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4구간(대축-원부춘)
여행일 : ‘22. 10. 31(월)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악양면·화개면 일원
여행코스 : 대축마을(1.8km)→동정호(2.2km)→평사리→입석마을(2.3km)→윗재→아랫재(3.6km)→원부춘마을(거리 및 시간 : 10.7km/ 실제는 11.04km를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4구간(원부춘-가탄)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하동 권역의 다섯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8.5km(평사리 최참판댁을 둘러볼 경우 10.7km로 늘어난다) 밖에 되지 않으나 높이가 750m나 되는 고개를 오롯이 넘어야하기 때문에 난이도는 ‘상’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토지의 주무대인 평사리를 둘러볼 수 있으니 능히 도전해 볼만하다.
▼ 들머리는 대축마을(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945)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악양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악양동로’를 타고 올라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축마을에 이르게 된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원부춘 8.5㎞←대축→삼화실 16.7㎞)는 버스정류장 근처 느티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다.
▼ 14구간의 특징은 코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하나는 ‘입석마을’을 거쳐 ‘아랫재’로 곧장 올라가는 방법으로 길이가 8.5km쯤 된다. 다른 하나는 소설 ‘토지(박경리가 썼다)’의 무대인 평사리에 들렀다가 아랫재로 올라가는 방법인데 이때는 길이가 10.7km로 늘어난다. 참!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은 평사리에서 ‘고소산성’으로 오른 다음 형제봉능선을 타고 ‘윗재’로 가는 방법을 추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GPX트랙을 찾을 수 없어 두 번째 방법으로 걷기로 했다.
▼ 악양천 쪽, 그러니까 백운산을 마주보며 걸어 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곳 악양면은 2009년 세계에서 111번째, 국내 5번째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그러니 서둘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자연과 더불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 동구 밖 소공원의 마을 표지석은 한 길도 더 넘는다. ‘악양 대봉감 정보화마을’이라는 입간판도 눈에 띈다. 대축마을은 ‘대봉감’의 시배지로 전해진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대봉감과 대봉곶감은 전국 그 어떤 대봉감보다 우수한 크기와 맛을 자랑한단다. 하긴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을 올렸을 정도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매년 11월 축제까지 열린다나?
▼ 소공원 앞에서 ‘축지교’를 건넌다. 초입에 벅수(원부춘 8.3㎞/ 대축 0.2㎞)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다리 아래로 흐르는 ‘악양천’은 거사봉과 시루봉 자락에서 시작해 하류 즈음에서 악양 들녘을 만들고 나서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길이 10.5km의 물줄기다. 천은 들녘 한가운데를 지나는 건 아니고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느긋하게 흐른다.
▼ 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이정표와 둘레길 안내판이 있다. 길은 여기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은 동정호와 최참판댁을 거치며 에두르는 길이고, 오른쪽은 입석마을을 향해 강둑으로 간다.
▼ 벅수의 방향표시도 둘이 아니라 ‘셋’이다. 기본인 빨강색 방향은 강둑을 따라 입석마을로 향한다. 우회로인 녹색은 평사리의 너른 들녘을 에둘러 간다. 두 길은 입석마을 바로 위에서 다시 만난다.
▼ 둘로 나뉘는 둘레길 상황은 안내판으로도 만들어 내걸었다. 지도는 그 거리까지 적었다. 너른 들녘을 에두르는 왼쪽 길이 4km로 오른쪽보다 1.7km 더 길다. 하지만 동정호와 토지의 산실인 평사리를 눈에 담을 수 있으니 다리품을 조금 더 팔만하지 않겠는가.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길은 또 다시 나뉜다. 이때 직진 방향에 놓인 평사리가 아름다운 풍경화를 만들어 놓는다. 들녘과 산등성이가 풍경을 위아래로 나눈 것이나, 반듯하고 질서정연한 논과 산등성이가 만드는 자연스러운 곡선의 대비도 느낌이 좋다. 널디너른 들녘에는 벼 대신 마시멜로처럼 생긴 곤포 사일리지만 곳곳에 쌓여 있다.
▼ 둘레길은 악양천의 둑길을 따라 ‘농업용수 공급 취수장’까지 간다. 아니 공사 중이어선지 제방의 아래로 길이 나있었다.
▼ 취수장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평사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평사리는 변한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단다. 마을 앞 섬진강에 배가 오가던 시절에는 외부와 문물을 교류하는 창구의 역할도 수행했단다. 특히 지리산의 품에 아늑하게 안긴데다, 마을 앞에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어, 큰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다.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 물이 넘나든다고 해서 ‘무딤이들’이라고도 불리는 널디너른 들녘이다. 저 들녘은 또 섬진강 500리 물길이 부려놓은 가장 너른 들이기도 하다. 이 너른 들이 사람을 불러들였고,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며 문화를 만들어냈다. 추수가 끝나 텅 비어버린 들녘은 83만평이라는 수치보다도 훨씬 더 넓어져 있었다.
▼ 동정호에 가까워지자 형제봉 능선이 더욱 또렷해진다. 신선대에 놓인 출렁다리가 그 자태를 드러내는가 하면, 맨 왼쪽에서는 하동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스타웨이 스카이워크’가 자신도 보아달라며 얼굴을 내민다.
▼ 들녘 한가운데, 키 작은 잡목 숲이 섬처럼 자리한 곳에 소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우뚝 서있다. 토지 속 주인공 서희와 길상이를 연상시킨다는 ‘부부송(夫婦松)’이다. 가을이면 누런 들녘과 푸른 소나무의 조화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고 해서 사진작가들의 단골 모델이 되기도 한단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허수아비의 할 일이 사라져버린 빈 들녘을 따라 걷다보면 그 끄트머리에서 ‘동정호(洞庭湖)’와 만난다. 동정호는 자연 습지를 복원한 생태공원의 호수다. 하동군 악양면(岳陽面)이 중국(호남성)에 있는 악양(岳陽)과 지명이 같은데 착안해 그 동네 호수의 이름을 살짝 빌려왔다. 옛날 나당 연합군을 이끌고 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을 보고 고향 땅에 있는 못과 닮았다며 ‘동정호’라 불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 호숫가 느린 우체통은 하동을 상징하는 두꺼비 조형물이 지킨다. 언뜻 보면 개구리처럼 보이는데 사실 동정호 주변은 두꺼비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란다. 이렇듯 동정호는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진다. 이런 점에 착안한 하동군은 동정호 일대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호수 중앙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가 하면, 수변 덱과 전망대, 사랑의 출렁다리 등을 만들어 산책할 수 있는 힐링공간으로 조성했다. 참! 혹자는 악양루에 앉아 푸른 가을하늘 아래 동정호 물가에 내려앉은 가을을 즐겨보라고 했다.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하나인 동정추월(洞庭秋月), 즉 가을 날 동정호에 휘영청 떠오른 하늘의 달과 수면에 비친 달을 떠올리면서...
▼ 이제 평사리로 갈 차례다. 동정호를 빠져나오는데 들녘 너머 악양면을 둘러싼 산세가 선명하다. 신성봉·형제봉·거사봉·시루봉 등 1000m 수준의 봉우리들이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길게 이어지면서 파노라마를 펼쳐놓는다. 그 사이 잘록한 부분이 묵계로 넘어가는 ‘회남재’일 것이다.
▼ 조금 더 걸어 ‘1003번 지방도’로 올라서면 ‘최참판댁’ 버스정류장이 반긴다. 둘레길은 저곳에서 차도를 타고 입석마을로 간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곧장 직진해 볼 것을 권한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토지’의 주무대인 ‘평사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 도로를 건너 ‘평사리’로 향했다. 그러자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는 길목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주무대라는 부제를 달고서. ‘토지’는 박경리 작가가 26년간의 집필기간을 걸쳐 완성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문학이다. 소설은 대한제국이 수립되는 1897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역사적 흐름을 폭넓게 가져간다. 작품 속 시간적 배경이 길다보니 공간적 배경도 장대하다. 최참판댁이 위치한 이곳 평사리 일대에서 시작해 진주·통영·경성과 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 및 일본 동경 등으로 확대돼 간다. 우리나라 근대사 속 민초들의 삶과 사회∙경제적 변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살려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마을 앞 주차장에는 지역 특산품들을 펼쳐놓았다. 그중에서도 대봉이 단연 눈길을 끈다. 악양의 대봉감은 굵기로 유명하다. 최상품은 감 하나에 460g이 넘고, 제일 작은 것도 250g이나 나간다고 한다. 수확한 지 10일에서 20일이면 홍시로 먹을 수 있고, 곶감으로도 인기가 있는데 비타민 A와 C가 풍부한 영양 간식이란다.
▼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여느 유명 관광지에 못지않다. ‘토지’가 국민 애독서를 넘어 드라마로까지 제작되자, 그 현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러자 하동군은 소설 속의 ‘최참판댁’을 실제인 양 지어놓았다. 마을에서 살던 이들의 초가삼간도 가상을 벗어나 현실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최참판댁은 하나의 마을로 구성되어 구경거리와 먹거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 소정의 돈을 내야만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조금 한산하지만 예전에는 연 입장객이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실존이 아닌 소설 속 공간에 불과한데도 찾아오는 이유는 대체 뭘까? 길에서 만난 어느 여행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 속 스토리가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러자 그 공간이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를 한번쯤 보고 싶어졌다나?
▼ 소설이 현실이 된 ‘평사리’는 평일인데도 꽤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옷이나 기념품, 특산품 등을 파는 가게는 물론이고 식당들도 손님맞이에 분주한 모습이다.
▼ 상호는 대부분 ‘서희’나 ‘길상이’ 등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대신 음식점은 ‘사랑채’와 ‘별채’ 같은 최참판댁 건물들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다.
▼ 저 우물은 길상이를 흠모하던 불쌍한 봉순이가 물을 깃던 우물일지도 모르겠다.
▼ 가장 먼저 들러볼 곳은 ‘박경리문학관’이다. 소설 ‘토지’의 모티브가 된 ‘평사리’에 마련된 작가를 기리는 공간이다.(작가의 고향인 통영과 토지 4·5부를 집필한 원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공간을 만나볼 수 있었다)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 작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의 위대한 작가이다. ‘토지’외에도 ‘불신시대’,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등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했는데, 부조리한 사회의 비판, 인간소외에 대한 저항, 인간의 존엄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 믿음 등을 담아냈다고 평가된다.
▼ 지리산 자락을 배경삼은 문학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오른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앞으로는 누런 들녘이 넉넉하게 펼쳐진다. 풍요의 상징이어야 할 저 들녘을 소설(토지)은 수탈의 공간으로 그려놓는다. 다른 한편으론 그것을 이겨내며 해방을 맞이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독자들이 이곳 평사리를 꼭 한번 와보고 싶은 곳으로 꼽는 이유이다.
▼ 내부는 박경리 작가의 삶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 기획됐다고 한다. 작가가 생전에 집필 할 때 사용하던 유품과 그가 남긴 글귀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하지만 난 마당에 펼쳐놓은 작가의 원고지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평사리를 들르지 않고 입석마을로 곧장 진행해버린 다른 일행들을 쫓아가려면 뛰어가도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이다.
▼ 다음 방문지는 ‘최참판댁’이다. 구중궁궐을 연상시킬 정도로 커다란 저택이지만, 사실 ‘토지’ 속 최참판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니 저 집도 소설을 극화시키기 위해 꾸며놓은 가상의 공간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소설 속 얘기지만 주인공들이 살아가며 흩뿌려놓은 삶의 편린(片鱗)이 녹아있는데...
▼ 저 사랑채는 최치수가 기거했다. 서희의 아버지이자 최참판가의 당주였던 그는 매사에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여자를 믿지 않는다. 별당아씨가 김환과 도망가자 추적했고, 최참판가의 재산을 차지하려 유혹하는 귀녀의 음모를 눈치 채고 강포수와 결혼시키려하나 김평산에게 살해되고 만다.
▼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안주인인 안방마님과 며느리, 여자 하인 등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최치수의 어머니이자 서희의 할머니인 안방마님 윤씨부인은 최참판가의 실질적 가장이다.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낳은 김환을 하인으로 곁에 두며, 별당아씨와의 불륜을 용인한다. 조준구의 장기 거주에 불안을 느껴 비밀리에 서희에게 금·은괴를 남겨주고 호열자로 죽는데, 이 자금이 서희가 재기하는데 발판을 만들어준다.
▼ ‘뒷채’는 연로하신 부모가 안채와 사랑채를 아들 부부에게 넘겨주고 은퇴하며 머무르는 공간으로 부엌과 서고 등이 딸려 있다.
▼ ‘별당채’는 그 집안 딸들이 기거하며 신부수업을 받는 공간이다. 별당아씨는 최치수의 둘째 부인이자 서희의 생모로 냉정한 남편에게 외면당하다가 이부 시동생 김환과 사랑에 빠져 도피한 후 묘향산 근처에서 죽는다. 그녀의 딸인 서희는 가족을 모두 잃고 조준구에게 재산을 빼앗기자 길상 등과 함께 용정으로 이주, 길상과 결혼해 두 아들 환국·윤국을 얻고 귀향하여 평사리 땅을 되찾는다. 그리고 은밀하게 항일운동을 하면서 지리산의 젊은이들을 돕고, 평사리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살아간다.
▼ 별당 앞은 ‘연못’ 차지다. 별당아씨를 연모한 구천의 마음과 구천을 향한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간절함이 녹아 있는 별당아씨의 연못이다. 신분은 달랐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사랑의 연을 맺은 스토리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모양이다. 사랑·소망·무병장수를 염원하며 던진 동전이 절구통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 ‘토지’의 첫 장면은 평사리 들판에서 8월 한가위에 사물놀이하며 가을 추수를 주민들이 즐기는 걸로 시작된다. 마지막 장면은 ‘최참판댁’이 장식한다. 별당에서 주인공 서희가 일제로부터 독립 해방 소식을 들으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소설처럼 별당을 마지막으로 최참판댁을 빠져나와 소설 속 마을을 둘러봤다. 마을은 칠성이네, 김평산네, 김훈장댁 등 14동의 한옥으로 구성됐다. 초가집은 TV 드라마 세트장으로도 활용된단다. 그래선지 용이네·두만네·월선네 등의 집들이 실제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지어졌다. 참! 김훈장댁과 김평산네는 한옥스테이도 할 수 있다고 했다. 1일 숙박료(평일 기준 30,000원에서 35,000원 사이)도 쌈지막하니 여유가 있다면 하룻밤 묵어가도 좋겠다.
▼ 최참판댁 입구는 최참판댁과 마을에서 촬영됐던 드라마나 영화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나, 둘... 열, 스물까지 헤아리다 지쳐 그만두었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조선총잡이·해를 품은 달·옥룡이 나르샤·꽃들의 전쟁·구름이 그린 달빛·역적 등등
▼ ‘토지장터’를 횡단해 마을을 빠져나왔다. 초가인 주막과 대장간 난전 등의 상가가 줄지어 있지만 평일이어선지 장이 서지 않아 한산했다. 참고로 평사리를 둘러보는 데는 20분이 걸렸다.
▼ 평사리를 둘러봤으니 이제 둘레길로 되돌아가야 한다. 아까 평사리로 들어오면서 횡단했던 1003번 지방도이다. 하지만 난 장터를 지나 마을 뒤편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앱의 도움을 받아가며 탐방로를 찾아나간다.
▼ 그렇게 4분쯤 걸어 대촌마을 근처(벅수 : 입석 0.9㎞/ 대축 3.1㎞)에서 둘레길을 만났다.
▼ 둘레길은 감나무 밭 사이를 헤집는다. 어른 주먹보다도 큰 감이 나뭇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봉감은 ‘과실 중의 으뜸은 감이요, 감 중의 으뜸은 대봉감’이라 할 정도로 색깔과 모양이 아름답고 감칠맛이 난다. 악양면은 삼면이 둘러싸인 분지형으로 바람의 피해가 적고, 겨울이 따뜻해서 품질이 우수한 대봉감을 생산하기 적격이란다. 감칠 나는 맛과 색깔, 아름다운 모양이 뛰어나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까지 됐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감나무 사이로 한참을 오르면 입석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다시 만난다. 이곳도 지리산둘레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하지만 벅수(원부춘 6㎞/ 대축 2.3㎞)는 평사리로 가는 방향을 빼먹었다. 역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헷갈리기 딱 좋은 곳이다.
▼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보문사 표지석이 서 있는 Y자 갈림길에서는 오른쪽 위로 간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섬진강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입석 상저수지’ 부근에서는 평사리 들녘과 칠성봉, 섬진강 건너 광양 백운산과 억불봉까지도 눈에 담을 수 있다.
▼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형제봉(1115.5m)이 우뚝 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최근에 새로 놓았다는 출렁다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둘레길에서 조금 비켜나 있으나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이다.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 비경, 섬진강 건너 우뚝 솟은 백운산의 자태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는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저 감밭은 제주도처럼 긴 막대기로 입구를 막았다. 제주도의 막대기(정낭)는 그 숫자로 주인의 근황을 나타낸다. 막대기 하나는 금방 돌아오고, 둘은 저녁, 셋은 멀리 여행을 떠났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나저나 ‘감에 손대지 말라’는 메시지일 거라는 내 설명에, 함께 걷던 이가 요즘 누가 농작물에 손대냐며 언성을 높인다. 내 생각도 같다. 하지만 아무리 당부해도 꼭 손을 대는 이들이 있으니 문제 아니겠는가. 언젠가 농작물 절취에 견디다 못한 마을주민들이 둘레길을 막아버린 곳도 만나지 않았던가.
▼ 가파른 콘크리트 임도가 계속된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지형이지만,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 최참판댁에서 35분. 쉼터(벅수 : 원부춘 4.9㎞/ 대축 3.6㎞)를 만났다. 굵은 서어나무 그늘에 평상과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바로 아래엔 화장실까지 들어앉혔다. 참! 완주 인증을 위한 스탬프보관함도 이곳에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 일이다.
▼ 100m쯤 더 올라가면 삼거리(벅수 : 원부춘 4.8㎞), 둘레길은 이곳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핸드폰의 앱은 이곳의 높이를 245m로 찍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고도를 500m나 높여야 한다.
▼ 산책로 수준으로 이어오던 둘레길이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산길로 변한다. 그러니 가파를 수밖에 없다. 곳곳에 침목계단을 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참! ‘토지’ 속 최참판댁 별당아씨는 구천이와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든다. 그렇다면 숨 헐떡이며 오르던 그네들이, 이 길 어디쯤의 바위 턱에 앉아 가쁜 숨을 내 쉬었을 수도 있겠다.
▼ 산길은 울창한 서어나무 숲을 지난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저 숲은 고단한 행군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면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立冬). 이파리를 다 떨구어버린 북녘의 나무들은 빈가지만 허공에 매달렸지만, 남녘의 지리산은 이제야 단풍이 무르익는다.
▼ 서어나무의 하얀 뿌리가 맹수의 발톱처럼 대지를 파고든다. 남세스럽게도 아랫도리를 뽀얗게 드러낸 것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 저 바위는 ‘말바위’라고 했다. 그런데 요리조리 살펴봐도 말의 형상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지천명을 넘긴지 스무 해나 지났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멀었나보다.
▼ 시간이 지날수록 산길은 허리를 곧추세운다. 산길 주변의 바위도 그 숫자를 늘려간다. 그러다가 사면에 길게 누워 있는 상사바위를 지나면 하늘이 살짝 열리면서 형제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 쉼터에서 50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20분)만에 형제봉 능선의 안부인 ‘윗재(해발 621m)’에 올라섰다. 이곳은 지리산둘레길과 지리산등산로가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른쪽 능선을 타면 신선대를 거쳐 형제봉, 왼쪽은 신성봉을 거쳐 고소산성으로 연결된다. 둘레길은 직진하다 오른쪽으로 형제봉의 북서면 능선을 휘감아 돈다.
▼ 이름표까지 떡하니 단 벅수는 이제 날머리까지 3.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 산행을 이어간다. 하지만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하산은 아니다. 이후로도 산 사면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참! 윗재 부근에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좁새바위 전망대’가 있다고 했는데 찾아보지는 못했다. 아니 당시는 그런 전망대가 있는 줄도 몰랐다.
▼ 바위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몸집도 아까보다 훨씬 더 부풀렸다. 산길은 그런 바위의 아랫도리를 에도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사이를 헤집는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위태롭게 걷기도 한다. 하지만 위험한 곳은 돌로 쌓아 길을 넓혔으니,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 그렇게 40분쯤 오르다보면 어느덧 ‘아랫재’에 이른다. 옛날 입석마을과 원부춘마을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라고 했다. 글쎄다. 조금만 에두르면 되는데 구태여 이렇게 높은 고개를 넘을 필요가 있었을까?
▼ 이번의 벅수(원부춘 2.4㎞)는 이름표가 없었다. 어디로 뻗어나가는 능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14코스(대축-원부춘)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747m)임은 분명하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하지만 저 길은 칠순을 넘긴 나에게는 버티기 힘든 고역이다. 퇴행성관절염으로 신음하는 내 무릎으로서는 가파른 경사의 너덜길이 길어도 너무 길기 때문이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주변 풍광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준다고나 할까?
▼ 숲은 단풍이 한창이다. 14구간(대축-원부춘) 전체로 보면 단풍이 많지 않은데 이곳은 노랗고 빨갛게 물오른 단풍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가을의 진수라는 단풍이 올라올 때보다 훨씬 더 짙어진 것이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단풍이니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에 풍덩 빠져보면 어떨까?
▼ 숲은 잎이 아기 손바닥처럼 작아 흔히 애기단풍으로 부르는 단풍나무가 주를 이룬다. 타오르듯 새빨간 단풍잎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보기 좋다.
▼ 단풍 숲이 끝나자 주변의 풍광도 볼품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돌너덜길도 함께 끝나면서 이후부터는 흙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 아랫재에서 1시간. 드디어 ‘원부춘’ 마을에 도착했다. 뒤로는 형제봉이 받쳐주고 아래쪽으로는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며 강 건너 백운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이름 그대로 풍요롭고(富) 따뜻한 봄날(春) 같은 동네다. 다른 한편으론 고려 때 한유한(韓惟漢)이 최충헌에게서 벗어나 숨어 두문불출한 곳이라 하여 ‘불출동(不出洞)’, 절(원강사)이 있고 부처가 날만 하다 하여 ‘불출동(佛出洞)’ 또는 ‘부처동’, 형제봉에 붙어 있다고 ‘부치동’ 등 이름도 다양한 산골마을이다.
▼ 하늘 아래 첫 집은 실용성 위주로 꾸며져 있었다. 식수는 계곡에서 뽑아온 듯하고, 작은 박스들을 연결해 텃밭을 만들었다. 한 평의 땅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산골마을의 형편을 보는 듯하다.
▼ 마을에 들어섰는데도 길은 여전히 기세가 사납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산비탈에 마을이 들어서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원부춘마을 주민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나 보다. 산 중턱. 그것도 가파른 비탈에 들어앉은 지형에 맞게 높다랗게 축대를 쌓은 다음 그 위에다 건물을 올렸다.
▼ 날머리는 ‘원부춘’마을(하동군 화개면 부춘리 326-2)
마을안길을 빠져나오면 트레킹이 종료되는 마을회관이다. 구간의 시·종점을 알리는 엠블럼(emblem)은 벅수(대축 8.7㎞←원부춘→가탄 13.2㎞)와 함께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11.04km를 걸었다. 소설 ‘토지’의 산실인 ‘평사리 최참판댁’을 다녀오느라 2km 남짓 더 걸었다. 소요시간은 4시간 10분. 높이가 750m나 되는 형제봉 능선을 넘느라 고생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에필로그(epilogue), 14구간(대축-원부춘)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평사리’이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토지’의 배경지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60년에 가까운 시간과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지역을 펼쳐놓지만 시작과 끝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박경리 작가는 작품을 탈고할 때까지 평사리를 방문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단 한번 진주여고 시절 이곳 출신 선배와 함께 평사리를 방문했던 기억이 머릿속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었단다. ‘토지’를 구상하던 중 공간적 배경에 만석꾼이 있어야할 정도로 넓은 평야가 있어야 한다는 점, 작품에 사투리(작가에게 익숙한)와 같은 문화적 요소를 녹여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다가, 넓은 논밭이 있던 평사리를 기억해내고 ‘토지’의 배경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후 최참판댁에서 열린 행사 때 평사리를 찾았다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지역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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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산(168.5m)-갈미봉(233m)-천태산(392.1m)
산 행 일 : ‘22. 9. 11(일)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의당면 일원
산행코스 : 가산주유소(현대오일)→시묘산→한일시멘트→갈미봉→천태산→동혈사→광덕사→동혈고개(소요시간 : 6.27km/ 2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인터넷에서 ‘천태산(天台山)’을 치면 영동의 ‘천태산(714.3m)’이 가장 먼저 뜬다. 그리고 양산의 천태산(630.9m)과 강진의 천태산(549.4m)이 뒤를 잇는다. 공주(392.1m)와 정읍(197.2m), 화순(482.5m)에서도 동명의 산들이 나름대로의 산세를 자랑한다. 오늘 오른 공주(의당면)의 천태산도 400m에도 못 미치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온 산의 모든 바위가 ‘구멍이 숭숭 뚫린 구리 색깔(‘銅穴山’으로도 불리는 이유다)’인가 하면,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동혈사’라는 천년고찰까지 품고 있었다.
▼ 산행들머리는 현대오일 ‘가산주유소’(충남 공주시 의당면 가산리)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세종 방면)을 타고 내려오다. 덕학교차로(의당면 덕학리)에서 691번 지방도(장군·의당 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산주유소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시묘산’을 오르지 않을 경우 1km쯤 더 가면 나오는 ‘언고개(송학2리)’에서 시작하면 된다.
▼ 산이 작아선지 단조로운 편이다. 송학리(언고개)나 덕학리(동혈고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들머리로 삼은 다음, 천태산을 찍고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코스가 짧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시묘산을 추가시키는데, 이때는 가산리(가산주유소)를 들머리로 삼는다.
▼ 주유소를 왼편에 끼고 돈 다음,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승용차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다.
▼ 들녘이 작아서인지 길은 3분이 채 되지 않아 산자락에 붙는다. 그리고는 왼쪽에 산자락을 끼고 이어진다.
▼ 길을 나선지 5분. 탐방로는 산속으로 파고든다. 이정표야 물론 없다. 거기다 그 흔한 표지기(리본) 하나 매달려있지 않으니 눈대중으로 초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오른편으로 90도를 트는 지점’이자,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라면 대충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 오곡백과가 여무는 데 더없이 좋다는 백로(白露)가 ‘그끄제’였다. 어제는 ‘한가위’, 햅쌀과 햇과일 등으로 차례를 지내는 명절이다. 그런데도 저 들녘의 벼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춘래불사춘이라더니 올해는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인 모양이다.
▼ 인적이 끊긴 산길은 거칠었다. 잡목과 웃자란 잡초가 갈 길 바쁜 나그네를 자꾸만 붙잡는다. 그렇다고 길의 흔적까지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산행 길라잡이의 대세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앱이 만능이 될 수야 없는 노릇. 산꾼들의 눈은 아직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쫒아간다. 최신 기술에 고전적인 경험을 장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 ‘시묘산’은 2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그렇다고 마냥 쉬운 산이 어디 있겠는가.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이곳 시묘산도 역시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을 만나기도 한다.
▼ 숲속으로 들어선지 10분. 자그마한 봉우리를 만난 탐방로가 왼편으로 우회를 한다. 이어서 동쪽으로 난 능선을 타고 ‘시묘산’으로 간다. 특별할 게 없는 상황이지만 길 찾기에 중요한 지점이기에 거론해봤다. 갈모봉으로 가려면 시묘산 정상을 찍은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 5분쯤 더 걸어 시묘산(168.5m)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산’으로까지 분류될 형편은 아닌 듯, 그저 도톰하게 솟아오른 능선상의 한 지점이라고나 할까?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매달아놓은 표지기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겠다.
▼ 그러니 정상석이 있을 리가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선두대장을 맡은 ‘그린나래’님이 매달아놓은 따끈따끈한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세상의 모든 산을 다 올라보겠다는 ‘만산회’ 멤버들이 묶어놓은 리본들도 보였다. 그들의 놀이터랄 수 있는 강송산악회에서도 이곳을 다녀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 꽤 오래 산행을 함께 해온 반가운 이름도 만날 수 있었다. ‘1만 산’ 등정을 위해 쉼 없이 산을 오르던 ‘서래야 박건석’ 선생님이시다. 건강이 안 좋아 요즘은 산행을 못하신다고 하던데, 빨리 쾌차하셔서 산에서 다시 뵈었으면 좋겠다.
▼ 위에서 얘기하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진행한다. 산길의 형편은 아까보다 훨씬 나빠졌다.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게 7분쯤 내려섰을까 일행들이 갈 생각을 않고 웅성거리는 게 아닌가. 시멘트공장을 만들면서 생긴 절개지가 앞을 가로막아버린 것이다. 이런 때는 선두대장의 모험심과 경험, 그리고 대처능력이 필요하다. 대신 다른 일행들은 그가 내린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 선두대장의 탁월한 능력 덕분에 가장 안전한 루트로 내려설 수 있었다.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만든 트랙을 무시한 채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 덕분이다.
▼ 가파른 경사지를 미끄러지듯 내려서자 ‘한일시멘트 공주공장’이다. 아니 시멘트 제조공정은 ‘단양공장’에서 이루어지니, 이곳은 그 시멘트를 이용해 다른 제품을 만드는 공정일 것이다. 하지만 시설만큼은 단양공장에 못지않게 거대했다.
▼ 길은 한일시멘트 앞에서 둘로 나뉜다. 양쪽 모두 절벽에 가까운 절개지를 끼고 있으나, 먼저 다녀간 이들은 양쪽 모두에서 갈미봉 등산로를 찾을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선두대장은 우릴 왼편으로 인도한다. 그쪽이 더 또렷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첫 번째 모퉁이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정표는 물론 없다. 이곳이 들머리임을 짐작할만한 별도의 시그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튼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또 다른 산행(갈미봉·천태산)을 시작하는 셈이다.
▼ 또렷하진 않지만 길의 흔적은 찾을 수 있었다.
▼ 3분쯤 오르자 무덤이 나오는가 싶더니, 곧 이어 ‘국가지점번호판’까지 세워진 정규 탐방로가 얼굴을 내민다. 참고로 국가지점번호는 산악·강변 등 도로명 주소가 부여되지 않는 비거주지역의 위치정보를 표시하는 번호로, 한글 2자리와 숫자 8자리로 구성된다. 재난·사고 등 응급상황 발생 시 설치된 국가지점번호판의 번호를 119에 알려주면 신속한 현장출동이 가능하다.
▼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파른 구간마다 침목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산비탈에는 밧줄난간까지 둘렀다. 지자체에서 꽤 많은 예산을 쏟아 부었나 보다.
▼ 아니나 다를까 ‘세종시계 둘레길’에서 내건 팻말이 눈에 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시계를 따라 내놓은 길이 151km의 ‘둘레길’로, 모두 12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이곳은 ‘4구간(개척의 길 : 하봉교차로↔종고개)’일 것이다. 참! 근처에는 송학2리(은곡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임을 알리는 이정표(송학2리 1㎞/ 동혈사 3.7㎞)도 세워져 있었다.
▼ 오른쪽 산비탈은 철망울타리를 쳐 한일시멘트로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용으로 여겨지는 샛문도 보인다. 아까 시멘트공장 앞에서 오른편으로 올라왔을 경우 저곳으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 이때 한일시멘트의 야적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레미탈(remitar)’ 공장이라니 미세 모래를 쌓아두었을 것이다. 레미탈이 미장용 또는 타일부착용 자재(시멘트와 고운 모래의 혼합물)이니 말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14분,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났다. ‘세종시계둘레길’의 이정표(종고개← 3.3㎞/ 의랑초등학교↓ 2.7㎞)는 왼편이 4구간의 날머리인 종고개(의당면 유계리)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둘레길과 헤어지게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세종시계둘레길과 헤어진 산길은 서둘러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속도만 조금 떨어뜨린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한일시멘트에서 산길로 들어서서는 20분)만에 갈미봉 정상에 올라섰다. 밋밋한 육산(肉山)이긴 하지만 약간 뾰쪽하게 솟아오른 게 산봉우리다운 모양새는 갖췄다. 하지만 정상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도 없었다. 그저 삼각점(전의 456)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 갈미봉은 봉우리가 등산로를 약간 벗어나 있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니 주의한다.
▼ 그게 아쉬웠던지 리딩을 하고 있는 그린나래 대장이 정상표지판(갈미봉, 234m)을 매달아 두었다. 삼각점(233m)과 다른 높이를 적었다는 게 다소 아쉽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덕분에 인증용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 갈미봉을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팔라졌다. 이럴 때는 속도를 뚝 떨어뜨리는 방법 밖에 없다. 마침 시간까지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겠는가.
▼ 숨이 턱에 차서 오른다. 이때 코끝을 스쳐가는 한 줄기 향기. 하나 둘 개체수를 늘려가던 소나무가 언제부턴가 솔숲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숨을 들이킬 때마다 향긋한 솔내음이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건 당연.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확 사라져버린다. 솔향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품은 향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공간이 툭 트이는가 싶더니, 떠나간 무덤 대신 이정표가 터를 잡았다. 송학2리에서 2km쯤 떨어진 지점(동혈사까지는 2.7km)인데, 오른편으로 500m쯤 내려가면 가산사로 연결된단다.
▼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거리를 잘못 적었다. ‘동혈사’까지 2.1Km가 남았는데,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천태산은 0.5km로 적었다. 그게 눈에 거슬린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매직펜으로 ‘2’를 써넣어 2.5km로 바꿨다.
▼ 계속해서 가파른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굴곡으로 점철된다는 인생처럼...
▼ 얼마쯤 더 올랐을까 벤치를 놓은 쉼터가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는 동혈사가 0.9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보은사(월곡저수지)로 내려는 길이 나뉜다고도 했다. 그건 그렇고 저 운동기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설마 산에까지 와서 몸을 풀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 천태산은 공주의 4대 혈(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명산이다. 그러니 명당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듯하게 써놓은 저 무덤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하지만 죽어서 명당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는 동안 복 짓고 업 짓는 게 중요하지.
▼ 무덤은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배산임수’의 틀을 갖췄다. 그리니 툭 터진 조망은 기본. 세종특별자치시와 시를 둘러싼 산군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 이후부터는 고만고만한 오르막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는 말자, 가팔랐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고 여기면 되겠다.
▼ 그러다가 구호지점표시목(다바 6961-3953)이 있는 봉우리(앱은 355.9m를 찍고 있었다)에 올라섰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0분(갈미봉에서는 40분) 만이다.
▼ 2~3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헬기장이다. 하지만 사용하지 오래인 듯 공터엔 잡초만 무성했다.
▼ 헬기장에서 내려서면 운동기구까지 갖춘 쉼터가 나온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동혈사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정표(천태산 0.5km/ 등산로 3.7km)에는 ’동혈사‘가 나타나 있지 않으니 참조한다.
▼ 천태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왼편은 비닐망으로 울타리를 쳤다. 동혈사와의 경계를 따라 길이 나있지 않나 싶다.
▼ 잠시 후 올라선 봉우리는 통신시설로 여겨지는 철제구조물이 들어섰다. 이동통신국 아니면 무인산불감시탑이려니 했는데, 의외로 한전의 ’천태산 TRS기지국‘이란다.
▼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왼편에서는 아까 얘기했던 비닐망 울타리가 계속해서 쫒아온다. 그러다가 희미한 갈림길 하나를 만났다. 한전의 기지국에서 5분쯤 되는 지점인데, 이따가 동혈사로 내려갈 때 이 길을 이용하니 잘 기억해 두자.
▼ 갈림길을 지나면서 바위지대가 시작된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없던 산에서 나타난 바위들이 신기롭기만 한데, 거기다 생김새까지 범상치가 않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다.
▼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거기다 정상부분은 바위지대가 아니겠는가. 저 돌탑이 그 증거라 하겠다.
▼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갈미봉에서 1시간). 바위봉우리인 천태산 정상에 올라선다. 아니 꼭대기만 바위가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그중 가장 크게 보이는 바위에 정상석(392.1m)과 삼각점(전의 23)이 세워져 있었다.
▼ 천태산은 ‘동혈산(東穴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주의 동쪽 혈(穴, 공주에는 4개의 혈이 있다고 한다)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구리가 채굴되고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해서 ‘동혈산(銅穴山)’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광복 후 다시 본래의 이름(東穴山)을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 이제 하산만이 남았다. 하산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조금 거칠지만 직진(아래 사진)하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서 내려가면, 기암 좌측에 광덕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보인다. 다른 하나는 되돌아 내려가는 방법이다.
▼ 우린 앞에서 얘기했던 삼거리로 되돌아 와 흔적조차 희미한 오솔길로 파고들었다. 다운받은 앱은 양쪽 모두를 가리키지만 선두대장이 조금 더 가까운 코스를 택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 루트를 남에게까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산짐승, 그중에서도 날씬한 것들이나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팔랐고, 험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 엉덩방아를 두어 번이나 찧고 나서야 ‘동혈사(東穴寺)’로 내려설 수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동혈사는, 풍수지리에 따라 공주 지역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지어진 4대 혈사(穴寺)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헌에는 없지만 절의 역사는 백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웅진 천도 후 천태산의 남동쪽 사면에 조영된 석굴사원에서 비롯됐단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가 19세기 후반 다시 기록에 나타난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0년대에 옛 절터에서 50m쯤 올라간 곳에 새롭게 지어진 것들이다.
▼ 소문난 수도처의 특징은 시야가 툭 트인다는 점이다. 이곳 동혈사 역시 명품 조망이 펼쳐진다.
▼ 경내는 명심보감용 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화엄경·금강경·법구경·선어록 등 불가에서 주장하는 금과옥조들을 팻말에 담아 곳곳에 세워놓았다. ‘산길을 거닐며’ 가슴에 새겨두라는 얘기일 것이다.
▼ 대웅전 뒤에는 ‘자연석굴’이 있었다. 어느 불자는 저 굴을 ‘동혈(東穴)’로 적고 있었다. 웅진(熊津, 현재의 공주)을 보호하는 4개의 혈(穴)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굴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웅진이 수도로 존재했던 기간이 고작 63년에 불과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동혈사는 바위 벼랑에 기대듯 지어졌다. 때문에 대웅전과 나한전은 길고도 가파른 돌계단으로 연결된다. 그마저도 곧장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써가면서 겨우겨우 오른다.
▼ 나한전으로 오르는 도중 뻥 뚫린 구멍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옛날, 동혈사의 스님은 저 구멍에서 나오는 쌀 덕분에 탁발을 하지 않고도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단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인근에 퍼지면서 상황을 달라졌다. 어느 욕심쟁이 농부가 스님을 살해했고, 더 많은 쌀이 나오도록 구멍을 넓히자, 벼락이 치면서 쌀 대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벼락을 맞은 농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말이다. 과한 욕심이 화를 불렀다고나 할까?
▼ 계단이 끝나갈 즈음, 돌갓을 쓴 부처님이 절벽에 걸터앉아 있었다.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듯. 노송을 일산처럼 쓰고 있는 모양새가 팔공산의 ‘갓바위 부처’를 연상시킨다.
▼ 그 수행에 기라도 보태주려는 듯 ‘3층 석탑(공주시 유형문화제 37호)’이 뒤를 받혀준다. 고려 때 만들어졌다는 탑은 독특한 양식이다. 고려시대에는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어 저렇게 층수에 구애받지 않은 이형탑이 만들어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고려시대 양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는 걸 기억해두자.
▼ 계단의 끝은 나한전이다. 바위벼랑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제비집을 연상시킨다.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아난다·가섭을 삼존상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 주위에 십륙나한상을 배치했다.
▼ 나한전에서 내려다본 절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천년고찰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대웅전 뒤 느티나무가 이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거대한 몸집을 한껏 부풀린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하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조금 전에 살펴보던 돌부처와 삼층석탑이 보인다. 부처님은 (백제 왕도였던) 공주를 바라보고 계신다. 불사를 일으킨 이들은 백제 때, 그것도 웅진의 4대 혈사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저건 또 뭘까? 대웅전 근처에서 샛길로 빠져나오는데 거대한 암벽 아래 촛불을 켜두는 유리박스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다. 바위의 영험하던 기운이 사라져버렸단 의미일까?
▼ 절간을 둘러본 다음 동혈고개로 연결되는 임도를 따라 하산을 이어간다.
▼ 하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선두대장은 그냥 내려가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6분쯤 내려간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간다.
▼ 4분 후 능선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능선 너머에서 ‘광덕사’라는 또 다른 절간을 만났다. 동혈사와 광덕사는 능선을 가운데 두고 남북에 절집이 들어앉은 모양새이다. 동혈사가 따뜻한 양지에 자리 잡은 반면, 광덕사는 음지라서 겨울에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으로 변하기 딱 좋겠다.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절간이 들어설 위치는 아닌 듯. 절간의 살림이 곤궁해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하지만 주변 풍광만을 동혈사에 못지않았다. 거대한 입석이 절간을 보호하고 있는 등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간판도 만만찮다. 위세는 약하지만 ‘광덕종’이라는 종파의 본산이란다. 그래봤자 절간에는 인기척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 아무튼 전각은 여염집에도 못 미칠 정도로 허름했고, 인적 끊긴 절간은 장독마저 뚜껑이 열려있다. 외로운 약사여래상만이 그나마 온전하다고나 할까?
▼ 임도를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절간으로 연결되는 진입로치고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오자 동혈사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포장길과 만난다. ‘양극화’. 현대에 들어 대두되는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다. 삼거리에서 그 양극화를 보았다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 산행날머리는 동혈고개(공주시 의당면 덕학리)
2분쯤 더 진행하자 동혈고개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동혈사의 표지석이 절간의 위세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 거대하기 짝이 없다. 그나저나 오늘은 6.27km를 2시간 30분에 걸었다. 산길 대부분이 가파른 오르막이었던 점을 감한하면 꽤 빨리 걸은 셈이다. 산행에 이골이 난 산꾼들의 뒤를 쫒느라 꽤 서둘렀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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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13코스(우수영관광지-학상 마을회관)
여행일 : ‘22. 10. 22(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문내면 및 화원면 일원
여행코스 : 우수영관광지→청룡산→명량대첩비→양정마을→임하도 갈림길→예락마을→용정교→학상마을회관(거리 및 시간 : 16.5km, 실제는 13.16km를 3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3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해남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서해랑길의 특징인 바닷길에 더해 산길·들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걷는다. 덕분에 다도해의 멋진 풍광과 함께 해남의 풍요로운 들녘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의 유적지 중 하나인 우수영에서는 이순신장군의 애국충정에 더해,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까지 살짝 엿보게 된다.
▼ 들머리는 학상 마을회관(해남군 화원면 산호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49번 지방도와 77번 국도를 이용 장춘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장춘리)까지 온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개초길(장춘교차로↔화원면 화봉리)’로 들어서면 오래지 않아 ‘학상마을’에 이르게 된다. 사실 이곳은 13코스의 들머리가 아니다. 산악회에서 주차 여건을 감안 들·날머리를 바꿨고, 덕분에 들머리였을 우수영관광지가 졸지에 날머리로 변해버렸다.
▼ ‘우수영관광지’에서 출발해 ‘학상마을’에 이르는 16.5km짜리 구간이다. 하지만 산악회 결정으로 시·종점이 뀌었다. 우리 부부는 한술 더 뜨기로 했다. 집사람의 부실한 무릎을 핑계 삼아 3km를 줄여 ‘예락1방조제’를 들머리로 삼았다.
▼ 남쪽 방향의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예락1 지방관리방조제’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위한 내 배려지만, 이면에는 지루할 수밖에 없는 들녘 구간을 살짝 지나쳐버리겠다는 내 얄팍함이 숨어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 실제 출발지는 ‘예락1 지방관리방조제’. 문내면 예락리와 무고리 사이 바다를 막은 방조제인데, 현재 개·보수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 방조제로 막히면서 옛 하천(서심원천)은 자연스레 담수호로 변했다. 그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 이정목은 출발지를 변경한 내 결정이 3km를 거저먹었음을 알려준다.
▼ 반대편 바다에는 멋진 동산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산자락에 지중해풍의 마을을 품고서. 기획 당시부터 지중해식으로 디자인을 통일시켰다는 ‘무고마을’일 것이다. 이국적인 정취가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 참! 길을 나서기 전에 길을 찾는 방법부터 알아두자. 서해랑길의 방향표식은 노란색(정방향)과 군청색(역방향)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니 역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오늘은 군청색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으면 된다.
▼ 해남의 특징은 유난히도 간척지가 많다는 점이다. 예락1방조제가 만들어낸 예락리 들녘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확을 끝낸 저 들녘에서 거둬들인 벼는 대체 얼마나 될까?
▼ ‘농업은 과학입니다’. 시사 프로그램 패널(panel)들이나 들먹이던 얘기가 아닌지도 이미 오래다. 요즘은 거기에 ‘경제성’이라는 개념 하나를 더 보탰다. 그러니 벼농사보다 경제성이 뛰어난 작물이 있다면 갈아타는 게 정석일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저 비닐하우스가 그 증거일 테고 말이다.
▼ 안에서는 부추처럼 생긴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소금기가 남아있는 간척지에서 자생하는 ‘세발나물(잎이 가늘다는 뜻으로, 가는 줄기가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이라는데, 지난 2006년 해남에서 최초로 재배에 성공했다나? 덕분에 바닷가 주민들이나 먹어보던 겨울철 별미가 도시인들의 밥상에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요게 각종 비타민·무기질·섬유질이 풍부한데다, 칼슘·칼륨·천연미네랄까지 다량 함유한 게 알려지면서 수요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단다. 하긴 면역력을 높여주는 건강식품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 만추를 걷는 나그네에게는 수확기가 지난 감까지도 그림이 된다.
▼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본보기? 기생으로도 부족해 숙주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 길을 나선지 30분. 지형이 그물질하는 것처럼 생겼다는 ‘예락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예락리(曳洛里)의 4개 자연부락(예락·동리·양정·임하) 중 하나로, 대외적으로는 해남 천주교의 시발지로 유명하다. 1904년 우수영 관아의 좌집사 김병범·김보현·박내국 등이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해남 가톨릭이 시작되었다. 그 흔적은 1923년에 지은 ‘예락공소’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한다.
▼ 예락마을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다. 때문에 간척지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마을을 지나면서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구릉지가 바닷가까지 드넓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 밭은 온통 배추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속이 차오른 것들로. 김장배추의 35%를 생산하는 해남 배추의 위세가 느껴지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 전에도 얘기했듯이 해남에서는 심심찮게 ‘둠벙’을 만난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 ‘침대만 과학’이 아니라 요즘은 ‘영농도 과학’이다. 그러니 농가의 펌프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둠벙’에서 끌어올린 물은 저런 스프링클러를 통해 밭작물에 공급된다.
▼ 강원도의 고랭지를 연상시키는 구릉지는 바닷가까지 계속된다. 해남의 자랑인 배추밭도 끊어질 줄 모른다. 해남배추의 특징은 흰 눈이 쌓인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겨울에도 아삭하고 신선한 김치를 담아먹을 수 있단다.
▼ 바닷가를 따라 난 803번 지방도로 내려서자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이름만큼이나 수많은 섬들이 눈앞에 쫙 깔려있다. 상태도·장산도·안좌도 등 큼지막한 섬들이 여러 새끼 섬들을 꼭 껴안고 있는 모양새다.
▼ 왼쪽 방향으로 잠시 걷자 삼거리(우수영과 임하도가 좌우로 나뉜다)가 나타났다. 임하도 쪽으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 탐방로는 임하도로의 초대를 사양하며 왼편 바닷가를 따른다.
▼ 바닷가로 나가자 ‘임하교(林下橋)’가 눈에 들어온다. 임하도는 1986년 방조제 형태의 다리로 놓이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저 다리는 조류의 흐름을 트기 위해 옛 다리를 헐고 2010년 새로 건설했단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남 복 터진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복 터진 마을’이란 해남군이 개발을 위해 그 지역의 역사·문화·농업 자원을 활용하면서 내건 ‘브랜드’이다. 그 대상은 ‘예락마을’. 천혜의 개펄과 그 곳에서 생산된 토판염·세발나물 등 다양한 농수특산물, 주민 간 끈끈한 믿음(천주교)이 있는 복 터진 마을이란 속뜻을 담았다.
▼ 건물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민물장어·닭구이·하모샤브샤브·장어탕 등을 파는데,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성업 중이라고 한다. 참! 예락마을의 특산품인 ‘세발나물’도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 식당을 지나 방조제 제방을 걷는다. 길이가 500m도 넘는 거대한 규모지만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해남의 드넓은 땅은 대부분 ‘간척사업’에 의해 생겨났다. 간척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물론 대단위의 역사가 있긴 했다. 다만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됐기 때문에 지방 토호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 해남의 명문가인 ‘해남윤씨’도 간척사업으로 논을 일구어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
▼ 오른편으로는 다도해의 풍광이 펼쳐진다. 왼쪽은 진도, 오른쪽은 장산도일 것이다. 그 사이 상·하태도를 배경삼아 마진도·백야도·족도·평사도·고사도 등 자잘한 섬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 왼편은 방조제가 만들어 놓은 ‘담수호’. 가을의 전령인 억새를 배경삼은 호수와 들녘이 한 폭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방조제가 끝나갈 즈음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담수호 대신 나타난 저 붉은 풀밭은 대체 뭘까? 오래 전 증도에서도 저와 비슷한 풀들을 보았는데, 안내판은 무기질과 미네랄이 풍부한 ‘함초’라고 적고 있었다. 함초의 ‘함’은 짠맛을 의미한다. 소금을 흡수하면서 자라나 고혈압과 당뇨에 효능이 큰 것으로 알려진다. 아닐 것이다. 소금보다도 값이 더 나가는 함초를 저렇게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겠지?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임하교에서는 30분). 양정마을로 들어섰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예락리’로 편입되면서 4개 자연부락 중 하나가 됐다. 취락은 구릉지에 분포하지만 바다를 끼고 있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단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임하도(林下島)’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임하’라는 지명처럼 울창한 산림(곰솔이 주를 이룬단다)으로 인해 유명해진 섬이다. 섬은 낮고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졌다. 주민들의 생업이 농업과 어업을 동시에 하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인 이유이다.
▼ 양정마을 주변도 배추밭 일색이다. 하지만 ‘세발나물’을 기르는 듯한 비닐하우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세발나물’의 본명은 ‘갯개미자리’. 바닷가 땅이나 염전 주변 등 소금기가 있는 곳에서 자라는데, 푸른 잔디를 연상시키는 외관과 달리 짠맛이 돌면서도 약간 단맛이 난다. 요즘 트렌드인 ‘단짠(달고 짜고)’을 갖추었다고나 할까?
▼ 마을 뒤 ‘양정길(2차선 도로)’을 가로지른다. 바다가 보이는데도 사방은 온통 배추밭뿐이다. 그렇다면 ‘1% 명품소금’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천일염은 대체 어디서 생산된단 말인가. 전통방법(갯벌을 단단히 다지는 토판염)으로 생산되는 귀하신 몸으로 도시의 고급식당에나 납품된다던데...
▼ 해남의 구릉지를 걸을 때는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채소밭 사이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 밭에서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 스프링클러 물줄기가 언제 나에게로 향할지 누가 알겠는가.
▼ 양정마을은 천혜의 자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선지 구릉지를 지나 만나게 되는 드넓은 들녘에서는 벼 수확이 한창이었다.
▼ 염전이었던 듯한 너른 들녘에는 태양광 패널이 한 가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성을 쫒아가겠다는데 뭐라 하겠는가마는 내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이 꼭 아니어도 요즘은 식량에까지 ‘안보’라는 개념이 붙는다. 그만큼 자원이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력은 효율이 좋은 원자력 등에서 얻고, 염전이나 평야에서는 그에 맞는 자원을 획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 양정마을 앞 바다는 숭어·도미·갑오징어가 잡힌다고 했다. 채취되는 낙지·모자반·다시마 등도 가계 소득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어부는 대체 무엇을 잡고 있는 중일까? 내 눈에는 망중한을 즐기는 강태공쯤으로 보였지만...
▼ 작은 고개를 넘자 규모가 제법 큰 축사가 길을 막아선다. 그리고는 이정표(시점 7㎞/ 종점 12㎞)를 이용해 바닷가로 우회시킨다. 그렇다고 꼭 따를 필요는 없다. 빙 돌아가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축사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된다.
▼ 이정표의 지시대로 바닷가로 나섰다. 모퉁이를 돌아서 만난 바다는 양식시설로 한 가득이다. 한마디로 바다목장이라고나 할까? 전복으로 여겨지는 양식장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있는가 하면, 뗏목 같은 부대시설과 채취선 등이 뒤엉키면서 어수선한 풍경도 함께 연출한다.
▼ 숫제 바다목장의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특산물인 전복은 기본, 전복의 먹이사슬인 다시마양식장이 함께 들어섰는가하면, 김발을 매달기 위해 세운 지지대까지 눈에 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시설물은 우수영 인근 해역에서 성행한다는 광어양식장?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전복의 달인, 오션’ 간판을 내건 양식장(성패가 될 때까지의 양식 및 수확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이 얼굴을 내민다. 흔하디흔한 전복양식장이 뭐가 새롭겠는가마는 열대성식물로 치장된 주택이 이색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 주택 옆에는 전복 종자를 키운다는 비닐하우스가 여러 동 들어서 있었다. 전복 양식장은 어린 전복을 키우는 ‘육상수조 치패장(아래 사진)’과 바다의 가두리양식 성패장으로 이루어진단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양정마을에서는 50분), ‘서외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뒷산은 전라우수영 수군진성의 성지였다는 ‘망해산(73.7m)’이다. 전라우수영은 최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535호)로 승격·지정됐다.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니 이젠 성역화작업만 남았다. 발굴조사를 위해 파헤쳐진 저 산자락은 그 현장이다.
▼ 서외마을은 ‘우수영문화마을’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서해랑길 특유의 이정목(시점 5.6㎞/ 종점 13㎞) 말고도 ‘Soul project’지도와 벽화, 시비(초등학생이 지은 시를 적었다)가 세워져 있었다.
▼ 마을길은 직진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의 표식은 왼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또 다른 이정표(망해루← 363m/ 방죽샘↑ 186m)는 아예 다음에 만나게 될 유적지의 이름까지 적어놓았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산자락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무릎이 부실한 집사람에겐 곧장 직진해 충무사로 오도록 이르고 말이다.
▼ 하지만 망해루로 오르는 탐방로가 막혀있었다. 전라우수영(사적 535호)의 정밀발굴조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란다. 그렇다고 고지가 눈앞인데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길의 형편도 살펴볼 겸 산속으로 들어선다.
▼ 그런 내 판단은 옳았다. 발굴조사 현장은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로 인해 훼손된 구간도 모래주머니를 쌓거나 야자매트로 덮어 위험요소를 없앴다.
▼ 그렇게 8분쯤 진행하자 드디어 ‘망해루(望海樓)’. 망해산의 정상에 있는 전라우수영의 망루로 성(城)과 함께 성루로 건설되었다. 1665년 무렵 지어졌으나 그간 소실되었다가 발굴조사로 그 면모가 밝혀졌고, 이어서 2006년에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참고로 전라우수영에는 망해루 외에도 구 충무사의 남장대인 정해루(靜梅樓)와 북장대가 더 있었다고 한다.
▼ 이름과는 달리 망해루는 조망이 꽉 막혀 있었다. 하지만 우수영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운동기구를 배치했는가 하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섬을 의인화 한 초등학생의 시도 눈길을 끌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우수영 오일장(805m 전방)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이어서 길고 긴 통나무계단을 내려서자 ‘북문길(이정표 : 오일장 525m/ 망해루 280m)’. 길가 정자가 잠시 쉬어가란다.
▼ 803번 지방도(우수영로)를 건넌다. 이어서 궁전아파트 옆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오일장’이 나타난다. 서외마을로 들어선지 25분 만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 시장이 있다. 시장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며 또한 정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때(4일과 9일)만 잘 맞추면 해남의 특산물을 제 값에 살 수 있다. 하지만 장날이 아니면 장터는 텅 빈 공터로 남는다. 그러니 장날을 미리 확인해보고, 아니라면 트레킹 코스를 살짝 바꿔보면 어떨까? 망해루에서 내려와 803번 지방도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면 탐방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 ‘오일장’부터는 마을길을 따른다. 상점과 음식점, 금융기관 등이 몰려있는 우수영의 번화가이다. 간판을 기웃거리며 5분쯤 걷자 나지막한 동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꼭대기에는 ‘명량대첩비’를 모신 ‘비각’이 올라앉았다. 명랑대첩비는 숙종 14년(1688년) 동외리(문내면)에 세워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강제로 뜯겨져 서울 근정전에 묻혀 있던 것을 1950년 주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아왔다. 그러나 원래 자리가 아닌 청룡산(학동리)에 옮겨놓았다가, 2011년에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나라 빼앗긴 설움을 온몸으로 버텨낸 불굴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 비각 안에는 명량대첩비(보물 503호)가 들어있다. 이 빗돌은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승전비이다. 이순신이 원균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기고,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 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으로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무용담을 담았다. 당시 대제학이었던 이민서가 비문을 지었고, 본문은 명필로 이름난 판돈녕부사 이정영의 글씨로 새겨졌다. 상부는 소설 ‘구운몽’의 저자인 김만중의 글씨라고 한다.
▼ 건너편에는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들어앉았다. 둘 사이의 광장에는 옛 충무사에서 함께 옮겨 온 비석이 늘어섰다.
▼ 충무사(忠武祠)는 임진왜란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충무공 헌창(軒敞) 사업이 활발하던 1964년 명량대첩비가 있던 학동리에 세웠던 것을 2017년 이곳으로 옮겼다. 영정을 모시는 제각 등에 제한됐던 옛 충무사와는 달리 사당, 동·서무, 외삼문과 강강술래마당 등으로 확대되었음은 물론이다.
▼ 사당에는 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어떠한 느낌으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옛 충무사에 걸려있던 것(김은호 화백이 그렸다)을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 유적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탐방로를 따른다. 그리고 100m쯤 더 걸어 우수영의 동문을 상징화 했다는 조형물을 만났다. 이정표(법정스님 생가↑ 488m/ 동헌터→ 133m/ 명랑대첩비↓ 118m)는 사거리인 이곳에서 곧장 직진하란다. 하지만 난 오른편을 선택했다. 100m 남짓만 걸으면 ‘동헌터’를 만날 수 있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내 선택은 후회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동헌터’로 여길만한 공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볼 수밖에...
▼ 그러다가 문내면생활문화센터를 만났고, 직원으로 여겨지는 분으로부터 문화센터 부근 전체가 ‘동헌터’였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직진한다. 이어서 건물의 외벽과 담장을 벽화로 빼곡히 채워 넣은 아름다운 골목을 걷는다.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마을길로, 벽화·아트카페·생활사박물관·강강술래 아트로드·시(詩) 조형물 등 다양한 볼거리로 꾸며졌다니 천천히 걸으며 마음껏 음미해 볼 일이다.
▼ 이순신장군의 시도 눈에 띈다.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 바다에다 맹세하니 바다 속의 용도 감동하여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오르고, 산에다 맹세하니 초목도 놀라 소스라치네)로 시작되어 수이여진멸 수사불위사(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 : 원수들을 모조리 쓸어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내가 죽어도 무슨 여한이 더 있겠는가?)로 끝을 맺는다. 전장에 나서야 하는 마음가짐을 담은 ‘천보서문원 군저북지위(天步西門遠 君儲北地危)와 고신우국일 장사수훈시(孤臣憂國日 壯士樹勳時)’가 생략되었지만 이순신장군의 우국충정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 주민이 떠나버린 낡은 흙집은 문내면의 특산물인 목화로 만든 포목을 판매하던 ‘면립상회(面立商會)’로 탈바꿈했다. 안에 생활유품이 전시되어 있다니 일종의 생활사박물관인 셈이다. 영업이 중단된 현대부동산도 ‘복덕방’이라는 강강술래를 체험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 쌈지공원이 들어섰는가 하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낮게 이어진 지붕 밑 담벼락에는 명량의 역사에서부터 이어져온 우수영 사람들의 사연이 벽화로 담겼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사람들이 ‘부산에 감천이 있다면 해남에는 우수영이 있다’고 외치는 이유일 것이다.
▼ ‘정재 카페’도 눈여겨 볼만하다. ‘정재’는 부엌을 부르는 전라도 사투리. 우수영을 왕래하던 뱃사람들의 쉼터가 되어주던 ‘제일여관’의 부엌이 커피 향 가득한 카페로 바뀌었다. 작고 허름한 옛 부엌처럼 보이지만 부뚜막과 식초병·소쿠리·부엌살림 같은 옛 생활용품으로 꾸며놓아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짬을 내서라도 한번쯤 찾아볼만한 이유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법정스님 마을도서관’이 나온다. 스님이 태어난 터를 새롭게 꾸미면서 만든 공공도서관이다. 마을도서관 외에도 법정스님의 어록이 담긴 포토존, 생가터 기단 등이 함께 조성됐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이곳(문내면 선두리 우수영마을)에서 태어났다. 2010년 길상사에서 세수 79세(법랍 56세)로 입적하기까지 맑고 향기로운 삶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 떠난 우리 시대의 청빈한 스승이었다.
▼ 생가 터는 빈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스님이 부르짖던 ‘무소유’를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 무체(無體)가 유체(집)를 대신하고 있었다. 스님의 저서 ‘물소리 바람소리’에 나오는 글귀를 싣고서.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생가 터 위로 오르면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이 우리를 맞이한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스님의 말씀과 함께. 그 앞에는 불일암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나무의자를 본뜬 의자를 배치했다.
▼ 스님의 자필 비문도 눈길을 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법정스님이 ‘숫타니파타’를 해설하여 만든 책, 법정스님의 뜻대로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어진 책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 언제부턴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래 코뿔소의 뿔이 하나이듯, 우리네 삶의 수행도 홀로 해볼 일이다.
▼ 우수영항, 우수영 마을은 서남해의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라우수영이 설치되었다. 현재도 수륙을 잇는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제주를 오가는 정기 항로가 운영되고 있다.
▼ 문화마을은 ‘점빵’도 탄생시켰다. 1960~1980년대 동네 골목길에는 어디나 구멍가게인 ‘점방’이 있었다. 점방은 과자와 사탕, 아이스크림뿐 아니라 소주·콩나물·설탕·라면·비누 등 모든 생활용품의 보고였다. 또한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장소를 넘어 지역의 사랑방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했다. 하지만 골목 곳곳에 편의점이 들어오면서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갔고, 이제는 도심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점방이 문화마을과 함께 다시 태어나 어릴 적 소중한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해준다.
▼ 포구 앞 벽화로 채운 가림막이 문화마을의 끄트머리임을 알려준다. 아니 우수영의 입구이니 문화마을이 시작을 알려준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안내자는 물론 명랑해전의 영웅 이순신장군이다.
▼ 우수영을 빠져나오자 ‘선두리’ 마을표지석이 이별을 고한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강강술래길’의 산길구간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수영의 꽃이라며 강강술래를 소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처럼 위장하여 옥매산을 빙빙 돌며 군사가 많은 것처럼 인해전술을 펼친 유래가 있다며.
▼ 데크로드를 2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충무사연리지 198m/ 우수영항 464m)가 18번 국도의 아래로 들어가란다. 서해랑길은 옛 충무사와 연리지를 구경시킨 다음, 청룡산을 넘어 우수영관광지로 이어진다.
▼ ‘학동리’ 표지석이 세워진 다리 아래는 두어 개의 표지판이 길손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중 1962년에 지어져 20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갈 때까지 이순신장군의 위패를 모셨던 옛 ‘충무사’는 ‘강강술래길’로부터 소개를 받는다. 참고로 ‘강강술래길’은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과 조선 수군의 본영이었던 전라우수영을 잇는 길이다. 걸음마다 충무공과 조선 수군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 갯벌의 무늬가 하도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용(龍)을 쏙 빼다 닮았다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잘 생긴 용 한 마리가 하늘이 아닌 육지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 고개를 돌리자 우수영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라 우도 수군의 본영이었던 우수영은 일제와 해방·건국을 거치면서도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진도대교가 놓이면서 유동인구가 확 줄어들었고, 아는 사람만 찾는 곳으로 변했었다. 그러다가 영화 ‘명량’의 성공으로 이제는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됐다고 한다.
▼ 강강술래길(서해랑길과 겹친다)이 아닌 ‘명량로(옛 18번 국도인 듯)’를 따르기로 했다. 이미 걸을 만큼 걸어온 집사람이기에 산등성이를 넘어야하는 코스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이다. 그렇다고 나 혼자서 산길을 탈 수야 없지 않겠는가.
▼ 날머리는 우수영관광지(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8번 국도를 따라 걷다 진대대교 앞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 우수영관광지(단지 안 풍경은 지난 번 5코스 때 소개했다)이다. 13코스의 시점이었으나 역으로 걸은 덕분에 졸지에 종점이 되어버린 지점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13.16km를 걷는데 3시간 20분이 걸렸다. 볼거리가 제법 많았는데도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난이도가 낮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서해랑길’은 민관의 협력으로 이루어 낸 윈윈(win-win)의 대표적인 사례다. 지역 주민은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지자체는 나그네가 헤매지 않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니 그에 대한 감사는 여행자들의 몫이다. 우리 부부가 특산물판매점을 찾았던 이유이다. 그리고 김치·젓갈·미역 등 해남의 특산물을 두둑이 챙겼다. 거기다 점심까지 현지 식당에서 때웠으니 인사치례를 한 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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