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월산(含月山, 584m)

 

산행일 : ‘21. 4. 10(토)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과 황룡동의 경계

산행코스 : 기림사→왕의 길→용연폭포→수렛재→함월산→481m봉→불령봉표→왕의 길→기림사(소요시간 : 약 11km/ 3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12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함월산은 ‘품을 함(含)’ 자에 ‘달 월(月)’ 자를 쓴다. 달을 머금은 산이라 하겠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남쪽으로 토함산과 맞닿아 있고 북쪽의 운제산과는 같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전형적인 육산이라는 특징도 있다.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눈에 담을만한 바위들이 가끔 나타나는가 하면, 감포 앞바다의 시린 쪽빛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함월산을 찾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앞의 두 산에 비해 입소문을 덜 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산이 요즘은 사람들로 넘친다고 한다. 함월산이 품은 명찰인 기림사와 골굴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배후산인 함월산까지 오르는가 하면, 최근 복원된 ‘왕의 길’이 명품 둘레길로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 산행들머리는 ‘기림사 주차장’(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 399-1)

동해고속도로(울산-포항) 동경주 IC에서 내려와 국도 14호선을 타고 포항방면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림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동해고속도로의 시작점인 남포항 IC는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포항 IC’에서 국도 31호선으로 연결시키면 된다. 그러나 우리를 싣고 온 산악회의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경주 IC에서 내려올 경우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도 말이다.

▼ 함월산은 꽤 여러 곳에서 오를 수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국제신문’의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이 개척한 루트를 따랐다. 함월산의 산행뿐만 아니라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신문왕 행차길’이라는 요즘 한참 각광을 받고 있는 명품 둘레길까지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 홍예다리(虹橋)를 본뜬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보성 벌교나 여수 흥국사, 고성 육송정 등 홍교는 대부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귀중한 문화재이다. 고흥 옥하리나 강진의 병영성 등 그 밖의 홍교도 최소한 유형문화재이다. 그런 홍교를 본떠 다리를 놓은 것이다. 시멘트로 만든 탓에 조잡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홍교는 홍교가 아니겠는가.

▼ 잠시 후 일주문(含月山 祇林寺)이 얼굴을 내민다. 기림사는 2600년 전부터 부처님께서 머물러 계신 곳임을 표방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 1250인과 함께 계셨다’는 금강경(金剛經)의 첫마디를 인용했다. 기원정사(祇園精舍)로도 번역되는 그 ‘기수급고독원’이 바로 이곳 기림사라는 것이다.

▼ 기림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되어있다. 그러나 해방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로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다고 한다. 그러다 교통이 불편한 데다 불국사가 대대적으로 개발되면서 지금은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이다.

▼ 일주문 옆에 몇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고 가는 것도 괜찮겠다.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원효대사와 기림사의 인연을 적었는가 하면, 기림사의 연혁과 다섯 가지 맑은 샘인 오정수(五井水), 그리고 기림팔경(祗林八景)에 대한 설명판도 따로 세웠다.

▼ 절에 왔으니 경내부터 우선 둘러볼 일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천왕문(天王門)이 중생일 맞는다. 사찰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으로 네 명의 천왕(天王)을 모시는 곳이나 그보다는 전각 앞의 소나무가 더 눈길을 끈다. 저 늙은 소나무 아래로 수맥이 흐르는데, 음용하면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명안수(明眼水)로 불린단다. 위에서 말한 오정수 가운데 남방(南方)이기도 하다.

▼ 가람의 금당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833호)이다. 오랜 연륜 만큼이나 단청의 색깔이 바래 더 예스러운 이 건물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세웠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그동안 여러 번의 개축과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2년(철종 13년)의 큰 화재 때는 이 전각만이 화를 면하기도 했단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화마도 비로자나불만은 피해갔던 모양이다. 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958호)과 비로자나삼불회도(보물 1611호) 등 또 다른 보물들이 대적광전의 내부에 있었으나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 앞마당의 반송(盤松) 옆에는 석탑 하나가 외롭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205호인 ‘기림사 삼층석탑’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올렸다. 1층 바닥돌이 묻히고 머리돌 일부가 없어졌으나 나머지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참! 이 탑의 아래로도 수맥이 흐른다고 했다. 음용하면 기골이 장대해지고 힘이 넘친다고 해서 ‘장군수(將軍水)’로 불린다. 기림사 오정수(五井水) 가운데 중방(中方)이기도 하다.

▼ 대적광전의 맞은편에 있는 진남루(鎭南樓, 경북 문화재자료 251호)는 꽤나 큰 건물이다. 이름은 누각이지만 누각처럼 생기지 않고 맞배지붕을 했다.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활동의 중심사원이었다고 한다. 이 때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썼던 건물이다.

▼ 이 일대는 가람의 핵심이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藥師殿, 경북 문화재자료 252호)과 맞은편에 진남루(鎭南樓), 오른쪽으로 응진전(應眞殿, 경북 유형문화재 214호), 수령이 500년 넘는다는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터가 있다.

▼ 기림사의 또 다른 한 축은 ‘유물관(祇林遺物館)’이다. 기림사는 천축국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당시 이름은 임정사(林井寺), 이후 원효대사가 석가모니가 제자를 가르치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원정사에 착안하여 기림사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림사의 역사는 천 년 전으로 훌쩍 올라간다. 그런 역사를 품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유물관의 히어로는 1501년(연산군 7년)에 조성된 ‘건칠보살반가상(乾漆菩薩半跏像, 보물 415호)’이다. 반가좌(半跏坐)로 앉았는데, 원통형 보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을 하고 있다. 이밖에도 자현장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모습을 나타낸 지옥시왕도가 눈길을 끈다. 상단에는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명의 지옥 왕들이 심판을 하고, 하단에는 망자의 몸에 못을 박거나, 절구에 넣고 찧거나 혀를 빼내어 쟁기로 가는 등 옥졸들에게 죄를 받고 있는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화정당(華井堂) 옆에는 돌샘이 있었다. ‘서방 화정수(西方 華井水)’라는 이름표를 달았는데, 음용하면 폐부의 기운을 다스려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해준단다.

▼ 꽃밭 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동자승이 귀여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기림사 경내는 이처럼 꽃밭과 소품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거기다 건물 앞에 세워놓은 주련(柱聯)들도 색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 일주문으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절간 뒤로 빠져나가도 탐방로와 연결된다). 이때 냇가에 세워놓은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호암천 건너 옛 동암(東庵, 東溪庵)에 오탁수(烏?水)가 있다는 것이다. 까마귀가 바위를 쪼아대자 물이 솟아나왔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다섯 가지 맛을 내는 물로 유명한 기림사의 오정수(五井水) 가운데 동방(東方)이기도 하다. 오정수의 나머지는 아까 보았던 화정수(西方)와 장군수(中方), 명안수(南方), 그리고 차를 끓여 마시면 맛이 으뜸이라는 북방 감로수(北方 甘露水)가 있다.

▼ 탐방로는 호암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이 구간은 여러 번에 걸쳐 갈림길을 만나는데 감로암(甘露庵) 앞의 첫 번째 갈림길에서 우린 또 하나의 오정수를 만났다. 바위에서 나오는 석간수로 하늘에서 내린 단 이슬 맛이 난다는 ‘북방 감로수(北方 甘露水)’이다. 안내판은 차를 다스리면 그 맛이 뛰어나다고 적고 있다. 우윳빛이 돌아 유천(乳泉), 단맛이 나서 감천(甘泉), 단이슬 감로와 같다고 해서 감로수(甘露水)라 부른단다.

▼ 산행을 시작한지 18분, 처음으로 만난 이정표(모차골→ 5.1㎞/ 기림사 주차장↓ 0.9㎞)는 우릴 오른편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왼편으로도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기림사에서 곧바로 빠져나오는 길이다.

▼ 조금 더 걸으면 ‘공원지킴터’다. 맞다. 이곳 함월산은 경주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아니 경주시 일원은 전체가 국립공원이다. 다른 국립공원들처럼 산이나 바다 등 자연경관이 아닌,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문화유산으로 이루어진 특별한 공원이다. 도시 전체가 벽 없는 박물관으로 보면 된다.

▼ 탐방로는 그야말로 곱다.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봄이 무르익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산벚꽃까지도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T자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자 이곳이 ‘신문왕 호국행차길’임을 알리는 커다란 목판이 눈에 띈다. 현대인들의 걷기 열풍은 오랫동안 자연의 품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옛 길을 사람들 앞에 드러냈다. 만파식적의 전설이 내려오는 ‘신문왕 호국행차 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왕의 길’로도 불리는 이 둘레길은 경주시내 월성에서 시작해 월지·능지탑·황복사지·명활산성·덕동호·추원마을·모차골·수릿재·세수방·용연폭포·기림사·골굴사·감은사지·이견대를 거쳐 문무왕릉까지 이어진다. 이중 ‘신문왕 호국 행차길’은 추원마을에서 기림사까지 편도 약 6㎞를 걷는 길로 석탈해가 신라로 들어왔던 길이자 문무왕 장례 행렬이 지나갔고, 신문왕이 마차를 타고 아버지 문무왕 묘를 찾아가 나라를 구원할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한 충효와 호국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 ‘왕의 길(신문왕 호국 행차길)’은 신문왕이 부왕의 능침(대왕암)에 나아가 호국룡으로부터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지켜줄 옥대와 만파식적을 받아서 돌아간 옛길이다. 경주국립공원관리소가 1500년 묵은 옛길을 공들여 복원했다. 기림사에서 시작한 이 둘레길은 용연폭포와 불령고개, 세수방, 수렛재, 모차골을 지나 추원마을로 이어진다.

▼ 탐방로는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이정표나 등산로안내도는 물론이고, 지명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을 곳곳에 세워 왕의 길을 찾은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거기다 함월산에서 식생하고 있는 동·식물과 물고기에 대한 안내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좋은 체험학습이 될 수 있겠다.

▼ 계곡을 따라 잠시 올라가자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계곡을 가로질러 목재 덱이 이어져 있다. ‘왕의 길’. 아니 함월산이 자랑하는 볼거리인 ‘용연폭포(龍淵瀑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름 그대로 용이 놀다가 하늘로 곧바로 차고 오르는 듯한 물줄기를 마주할 수 있다. 참! 폭포가 만들어놓은 깊은 못. 용연(龍淵)에는 멸종위기 2급 어류인 독종개가 서식하고 있다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 ‘삼국유사’에 따르면, 만파식적(萬波息笛)과 옥대(玉帶)를 얻어 궁궐로 돌아가던 신문왕은 계곡에서 마중 나온 태자 이공을 만난다. 옥대의 장식에 새겨진 용이 진짜임을 알아본 태자가 장식을 떼어 물에 넣자 순식간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생긴 연못이 용연(龍淵)이고, 그 연못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용연폭포다.

▼ 명색이 ’왕의 길‘인데 쉼터 하나 없겠는가. 용연폭포 상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의 냇가에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작은 쉼터(이정표 : 수렛재 2.5㎞/ 용연폭포)를 만들어 놓았다.

▼ 잠시 후 갈림길(이정표 : 수렛재 2.3㎞/ 용연폭포 0.2㎞)을 만난 탐방로는 널찍한 임도를 버리고 산속으로 파고든다.

▼ 때문에 길의 폭이 많이 좁아졌다. 경사도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숲속으로 길이 난 덕분에 푸릇푸릇한 봄의 향취를 더 가까이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록으로 물든 산하는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 ‘119’에서 세운 구호지점표시목이 특이해 카메라에 담아봤다. 현위치 번호(경주 26-07)와 국가지점번호(마마 7051-6233) 등의 기본적인 정보 외에도 진행방향의 표시와 해발고도까지 적어 넣었다. 이정표와 고도표까지 겸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 완만한 오르막길이 잠시 계속된다. 그러더니 불령(佛嶺)이라는 작은 고갯마루(이정표 : 수렛재 1.6㎞/ 용연폭포 0.9㎞)에 올라선다. 쉼터에서 15분 거리인 이곳에는 소중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불령봉표(佛嶺封標)’가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입산을 금한다’는 왕명을 새긴 바윗돌로 옆에는 안내판을 세워 불령봉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참! 이곳에서도 함월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수렛재에서 오르기로 하고 그대로 직진했다. 저 오솔길은 함월산 정상을 지나 하산할 때 걷게 된다.

▼ 봉표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 31년에 세웠다. 가로 1.2m, 세로 1.5m 크기의 화강석 표면에 ‘연경묘 향탄산인 계하 불령봉표(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라는 글귀를 새겼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묘(묘호 연경)에 대한 봉제사와 그에 따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숯을 만드는 산이니 일반인이 나무를 베는 일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불령봉표 일대는 조선시대 고급 숯인 백탄(白炭)의 생산지로 전해지고 있다. 백탄을 만들기 위해선 나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벌채를 막고자 봉표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 산비탈을 따르던 탐방로는 계곡을 서너 번쯤 건너기도 한다. 계곡 언저리에 밀식하고 있는 진달래들이 새하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집사람은 철쭉이라 우긴다. 진달래는 잎을 피우기 전에 꽃망울부터 터트린다는 특징을 내세우며 말이다.

▼ ‘왕의 길’은 한때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보니 어떤 곳에서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긴 여정에 지친 신문왕 일행이 잠시 쉬며 손을 씻었다는 ‘세수방’이 이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겨우내 떨어진 낙엽이 계곡을 덮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 탐방로가 갑자기 가팔라진다. 그러더니 절벽에 가까운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아슬아슬하게 올라간다. 맞다. 이곳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했던 주요 방어선이었다. 그러니 저 정도는 거칠어야 하지 않겠는가. 옛 사람들은 이곳을 ‘말구부리’라 불렀다. 길이 비탈진 탓에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구부러졌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말 뿐만이 아니라 왕의 행차도 이곳에서는 난관에 봉착했을 게 뻔하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만에 ‘수렛재’에 올라섰다. 신문왕이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갯마루이다. 681년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2년 후인 683년에 이 고개를 넘었다.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대왕암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 무렵 정국은 매우 어지러웠다고 한다. 자신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이 난을 일으켰고, 수백 년 동안 신라를 괴롭혀온 왜구의 준동도 늘 고민거리였다. 이에 대한 해답을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그의 아버지에게서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정표는 ‘모차골’까지의 거리를 1.4㎞로 적고 있다. ‘모차골’이란 신문왕이 탄 마차가 지나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차길이 모차골로 변했단다. 곁에는 ‘지명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수렛재와 모차골 외에도 용연폭포, ‘말구부리’, ‘세수방’ 등의 유래를 적었다.

▼ 이제 ‘왕의 길’을 벗어날 차례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타면 된다. 산길로 들어선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는 산책삼아 걸어왔지만 앞으로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길이 또렷한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 산길은 작은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서 함월산으로 향한다. 아니 비교적 가파른 오르막길을 길게 올랐다가 짧게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10분 남짓을 오르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특별히 눈에 담을 것도 없는데다 조망까지도 일절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봉우리다.

▼ 9분을 더 고생해서 올라선 봉우리(국제신문에서는 550m으로 표기하고 있었다)에서 우린 명품바위를 만났다. 공룡의 등줄기라도 되려는 듯 뿔처럼 생긴 바위 몇 개가 뾰쪽하게 돌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 생김새가 자못 빼어나서 ‘명품’이란 표현을 써봤다.

▼ ‘바위의 자태뿐만 아니라 조망까지도 일품이랍니다.’ 산책삼아 산을 올랐다는 현지 산꾼 부부의 자랑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바위 사이로 올라서니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부부가 자랑삼아 말하던 동부민요보존회수련원(그들은 국악학교라고 했다)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그 뒤를 받혀주고 있는 동대봉산과 무장봉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바위 무더기는 오른편으로 우회한다. 이어서 꽃망울을 활짝 연 진달래가 반기는 오솔길을 잠시 걸으면 드디어 함월산 정상이다. 수렛재를 출발한지 34분 만이다. 참! 정상 근처에서 만나게 된다는 ‘무장봉 갈림길’은 무심코 지나쳐버렸다. 수렛재에서 올라온 호미지맥이 무장봉 방향으로 흐르는 중요한 지점이지만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으니 어찌 알아보겠는가.

▼ 정상은 별다른 특징도 없고 조망도 없는 밋밋한 봉우리다. 그리고 정상인지도 확실치가 않다. 헬기장에 버금갈 정도로 널따랗지만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국립공원에서까지 내팽개쳤을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그게 아쉬웠던지 누군가가 돌무더기를 쌓고 그걸 지지대 삼아 판자를 세워놓았다. 서툰 글씨로나마 ‘함월산’이라 적었음은 물론이다.

▼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으로 오를 때와는 달리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조심조심 10분 정도를 내려서니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도 물론 이정표는 없다. 국제신문 취재팀은 이곳에서 왼편 ‘모차골’로 내려섰다. 하지만 우린 곧장 직진하기로 했다. 불령봉표가 있는 불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그게 10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숨이 턱에 차서 올라선 ‘481m봉’은 그야말로 전망대 일색이다. 꼭대기가 바위무더기들로 이루어져 있어 서는 곳마다 시야가 트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첫 번째 조망처에 서면 산자락 사이로 포항 지역의 쪽빛 바다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 반대편으로 나가면 이번에는 경주시 방면의 바다가 펼쳐진다. 태초의 빛 그대로 쪽빛 시린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 481m봉에서 내려서는 길 역시 많이 가팔랐다.

▼ 소나무가 많이 굵어졌다. 해를 두고 거듭 쌓여온 솔가리도 수북하다. 송이버섯이 자라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 하겠다. 그래선지 비닐 끈으로 금줄을 쳐놓은 곳이 많이 보였다.

▼ 짧게 올라선 또 다른 봉우리에는 눈에 담아둘만한 바위들이 두어 개 보였다. 참고로 이 길은 부산일보의 ‘산&산’ 취재팀이 답사했던 코스이다. 기림교(기림사 입구)에서 출발해 함월산 정상과 도통골을 거친 다음 기림사로 하산했는데, 이런 볼거리들이 그들의 발걸음을 이끌었지 않나 싶다.

▼ 걸터앉아 쉬기에 딱 좋은 바위들도 여럿 보였다. 쉬면서 조망까지 즐길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 이후로는 평범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저 화사하게 피어난 진달래에 눈 맞추며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흥이라도 나면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면 될 일이고 말이다. 다만 이 구간은 송이 채취지역이라서 가을철에는 피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40분 내려서자 드디어 불령고개다. 물론 함월산 정상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이젠 왕의 길을 따라 기림사까지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건 그렇고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20분이 걸렸다. 국제신문에서 산행거리를 11㎞로 적고 있었으니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대부분이 트레킹 코스인데다 산길 또한 걷기에 딱 좋을 정도로 완만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번 산행은 이동 중에 ‘골굴사(骨窟寺)’라는 사찰을 들러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기림사와 함께 함월산을 대표하는 천년고찰인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일주문도 ‘함월산 골굴사(含月山 骨窟寺)’라는 편액을 달았다. 골굴사는 신라 불교가 번창하던 6세기경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 일행이 12개의 석굴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인공 석굴사원이다.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석굴들이 특이해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기림사와 함께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어있다.

▼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재로 폐사된 골굴사는 1990년 적운스님이 머물며 중창을 시작해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골굴사는 현재 사찰에서의 생활과 발우공양, 다도, 참선 및 명상 그리고 선무도(禪武道)를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일일체험과 1박 2일 템플스테이, 그리고 장기 입산 수련 등 다양하다니 기회가 되면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 경내로 들어가자 육중한 몸매의 포대화상과 개 모양의 상이 있다. 개 모양의 상은 골굴사에서 유명세를 떨친 ‘동아보살상’이라고 한다. 겨울에 태어났다고 해서 ‘동아’라는 이름을 얻은 이 개는 골굴사에서 오래 길렀는데 일체 육식을 하지 않고 아침·저녁 예불에 꼭 동참하면서 절간의 명물이 되었다. 개가 늙어 죽자 그 영혼을 기리고자 동상을 세웠단다.

▼ 원융당(템플스테이 숙소)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마애불이 있는 골굴사 사찰이고 오른쪽은 선무도 대학과 화랑사관학교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근처에는 선무도 대학인 원효관도 있다. 그건 그렇고 소림사 하면 무술이 떠오른다. 한 때 중국영화에 자주 등장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에도 깊게 새겨졌다. 그 소림사처럼 무술을 연마하는 사찰이 바로 이곳 골굴사이다. 첨부된 사진은 선무도 대학의 숙소와 식당인 ‘마하지관원(摩訶止觀院)’이다.

▼ 법당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선무도(禪武道)’로 여겨지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상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선무도란 위빠사나(Vipasanna)라 불리는 수행법으로 본래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 하여 부처님 당시부터 전수되어 온 수행법이라고 한다. 이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방법으로 인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요가와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이란다. 범어사의 양익(兩翼)스님이 흩어진 관법수련을 체계화하여 승가에만 전수했고, 이를 적운스님이 전수받아 대중포교를 하면서 1985년 '선무도'라 칭했단다. 현재는 국내는 물론이고 멀리 외국에서까지 선무도를 배우기 위해 총본산인 이곳을 찾고 있으며, 14개 나라에 선무도를 배울 수 있는 지부들이 열려있다고 한다.

▼ 골짜기 끝에 이르자 골굴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수십 미터의 응회암 절벽에 크고 작은 동굴이 군데군데 숭숭 뚫려 있고, 그 절벽의 맨 꼭대기에는 모나리자처럼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여래불이 앉아 있다. 참고로 응회암(凝灰岩)은 바위가 비바람에 깎여 나갈 때 암석에 포함된 크고 작은 암석덩어리들이 함께 빠져나간다. 그 자리가 수많은 구멍들을 만들고 이 구멍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고 발달(타포니)하게 된다. 골굴암은 이러한 타포니 동굴을 다듬어서 석실을 만들고 불상을 배치한 석굴사원이다.

▼ 골굴사의 핵심은 높은 응회암 암벽을 깎아서 만든 마애석불이다. 높은 암벽의 꼭대기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조각했는데, 현재 유리로 지붕을 씌워 보호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제작한 다른 지역의 석불들과는 달리 이 부처님은 모래 성분이 다량 함유된 응회암에다 새겼고, 응회암의 가장 큰 약점인 풍화작용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지붕을 씌운 것이다.

▼ 골굴사의 금당(金堂)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석가모니불 대신 비로자나불을 모시기 때문에 이름 또한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을 쓴다. 이 전각의 앞마당에서 선무도(禪武道)의 공연이 펼쳐진다는데 때(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후 3시)를 맞추지 못해 구경하지는 못했다.

▼ 대웅전을 지나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굴 앞에 전각을 세워 놓은 관음굴이 나타난다. 옛 모습을 한 유일한 석굴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화려하게 단청된 여러 채의 전각과 이를 연결하는 회랑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골굴 석굴도’와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단다. 특히 정시한은 석굴사원이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찬탄하기까지 했단다.

▼ 줄을 잡고 관음굴 오른쪽 바위 절벽으로 올라가면 작은 암문(岩門)이 나타난다. 몸을 비틀어야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골굴사의 얼굴마담인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이 빚어낸 ‘천왕문(天王門)’ 또는 ‘불이문(不二門)’이라 할 수 있겠다.

▼ 좁은 틈새를 비집고 나오면 골굴사 투어의 백미인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518호)이다. 마애불은 뚜렷한 얼굴 윤곽과 잔잔한 미소가 압권이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4m에 폭이 2.2m 정도.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세련되지 못한 옷 주름 때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하고,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 주름, 겨드랑사이의 ‘V’자형 옷 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원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 마애불 앞에 서면 조망도 압권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골굴사 주변과 감포로 나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 골굴사의 특징은 암벽사원이라는 점이다. 마치 사람의 뼈처럼 생긴 자연절벽에 12개의 굴을 뚫어 불상을 모시기도 하고 그 안쪽 벽에 불상을 새기기도 했다. 이 굴들은 천축국에서 건너온 광유선사가 자신의 나라 사원양식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의 ‘둔황석굴’로 불리는 이유이다.

▼ 관음굴을 내려오면 산신당이다. ‘산신당 여궁(女宮)과 남근바위(男根石)’에 대한 설화를 낳게 한 주인공이다. 자손이 귀한 집안 부녀자들이 남근바위에 참배하고 산신당 앞 여궁(女宮)을 깨끗이 청소한 후 판자를 깔고 철야기도를 하면 후세를 얻는다는 것. 흥미로운 얘기라서 주변을 살펴봤지만 남근바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 암자들을 둘러본 다음 ‘오륜탑(五輪塔)’이 있는 언덕 위에 오르면 골굴사 투어는 끝난다. 1500년 전 인도로부터 불법을 전래한 골굴사의 창건주 광유성인을 받들기 위해 조성된 이 탑은 대일여래불(大日如來佛)을 상징하는 만다라(曼茶羅)로 모든 덕과 지혜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단다. 안에는 태국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佛舍利) 3과를 봉안했다. 그래선지 탑의 앞에다 꽤 많은 의자들을 배치했다. 템플스테이의 수련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