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재봉(龜在峰, 767.8m)-분지봉(分枝峰, 620m)

 

산행일 : ‘15. 8. 27()

소재지 : 경남 하동군 하동읍과 악양면, 그리고 적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미서마을능선활공장구재봉신촌재분지봉옥산재서재마을(산행시간: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징 : 경남 하동 땅에는 악양(岳陽)이란 고을이 있다. ‘평사리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고장, 즉 박경리(朴景利, 1926~2008)선생의 대하소설 토지(土地)’의 무대로 세상에 알려진 고을이다. 구재봉은 악양 땅에 자리 잡은 산 중의 하나로서 평사리 들판을 사이에 두고 형제봉과 서로 대칭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지만. 구재봉 정상 어림만 거대한 바위지대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비록 스릴을 느끼는 암벽등반은 아니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릉은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거기다 활공장과 구재봉, 그리고 분지봉에서의 조망(眺望)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나다.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할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미서마을 입구 버스정류장(하동군 압양면 미점리)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하동방면의 19번 국도를 탄다. 국도는 섬진강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지다가 조영남의 노래로 잘 알려진 화개장터를 지나 악양삼거리(악양면 미점리)에 이른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미서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악양삼거리 근처에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지어진 악양루(岳陽樓)라는 누각(樓閣)이 볼만하니 잠깐 짬을 내어 둘러봐도 괜찮을 것이다.

산행은 아래 지도에 표시된 화살표시와 반대방향으로 진행됐다.

 

 

미서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악양은 청동기 시대인 BC 5000년경에 이미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섬진강변의 중요한 목이었던 미점도 이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미점의 3개 단위부락 중 하나가 미서마을이다. 미점은 국가가 형성된 변한 시대인 BC 108년엔 대외 연락의 중요한 지점이었고, 신라 때는 범포(帆浦)로 섬진강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군사상 중요한 요지가 되어 관방(關防)으로도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중요한 역할은 조선후기의 사창(司倉)으로 연결되었다고 보면 된다.

 

 

자그마한 산골마을인 미서마을을 지나 임도(林道)를 따른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는 과수원 사이로 나있다. 그런데 과수원의 나무들이 의외로 감나무이다. 이곳 하동은 매실로 유명한 지역인 줄로만 알았는데 감도 많이 생산되는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3~4분쯤 지나면 과수원 단지가 끝나도 전에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왼편과 직진 어느 곳으로 진행하더라도 20분쯤 후에는 다시 만나게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된다. 하지만 난 지리산둘레길과 연결된다는 왼편을 권하고 싶다. 오른편으로 갈 경우 형제봉과 미서마을의 들녘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남의 고사리경작지 통과해야하는 민폐를 끼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우린 직진코스를 택했다. 임도의 주변은 이제 고사리 밭으로 변해있다. 때문에 조망(眺望)이 트인다. 앞서 말한 형제봉과 미서마을 앞 들녘이 아무 거리낌 없이 성큼 다가온다.

 

 

 

거의 산꼭대기나 다름없는 곳에 세워진 움막이 보인다. 농작물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 지키려는 대상이 산짐승들이기만을 빌어보지만 아쉽게도 그 대상은 인간이었나 보다. 얼마 후에 농작물 채취금지라는 경고판이 철망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고사리 밭을 지나 경계선에 쳐진 철망(鐵網)을 따른다. 그러다가 또 다시 민폐(民弊)를 저지르고 만다. 고사리 밭을 무단 통과한 것만 해도 미안한 일인데 철망을 딛고 넘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까 만났던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것을 권했던 이유이다.

 

 

철망을 넘으면 제법 또렷한 오솔길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미동을 넘어오는 고개, 지리산둘레길상의 임도사거리(이정표 : 미동마을/ 대축마을로)에 내려선다. 아까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갈려나갔던 임도와 다시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8분이 지났다. 참고로 삼화실에서 출발한 지리산둘레길은 신촌재(먹점재)를 넘어 이곳을 지난 다음 대축마을에서 그 소구간(16.4km)이 끝난다. 또 하나, 아까 왼편으로 진행했던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직진코스보다 훨씬 더 편하면서도 거리 또한 가까웠다고 한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산길은 고속도로 수준이다. ‘고속도로는 고속도로인데 경부가 아닌 88고속도로 수준입니다.’라던 강송산악회 회장님의 안내말씀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산길이 넓은데다 엊그제 제초(除草)를 한 것처럼 정비까지 잘되어 있는 것이다. 대신 오르막길의 가파름은 상당히 가파르다. 거기다 그 오름세는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거기다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오를 수밖에 없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지 싶다.

 

 

그래도 나름대로 구경거리는 있다. 활공장에 가까워지면서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구경거리는 남근(男根)’처럼 생긴 바위가 아닐까 싶다. 흡사 용틀임이라도 하려는 듯 거대한 귀두(龜頭)를 바짝 세우고 있는 형상이 남근을 빼다 닮았다. 다른 산들에서 보아오던 남근바위들에 뒤지지 않기에 감히 남근바위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다른 또 하나는 둘로 나누어진 바위이다. 반듯하게 둘로 나누어진 게 누가 일부러라도 잘라 놓은 것 같은 모양새이다. 경주에 가면 김유신장군이 칼로 베었다는 둘로 나누어진 바위가 있다. 단석산이라는 산의 이름을 얻게 한 유명한 바위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바위는 단석산에서 보았던 바위보다 더 절단면이 매끄럽다. ‘단석(斷石)바위이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이곳 구재봉은 고려시대의 유명한 무장(武將)인 정안(鄭晏, ?~1251)장군과 인연이 깊은 산이다. 특히 그의 동생 정희령장군은 그의 백마(白馬)와 화살의 빠르기를 이곳에서 겨루게 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저 바위를 그들 형제 중 누군가가 칼로 베었다고 하면 어떨까? 그 사람이 역사에 까지 나오는 정안장군이라면 더 좋을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 감히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시도해 본다.

 

 

바위들을 구경하면서 오르다보면 금방 활공장(滑空場)이다. 임도를 통과한지 딱 25분 만이다. 곱디고운 잔디가 깔린 활공장에는 젊은이들 몇 명이 케노피(canopy)를 깔아 놓고 있다. 아마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하기에 좋은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 활공장은 하동군에서 2003년에 만든 시설로 이곳에서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 활공을 할 경우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악양 무듬이 들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동군에 있는 두 개의 활공장 중 하나로 형제봉 활공장과 마주보고 있는데, 바람이 부는 방향을 보고 어느 곳에서 활공할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활공장에 오르면 꼭 활공을 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건너편에 있는 형제봉은 물론 섬진강과 넓디 너른 무듬이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활공을 할 때 내려다보인다는 풍경이 이곳 활공장에서 거의 비슷한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거기다 섬진강 건너 백운산과, 저 멀리 보이는 하동의 금오산은 보너스로 쳐도 될 일이다.

 

 

 

이정표(구재봉 1,6Km/ 개치)가 가리키는 능선을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활공장을 지나면서 그 가파른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두어 번에 걸쳐 작은 오르내림을 하더니 15분 남짓 후에는 전위봉에 올려놓는다.

 

 

 

전위봉을 지나면서 잠시 고도(高度)를 낮추던 산길은 이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길가에 매어놓은 로프를 의지해야 할 정도로 그 가파름이 심하다. 하지만 그 거리가 짧아 잠시 후에는 주능선삼거리(이정표 : 구재봉 150m/ 칠성봉 6.2Km/ 활공장 1.6Km, 미동 3.5Km)에 올라서게 된다. 전위봉에서 이곳 삼거리까지는 대략 15분 정도가 걸렸다. 이곳 삼거리에서부터는 삼신지맥(三神枝脈)을 따르게 된다. 삼신지맥은 낙남정맥 상의 지리산 삼신봉(1289m)에서 남쪽으로 분기(分岐)하여 관음봉과 거사봉, 시루봉, 칠성봉, 구재봉, 분지봉 등을 만든 후 하동공설운동장 동남쪽 횡천강(橫川江)을 건너는 대석교() 앞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31.9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거사봉에서 형제봉과 신선봉으로 가는 또 다른 산줄기를 분가(分家)시키니 참조할 일이다.

 

 

주능선을 만나면서 산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온전한 흙산이던 것이 갑자기 거대한 돌들의 축제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지만 구태여 서두를 필요는 없다. 벼랑을 타고 조금만 나가보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약간 위험하기는 해도 멋진 경관을 보려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백 길 단애(斷崖)는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하고, 벼랑 아래의 산하는 그 반대로 아늑하기만 하다. 그 둘의 조합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로 다시 태어난다.

 

 

 

 

정상 부근에는 상사바위, 흔들바위가 있고 방바위, 통시바위 등 기암(奇巖)들이 즐비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위틈의 천년 석굴(石窟)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직도 내 수양이 부족했던지 바위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석굴은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해 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바위구경을 즐기다 발길을 돌리면 금방 구재봉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2시간이 지났다.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1 : 먹점재 2.0Km, 분지봉 2.5Km/ 칠성봉 5.4Km, 회남재 12.4Km, #2 : 문암정 1.0Km/ 휴양관 2.5Km) 외에도 반듯하게 지어진 정자(亭子)와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 잡고 있다. 정상의 앞과 뒤에 두 기의 무덤까지 있는 것을 보면 풍수도 뛰어난 모양이다. 이곳 구재봉도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이 전설의 주요 모티브(motive)백마와 내기를 해서 백마가 졌다고 잘못 알고 백마를 죽인 정희령이다. 고려 시대 정안(鄭晏, ?~1251)장군의 동생으로 명궁(名弓)이었던 정희령장군은 백마(白馬)를 타고 다녔는데 백마가 빠른가, 아니면 화살이 빠른가를 내기 했다가 화살 낙하지점에 도착해도 화살이 보이지 않기에 백마의 목을 쳤는데 그 뒤에 화살이 와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장군의 용마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종류의 설화(說話)는 김덕령장군 말고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설화들은 하나같이 잘못된 판단으로 애마(愛馬)의 목을 쳐버린 명장(名將)들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아니 그런 한계점이 오히려 그들을 인간적인 명장으로 만드는 지도 모른다. 교만하고 경솔한 성격을 가지지 않도록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인정하고, 그리하여 인간적 명장으로 거듭나게 됨으로써 민중들의 지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및 인용)

 

 

정상표지석을 보면 구재봉의 이름이 두 개인 것을 알 수 있다. 정상석의 앞면과 뒷면에 적힌 이름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정상에서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적량면과 악양면 중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형상(形象)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름 또한 달라진다는 것이다. 적량면 쪽에서 볼 때는 산등성이의 바위가 거북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거북 구()자를 쓰고, 악양면에서는 산의 모양이 비둘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비둘기 구()를 쓴다고 한다.

 

 

정상 아래에는 구산(龜山)라는 글자가 음각(陰刻)된 바위가 있다. 전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이곳 구재봉을 구자산(龜子山)의 정상이라 적고 있는데,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발아래에는 섬진강과 평사리의 무딤이 들녘이 펼쳐지고, 눈을 들면 호남정맥은 물론이고, 지리주능선과 낙남정맥 능선상의 모든 것들이 조망된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순간이다.

 

 

정상의 바로 아래에 있는 헬기장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의 뒤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남쪽과 서쪽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섬진강과 백운산 능선은 아까보다 훨씬 더 또렷해졌고, 이번에는 그 강물의 끝자락 광양만()까지도 조망된다.

 

 

 

분지봉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다 다시 완만해지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오르내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 오르막이 작을 뿐이다. 참고로 구재봉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계리(적량면) 방향의 능선으로 내려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도 그쪽 방향으로 잘못 내려섰다가 고생한 일행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산을 내려가다 보면 벌목(伐木)을 마친 개괄지를 만난다. 어린 편백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것이 아마 경제림으로 조성하려는 모양이다. 나무를 베어버린 탓에 조금은 황량한 풍경이지만 그 덕분에 섬진강이 오롯이 나타난다.

 

 

구재봉을 내려선지 40분쯤 지나면 화장실까지 갖춘 고갯마루 신촌재(이정표 : 분지봉 0.5Km/ 구재봉 2.0Km/ 신촌/ 먹점)에 내려서게 된다. ‘지리산둘레길용 이정표에는 신촌재라고 적혀있지만 먹점마을과 신촌마을을 잇는 고갯마루라고 해서 먹점재라고도 불리니 참조할 일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황톳길만 해도 부드러운데, 그 위에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경사까지 완만하다보니 걷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산행을 보고 웰빙(well-being)산행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산길 전체가 완만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발 460m인 신촌재에서 분지봉(620m)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160m의 고도차(高度差)를 극복해야하기 때문에 가파른 구간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길이 고와서 힘든 줄을 모르고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신촌재를 출발한지 25분쯤 지나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지키고 있는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제법 너른 구릉(丘陵) 형태로 이루어진 정상은 둥근 돌기둥을 비스듬하게 쳐낸 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지석이 지키고 있다. 참고로 분지봉은 구재봉에서 나뉘어져 생긴 봉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이곳 분지봉에 못이 있다고 해서 못 지()’자를 써서 분지봉(分池峰)이라고도 불린다니 참조할 일이다. 한편 정상에서 발견된 기와, 축대 등의 흔적들을 들어 아까 지나온 구재봉의 전설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정안장군의 여동생이 이곳에 살았다는 민담(民譚)이 바로 그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론 절터의 흔적이라는 설도 있으니 이 또한 참조할 일이다.

 

 

정상에 오르면 오뚝이처럼 생긴 바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위 아래에 나무기둥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으니 위로 올라가보자. 아래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게 시야(視野)가 열린다. 진행방향의 능선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 끝에는 광양만이 또렷하다. 날씨가 화창할 경우 사천과 남해를 잇는 창선연륙교까지 보인다고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산을 시작한다. 아까 정상 근처에 세워진 이정표(중앙중학교 6.2Km/ 구재봉 2.5Km)가 가리키고 있는 중앙중학교 방향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면의 섬진강 방향으로도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는 것이다. 단축코스로 생각하고 내려서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이다. 실제로 오늘 그쪽으로 내려섰다가 고생을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하산 길은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가끔 오르막길도 나타난다. 그러다가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오른쪽 사면(斜面)이 훤하게 비어있는 봉우리 위에서이다. 산불의 흔적인지 기둥만 남은 죽은 나무들이 비탈에 널려있다. 그 덕분에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섬진강과 그 너머 백운산은 물론 저 멀리 광양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 글에선가 전망대라고 부르는 지점이 있었는데 이곳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흔히 오백리라고 하는 섬진강은 212.3km로 남한에서 아홉 번째로 긴 강이며 이 물줄기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계곡과 산과 들과 마을을 적신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봉황산에서 발원하여 지리산 자락을 끼고 돌고 돌아 숱하게 아름다운 강변을 만들어 내는데 그 중에서도 하동군 화개면의 화개나루가 가장 넓고 깊다고 한다. 섬진강은 여느 강보다 정겹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내가 태어난 곳 또한 섬진강 강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흔들바위를 닮은 바위를 만난 후, 산길은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안전로프까지 매어놓은 것을 보면 그 가파름이 약간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산길 주변은 온통 소나무로 점령하고 있다. 그것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쑥쑥 뻗어 오른 잘 생긴 놈들이다. 아까부터 코끝을 간질여오던 그 무엇인가의 정체는 솔향이었나 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저 향기 속에 그득 담겨있을 이 얼마나 행복한 산행인가. 이런 걸 보고 힐링(healing)산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에 겨워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보면 어느새 옥산재(이정표 : 중앙중학교 4.2Km/ 서재/ 신촌/ 분지봉 2.0Km)에 내려서게 된다. 분지봉에서 40분 정도가 걸렸다. 옥산재는 지금이야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가 훤하게 뚫려있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옥산재는 하동사람들이 넘나들던 중요한 길 중의 하나였다. 적량면 지역의 사람들이 하동읍이나 화개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옥산재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임도는 구절양장(九折羊腸) 모양으로 구불대면서 아래로 향하지만 내려서기 딱 좋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하다. 거기다 심심찮게 시야(視野)까지 터진다. 섬진강과 화심리(하동읍) 들녘은 물론이고 강 건너 백운산 자락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산행날머리는 서재마을

그렇게 눈요기를 즐기면서 15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서재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그러나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는 마을회관에서도 5분 정도를 더 내려간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산악회의 배려이다. 흡사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 앉아있다 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그러나 어쩌랴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쉬운 마음을 접고 밖으로 나오면서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이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