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산(雲住山, 459m)

 

산행일 : ‘18. 2. 6()

소재지 : 세종시 전동면과 전의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고소재삼각점봉임도삼거리운주산 정상운주산성 순환로서문지고산사운주산성 주차장(산행시간: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세종특별자치시의 진산(鎭山)인 운주산은 관내에서 가장 높은 산(459m)일 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의 유적지(遺蹟地)를 품고 있는 산이다. 정상을 기점으로 3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으로 쌓아올린 운주산성(충남도지정기념물)’을 말하는데, 백제 멸망 후 풍왕과 복신, 도침장군을 선두로 일어났던 백제부흥 운동군의 최후의 구국항쟁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산은 전체적으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널따란 등산로에 조금이라도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그리고 길이 나뉘는 곳마다 이정표를 설치했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한마디로 산림공원(山林公園)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산세 또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오르내리는데 어려움도 없다. 경사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거기다 2~3시간이면 넉넉히 산행을 마칠 수 있으니 가족단위의 산행에 적합한 산이라 할 수 있겠다.


 

산행들머리는 세종시 국가유공자묘역(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봉대리 산 30-10)

논산-천안고속도로 남풍세 IC에서 내려와 조치원·공주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번 국도를 탄다. 전동교차로(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굴다리 아래를 통과하면 전동삼거리(전동면 노장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전동로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전동면과 전의면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인 고소재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고갯마루의 왼편에는 널따란 묘역(墓域)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조성한 국가유공자묘역이란다. ‘국가유공자묘역이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을 모시는 묘역을 말한다. 다시 말해 국민의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호국의 성지(聖地)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한 묘역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사업은 국가에서 하는 게 보통이지만 요즘에는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기 지역 출신을 기리는 사업이니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이곳이 국가유공자 묘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왼편으로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등산로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100m쯤 들어가자 맞은편 산자락으로 올라갈 수 있게끔 계단이 놓여있다. 망설일 필요 없이 올라서면 된다. 참고로 망경산으로 가려면 들머리가 있는 도로 건너편에서 이정표(망경산 정상0.6Km/ 전동면/ 천안시/ 운주산 정상4.2Km)를 찾아야 한다. 0.6Km쯤 올라야 만나게 되는 망경산은 천안에 소재하고 있는 망경산(600.1m)과 구분하기 위해 작은 망경산이라고도 불린다.



언덕 위로 오른 산길은 묘역(墓域)을 조성하면서 깎아내린 절사면(切捨面)의 왼편 가장자리를 따른다. 덕분에 발아래에 있는 국가유공자 묘역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망경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지자체(地方自治團體) 단위의 묘역이어선지 들어선 묘의 숫자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5분쯤 걸려 묘역을 통과하면. 모퉁이에 세워진 이정표(운주산 정상4.1Km/ 망경산 정상0.7Km)가 능선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 희미하나마 오른편 능선으로도 길의 흔적이 보이는 걸 보면 고갯마루에서도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두엇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높이가 459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니 일부러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을 뿐만 아니라, 길이 나있으나 등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향에는 친절하게도 등산로 아님이라는 표시까지 해두었다.





그렇게 봉우리 몇 개를 넘자 벌목(伐木)으로 인해 생긴 개활지(開豁地)가 나타난다. 천안시 방향으로 시야가 뻥 뚫린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없다. 짙게 낀 연무(煙霧)가 시계(視界)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순하다고 해서 맨날 완만한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골이 깊을 뿐만 아니라 경사까지도 급한 곳이 나온다. 하긴 높이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내림의 폭()이 큰 충청도 지역 산들의 특징이 어디 가겠는가. 다만 이곳 운주산은 그런 특징이 약할 따름인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4분 만에 삼각점봉에 올라선다. 해발이 240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봉우리이다. 그래선지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난 지점에 설치해놓은 삼각점(청주 402)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서 정상석을 찾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걷자 산길은 임도로 내려선다. 그리고 50m쯤 떨어진 곳에서 산길은 또 다시 임도와 헤어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임도와 만났다가 헤어지는 지점마다 이정표(운주산 정상 1.5Km/ 망경산 정상 3.3Km)가 세워져 있고, 특히 다시 만나는 산자락에는 침목(枕木) 계단이 곱게 놓여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누군가는 이곳을 밤실고개라고 적고 있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0분 후, 또 다시 임도(이정표 : 운주산 정상 1.1Km/ 망경산 정상 3.7Km)를 만난다. 이어서 밀양 박씨묘역을 만났다 싶으면 임도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6분 정도 임도를 따르다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아니 능선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으니 사거리(이정표 : 운주산 정상0.6Km/ 봉대리/ 미곡리/ 망경산 정상4.2Km, 노곡리)라 부르는 게 옳겠다.



길가에 세워진 국가지점번호 표시판이 눈길을 끈다. 상단에다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생산되는 전기를 어디에 사용하는지는 몰라도 처음 보는 외형이다.



운주산으로 향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 경고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경사가 심한 곳이니 미끄럼에 주의하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계단의 가장자리를 따라 밧줄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거기다 이 구간은 거리까지도 짧다.



하지만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첫 번째 계단이 끝났다 싶으면, 진행방향의 산자락에 놓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 것은 아예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문득 백팔계단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어디에선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108개나 되는 그 계단을 오르면서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떨쳐버리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108개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계단에 비하면 백팔계단은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 할 수 있겠다. 계단의 숫자가 108개가 아니라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15분 조금 못되게 죽을 고생을 하면 계단은 끝난다. 하지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긴 계단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계단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이번 것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5분 만에 둥그런 대() 모양으로 생긴 정상(이정표 : 고산사1.7Km/ 성곽순환로/ 망경산 정상4.8Km)에 올라선다. 운주산(雲注山)항상 구름이 머무는 산이라는 뜻으로 구름 운()’살 주()’ 자를 쓴다. 하지만 옛 이름은 고산(高山)이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그 증거를 금성산 아래에 있는 비암사(碑岩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여러 형태의 스님들을 형상화한 괘불의 아랫부분에 쓰여 있는 글씨에서 찾는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운주산(雲住山)전의현(全義縣)‘의 남쪽 7리에 있는데 증산(甑山), 고산(高山)과 더불어 솥발 모양으로 솟아있다.’는 기록과 대비시키며 문헌(文獻)에서 나오는 운주산이 현재의 금성산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결부시킬 경우 현재의 운주산은 자동적으로 문헌상의 고산이 된다. 또한 그들은 조선 초기까지 해도 '고산'이라 불려왔으나 조선 후기에 '운주산(雲住山)'으로 잘못 기록되면서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고 주장한다.



정상은 둥그런 모양의 대지(臺地)로 이루어져 있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제단(祭壇)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위에 고유문이라고 적힌 빗돌이 세워져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고유문(告由文)이란 국가나 일반 개인의 집에서 큰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또는 치른 뒤에, 그 이유를 신명(神明)이나 사당(祠堂)에 모신 조상에게 알리는 글을 말한다. 이로 보아 이곳 운주산 정상에서 해마다 지내오고 있다는 고산제(高山祭)’ 행사를 위해 만든 시설물이 아닐까 싶다. ! 깜빡 잊을 뻔했다.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는 또 다른 표식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고유문 빗돌을 올려놓은 대 옆에 삼각점(전의 024)을 설치하고 이곳의 해발고도를 459m로 적어 놓았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편이다. 동쪽 방향으로 시야가 열리는데, 같은 산줄기에 있는 망경산과 동림산을 중심으로 그 오른편으로는 청주시가지가 그리고 왼편에는 천안 제5 일반산업산지가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천안시에 소재하는 독립 기념관과 청주시 및 아산만까지 보인다는데,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는 연무(煙霧) 때문이다. 아니 동림산 우측에 있어야할 청주시가지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그쪽 방향에 세워놓은 조망도 덕분에 눈에 들어와야 풍경화의 포인트들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의 아래에는 백제의 얼 상징탑이 우뚝 솟아있다. 백제 부흥 운동을 하다 죽은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라고 한다. 이곳에서 그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薦度齋)를 매년 올리고 있는데, 백제가 멸망한 음력 98일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그 즈음의 토요일에 고산제(高山祭)’라는 이름으로 열리고 있단다. 참고로 고산제는 여지도서(與地圖書)’충청읍지(忠淸邑誌)’ 등에 나오는 운주산의 옛 이름 고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몇 걸음 내려서자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뉜다. 뜬금없는 운주산성 안내판말고도 이정표(성곽순환로 청송약수터0.8Km/ 고산사1.6Km/ 뒤웅박고을2.2Km, 전동면사무소 5.4Km/ 운주산 정상)가 세워져 있으니 잘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하산지점인 고산사로 내려가는 길이 두 개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다. 어디로 가더라도 고산사에 이르기는 매한가지니까 말이다.



이정표가 등산로로 표기하고 있는 고산사 방향의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널따란 데다 판석(板石)까지 곱게 깔아 놓았다. 성곽까지의 거리 또한 짧다. 하지만 인위적인 냄새가 강해 산행하는 재미는 뚝 떨어진다.



좋은 길을 놓아두고 성곽순환로를 따른다. 운주산성을 조금이라도 더 음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허리를 따라 난 오솔길은 자연 그대로이다. 세월 따라 자연스레 만들어진 오솔길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성곽(이정표 : 성곽순환로/ 청송약수터0.5Km/ 운주산 정상0.4Km)이 나타난다. 최근에 복원을 해놓은 듯 쌓아올린 돌들의 색깔이 하얗다. 아마 동문지(東門址)일 것이다. 성문의 안쪽에 있는 사각의 터에는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무슨 건물이 있던 자리인 것 같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울타리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나, ()에 대한 안내가 아니라 운주산성 전반에 대한 설명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안내판을 세운 공무원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뭔가를 하나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 하는 탐방객들에게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영락없이 닮았다며 바위 하나를 가리킨다. 맞다. 그녀 말마따나 맹꽁이를 쏙 빼다 닮았다. 바위다운 바위 하나 보이지 않던 산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바위가 눈요깃감이라니 행운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잠시 후 정자(亭子) 하나가 나타난다. 조망이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곳에다 정자를 지어놨는지 모르겠다.



정자를 지났다싶으면 또 다시 성곽(城郭)을 만난다. 운주산성(雲住山城)의 서문지(西門址)일 것이다. 성곽은 오래된 고성(古城) 답지 않게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된 느낌이다. 이곳 역시 최근에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에서 이곳 서문지까지는 대략 40분 정도가 걸렸다. 참고로 운주산성(雲住山城 :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1)은 운주산 정상을 기점으로 서·남단 3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 :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이다. 성의 둘레는 3,098m, 이것이 외성(外城) 구실을 하고 있고 성안에 543m 규모의 내성(內城)이 있다. 그러니까 이중성(二重城)인 셈인데 하나는 석성(石城)이고 하나는 토성(土城)으로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세종시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내·외성이 모두 석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백제시대에 축성된 이후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 큰 전쟁을 치루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붕괴된 것을 최근에 이르러 복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참고로 유적지 발굴과정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와 토기의 조각들이 다수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어골문(魚骨文)과 격자문(格子文)이 장식된 기와조각을 비롯하여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조선시대 백자조각도 수습되었단다. 이로보아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까지 사용되어 온 산성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운주산성은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풍왕과 복신, 도침장군을 선두로 일어났던 백제부흥 운동군의 최후의 구국항쟁지(救國抗爭地)로 알려져 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백제 유민들은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임존성에서 흑치상지와 복신이 이끌던 부흥군은 도침대사가 이끄는 주류성으로 모여 나당연합군을 크게 물리쳐서 빼앗겼던 수많은 성을 회복한바 있다. 당시 복신과 도침대사가 근거지로 삼아 승리했던 주류성의 위치가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주장의 근거를 백강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해 농사지을 수 없는 곳이다라고 적은 일본 최고(最古)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찾는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도 주류성은 연기군에 있다고 주장했다. 위 묘사와 가장 근접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주류성의 위치를 두고 홍성의 학성산성서천의 건지산성’, ‘부안의 위금암산성등으로 견해가 갈린다.



그나저나 백제 부흥군은 그들이 바라던 바를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야 어떠했던 간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으로 최후를 맞은 3년여의 삶을 그려보자. 그들의 영혼이 1300여년 세월을 넘어 운주산 골짜기마다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리고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보자. 우리 모두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자는 얘기이다.



산성의 안은 공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팔각정자와 연못, 평상 쉼터와 산책길 등 가족과 여행객들이 잠시 머물며 숨을 고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산성에서의 스산한 마음을 뒤로 하고 무거운 발길을 고산사로 돌린다. 내려오는 길가에는 유난히도 돌이 많다. 운주산이 전형적인 흙산임을 감안할 때 의외라 할 수도 있겠다. 혹시라도 백제 유민들이 흘린 눈물방울이 돌로 변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난 지금 백제유민들의 한 맺힌 눈물을 발길로 차며 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서문(西門)에서 고산사로 내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임도를 따라 편안하게 내려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덜길을 이용해 곧장 고산사로 내려가는 방법이다. 성문 앞에 세워진 이정표(고산사 0.7Km/ 임도/ 운주산 정상 1.0Km)에는 고산사로 곧장 내려가는 길에다 등산로라고 표기를 해놓았다. 오솔길이 더 바람직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난 길을 20분 남짓 내려서자 계곡 옆 산자락에 들어앉은 사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운주산의 옛 이름인 고산(高山)’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고산사(高山寺)‘이다.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고색창연한 옛 절도 아니고, 명성을 크게 떨칠 만큼 위세 당당한 가람(伽藍)은 더욱 아니다. 1966년에 지었으니까 역사 또한 일천할 뿐이다. 하지만 창건 사연만은 남다른 데가 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란다. 참고로 이 절은 운주문화연구원의 최병식 원장이 지었다고 한다. 백제 역사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전공인 전자공학까지 버린 늦깎이 고고학자(考古學者)’란다. 주지스님은 법광이다. 백양사와 선운사에서 승가대학장을 역임했다는 이력이 돋보이는 스님이다.



절의 대문을 겸하고 있는 2층짜리 종각(鐘閣)‘은 이름부터가 백제루’(百濟樓)‘이다. 절집 누각으로는 매우 독특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백제를 향한 창건주의 열망이 묻어나는 수식어라 할 수 있겠다. ()에는 백제삼천범종이 걸려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 나당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조성한 범종이라고 한다.



마당으로 올라서면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가 눈에 들어온다. 위혼비 너머로 보이는 전각(고산사를 설명하면서 첨부한 사진과 같은 전각이다)백제극락보전(百濟極寶殿)’이다. 당나라에 끌려가 세상을 떠난 의자왕과 백제를 재건하려다 산화한 부흥군의 극락왕생을 빈다는 의미일 것이다. 보다 더 상세히 알고 싶다면 백제루 앞에 세워놓은 공덕비(功德碑)’를 찾아볼 일이다. 운주산성의 유래, 백제 부흥운동의 개요, 1997년 고산사 창건의 동기와 백제극락보전 중창의 의미를 간략하게 적었다.



사찰이 내려다보이는 산 절벽의 턱밑에 걸터앉은 전각 하나가 절간의 전체적인 풍모를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세존각(世尊閣)이라는데 그 안에 모셔진 부처여래상이 절간을 오가는 중생을 굽어 살피는 형상이다.



세존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발아래에 있는 고산사의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옴은 물론이고, 작성산과 금성산, 오봉산 등 주변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행날머리는 고산사 앞 주차장

위혼비 앞에 있는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 후 절간을 빠져나온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나타나는 일주문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관리사무소가 있는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강추위 때문에 중간에 쉬지를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다만 요것조것 설펴보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음은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주차장 주변은 공원으로 잘 가꾸어 놓았다. 계곡물을 끌어올려 물레방아를 만들었는가 하면, 작은 연못 위로는 데크로 길을 내어 산책을 할 수 있게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