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산(魯城山, 348.1m)-옥리봉

 

산행일 : ‘15. 6. 23()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노성면과 상월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상월초교노성산노성산성금강대도옥리봉궐리사명제고택애향탑주차장(산행시간 : 1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노성산(옛 지명은 魯山 또는 城山)은 높이가 비록 4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노성현(魯城縣)의 진산(鎭山)일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상 어림에 있는 노성산성(魯城山城)이나 성산봉수(城山烽燧)가 증거라 할 수 있다. 제법 규모가 반듯한 산성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은 일단 순하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산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드라운 흙길로 연결된다. 거기다 산이 얕은 탓에 경사(傾斜) 또한 완만하다. 산행 내내 힘들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다만 산행시간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시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짧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나들이 코스로 찾았을 경우에는 하등에 문제가 될 게 없다. 산성(山城)은 물론이고 명제고택(明齋古宅)과 궐리사(闕里祠), 그리고 노성향교(魯城鄕校) 등 문화재(文化財)들을 끼고 있어 어린이들과 함께하면 제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상월초등학교 앞 도로(논산시 상월면 신충리)

천안-논산고속도로 탄천 I.C에서 내려와 643번 지방도를 탄다. 지방도를 타기 위해서는 두 번에 걸쳐 우회전을 해야 하니 주의할 일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장마루삼거리(논산시 노성면 죽림리)에서 좌회전하여 645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이번에는 23번 국도를 만난다. 이곳에서는 국도로 올라가지 않고 ‘U'자 형으로 돌면서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두 번에 걸쳐 통과한다. 그러고 나면 저만큼에 상월면소재지인 신충리 보인다. 산행들머리이다. 길가에 상월초등학교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안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실제로 우리가 타고 온 버스도 후자의 코스를 이용해서 들머리까지 왔다.

 

 

 

상월초등학교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 오른편에 공덕비(功德碑) 하나가 보인다. 허인무라는 사람을 기리는 것인데, 무엇을 잘했었는지는 몰라도 들머리의 기점으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2~3분쯤 걸어 들어가면 상월초등학교이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등산로가 운동장을 가로지르도록 나있기 때문이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를 벗어나면 또 다른 길을 만난다. 면사무소에서 산성리로 연결되는 길이다. 등산로는 산성리 방향으로 50m쯤 걷다가 오른편으로 열린다. 이곳 들머리에도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어 기점(基點)으로 삼을만하다. 통정대부를 지낸 김흠이라는 사람의 표충비(表忠碑)란다. 아무튼 유난히도 비석(碑石)이 많은 고장이다. 이런 비석들은 산행이 끝나는 애향탑주차장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버려지듯이 널려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유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1.6Km란다. 산자락에 들어서도 산길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경사(傾斜)가 완만한 것이 거의 평지 수준인 것이다. 산이 낮은데다가 정상까지의 거리까지도 멀다보니 고도(高度)를 높이는 게 그다지 급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있다. 경사(傾斜)가 조금만 있다 싶어도 통나무로 계단을 깔았고, 심지어는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길이 편한 데가 길가에는 들꽃들까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산자락에 접어든지 10분쯤 지나면 삼거리(이정표 : 노성산 정상 1.7Km/ 신충리 0.7Km/ 상월초교 0.4Km)를 만난다. 오른편은 면소재지가 있는 신충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가 좀 이상하다.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이정표는 분명히 정상까지의 거리를 1.6Km라고 적고 있었다. 10분 정도를 더 걸었는데도 정상까지의 거리는 오히려 더 늘어나버린 것이다. 등산로 정비를 하면서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물론 다른 부분들은 흠잡을 것 하나 없이 잘 해놓았다. 글로나마 논산시청의 관계자들께 감사드려본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이 곱기는 매한가지이다. 아니 더욱 고와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훤칠하게 자라난 능선의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향긋한 소나무향까지 쏠쏠하게 보내준다. 그러지 않아도 편한 산행이 이번에는 아예 힐링(healing)으로 변해버린다. 행복하다. 이런 재미로 사람들이 산을 찾는가 보다.

 

 

등산객들을 반기는 건 들꽃들뿐만이 아니다. 붉고 탐스런 열매도 눈에 띈다. 생김새는 마가목(馬牙木)을 빼다 닮았지만 글쎄다. 남자들의 정력에 좋다고 알려져 있는 마가목을 저렇게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신충리갈림길에서 20분 남짓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노성산 정상 0.32Km/ 노성애향탑 1.55Km/ 상월초등학교 1.28Km)를 만난다. 이번에는 애향탑에소 올라오는 길이 왼편으로 열린다. 이곳은 이따가 하산을 할 때 다시 만나게 되는 지점이니 기억해 두는 좋을 것이다.

 

 

 

애향탑갈림길에서 약간 가팔라진 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제법 규모 있게 쌓아올린 석축(石築)을 만나게 된다. 높이가 제법 되는 것이 이곳 노성산에 쌓았다는 노성산성이 아닐까 싶다. 길은 축대를 오르도록 나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빼다 닮았다. 원래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 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 정도의 생김새라면 연리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오랜만에 연리지(또는 )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연리지의 고사(故事)는 후한말(後漢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됐다. 효성이 지긋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10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보살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그 후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당() 시인(詩人) 백락천(白樂天)에 의해서다. 백락천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그는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다.

 

 

축대에 올라서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오고, 이어서 나타나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이어서 완만하게 흐르는 선이 고운 산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드디어 노성산의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이 채 안 걸렸다. 그것도 한가하게 걸은 결과이니 산행치고는 너무 짧지 않나 싶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의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정상표지석과 삼각점(공주26)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은 '바르게살기운동 노성면 위원회'에서 세웠다는 '노성산 국기게양대'가 지킨다. '무인산불감시탑'도 보인다.

 

 

 

정상석 근처에서는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 정상의 한편에 세워진 정자(亭子)에 올라야 조망을 즐길 수 있다. 그것도 나무에 가려 일부분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말이다.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계룡산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노성면의 너른 평야가 내다보이지만 일부분만 보일 따름이고, 그나마 연무(煙霧)에 가린 탓에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도 없다.

 

 

애향탑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의 바로 아래에 설치된 운동기구 곁을 지나는데 누군가가 몸을 좀 풀고 내려가잔다. 너무 산행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런 속도로 진행할 경우 2시간이 채 안되어 산행이 끝날 것이 분명하다. 하산 지점에 있는 궐리사(闕里祠)나 명제고택(明齋古宅) 등의 문화재(文化財)를 둘러본다고 해도 3시간을 채 넘기지 못할 테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겠다.

 

 

정상에서 10분 남짓 내려오면 오른편에 커다란 봉분(封墳)이 하나 보이고 그 아래에는 화려하게 채색된 전각(殿閣)이 자리하고 있다. '금강대도(金剛大道)'의 노성본원이다. 그리고 전각 뒤에 있는 봉분은 금강대도의 창도자(唱道者)인 토암 이승여(李承如 : 19741934)의 묘이다. 내가 알기론 금강대도의 총본원은 충남 연기(세종특별자치시)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의 묘가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세운 금강대도(金剛大道)는 여느 종교와는 많이 다르다. 기존 종교들이 하늘을 무조건 높이고 구원의 대상으로 인간을 낮게 보았다면 금강대도는 사람이 아니면 천지도 없다며 사람을 천지와 동등한 지위에 올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가 남성중심인데 비해 금강대도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반열 위에 올려 남자를 금강도인, 여자를 연화도인으로 남녀평등을 구현했다. 남녀평등의 선구자인 셈이다.

 

 

'금강대도(金剛大道)'는 토암 이승여(李承如 : 19741934)에 의해 창도된 신종교로써,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태어난 이승여가 33세에 대도를 얻은 후 1910년 계룡산 신도안 백암동으로 옮겨 포덕(布德)을 한데서 비롯된다. 1934년의 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당시의 신도수가 13,000명이라 하여 상당한 교세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대 교주는 그의 장남 이성적(19131957)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기도 하였으며, 3대 교주 이일규(19342004)는 이성직의 장남으로 포교에 주력하여 현재 전국적으로 118개의 본원, 분원이 설치되어 있다. 금강대도는 3대의 교주와 그 배우자를 건곤부모(乾坤父母)라 하여 섬기고, 우주적으로 천지인이, 종교적으로는 유불선이, 인간적으로는 심(), (), ()이 그리고 가정적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합치됨을 종지로 한다. 또한 남자 도인을 금강(金剛), 여자도인을 연화(蓮華)라 하여 철저한 남녀 평등사상을 유지하고 있다.(출처 : 디지털청주문화대전)

 

 

금강대도 옆에는 기묘(奇妙)하게 생긴 바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왼편 세 개의 바위에 삼신암(三神岩), 그리고 오른편 7개의 바위에는 칠성암(七星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금강대도를 지나면 인적이 끊기 폐가(廢家)가 길손을 맞고, 이어서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면 반듯하게 복원된 산성(山城)이 좌우로 나타난다. 사적 제393호인 노성산성(魯城山城)이다. 논산은 수십 개의 산성(山城)이 지금도 존재하는 고장이다. 현재까지 논산에서 발굴된 산성만 해도 24개나 된다고 한다. 수십 개의 산성이 남아있는 논산에서도 비교적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산성이 노성산성이다. 백제시대의 노성산성은 수도 사비의 남쪽을 방어하는 중요 요새로 병력만 수천 명이 주둔했을 것으로 짐작될 만큼 당시로써는 대규모의 산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주요 전략 기지가 되어 논산 방어의 한축을 담당해왔다.

 

 

 

산의 정상에서 남쪽으로 형성된 작은 곡부(谷部)의 상단을 삼태기 모양으로 에워싼 테뫼식(산 정상부를 둘러가며 쌓은 건축형식)산성으로서 성곽(城郭)의 둘레는 약 950m, 성벽(城壁)의 높이는 남쪽이 6.8m, 그리고 서쪽도 4.2m나 되는 나름대로 규모를 갖춘 반듯한 성이다. 또한 성벽은 표면이 장방형으로 다듬어진 할석으로 수평 쌓기하고, 기단의 아래에서는 계단식으로 점차 안쪽으로 수렴되도록 축조되어 매우 견고하다. 참고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주산석성(主山石城)이라 하여 둘레 350()이고 성안에 3개의 샘이 있어 마르지 않으며, 군창이 있다고 하였고, 이곳의 봉화대가 남으로 은진의 노산(蘆山 : 지금의 황화산)과 이어지고, 북으로 공주의 효포산(曉浦山 : 지금의 月城山) 봉수와 이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노산성(魯山城)이라 하고, 둘레 1,950()이고, 높이 8척이며, 성안에 4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 이용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산성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다 왼편으로 난 통나무계단을 오른다. 능선을 따라 옥리봉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능선 위로 오르면 아까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지나갔던 길을 다시 만난다. 당연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내리막길을 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노성애향탑 갈림길(이정표 : 노성산 정상 0.32Km/ 노성애향탑 1.55Km/ 상월초등학교 1.28Km)을 만난다. 이번에는 애향탑으로 방향을 잡는다.

 

 

옥리봉으로 가는 능선도 역시 순하다. 돌맹이 하나 없는 흙길은 부드럽기만 하고, 내리막의 경사(傾斜) 또한 느긋하다보니 걷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다. 여기에 볼거리까지 갖추었다면 최상의 코스가 되었겠지만 산은 이런 호사(豪奢)까지는 선물하지 않는 모양이다. 능선을 따라 내려서다보면 잠시 후 삼거리(이정표 : 상월방향/ 애향탑/ 노성산 정상 0.64Km)를 만난다. 애향탑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신경 쓰지 말고 곧장 능선을 타면 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애향탑 방향/ 노성산 정상 9.88Km)를 만난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다보면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지만 잠깐의 오르막길을 만나게 되고, 이정표(노성 궐리사 0.87Km/ 노성 애향탑 0.73Km/ 노성산 정상 1.14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산성에서 능선으로 다시 올라 처음으로 만났던 이정표에서 15분쯤 떨어진 지점이다. 글로 표현하다 보니 길어졌을 뿐 막상 걸어보면 금방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곳 삼거리봉이 옥리봉의 정상이 아닐까 싶다. 비록 정상임을 알게 해주는 그 어떤 표식도 발견할 수 없지만 말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산행대장의 말로는 조금 더 가야 옥리봉 정상이 나온다고 했지만 이후에는 산봉우리라고 불러도 될 만한 곳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이곳을 옥리봉 정상으로 본 이유이다. 참고로 옥리봉은 옥녀봉(玉女峯)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선녀가 거문고를 타며 노래부르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이 산자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명제고택이 바고 그 혈자리(穴處)란다. 고재희씨가 지은 풍수지리교과서2권에 나온 얘기이니 믿거나 말거나는 본인의 판단에 달렸을 것이다.

 

 

능선은 삼거리봉을 지나서도 잠시 평탄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상월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하나를 분기(이정표 : 애향탑 0.61Km/ 상월방향/ 노성산 정상 1.27Km)시키고 나서는 사나운 기세로 변한다. 길이 잡목(雜木)으로 뒤덮여 헤쳐 나가기가 만만찮은데다가 경사(傾斜) 또한 가파르게 변한 것이다. 대신 좋은 점도 하나 있다. 모처럼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이다. 노성면과 광석면 등 논산의 너른 들녘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에 들어앉은 논산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거친 산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두어 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길 찾기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구간이다. 이럴 경우에는 조금이라도 길의 흔적이 또렷한 곳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렇게 16~7분 정도를 진행하면 명재고택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궐리사 350m/ 명재고택 600m)에 이르게 된다.

 

 

명재고택갈림길에서 다시 7~8분쯤 더 내려서면 오른편에 몇 채의 전각(殿閣)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충청남도기념물 제20호인 노성궐리사(魯城闕里祠)이다. 궐리사(闕里祠)란 공자(孔子)의 영상을 봉안한 영당(影堂)으로 기와로 된 정면 3, 측면 3, 면적 약 1,564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궐리(闕里)란 공자가 생장한 궐리촌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원래 1687(숙종 13) 송시열(宋時烈)이 궐리사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716(숙종 42)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俊이건명(李健明이이명·김창집(金昌集) 등 제자들이 노성산 아래 궐리촌(闕里村:현 위치의 서쪽)에 궐리사를 건립하고 이듬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791(정조 15)에는 송조5(宋朝五賢)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805(순조 5) 관찰사 박윤수(朴崙壽) 등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중건 당시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일명 춘추사(春秋祠)라고도 한다. 궐리사는 강릉·제천·오산에도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과 오산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궐리사의 동쪽에는 궐리(闕里)’라고 음각되어 있는 석주(石柱)가 있다. 궐리사의 건립 시기와 비슷한 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주는 각을 없앤 4각 기둥의 형태로, 꼭대기에는 정방형 옥개석이 올리어져 있다. 네모난 기단 위에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7개의 별이 그려져 있는데 맨 끝의 별이 공자가 탄생한 중국 곡부의 니구산을 가리키고 있으며 옥개석의 홈부분은 별의 빛을 의미한다는 설()이 구전(口傳)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석주 뒤에는 2002년 중국에서 구입한 높이 약 2m의 공자상이 있다.

 

 

궐리사를 빠져나와 홍살문을 지나면 삼거리(이정표 : 명제고택 190m/ 궐리사 70m),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2~3분쯤 걸으면 노서서재(魯西書齋)’이다. 명재(明齋)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이란다. 드디어 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인 명재고택(明齋古宅)에 들어선 것이다. 1629년 한양에서 태어난 명제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였던 윤증(尹拯 :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할아버지로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그저 이름 그대로 적는다)의 호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충청도에서 생활하며 과거를 보지 않고 수학에만 전념했다. '산림'(山林)으로 분류해도 좋을 듯 싶다. '산림'이란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은 명망 있는 선비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과거를 치러 관직에 나아가기보다는 시골에 머물면서 학덕을 기르고 후학을 양성했다. 이는 23세에 소과에 급제해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일생을 칩거하며 산림으로 지냈던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정이 윤증을 부른 것은 18차례에 이르렀고, 말년에는 정승인 우의정으로 천거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저명한 학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다른 선비와 교유하며 명성과 인맥을 쌓았다. 그가 사사(師事)한 사람 중에는 당대 최고의 사대부가 많았다. 그중 한 명이 우암 송시열이다. 윤선거와도 친분이 있었던 송시열은 윤증보다 22살 많았다. 하지만 윤증과 송시열의 인연은 사제가 아닌 정적으로 마무리됐다. 대전 회덕(懷德)의 송시열과 논산 이성(尼城)의 윤증이 대립한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하는 원인이 됐다. 두 사람이 서로를 비방하며 적대시하게 된 원인은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되었던 윤휴(尹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다른데서 시작된다. 송시열도 한때 윤휴를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평생 독서가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윤휴의 학문이 깊이를 알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하지만 윤휴가 주자의 서()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주를 달아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술을 집필하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반면 윤선거는 윤휴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 윤선거가 죽자 윤증은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윤휴에 대한 윤선거의 평가가 자기와 다른 것을 알고 송시열은 묘갈명을 무성의하게 짓는 것은 물론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비겁하게 살아 돌아온 인물로 폄하해버린다. 그러자 윤증이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윤증은 신유의서(辛酉疑書)를 통해 송시열의 정치적 편견으로 남인들이 죽임을 당하게 하였고 또한 지나친 독선과 주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로 평가하여 버린다. 이에 사제였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정적(政適)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이 사건으로 서인은 급격하게 분파되기 시작했으며 송시열을 따르는 세력은 노론(老論), 윤증을 중심으로 모인 세력은 소론(少論)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서재(書齋)의 툇마루에 앉으면 울창한 숲속에 고즈넉이 들어않은 고택(古宅)이 내려다보인다. 좋은 주택의 첫째 조건은 거주자가 생활하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멋스럽다고 해도 살기 불편하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얘기이다. 고택을 안내해준 문화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명재고택은 실용성과 기능성을 고루 갖추었다고 한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설계와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영역을 갖도록 한 공간 배치가 특징이란다. 또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장치도 곳곳에 마련돼 있다고 했다. 높이가 낮은 굴뚝 하며 안채로 들어가는 문지방의 아래로 난 틈은 물론이고 건물사이의 공간이나 사랑채의 문 등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설계된 것들이 없었다. 일로 치면 실용성과 기능성에다 편의성까지 고루 갖춘 셈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무슨 장독대가 저리도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윤씨 가문에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기위해 장류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고택의 앞에는 사각의 꽤 넓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연못은 단순히 조경을 위해 조성한 장치가 아니란다. 노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아두는 저수지로 쓰였는데 연못과 집 사이에 끊임없이 물을 대는 수로와 우물이 있어서 지수(池水)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람의 온도를 낮춰주는 역할까지 했단다. 못의 한편에는 오래 묵은 배롱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만일 붉은 꽃망울이라도 터뜨린다면 시간이 멈춘 고택과 어우러져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연못 뒤 명재고택은 윤증이 팔순을 맞은 1709년 무렵에 세워졌다. 윤증의 호를 딴 가옥이지만, 그는 이곳에 머물지 않고 가끔 들르기만 했다고 전한다. 3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명재고택은 전통적인 사상인 풍수가 완벽하게 반영돼 있다. 풍수는 본래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바람을 품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또 다른 입지 원칙인 배산임수 역시 명재고택과 부합한다. 길지의 필수 조건이라 할 만한 남향도 지켜졌다.

 

 

고택은 산 아래에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사랑채와 행랑채를 정면으로 배치했다. 그중 사랑채는 정면 4,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전퇴를 둔 2칸의 사랑방이 놓이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었다. 사랑방 좌측에는 1칸 마루방과 하부에 부엌을 둔 작은 사랑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방 뒷퇴에는 드나드는 입시에 작은마루방이 이어져 사랑방과 연결되며 작은사랑방의 뒷방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작은사랑방에 걸린 현판에는 '이은시사(離隱時舍)'라는 글이 보이는데, '속세를 떠나 은거하기 좋은 집'이라는 뜻이란다. 어쩌다 한번 씩 이곳에 들렀을 명재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가 이곳 작은 사랑방에 앉아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젖어 있는 모습 말이다. 참고로 윤증은 조정의 관직에 임명되어도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의 어머니 공주 이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군에게 죽느니 순절을 택했었다. 전쟁 후 청나라의 속국이 되다시피 한 조선의 상황이 그가 출사를 하지 않았던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그를 가리켜 백의정승이라고 부를 정도로 말이다.

 

 

안채는 문간채를 바라보고 있는 자집이다. 가운데에 마루가 있고 좌우에 부엌과 방이 늘어서 있다. 대청의 안쪽 벽에는 바라지창이 세 개 있는데, 창문을 열면 바람이 자연스럽게 통하면서 환기가 된다. 안채는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섰을 때 왼쪽은 안주인, 오른쪽은 며느리가 주로 머물렀다. 부엌은 양쪽에 하나씩 있는데, 모두 뒷문이 달려 있는 점이 이채롭다. 왼쪽의 부엌은 광채로 갈 때, 오른쪽의 작은 부엌은 사당으로 음식을 나를 때 이용했다. 안주인이 거주하는 안채는 당연히 폐쇄적이다. 문간채 앞에 서도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에둘러 들어가야 하는데, 벽은 아랫부분이 30쯤 트여 있다. 안채의 마님들이 대청에서 쉬면서 누가 들어오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아이디어란다. 대청에서 앉아 있으면 이 틈으로 손님의 신발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종류와 깨끗함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의 지위와 상태를 유추할 수 있었다니 뛰어난 창작능력이 아닐 수 없다. 문화해설자가 침을 튀겨가며 극찬한 시설들은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시누이의 눈을 피해 며느리가 쉴 수 있었던 작은 공간과 안채와 광채 사이의 좁은 길에 숨어있다는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안채와 광채 사이의 처마를 보면 뒤뜰로 향할수록 폭이 좁아진다. 두 건물의 면이 평행선을 그리는 대신 A자 형태로 돼 있는 것이다. 바람이 좁은 지점을 빠져나와 넓은 지역으로 오면 속도가 감소하고 강도가 약해진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란다.

 

 

연못에서 왼편에 보이는 건물들은 충남기념물 제118호인 노성향교(魯城鄕校)이다.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화(敎化)를 위해 창건되었다. 본래 현재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다 세웠다고 하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은진향교와 같은 연대인 1398(태조 7)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에 1967년과 1975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하고 있을 따름이고, 언제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五聖) ·10(十哲) ·송조 6(宋朝六賢)과 한국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원래는 토지와 전적(田籍) 및 노비를 지급받아 경비에 충당하고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갑오개혁으로 신학제(新學制)가 시행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가을에 석존제(釋尊祭)를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도 분향(焚香)을 한다.

 

산행날머리는 애향탑주차장

향교 앞을 지나 5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애향탑(愛鄕塔)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널따란 주차장에 이르면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언덕 위에 세워진 하얀색의 탑()이 하나 보인다. ‘애향탑 주차장이라는 이름을 얻게 만든 장본인으로 이곳 주민들이 충(), (), ()를 생활 속에 실천해온 선조들의 거룩한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만든 탑이란다. 탑의 옆에는 애향공원이라는 비석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주차장이라는 역할 외에도 공원(公園)을 겸하도록 꾸며져 있다. 깔끔한 화장실은 기본이고, 쉬어갈 수 있도록 정자(亭子)와 벤치, 그리고 서너 개의 커플용 그네와 각종 운동기구들, 그것도 부족했던지 음수대(飮水臺)까지 설치해 놓은 것이다. 오늘 산행시간은 총 2시간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1시간50분이 걸렸다. 물론 궐리사와 명제고택 등 문화재를 관람하는데 소요된 30분은 뺀 시간이다.

 

에필로그(epilogue)

이런 산악회도 있을까? 후기를 쓰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이유이다. 논산에 있는 노성산까지의 산행비는 1인당 18,000, 아무리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비싸지 않은 가격이다. 아니 저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니 기상천외한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쌈과 각종 반찬, 거기다 돼지갈비 찜까지 상에 올려져 있다. 시원한 막걸리도 넉넉한 것은 물론이다. 누군가가 찬조를 했다지만 따끈따끈한 두부에 현지막걸리까지 추가로 올라온다. 이건 숫제 식사가 제공되는 산악회보다 더 풍요로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간을 좀 낼 수 있냐는 질문 끝에 버스의 행선지를 평택항으로 돌리더니 싱싱한 회에 맥주와 소주를 제공한다. 이건 분명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산악회에서 손해를 보는 장사라는 얘기이다. 얻어먹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이다. 그러나 난 다음 주 화요산행을 또 신청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집사람까지 합쳐서다 산행지가 가보지 않았던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들이 보여준 넉넉한 마음씨에 마음이 동했던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물론 다음 산행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