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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조지아  바투미 시가지 투어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바투미(Batumi) : 조지아 최대 항구이자 최대의 휴양도시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인구 15만 남짓의 조지아 제2의 도시이기도 한데,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아서인지 그리스·로마 양식뿐만 아니라 터기 등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섞여있다.

 

 조지아 서부지역에 위치한 바투미로 가는 길. 스탈린의 고향이라는 고리 쿠타이시(‘콜키스 왕국의 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젤라티수도원이 있다)‘를 지난다. 압하지아(Abkhazia)와 남오세티아(South Ossetia)을 지날 때는 2008년 조지아 영토 내에서 자치공화국을 선포한 두 지역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조지아를 침공한 러시아에 분노도 터뜨린다. 그리고 꽈리강과 리오니(Rioni)강을 나누는 분수령이자 시다카르틀리주(주도: 고리)와 이메레티주(주도: 쿠타이시)의 경계인 고개를 넘어 흑해 연안으로 들어선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트빌리시를 출발한지 6시간.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조지아의 서쪽 땅 끝인 흑해연안에 이른다. 그리고는 바닷가 작은 마을 그리골레티(Grigoleti)’에서 여장을 푼다. 트빌리시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300km 정도. E60 E692 등 고속도로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도 6시간이나 걸렸으니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 하겠다.

 그리골레티(Grigoleti)’는 자성이 있는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전 세계 5대 브랜드 호텔 그룹인 윈덤(Trademark Collection by Wyndham)이 운영하는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세계적인 리조트라 그런지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는데 2022년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전 세계 6개 대륙 9,300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윈덤은 미국과 유럽에 특히 많으며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있다.

 바닷가와 접하고 있으니 흑해 해변이 리조트의 전용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로비 가까운 곳에 수영장을 만들어 해수욕에 싫증을 느낀 투숙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나면 스파나 피트니스센터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흑해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오는 레스토랑과 테라스가 가장 마음에 든다.

 바닷가로 나간다. 이름과는 달리 바다의 색깔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만나본 여느 바다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 어떤 바다보다도 푸르렀다. 다만 바닷가 모래사장이 거무튀튀하다는 게 약간 다를 뿐. 저 모래사장이 흑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겠다.

 리조트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심어져 경치가 좋은 편이다. 바다 쪽으로는 꽃이 가꾸어진 정원도 있다. 날씨가 화창한 탓인지 아직은 수온이 차가울 텐데도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비키니 차림의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저녁식사까지 시간이 조금 남기에 해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1km남짓 걸었는데 해변은 부유한 이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별장의 테라스를 바닷가 모래사장에 잇대어 만드는 등 낭만을 더했다. 붉게 물드는 저녁놀의 바닷가, 그리고 식탁에는 와인을 곁들인 만찬이 차려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가.

 다음 날 아침 바투미로 간다. ‘그리골레티 비치에서 바투미까지는 30km쯤 떨어져 있다. 가는 내내 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공연장과 놀이공원이 보이는가 하면, 바투미식물원도 곁눈질해 볼 수 있다

 버스는 국제 컨테이너터미널을 지나 바투미 항구에서 멈춘다. 가이드는 우릴 선착장으로 인도한다. 해안을 따라 요트와 보트, 유람선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다. 참고로 바투미 항(Batumi Sea Port)’은 조지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항구라고 한다. 1878년 로스차일드와 노벨 형제가 참여해 항구를 건설했는데, 조지아의 메인 항구 역할을 한다. 외국과의 교역품의 운반이나 국제여객선 루트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곳 흑해에서 더 큰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하니 운송로가 썩 편치만은 않다.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차차 분수(Batumi chacha fountain)’라는 이름의 타워(Tower)인데 예전에는 차차(와인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만든 술)가 분수대에서 흘러나왔다나? 아무튼 지금은 프랑스 건축가 ‘Raymond Charles Père’가 디자인했다는 오스만 스타일의 시계탑만 남아있다. 그런데 튀르키예의 이즈미르 시계탑을 쏙 빼다 닮았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우리가 타고 갈 유람선이다. 이름은 ‘Sea Star 1’.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에서의 조망이 조금 더 나은 편이다. 유람선은 어항, 페리항, 유람선항, 요트항 그리고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돈 다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옛 해적선을 닮은 낭만의 유람선도 눈에 띈다. 바투미를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유람선은 음악에 맞춰 파도를 타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간다. 그러자 해안도시 바투미의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닷가를 따라 펼쳐지는 고층빌딩의 파노라마가 무척 멋있다. 바투미는 15만 명의 인구를 가진 중소도시지만 현대적 고층빌딩이 즐비한 현대도시다. ‘아자라 자치공화국의 인구가 33만 명이라니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사는 셈이다.

 해안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 있는 고층빌딩들은 대부분 2010년부터 지어졌다고 한다. 쉐라톤 호텔, 래디슨 블루 호텔, 켐핀스키 호텔, 힐튼 호텔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그 옆에는 야간에 불을 밝히는 등대(1863년 오스만튀르크 시절 나무로 만든 등대인데, 1882 21m 높이의 팔각형 석조로 새로 지었단다)도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커다란 회전관람차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흑해를 따라 늘어선 현대도시 바투미의 고층빌딩들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유람선은 바투미 해안을 따라 2km쯤 가다가 되돌아온다. 유람이라고 해봐야 해안의 빌딩을 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해수욕장의 피서객들을 보는 재미가 조금 더해진다고나 할까? 참고로 흑해의 둘레는 5,800km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조지아가 차지하는 부분은 310km쯤 된단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투미의 명물로 알려진 알리와 니노(Ali and Nino)’를 찾았다. 사랑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으로 조지아 조각가인 크베시타제(Tamara Kvesitadze)’가 만들었고, 이곳 바투미 해변에는 2010년 설치했단다. 작품은 원래 남과 여(Man and Woman)’로 발표되었고 한다. 하지만 너무 일반적이어서 사이드(Kurban Said)의 소설 알리와 니노(Ali and Nino)’에서 이름을 차용했다나? 아무튼 소설 속 알리는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무슬림이고, 니노는 조지아 출신의 기독교도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별한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면서 니노는 딸을 데리고 조지아로 피신한다. 그러나 알리는 간자(Ganja)에 남아 러시아군과 싸우다 죽음에 이르게 된다(1920년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연방에 편입된다). 이후 알리와 니노는 카프카스 지역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져 1998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로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알리와 니노는 처음에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잠시 후 서로 손을 잡는가 싶더니, 이들은 다시 멀어져 간다. 알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소설과는 달리 두 연인의 조형물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10분 간격으로 반복한다. 소설이 알리와 니노의 일대기라면, 조형물은 사랑과 이별이라는 메시지가 중심이 된다. 참고로 바투미는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도시다. 그런 도시에서 알리와 니노는 다양한 민족, 문화와 종교의 화합과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한다.

 2011년에 지어졌다는 알파벳 타워 130m 높이를 자랑한다. 철골 구조물 밖으로 두 개의 밴드 형태 알루미늄 판이 넝쿨손처럼 돌며 올라가는데, 그 판 위에 33개 조지아어 알파벳이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투미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단다.

 바투미 타워(탑처럼 생긴 건물)’는 바투미 기술대학의 건물로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했다. 2012년 준공했으나 건물의 위치, 형태, 관람차 등 대학에 맞지 않아 10년 채 표류중이라고 한다. 곧 호텔로 변신할 계획이라나?

 바닷가로 나가면 흑해 전망대가 있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이층 구조물을 설치해 바다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흑해(Black Sea)’는 우리나라 면적의 4배에 이르는 호수 같은 바다다. 터키 해협을 통해 지중해와 연결되는 갇힌 바다이다.

 바다 전망이라고 해야 별 게 없었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해안과는 달리 이곳 흑해는 섬이나 리아스식 해안이 없어 단조롭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평선이 보이는 푸른 바다만 펼쳐질 따름이다.

 대신 좌우로 펼쳐지는 바닷가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둔 해안은 바닥이 자갈이어서 물이 더 깨끗하게 보인다. 그 자갈 위로 파도가 부딪쳐 하얀 포말이 생겨난다. 그 때문에 바다가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래선지 아직은 철이 이른데도 바닷가에서 여름을 즐기는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반대편으로도 흑해가 질펀하게 펼쳐진다. 이쯤해서 가이드가 전해준 팁 하나. 흑해가 ‘Black Sea’가 된 이유는 흑해의 바닥이 검어서라고 했다. 때문에 물속의 가시거리가 굉장히 짧단다. 흑해와 접한 나라들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죽음을 뜻하는 검은색의 바다가 되었다는 설도 있단다.

 바닷가를 떠나 바투미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로 연결되는 바투미대로(Batumi Boulevard)’는 분수 광장을 지나 유럽광장으로 이어진다.

 감사후르디아 대로(Zviad Gamsakhurdia Avenue : ‘감사후르디아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루스타벨리 대로(Rustaveli Avenue)’가 만나는 지점에 넵튠 분수가 있었다. 분수 한 가운데 바다의 신 넵튠이 삼지창을 들고 우뚝 서 있는 모양새이다. 냅튠은 물의 신이다. 샘이나 강, 바다의 신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니 바닷가에 터를 잡은 바투미로서는 해양에서의 안녕과 평화를 빌기에 딱 좋은 신이라 하겠다.

 넵튠(Neptune, 포세이돈) 분수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네투노 광장 16C에 세워진 쟝드 볼로뉴(Jean de Boulogne)’의 조각상 ‘Fontana di Nettuno’를 그대로 복제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똑 같게 복제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원작을 빌려오면서 청동상을 금도금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분수 건너편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바투미 극장이 있었다. 4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과 두 개의 소극장에서 음악, 연극, 무용 등 예술과 관련된 공연이 열린다. 지붕 아래 박공벽에는 리라(lyre)로 불리는 현악기와 트럼펫으로 불리는 관악기를 양각해 놓았다. 그 가운데서 두 사람이 웃고 있는데, 오마이뉴스는 리라의 명수 오르페우스와 음악의 신 아폴로로 추정하고 있었다.(바투미 편은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데 바투미 극장 뒤편에 있는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어쩌면 일리아 차브차바제(Ilia Chavchavadze, 1837-1907)’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바투미 극장을 후원했었다니 말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법률가, 언론인, 정치인 등으로 활동한 그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시가지는 유럽의 어느 중세도시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노랑머리의 남녀도 심심찮게 보인다. 맞다. 바투미는 조지아 최대 항구도시이자 조지아 최대의 휴양도시라고 했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단다.

 좁은 거리는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오스만투르크와 러시아, 유럽 등 다양한 나라들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고풍스럽고 특이한 형태의 건물도 많아 마치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가까워질 무렵 성 니콜라스교회(St. Nikolas Church)’를 만났다. 바투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그리스 출신의 바투미 시장 에프레미디(Ilya Efremidi)의 후원으로 1865년 공사를 시작해 1871년 완공했다. 20세기 초에는 성 니콜라스, 성 조지, 성모 마리아 이콘이 그리스 히로스(Khiros) 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근처에서 아르메니아 교회(Christ the Saviour Armenian Apostolic Church)’도 만날 수 있었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러시아정교회나 조지아정교회와는 달리 우리나라 교회처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다고 했다.

 활을 들고 있는 큐피드를 형상화 한 꼬맹이 분수도 눈에 띈다. 독신자가 이 물을 마실 경우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고, 부부가 함께 마시면 오래오래 행복과 화합을 보장해준다나?

 그 뒤에는 황금빛 여인의 동상도 있었다.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란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도착하니 시간이 일러서인지 인적이 뜸했다. 하지만 점심 손님들이 많은지 식당에서 내놓은 탁자들이 널따란 광장의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바투미의 역사지구 재건과 관광인프라 확충계획에 따라 조성된 광장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을 모방하여 2010년 완공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식당과 술집 그리고 커피숍도 마르코폴로, 피아짜, 미미노 같은 이탈리아어 상호를 가지고 있었다.

 바투미 광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양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의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의 부티크 호텔과 시계탑이 산 마르코 광장의 총독관저 같은 느낌을 준다나? 하지만 내 기억속의 산 마르코광장 99m 높이의 종탑(Campanile di San Marco)은 저 풍경과 많이 달랐다.

 광장 한가운데는 2010년에 만들어진 커다란 모자이크화가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유명 성악가들이 이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단다.

 한가운데서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유럽광장(Europe Square : 옛 이름은 시대광장이라고 했다)’은 넵튠분수의 남서쪽에 있다. 바투미광장에서도 무척 가깝다. ‘유럽이란 이름만으로 조지아의 유로 가입의자가 엿보이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밝고 활기차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많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나 싶다.

 광장의 예쁜 건물들은 유서 깊은 동유럽의 도시들을 연상시킨다. 바투미의 근·현대를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아르누보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 뒤쪽으로 21세기 빌딩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건물은 현재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 식당, 기념품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광장에는 2007년에 세웠다는 메데아 동상(Statue of Medea)’이 우뚝 서있다. 그리스 신화 속 황금의 나라 콜키스 왕국이 역사상 실존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존감의 상징으로 조각가 흐말라제(David Khmaladze)’가 제작했다. 동상은 콜키스 왕국의 공주 메데아가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황금 양가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이올코스 왕국의 이아손 왕자를 사랑해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에게 황금 양가죽을 넘겨준다는 것을 형상화한 모양이다. 이쯤해서 의문점 하나. 콜키스 왕국의 입장에서 메데아는 적국 왕자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조국을 버린 배신자다. 그런데도 아테네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의 왕위를 계승케 하는 등 전설을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이유는 뭘까?

 기둥에 새겨놓은 아르고 원정대의 부조에서 이아손과 황금 양가죽에 대한 얘기를 소환해본다. 황금 양가죽은 콜키스 왕국의 영광과 번영의 상징으로 아이에테스 왕이 아레스 숲속에 숨겨놓고 황소와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이아손이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 두 동물을 물리쳐야 했는데, 이아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메데아다.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도 역시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해,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죽이는 악녀가 된다. 그녀는 아테네 왕국을 거쳐 마침내 콜키스 왕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 아버지 아이에테스는 동생에게 왕위를 잃고 궁에서 쫓겨나 있었다. 메데아는 마법을 부려 아버지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나중에는 아테네 왕과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 왕위를 계승케 한다.

 광장에는 옛 풍경을 담은 사진도 게시해놓았다. 광장을 돌아다니다보면 옛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사진들을 여럿 볼 수 있다.

 광장의 한쪽에서는 2010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커다란 천문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 시청의 천문시계를 벤치마킹한 것 같은데, 덕분에 천문시계가 매달린 저 건물은 바투미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했단다.

 천문시계는 시간 말고도 태양, , 별자리, 행성의 위치 등 천문 정보까지 함께 알려준다고 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자오선, 지평선, 일출과 일몰, 달의 나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달의 실제 움직임까지 보여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천문시계의 안내판을 세워두는 고객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바닷가. 해변에 분수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저녁이면 이곳에서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분수쇼가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볼거리는 아니라고 했다.

 분수광장 초입에 ‘Under-21 Championship’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UEFA 유러피언 U-21 챔피언십은 유럽 축구 연맹(UEFA)이 주관하는 21세 이하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국가대항전이다. 그러니 조지아와 루마니아의 시합이 곧 열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로 가다보면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동상을 만나게 된다.

 이젠 공원(Mircle park)을 둘러볼 차례이다. 한마디로 공원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예쁜 건축물들과 독특한 조형물들, 그리고 나무가 우거진 길게 뻗은 산책로가 있는 멋진 공원이다. 초입에 조성해놓은 울창한 대나무 숲도 잠깐 쉬다가기에 딱 좋았다.

 뭔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은 동서양을 불문하는가 보다. 어른 팔뚝만큼이나 굵은 대나무에 뭔가를 끄적거려놓았다. 낙서가 된 대나무는 의외로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글로 된 낙서는 보이지 않았다.

 공원은 테마별로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져 있는데, 어린이들을 위한 미니 동물원이 있는가 하면, 조각공원과 여러 형태의 분수도 눈에 띈다.

 조류 동물원, 날아갈 우려가 있는 새들은 커다란 새장 안에서 기르고 있었다.

 유료로 여겨지지만 탁구대와 당구대도 설치해놓고 있었다.

 조지아인들이 사랑하는 스포츠답게 체스도 야외로 나왔다. 참고로 조지아 국적의 여성 체스선수 노나 가프린다시빌리 20세에 여성 챔피언에 오른 후 16년간(1962-1978)이나 자리를 지켰고, 세계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 칭호를 받기도 했다.

 바투미는 요런 이층 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미리 예약해둔 식당 근처에서 내려 현지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우리도 코카서스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메뉴는 아자리안 하차푸리(Ajarian Khachapuri)’. 바투미가 속한 아자리야(Ajaria)지역 특유의 빵으로, 보트 모양의 빵 안에 치즈와 버터를 넣어 녹인 다음 계란 노른자를 얹었다. 이스트를 사용해 부풀어 오른 빵을 뜯어 치즈와 달걀을 찍어 먹으면 된다.

 

서해랑길 64-4코스(운산교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

 

여 행 일 : ‘25. 2. 8( )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및 당진시 용연동·대덕동·정미면·면천면 일원

여행코스 : 운산교수당2대운산교신성대학교용천교대덕공원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거리/시간 : 18.7km, 실제는 대운산교부터 14.85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네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운산교(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운암로(70번 지방도)를 타고 운산방면으로 1.5km쯤 들어오면 운산교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4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설치되어 있다.

 운산면소재지(용장리)에서 역천을 따라 내려가다 용천교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아미산 초입까지 가는 20.1km짜리 여정. 험하지는 않지만 산길을 7km나 타는데다,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도 없어 추천할만한 코스는 아니다. 난이도도 별이 4(전체 5), 어려운 코스로 분류된다.

 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정보 플랫폼)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서산 유기방가옥을 추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에서 2km 가까이나 떨어져 있어 쉽게 들러볼 수는 없다. 그래서 초반의 4km 정도를 생략하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여미리에 있는 유기방가옥을 다녀오기로 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느티나무(수령 250년의 보호수)가 반긴다.

 여미리는 달의 넉넉함을 나눌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하긴 늦봄인 사월 여미리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가장 아름답다 하여, 서산8경 중 5경인 여월미야(餘月美也)’에 꼽혔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마을 초입의 유상묵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2)’부터 먼저 둘러본다. 구한말인 1925년 종5품 벼슬을 지낸 유상묵이 운현궁(雲峴宮)을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야산을 배경으로 경사면에 기단을 쌓고 U자형으로 토담을 두른 후 안채와 사랑채를 들어앉혔다. 모티브로 삼았다는 운현궁과 어떻게 닮았는지가 궁금했지만, 문이 닫혀있는 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외관만 살펴보고 발길을 돌렸다.

 사랑채 대문에는 나전헌(螺田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유상묵의 손자인 유정로의 호라나? 안에는 일중 김충현(1921-2006)의 공산무인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를 비롯해 나전심경(螺田心畊), 향감여미(鄕感餘美) 등의 편액이 걸려있다고 한다.

 자형의 사랑채와 자형의 안채가 자형의 행랑채와 담장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출입문도 구별되어 각각 안대문과 사랑대문으로 출입할 수 있으며, 행랑채 익랑에 있는 중문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있다.(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유상묵 가옥에서 80m쯤 떨어진 곳에는 320년이나 묵었다는 거대한 소나무가 있다. ‘서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나이만큼이나 풍성한 품을 미륵불에 내어준다.

 소나무 그늘에는 고려(초기) 때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32)‘이 있었다. 높이가 307cm나 된다는 거대한 미륵불은 살찐 방형(方形)으로 근엄하다. 머리 위에는 화불(化佛)이 새겨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용장천(龍獐川)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수습·보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미륵불의 왼쪽 옆으로 난 샛길로 70-80m쯤 들어가면 선정묘(宣靖廟)‘가 나온다. 조선 정종의 4남 선성군(宣城君)과 배위 3명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왼쪽이 사당, 오른쪽은 재실인 선미재(宣美齋)‘이다. 두 건물 모두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홍살문과 외삼문을 차례로 지나면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맞는다. 경기도 파주에 있던 것을 후손이 끊기면서 다른 후손들이 살아가던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참고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성촌인 여미리는 경연참찬관을 지낸 이창주(李昌冑, 1567~1648)가 입향 시조이다.

 초입으로 되돌아오자 이번에는 달빛미술관이 맞는다. ‘우전 마진식이란 분의 개인 미술관으로, ·여름·가을·겨울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끔은 여미달빛음악회 같은 이벤트도 열린단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작품을 구경하지는 못했다.

 건물 밖도 전시장으로 꾸몄다. 대신 그림이 아닌 조각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런데 서산과 말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2주 전, ’해미 국제성지순례길을 답사할 때도 저런 말 조형물을 보았었다.

 여미리를 방문한 탐방객들의 느낌을 담은 글과 그림들을 타일로 제작해 벽화를 만들었다. 옆에는 신재 이원중의 여미가 어드메뇨 고향 한번 돌아보세!’란 시비도 세워져 있다.

 달맞이 동산이라고 했다. 정자에 올라 그 유명한 달빛을 구경해보란 모양이다. 참고로 여미리는 저 달맞이동산을 비롯해 석불입상, 성선군사당, 비자나무, 라전고택, 서암동천, 유기방가옥, 느티나무마당, 전라산 등을 ‘9으로 꼽고 있었다.

 마을 끝에는 여미리의 얼굴 마담격인 유기방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3)’이 있었다. ‘두루누비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꼽은 고택으로, 양지바른 산자락 남고북저의 지형에 건물을 앉히고 타원형 토담을 둘렀다. 가옥 좌측에는 지붕이 개량된 가랍집(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을 배치했다. 1919년에 지어졌는데, 서산지역의 전통 양반 가옥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고택은 자형 안채와, 동편에 담을 사이에 두고 자형의 사랑채, 그 앞에 자형 사랑 대문채가 자리한다. 안마당 서측에는 동향으로 작은 행랑채가 안마당을 감싸며, 대문은 누각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에서 작은 문으로 연결되는 사랑채에서는 한옥 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누각형 대문을 들어서면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 자형' 안채가 양반가다운 규모를 드러낸다. 안채 왼쪽에 행랑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마당을 가운데 둔 'ㅁ 자형'이다. 덕분에 크기가 상당한 가옥인데도 아늑한 인상이다.(구도가 안 맞아 다른 분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고택 곁에 있는 감나무(서산시 보호수)’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수령이 400년도 넘었다는데 높이가 13m나 된다고 했다.

 유기방 가옥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성인 기준 8천원이라니 제법 비싼 편이다. 하지만 수선화가 피어 있을 때만 받는다니 마음 놓고 들어가 볼 일이다. 대신 살림집을 겸한다니 주인장의 안정을 깨뜨리지는 말자.

 주막이란다. tvN 미스터 선샤인을 비롯해 KBS-2 직장의 신 붉은 단심’, MBC ‘연인’, SBS ‘꽃선비 열애사 등 수많은 드라마가 이 주막이나 고택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가옥 안내도는 수선화로 치장되어 있었다. 맞다. 유기방 가옥에서는 수선화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수선화 꽃밭에 둘러싸인 고택을 중심으로 열리는데, 만개한 수선화를 벗 삼아 마음껏 봄나들이를 즐길 수 있단다.

 유기방 가옥의 오른쪽 언덕에는 수령이 350년이나 된다는 비자나무가 있다. 입향조(이창주)의 증손인 이택(李澤, 1651-1719) 1675년 제주도에서 흙과 함께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세 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아 둘레 246cm에 높이가 20m나 되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다. 제주에서 군락을 이루는 비자나무는 전라도의 백양산과 내장산에서 자생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중부지방 이북은 이처럼 장수하는 고목이 흔치 않다니 충남 기념물(174)로 지정받을 만하다.

 유기방 가옥 앞에는 한 쌍의 해태상이 세워져 있었다. 저곳이 서산 아라메길’ 1구간인 천년미소길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서산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를 합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다. 1구간은 역사 유적지와 계곡, 산으로 이뤄진 친환경 트레킹 코스로 전라산·용현리 등을 거쳐 해미읍성에 이르는 20.1km 구간이다.

 09 : 50. 실제 출발지인 대운산교’. 첨부된 지도에서 탐방로가 ‘647번 지방도와 만나는 지점이다. ‘여미리를 둘러본 다음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덕분에 오늘은 정규코스에서 4.35km(두루누비 표기)를 단축해서 걷는 셈이 됐다.

 내포 문화숲길  원효깨달음길을 걷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포 문화숲길은 내포(內浦)의 역사·문화·생태를 아우르는 걷기 여행길이다. 서산·당진·홍성·예산 등 내포지역에 위치한 4개 시·군이 공동으로 조성·운영하는 숲길로 26개 읍면동, 121개 마을 총 320km를 지난다.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백제부흥군길, 내포역사인물길, 내포동학길 등 5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09 : 50. ‘역천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제방 위로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잠시 후 둑길(이정표 : 영탑사 9.14km/ 안국사지 4.45km)과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참고로 역천(驛川)은 서산시 가야산 석문봉에서 발원, 북으로 흘러가면서 서산(운산면당진(고대면·정미면)의 퇴적평야를 일군 뒤 서해로 유입되는 29.13Km 길이의 하천이다.

 원효깨달음길 내포불교순례길로 이름을 바꾸었나보다. 원효깨달음길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원효대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성찰과 깨달음을 얻는 길이다. 103.5,km 1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이곳이 7코스와 8코스의 경계지점인 모양이다.

 09 : 58.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검암천(劍岩川)’을 건넌다. ‘두루누비 대방교의 교각 침하로 위험할 수도 있다며 검암천교로 우회시키는 구간이다. 하지만 안내판은 차량통행만 금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검암천(劍岩川)은 당진시 아미산(峨嵋山)에서 발원 남서로 흐르다가 정미면에서 역천으로 유입되는 길이 8.96km의 하천이다.

 10 : 05. 또 다시 역천을 따라간다. 역천과 대방(大防)’ 들녘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10 : 12. ‘신성대학교로 들어가는 덕마교는 스치듯 지나간다. 때문에 대학교나 학사촌은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다리 건너에는 1995년에 개교한 신성대학교가 있다. 2007 4년제 학사과정을 인가 받아 전공심화학부를 열었다. 그래선지 전문학교에서 보아오던 물리치료학과와 치위생학과, 사회복지학과 등이 4년제로 편재되어 있었다.

 10 : 13. 역천은 덕마교를 이용해 건넜다. 하지만 이 다리도 중간이 움푹 꺼져 있었다.

 이후부터는 역천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왼쪽에는 모평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요리조리 꿈틀대는 역천의 물줄기가 빚어놓은 충적평야이다.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모평리(模坪里)’란 지명이 대모산(大模山) 기슭에 들어앉은 촌락이 드넓은 평야(平野)를 뜨락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10 : 30. ‘모평중보란다.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수중보(水中洑)라는 얘기일 것이다.

 10 : 37. 운평교. 저 다리를 건너 용연동으로 갈 수도 있지만, 탐방로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10 : 45. ‘용천교로 역천을 건넌다. 정미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저 다리를 기점으로 당진시내인 용연동으로 넘어간다.

 초입의 안내판은 양지말(역말)’의 유래를 전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 당진에는 순성역(順城驛)과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는데, 이곳 용연동이 흥세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역말이란다. 참고로 홍세역에는 역리(驛吏) 17명과 노() 2, () 2, 기마 4, 복마 4필이 있었다고 한다. 꼬맹이 역참(驛站)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우리가 흔히 쓰는 한참이나 간다라는 어휘는 이 역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알아두자.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를 한 참()’이라 했는데, 고려시대는 이 '한 참'의 거리가 100( 40km)에 이르렀다니 오죽이나 힘들었겠는가.

 역천의 상류 쪽 풍경.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는 용현보가 물길을 막고 있다. 참고로 역천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시흥도역승(時興道驛丞) 산하 7개 속역 중 하나인 흥세역(興世驛)’의 옆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하류 쪽 풍경. 저 물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석문호수를 만난다.

 10 : 49. 다리 건너 삼거리에서 역천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간다. 150m쯤 진행하면 또 다른 삼거리, 탐방로는 이곳에서 역천로를 벗어나 용연로로 들어선다. 옛날 흥세역이 있었다는 곳이기도 한다. 자연부락 이름도 역말(驛村)’로 불린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용연로를 따라간다. 오른편은 용연천’, 면천면(죽동리) ‘음고개에서 발원 서쪽으로 흘러 용천교 앞에서 역천에 유입되는 2.8km 길이의 하천이다.

 1975년에 문을 열었다는 용연초등학교도 험난한 세파를 배겨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학생 수 부족으로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진 유일의 공립 단설유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연1 마을회관. ‘용연(龍淵)’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큰 연못(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뭄이 있을 때 남쪽 이배산(利背山)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굴려서 용연에 떨어지면 비가 온다고 믿었단다.

 11 : 02. 2차선의 널찍한 용연로와 헤어진 다음, 1차선인 용란재길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사진에서 보이는 움푹 파인 능선안부를 넘어간다.

 탐방로는 이제 용란재길을 따라간다. 읍내동과 용연동 간을 잇는 1차선 도로다. 아까 삼거리에서 만났던 이정표(어름수변공원 3.13km/ 용천교 1.30km)를 시작으로 심심찮게 나타나는 내포불교순례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어름수변공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양지바른 산자락. 그럴듯하게 지어진 저 건물은 재사(齋舍)일까 아니면 살림집일까?

 11 : 18. 길은 해발 72m(핸드폰 앱)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용란재라고 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고갯마루 부근에서 만난 염수 분사장치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원격제어로 염수를 분사시킬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고개를 넘으면 대덕동이다. 당진 시내에 가까워졌는지 고층아파트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11 : 24. 아미로(609번 지방도)는 곧장 횡단해버린다. 이어서 자 모양으로 들녘을 가로지른다. ‘엘지시스템 에어컨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개울둑을 따르는데 이정표(어름수변공원 1.26km/ 용천교 3.18km)가 방향을 알려준다.

 11 : 29. 빌라촌 앞에서 양지말길을 만나 어름수변공원을 향해 간다. 왼쪽 산자락에 대덕맨션, 송정빌리지, 송정빌라 등 공동주택 단지가 여럿 들어서 있었다.

 잠시 후 임도가 시작된다. 당진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의 숲속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11 : 38. kakaomap은 이 일대를 봉암() 근린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어름수변공원, 버들수변공원, 여울수변공원과 연계 조성된 도심 근린공원으로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 내포 지역 지자체(서산·당진·홍성·예산)들이 불교 성지와 천주교 성지, 동학, 역사인물, 백제 부흥운동 등 수많은 흔적들을 옛길과 마을길, 숲길, 들길, 하천길로 연결한 길이 320km의 장거리 도보 트레일이다.

 50m쯤 더 걸으면 삼거리. 이정표(어름수변공원 0.46km/ 용천교 3.97km/ 아미산정상 6.87km)가 이제껏 함께 걸어오던 어름수변공원과 헤어지란다. 그리고는 아미산을 향해 걸을 것을 지시한다.

 탐방로는 근린공원답게 잘 닦여 있었다. 산책 나온 시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 도심에서 가까운 탓인지 능선에 농지나 농가가 들어서 있기도 했다.

 11 : 49.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이제 그만 임도를 벗어나란다. 임도가 넷으로 나뉘는 지점인데, 산길 하나를 더 내놓은 것이다.

 이정표(아미산 정상 6.4km/ 어름수변공원 0.9km)와 함께 세워놓은 안내판이 산길이 시작됨을 알려준다.

 도심 근교의 산답게 길은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하게 잘 닦여있는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었다. 시민들이 산책삼아 나서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이즈음 산비탈 반대편으로 풍요로운 당진의 들녘이 먼발치로 건너다보이기도 한다.

 12 : 00.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곳곳에 놓아둔 벤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12 : 05. 잠시지만 임도에 내려서기도 한다.

 12 : 08. 느닷없이 나타난 계단. 이정표(아미산정상 5.27km/ 어름수변공원 2.07km)가 계단으로 올라가란다.

 계단 위에는 대덕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대덕산(주민들은 그렇게 부르나, 검색되는 지도는 없다)에 조성된 공원으로, 풋살이나 농구를 즐길 수 있는 경기장에다 산책로, 벤치·파고라 같은 휴식시설 등을 가미해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대덕공원 표석과 조형물. 조형물은 가족나들이에 딱 좋은 공간이라는 자랑을 담았지 않나 싶다.

 12 : 17. 대덕공원 앞. ‘당진시 도로관리사무소 진입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올라간다.

 12 : 22. 눈티고개.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눈티고개. 새말에서 대덕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고 험하여 늦봄까지 눈이 녹지 않고 있다 하여 설티(雪峙눈틔고개·눈티고개 등으로 불린다는 곳이다.

 안내판은 면천군과 당진현을 잇는 가장 큰 대로가 이 고개를 지나갔다고 적었다. 군수나 현감이 다니던 길이라서 당진군에서 가장 큰 서낭당이 고갯마루에 있었단다. 눈이 오면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고 길을 닦는 부역에 동원된 주민들의 고층과 애환이 서려있는 고개이기도 하단다. 그들의 삶의 흔적과 염원이 깃든 돌탑도 있었다고 했으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널찍했다던 고갯길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산길은 여전히 고왔다. 하지만 경사는 아까보다 상당히 가팔라졌다.

 왼쪽 나뭇가지 사이로 당진시가지가 내다보인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것이 대도시의 풍모가 엿보인다. 1990년대 말 당진화력에 출장 왔을 때만해도 소읍에 불과했었는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에 딱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해있다.

 12 : 26. 공식적인 지명은 없었지만 공동묘지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아미산과 다불산이 조망된다. 두 산을 잇는 능선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명색이 산길인지라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금방 끝나기 때문에 버겁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64-4코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서해랑길의 이정표를 만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시설물에 붙여놓은 화살표식 엠블럼’, 그리고 이런 가이드 리본이 전부였다.

 12 : 37. 대신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계단을 놓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도록 했다.

 12 : 45. 운치어린 대나무 숲을 스치듯 지나치자,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삼거리(이정표 : 아미산정상 3.57km/ 어름수변공원 3.37km)가 맞는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지만 서해안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12 : 50. 산속으로 들어갈 것을 지시하는 이정표가 지금 우리가 백제부흥군길(8코스)’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홍성 오서산의 장곡산성(주류성), 예산의 봉수산 임존성을 거쳐 당진의 아미산까지 이어지는 '백제부흥군길'은 총 8개 코스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참고로 660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다시 시작되는 산길은 아까보다 많이 가팔라졌다. 오르내림도 상당히 커졌다. 당진시에서 가장 높은 아미산(350.9m) 자락에 들어섰다는 증거일 것이다.

 12 : 57.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이정표를 만났다. 가야할 방향(아미산 정상 2.85km)은 같은데, 반대방향인 어름수변공원(4.49km)’을 우리가 왔던 길이 아닌 능선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두루누비의 앱을 따라 왔는데도 말이다.

 13 : 07. 산길에서 나와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2.22km)를 가로지른다. 죽동2리와 성북2리를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음고개)인데 차량통행이 잦은 듯 바퀴자국이 여럿 나있었다.

 길은 건너편 아미산 자락으로 파고든다. 250m쯤 떨어진 산중턱의 민가까지 비포장 길(도로에 가까운)이 나있다.

 13 : 13. 민가에 딸린 정자 옆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13 : 15. 가파른 산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1.93km/ 몽산 4.05km/ 어름수변공원 5.41km)가 나타난다. 왼쪽은 64-5코스의 주요 기점 중의 하나인 몽산으로 연결된다. 64-4코스의 종점은 당연히 오른쪽으로 간다.

 13 : 23. ‘야외교실이란다. 체험학습이라도 하는 공간인 모양인데, 나로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실린 시판에 더 관심이 간다. 30년 가까운 공직생활 동안 늘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지표로 삼았었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동장군은 가실 줄을 모른다. 매일처럼 한파, 그것도 경보까지 발령하던 기상청이 어제는 이곳 서해안에 폭설이 내릴 거란 예보까지 덧붙였었다. 눈이 적게 내려 트레킹을 하는데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3 : 31. 아미산 쉼터. 아미산에 만들어놓은 여러 쉼터 중 하나로 산행을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채비하기 딱 좋은 곳이다. ‘백제부흥길의 주요 포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8코의 종점이자 9코스의 시점이다. 그래선지 이정표(아미산정상 1.2km/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7km/ 대덕공원 4.0km, 몽산 4.8km) 옆에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아미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1.2km로 다소 멀지만, 대신 가장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아미산 등산로 안내도.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방향으로 간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임도를 따라가면 된다.

 13 : 38. 서해랑길(64-5코스) 안내도는 아미산산림욕장 입구(이정표 :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26km/ 몽산 3.77km/ 아미산쉼터 0.5km)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두루누비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까지 조금 더 걸으란다. 자동차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64-5코스 답사 때는 이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13 : 41. 아미행복교육원. 당진교육지원청에서 운영하는 교육시설로, 폐교된 면천초등학교 죽동분교를 리모델링해 당진외국어교육센터로 활용하고 있단다. 원어민 교사가 이 지역 학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나?

 그러나 빗돌은 우리네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시인이자 서예가인 늘빛 심응섭 교수의 효행을 새겨놓았다. 한글문자조형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분이다.

 13 : 46.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4.85km 4시간에 걸었다. 7km나 되는 산길을 오르내린데다, 눈까지 쌓여있어 속도가 떨어졌던 모양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오늘만이 아니다. 내 생의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줄 것이다. 어느 날 작은 시험이 진행됐다. 주부에게 아주 친한 사람 20명을 적게 한 다음, 덜 친한 순으로 지워나가도록 했단다. 동료, 이웃, 친구 등이 차례로 지워져나갔다. 부모님을 지울 때는 오래 망설였다. 자녀를 지울 때는 아예 대성통곡을 하더라나? 맞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님은 세상을 떠날 것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만들어 부모 곁을 떠나간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함께 할 사람은 배우자뿐인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아내와 함께 한 하루였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DMZ 평화의길 5코스(고양종합운동장-성동사거리)

 

여행일 : ‘25.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일산서구) 대화동·가좌동 및 파주시 동패동·송촌동·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고양종합운동장가좌근린공원동패지하차도심학산둘레길파주출판단지공릉천살래길통일동산성동사거리(거리/시간 : 21km, 실제는 동패지하차도에서 출발 16.7km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고양종합운동장(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자유로(국도 77호선) 이산포 JC에서 고양대로로 바꿔 타고 3km쯤 들어오면 고양종합운동장이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보조경기장 뒤쪽에 위치한 휴게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고양종합운동장(휴게공원)을 출발 자유로 언저리를 따라 파주 통일동산까지 북진하는 21km의 여정이다. 도심에서 출발해 숲길과 시골길, 공원 등 다양한 길을 걸어볼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심학산, 출판단지, 통일동산 등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나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는 없다. 하지만 짬을 조금만 내면 종점 근처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평화통일의 의지들 되새겨 볼 수 있다.

 08 : 20. 실제 출발지인 동패지하차도(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코스를 단축하기로 했다. 아니 이름(DMZ 평화의길)에 어울리지 않는 시내구간을 줄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08 : 23. 동패지하차도 상단(이정표 : 성동사거리 15.8km).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인데, 평화누리길(6코스) 및 경기둘레길(5코스)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의길(5코스)’도 뭔가를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점인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6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제공한 앱에는 ‘4.95km’로 뜬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안내도는 평화누리길(6코스)과 경기둘레길(5코스)만 표기하고 있었다. 더부살이하고 있는 평화의길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08 : 27. ‘산남로를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100m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란다.

 08 : 29. 동서대로(358번 지방도) 하부 굴다리. 평화누리길은 6코스의 시점을 이곳으로 삼는 듯 눈에 익은 아치형 대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다. 다음 화장실은 출판도시를 지나고서야 만날 수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꼭 들렀다 가도록 하자.

 길은 심학산의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겁을 준다고나 할까?

 08 : 33.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 심학산 둘레길을 만나게 되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평화누리길 6코스는 심학산 둘레길(출판도시길 순환코스)’의 남쪽 코스를 따라간다. 하지만 안내판은 북쪽 코스도 타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정상에 서면 한강의 유장한 물줄기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북한의 송악산까지 코앞으로 다가온단다.

 심학산은 한강을 향해 솟아오른 해발 194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곳곳에 바위가 포진하고 있는데다 경사까지 급해 산을 오르려면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일까? 탐방로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둘레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08 : 48.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이정표 등의 시설물은 물론이고, 탐방객들을 위한 쉼터도 여럿 만들어놓았다. 하긴 심학산 둘레길 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는가. 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라지만 심학산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는 1026일에 열렸다나?

 08 : 55. 산머루가든 갈림길(이정표 : 낙조전망대 1,699m/ 산머루가든 660m/ 배수지 1,387m). 심심찮게 길이 나뉘지만 그때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09 : 08. 약천사 갈림길(이정표 : 배밭정자 1,592m/ 약천사 260m/ 전원마을 516m)도 그중 하나다. ‘약천사(藥泉寺)’ 1932 (고려시대의 절터에) 법성사로 중창되어 1995년 약천사로 개명한 앳된 사찰이지만 13m 크기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로 유명세를 탔다. JTBC 주말드라마 나의해방일지의 촬영지이자, 인기배우였던 고 박용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길은 큰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진다. 산책하기 딱 좋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배낭도 없이 걷고 있는 시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데크 계단이나 밧줄 난간을 설치해 오르내리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09 : 24. 낙조전망대.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길의 끝, 서쪽으로 시야가 확 열리는 곳에 세워놓은 전망대이다. 한강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낙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난간에 서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장중히 흐르는 한강 너머, 김포 한강신도시를 시작으로 하성면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중심에 봉성산과 전류리포구가 있다. 3코스와 4코스를 답사하면서 눈만 들면 심학산이 차올랐었는데, 이번 5코스는 반대로 김포의 드넓은 들녘과 전류리포구를 눈에 담으며 가는 모양새이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뻗어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밀물일 땐 바닷물이 이곳까지 오기도 한단다. 봉성산, 태산, 문수산 등 앙증맞은 멧부리들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비틀면 저 멀리 북녘에 황해도 개풍군 관산반도가 희끄무레하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리듬감을 더해주어 지루할 틈이 없다. 거기다 널따란 바위들이 등산로 곁에 군데군데 놓여 있어 좋은 쉼터가 된다. 이 구간에서는 추락위험 경고판까지 만날 수 있었다.

 09 : 34. ‘배밭 정자란다. 요 아래 있는 배 과수원에서 이름을 얻어온 모양인데, 사통팔달로 길이 나뉘는 지점답게 정자 말고도 이정표와 벤치, 운동기구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배밭입구(510m)’ 방향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산길을 5분쯤 내려가자 한껏 덩치를 부풀린 한강이 얼굴을 드러낸다. 오두산 아래서 임진강과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09 : 43. 심학산등산로 입구. 4개의 등산길과 둘레길 코스를 그려 넣은 심학산 종합안내판과 이정표, 평화누리길 6코스(출판도시길)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심학산의 원래 이름은 수막산(水幕山)’이다. 넓은 평야와 구릉지에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이란 뜻이란다. 홍수 때 산이 깊이 잠겼다거나 바위가 깊숙이 포진해 있다며 심악산(深嶽山)’ 심악산(深岳山)’, 지세가 거북의 등딱지를 닮았다며 구봉산(龜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 이름인 심학산(尋鶴山)’은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 도망갔다가 이곳에서 잡혔다는데서 유래됐단다. 하지만 이는 191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제의 곡해(曲解) 또는 의도적인 변경으로 보는 이유다. 고로 대동여지도 등 일제 이전의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심악산(深岳山)’으로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09 : 46.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마을에는 두어 개의 카페가 들어있었다. 참고로 이곳 책마을에는 인포떼끄’, ‘보물섬’, ‘헤세 같은 입소문을 탄 카페가 여럿 있다. 하나 같이 책과 카페를 합쳐놓은 공간이다. 책을 꼭 구매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에 드는 책 한권 골라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읽다 가면 그만이다. 그러다 좋아하는 작가라도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누가 알겠는가.

 09 : 52. 다리(이름표가 없는)를 건너 출판단지로 들어간다. 정식명칭은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기획부터 인쇄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해결 할 수 있는 국가산업단지이자 1만여 명의 종사자들이 250여 개 출판관련업체에서 일하는 책 마을이다.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전 과정이 '원스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되고 속도도 빨라졌다. 덕분에 시내 곳곳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구할 수 있다.

 다리는 출판단지 유수지를 가로지른다. 유수지(遊水池)란 가뭄이나 홍수 때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마련한 천연 또는 인공의 저수지를 말한다. 출판단지를 가로지르는 하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 인공의 저수지를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09 : 54. 이채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문발로를 따라간다. 파주출판도시가 품은 가장 큰 도로인 문발로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뻗은 길들을 따라 출판사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크고 작은 책방(완전 매력적인 가격으로 할인 판매한다), 그리고 북카페(역시 할인판매)와 아트샵, 박물관 등이 자리한다. 길가에 늘어선 건축물들도 하나의 볼거리이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시각, 좋은 글, 좋은 디자인이 나오고 이게 곧 바른 책을 펴내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 도시 전체를 멋진 건축물들로 채웠다고 한다. 덕분에 책의 도시이자 건축의 도시로 불린다나?

 광화문의 교보문고 앞 빗돌에 새겨진 문구를 책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맞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전달된 책은 읽혀서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인 것이다. 그래 이곳은 상상하고, 만들고, 공감하고, 나누는 책 마을이었다.

 09 : 59. 심학교사거리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 ‘책 마을은 한적했다. ‘이라는 선입감 때문일까? 인근에 있는 ‘(헤이리)예술인마을이나 영어마을처럼 북적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단지를 통과하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10 : 04. ‘직지길을 따라 걷다보면 출판단지 근린공원에 이른다. 출판단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공원으로, 너른 잔디밭과 야트막한 언덕 등 피크닉 명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언덕은 지금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 덕분에 눈썰매장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유수지 쪽에는 탐조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유수지를 찾는 철새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2023년에 생태모니터링을 했는데 101종의 조류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큰기러기·저어새·노랑부리저어새·수리부엉이·흰꼬리수리 같은 법정보호종도 포함되어 있단다.

 계속해서 직지길을 따라간다. 아니 8차선의 자유로 2차선의 직지로 사이에 보행로까지 품은 자전거도로를 따로 내놓았다.

 10 : 17. 유수지가 끝나는 곳에 노주교 사거리가 있었다. 머리 위로는 문발 IC’의 고가 진출입로가 얼키설키 지나간다.

 10 : 19. 문발교사거리(이정표 : 성동사거리까지 8.3km). ‘운정신도시 중 최초로 조성된 교하지구로 연결된다는 표식일 것이다. 교하(交河)는 최창조라는 풍수가가 통일 한국의 수도로 추천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12(광해군 4)에는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왕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吉地)라면서 교하천도론을 적극 개진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계속해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자유로 재두루미길(활자마을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의 사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차량 통행이 허락되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10 : 37. ‘재두루미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쉼터(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로 보아 주민들의 쉼터로도 이용되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이제 재두루미길을 따라간다. 1차선의 차도를 중심에 두고 양옆에 점선으로 자전거길을 나누어 놓았다.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을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10 : 46. 슬슬 지겹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려고 할 때쯤 길은 직각으로 꺾여 마을(송촌동)로 들어간다. 이정표(성동사거리 7.9km/ 동패지하차도 7.9km)가 정확히 절반을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라간다. 강변을 따르던 길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고 보면 되겠다.

 길은 두어 곳에서 나뉘고 있었다. 그것도 마을을 전방에 두고도 들녘으로 에돌아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방향을 지시해준다.

 10 : 58. 그렇게 도착한 송촌동’. ‘동곡심방(銅谷心房)’이라는 편액을 건 3층 건물이 반긴다. 마당에는 거대한 석불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의 설명으로 보아 운주사(雲住寺) 와불(臥佛)’을 모티브로 삼았지 않나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운주사는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이 근저에 깔려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며 선복에 해당하는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안내판은 화순(전라남도)의 운주사에 있는 와불(臥佛)’에 얽힌 전설을 전하고 있었다. 운주사에 있는 수많은 불상들의 정점은 대웅전 왼편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두 기의 와불이다.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인 이 와불은 실제로는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민초들이 그렇게도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그 부처님이기도 하다.

 11 : 00. 언덕으로 올라서자 2차선 도로인 소라지로가 반긴다. 탐방로는 소라지로를 따라 북진한다.

 11 : 06.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한강이 자신도 보아달란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한강은 저 너머 북한 땅을 배경에 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끼고 동서로 흘러드는 임진강과 교회(交會)한다. 조금 더 나가보자.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던 한강과 임진강은 다시 북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예성강을 만나 서해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길가에는 멋진 카페들이 여럿 들어서있었다. 그중에서도 우연히, 설렘이라는 디저트 감성 카페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멀리 보이는 한강 뷰와 통 유리창 밖의 초록뷰를 보며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는데, 잠시 쉬다가자는 내 부탁을 들은 채도 않고 지나쳐버리는 걸 보면 집사람의 눈에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메뉴판도 예술로 변할 수 있는가 보다. 이곳만의 시그니처 크림커피와 디저트를 마시다보면 여행의 재미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맞은편에는 ‘Eastern ~ One’이라는 인테리어 소품 창고형 매장도 들어서 있었다. 발길을 재촉하는 집사람의 기세에 눌려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짬을 내 들러보신 이석암 작가님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라고 귀띔해주신다.

 11 : 10. ‘송촌동 종점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소라지로327번길이라는데 2차선이었던 도로가 1차선으로 좁아졌다.

 길이 좁아진 탓인지 도로라기보다는 임도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갯마루에서는 살림채(한옥펜션)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성동사거리 6.7km)을 만나기도 한다.

 11 : 18. 고개를 넘으면 재두루미길과 다시 만난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방향을 틀어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11 : 25. 탐방로는 마을(松村洞)을 관통한 다음, ‘재두루미길로 다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철책으로 둘러싸인 공릉천변을 따라 동진한다.

 11 : 28. 공릉천에는 송촌교가 놓여있었다. 아래로 물만 지나갈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다리다. 공릉천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를 막기 위해서라는데, 실제로 침투한 적도 있었단다.

 다리 난간은 윤형철조망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런데 서쪽을 향해서만 있는 게 아닌가. 하류 쪽은 철책으로 꽉 막혀 있는데 반해, 상류 쪽은 아무 제한 없이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다리 자체가 민통선인 셈이다.

 공릉천의 상류 쪽 풍경. 공릉천(恭陵川)은 양주 칠봉계곡에서 발원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길이 75km의 국가하천이다. 공릉천은 철새의 낙원으로 알려진다. 송촌대교 일원과 하구에 습지가 발달된 탓에 저어새·흰꼬리수리·재두루미 등의 철새가 관찰되는데,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들도 서식한단다.

 하류 쪽에는 송촌대교가 놓여있다. 힘차게 내달리는 공릉천의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백로와 기러기 떼 등 겨울 철새와 원앙, 비오리 등 천연기념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리 몇 마리가 전부였다.

 11 : 33. 다리를 건넌 다음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때 공공하수처리시설을 지나기도 한다. 시설의 담장을 끼고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하수처리시설이 비릿한 농업비료 같은 냄새를 스멀스멀 풍긴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리를 잡아도 한참이나 잘못 잡았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탄현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왼쪽에 탄현 시가지가 들어섰다. 시골의 소읍인줄로만 알았는데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11 : 48. ‘소리지로를 빠져나와 지하 차도로 들어간다. ‘자유로에서 필승로로 빠져나가는 진출로 아래로 난 일종의 굴다리다.

 굴다리는 벽면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작품명은 '평화의 삼거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 습지 지역의 특성을 그림으로 담았단다.

 굴다리를 빠져나온 다음(이정표 : 성동사거리 2.2km), 이번에는 자전거 길과도 헤어진다. 이어서 통일동산관광특구 도로 표지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11 : 51. 이후부터는 필승로를 따라간다. 50년 전, 육군 졸병이었던 시절 구호가 필승이었던 것 같은데.

 이즈음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11 : 58. 검단사 입구. 탐방로는 검단사 쪽으로 올라간다. 검단사(黔丹寺) 847(신라 문성왕 9)에 혜소(慧昭) 스님이 창건했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으로 불리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됐단다. 노태우 전 대통령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루누비(DURUNUBI)에서 제공한 GPX 트랙이나 이정표 등 모든 지표는 검단사 방향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통일공원 이정표가 가리키는 장준하 추모공원으로 진행할 것을 권한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산길을 걷느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운동가인 장준하 선생의 묘역을 찾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아서이다.

 1975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사 한 장준하 선생은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혀있었다. 그러다 홍수로 묘가 파괴되면서 2012년 이곳으로 이장하게 됐단다. 공원에는 선생의 행적을 알리는 연혁이 적은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공원 뒤편 산길을 50m쯤 오르면 선생의 묘가 나오는데, 그의 책 돌베개의 이름을 따 봉분을 돌베개로 만들었단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했다.

 11 : 59. 우리부부는 도로를 따라갈 경우 통일동산을 만날 수 없다는 선두대장의 엄포에 헷갈려 검단사 방향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50m쯤 올라갔을까 이정표(성동사거리 3.5km)가 왼쪽 산자락을 가리킨다. 이어서 초입의 침목계단을 오르자 살래길 표지판이 길손을 반긴다. 파주 시민들이 건강 증진 및 휴식공간으로 많이 찾는 둘레길이다.

 살래길은 엉덩이(또는 몸을)를 살래살래 흔들며 걷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장단콩웰빙마루를 출발 검단사·유승앙브와즈아파트·전망대를 거쳐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 이르는 4.2km 구간으로 걸어서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검단산(黔丹山, 151.8m)의 허리쯤을 에돌아가는 둘레길은 곱디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까지 거의 없어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곳곳에 놓여있는 벤치나 평상에서 쉬어가면 그만이다.

 검단산은 그리 높지도 않은데다 완만하기까지 해서 누구나 산책하듯 가볍게 나서기 좋은 산이다. 거기에 살래길까지 조성되면서 길은 더욱 고와졌다. 주어진 시간에 따라 코스를 정할 수 있는데, 모든 코스를 다 누빈다고 해도 4-5시간이면 충분하단다.

 12 : 15. 길고 긴 계단 위에서 고려통일대전이 날개를 편 듯한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 왕과 충신들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 내다보일 것도 같은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옛 영화를 회상하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미공개 시설이라고 하나, 건설업체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쪼록 잘 마무리되어 또 하나의 귀한 구경거리로 탄생했으면 좋겠다. 사진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찍었다.

 12 : 22. 조금 더 걸어 살래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에 이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앞이 탁 트이면서 오두산 정상의 통일전망대로부터 성동리를 지나 헤이리까지 뻗어간 오두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허리를 자유로가 지나간다. 길을 뚫기 위해 오두산 줄기를 뭉텅 잘라냈다.

 2021년에 개장했다는 장단콩 웰빙마루도 눈에 들어온다. 파주를 대표하는 특산품인 장단콩을 테마로 생산-가공-유통-판매와 체험-관광-문화가 어우러진 6차 산업의 농촌 융복합단지다.

 12 : 25. ‘호텔지구에 가로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골짜기로 들어간다.

 산길은 한참이나 더 이어지고 있었다. 검단산 산책로는 크게 살래길과 능선길로 나누어진다. ‘평화의길은 이중 살래길만 오롯이 따른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탐방로가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이유이다.

 참호나 교통호 같은 옛 군사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시설보수를 해온 듯 옛 모습 그대로이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12 : 48. ‘이제 그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즈음에야 유아숲체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마별 숲속 놀이시설인데, 유아숲지도사가 참여하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12 : 57. 골프하우스인 ‘Bunker Hill’을 지나자 이번에는 통일동산이 맞는다. ‘통일동산(統一東山)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시된 평화시 건설구상의 일환으로 조성된 안보·관광단지이다. 그 규모가 168만여 평이나 된다니 성동리 일대가 모두 포함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일동산으로 적은 Kakao map의 표기는 잘못되었지 않나 싶다.

 13 : 14. 공원을 빠져나온 다음, ’평화로를 따라 200m쯤 더 진행하면 성동사거리가 나오면서 트래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글자조형물(통일동산관광특구)이 있는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가면 만날 수 있다.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 입구다. 참고로 통일동산 관광특구는 탄현면의 성동리·법흥리 일원에 조성된 접경지역 최초의 관광특구이다. 평화와 역사, 생태와 예술문화 그리고 쇼핑까지 파주의 멋과 맛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에 띄는가 하면, 이를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16.70km 5시간에 걸었다. ‘평화의길이라는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4.5km정도의 시내 구간을 생략했지만 시간은 코스 전체를 다 걷는 것만큼 소요됐다. 산길이 6km도 넘은데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 속도를 뚝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트래킹을 마치고 날머리 부근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들렀다. ‘평화의길에 근접해 있는 북한 땅 조망을 위한 전망대는 빠짐없이 안내해주겠다는 산악회의 배려 덕분이다. 아무튼 이 전망대는 1992 98일 문을 열었다. 북한 인권을 포함한 북한실상 알리기 차원의 많은 자료를 전시·운영하고 있으며, 북한 관산반도와 북한 주민들의 실제 생활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화나 김포에서 들렀던 전망대들과는 달리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흔히 통일전망대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전망대'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정말 잘 꾸며진 박물관이자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하 1층은 어린이 체험관’, 1층과 2층은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 그리고 3-4층은 전망대로 꾸몄다. 4층에 있는 전망라운지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다.

 1-2층의 전시실. 국립통일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시설답게 통일교육과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탈북민들이 직접 증언한 북한 경제, 사회실태 인식보고서  북한인권보고서 내용 등 다양하고 알찬 통일교육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층의 실내 전망대’. 원형의 유리창 너머로 북녘 땅을 살펴볼 수 있다. 오두산 인근을 축소시킨 미니어처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유리창에는 그 너머로 보이는 북녘 땅의 지명을 적어 실물과 대비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곳에 들어선 선전마을에는 인민문화회관과 소학교, 김일성별장, 북한군 초소 등이 있으며 주민은 4,000여 명이 산단다.

 유리창이 시야를 방해한다고 생각되면 야외전망대로 나가볼 일이다. 북한의 관산반도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실시간 XR확장현실 망원경을 통해서인데, 망원경으로 담은 장면을 QR코드로 스캔해 저장해 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디지털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난간에 서면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에서 흘러내리는 임진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나가 된 물줄기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파주의 옛 이름인 교하(交河)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난 달 신형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발표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북한 땅이 더 스산하게 보인다. 그 기분에 떠밀려 개풍군(황해북도)을 망원경으로 당겨보기로 했다. ‘쌀로써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등의 선전구호가 다르게 변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구호는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지게를 지고 이동하고 있는 북한 농민들만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오면 고당 조만식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883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평양 숭실중학교와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가 해외로 떠나버린 이 고난의 땅에서 애국·애족 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된 후에는 북한 동포를 버리고 자신만 월남할 수 없다며 북한 땅에 남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자유민주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련 군정 및 공산당에 맞서 싸우다 끝내 순국하셨다.

 실향민을 위한 공간인 망배단(望拜壇)’도 만들어져 있었다. 명절 때면 실향민과 실향민 후손, 탈북민 등이 차례상을 차려놓고 북녘을 향해 절을 올린단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은 해발 118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던 곳이다. 통일전망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있던 오두산성(鰲頭山城,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의 성터도 없어져버린 것으로 알았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 작가님 것을 빌려왔다. KBS드라마 광개토대왕을 보면서 남다르게 받아들였던 관미성(關彌城)’을 그 흔적이라도 볼 수 있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