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천산(藥泉山, 210.8m)-월방산(月芳山, 360.1m)

 

산 행 일 : ‘22. 11. 5()

소 재 지 : 경북 문경시 산양면 및 호계면 일원

산행코스 : 봉정1리 입구봉정1(굴골)월방산봉천사3층석탑약천산산양농공단지(소요시간 : 7.58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백두대간에서 갈려나온 운달지맥에 놓여있는 산들로 전형적인 흙산이다. 해발이 400m에도 못 미치니 높지도 않다. 하지만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200년 이상 묵은 노송 백여 그루와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이게 봉천사의 주지스님에 의해 스토리텔링으로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고인돌 같은 선사시대 유적을 비롯해 삼국시대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산신각, 최근 복원된 삼층석탑, 마애미륵불·약사여래상·마애관음상 등 역사적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번쯤은 다녀올만한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봉정1리 입구(경북 문경시 산양면 봉정리)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IC에서 내려와 문경시가지를 관통(3번 국도의 대조교차로에서 34번 국도의 반곡IC교까지)한 다음 34번 국도로 진정삼거리(산양면 진정리)까지 온다. 좌회전하여 923번 지방도로 바꾸면 잠시 후 봉정1 입구(봉정1리 버스정류장은 200m쯤 더 가야 나온다)에 이른다. ‘봉정1(굴골)’ 주민들이 표지석을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이 작아선지 단조로운 편이다. 지맥 종주꾼들을 제외하면 너나없이 봉정1 마을회관을 들머리로 삼는다. 오른편이나 왼편 중 어느 방향으로 시작하는가만 다를 뿐 월방산과 봉천사, 약천산을 둘러본 다음 마을회관으로 되돌아오는 원점산행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문경 시내에 있는 돈달산(273m)과 연계하기 위해 약천산에서 곧바로 산양농공단지로 내려갔다.

 왼쪽으로 난 농로(굴골길)를 따라가며 산행이 시작된다. 불승종 소속의 경선암에서 내건 입간판의 방향표시를 참조하면 되겠다.

 길은 확포장공사가 한창이다. 지나갈 때마다 동작을 멈춰주는 포크레인 기사께 감사 인사를 보내며 뛰다시피 지나쳤다.

 13분 만에 도착한 굴골(봉정1)’. 신라시대 정치가 고운 최치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에 마을 유래비와 함께 고운선생의 시비(詩碑)를 세워놓았다. 가야산 홍류동폭포 옆에 새겨진 글이라는데, 자신들의 조상인 점을 내세워 빗돌로 만든 모양이다. 시의 내용은 이랬다. <바위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말소리는 지척이라도 분간이 어렵구나/ 세속의 시비소리 행여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을 둘러치게 하였구나.>

 마을회관 앞에는 수령이 29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보호수) 한 그루가 서있었다. 오래 묵어 영험까지 띠었는지 나무 아래 제단까지 만들어놓았다.

 탐방로는 마을을 가로지른다. 반듯하게 지어진 주택들이 많을 걸 보면 굴골이 부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부티는 금방 드러났다. 남새밭에 일 나온 아주머니께 채소가 참 튼실하다고 말을 건넸더니 팔뚝만한 무 하나를 덥석 내미는 게 아닌가. 산행을 하다가 목이 마를 때 베어 먹으면 그만이라면서... 넉넉함이 불러다 준 인심 아니겠는가.

 봉정1(‘탑동이라는 자연부락일 게다)로 넘어가는 언덕배기로 오르면 곧바로 산길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왼쪽 방향의 산속으로 들어간다.

 자그마한 고개를 넘자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하지만 경사진 산비탈에는 길이 나있지 않다. 제대로 가고 있는 지가 의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두대장을 믿고 따를 수밖에...

 능선에 오르니 길이 제법 또렷해진다. 그렇다고 수월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길만 확실해졌을 뿐 사나운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향기 가득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면 길이 나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산행 길라잡이의 대세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앱이 만능이 될 수야 없는 노릇. 산꾼들의 눈은 아직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쫓아간다. 최신 기술에 고전적인 경험을 장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잠시 후 봉천 제1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봉천산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처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안내판의 지시대로 나가니 밧줄난간이 둘러쳐진 전망대가 나왔다. 그리고 봉천 제1에 걸맞는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지점인데도 산양용궁벌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것이다. 들녘을 감싸는 문경·예천의 산들은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에 주어지는 보너스이리라.

 저 들녘은 고구려의 유명한 장수왕이 다녀갔고, 여자문제로 복잡한 백제 개로왕도 다녀갔다고 한다. 견훤과 왕건의 운명을 건 싸움도 저곳에서 벌어졌단다. 승리한 왕건의 군사는 몰라도, 참패한 견훤의 군사들이라면 이곳 월방산의 산속으로 숨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전망대를 빠져나오는데 할매미소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봉천사 주지인 지정스님이 월방산을 너럭바위공원으로 꾸미면서, 주변에 널려있다시피 한 소나무·너럭바위·산신각·석실무덤·() 등에 저런 이름표들을 붙여오고 있단다. 그나저나 바위는 추억속의 할머니처럼 따뜻한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이밖에도 다수의 안내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말벌바위·낙엽아래두꺼비·두꺼비37바위·고래바위 등 이름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름표에 어울리는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바위의 숫자가 하도 많다보니 지정스님의 상상력에 한계가 왔던 것일까? 아니 내가 부처를 못 따라간 중생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길은 계속해서 오름질이다. 가파른 경사도 꺾일 줄 모른다.

 얼마쯤 올랐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월방산 정상은 왼편이다. 하지만 월방산의 또 다른 명물인 산신각을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망설임 없이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길은 산 사면을 헤집는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다.

 잠시 후 만난 방향표시지, 오른편으로 들어갔다 나오란다. 뭔가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10m쯤 들어갔을까 자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바위 벼랑에 걸터앉아 있다. 접근이 어려운 지형인데도 한술 더 떠 주위를 돌로 울을 쌓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신성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산신각이라 부른다고 했다

 문이 잠겨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안에는 큰 호랑이를 타고 있는 백발노인의 초상이 걸려 있다고 한다. 심성 고운 아낙네와 심술궂은 사내의 전설도 전해진다. 사내의 심술로 재난을 겪은 주민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 산신령께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산신각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지대가 높은 편이 아닌데도, 고산 준봉이 발아래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을 접하게 된다.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밧줄을 매어놓았다.

 오르는 도중 망양대라는 또 다른 전망대도 만날 수 있었다. ‘산양면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뜻을 지녔지 않나 싶다.

 길을 나선지 1시간10(산행을 시작한지는 50), 월방산 정상에 올라섰다. 분지형의 정상은 아담한 정상석과 안내판 몇이 지키고 있었다. 월방산은 나지막한 산이다. 또한 문경의 주산도 아니다. 하지만 천혜의 자연과 문화가 숨어있는 영산으로, 옛 사벌국의 진산이자 고대의 수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선지 옛적에는 이 산()을 경계로 주변 큰 마을의 이름들이 정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사람을 품었으니 봉서마을과 봉정마을, 반곡마을이다.

 정상의 소나무는 무당집 처마처럼 울긋불긋한 리본들로 뒤덮였다. 나무와 나무사이를 연결해놓은 비닐 끈도 보인다. 어떤 이는 저걸 무속인들의 흔적이라고 했었다. 실제로 그는 신물(리본에 적힌 글귀는 판독이 불가능했다)이 매달려있는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나온 소나무는 화합송이란 이름표를 매달았다. ‘부부의 금슬을 나타낸 작명이지 싶다. 부부가 속정이 깊으면 자녀를 많이 둘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트이지 않는 조망에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안내판의 지시대로 20m만 내려가면 시야가 툭 터지는 멋진 전망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경·예천의 산들에 더해 안동의 학가산과 의성의 비봉산까지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대체 어느 산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산을 시작한다. 봉천사 방향인데 길이 참 고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지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있다.

 8분쯤 걸었을까 봉샘(鳳泉)’ 안내판이 눈에 띈다. 옛날 봉황새가 마셨다는 우물일 것이다. 사람이 마시면 신선이 되어 무병장수한다는 그 신비의 우물 말이다. 거리가 가까우니 일단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만두는 게 옳겠다. 길이 나있지도 않을뿐더러 봉샘 또한 우물이라기보다 늪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할퀴고 찔리는 악전고투를 치러가며 내려선 봉샘은 실망 그 자체였다. 우물은 보이지도 않고 질퍽거리는 공터에 안내판 하나만 외로웠기 때문이다. 안내판은 샘을 정비할 때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사각의 통나무 틀이 발견되었다고 적고 있었다. 70년대까지는 수도관으로 물을 끌어 동네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탐방로로 되돌아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산길은 여전히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오른쪽 사면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산양삼 같은 귀한 약초를 재배하는 모양이다.

 조망이 터지기도 한다. 산양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월방산에서 30(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40), ‘봉천사에 내려섰다. 법당과 삼성각, 요사가 전부인 자그마한 사찰이다. 1998년 향림(香林)이라는 이곳 출신의 비구니가 지었다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 된 지금은 비구가 주석하고 있단다. 꽃으로 치장된 약사여래좌상은 절집꾸미기에 열심이라는 주지스님의 작품이지 싶다. 절집의 내부 구경은 그만두기로 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이(전두환 전 대통령)를 모시는 흔적까지 가슴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법당 앞 너럭바위(‘봉천대란다)는 조망의 명소다. 시야가 툭 터지면서 산양면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특히 소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해는 사진작가들의 촬영 포인트이기도 하단다. 거기다 고여 있는 물에는 반영(反影)까지 이루어진다나?

 봉천사를 빠져나오는데 140(400년으로 적는 이들도 많았다) 묵었다는 등치 큰 소나무(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뒤는 거대한 바위가 받혀준다. 병암(屛巖, 김현규의 雅號)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 저 바위를 아홉 겹 산봉우리로 비유하면서 자연이 만든 병풍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그 바위 한켠에 병암(屛巖)이라 새겨 넣었다.

 소나무, 바위와 함께 어우러진 병암정(屛巖亭)’은 한 폭의 산수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자는 병암 김현규(金顯奎, 1765-1842)가 후손들의 학문증진을 위해 1832년 지었다. 진사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병암정을 세웠다고 한다. 정면 2, 측면 1칸의 작은 규모인데도 온돌방과 마루를 둔 독특한 배치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란다.

 봉천사 주변에는 예상외로 바위가 많았다. 그런데 그 돌들 하나하나마다 이름이 붙어있다. ‘좌선대라는 저 바위처럼 생김새에 어울리게 지어놓았는데,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이름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긴 저렇게 많은 바위에 이름을 붙이다보면 상상력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수도 있겠다.

 백미(白眉)는 단연 오백나한이다. 오백나한이란 깨달음의 한 단계인 아라한과를 증득한 500명의 불교성자를 이른다. 이들은 한국·중국·일본 등지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주차장 앞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가 오백나한을 닮았다며 그런 이름을 붙여놓았다.

 봉천사를 세상에 알린 건 개미취이다. 주지인 지정스님이 절집을 찾는 발걸음을 늘리려고 일부러 심었다고 한다. 그게 몸집을 불리고 입소문을 타면서 올해는 축제까지 열렸단다. 푸른 가을하늘과 푸릇푸릇한 나무, 만개한 개미취가 조화를 이루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나? 하지만 입동을 앞두어선지 꽃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내 아쉬움을 눈치챘나보다. 게으른 개미취 한 그루가 이제야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갈색 들풀 사이에서 매일 깊어가는 가을을 붙잡고 있었나보다. 참고로 연보라색 여러해살이인 개미취는 꽃대의 작은 털이 마치 개미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말은 기억 먼 곳의 벗을 그리다이다.

 봉천사의 주변 풍경은 매혹적이다. 사찰 주변에는 300년 된 소나무만 50그루 넘게 있다. 동네의 지기를 채우기 위해 조성된 비보림(裨補林)이라는데, 지정스님이 이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잿봉서 송림(松林)’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마을 출신의 많은 남자들이 저 소나무 숲으로부터 정기를 얻어 입신양명했다는 얘기도 전하고 있다.

 이름 붙이기 행사는 숲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선대부송을 시작으로 이송정, 노인송, 한풍송 등 소나무의 생김새에 어울리는 이름을 다양하게 지어놓았다.

 곳곳에 세워놓은 시판(詩板)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황윤섭·강상률·권득용 등 문경에 기반을 둔 시인들이 주변 풍경이나 역사를 시로 읊었다.

 잿봉서(봉서2)’는 문경에서는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한다. 절간 아래 있으니 사하촌(寺下村), 즉 부처님의 법() 아래에 있는 마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마을 역시 쇠락이라는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진 못했다. 한때 사십여 세대 삼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살았지만, 그 영화는 지금 색 바랜 사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단다.

 잿봉서 마을 초입, 입간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조금 전 들렀던 봉천사가 고녕가야의 소도(蘇塗, 천신을 모시던 곳)라는 것이다. 상주·문경 지역에 위치했다는 고령가야(古寧伽倻)’를 이르는 모양이다. 봉천사 자리에는 소도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절간은 이미 빠져나왔다. 이젠 잿봉서와도 헤어질 차례이다. 그런데도 삼층석탑이 눈에 띄지 않으니 문제다. ‘얻고 싶으면 구하라고 했던가? 들일 나온 주민들 몇 분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눈에 띌 거라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구간에서도 몇 개의 안내판을 만날 수 있었다. 바위(곰바우·개바우·범바우·병풍돌)에 소나무(한풍송)에 샘(탑들샘)까지, 눈에 띄는 모든 사물마다 빠짐없이 이름을 붙였다.

 몇 걸음 더 걸으니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월방산의 단전을 차지하던 봉덕사가 남긴 유물이다. 천 년도 더 전에 어느 못된 중이 범바위 턱과 개바위 턱을 떼어내면 봉덕사가 흥성한다고 부추기더란다. 그 말을 믿고 두 바위의 턱을 떼어내니 천둥과 벼락이 떨어졌고, 결국에는 폐사되었다나? 외로운 석탑만이 옛 영화를 자랑하고 있는 이유이다.

 탑은 높이 솟은 거대한 자연암반을 깎아 조성했다. 때문에 지대석이 생략된 특수한 구조로 되어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제 말기 사리구절취단에 의해 도괴되었던 것을 1991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탑 내의 사리구(청자완·목제사리함·수정사리호·자색 비단 등 11)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에 의해 반환받았으나,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단다.

 천년지기 안내판 주변의 봉덕사 터를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작은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고갯마루에는 홍보용 입간판이 내걸렸다. 그런데 수탉 한 마리가 올라앉았다. 아니, ‘의 나라라고 적힌 걸 보면 봉황을 그리려다 저리 되었나 보다. 이곳 봉서리(鳳棲里)’를 봉황으로 나타낸 듯. ‘고녕가야의 오랜 전설’, ‘겨레 문명의 맥박소리라는 문구도 눈길을 끈다. 맞다. 부족국가 시절, 이곳 문경은 상주와 함께 사벌국(沙伐國)’의 영토였다. 가야시대에는 고령가야(古寧伽倻)’가 있었다는데, 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월방산 둘레길 안내도도 눈에 띈다. 월방산과 봉서1·2리 일대를 개략적으로 그린 다음, 그 위에다 이름이 있는 바위와 소나무는 물론이고 고대석실분·약사여래상·마애관음상 등 둘러볼만한 명소들을 사진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이 안내도를 참조해 찾아보는 것은 어려울 듯...

 탐방로는 다시 도로(봉서2)을 따른다. 2차선으로 널찍하게 뚫렸지만 지형지물을 건드리지 않고 내놓은 탓에 ‘S’자로 휘어나간 모양새가 여간 고운 게 아니다.

 객주 문학길도 개설했나 보다. ! 그러고 보니 반곡마을은 객주(김주영 작)의 시작점이다. 천봉삼을 비롯한 수많은 민초들이 꾸며가는 객주’, 반곡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유한 보부상들은 옹기를 지고 출발하여 용궁·개포장을 거쳐 안동·진보로 넘어간다. 창수령을 넘어 영해에서 어물을 떼어 오기도하고 소금을 지고 나르기도 한다. 보부상의 애환이 서려있는 길의 일부를 둘레길로 조성해 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봉천사에서 30(기웃거린 시간 포함), 또 다른 고갯마루(Daum지도는 수루재로 적고 있었다)에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오른편은 반곡2를 거쳐 문경시내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왼편으로 난 임도를 따른다. ! 그 사이로 나있는 운달지맥은 철망 문으로 막혀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임도를 따라 5분쯤 올라갔을까, 고갯마루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들어서란다. 핸드폰의 ‘GPX 트랙도 오른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하지만 계속해서 임도를 타는 게 옳은 방법이다. 오른쪽은 운달지맥을 하는 이들, 특히 지맥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꾼들이나 선택하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죽도록 고생만 했다. 길이 나있지 않다보니 잡목과 넝쿨식물들로 가득 찬 능선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GPX트랙마저 없었더라면 먼저 다녀간 어느 지맥 사냥꾼 말마따나 개고생을 할 뻔 했다. 이 구간에 놓여있다는 ‘222.4m도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음은 물론이다.

 거친 산속을 15분쯤 헤매다 다시 임도로 내려섰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랐더라면 2-3분이면 족했을 텐데 잘못된 판단으로 다리품만 헛 팔았다. ‘운달지맥을 탄 이의 트랙을 내려 받은 탓일 것이다. 참고로 운달지맥(雲達枝脈)’은 백두대간의 대미산에서 남으로 분기되는 능선으로 여우목고개를 지나 마전령에서 운달산으로 이어지고, 계속 남진하여 석봉산을 지나면서 고도를 낮춘다. 조항령을 지나 활공장(867m)을 살짝 들어 올린 후 단산과 월방산, 약천산으로 이어지다 금천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삼강교에서 맥을 다하는 약 48.8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능선을 계속 타는 운달지맥과 헤어져 이번에는 임도를 따랐다. 이어서 100m쯤 더 걸어 폐 축사를 만났다. 규모가 큰 것이 주인장이 한때는 축산왕의 꿈을 꾸었을 법도 하건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허로 변해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야은(冶隱) 선생만 읊을 일은 아닌가 보다.

 축사를 지나자마자 왼쪽 임도로 들어선다. 널찍한 임도이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 잡초가 무성해 길을 찾기조차 힘들 정도다. 아무튼 묘역 앞에서 임도는 산자락을 에돌아 능선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150m쯤 걸어 능선에 올라선다. ‘봉정리쪽으로 에둘러 온 운달지맥을 다시 만난 것이다.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지맥 종주꾼들이 많은지 길은 의외로 또렷했다.

 150m쯤 더 걸어 약천산(藥泉山) 올라섰다. 운달지맥의 마지막 부분으로 요 아래 가재골에 있는 약샘에서 이름을 빌려다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세 평 남짓의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오석으로 된 작은 정상석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봉긋하게 솟아올랐으나 육산의 특징대로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반곡마을 방향으로 가는 운달지맥과 헤어져, 추산마을 쪽 산비탈로 내려왔다. 헤어진 지맥의 형편은 잘 모르겠지만, 이쪽 길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산비탈은 경사가 심했고, 웃자란 잡초에 잡목, 거기다 넝쿨식물들까지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10분쯤 악전고투를 치른 다음에야 추산마을에서 산양농공단지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내려설 수 있었다. 200년 묵은 상수리나무(보호수)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고갯마루는 상수리나무를 중심에 두고 작은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다람쥐 조형물도 보인다. 상수리나무 열매를 주워 먹고 있는 모양새다.

 탐방로는 이제 임도를 따라 산양농공단지로 간다.

 5분쯤 더 걸어 산양농공단지에 도착했다. 산양면은 1949년도에 약관 22세의 나이로 문경군수를 지냈고 3공부터 5공까지 6선의 국회의원을 지낸  채문식 국회의장의 출신지이다. 그래서일까? 시골 공단 치고는 꽤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날머리는 산양농공단지 버스정류장(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농공단지를 지나면 국도 34호선’, 이후부터는 국도를 따라 문경시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난 버스정류장(산양농공단지)에서 산행을 끝내기로 했다. 인도가 따로 없는 대로변을 걸으며 목숨을 걸기보다는 버스로 이동하는 게 옳을 것 같아서이다. 아니 하시라도 빨리 식당으로 가서 문경의 특주인 호산춘(湖山春)’을 맛보고 싶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황희 정승의 후손이 손님 접대용으로 빚었다는, 자신의 호(湖山)에다 봄날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을 추가시켰다는 그 미주(美酒)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