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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36코스(향화도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

 

여행일 : ‘23. 9. 9()

소재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향화도항염전(옥실리)신흥마을내묘마을설도항합산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4.13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6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시종여일 걷는다. 이때 물때에 맞춰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갯벌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자칫 지루하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칠산바다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눈요깃거리로 삼다보면 트레킹은 어느새 끝을 맺는다.

 

 들머리는 향화도항(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읍으로 들어온다. 신풍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22번 국도(함평방면), 종산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808번 지방도(염산방면), 봉전교차로(염산면 상계리)에서 77번 지방도(해제방면)를 번갈아 타며 30km쯤 들어오면 향화도항에 이른다.

 칠산바다의 해안선, 아니 방조제의 둑길을 걷는 14km 길이 코스다. 오늘은 전 구간을 다 걸어보기로 했다. 앞세운 집사람과의 거리는 3km, 조금만 재촉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서해랑길(영광 36코스) 안내도는 칠산 갯길 300 탐방안내도와 함께 버스정류장(칠산타워) 옆에 세워져 있다.

 11 ; 28. 향화로를 따라 포구를 벗어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200m쯤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13.7km/ 시점 0.3km)에서 방향을 틀어 방조제로 간다.

 이때 칠산바다에 떠있는 목도가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또 둘이 하나로 돌아오는 요술 섬이다.

 옥실리 앞바다, 무동력선 여러 척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바다를 삶의 현장삼아 살아가는 어부의 작업장이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대무마을(옥실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서해랑길 36코스는 이런 방조제들을 번갈아가며 걷는 여정이다.

 고개를 돌리자 향화도항이 눈에 들어온다. 칠산대교가 놓이면서 항구는 제 기능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영광권역 해안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칠산타워만큼은 요지부동이다. 함평만과 칠산바다가 한꺼번에 조망되는 높이 111m의 전망대에 올라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들녘은 아직도 염기가 다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웃자란 갈대가 숲을 이룰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다.

 방조제가 끝나자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방조제는 아니지만 해안을 따라 길이 나있다.

 이즈음에서 우린 닭섬(kakaomap 닥섬으로 적었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닭을 닮았다는 섬이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섬은 민닭섬이다. 등대 위로 떨어지는 일몰로 유명한 곳이다.

 11 : 40. 길이가 700m쯤 되는 두 번째 방조제는 송촌마을(옥실리) 앞을 지난다.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은 염전으로 가득하다. 맞다. 영광군의 염전은 568ha로 전남 서남해안 염전(3007ha) 중 신안군 다음으로 많다. 소금도 전남 전체 생산량의 19%를 차지한다. ‘소금 염(), 뫼산()’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근원이기도 하다.

 토판염전으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흙판에서 소금을 만드는 친환경적인 토판염은 장판염전에서 추출한 소금보다 미네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염도가 낮은 데다 맛도 순해 요리에 그만이다. 그러나 장판염보다 품이 많이 들고 생산 날 수도 훨씬 짧아 수지 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한다.

 후쿠오카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 때문에 시끄러운 요즘. 사재기로 인해 금값이 된 소금은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그런데도 저 소금밭은 왜 놀리고 있는 것일까? 경제성을 이유로 토판염전이 장판염 생산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공간은 대하양식장 차지다. 오래 전, 소금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값싼 중국산 소금에 밀린 많은 염전이 문을 닫는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당시 선택했던 대체업종이 바로 저 대하양식이었을 것이다.

 왼쪽으로는 칠산 바다가 펼쳐진다. 연평도와 더불어 그 옛날 조기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1 : 50. 방조제는 장고도(이정표 : 향화도에서 2.67km)’를 만나면서 끝난다. 간척사업이 바닷가 작은 섬을 뭍으로 연결시켰다. 하지만 비탈이 심했던지 길은 신흥마을 쪽 내륙으로 에돌아간다.

 칠산 갯길 300의 탐방안내도가 눈에 띈다. 전국에 번지고 있는 걷기 열풍에 동참한 영광군이 조성한 둘레길이다. 모두 5개 코스(굴비길·노을길·백합길·천일염길·불갑사길)로 나뉘는데, 이중 불갑사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해랑길과 일치한다. 하나 더, 오늘은 4코스인 천일염길(향화도항-설도항-야월리염전-백바위해수욕장)’을 따라 걷게 된다.

 잠시 후 옥실4에 이른다. kakaomap 신흥마을로 표기하고 있으나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신옥·와룡·내묘·송정·미동·소무·송촌·대무)에는 끼지 않는다. 새로 생긴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은 꽤 넓은 담수호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칠산대교와 칠산타워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향화로2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가다 한우사육장인 성율농장(이정표 : 향화도에서 2.9km)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넘어 또 다른 방조제로 올라선다.

 꼬맹이 방조제를 지나면,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아니 곶부리와 곶부리를 잇는 게 방조제일지니 반대편 곶부리를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쥐섬이 눈에 들어온다. 생긴 게 쥐를 닮았는지는 몰라도, 생쥐만큼이나 작은 섬이다. 땅 투기로 뜨겁던 시절, 친구는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를 가보지도 않은 채 샀었다. 지금까지도 애물단지로 남아있다던 섬이 저런 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 : 08. 미동마을 앞 방조제로 올라선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방조제는 꽤 너른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미동마을과 송정마을 등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도 둘이나 된다.

 입질은 자주 있나요?’. ‘이제 막 왔답니다’. ‘뭐가 잘 잡히는가요?’. ‘안 잡아봐서 몰라요’. 강태공의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무미건조한 대화가 되어버렸다. 4년쯤 전 튀르키예의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만난 강태공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었고, 당시 난 팔뚝만한 물고기를 선물로 받기도 했었다.

 방조제가 끝나고 잠시지만 해안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잠시 후 해안에 다시 닿는다.

 12 : 20.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칠산갯길 300에서 이정표(장고도에서 2.96km)를 세워놓았다. 산자락을 향해 길이 나있는데도 서해랑길 방향표시는 오른쪽으로 가란다. 길이 끊겨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집사람을 따라잡은 기념으로 한 컷. 활짝 웃는 게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녀 뒤로 칠산바다가 펼쳐진다. 칠산바다는 꽃게··조기·새우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어족자원을 자랑한다. 이들은 아까 거론한바 있는 천일염과 만나 젓갈·굴비 등 2차 가공품으로 재탄생되어 영광 수산업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서해랑길은 바닷가와 이별을 고한다. 장고도에 이어 두 번째인데 내묘마을(옥실리)’을 향해 내륙으로 파고든다.

 썩 넓어 보이지는 않은 간척지는 갈대로 한가득이다. 아직도 염기가 덜 빠져나간 모양이다.

 잠시 후 이른 내묘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고양이 머리를 닮았다 하여 괴머리라 불렀으며, 그 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묘라 부른다.

 그렇지 않아도 꼬맹이 마을인데, 두어 곳은 아예 폐가로 방치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전라도를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움 인정과 풍요로운 자연을 보고 팔불여(八不如)를 말했다. 그중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영광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저런 풍경이라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일런지도 모르겠다.

 마을 뒤 고갯마루를 넘으면 또 다른 방조제가 반긴다. 길이가 1.5km나 되는 긴 방조제다.

 12 : 39-49. 둑길이 하도 길다보니 쉼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저런 정자가 세 개나 길손을 맞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에 논농사로 업을 삼는 신옥마을과 신오마을 등 옥실리와 오동리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앉았다.

 일주일 후면 추분(秋分). 둑길도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가을의 전령 인 물억새, 가을이 깊어갈수록 색이 짙어진다는 갈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KBS-2TV 건강 혁명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도 눈에 띈다. 2년 제작 과정의 장기 프로젝트로, 전국에서 모집된 30여명의 당뇨 환자들이 매월 23일의 캠프를 차리고 설도항의 아름다운 해변을 걸으며, 운동법·식습관·생활습관 등의 미션 수행을 통해 당뇨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공유하던 프로그램이다.

 13 : 02. 젓갈 생산지로 유명한 설도항(雪島港)’으로 들어선다. 멸치며 민어, 조기 등 수산물을 깔아놓은 좌판이 주욱 늘어서 있고 갈매기들이 자유로이 유영하는 작은 포구다. 하나 더, 설도는 원래 와도(臥島, 사람이 누워있는 모양새란다)라는 조그만 섬이었다. 1930년께 설도관문이 건설되면서 육지의 바닷가로 변했다. 이 와중에 누운섬 눈섬이 되었고, 이게 또 한자로 변환되면서 설도(雪島)로 굳어졌다.

 자그마한 포구는 선착장도 아담하다. 하지만 통통배부터 중형의 고기잡이배까지 정박하고 있는 어선의 크기나 숫자는 서해안답지 않게 컸다. 인근 어장에서 잡히는 수산물의 양이 그만큼 짭짤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설도는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6.25 전쟁 중 공산당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됐다. 그 현장에 기독교인 순교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독교인 순교탑을 세워 놓았다.

 설도항은 젓갈 생산지로 유명하다. 고만고만한 젓갈 가게들이 줄지어 섰다. 하지만 내 집에 들든 네 집에 들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호객행위가 없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 구입해도 맛과 가격이 같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여담 하나, 옛날 농사와 고기잡이를 함께 해야 하는 갯마을 어머니들에게 반찬 마련은 이중고였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미리 반찬을 만들어 놓을 수도 없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젓갈이다. 새우·송어 등 재료가 흔했고, 거기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설도항의 명물 젓갈타운은 고깃배 모양으로 따로 지었다. 앞바다에서 잡히는 새우·꼴뚜기·조개·멸치 등 각종 수산물에 천일염으로 간한 다양한 젓갈을 팔고 있음은 물론이다. ‘잡젓도 그중 하나. 황석어젓·밴댕이젓·곤어리젓으로 잡젓을 만들고, 풋고추를 담가 석 달 정도 숙성시킨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밥도둑이 따로 없단다.

 수산물판매센터는 젓갈타운과 함께 설도항의 주축을 이룬다.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신선한 활어와 꽃게·왕새우·낙지 등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안강망이나 닻자망으로 잡은 수산물을 수협을 거치지 않고 어민들이 직접 판매하기 때문이다.

 입주 상점들은 하나같이 영세했다. 커다란 수족관으로 치장된 다른 수산시장들과는 달리 작은 고무통들만 눈에 띈다. 그나마 수산물을 반도 채우지 못했다.

 13 : 10.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염산방조제의 둑길을 걷는다. 직진으로 뻗은 길은 차 한 대가 다닐 정도로 좁기 때문에 앞뒤로 오가는 자동차를 유의해 다니는 편이 좋다.

 이 구간은 자전거로 달려 볼 수도 있다. 염산면사무소에 비치된 약정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자전거(안전모와 무릎보호대 포함)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 사전예약도 가능하단다. 참고로 자전거 둘레길은 설도항에서 봉양들까지의 방조제(7km)와 염전 및 청보리밭을 감상할 수 있는 농어촌도로(5km)를 합쳤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덧 남도의 바다가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젓갈과 자연산 횟집으로 유명한 설도항에서의 먹거리는 덤이다.

 오른쪽으로는 방조제를 쌓아 만든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 봉덕산(295.6m) 자락에는 염산면 소재지인 봉남리가 들어앉았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봉남평야가 펼쳐진다. 1930년대 설도를 사이에 두고 옥실리와 야월리 방향으로 각각 방조제를 쌓았다. 이때 저 들녘이 생겨났고, 설도는 섬에서 육지로 바뀌었다.

 봉양들로 가는 방조제를 걷는다. 바다를 향해 줄곧 달린다고나 할까? 하나 더, 이 구간 역시 건강 혁명의 촬영지이다.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길가 들녘에서 생산되는 찰쌀보리·새싹보리·보리빵과 영광의 특산물인 청보리 한우·굴비 등이 제공됐다.

 졸지에 한나라의 공주로 둔갑해 남흉노로 시집가던 왕소군은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고 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유래다. 하지만 난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를 외친다. 여름철에 피어야할 금계국이 입추가 내일모래인데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봄꽃인 민들레도 한 몫을 거든다. 하지만 국내 산천을 접수해버렸다는 서양민들레가 아닌 순수 토종민들레로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꽃받침(총포)이 뒤로 젖혀져 있지 않고 곧게 감싸고 있으면 토종민들레라고 하지 않았던가.

 얼마쯤 걸었을까 농경지가 끝나는가 싶더니 들녘이 온통 물 밭으로 변해버렸다. 커다란 합산제를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저수지들이 줄을 이룬다. 양식시설이 집단으로 들어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40. 지자체도 이때쯤이면 다리가 뻐근해질 것임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정자를 지어 잠시 쉬어가도록 했다. ! 이곳은 단축코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점이기도 하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을 에돌지 않고 간척지 들녘을 횡단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1.5km 정도가 단축된다.

 단축코스에 대한 유혹을 겨우 떨쳐내고 이정표(종점 4.8km/ 설도항 2.3km)가 가리키는 종점 방향으로 간다. 집사람은 물론 단축코스를 선택했다.

 이즈음 썩 내키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간척지에 그보다도 더 넓어 보이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한 결정이겠지만, 원자력을 축소하면서까지 장려된 점은 분명 문제다. 이는 발전단가를 상당히 높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시선을 조금이라도 옮길라치면 저만치 눈앞에는 어김없이 칠산타워가 놓여있다. 맞다. 이곳 영광의 랜드마크는 칠산타워라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아무리 해안 길을 빙글빙글 돌아도 눈앞에서 칠산타워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둑에 걸쳐놓은 저 시설의 용도는 대체 뭘까. 칠산바다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전망대일지도 모르겠다.

 발아래는 끝없는 갯벌, 뻘 바다에 올라앉은 어선, 너른 개펄에 놓인 통발과 행여나 통발에 걸릴까 집게발 들고 조심조심 오가는 게들을 관찰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밋거리일 것이다.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다. 그나저나 가을이 무르익어가나 보다. 공활한 하늘은 푸름을 한껏 자랑하고, 쏟아지는 햇살은 화사했다. 그 푸름에 바다가 더해진다. 그러자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이 티가 되어버린다.

 간척지가 하도 넓다보니 대하양식장도 단지를 이루고 있다. 다른 지역의 양식장들과는 달리 대하를 잡는 통발 모양의 어망도 눈에 띈다.

 바다에 타워와 다리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14 : 08. 드디어 바다를 향한 긴 여정이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저곳(둘레길 자전거여행 안내도는 합산항으로 적고 있었다)을 반환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끄트머리에는 선착장(이정표 : 봉양들 3.16km/ 설도항 4.36km)이 만들어져 있었다. 쉼터용 정자도 들어섰다. ‘월봉마을 어민들을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정박하고 있는 배는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 건너는 무안군(해제면) 도리포, 그 사이에 김 양식을 위해 세운 지주가 숲을 이룬다. 맞다. 도리포 인근 갯벌에서는 일찍부터 김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주식으로 곱창김을 생산하는데, 일반 김보다 채취 횟수가 적어 대량 생산이 어려운 반면 김 값이 훨씬 좋단다.

 이후부터는 조개산(118.2m)을 전방에 두고 걷는다. 대하양식장과 태양광발전소 등 아까 합산항으로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역순으로 펼쳐진다.

 집사람과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던 둘레길 도반을 따라잡았다. 80대 중반을 바라보는 연세이신데도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신다.

 건너편에는 37코스가 지나가는 월평항이 있다.

 길은 가음방저수지와 내남저수지, 봉양저수지로 연결되는 수로형 내만의 둑길을 따라간다.

 트레킹이 막바지에 이르자 마음부터 여유로워진다. 그러자 누렇게 물들어가는 봉남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저런 들녘이 있었기에 영광이 ‘4()’의 고장으로 불렸을 게고 그 속에 쌀이 끼어 있을 것이다.

 조개산(118.2m)이 성큼 다가왔다. 그 앞이 종점인 합산마을이다. 1927년 간척지가 조성되고,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생긴 마을이다. 봉남리(奉南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동촌·내남·합산·설도·한시·봉전) 중 하나로 합산(蛤山)’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조개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했다.

 14 : 42. 합산갑문을 지나 합산마을 앞 도로(칠산로5)에 이르면 트레킹이 끝난다. 염산방조제의 끝이자 버스정류장(합산마을)에서 100m쯤 떨어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GPX트랙이 14.1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영광 37코스) 안내도는 방조제와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하나 더, 시작점 표시판은 안내도 기둥에 매달려 있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9코스(양구 평화의 길)

 

여행일 : ‘23. 9. 3()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및 양구군 방산면 일원

여행코스 : 평화의 댐오천터널종점상회각시교금악교방산면소재지(백자박물관·직연폭포)자월교송현1백석대대송현하수처리장두타연갤러리(거리/시간 : 23.5km, 실제는 종점상회부터 송현하수처리장까지 14.80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트레킹·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평화의 댐 주차장(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춘천과 화천을 거쳐 오는 것이 보통이나 산사태로 길이 막혀 양구 쪽으로 돌아왔다.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와 46번 국도를 이용 양구까지 온다. 이어서 460번 지방도를 타고 화천방면으로 가다보면 평화의 댐이 나온다. 댐의 상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오늘은 9코스를 걷는다. 4개 코스(75km)로 이루어진 양구지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양구 평화의 길이라는 브랜드로 포장되어 있다. 공식적인 거리는 23.5km, 산행대장은 실제 거리가 30km에 육박한다며 겁부터 준다. 이에 놀란 난 출발지에서 10km쯤 떨어진 종점상회부터 걷기로 했다. 빈약한 내 체력으로는 20km 이상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평화의 댐은 북한의 수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워졌다. 북한이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을 건설, 무려 200억 톤의 수공을 펼쳐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는 과장된 발표로 국민 성금을 모았었다(나도 참여했을 정도로). 그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온종일 63빌딩이 절반이나 물에 잠기는 것을 비롯해서 서울특별시의 주요 건축물이 물에 잠기는 모형을 보여주었고, 대학 교수들이 출연하여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었다(그 교수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허구였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홍수 조절기능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증축되기도 했고, 화천 관광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① 평화의 댐  세계평화의 종  비목공원  평화의 댐 물문화관  피스스카이워크  세계평화의 종공원 / 벨 파크  염원의 종 / 댐 하류전망대  국제평화 아트파크  평화누리마당  노벨평화의 종  DMZ 아카데미  물의 정원  평화오름 길  평화의 숲  평화나래교  평화캠핑장  자유의 숲  물빛누리호 선착장  배수터널

 댐의 상류 쪽 풍경, 하단의 하얀색 부분(80m)은 전두환 대통령 때 쌓았고, 위쪽은 45m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 증축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다. 다른 댐들과는 달리 북한의 수공을 막기 위해 쌓은 탓에 물을 채우지 않고 배수터널을 통해 화천댐으로 그냥 흘러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란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세계 평화의 종이 반긴다. 분쟁 현장에서 사용된 탄피 1만관(37.5)에 세계분쟁 종식 및 평화의 의지를 담아 만들어진 초대형 범종이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발포한 탄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분쟁 현장의 탄피, 국방부의 한국전쟁 유해 발굴 작업 중 수집한 탄피 120여 개 등 모두 29개국에서 모은 탄피들로 제작되었다. 1만관 중에서 9,999관으로 종을 주조하고, 나머지 1관은 통일이 되면 추가하여 완성시킨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미완의 종이기도 하다.

 조금 더 가면 전쟁의 상흔을 되새기는 비목공원이 나온다.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긴 난 반대편 방향인 피스 스카이워크로 간다. 거대한 댐에 매달린 공중 전망대로 바닥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시원스런 조망과 스릴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하류의 파로호,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풍경이 평화로우면서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매점 옥상도 전망대로 만들었다. 아래층(cafeteria)에서 산 커피라도 마시며 주변 풍광에 푹 빠져보라는 듯 테이블까지 배치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Peace Man’이란다. 자신처럼 같이 온 이에게 사랑을 고백해 볼 것을 귀띔한다.

 이젠 댐의 하부로 내려가 볼 차례다. 산비탈을 따라 569개나 되는 나무계단이 길게 놓여있다.(안내판은 하늘 오름길로 소개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서면 세계평화의 종 공원(bell park)’이 반긴다. 평화의 댐이 우리나라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정이품송 장자목(長子木)’이 자라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103호인 보은의 정이품송을 아버지로 삼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어미목(강원지역 금강송)을 선발해 인공 교배시켜 얻은 첫 소나무란다.

 평화와 상생을 바라는 종도 눈에 띈다. 상단은 각 대륙을 상징하는 평화의 아기천사가 지구를 감싸고 있는 형상, 중단의 첨탑은 평화와 행복을 세계로 넓히길 염원하는 화천군민의 의지를 담았다. 종을 형상화 한 하단에는 불교철학자이자 평화건설자인 이께다 다이사쿠 SGI회장의 소설 ·인간 혁명에 나오는 글귀를 담았다. 평화만큼 존귀하고, 평화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는...

 생명의 나무(수많은 생명을 품어 기르는 한 그루 나무를 통해 생명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깨닫는다)와 평화의 종(분쟁과 분단을 넘어 화해와 통일을 기원한다), 어린이들의 기원(에티오피아와 한국 어린이들의 세계평화와 남북통일 소원을 담은 그림엽서를 매달고 있다)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공원 주차장 오른편, 언덕을 향해 계단이 놓여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평화의 댐을 아래서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니 망설이지 말고 올라볼 일이다.

 언덕 위에는 나무로 만들었다는 염원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담은 침묵의 종이란다. 저 종이 침묵을 깨고 세계를 향해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나?

 댐 하류 전망대라는 이름처럼 거대한 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특히 통일로 나가는 문이라는 초대형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댐 중앙이 뚫려 하천의 물이 남과 북을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댐 상류 700m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의 풍경을 트릭 아트로 그렸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저 트릭아트는 높이 93m에 폭이 60m로 기네스 세계기록(4775.7)에도 등재됐다. 기존에 세계 최대였던 중국 난징의 트릭 아트 작품보다 2배 가까이 크다.

 다음은 국제평화 아트파크이다.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비행기를 놀이기구와 합성하여 155마일 휴전선 일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테마파크로 DMZ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표현하며, 색색의 기원을 담은 리본들이 철조망에 있는 한 평화는 지속된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아트파크의 중심에는 38m 높이의 평화의 약속이라는 상징탑이 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의 땅 한반도에서 인류와 생명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꼭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3개의 포신은 자유·평화·사랑을, 2개의 반지는 다음 세대와의 영원한 평화의 약속을 담았다나?

 평화의 약속, 염원, 이카루스의 날개 등 다양한 조형물들이 상징탑을 둘러싸고 있다. 안보·평화·생명을 주제로 탱크·자주포·대공포·전투기·대북확성기 등 수명이 다한 폐장비류를 재활용하여 평화 예술품으로 재구성해 놓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이라 하겠다.

 평화를 위한 여정은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의 하나 된 걸음이 더 낫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저 조형물의 문구(All over the world)처럼 세상으로 퍼져나간다면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11 : 23. 실제 출발지는 종점상회. 양구군 군내버스의 오미리 종점에 위치한 상점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버스정류장의 이름을 얻어다 썼다. 그나저나 출발지인 평화의 댐에서 이곳까지는 9.7km. 코스 길이가 30km나 된다는 산행대장의 겁 때문에 그만큼의 거리를 단축했다. 아니 그보다는 지방도를 따라 걸으며 어두컴컴한 터널을 들락거려야 하는 끔찍함을 피하려는 마음이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정표는 수입천 쪽으로 내려가란다. 그리고 중요 기점 중의 하나인 각시교까지의 거리가 3.6km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우기인 여름철에 찾아왔다면 각시교까지 곧장 도로(460번 지방도)를 따라 진행할 것을 권한다. 평화누리길을 따르다보면 수중보를 이용해 수입천을 건너야하는데, 냇물이 불어날 경우 자칫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수입천으로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또 다른 이정표는 5km 전방에 파서탕(破署湯)’이 있음을 알려준다. 얼마나 물이 차고 맑았으면 물줄기가 더위를 깬다는 지명까지 붙였을까 싶다.

 파서탕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이정표 : 각시교 3.5km/ 피서탕 5km/ 오미종점 0.1km). 다른 지역 사람들이 내뱉었더라면 큰일 날 단어를 상호로 내건 입간판이 눈에 띈다. 강원도 지역이나 그 출신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감자바위도 강원도 사람들이 쓰면 흉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들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화누리길은 그 산과 산 사이 협곡,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기대어 나있다. 맞다. 이곳은 방산(方山)’. 푸른 산이 사방에 널려있다는 고장이다.

 그렇다고 논이 없겠는가. 우리네 선조들은 냇가에 둑을 쌓고, 비탈진 산자락을 일구어가며 농토를 만들었다. 그 논에서 지금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백로(白露)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간이화장실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둘레길 나그네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쉼터도 심심찮게 만난다. ‘평화누리길은 트레커보다는 자전거 라이더들이 주 고객이다. 쉼터마다 만들어놓은 저 자전거 거치대가 그 증거다.

 평화누리길 평화의길과 함께 간다. 평화누리길에 평화의길이 숟가락을 살짝 올려놓은 것 같은데, 두 길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뭐가 문제겠는가.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니 말이다.

 탐방로는 수입천(水入川)을 오른쪽 허리춤에 차고 간다. 수입면(양구군)의 청송령(靑松嶺)에서 발원하여 문등리와 방산면 건솔리·금악리 등을 우회하여 파로호로 유입하는 길이 34.8km의 하천이다. 접경지역이라서 개발이 덜 되었지만 두타연 등 명승지를 여럿 끼고 있다.

 건너편 산자락에도 띄엄띄엄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삶은 편치 않겠다. 장마 때 물이라도 불어날라치면 잠수교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그네들의 집은 육지 속 섬으로 변할 테니까.

 역시 강 건너, 잘 지어진 집들이 무리지어 들어선 것이 영락없는 펜션이다.

 12 : 10. 트레킹을 시작한지 45, 난감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평화의길 방향표시는 수입천을 건너라는데, 이게 수중보를 겸한 잠수교라서 수문으로 해결을 못한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발목을 넘길 정도로 물이 차올라 건너려면 상당한 모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안전 불감증의 현장이 아닐까 싶다. 해파랑길이나 서해랑길, 지리산둘레길 등 그동안 걸어온 대부분의 둘레길들은 강우기를 대비한 우회로를 따로 내놓고 있었다. 이에 대한 안내문도 붙여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양구군은 위험요소를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맡은바 일을 제대로 하라며 비싼 세금을 내온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싶다.

 앞을 가로막는 산자락을 에돌아나가는 농로가 나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되돌아나가는 도중 오미리(五味里)의 자연부락인 낭구미를 지나기도 한다. 참고로 오미(五味)라는 지명은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5개 반이 갖고 있는 단맛·쓴맛·싱거운맛·짠맛·매운맛 등 각각의 독특한 매력과 맛 좋은 청정 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2: 30. 400m쯤 진행하니 46번 지방도가 나온다. ‘오미리 산촌 생태체험관이 있는 곳이다. 오미리는 친환경농법(벼 사이에서 노닐고 있는 우렁이를 쉽게 볼 수 있다)으로 생산한 쌀이 자랑거리라고 한다. 오리농법으로 생산한 오리쌀이나 키토산농법으로 생산한 오대쌀로 밥을 지으면 구수한 밥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질 만큼 향이 좋단다. 밥맛도 대한민국 최고를 자랑한다나? 마을에서는 그런 특징들을 살려 산나물 채취·다슬기잡기·농작물 수확·썰매 만들기 등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사시사철 운영하고 있단다.

 도로변에는 앞서간 이들의 후기에서 자주 소개되는 오미막국수도 있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소문난 맛집으로 꼽힌다. 그나저나 앱은 4.67km를 찍고 있다. 종점상회에서 이곳까지는 800m(460번 지방도를 따랐을 경우), 길이 끊긴 평화누리길을 고집하다가 3.8km나 더 걸은 꼴이 되어버렸다.

 속상한 마음을 길가 코스모스로 달래본다. 기상청은 오늘도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그렇다고 계절까지 속일 수 있겠는가. 가을의 전령이라는 코스모스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백일홍은 마음고생에 대한 보너스다.

 12 : 35 : 300m쯤 더 걸으면 각시교’.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기점으로 삼고 있던 곳이다. 평화누리길은 잠수교(수중보)를 건너 다리 저편으로 온다. 하지만 물이 넘치는 잠수교를 건널 수 없어 빙 돌아왔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이정표(금악교 1.2km/ 방산면사무소 3.1km/ 평화누리길 오미리종점 3.6km/ 오미리 버스종점 1.1km)가 현재 상황을 알려준다. 아까 종점상회(오미리 버스종점)에서 도로를 따라 곧장 왔더라면 1.1km면 되었을 것을 길이 끊긴 평화누리길을 고집하느라 3배 이상을 더 걸었던 것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금악교를 향해 간다. 금악교로 곧장 가는 도로를 놓아두고 수입천의 강둑을 따라 에둘러 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건너편의 또 다른 이정표는 직연폭포 방향으로 가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길가 비닐하우스에서는 풋풋한 오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물소리의 터’. 이름처럼 수입천의 강둑에 매달 듯 탐조대를 겸한 쉼터를 만들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가라며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독수리·황조롱이·두루미·꾀꼬리 등 이곳에서 살고 있는 새들에 대한 설명판도 보인다. 일종의 다목적 쉼터인 셈이다.

 독수리는 아예 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나머지 새들에 대한 조형물도 있다는데 웃자란 잡초에 묻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물소리의 터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팔랑개비다. 10여 개의 커다란 팔랑개비가 힘차게 돌아가는 풍경이 쏠쏠한 볼거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누렇게 물들어가는 금악리 들녘도 무척 넓었다. 심심산골인 양구 지역에 저런 들녘이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12 : 55. 금악교를 건너 금악리(金岳里)로 간다. 옛날 사기를 굽는 막이 있던 곳으로 초기 이름은 사기막 혹은 사금막(沙金幕),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금막(金幕) 또는 금악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무튼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도로를 횡단해 수입천의 둑길을 따른다.

 잠시 후 요런 무지개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중간에는 주변 풍광을 감상해보라는 듯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수입천에 바위가 늘어나면서 풍경이 한결 고와졌다. 저 물길에는 꺽지·쉬리· 탱가리·뚝지·메기 등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단다. 덕분에 가족과 함께 낚시여행을 즐기기에 딱 좋다나?

 13 : 16. 460번 지방도(이정표 : 직연폭포 0.4km/ 평화의 댐 19.9km)로 다시 올라선다. 가드레일 밖으로 잔도처럼 데크길을 따로 냈다.

 ! 거북이 닷!’ 거북이 한 마리가 소를 향해 나아가는 모양새다.

 13 : 20. 방산면(方山面)의 면청소재지인 현리(縣里)’로 들어선다. 어깨를 맞대고 있는 장평리(長坪里)와 함께 방산면의 행정 중심을 이룬다. 조선시대 때 이곳에 방산현(方山縣)의 현청(縣廳)이 있었다고 해서 현리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탐방로는 수입천의 천변을 따른다. 560번 지방도와 수입천 사이에 데크로 길을 냈다.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듯 길가에는 정자와 파고라도 배치했다. 수입천의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으니 쉼터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장평마을로 가는 초입, ‘조선백자 시원지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종류의 자기 중 조선백자가 시작된 곳(始原地)’이라는 것이다. 흔히 백자 하면 경기도의 광주·이천·여주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종실록 등 역사서에 양구의 자기소가 언급될 정도로 양구도 빠지지 않는 백자의 고장이다. 국가에 공납품으로 들어갈 만큼 품질이 좋은 백자를 생산해왔다(금강산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 사리구가 양구에서 생산된 백자로 알려진다). 분원백자(조선시대 왕실용 자기)에 공급되던 최고 품질의 백토가 이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지역민들의 삶을 엿본다며 상가지역으로 들어가는 나그네들도 여럿 눈에 띈다. 하지만 난 수입천변을 따르는 평화누리길로 진행한다. 그래야 먼 거리에서나마 직연폭포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 나오는 두 번째 다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이다. 폭포전망대가 막힌 줄 알았더라면 줌으로 당겨보았을 텐데 아쉽다.

 13 : 34. 탐방로는 양구 조선백자박물관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수입천 쪽으로 간다. 하지만 난 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그윽하고 담백한 여백의 미로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조선백자를 구경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참고로 양구백자박물관은 양구의 백자 제작 역사를 보존하고 조선왕실 백자의 주원료로 사용된 양구 백토 연구를 통해 현대적인 사용 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지난 2006년 개관했다.

 전시실은 시대 순으로 백자가 전시되어 있다. 양구 백토에 대한 설명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유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첫 대면은 14~15세기 초(고려 말 조선 초기)의 백자, 불순물이 섞여 있어 약간 노르스름하고 녹색을 띤다.

 주류를 이루는 조선 중후기 백자는 백색 도는 회백색을 띠며 청화(靑畫)와 철화(鐵畵)로 그린 꽃··물고기·문자 등 다양한 문양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대접이나 접시의 겉면에 간단한 초화문(草花文)을 그려 넣었으며, 18세기로 갈수록 제기류를 비롯 다양한 기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현대백자실이다. 양구 백토로 만든 백자가 전시되고 있는데,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달항아리를 비롯해 현대 백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을 통해 기증된 작품들과 구백자연구소에서 진행한 백자의 여름 전시에서 기증된 작품, 호주 도예가 스티브 해리슨의 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단다.

 저게 백자? 하긴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현대 예술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기획전시실에도 다양한 백자가 전시되고 있었다. 양구백토로 제작된 작품과 남북한의 원료를 합토해 만든 통일백자 등이라고 한다.

 야외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도자기를 제작하는 전 과정을 조형물을 통해 재현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는 피노키오가 귀여워 그중 하나를 게재해 본다.

 양구 가마도 복원되어 있었다. 양구는 고려시대부터 20세기까지 600여 년간 백자가 생산되어 왔다. 양구 가마터는 1454(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에서 처음 소개된다. 전국의 139개 자기소 중 2개가 양구현에 있었단다. 1530(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전국 자기소 32개소 중에 양구현이 포함된다. 139개에 달했던 자기소가 100년 만에 32개소로 축소됐지만, 양구는 도자기 생산의 요지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 : 50  14 : 20. 15분 정도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직연정(直淵亭)’이란 정자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덕분에 준비해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와 냇가(수입천)로 간다. 아니 입구에 세워놓은 직연폭포(直淵瀑布)’안내판부터 살펴본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잠시 쉬어가는 곳인데, 폭포수가 곧바로 떨어진다고 해서 직연이란 이름이 붙었다나? 떨어진 물줄기가 잠시 멈췄다가는 ()’는 깊이가 20m나 된단다. 1922년 칠천리 김왈룡의 어린 송아지가 물에 빠졌을 때 석자 이상의 메기가 이를 잡아먹었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일화도 전해진다.

 몇 걸음 더 걸으면 폭포를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것도 꽤 오래된 듯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국가나 지방 행정도 고객 서비스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양구군청은 저 폭포를 보려고 찾아온 관광객들의 바람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납세자인 국민에 대한 배반이라고나 할까?

 폭포는 상부에 놓인 다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폭포는 아래서 올려다봐야 제멋이다. 그러니 반쪽자리 구경이라고 하겠다. 그나저나 물줄기가 곧바로 떨어져서 직연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와폭(臥瀑)’이 분명했다. 그저 높이 20m의 암벽이 병풍을 둥글게 세워놓은 듯한 경관이 아름답다는 설명만이 공감을 줄 따름이다.

 그 아쉬움은 상부에 있는 수중보의 물줄기로 달랠 수 있었다. 보를 넘어오는 물줄기가 나이아가라 폭포가 부러워할 정도로 멋지게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에 45m 높이의 인공폭포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물줄기가 끊긴 채 시커먼 배만 들러내고 있었다. 물이 흔한 여름철인데도 저렇다면 다른 철에는 아예 운영을 검토할 일도 없겠다.

 평화누리길은 계속해서 수입천을 오른쪽에 끼고 이어진다. 강줄기를 따라 난 산책로는 고요하고 은밀하다. 길은 잘 닦여있으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기 때문이다.

▼ 14 : 33.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일차선 도로(소풍정길)로 올라서고, 곧이어 자월교로 수입천을 건넌다.

 자월교를 건넌 다음 수입천 강둑으로 올라선다. 이후부터는 수입천을 왼편에 두고 걷는다. 오른쪽으로 누렇게 물들어가는 장평리의 들녘이 펼쳐지는데 제법 넓다.

 길은 접어들수록 물 향기가 짙다. 평화누리길과 어깨를 맞대고 가는 강줄기 뒤로는 맑은 세상이 펼쳐진다.

 경관 좋은 곳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전망대 맞은편, 두타연갤러리로 가는 460번 지방도가 하천 건너로 지나간다.

 백색의 암벽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 위를 물줄기가 떨어지듯 흘러가며 굉음을 낸다. 양구의 또 다른 명소로 꼽아도 손색이 없겠다.

 경관이 고운데 정자 하나 없겠는가. 하천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이정표(두타연까지 6.7km)는 직연폭포에서 2.5km쯤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하천 건너로 큼지막한 건물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 송현리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15 : 00. ‘송현1리 경로당을 지나 송현교로 수입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 구간이 ‘DMZ 평화의길’ 25코스임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평화누리길의 방산면 구간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송현리(松峴里)는 웬만한 면소재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인근 군부대의 이전 등으로 경기가 많이 침체되었다고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숙박 및 휴게 시설 등 인프라를 갖춘 캠핑장을 송현리에 조성하기로 했다나?

 송현리에서 46번 지방도를 다시 만났다. 그런 다음에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간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강원도가 무대다. 장돌뱅이인 허 생원은 우연히 만난 젊은 장돌뱅이 동이와 대화 장터로 가는 길에 밤길을 동행하게 되고, 달빛 아래 메밀꽃 밭에서 자신이 젊었을 때 물레방앗간에서 있었던 성 서방네 처녀와의 이야기를 회상한다. 이곳 역시 강원도, 그러니 어찌 메밀꽃밭 한번 지나지 않겠는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도로, 왼편은 군부대의 연속이다. ‘백석대대라는 버스정류장까지 있을 정도다.

 여유롭게 산천경개를 즐기다보니 어느덧 후미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앞질러간 일행이 매달아놓은 표지기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허총무, 사슴과 구름... 산에서도 뛰어다닐 정도로 건각을 자랑하는 여성 도반들이다.

 15 : 25. 그렇게 25분쯤 걷자 송현 하수처리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점심상을 차릴만한 자리를 찾던 산악회버스가 하수처리장 맞은편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9코스의 종점인 두타연갤러리까지는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 하지만 느긋하게 배를 채운 상태로는 걷는 게 무리, 별수 없이 산악회버스로 왔다. 그렇게 도착한 두타연갤러리는 문이 닫혀있었다. 소지섭이 영화와 드라마 촬영 때 입었던 의상과 스틸 사진으로 꾸며 소지섭갤러리로도 불린다는데... 참고로 배우 소지섭은 영화 촬영을 하며 양구군과 인연을 맺었다. 이어 민통선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 강원도 DMZ 일대를 배경으로 2010년 포토에세이집 소지섭의 길을 출간하면서 양구군과 깊이 교류하게 됐다고 한다.

 백석산지구 전투전적비에 들러 묵념을 드려본다. 백석산 전투(1951.8.18.-10.28)에서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세운 전적비로, 격전 끝에 백석산과 그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은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고 10 25일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백석한 일대의 전투가 종료됐다.

 갤러리 앞 고방산교차로 중앙에는 백자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 양구가 조선백자의 시원지임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기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다. 고려청자가 옥빛의 화려함으로 보는 이를 찬탄하게 한다면, 조선백자는 그윽하고 담백한 여백의 미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서해랑길 35코스(돌머리해변-향화도항)

 

여행일 : ‘23. 8. 26()

소재지 : 전남 함평군 함평읍·손불면 및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돌머리해변주포항대발마을석계마을농암마을월천방조제안악해변함평항향화도항(거리/시간 : 19km, 실제는 첨단양식장부터 13.47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5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함평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함평군에서 영광군으로 간다. 덕분에 함평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트레킹 내내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주요 볼거리로는 안악해변의 꽃밭과 칠산타워의 조망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돌머리 해수욕장(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따라 함평방면으로 2km쯤 내려오다 양림교차로(함평읍 진양리)에서 주포로로 옮겨 4.5km쯤 들어가면 돌머리해수욕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무안 35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해수풀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해제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걷는 19km 길이의 코스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6Km를 줄여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첨부된 지도의 석창리)’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산악회의 배려로 중요 포인트인 돌머리해변과 주포항을 둘러봤으니 봐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고 보면 되겠다.

 이동 중 들른 주포(酒浦), 옛 이름은 주항포(酒缸浦, 1865년 간행 대동지지 지명), 1900년대 초부터 주포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막이 많은 포구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주포방조제가 건설되고 구주포가 포구의 구실을 못하게 되자 신설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서해에서 잡은 수산물의 집산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단다. 그러니 주막이 많았을 것은 당연, 하지만 어선이 대형화 되는 1955년 이후 점차 사양화되어 폐항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1962년 돌머리해수욕장 개장으로 횟집이 늘어나면서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곳에서만 잡히는 엽삭(곰삭은 엽삭젓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단다)’이란 특이한 물고기가 있었다고 했다. 황실이(강달이준치·조기(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등도 주포항으로 모였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서너 척의 어선이 매어져 있을 뿐 한적하기 짝이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구가 떠오를 정도로...

 쇠락한 포구의 물양장은 텅 비었다. 하지만 옛날, 특히 배가 들어온 날의 주포는 북적거렸다고 한다. 만선의 풍어를 알리는 배는 오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주머니가 두둑한 어부들로 붐비던 주포는 술과 음식이 넘쳐나고 노랫소리가 드높았단다. 주포의 이름에 술 주()’자가 박혀있는 이유일 게다.

 돌머리해수욕장이 개장된 뒤로 찾는 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지자체가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수산물 직거래장터를 열었다. 그 옛날 주포를 먹여 살리던 뱃사람들 대신, 이젠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린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 난간에 서면 함평만의 풍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35코스가 시작되는 돌머리 해안은 물론이고, 그 너머로 서해랑길을 답사하면서 걸었던 현경면과 해제면의 해안, 즉 곶부리로 점철되던 아름다운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석창리를 에돌아가는 해안이 있다. 중앙에 보이는 산은 두류봉’, 그 왼쪽 끝을 돌꼬리(돌고지)라 부른다고 했다. 석창리의 포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포구의 오른쪽은 주포방조제다. 동쪽 깊숙이 파고든 함해만을 가로막은 방조제로 이로 인해 장교리(함평읍)과 궁산리(염산면)에 드넓은 들녘이 만들어졌다. 저 방조제는 수랑개라는 지명을 만들기도 했다. 바다를 막은 간척지의 진흙탕 즉 질흙 투성이 갯가로 발이 술술 빠지는 수렁의 갯가라는 뜻이다.  수랑개 술항개를 거쳐 주포가 되었다는데. 낭만적인 이름으로 이보다 더한 이름이 있을까 싶다.

 포구 근처에는 한옥 전원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의 볼거리(함평만의 황홀한 낙조)와 놀거리(돌머리해수욕장), 먹거리(식당·카페)를 연계시킨 체류형 관광단지로, 50여 동의 한옥 가운데 30여 동이 민박으로 쓰이고 있단다.

 주포방조제 끄트머리에는 함평의 명물 해수찜 마을(손불면 궁산리)이 있다. 유황이 함유된 돌을 소나무로 달구어 데운 물로 찜질을 하는 곳인데, 함평의 바닷가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간요법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해수찜은 따뜻한 물이 담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아니다. 해수에 뜨겁게 달군 유황석을 넣은 물에서 나온 증기로 몸을 데우고, 그 물에 적신 수건을 몸에 덮는 방식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한 해수탕과는 완전히 다르다. 피부질환·신경통·당뇨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의 해수찜은 세종실록의 도자기 가마를 이용한 한증법을 계승·발전시켰다고 한다. 가열한 유황석을 쑥·삼못초·뱀딸기풀 등의 약초가 담긴 해수탕에 넣어 데워진 물로 찜질하는 것. 뒤뜰 아궁이에서 갓 구워낸 유황석을 넣은 탕의 온도는 섭씨 7080. 온도가 내려갈 때까지 수건에 물을 적셔 찜질한다. 이렇게 하면 온천과 약찜의 효능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실제 출발지는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함평군 손불면 석창리)’이다. 돌머리해수욕장에서 811번 지방도를 타고 손불 방면으로 6km쯤 오면 나온다.

 11 : 20. 서쪽, 그러니까 함평만을 향해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정표에 적힌 첨단 양식장 300m쯤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담수어 양식단지, 첨단시설을 갖춘 입주업체들은 식품안전관리시스템인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적용업소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위해 물질이 섞이지 않은 담수어(장어)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에는 둥근 반지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양식장에서 기르고 있는 장어를 형상화했는데, ‘대지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참고로 뱀장어는 함평군의 군어이다. 함평군은 이밖에도 군 나비인 호랑나비와 은행나무·춘란·비둘기 등을 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갖고 있다.

 줌을 당기자 돌머리해안이 성큼 다가온다. 둥그렇게 울타리를 쳐놓은 곳은 낙지 산란장(낙지목장이란 이름표를 달기도 한다)’일 것이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갯벌낙지의 보존을 위해 낙지 산란장 조성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단다.

 서해랑길은 함평면의 해안선을 따라간다. 그리고 종점인 향화도항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바닷가와 헤어지지 않는다. ! 앱은 서해랑길과 만나는 이곳을 시점에서 6.13km쯤 떨어졌다고 표시한다. 집사람 덕분에 오늘도 6km 정도를 단축한 셈이다.

 갯벌은 아직도 황토색이다. ‘황토 랜드라는 브랜드는 무안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함평의 바다도 맑고 고운 황토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물때를 맞춰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11 : 35. 해안선을 따라 700m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아니 둑길 옆에 월천항으로 가는 811번 지방도를 새로 내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왼편 둑길을 따른다.

 들녘 너머는 석계마을’. 법정 동리인 석창리(石倉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석계·해창·대발·농암·대덕·해안) 중 하나로, 군유산과 두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이 마을 돌꼬리로 유유히 뻗어 나가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이 시냇물 같은 형국이라 하여 석계(石溪)’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금 더 걸으면 석창리 어민회관이 있는 돌고지 선착장이다. 35코스의 시점인 돌머리와 상대되는 지명으로 돌머리와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돌꼬리(또는 돌고지)’로 불린다고 한다. 함평의 구릉지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두 곶(), 즉 돌머리와 돌꼬리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선착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석계마을과 농암마을을 거쳐 산남리 방조제로 연결된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공사 중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기는 했지만 산남방조제로 가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돌꼬리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도로가 온통 헤집어져 있다. 하지만 바닷가를 따라 난 옛길이 선명해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눈을 들자 석창리 앞바다의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 갯벌은 석화가 지천이라고 한다. 석화는 해풍에 맛을 키우고 갯벌의 영양분을 빨아 제 살을 불린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석화는 바다의 인삼로 불릴 만큼 영양이 높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 때면 맛과 영양이 최고에 달해 이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나?

 11 : 54. 정자가 길손을 맞는 산남방조제(석창리-산남리-월천리를 잇는다)’에 이른다. 초입의 이정표는 종점(칠산타워)까지 1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함평만해안도로는 서해랑길 5코스처럼 돌머리해안과 영광군 칠산대교를 잇는다. 함평만의 수려한 경관과 명품 해상교량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명품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을 얻었다.

 이제 산남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도 45분이나 걸린 엄청나게 긴 방조제이다. 이 방조제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생 김연수가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삼양사라는 회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월천리 백옥과 석창리 농암 간 3.8km의 둑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시작해 1933년에 완공된 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400정보(町步)나 되는 손불간척지가 생겨났으니, 그게 바로 산남리의 저 너른 들녘이다. 이후 갯땅은 농토가 되었고, 지금은 고소하고 쫀득한 맛좋은 함평 간척지 쌀이 생산된다. 하나 더, 산남리 마을에는 1970년대 초 꽃반지 끼고의 가수 은희가 만든 문화공간 민예학당이 있다. 자연재료를 활용한 디자인 제품, 천연염색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잠시 들려도 좋을 것이다.

 반대편은 함평만의 드넓은 갯벌,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경사가 완만해 석화()와 바지락, 낙지 등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석화(石花)’는 바위에 붙어 있는 모습이 '꽃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코끝이 알싸할 정도로 찬바람이 불 때부터 맛이 들기 시작해 12월이면 절정에 이른다. 농한기의 귀한 소득원이기도 하다.

 갯벌에 쳐놓은 저 그물망의 정체는 대체 뭘까? ‘개막이일지도 모르겠다. 조석간만의 차가 클 때 갯벌에 그물을 쳐 놓고 밀물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갇히도록 하는 전통 고기잡이다.

 12 : 18 - 12 : 48. 방조제의 중간쯤에서 만난 정자, 끝이 보이지 않는 둑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이라서 더욱 반갑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 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30분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갯벌이 하도 넓다보니 그 사이로 강처럼 물길이 나있다.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생김새로 봐서는 낙지 산란장 같은데... 이곳 함평만이 세발낙지의 본고장이라니 말이다. 세발낙지는 발이 세 개여서가 아니라 가늘어서 붙은 이름이다. 갯벌에서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한 낙지는 일하다가 쓰러진 소를 일으킨다고 할 만큼 원기를 북돋아 주는 해산물로 알려져 있다. ‘바다의 산삼 혹은 노다지라고도 불린다.

 13 : 07. 길고 긴 방조제의 끝은 일공구(이정표 : 종점까지 7.1km)’이다. 맨 처음 공사를 시작한 곳이어서 일공구라 한다는데, 위에서 얘기하던 삼양사의 간척공사 산물이다. 하나 더, 향토사 공부를 한다는 김경수씨는 간척공사 이전에는 이곳이 백옥동(白玉洞) 마을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일공구에도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갯벌에 기우뚱 몸을 기대고 있는 고깃배도 여럿 보인다. 포구에는 잡아온 물고기를 파는 횟집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간척공사 때 이곳은 각처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뿌리는 돈으로 늘 흥청거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 같은 둘레길 나그네들이나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 되어버린 셈이다.

 신옥교라는 무지개다리를 이용해 월천저수지(손불간척지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건넌다. 한가하게 날개짓을 해대는 서너 마리 갈매기의 환송을 받으며...

 ‘1공구라는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양, 포구는 아직도 새로운 방파제를 쌓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공구부터는 월천방조제를 걷는다. 일공구에서 안악에 이르는 이 방조제는 2000 8월 태풍 프라피룬으로 유실되었다.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을 때 거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는 해당화 6만여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라고나 할까?

 13 : 22. ‘안악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월천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안악(雁岳)이란 지명은 雁來基(안래기 안애기)’ 또는 雁落(안락 안악)’이 변형된 것이란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기러기와 인연이 많은 모양이다.

 월천방조제가 끝나는 곳에는 작은 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5.7km)이 조성되어 있었다. 큼지막한 빗돌이 방금 전 월천방조제를 걸었고,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안악마을임을 알려준다.

 안악마을의 포구는 작다. 시쳇말로 주먹만 하다고나 할까? 정박하고 있는 어선도 주먹만 한 보트 두어 척이 전부다. 하지만 횟집에 펜션까지 들어서있으니 먹거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함평만 갯벌에서 나오는 싱싱한 숭어·세발낙지·보리새우 등은 여름철 미각을 돋운다고 하지 않던가.

 포구에는 소녀상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함평만의 부드러운 곡선이 주는 안정감과 미래를 지향하는 함평의 기상을 형상화 했단다. 거기에 국민가수 이미자가 노래한 섬마을 선생님에 나오는 총각선생님에 대한 섬 처녀의 간절한 기다림을 담았단다. 그럼 이곳 안악마을이 원래는 섬이었다는 얘기일까?

 섬마을 선생님 노래비도 눈에 띈다. 10년쯤 전 대이작도를 답사하다 섬마을 선생님과 관련된 관광지를 만났었다. 1967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섬마을 선생님의 촬영지라면서 이미 폐교된 초등학교를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노래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고나 할까?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안악해수욕장. 200m 길이의 결 고운 백사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감싼다. 그 숲에는 썬 베드를 놓아 피서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했다. 백사장에는 규모는 작지만 전천후 인공해수풀장도 만들었다. 명품 피서지로 만들려는 지자체의 노력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화이트 정원(‘해름애 언덕’, ‘바람의 언덕으로도 불린다)’은 안악해변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농산어촌 활력화 경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수국·팜파스그라스·코스모스 등 여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꽃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싱그러운 여름 수국은 시들어가는 중, 대신 팜파스그라스가 나그네의 동심을 소환시킨다. 깃털모양의 풍성한 이삭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데, 거기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기까지 해 여간 신비로운 게 아니다.

 그밖에도 보라색 버들마편초가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버들잎처럼 좁은 잎 모양 형태와 긴 꽃대 끝에 꽃이 달려서 마편 즉 말채찍처럼 생겼다고 해서 버들마편초란 이름을 얻었다.

 해당화는 일종의 보너스다. 해안가 도로변에서 만나게 되는데,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금물투성이의 모래땅에 뿌리를 묻고 살아간다.

 꽃밭에서의 힐링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진행방향에 칠산대교를 놓고 걷게 된다.

 함평만 해안도로는 황혼 무렵의 해넘이가 자랑거리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해제반도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이 짙은 감흥을 선사한단다. 하지만 지금은 벌건 한낮, 일몰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13 : 46. 이번에는 학산리(鶴山里) 앞 방조제를 걷는다. 1930년경 목포사람 정태성이 막았다고 한다.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둑을 쌓은 이의 이름을 따 정태성농장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300m 남짓의 둑이 만들어낸 들녘치고는 꽤나 넓다. 그 너머 산자락에는 학산리의 자연부락인 지호(芝湖) 마을과 평산(平山) 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한없이 구불대는 함평만의 해안선을 따라 종점인 향화도항으로 간다. 문득 이은상 시인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가 떠오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칠산대교가 코앞인데도 걷고 또 걸어도 이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함평만은 육지에서 흘러 내려온 흙이 퇴적돼 만들어져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보고다. 수심이 깊지 않고 조차가 크고 조류 소통이 좋아 갯벌이 발달했다. 덕분에 주민들은 갯벌에 기대어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잡고, 김 양식을 하며 생활해왔다. 갯벌을 막아 농지를 조성하고 염전을 만들기도 했다.

 해안선은 곳곳에서 구불댄다. 해변에 바짝 붙어 구불구불 이어진 이 길은 한결 운치 있다. 옛 사람들은 그런 지리적 여건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방조제를 쌓았고, 주민들은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간다.

 바다는 김 양식장의 지주로 한 가득이다. 갯벌에 저런 기둥들을 세우고 김을 매달아 양식한다. 바다 건너 도리포 곱창김의 주산지로 알려진다. 그만큼 청정해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해역을 끼고 있는 함평에서도 곱창김을 양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식은 바다에서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해수를 저장해두는 저 저수지는 동성수산과 손불수산에서 양식업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잠시 후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808번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온 함평항길이 해안도로와 만난 것이다.

 함평항으로 가는 길,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들이 의외로 많다. 근처에 함평항이라는 틀이 잡힌 포구가 있는데도 말이다. 함평항이 항구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14 : 26. 함평항에 도착했다. 원래 이름은 해은항’, 해은마을(함평군 손불면 학산리)에 있는 포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까지 어업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고, 2006년에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이 되었다. 하지만 여객선은 들르지 않는다. 아니 들러본 적도 없고, 그저 인근 어민들의 선착장으로만 활용되어 왔었다. 그게 해안도로가 건설되고, 국가어항으로의 승격을 목표로 시설을 확충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부두는 웬만한 축구경기장보다도 더 넓었다. 하긴 국가관리 연안어항으로의 승격을 위해 명칭까지 바꿨다니 어련하겠는가. 해양 마리나 시설, 항로준설, 연안정비 등 개발 사업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편의점이 들어서 있었다.

 널찍한 잔디공원에서 ‘HAM PYEONG’이라고 적힌 커다란 전시물이 반긴다. 이곳 함평항은 해넘이의 명소 중 하나다. 조형물 곁에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전망대를 지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저 멀리 육지와 섬의 실루엣, 이 둘을 이어주는 칠산대교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거기다 일몰까지 더해지면 조물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단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옥실 방조제를 지나 영광 땅(염산면 옥실리)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이 방조제가 함평과 영광의 군 경계인 셈이다.

 푸름으로 뒤덮인 옥실리 들녘과 새하얀 철새가 만들어내는 조화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칠산대교가 바다를 가른다. 호리병처럼 생긴 함해만의 주둥이이자, 해제반도가 끝나는 북쪽의 도리포와 영광군 염산면의 향화도 사이에 놓은 다리다. 왕복 2차선, 길이 1800m로 지난 2019 12월에 개통됐으며, 그 덕분에 양 지역은 차량 이동 시간이 70분에서 5분으로 단축돼 생활편의가 크게 향상됐다.

 옥실방조제의 끄트머리에도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고깃배보다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무동력선들이 더 눈길을 끄는 포구이다.

 선착장을 지나자 칠산대교가 머리맡으로 다가온다. 35코스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함평만의 입구, 바다가 깊어졌나보다. 고기잡이에 한창인 어선들이 꽤 많다.

 14 : 56. 날머리인 향화도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들어서자 111m의 높이를 자랑하는 칠산타워가 시야를 꽉 메워버린다. 전남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로, 영광군의 11개 읍면이 하나로 화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전망대에 오르면 칠산대교와 인근의 섬과 바다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서해랑길 안내도(영광 36코스)는 향화도항의 입구, 버스승강장 옆에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함평만이 함평군과 무안군을 아우르는 큰 항아리라면 이곳 향화도항과 도리포 유원지는 그 항아리의 주둥이다. 지명에서 드러나듯 섬이었단 향화도(向化島)는 간척사업에 의해 육지가 됐고, 항구가 들어서면서 송이도와 낙월도를 잇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3.47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점을 감안하면 무리한 속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