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6코스(녹진국민관광지-용장성)

 

여행일 : ‘22. 7. 9(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군내면 및 고군면 일원

여행코스 : 녹진 국민관광지→진도타워→무궁화동산→둔전방조제→벽파진→연동마을→용장성(15.5km, 실제는 16.11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진도의 바닷가를 걷는 이 코스의 주요 볼거리는 녹진관광지와 진도타워, 벽파진, 용장성 등 구국의 충정을 품은 유적지가 대부분이다. 진도의 아름다운 바닷가 풍광에 만족할 게 아니라 선조의 구국충정까지 가슴에 담아가는 여정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 들머리는 ‘녹진 국민관광단지’(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강진방면 2번 국도. 서호교차로(영암군 서호면 서호리)에서 49번 지방도(진도방면),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77번 국도(진도방면), 우수영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18번 국도로 옮겨 진도대교를 건너면 녹진 국민관광지에 이른다. 네비게이션을 이용(‘녹진국민관광단지’를 입력)해 찾아갈 수도 있다.

▼ ‘녹진관광지’에서 ‘용장성’에 이르는 15.5km 길이의 둘레길. 이 코스는 진도의 바닷가를 걷는다. 때문에 볼거리도 하나같이 바다와 관련이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진도의 바닷가 풍경은 물론이고, 녹진·벽파진·용장성 등 유적지들도 하나같이 바다를 건너오는 외적과 싸우던 역사의 현장이다. 난이도는 ‘상(5등급 중 4번째)’이다.

▼ 서해랑길은 ‘망금산(106.5m)’으로 오르란다. 이왕이면 꼭대기에 올라앉은 진도타워까지 구경하고 가란다. 하지만 난 ‘진도각 식당’ 오른편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속속들이 살펴본바 있는 진도타워보다는 새로운 볼거리를 찾아서이다.

▼ 식당 뒤 해안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산책로를 조성해놓았다는 것은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런 내 기대는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녹진 국민관광지’가 자랑하는 풍광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 머리 위로는 ‘진도대교’가 지나간다. 길이 484m에 너비가 11.7m인 이 다리는 한국 최초(1984년 개통)의 사장교로 알려진다. 교각을 세울 수 없는 여건(유속이 11.5노트로 동양에서 가장 빠르단다) 때문에 양쪽 해안에 강철교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사장교 형식을 취했다. 2001년에 제2진도대교가 개통되면서 국내 최초의 쌍둥이 사장교가 된다.

▼ 야외무대에 오르니 울돌목 건너 ‘우수영’이 코앞이다. 울돌목은 세계해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을 거둔 ‘명랑대첩’의 격전지이다. 지자체에서 이런 점을 부각시켜 울돌목 일대를 국민관광지로 지정,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 도로로 올라와 다시 탐방을 이어간다. 명량대첩의 격전지인 울돌목을 옆구리에 끼었다고 해서 이름까지도 ‘명량대첩로’다. 길가에는 펜션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울돌목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옛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가 보다.

▼ 이 길은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이기도 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관직에서 파직당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그가 군사·무기·군량·병선을 모아가며 명량해협으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역사스토리 테마 길로 조성했다. 구례(병사를 모음)를 출발해 곡성(군관들과 수군재건 협의), 순천(무기를 구하고), 보성(식량 선적), 장흥(해상출전을 결의), 강진(해상 기동추격전)을 거친 다음, 해남과 진도 사이의 바다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니 이 얼마나 비장한 마음가짐인가. 괴멸되다시피 한 조선 수군과 이순신을 마지막까지 버티게 할 수 있었던 좌표였을 것이다.

▼ 앗! 가슴 설레어 찾아온 ‘강강술래 터’가 주차장이라니. 탐방로까지 변경하게 만든 주범이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강강술래 터’는 정규 탐방로를 걸었을 때 만나게 된단다. 잘못된 지리정보(지도)가 원인이었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내 탓도 크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 명랑해협의 감시초소 역할을 했다는 망금산(望金山)의 ‘관방성(關防城 : 전라남도 기념물 제204호)’도 안내 빗돌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얼마쯤 가야할지를 모르니 어쩌겠는가.

▼ 최민식이 열연한 ‘명량(鳴梁)’을 보셨나요? 영화는 위급상황을 전하려는 민초들이 옷을 벗어들고 소리치던 바위를 클로즈업 시켰었다. 그 바위가 바닷가에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의 장면이 그려지는 바위가 나왔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작았지만...

▼ 건너편에 있는 섬은 ‘피섬’이란다. 원래 이름은 ‘어지바위’. 명량대첩 당시 수장된 일본 수군의 피가 바위로 스며들어 붉게 보인다고 해서 이름을 바꾸었다나?

▼ 바다라기보다 폭우 때의 강물에 가깝다. 물길이 소용돌이 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내린다. 그곳에 ‘조류발전소’가 들어앉았다. 발전량은 1천㎾급(400가구가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 아직 시험운용 중이나 장차 2만4천㎾까지 발전규모를 늘릴 예정이란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8분. 모퉁이를 돌아서자 항아리처럼 움푹 파인 만(灣)이 나온다. 그 안에는 진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갯벌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 안내판은 진도 갯벌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생물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 갯벌의 훼손을 방지하고 있단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지정되었다나?

▼ 안산호수공원·궁정동·정장리(계룡시)의 공통점은 무궁화동산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무궁화동산이 이곳 울돌목에도 조성되어 있었다. 아니 진도는 길가도 무궁화를 심었다. 무궁화가 진도의 가로수인 셈이다. 아무튼 공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궁화를 심었다. 시비(詩碑)·평화통일비·무궁화터널·정자·연못 등 시설도 두루 갖췄단다. 하지만 둘러보는 것까지는 사양키로 했다. 둔전방조제에서 오매불망 서방님을 기다리는 집사람이 있는 데야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 무궁화는 화려하거나 요염하지 않고 짙은 향기도 없다. 하지만 그 깨끗한 흰 꽃잎과 깊숙이 또렷하게 자리 잡은 붉은색 심문은, 가슴 속에 열정을 간직한 순결한 영혼을 연상케 한다. 조지훈이 ‘희디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줏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 읊은 이유일 것이다.

▼ 무궁화동산에서 ‘서해랑길’을 만났다. 시점까지는 2.2km. 해안도로를 따랐던 내 앱(산길샘)도 비슷한 거리인 1.94km를 찍고 있다. 정규 탐방로를 걸어온 선두대장을 이곳에서 만난 이유일 것이다.

▼ 망금산의 정상은 ‘진도타워’가 걸터앉았다. 2013년 같은 자리에 있던 녹진전망대를 허물고 타워(tower)를 새로 세우면서 진도의 랜드마크(landmark)로 탈바꿈했다. 높이 60m에 지하 1층, 지상 7층의 규모로 1층에는 안내데스크와 티켓부스가 있고, 진도의 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특산물 판매장이 마련되어 있다. 3층부터 5층까지는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다목적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 탐방을 생략한 진도타워는 4년 전의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설명도 당시의 것을 사용했다. 아래 사진은 타워 앞에 조성된 ‘승전광장’이다.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진도군민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조성된 광장으로, 여섯 개의 이순신장군 어록비(語錄碑)와 당시 해전의 장면을 연출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 다른 조형물에는 이순신장군과 함께 싸웠던 장수들의 초상화와 함께 약력을 적어 넣었다. 참! 이왕에 진도에 왔으니 최근에야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어란(於蘭)’이라는 충기(忠妓)에 대해 알아보자. ‘13대 133‘이라는 절대 불리의 여건에서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인의 한편에는 ‘어란’이라는 기생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왜군은 어란진에 주둔한 채로 출정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혀가 왜장 ‘칸마사가게(管正陰)’의 연인으로 있던 어란이 왜군의 출정 기밀을 이충무공에게 알림으로써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의 첩보로 인해 ‘칸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명량이 바라보이는 여낭터 벼랑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나라에는 충절을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와 함께 정유재란의 ‘3대 의녀’로 꼽고 있던데, 그 말에 공감이 간다.

▼ 7층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해협, 우수영 관광지를 한눈에 조망(사진은 생략)할 수 있다. 울돌목 방향에는 ’명랑대첩 해전도‘를 세워놓아 눈앞에 펼쳐지는 울돌목해협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반대방향으로는 진도의 들녘이 펼쳐진다. 널고 반반한 것이 섬 같아 보이지 않는다. 풍요로워 보인다는 얘기이다. 참! 한쪽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명랑대첩 승전관‘에 들어가 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명랑대첩 해전도’로 부족했던 부분을 메꿔주고도 남을 것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도로를 따를 수밖에 없던 탐방로가 가끔은 이렇게 방파제 위로 오르기도 한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갯벌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 이때 위에서 얘기하던 ‘갯벌 습지보호지역’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흡사 술래잡기라도 하는 양 파도에 떠다니는 자그만 섬은 ‘넙섬(右)’과 ‘굴섬(左)’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었으나 지금은 무인도로 버려져 있단다.

▼ 진도에는 ‘아리랑’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색소폰’이란 단어가 보무도 당당하게 옆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말이다. 진도색소폰연주협회가 ‘4인4색’의 버스킹공연을 해오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 눈에 들어오는 바다는 온통 양식시설 차지다. 가두리양식장이 종(縱)과 횡(橫)으로 반듯하게 열을 이루고 있다. 행여나 바람이라도 거세질세라 주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근심의 근원이기도 한 시설이다. 섬사람들에게 바람은 곧 풍파다. 어떤 삶에 풍파가 없으랴.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바람에 맞서 싸우기보단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풍요를 가져오게 되었고 말이다.

▼ 양식시설이 저리도 많은데 어찌 포구하나 없으랴. 그렇다고 배를 댈 수도 없는 곳에 선착장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부교(浮橋)를 놓음으로써 조수간만의 커다란 차이를 극복했다.

▼ 무궁화동산에서 25분. 아기자기한 바닷가 풍경에 푹 빠져 걷다보면 꼬맹이 동산 하나를 만난다. 탐방로는 동산 앞(이정표 : 종점 11.4㎞/ 시점 4.1㎞)에서 왼편 바닷가로 향한다.

▼ 바닷가에는 아치형 문이 만들어져 있다. ‘습지보호지역’이란 문패를 달았는가 하면, 안내판을 세워 눈앞에 펼쳐지는 갯벌에 대해 설명해준다. 습지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빼놓지 않았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다리를 놓았는가 하면, 그 끄트머리에는 전망대를 배치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갯벌을 관찰하게 하려는 안배일 것이다.

▼ 관람객이 없는 전망대는 낚시꾼 차지였다. 입질 끊긴지 오래이건만 낚싯대에서 눈길 한번 떼지 않는 그. 진정한 강태공의 뒷모습일 수도 있겠다.

▼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속살을 드러낸 갯벌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넓었기 때문이다.

▼ 산 위의 정자로 오를 수 있는 길이 나있지만, 왼편으로 난 데크 탐방로를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다시 도로(명량대첩로)로 올라선다.

▼ 서해랑길의 특징 중 하나는 이정표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서해랑길 고유의 리본(빨간색과 노란색이 한 쌍을 이룬다)을 촘촘히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 갯벌전망대를 빠져나온지 11분 만에 ‘둔전방조제(屯田防潮堤)’에 올라섰다. 군내면 둔전리와 고군면 오류리 사이에 축조한 방조제로, 1956년 1,116m 길이의 이 둑이 완공되면서 둔전리의 너른 들녘(219㏊)이 생겨났다. 참고로 둔전(屯田)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곳에 둔전이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벽파진에 주둔하던 군사들의 군량미를 이 마을에서 충당하지 않았나 싶다.

▼ 둑에는 ‘자귀나무’가 지천이다. 하도 많다보니 둑방길의 가로수가 되어버렸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분홍빛이 선명하게 공작새처럼 꽁지를 활짝 펼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이 자귀나무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잎에 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칭으로 나있는 이파리가 밤이 되면 합체가 되듯이 모아진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합혼수(合昏樹). 평생을 신혼부부처럼 살자는 우리 부부에게 딱 어울리는 분위기 아닌가.

▼ 둑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서쪽으로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진도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갯벌과 바다, 그리고 섬이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또한 만만치가 않다.

▼ 오른편도 드넓기는 매한가지다. 다만 갯벌 대신 들녘이 펼쳐진다는 게 다를 뿐이다. 지금 걷고 있는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겨난 들녘으로, 저곳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별도의 저수지를 만들었을 정도로 널따랗다.

▼ 첨탑처럼 솟아오른 금골산(金骨山·195m)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산세가 빼어나다고 해서 ‘진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리는 산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조각가가 바위에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산세을 볼 수 있단다.

▼ ‘저 집은 피난 다니느라 바쁘겠다.’ 함께 걷던 둘레길 도반이 혀를 끌끌 찬다. 맞다. 바닷가 갯벌을 마당삼은 저 집들은 파도만 조금 높아도 지정 대피소로 피신해야 할 것 같다.

▼ 방조제는 15분을 걷고 나서야 반대편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더운 여름날, 그것도 햇볕에 완전 노출되어 걷다보니 몸은 녹초가 되어버렸다. 지자체에서도 이를 눈치 챘나 보다. 배수관문 옆에 작은 공원을 만들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방조제 끝에서 다시 도로를 따른다. 바닷가를 떠난 길은 고개를 올라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串)으로 향한다. 그건 그렇고 오늘도 역시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약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까지 몰아내지는 못한다. 잠깐 쉬며 타월을 쥐어짜면 쏟아지는 땀방울이 한 됫박은 될 성 싶다. 삼복더위에 이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 곶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나타나는 바다. 이번에는 오류마을의 앞바다이다. 참! 이 길은 ‘진도 일주도로’이기도 하다. 진도 바닷가를 따라 한 바퀴 빙 도는 120km 길이의 순환도로로,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널리 입소문을 탔다. 이 길을 따르다보면 한국의 미(美)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케 해준단다. 맞다. 저렇게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어찌 입소문을 타지 않겠는가.

▼ 둔전방조제에서 35분. 801번 지방도에서 ‘오류삼거리’를 만난 서해랑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잠시 후 호국의 얼로 알려지는 ‘벽파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 몇 걸음 더 걷자 벽파마을의 버스정류장. 서해랑길은 그 맞은편에서 열린다. 초입에 ‘충무공전첩비’로 연결됨을 알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 야트막한 동산에 오르자 진도의 자부심이라는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진도출신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1956년 세운 빗돌이다. 빗돌은 귀부(龜趺)와 비문(碑文)으로 이루어져있다. 전첩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게 아니라, 현장의 바위를 깨고 쪼개 조각한 것이란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의 글을 서예의 대가 손재형이 썼는데, 888자 중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단다. 한 글자 한 글자 그 자체가 작품이라는 것이다.

▼ 전첩비에서 바위를 따라 내려오면 호국의 역사를 품은 ‘벽파정(碧波亭)’이 있다. 1207년(고려 희종3년) 벽파나루 언덕에 세운 이 정자는 ‘삼별초의 난’ 때 여몽연합군과의 회담장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16일 동안 머물면서 전략을 세우고 수군을 정비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요새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됐다고 한다. 그래선지 내부에 걸린 시판들도 하나같이 새 맛을 퐁퐁 풍기고 있었다.

▼ 정자 아래 ‘벽파항(碧波港)’은 진도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진도와 육지를 연결하던 나루터였다. 진도와 제주도의 관문이자 인근 해역을 지나는 모든 여객선이 들리는 거점 항구였단다. 하지만 요즘은 ‘불 꺼진 항구’라고 부른다나? 진도대교가 놓이면서 간선도로의 이정표에서도 찾기 힘든 항구로 쇄락했다는 것이다. 분주하게 오가던 여객선 대신 어선 몇 척만이 한가로운 풍경. 그게 바로 ‘벽파항’의 현실이 되었다.

▼ 집사람과 함께 정자에 올랐다. 그리고 준비해간 박주를 나눠 마시며 옛 사람들의 풍치를 따라봤다. 먼저 다녀간 시인묵객들이 읊조렸던 싯구를 따라하면서... 그 여운을 간직한 채로 다시 길을 나선다. 연동마을로 이어지는 방조제의 둑길을 따르면 된다. 참! 둑길에서 만난 ‘삼별초 호국역사탐방로’의 이정표(목섬 0.49㎞/ 벽파정 0.08㎞)를 깜빡 빼먹을 뻔했다. 같은 이름의 둘레길과 서해랑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 둑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왼편에는 감부도를 품은 벽파진 앞바다가 펼쳐진다. 1270년 삼별초를 실은 천여 척의 배가 들어왔던 곳이다. 또한 조선수군의 재건을 노리던 이순신이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바다이기도 하다.

▼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들녘은 농경지 대신 대하양식장이 들어앉았다. 대하양식은 90년대 말의 ‘소금수입 자유화’ 때 많이 늘어났다. 폐전을 원하는 일부 천일염 사업자들이 정부의 지원금을 종자돈 삼아 대하양식장을 열었는데, 그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수익성이 높아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방파제 끝에 이른 탐방로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4.7㎞/ 시점 10.8㎞)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연동마을로 곧장 들어가는 단조로움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작은 고개 하나만 더 넘으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경관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 선착장 조금 못 미치는 지점(이정표 : 종점 4.3㎞/ 시점 11.2㎞)에서는 오른편이다. 연동마을로 연결되는 이 길은 황폐화된 양식장을 만나기도 하지만, 부들과 연꽃이 군락을 이루는 아름다운 저수지를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 진도에 왔으니 천연기념물 53호인 진돗개를 만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갈기를 세우고 짖어대는 개는 무섭기 짝이 없었다. 충성심, 용맹함, 귀가본능이 탁월하다는 국견(國犬)이지만 내 앞에서 짖어대는 저 개는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할 따름이다.

▼ 선착장에서 10분.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연동마을이 나타난다. 진도로 들어온 삼별초군이 용장성으로 자리를 옮길 때가지 머물렀던 마을이라고 한다.

▼ 마을에 들어서니 대문에 매달린 예쁘장한 종이 눈길을 끈다. 이게 또 국기게양대와 세트로 묶여있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엿들은 말로는 이 마을 이장님이 개발한 초인종이라나? 공금까지 들여가며 집집마다 설치해 주었으나 호응을 별로였던 모양이다. 이미 떼어낸 집도 보였으니 말이다.

▼ 연동마을의 담벼락은 그림과 글로 채워져 있었다. 마을의 유래를 적었는가 하면, 연꽃이나 물고기 등 마을과 연관이 있는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잘 그리지도 그렇다고 구성도가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소박함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 ‘민족반역자 김일성을 때려잡자‘.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문구도 적혀있었다. 김일성은 1994년에 죽었다. 아들인 김정일도 2011년에 죽었고, 지금은 그의 손자 김정은이 정권을 잡고 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요즘엔 그 주기가 절반으로 단축되었다고도 한다. 강산이 6번도 더 변했으련만 이곳 연동마을 주민들의 반공의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 벽화에 홀렸음일까? 잠깐이지만 길을 잃고 마을안길을 헤맸다. 그러다가 임시로 내놓은 새로운 탐방로를 찾아내 다시 트레킹을 이어간다. 공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옛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연동마을의 자랑거리인 바닷가도 한번쯤 보고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연동마을은 흙 속의 진주라 할 만큼 갯벌이 좋아 낙지와 조개를 잡고 김 양식으로 살아가는 마을이다. 그 뒤로 너른 바다가 활짝 열린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대 선단이 쳐들어왔던 물길이다.

▼ 바닷가를 따라 잠시 걷던 둘레길이 오른편으로 향한다. 이정표(용장성 3.25㎞/ 연동마을 0.51㎞)는 ‘삼별초 호국역사탐방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100m 남짓 더 걸어 만난 또 다른 삼거리. 이곳에는 서해랑길의 이정표(종점 3.0㎞/ 시점12.5㎞)도 세워져 있었다. 아까 연동마을에서 헤어졌던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포장과 비포장을 반복하는 임도는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임도는 나그네에게 길을 내주면서도 그게 무료했던가 보다. 가다가 휘고 휘었다가는 오르막으로 달리고 다시 쉬엄쉬엄 평지로 늘어지며 장난치듯 십리 가까이를 그렇게 간다.

▼ 서해랑길은 이 구간에서 ‘삼별초 호국역사탐방로(1코스)’를 따른다. 지역에 산재해있는 호국의 역사를 품은 길들을 이어 역사학습과 체험이 가능하도록 조성한 탐방로이다. 최종 목적이야 걷기 여행객의 유치겠지만...

▼ 임도로 들어선지 40분. 산딸기를 주전부리삼아 올라선 고갯마루(해발 155m)는 쉼터를 겸하고 있었다. 곁에는 ‘성황당산성터’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읽을거리까지 제공한다.

▼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얼마쯤 내려왔을까 시야가 트이는가 싶더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용장골’이 나타난다. 용장골은 ‘삼별초의 난’ 때 새로 옹립한 왕의 궁전이 들어섰던 곳이다. ‘용이 숨은 곳’이라는 뜻의 지명과 역사가 딱 들어맞은 셈이다.

▼ 벌통이라고 해서 같은 벌통이 아닌가 보다.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난 벌통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꿀벌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왕성했다.

▼ 오늘도 다양한 야생화를 만날 수 있었다. ‘범부채 꽃’도 그중 하나다. 범부채는 잎보다 한참 높은 곳에서 꽃줄기가 올라온다. 그리고 범 무늬가 선명한 주홍빛 꽃이 하늘로 향한다. 꽃은 화려하다. 하지만 잎에 비하면 작고 단아하며 높은 꽃줄기에 몇 개만 피어나 전체적으로 고고하고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한국 자생식물이어서 일까?

▼ 고갯마루에서 내려선지 18분 만에 ‘용장성 유적지’에 닿았다. 이곳은 ‘삼별초의 난’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다. 강화도로 옮긴 고려 무신정권의 군인이자 경찰조직이었던 삼별초(三別抄)가 고려왕 원종이 원나라에 굴복해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반대하며,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지휘로 군사와 민초들을 이끌고 강도 외포리를 떠나 두 달 만에 진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에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고 제주도로 쫓겨 가기 전까지 짧은 기간(1270-1271) 동안 결사항전을 했었다.

▼ 유적지로 들어서자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동상과 삼별초추모관이 반긴다. 1270년 몽고와 강화를 맺은 고려 원종(元宗)은 강화도 피난살이를 정리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에 해산령을 내린다. 이에 반발한 배중손은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찾아들었고, 용장성을 거점으로 삼아 왕족인 승화후 온을 임금으로 세운다. 하지만 1271년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몽골의 연합군이 용장성을 점령했고, 살아남은 삼별초는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삼별초는 1273년 여몽연합군 1만 명의 공격을 받고 3년 만에 진압된다.

▼ 다음은 ‘고려항몽충혼탑(高麗抗蒙忠魂塔)’이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주인공은 물론 삼별초이다. 삼별초란 야별초의 좌ㆍ우 별초와 신의군으로 이뤄진 별초군을 총칭한다. 별초(別抄)는 임시 군대조직으로, 대몽항쟁기에 큰 활약을 했다. 최우 집권 초기에 횡행한 도적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했는데 이를 야별초라 한다. 그 뒤 인원이 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눴다. 이후 최항이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창설했다. 신의군은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로 구성됐다. 이들을 합쳐 삼별초로 구성한 것이다.

▼ 내친김에 ‘용장사(龍藏寺)’까지 올라가 봤다. 역사는 이 절을 항몽유적지(抗蒙遺蹟址)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절간은 당시의 것이 아닐뿐더러 위치도 다르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자. 너덧 채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절간의 얼굴마담은 금당인 극락전이 아니라 ‘염불당(念佛堂)’이었다. 고려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용장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오는 삼존불(石造藥師如來坐像이라고도 부르며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을 모셔놓았단다.

▼ 절간을 빠져나오자 길은 용장성(龍藏城, 사적 제126호)으로 이어진다. 아니 정확히는 삼별초가 왕으로 옹립한 ‘승화후 온(承化候 溫)’이 머물던 ‘궁궐’이 있던 자리다. 하지만 궁궐터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지형이다. 폭이 좁은데다 비탈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개의 단(段)으로 나눈 다음, 그 위에다 건물들을 들어앉혔단다. 그것도 북향으로...

▼ 날머리는 용장성유적지 주차장(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궁지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금방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6.11km. 무더운 날씨를 감안하면 엄청나게 빨리 걸은 셈이다. 3/1쯤 더 나간 지점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뛰다시피 걸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걷고 있을 그녀의 무료함을 하시라도 빨리 덜어주려면 뛰는 게 문제가아니라 날라서라도 가야하지 않겠는가.

▼ 완주를 증명해주는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07코스로 적고 있었다)는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이를 배경삼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집사람의 표정이 오늘따라 무척 밝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무릎이 아프다며 끙끙 앓는다. 이번 주부터는 대청호 둘레길이 시작되는데 이 일을 어찌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