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8구간(선비 길)
여행일 : ‘22. 11. 19(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옥천읍 일원
여행코스 : 추소리 느티나무(절골)→환평재→생약자원관리센터→환평리 갈림길→이지당→서화천 생태습지→보오마을→옥천폐기물처리장→이평마을→석결마을→돌거리고개(거리/시간 : 13㎞/ 실제는 14.42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여덟 번째 구간인 ‘선비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상류인 서화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많은 곳에서 인도가 따로 없는 포장도로를 걸어야한다는 단점도 있다.
▼ 들머리는 ‘추소리 느티나무’(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군북면소재지(옥천군)까지 온다. 초입의 삼거리에서 소재지인 이백리로 들어오지 말고 ‘환산로’로 갈아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추소리(절골)에 이르게 된다. 고갯마루에 걸터앉은 ‘둥그나무’가 8구간의 들머리이다. 나무 아래엔 여지없이 돌탑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한가득 담긴 ‘서낭당’이다.
▼ 대청호, 아니 상류인 서화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특히 초반부인 추소리 ‘부소담악’과 중반부 지오리에서 만나는 호안절벽은 대청호 제일의 절경으로 꼽는데 모자람이 없다. 거기다 ‘이지당’이라는 보물까지 가슴에 담았으니 이 아니 멋진가. 하지만 이 구간도 도로(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하는 단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백리길 표식(이정표·팻말·리본 등)이 거의 없다는 점도 6·7구간과 같았다. 걷는 내내 지자체의 무관심에 대해 불평했던 이유이다.
▼ ‘둥그나무’ 아래서 길을 나선다. 초입의 ‘동학정(동학혁명과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빗돌을 지나자, 돌장승이 마을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다. 하지만 환영한다는 듯 선한 표정으로 길손을 맞는다.
▼ 잠시 후 ‘부소담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뉜다. 400m 거리의 ‘추소정’까지 데크 탐방로가 놓여있다.
▼ 추소리 쪽 황톳길로 들어서자 대청호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소담악(芙沼潭岳)’의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예로부터 ‘숨은 병풍’이라 불리었고, 이름 그대로 금강변을 따라 기암이 병풍처럼 펼쳐진 ‘부소무니’의 선경이다.
▼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대청호는 진짜배기 명경이다. 물빛은 거울처럼 맑아 데칼코마니처럼 숲과 산을 비추고, 말갈기를 쏙 빼다 닮은 모래언덕은 하얀 억새꽃으로 한껏 멋을 부린 채 호수를 향해 내닫는다.
▼ 탐방로는 ‘추소리 마을광장(실은 주차장이다)’에서 대청호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추소리(楸沼)’로 들어간다. 추소리는 자연마을 몇 개를 합쳐 새로운 마을을 만들면서 추동(楸洞)과 부소(扶沼)에서 한자씩 취한 지명이라고 한다. 부소는 ‘부수머리(또는 부소머리)’의 옛말을 한자화 한 것인데, 마을 앞 바위지대로 서화천이 뱀같이 굽이치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물이 고여 못(沼)을 이룬다는 뜻을 지녔단다.
▼ 겨울 호반은 한산했다. 대청호 물살을 힘차게 가르던 보트들은 배를 허옇게 드러낸 채 따뜻한 봄날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고 상상의 나래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작은 배 하나 띄워놓고 우암 송시열이 느꼈을 풍류를 맛본다.
▼ 주차장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추소리 고샅길을 지나 환산의 산허리를 에돌아가는 ‘환산로(2차선 도로)’로 연결된다.
▼ 추소경로당 맞은편에는 이 마을 출신 소설가 유승규(1921-1993)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고향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채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 사회의 질곡을 글로 풀어냈다면서, 이무영과 함께 농민문학의 꽃을 피운 소설가로 소개하고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오르막길이 끝나면서 ‘환평로’로 올라섰다. 군내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다. 탐방로는 왼편(옥천방면)으로 방향을 트는데,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는 변함없이 벚나무다. 대전에서 시작된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 버스정류장(추소리) 옆에는 ‘추소마을’이 문화유씨 세거지(世居地)임을 알리는 빗돌과 함께 ‘향혼비’를 세워놓았다. 추소팔경으로까지 꼽혔던 빼어난 경관들이 대청호 속으로 잠긴데 대한 아쉬움을 담았으리라. 그런데 ‘소소소금강(笑沼小金剛)’이란 저 시비의 정체는 대체 뭘까? ‘布德 150년 입추’라는 글귀로 보아 어느 천도교도가 지은 모양인데...
▼ 환산 등산로의 들머리(담장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다)가 되어주는 ‘좋은 기도동산’은 ‘Paul&Daniel Christian School’을 겸하는 모양이다. 기독교 교육중심의 대안학교라고 한다.
▼ 5분 남짓 걸어 ‘환평재’에 닿았다. 오백리길은 계속해서 도로(환산길)를 따른다. 하지만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는 왼편으로 난 임도를 가리킨다. 핸드폰에 다운받아 놓은 트랙도 같은 방향을 지시한다. 선두대장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 이정표는 이 길을 ‘달빛산책로’로 표시하고 있었다.
▼ 잠시 후 올라선 능선에선 ‘환산’을 조망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환산(옛 이름은 고리산)은 군사요충지였다. 백제의 왕자 여장이 쌓았다는 고리산성의 성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 ‘달빛산책로’로의 진입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낭만적인 이름(달빛산책로)과는 달리 길이 무척 험했기 때문이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이 길을 가로막는 데다, 가파른 내리막 구간에는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이 쌓였다. 덕분에 난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고 말았다.
▼ 악전고투를 치루고 난 뒤에야 ‘환평리’ 들녘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논두렁밭두렁을 뒤뚱뒤뚱 걷는다. 양팔을 춤추듯이 휘저으며 가는 앞사람을 바라보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평균대만큼이나 비좁으니 중심 잡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 ‘서화천’으로 이어지는 ‘강변산책로’를 만나기도 했다. 소슬바람에 춤추고 있는 억새가 예뻤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이지당을 지나면서부터는 내내 서화천과 함께 하게 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서화천을 벗어난 오백리길은 이제 ‘환평마을’로 향한다. 뒷산인 고리산의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고리산엔 배를 매는 큰 고리가 있는데 과거 큰 비가 내려 여기에 배를 자주 묶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가 올 때마다 고리에 가장 가까운 ‘고무실(나중에 고리실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환평마을이 되었다)’을 찾았단다.
▼ 환평리 들녘을 걷다가 언덕으로 올라서자 신식 건물이 하나 나온다(오는 도중 환평리로 올라가는 길과 헤어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운영하는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다. 황기며 울금이며 맥문동이며 다양한 약초들이 재배되고 있단다.
▼ 오백리길 옥천구간은 길 찾기가 힘들다는 게 특징이다. 마을길·들길·산길을 걸으며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지만, 그중 이정표가 세워진 곳은 5%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흔한 리본까지도 매달려 있지 않으니 어찌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둘로도 모자라 세 갈래(직진이 올바른 방향)로 나뉘는 ‘생약자원관리센터’도 오백리길 표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GPX 트랙을 미리 받아놓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 옥천만 해도 따뜻한 남쪽 나라인가 보다. 들녘의 김장용 무·배추가 아직도 푸른 걸 보면 말이다. 무서리에 시들기라도 할까봐 김장을 마쳐버린 홍천의 내 농장과는 딴 세상이다.
▼ 생약자원관리센터에서 12분(트레킹을 시작한지 55분). 오백리길은 다시 ‘환산로’로 올라선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실감한 지점이기도 하다. 다운 받아놓은 GPX 트랙이 벼랑에 가까운 반대편 산비탈로 내려가라 했기 때문이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 큰 부상을 입을 텐데도 말이다. 파일을 만든 이는 초능력자였을지도 모르겠다.
▼ 트랙을 무시한 채 환산로를 따라 걸었다. ‘안전’, 둘레길 여행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 5분쯤 더 걸어 만난 ‘환평리 갈림길’, 모처럼 나타난 이정표(이지당 1㎞/ 부소담악 4㎞)가 반갑기 이를 데 없다.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백리길이 360도에 가깝게 방향을 틀면서 도로와 헤어지기 때문이다.
▼ 잠시 후 아까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던 지점의 아래를 지나간다.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왔더라면 1분이면 닿을 거리다.
▼ ‘못 간다고 전해라’로 대변되는 이애란의 ‘백세인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 문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쓰레기에 얼마나 몸살을 앓았으면 저런 현수막까지 내걸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한번쯤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드넓은 인삼포(人蔘圃)가 눈길을 끄는 이 구간도 갈림길을 여럿 만난다. 그러니 좌회전·우회전 등의 진행 방향을 거론하는 건 무의미하다. 나처럼 GPX 트랙을 미리 다운받아 놓지 않은 사람들은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환평리 갈림길’에서 15분(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5분), 서화천(옥천에서는 ‘소옥천’이라 부르기도 한단다)에 내려서니 ‘이지당(二止堂, 보물 제2107호)’이 얼굴을 내민다. 조선시대 중엽 인근 옥각리에 살던 김(金)·이(李)·조(趙)·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이후 퇴락된 것을 1901년 이 서당을 세웠던 4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 서화천을 바라보며 석축기단 위에 지어진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일렬로 서있어서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본채 1동, 누각건물 1동으로 돼있다. 위로 오르는 사다리도 놓여있는데, 중층의 누를 덧붙여 지은 이런 형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한다.
▼ 마루에는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각신동’이라는 마을 앞의 서당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 1544-1592)이 직접 썼다고 한다. 호인 중봉(重峯)으로 더 알려진 그는 임진왜란 때 1,7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했다.
▼ 먼저 도착해 있던 집사람이 반가워 카메라부터 들이댔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지당(二止堂)’의 현판을 배경 삼았다. 이지당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시전(詩傳)의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의 문구에서 끝의 두 ‘지(止)’자를 따 새로운 이름으로 삼았다.
▼ 이지당으로 들어가는 초입은 멋진 바위가 줄을 잇는다. 그 바위에 ‘이지당 중봉선생유상지소(二止堂 重峯先生遊賞之所)’라 새겨져 있었다. ‘우재선생서(尤齊先生書)’라는 글씨도 보이는데, 우재는 송시열의 또 다른 호라고 한다. 우암이 ‘이지당(二止堂)’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남긴 글씨란다.
▼ 서화천 위로 놓인 다리(이지당교)를 건너 트레킹을 이어간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옥천자전거길’ 안내판은 이후부터 자전거와 공존해야 함을 알려준다.
▼ 다리를 건너 도로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천변도로를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반대편은 4번 국도로 연결된다). 언제부턴가 도로명이 ‘옥각로’로 바뀌어 있다.
▼ 맞은편 도로에서 바라본 ‘이지당’. 바위 반 흙 반의 벼랑을 여덟 폭 병풍삼은 이지당은 서화천을 앞마당 삼았다. 개울에서 흐르는 물소리, 잎사귀를 때리는 빗소리로 심신을 안정시키며 공부하기에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공부에 몰두하다가 머리라도 지끈해지면 마루로 나와 그 소리들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 반대편에는 ‘서화천’의 생태하천 복원공사(각신지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2만평쯤 되는 하천부지에 인공습지를 조성하는 중이란다.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려는지 탐방로와 정자, 벤치 등도 함께 만들고 있었다.
▼ 이지당에서 10분. 오백리길은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는다. 하지만 나는 GPX 트랙이 지시하는 대로 둑길로 내려섰다. 그리고 꼭꼭 숨어있던 비경을 만났다. 산태극수태극이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지는데,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바위절벽을 끼고 도는 감입곡류(嵌入曲流)는 언제 봐도 신비롭다.
▼ 눈의 호사를 누리며 10분쯤 걷자 ‘서화천 생태습지’에 닿는다. 4만7천 평(습지만도 1만 평이 넘는단다)이나 되는 ‘지오리’ 일대 하천부지에 수질정화를 위한 습지를 조성해놓았다.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된 처리수를 다시 정화하고, 빗물과 함께 유입되는 비점 오염물질을 정화해 ‘소옥천(서하천의 하류)’으로 방류하는 시스템이란다. 소옥천의 물은 침강지와 깊은 습지, 얕은 습지, 생태침강지 등을 거치면서 식재된 식물의 수질정화를 통해 깨끗한 물로 다시 태어나 하천으로 되돌아간다.
▼ 생태습지는 관광지 냄새를 물씬 풍긴다. 호수를 연상시키는 연못들 사이사이를 누비는 탐방로는 물론이고, 조망 데크에 분수까지 갖췄다. 휴게시설과 체험장도 있단다. 거기다 노랑꽃창포와 부들·노랑어리연꽃·갈대·수련 등 수질정화 기능이 뛰어난 수변 및 수생식물까지 심었다니 어련하겠는가.
▼ 범위가 하도 넓은 탓에 생태습지를 한눈에 담을 수는 없다. 그래도 꼭 담고 싶다면 남쪽 끄트머리(용목마을 앞)에 있는 ‘조류 관찰대’를 추천한다. 길게 놓인 계단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의외로 크기 때문이다.
▼ 데크 계단을 오르면 팔각정을 만난다. 정자 앞 난간에는 조류 관찰용 망원경이 마련되어 있다. 습지를 찾아오는 철새들이 놀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관광지에 가까운 습지에서 노니는 철새들이라면, 사람 몇 지나간다고 해서 놀랄 일도 없을 것이다.
▼ 때를 잘못 맞춘 탓인지 철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드넓은 생태습지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저 습지는 수질개선이라는 본연의 임무 외에도 인근 주민들에게 소득까지 늘려준단다. 임금을 주고 제초작업 등을 부탁한다니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지오2길’을 따라 ‘보오마을’로 간다. 왼쪽 옆구리에 서화천을 매달고 가는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참! 이 구간은 상습 침수지역이기도 하다. 대청호의 수위가 올라가면 자동으로 물에 잠기게 된단다. 그래선지 초입에 차단기를 설치하고, 침수가 될 경우 도로를 막겠다는 ‘통행금지’ 팻말을 붙여놓았다.
▼ 습지에서 정화된 물이 내려가는 길목은 강태공의 차지였다. 아니 이 부근의 서화천변은 온통 강태공들이 타고 온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청호의 수위가 오르면 몰려드는 물고기 떼를 따라 낚시꾼들이 떼를 지어 모여든다나? 그러다보니 쓰레기 관련 민원도 함께 늘어났고, 2021년부터는 낚시를 금지하고 있다던데...
▼ 냇물을 걸상 삼은 저 ‘옥천천 수질측정소’는 대청호의 수질오염 방지를 위한 시설이란다. 서화천의 수질을 상시적으로 측정·감시해오고 있다나? 아무튼 오백리길은 저 측정소를 마지막으로 대청호(서화천)와 헤어져 내륙으로 파고든다.
▼ 조류관찰대에서 15분, ‘보오마을(’보골‘ 또는 ’복골‘로도 불린다)’에 이른다. 조그마한 산촌이지만 첫인상이 무척 좋아 보이는 마을이다. 마을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터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꽃밭을 만들어놓은 덕분이다. 경로당 앞에 정자를 지어 나그네들에게 쉼터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 골목길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는가 하면. 돌 축대사이사이도 꽃을 심어 풍치를 더했다. 하지만 이 마을은 장마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육지 속의 섬이 되어버리는 오지마을이기도 하다. 대청호가 만수위가 되면 마을 진입로가 물에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시내버스도 함께 끊겨 버림은 물론이다.
▼ 고샅길을 올라가니 비석에 시 한 편을 새겨놓았다. 류재길 씨의 ‘대청호야 돌려다오’라는 시로 대청호가 삼켜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과 마을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다. <봄이 오면 냇물 따라 천렵하는 노래소리, 어두우면 아낙네들 땀 내리는 첨벙소리>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는가.
▼ 고샅길을 지나 마을 뒤로 나간다. 오백리길은 이제 ‘이평1길(2차선 도로)’이 지나가는 산등성이(아래 사진의 둑처럼 보이는 부분)를 향해 나아간다.
▼ 잠시 후 만나는 ‘소류지(沼溜地)’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도 오백리길의 표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류지를 오른편에 끼고 직진하면 된다. 길이 훤하게 뚫려있는 왼쪽(아스팔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다)에 홀리지 말 일이다.
▼ 조금 전 거론했던 산자락에 이르자 길을 ‘갈 지(之)’자를 쓰면서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금방이면 끝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아니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오르막길이라는 것까지 깜빡 잊어버릴 것이다.
▼ 집사람의 부지런한 손길은 오늘도 멈출 줄 모른다. 서방님께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그녀의 눈에 나물이 들어왔으니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달래장’으로 변한 저 달래는 내일 아침 곱창김과 함께 밥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아까 이지당에서 나를 기다리며 캤다는 냉이는 국으로 끓여져 있을 것이고.
▼ ‘이평리’로 연결되는 차도(이평1길)로 올라섰다. 보오마을에서 이곳까지는 0.75km, 하지만 나물을 캐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느라 20분이나 걸렸다. 참!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정표(이평리 2.5㎞/ 이지당 4㎞)가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그러나 이름표(보골 갈림길)가 무색하게도 ‘보골’로 내려가는 방향표시는 매달려있지 않았다. 이후부터 오백리길은 차도를 따른다. 2차선 도로이지만 차량통행이 거의 없어 오가는 차량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 길이 편하면 눈이 바빠지는 법이다. 그러다가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만추의 풍경을 만났다. 골짜기에 숨은 듯 들어앉은 ‘보오마을’이 붉은 옷으로 단장한 낙엽송 산자락과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이 일대는 토종식물이자 멸종위기식물인 ‘병아리풀’의 자생지란다. 한해살이인데다 8-9월에 꽃을 피운다니 꽃구경은커녕 풀 구경도 이미 물 건너간 셈. 관상용으로도 재배한다니 누구네 화단에서나 만날 볼 기회가 주어질라나?
▼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힘겹게 고갯마루로 올라선 길은 다시 아래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은 눈요깃거리가 된다. 지형지물을 살려가며 길은 냈는지 도로가 만들어내는 곡선미가 제법 아름답다.
▼ 깊은 계곡에는 대규모 ‘폐기물종합처리장’이 들어섰다. 쓰레기 매립지와 소각시설로 이루어졌다는데, 저 ‘소각시설’이 낭비로 여겨지는 이유는 대체 뭘까? 쓰레기 소각으로 열을 얻어내는 시설을 오랫동안 봐왔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열 공급을 무료로 받았음은 물론이고, 아파트관리비도 소각장에서 내주었었는데...
▼ 한가로운 도로를 여유롭게 걷기를 30분. 7구간 때 만났던 ‘이평리(梨坪里)’와 같은 이름의 동네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니 ‘같은 듯 같지 않은’ 마을이다.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마을이 졸지에 둘로 나뉘어버렸고, 이젠 대청호를 사이에 두고 목메어 바라보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 이평리 앞에서 다시 ‘서화천’을 만났다. 그런데 이게 몸집을 확 불린 것이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서화천이 금강에 합류되는 지점에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금강이 흘러가는 길목에 댐을 만들면서 대청호가 생긴 것이고...
▼ 또 다른 호숫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변에 걸린 현수막은 ‘반딧불이 서식처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맞다. 올 봄엔가 홍수터라는 대청호반에 생물서식처인 둠벙과 생태습지 등을 조성 수변식생을 복원하겠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었다. 이평리 일대는 반딧불이 3종을 비롯한 멸종위기 야생생물과 청정지표종·희귀종이 서식하고 있단다. 하지만 생태계 교란종이 확산되면서 개체수가 확 줄어들었단다.
▼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개체수를 늘려가고 있는 생태계 교란종을 제거하고, 생태복원 깃대종(늦반딧불이, 꼬리명주나비 등)의 서식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공사이다. 반딧불이를 테마로 한 생태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 오백리길은 막바지를 향해 내닫는다. 하지만 그 끝을 쉽게 내주고 싶지 않은 듯, 높이가 130m쯤 되는 고갯마루를 넘어가란다. 체력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 이평마을에서 15분, 고개를 넘자 이번에는 ‘석결(石結)’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뭐 볼게 있어 그 먼 길을 왔냐는 할머니들의 자가용은 신식이었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던 분들이 언제부턴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 편의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췄으니 모터가 없는 수동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내리막길에서는 브레이크를 잡고, 걷다가 지치면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 그만이다. 마실 것? 의자 아래에 짐칸을 배치했으니 ‘걱정아 물러가라’이다.
▼ 석결마을에서 더 넓어진 대청호를 만났다. 서화천을 따라오던 오백길이 어느덧 금강 본류에 이르렀다는 증거일 것이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난 모퉁이에는 작은 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정자에는 오백리길 표지판을 붙여놓았다.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지쳤을 나그네들에게 다리품이라도 풀고 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게으른 지자체는 만들지만 알았지 정비하는 건 잊었나보다. 선비길(8구간)의 명물로 꼽히는 장승이 온전치를 못한 걸 보면 말이다. ‘대청호 보전하세’를 여읜 ‘금강인 어절씨구’만이 외롭게 서있다.
▼ 날머리인 ‘돌거리고개’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고갯마루로 올라가지는 못했다. 날머리를 200m쯤 앞둔 지점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대청댐광장(실은 부유쓰레기 적치장이다)’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거리고개에는 주차할만한 장소가 없다나?
▼ 날머리는 ‘돌거리고개’(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때문에 돌거리고개까지는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석호길(진걸마을에서 옥천으로 나가는 도로)과 우리가 걸어온 ‘석호1길’이 만나는 삼거리가 8구간의 종점이다. 아무튼 오늘은 14.42km를 3시간 50분에 걸었다. 나물을 뜯는 집사람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조금 더디게 걸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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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산(藥泉山, 210.8m)-월방산(月芳山, 360.1m)
산 행 일 : ‘22. 11. 5(토)
소 재 지 : 경북 문경시 산양면 및 호계면 일원
산행코스 : 봉정1리 입구→봉정1리(굴골)→월방산→봉천사→3층석탑→약천산→산양농공단지(소요시간 : 7.58km을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백두대간에서 갈려나온 ’운달지맥‘에 놓여있는 산들로 전형적인 흙산이다. 해발이 400m에도 못 미치니 높지도 않다. 하지만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200년 이상 묵은 노송 백여 그루와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이게 봉천사의 주지스님에 의해 스토리텔링으로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고인돌 같은 선사시대 유적을 비롯해 삼국시대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산신각, 최근 복원된 삼층석탑, 마애미륵불·약사여래상·마애관음상 등 역사적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번쯤은 다녀올만한 산으로 꼽고 싶다.
▼ 산행들머리는 봉정1리 입구(경북 문경시 산양면 봉정리)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IC에서 내려와 문경시가지를 관통(3번 국도의 대조교차로에서 34번 국도의 반곡IC교까지)한 다음 34번 국도로 진정삼거리(산양면 진정리)까지 온다. 좌회전하여 923번 지방도로 바꾸면 잠시 후 ‘봉정1리’ 입구(봉정1리 버스정류장은 200m쯤 더 가야 나온다)에 이른다. ‘봉정1리(굴골)’ 주민들이 표지석을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이 작아선지 단조로운 편이다. 지맥 종주꾼들을 제외하면 너나없이 ‘봉정1리’ 마을회관을 들머리로 삼는다. 오른편이나 왼편 중 어느 방향으로 시작하는가만 다를 뿐 월방산과 봉천사, 약천산을 둘러본 다음 마을회관으로 되돌아오는 원점산행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문경 시내에 있는 돈달산(273m)과 연계하기 위해 약천산에서 곧바로 산양농공단지로 내려갔다.
▼ 왼쪽으로 난 농로(굴골길)를 따라가며 산행이 시작된다. 불승종 소속의 경선암에서 내건 입간판의 방향표시를 참조하면 되겠다.
▼ 길은 확포장공사가 한창이다. 지나갈 때마다 동작을 멈춰주는 포크레인 기사께 감사 인사를 보내며 뛰다시피 지나쳤다.
▼ 13분 만에 도착한 ‘굴골(봉정1리)’. 신라시대 정치가 고운 최치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에 마을 유래비와 함께 고운선생의 시비(詩碑)를 세워놓았다. 가야산 홍류동폭포 옆에 새겨진 글이라는데, 자신들의 조상인 점을 내세워 빗돌로 만든 모양이다. 시의 내용은 이랬다. <바위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말소리는 지척이라도 분간이 어렵구나/ 세속의 시비소리 행여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을 둘러치게 하였구나.>
▼ 마을회관 앞에는 수령이 29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보호수) 한 그루가 서있었다. 오래 묵어 영험까지 띠었는지 나무 아래 제단까지 만들어놓았다.
▼ 탐방로는 마을을 가로지른다. 반듯하게 지어진 주택들이 많을 걸 보면 굴골이 부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그런 부티는 금방 드러났다. 남새밭에 일 나온 아주머니께 채소가 참 튼실하다고 말을 건넸더니 팔뚝만한 무 하나를 덥석 내미는 게 아닌가. 산행을 하다가 목이 마를 때 베어 먹으면 그만이라면서... 넉넉함이 불러다 준 인심 아니겠는가.
▼ 봉정1리(‘탑동’이라는 자연부락일 게다)로 넘어가는 언덕배기로 오르면 곧바로 산길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왼쪽 방향의 산속으로 들어간다.
▼ 자그마한 고개를 넘자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하지만 경사진 산비탈에는 길이 나있지 않다. 제대로 가고 있는 지가 의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두대장을 믿고 따를 수밖에...
▼ 능선에 오르니 길이 제법 또렷해진다. 그렇다고 수월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길만 확실해졌을 뿐 사나운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향기 가득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면 길이 나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산행 길라잡이의 대세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앱이 만능이 될 수야 없는 노릇. 산꾼들의 눈은 아직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쫓아간다. 최신 기술에 고전적인 경험을 장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 잠시 후 ‘봉천 제1경’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봉천산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처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안내판의 지시대로 나가니 밧줄난간이 둘러쳐진 전망대가 나왔다. 그리고 ‘봉천 제1경’에 걸맞는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지점인데도 산양용궁벌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것이다. 들녘을 감싸는 문경·예천의 산들은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에 주어지는 ‘보너스’이리라.
▼ 저 들녘은 고구려의 유명한 장수왕이 다녀갔고, 여자문제로 복잡한 백제 개로왕도 다녀갔다고 한다. 견훤과 왕건의 운명을 건 싸움도 저곳에서 벌어졌단다. 승리한 왕건의 군사는 몰라도, 참패한 견훤의 군사들이라면 이곳 월방산의 산속으로 숨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 전망대를 빠져나오는데 ‘할매미소’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봉천사 주지인 ‘지정스님’이 월방산을 ‘너럭바위공원’으로 꾸미면서, 주변에 널려있다시피 한 소나무·너럭바위·산신각·석실무덤·소(沼) 등에 저런 이름표들을 붙여오고 있단다. 그나저나 바위는 추억속의 할머니처럼 따뜻한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 이밖에도 다수의 안내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말벌바위·낙엽아래두꺼비·두꺼비37바위·고래바위 등 이름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름표에 어울리는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바위의 숫자가 하도 많다보니 지정스님의 상상력에 한계가 왔던 것일까? 아니 내가 부처를 못 따라간 중생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 길은 계속해서 오름질이다. 가파른 경사도 꺾일 줄 모른다.
▼ 얼마쯤 올랐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월방산 정상은 왼편이다. 하지만 월방산의 또 다른 명물인 ‘산신각’을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망설임 없이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 길은 산 사면을 헤집는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다.
▼ 잠시 후 만난 방향표시지, 오른편으로 들어갔다 나오란다. 뭔가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10m쯤 들어갔을까 자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바위 벼랑에 걸터앉아 있다. 접근이 어려운 지형인데도 한술 더 떠 주위를 돌로 울을 쌓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신성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산신각’이라 부른다고 했다.
▼ 문이 잠겨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안에는 큰 호랑이를 타고 있는 백발노인의 초상이 걸려 있다고 한다. 심성 고운 아낙네와 심술궂은 사내의 전설도 전해진다. 사내의 심술로 재난을 겪은 주민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 산신령께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 산신각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지대가 높은 편이 아닌데도, 고산 준봉이 발아래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을 접하게 된다.
▼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밧줄을 매어놓았다.
▼ 오르는 도중 ‘망양대’라는 또 다른 전망대도 만날 수 있었다. ‘산양면’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뜻을 지녔지 않나 싶다.
▼ 길을 나선지 1시간10분(산행을 시작한지는 50분), 월방산 정상에 올라섰다. 분지형의 정상은 아담한 정상석과 안내판 몇이 지키고 있었다. 월방산은 나지막한 산이다. 또한 문경의 주산도 아니다. 하지만 천혜의 자연과 문화가 숨어있는 영산으로, 옛 사벌국의 진산이자 고대의 수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선지 옛적에는 이 산(山)을 경계로 주변 큰 마을의 이름들이 정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사람을 품었으니 봉서마을과 봉정마을, 반곡마을이다.
▼ 정상의 소나무는 무당집 처마처럼 울긋불긋한 리본들로 뒤덮였다. 나무와 나무사이를 연결해놓은 비닐 끈도 보인다. 어떤 이는 저걸 무속인들의 흔적이라고 했었다. 실제로 그는 신물(리본에 적힌 글귀는 판독이 불가능했다)이 매달려있는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나온 소나무는 ‘화합송’이란 이름표를 매달았다. ‘부부의 금슬’을 나타낸 작명이지 싶다. 부부가 속정이 깊으면 자녀를 많이 둘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트이지 않는 조망에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안내판의 지시대로 20m만 내려가면 시야가 툭 터지는 멋진 전망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경·예천의 산들에 더해 안동의 학가산과 의성의 비봉산까지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대체 어느 산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하산을 시작한다. 봉천사 방향인데 길이 참 고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지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있다.
▼ 8분쯤 걸었을까 ‘봉샘(鳳泉)’ 안내판이 눈에 띈다. 옛날 봉황새가 마셨다는 우물일 것이다. 사람이 마시면 신선이 되어 무병장수한다는 그 ‘신비의 우물’ 말이다. 거리가 가까우니 일단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만두는 게 옳겠다. 길이 나있지도 않을뿐더러 봉샘 또한 우물이라기보다 ‘늪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 할퀴고 찔리는 악전고투를 치러가며 내려선 ‘봉샘’은 실망 그 자체였다. 우물은 보이지도 않고 질퍽거리는 공터에 안내판 하나만 외로웠기 때문이다. 안내판은 샘을 정비할 때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사각의 통나무 틀이 발견되었다고 적고 있었다. 70년대까지는 수도관으로 물을 끌어 동네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 탐방로로 되돌아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산길은 여전히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 오른쪽 사면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산양삼’ 같은 귀한 약초를 재배하는 모양이다.
▼ 조망이 터지기도 한다. 산양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 월방산에서 30분(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40분), ‘봉천사’에 내려섰다. 법당과 삼성각, 요사가 전부인 자그마한 사찰이다. 1998년 향림(香林)이라는 이곳 출신의 비구니가 지었다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 된 지금은 비구가 주석하고 있단다. 꽃으로 치장된 약사여래좌상은 절집꾸미기에 열심이라는 주지스님의 작품이지 싶다. 절집의 내부 구경은 그만두기로 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이(전두환 전 대통령)를 모시는 흔적까지 가슴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 법당 앞 너럭바위(‘봉천대’란다)는 조망의 명소다. 시야가 툭 터지면서 산양면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특히 소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해는 사진작가들의 촬영 포인트이기도 하단다. 거기다 고여 있는 물에는 반영(反影)까지 이루어진다나?
▼ 봉천사를 빠져나오는데 140년(400년으로 적는 이들도 많았다) 묵었다는 등치 큰 소나무(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뒤는 거대한 바위가 받혀준다. 병암(屛巖, 김현규의 雅號)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 저 바위를 아홉 겹 산봉우리로 비유하면서 자연이 만든 병풍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그 바위 한켠에 병암(屛巖)이라 새겨 넣었다.
▼ 소나무, 바위와 함께 어우러진 ‘병암정(屛巖亭)’은 한 폭의 산수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자는 병암 김현규(金顯奎, 1765-1842)가 후손들의 학문증진을 위해 1832년 지었다. 진사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병암정을 세웠다고 한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작은 규모인데도 온돌방과 마루를 둔 독특한 배치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란다.
▼ 봉천사 주변에는 예상외로 바위가 많았다. 그런데 그 돌들 하나하나마다 이름이 붙어있다. ‘좌선대’라는 저 바위처럼 생김새에 어울리게 지어놓았는데,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이름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긴 저렇게 많은 바위에 이름을 붙이다보면 상상력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수도 있겠다.
▼ 백미(白眉)는 단연 ‘오백나한’이다. 오백나한이란 깨달음의 한 단계인 아라한과를 증득한 500명의 불교성자를 이른다. 이들은 한국·중국·일본 등지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주차장 앞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가 오백나한을 닮았다며 그런 이름을 붙여놓았다.
▼ 봉천사를 세상에 알린 건 ‘개미취’이다. 주지인 지정스님이 절집을 찾는 발걸음을 늘리려고 일부러 심었다고 한다. 그게 몸집을 불리고 입소문을 타면서 올해는 축제까지 열렸단다. 푸른 가을하늘과 푸릇푸릇한 나무, 만개한 개미취가 조화를 이루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나? 하지만 입동을 앞두어선지 꽃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그런 내 아쉬움을 눈치챘나보다. 게으른 개미취 한 그루가 이제야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갈색 들풀 사이에서 매일 깊어가는 가을을 붙잡고 있었나보다. 참고로 연보라색 여러해살이인 개미취는 꽃대의 작은 털이 마치 개미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말은 ‘기억’과 ‘먼 곳의 벗을 그리다’이다.
▼ 봉천사의 주변 풍경은 매혹적이다. 사찰 주변에는 300년 된 소나무만 50그루 넘게 있다. 동네의 지기를 채우기 위해 조성된 비보림(裨補林)이라는데, 지정스님이 이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잿봉서 송림(松林)’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마을 출신의 많은 남자들이 저 소나무 숲으로부터 정기를 얻어 입신양명했다는 얘기도 전하고 있다.
▼ 이름 붙이기 행사는 숲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선대부송’을 시작으로 이송정, 노인송, 한풍송 등 소나무의 생김새에 어울리는 이름을 다양하게 지어놓았다.
▼ 곳곳에 세워놓은 시판(詩板)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황윤섭·강상률·권득용 등 문경에 기반을 둔 시인들이 주변 풍경이나 역사를 시로 읊었다.
▼ ‘잿봉서(봉서2리)’는 문경에서는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한다. 절간 아래 있으니 사하촌(寺下村), 즉 부처님의 법(法) 아래에 있는 마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마을 역시 쇠락이라는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진 못했다. 한때 사십여 세대 삼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살았지만, 그 영화는 지금 색 바랜 사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단다.
▼ ‘잿봉서’ 마을 초입, 입간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조금 전 들렀던 봉천사가 ‘고녕가야’의 소도(蘇塗, 천신을 모시던 곳)라는 것이다. 상주·문경 지역에 위치했다는 ‘고령가야(古寧伽倻)’를 이르는 모양이다. 봉천사 자리에는 소도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 절간은 이미 빠져나왔다. 이젠 ‘잿봉서’와도 헤어질 차례이다. 그런데도 ‘삼층석탑’이 눈에 띄지 않으니 문제다. ‘얻고 싶으면 구하라’고 했던가? 들일 나온 주민들 몇 분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눈에 띌 거라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 이 구간에서도 몇 개의 안내판을 만날 수 있었다. 바위(곰바우·개바우·범바우·병풍돌)에 소나무(한풍송)에 샘(탑들샘)까지, 눈에 띄는 모든 사물마다 빠짐없이 이름을 붙였다.
▼ 몇 걸음 더 걸으니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월방산의 단전을 차지하던 ‘봉덕사’가 남긴 유물이다. 천 년도 더 전에 어느 못된 중이 범바위 턱과 개바위 턱을 떼어내면 봉덕사가 흥성한다고 부추기더란다. 그 말을 믿고 두 바위의 턱을 떼어내니 천둥과 벼락이 떨어졌고, 결국에는 폐사되었다나? 외로운 석탑만이 옛 영화를 자랑하고 있는 이유이다.
▼ 탑은 높이 솟은 거대한 자연암반을 깎아 조성했다. 때문에 지대석이 생략된 특수한 구조로 되어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제 말기 사리구절취단에 의해 도괴되었던 것을 1991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탑 내의 사리구(청자완·목제사리함·수정사리호·자색 비단 등 11점)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에 의해 반환받았으나,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단다.
▼ ‘천년지기’ 안내판 주변의 봉덕사 터를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작은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 고갯마루에는 홍보용 입간판이 내걸렸다. 그런데 수탉 한 마리가 올라앉았다. 아니, ‘鳳의 나라’라고 적힌 걸 보면 봉황을 그리려다 저리 되었나 보다. 이곳 ‘봉서리(鳳棲里)’를 봉황으로 나타낸 듯. ‘고녕가야의 오랜 전설’, ‘겨레 문명의 맥박소리’라는 문구도 눈길을 끈다. 맞다. 부족국가 시절, 이곳 문경은 상주와 함께 ‘사벌국(沙伐國)’의 영토였다. 가야시대에는 ‘고령가야(古寧伽倻)’가 있었다는데, 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 ‘월방산 둘레길’ 안내도도 눈에 띈다. 월방산과 봉서1·2리 일대를 개략적으로 그린 다음, 그 위에다 이름이 있는 바위와 소나무는 물론이고 고대석실분·약사여래상·마애관음상 등 둘러볼만한 명소들을 사진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이 안내도를 참조해 찾아보는 것은 어려울 듯...
▼ 탐방로는 다시 도로(봉서2길)을 따른다. 2차선으로 널찍하게 뚫렸지만 지형지물을 건드리지 않고 내놓은 탓에 ‘S’자로 휘어나간 모양새가 여간 고운 게 아니다.
▼ ‘객주 문학길’도 개설했나 보다. 참! 그러고 보니 반곡마을은 객주(김주영 작)의 시작점이다. 천봉삼을 비롯한 수많은 민초들이 꾸며가는 ‘객주’, 반곡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유한 보부상들은 옹기를 지고 출발하여 용궁·개포장을 거쳐 안동·진보로 넘어간다. 창수령을 넘어 영해에서 어물을 떼어 오기도하고 소금을 지고 나르기도 한다. 보부상의 애환이 서려있는 길의 일부를 둘레길로 조성해 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봉천사에서 30분(기웃거린 시간 포함), 또 다른 고갯마루(Daum지도는 ‘수루재’로 적고 있었다)에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오른편은 ‘반곡2리’를 거쳐 문경시내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왼편으로 난 임도를 따른다. 참! 그 사이로 나있는 ‘운달지맥’은 철망 문으로 막혀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임도를 따라 5분쯤 올라갔을까, 고갯마루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들어서란다. 핸드폰의 ‘GPX 트랙’도 오른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하지만 계속해서 임도를 타는 게 옳은 방법이다. 오른쪽은 운달지맥을 하는 이들, 특히 지맥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꾼들이나 선택하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 결론부터 말하면 죽도록 고생만 했다. 길이 나있지 않다보니 잡목과 넝쿨식물들로 가득 찬 능선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GPX트랙’마저 없었더라면 먼저 다녀간 어느 지맥 사냥꾼 말마따나 ‘개고생’을 할 뻔 했다. 이 구간에 놓여있다는 ‘222.4m봉’도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음은 물론이다.
▼ 거친 산속을 15분쯤 헤매다 다시 임도로 내려섰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랐더라면 2-3분이면 족했을 텐데 잘못된 판단으로 다리품만 헛 팔았다. ‘운달지맥’을 탄 이의 트랙을 내려 받은 탓일 것이다. 참고로 ‘운달지맥(雲達枝脈)’은 백두대간의 대미산에서 남으로 분기되는 능선으로 여우목고개를 지나 마전령에서 운달산으로 이어지고, 계속 남진하여 석봉산을 지나면서 고도를 낮춘다. 조항령을 지나 활공장(867m봉)을 살짝 들어 올린 후 단산과 월방산, 약천산으로 이어지다 금천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삼강교에서 맥을 다하는 약 48.8km의 산줄기를 말한다.
▼ 능선을 계속 타는 운달지맥과 헤어져 이번에는 임도를 따랐다. 이어서 100m쯤 더 걸어 ‘폐 축사’를 만났다. 규모가 큰 것이 주인장이 한때는 축산왕의 꿈을 꾸었을 법도 하건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허로 변해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야은(冶隱) 선생만 읊을 일은 아닌가 보다.
▼ 축사를 지나자마자 왼쪽 임도로 들어선다. 널찍한 임도이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 잡초가 무성해 길을 찾기조차 힘들 정도다. 아무튼 묘역 앞에서 임도는 산자락을 에돌아 능선으로 올라간다.
▼ 그렇게 150m쯤 걸어 능선에 올라선다. ‘봉정리’쪽으로 에둘러 온 ‘운달지맥’을 다시 만난 것이다.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지맥 종주꾼들이 많은지 길은 의외로 또렷했다.
▼ 150m쯤 더 걸어 약천산(藥泉山) 올라섰다. 운달지맥의 마지막 부분으로 요 아래 가재골에 있는 ‘약샘’에서 이름을 빌려다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두세 평 남짓의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오석으로 된 작은 정상석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봉긋하게 솟아올랐으나 육산의 특징대로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반곡마을 방향으로 가는 운달지맥과 헤어져, 추산마을 쪽 산비탈로 내려왔다. 헤어진 지맥의 형편은 잘 모르겠지만, 이쪽 길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산비탈은 경사가 심했고, 웃자란 잡초에 잡목, 거기다 넝쿨식물들까지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10분쯤 악전고투를 치른 다음에야 추산마을에서 산양농공단지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내려설 수 있었다. 200년 묵은 상수리나무(보호수)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고갯마루는 상수리나무를 중심에 두고 작은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 다람쥐 조형물도 보인다. 상수리나무 열매를 주워 먹고 있는 모양새다.
▼ 탐방로는 이제 임도를 따라 산양농공단지로 간다.
▼ 5분쯤 더 걸어 ‘산양농공단지’에 도착했다. 산양면은 1949년도에 약관 22세의 나이로 문경군수를 지냈고 3공부터 5공까지 6선의 국회의원을 지낸 故 채문식 국회의장의 출신지이다. 그래서일까? 시골 공단 치고는 꽤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 날머리는 산양농공단지 버스정류장(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농공단지를 지나면 ‘국도 34호선’, 이후부터는 국도를 따라 문경시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난 버스정류장(산양농공단지)에서 산행을 끝내기로 했다. 인도가 따로 없는 대로변을 걸으며 목숨을 걸기보다는 버스로 이동하는 게 옳을 것 같아서이다. 아니 하시라도 빨리 식당으로 가서 문경의 특주인 ‘호산춘(湖山春)’을 맛보고 싶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황희 정승의 후손이 손님 접대용으로 빚었다는, 자신의 호(湖山)에다 봄날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을 추가시켰다는 그 미주(美酒)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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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 길)
여행일 : ‘22. 10. 9(일)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선원면 일원
여행코스 : 용흥궁→중앙교회→청하동약수터→남장대→호텔 에버리치→남산리→찬우물약수터→철종외가(거리/시간 : 11.7km/ 실제는 10.98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열네 번째 코스인 ‘강화도령 첫사랑 길’을 걷는다. 강화의 아픈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강화도령 원범(철종)과 봉이 처자의 애잔한 러브스토리를 스토리텔링 해 만들었다.
▼ 들머리는 ‘용흥궁주차장’(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강화읍내로 들어서면 강화군청에 이어 용흥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버스에서 내려 철종의 잠저(潛邸, 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인 ‘용흥궁’부터 들러본다.
▼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에서 시작해 철종의 외가가 있는 냉정리(선원면)에서 끝을 맺는 11,7km짜기 구간.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별칭처럼 강화나들길 20개 코스 중 가장 로맨틱한 코스로 꼽힌다. 첫 번째 러브스토리는 철종과 봉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추정되는 ‘청하동 약수터’. 데이트 코스였을지도 모르는 강화산성 남장대를 거쳐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던 외가까지 이어진다.
▼ 용흥궁(龍興宮)은 조선의 25대 왕 ‘강화도령’ 철종이 11세부터 19세까지 살던 곳이다.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이다. 은언군은 역모 사건에 연루돼 강화도로 유배됐고,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인 철종도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빈농으로 살다가 1849년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서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다.
▼ ‘용흥궁’은 말이 궁이지 아담한 기와집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원래는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른 뒤 기와집으로 개축했다는 것.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르고 4년 뒤 강화 유수 정기세가 한옥을 짓고 ‘용흥궁(용이 흥하게 되다)’이라 했으나, 작은 공간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들인 살림집 수준이라 다소 초라하다. 강화도령의 팍팍한 삶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나 할까?
▼ 용흥궁을 빠져나오자 시멘트가 벗겨지고 철근이 드러난 낡은 굴뚝이 우뚝 서 있다. 옛날(1947-2005) 이곳에 있던 ‘심도직물’의 굴뚝이라고 한다. 한때는 종업원이 1200명도 넘었다지만, 지금은 용흥궁공원으로 바뀌어 옛 영화는 추억 속에서나 더듬어 볼 수 있다. 30m도 넘었다는 굴뚝이 5m만 남았으니, 추억도 그만큼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 남쪽 방향, 그러니까 남산으로 연결되는 ‘북문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4분쯤 걸어 만나게 되는 ‘강화중앙시장’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전통적인 재래시장이다. 탐방로는 시장 앞 사거리에서 직진이다. 오른쪽은 ‘첨화루(瞻華樓, 남한산성 서문)’로 연결된다. 주어진 시간에 쫓겨 포기해야했지만 강화의 핫블레이스인 ‘조양방직’도 그쪽에 있다. 이 공장은 지난 20-30년 정도 폐공장으로 방치되다가 미술관 카페로 변신했다. 낡은 공장을 미술품·고가구·골동품으로 채워 ‘신문리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며 강화의 관광명소이자 이색카페로 유명하다. 엠제트(MZ)세대의 ‘뉴트로(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성지’로도 주목받는다.
▼ 강화나들길에 들인 강화군청의 열정을 심심찮게 느낄 수 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팔각정 등)를 곳곳에 조성했는가 하면, 진전(眞殿, 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의 제사 때 정한수로 사용했다는 ‘솔터우물’ 같은 옛 시설들도 새롭게 단장 해 여행자들에게 내놓았다.
▼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길을 나서기 전 여행할 곳의 정보를 미리 알아두어야 하는 이유다. 요즘은 SNS나 관련 인터넷홈페이지 등 많은 정보가 넘쳐난다. 그러나 현지에서 물어물어 정보를 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강화군에서도 발 벗고 나섰다. 중앙시장 뒤 1914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옥을 개량해 ‘관광안내소’를 만들어 놓았다.
▼ 110년 전통의 ‘강화중앙교회’도 스치듯 지나간다. 거대한 몸집을 빼놓으면 특별한 게 없지만, 국민일보에서 본 옛날 사진은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치’ 창에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인 가는 탑이 3층 높이로 솟구치는데, 특이한 점은 탑머리로 팔작 한옥지붕을 얹고 있다는 점이다.
▼ 성산아파트 근처에서 잠시 헷갈렸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 덕분에 무사히 길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아파트 담벼락에 매달린 나들길 리본을 참조해도 되겠다.
▼ 오르막 골목을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남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나온 지릉인데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 강화 사람들에게 남산은 동네 뒷산이다. 산책삼아 마실 나오기 딱 좋은 곳이라는 얘기다. 산자락 곳곳에 근린공원을 들어앉힌 이유일 것이다.
▼ 탐방로는 무척 잘 닦여있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했고 경사까지 완만했다. 약간이라도 가팔라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 남산의 특징을 잘 살린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잣나무·진달래·자작나무 등 군락지들을 지명으로 삼았다. 그런데 ‘건강의 숲’과 ‘아이의 숲’은 뭘 의미하는 걸까?
▼ 어제가 한로(寒露),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절기이니, 가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나 보다. 가을비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저 구절초 꽃들이 그 전령이고 말이다.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김용택 시인의 ‘구절초꽃에서’>
▼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 계단을 올라 ‘청하동약수터(淸霞洞藥水)’에 다다른다. 1801년 낙향한 은언군(철종 할아버지)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약수터다. 또한 강화도령 원범(元範)이 왕으로 오르기 전 강화도 처녀 ‘봉이(鳳伊)’와 만나 사랑을 키워가던 곳으로도 알려진다. 이 약수터에서 만나 남장대 자락을 지나 찬우물약수터까지 걸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라는 14코스의 아명을 만들어낸 명소로 보면 되겠다.
▼ 홍보용인지 강화도령과 봉이를 이미지화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나들길 14코스’의 지도를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시골스런 옷차림의 처녀총각이 더 눈길을 끈다. 기념사진 한 장 남기기에 딱 좋은 포토죤이라고나 할까?
▼ 남산은 나지막한 산이다. 약수터는 그런 산의 7부 능선쯤에 들어앉았다. 그런데도 시원하고 담백한 물이 꽤 많이 흘러나온다. 하긴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었다는데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옛날만은 못한 듯, 족탕으로 여겨지는 맞은편 물줄기는 물이 마른지 오래였다.
▼ 약수터를 만난 나들길은 지금껏 이어온 임도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선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 오솔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겁다싶을라치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 잠시 후 웬만한 집 한 채 크기인 ‘거북바위’가 나타난다. 거북이를 닮은 이 바위는 어가를 탄 채 강화도를 떠나는 원범, 이제는 왕이 된 철종의 행렬을 바라보며 그의 무사와 안녕을 빌던 봉이의 일화가 남아있는 곳이다. 철종이 떠난 이후로도 매일처럼 이 바위에 올라 물을 떠 놓고 빌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얘기를 간직한 서글픈 바위지만, 간절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많은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곤 한단다. 제단으로 여겨지는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우물도 눈에 띈다. 한 곳은 물이 고여 있고, 다른 한 곳은 초와 향을 키울 수 있는 아궁이다. 상부에 제기까지 놓여있는 걸 보면 이곳 또한 기도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도 영험한... 하긴 어떤 이는 요 아래 약사사 스님의 입을 빌어 우물의 영험함을 설명하고 있었다. 물의 양이 기도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나?
▼ 기도터부터는 ‘생태체험 숲’으로 조성된 ‘잣나무 숲’을 걷는다. 10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커다란 잣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찼는데, 탐방로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으며 위로 오른다.
▼ 청하동약수터에 10분. ‘남암문(南暗門)’에 올라선다. ‘암문’이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비밀 출입구이다. 성안의 필요한 물품을 운반했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구원을 요청하거가 적을 역습할 때 이동통로로 사용했다. 그러니 문이 자그마했을 것은 당연.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문은 마차가 지나다녀도 될 만큼 컸다. 이는 강화산성 규모가 대량의 물자수송이 필요했을 정도로 컸다는 증거이리라.
▼ 나들길 이정표는 15코스만 남장대로 가라하고 14코스는 곧장 직진하란다(나들길은 남산에서 14코스와 15코스가 상당히 겹친다). 하지만 난 15코스인 ‘남장대’부터 올라보기로 했다. 강화산성의 성벽이 남산의 산자락을 따라 이무기처럼 아찔하게 이어진다. 강화산성은 고려산성으로도 불리는 데, 1232년에 축성돼 39년간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당시엔 내성·중성·외성으로 겹겹이 쌓아 섬을 옹위했다 하나 지금 남은 것은 ‘내성’뿐이다. 그 둘레는 약 7.1km.
▼ 오르다 힘이 들면 가만히 뒤를 돌아보면 된다.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강화의 풍경이 그동안의 고생을 한눈에 씻게 해준다. 참! 이 부근은 MBC 월화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여주인공(은산)과 남주인공(왕린)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아름다운 배경으로 성곽길과 진달래꽃이 노출됐었다.
▼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인 남산의 정상에 도달하면 강화산성의 3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장대가 우리를 맞아준다. 흔히 보는 정자와는 뭔가 다른 ‘포스’를 보여주는데, 몽골 침략 당시 지휘부가 머문 곳으로, 사방에 장대가 있었다지만 남은 곳은 이 곳뿐이다.
▼ 남장대는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진무영(鎭撫營)에 속한 군사 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누각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졌다가 2010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 장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염하 건너 김포 땅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으면 북한의 개성 땅까지 바라보인다고 한다.
▼ 강화군의 배려도 돋보인다. 방향마다 전경 안내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가며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 나들길은 이제 서남쪽 능선을 따른다. 길을 가로막는 성벽은 망루를 이용해 넘는다. 산불감시초소로 여겨지는 망루를 가운데 두고 성안·밖으로 나무계단을 놓았다.
▼ 오래가지는 않지만 능선을 탄다. 우리야 나들길을 걸을 때나 만날 수 있는 강화산성이지만 이곳 주민들에게는 산책코스로 사랑받는 동네 뒷산이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음에도 불구하고 널찍하면서도 또렷한 이유일 것이다.
▼ 이곳에서도 울창한 잣나무 숲을 만날 수 있었다. 남산에 조성된 여덟 개의 생태체험 숲(건강의 숲, 단풍나무 숲, 남산 약수터, 아이의 숲, 자작나무 숲, 잣나무 숲, 사랑의 숲, 바위정원) 중 하나인 잣나무 숲이다.
▼ 길은 합쳐졌다 나뉘기를 반복한다. 강화산성이 강화읍의 사방에 울타리처럼 두른 성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지 않겠는가. 14코스와 15코스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정표 : 국화리공동묘지↑ 250m/ 청하동약수터→ 500m/ 남장대↓ 200m)도 그중 하나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14코스와 15코스가 또 다시 나뉜다. 국화저수지로 향하는 15코스와 이별을 고한 14코스는 왼편 ‘사랑의 숲’으로 내려선다.
▼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222.5m로 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남산은 꽤나 매섭고 옹골찼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하긴 강화산성이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견뎌낸 요새라 하지 않았던가.
▼ 남장대에서 15분, 생태체험 숲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숲’을 만났다. 200평쯤 되는 공터에 사랑을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들을 배치했다. 그 옛날 강화도령 원범과 봉이 처녀가 순박한 사랑을 나누었을 법한 장소지만, 그네들을 나타내는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강화나들길과는 별개로 조성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 조형물은 Love와 ♡가 주를 이룬다. 사랑의 결실인 결혼반지도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키스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뭇가지 모양의 선들로 키스를 하기 직전인 남녀를 그려냈다.
▼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어떤 곳은 아찔할 정도로 가파르다. 흙길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그게 더 미끄러워질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튼튼한 밧줄 난간을 매어놓아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했다.
▼ 그렇게 4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20분)쯤 내려서자 ‘에버리치 호텔’의 뒤편(이정표 : 종점 6.6㎞/ 시점 3.2㎞). 나들길은 이곳에서 왼쪽 방향이다.
▼ 하지만 방향표식을 놓친 나는 오른쪽으로 가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덕분에 호텔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었지만...
▼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아차린 지점에서 본 ‘선행리’ 들녘이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을 계속해서 가더라도 저곳에서 나들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난 에버리치호텔로 되돌아가 정규 탐방로를 따르기로 했다.
▼ 호텔부터는 널찍한 도로를 따른다. 이어서 남산마을 주택가(이정표 : 종점까지 5.9km)를 횡단하듯이 통과한다. 때문에 갈림길을 여럿 만난다. 하지만 길 찾기 쉽다는 게 나들길의 장점 아니겠는가. 이정표나 리본 등 둘레길 표식을 하도 잘 해놓아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 내려가는 도중 ‘사소한 공방 다을’을 만났다. 공방지기가 직접 만든 도자기에 다육식물을 심어 판매한다는 곳이다. 다기·접시·화병 등 직접 만든 공예품들로 꾸며진 내부가 볼만하다는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월간 전원속의 내집’에서까지 소개했을 정도로 가옥의 구조도 독특하다니 나중에라도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 남산마을을 빠져나오면 ‘명진 컨벤션웨딩부페’. 군 단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커다란 규모를 자랑한다. 예식장말고도 컨벤션센터와 뷔페까지 겸한다니 강화도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 나들길은 버스정류장(명진부페)을 코앞에 두고 왼쪽 골목(이정표 : 종점까지 5.4km)으로 들어간다. ‘㈜태민’의 담벼락을 오른쪽에 끼고 돈다면 이해가 쉽겠다.
▼ 뒤이어 나타나는 들녘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들녘 너머로는 남산이 오롯이 솟아오른다.
▼ 들녘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선행천’의 둑길을 따른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저 들녘의 풍요로움은 선행천이 있어 보장된다. 혈구산 동쪽기슭과 혈구산과 고려산 사이 고비고개에서 시작되는 ‘선행천’은 동락천과 합류하여 선원면과 강화읍 경계를 따라 흘러 갑곳나루 옆에서 염하를 만난다.
▼ 선행천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붉은 색으로 정비된 둔치, 제방도로에는 벚나무가 나란히 심겨 있다. 산책하기 딱 좋게 꾸며졌다고 보면 되겠다. 걷다가 피곤해지면 둔치에 놓여있는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면 될 일이고.
▼ 아치형의 예쁘장한 다리(이정표 : 종점까지 4.8km)를 건너자 ‘나무들의 집’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교회의 또 다른 샘플로 잘 알려진 곳이다. 예배당을 기본으로 하지만, 평소에는 콘도(신도들을 위한) 및 MT형의 교육·훈련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고나 할까?
▼ 그래선지 시설의 외부공간이 개방되어 있었다. 덕분에 빗속에서 요기를 때울만한 공간을 찾던 나에게는 구제주가 되어주었고 말이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왔지만, 자리를 내어준 교회에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이후부터는 ‘선행리’의 마을안길을 따른다. 이 마을은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였던 ‘최우’가 세웠다는 원찰 ‘선원사(현 충렬사 근처)’가 있었다는 곳이다. 최우는 몽고군에 의해 불탄 대장경을 다시 조성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병란을 물리치고자 1236년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조판불사를 시작했다. 대장도감은 이후 선원사로 옮겨졌고, 최우의 후원 아래 16년간의 작업 끝에 1251년 재조대장경이 완성됐다.
▼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시리미로(2차선 도로)’는 횡단한다. 나들길이 건너편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조금 애매하지만 이정표(종점까지 4.1km)나 리본 등 나들길 표식이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포장까지 된 임도지만 혈구산 자락의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 형태라서 지루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혈구산의 맑은 공기를 실컷 마시며 걷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 ‘나무들의 집’에서 15분. ‘찬우물약수터’에 닿았다. 철종이 어린 시절 외가를 오가던 길목에 있는 약수터이다. 위치로 보아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목을 축였지 않았을까 싶다.
▼ 약수터 고무대야에는 막걸리가 한 가득이다. 원범은 훗날 임금이 되어서도 봉이와의 추억을 잊지 못해 청하동에서 떠온 물로 막걸리를 담그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저 막걸리 하나 챙겨 당시 철종이 느꼈을 감정을 잠시나마 이입시켜 볼까나?
▼ 약수터 주변은 어르신들이 점령했다. 동네 주민들로 여겨지는 할머니들이 좌판을 펴고 제철 체소를 팔고 있었다.
▼ 이곳도 원범이와 봉이의 데이트 장소였다고 한다. 청하동약수터에서 함께 걸어온 청춘 남녀는 이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걸어 온 길을 되돌아갔단다. 데이트 코스의 반환점인 셈이다. 그걸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구간 조형물 말고도 사랑의 팻말 걸개판을 세워놓았다.
▼ 약수터를 빠져나온 나들길은 4차선의 84번 지방도를 횡단한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원범 총각과 봉이 처자의 사랑 놀음에 동화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아니 요놈에게 홀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바로셀로나의 ‘구엘공원’에서 만났던 풍경, 즉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으로 장식된 기다란 벤치(‘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라고 했었다)를 떠올렸고, 당시를 회상하며 타일화를 감상하다 그만 길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가우디(Antonio Gaudi)’의 작품을 떠올렸으니 오죽했겠는가.
▼ 하나하나의 파편들은 모여 원범 총각과 봉이 처자를 만들기도 한다.
▼ 10분 남짓 엉뚱한 길을 걷다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로의 반대편 인도를 걷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음은 물론이다.
▼ 조금 걷다보면 도로표지판 아래에서 오른쪽의 야산으로 올라가는 길(이정표 : 종점까지 3.1km)이 나 있다. 14코스의 마지막 산악 구간인데, 낮고 완만한데다 그 거리까지 짧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지친 심신을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회복시켜주었다. 이곳은 울창한 잣나무 숲, 피톤치드 흠뻑 머금은 솔향기가 사방으로 넘치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 일단 능선으로 오르면 산길은 더 이상의 오르막 없이 완만하게 아래로 향한다. 가끔은 표식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내려가면 다시 나타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 산길을 빠져나올 즈음 양봉시설을 만났다. 하지만 늦가을이어선지 벌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냉정마을’, 나들길은 마을을 횡단하듯 지나가는데, 눈에 들어오는 주택들이 하나같이 멋지다. ‘냉정(冷井)’이 맑고 시원한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는 샘을 이르는 지명일지니, 그런 여건을 찾아 부티 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나 보다.
▼ 찬우물약수터에서 25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25분). 나들길은 또 다시 84번 지방도(이정표 : 종점까지 2.1km)로 올라선다.
▼ 1923년에 개교해 올해 나이가 100살이나 되었다는 선원초등학교는 스치듯 지나간다. 때문에 운동장 한가운데서 자란다는 ‘천지송’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한 뿌리에서 여러 개의 줄기가 뻗어 나와 옆으로 갈라지면서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보여준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갈수록 굵어지는 빗줄기가 모든 걸 나태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어쩌겠는가.
▼ 초등학교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이번에는 드넓은 평야지대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몇 번의 이정표 안내를 받으며 냉정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시야가 툭 트여 마음까지 넉넉해지지만, 오뉴월 뙤약볕이라도 쬐인다면 그늘이 없어 고역을 치를 수도 있겠다.
▼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저런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고려와 조선의 권력자들이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곳 강화도를 피난처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 선원초등학교에서 30분. 드디어 철종외가(哲宗外家,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8호)에 도착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지어진 집으로 철종의 외삼촌인 '염보길'이 살았다는 집이다. 집은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다. 특이한 건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인데 가운데를 흰 벽으로 구분해 놓았다.
▼ 조카가 왕위에 오른 후 지어져서인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멋지기까지 했다. 사랑채의 누마루 위로 오르면 안채가 보이고, 담 너머로는 너른 들녘이 눈에 차오른다. 참고로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했다.
▼ 스탬프보관함 옆의 무지렁이처럼 그려진 강화도령, 즉 ‘원범(철종)’이 눈길을 끈다. 나무를 해 팔아가며 사는 일자무식의 더벅머리 숫총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앎이다. 철종은 183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왕손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으니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 소양을 갖추는 교육은 받았다. 재위 시 사가에 있을 때의 교육 정도를 묻는 질문에 ‘소학’까지 배웠다고 철종은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철종이 일자무식인 것처럼 시중에는 알려져 있다.
▼ 날머리는 ‘대장간마을’ 버스정류장(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철종외가는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84번 지방도까지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했다. 냉정2리 마을회관 앞 도로 건너편에 버스정류장을 겸한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10.98km를 걷는데 3시간30분(간식 시간은 뺐다)이나 거렸다. 남산의 오르막 산길도 속도를 떨어뜨렸겠지만, 그보다는 우산을 쓰고 걷느라 속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에필로그(epilogue), 철종(원범)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왕으로 단종·사도세자와 함께 조선 왕실의 야사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인물이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원범은 역모에 휩쓸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나무를 베어 팔아가며 살다 현종이 급사하자 하루아침에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천자문은 깨우쳤으나 다른 학문을 닦을 여유가 없었던 삶 때문에 왕으로서의 그의 지시는 조정 권신들에게 반박 받고 무시되기 일쑤였으며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수 없는 까다로운 궁중 예법은 예전의 건강한 젊은이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든다. 결국 실권 없이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그런 비운의 삶을 살다 간 때문인지 철종은 여러 야사를 낳았다. 왕위에 오르고서도 강화에서 농사지으며 마셨던 막걸리를 잊지 못해 아내인 철인왕후 김씨가 몰래 친정에 사람을 보내 구해서 올렸다는 이야기나, 강화도에서 농민으로 살 때 연정을 품었던 ‘봉이(’양순이‘라는 설도 있음)’라는 평민의 여식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철종의 그런 지난했던 삶은 애잔했던 러브스토리가 덧입혀지면서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명품 둘레길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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