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산(168.5m)-갈미봉(233m)-천태산(392.1m)

 

산 행 일 : ‘22. 9. 11(일)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의당면 일원

산행코스 : 가산주유소(현대오일)→시묘산→한일시멘트→갈미봉→천태산→동혈사→광덕사→동혈고개(소요시간 : 6.27km/ 2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인터넷에서 ‘천태산(天台山)’을 치면 영동의 ‘천태산(714.3m)’이 가장 먼저 뜬다. 그리고 양산의 천태산(630.9m)과 강진의 천태산(549.4m)이 뒤를 잇는다. 공주(392.1m)와 정읍(197.2m), 화순(482.5m)에서도 동명의 산들이 나름대로의 산세를 자랑한다. 오늘 오른 공주(의당면)의 천태산도 400m에도 못 미치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온 산의 모든 바위가 ‘구멍이 숭숭 뚫린 구리 색깔(‘銅穴山’으로도 불리는 이유다)’인가 하면,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동혈사’라는 천년고찰까지 품고 있었다.

 

▼ 산행들머리는 현대오일 ‘가산주유소’(충남 공주시 의당면 가산리)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세종 방면)을 타고 내려오다. 덕학교차로(의당면 덕학리)에서 691번 지방도(장군·의당 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산주유소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시묘산’을 오르지 않을 경우 1km쯤 더 가면 나오는 ‘언고개(송학2리)’에서 시작하면 된다.

▼ 산이 작아선지 단조로운 편이다. 송학리(언고개)나 덕학리(동혈고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들머리로 삼은 다음, 천태산을 찍고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코스가 짧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시묘산을 추가시키는데, 이때는 가산리(가산주유소)를 들머리로 삼는다.

▼ 주유소를 왼편에 끼고 돈 다음,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승용차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다.

▼ 들녘이 작아서인지 길은 3분이 채 되지 않아 산자락에 붙는다. 그리고는 왼쪽에 산자락을 끼고 이어진다.

▼ 길을 나선지 5분. 탐방로는 산속으로 파고든다. 이정표야 물론 없다. 거기다 그 흔한 표지기(리본) 하나 매달려있지 않으니 눈대중으로 초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오른편으로 90도를 트는 지점’이자,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라면 대충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 오곡백과가 여무는 데 더없이 좋다는 백로(白露)가 ‘그끄제’였다. 어제는 ‘한가위’, 햅쌀과 햇과일 등으로 차례를 지내는 명절이다. 그런데도 저 들녘의 벼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춘래불사춘이라더니 올해는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인 모양이다.

▼ 인적이 끊긴 산길은 거칠었다. 잡목과 웃자란 잡초가 갈 길 바쁜 나그네를 자꾸만 붙잡는다. 그렇다고 길의 흔적까지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산행 길라잡이의 대세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앱이 만능이 될 수야 없는 노릇. 산꾼들의 눈은 아직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쫒아간다. 최신 기술에 고전적인 경험을 장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 ‘시묘산’은 2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그렇다고 마냥 쉬운 산이 어디 있겠는가.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이곳 시묘산도 역시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을 만나기도 한다.

▼ 숲속으로 들어선지 10분. 자그마한 봉우리를 만난 탐방로가 왼편으로 우회를 한다. 이어서 동쪽으로 난 능선을 타고 ‘시묘산’으로 간다. 특별할 게 없는 상황이지만 길 찾기에 중요한 지점이기에 거론해봤다. 갈모봉으로 가려면 시묘산 정상을 찍은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 5분쯤 더 걸어 시묘산(168.5m)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산’으로까지 분류될 형편은 아닌 듯, 그저 도톰하게 솟아오른 능선상의 한 지점이라고나 할까?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매달아놓은 표지기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겠다.

▼ 그러니 정상석이 있을 리가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선두대장을 맡은 ‘그린나래’님이 매달아놓은 따끈따끈한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세상의 모든 산을 다 올라보겠다는 ‘만산회’ 멤버들이 묶어놓은 리본들도 보였다. 그들의 놀이터랄 수 있는 강송산악회에서도 이곳을 다녀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 꽤 오래 산행을 함께 해온 반가운 이름도 만날 수 있었다. ‘1만 산’ 등정을 위해 쉼 없이 산을 오르던 ‘서래야 박건석’ 선생님이시다. 건강이 안 좋아 요즘은 산행을 못하신다고 하던데, 빨리 쾌차하셔서 산에서 다시 뵈었으면 좋겠다.

▼ 위에서 얘기하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진행한다. 산길의 형편은 아까보다 훨씬 나빠졌다.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게 7분쯤 내려섰을까 일행들이 갈 생각을 않고 웅성거리는 게 아닌가. 시멘트공장을 만들면서 생긴 절개지가 앞을 가로막아버린 것이다. 이런 때는 선두대장의 모험심과 경험, 그리고 대처능력이 필요하다. 대신 다른 일행들은 그가 내린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 선두대장의 탁월한 능력 덕분에 가장 안전한 루트로 내려설 수 있었다.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만든 트랙을 무시한 채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 덕분이다.

▼ 가파른 경사지를 미끄러지듯 내려서자 ‘한일시멘트 공주공장’이다. 아니 시멘트 제조공정은 ‘단양공장’에서 이루어지니, 이곳은 그 시멘트를 이용해 다른 제품을 만드는 공정일 것이다. 하지만 시설만큼은 단양공장에 못지않게 거대했다.

▼ 길은 한일시멘트 앞에서 둘로 나뉜다. 양쪽 모두 절벽에 가까운 절개지를 끼고 있으나, 먼저 다녀간 이들은 양쪽 모두에서 갈미봉 등산로를 찾을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선두대장은 우릴 왼편으로 인도한다. 그쪽이 더 또렷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첫 번째 모퉁이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정표는 물론 없다. 이곳이 들머리임을 짐작할만한 별도의 시그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튼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또 다른 산행(갈미봉·천태산)을 시작하는 셈이다.

▼ 또렷하진 않지만 길의 흔적은 찾을 수 있었다.

▼ 3분쯤 오르자 무덤이 나오는가 싶더니, 곧 이어 ‘국가지점번호판’까지 세워진 정규 탐방로가 얼굴을 내민다. 참고로 국가지점번호는 산악·강변 등 도로명 주소가 부여되지 않는 비거주지역의 위치정보를 표시하는 번호로, 한글 2자리와 숫자 8자리로 구성된다. 재난·사고 등 응급상황 발생 시 설치된 국가지점번호판의 번호를 119에 알려주면 신속한 현장출동이 가능하다.

▼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파른 구간마다 침목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산비탈에는 밧줄난간까지 둘렀다. 지자체에서 꽤 많은 예산을 쏟아 부었나 보다.

▼ 아니나 다를까 ‘세종시계 둘레길’에서 내건 팻말이 눈에 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시계를 따라 내놓은 길이 151km의 ‘둘레길’로, 모두 12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이곳은 ‘4구간(개척의 길 : 하봉교차로↔종고개)’일 것이다. 참! 근처에는 송학2리(은곡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임을 알리는 이정표(송학2리 1㎞/ 동혈사 3.7㎞)도 세워져 있었다.

▼ 오른쪽 산비탈은 철망울타리를 쳐 한일시멘트로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용으로 여겨지는 샛문도 보인다. 아까 시멘트공장 앞에서 오른편으로 올라왔을 경우 저곳으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 이때 한일시멘트의 야적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레미탈(remitar)’ 공장이라니 미세 모래를 쌓아두었을 것이다. 레미탈이 미장용 또는 타일부착용 자재(시멘트와 고운 모래의 혼합물)이니 말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14분,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났다. ‘세종시계둘레길’의 이정표(종고개← 3.3㎞/ 의랑초등학교↓ 2.7㎞)는 왼편이 4구간의 날머리인 종고개(의당면 유계리)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둘레길과 헤어지게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세종시계둘레길과 헤어진 산길은 서둘러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속도만 조금 떨어뜨린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한일시멘트에서 산길로 들어서서는 20분)만에 갈미봉 정상에 올라섰다. 밋밋한 육산(肉山)이긴 하지만 약간 뾰쪽하게 솟아오른 게 산봉우리다운 모양새는 갖췄다. 하지만 정상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도 없었다. 그저 삼각점(전의 456)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 갈미봉은 봉우리가 등산로를 약간 벗어나 있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니 주의한다.

▼ 그게 아쉬웠던지 리딩을 하고 있는 그린나래 대장이 정상표지판(갈미봉, 234m)을 매달아 두었다. 삼각점(233m)과 다른 높이를 적었다는 게 다소 아쉽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덕분에 인증용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 갈미봉을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팔라졌다. 이럴 때는 속도를 뚝 떨어뜨리는 방법 밖에 없다. 마침 시간까지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겠는가.

▼ 숨이 턱에 차서 오른다. 이때 코끝을 스쳐가는 한 줄기 향기. 하나 둘 개체수를 늘려가던 소나무가 언제부턴가 솔숲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숨을 들이킬 때마다 향긋한 솔내음이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건 당연.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확 사라져버린다. 솔향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품은 향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공간이 툭 트이는가 싶더니, 떠나간 무덤 대신 이정표가 터를 잡았다. 송학2리에서 2km쯤 떨어진 지점(동혈사까지는 2.7km)인데, 오른편으로 500m쯤 내려가면 가산사로 연결된단다.

▼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거리를 잘못 적었다. ‘동혈사’까지 2.1Km가 남았는데,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천태산은 0.5km로 적었다. 그게 눈에 거슬린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매직펜으로 ‘2’를 써넣어 2.5km로 바꿨다.

▼ 계속해서 가파른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굴곡으로 점철된다는 인생처럼...

▼ 얼마쯤 더 올랐을까 벤치를 놓은 쉼터가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는 동혈사가 0.9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보은사(월곡저수지)로 내려는 길이 나뉜다고도 했다. 그건 그렇고 저 운동기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설마 산에까지 와서 몸을 풀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 천태산은 공주의 4대 혈(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명산이다. 그러니 명당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듯하게 써놓은 저 무덤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하지만 죽어서 명당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는 동안 복 짓고 업 짓는 게 중요하지.

▼ 무덤은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배산임수’의 틀을 갖췄다. 그리니 툭 터진 조망은 기본. 세종특별자치시와 시를 둘러싼 산군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 이후부터는 고만고만한 오르막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는 말자, 가팔랐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고 여기면 되겠다.

▼ 그러다가 구호지점표시목(다바 6961-3953)이 있는 봉우리(앱은 355.9m를 찍고 있었다)에 올라섰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0분(갈미봉에서는 40분) 만이다.

▼ 2~3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헬기장이다. 하지만 사용하지 오래인 듯 공터엔 잡초만 무성했다.

▼ 헬기장에서 내려서면 운동기구까지 갖춘 쉼터가 나온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동혈사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정표(천태산 0.5km/ 등산로 3.7km)에는 ’동혈사‘가 나타나 있지 않으니 참조한다.

▼ 천태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왼편은 비닐망으로 울타리를 쳤다. 동혈사와의 경계를 따라 길이 나있지 않나 싶다.

▼ 잠시 후 올라선 봉우리는 통신시설로 여겨지는 철제구조물이 들어섰다. 이동통신국 아니면 무인산불감시탑이려니 했는데, 의외로 한전의 ’천태산 TRS기지국‘이란다.

▼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왼편에서는 아까 얘기했던 비닐망 울타리가 계속해서 쫒아온다. 그러다가 희미한 갈림길 하나를 만났다. 한전의 기지국에서 5분쯤 되는 지점인데, 이따가 동혈사로 내려갈 때 이 길을 이용하니 잘 기억해 두자.

▼ 갈림길을 지나면서 바위지대가 시작된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없던 산에서 나타난 바위들이 신기롭기만 한데, 거기다 생김새까지 범상치가 않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다.

▼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거기다 정상부분은 바위지대가 아니겠는가. 저 돌탑이 그 증거라 하겠다.

▼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갈미봉에서 1시간). 바위봉우리인 천태산 정상에 올라선다. 아니 꼭대기만 바위가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그중 가장 크게 보이는 바위에 정상석(392.1m)과 삼각점(전의 23)이 세워져 있었다.

▼ 천태산은 ‘동혈산(東穴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주의 동쪽 혈(穴, 공주에는 4개의 혈이 있다고 한다)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구리가 채굴되고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해서 ‘동혈산(銅穴山)’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광복 후 다시 본래의 이름(東穴山)을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 이제 하산만이 남았다. 하산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조금 거칠지만 직진(아래 사진)하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서 내려가면, 기암 좌측에 광덕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보인다. 다른 하나는 되돌아 내려가는 방법이다.

▼ 우린 앞에서 얘기했던 삼거리로 되돌아 와 흔적조차 희미한 오솔길로 파고들었다. 다운받은 앱은 양쪽 모두를 가리키지만 선두대장이 조금 더 가까운 코스를 택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 루트를 남에게까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산짐승, 그중에서도 날씬한 것들이나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팔랐고, 험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 엉덩방아를 두어 번이나 찧고 나서야 ‘동혈사(東穴寺)’로 내려설 수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동혈사는, 풍수지리에 따라 공주 지역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지어진 4대 혈사(穴寺)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헌에는 없지만 절의 역사는 백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웅진 천도 후 천태산의 남동쪽 사면에 조영된 석굴사원에서 비롯됐단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가 19세기 후반 다시 기록에 나타난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0년대에 옛 절터에서 50m쯤 올라간 곳에 새롭게 지어진 것들이다.

▼ 소문난 수도처의 특징은 시야가 툭 트인다는 점이다. 이곳 동혈사 역시 명품 조망이 펼쳐진다.

▼ 경내는 명심보감용 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화엄경·금강경·법구경·선어록 등 불가에서 주장하는 금과옥조들을 팻말에 담아 곳곳에 세워놓았다. ‘산길을 거닐며’ 가슴에 새겨두라는 얘기일 것이다.

▼ 대웅전 뒤에는 ‘자연석굴’이 있었다. 어느 불자는 저 굴을 ‘동혈(東穴)’로 적고 있었다. 웅진(熊津, 현재의 공주)을 보호하는 4개의 혈(穴)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굴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웅진이 수도로 존재했던 기간이 고작 63년에 불과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동혈사는 바위 벼랑에 기대듯 지어졌다. 때문에 대웅전과 나한전은 길고도 가파른 돌계단으로 연결된다. 그마저도 곧장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써가면서 겨우겨우 오른다.

▼ 나한전으로 오르는 도중 뻥 뚫린 구멍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옛날, 동혈사의 스님은 저 구멍에서 나오는 쌀 덕분에 탁발을 하지 않고도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단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인근에 퍼지면서 상황을 달라졌다. 어느 욕심쟁이 농부가 스님을 살해했고, 더 많은 쌀이 나오도록 구멍을 넓히자, 벼락이 치면서 쌀 대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벼락을 맞은 농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말이다. 과한 욕심이 화를 불렀다고나 할까?

▼ 계단이 끝나갈 즈음, 돌갓을 쓴 부처님이 절벽에 걸터앉아 있었다.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듯. 노송을 일산처럼 쓰고 있는 모양새가 팔공산의 ‘갓바위 부처’를 연상시킨다.

▼ 그 수행에 기라도 보태주려는 듯 ‘3층 석탑(공주시 유형문화제 37호)’이 뒤를 받혀준다. 고려 때 만들어졌다는 탑은 독특한 양식이다. 고려시대에는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어 저렇게 층수에 구애받지 않은 이형탑이 만들어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고려시대 양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는 걸 기억해두자.

▼ 계단의 끝은 나한전이다. 바위벼랑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제비집을 연상시킨다.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아난다·가섭을 삼존상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 주위에 십륙나한상을 배치했다.

▼ 나한전에서 내려다본 절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천년고찰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대웅전 뒤 느티나무가 이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거대한 몸집을 한껏 부풀린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하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조금 전에 살펴보던 돌부처와 삼층석탑이 보인다. 부처님은 (백제 왕도였던) 공주를 바라보고 계신다. 불사를 일으킨 이들은 백제 때, 그것도 웅진의 4대 혈사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저건 또 뭘까? 대웅전 근처에서 샛길로 빠져나오는데 거대한 암벽 아래 촛불을 켜두는 유리박스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다. 바위의 영험하던 기운이 사라져버렸단 의미일까?

▼ 절간을 둘러본 다음 동혈고개로 연결되는 임도를 따라 하산을 이어간다.

▼ 하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선두대장은 그냥 내려가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6분쯤 내려간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간다.

▼ 4분 후 능선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능선 너머에서 ‘광덕사’라는 또 다른 절간을 만났다. 동혈사와 광덕사는 능선을 가운데 두고 남북에 절집이 들어앉은 모양새이다. 동혈사가 따뜻한 양지에 자리 잡은 반면, 광덕사는 음지라서 겨울에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으로 변하기 딱 좋겠다.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절간이 들어설 위치는 아닌 듯. 절간의 살림이 곤궁해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하지만 주변 풍광만을 동혈사에 못지않았다. 거대한 입석이 절간을 보호하고 있는 등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간판도 만만찮다. 위세는 약하지만 ‘광덕종’이라는 종파의 본산이란다. 그래봤자 절간에는 인기척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 아무튼 전각은 여염집에도 못 미칠 정도로 허름했고, 인적 끊긴 절간은 장독마저 뚜껑이 열려있다. 외로운 약사여래상만이 그나마 온전하다고나 할까?

▼ 임도를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절간으로 연결되는 진입로치고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오자 동혈사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포장길과 만난다. ‘양극화’. 현대에 들어 대두되는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다. 삼거리에서 그 양극화를 보았다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 산행날머리는 동혈고개(공주시 의당면 덕학리)

2분쯤 더 진행하자 동혈고개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동혈사의 표지석이 절간의 위세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 거대하기 짝이 없다. 그나저나 오늘은 6.27km를 2시간 30분에 걸었다. 산길 대부분이 가파른 오르막이었던 점을 감한하면 꽤 빨리 걸은 셈이다. 산행에 이골이 난 산꾼들의 뒤를 쫒느라 꽤 서둘렀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