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적산(香積山, 574)-함지봉(咸芝峰, 386.5m)-깃대봉(310.2m)

 

산행일 : ‘17. 1. 30()

소재지 : 충남 계룡시 엄사면·신도안면과 논산시 상원면·연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무상사향적산방헬기장향적산상여바위국사봉(백련봉)윗산명재아랫산명재함지봉깃대봉황산성관동리(산행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싸리재 근처 465m봉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이 있다. 이 능선을 따라 대략 1Km쯤 떨어진 곳에 빚어진 산이 향적산(香積山)이다. 향적산에서 계속 남진하는 능선은 약 7km 거리에서 함지봉(咸芝峰)을 들어 올린 후, 2km를 더 가는 곳에서 황산성 터를 지난다. 이어서 남은 여맥(餘脈)들을 모두 연산천에다 가라앉힌다. 오늘은 위에서 말한 맥()의 대부분을 걸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코스를 만날 수 있었다. 빼어난 산세(山勢)를 자랑하는 암릉구간이 있는가 하면, 향적산의 정상과 상여바위 등에서는 일망무제의 조망(眺望)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나머지 구간은 편안하기 이를 데 없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없는 것이 뛰어다녀도 될 것 같다는 얘기이다. 15Km 가까운 거리를 4시간 30분에 걸었다면 길이 얼마나 편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이렇게 좋은 산이 아직까지도 입소문을 타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이지 않나 싶다.

 

산행들머리는 무상사(계룡시 엄사면 향한리 452-13)

호남고속도로 계룡 I.C에서 내려와 1번 국도를 타고 엄사면소재지인 엄사리까지 일단 온다. 논산시 방향이다. 엄사리의 관문인 연화교차로(엄사리)에서 국도를 빠져나온 후, 조금 들어오다 평리사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잠시 후 엄사중학교를 지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향한리 사거리(엄사면 향한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상사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오늘 산행은 지도에 표시된 코스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들머리를 향한리에 있는 무상사(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로 삼아 주능선에 있는 헬기장으로 올랐고, 하산도 황산성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로 떨어진 다음 길을 개척해가며 관동리를 거쳐 연산면소재지까지 진행했다



산행에 들어가기 전에 무상사(無上寺)에 들러보기로 한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절이었기 때문이다. 국제적 선수행(禪修行) 그룹인 관음선종의 창설자인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에 의해 2000년에 건립된 무상사는 불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사찰이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 동양불교의 진수를 찾아 모인 외국 스님들이 수양하는 국제선원으로 유명하다. 숭산스님은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고봉선사에게서 전법계(傳法偈)를 받았고, 19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 선교를 시작하였다. 200411월 서울의 화계사에서 열반에 들었지만 그가 남긴 가르침은 전 세계 (30여 국가에 100여개 선원)에 널리 펴져 있다. 참고로 무학대사는 이곳 향적산에서 800명의 위대한 법사가 나와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대가(大家)답게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관음선종의 아시아 지역 본원인 무상사가 이곳에 터를 잡았으니까 말이다.



무상사의 오른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무조건 왼편을 따른다. 오른편은 만운사(이정표 : 만운사 1.5Km)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50m쯤 더 걸으면 만나는 갈림길(이정표 : 향적산 정상 1.6Km/ 싸리재 1.13Km)에서도 역시 왼편이다. 둘 모두 정상으로 연결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오르기 위해서이다.



무상사를 왼편에 끼고 난 길은 제법 넓다. 하지만 거칠기 짝이 없다. 간벌(間伐)한 나무들을 길에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지나다니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널따란 임도를 다시 만나게 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아까 오른편으로 나뉘었던 임도와 다시 만나는 게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까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신경 쓰지 말고 향적산방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의 국사봉의 방향표시를 따른다. 잠시 후 연화사로 들어가는 길이 또 다시 나뉘나 개의치 않고 그냥 통과한다. 들어가 볼 필요도 없다는 얘기이다.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기도터가 분명할 테니까 말이다.



15분쯤 걸었을까 몇 채의 가옥들이 나타난다. ‘향적산방이라는데 일명 산제당이라 불리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볼거리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거북바위 하단부에는 기도를 드리는 동굴이 있고, 용바위는 거북바위 남동쪽 아래에 있는데 나무숲에 가려져 있다고 한다. 아무튼 산제당은 조선 후기 역학(易學)의 대가이자 남학계의 신종교인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의 창시자인 일부(一夫) 김항(金恒) 선생이 정역(正易)을 공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세계의 중심지는 한국이며 한국의 중심지는 계룡산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김항 선생은 산제당에 있는 거북바위가 하도(河圖)이며, 용바위는 낙서(洛書)로 이곳이 계룡산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했다. 역술인들은 하도와 낙서를 주역(周易)의 기본원리로 보고 있다.



산길은 향적산방의 경내를 가로지르며 나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어른들 두세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아야만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허리통이 굵은 것이 몇 백 년은 족히 되었겠다. 그만큼 이곳 산제당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참을 뭉그적거린 후에야 산행을 이어간다. 김항선생의 기도터를 기웃거려보고 싶었으나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했다. 최소한 그가 수련을 했다는 곳을 보고난 후에야, 그가 왜 세상의 중심을 한국이라고 했는지를 눈치라도 챌 수 있지 않겠는가. 아쉬운 일이다. 아무튼 10분 후 장군암(將軍庵)을 만난다. 여염집을 닮은 건물들이 몇 채 들어서 있는 것이 이곳 역시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기도터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건물 뒤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 아래에는 신당(神堂)이 지어져있을 것이다. 만일 그곳에서 물이라도 난다면 용궁(龍宮)’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장군암을 지나서도 산길은 또렷하다. 둘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정도로 넓다. 거기다 길가에 밧줄난간까지 만들어 놓아 폭설 때도 길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겠다. 그렇게 잠시 걸었을까 진행방향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이 계단은 능선 위에 있는 헬기장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면 능선(이정표 : 국사봉0.32Km/ 엄사리(청송약수터)4.68Km)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헬기장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이곳은 오른쪽 만운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다. 확인은 안 해봤지만 이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라고 한다. 가파른 등성이를 고집하는 길과 왼편 비탈을 돌아 작은 산등으로 오른 다음 고스락으로 오르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가든 10분이면 고스락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왼편 비탈을 돌아서 오르기로 한다. 이정표에 국사봉으로 표기된 방향이다. 여기서 국사봉은 향적산의 정상을 이르는 말이니 참조한다. 그런데 왜 국사봉이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따가 황산성 방향으로 능선을 타다보면 국사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봉우리를 만나게 되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3분쯤 지나자 대피소에 이른다. 왼편 계룡시를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인 곳인데 널찍한 것이 비박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겠다.



대피소에서부터는 다시 능선을 탄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처음에는 밧줄난간을, 그리고 다음에는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계단을 오르는 길 오른편에 거대한 송신탑이 나타난다. 대전방송(TJB)의 향적산중계소란다. 대부분의 송신탑들은 산의 꼭대기에다 모셔놓는데, 이곳은 산의 허리에다 들어앉혔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본받을만한 발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7분쯤 오르니 향적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이다.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상표지석 외에도 향적산의 명물로 불리는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와 오행비(五行碑), 그리고 삼각점안내판(공주 314, 실제 삼각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향적산(香積山)향이 쌓인 산이라는 뜻이다. 계룡산과 맥락을 같이하는 이 산은 옛날부터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많은 종교인과 기복을 빌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수도를 위해 이 산으로 입산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피운 향의 향기가 쌓여 있다는 뜻에서 산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전해진다. 한편 이곳 향적산은 계룡산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는 산세로 보기도 한다. 또한 향적산에서 보이는 계룡산은 정상인 천황봉을 큰 닭의 머리라고 볼 때 서편의 연천봉과 동편의 황적봉이 힘차게 펼친 닭의 날개로 보기도 한다.



정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와 오행비(五行碑)가 아닐까 싶다. 특이하게 생긴 외형(外形)은 일단 제켜놓고 보자. 그리고 왜정(倭政) 때 평양에 살던 조미양 할머니가 묘향산과 구월산에 있던 단군성조의 얼을 이곳으로 옮겨와 신봉하는 활동을 하다가 1948년 작고한 이후 그의 며느리인 손씨 부인이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들을 세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일단 믿어보자. 그렇다면 그 비석에 적힌 문구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문구들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천지창운비는 사각형 돌로 된 받침대 위에 세운 약 2m 높이의 콘크리트 사각형 기둥이다. 기둥 꼭대기에는 지붕격인 옥개석이 얹혀 있다. 각 면은 북, , , 서쪽 방향으로 흰색 대리석 판이 박혀 있다. 석판마다에 한문으로 북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동면에는 천계황지(天鷄黃地), 남면에는 남두육성(南斗六星), 서면에는 불() 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천지창운비 서쪽 약 1.5m 거리에 있는 오행비는 흰색 대리석 받침돌 위에 세운 높이 약 1.6m에 폭이 각각 30cm가량 되는 짙은 회색 화강암 사각기둥이다. 이 오행비 북면에는 한문으로 한 일(), 동쪽에 다섯 오(), 남쪽엔 모일 취(), 서쪽에는 불 화() 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계룡산이 있는 북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연천봉에서 시계방향으로 문필봉과 쌀개봉, 천황봉이 날아갈 듯이 자태를 뽐낸다. 천황봉 오른쪽으로는 황적봉, 치개봉, 우산봉, 갑하산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동쪽에는 서대산과 천만산이 보이고 그 뒤로는 대둔산이 하늘금을 이룬다. 남쪽에서도 수많은 산들이 고개를 내민다. 상여바위 뒤로 함지봉으로 이어지는 남릉이 꿈틀거리고 있고, 남서(南西)로는 논산의 황산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상월면 들판과 구릉지대 뒤로 금북정맥 백월산과 오서산, 성태산 등이 아른거린다. 북서쪽 멀리로는 청양의 칠갑산과 금북정맥의 높고 낮은 산들이 눈에 와 닿는다.



남쪽 방향에는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았다. 실경(實景)과 비교해가면서 즐기라고 계룡시를 주로 한 조망안내도까지 세워두었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싱여바위(첨부된 지도에는 농바위로 표기되어 있다)를 거쳐 함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남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쓴 능선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산은 남릉을 탄다.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는 방향인데, 길이 또렷하기 때문에 이정표가 없다고 해서 들머리를 못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눈이 호사(豪奢)를 누린다. 화려한 눈꽃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상으로 오를 때 눈길을 걷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뭔가 10% 정도 부족하다고 느꼈었는데 그 부족분을 이곳 남릉에서 채워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10분쯤 걸었을까 거대한 암릉이 앞을 가로막는다. 향적산의 백미(白眉)로 알려진 상여바위(농바위)이다. 상여바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위에다 눈으로 덧칠까지 했다. 한마디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얘기이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똑 떨구던 옛 동심(童心)이 살아났나 보다. 그러니 오늘 산행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여바위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무조건 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아래에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위험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오르고 나면 바윗길이 제법 널찍하기 때문이다. 낭떠러지 위로 난 비탈길을 잠깐 걷기도 하지만 조금만 조심한다면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역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바위벼랑 위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계룡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오른편 앞에는 어은리 들판 넘어 탑산여맥 산줄기가 늘어서있다. 그 오른편 산줄기는 아마 노성지맥일 것이다. 그리고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방금 전에 올랐던 향적산이 살펴 가시라고 손짓을 한다. 송신탑이라는 뾰쪽한 고깔모자를 쓰고서 말이다.



조망을 즐기며 10분쯤 걷다보면 자 안부를 만난다. 이정표(황산성6.9Km/ 향국사3.0Km, 무상사 1.4Km/ 국사봉?)가 파수를 서고 있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무상사가 나온다. 그렇다면 이 지점을 경유하는 산행코스가 멋지게 그려질 수도 있겠다. 요 아래 무상사에다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오늘 우리가 선택했던 향적산방(또는 싸리재 경유)-헬기장-향적산-상여바위봉-이곳 안부를 거쳐 무상사로 되돌아가는 원점회귀 코스 말이다.



이제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거기다 능선만 따르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저 환상적인 눈꽃잔치에 푹 빠지고 볼 일이다. 그렇게 8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안부(이정표 : 황산성5.6Km/ 대명리(극락사)0.4Km/ 향적산(국사봉)3.0Km)를 만난다. 이번에는 자 안부이니 논산시 상월면 방향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12분 후에는 국사봉(442.3m) 위에 올라선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두어 번의 오르내림이 반복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곳 국사봉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 안 보인다는 얘기이다. 그 흔한 이정표마저도 없다. 조금 앞서 지나간 일행이 매달아 놓은 종이까지 없었더라면 이곳이 국사봉인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게 뻔하다. 그나저나 국사봉이라는 지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하나의 산에 같은 이름의 봉우리가 둘이어서는 안 되는데도, 향적산의 정상과 이곳의 지명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럼 국사봉(國事峰)이라는 지명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조선조 태조가 신도안을 도읍지로 정하려 할 즈음 이 봉우리에 올라 계룡산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고 나라를 위한 큰 인물이 나올 곳이라 하여 한자로 國事峰’, 또는 國師峰이라 지었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향적산의 정상을 국사봉으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그 산세(山勢)가 이곳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 이곳을 백련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니, 향적산의 정상을 국사봉’, 그리고 이곳을 백련봉으로 부르는 게 옳을 것 같다.



눈꽃잔치를 즐기는 산행이 계속된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짙어졌다. 걷는 속도가 더뎌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무튼 국사봉에서 잠시 내려갔다 싶은데 산길이 갑자기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헷갈리기 딱 좋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능선을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방향을 튼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시 능선의 모양새로 되돌아온다. 이제야 제대로 진행하고 있다는 믿음이 간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안부사거리에 내려서는데 윗산명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곳에서 반가운 지명 하나를 발견한다. 이정표(황산성4.9Km/ 도곡리방향/ 대우리(백련사)0.4Km/ 향적산(국사봉)3.3Km)백련사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올랐었던 국사봉을 백련봉으로 불러야할 이유가 훨씬 더 또렷해졌다.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지만 눈꽃잔치는 아까보다는 조금 약해졌다. 그만큼 고도(高度)를 낮추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눈요깃거리까지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의 경관을 기웃거리며 25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작은산명재’(이정표 : 황산성3.4Km/ 도곡리방향/ 어은리1.1Km/ 향적산(국사봉)4.8Km)에 내려선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약간은 경사가 가팔라지는 모양새이다. 통나무계단을 설치한 곳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는 밧줄난간까지 만들어 두었다. 거기다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괜찮게 생긴 바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15분 후에는 수척골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물론 아랫산명재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이곳 수척골산도 정상표지석이 없기는 백련봉(국사봉)과 매한가지이다. 이정표도 물론 없다. 누군가가 삼각점안내판(공주 454)의 기둥에다 매달아 놓은 표지판(수척골산 366.2m)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는다. 그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커다란 바위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능선을 치고 오르니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봉우리의 위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370m봉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정상에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시도 없다. 그저 마창 산죽산악회의 노란색 시그널이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영진지도를 보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주산이 있다고 표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이곳 370m봉이 주산(황산)이라는 것이다. 영진지도에 주산이라 표기된 지점의 높이가 고작 308m에 불과하다면서 말이다. 62m나 낮은 봉우리에다 이름까지 갖다 붙일 이유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 370m봉의 소나무 숲속에서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삼각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나저나 영진지도에 표기된 지점을 다녀온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370m봉에서 15분쯤 더 진행하면 공터로 이루어진 함지봉 정상에 올라선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한쪽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이정표(표정리1.4Km/ 향적산6.5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 또한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그저 삼각점(논산 022)에 적힌 높이(386m)를 보고 이곳이 함지봉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 표시가 있기는 하다. 어느 산꾼이 자신의 시그널에다 함지봉 386.5m’라고 써놓았다.



잠시 후 시야가 툭 터지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오른편으로 드넓은 논산 들녘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밧줄 난간까지 만들어 놓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황산성1.7Km/ 표정리0.6Km/ 향적산(국사봉)6.8Km)가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표정리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능선의 풍경이 확 바뀐다. 바위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숫제 암릉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산길은 바윗길과는 거리가 멀다. 바위를 피해가며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바위 위를 오를 때도 있으나 평평한 것이 일반 산길과 다름이 없다. 그저 특이하게 생긴 바위들에 눈을 맞추며 걷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14분쯤 걸으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생긴 깃대봉에 올라선다. 그러니 이곳이 어디라고 여길만한 표시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없다. 그저 앞서간 일행이 붙여놓고 간 간이표시(깃대봉 304.9m)를 보고 이곳이 깃대봉인가 할 따름이다.



깃대봉을 지나서도 능선의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비록 잠시이지만 큰 바위들이 늘어선 멋진 산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드라운 흙길이 나타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264m봉이다.



웃자란 잡초들로 가득 차 있는 264m봉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황산성0.43Km/ 향적산(국사봉)8.2Km)로 나뉜다. 황산성으로 가려면 직진, 그러니까 오른편 길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왼편 길이 더 또렷하니 문제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정표를 따르기로 한다. 이정표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하산 길을 재촉한다. 이 구간은 가파를 뿐만 아니라 질퍽거려 미끄럽기까지 하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밧줄에 의지해서 조심조심 내려가면 되니까 말이다. 가파른 구간이 끝났다싶으면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널찍한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생김새로 보아 영락없는 성터이다.



분지에 이르니 황산성이라고 적힌 표석(標石)이 눈에 띈다. 그래 이곳이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 황산성(黃山城)이었던 것이다. 황성(黃城) 또는 북산성(北山城),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황산성(黃山城)은 연산 지역과 논산 방면 황산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깃대봉 남릉 일원에 축조된 산성(山城)이다. 백제의 웅진시대부터 사비시대에 걸쳐 축조된 성으로 추측되며, 북쪽은 험난한 산세로 되어 있어 적의 침입이 어려운 지세를 이용하여 자연석을 축성하였고 나머지는 활석을 사용 축성하였는데 성 높이는 서부가 2m, 동부가 1.8m이고 성의 폭은 1m내외이며 성 둘레는 870m이다. 대부분 도괴된 상태로 성의 동서남북에 문의 흔적이 있고, 성의 북쪽 봉우리 부분에 30정도의 넓은 면적이 있어서 군을 사령하던 장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산현 성곽조는 주위가 1,740척이고, 높이가 12척인데, 안에 우물 1개소와 군창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성내 곳곳에서 백제 토기와 고려와 조선시대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이중 기와조각에 찍힌 대안원년(大安元年)’1209(고려 희종 5)에 해당된다. 특히 황산인방(黃山寅方)’으로 판독되는 기와는 이곳이 백제 5방의 하나인 동방 득안성(得安城)에 관계된 곳이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이로 미루어보아 백제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표(황산성/ 향적산(국사봉))가 가리키는 대로 하산을 시작한다. 그리고 2~3분 후에는 주차장에 내려선다. 이정표(관동리방향/ 표정리 2.0Km, 덕암리 4.5Km)향적산등산로 안내도’. 그리고 황산성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진 주차장은 일단 넓다. 그리고 포장임도로 우리가 하산지점으로 계획하고 있는 관동리까지 연결된다. 승용차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대형버스의 진입은 불가능하단다. 계속해서 걸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또 다른 이정표(관동리3.5Km/ 표정리방향/ 향적산(국사봉)8.85Km, 황산성 0.15Km)에는 관동리까지의 거리표시가 되어 있다.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앞으로도 3.5Km를 더 걸어야한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지름길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다.



임도를 따라 3분쯤 걷다가 첫 번째 묘역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조금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두 번째 묘역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만 제대로 된 길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연산향교로 이어진다고 하니 참조한다. 아무튼 우린 길을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커녕 짐승들조차 다닌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찔리거나 할퀴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가다 싸대기까지 얻어맞아가며 10분 남짓 내려서니 임도가 나온다.



오른편에 채색(彩色)이 된 전각이 보인다. 하지만 사찰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곳 향적산 인근은 기도터가 많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 저 건물도 기도터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향적산(香積山)'향이 쌓인 산'이라는 뜻이다. 저런 기도터가 하도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기도터를 대표하는 게 바로 향()일 테니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연산 재래시장 주차장

임도를 따라 10분쯤 걸어 나가면 하산지점으로 예정된 관동리가 나온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린 연산면소재지까지 걸어 나갈 수밖에 없다. 10분 이상을 더 걸어서 말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중간에 멈춘 일이 없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