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502)

서해랑길 48코스(변산해수욕장-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여 행 일 : ‘24. 3. 2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및 하서면 일원

여행코스 : 변산해수욕장(사랑의 낙조공원)대항리 패총새만금홍보관소광교차로비득마을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거리/시간 : 10.2km, 실제는 11.30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8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북쪽해안과 새만금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옛날은 해안선이었다)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새만금간척박물관과 새만금홍보관,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하나 더, 초반(새만금홍보관까지)은 변산마실길의 1코스(조개미 패총길)와 겹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들머리는 사랑의 낙조공원(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25km쯤 내려오다 방포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변산해수욕장이다. ‘오토캠핑장 바로 앞에서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사랑의 낙조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부안48코스) 안내도는 팔각정 옆에 세워놓았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북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아니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인해 절반은 들녘이 되어버렸다. 길이는 10.2km, 짧은 거리인데다 평탄하기까지 해서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내가 보기에는 1개만으로도 충분했지만...

 11 : 00. 해안선에 잇대어 내놓은 2차선 도로(변산로)를 따라 동·북진(·北進)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탁 트인 서해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지만, 해무가 짙은 탓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1 : 07. 잠시 후, 왼쪽으로 나있는 오솔길로 내려간다.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3층 건물을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된다.

 이정표(종점까지 9.2km) 48코스의 시점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내 앱은 0.4km를 찍는다. 48코스 안내도를 사랑의 낙조공원에 설치해놓은 탓에 0.6km를 줄여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지난 47코스 때 그만큼 더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11: 10.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앞에는 대항리 패총(大項里 貝塚)’이 있었다.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조개류를 잡아먹고 버린 껍질이 쌓여 생긴 조개무덤(조개무지)을 말한다. 조개무지 앞에는 안내판을 세워 발굴과정 및 출토된 유물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한술 더 떠본다. 외국처럼 발굴 당시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위에 강화유리를 덮어놓았더라면 조금 더 생생하게 패총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항리 패총은 1967년에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다. 1981년에는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개무지의 크기는 사방이 10m 내외이며, 두께는 60cm라고 한다. 조개무지 속에서 옛사람들의 생활쓰레기인 뗀석기(打製石器) 5점과 빗살무늬토기 조각 2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선사시대에 이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단다.

 패총 앞은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해양연구센터에서 밭두렁을 타고 온 서해랑길은 야트막한 구릉(丘陵)을 넘는다. 황토 구릉지로 유명산 해제반도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진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마늘·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고 했다.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저 밭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11 : 15. 구릉지를 넘어 해무(海霧)가 짙은 바닷가로 내려선다. 해식애의 기암절벽이 눈길을 끈다는 해변이다. 하지만 오늘은 짙은 물안개가 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 물안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주니까 말이다.

 서해의 맑고 깨끗한 바닷물과 자욱한 물안개가 어우러져 더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해무는 바다에서 끼는 안개다. 따뜻한 해면의 공기가 찬 해면으로 이동할 때 해면 부근의 공기가 냉각되어 생기는 안개다. 하긴 그끄제가 봄을 나눈다는 춘분(春分)’이 아니었겠는가.

 도대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 사람들은 대개 망망대해를 보고 그런 표현을 쓴다. 하지만 오늘은 해무에 잠겨있는 저 바다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고운 해변을 안마당처럼 차지하고 있는 저 건물은 모나코 모텔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시끄럽던 시절, 홍해(이집트)의 휴양지인 후루가다에서 머물던 나는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지로 고민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당시 머물던 ‘Desert rose’라는 리조트의 시설들, 그중에서도 투숙객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해변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는데, 한국에도 저런 숙박업소가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11 : 20. 서해랑길은 백사장 끝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초입의 이정표가 변산마실길 1코스(조개미 패총길)의 종점인 새만금 간척박물관까지 2.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병사들이 해안선 감시를 하며 거닐던 교통호를 따라 간다. 바닷가에서는 철조망이 따라온다. 1960-70년대 심심찮게 넘어오던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기 위해 쳐놓은 시설물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옛 경비초소를 만난다. 1970년대 중반, 지역 예비사단에서 만기제대 절차를 밟다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소식을 접했었다. 그렇듯 당시는 북한 특수공작원들에 대한 방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던 시절이었다. 쓰러져가는 저 시설물에서 흉흉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시 바닷가. 하지만 이번에는 바닷가로 내려서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간다.

 그렇다고 바닷가 풍경까지 놓치는 것은 아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멋진 풍광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이정목이 변산마실길 1코스인 조개미 패총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만금간척박물관에서 변산해수욕장을 거쳐 송포항에 이르는 길이 5km의 둘레길이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야산길과 바닷길을 선택하여 걷을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1 : 27. ‘대항교차로(30번 국도에서 변산로로 내려오는 지점)’ 앞에서 변산로로 올라온 다음 잠시 도로를 따라간다.

 도로 아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닷가 벼랑 위로 축대를 쌓고, 바다를 향해 난간을 덧대고 있다. 잔도(棧道)처럼 아슬아슬한 길을 새로 내려는 모양이다.

 변산로는 보도(步道)가 따로 없다. 때문에 여행자들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에서 내려와 공사가 한창인 울퉁불퉁한 탐방로를 따라 걷는다.

 탐방로는 국도 30호선(70호선 병행)’의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번 구간(48코스)은 유난히도 자주 국도의 위아래를 횡단하면서 이어진다.

 탐방로는 교각 아래를 통과한 다음에도 한참을 더 들어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간 합구마을(대항리)’ 앞바다를 한 바퀴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산촌과 어촌이 절며하게 어우러진 합구마을은 본래 백합 등 조개가 풍성한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합구(蛤九)’라는 지명도 조개가 아홉 개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요즘은 어업의 비중이 많이 낮아졌다. 그러니 한적하고 운치 있는 바다를 낀 농촌마을 쯤으로 치부해두자.

 뒤돌아본 국도 30호선. ‘조개미교의 반원형 교각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합구마을의 동구 밖까지 밀려온 바닷물은 썰물 때가 되면 저 다리 아래를 지나 바다로 되돌아간다. 참고로 조개미는 합구마을의 옛 이름이다.

 11 : 37. 탐방로는 잠시 변산로로 올라선다. 그리고 100m쯤 걷다가 변산해수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정표(종점까지 7.2Km)가 새만금홍보관까지 1.3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지점이다. 참고로 해수찜이란 해수의 염도차를 이용해 몸속 노폐물을 배출하고, 해수에 녹아있는 각종 이로운 미네랄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해 찜질을 하는 곳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다시 바닷가. 저 갯벌은 죽합이 지천이라고 했다. 죽합은 모양이 대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맛조개라고도 불린다. 호주머니에 소금 한 주먹 갖고 가서 타원형의 구멍에 살짝 뿌리면 백합이 기어 나온단다. 삽이나 호미로 잽싸게 파서도 잡을 수 있단다. 하나 더. ‘개불이 먹고 싶으면 동그란 구멍을 파보라고 했다.

 이후부터는 해안가 벼랑 위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서해바다가 심심찮게 내다보이는 기본 좋은 구간이다.

 11 : 42. 전망 좋은 곳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이 근처에서 영화 변산이 촬영되기도 했단다. ‘고향이라고 해준 것도 없으면서 발목은 드럽게 잡네!’ 짝사랑 선미(김고은)의 꾐수에 낚여 고향으로 내려온 학수(박정민). 이준익 감독의 변산은 빡세지만 스웩 넘치고, 부끄럽지만 빛나는 청춘을 그린 영화이다.

 난간에 서면 시야가 뻥 뚫린다. 비안도와 두리도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으면 그 너머에 있는 고군산군도까지 조망된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짙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계속해서 해안가 오솔길을 탄다. 옛날 병사들이 경계를 하면서 오가던 교통호가 세월의 무게를 못 견디고 걷기 나그네들의 탐방로로 변했다.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는 이 구간도 코발트빛 서해바다를 마음껏 즐기며 걸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그런 호사를 앗아가 버렸다. 오솔길 아래의 기암괴석 해안을 눈에 담을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1 : 49. 그러다 올라선 공터는 운동장보다도 더 컸다. 그런데 중장비가 오가는 걸 보면 뭔가 새로운 변신을 위해 공사 중인가 보다. 맞다. kakaomap은 이곳을 새만금챌린지 테마파크로 적고 2026년에 준공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변산마실길 1코스의 명물인 꽃동산을 갈아엎고 있는 거나 아닐까? 봄이면 샤스타데이지의 순백 꽃물결이 일렁인다는 그 꽃동산말이다. 해질 무렵 서해낙조와 함께 즐기면 무릉도원에 온 듯한 황홀경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공터의 막바지. 진행방향 저만큼에 새만금간척박물관이 놓여있다.

 옛말처럼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가 보다. 공터를 빠져나오니 바닷가에 꽃동산 안내판이 나뒹굴고 있다. 주변에는 변산마실길과 변산애향숲 빗돌도 널브러져 있었다.

 11 : 55. ‘간척박물관을 코앞에 둔 지점. 바닷가로 내려가 역방향으로 걸어간다. 변산반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병풍바위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아니 물안개로 뒤덮인 몽환적인 바닷가를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보라, 물안개가 피어오른 저 풍경, 몽유도원도의 실경이 아니겠는가.

 두어 구비 모퉁이를 돌자 신비한 색깔의 바위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서로 마주선 두 바위가 찾아온 이들을 호위라도 하려는 듯 좌우로 도열해 있다. 그런데 검은색의 흔한 갯바위인 바다 쪽 바위와는 달리, 육지 쪽에 있는 바위는 색깔도 기이하고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높이 9-10여 미터에 길이가 60m쯤 될까? 바다를 향해 쏟아지는 폭포처럼 생겼는데, 그게 병풍으로 보인 사람들도 있었나 보다. 언제부턴가 병풍바위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온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물안개는 신비로움을 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해준다.

 백사장에는 바람이 만들어놓은 물결무늬가 선명했다. 시간이 난다면 바다로 더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듯. 갯골 웅덩이에서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한 작은 생명들이 유영하는 광경이라도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12 : 03. 새만금시설지구 초입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있다. 묵정마을의 어민들이 사용하는 시설인 듯한데, 꼬맹이 어선 몇 척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평화의 사절단처럼 물때를 기다리며 숨을 고른다.

 12 : 05 - 12 : 20. 시설지구에서의 첫 만남은 새만금 간척박물관이다. 새만금과 우리나라의 간척뿐만 아니라 세계의 간척역사, 기술, 미래가치까지 재조명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023 8, 3층 규모로 문을 열었는데, 3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실을 중심으로 교육실, 체험실, 영상관, 수장고, 야외광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국내외 간척사를 배울 수 있는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여러 점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만금을 바라보다’, ‘새만금 평화의 휴식’, ‘새만금 바람의 소리를 듣다’, ‘새만금 교육의 자리 등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각각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래 사진의 조형물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포토 죤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도 여럿이다.

 상설전시실은 바다·갯벌·사람, 세계 및 한국의 간척, 새만금의 혁신 등을 주제로 다양한 콘텐츠가 구성돼 있으며, 새만금의 발전과정을 담은 고지도와 각종 민속품 등 6000여 점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관람은 간척의 과거·현재·미래를 차례로 보여주는 동선을 따라가면 된다.

 바닷일은 전통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개양할미 당집(그림) 옆에는 용왕제 때 쓰는 다양한 깃발과 도구들도 전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바닷가에서는 띠배를 만들어 바닷물이 들어차면 먼 바다로 띄워 보내며 마을주민들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용왕제를 열곤 했다.

 소금도 바다와는 불가분의 관계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재원 중 일부를 염전에서 마련했단다. 그래선지 옆에다 옛날 전통방식으로 천일염을 채취하는 과정과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았다.

 물안개와 조개잡이 삼매경인 아낙내들이 어우러지는 조합이 한 폭의 수묵과로 그려진다.

 12 : 22.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새만금방조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군산시 비응도동에서, 고군산군도의 신시도를 거쳐, 부안군(변산면) 대항리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이다. 길이는 33.9km, 2위인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보다 1.4km 더 길다고 한다. 1991 11월 착공돼 2010 4 29 19년 만에 준공되었다.

 12 : 25  12 : 37.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만금홍보관으로 간다. 한국농어촌공사(새만금사업단)에서 운영하는 홍보시설로 새만금 건설과 관련된 역사기록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새만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고 보면 되겠다.

 3층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 새만금의 광활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군산을 향해 길게 뻗어나가는 저 방조제는 바닥(평균)  290m(최대 535m)에 평균 높이(평균) 36m(최대 54m)라고 한다. 길이는 위에서 얘기한 대로 33.9km이다. 끝이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선지 시야가 닿지 않는 거리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여의도의 140배나 되는 바다를 땅으로 만드는 거대한 사업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19년간의 새만금 방조제 축조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자연의 힘을 이기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세계적인 간척 기술로 마침내 새만금 간척 사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3층의 홍보관은 기획전시실·상설전시실·홍보영상관·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은 전망대가 있는 3층에서 무장애(無障礙)의 동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도록 했다.

 사업은 방조제와 간척지 조성이 마무리될 때까지 약 2 9,0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으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환경오염 문제로 간척사업에 대한 찬반 논란이 빚어지면서 물막이 공사를 남겨둔 시점에서 공사가 2차례 중단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한국 간척기술의 발전사, 국토이용 상의 문제, 간척사업 추진현황, 수질개선 대책, 주요 철새도래지 등에 관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새만금은 만경평야의 자와 김제평야의 자에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의 자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다. 만경·김제 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만금지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미니어처도 전시하고 있었다.

 12 : 37. 관람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정문에서 왼쪽으로 200m쯤 걸으면 홍보관교차로이다.

 새만금 간척지(정확히는 새만금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왼쪽 옆구리에 새만금간척지의 들녘을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왼쪽으로는 새만금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맞다. 새만금간척사업은 측량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저 멀리 지평선은 그야말로 수평이다. 문득 영화에서 본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들녘이 떠오른다. 저런 광활함이면 말 타고 한없이 달려 말뚝 박고 내 땅이요를 외쳐볼 만하다. 참고로 새만금간척사업으로 군산시·김제시·부안군 공유수면의 401(토지 283, 담수호 118)가 육지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여의도 면적의 140)에 이르는 면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도 10 140에서 10 541 0.4% 늘었단다.

 12 : 50 - 13 : 05, ‘묵정교차로에서 30번 국도의 새만금교 아래를 통과하면 직소천(直沼川)’을 만난다. 변산면 중계리에서 발원하여 진서면 석포리, 변산면 중계리를 지나 변산면 대항리에서 새만금 담수호로 흘러드는 20.6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직소천에 있는 아홉 곳의 절경을 봉래구곡(蓬萊九曲)’으로 부를 정도로 상류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묵정교차로 잔디밭에서 간식을 먹느라 15분 정도 쉬었다.

 변산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변산교로 직소천을 건너면서 하서면(下西面)으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자동차전용도로인 30번 국도의 보조용 도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도로변 소공원에서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는 꽃 중 가장 붉은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청순해 보여 아가씨나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꽃샘바람에 붉게 물든 아가씨의 얼굴색을 닮았다나? 꽃말도 수줍음이라고 한다.

 13 : 13. ‘소광교차로에서는 국도(변산바다로)를 횡단한다. 통행량이 많아서인지 횡단보도 표시는 물론이고. 교통섬에 교통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종점까지 4km)가 새만금홍보관에서 1.7km를 걸어왔음을 알려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매향비가 반긴다. 매향비(埋香碑)는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바닷가에 향을 묻고 세우는 비()를 말한다. 국내 최상급 바지락 생산지였던 부안의 옛 해창(海倉) 갯벌에 그런 향을 묻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갯벌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빗돌 뒤, 들녘의 초입에는 엄청나게 많은 장승이 늘어서 있었다. ! 이곳에서 해창갯벌 장승제가 열린다고 했다. 해창갯벌 및 새만금 이전의 모든 갯벌은 막혔지만 마지막 남은 수라갯벌. 여전히 40여 종의 멸종위기 생명들이 살아 있는 그곳을 보존하자고 외치는 환경단체들이 여는 행사다. 장승을 통해 자신들의 소망을 듣는다며 작년 여름에도 장승 8개를 추가로 세웠다는데, 그런 행사를 20년이나 해왔다니 저 정도 숫자는 능히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3 : 18. ‘잼버리 1란다. 실패의 대명사로 낙인찍혀버린 ‘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저 안쪽 들녘에서 열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2023.8.1-12(12일간) 열린 잼버리대회는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는 대혼돈의 잼버리가 되어버렸었다. 하지만 내 탓이요보다는 여야 정치권과 정부 부처, 전라북도 간의 책임 공방만 치열했었다. 그 현장이 바로 저 다리 건너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리 건너에는 잼버리기반공사 철거작업 안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시작 첫날부터 쏟아진 잼버리에 대한 비난은 전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그 비난은 대회 장소를 잘못 고른 것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준비 부족에서 원인을 찾고 싶다.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자연재해도 문제였지만, 더러운 화장실과 곰팡이 핀 음식 등 주인의식은 눈꼽만큼도 없는 행사준비가 대혼돈을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준비만 철저했더라면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자립심을 높이는 스카우트 운동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가 또 이디 있겠는가.

 탐방로는 해창쉼터(13 : 26)’를 만나기도 한다. 옛 해창갯벌을 회상이라도 해라는 듯 공터 가장자리에 벤치 몇 개를 놓아두었다. 하지만 광활한 들녘이 무슨 볼게 있겠는가. 그냥 지나쳐버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30번 국도의 비득치교가 나타난다. 탐방로는 저 다리 아래(이정표 : 종점까지 3km)를 지나간다.

 변산반도에는 계절별로 주꾸미, 전어 등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그 가운데서도 청정갯벌에서 나온 백합과 바지락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그 백합으로 만들어낸 백합죽은 변산이 자랑하는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다. 부안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백합죽은 인근 식당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데, 백합 조갯살을 잘게 썰어 넣고 약간의 참기름과 깨소금만으로 간을 해 끓여내기 때문에 백합 고유의 담백한 풍미가 일품이다.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그저 30번 국도를 오른편에 끼고 가다가, 왼편으로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34. 백련리(白蓮里)의 자연부락인 비득치 마을은 자자손손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온 어촌이다. 부안 출신 김민성 시인이 <전략- 확 짠 내가 스며오는 속에/ ‘오오매 으쩐 일이데여!’ 반가워하며/ 내 손을 덥썩 잡는 새포댁의 손/ 소당깨만 한 까칠까칠한 손 -후략>이라며 읊던 새포댁의 손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동향의 김교서 시인은 비득치에 가면이란 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새만금방조제가 놓이면서 바닷가 마을이 아닌 변산 밑의 산골마을로 변해버렸다.

 잼버리 행사장의 시설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듯 들녘에는 중장비가 오가고 있었다. 방조제가 놓이기 전만 해도 저곳은 갯벌이었다. 칠산바다 물고기들이 산란하러 모여들고, 질 좋은 백합과 바지락이 지천이었단다. 멀리 남반구 뉴질랜드에서 북반구 툰드라까지 약 3Km를 오가는 도요물떼새 등 철새의 휴게소이기도 했다. 법정 보호종만 해도 40여 종에 이르렀다나?

 13 : 44.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바람 모퉁이가 나오는데, ‘야방 모퉁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야방은 주변 지역을 훤히 잘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라서, 임진왜란 때 밤에 야방을 섰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 특징을 살리려는 듯 잼버리 야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잼버리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다목적 광장, 팔각정, 전망대, 주차장, 안내센터, 화장실, 조형물 등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자동차전용도로가 중간에 놓여있어 가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대회가 실패로 끝나서인지 펄럭이고 있어야 할 만국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국기를 보며 나라 이름을 알아맞히는 재미가 쏠쏠한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문득 유럽 연수 때 각국을 돌아다니며 삼색으로 된 국기들을 대비해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프랑스·이탈리아·아일랜드·벨기에 등은 세로 삼색기인데 색깔만 다르다. 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헝가리 등 가로 삼색기인 나라는 더 많다.

 13 : 48. 잠시 후 백련마을(어촌계 회관)’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백련리(白蓮里) 9개 행정부락(삼산·금광·노계·금산·월포·신촌·문수·백련·대광·비득·소광) 중 하나로, ‘백련이라 지명은 변산의 의상봉과 와우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수동 계곡 아래에서 못을 이루는데, 그 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났다는 데서 유래했다.

 버스정류장은 광고판을 겸하고 있었다. ‘부안 정명 600주년(2016)’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선정한 9가지 볼거리·살거리·먹거리를 부안 9()·9()·9()’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는다.

 13 : 56.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풍력발전기가 고개를 내밀면서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테마파크 입구의 보리밭. 아직은 키가 무릎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하지만 달포만 더 있으면 싱그러운 빛깔로 일렁이는 보리의 군무를 보게 될 것이다. 보릿대가 살랑댈 때마다 풋내음이 퍼지고, 쏟아지는 봄볕 튕겨내며 싱그러운 빛깔로 반짝이는 어느 봄날.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13 : 59. 테마파크 입구 삼거리. 이정표(종점까지 1km)가 함께 걸어온 변산로와 헤어지라고 한다. 이정표의 지시대로 신재생에너지로로 들어가자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가 반긴다. 테마 체험단지, 실증 연구단지, 산업단지가 함께 입주해 있어 연구개발에서 생산, 교육, 홍보까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전국 최초의 신재생에너지 복합단지다. 참고로 신재생에너지는 재생에너지와 신에너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재생에너지는 햇빛··바람·생물유기체 등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이르고, 신에너지는 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 기존의 화석연료를 변환시켜 이용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하나 더. 신재생에너지의 특징은 환경 친화성과 비 고갈성이다. 원자력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두다.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2009년 공사를 시작해 2011년 완공했다. 중심 시설인 테마체험관(위 사진의 오른쪽 건물)’은 즐기면서 학습할 수 있는 에듀테인먼트 시설로 8개 분야(태양열·태양광발전·바이오매스·풍력·소수력·지열·해양에너지·폐기물에너지)의 재생에너지와 3개 분야(연료전지·석탄액화가스화·수소에너지)의 신에너지 및 그린하우스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난해한 에너지의 원리도 놀면서 익히면 더 즐거워진다나? 쓰레기나 돼지똥, 소똥이 전기가 된다면 어린이들이 믿겠는가. 그런 에너지의 변화를 말로 설명해봤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재생에너지·수력·화력·태양열 등 머리로만 이해하던 에너지의 원리를 만지고, 움직이고, 게임하면서 알아차리게 해 준다고 했다. 알아두면 좋을 지식들을 재미있는 놀이에 담아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단다.

 14 : 15. 테마 체험단지와 실증 연구단지를 지나 산업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코너에 월포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는 사거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경로당의 맞은편, 도로 건너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11.30km가 찍혀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새만금 박물관과 홍보관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나 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그것도 시점에서 종점까지 풀코스로 말이다. 코스가 짧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집사람의 건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다른 소원이 뭐냐고 또 다시 물으신다면 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시면 난 또다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건강의 대상은 내가 아닌 내 집사람이라고 공손히, 그러나 또렷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안고원길 6구간(전주가는 길)

 

여행일 : ‘24. 3. 1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장승삼거리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실제 출발지, 인증)모래재휴게소모래재주화산(조약봉, 인증)임도사거리부천마을원봉암마을부귀면사무소(거리/시간 : 15.8km, 실제는 메타세쿼이아길부터 12.22km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완주) 소양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진안·장수 방면으로 19km쯤 내려온다. ‘서판사거리(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에서 우회전 모래재로로 옮겨 3km쯤 들어오면 원세동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500m쯤 더 올라가면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장승삼거리에서 출발해 메타세쿼이아길 따라 전주를 넘나들던 모래재로 오른다. 이어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을 넘은 다음, 금남정맥 아래 임도를 따라 부귀면사무소로 오는 전형적인 고원길이다. 해발 500m도 넘는 산줄기를 탄다고 해서 난이도는 ’. 구간 거리도 15.4km나 되지만, 지난 5구간 때 추가로 걸었건 거리를 빼고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부터 걷기 시작했다.

 10 : 40. ‘메타세쿼이아길을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양옆으로 늘어서있는 이 길은 모래재휴게소까지 이어진다. 1986년부터 2004년까지 잠동-큰터골의 1km 구간에 메타세쿼이아가 집중적으로 식재됐고, 2008년에는 모래재휴게소까지 구간이 확장되었다. 초기에 조성된 가로수는 수령 40년이 되어가면서 어른의 몸통보다도 더 굵어졌다. 줄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우뚝우뚝 솟아 삼각형을 이루는 메타세쿼이아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드라마 보고 싶다에서 주인공 박유천과 윤은혜가 아픈 상처를 잊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던(네티즌들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기도 했단다), ‘내 딸 서영이에서 서영이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 걸었던 추억의 길이다. 영화 국가 대표에서도 이 길이 등장했었다. 주인공 하정우 등 스키선수들이 성동일 코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었다.

 10 : 42.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테크길 입구. 이정표가 이름표(메타세쿼이아)를 달았다. 6구간의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모자까지 썼다. 그러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바깥에 데크 탐방로를 새로 내놓았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저 길을 따르라고 한다. 그러니 탐방로를 따라가다 오가는 차량이 없을 때 잠깐 도로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 된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길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이다.

 들녘 너머에는 신덕마을(웅치골)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야생화를 키우고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뒤 편백나무 숲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있고, 숙박시설과 마을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도 있단다. 그래선지 고원길 트랙은 저 마을을 들렀다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새로 만든 데크길을 따르다가 그만 진입로를 놓쳐버렸다.

 10 : 50. 잠시 후 도착한 웅치골 사거리’. ‘모래재로(옛 국도 26호선)’에서 옛 웅치길이 갈려나가는 지점이다. 호랑이와 도둑떼가 출몰하던 시절, 이 길은 전주를 연결되던 유일한 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로 향하던 왜군이 이 재(熊峙 또는 곰티재)를 넘었다. 관군과 의병이 왜군에 맞서 대격전을 벌였고, 고갯마루에는 현재 이를 알리는 웅치전적비가 서있다.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던 산길은 1910년 신작로가 되었다. 하지만 99굽이의 비포장 길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모래재가 뚫리면서 기억너머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비포장 산길로서의 기능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트레킹족의 차지가 되었다.

 웅치골 입구. 코너에 백곰 한 마리가 서 있다. 곰은 제 몸만 한 마을 표지석을 껴안고 웃는다. 충렬의 혼이 깃들어있는 곳이니 잠시 들렀다가라는 듯. 아무튼 옛 웅치(熊峙, 곰티재) 길은 신덕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산골짜기로 숨어든다. 모래재길이 생기기 전 진안과 전주를 연결하던 아주 오래되고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안내도는 임진왜란 웅치전적에 대해 간락하게나마 알려준다. 1592 7 8, 왜군은 웅치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전장에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 화살이 떨어진 조선군이 안덕원으로 후퇴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김제군수 정담과 휘하의 병력은 웅치에 남아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정담을 비롯해 종사관 이봉·강운 등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웅치는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적은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아무튼 웅치를 넘은 왜군은 7 9일 전주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웅치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남원에서 돌아온 동복현감 황진이 그런 왜군을 안덕원 인근에서 격파했다. 하나 더. 이 전투의 승리와 한산대첩이 있었기에 호남지방이 보전될 수 있었고, 이는 임진·정묘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고원길은 사거리에서 큰터골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메타세쿼이아길 1차 조림지의 끝이라는 것 외에는 귀가 솔깃할 얘깃거리는 전해주지 않는다.

 이정표는 6구간의 시점(始點) 장승삼거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4.4km로 적고 있었다. 핸드폰의 트랙은 현재 0.85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6구간의 시점이 아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출발(생략구간은 지난 5구간 답사 때 이미 걸었다)한 덕분에 3.9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큰터골 마을회관. 고원길은 회관 앞 고샅길을 따라간다.

 당산나무 아래 철망울타리는 걷기 여행자들이 매달아놓은 리본들로 빈틈이 없을 정도다. 울긋불긋한 게 흡사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10 : 54. 마을을 빠져나오면 다시 모래재로이다. 그런데 가로수가 은행나무로 바뀌어있는 게 아닌가. 느닷없이 수종이 바뀐 게 조금 어색했지만.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철이면 메타세쿼이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도 있겠다.

 10 : 57. ‘큰터골 버스정류장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마을주민들보다는 송어요리 전문점인 진미가든의 단골손님들에게 더 유용할 듯. 예약이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높은 로컬 맛집이라니 말이다.

 11 : 02. 노거수 두 그루가 수문장을 자처하는 수목원 가든 찻집을 지나자 이번에는 적천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세동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버스정류장(적천마을) 맞은편에는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의 생가가 있었다. 박병순(朴炳淳, 1917-2008)은 스승인 가람 이병기에 이어 한국현대문학사에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정열을 쏟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시절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발간하고, ‘가람동인회로 활동하면서 시조시인으로서 한국시조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박병순의 생가. 1917년에 태어나 1939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나라사랑도 남달랐는데,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고 한글보급운동에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마당에는 박병순의 흉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봄눈. 앵도, 속금산, 무궁화 등 그의 대표작들을 새겼는데, 이중 속금산과 무궁화는 이 집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생가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북진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으나 억새가 무성한 것이 가을철에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길가 부지런한 산골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11 : 09. 도로(모래재로)로 올라서자 또 다시 메타세쿼이아가 반긴다. 아까보다는 굵기나 크기가 작아졌지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명품 파크 웨이(Park-Way)’로 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파크 웨이란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드라이브하는 길로서 주변자연과 문화자원을 활용한 휴양활동의 전초기지를 말한다.

 11 : 13. 길은 좀 더 가팔라지고 좀 더 급하게 굽이진다. 그리고 적천저수지라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호젓이 지난다.

 11 : 17. 그러자 고갯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모래재 휴게소가 길손을 맞는다. 26번 국도가 새롭게 놓이면서 모래재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그러다 느리게 달리기 위해, 천천히 걷기 위해, 그리고 잠시 멈추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길로 변했고, 모래재 휴게소도 그들이 찾는 쉼터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모래재 휴게소. 아침마다 토종 계란과 향 짙은 원두커피를 준비한다는 곳이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재를 넘는 직장인들도 있단다. 하나 더. 어떤 이는 휴게소의 약수를 첫 손가락에 꼽기도 했다. 해발 480m의 지하 73m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뽑아 올린 건강한 물인데, 진안군에서 1년에 한 번씩 수질검사까지 해준단다.

 맞은 편, 도로 건너에는 전주공원(공원묘지)이 위치하고 있다.

 11 : 19. ‘모래재 휴게소 광장의 끄트머리쯤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로 올라간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는 모래재 터널로 연결된다. 참고로 모래재는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진안과 장수, 무주 등 이른바 전북의 지붕으로 불리는 무진장 주민들이 전주를 오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도로는 1972 11월 개통됐다. 1997 4차로의 도로가 보룡고개에 나기 전까지 차량통행이 가장 많았으나, 한편으론 심한 굴곡으로 인해 대형 사고가 많이 일어났기도 했다.

 임도는 제법 가파르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거리까지 짧다.

 11 : 25. 잠시 후 이번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이 끝나고 산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정표는 산행구간의 핵심인 주화산(조약봉)까지의 거리를 0.81km로 적고 있다.

 고원길은 이제 산길을 탄다. 느리게 오르는 반듯한 산길은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진안고원의 경계에 놓인 산들이 갖는 특징이지 싶다. 진안과 다른 지역의 고도 차이가 300m나 되다보니 능선까지 오르는데 드는 힘도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진안지역에서는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11 : 29. 덕분에 4분 만에 모래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에서 시작해 내려온 호남정맥의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높이는465m, 진안에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으나 전주시 방향으로는 매우 높은 고도를 갖고 있다.

 모래재라는 지명은 고갯마루 왼편에 위치한 신촌리(완주군 소양면)의 골짜기 모사골에서 유래했다. 모사가 모새(모래)로 발음됐고, 이게 또 표준어가 되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아무튼 탐방로는 이정표(주화산 0.6km/ 곰티재 4.7km/ 모래재휴게소 0.31km)가 가리키는 주화산 방향의 능선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마루금을 따라간다. 호남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이 산줄기는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이고,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 산줄기를 경계로 농경과 산업은 물론이고 현격히 다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능선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색과 붉은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이 리본은 진안의 특산물인 홍삼과 인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 산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잠시 쉬어가라며, 천천히 돌아가라며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반자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멋지게 꼬부라진 도로가 내다보인다. 한때 위험하기로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던 모래재이다. 진안은 산이 8할이다. 때문에 마을과 마을이 고개로 연결되고 다른 고장을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만 한다. 가늠도 어렵게 많은 고개들. 그 중 모래재는 노령산맥의 호남정맥에서 제일 먼저 산을 넘어 진안과 전주를 연결시킨 중요한 고개였다.

 ! 아까 모래재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산길이 많이 가팔라졌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하긴 명색이 백두대간 다음으로 큰 산줄기인 정맥(正脈)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39. 도중에 편백나무 숲이 적힌 이정표(주화산/ 편백나무 숲/ 곰티재)를 만났다. 요 아래 소양면의 어디쯤에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후부터 능선은 사납던 기세를 확 누그러뜨린다. 덕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11 : 45.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헬기장이다. 아니 실질적인 주화산일수도 있겠다. 고도계가 3정맥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보다 3m나 더 높은 570m를 찍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출발지인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5분이 걸렸다.

 널찍한 공터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전망대가 들어섰다. 산비탈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를 만들었다.

 난간에 서자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묵방산과 응봉산 등 완주의 산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 전주시가지의 고층빌딩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11 : 48. 공터를 지나자 곧이어 주화산(조약봉, 563.5m)이 길손을 맞는다. 진안군(부귀면 세동리)과 완주군(소양면 신원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63.5m의 산으로 산악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주화산(珠華山)을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로 호남정맥이 갈려나간다고 본다. ‘주화산이란 이름도 2000년대 이후 산악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정상석은 없다.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건건산악회에서 세운 ‘3정맥 분기점 표시봉이 이들을 대신한다고나 할까? 아니 주화산을 기점으로 강 3개의 수계가 나뉘는 점은 특별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동남쪽에 섬진강(부귀천), 동북쪽으로 금강(정자천), 서쪽으로 만경강(소양천)의 분수령이 된다. 하나 더, 진안고원길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6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이정표가 정맥 3개가 나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은 정맥 종주산악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이다. 장수군 영취산에서 시작되는 금남·호남정맥이 팔공산부터 주화산(조약봉)까지 41.5km, 이곳 주화산에서 갈라진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각각 26.3km, 10.5km 진안고원을 지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부귀산 방향, 즉 금남·호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을 놓아 내려서는 부담을 덜도록 했다.

 11 : 53. 그렇게 내려서다보면 어느덧 조약치이다. 이정표(모래재휴게소 1.15km/ 주화산(조약봉) 0.22km)는 이곳이 금남호남정맥에 있는 고갯마루 중 하나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막상 금남호남정맥의 부귀산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없었다.

 이후부터는 세봉임도(細鳳林道)를 따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모래재휴게소의 반대방향인데, 입봉(638.7m)을 거쳐 연석산(928.2m)로 넘어가는 금남정맥의 8부쯤 되는 산허리를 따라 임도가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백나무로 옷을 갈아입은 산자락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임도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봉암리 산골짜기(kakaomap 봉호재골 연애골로 적고 있었다) 써미트 골프장이 들어서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퍼팅그린이나 페어웨이, 인공호수 등 골프장에서 만들어놓은 시설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작용해주기 때문이다.

 임도는 골프장의 바로 위를 지나기도 한다. ‘굿 샷’, ‘나이스 버디 등 서로를 응원해주는 목소리는 물론이고, 골퍼들이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도중에 거리표시가 있는 이정표(#1 : 부귀면사무소 7.6km, #2 : 부귀면사무소 6.3km)를 두 번이나 만날 정도로 임도는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르기도 한다. 탐방로가 주화산보다도 높은 입봉(立峰, 638.7m) 9부 능선을 넘도록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2 : 23 - 12 : 32. 진안군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길가에 벤치를 놓아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12 : 39. 임도가 끝나면서 산길로 들어선다. 저 벤치는 미리 체력을 보충해놓은 다음 산길을 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는 오르막길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12 : 41. 잠시지만 입봉에서 봉암리로 뻗어나가는 능선(이정표 : 부귀면사무소 5.1km/ 장승삼거리 10.7km)을 타기도 한다. 아니 능선(해발 583m)을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길이 나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이들에게는 마의 구간이다.

 12 : 58. 두충나무재배지와 산죽군락을 연이어 지나 농로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부천마을(봉암리)’로 향한다. 이렇듯 고원길은 굽이굽이 들어앉은 마을들을 지난다. 덕분에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길 따라 걷기만 하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놓쳐버린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13 : 02. 마을 안길을 지나는데 정자(富泉亭)가 이 마을의 유래를 궁금하게 만든다. ‘부천(富泉)’. 물이 넉넉하니 농사가 잘 되었을 게고, 주민들의 삶도 풍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실 나온 동네 주민은 내()가 없어 샘()을 썼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갈음해버린다. 마을의 유래라도 건져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소규모 주택단지도 눈길을 끈다. 하나의 대지에 세 가구가 들어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은 이제 들길을 탄다. 굽이마다 마을과 자연이 반겨주는 길이다.

 이때 보령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모래재를 넘어 전주로 가던 26번 국도가 지금은 4차선으로 변해 저 고개를 넘는다. 1997 1월 전주와 무주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개통됐다.

 13 : 20. 부천마을에서 출발한 들길은 10분쯤 지나 2차선의 부귀로를 만난 다음 원봉암(元鳳岩)’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 4개 행정부락(원봉암·소태정·부천·미곡) 중 하나로 천주교 교우촌(‘공소도 있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7km/ 장승삼거리 13.1km) 신촌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원봉암이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13 : 27. 도로(부귀로)를 따라가다 만난 봉암교’.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2km/ 장승삼거리 13.6km)가 다리를 건너지 말란다. 보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피해 정자천의 둑길을 따르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자연과 함께 하는 길로 인도하는 게 특징이다.

 이후부터는 정자천(程子川)을 따라 내려간다. 운장산 골짜기(부귀면 궁항리)에서 발원하여 거석리와 정천면 월평리를 거쳐 용담호로 흘러드는 길이 20km의 하천으로, ‘정자란 지명은 하천 주변에 정자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이웃한 주천면과 용담면 지역에 주자천(朱子川)’이 흐르므로 이에 견주어 중국의 현인인 정자(程子)에 맞추어 이름을 고친 듯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자천은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는 용담댐에 수몰되어버린 하류의 얘기고, 상류는 충적지를 만들면서 생긴 곡선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 충적지를 지나다 만난 요런 길이라도 볼거리로 꼽으면 몰라도...

 13 : 40. 26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에서 바깥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곳이다.

 굴다리 근처 부귀교차로에서 잠시 49번 지방도(귀상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부귀로로 다시 내려선다.

 13 : 44. ‘오산교로 정자천을 건너면 이번에는 사인암 마을이 맞는다. 법정 동리인 거석리(巨石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상거석·신거석·사인암·하거석·금평·금계곡) 중 하나로 사인암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사자 형국이고 큰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그러다 고려 때 사인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았었다며 요즘은 사인암(舍人岩)’으로 고쳐 부른단다. 하지만 마을 정자는 아직도 사인암(獅仁岩)이란 지명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새롭게 단장된 신작로를 따라간다.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13 : 50. 배구·족구·풋살 경기가 가능한 다목적구장이란다. 우천 시에도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육상 트랙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목적구장 옆에는 충혼탑이 있었다. 안내판은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을 지키다가 숨진 주민자치대 및 의용경찰대원들의 거룩한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9.28 수복으로 퇴로가 막힌 공산당이 운장산 일대로 몰려 무고한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만행을 일삼자, 이들이 목숨 받쳐 이 지역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6구간이 끝나는 신거석 마을로 간다. 거석리의 중심 마을이자, 부귀면 소재지로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보건지소·농협 등 부귀면의 행정기관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 이 무슨 생소한 풍경이란 말인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공중전화가 버젓이, 그것도 대로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친일잔재라 할 수 있는 윤치호 시혜 불망비 윤치호 흥학 불망비 시혜불망비는 부귀면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소작료를 경감해 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29년 소작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흥학불망비는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부귀면 초대 면장이 건립했다.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를 비롯해 만인공동회 등 애국 계몽활동을 지도하고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특사로 석방돼 변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안내판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不忘) 할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빗돌들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행적을 밝히고 현재를 살아가는 후대에게 교훈과 경계를 삼기 위한 역사 교육의 생생한 증거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14 : 03. 부귀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은 12.22km를 찍는다. 코스의 절반 정도가 500m 안팎의 능선과 임도를 오르내렸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눈에 익은 진안고원길 특유의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7구간(황금폭포 하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을 면사무소 앞마당에 세워놓았다.

서해랑길 47코스(격포항  변산해수욕장)

 

여 행 일 : ‘24. 3. 9()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격포항(금정모텔 앞)채석강격포해수욕장수성당적벽강하섬전망대성천항고사포해수욕장송포항변산해수욕장 사랑의 낙조공원’(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5.64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변산마실길(2·3코스)과 겹친다고 해서 마실길 위의 세계지질공원으로도 불린다.

 

 들머리는 격포항(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내려오다 종암교차로(변산면 마포리)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격포로로 들어오면 잠시 후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7코스) 안내도는 닭이봉전망대의 입구 근처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네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길이는 13.9km,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산길을 연상시키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기 때문에 결코 쉽다고 볼 수는 없다.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 이유일 것이다.

 10 : 41. 탐방로는 2차선 도로인 방파제길을 따라 북쪽으로 간다. 전망대가 있는 닭이봉(鷄峰. 85m)’을 오른쪽으로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나는 반대 방향인 격포항 쪽을 선택했다. 물 때(썰물)가 맞은 덕분에 세계적 지질명소인 채석강을 둘러볼 수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10 : 44. 채석강으로 가는 길. 왼쪽은 격포항이다. 격포(格浦)는 일찍이 수군(水軍)의 요새지로서 별장이나 첨사가 주둔했다. 조선시대는 전라우수영 관할 격포진이 있었다. 지금은 서해안권의 대표 국가어항으로 개발되어 있어 다양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청정해역을 품고 있어 봄 주꾸미, 가을 전어를 비롯해 갑오징어, 꽃게, 백합, 바지락 등 사시사철 다양한 수산물들을 만날 수 있는 풍요로운 항구다.

 채석강(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3)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면 방파제 위에서 자그마한 공원을 만난다. ‘채석강 갤러리라는데, 부안군에서 석재로 만든 각종 조형물들로 예쁘게 꾸며놓았다. 다양한 대리석 작품들에 채석강과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격포항 종합안내 변산팔경 등의 관광홍보판과 함께 어항이용안전수칙 등의 안전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채석강을 구경할 때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10 : 47. 방파제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채석강(彩石江)이 모습을 드러낸다. 20m 높이의 해안절벽은 중생대 백악기( 7천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책 수십만 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시루떡 같다고도 한다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서 그 형상도 달리 나타나는가 보다. 참고로 원래의 채석강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놀던 중국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강이다.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에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그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이태백처럼 술 한 잔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침식에 의해 층을 이룬 절벽 아래로 편마암층이 닳고 닳아 벼루처럼 반들반들하고 닭이봉 아래의 층암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바위절벽을 움푹 파고 들어간 해식동굴에서 만나는 해넘이도 장관이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으니 참조한다.

 해식동굴은 인생샷을 건져보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 바다 쪽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서 눈길을 끈다. 해식절벽이 저런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 채석강은 '연인과 함께 가면 사랑이 깨진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고 한다. ‘돌 깨는 작업장인 채석장(採石場)’과 소리()가 같아서였을 것이다. ‘채석장 돌이 깨지듯 사랑이 깨진다.’고 여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70~80년대 만 해도 이곳은 사랑이 무르익는 곳이었다. 이곳에 놀러왔던 연인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놓쳐버리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귀가를 못한 젊은 남녀들이 따로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다. 하여간 그로 인해 결혼까지 간 커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11 : 02.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앞에 서면 켜켜이 쌓인 세월과 자연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해안가 바닥은 끝없는 바위멍석을 깔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데다 높낮이 차가 있어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게 1.5km쯤 되는 암반지대를 진행하면 격포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난 오른편 나무계단으로 오른다. ‘서해랑길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11 : 06. 호텔과 음식점들이 들어서있는 골목을 지나 격포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해수욕보다는 오히려 채석강과 서해안의 일몰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인데, 500m 길이의 백사장이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으며, 경사가 완만해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딱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 호텔, 리조트, 펜션, 캠핑장, 음식점, 카페, 수산시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 없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늘이 편치 않은 빈약한 배후 숲은 단점이라 하겠다.

 11 : 09. 백사장을 지나 반대편 갯바위에 오르면 인어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노을공주로 불리는 인어인데 걸쭉한 얼굴이 공주보다는 왕비에 가깝다. 이 인어상은 31년 전, 격포 앞바다의 대 참사(292명이 사망한 서해페리호 침몰사고)를 겪은 후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나? 하나 더. 이 인어상은 격포 앞바다의 석양이 진홍빛으로 물들면 은빛 비늘을 자랑하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도 갖고 있단다.

 그 위에는 해넘이 채화대가 있다. 1999 12 31, 새천년을 맞이하는 국가행사를 하면서 마지막 햇빛으로 해넘이 성화에 불을 붙였다는 곳이다. 이 성화는 다음 날 일출 행사에서 얻은 성화와 합쳐진 뒤 새천년 영원의 불 보관함에 간직되어오고 있으며, 각종 대회의 성화에 불씨로 제공되고 있단다. 참고로 영원의 불 보관함은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 옆에 있다.

 바다 건너에는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위도(蝟島)’가 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풍경 등 천혜의 경관을 갖고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 홍길동전에서 꿈꾼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다. 그 앞에 떠있는 꼬맹이 섬 임수도는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몸을 던진 임당수로 구전되는 곳이다.

 11 : 16. 채화대에서 빠져나와 ‘SONO Belle Hotel & Resort’ 옆으로 난 소로를 따르면 2차선 도로인 변산해변로(이하 변산 해안도로’)’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간다. 하지만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11 : 21. 4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12.1km/ 시점 1.8km)가 수성당까지 0.6km가 남았다며 왼쪽으로 난 소로(죽막길)로 들어가란다.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의 정문 앞 삼거리이다.

 11 : 25. 조금 더 걸으면 서해생명자원센터(한국수산자원공단)에 이어 죽막마을이 나온다. 서해랑길은 마을 앞 개천가를 따라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에서 만난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해안가 200m의 지정구역 안에 132그루가 자란다)’. 안내판은 이 숲이 천연기념물(123)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지역이 후박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서 식물분포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나? 그나저나 후박(厚朴)하다는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이름대로 후박나무는 후박한 나무이다. 약재, 목재, 염색재로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다 내준다.

 후박나무군락지 옆 너른 공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뭔가를 심으려는 듯 밭갈이를 해놓았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식재한다고 했으니 유채 씨라도 뿌리려나 보다.

 11 : 29. 공터를 가로지르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58호인 수성당이다. ‘죽막동 유적이라는 이름의 사적(541)으로도 보호받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란다.

 수성당(水聖堂)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미와 그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신 제당으로 조선 순조 1(1801)에 처음 세웠다. 지금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참고로 개양할미는 수성당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은 뒤 일곱 딸은 각 도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깊이를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수성당은 아홉 여신이 좌정해 있다 하여 구낭사라고도 한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하여 어부를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한다는 바다의 신이다. 때문에 이 지역 어민들은 개양할미를 정성껏 모셔왔다. 요즘도 정월 열나흘 날에 계양할미에게 치성을 드리는 수성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풍어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공동제사이다.

 수성당 앞에서의 조망. 아까 채화대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달라진 게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일몰도 변산팔경의 으뜸인 격포낙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조선의 빼어난 풍광 10경으로 뽑은 그 변산 낙조말이다.

 수성당을 나오면 산책로는 시누대 숲길로 이어진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시누대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그 숲속으로 터널형의 산책로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나있다.

 전망 좋은 곳에는 포토죤까지 만들어놓았다. 온 서해가 다 보일 정도로 막힘이 없는데, 이를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찍으라는 듯 액자 조형물을 세워두었다.

 11 : 39. 시누대 숲을 빠져나오면 길은 적벽강(赤壁江)’으로 이어진다. 채석강과 더불어 국가 명승(13)’으로 지정된 곳이다. 용두산(龍頭山)을 에도는 2km의 해안선을 따라 펼치는 붉은 절벽은 채석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더했다고나 할까? 참고로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가 황주로 유배를 가서 빈한한 삶을 살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는 적벽강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검붉은 색을 띤 암반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니 적벽강의 백미는 석양 무렵이라고 했다. 바위 단애가 진홍색으로 물들며 장관을 이룬단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 해안의 자갈 구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귓가를 때린다. 달빛에 술상을 마주한 소동파가 읊조리는 싯구라도 되는 양...

백악기 후기, 거대한 호수 아래 퇴적된 격포리층이 지질운동으로 솟아올랐다 침식되면서 적벽강이 만들어졌단다. 퇴적암인 셰일과 화산암인 유문암의 경계 부분에 성질이 다른 두 암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페퍼라이트는 적벽강을 대표하는 지질구조이다.

 글자 조형물은 우리가 변산 마실길 3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적벽강 노을길로 포장된 3코스는 성천항에서 격포항까지의 구간으로 변산마실길의 백미다. 길은 줄곧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데 변산반도의 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 그리고 바닷길이 드러나는 하섬과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지를 품고 있다. 특히 이 구간을 걷다가 만나는 노을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알려진다.

 11 : 42. 서해랑길은 적벽강의 해식 단애 위를 따라간다.

 덕분에 적벽강의 빼어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변산의 해안은 모래와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멋들어진 기암들이 수문장처럼 바다와 뭍의 경계를 지킨다. 이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서쪽으로 향하다 순식간에 서해 바다로 몸을 숨긴 덕분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산줄기가 물속으로 잠수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하나 더. 사람들은 내륙의 산줄기를 내변산’, 해안을 외변산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아두자.

 11 : 46. 조금 더 걸어 도착한 또 다른 적벽강 생태탐방로 입구. 아름다운 변산 앞바다와 함께 커다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안내판은 적벽강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었다.

 안내판은 페퍼라이트, 주상절리, 단층, 돌개구멍 등 다양한 지질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려가 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4km 전방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 : 49. 적벽강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변산 해안도로를 만난다. 그리고는 꽤 오래 이 도로를 따라간다.

 변산해안로라는 이름대로 도로는 바닷가를 따라간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가 확 트인다. 이 무렵 나그네들은 하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12 : 09. 도로변에 있는 마실길의 반월안내소에 도착하면 회화나무 고목이 나그네를 반긴다. 안내판은 ‘500여 년 전 부안 현청 동헌에 심어졌던 것으로 수령이 다하여 그 몸통을 수거·보관해오다 변산마실길 반월안내소를 개소하면서 수명을 다한 고목이지만 향토의 애환을 지켜온 수혼을 변산 마실길의 수호신으로 삼아 탐방객의 안녕을 빌고자 세워 두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나 더. 안내소 옆에 변산 아으리랑 노래비와 하섬 부근에서 해양자원을 조사하다 숨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 연구원들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도록 하자.

 12 : 15. 도로에서 내려와 오솔길(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5km)을 따른다. 이후부터 길은 변산 해안도로와 해안 숲길, 바닷길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하섬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도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TV만 켜면 방송은 온통 남녘의 꽃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힌 저 매화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탐방로는 바닷가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 나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곶부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

 12 : 20. ‘변산 해안도로와 만나는 지점(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2km)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용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드라이브 스루로 여행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전망대에 서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이곳 부안에는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수식어들이 참 많다. ‘변산삼락(邊山三樂)’도 그중 하나인데, ·풍경·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저런 풍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바닷가 오솔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책로라기보다 등산로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47코스의 난이도가 별이 3개로 평가되는 이유일 것이다.

 길은 시누대라고 하는 해장죽(海藏竹) 숲속을 헤집기도 한다. 터널이 만들어내는 빛의 조화로 인생 사진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는 구간이다.

 바다로 눈을 돌리자 하섬이 부쩍 가까워졌다. 사당도와 석도, 비안도 등 주변의 섬들도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 더. 육지에서 1km가량 떨어진 하섬은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무렵 썰물 때가 되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2~3일간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백합·꼬막 등 해산물을 줍는 진풍경이 펼쳐진단다.

 12 : 47. 산길 느낌의 탐방로를 따라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해안초소에 이른다. 변산반도의 해안을 지키던 옛 군사시설을 전망대 겸 쉼터로 바꾸어 놓았다. 쉼터는 꽃을 들고 프러포즈를 하는 남성의 조형물을 세워 가슴 설레는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탐방로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그래선지 해안절벽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이 구간은 철조망에 걸린 팻말을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유수불부(流水不腐)’ 같은 사자성어가 있는가 하면, 청춘이 기생을 안으면 천금이 건불이라는 유머 넘치는 글귀도 눈에 띈다.

 12 : 51.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계단을 설치했고, 작은 개울이라도 만날라치면 어김없이 다리를 놓았다. 이뿐 아니다. 작고 예쁜 해변은 나무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갈 수도 있도록 했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하섬이 성큼 다가온다.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는 하섬은 새우가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새우 하()를 썼다. 그러다 원불교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바다에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꽃 하()’자로 바꿔 사용한다고 했다. 그나저나 눈에 들어오는 하섬은 여느 섬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바다가 하섬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전설이 만들어낸 길이다. 옛날 옛적에 육지에서 노부모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와 부모님이 탄 고깃배가 하섬까지 떠내려가서 돌아오지 못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용왕님께 빌고 빌어 용왕님이 바닷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교통호를 따르다보니 군의 옛 시설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군인들이 떠난 뒤, 초소와 녹슨 철조망만 남아있던 초병의 길 변산 마실길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12 : 58. 그렇게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하섬 전망대. ‘변산 해안도로의 도로변, 하섬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로 지나가는 탐방로에는 커다란 대리석 조형물을 세워 이곳이 변산 마실길임을 알린다.

 마실길 나그네들을 위한 전망대도 빼먹지 않았다. 또 하나의 전망대를 탐방로에 걸쳐놓았다. 그나저나 산길을 걷다가 바다에 둘러싸인 하섬을 만나니 눈이 절로 시원해진다. 하지만 하섬은 눈으로 즐기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을 위한 원불교 신도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단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뻗어나가는 오솔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저 능선을 넘으면 성천항으로 연결되는 산비탈이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오솔길은 한 명씩 차례로 줄을 서서 가야 할 만큼 비좁다.

 13 : 15. 길을 나선지 2시간 35. 변산마실길 2코스(적벽강 노을길)의 시점인 성천항에 도착했다. 포구의 초입, 유유동천(遊儒洞川)의 배수갑문 못미처 갈림길에 변산마실길 안내도와 이정표(송포항 5.0km/ 격포항 9.0km), 그리고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6km)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변산면 운산리에 위치한 성천항(成川港)’은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5개 지방어항(곰소항·궁항항·송포항·식도항·성천항) 중 하나다. 연근해 어업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질산어장에서 주로 전어와 갈치를 잡는다.

 성천항은 바다낚시의 명소인 듯. 동호인들이 버스까지 끌고 와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창에 그려놓은 물고기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들어 맨다. 저 낚시꾼들은 물고기를 낚자마자 뼈만 남기고 회를 떠서 먹어버리는 모양이다.

 13 : 20. 포구의 모퉁이(이정표 : 종점까지 5.2km)를 돌아서면 고사포해수욕장이 길손을 맞는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모래밭이 가장 길다는 해변으로, 그 길이가 무려 2Km에 이른다고 한다. 잠시지만 모래사장을 걸어본다. 누군가 그랬다. 물 빠진 변산의 해수욕장에 들어서면 신발은 벗어두자고.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를 걷는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종착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을 뿐...

 고사포해수욕장의 백사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물이 깨끗하고 수온이 적당해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근거리에 있는 하섬은 물론이고,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고사포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파도소리에 더해진 솔바람소리가 인상적인데, 그 숲속에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다. 솔숲 앞으로는 드넓은 서해바다가 부드럽게 펼쳐진다. ‘! 좋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멋진 해변이라 하겠다. 그래서일까?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소나무 숲에는 꽤 많은 텐트가 쳐져 있었다.

 13 : 39. 서해랑길은 해수욕장을 지나 맞은편 산자락(이정표 : 종점까지 3.7km)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병사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하섬이 바라보이는 갯바위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내려가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니 탐방로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13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수많은 펜션들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운산교차로를 스치듯 지나면 서해랑길은 마리나, 헤이데이, 그랑메종, 보보스, 바라한 등 서구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펜션들로 가득한 저 마을을 관통한다.

 13 : 55. 펜션지구의 뒤 작은 고개를 넘자 양어장으로 여겨지는 시설이 나타났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으로 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정자까지 지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주변은 기암괴석으로 가득했다.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아무렇게나 다듬어진, 태고의 신비스러운 흔적을 여기서도 본다. 역광으로 인해 어둑해진 풍광이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함께 걷던 80대 도반의 손가락 끝에는 거북바위가 걸려있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정자에 올라본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한반도가 품은 작은 반도 변산은 서해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췄다. ‘서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유다.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해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저런 명소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모실길 노선안내판이 우리가 지금 변산 마실길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구간은 철책 초소길을 따라가며 자연적으로 조성된 상사화 군락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송포항에서 출발해 솔향기 가득한 숲길과 붉노랑상사화 군락지, 금빛모래의 고사포해수욕장을 거쳐 옥녀가 머리를 감았다는 성천포구에 이르는 길이 4.8km의 코스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교통호를 따라간다. 바닷가 산비탈에 쳐놓은 녹슨 철조망도 함께 따라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벌거벗은 구릉지도 만난다. 그곳에는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실길은 이렇듯 봄의 유채꽃에서 겨울의 눈꽃에 이르기까지 사계절 내내 꽃들이 활발하게 피어난다.

 14 : 14. 나무로 만든 출렁다리를 건넌다. 작지만 탄력이 있어 출렁거림이 남다른 곳이다.

 14 : 20. 시야가 툭 트이는 널따란 구릉지는 상사화 군락지로 조성해 놓았다. 매년 늦여름(8월말부터 9월초) 샛노란 붉노랑상사화와 함께 순백의 위도상사화가 곱게 피어난단다. 때를 잘 맞추면 푸른 파도와 함께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나?

 어떤 이는 이곳을 샤스타데이지 꽃밭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봄에 이곳을 찾으면 상사화 대신 샤스타데이지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이한단다.

 붉노랑상사화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땐 잎이 없어 잎은 꽃을, 꽃은 잎을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꽃이다. 평소에는 연한 노란색이지만 직사광선이 강한 곳에서는 붉은빛을 띤다고 해서 붉노랑상사화란 이름이 붙여졌다. 만개 때는 껑충한 연초롱 꽃대 끝에 왕관처럼 얹혀진 노랑 꽃술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조망도 좋다.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수많은 섬들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해안은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선지 부안의 바닷가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할퀴어지고 뜯기고 긁힌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탐방로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곶부리를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한적한 오솔길은 사색하기 딱 좋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는 맑아지고 맘속의 모난 돌도 둥글둥글 다듬어진다.

 14 : 25. 모퉁이를 돌아서자 반원형의 전망대가 잠시 들렀다가란다. 다리 모양의 대를 세우고 그 위에다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서자 변산해수욕장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나로서는 옛 추억을 소환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35년쯤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서른의 중반 무렵, 가족들과 함께 저곳에서 하계휴가를 보냈었다. 당시 아버지가 잡아온 바지락과 백합으로 술국을 끓였고, 그걸 반주삼아 마신 술로 나는 얼큰하게 취했었다. 그날 밤. 판소리랍시고 흥얼대는 내 술주정을 늦게까지 들어주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바다 건너 저 멀리서는 새만금 방조제와 고군산군도가 자신도 한번 보아달란다.

 1960년대 전후 북한의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했다는 녹슨 철조망은 이제 소망의 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조개껍데기나 판자에 나름대로의 소원을 적었는데, 남녀의 이름과 함께 하트() 표식을 넣은 게 가장 많이 눈에 띈다.

▼ 안내판은 이 부근을 붉노랑상사화의 자생지라고 했다(9월 무렵)를 잘 맞추면 샛노랗게 핀 상사화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단다하지만 3월 초인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대신 복수초가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있었다이른 봄소식은 복수초의 노란 꽃잎에서 온다고 했다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활짝 핀 복수초에서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14 : 31. 변산해수욕장의 남단과 맞닿아있는 송포항(松浦港),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또 다른 지방어항이다. 이곳도 성천항처럼 칠산어장을 주요 어장으로 삼아 전어와 갈치 등을 잡는다. 참고로 송포(松浦)는 지지포라는 곳에서 살던 어느 선비가 이곳 소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14 : 36. 변산해수욕장은 송포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작된다.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변산해수욕장은 서해안 3대 해수욕장(대천·변산·만리포)’ 중 하나로, 희고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2km 길이의 사빈과 배후의 소나무 숲이 한데 어우러지며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백사청송(白沙靑松)의 해변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백사장도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란다.

 탐방로는 해수욕장의 배후 솔숲으로 나있다. 변산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 중 하나로 1933년에 개장했다. 배후 솔숲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에는 수많은 시판(詩板)이 늘어서 있었다. 이 지역 출신의 작가들인지 하나같이 부안의 산하를 노래하고 있다. 맞다. 이곳 부안은 시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던 명기 매창(梅窓)이 있었는가 하면, 현대에 와서는 서정시인 신석정(辛夕汀)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변산반도와 채석강 등 부안의 주옥같은 산하를 빼어난 문장으로 풀어냈었다.

 글자조형물은 파도를 담았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지역 예술가가 만든 조형물이란다. 제목은 꿈꾸는 물고기’. 변산과 관련된 주제인 물고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다채로운 포토존과 조형물들이 해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해파랑길 안내책자나 kakaomap 47코스의 종점을 변산해수욕장의 버스정류장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47코스와 48코스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헷갈려하는데 두루누비에서 다운받은 앱이 사랑의 낙조공원까지 조금 더 가라고 알려준다.

 14 : 52.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 이정표가 당신은 이미 48코스를 400m나 걸어왔다고 알려준다.

 변산해수욕장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굳힌 사랑의 낙조공원은 꽤나 긴 계단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첫 만남인 전망대를 겸한 작은 광장에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며, 한 쌍의 하트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트는 반쪽만 만들어 놓았고, 비워진 반쪽은 탐방객들의 사랑 표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석양 무렵 이 조형물에 대칭으로 신체를 맞출 경우 인생사진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아래(다섯 번째)에 게재되어 있는 해넘이 안내판을 보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로마의 명물인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을 닮은 조형물도 눈에 띈다.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플루비우스의 얼굴)이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입에다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Pluvius)’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왔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난간에 서면 변산해수욕장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런데 생경스럽다는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맞다. ‘변산해수욕장이 서해라고 해서 갯벌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시커먼 갯벌 대신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이 들락거릴 때도 흙탕물 대신 쪽빛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공원에서 바라본 해수욕장의 배후 풍경. 변산해수욕장은 노을이 머무는 사계절 관광지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었다. 오토캠핑장을 시작으로 전기시설이 가능한 야영장(80), 스토리센터, 노을바라기(전망대), 비치가든(물놀이장), 노을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놓았다.

 하트 손이란다.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가 손인데 사랑의 첫 단계가 손잡기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까지 손을 잡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남자와 여자의 손으로 하트를 조각했단다. 사랑의 약속이 깨지지 않고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증사진 하나쯤 남겨보면 어떨까?

 사랑의 낙조공원 해넘이 안내판. 월별 해넘이 위치와 일자별 해넘이 시각을 담았다. 노을에 대해서는 최적의 뷰를 보여주는 곳이니 부안의 멋진 노을을 듬뿍 담아가라고 한다.

 15 : 02. 서해랑길 안내도(부안 48코스) 사랑의 낙조공원의 진입광장 남쪽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5.64km를 찍고 있으니 상당히 더디게 걸은 셈이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오솔길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여행과 레포츠에 푹 빠져있는 나. 집사람은 그런 내가 좋다며 항상 함께 해준다. 이런 생활 패턴이 우리 부부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다. 미국 대중문화계의 스타이자 코미디의 전설로 불리는 조지 번스 100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인 앨런과 함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고,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