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산(舟尾山, 382m)-능암산(陵岩山, 294m)-월성산(月城山, 313m)

 

여행일 : ‘17. 1. 26()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학동과 옥룡동, 오곡동, 신기동, 소학동 일원

산행코스 : 경찰서두리봉(272m)우금치지막곡산(紙幕谷山, 298m)주미산철마산(鐵馬山, 345.1m)능암산웅치월성산옥룡동주민센터(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오늘 산행은 공주대간(公州大幹)‘의 일부를 걷게 된다. 공주시의 남쪽을 ’U‘자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길이 13.7km(현지 안내판의 수치)의 능선이 공주대간인데, 월성산과 능암산, 철마산, 주미산, 두리봉 등의 주요 산봉우리들을 품고 있다. ’공주대간이란 뚜렷한 이름 없이 그저 삶의 터전을 가꿔오던 산골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생업의 길이었던 것을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길을 다듬은 뒤에 백두대간을 모티브로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외지 사람들에게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의 주요 격전지로 더 알려져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물론 우금치(牛禁峙)’이다. 하지만 나머지 구간도 어느 곳 하나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을 맺지 않은 곳은 없다.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사이에 벌어졌던 ‘1차 전투(10.23~25)’‘2차 전투(11.08~11.11)’가 모두 이곳 공주대간 상의 웅치(熊峙)와 우금치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관군(관군+일본군)은 대간 줄기를 따라 금학동과 봉수대, 웅치, 효포, 우금치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에 농민군은 동쪽부터 서쪽 봉황산까지 30~40여리(13~16km)에 걸쳐 깃발을 꽂아 군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공주대간이 13km 정도니까 공주시내 전체를 둘러쌓았다고 보면 되겠다. 우금치 진격을 위해 우금치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방어선을 교란시키려고 효포 지역의 두 봉우리에서 공격할 듯 기세를 취하기까지 했단다. 아무튼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패했다. 그리고 이 전투를 계기로 농민혁명도 끝났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역사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금치는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며 우리 민족의 기개 넘치는 격전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우금치전적지(공주시 금학동 327-2)

논산-천안고속도로 남공주 I.C에서 내려와 40번 국도로 올라오자마자 다시 빠져나와야 한다. T.G 바로 근처에 봉정교차로(공주시 태봉동)가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우금치로를 타고 공주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금치전적지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우금치는 현재 터널이 뚫려있다. 아니 덮개를 씌웠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도로를 내느라 능선을 깊숙이 팠었던 것을 다시 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흙을 덮기 전에 미리 터널을 만들어 두었음은 물론이다. 동물의 이동 통로를 만드느라 그랬지 않았나 싶다. 만일 그랬다면 동물들 덕분에 공주대간이 다시 살아난 셈이 됐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共存)’,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참고로 우금치라는 이름의 유래는 우금(牛禁)과 우금(牛金)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이곳에 도둑의 출몰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관()에서는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소를 몰고 고개를 못 넘게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개 이름을 우금(牛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개에서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해서 우금(牛金)이라 불렀단다.



차에서 내려 터널을 향해 조금만 더 걸으면 우금치 전적지가 나온다. 사적 제387호로 지정되어있는 우금치전적지에는 동학혁명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때 이 고개를 넘기 위해 노력했던 동학군의 안타까운 넋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또한 동학 농민 운동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정치의 개혁을 위해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잘 관리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곳의 일을 들춰내기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패배의 역사도 역사일진데 말이다.



우금치(牛禁峙)는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2차 전투(11.08~11.11)’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1025일까지의 전투에서 연패(連敗)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약 1주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뒤 118일 공주를 향해 최후 결전을 감행한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이인과 판치에서 퇴각한다. 농민군의 공격에 놀란 관군과 일본군은 대간 줄기를 따라 금학동, 봉수대, 웅치, 효포, 우금치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한다. 9일 오전 10시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향해 진격을 한다. 그리고 우금치 진지에 불과 몇 미터까지 돌진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에 막혀 오르다 밀리기를 40~50회를 거듭하다가 8시경 철수를 시작함에 따라 공주전투의 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공주 전투는 4만 명이 넘는 최대 규모였으나 화력(火力=총포 등의 위력)의 현격한 열세전술(戰術)의 부재로 인해 농민군이 대패(大敗)하고 말았다.



누군가 위령탑의 비문(碑文)을 훼손시켜 놓았다. 적힌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건 도리가 아닌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렇게 훼손을 한다면 세상에 남아 날 시설물이 어디 있겠는가. 공주가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고을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터널의 위로 올라서자 오른편 산자락에 장승들이 늘어서 있다. 두리봉의 들머리(이정표 : 봉화대7.8Km/ 두리봉2.2Km/ 우금치전적지0.1Km)이다. 오늘 오르게 될 주미산이나 월성산 등은 왼편, 그러니까 두리봉의 반대방향이다. 하지만 이정표의 어디에도 그런 지명은 나타나지 않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산행을 하는 중에 만나게 되는 모든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두리봉과 봉화대를 신주(神主)처럼 모시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봉화대란 월성산의 정상에 복원된 시설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오늘 산행은 봉화대를 향해 진군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봉화대 방향은 절개지이다. 요 아래로 난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흉터일 것이다. 때문에 산길은 절개지의 오른편으로 열린다. 그리고 잠시 후 능선에 오르면 갈림길(이정표 : 봉화대7.6Km/ 뱁새울0.6Km/ 두리봉2.4Km)을 만난다. 반대방향, 그러니까 공주시가지 방향으로도 길이 나있는 걸로 보아 우금치 터널을 거치지 않고도 이곳으로 곧장 올라오는 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길은 잘 나있다. 출발하기 전부터 예상하기는 했다. 명색이 공주대간이니 얼마나 공을 들였겠는가. 그런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잘 가꾸어져 있다고 봐야겠다. 몇 년 전 지자체(地方自治團體) 차원에서 정비 사업을 펼쳤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에서는 나무계단과 밧줄 난간을 새로 설치하는 한편, 주요 지점에는 안내도와 이정표를 그리고 쉬어갈만한 곳에는 나무의자들을 각각 설치했다고 전했었다. 그 뒤로도 주기적으로 등산로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제거하는 등 노면(路面) 정비를 해왔을 게 분명하다.



앞서가던 심용보(沈爖輔)선생님이 표지기(ribbon)를 매달고 계신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삼각점(공주 408, 1979. 8 복구)이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해발이 겨우 194.6m에 불과한데 왜 이런 곳에다 삼각점을 설치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산행을 마칠 때쯤에는 이보다 더 의외인 삼각점도 보게 되지만 말이다. 참 오늘 심선생님으로부터 너무 귀한 선물을 받았다. 전국의 13,000개 산(봉우리)을 오른 기념으로 발간하신 우리나라 산, 봉우리 편람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았으니 나도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중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기분 좋은 승격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대단하신 분이다. 우리 나이로 80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1주일에 다섯 번 정도를 산을 오르신다니 말이다. 산봉우리에 연연하지 않는, 아니 연연할 수조차 없는 초보 산꾼에 불과하지만 그의 열정과 체력만은 꼭 닮고 싶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산들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



산길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며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아니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에 짧고 완만한 내리막길이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우금치와 지막곡산의 표고 차가 200m가까이 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했을까 수원지 갈림길‘(이정표 : 봉화대7.1Km/ 수원지1.2Km/ 두리봉2.9Km)을 만나고, 이어서 10분 정도를 더 오르면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559-2514)과 벤치 2개가 놓여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나뭇가지에 광주지역의 산악인 백계남씨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지막곡산 297.6m‘이란다. 하지만 조금 전에 이곳을 지나간 문정남선생님의 표지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분의 판단으로는 지막곡산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내 생각도 역시 그렇다. 진행방향 저만큼이 이보다 조금 더 놓은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있는 게 그 증거이다. 이곳은 274.7m봉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274.7m봉을 지나면서 급하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미끄러지는 게 부담스러울 경우 밧줄 난간에 의지해서 내려가면 된다.



안부까지 떨어졌던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13분 후에는 지막곡산에 올라선다.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570-1477)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지막곡산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표시목에다 지막곡산이라고 적어 놓았을 뿐이다. 공공기물에 낙서를 한 행위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막곡산을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아까 274.7m봉을 내려서면서 가파르다 여겼는데 이곳에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긴 아까는 25m만 고도를 낮추면 되었는데, 이번에는 50m를 낮추어야만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게다. 하지만 이번에도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선다면 큰 어려움은 없다.



그렇게 9분쯤 내려서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주미산0.3Km/ 산림휴양관0.5Km/ 우금티터널2.2Km)가 나온다. 왼편은 올 7월에 문을 연 주미산자연휴양림으로 연결된다. ’숲속의 집산림문화휴양관‘, 야영장 등의 숙박시설은 물론이고 목제문화체험관과 야외 물놀이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니 유네스코세계유산인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등 공주지역의 문화유적을 구경하러 오는 길에 한번쯤 들러 봐도 좋을 듯싶다.



안부를 지나면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이번에는 나무계단까지 만들어 두었다. 밧줄난간도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10분쯤 올랐을까 데크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공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을 즐길 수 있다.




5~6분쯤 더 걸었을까 공주대간 종합안내도와 이정표(봉화대 5.7Km/ 4.3Km), 그리고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22-2447)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주미산의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정상을 둘러보고 나면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정상에는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공주시에서 산행로를 정비하는 길에 정상석까지 챙긴 모양이다. 여러 봉우리 중 하나인 이곳 주미산을 최고봉으로 인정하면서 말이다. 주미산(舟尾山)이라는 이름은 공주지역의 풍수지리(風水地理)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공주는 북쪽 일부만 트여 있은 분지(盆地)로 사람을 가득 실은 배가 출발하기 전 모습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행주형(行舟形)의 지형인데, 이곳 주미산 인근이 배의 끝부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편, 뱃머리 방향의 배를 매어두어야 할 지점에는 정지산(艇止山. 금성동 소재)이 있고, 정지산 아래엔 뱃사공에 해당하는 사공바위와 선박들이 정박했던 곳에 해당하는 정자방(正子方, 일명 정지방, 증지방)이 있다고 한다.



정상석 뒤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앞으로 걷게 될 공주대간의 나머지 구간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철마산에서 능암산을 거쳐 월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산은 계룡산 줄기가 아닐까 싶다. 왼쪽 멀리 보이는 건 갑하산과 우산봉일 것이고 말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후부터 당분간은 일정한 고도(高度)를 유지하면서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산행이 계속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철마산에 올라선다. 그렇다고 이곳이 철마산이라는 증거는 없다. 정상표지석이 안 보인다는 얘기이다. 이정표(봉화대 3.4Km/ 주미산 0.5Km)에도 현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저 삼각점(공주 315)에 적힌 해발고도(315m)를 보고 이곳이 정상이려니 할 따름이다. 아니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표시가 또 하나 있기는 하다. 누군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42-2419)에다 철마산이라고 적어 놓았다.




철마산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10분 후에는 이정표(봉화대 2.8Km/ 주미산 1.1Km)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88-2428)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번에는 통나무로 의자까지 만들어 놓았다. 339m봉이 아닐까 싶다. 3~4분 남짓 앞에서 걷고 있는 문정남선생님이 매달아놓은 표지기가 눈에 띈다. 하단에 ’14,692이라고 적어 놓았다. 적힌 숫자만큼의 산봉우리들을 올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고도(高度)를 까먹는 산행이 시작된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간다는 얘기이다. 18분 후, 이정표 대신에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98-2495)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뉘고, 이어서 3분 후에는 또 다시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이번에는 이정표(봉화대 3.5Km/ 두리봉 6.5Km)까지 세워 놓았다. 이어서 중간에 2개의 이정표(#1 : 봉화산 3.3Km/ 두리봉 6.7Km, #2 : 봉화대 3.1Km/ 두리봉 6.9Km)를 더 만나고 나면 능암산 정상이다 철마산에서 내려선지 48분만이다.



능암산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712-2573)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능암산을 대표하는 것은 명품소나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잘 다듬은 정원수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진 것이 명품소나무반열에 넣어도 되겠다



조망 또한 일품이다. 남동 방향이 암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계룡산 방향의 산줄기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왼쪽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은 금강이 아닐까 싶다.



산행을 하다보면 심심찮게 시판(詩板)들을 만나게 된다. 김소월, 서정주, 신경림 등 꽤 많은 시인(詩人)들의 대표작을 적어 놓아 음미하면서 걷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그 중에 한용운선생님의 복종이란 시가 가장 가슴에 다가와 사진을 올려본다.



능선의 양쪽은 거의 비탈에 가깝다. 흡사 토성(土城)의 성곽(城郭)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흙을 빚어 올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자연 성곽으로 보면 되겠다. 120년 전 이 길은 농민군들이 뛰어 다녔을 것이다. 꼭 통과해야만 하는 우금치나 웅치를 향해 말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계속해서 아래로 향한다.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이 더 길면서도 가파르다는 얘기이다. 가는 길에는 왼편으로 생태공원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봉화대1.4Km/ 생태공원0.8Km/ 두리봉)을 만나기도 한다. 이 구간에서는 주의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이정표(봉화대 1.3Km/ 생태공원 1.3Km)이다. 방금 걸어온 방향을 생태공원으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방향에서 산행을 해오는 사람들은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그나마 누군가 이정표의 그쪽 방향에다 아님, 주미산방향으로라고 적어 놓아 다행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십자안부까지 떨어졌던 산길이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229m봉이 아닐까 싶다. 이곳도 역시 정상석은 없다. 그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744-2671)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 무슨 정상석이 필요하겠는가. 아무튼 정상에 서면 잠시 후에 오르게 될 월성산이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229m봉을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나보다. 통나무로 계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길고 긴 계단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생각보다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리고 7분 후에는 안부사거리(이정표 : 봉화대 0.6Km/ 주미산 4.3Km)에 내려선다. 능치(陵峙), 능치고개일 것이다. 혹자는 이곳 능치(陵峙)의 어원(語源)능치고분군에서 찾기도 한다. 공주터널이 지나고 있는 바로 위 금학동 쪽의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그 백제시대의 고분군(古墳群) 말이다. 참고로 이 고개는 능치(陵峙)와 능현(陵峴, 신증동국여지승람) 외에도 웅치(熊峙) 또는 곰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논산 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웅진성(공주)으로 들어가기 위해 넘던 고갯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웅치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때 농민군(農民軍)의 주요 격전지(激戰地)였다. 18942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발생한 민란은 동학교도와 결합되고 반침략과 반봉건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차 봉기(蜂起)’이다. 한때 전주성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전주화약을 체결함으로써 봉기는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에 척왜(斥倭)를 외치며 18949월에 다시 봉기한다. 그리고 남접과 북접이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공동 전선을 펴게 된다. 2차 봉기의 마지막 격전지가 공주 우금치 지역이다. 공주를 사이에 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우금치전투가 있기 전에 벌어졌던 ‘1차 전투(10.23~25)’의 격전지가 바로 이곳 웅치였다는 것이다. 전투에서는 비록 패하였지만 말이다.



반대편 능선으로 올라서자마자 삼거리(이정표 : 봉화대/ 수원골/ 공주여고)을 만난다. 왼편은 수원골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던 산길은 효포초등학교 삼거리’(이정표 : 봉화대 0.3Km/ 주미산 4.6Km)를 만나면서 가팔라진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다면 대충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나 고갈되어가는 체력 때문에 애를 먹게 되는 구간이다.



숨이 턱에 차서 오르길 20분이면 드디어 월성산 정상이다. 이는 웅치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니 참조한다. 정상은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왼편 e-편한세상아파트로 연결되는 삼거리(이정표 : 대웅아파트1.8Km/ e-편한세상아파트2.2Km/ 주미산4.0Km)인데 체육시설과 평상은 물론 공주대간 코스안내도건강운동정보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정상표지석은 그보다 조금 위에다 세웠다. 그런데 봉화대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이곳의 지명은 분명 월성산이다. 그리고 봉화대는 그곳에 세워진 하나의 시설물일 따름이다. 정상석이 잘 못 되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정상석의 뒤에는 산뜻한 외모의 봉수대(烽燧臺)가 세워져 있다. 논산의 노성산성에 있던 봉수대로부터 신호를 받아 정안의 고등산봉수대로 연락을 해주던 봉수대가 있었던 터인데 2007년에 새로 복원했단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남쪽의 계룡산 줄기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가 하면, 북쪽으로는 공주시가지가 널찍하게 펼쳐진다.



하산을 시작한다. 철사다리를 빙글 돌아 내려가면 잠시 후 정상 정도 높이의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난다. 정상과 쌍둥이 형제라고 보아도 되겠다. 이곳에는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조망을 실컷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남쪽방향으로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열린다. 오늘 올랐던 전망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싶다. 금강과 세종시 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우산봉과 계룡산의 굵은 힘줄까지도 또렷하게 나타난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육각으로 지어진 정자(亭子)를 만난다. 하지만 그냥 지나쳐도 되겠다. 정자에 올라봐야 볼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잠시 쉬어가는 용도로 지어놓았나 보다. 반대방향에서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거칠어진 숨결을 풀어볼 겸해서 말이다.



정자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길이 널따랗기 때문에 내려서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언제부턴가 길가는 소나무들 천지로 변해있다.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 산행이 시작된다는 얘기이다.



이제부터는 심심찮게 갈림길이 열린다. 그만큼 도심(都心)에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첫 번째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수원골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2.2Km/ 수원골0.4Km/ 봉화대0.7Km)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는 게 지겹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라면 이쯤해서 수원골로 내려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정자에서 내려선지 13분 만이면 또 다른 정자를 만난다. 이번에는 간단한 운동기구 두 세트 정도와 벤치도 함께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조망이 트이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반대방향에서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에게 잠깐 쉬어가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나무그늘 덕에 무더운 여름에는 땀 식히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선택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는 능선을 계속해서 타느냐 아니면 이쯤에서 산을 내려갈 것인지를 놓고 말이다. 이를 눈치라도 챘는지 곳곳에다 갈림길을 만들어 두었다. 그 첫 번째는 8분 후에 만나게 되는 주공아파트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1.2Km/ 주공아파트0.4Km/ 봉화대1.7Km)이다. 이어서 공주대 옥룡캠퍼스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0.9Km/ 공주대옥룡캠퍼스0.4Km/ 봉화대2.0Km)대웅아파트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0.7Km/ 대웅아파트0.3Km/ 봉화대2.2Km), ’옥룡사거리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0.6Km/ 옥룡사거리/ 봉화대2.3Km)이 대략 2~4분 간격으로 줄지어 나타난다.



잠시 후 괴이하게 생긴 삼각점(충남 36)을 만난다. 삼각점을 가운데에다 신주(神主)처럼 모셔놓고 네모진 오석(烏石)으로 테를 둘렀다. 그 아래에는 국가의 중요시설물이니 훼손돼지 않도록 협조해달라는 당부의 말까지 적어 놓았다.



산행이 마감되는 옥룡정수장은 삼각점의 바로 아래에 있다. 능선의 한가운데에다 조성한 탓인지 산길은 이 시설물을 왼편으로 우회(迂迴)하도록 해놓았다. 내려오는 길에 시야가 잠깐 열리면서 옥룡동 일원과 공주시가지를 관통하는 금강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산행날머리는 옥룡정수장

정수장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반 바퀴를 돌면 체육시설지구가 나온다. 이곳에 큼지막한 공주대간 탐방로 안내판을 세워놓았으니 자기가 걸어온 길을 정리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체육시설을 지나면 정수장의 정문이다. 문의 옆에는 등산로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길을 못 찾고 정수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골머리를 자주 앓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은 이곳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쉬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에필로그(epilogue), 오늘 산행은 동학농민운동을 되새기며 걷는 셈이 되었다. 산행을 시작했던 우금치에서부터 산행이 마무리되는 봉화대에 이를 때까지 120년 전의 동학농민군의 넋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시작으로 1년여에 걸친 농학농민운동은 결국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참가했던 농민군들이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3·1독립운동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고 한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할 아픔의 역사라는 얘기일 것이다. 민란으로까지 번질 정도로 궁핍한 백성들을 제대로 보듬지 못한 위정자(爲政者)들 때문에 엉뚱하게 외세 침략의 발판이 되고만 뼈아픈 우리의 역사이자 씁쓸한 패배의 기록이지만 올바르게 인식하고 다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특히, 시끄럽기 짝이 없는 요즘의 현실이라면 이는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