세히 서술했다. 당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으며, 전 사헌부 지평 황기천(黃基天)이 글을 썼다.
▼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자신의 집에까지 쳐들어 온 왜적들의 손에서 병든 아버지를 지켜냈다고 한다. 아버지 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는 신의련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다(孝子所居之地)’라는 방을 동구 밖에 써 붙이고 부하들에게 절대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고는 물러갔단다. 덕분에 1만여 명이 무사히 난을 피할 수 있었고, 정유재란 때는 그 수가 5만에 이르렀다나? 이로 인해 난을 피한 사람들의 수를 따 동네 이름이 ‘만인동(萬人洞)’을 거쳐 오만동(五萬洞)이 됐고, 들녘은 면화평(免禍坪), 앞산은 덕태산(德泰山)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 효자각에서 내다보는 계곡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그런 미재천의 천변, 계류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영모정(永慕亭)이 들어섰다. 미계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9년(고종 6년)에 세운 정자로 1984년 전북 문화재자료(제15호)로 지정됐다.
▼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아담한 누정은 지붕이 특징이다. 일반기와를 쓰지 않고 이 지역에서 나는 너새(돌기와)를 얹었다.
▼ 영모정 근처에서 길이 갈라진다. 들판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길은 원노·신기·마치, 천 따라 물길 거슬러 나아가는 길은 하미·비사 등의 부락으로 연결되다.
▼ 12 : 17. 하미마을 쪽 숲길을 따라 200m 남짓 더 올라가면 미재천의 천변에 자리한 ‘미룡정(美龍亭)’을 만난다. 미계 신의련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또 다른 정자이다. 정자에 오르면 미재천이 내려다보이고, 느티나무 숲의 운치도 즐길 수 있다.
▼ 정자 주변에는 미계덕산고(美溪德山高)와 미계장구지소(美溪杖屨之所) 등 신의련을 칭송하는 선돌 서너 개가 세워져 있었다. 신의련의 영모비(永慕碑)와 마을의 화재막이 역할을 하는 돌탑도 눈에 띈다.
▼ 미룡정 앞 미재천은 개울 수준의 작은 계곡이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울창한 숲이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 ‘진안고원 길(2구간)’의 완주를 인증해 줄 이정표는 미룡정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만날 수 있다. 매 구간마다 이런 이정표를 2개씩 설치했는데, 2구간의 첫 번째 인증용 이정표는 ‘남악제’의 둑에 세워져 있다.
▼ 탐방로는 미룡정 뒤로 난 농로를 따른다. ‘간짓대 걸쳐놓고 턱걸이하기 딱 좋다’는 농담을 떠올리게 만드는 좁은 산골짜기. 손바닥만 한 논밭도 버려두기 아깝다는 듯, 길을 그것도 시멘트포장까지 해놓았다.
▼ 12 : 24. 농로를 버리고 숲길(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5.2km)로 들어선다. 산길은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했을 정도로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평하게 변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 두 번의 계단 구간을 올라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는 휘파람이 저절로 나오는 걷기 딱 좋은 길이 계속된다. 오르내림이 없는데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낙엽까지 수북해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 산길의 동반자는 ‘리본’이 되어준다. 길목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 색과 붉은 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도 돋보인다.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12 : 40. 덕태산의 동북쪽 능선 끄트머리 안부인 ‘닥실고개’에 올라선다. 2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앱은 444m를 찍는다)으로 백운면의 운교리와 노촌리를 연결하는 고갯마루다. 북쪽 노촌리에 하마치마을과 원노촌마을이 있고, 남쪽은 운교리 신전마을이 있다. 하나 더. 이곳은 그간 묵어 있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신작로가 뚫리면서 인적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진안고원길이 조성되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온전한 고개의 기능을 되찾고 있다.
▼ 이정표(백운면사무소 4.3km/ 마령면사무소 10.4km)가 이곳이 ‘닥실고개’임을 알려준다. ‘닥실’이란 지명은 고개 서쪽에 있는 ‘양계봉(493.7m)’에서 얻어왔다고 한다. 고개 양쪽 골짜기의 이름도 ‘닥실골’이란다.
▼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신전 방향은 정상까지 고랭지채소밭으로 활용하고 있어 농로가 개설되어 있다. 산중이라서 경작지에 멧돼지 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쳐놓은 전기선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지만 길은 엉망이었다. 이틀을 연이어 내린 겨울 장마로 인해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 12 : 50. 고랭지채소밭 사이로 난 길을 10분쯤 걸으면 신전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운교리(雲橋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운·원산·주천·신전) 중 하나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이다. 조금 전 넘어온 닥실고개와 잠시 후 넘게 되는 ‘배고개’를 통해서만 다른 세상과 마날 수 있는 벽지이기도 하다.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별천지라고나 할까?
▼ 안내판은 신진마을의 옛 이름이 ‘가루손이’였음을 알려준다. 마을 지형이 소가 가로로 누운 ‘와우혈’이기 때문이란다. 볼거리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비보풍수림 ‘송림원’을 내세운다. 하지만 어떤 걸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민이 눈에 띄지 않아 물어볼 수도 없었다.
▼ 정자가 있는 동구 밖, 당산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한단다. 진안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놓았다.
▼ 다음 행선지인 ‘상백운 마을’로 나가는 길은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어진다. 거기다 오르막이다. 하긴 알을 깨고 나가는 일이 어디 그리 수월하겠는가. 아니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또 다른 통로인 ‘닥실고개’에 비하면 숫제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다. 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 13 : 09. 별천지를 떠나는 아쉬움을 보듬고 ‘배고개(383m)’를 넘는다. 신전마을과 상백암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명찰(배고개)까지 단 이정표가 2.9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백운면사무소에 닿는다며 힘을 내란다.
▼ 상백암마을로 가는 길가도 역시 농경지가 펼쳐진다. 그 사이에 비닐망이 튼튼하게 쳐져있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힘겨운 투쟁의 한 산물이다.
▼ 수문장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는 저 조형물은 대체 뭘까? 이 근처에 사슴목장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 길가의 모정(茅亭)은 농부들의 쉼터이다. 하지만 진안고원길이 지나가면서부터는 걷기 여행자들이 더 많이 찾는다.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는 참새방앗간으로 사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 13 : 12. ‘상백암’ 마을은 스치듯 지나간다. 법정 동리인 ‘백암리(白岩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부락(원촌·번암·중백·상백·백운동) 중 하나로 ‘백암’이란 지명은 마을 주변에 차돌바위(흰 바위)가 많은데서 유래했다. 그 백암마을의 맨 위에 위치한 부락쯤으로 보면 되겠다.
▼ 13 : 19. ‘백운동로’로 내려선다. 상백암마을 주민들은 변화가 필요했던가 보다. 논이었음직한 들녘이 온통 사과나무로 가득하다. 최근에 심은 듯한 어린 사과나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사이로 난 길(상백암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2차선 도로인 ‘백운동로’를 만난다.
▼ 도로 아래로는 ‘백운계곡’이 흐른다. 백암리를 감싸고 있는 선각산(1,105m)과 덕태산(1,113m)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인데, 이게 제법 빼어난 풍경을 만들어낸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붐빌 수도 있겠다.
▼ 13 : 26. 이후부터는 ‘내동산’을 전면에 놓고 걷는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백암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중백암마을’에 이른다.
▼ 13 : 32. 중백암마을 정자에서 트레킹을 끝내기로 했다. 백운면사무소까지는 아직 400m쯤 더 가야하지만 산악회버스가 점심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어쩌겠는가. 특히 겨울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데야 고민해 볼 필요조차도 없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5분을 걸었다. 앱은 12.21km를 찍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가 하면, 일부 구간에서 푹푹 빠지는 진흙탕과의 싸움까지 치렀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 빨리 걸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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