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栢紫山, 287m)-천호산(天護山, 366m)

 

산행일 : ‘17. 3. 7()

소재지 : 충남 계룡시 금암동·엄사면·두마면과 논산시 연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계룡지구대(양정)금바위천마산두리봉천호산353m대목재전투경찰대 사격장송정21번 국도송정1(산행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한마디로 산이라기보다는 공원(公園)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산이다. 그만큼 잘 가꾸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눈이 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산을 오르내리는 시민들을 꽤 많이 만날 수가 있었다. 평상복 차림이 대부분이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두 산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천마정에서 만나게 되는 금바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망(眺望)만은 괜찮은 편이다. 명품 전망대로 알려진 금바위 말고도 여러 곳에서 계룡산과 계룡시가지, 그리고 대둔산 등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길도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한 것이 여느 흙산들이 보이는 특징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소나무보다는 참나무들이 많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을 감안해 볼 때 가족나들이 겸해서 한번쯤은 찾아볼 만한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양정지구대(계룡시 엄사면 엄사리 211-8)

호남고속도로 계룡 I.C에서 내려와 계룡대로를 타고 계룡시가지를 통과하면 연화교차로(계룡시 엄사면 엄사리)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1번 국도로 올라가 1Km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양정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 근처에 있는 계룡지구대가 산행들머리이다. 당진-영덕고속도로 공주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와 96번 국도, 그리고 1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계룡시까지 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실제로 우리를 싣고 온 산악회 버스도 이 후자(後者)의 방법을 택했다.




계룡지구대(논산경찰서) 앞마당의 왼편 산자락으로 놓인 통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눈에 확 띄는 곳에 계단이 놓여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는 에어브러시(airbrush)‘가 매달린 천마·천호산 등산로 안내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산행을 시작해 볼 일이다. 산행 스케줄을 짜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길은 한없이 순하다. 널따라면서도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완만하기 때문이다. 혼자보다는 둘이서 도란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거기다 어젯밤 내린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낭만을 더한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여간 듣기 좋은 게 아니다. 올해의 마지막 눈 산행이 될 것 같아 느릿느릿 걸으면서 한껏 여유를 누려본다.



여린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진다. 길가에 밧줄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르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적당히 가파르다고 보면 된다.



10분쯤 지나 천마사 갈림길‘(이정표 : 팔각정 0.97Km/ 천마사 0.22Km/ 양정 0.39Km)을 만났다 싶으면 곧이어 삼각점(공주 457)이 설치되어 있는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삼각점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잡목들 때문에 아랫도리가 잘려나가긴 했지만 계룡시가지를 조망하는 데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시가지의 뒤편은 계룡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어젯밤에 눈이 내린 탓인지 산릉이 온통 하얀 색깔을 띠고 있다. 오늘 산행의 특징은 조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계룡시(鷄龍市)1개 동(금암동)3개 면(도안면, 엄사면, 두마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60.68면적에 인구가 4957(2013 추계)인 자그마한 도시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국방도시로 시민의 대부분이 군인(軍人) 등 유동인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존 주민들은 10% 남짓 밖에 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계룡시는 황등야산군과 황등야군, 황산군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 연산현에 속했다가 1895년 공주부 연산군, 그리고 1896년에는 충청남도 연산군이 되었다. 1914년에는 두마면으로 개칭되어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자 1990년 계룡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2003년에는 계룡시로 승격했다.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산행이 이어진다. 그리고 4분쯤 지나면 시청갈림길‘(이정표 : 팔각정0.88Km/ 시청0.82Km/ 양정0.42Km)을 만난다. 왼쪽 방향의 눈길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여럿 찍혀있다. 양정에서 올라오면서 보지 못했던 흔적들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잠시 후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공터가 나온다. 간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기구들 외에도 평행봉 등의 체력단련용 기구들도 보인다. 숫제 종합 체육센터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거기다 꽤나 많은 벤치들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벤치는 이곳 말고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는 천마산이 그냥 산에 그치는 게 아니라 계룡시민들의 안마당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천마정으로 향한다. 여전히 길은 넓다. 아니 오히려 더 넓어졌다고 봐야겠다. 경사가 없는 것 또한 변함이 없다.



그렇게 7분 남짓 진행하면 날등에 올라앉은 팔각의 멋진 정자(亭子)를 만난다. 천혜의 전망대로 알려진 천마정(天馬亭)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는 거대한 바위의 반대편 끝자락에 걸터앉은 것이 누가 보아도 천혜의 조망처이다. 잠시 쉬어가며 조망을 즐겨보라는 배려로 지어놓은 모양이다.




천마정의 앞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의 한가운데가 마치 칼로 잘라 놓은 것처럼 나뉘어져 있다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 바위는 금바위(또는 金岩)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밖에도 암소바위(바위의 모양새가 소의 머리와 몸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송장바위 등 바위에 얽힌 다양한 이름들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고려 중엽에 못된 무뢰배로 변한 개태사의 승려들을 토벌한 최일장군에 얽힌 전설 하나를 전해볼까 한다. 국가의 혼란을 틈타 민간(民間)에 큰 폐해(弊害)를 끼치고 있던 개태사의 승려들을 토벌하려고 내려온 최일장군이 어느 날 말을 타고 개태사를 향하여 가던 중이었다. 금암리 앞을 지나려는데 한 농부가 검은 암소로 논을 갈면서 이놈의 미련한 소야! 최일 만큼이나 미련하고 어두운 소이구나라고 외치더란다. 이 소리를 들은 최일 장군이 말에서 내려 농부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니 천마산 중턱에 있는 암소바위가 개태사를 보호하고 있어 이 절을 치려고만 하면 안개로 절을 보호하니 암소바위를 칼로 내려 친 다음 개태사를 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단다. ()의 계시(啓示)임을 알아차린 최일장군이 천마산에 올라 장검으로 암소바위의 한복판을 내려치니 바위가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흐르더란다. 그런 연후에 안개가 걷힌 개태사에 숨어있던 승려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송장바위라는 이름은 바위가 사람의 시신(屍身)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금바위라는 이름이 생겨난 연유는 또렷하지가 않다. 위의 전설에서 바위가 둘로 갈라졌다고 했는데 여기서 생겨난 이름이 아닐까 싶다. ‘금이 간 바위라는 뜻으로 말이다. ‘이란 낱말의 어원(語源)에는 둘로 나누어진 사이에 생겨난 선()을 이르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금암(金岩)은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역(誤譯)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모두가 내 개인적인 의견일 따름이니 그냥 흘려들으면 될 일이다.



천마정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정자에라도 오를라치면 계룡시 문화체육공원이 자리 잡은 엄사면 일대와 금암동 아파트촌을 비롯한 계룡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가지 뒤편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계룡산(鷄龍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곳 계룡시만이 아니라 대전과 공주, 논산 등 주변에 자리 잡은 수많은 도시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산이다. 아무튼 저 산은 풍수지리에서도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관광지로도 제5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데크길을 지나 천마산으로 향한다. 거의 경사가 없는 반반한 산길이 이어진다. 잠시 후 보덕사 갈림길’(이정표 : 천마산 0.42Km/ 보덕산 / 시청 1.98Km, 양정 1.64Km, 팔각정 0.28Km)을 지났다 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길게 놓인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면 송전탑(送電塔)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정표 : 천마산0.16km/ 농소리입구0.38km/ 시청2.24km, 양정 1.9km, 팔각정 0.52km)에서 농소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데, 계룡시가지와 계룡산 등 주변 풍경이 한눈에 잘 들어오므로 잠깐 쉬어가며 조망을 즐겨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천마산으로 향한다. 거의 경사가 없는 반반한 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거기다 가끔은 계룡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한마디로 멋진 길이라 할 수 없다. 서슬 시퍼런 계룡산의 산줄기는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래서 저 산줄기, 즉 계룡산에서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그 옛날 동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신라군을 막는 저지선(沮止線)이 되었다. 신라군에 맞서 싸워야 할 백제군의 마지막 저지선 말이다. 이후부터는 이렇다 할 언덕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들판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산줄기에 나있는 고갯마루들 중 어느 하나라도 넘으면 금강을 지나 서해 바다까지 한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지세(地勢)인 것이다.




잠시 후, 그러니까 천마정을 출발한지 15분이 조금 못되어 천마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45분만이다. 열 평이 훨씬 넘는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의외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꼭 있어야할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등산로의 상태나 이정표 등 시설물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기에 정상석 하나쯤은 당연히 세워져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허전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정상은 이정표(천호봉 4.0km, 농소리 1.1km/ 양정 2.06km, 금안동 0.7km, 팔각정 0.67km )와 벤치, 그리고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정상은 조망까지도 보잘 것이 없다. 나뭇잎이 다 져버린 빈 나뭇가지 사이로 계룡시가지가 고개를 내밀지만 잎이라도 무성해질라치면 이는 곧 사라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천호산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산길은 여전히 완만하게 이어진다. 원래부터 낮은 산이라서 고도를 낮추는데 급할 게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7분 후에는 농소리로 연결되는 삼거리에 내려선다. 이정표(황룡재7.23Km/ 농소리입구0.26km, 유림회관 1.79km/ 천마산0.27km, 팔각정 0.94km, 양정 2.33km, 시청 2.67km)의 위에는 능선종점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아마 산책삼아 천마산을 오른 시민들에게 이쯤에서 내려가라고 지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하나 같이 농소리로 향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밋밋한 오름길을 따라 3~4분쯤 올라가면 벤치 두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하고 있는 두리봉 정상이다. 천마산과 마찬가지로 정상석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 흔하던 이정표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국가지점표시목(다바 7697-0725)이 이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두리봉을 지난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미끄러지는 것이 두려울 경우 밧줄에 의지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리막길 오른편은 비닐 망()으로 막혀있다. 누군가 약초라도 재배하고 있나 보다. 그렇게 9분 정도를 내려서면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농소리고개(이정표 : 천호봉3.15km/ 농소리0.25km/ 천마산0.85km) 이다.



농소리고개에서는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진 농막(農幕)을 오른편에 두고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잠시 후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조림한 것으로 보이는 소나무들이 가득 차 있는 기분 좋은 산길이 잠시 이어진다. 왼편으로 잘 써놓은 묘역(墓域)도 내려다보인다. 숫자로 보아 문중 묘로 보이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음덕(蔭德)을 많이 입었나보다.



그렇게 5~6분쯤 진행하면 또 다른 농막(農幕)을 만난다. 이번의 것도 역시 컨테이너를 이용했다. 맞은편 산자락에 묘목을 심는 등 주변을 농장으로 일구었는데, 농장을 관리하는데 쓰이는 농막인 모양이다.



농막에서는 비록 잠시지만 임도(林道)를 따른다. 오른편 방향으로 50m쯤 진행하다가 임도가 둘로 나뉘는 지점에서는 왼편의 오르막 임도를 따른다.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코팅지가 천호산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들머리를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00m쯤 임도를 따르다가 왼편 산자락으로 치고 오르면 또 다시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농막에서 6분이 걸렸는데, 능선을 농장으로 일구어버린 탓에 산자락을 한 바퀴 에둘러서 올라온 셈이다. 다시 올라선 능선은 여전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주변의 풍경 또한 아까와 별반 다름이 없다. 거의 모든 나무들이 참나무들뿐이란 얘기이다. 조망이 트이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 작은 오르내림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그리고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아니 가끔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밧줄을 매달아 놓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 거리가 짧아서 큰 어려움 없이도 올라설 수 있기에 특별히 거론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천호봉1.06km/ 농소리0.66km/ 개태사 방향/ 천마산3.26km)를 지나고, 이어서 4분 후에는 수복동 삼거리’(이정표 : 천호봉 0.9km/ 회음동 0.8km, 수복동 0.75km/ 천마산 3.1km)를 만난다.



또 다시 반복되는 작은 오르내림을 이어가다 보면 또 다른 수복동 갈림길’(이정표 : 천호봉0.32km/ 수복동0.8km/ 천마산3.68km)을 만난다. 능선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아무튼 오늘 걷고 있는 산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곱다고 할 수 있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곳곳에 이정표까지 잘 세워져 있다. 길 잃을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굳이 필요가 없어 보이는 곳에까지 이정표들을 세워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만큼 많은 이정표들이 세워져 있다는 얘기이다. 논어(論語)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자공(子貢)의 물음에 공자(孔子)가 답하는 형식을 빌었는데,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말인데, 내가 더 중용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이정표를 세운 사람들로 봐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다 설치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오늘 걷고 있는 이 능선은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일부구간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려나온 금남호남정맥은 전북 진안군 부귀면에 위치한 주화산(珠華山, 600m)에서 금남과 호남이라는 두 개의 산줄기로 나뉜다. 이중 북쪽으로 갈려나오는 산줄기가 금남정맥인데, 주화산에서 시작하여 왕사봉과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으로 이어지다가 부여의 부소산에서 끝을 맺는다. 총 길이가 118쯤 되는데 금강의 남쪽에 있는 산줄기라는 데서 금남(錦南)‘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후부터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오늘 걷고 있는 산릉에서 가장 주가 되는 산이다 보니 뭔가 생색이라도 내려나 보다. 그렇게 4분쯤 올라서면 개태사 갈림길‘(이정표 : 천호산 0.3km/ 개태사1.1km/ 천마산 방향)이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개태사(開泰寺)로 연결된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하늘의 가피(加被)를 받아 천년만대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의지로 창건했다는 그 개태사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당시 이곳 황산벌에서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신검이 두 나라의 사활을 걸고 치열한 전투를 치렀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이룰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황산벌이 강력한 고려제국 건설의 첫 무대였던 셈이다. 그런 인연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이 거대한 제국()을 연() 곳이라는 뜻의 개태사(開泰寺)였다는 것이다. 하긴 내가 왕건이었다고 해도 오래오래 기억해 둘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참고로 원래의 개태사는 폐허로 변해 터만 남아 있었으나, 1930년 김광영이란 사람이 중건하여 도광사라 부르다가 그 뒤 개태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잠시 후 또 하나의 수복동 삼거리’(이정표 : 천호봉 0.12km/ 수복동 0.94km/ 천마산 3.88km, 개태사 방향)를 만났다 싶으면 곧이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고 있는 천호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천마산을 출발한지 1시간 25분 만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정표(벌곡방향/ 신계룡변전소4.30km, 수복동 0.89km/ 천마산4.0km, 개태사 방향)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이정표에다 이곳의 지명을 적어 놓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산행 초반에 만나는 이정표들은 맨 꼭대기에다 현재 위치의 지명을 적어놓았더니만 이곳의 이정표에는 그것마저도 생략해 버렸다. 그저 선답자들이 매달아 놓고 간 리본들을 참조해 이곳이 천호산의 정상이려니 해볼 따름이다.



천호산(天護山)의 원래 이름은 황산(黃山)이었다고 한다. 산 아래 들녘의 지명인 황산벌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백제의 계백장군이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그 들판 말이다. 또 다른 설()은 천호산이라는 이름의 근원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신검 사이에 있었던 치열한 전투에서 찾는다. 이곳 황산벌에서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큰 싸움을 치렀는데, 그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를 계기로 대업을 이룬 왕건은 이 땅을 하늘이 도운 곳이라 여겼고, 황산의 이름 또한 천호산(天護山)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천호산을 지나면서 주변의 풍경이 확 바뀐다. 참나무 일색이던 능선이 소나무 일색을 변한 것이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짙은 솔향이 코끝을 자극해 준다. 지쳐가던 육신(肉身)이 다시 깨어나는 것 같다. 솔향 속에 배어있을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중의 하나가 소나무라니까 말이다. 이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의 살균기능 외에도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효능도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호사(豪奢)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다. 능선이 또 다시 참나무들로 옷을 갈아입어버리는 탓이다. 본디 지니고 있던 특징을 벗어난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모양이다. 이곳 천마산과 천호산에는 산의 특징으로 삼아도 될 만큼 참나무 숲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7분쯤 걸으면 화악리로 연결되는 삼거리(이정표 : 황룡재3.0Km/ 화악리입구1.0Km/ 천호산0.5Km)를 만난다.



이후로도 산길은 크게 변화를 주지 않는다. 능선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고, 그 능선은 온통 참나무 일색인 것이다. 그렇다고 소나무가 일절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소나무 무리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저 양념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얼마쯤 걸었을까 오랜만에 시야(視野)가 열린다. 송전탑(送電塔)을 세우면서 주변의 나무들을 제거해 놓은 덕분이다. 이름 모를 주변의 산들이 수없이 널려있는데, 눈대중으로 헤아려 볼 때 그중 가장 높은 산은 대둔산이 아닐까 싶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고맙게도 능선만을 고집하지 않는 구간도 만난다. 조금은 덜 힘든 것 같아 사면(斜面)으로 난 길이 여간 고맙다. 거기다 주변의 소나무들까지 그 개체수를 늘려가고 있다.



사면을 돌아 오르면 양지서당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이정표(황룡재2.3Km/ 양지서당 입구1.0Km/ 천호산1.2Km)를 만난다. 혹시 대전시 유성구(도룡동)에 있던 그 양지서당(養志書堂)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 인성예절(人性禮節) 등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한문과 서예, 검도 등을 가르치던 양지서당이 2000년대 초쯤에 논산시 쪽으로 이전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이다. 천호산에서 이곳까지는 17분이 걸렸다.



사면으로 난 길에서 다시 한 번 조망이 트인다. 아까 송전탑에서 보았던 풍경이 또 다시 펼쳐지는데, 잡목이 훼방을 놓던 아까보다는 훨씬 더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삼거리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이 또 다시 이어진다.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은 수북하게 쌓인 솔가리로 인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이건 숫제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경사까지 거의 느낄 수가 없으니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 아닐까 싶다.



얼마쯤 걸었을까 산길이 위로 향하고 있다. 까짓 오름길이 여기만 있는 게 아니니 특별히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오름길은 밋밋한 경사로(傾斜路)로만 이어지던 오늘 산행에서는 보기 드물게 가파르기에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밧줄에 의지해서 오를 수 있도록 길가에 난간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다 오르막길의 거리 또한 제법 긴 편이다. 꽤나 힘을 쏟아야만 첨부된 지도에 353m봉으로 나와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소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353m봉 정상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았다. 조망이 좋으니 느긋하게 쉬면서 즐기다 가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의미인데, 지금의 상황과 딱 맞지 않나 싶다. 봉우리 위에서의 조망이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이다. 천마산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로 알려진 천마정보다 오히려 한 수 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의 산행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조망, 즉 계룡산과 대둔산에 대한 조망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멋진 풍광에 푹 빠져 있다가 하산을 서두른다. 하산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밧줄에 의지해서 서서히 내려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대목재(이정표 : 황룡재1.4Km/ 사격장0.6Km/ 대목리0.5Km/ 천호산2.1Km)에 내려선다. 연산면의 한림정마을(송정리)과 벌곡면의 대목골마을(한삼천리)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사거리인 이곳에선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선두대장의 진행방향표시지가 오른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능선을 타다가 팔각정을 거쳐 연산농공단지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뭔가 피치 못할 변수(變數)라도 생겼던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길을 구부러뜨림으로써 그 경사를 확 떨어뜨렸다.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저 길이 굽이돌면서 만들어 놓은 예쁜 곡선(曲線)을 눈에 담으며 서서히 내려서고 볼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패자(敗者)의 한을 품은 퇴락한 흔적이라도 찾아볼 것이고 말이다. 고대사회를 피로 물들였던 살벌한 격전지였으니 아직까지 숨어있는 그 어느 흔적 하나 찾아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13분쯤 내려가니 전투경찰대의 사격장이 나타난다. 이곳 연산은 고대 사회를 피로 물들인 격전지(激戰地) 중 한 곳이다. 계백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대군과 맞선 황산벌도 이곳이고, 고려에 투항한 견훤이 자신이 세운 후백제의 군대와 맞서 싸워 왕권을 찬탈한 큰아들 신검을 무릎 꿇게 한 곳도 다름 아닌 이곳이다. 누군가는 그런 치열함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육군 제2훈련소(연무대)’에서 찾고 있었다. 천 년도 훨씬 더 지난 그 옛날, 피로 물들었던 이 땅에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군생활의 기초를 닦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라면 이곳 전투경찰대의 사격장 또한 그 치열함에 넣어도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송정1(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423-4)

사격장에서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전투경찰대 정문을 통과하고 나면 곧이어 송정2리 한림정마을에 이르게 된다.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선비가 정자(亭子)를 짓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마을이다. 산행은 이곳에서 대충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10분이 걸렸다.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쉬지를 못하고 걸었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는 송정1리 마을에 주차되어 있다고 한다. 주차를 시킬만한 곳을 찾다보니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2Km 넘게, 그러니까 3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덕분에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까짓 거리쯤이야 문제될 게 없지만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을 스쳐가며 걸어야만 하는 ‘1번 국도4차선 도로변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정자(亭子)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마을 앞 사거리에는 한림정마을의 지도와 함께 마을의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계백과 5000결사대의 기상이 서린 마을이라는 부제(副題)를 달았다.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1번 국도에도 계백로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계백장군과 그 장졸들이 품었을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기리 보전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다. 길가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壁畫)이다. 고전 산수화를 그려놓았는데, 봉우리 위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다. 한림정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 오늘 하루만이라도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