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족산(鼎足山, 748.1m)

 

산행일 : ‘15. 5. 16()

소재지 : 경남 양산시 주남동·하북면,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삼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영산대학 양산캠퍼스임도주남고개용바위정족산노전암천성산공룡능선 갈림길내원사주차장(산행시간: 4시간)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전형적인 육산(肉山)에 정상 부위만 바위로 이루어진 독특한 외형의 산으로 정상부의 바위들이 흡사 솥발처럼 솟아있다 하여 솥발산이라고도 불린다. 700m 대의 결코 낮지 않은 산이지만 들머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긴 탓에 산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거기다 짙은 숲속으로 난 황톳길은 한없이 보드랍다. 한마디로 산행이라기보다는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양산판 둘레길을 걷는 기분이라면 이해가 갈는지 모르겠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정상에서의 뛰어난 조망(眺望)을 들 수 있다. 거기다 하나 더한다면 노전암 앞으로 흐르는 상리천이다. 하얀 암반(巖盤) 위로 흐르는 맑은 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못 빼어나다. 반면에 단점도 있다. 능선의 곳곳에서 임도를 따라야 하는 탓에 따가운 땡볕아래 노출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영산대학교 양산캠퍼스(양산시 주남동 산150)

동해고속도로 문수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이용 양산까지 온다. 양산시내의 상호교차로(交叉路 : 양산시 삼호동)에서 우회전 1028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영산대학교 양산캠퍼스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영산대학교 본관의 뒤편으로 열린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백련사방향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대학의 왼편 끄트머리로 난 등산로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곳으로 오를 경우 천성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능선으로 오른 후에 정족산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 의미도 없는 길을 일부러 길게 돌아서 갈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19973월 단과대학(8개 학과)으로 문을 연 영산대학교(靈山大學校, Youngsan University)는 현재 2개 캠퍼스(양산, 해운대)6개 단과대학(34개 학과)7개 대학원을 거느린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하였다.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풍 탓인지 관광, 보건, 부동산, 조리, 미용 등 주로 전문대학들에서 운영하는 학과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이 특징이다.

 

본관 건물 가운데로 난 통로를 이용해도 임도와 연결된다.

 

 

주남고개까지는 임도로 연결된다. 30분 이상이나 걸리는 먼 길이다. 거기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가 차량의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따랗다 보니 햇빛에 노출될 것이 당연하다. 여름 산행에는 달갑지 않은 코스라는 얘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르막의 경사(傾斜)가 완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루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른 특징이 없는 길을 타박거리며 오르는데 오른편에 둥그런 ()’이 그려진 바위가 하나 보인다. 원불교의 낯익은 표식(表式)이다. 그러면 그렇지 싶다. 어쩐지 영산대학교라는 이름이 낯이 익더라니. 원불교와 인연이 있는 대학이었나 보다. 석가여래가 설법을 마치면서 대중들에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다는 영산(靈山)은 고대 인도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의 북동쪽에 있는 산이다. 당연히 불교에서는 신성시 여길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 4대 민족종교 중에서도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는 원불교(圓佛敎)에서는 교의 창립자인 소태산(少太山=박중빈) 대종사(大宗師)가 태어나고 개교(開敎)를 한 곳을 영산이란 이름을 붙여 근원성지(根源聖地)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원불교와 영산대학교의 연관성을 상상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두 곳의 연관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불러온 착각이었던 것이다. 영산대학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백련사라는 사찰이 원불교 교단이었었나 보다.

 

 

주남고개에는 이정표(노전암 3.9Km, 한듬계곡 4.4Km/ 천성산24.2Km, 영산대 1.6Km, 가사암)천성산 등산안내도외에도 양산 누리길이라는 종합안내도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양산판 둘레길인 모양인데 지도만 보고는 구간이나 접근방법 등을 알 수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고개에 올라서면 왼편 능선으로 길이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남정이라는 정자(亭子)가 있다지만 일부러 가볼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 곧장 정족산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노전암 방향의 임도를 따라야함은 물론이다.

 

 

일단 주남고개에 올라서고 나면 임도의 경사는 현저히 줄어든다. 거기다 그늘까지 져서 시원하기까지 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구간이란 얘기이다. 고갯마루 근처에서 조계암 및 안적암으로 가는 길을 나뉘어보내고, 계속해서 대성암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10분 후에는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이정표 : 정족산 정상 2.4Km/ 대성암 1.9Km/ 주남고개 0.6Km)이 나타난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도 되지만 이왕이면 오솔길로 들어설 것을 추천한다. 이왕에 산에 왔으니 시멘트길 보다는 흙길을 걷는 게 좋을 것이고, 거기다 오르내림의 경사까지 거의 없어서 걷기에 부담까지 없기 때문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능선은 금방이다. 10분이 채 안되어 능선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파른 것도 아니다. 임도 보다 오솔길을 권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능선에 세워진 이정표(정족산 정상 2.1Km/ 주남고개 0.9Km)에 낙동정맥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맞다. 오늘 걷게 될 능선의 대부분은 낙동정맥을 따라 걷게 된다. 참고로 낙동정맥(洛東正脈)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구봉산(九峰山 : 강원도 태백시)에서 분기하여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서 숨을 다하는 약 370의 산줄기를 말하며, 주요 산으로는 백병산과 주왕산, 가지산, 취서산, 금정산 등이 있다.

 

 

 

능선에 올라서서도 산길의 풍경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보드라운 흙길과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골고루 섞여있는 나무들의 조합 또한 변함이 없다. 능선을 따라 3~4분쯤 걸으면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오른편의 전망바위에서는 울산시 방향이 열리고, 잠시 후 내려가는 구간에서는 천성산 방향이 시원스럽다. 허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하(山河)를 둘러싼 짙은 안개가 조망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연록의 능선이 갑자기 변해버린다. 누런 시체들이 능선을 가득 채우고 있다. 능선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산죽(山竹)들이 모조리 죽어있는 것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신우대란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버린 것이 혹시 말세(末世)의 징조일지도 모르겠다는 내 얘기를 듣고 앞서가던 김진수선배께서 산죽의 종류를 바로잡아 주신다. 종류야 어떻든 산죽은 평소에는 꽃을 피우지 않고 죽순으로 번식한다. 그러나 일생에 단 한번 꽃을 피운다. 더 이상 삶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꽃을 피운 뒤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에는 그 씨앗으로 종족을 이어간다. 그런 상황을 일러 천재지변(天災地變) 등의 징후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말세라는 표현이 생각났던 것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대나무의 열매(練實)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원추(鵷鶵=봉황새)라는 새의 유일한 먹이라는 그 귀한 씨앗 때문에 말이다.

 

 

전망봉에서 5분쯤 더 진행하면 대성암분기점(이정표 : 정족산 정상 1.7Km/ 대성암 1.3Km/ 주남고개 1.3Km)에 이른다. 왼편에 능선과 나란히 이어지는 임도가 보인다. 그리고 이 임도는 10분쯤 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대성암 갈림길까지 계속된다. 아까 능선으로 올라서지 않고 곧장 임도를 따랐을 경우 더 편하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다만 보드라운 흙길을 걷는 즐거움과 시원스런 조망을 즐기는 눈의 호사(豪奢)를 포기해야 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대성암 갈림길’(이정표 : 정족산 정상 1.3Km/ 대성암 0.9Km/ 주남고개 1.7Km) 아래에 널따란 공터가 보인다.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니 차량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터의 옆은 벤치에다 정자(亭子)까지 갖춘 반듯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 지자체에서 등산로 정비에 쏟고 있는 노력이 돋보이는 풍경이다.

 

 

공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렇다고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오르막의 길이까지도 짧다. 그저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다. 산길은 7~8분쯤 후에는 또 다시 임도를 만나게 된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정족산 산행을 하다보면 유난히도 임도를 자주 만나게 된다. 아마 산의 곳곳을 임도로 연결시켜 놓은 모양이다.

 

 

임도를 따라 잠시 올라서면 저만큼에서 정족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바위로 이루어진 꼭대기가 제법 수려하다. 그 자태를 즐기면서 다시 7~8분쯤 걸으면 산길은 다시 임도와 헤어지면서 왼편 산자락(이정표 : 정족산 정상 0.3Km)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주변의 풍경은 확연히 달라진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의 형태를 보이던 산길이 바윗길로 변하는 것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천성산 방향의 산들이 나타난다. 짙게 낀 안개 탓에 비록 흐릿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지금은 천성산을 1봉과 2봉으로 합쳐서 부르지만 그 전엔 군부대가 장악한 원효암의 뒷산을 원효산, 그리고 내원사가 자리한 천성산으로 분리해서 불렀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원효산을 한 때는 초성산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그도 못마땅했던지 최근엔 아예 원효산을 천성1, 천성산을 천성2봉으로 부르는 것이다. 원효산의 정상을 점령해버린 군부대가 그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10분쯤 오르면 요상하게 생긴 바위가 2~3m높이로 포개져있는 것이 보인다. ‘용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정족산의 명물이다. 바위는 소문대로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용()을 닮지는 않았다. 꼭 집어 뭐를 닮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가뭄이 들 경우 이곳 용바위에다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산신(山神)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어쩌면 비를 내리게 해주는 영물이 ()’이라는 것에서 모티브(motive)를 타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곳 언양지방의 또 다른 기우소(祈雨所)가 있는 고헌산 기우소의 이름이 용샘인 것과 같이 말이다.

 

당신은 영원한 내꺼, 사진은 비록 내 가랑이 사이이지만 실제는 언제나 내 가슴 속에 오롯이 있나이다.

 

 

용바위에서 기이한 생김새에 매료되어 사진촬영에 열을 올리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거대한 바위벼랑을 왼편으로 우회(迂廻)한 후, 길가에 늘어선 기암괴석(奇巖怪石)들에 눈을 맞추다보면 어느덧 정족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임도를 벗어난 지 2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40분 정도가 지났다.

 

 

 

정상은 거대한 바윗덩이들이 불규칙적으로 곧추선 형상이다. 정상표지석은 정상을 이루는 바위들 중 가장 높은 바위 위에다 세워 놓았다. 당연히 정상은 설자리도 마땅찮을 정도로 비좁다. 혹여 정상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찍으려면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긴 정상이 반석(盤石)으로 이루어졌지 않음에야 이런 곳에서 공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참고로 풍수가들은 정족산을 화산(火山)으로 본다고 한다. 능선이 세 발 달린 밥솥처럼 뻗어나갔다(솥발산=鼎足山)’는 데서 유래된 해석이다. 때문에 암 환자들이 맨발로 정족산을 오르내리면 낫는다는 속설(俗說)도 있다. 몸속에 똘똘 뭉친 암의 기운이 펄펄 끓는 솥에서 녹는다는 것이다.

 

 

정상의 건너편에 또 다른 바위가 보인다. 연록의 숲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위의 상부에다 태극기를 새긴 석판(石板)을 붙여놓았다. 조금만 고생하면 바위 위로 오를 수도 있으니 태극기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괜찮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 하늘과 땅이 열릴 때 물난리가 났는데, 정족산 정상 또한 모두 물에 잠겨버리고 솥발(鼎足)만 남아 물에 찰랑거렸다고 한다. 그 꼭대기의 높이만큼이나 바라보이는 세상 또한 넓다. 사방 어디를 봐도 거칠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변에 짙게 낀 안개 때문에 그저 그게 그거려니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놓여 있는 산들의 위치를 나열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국제신문의 산행기에서 옮겨왔으니 참조하길 바란다. 서쪽으로는 영남알프스의 주능선이, 북쪽 멀리로는 경주의 남산 금오산 울산 치술령, 그 오른쪽 앞으로 문수산과 남암산이 보이고 더 오른쪽 멀리로는 울산시가지와 동해 바다까지 눈에 든다. 동쪽으로는 대운산과 시명산 불광산 능선이 남쪽으로 내달리고 더 아래로는 함박산과 달음산, 해운대 장산까지 들어온다.

 

 

하산길은 철쭉 군락지 사이로 나 있다. 그렇게나 화사했던 꽃들은 져버린 지 이미 오래, 그저 늦부지런을 떠는 꽃들 몇 개가 이미 시들어버린 꽃들의 잔해(殘骸) 속에서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좋다. 볼품없는 꽃이라고 해서 꽃이 아닐 리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꽃들은 어김없이 아름다울 테고 말이다.

 

 

철쭉꽃밭을 지나면 또 다시 임도가 반긴다. 임도를 따라 15분쯤 걷다가 이번에는 왼쪽 산자락(이정표 : 동부마을 5.9Km/ 삼덕공원묘지 0.5Km/ 정족산 0.9Km)으로 들어선다. 또 다시 시원한 숲길이 이어진다. 날씨가 더워지는 만큼 따가운 햇볕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날씨, 이런 때에 딱 좋은 산길이다.

 

 

 

산자락에 들어서도 큰 오르내림이 없는 산길이 이어진다. 가는 길에는 또 하나의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천성산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넓게 열리지만 아쉽게도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짙게 낀 안개가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걸으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있는 662m봉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7분 정도 걸은 지점이다. 낙동정맥은 이 봉우리에서 서북진하며 지경고개로 내려섰다가 영취산 신불산으로 이어지며 북상한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북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영축산이나 신불산이 보여야하지만 아쉽게도 안개에 둘러싸인 산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662m봉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첫 번째 헬기장이 나오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기괴하게 생긴 바위를 하나 만나게 된다. 언제가 어린이용 애니메이션(animation)에서 보았던 괴물의 얼굴이 떠오르는 형상이다. 그리고 근처에서 또 다시 조망이 트인다. 이번에는 천성산방향이 열리면서 조금 후에 내려가게 될 북대골이 눈에 들어온다.

 

 

 

기암(奇巖)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오른편 숲속에 작은 연못이 하나 보인다. 길은 나있지 않지만 냉큼 들어서서 카메라의 셔터부터 누르고 본다. 혹시 습지(濕地)’가 아닐까 해서이다. 그만큼 이곳 정족산은 습지와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생태계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무제치 늪으로 정족산의 어깨부분에 있다. 6000년 전에 생성된 무제치늪은 과학적 검증을 거친 국내의 늪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져 한반도 남부지역의 자연생태계 변천과정과 습지 동식물의 서식변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연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내 추측이 틀렸음은 채 차 한잔 마시기도 전에 알아차리게 된다. 그 연못은 천연습지가 아니라 근처 공원묘지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저수지였던 것이다.

 

 

두 번째 헬기장을 지난 후, 한적한 숲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오른편에 임도가 보인다. 662m봉에서 20분 조금 더 되는 지점이다. 이 임도를 스쳐지나가자마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는 길, 노전암으로 하산코스를 잡았다면 왼편의 북대골짜기로 내려서야함은 물론이다. 갈림길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북대골, 골짜기 상류는 물기 한 점 없는 건천(乾川)이다. 물 대신에 크고 작은 수많은 바위들이 흡사 물결처럼 아래로 흘러가는데, 산길은 그 너덜을 피해 골짜기 옆으로 나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법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고 가기에 충분한 양이다.

 

 

 

 

북대골은 그다지 넓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골짜기 주변을 돌로 축대(築臺)를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수많은 작은 밭들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 화전민(火田民)들이 살았던 흔적인 모양이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자투리땅일망정 허투루 내버려두지 않았던 우리내 조상들의 지난(至難)했던 삶에 가슴 한편이 저려오는 순간이다.

 

 

물소리 그득한 개울을 서너 번 건너다보면 저만큼에 노전암(露田庵)이 나타난다. 임도 옆 갈림길에서 40분 정도 되는 지점이다. 노전암은 비좁은 절터를 조금이라도 더 넓혀보려 했던 스님들의 고심(苦心)이 역력하게 나타나는 모양새이다. 개울 쪽에다 길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절터를 조성해 놓았다. 노전암을 보았다고 해서 곧장 경내(境內)로 들어갈 수는 없다. 절의 입구 쪽에 있는 예쁘장하게 생긴 나무다리(이정표 : 한듬계곡 2.0Km, 성불암 2.0Km/ 주남리 5.1Km)를 건넌 후, 다시 거슬러 올라와야만 절간 안으로 들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노전암 경내에 들게 된다. 돌탑과 석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전암엔 주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은 보이지 않는다. 돌탑 주변에 조성된 제법 너른 공터의 뒤에 외로운 듯 산신각(山神閣)만이 서있을 따름이다. 그리고는 공터의 왼편에 제법 규모가 있는 요사(寮舍)가 보인다. 대웅전을 찾아 서성이는데 절에서 키우는 개들이 사납게 짖어댄다. 이를 본 스님(아니 보살님인지도 모르겠다)이 새로 지으려고 준비 중이라고 알려주신다. 그러고 보니 요사 앞에 도란도란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스님들이 모두 여자들이다. 비구니(比丘尼)들이 수도하는 사찰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문이 자자한 점심공양이 가능할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경남유형문화재 제202호인 노전암(露田庵)은 내원사(內院寺:경남기념물 81)의 암자 중 하나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가 없고, 그저 조선 순조 때 태희선사가 중건했다는 것 정도만 전해지는 자그만 산중 사찰이다. 그러나 원효(元曉)대사가 내원사를 창건했고, 원적산에 데리고 온 1,000명의 제자를 가르치자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이 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점, 또한 도를 닦을 시기에 산중에 89개의 암자(庵子)를 지었다고 전하는 바로 미루어보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수통에 물을 채운 후에 일주문을 빠져나온다. 이제부터는 널따란 임도(도로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를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왼편은 옥수가 흐르는 상리천, 그러나 물가로 내려갈 수는 없다. 인근 주민들의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에는 계곡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전암에서 15분 정도 내려오면 천성산공룡능선 갈림길’(이정표 : 성불암방향, 짚북재 2.7Km/ 공룡능선 짚북재 2.9Km/ 노전암방향 짚북재 4.7Km)에 이르게 된다.

 

 

공룡능선 갈림길 근처부터는 물놀이하기 딱 좋은 장소의 연속이다. 하얀 암반(巖盤) 위로 흐르는 물은 하도 맑아서 그냥 마셔도 될 정도이다. 거기다 주변 경관까지 뛰어나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쉬었다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산행 중에 흘렸던 땀도 씻을 겸해서 말이다. 마침 주민들이 묶어 놓았던 상수도보호구역도 어느새 부턴가 풀려있다.

 

 

산행날머리는 내원사매표소

내려오는 계곡은 제법 길다.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다. 계곡주변의 경관이 뛰어난데다가 물놀이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계곡 반대편에 놓인 데크길이 계곡을 따라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몇 년 전에 천성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걸었던 길이다. 공룡능선 갈림길에서 대략 15분 정도 걸으면 내원사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중간에 성불암 갈림길’(이정표 : 천성산24.4Km)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거나 땀을 씻으며 20분 이상을 쉬었으니 4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