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지산(紫芝山, 367m)

 

산행일 : ‘14. 1. 4()

소재지 : 충남 금산군 제원면

산행코스 : 난들교암릉성터자지산부엉이봉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 S라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금강의 조망(眺望)이 빼어난 산이다. (:)과 골(:바위)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지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바윗길도 위험하지도 않기 때문에 가족산행지로도 추천할 만하다. 다만 산행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 흠이나 가족나들이에는 충분할 것이다. ‘자지산이란 이름이 왠지 남세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은 은밀한 것이라는 우리네 풍속(風俗) 탓이다. 그러나 자지산의 자지는 자주 빛 지초를 말한다. 이 산에서 자주 빛 지초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난들교

대전-통영고속도로 금산 I.C에서 내려와 68번 지방도를 타고 영동읍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얼마 안 있어 제원면소재지에 이르게 된다. 이곳 제원우체국 앞에서 좌회전하여 진행하다가 대원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강변(江邊)을 따라 들어가면 버스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난들교()에서 약 200m쯤 못 미친 지점이다. 원래는 금강변(錦江邊)에 위치한 천내리(금산군 제원면)에 있는 기러기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하려했지만, 산행코스가 너무 짧다고 해서 근처에 있는 천앙산(490.1m) 하나 더 타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은 좋은 생각은 아니다. 천앙산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올라갈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천앙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난들교를 건너지 말고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야 한다. 계곡은 개인의 소유인지 차단기(遮斷機)를 설치해서 차량의 통행을 막고 있다. 차단기를 지나 100m남짓 더 들어가면 컨테이너박스가 보인다. 산길은 컨테이너박스 뒤로 나있다. 임도(林道)를 겸하고 있는 산길은 처음에는 제법 또렷하게 나있다. 그러나 얼마간 가다보면 길의 흔적은 사라져버리고 능선은 온통 아카시아나무 천지다. 한 발짝 옮기기도 쉽지 않을 정도이다. 20분쯤 올라갔을 즈음 드디어 집사람의 얼굴표정이 변하기 시작한다. 구태여 이 고생을 해가면서 올라가야만 할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집사람의 의견을 쫒아 발걸음을 돌린다. 자지산 산행이 시작되는 난지교까지 다시 되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35, 천앙산을 오르지도 못하고 시간만 쓴 게 아까웠지만 정상정복을 포기한 것은 잘 내린 결정이었다. 천앙산을 다녀온 사람들에 의하면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데다가, 아카시아나무 가시에 바지까지 찢긴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난지교에서 이번에는 자지산으로 향한다. 산행은 다리를 시작된다. 들머리에 자지산이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碑石)과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들머리에 들어서자 길이 세 개로 나뉘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빗돌의 뒤로 난 길 외에도 왼편 능선으로 곧장 치고 오르는 길, 그리고 작은 골짜기를 따라난 길이다. 오른쪽과 왼쪽의 길은 15분쯤 후에는 다시 만나게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들어서면 될 일이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계곡을 따라 난 가운데 길로 들어서본다. 50m쯤 들어가니 플라스틱 파이프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개구리약수(藥水)’이다. 제법 넉넉하게 물이 흘러내리지만 마시는 것은 사양하고 발길을 돌린다. 수질(水質) 분석결과를 붙이도록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으나, 분석결과는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입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에 보이는 길로 들어선다. 곧장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다. 초입에서 잠깐 잡목(雜木)들이 발길을 잡던 산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소나무 숲길로 변한다. 마침 경사(傾斜)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으니 여유롭게 산행을 시작해본다. 코끝을 스치는 소나무향이 무척 신선하다. 저 향()속에는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까지 듬뿍 실려 있을 것이다. 덕분에 오늘 산행은 웰빙(well-being), 아니 힐링(Healing) 산행으로 변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18분쯤이면 임도(林道)를 만나게 된다. 아까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올라왔을 경우에는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임도를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왼편 절개지(切開地) 위의 나뭇가지에 산악회의 시그널들(signal)이 마치 무당집 대문 앞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임도를 떠나 다시 산자락으로 올라서게 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산길은 서서히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별로 힘들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보내오는 짙은 소나무향이 그 원인일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0분쯤이면 거대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바윗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암벽의 경사(傾斜)는 제법 심한편이지만 그다지 높지도 않을뿐더러 튼튼한 밧줄까지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 바윗길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바위구간을 오르면, 어디로 갈까를 갖고 잠깐 고민을 해야 하는 구간이 나온다. 이곳에는 안전시설이 없기 때문에 약간의 주의가 요구된다. 오른편이나 왼편, 어느 곳으로 올라가도 되지만 이왕이면 오른편으로 올라갈 것을 권하고 싶다. 그래야 로프에 한 번 더 매달려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지산에는 유난히도 부처손이 많다. 부처손(卷柏)은 건조한 바위면에서 자라는 사철 푸른 잎을 가지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습기가 없을 때는 말리므로 공처럼 되었다가, 습기가 있으면 다시 활짝 펴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 줄기, 뿌리 전체가 약재(藥材)로 쓰이는데, 지혈, 이뇨, 거담 등의 효능이 있고 천식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토혈, 혈변, 대하증, 붕루(崩漏-월경이 멈추지 않는 증세로 적대하라고도 한다) 등의 치료에 주로 사용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약효(藥效)가 대부분 여자에게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자란 부처산보다 이곳의 부처손이 훨씬 더 약효가 뛰어날 것이 분명하다. 남자산(?)에서 양기(陽氣)를 먹고 자란 약초(藥草)이니 여성에게 더 뛰어난 효능을 보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참고로 부처손이란 한자명인 보처수(補處手)에서 유래된 것이다.

 

 

금산에서 흘러내려온 오른쪽의 봉황천이 둥글게 휘면서 돌아나가고 있는 금강줄기와 합쳐지고 있다.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진악산과 구봉산일 것이다.

 

 

바윗길을 지나 다시 7분쯤 더 오르면 돌무더기가 보인다. 바로 자지산성(紫芝山城)이다. 자지산성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호남을 공략하려는 왜군들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성곽(城郭)을 쌓은 돌들은 강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당시 조총을 든 왜군들에게 의병들이 챙겨 들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죽창이나 낫이 다이었을 거다. 그런데 만일 그런 무기도 없을 경우에는 어땠을까? 아마 돌맹이가 최후의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강돌을 주워다가 성을 쌓은 것이다.

 

 

 

자지산성을 지나면 곧바로 정상직전의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은 뛰어난 조망대(眺望臺)신안천계곡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국사봉이 보이고, 충남에서 가장 높다는 서대산은 국사봉 뒤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다. 신안천계곡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신안마을에 이르게 된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은 아까 올라가다가 포기하고 돌아온 천앙산이다. 자지산 정상은 동봉과 서봉으로 나누어져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올라선 이 봉우리가 서봉일 것이다.

 

 

 

 

 

서봉에서 정상인 동봉까지는 10분이면 충분하다. 서봉에서 바라볼 때는 경사(傾斜)가 제법 가파르게 보이지만, 생각보다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바위봉우리이려니 하고 생각했던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을 주인인양 차지하고 있는 소나무들 사이에 검은 정상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이정표나 안내판 등 다른 시설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더 시원스러워진다. 가야할 부엉이봉 뒤로 월영산과 갈기산은 제법 또렷한데, 민주지산은 희미하니 형태만 나타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드는 미세(微細)먼지 탓일 것이다. 난들교에서 정상까지는 50분이 걸렸다.

 

 

 

정상에서 부엉이봉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제법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부엉이봉으로 향하는 능선이 ‘C’자형으로 휘어있는 탓에 잘못하면 오른편 길을 부엉이봉으로 가는 길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부엉이봉으로 가는 왼편 길이 더 또렷하고, 거기다가 산악회의 시그널들이 더 많이 붙어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부엉이봉으로 방향을 잡으면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순한 능선길로 변한다. 정상을 출발한지 15분 남짓 되면 왼편에 지도(地圖)에도 없는 갈림길 하나가 나타나지만 무시하고 진행하면 된다. 이어서 18분 정도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하다보면 또 다시 왼편으로 갈림길 하나가 나뉜다. 왼편은 천태산으로 가는 길이니 주의가 필요하다.

 

 

 

 

천태산 갈림길에서 부엉이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중간에 딱 한번 조망(眺望)이 트일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산길이 계속된다. 능선은 큰 오르내림이 없이 35분 동안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조망터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만큼 조망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월영산과 갈기산, 비봉산이 또렷하고, 천태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부엉이봉 정상은 정상표지석 대신에 나무판자로 만든 정상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을 뿐, 자지산과 마찬가지로 다른 시설물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정상표지판이 붙어있는 나무의 뒤편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부엉이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한 부엉바위라고 한다. 만일 산행을 하다가 이런 바위를 만났을 때에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올라가 보는 것이 좋다. 어김없이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위 위로 오르면 구비치는 금강과 맞은편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월영산과 갈기산이다.

 

 

 

 

 

부엉이봉에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경사(傾斜)가 심한 탓에 요리조리 갈지()자를 그려가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그러다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전망대이다.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는 의외로 조망이 시원찮다. 금강과 기러기공원으로 연결되는 세월교가 보이지만 나뭇가지에 가려서 또렷하지 않는 것이다.

 

 

 

 

전망대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신경 써서 잘 만들었네요.’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을 정도로 계단의 높이가 알맞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계단을 내려서는 집사람의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강변에 이르러서도 나무데크는 끝이 나지 않는다. 기러기공원으로 넘어가는 세월교까지 데크로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기러기공원 주차장

강변을 따라 난 데크길이 끝나면 금강을 가로지르는 세월교가 나온다. 비가 많이 올 경우 잠수교로 변하는 이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기러기공원 주차장이다. 하산지점인 기러기공원에 이르면 건너편 바위벼랑에 인공폭포가 보인다. 그 오른편에 약간 시커멓게 보이는 것이 자지산 음양조화(陰陽調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음굴이다. 자지산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갖춘 산이라고 한다. 풍수지리(風水地理)상 남성의 성기 비슷하게 생긴 자지산이 양()을 나타내며, 천내리 원골 건너편의 강가 수십 길 바위 벼랑에 여자의 성기(性器)를 닮은 굴이 음()을 대신한다고 한다. 그 둘이 합해서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부엉이봉에서 주차장까지는 40분 정도가 걸렸다.

 

 

개죽산(介竹山, 452m)-작성산(鵲城山,497m)-은석산(恩石山, 455.3m)

 

산행일 : ‘13. 11. 9()

소재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과 병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에스원연수원 정문왼편 능선삼성고개개죽산풍산공원묘지(봉황산)봉암산작성산개목고개은석산상봉산(上峯山)병천초교(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천안지역 산악인들로부터 천안독립종주로라 이름 붙여진 다섯 산 중에서 가장 높다는 작성산의 높이가 겨우 497m이니 동네 뒷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지막한 산들이다. 그러나 산행은 의외로 힘든 편이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고 가파르기 때문에 낮은 산인데도 불구하고 높은 산에 못지않게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행이 힘든 것에 비해 산은 보잘 것이 없다. 전형적인 흙산인지라 산세(山勢)가 특별하지도 않고, 조망(眺望) 또한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삼성에스원천안연수원 정문

경부고속도로 옥천 I.C에서 내려와 첫 번째 4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병천천(竝川川)을 만나게 된다. 이곳 병천천을 건너기 직전에 좌회전하여 57번 국도(안성방면)를 따라 들어가면 북면사무소 소재지인 오곡리를 지나 다시 한 번 병천천을 만나게 된다. 병천천을 가로지르는 사담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에스원천안연수원에 이르게 된다.

 

 

 

연수원 정문에서 왼편으로 난 농로(農路)를 따라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먼저 다녀간 선답자(先踏者)들의 후기(後記)에는 연수원을 그냥 통과하고 있지만,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붙어있는 경고판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산자락과 밭의 가장자리 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길이 오른편으로 크게 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올바른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나있지만 길의 흔적이 의외로 희미하기 때문에 헷갈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다. 무조건 능선 위로 오르면 되겠거니 하는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바로 능선으로 올라서겠다는 생각으로 오른편 산자락으로 올라선 우리부부는 꽤나 심한 고생을 자초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경사(傾斜)가 가파른데다가 길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막상 능선에 올라섰다고 해도, 한참을 더 가야만 정규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더 멀게 우회(迂廻)를 해버린 결과가 된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3분이 지났다.

 

 

 

 

제대로 된 등산로로 들어서서 12분 정도를 걸으면 임도(林道)를 만나게 된다. 지도에 삼성고개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지른 후 맞은편 능선으로 들어붙는다. 능선으로 진행하면 산길은 급경사(急傾斜)와 완경사(緩傾斜)를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나 경사가 좀 누그러진다고 해도 오르기에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참나무 낙엽이 두텁게 덮여있는 탓에 엄청나게 미끄럽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사가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로프가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임도를 출발해서 약 8분 정도가 지나면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 주능선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데도, 눈에는 주능선이 전방(前方)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했다는 후기가 많은 지점이다. 삼거리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5분 정도 내려오면 안부에서 이름 없는 사거리를 지나게 되고, 다시 5분쯤 더 걸으면 ‘POST’라고 쓰인 아크릴(acrylic)판이 나무기둥에 묶여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그 아크릴판의 상단(上端)개죽산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이곳이 개죽산의 정상이라는 말인가? 설마로 위안을 삼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POST지점에서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20분 정도를 더 걸으면 개죽산(介竹山, 452m)이다. 개죽산으로 가는 길에는 오른편 산비탈의 빈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건물 한 무더기가 보인다. ‘삼성에스원연수원이다. 그러고 보면 아까 보았던 아크릴판은 연수원의 훈련과정에서 이용되는 ‘POST’인 모양이다. 개죽산 정상은 10평 남짓한 공터에 삼각점(三角點)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정상표지석까지 세우기에는 어설픈 봉우리인 모양이다. 대신 정상판 하나가 가냘픈 나무기둥에 어설프게 묶여 있는 것이 보인다. 정상석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지 새마포산악회에서 붙여 놓았다. 개죽산 정상은 사방이 잡목(雜木)으로 에워싸여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개죽산을 지나면서 처음으로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이정표는 조금 문제가 있다. 가야할 방향을 은석산으로 표시한 것은 좋지만, ‘천안지리산종주대에서 매달아 놓은 성거산이라는 이정표가 문제인 것이다. 성거읍에 있는 성거산은 이곳에서 매우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사전 준비 없이 무턱대고 따랐다가는 큰 낭패를 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를 만들려면 최소한도 적혀있는 목표지점까지의 거리 정도는 함께 표시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개죽산을 지나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하면서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왼편에 거대한 묘역(墓域)이 펼쳐진다. 풍산공원묘지이다. 묘역 상부의 절개지(切開地) 위로 난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뜬금없는 정상판 하나를 만나게 된다. ‘봉황산이라고 적혀있는데, 지형도(地形圖)에 표기된 봉황산(봉암산)의 위치와 맞지도 않을뿐더러, 세워진 위치 또한 산봉우리가 아니고 능선상의 한 지점에 불과한 곳에다 붙여 놓은 것이다. 아무리 개인이 한 것이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헷갈리게 할 우려가 있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공원묘지로 내려선 산길은 묘역에서 만든 길을 잠시 따르다가 잠시 후에는 다시 산속으로 들어선다(입구에 아크릴로 만든 이정표가 붙어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그리고 이내 거칠게 변해버린다. 가파르게 떨어지는 경사(傾斜)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행여나 미끄러질세라 조심스럽게 20분 정도를 진행하면 잡목으로 뒤덮인 석은배미고개에 이르게 된다. 서쪽 오곡리와 동쪽 봉항리 방면 길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양쪽 마을 주민들이 분주하게 넘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은배미고개에서 다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봉암산 정상이다. 오늘 오르는 산들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무시할 일은 아니다. ()과 봉 사이의 골이 상당히 깊고, 오르내림의 경사(傾斜)가 가파르기 때문이다. 오늘 걷는 산행의 특징이다.

 

 

 

 

 

 

 

봉암산(426.9m) 정상도 상당히 넓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고, 어깨 높이로 자란 억새풀밭 가운데에 오래된 삼각점이 보인다. 이곳도 개죽산 정상처럼 사위(四圍)가 잡목수림으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에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까 지나왔던 개죽산과 마찬가지로 정상표지석 대신에 개인이 만든 정상판()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아까 공원묘지 근처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사람이 만든 정상판이다. 그 외에도 오늘 산행을 리드(lead)하고 있는 이상혁님이 조금 전에 매단 코팅지가 하나 더 바람에 날리고 있다. 산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인데 산에서 해야 할 일을 뭔가 하나 더 찾아 낸 모양이다.

 

 

 

봉암산에서 작성산으로 가는 길도 지나왔던 길과 별반 다름이 없다. 얕거나 혹은 깊은 골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것이다. 다만 이 구간은 주변 풍광(風光)이 조금 변하는 맛은 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를 지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단풍나무의 숲이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가을의 막바지에서 만난 붉은 단풍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쌓였던 피로를 날리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봉암산에서 작성산은 40분 조금 넘게 걸린다. 중간어림의 안부에서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 가쁘게 치고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작성산(鵲城山, 497m) 정상이다. 무인산불감시탑이 우뚝 솟아있는 작성산 정상에서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정상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참고로 까치 작()으로 시작되는 작성산은 이곳 외에도 충북 제천시의 금수산 북쪽에 있는 작성산과,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작성산(鵲城山 · 339m) 정도가 알려져 있다.

 

 

 

 

작성산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충청도 산답게 음흉하네요.’ 함께 걷던 일행의 말에 대꾸를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의 해설(解說)이 일품이다. 산의 높이가 동네 뒷산 정도 밖에 안 되는데도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는 것이다. 골이 깊어서 오르내리기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윗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그의 손가락이 아래를 가리킨다. 비록 잠깐이지만 바윗길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아무리 짧아도 바윗길은 바윗길인 것이다. 비탈길을 20분 정도 내려서면 낡은 이정표(은석산 1.0Km/ 작성산 0.9Km/ 매송교 1.8Km)가 서있는 개목고개에 이르게 된다. 병천리와 용암리를 잇는 개목고개는 옛날 의견(義犬)이 술에 취한 주인을 구하고 죽었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진다 

 

 

 

개목고개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지나왔던 구간에도 이정도로 가파른 곳들이야 있었지만 3시간의 산행에서 쌓인 피로를 감안하면 느끼는 강도는 훨씬 더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가파른 곳마다 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가파른 산길은 중간어림에서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을 만나면서 그 경사(傾斜)를 잠깐 누그러뜨렸다가 다시 한 번 가파르게 솟구친 다음에 은석산(恩石山, 455.3m) 정상에 이르게 한다. 작성산 정상에서 1시간 조금 못 걸렸다. 은석산 정상도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졌기는 매 한가지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은석사 0.6Km/ 개목고개 1.0Km, 성거산), 그리고 서툰 솜씨로 쌓아올린 돌탑이 하나 보인다. 그런데 이정표가 좀 이상하다. 진행하려고 하는 상봉산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정표는 등산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시설물이다. 그런데도 오늘 만난 이정표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거의 없었다. 참고로 이곳 은석산은 천안의 5대 명산(名山) 중 하나로서, 산이 대순같이 수려(秀麗)하고 수석(樹石)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에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묘()가 있다. 

 

 

 

은석산을 지나면서 편한 산행이 시작된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은 경사(傾斜)도 완만(緩慢)할뿐더러 흙길에 솔가리(소나무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지겨우리만치 계속되던 참나무 숲이 언젠 부턴가 소나무 숲으로 바뀌어 있다. 순한 산길을 걸으며 모처럼 여유를 부리다보면 14분 후에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고갯마루에 내려서자마자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무심코 지나쳐버린 것을 알게 된다. 고갯마루에 세워진 이정표(은석사/ 은석산 정상/ 박문수어사 묘)를 보고 나서야 박문수어사 묘를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박어사의 묘를 참배하려면 정상에서 은석사 방향으로 내려갔어야만 했다.

 

 

 

첫 번째 임도를 지나면서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 시작한다. 거의 산책로 수준의 폭신폭신한 길에 조망(眺望)까지 트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거기다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이 보내오는 솔향 속에는 피톤치드(phytoncide)까지 가득하니 힐링(healing)산행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병천면 시가지(市街地)와 들녘으로 눈요기를 하며 30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두 번째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이 고갯마루는 옛날 산 남쪽 가암마을에서 계곡 길을 이용, 북쪽 서원마을로 넘나들던 큰 고개였다고 한다.

 

 

 

 

임도를 지나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붙으면 15분 후에는 상봉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해도 산길은 산책로처럼 순하기 짝이 없다. 길의 폭도 역시 임도 수준이다. ‘철없는 진달래네요산길이 편해진 집사람의 눈에 주변의 풍물(風物)이 들어오는 여유까지 생겼는 모양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한 떨기 진달래가 길가에서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상봉산(上峯山, 220m) 정상에는 상봉정(上峯亭)이라는 2층짜리 8각 정자와 운동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아마 지역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가꾸어 놓은 모양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시석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이정표(병천 1.2Km/ 은석사 2.3Km)의 상단에 정상이라 적힌 철판을 붙여 놓았다. 정자에서는 남쪽과 서쪽으로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남동으로는 아우내장터와 유관순 열사 사적지가 있는 매봉산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남으로는 조치원 방면 크고 작은 산들이, 남서쪽으로는 금북정맥과 함께 광덕산과 망경산이 보인다.

 

 

 

 

산행날머리는 병천초등학교

상봉산에서 병천으로 내려가는 산길도 순하기는 매일반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아래로 난 산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삼거리(이정표 : 병천초등학교 0.4Km/ 병천 0.6Km/ 상봉산 0.6Km)를 만나게 되고, 삼거리에서 병천초등학교를 향해 내려서면 20분이 채 안되어 산행날머리인 병천초등학교 근처의 시가지에 이르게 된다. 이왕에 병천에 왔다면 잠깐 짬을 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소문난 순대국밥도 먹을 겸 아우내장터를 한번쯤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돼지 소창에 양배추, , 고추, 마늘 등을 선지와 함께 버무려 넣은 병천순대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우내장터는 무엇보다도 1919년 41일 유관순열사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식장산(食藏山, 623.6m)

 

산행일 : ‘13. 8. 11()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와 옥천군 군서면, 군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대성삼거리고산사식장사해돋이전망대KT송전탑독수리봉국사봉장고개세정골 옆 지방도세천유원지(산행시간 : 5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식장산은 경사(傾斜)가 그다지 심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경사가 있을라치면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어서 노약자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산이다. 곳곳에 널린 시원스런 조망(眺望)처와 울창한 숲, 그리고 깊은 계곡, 특히 도심(都心) 속의 동네 뒷산이다 보니 대전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참고로 산의 이름이 식장산이 된 것은 역사(歷史)와 연관이 있다. 신라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식장산 일대에 백제가 성을 쌓고 신라군의 침략에 대비해 식량을 감춰두고 비축했다하여 식장산(食藏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산행들머리는 대성동삼거리

대전-통영고속도로 남대전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이용하여 대전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대성동삼거리(대전시 동구 대성동)에 이르게 된다. 삼거리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도로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 도로는 고산사까지 이어지지만 대형버스는 진입이 불가능하다. 도로 입구에 식장산과 고산사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대형 이정표(식장산 2.5Km, 고산사 1.0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는 대전통영고속도로아래를 지나더니 드디어 산속으로 접어든다. 산속으로 들어서고 나서도 도로는 그다지 급하지 않은 경사(傾斜)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산길은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지만 다행이도 햇볕은 들지 않는다. 주변의 숲이 울창해서 완벽하게 햇빛을 차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정도가 지나면 천년고찰(千年高札)인 고산사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고산사로 올라오는 길에 이정표(고산사 0.6Km, 식장산악약수터 1.2Km/ 식장정상 약수터 0.6Km)가 세워져 있는 갈림길을 만나게 되나 무시하고 진행하면 된다.

 

 

 

 

 

고산사(高山寺), 신라 말(헌강왕 15) 승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가람의 구조 및 석탑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의 사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조선시대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중건되었고, 1636년에 중수한 대웅전(대전광역시유형문화재 10)에 봉안된 불상은 중앙에 있지 않고 서단(西壇)에 동향하고 있는 것으로 특이하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전 외에 극락보전과 산신각, 그리고 범종각이 있다.

 

 

 

 

고산사에서 빠져나와 조금만 더 오르면 개심사로 갈려나가는 산길(이정표 : 개심사 0.9Km/ 식장사 0.2Km/ 고산사 0.3Km)이 나타나고, 다시 200m만 더 올라가면 식장사에 이르게 된다. 대웅전과 요사(寮舍)가 전부인 식장사는 한적하기 이를 데가 없다. 법당이나 요사의 문도 꽉 닫혀있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고산사와는 정 반대의 분위기이다. 염불소리가 활기차던 고산사는 활기에 넘쳤지만 식장사는 다른 세상처럼 조용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똑같은 절인데도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똑같은 부처님도 절에 따라 불력(佛力)이 다른 것일까. 그렇지만 식장사 대웅전 뜰에서 바라본 대전시내의 조망(眺望)은 일품이었다.

 

 

 

 

 

 

식장산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이정표(대성산악약수터 0.2Km/ 식장정상약수터 0.3Km, 만인산 20.15Km/ 고산사 0.3Km)가 세워진 절의 입구로 다시 빠져나와야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갈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는 없지만 식장정상약수터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갈림길에서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넘으면 약수터가 보인다. 목이라도 축일까 해서 약수터에 들어가 보지만 마시기에 부적합하단다. 행정관청에서 수시로 수질검사(水質檢査)를 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아쉬운 부분이 하나 보인다. 약수터에 걸려있는 바가지가 눈에 거슬리는 것이다. 바가지까지 일단 치웠다가 수질(水質)이 제대로 돌아왔을 때에 다시 걸어두면 어떨까 싶다.

 

 

 

 

약수터에서 짧은 오르막길을 오르면 능선안부에서 산내삼거리 갈림길(이정표 : 산내삼거리 1.2Km/ 정상 0.6Km, 구절사 4Km, 만인산/ 식장사 0.2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제법 가파른 능선길을 치고 오르면 정자(亭子 : 옆 이정표 : 정상 0.4Km/ 산내삼거리 1.6Km/ 판암동 2.8Km)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쉼터용으로 만들어 놓은 정자는 우리가 평소에 주변에서 보아오던 정자의 생김새와는 다른 외양(外樣)을 지녔다. 한 개의 기둥 위에 육각(六角)의 지붕을 얹은 모양이 마치 우산(雨傘)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정자에서 다시 한 번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오르면 대전 시내가 잘 조망(眺望)되는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정상을 겸한 해돋이 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사실 이곳은 정상이 아니다. 진짜 정상은 이곳에서 200m쯤 더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진짜 정상은 등산객들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방송국 송신탑(送信塔)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을 대신하고 있는 이곳에는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정상표지석에 적힌 해발고도(海拔高度)는 식장산 정상의 높이(623.6m)가 아니라 598m이다. 비록 정상을 방송시설에 빼앗기고 이곳에다 정상을 옮겨 놓았지만 정상의 높이까지 대신하지는 못했나 보다. 전망대에서는 보문산과 대전 시내가 한 눈에 잘 들어온다. 산행들머리에서 정상(해돋이전망대)까지는 1시간20분 정도가 걸렸다. 고산사와 식장사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좀 더 지체되었나 보다.(중간에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포인트별 소요시간은 생략했다  

 

 

 

 

 

 

전망대에서 송신탑 방향으로 50m정도 진행하면 사거리(이정표 : 세천공원 4.9Km, 행글라이더장 0.4Km/ 만인산 19.5Km/ 고산사 1.2Km)가 나온다. 이곳에서 독수리봉으로 가려면 정면에 보이는 방송국 송신시설을 우회(迂廻)하여야 한다. 어느 쪽으로 우회를 해도 상관없지만 오른편 우회로를 택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산악회 선두대장이 깔아 놓은 방향표시지를 참조했을 따름이다. 정상을 우회하는 길에 정상을 방송국에 빼앗긴 식장산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언젠가 전주의 모악산에 오를 기회가 있었는데, 모악산의 정상도 역시 이곳 식장산과 마찬가지로 방송국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모악산이 이곳 식장산과 다른 점은 송신시설 안에 위치한 정상까지 통로를 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식장산의 정상도 이제 그만 시민들에게 돌려주면 어떨까 싶다.

 

 

 

송신시설을 우회(迂廻)하는 길은 다양한 형태의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너덜로 이루어진 오름길이 나오는가 하면, 벼랑의 난간을 따라 난 길이 보이기도 하다가, 침목(枕木)으로 만들어진 계단으로 끝을 맺는다. 계단의 끄트머리에 안부 사거리(이정표 : 구절사 2.9Km, 만인산 19.5Km/ 세천공원 4.1Km/ 약수암/ 식장산 정상 0.4Km, 고산사 1.6Km)가 있다. 이정표를 아무리 살펴봐도 가고자하는 독수리봉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독수리봉이 구절사 가기 바로 전에 있으므로 구절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안부사거리에서 200m정도 능선을 치고 오르면 580.7(이정표 : 행글라이딩장 1.0Km/ 만인산 19.3Km)이다. 예비군들의 참호(塹壕)가 있는 봉우리에 오르면 조망(眺望)이 시원스럽다. 지나온 식장산의 송신시설은 물론이고, 건너편 산봉우리를 점령하고 있는 KT기지국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또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옥천의 산하(山河)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다.

 

 

 

 

580.7봉을 내려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가 또 하나의 세천공원 갈림길(이정표 : 세천공원 3.9Km/ 만인산 19.0Km/ 식장산 0.9Km)을 지나면 KT기지국이다. 기지국이 점령하고 있는 산봉우리도 역시 등산객들은 들어갈 수가 없다. 이곳에서 독수리봉으로 가려면 기지국을 왼편에 두고 오른편으로 능선을 타야 한다. 기지국을 지나면 곧이어 안부사거리(구절사 1.9Km/ 만인산 18.5Km/ 세천공원 4.0Km/ 식장산 정상 1.4Km, 고산사 2.6Km)가 나오고 이곳에서 능선은 오른편으로 크게 휜다. 맞은편에 보이는 독수리봉에서 자꾸 벗어나는 것 같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능선은 어느 정도 오른편으로 흐르다가 다시 왼편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안부사거리를 지나면 얼마 안 있어 대전옥천경계능선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부터는 오른편에 옥천군 그리고 왼편에 대전시를 끼고 걷게 된다. 능선에 대청호 상수도 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보면 인근에 대청호()가 있는가 보다. 만인산으로 갈라지는 길을 지나면, 우측에 산불이 난 흔적을 볼 수 있다. 좌측 능선으로는 불길이 넘어가지 않았는지 밑동이 탄 소나무들이 능선 우측에 많다. 생김새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나무들인데 아깝다.

 

 

 

 

산불지역을 지나면 오른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능선이 나타난다. 어쩌면 벼랑 위가 508봉일 것이다. 508봉을 넘으면 능선안부에서 세천공원 갈림길(전망대(독수리봉) 0.5Km/ 세천공원 3.9Km/ 고산사 3.5Km, 해돋이전망대 2.3Km, 만인산 18.4Km)을 만나게 되고, 곧이어 옥천의 산하(山河)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전망대에는 막걸리 장사가 좌판을 열어놓고 있다. 하산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냉큼 자리를 잡는다. 막걸리는 한 사발에 2천원, 그런데 이곳은 안주가 좀 특이하다. 멸치에 고추장을 묻힌 다음 참깨를 다시 묻혀 먹는 것이다.

 

 

 

 

 

 

 

전망대에서 그다지 급하지 않는 오르막길을 잠깐 치고 오르면 독수리봉(586.5m)이다. 독수리봉은 헬기장으로 만들어졌는지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이정표(구절사 0.7Km/ 만인산 19Km)와 삼각점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는데, 그 외로움을 달래라도 주려는 듯 이곳에도 역시 막걸리장사가 좌판을 열어놓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또 다시 자리를 잡는다. 역시 충청도의 인심은 후한가 보다. 주인아저씨께 농담을 좀 던졌더니 금방 마늘쫑 안주가 보너스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독수리봉은 탁 트인 조망(眺望)이 압권(壓卷)이다.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옥천의 산하가 정겹기 그지없다  

 

 

 

 

세천공원으로 하산을 하려면 대천옥천경계능선을 따라가면 된다. 여름철 삼복더위에 지쳤을만한데도 능선을 따라 내려서는 발걸음은 가볍기 짝이 없다. 주어진 시간까지 너무 여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아까 주인아저씨 말이 세천공원까지는 1시간 2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산행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4시간이 채 넘지 않았으니 2시간여가 남았다. 여유를 부려도 좋을만한 것이다. 내려가다 계곡에 들어가 산행에서 흘린 땀도 씻고, 유원지에서 간단한 요기까지 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선두대장이 산행코스를 변경해 버린 것이다. 세천공원으로 곧바로 내려가는 직행코스가 아니고, 국사봉을 거쳐 쇠정골로 내려가는 장거리 완주코스이다. 목욕이나 요기는커녕 하산지점에 도착하기에도 벅찬 시간이 되어버렸다.

 

 

 

하산길은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전망대(독수리봉) 0.2Km/ 세천공원 4.0Km/ 구절사 0.5Km)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왼편 세천공원방향이 맞은 게 분명한데, 산악회의 방향표시지가 구절사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두대장의 지시대로 능선을 따라 구절사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구절사 갈림길에서 구절사와 헤어져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진행하면 껄떡이 고개를 만난다. ‘껄떡이고개는 아마 가파른 오르막 고개를 나타내는 깔딱이 고개를 잘못 표기한 것일 게다. ‘로 모음(母音) 하나 잘못 표기한 덕분에 그 뜻은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변해버렸다. 눈치 없이 남의 것이나 넘보는 거지근성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표지판에 독수리봉까지의 거리가 200m로 표기된 것을 보면 아까 지나왔던 갈림길에서 세천공원 방향으로 내려왔을 경우에 이곳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깔딱고개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세천공원 3.4Km/ 세정골 4.1KmKm/ 전망대(독수리봉) 1.0Km. 구절사 0.7Km)를 만난다. 세천공원으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방향표시지는 맞은편 능선으로 오르도록 하고 있다. 세정골로 가는 능선이다. 방향표시지가 지시하는 대로 세정골 방향으로 진행한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더니 커다란 봉우리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국사봉인데 다행이도 산길은 우회로(迂廻路)를 만들어 놓았다. 힘들게 봉우리를 오를 필요가 없어 우회로로 들어섰지만, 사실은 국사봉인줄도 모르고 우회를 했다. 국사봉을 우회하면 산길은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리다가 장고개를 만들어 놓는다. 이곳 장고개에서도 세천유원지로 내려갈 수가 있다.

 

 

 

 

 

 

 

산행날머리는 세천유원지

장고개를 지나서도 세정골로 이어지는 능선은 끊임없이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 오르내림이 제법 크다는 게 문제다. 지쳐버린 몸은 이미 천근만근인데, 능선을 오르는 일이 결코 쉬울 일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어느 갈림길에선 방향표시지마저 보이지를 않는다. 산악회에 전화를 하는 일행의 손놀림이 분주해진다. 결국에는 우연히 만난 노익장(老益壯) 여성 등산객의 안내를 받아 하산 방향을 결정한다. 80세가 넘은 이분이 몇 십 년 동안 식장산을 찾았다니 믿을 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다시 산악회의 방향지시지가 보였던 것이다. 능선은 세정골로 들어가는 지방도에서 끝을 맺는다. 독수리봉에서 이곳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곳에서 산악회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세천유원지까지는 도로를 따라 2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여름철 뙤약볕 아래에서 20분을 걷는 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다. 고민하고 있는데 아까의 나이든 여성분이 손수 운전하는 승용차로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세천유원지까지 우리를 실어다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칠갑산(七甲山, 561m)

 

산행일 : ‘13. 3. 3(일)

소재지 : 충남 청양군 정산면과 장평면, 그리고 대치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천장호 주차장→출렁다리→나무테크 계단→정상→삼형제봉 갈림길→장곡사→장승공원 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가고파산악회

 

특징 : 한마디로 전형적인 흙산(肉山)으로, 산은 참나무 등 울창한 활엽수림(闊葉樹林)과 수십 년생(年生) 소나무들이 꽉 채우고 있다. 산이 별로 높지 않은데다가 특히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어 남녀노소, 초보자 할 것 없이 편안하게 산행할 수 있는 가족 산행지로 적합하다. 그러나 왜 ‘100대 명산’에 꼽혀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경관(景觀)은 보잘 것이 없다. 들머리와 날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천장호의 출렁다리와 천년고찰(千年古刹)인 장곡사가 볼거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천장호 주차장

공주서천고속도로 청양 I.C에서 내려와 39번 국도를 타고 아산방면으로 달리다가 정산면소재지인 서정리사거리에서 36번 국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호(칠갑산 휴게소)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천장호 주차장에서 칠갑산 들머리까지 가려면 먼저 천장호(湖)를 건너야 한다. 이곳 청양군에서는 천장호에 출렁다리를 설치해 들머리까지 건너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주차장에서 출렁다리로 향하는 길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진 데에는 KBS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KBS의 인기 프로그램인 ‘1박 2일’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부쩍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천장호 출렁다리로 향하다보면 길가에 동상(銅像) 하나가 눈에 띈다. 칠갑산을 유명하게 만든 국민가요 ‘콩밭 매는 아낙네’를 형상화한 동상이다. 아마 이곳 청양은 예로부터 물산(物産)이 풍부했었나보다. 콩밭 매는 아줌마가 저렇게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참고로 오늘 오르게 될 칠갑산은 1973년 3월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장곡사라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을 품고 있다.

 

 

 

천장호는 옥같이 맑은 물과 호수(湖水) 위에 비친 칠갑산 경관(景觀)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리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천장호는 맑고 투명해 보인다. 그 호수 위로 멋진 출렁다리가 길게 놓여있다. 출렁다리의 교각(橋脚)이 고추의 형상(形象)을 하고 있는 것은 보면, 이곳 청양이 고추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모양이다. 아니 청양고추의 매운 맛을 한번 보여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서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이 탄성(歎聲)을 질러대고 있다. 다리의 출렁거림에 아찔한 스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다리의 중심부는 30~50cm까지 출렁거린다고 하니 연약한 여성들로서는 괴성을 질러댈 만도 하다. 천장호 출렁다리는 그 길이가 207m에 폭은 1.5m로서 국내에서는 가장 길며, 아시아에서도 세 번째로 긴 출렁다리라고 한다.

 

 

 

 

고추의 모양을 한 이정표가 정겹다. 이 고장의 특산물(特産物)인 고추를 형상화해서 이정표를 만들어 놓았다. 자연스럽게 고장의 특산물을 선전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뛰어난 이정표가 어디 있을까 싶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황룡(黃龍), 좌측으로 호랑이 조형물이 반긴다. 이곳 천장호에 얽힌 전설(傳說)을 형상화 시켜 놓은 것이란다. 천장호에는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 승천(昇天)하려던 황룡이 자신의 몸으로 천장호에 다리를 만들어 아이의 생명을 구하고, 이를 본 호랑이가 영물(靈物)이 돼 칠갑산을 수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 때문에 이곳을 건너 칠갑산에 오르면 황룡과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복(福)을 받고,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칠갑산을 오르면서 이곳을 거쳐 가는 것이라고 한다.

 

 

 

 

칠갑산의 산행은 다리 건너 왼편에 보이는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오르면서 시작된다. 이리저리 갈지(之)자를 만들면서 끝없이 위로 오르던 계단은 마지못해 전망대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천장호가 발아래 펼쳐지는데, 수면(水面) 위에 그려진 산자락은 마치 그림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기만 하다.

 

 

 

 

 

전망대를 지나면 나무테크 계단은 끝이 나고, 대신에 안전로프가 매달려있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있다. 이렇게 가파른 오르막길에서는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다. 시간이라도 급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말이다. 마침 오늘 따라나선 산악회는 하산시각을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넉넉하게 주었다. 서서히 여유를 부리면서 걸으면 어느덧 조그만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정상 3.2Km/ 천장리 0.5Km/ 천장호 출렁다리)로 나뉜다. 왼편은 천장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니 당연히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천장리 갈림길까지 올라오면 오늘 산행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이곳에서 끝을 맺고, 이곳에서 정상까지의 3.2Km 능선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편하면서도 넉넉한 것을 일컬어 ‘어머니의 품’ 같다고들 말한다. 오늘 걷고 있는 산길이 바로 그런 길일 것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은 지루하게 이어진다. 전형적인 흙산인지라 특별한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능선을 꽉 채운 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 또한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아무래도 앙상한 겨울철보다는 나뭇잎이 무성한 계절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만일 눈이라도 수북이 쌓인 겨울철이라면 몰라도... 능선은 가끔 오르내림의 폭이 큰 안부도 만나지만 대부분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완만하게 이어지던 능선이 갑자기 가팔라지더니 정상근처에서 도림리 갈림길(도림리 2.4Km/ 천장호 출렁다리 3.6Km)과 나뉘고, 이어서 곧바로 정상에 올려놓는다. 칠갑산은 삼국시대의 시가(詩歌)인 ‘도솔가’에서 칠악산(漆嶽山)으로 등장하는 등 백제 때부터 신성하게 여겨왔다. 백제의 주요 제천행사를 이곳에서 올렸다 전한다. 이후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으뜸이 되는 갑(甲)자를 써서 칠갑산(七甲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은 한마디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광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널따란 헬기장까지도 부족하여, 가장자리 두어 곳에다 쉼터를 겸한 전망테크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정상은 엄청나게 넓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정상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발붙일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막걸리를 사먹으라고 외치는 소리하며, 라디오 소리, 같이 온 일행을 부르는 소리가 뒤엉킨 정상은 5일장이 선 시장바닥을 연상시킬 정도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오래 머물지를 못하고 바로 하산길을 재촉한다.

 

 

널따란 정상에 올라서면 한가운데 세워진 정상표지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마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랗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석 뒤에는 시산제를 지낼 때 이용하면 제격일 것 같은 제단(祭壇)이 놓여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산악회에서 차려 놓은 제수상이 제법 푸짐하게 벌려져 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쉼터를 겸한 조망테크를 두어 곳 만들어 놓았다.

 

 

정상은 한마디로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근처의 산들은 물론이고 멀리로는 전북 북부지역에 솟은 산들도 볼 수 있다. 홍성과 보령에 걸쳐 있는 오서산은 물론이고 저 멀리 대둔산과 천등산, 그리고 운장산과 미륵산이 당당하게 그 자태를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까이에는 만세봉과 계봉산, 남산과 시루봉, 정혜산과 망월산, 그리고 국사봉과 팔봉산 등이 동서남북의 순서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천년고찰 장곡사를 향해 하산을 서두른다. 도립공원(道立公園)답게 곳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한 가지만 주의한다면 길을 헷갈릴 염려는 없다. 먼저 장곡사가 적힌 이정표(휴양림 6.5Km, 장곡리 5.0Km, 장곡리주차장 4.3Km, 장곡사 3.0Km, 지천리 3.9Km)를 찾은 후에 하산길의 방향을 잡으라는 얘기이다. 하나의 이정표에 여러 방향을 표시하는 다른 곳의 이정표와는 달리, 이곳은 하산길마다 각각의 이정표(천장호 방향/ 장곡사 방향/ 칠갑광장 방향)를 별도로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상에는 이정표가 세 개나 세워져 있다.

 

 

 

하산길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하긴 산이 나지막하다보니 서둘러 고도(高度)를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장곡사로 내려가려면 삼형제봉으로 향하는 주능선을 타고 5분쯤 내려가다 삼거리(삼형제봉 1.0Km, 장곡리 4.7Km/ 장곡사 2.6Km, 휴양림 6.1Km/ 정상 0.25Km)에서 오른편 지능선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장곡사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 능선의 오르내림이 깊어지면서 경사(傾斜) 또한 아까보다는 가팔라진다. 그러나 오르내리는데 힘이 들 정도는 아니다.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봉우리를 만날 경우에는 어김없이 산길이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나무계단이나 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정상을 출발해서 2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능선안부에서 장곡산장 갈림길(장곡산장 2.0Km/ 장곡사 2.6Km/ 장곡사 1.7Km/ 정상 1.3Km)과 나뉘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20분 조금 넘게 진행하면 이번에는 휴양림 갈림길(휴양림 4.0Km/ 장곡사 주차장 1.8Km/ 정상 2.5Km)을 만나게 된다. 물론 이곳에서는 장곡사주차장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휴양림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어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장곡사(長谷寺)가 산자락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장곡사는 우리나라에서 대웅전(大雄殿)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절이다. 그리고 절마다 한두 개쯤은 솟아 있는 탑(塔)이 전혀 없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두 개의 대웅전이 동남향과 서남향으로 방향만을 달리한 채 비탈길 위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위쪽은 '상대웅전', 아래쪽은 '하대웅전'이라 불린다.

**) 장곡사(長谷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寺刹)로서 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웅전(大雄殿)을 두 개나 갖고 있는 독특한 절인데, 어떤 이유로 두 개의 대웅전이 들어서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약사여래도량(藥師如來道場)의 뛰어난 기도 효험으로 인해 찾는 사람들이 늘자, 그들을 수용할 공간 확보를 위해 대웅전 하나를 더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장곡사에는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文化財)도 적지 않다. 상·하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보물이다. 상대웅전(上大雄殿)은 보물 제162호, 그리고 하대웅전(下大雄殿)이 보물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상대웅전의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국보 제58호)와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鐵造毘盧遮那佛坐像附石造臺座, 보물 제174호), 그리고 하대웅전의 금동약사여래좌상(金銅藥師如來坐像)과 장곡사미륵불괘불탱(長谷寺彌勒佛掛佛幀, 국보 제300호)이 바로 그것이다.

 

 

 

옛 절이 다 그렇듯 장곡사 역시 현재의 규모는 작다. 전해져 내려오는 절의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은 것이다. 과거 스님들이 밥통으로 사용했다는 거대한 느티나무 ‘구유’만이 옛 규모를 짐작케 할 따름이다. 산비탈에 들어앉은 절터는 한눈에 봐도 협소하지만 지리적 조건을 절묘하게 이용해 당우(堂宇)들을 배치한 옛 스님의 안목이 감탄스럽다. 장곡사 앞자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은 아흔아홉 굽이를 휘휘 돌아내린다 해서 ‘아흔아홉계곡’이라 불린다. 이 골짜기는 곧 지명(地名)이 되고 절집 이름이 됐다.

 

 

 

 

산행날머리는 장승공원 앞 주차장

장곡사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10분 조금 넘게 걸어 내려오면 일주문을 지나 집단시설지구(集團施設地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장곡사에서 내려오는 길목에도 음식점이 두어 곳 들어서 있으니 집단이라는 낱말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집단시설지구의 광장에 이르면 또 하나의 ‘콩밭 매는 아낙네’ 동상(銅像)을 만나게 되는데, 이번 것은 앉아서 콩밭을 매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동상의 아래편 광장(廣場)은 장승공원이 차지하고 있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모습에다 크기도 다양한 장승들이 갖가지 표정으로 한데 모여 있는 독특한 공원이다. 세워져있는 장승들은 전래(傳來)된 장승들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으로 조형해낸 현대식 장승들이 많다.

 

 

 

 

광덕산((廣德山, 699.3m)-망경산(600m)

 

산행일 : ‘12. 9. 15(토)

소재지 :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과 아산시 송악면, 배방면의 경계

산행코스 : 광덕사주차장→광덕사→헬기장→광덕산 정상→장군바위→설화산 갈림길→망경산→수철리(산행시간 : 앉아서 쉬는 시간을 뺄 경우 3시간20분)

함께한 산악회 : 나홀로

 

특징 : 산이 높지 않을뿐더러, 전형적인 흙산(肉山)으로 이루어져 부담 없이 오르내릴 수 있는 산이다. 특히 망경산까지 연계할 경우 고도(高度)의 차이가 거의 없는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족단위 산행에 잘 어울린다. 인접도시인 천안과 아산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탓에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난다. 다만 광덕산만 단독으로 오를 경우 산행코스가 너무 짧기 때문에 망경산과 연계(連繫)시켜야 하는데, 망경산에서 하산할 경우에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하다는 것이 하나 아쉬운 점이다.

 

 

산행들머리는 광덕사 주차장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남천안 I.C를 빠져나와 1번 국도(國道: 대전방향)를 4Km쯤 달리다가 소정면소재지(面所在地)에서 우회전하여 지방도(923번:?)를 타고 풍세면소재지(面所在地)까지 3Km정도를 들어간다. 면소재지인 풍서리에서 좌회전 923번 지방도(풍서교차로)를 따라 사곡면 방향(좌회전)으로 달리다가, 광덕산휴계소 앞에서 오른편(618번 지방도)으로 접어들면 조금 후에 광덕사 앞에 있는 널찍한 주차장(駐車場)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잠깐 올라가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광덕사 진입로(이정표 : 광덕사 0.3Km)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광덕사 방향으로 걷다보면 맨 먼저 광덕사의 대문인 일주문(一柱門)이 손님을 맞는다. 그런데 문(門) 위에 걸려있는 간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광덕사의 뒷산은 분명히 광덕산으로 알고 있는데, 간판에는 태화산(泰華山)으로 적혀있는 것이다. 아마도 광덕산의 옛 이름이 태화산이었나 보다. 일주문 옆에는 호두나무 설명판을 겸한 산행안내도와 천안소방서에서 세운 산악위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에 안양암(安養菴)이 보인다. 안양(安養)이라함은 극락(極樂)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극락전(極樂殿) 앞에 있는 건물에다 안양루(安養樓)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안양암의 대문은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독특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절들은 대문을 겸한 별도의 전각(殿閣)을 짓고 그 안에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안치한다. 그리고 불자(佛者)들로 하여금 사천왕상 사이를 통과해서 경내(境內)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앙암은 그런 전각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경내로 들어가는 대문에다 사천왕상 비슷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대문의 오른쪽 귀퉁이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문을 밀고 들어가면 바로 경내이다. 안양암은 대문과 일직선상에 주불전(主佛殿)인 극락전을 배치하고 좌우에 대칭으로 요사(寮舍)를 배치해 놓았다. 이곳 안양암이 비구니들의 수행암자(修行庵子)라고 했으니, 전형적인 수행처(修行處)의 건물배치 방식이 아닐까 싶다.

 

 

 

보화루(普化樓)의 누각 아래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大雄殿) 앞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보화루 건물 과 직선의 위치에는 대웅전이 터를 잡았고, 대웅전과 보화루를 잇는 직선의 오른편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의 오른편에는 지장보살과 열시왕(十大王 : 저승의 재판관)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冥府殿)이 보인다. 마당 오른쪽에 보이는 전각(殿閣)은 생김새로 보아 종무소와 공양간일 듯 싶다.

* 광덕사(廣德寺), 신라 진덕여왕(652년) 때 진산(珍山)스님이 창건했다. 자장(慈藏)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와 사리 등을 그에게 주어 새로운 도량(道場)을 열게 했다는 것이다. 한 때는 90개 가까운 부속암자를 거느렸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명맥만 이어오다 선조 32년의 중수(重修)와 1980년대의 신․증축(新․增築) 과정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文化財)로는 광덕사 고려사경(금은자법화경 : 보물 제390호)과 광덕사 조선사경(부모은중경 : 보물 제1247호), 그리고 ‘광덕사 삼층석탑’ 등 다수의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안양암을 지나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극락교(橋)를 건너면, 정면에 2층 구조의 보화루(普化樓)가 보인다. 보화루 앞에 아주 거대(巨大)하면서도 오래 묵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있으니 이 나무가 국내 호두나무의 최고령 나무로 알려진 광덕사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이다. 밑동의 굵기는 어른의 팔로 서너 아름은 족히 넘고, 위에 벌어진 가지의 굵기도 한 아름으로는 어림도 만큼 거대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선입견(先入見) 때문인지는 몰라도, 밑동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의 위로 군살 박힌 시골노인의 손바닥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다.

* 호두는 마치 복숭아(桃)처럼 생긴 것을 중국 호(胡)나라에서 가져왔다고 해서 호두(胡桃)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호두의 원산지는 페르시아로 추정되는데, 고려 말 충렬왕 때 이곳 출신인 류청신(柳淸臣)이란 역관이 사신들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면서 들여왔단다. 그는 가져온 3그루의 묘목(苗木)과 5개의 종자(種子)를 고향인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 부근에 심거나 파종(播種)했고, 그때부터 천안은 국내 최초의 호두 생산지인 동시에 주산지(主産地)가 되었다. 수령(樹齡)이 4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호두나무는 어쩌면 류청신이 심었다는 원조(元祖)나무의 아들쯤 되는 항렬이지 않을까?

 

 

광덕사 왼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광덕사의 담벼락을 벗어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개울을 건너 조금만 더 들어가면 광덕사를 들르지 않고 곧장 올라오는 주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주차장에서 300m지점) 등산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으로 가면 헬기장을 거쳐 정상에 이르게 되고, 오른편은 장군바위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광덕산 정상만을 둘러보려고 한다면 어느 길을 선택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오른편 장군바위 코스를 이용해 정상에 올라갈 경우에는 내려올 때 헬기장 코스를 이용하면 되고, 아니면 그 반대방향으로 진행해도 결과는 똑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경산이나 태화산, 또는 설화산 등을 광덕산과 연계할 경우에는 왼편 헬기장코스를 이용해야만 한다.(이정표 : 헬기장 1.4Km/ 장군바위 2.1Km)

 

 

 

 

장군바위 갈림길을 지나면 산길은 잠깐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나무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계단을 보면 관계자들의 사려(思慮) 깊은 결정을 엿볼 수 있다. 각 계단의 폭과 높이가 한 걸음에 계단 하나씩 밟고 오르기에 적당하게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계단은 오르고 또 올라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은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끝이 안보이도록 이어지던 가파른 계단이 끝나면 팔각정(八角亭)이 있는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이정표 : 정상 1.3Km/ 주차장 1.5Km). 주차장에서 곧바로 능선을 탈 경우에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물론 능선을 넘으면 해사동으로 내려가게 된다. 정자(亭子) 앞에는 젊은 여자 둘이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공동체 가정’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고 있단다. 그리고 앞에는 모금함과 함께 식수(食水)통이 놓여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잠깐 걸음을 멈추고 목을 축이고 가라는 친절인 모양이다. 거기다가 아름다운 음악까지 듣는다면 이까짓 피로(疲勞)쯤이야 금방 없어져 버릴 것이다. 모금함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넣고서 후다닥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더 넣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다.

 

 

 

이은상 선행의 ‘산악인의 선서’가 새겨진 빗돌의 뒤로 산행을 이어간다. 길은 곱지는 않지만 두세 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랗다. 5분 조금 못되게 올라서면 제법 널따란 묘역(墓域)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너덜길과 통나무 계단길을 힘들게 올라서면 헬기장이다(이정표 : 정상 0.6Km/ 주차장 2.3Km). 헬기장은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는 듯, 산행안내도와 벤치를 갖춘 쉼터로 바뀌어져 있다.

 

 

 

헬기장에서 잠깐 내려선 산길은 완만(緩慢)한 계단길로 오르막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엉성한 돌무더기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 버린다.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다행이도 길가에 난간과 하얀 로프가 매어져 있기 때문에 붙잡고 오른다면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남짓이면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이정표 : 망경산 4.3Km, 넋티고개 5.8Km/ 외암마을 8.8Km/ 설화산 8.7Km, 배방산 13.0Km)

 

 

 

 

광덕산 정상은 헬기장으로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널따란 분지(盆地)이다. 아니 요즘도 헬기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 가운데는 보도블럭을 깐 공터로 남겨 놓고, 공터의 둘레에다 정상표지석과 산행안내도, 그리고 '광덕산에 올라'라는 시비(詩碑)와 쉼터 등을 조성(造成)해 놓았다.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조망(眺望)이 잘 터진다. 북서쪽 발아래에는 송악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오른쪽에는 ‘39번 국도’와 아산시가 또렷하다. 북동쪽에는 망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너머에 천안시가 희미하고, 남으로는 무성산이, 그리고 남서쪽에 위치한 갈재고개 너머 멀리 첩첩(疊疊)이 쌓여있는 능선들은 아마 금북정맥일 것이다. 그런데 광덕산이 인근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기 때문일까? 광덕산 정상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정상을 살짝 비켜난 숲속에는 막걸리를 파는 좌판이 벌여져 있고, 정상의 너른 공터에 무리지어 앉은 사람들 앞에는 어김없이 술병들이 수북하다. 옛날 우리가 보아오던 사랑방 풍경(風景)이 자연스럽게 오버랩(overlap)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歸結)일 것이다.

 

 

 

광덕산을 처음 찾는 사람들이라면,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이곳 천안과 아산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산이구나.’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알록달록한 차림의 등산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인파(人波)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일 따름이다. 정상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 인파(人波)로 넘치고 있다. 정상 옆의 능선에 자리 잡은 막걸리 좌판은 술꾼들로 소란스럽고, 시장바닥을 연상시키는 북적거림은 정상표지석까지도 점령해 버렸다. 광덕산은 아마 이 지역사람들에게는 사랑방쯤 되는 모양이다. 사랑방이라는 게 원래 이웃들 특히 동년배들끼리 모여 희로애락(喜怒哀樂)를 주고받던 곳이기 때문이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노랗고 빨간, 그리고 어떤 때는 파란 원색(原色)의 등산복들이 끊이지 않고 꼼지락거리고 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르내리는 무리들은 아마 동년배(同年輩)들 아니면 가족들끼리일 것이다.

 

 

 

망경산으로 진행하려면 북동릉을 타야한다. 이 능선을 타고 5분 남짓 내려가면 멱시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약수터갈림길이다(이정표 : 광덕산 정상 0.3Km/ 장군바위 0.9Km/ 멱시마을 2.2Km).

 

 

 

 

정상을 출발한지 20분 조금 넘게 걸으면 능선이 푹 꺼지는 안부에서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이는데, 바위 주변에는 등산객들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휴식(休息)을 즐기고 있다. 이곳 광덕산의 명물(名物)로 알려진 장군바위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속담(俗談)이 있다. 장군바위에 딱 어울리는 속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군바위는 그 크기나 생김새가 보잘 것이 없다. 어쩌면 전형적인 흙산인 광덕산 권역에서 돌출된 암괴(巖塊)라는 의외성 때문에 명물대접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허약한 젊은이를 장군(將軍)으로 만들었다는 영험(靈驗) 때문이지 장군바위의 아래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제단(祭壇)이 여러 곳에 보였다. 장군바위 안부는 사거리로서 하산지점을 광덕사로 잡았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장군바위 이정표 : 광덕산 정상 1.2Km/ 장군약수터 0.3Km, 멱시마을 2.0Km/ 망경산 3.1Km, 설화산 7.8Km, 배방산 11.8Km).

 

 

 

 

장군바위를 우회(迂廻)하여 반대편 능선으로 올라서면 오른편 방향에 ‘부용묘’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보인다. 아마도 조선(朝鮮) 최고의 여류 시인(詩人)이라고 알려진 김부용(金芙蓉)의 묘(墓)가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김부용은 정조 때의 기생으로 호는 운초(雲楚), 유고집(遺稿集)으로 일제강점기에 김호신이 편찬한 운초집(雲楚集)이 전해지고 있는데,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그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기생이 된 뒤, 평안감사 김이양의 소실이 된 한 많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난 운초의 묘(墓)가 여기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몸을 의탁했다는 김이양의 본향(本鄕)이 이 근처가 아니었나 싶다.

 

 

 

장군바위에서 망경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고저(高低)의 차이가 심하지 않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20분 남짓 걸으면 ‘마늘봉 쉼터(이정표 : 장군바위 1.0Km, 광덕산 2.2Km/ 망경삼거리 0.8Km, 망경산 2.0Km, 설화산 6.5Km)를 지나게 되고, 또다시 20분 정도 더 걸으면 망경봉 삼거리이다(이정표 : 장군바위 1.8Km, 광덕산 3.0Km/ 망경산 1.2Km, 배방산 10.0Km/ 설화산 5.7Km). 등산로 주변은 온통 참나무 일색, 산길은 간혹 너덜이 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부드러운 흙길이다. 장군바위를 출발해서 지금까지 주변의 경관은 거의 변화를 주지 않고 이어진다. 주변의 경관(景觀)을 제대로 가슴에 담을 여유도 없는데 다행이다. 장군바위에서 만나 함께 걷고 있는 이 지역(아산시) 등산객의 발걸음이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다. 나를 걱정해서 서서히 걷고 있다는데도 따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망경산 갈림길에서 걷기에 편한 산길을 따라 500m정도 걸으면 안부에서 이정표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정표가 좀 괴이(怪異)하다. 이정표에는 분명히 현재 위치를 ‘만복동 갈림길’이라고 표기(標記)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만복동으로 가는 방향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문은 금방 풀리게 된다. 등산로 오른편 나무에 ‘만복사’와 ‘만복골’의 방향표시를 한 나무판자(板子)가 붙어있는데, 그쪽 방향으로 난 등산로가 길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급적 만복골 방향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의미인가 보다. 물론 나무에 매달려있는 이정표는 개인이 만들어 붙인 것이다.

 

 

 

‘만복동 갈림길’ 안부에서 뚝 떨어졌던 능선은 망경산 정상을 향하여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런데 그 오르막길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제법 가팔라서 숨을 깔딱이게 만들고 있다. 갑자기 오르막으로 변한 길이 다소 힘들지만, 남은 거리가 700m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만복동 갈림길에서 15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드디어 만경산 정상이다.

 

 

 

만경산 정상은 광덕산과 마찬가지로 넓은 분지(盆地)로 된 헬기장이다. 정상표지석도 역시 가운데에서 광덕산 방향으로 약간 비켜나 세워져 있다. 다만 광덕산과 다른 점이라면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잡목(雜木)들 때문에 광덕산보다 조망(眺望)이 시원치 않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정상표지석 뒤에 풍향(風向)을 보기위한 측풍기(測風器)가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아마 행글라이딩(hanggliding)의 활강장(滑降場)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나 싶다. 망경산 정상은 생김새만 광덕산과 비슷하지 분위기는 영 딴판이다. 시장바닥을 연상시키던 광덕산과는 달리 산이 텅 비어있는 것이다. 이곳 망경산까지 오는 동안 등산객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널따란 정상도 역시 고작 세 사람이 전부이다. 등산객 두 사람과 산상주막(山上酒幕) 주인장 한 명이 전부일 따름이다. 마침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사람을 아는 듯, 장군바위에서부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었던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두 사람 모두 매주 산을 오르는 등산 애호가이고, 그 덕분에 오래전부터 친분을 나누는 사이인 모양이다. 그들의 분위기에 이끌려 슬그머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리고 술잔을 주고 받다보니 무려 두 시간을 넘겨버렸다. 물론 주막의 막걸리도 동이 난건 당연한 일이다.

 

 

 

망경산에서의 하산길은 모두 세 가지가 있다. 광덕산에 방향을 뒤로 놓고 볼 때, 헬기장의 왼편 끝이 수철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공예마을길, 직진하면 넋티고개를 거쳐 태화산으로 가는 길이다. 나머지 하나는 물론 광덕산 방향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려가고자 하는 수철저수지 방향에는 이정표가 없다는 것이다. 별수 없이 지도(地圖)로 방향을 읽은 다음, 산악회의 리본이 매어있는 곳으로 내려서면서 하산을 시작한다.(망경산 정상의 이정표 : 넋티고개 1.5Km, 태화산 3.8Km, 배방산 8.8Km/ 광덕산 4.2Km, 설화산 6.9Km)

 

 

 

 

하산길은 의외로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다. 거기다 부드러운 흙길이다 보니 걷기에 여간 편한 게 아니다. 그러나 울창하게 우거진 참나무 숲 아래로 이어지는 산길의 분위기는 변할 줄 모른다. 길가에 간간히 보이는 버섯과 들꽃을 감상하며 20분 정도 걸으면 능선을 가로지르는 수철리 임도(林道)가 나온다.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도로 건너편에 세워진 정자(亭子)가 보이고, 산길은 정자의 뒤편으로 이어진다.(이정표 : 망경산 1.1Km/ 호수마을 1.3Km)

 

 

 

정자를 지나면서 소나무가 서서히 개체(個體)의 수(數)를 늘려가더니, 언제부턴가 온통 소나무 천국으로 변해있다. 코끝을 간질이는 소나무 향기에 산행을 하며 쌓였던 피로가 눈 녹은 듯이 사라져 버린다. 역시 피톤치드(phytoncide)의 약효(藥效)는 대단한가 보다. 솔향에 취해 걷다보면 천관사갈림길(날마루 1.1Km/ 망경산 1.3Km)과 호수마을 갈림길(날마루 0.6Km/ 호수마을 0.5Km/망경산 1.8Km)을 만나게 된다. 두 갈림길에서 모두 날마루 방향으로 진행한다.

 

 

 

 

 

산행날머리는 날마루

호수마을 갈림길을 지나면서 길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길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잡초(雜草)로 우거져 있다. 등산객들이 이 코스 보다는 호수마을 코스를 선호(選好)하는 모양이다. 하긴 이곳을 답사(踏査)하기 전에 검색해본 대부분의 산행기에 ‘산행 날머리’가 수철저수지로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호수마을은 수철저수지 위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말인가 보다. 하산을 시작한지 50분 가까이 되면 호수마을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인 날마루 입구(이정표 : 호수마을 0.4Km/ 망경산 2.4Km, 광덕산 6.2Km/ 태화산 6.2Km)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약 1Km만 걸어 나가면 923번 지방도가 지나는 수철리이다. 이곳에서 아산으로 나가는 시내버스는 1시간에 1대(매시 20분), 3Km를 더 걸어야 나오는 맹씨고택(古宅)에서는 20분마다 1대 꼴로 시내버스가 다닌다.

 

 

 

 

금요일과 토요일 양일간에 걸쳐 세미나가 열렸던 덕산의 '리솜 스파캐슬', 토요일의 세션은 관심 밖이어서 광덕산에 다녀왔다.

 

가야산(伽倻山, 678m)

 

산행일 : ‘12. 9. 8(토)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과 예산군 덕산면, 봉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상가리 주차장→남연군墓→관음전→옥양봉(玉陽峰, 621.4m)→석문봉(石門峰)→가사봉(677.6m)→너덜계곡→상가저수지→상가리 주차장(산행시간 : 쉬는 시간 없이 3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나홀로

 

특징 : 가야산은 옥양봉과 석문봉, 그리고 주봉(主峰)인 가사봉 등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 동안 가사봉 정상의 통행(通行)을 금(禁)하고 있었던 탓에 웬만큼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라면, 옥양봉과 석문봉만 둘러보도록 코스를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만일 코스가 너무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일락산을 포함시켰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최근 가사봉의 통신시설 옆으로 나무테크 계단을 만들어 놓은 이후에는 가사봉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가야산을 이루고 있는 세 봉우리들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덕산면 상가리 주차장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를 빠져나와 45번 국도(國道:예산 방면)와 40번 국도(수덕사교차로에서 함덕 방면으로)을 번갈아 타고 가다, 덕산면소재지(面所在地)에서 좌회전하여 가야산로(路)를 따라 들어가면 옥계저수지를 지나 산행들머리인 상가리 주차장에 닿게 된다. 상가리 주차장 입구에는 ‘대형차량 주차장’이라고 적혀있으나. 승용차도 이곳에 주차를 시켜야만 한다. 주차장 위에로는 마땅히 차를 세울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변에 무단으로 주차할 경우에 과태료(過怠料)를 매기겠다는 예산군수의 서슬이 시퍼런 경고판이 곳곳에 붙어있어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마땅히 주차할 장소를 찾지 못한다.

 

 

 

주차장에서 상가리 방향으로 난 널따란 도로(道路)를 따라 올라가다 왼편에 보이는 길로 접어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평소에도 차량통행이 빈번(頻繁)할 정도로 길이 넓을 뿐만 아니라, 들머리에 ‘주차금지’ 경고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산행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지나치게 되는 곳이 남연군묘(墓)이다. 주차장에서 약 5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데, 하산길에 묘역(墓域)을 통과하게 되므로 서둘러 답사할 필요는 없다. 남연군묘 입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가야산을 오르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왜냐하면 왼편 남연군묘 방향의 길로 진행할 경우, 얼마 안가서 다시 석문봉으로 가는 길과 가사봉으로 가는 길이 나뉘기 때문이다. 앞에 가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오른편의 옥양봉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옥양봉에서 시작해서 석문봉과 가사봉을 한꺼번에 다 둘러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사봉을 먼저 올라도 세 봉우리를 다 둘러볼 수 있는데도 굳이 옥양봉을 먼저 오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체력(體力)이 안 될 경우에는 세 봉우리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데, 그 포기할 대상을 옥양봉 보다는 가사봉을 선택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만큼 가사봉 정상은 조망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연군묘 갈림길에서 비좁은 시멘트 포장도로(道路 : 실제로 차가 다니는 도로이다)를 따라 7분정도를 걸으면 작은 식당촌을 지나면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이정표 : 석문봉 2.03Km/ 옥양봉 2.0Km). 왼편으로 진행하면 옥양폭포(瀑布=옥녀폭포)를 거친 후, 옥양봉과 석문봉 사이의 안부에 이르게 되고, 옥양봉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으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석문봉갈림길을 통과해서 얼마간 더 걸으면 길은 계곡길과 능선길로 나뉜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옥양봉으로 가게 되나. 능선길로 접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계곡길보다는 능선길의 조망(眺望)이 한수 위이기 때문에, 볼거리가 많은 능선길을 선호(選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계곡갈림길을 지나 짙은 소나무 숲 아래를 걷다보면 작은 쉼터가 보인다. 관음전갈림길이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고 조금 후에는 다시 만나게 되니 고민할 필요는 없다.

 

 

 

관음전(觀音殿) 갈림길에서 관음전을 향해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가야산의 옥양봉과 석문봉 일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절로 알려진 관음전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원래 이 일대에는 가야사를 위시해서 크고 작은 절이 무수히 많아 절골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많던 절들이 다 없어져버리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절이라는 정보(情報)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온 보람도 없이, 관음전은 의미 있는 볼거리가 전혀 없는 조그만 암자(庵子)일 따름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숲속에 웅크리고 있는 관음전은 작고도 초라했다. 다만 암자의 앞마당에 서면, 덕산면의 들판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것이 웬만한 전망대(展望臺) 이상이다.

 

 

 

등산객들은 관음전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등산로가 끊겨버린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그냥 요사(寮舍)채의 처마 아래를 통과하면 된다. 요사채의 왼편 언덕에 이곳이 등산로임을 알려주는 팻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요사채 앞을 지나가더라도 선방(禪房) 안에 있는 스님은 내다보지 않을뿐더러, 매어있지 않은 개도 달려들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관음전에서 산의 사면(斜面)으로 난 산길을 따라 잠깐 걸으면 아까 삼거리에서 헤어졌던 주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이정표 : 옥양봉 420m/ 하산로 580m/ 관음전 50m)

 

 

 

 

주 등산로와 만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힘들게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는 듯, 곳곳에 통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았고, 가파른 바윗길에는 어김없이 밧줄을 매어 놓았다. 주 등산로를 만나서 15분 정도를 힘들게 오르면 쉰길바위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바위의 높이가 어른의 키로 쉰(50)길 정도 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모양이다. 쉰길바위 위는 뛰어난 전망대이니, 발걸음을 서두르기보다는 잠시 쉬면서 덕산방향의 조망(眺望)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쉰길바위에서 옥양봉 정상까지는 지척(咫尺)이다. 쉰길바위 보다 조금 위에 있는 또 하나의 전망대를 거쳐 정상까지는 서서히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하다. 옥양봉 정상은 의외로 볼품이 없다. 숲으로 가려있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을뿐더러, 그 흔한 정상표지석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이정표를 겸하고 있는 산행안내도까지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지도 모르고 그냥 통과해버리는 경우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하게 1시간이 지났다. 조망은 정상에서 조금만 비켜나면 해결된다. 정상에서 오른편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멋진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그리고 시야(視野)가 활짝 열린다. 북쪽으로는 당진, 그리고 서쪽에는 서산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있다.

 

 

 

 

석문봉으로 가기위해서는 옥양봉에서 남서쪽 능선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석문봉으로 방향을 틀면, 맨 먼저 눈에 들어는 것이 아래를 향해 길게 늘어진 나무계단이다. 석문봉 방향이 날카로운 암벽(巖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계단을 이용해서 아래로 내려가도록 한 것이다. 계단은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아직까지 사람의 손때가 타지 않은 채이다. 예산군에서 대대적으로 등산로를 정비하고 있는 듯, 산행을 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서 안전시설을 설치하는 공사현장을 만날 수 있었다.

 

 

 

나무계단에 올라서면 진행방향 정면에 석문봉이 가까이 다가와 있고, 그 뒤에 보이는 가사봉은 ‘나도 여기 있다’는 듯이 손짓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계단 근처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 소나무들이 하나 같이 아름답다. 한 뿌리에 여러 그루가 뻗어 나오는 등 정원에 옮겨다 놓아도 충분할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15분 정도 내려서면 안부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산길은 갑자기 걷기에 편안해진다. 흙길로 변한 능선이 보너스(bonus)로 고저(高低)의 차이까지 없애버린 것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듯이 인간의 삶이란 항상 좋을 수도, 그렇다고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 걷는 산길도 마찬가지이다. 길이 걷기에 편할 정도로 고와졌으나, 대신에 등산로 주변에 꽉 찬 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이 막혀버린 것이다. 앞만 바라보고 걷는 지루한 산행이 이어진다. 옥양봉을 출발해서 15분 정도 지나면 왼편에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인다(이정표 : 석문봉 0.9Km/ 옥양봉 0.5Km/ 주차장 2.68Km). 이 길로 내려가면 아마 옥양봉을 올라올 때 지났던 계곡갈림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돌탑(石塔)이 있는 봉우리와 통신시설이 있는 능선을 지나는 등 조망이 트이지 않는 능선길이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석문봉까지의 거리(1.5Km)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덕분에 지루한 산길이 싫증날 즈음이면 옥양폭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되고(이정표 : 석문봉 0.1Km/ 옥양봉 1.4Km/ 주차장 3.19Km), 이곳에서 정상은 5분도 채 되지 않는다. 옥양봉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일락산으로 가게 된다. 옥양봉에서 석문봉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석문봉 정상은 바위봉우리로서 마치 커다란 바위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이 생겼다. 맨 위에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태극기(太極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가야산의 정상은 온통 바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앉는 곳이 어디이든 앉는 곳마다 의자이고 쉼터일 것이다. 그러나 예산군에서는 정상에다 벤치까지 만들어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다. 그들의 정성이 고마울 따름이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정상에 세워져 있는 돌탑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돌탑이 세워진 자체가 아니고, 돌탑을 새운 의미가 눈에 거슬린다. 해미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종주(白頭大幹 縱走)를 기념해서 쌓은 탑(塔)이라는데, 요즘은 백두대간 종주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정도로 흔해졌을 뿐만 아니라, 지역 동호인산악회(同好人山嶽會)의 자축기념물(自祝記念物)을 모셔두기에는 가야산이 너무 뛰어난 산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다. 바위봉우리의 전형적(典型的)인 특징이다. 거기에다 이곳 가야산이 충남 해안에 솟은 산중에서 오서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기 때문에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조망이 트일 수 있는 것이다. 진행방향에는 원효봉과 가사봉이 보이고, 발아래에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간월호와 A지구방조제, 그리고 천수만과 안면도가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다.

 

 

 

석문봉에서 가사봉으로 가는 능선은 아기자기한 암릉의 연속이다. 위험한 바위봉우리는 우회(迂廻)하면서 남쪽 능선을 따라 20분쯤 내려가면 남연군묘역으로 내려가는 길과 나뉘는 갈림길이 나온다. 가야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산을 내려간다. 하지만 난 가사봉까지 다녀올 것을 권하고 싶다. 만일 가사봉이 별로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가사봉에서 4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하산을 하면 될 것이다. 그만큼 석문봉에서 가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은 안전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으면서도 바윗길 특유의 스릴(thrill)을 제공해준다. 거기에다 암봉 위로 올라설 때마다 좌우(左右)로 툭 터지는 조망은 가야산 산행의 백미(白眉)이다.

 

 

 

 

 

가야산의 주릉(柱稜), 특히 석문봉과 가사봉 사이에 솟아오른 봉우리들은 모두 조망(眺望)이 좋다. 동쪽에는 홍성의 용봉산이 건너다보이고, 남서쪽에는 천수만이 넓게 펼쳐지고 있다. 남쪽에 우뚝 솟아오른 가사봉 너머에는, 수덕사를 품은 덕숭산을 위시해서 수많은 연봉(連峰)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쪽의 석문봉 너머에는 일락산이 가까운데, 그 아래에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인 개심사가 자리 잡고 있다.

 

 

 

가야산 산행의 가장 빼어난 점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능선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이라고 할 수 있다. 백두대간의 속리산(천황봉, 1058m)에서 갈라져 나온 금북정맥이 서해로 빠져 세력을 다하기 전, 남은 힘을 쏟으면서 빚어 놓은 산이 가야산(伽倻山, 678m)이다. 비록 높이는 600m급에 불과하지만 서해(西海)에서 가까운 내포평야에 우뚝 솟아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도(高度)가 높아 보인다. 때문에 사방으로 조망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내포지방 최고의 전망대(展望臺)가 된 것이다

* 금북정맥(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俗離山) 청황봉에서 갈라져 나와 충청북도 북부를 동서로 가르며 안성에서 칠장산(七長山, 492m)을 이룬 후, 서남쪽으로 방향을 뱡향을 바꿔 태안반도 안흥의 주화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이르는 옛 이름이다. 속리산에서 이어지는 산맥(山脈)이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데, 속리산에서 칠장산까지 구간은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라고 불린다.

 

 

 

석문봉에서 가사봉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리는데, 능선의 곳곳에 암봉들이 솟아있고 암봉에는 간혹 위험한 구간도 나타나기 때문에, 등산객들이 많을 경우 시간이 지체(遲滯)될 수도 있다. 능선을 걷다가 심심찮게 나타나는 봉우리에 올라서면 조망이 좋다. 연암산과 그 너머로 천수만과 서해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서쪽으로는 상가저수지와 서해안고속도록, 그리고 해미읍내가 잘 조망된다. 석문봉을 출발해서 1시간 가까이 지나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가사봉을 들르지 않고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체력(體力)이 소진(消盡)된 사람이나, 조망에 싫증난 사람들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된다.(이정표 : 가야봉 0.42Km/ 석문봉 1.23Km/ 주차장 3.19Km)

 

 

 

 

가사봉은 통신시설(通信施設)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등산로는 나무계단을 이용해서 통신시설까지 길게 오른 후, 곧바로 나무계단을 이용해서 왼편으로 내려가도록 되어있다. 그런 다음 통신시설을 우회(迂廻)해서 건너편 지능선에 내려놓는다. 때문에 정상에 올라봐야 조망 외에는 다른 볼거리가 없다. 조망이야 능선을 걸어오면서 실컷 보았기에 정상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하산을 서두른다.

 

 

 

 

 

 

가사봉에서의 하산길은 그야말로 난코스이다. 초반부터 너덜길,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른 너덜길이 이어진다. 그렇게도 등산로 정비에 신경을 쏟던 예산군청이 이 코스는 아예 정비를 포기해 버린 모양이다. 로프나 계단 등 안전시설이 일절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철에 이 코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내려오면 오른편에 헬기장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이정표 : 헬기장 2.88Km/ 상가리주차장 0.83Km/ 가야봉 1.15Km). 가파른 내리막길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이용하는 코스로서, 가사봉에서 원효봉으로 진행하다가 중간지점에 있는 헬기장에서 하산하는 코스이다. 헬기장갈림길에서부터 길은 넓어지면서 또한 순해진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계곡을 세 번 정도 건너다보면 왼편에 상가저수지가 보이고, 저만큼 아래에 남연군묘역이 바라보인다.

 

 

 

 

상가저수지를 빠져나오면 석문봉에서 내려오는 널따란 길과 만나게 된다. 등산객들이 하나 둘, 눈에 띄지 시작하는 것은 하산코스를 이곳으로 잡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갑자기 넓어진 도로를 따라 잠시 내려오면 오른편에 자그마한 한옥(韓屋) 한 채가 보인다. ‘남은들 상여막’이라고 한다. 옆면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벽 너머에 상여 하나가 놓여 있는데, 남연군의 시신을 운구(運柩)했던 상여라고 한다.

* 남은들 상여막(喪輿幕) : 상여(喪輿)란 시신(屍身)을 장지까지 운반하는데 사용하는 기구로서 행상, 영어, 온량거라고도 불린다. 상여를 평상시에 보관해 두는 곳을 상여막이라고 하는데, ‘남은들 상여막’라 함은 남은들이라는 마을에 소재한 상여막을 일컫는 것이다. 이 상여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마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시신을 장지(葬地)까지 운반했던 사실,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상가리주차장(원점회귀)

‘남은들 상여막’의 맞은편 언덕에는 흥선대원군(大院君)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墓)가 자리 잡고 있다. 남연군(南延君)의 묘(墓)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지관(地官)이었던 정만인이라는 사람이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고 추천했다는 명당이다. 이곳에는 원래 가야사라는 사찰(寺刹)이 있었으나, 사찰이 불타는 등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남연군의 묘가 자리 잡았다. 가야사의 승려를 매수했다거나, 혹은 권력으로 쫒아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설(說)이 전해지는 가운데, 결국 절은 불타 없어졌고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가 이장(移葬)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관심이 많던 흥선대원군이 그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흥선대원군 본인은 아니지만 그의 아들인 고종과 손자인 순종이 황제에 등극하였으니 지관의 예언(豫言)이 적중한 샘이다. 남연군 묘역을 빠져나오면 금방 산행을 시작하면서 지나갔던 갈림길이 나타난다.

* 남연군묘는 한국근대사(近代史)에 있어 굴절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했다. 쇄국정책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조선(朝鮮)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독일의 상인(商人) 오페르트(Oppert)는 조선의 천주교인들로부터 대원군의 풍수지리관을 듣고 남연군의 묘(墓)를 도굴하기로 결심한다. 유골(遺骨)을 무기로 해서 통상교섭을 성사(成事)시키려고 한 것이다. 1868년 서해안(西海岸)의 행담도(서해대교 아래 휴게소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에 배를 정박한 후, 작은 배를 이용해서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와서 심야에 도굴을 감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관곽(棺槨)까지는 파고 들어갔으나 300포나 쏟아부은 단단한 석회는 끝내 뚫지 못했다. 이 사건은 결국, 쇄국정책(鎖國政策) 강화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가져오는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팔봉산(八峰山, 362m)

 

산행일 : ‘12. 9. 7(금)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산행코스 : 양길주차장→돌거북→1,2봉 사이 안부→1봉~8봉→서태사→어송주차장(산행시간 :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30분)

 

함께한 산악회 : 나홀로

 

특징 : ‘여덟 개의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고, 거기에다 소나무 숲이 일품인 산’ ‘정상인 3봉에 서면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파노라마(panorama)를 연출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산’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팔봉산을 표현하는 문장(文章)들이다. 2개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첫 번째 문장은 조금 손질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여덟 개의 봉우리가 각기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지만, 5봉에서 8봉까지의 4개 봉우리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일 따름이다’ 팔봉산 산행은 이번이 세 번째이지만 1봉에서 8봉까지의 완주(完走)는 이번이 처음이다. 몇 년 전의 처녀산행 때에 안내하던 분이 왜 4봉까지만 둘러보고 원점회귀를 했는지 느낄 수 있었던 산행이었다.

 

산행들머리는 팔봉면 양길리 등산로입구 주차장

서해안고속도 서산 I.C를 빠져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서산시를 지나 어송교차로(交叉路)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팔봉면소재지를 통과하면 오목내사거리에서 634번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1Km쯤 들어가다 오른편에 보이는 팔봉산로(路)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팔봉산주차장이다. 참고로 네이게이션(navigation)을 이용할 경우에는 ‘양길리’를 조회하여, 검색창에 뜨는 ‘양길리 등산로입구’를 지정하면 된다. 양길리 주차장 왼편으로 난 등산로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된다. 등산로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의 컨셉(concept)은 당연히 웰빙(well-being)이다.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넘치도록 만들어낸다는 소나무이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송리와 양길리를 연결하는 임도, 임도에 관계없이 곧장 직진하면 된다.

 

 

 

울창한 ‘솔밭 길’을 10분 정도 산책(散策)삼아 걸으면 돌거북이가 물을 내뱉고 있는 약수터에 이른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거셀 정도로 내품는 물의 양(量)이 많지만, 아쉽게도 마시는 물로는 부적합하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약수터를 지나 얼마 안 있으면 널따란 쉼터가 나오고, 본격적인 산행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약수터에서 대략 6분 정도면 1봉과 2봉 사이의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이정표 : 양길 임도 0.5Km/ 1봉/ 2․3봉/ 운암사지)

1봉과 2봉 사이 안부, 왼편으로 가면 1봉, 2봉은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된다. 안부를 넘어 사면을 따르는 산길은 천제터와 운암사지를 거쳐 정상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다.

 

 

1봉은 능선안부에서 왼편 능선으로 진행해야 한다. 다음 봉우리인 2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이곳 안부로 되돌아와야 하는데, 되돌아오는 일이 다소 번거롭더라도 1봉의 주변 조망(景觀)과 전망(展望)을 놓치지 않는 게 좋다. 능선안부에서 1봉 정상까지는 채 100m도 안 될뿐더러, 평소에 품어온 바램을 빌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생김새가 감투를 닮았다는 1봉은 소원(所願)을 빌 경우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얻게 된다는 전설(傳說)을 갖고 있다.

 

 

 

이왕에 1봉에 올라왔으면 조금 위험스럽지만 바위 위로 올라보는 게 좋다. 바위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 사이를 암벽타기를 하듯이 비집고 올라선다. 너럭바위 위는 한마디로 아찔하다. 비록 천애절벽(天涯絶壁)은 아니지만, 딛고 있는 바위가 허공에 걸쳐져 있기 때문에 발아래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그 모험은 사방으로 열리는 뛰어난 풍광(風光)으로 인해 금방 보상을 받게 된다. 맞은편에는 서해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뒤로 돌아보면 2봉과 3봉으로 오르는 바위능선이 늠름한 자태(姿態)를 뽐내고 있다.

1봉에서 바라본 2봉과 3봉

 

 

 

안부로 다시 내려와 2봉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날카롭게 선 바윗길이다. 그러나 미리부터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조금만 위험하다싶으면 철제(鐵製)계단이나 철제(鐵製)난간을 설치해 놓아, 마음 놓고 오를 수 있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1봉과 2봉 사이 안부에서 10분 정도를 오르면 2봉 정상이다.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는 감투모양으로 생겼다는 1봉(2봉으로 오르는 능선에서의 조망)

 

 

2봉은 힘센 용사의 어깨를 닮았다고 해서 ‘어깨봉’이라고도 불린다. 2봉에서의 조망(眺望)도 빼어난 것이 차라리 1봉보다 한수 위이다. 1봉 너머로 팔봉면 들판이 펼쳐지고, 그 뒤로는 서해(西海)의 가로림만(灣)이 한눈에 들어온다. 툭 터진 시야(視野)는 거칠 게 없다. 또한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정상에는 뾰쪽뾰쪽한 기암(奇巖)들이 늘어서있는데, 그 모습이 흡사 공룡의 등뼈를 닮았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고 했던가? 6시에 다시 시작되는 워크숍(workshop) 일정에 맞추려고 서둘다보니, 우럭바위를 지나치는 우(愚)를 범해버렸다. 덕분에 팔봉산의 명물(名物)중의 하나인 우럭바위의 사진이 없는 산행기(山行記)가 되어버렸다. 옛말에 ‘바쁠수록 쉬어가라’고 했는데...

 

 

 

 

광해군 때 한여현(韓汝賢) 선생이 편찬한 호산록(湖山錄 : 서산시의 邑誌)에 보면 원래는 산봉우리가 9개였는데, 제일 작은 봉우리를 제외하고 팔봉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매년 12월 말이면 작은 봉우리가 자기를 수에 넣지 아니하였다고 울었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거기다 더해 그 작은 봉우리가 태안으로 옮겨가 백화산이 되었다는 또 다른 전설도 전해진다. 태안읍의 뒷산인 백화산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세(山勢)가 자못 범상치 않은 산이다. 5년 전쯤 백화산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도 4봉에서 8봉까지의 5개 봉우리는 결코 백화산의 자태를 따라가지 못한다.

▼ 정상인 3

 

 

 

2봉에서 3봉까지는 의외로 흙길이다. 2봉을 넘어서면 헬기장이다.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에는 쉼터용 정자(亭子)를 지어놓았다. 잠시 쉬어가야 옳겠지만, 갈 길이 바쁜 산객(山客)의 눈에는 정자가 들어올 리가 없다. 왼편에 갈림길이 보이는데,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 ‘운암사지’로 가는 길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마 2봉에서 3봉으로 오르는 암릉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우회(迂廻)해서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헬기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여있는 침목(枕木)계단을 올라서면 묘하게 생긴 바위문을 만나게 된다.

 

 

 

‘머리조심’이라고 적혀있는 경고문에 따라 고개를 숙이다보면 건너편에 철계단이 보인다. 철제계단은 갈지(之)자를 만들며 위로 오르도록 놓여있다. 단번에 위로 오르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위높이에 비해 공간(空間)이 턱없이 비좁은 탓이다. 철계단 안쪽이 용(龍)굴이다. 일명 통천문(通天門)이라고도 불리는 용굴은 바위터널로서 철계단을 이용해 위로 올라선 후 굴을 통과하도록 되어있다. 용굴을 통과해서 바위 위로 오르는 게 더 극적이겠지만 철계단을 이용해서 위로 오른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한 사람씩 겨우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굴을 통과하려면 배낭을 벗어야하는데 배낭을 처리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 통천문이라고도 불리는 용굴, 홍천 팔봉산의 해산굴보다 한수 위이다.

 

 

 

갈지자로 놓인 철계단을 밟고 바위위로 올라선 후, 다시 한 번 가파른 철계단을 밟고 올라서야만 3봉 정상이다. 3봉의 정상은 인접한 두 개의 바위봉우리(巖峰)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정상은 가히 수석(壽石) 전시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기암(奇巖)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누가 던져 놓은 듯 크고 작은 바위들이 서로 몸을 기대거나 포개어져 있는 형상(形象)이다. 아뿔싸! 정상에서 인증(認證)사진을 찍어야하는데,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 정상에 오를 때까지 등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산이 온통 비어있는 것이다. 잠깐 기다리다가 별수 없이 맞은편 봉우리로 진행하는데, 방금 내려왔던 정상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반가운 마음에 부리나케 되돌아가 사진촬영을 부탁해보지만, 힐끗 올려다보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산을 내려가 버린다. ‘인심 참 고약타’ 다른 지역 사람이 올라오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지만, 설마 이 지역 주민은 아니겠지? 설마 인심 좋기로 소문난 충청도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362m라는 팔봉산의 높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발아래에 깔려있는 풍광(風光)들이 까마득하게 펼쳐진다. 지나온 방향에는 1과 2봉의 바위봉우리가 너른 팔봉면 들판 속에 갇혀있고, 가로림만(灣)을 끼고 있는 너른 갯벌의 고즈넉한 풍경(風景)이 넓게 펼쳐진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팔봉산과 지맥으로 연결된 금강산이 다소곳이 앉아있고, 왼편에는 4~8봉이 가지런히 이어지고 있다. 사방으로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뻥 뚫린 조망이 가히 일망무제(一望無題)인 것이다.

▼ 3봉 정상에서 바라본 2봉과 1봉, 그리고 가로림만

 

 

팔봉산의 가장 큰 매력은 뛰어난 조망(眺望)과 산정(山頂)의 암릉미에 있다. 정상에 오르면 바위산의 전매특허(專賣特許)대로 조망이 시원스럽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툭 트이는 것이다. 저 멀리 서해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과 가로림만, 그리고 넓고 너른 서산의 들판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탁 트인 리아스식해안(rias coast)과 갯벌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3봉에서 4봉은 지척이다. 양쪽으로 철제난간이 설치된 암릉을 내려섰다가, 짧은 철계단 하나를 거치면 이내 4봉 정상이다. 4봉 정상 가까이에서 어송리 임도(林道)로 내려가는 길과 나뉘는 갈림길(이정표 : 어송리 임도 0.8Km/ 3봉 정상 0.2Km/ 4봉)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1봉에서 4봉까지의 경관(景觀)이 팔봉산의 진수(眞髓)이기 때문에, 5봉에서 8봉까지는 답사(踏査)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등산객들이 하산하게 되는 지점이다. 4봉 정상 자체는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지만, 3봉 정상에 대한 조망(眺望)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이곳에서 정상의 바위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바위 선발대회’라도 열린 듯 바위들이 저마다의 자태(姿態)를 한껏 뽐내고 있다.

 

 

▼ 4봉에서 바라본 3봉

 

 

 

4봉에서 8봉까지의 구간은 평범한 능선길이다. 4봉에서 가파르면서도 긴 철계단을 한 번 내려선 이후에는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능선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때문에 8봉을 제외하고는 봉우리인지 능선인지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봉우리들이 밋밋하다. 때문에 각 봉우리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정상석의 숫자만 아니라면, 어느 봉우리가 어느 봉우리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거기에다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조망(眺望)까지도 별로이다.

 

▼ 5봉에서 바라본 4봉과 3봉

 

 

 

 

7봉에서 잠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맞은편 바윗길에 매어있는 로프를 잡고 짧게 오르면 통신시설이 나타난다. 8봉은 건너편에 보이는 숲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8봉 정상도 다른 봉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자그마한 정상표시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틀린 점을 꼭 찾아야한다면, 다른 봉우리들에 비해 삼각점과 그 삼각점을 설명하는 안내판 하나가 더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8봉에서 서태사 방향으로 내려서면 또 다시 바윗길이 나타난다. 비록 짧지만 바위의 생김새만은 예사롭지 않다. 생김새도 기괴(奇怪)할뿐더러 그 크기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8봉 이정표 : 서태사 0.3Km/ 3봉 정상 0.8Km)

 

 

 

바윗길 끝에서 주 등산로를 벗어나 오른편으로 들어서본다. 희미하게나마 사람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다른 곳은 아까 지나왔던 바윗길의 바로 아래. 위로 올려다 보이는 바위들이 위에서 보던 경관(景觀)보다 더욱 뛰어나다. 바위들의 위용(偉容)이 더 높고 더 날카롭게 돋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바위 아래에 제단(祭壇)이 만들어져 있고, 대낮인데도 촛불이 켜져 있다. 아마 서태사에서 만들어 놓은 산신당(山神堂)인 모양인데, 이러한 제단은 서태사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럴듯하게 생긴 바위 아래에는 어김없이 만들어져 있었다.

 

 

서태사는 불교 사찰(寺刹)이라지만 왠지 느낌부터 생소하다. 절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殿閣)인데, 우리가 늘상 보아오던 단청(丹靑)이 화려한 한옥(韓屋)건물이 아니라 조립식으로 지어진 현대식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에 고시준비를 하면서 머물렀던 고시원(考試院)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혹시 도(道) 닦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아닐까요?’ 내 느낌을 전해들은 지인(知人)이 하는 말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찰의 간판만 걸어놓고 도 닦는 사람들을 수용하여 숙박업(宿泊業)을 하는 시설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산을 내려올 때 봤던 산신당들에다 그의 말을 연결시켜보니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이정표 : 주차장 1.3Km/ 8봉 정상 0.3Km)

 

 

 

산행날머리는 어송리 주차장

서태사에서 산행이 종료되는 어송리로 내려가는 길은 울창한 솔숲길이다. 20분 정도를 코끝에 스치는 솔향에 취해 걷다보면 이내 어송리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管理事務所)에서 잘 관리하고 있는 듯, 주차장도 깔끔할뿐더러 한쪽 귀퉁이에 있는 공중화장실은 가히 최상의 시설이다.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향긋한 방향(芳香)까지 내품토록 설계되어있다. 물론 청결은 기본이다.

▼ 워크샵이 열렸던 풍경리조트, 태안군 가로림만의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특별히 자랑할만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조용하고 한적해서 좋았다. 주인장께는 미안하지만...

 

 

 

 

태화산(泰華山, 423m)

 

산행일 : ‘12. 9. 1(토)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과 신풍면의 경계

산행코스 : 무교(춤다리)→남가섭암→깃대봉→물란이고개→활인봉(정상)→나발봉→중불교문화원→삭발바위→마곡사→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20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태화산은 아는 사람들이 드물어도, 태화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마곡사(麻谷寺)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찰(寺刹)이다. 사찰의 역사가 깊기도 하지만 백범 김구(金九)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옥살이를 하다 탈옥(脫獄)한 김구선생이 이곳에서 한동안 ‘스님’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찰의 유명세에 비해 태화산은 미미하기만 하다. 높지도 그렇다고 깊지도 않으며, 특별한 볼거리까지도 제공하지 못하는 평범한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629번 지방도가 마곡천을 가로지르는 무교(舞橋:춤다리)

당진-대전간고속도로 마곡사 I.C를 빠져나와 사곡면소재지(面所在地)인 호계리를 통과한 후, 629번 지방도로를 따라 마곡사방향으로 진행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곡천(麻谷川)을 가로지르는 무교(舞橋:춤다리)에 이르게 된다.

 

 

 

무교(舞橋,춤다리)의 다리 옆에 위치한 ‘춤다리 쉼터(민박집을 겸함)’의 오른편으로 난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 길은 마곡온천레포츠타운과 남가섭암, 그리고 월성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니 들머리의 방향을 잡을 때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의 나무는 ‘가교리 2구‘ 마을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로서,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있다.

 

 

‘맞은편에서 차(車)가 올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요?’ 집사람의 생각에 아스팔트 포장도로치고는 너무 비좁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하긴 1.5톤 트럭이나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노폭(路幅)이 좁으니 집사람이 걱정할 만도 하다. 그러나 포장도로는 비록 좁아지기는 할망정 끊어지지 않고 남가섭암까지 계속 이어진다. 가는 길에 마곡온천과 월성사 갈림길이 나오지만 두 번 모두 왼편의 남가섭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무교를 출발해서 20분 정도 걸으면(약 1.5km) 능선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남가섭’이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간이 주차장(駐車場)이 조성되어 있다. 고개 너머에 위치한 남가섭암(南迦葉庵)의 주차장이다. 남가섭암은 고개에서 5분 정도 내려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마곡사의 부속암자인 남가섭암은 대웅전과 요사채, 그리고 산신각이 전부인 자그마한 암자(庵子)이나, 동쪽의 좁은 들판과 산줄기를 바라보며 묵언정진(黙言精進)하기에는 딱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평소에 들르는 등산객들이 거의 없는 듯, 문을 열고 내다보는 스님이 의외라는 눈초리로 바라보신다.

 

 

 

 

깃대봉으로 가려면 다시 고갯마루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등산로가 ‘남가섭’ 표지석 뒤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전국을 할퀴며 지나갔던 태풍(颱風) 볼라벤의 흔적이 이곳에도 역력하다. 바람에 의해 부러진 잔가지들이 산길을 수북하게 덮고 있고, 어른들의 허리만큼이나 굵은 나무들도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허리가 부러져 있다. 깃대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그다지 경사(傾斜)가 가파르지 않게 오르내리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깃대봉(310m)은 아무런 특징(特徵)이 없는 밋밋한 봉우리일 따름이다. 밋밋함이 민망했는지 한 가운데에 삼각점이 박혀있고, 그 옆을 묘(墓) 1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득 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둘러봐도 깃발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대부분의 봉우리들에 오르면 나부끼고 있는 깃발들을 볼 수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깃발은커녕 깃대조차 세워져 있지 않는 것이다. 춤다리를 출발한지 약 1시간 정도가 지났다.

 

 

 

 

 

물란이고개로 내려서는 길은 깃대봉에 오를 때처럼, 사람의 통행이 많지 않은 풋풋한 산길이 이어진다. 이 구간은 안전(安全)에 주의를 요하는 구간이다. 내리막길이 많이 가파르지만 전혀 안전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능선 안부인 물란이고개는 사거리지만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이곳으로 다니는 등산객들이 적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물란이골(naver지도에는 물한이골로 표기)을 거쳐 평소리에 이르게 되고, 오른편은 건물이 가까이보일 정도로 마곡온천이 지척(咫尺)이다. 물론 활인봉은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태화산 등산은 마곡온천에서 시작해 이곳 물란이 고개를 거쳐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겠지만, 그럴 경우 전체적인 산행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에, 깃대봉을 돌아오도록 코스를 연장하는 모양이다.

 

 

 

물란이고개에서 활인봉으로 오르는 구간(약 1.4Km)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비록 위험한 바윗길은 아니지만 무척 가파르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이런 가파른 경사의 길을 오르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역(苦役)일 것이다. 물란이고개를 출발한지 20분이 조금 더 지나면 380봉에 올라서게 되고, 이후 산길은 경사(傾斜)를 누그러뜨리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다가 태화산의 정상인 활인봉에 이르게 만든다.

 

 

 

활인봉의 한 가운데는 팔각정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추녀 밑에 ‘활인봉’이라고 적혀있는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활인봉 정상의 조망(眺望)은 썩 뛰어나지는 않지만, 북서쪽의 나발봉과 그 뒤를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들, 그리고 동쪽에 있는 무성산과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하늘금이 얼핏얼핏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정도가 지났다.(정상의 이정표 : 나발봉 1, 2코스 2.0Km/ 대웅보전 3코스 3.6Km)

 

 

 

 

활인봉에 올라서면 낯선 풍경(風景)이 눈에 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오솔길이 사라지고, 갑자기 대로(大路)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서너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 정도로 길이 넓을 뿐더러, 길의 양쪽의 가장자리를 통나무로 경계(境界)까지 구분해 놓았다. 그리고 경사(傾斜)가 가파른 내리막길에는 잘 다듬은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원형으로 똬리를 트는 모양이 웬만한 예술작품보다 더 아름답다. 물론 갈림길마다 빠짐없이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산행을 하다보면 곳곳에서 이런 벤치를 만나게 된다. 펩시콜라 회사에서 등산객들을 위해 설치해준 모양이데, 설치만 해 놓고는 그냥 방치해 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낡아서 사람이 앉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진 의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활인봉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30분 정도 내려서면 능선 안부에 닿게 된다. 이곳 ‘생골 갈림길’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마곡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나발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맞은편 능선으로 진행해야 한다. 갈림길에는 이정표(나발봉 1코스 0.8Km/ 활인봉 3코스 1.2Km/ 생골 2코스)외에도 백범명상길이라고 적힌 널빤지가 하나 더 보인다. ‘마곡사 솔바람길’이라고 불리는 충청도판 올레길이란다. 올레란 본래 제주도 말로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을 뜻하는데, 지금은 자연친화적인 ‘트레킹 코스’로 의미가 바뀌었다. 일명 ‘백범 명상길’이라고 불리는 마곡사 솔바람길은 송림욕(松林浴)으로 특화된 올레길이라고 보면 쉬울 것이다. 태화산 주변의 울창한 노송(老松) 숲을 활용하여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 장교를 처단하고 인천감옥에 갇혀있던 김구선생이 탈옥 후 잠시 도피해있던 곳이 이곳 마곡사이다. 그때 김구선생이 산책(散策)을 하며 명상(瞑想)을 즐기던 소나무 숲길을 올레길로 조성을 해 놓은 것이 ‘백범 명상길’이다.

 

 

 

옛날 이곳 태화산에는 활인(活人)이라는 이름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이 샘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마시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아나는 신비한 효능(效能)을 가졌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비록 샘물이 말라버렸지만(지금의 활인샘과는 다르다함), 태화산은 다른 것으로 그 효능을 대신하고 있다. 태화산에 가득한 적송(赤松)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바로 그것이다. 나무가 해충이나 미생물 및 각종 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산하는 천연의 항균물질(抗菌物質)인 피톤치드를 사람들이 호흡할 경우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암 투병중인 사람들이 투병을 위해 찾아드는 곳이 편백나무 숲인데, 편백나무가 나무들 중에서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기 때문이다. 태화산에 가득한 소나무(赤松) 역시 편백나무에 못지않게 피톤치드를 많이 배출(排出)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소나무가 활인샘을 대신하고 있다고 해도 잘못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은 그 기둥까지도 잎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그 이파리가 나무 본래(本來)의 이파리가 아닌 다른 나무의 이파리라는 게 특이하다. 담쟁이넝쿨류의 기생식물이 온통 나무를 칭칭 감으면서 공생(共生)하고 있는 것이다. 등산로 주변의 울창한 숲들 때문에 트이지 않는 조망(眺望)을 원망하기 보다는 주변의 풍물(風物)을 가슴으로 받아들여 보자. 그러다보면 지루하게 느껴지던 산행이 어쩌면 즐거운 산행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활인봉에서 나발봉까지의 구간은 ‘백범 명상길’중에서도 ‘솔잎 융단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구간이다. 소나무의 낙엽(落葉)을 일컫는 솔가리가 두텁게 깔려 있어서 마치 융단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산길은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한데다가 길바닥은 황톳길로 보드랍기까지 하다. 이런 길이기에 백범선생도 마음 놓고 산책(散策)을 즐겼을 것이다. 등산로 주변에는 적송(赤松)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데, 잣나무 조림지(造林地)도 심심찮게 보인다. 소나무 이파리를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결에는 진한 소나무향이 스며져 있다.

 

 

 

나발봉 정상에도 활인봉과 같이 아담한 정자(亭子)가 서있다. 나발봉 정상은 제법 조망(眺望)이 뛰어나서 이곳 태화산의 주봉인 활인봉은 물론이고, 동쪽의 무성산과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의 다랑이 논까지 내려다보인다. 하나 아쉬운 점은 정자와 이정표(대웅보전 1코스 3.2Km/ 활인봉 2,3코스 2.0Km)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을 뿐, 막상 필요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활인봉에서 나발봉까지는 40분이 조금 못 걸린다.

 

 

 

나발봉에서 전통불교문화원까지의 하산길은 가파르면서도 길게 이어진다. 이곳도 가파른 구간에는 어김없이 침목(枕木)계단이 보인다. 계단은 원(圓)을 그리면서 고도(高度)를 떨어뜨리고 있다. 등산로 주변은 여전히 소나무 일색,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적송(赤松)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구간은 ‘백범 명상길’ 중에서도 ‘황토 숲길’이라고 불린다. 솔가리로 뒤덮인 오솔길이 맨발로 걸어도 좋을 만큼 부드럽기 때문일 것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걸으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급하게 왼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가파른 침목계단을 밟으며 내려서면 잘 지어진 정자(亭子)가 보이고, 저만큼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정자에서 잠깐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마곡천(川)에서 오른편 방향으로 얼마간 더 걸으면 이내 전통불교문화원이다. 전통불교문화원(傳統佛敎文化院)은 마곡사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나 마곡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조계종(曹溪宗) 총무원(總務院)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는 시설이란다. 그런데 건물을 보자마자 눈에 거슬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래도 건물의 외관(外觀)이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불교(傳統佛敎)’라는 낱말에 홀려 그저 단청(丹靑)이 화려(華麗)한 전각(殿閣)만을 예상했었는데, 갑자기 완벽한 현대식(現代式) 건물이 눈앞에 펼쳐지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불교를 연상시키는 외형(外形)이라고는 지붕과 벽면의 색상(色相)이 스님들 가사의 색상과 비슷한 것이 전부이다.

 

 

 

전통불교문화원(傳統佛敎文化院), 조계종 최초의 대규모 교육연수시설로서 종단(宗團)의 각종 연수(硏修)와 일반인 대상의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교육이나 연수 외에도 ‘전통불교 문화체험’과 간화선(看話禪 : 화두를 근거로 수행하는 참선 방법)수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전통불교문화원(傳統佛敎文化院)에서 마곡사로 가는 길을 찾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근처에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정문을 빠져나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정문 밖 도로변에 보이는 ‘마곡사’의 이정표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 낭패를 당하게 된다. 이럴 경우 산 하나를 꼬박 돌아야하기 때문이다. 마곡사로 가는 올바른 방법은, 불교문화원에서 정문방향의 다리를 건너지 말고 오른편에 보이는 산책로(散策路)를 따라 내려가야 한다. 5분 정도 걸으면 불교문화원이 끝나면서 마곡사 방향으로 놓여있는 은적교라는 다리가 보인다. 이곳에서 마곡사까지는 10분이 조금 못 걸리는데 길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불교문화원에서 마곡사로 내려가다 보면 영은교(橋)를 조금 지나서 왼편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예쁘장한 나무다리(木橋)가 보인다. 나무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에 전망대 모양의 나무테크가 보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자, 나무테크 옆에 반반한 바위가 보이는데, 이 바위 위에서 백범선생이 머리를 깎았단다. 일본인들을 속이기 위해서 가짜로 삭발을 한 것이다.

 

 

 

백범선생 삭발바위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마곡사 뒤편에 이르게 된다. 뒤뜰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눈에 들어온다. 이층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이 수많은 대중(大衆)들을 아우르고도 남을 정도로 웅대(雄大)하다. 대웅보전 앞에는 단층건물인 대광보전(大光寶殿), 그리고 대광보전 앞의 마당 한가운데에는 ‘풍마동 다보탑’이라고도 부르는 오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 마곡사(麻谷寺). 25개로 이루어진 조계종 교구(敎區) 중 하나(제6교구)를 총괄하고 있는 본사(本寺)일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사찰(寺刹)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640년)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으며, 보조국사(普照國師), 도선국사(道詵國師) 등의 중수(重修)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절의 낙성식 때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신라의 승려 무염(無染)이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문화재(文化財)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801호),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802호), 영산전(捌相殿:보물 800호), 5층 석탑(보물 799), 그리고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1권(보물 269호)와 제6권(보물 270호), 석가모니괘불탱(보물 1260호)이 있으며, 이밖에도 다수의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대광명전 앞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향나무 옆에는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한말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선생은,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 향나무는 해방 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선생이 그 때를 회상하며 심은 나무란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 향나무 주위를 서성이는 것을 보면 그의 애국충정(愛國忠情)은 나무 옆에만 서있어도 전이(轉移)가 되는 모양이다.

 

 

백범선행이 심었다는 향나무 옆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멋지게 생긴 소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안내판이 없으니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생김새로 보아서는 명품(名品)소나무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종루(鐘樓) 앞에 놓인 홍교(虹橋)를 지나면 오른편에 영산전이 있지만 아쉽게도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곱게 핀 꽃무릇(석산 : Lycoris radiata)과 노닐다가, 영은암으로 올라가는 길가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메타세콰이어(Metasequoia) 숲길을 감상하다보면 마곡사를 벗어나게 된다.

 

 

 

 

산행날머리는 마곡사 주차장

마곡사에서 주차장까지 걸어 나가는 길은 반갑지 않은 구간이다. 만만치 않게 먼 거리라서 지겹기까지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도로의 옆에 흐르는 나름대로 운치(韻致)있는 계곡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마곡사를 나서면서 산행도 마감되려니 했던 기대감이 무너진데 대한 보상(報償)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일단 주차장에 도착하면 그 심난했던 마음을 일거에 날려 보낼 수 있으니까. 주차장 근처의 계곡에는 멱을 감기에 충분할 정도로 물이 깊고, 목욕 후에 찾은 뒤풀이 식당에서 맛본 음식은 나름대로 맛깔스러웠다.

 

용봉산(龍鳳山 381m)-수암산(秀岩山 259.4m)

 

 

산행일 : ‘11. 9. 10(토)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홍성군 홍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용봉초교→미륵암(용도사)→바위능선→정상→360봉→마애석불→수암산→265봉→덕산온천 (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산세(山勢)는 작지만 능선 전체가 바위산으로 되어 있어, 능선에 오르면 산 전체가 기묘(奇妙)한 바위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충남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다. 산이 작기 때문에 길게 걸어도 산행시간이 4시간이면 족할 정도로 짧고, 산행을 하는 내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므로, 가족(家族) 산행지로 추천 할만하다.

용봉산은 크고 작은 기암(奇巖)으로 이루어진 바위봉우리들이 널려 있다. 마치 일정 지역 안에 일부러 수집해 모아 두기라도 한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용봉산을 산행할 경우에는 보통 용봉산과 수암산을 연결시킨다. 이중 수암산 정상 근처에도 보기 좋은 작은 암봉들이 분포되어 있으나,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은 대부분 용봉산에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용봉산의 핵심만 둘러보고 내려와도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홍성군 홍북면 용봉초등학교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빠져나와 좌회전, 45번국도(國道/ 예산・아산 방향)를 타고 15km쯤 달려 덕산면 소재지 온천지구로 들어간 후, 정남쪽 609번지방도(地方道/ 홍성읍 방향)를 따라 남하한다. 세심천온천호텔 앞을 지나 8km쯤 가다가 봉신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용봉초등학교가 보인다. 이밖에도 당진-대전고속도로 고덕 I.C(40번 국도 이용)나 경부고속도로 천안 I.C(21번 국도 이용)에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용봉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내리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초등학교 왼편에 위치한 매표소(賣票所)이다. 입장료는 천원, 용봉산 전체를 자연휴양림(自然休養林)으로 가꾸고 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費用)이란다. 등산로 곳곳에 쏟고 있는 그들의 정성이라면 천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 받더라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매표소 옆에 설치된 화장실을 사용한 대가(代價)라고 생각해도 좋고.....

 

 

용봉초등학교와 매표소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며 산행이 시작된다. 왼쪽에 '용천가든', '용봉산자연휴양림', '미륵암 0.5km' 등등 안내판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용천가든을 지나니 '미륵암 0.2km, 정상 1.2km"라는 이정표가 있다. 미륵암으로 오르는 임도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길 주위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솔잎향이 그윽하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나면 왼편에 자그마한 산사(山寺)가 하나 보인다. 일반적으로 미륵암(彌勒庵)이라고 불리는 용도사이다. 용도사는 대한불교 용융종의 오래된 고찰(古刹)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용융종은 검색되지 않는다. 아마 널리 알려지지 않은 불교(佛敎)의 한 종파인 모양이다.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 중 합장을 하고 있는 분들이 보인다. 아마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강한 분들인 모양이다. 절의 왼편에는 바위 단애(斷崖)가 보이고, 그 아래 부처님 한분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계신다. 우뚝 솟은 자연암석을 활용하여 조각한 미륵불이다. 미륵불이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 용도사 옆에 있는 미륵불(彌勒佛 : 홍성 상하리 미륵불)은 1979년에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87호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충청도 지방에서 발견되는 불상(佛像)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단다. 이 석불입상은 하나의 독립된 바위에 입체적으로 새긴 것이라 마치 동상을 연상케 한다.

 

 

 

용도사 오른편으로 난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용봉산을 찾는 사람들은 ‘산이 낮으니 오늘 산행은 쉬울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늘 우리를 안내하는 ‘좋은 사람들’의 산행대장의 멘트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미륵암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제법 가파르다. 다들 입고 있던 옷들을 하나 둘 벗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비옷, 그리고 점퍼 순으로...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느꼈던 쌀쌀함 때문에 가을이려니 했더니만 아직은 여름의 막바지인 모양이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 홍성의 평야(예당평야)가 시야에 들어온다.

 

 

안개가 끼고 가랑비는 오다 말다... 부지런한 집사람의 손길이 바빠진다. 가랑비가 몇 방울만 떨어져도 그새를 못 참고 비옷을 걸친다. 그러나 무심한 가랑비는 5분도 못 넘기고 그쳐버린다. 그러면 집사람의 비옷도 어느새 배낭 속으로... 빗방울 따라 부지런을 떠는 집사람이 가여웠을까? 용봉산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더니 언제 빗방울이 떨어졌냐는 듯이 주위의 경관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륵불에서 30분 정도 올라가면 주능선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산은 이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전형적인 바위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듯한 형상’에서 유래됐다는 용봉산의 산 이름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용봉산 정상은 바위 무더기이다. 누군가 일부러 옮겨 놓은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다. 아마 이곳 산신령(山神靈)의 작품이겠지? 덕분에 바위무더기 위에 올라앉은 정상표지석 주위는 비좁을 수밖에 없고, 정상표지석을 배경삼아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맨 먼저 찾아오는 것은 탄성이다. ‘아! 어쩌면 저리도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형상들일까?’ 보이는 암봉(巖峰)마다. 그리고 나타나는 바위마다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다. 한마디로 기암괴석(奇巖怪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봉산을 작은 금강산(金剛山)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일단 능선에 오르면 바위산의 특징대로 조망이 뛰어나다. 산 아래에는 너른 들녘이 펼쳐지고 있고, 건너편으로 덕숭산과 금남정맥이 용봉산과 나란히 달리고 있다. 용봉산은 특히 바위가 빼어나 곳곳에 암봉이 어여쁜 그림 같고, 멀리 바라보이는 바위들은 거실의 벽에 걸려있는 산수화(山水畵)를 닮았다. 바위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소나무들이 멋스럽다. 짙은 소나무 향을 들이마시며 걷다보면 마음은 어느새 행복(幸福)코드로 변해 있다.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 아니 지나는 사람들을 따라 바람들도 스쳐 지나가는 길목, 그 길목의 바위틈에서 한 생명을 만난다. 바위틈 속을 비집고 목숨의 뿌리를 내린 소나무... 모질고도 절박한 생명력이다. 저 척박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실낱같은 생명수를 빨아올리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문득 저 소나무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음은, 어쩌면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싶음이 아닐까?

 

 

 

이곳 용봉산의 바위들은 제각기 이름을 갖고 있다. 그 수많은 기암들에게 사람들은 장군바위, 촛대바위, 삼형제바위, 사자바위, 매바위, 마당바위, 등등 형상에 맞는 이름들을 지어주었다. 이런 기암(奇巖)들을 머리에 얹은 암릉이 사방으로 뻗었으니 당연히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듯한 형상’에서 유래됐다는 용봉산(龍鳳山)이란 산이름이 제격일 것이다.

 

 

 

 

‘수석 전시장(壽石 展示場)’ 용봉산을 나타내는 단어로 이보다 더 적합한 것이 있을까? 작은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바위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그 형상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하다.

 

 

 

정규 등산로를 벗어나 본다. 잠깐이나마 스릴을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오른편의 암벽(巖壁)을 잡고 오르니 용봉산에서 가장 큰 암봉(巖峰)인 악귀봉 정상이다. 절고개로 가기 위해서는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하지만, 왼편으로 내려선다. 정규등산로를 벗어난 탓에 자연스레 지나쳐버린 전망대(展望臺)에 들르기 위해서이다. 용봉산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를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암릉들은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이다. 천태만상(千態萬象)의 기암(奇巖)들은 한마디로 말해 한 폭의 잘 그린 동양화를 연상케 하고 있다.

 

 

 

 

입장료(入場料) 천원으로 이렇게 관리를 잘하고 있다니 자못 감탄스럽다. 숲속 길은 대도시 근교의 공원(大都市 近郊 公園)처럼 잘 정비되어 있고, 산행 중 잠시 쉬었다 갈 수 있게끔 정자와 평상, 그리고 벤치를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바윗길도 조금만 위험하다싶으면 어김없이 안전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비록 바위를 잡고 오르는 스릴은 사라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산(名山)이니 당연히 안전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 용봉산 자연휴양림은 산막(山幕)은 운영하고 있지 않는단다.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인 악귀봉에서 용봉산 구간은 끝난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절고개로 내려선다.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자꾸 뒤돌아봄은 저 아름다운 능선을 못내 잊지 못함일 것이다. 절고개에서 곧바로 수암산으로 진행할 수도 있지만 오른편 마애석불을 방향으로 내려선다. 용봉사를 들러보기 위해서이다. 국보(國寶)급 문화재를 2점이나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둘러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절고개에서 200m정도 내려오면 갑자기 시원스레 시야(視野)가 뚫리면서 널따란 잔디밭이 나타난다. 보물 제35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磨崖石佛)이다. 높이 4m의 이 석불은 그 수법이 경탄할 정도로 정교한데 이 석불은 백제 말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를 주변에서 발견되는 백제 때의 와편에서 찾고 있단다. 마애석불에서 산죽(山竹)이 우거진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금 더 내려오면 커다란 봉분이 보인다. 평양조씨의 묘이다. 조선조 중엽 이 자리가 명당이란 풍수가의 말을 믿은 평양조씨가 이곳에 있던 용봉사를 없앤 뒤 이 무덤을 썼단다. 그러나 그 뒤로 후손이 끊어져버려 돌보는 이가 없자 스님들이 무덤을 돌보아주고 있다니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무덤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왼편에 아담한 사찰이 보인다. 용봉사이다. 용봉사(龍鳳寺)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유물로 볼 때 백제 말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하고 있는 고찰(古刹)로 인근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현재의 사찰(寺刹) 서편의 조금 높은 곳에 있던 옛 절이 명당임을 안 평양 조씨(平壤 趙氏)가 절을 폐허화시키고 그 자리에 묘를 쓴 탓에, 지금의 사찰은 1906년에 새로 세운 것이란다. 그럼 평양조씨 후손들은 지금 잘 나가고 있을까?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1262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괘불)이 있으며, 옛 절터에는 보물 제35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이 있다.

 

 

용봉사 앞의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또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수암산은 용봉사 입구의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병풍바위 방향을 따라 오른편 능선으로 오르면 된다. 용봉사에서 침목(枕木)계단을 따라 200m정도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다. 병풍바위이다. 병풍바위는 이름에 걸맞게 우람하면서도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암벽을 붙잡고 오르려는데 들리는 집사람의 지청구 ‘위험 표지판이 안보이시나요?’ 아쉽지만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다.

 

 

 

능선에 올라서면 등산로는 고저(高低)의 차이가 크지 않은 오르내림을 연속적으로 반복한다. 구름이 잔뜩 낀 탓에 덕숭산과 가야산의 모습은 희미하지만, 오른편 발아래에는 널따란 들판이 펼쳐져있고, 크레인 등 중장비(重裝備)를 동원한 공사가 한창이다. 충남도청이 이곳에 들어온단다. 그리고 혁신도시도...

 

 

 

 

 

고만고만한 작은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 수암산(秀岩山) 정상이다. 수암산(秀岩山)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바위가 빼어날 법도 한데, 용봉산보다 빼어난 바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수암산의 정상에는 팔각정 하나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뒤로 돌아 용봉산 쪽을 바라보면 비록 높지는 않을망정 갖출 것은 다 갖춘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암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265m, 260m, 255m, 245m 등 조금씩 고도(高度)를 낮추어가는 봉우리들을 여러 개를 넘어야 덕산온천에 다다르게 된다. 능선은 깊지 않은 굴곡을 만들면서 오르내림을 되풀이하고 있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데다가 암릉이었던 용봉산과는 달리, 이곳은 흙길이어서 내리막길임에도 불구하고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산행날머리는 덕산온천 주차장

운동기구 몇 점이 설치되어 있는 체육공원을 지나서 오른편으로 떨어지면 세심온천이다. 덕산온천은 거의 능선이 끝나갈 때까지 내려가야만 한다. 이정표가 없는 삼거리에서 무심코 내려서니 세심온천, 여기에서 산악회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덕산온천까지는 1Km정도를 더 걸어가야만 한다. 길가 휴게소에서 산 캔맥주 하나로 목을 축이며 걷다보면 이내 산행이 종료되는 덕산온천에 닿게 된다.

 

 

 

용봉산(381m)-수암산(258m)

 

산행일 : '06. 11. 25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과 삽교읍의 경계

산행코스 : 용봉초교-용봉산 정상-노적봉-절고개-수암산-덕산온천

함께한 사람들 : 산자부 산악회 

 

 

산자부 산악회와 함께 찾은 용봉산

초겨울인데도 포근한 날씨가 꼭 봄 기운...

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아름답기 그지업고

소나무 뿐인 산이 꼭 충북 월악산 군에 온 것 같았다.

9시에 시작된 산행이 13시에 끝났으니 4시... 적당하다.

산행후엔 온천욕... 산뜻하다.

점심은 홍성읍에서 파김치 뱀장어구이...

파김치와 어우러지는 장어의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부 출신 직원이 하는 식당이라 의미도 있었고...

 

 

정상

 

 

 

 

노적봉

 

바윗속의 생명...

무슨 영양분이 있어 소나무까지...

 

바윗속에서 생명이...

 

수암산 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