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산(太祖山, 421.5m)-흑성산(黑城山, 504m)

 

산행일 : ‘18. 3. 1()

소재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안서동·유량동 일원

산행코스 : 각원사능선삼거리태조산아홉사리고개흑성산흑성산성독립기념관(산행시간 : 3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온라인 산악회



특징 : 흑성산이나 태조산 모두 제대로 된 바위 하나 만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가슴에 담아둘만한 산세는 갖고 있지 못하다. 일부러 시야를 터놓은 몇 곳을 제외하고는 조망 또한 보잘 것이 없다. 흙산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는 산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산은 잘 가꾸어져 있다. 천안시가 만든 홍보책자에는 태조산을 '수려한 산세에 감탄이 절로 나는 산'이라 했고 '둥그스름하게 연꽃이 핀 듯한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천안의 명산'이라고도 표현했다. 천안의 진산(鎭山)으로 천안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흑성산도 마찬가지다. 흑성산성을 복원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흑성산 아래에는 독립기념관이라는 우리 민족의 새로운 성지(聖地)가 조성되어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하는 명소이다. 이 독립기념관을 찾아올 때 흑성산이나 태조산까지 함께 끼워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침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있어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산행들머리는 각원사 주차장(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경부고속도로 천안 IC에서 내려와 23번 지방도(망향로)를 타고 입장면 방향으로 아주 잠깐 달리다가 안서동삼거리(천안시 동남구 신부동)에서 우회전하여 각원사길을 따라 들어가면 잠시 후 산행들머리인 각원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각원사(覺願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재일교포인 각연거사(覺然居士) 김영조(金永祚)의 시주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성금을 더해 1977년에 세워졌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사찰을 세우려 한 것이 발원의 본뜻이라고 한다. 1978년에 설법전(設法殿)을 건립하였고, 1979년에 칠성전(七星殿)과 산신전(山神殿), 1984년 관음전, 1996년 대웅보전(大雄寶殿) 등을 차례로 완공했다. 현재는 앞에서 열거한 건물들 외에도 영산전과 성종각, 청동대불 등이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에 내리니 이층으로 지어진 성종각(聖鐘閣)이 중생을 맞는다. 그런데 태조산루(太祖山樓), 태조산에 있는 누각이란다. 절간에 있는 건물치고는 이름이 묘하다.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 ()’자를 쓴 것까지는 뭐랄 수 없겠으나,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까지는 지워낼 수가 없다. 사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 건물의 아래층에는 특이한 조형물 하나가 놓여있다.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인 치미(鴟尾)’이다. 각원사 대웅전의 용마루 양 끝에 세웠다는데 그 생김새가 경주 황룡사의 치미를 그대로 베꼈다. 다만 그 재질이 청동에서 기와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국내의 대웅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나타난다. 정면 7, 측면 4칸의 목조 건물로 34개의 주춧돌이 놓여 있으며 100여만 재의 목재(木材)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외관(外觀)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사분합(四分閤, 문짝이 넷으로 이루어진 문)의 쌍여닫이문이 달려있다.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대성 자모 관세음보살을 협시보살로 봉안하고 있으며, 불상 뒤에 모시는 후불탱화의 주불은 석가모니불이고, 좌우로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그 회상(會上)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높이 15m에 둘레가 30m나 되는 청동대불이 아닐까 싶다. 칠성전(七星殿, 아래에 첨부된 사진) 옆에다 놓은 제법 긴 계단을 오르면 만날 수 있는데, 무게가 60ton이나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귀와 손톱의 길이만도 각각 175cm30cm나 된단다. 이 불상은 태조산 주봉을 뒤로하여 서향을 바라보며 자비의 미소로 많은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 대불을 세 바퀴 돌고나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난 어땠을까? 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속설을 믿겠는가.




칠성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길이 넓은데다 판석(板石)으로 바닥을 깔아놓기까지 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분쯤 지나자 공들여 쌓아올린 케언(cairn)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로수 역할이라도 하려는 듯이 길의 양편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




케언(cairn)만 있는 게 아니다. 절간의 경내에서나 볼 법한 반듯한 규모의 석탑(石塔)도 세워져 있다. 동자승의 조형물도 보인다. 경배(敬拜)를 드릴만한 것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놓았다.




돌탑지역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곧장 위로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까지 매어놓아 힘이 보대끼는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게끔 했다.



오르는 길에는 동굴도 만날 수 있다. 그다지 깊어보이지는 않지만 비박(野營, Bivouac)도 가능하겠다. 그나저나 동굴 안에다 호랑이 조형물이라도 하나 만들어 두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해서라도 옛날 얘기 한 토막을 곁들이면서 말이다. 문득 괴산의 산막이 옛길에서 보았던 호랑이굴이 생각나서 그런 넋두리까지 해봤다.



잠시 후 성거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능선삼거리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만이다. 태조산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따라야 한다. ‘각원사에 대해 설명해 놓은 안내판과 함께 세워놓은 이정표(태조산2040m/ 성거산 정상3750m/ 좌불상610m)가 진행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길 찾기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능선을 탄지 7분쯤 지나면 안서동의 ‘e-편한세상 아파트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태조산 정상1680m/ 안서 e-편한세상1350m/ 유왕골(약수터)840m)를 지나고, 이어서 4분쯤 더 걸으면 쉼터를 만난다.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까지 갖춘 것이 흡사 도심(都心)의 공원을 보는 것 같다. 이곳 태조산이 천안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더니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함께 온 일행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눠도 될 정도로 널찍하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가끔 나타나는 급상사 지역엔 나무계단이나 돌계단을 놓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밧줄난간까지 설치했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재작년(再昨年)엔가 관할 지자체인 천안시에서 독립종주로를 정비한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그게 마무리되었나보다. 당시 기사에서는 취암산·흑성산에서 시작해서 태조산·성거산·위례산을 지나 부소산·개죽산·작성산·은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애국선열들의 민족혼을 느낄 수 있는 독립종주로라 부르면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에 걸쳐 사업이 추진된다고 했었다.



그렇게 5분쯤 더 진행하면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7357-7007)’이 세워진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이어서 4분 후에는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7317-6990)’이 세워진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둘 중의 하나가 대머리봉(359.6m)일 텐데 어느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천안시 청소년수련원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태조산 정상843m/ 청소년수련원1250m/ 성거산 정상4861m)를 지났다싶으면 산길은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 가파름이 버거울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길어서 수월하지만은 않는 구간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의외의 풍경을 만났다. 산꼭대기이다 싶을 정도로 높직한 능선에다 울타리를 쳐놓은 것이다. 능선의 정중앙을 따라 끝없이 쳐진 것이 사유지(私有地)를 구분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교보생명의 사유지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이제는 능선을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태조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만이다. 정상은 이층의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정상표지석은 정자의 앞에다 배치했다. 태조산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건강안내판도 두엇 세워놓았다.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이곳 태조산이 천안의 진산이라더니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산이 낮은데다 산세까지 완만해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태조산(太祖山)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는 설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또한 왕건을 도운 도선국사(道先國師)는 이곳에 와서 지형을 정찰한 후 이곳은 하늘 아래 가장 평안한 동네로다.’라고 말했단다. 천안(天安)이란 지명이 생긴 이유이다.




정자의 아래에는 조망판까지 세워놓았다. 널따랗게 펼쳐지는 천안시가지와 함께 천안아산신도시까지 그려 넣었다. 일봉산과 남산, 봉서산, 노태산 등 시가지가 품고 있는 산들을 표기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경관을 보려면 정자의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주변의 잡목들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위에 내몰려 갈 길을 서두른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기라 나온다는 경칩(驚蟄)이 코앞인데도 맹추위는 물러갈 줄 모르는 모양이다. 바닥은 아직도 살얼음이 꽁꽁 얼어있고, 볼을 스쳐가는 바람은 모든 사물을 금방이라도 꽁꽁 얼려버릴 것 같다. 아무튼 울타리를 따라 400m쯤 내려서니 오른편 철조망 너머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하지만 들어오지는 말라는 안내판이 매달려 있다. ‘교보생명 계성원(연수원)’ 시설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에 닿는다. 이정표(3포스트1230m/ 교육원삼거리1670m/ 태조산600m)는 이곳의 위치를 ‘2Post’로 적고 있다. 그리고 진행방향을 3포스트라고 표기해 놓았다.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지명이 아닐까 싶다. 기존의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지명을 사용하려면 이정표에다 간략하게나마 지도를 함께 그려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진행방향의 울타리를 열어놓은 걸로 보아 사유지는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잠시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주능선을 따라 난 산길과는 별도로 임도(林道) 하나가 왼편으로 나있는 것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데다가 임도가 워낙 널따랗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산악회의 방향표시지도 왼편을 향하고 있다. 선두대장도 길이 헷갈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른 의도가 있겠거니 하고 방향표시지를 따르고 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선두대장도 이를 알고 어디쯤에선가 방향을 틀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곳에다 표식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를 놓치고 끝까지 내려가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닥에 쌓인 낙엽이 깊어진다. 그만큼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고 임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서니 도선사라는 사찰이 나온다.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라는데 건물부터가 여느 여염집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평범하면서도 작은 절간이다. 그저 약수(藥水)를 품어내고 있는 입구의 두꺼비상이 눈길을 끄는 것이 모두라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도선사의 진입로를 겸하고 있는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전원주택들이 간간히 보이는 마을길을 지났다싶으면 8분 후에는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목천읍 유왕골과 지산리를 잇는 시도(市道, 덕천1)이다.



도로를 따라 6분쯤 걷자 태조산과 흑성산의 경계인 아홉싸리고개에 이른다. 산길은 왼편 축대의 위로 열린다.



들머리 부근에서 잠시 가파르던 산길은 이후부터는 느긋하게, 그러나 지속적인 오르막길을 만들면서 꾸준히 고도(高度)를 높여 간다. 하지만 길의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데다가 계단 등의 안전시설도 일절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에 올랐던 태조산과는 달리 버려져 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정상 가까이에서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살얼음까지 깔려있어 미끄럽기 짝이 없는 데도 몸을 의지할만한 것들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고갯마루에서 40분 만에 대전MBC 흑성산 TV중계소앞에 올라선다. 유난히도 많아 보이는 흑성산의 통신시설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임도를 따라 조금만 더 오르면 널따란 헬리포트에 이른다. 천안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대이다.




헬기장 뒤에 보이는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공군 항로보안단의 지대와 미극동공군의 통신대란다. 때문에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흑성산성 쪽으로 가려면 군부대의 철조망을 따라 난 비탈길을 걷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살얼음이 얼어있는 오늘 같은 날에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길이다. 그런 모험이 싫은 사람들에게도 방법은 있다. 대전MBC 흑성산 TV중계소 앞으로 내려가서 왼쪽의 임도로 나아가면 흑성산성에 이를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행글라이더 활공장에서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조망은 포기해야만 한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대전방송(TJB)의 중계시설이 있는 정상부분의 아래에 고려 말 북쪽의 홍건적과 남서쪽의 왜적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김사혁 장군의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전적비의 옆에다 세워놓은 정상표지석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다. 아니 정상석에 비해 전적비가 너무 크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참고로 흑성산의 본래이름은 검은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검다'는 뜻을 그대로 옮겨 '흑성산'으로 바꾼 것이란다. 태조산에서 흑성산까지는 1시간 20분이 걸렸다.




정상석의 맞은편에는 흑성산성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城門) 앞 광장 양쪽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만큼 조망이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2012년엔가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전망대에 서면 천안 일대가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곳을 명당이라고 하나 보다. 맞다. 흑성산은 풍수지리상 서울의 외청룡에 해당되고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의 명당 길지로 예로부터 '좌우동천승적지(左右洞天勝敵地)'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김시민, 이동령, 이범석, 유관순, 조병옥 등 많은 구국열사가 배출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말하는 좌우동천승적지는 석천리와 지산리의 승적골(勝敵谷)을 말하는데 석천리의 승적골은 5(덜목, 제목, 칙목, 사리목, 돌목)의 사이에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있기 때문이며, 지산리 승적골은 매우 아늑하여 예부터 피난처로 알려져 있단다.



성안(城內)으로 들어서자 경주의 첨성대(瞻星臺)를 닮은 건축물 하나가 눈에 띈다. 성 밖의 사정을 성안의 군사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던 노대(弩臺)‘라고 한다. 수원 서장대(西將臺)의 서북측에 동향으로 자리 잡은 서노대(西弩臺)를 본 따 축조한 것으로 누각이 없이 쇠뇌(弩砲=노포)를 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전돌을 쌓아 방형의 대를 만들었고 모서리를 깎아 모를 없앤 게 특징이란다. 참고로 흑성산성(黑城山城, 충남 문화재자료 제364)은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쌓는 방식)으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천안의 옛 산성 중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성의 둘레가 약 2,290(), 높이가 6자이며, 그 안에 샘이 두 곳 있는데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둘레 약 570m이나 산성 대부분이 훼손되어 원형을 찾기 어렵다. 그 중심부에는 미군(美軍) 시설과 KBS 등의 송신소가 있다.



▼ 끄트머리로 나아가면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문득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자란 휴식이나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다. 그런 시설이 산성 안에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산성이란 게 본디 적을 막기 위한 시설 중에서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안내판에도 이에 대한 고증은 적혀있지 않다. 아무래도 천안시가지나 독립기념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용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나 싶다. 난간에 설치해 놓은 조망도가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참 반대편에도 공심돈(空心墩)이란 건축물을 지어놓았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겸하던 돈대(墩臺)인데 이 역시 수원성의 것을 벤치마킹(benchmarking)했다고 한다. 그만큼 흑성산성에 대한 고증(考證) 자료가 빈약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석 옆에 있는 철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산길은 성벽의 아래로 옹색하게 나있다. 아니 ‘KBS 대전총국흑성산중계소의 축대라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성벽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런데 이정표(전망대0.2Km, 단풍나무 숲길 1.4Km/ 흑성산성0.7Km)에는 두 방향만 표시해 놓았다. 흑성산성을 왼편으로 돌아가도록 하면서 우리가 내려왔던 길을 아예 빼버린 것이다. 내려오던 길이 좁으면서도 옹색하다는 느낌이 강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4분 후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만들어진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에 오르면 독립기념관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곳에 들어서게 된 이유는 동쪽의 병천면에 3·1운동의 한 본거지였던 유관순기념사당이 있어 독립운동과 관계된 곳이라는 점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지형이 평탄한 넓은 땅이 있다는 입지조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저곳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것과 관련하여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에 얽힌 일화 하나가 전해진다.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죽자 그의 묘소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하였는데 이때 어느 유명한 지관이 이곳은 2~3백년 후에는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므로 그때가면 이장을 해야 되니 이곳에서 십여 리 동쪽에 묘를 쓰라고 권하여 지금의 북면에 위치한 은석산에 묘소를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독립기념관이 들어섰으니 풍수지리상 명당 길지인 이곳이 제구실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자, 산길은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해놓았을 정도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계속해서 능선을 탈 경우에는 흑성산기도원으로 연결된다. 독립기념관으로 내려가고 싶을 경우에는 이정표(단풍나무 숲길0.9Km/ 교친21.0Km/ 흑성산성1.2Km)가 가리키고 있는 왼편 단풍나무 숲길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 구간도 역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밧줄난간이 매어져 있다는 점도 조금 전의 능선길과 같다.



산행날머리는 독립기념관

17분쯤 후 널따란 아스팔트포장 도로에 내려선다. 길가에 ‘B코스, 흑성산 정상가는 길, 1500m’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진 걸로 보아 우리가 제대로 내려온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길가엔 단풍나무들이 줄을 지어 심어져 있다. 이정표에 적혀있던 단풍나무 숲길이 바로 이곳인가 보다. 이는 곧 산행이 마무리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30분쯤 쉬었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은 3시간 30분인 셈이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독립기념관이 나타난다. 외침(外侵)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國難克服史)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전시·연구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건립된 겨레의 전당이다. 해방 이후 독립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정부에서 부지(400)를 매입하였고 국민의 성금(49024325009, 198648일 기준)으로 건립 자금을 충당했다. 원래는 1986815일에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4일 뜻하지 않은 화재가 일어나 1년을 늦추어 개관하였다. 현재 75개동의 건물에 총 9만여 점의 유물이 전시·보존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문화유산과 역사적인 자료들을 전시해놓은 제1전시관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제7전시관까지 총 7개 전시관이 있다.



겨레의 큰 마당’, 즉 길이 258m에 폭이 222m나 되는 겨레의 집앞마당에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삼일절행사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기념행사나 음악회 등과 같이 수만 명이 모이는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설계된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줄타기공연이 한창인 마당 뒤편의 겨레의 집은 독립기념관의 상징적 건축물로, 기념 홀의 역할을 한다. 길이 126m, 68m, 높이 45m 에 이르는 규모로, '동양최대의 기와집'으로 설명된다. 전통 건축물의 맞배지붕양식을 본떠 설계되었으며, 기와는 구리로 제작되었다. 현판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이다. 겨레의 집 내부에는 불굴의 한국인상이라는 한민족의 기상을 담은 거대한 조각상이 유명하다. 태극기를 들고 앞을 가리키는 인물을 필두로 여러 인물들이 그와 함께하는 형태의 군상(群像)인데, 온 몸을 바쳐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신 순국선열들의 얼을 형상화한 작품이란다.



오늘은 31, 아흔여덟 번째로 맞는 삼일절이다. 이렇게 뜻깊은 날을 독립기념관에서 가만 놔둘 리가 없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1,919명의 명예독립운동가의 대한독립만세행진등 다양한 시민 참여형 문화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국가상징물인 태극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행사도 그중 하나이다. ‘겨레의 큰 마당에 약 900여 기의 태극기를 설치한 길이 110m‘31 태극기 터널을 조성해놓았다.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함께 적어놓은 어록(語錄)을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한 공간이다. 그런데 옛날과 같은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상징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부 사람들의 행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신념을 위해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것까지야 뭐라고 하겠는가마는 함께 들고 나온 성조기가 태극기의 본 뜻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이스라엘 국기까지 보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는 않는 편이다. 현 정부에 표를 던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난 요즘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에 마치 두 손을 모아 뭔가를 빌고 있는 듯한 대형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아니 막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 같기도 하다. 민족의 비상을 상징하는 겨레의 탑인데 그 높이가 무려 51.3m나 된다고 한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친 영원불멸의 민족기상을 표상하고 민족의 자주·자립을 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단다. ·후면에 무궁화와 태극(太極)이 약동하는 부조(浮彫)가 있고, 탑 내부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 사신도(四神圖)를 상징화한 모자이크 조각이 4면을 장식되어 있다. 또한 바닥에는 화강석으로 국토가 그려져 있고, 구리 주물관 24()로 방향을 표시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