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월) - 10.12(금)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둘째 날 : 만선산(萬仙山)과 비나리길(崑山 掛壁公路)
특징 : 만선산(萬仙山)은 만 명의 신선이 살 정도로 아름다운 봉우리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풍경구(風景區)는 하남성 신향시 휘현의 태항산대협곡 남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총면적 64Km²에 최고해발고도는 1,672m. 수많은 봉우리들이 층층이 겹치면서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데다, 엄청난 석벽(石壁)경관이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풍경구의 안에는 영화와 TV 촬영지로 유명한 곽량촌(郭亮村), 조용하고 우아한 마을 남평(南坪), 지상천국이라는 로라채와 함께 홍암절벽대협곡, 절벽장랑, 천지. 연화분, 백령동, 함천, 일월성석, 흑룡담폭포, 오봉산 임해, 황룡동, 마검봉, 손빙천, 칠랑봉 등 200개소가 넘는 명승지들이 있다고 한다. 이를 모두 둘러보려면 2~3일 정도가 소요된단다.
▼ 만선산으로 이동할 때는 비나리길은 이용했다. 왕망령경구의 산문에서 ‘SUV 차량’에 올라타면 만선산경구의 산문까지 이동시켜준다. 이때 비나리길을 통과하는 것이다. 비나리길은 검문소(檢問所)의 역할을 하고 있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시작된다. 비나리길의 원래 이름은 ‘곤산괘벽공로(崑山 掛壁公路)’. 한쪽 방향으로만 달릴 수 있는 이 길은 외부차량의 진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풍경구의 로고가 그려진 전용차량만 이용할 수가 있단다. 지역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운영권까지 그들에게 주어졌나보다.
▼ 비나리길은 절벽에 동굴을 뚫어 만든 길을 말한다. 곤산의 절벽 위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산 아래의 외부로 나가기 위해 징과 망치로 뚫은 절벽 터널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선지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자락 절벽에 동굴을 뚫어야 했던 사연도 여럿으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산을 가로질러 병원을 가야 하는 산마을의 염원을 담아 10년간 고생한 끝에 뚫린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이드는 여자가 귀한 마을에서 살던 총각들이 결혼할 여자들을 얻기 위해 낸 길이라고 했다.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던 석애구(錫崖沟)는 근친혼(近親婚)으로 인해 지적장애인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길을 수직암벽에 뚫은 것이 비나리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설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얘기를 옮겨볼까 한다. 왕망령의 서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석애구 마을은 사면이 웅장한 산세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쉬엄쉬엄 하천이 흐르는 그림 같은 마을이라고 한다. 반면에 이런 환경은 외부와의 단절을 초래했고, 이는 주민들에게 큰 고통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 견디다 못한 이곳 주민들이 1960년에 자발적으로 곡괭이와 정으로 절벽을 뚫어 괘벽공로를 만들고 바깥세상과 소통했다는 것이다. 약 3km의 길이 완성될 때까지는 무려 15년이나 걸렸단다.
▼ ‘비나리길’이라는 지명의 유래 또한 재미있다. ‘비나리여행사’에서 가장 먼저 안내를 했다고 해서 '비나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부를 마땅한 이름이 없어 ‘비나리 여행사에서 갔던 그 길 있잖아’ 이러다가 비나리길로 굳어져 버렸단다.
▼ 비나리길은 안에 들어가 걸을 때보다 밖으로 나와 멀리서 볼 때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인공 동굴에 창문처럼 환기구를 냈는데, 저걸 죄다 사람 손으로 만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길 아래는 당연히 깎아지른 절벽이다.
▼ 절벽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도 없이 뚫려있다.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전망대다.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까지 했다.
▼ 비나리길에서는 20분 조금 못되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200~300m 정도의 거리를 걸으면서 주변 경관을 직접 느껴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면 카메라에 가득히 담아두면 될 일이다. 덕분에 우린 JTBC-TV의 ‘뭉쳐야 뜬다’ 멤버들이 떨던 너스레를 따라해 볼 수 있었다.
▼ 절벽으로 난 창(窓)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액자 속에 갇혀있는 풍경화 같다. 드넓은 태항산이 제한된 공간으로 들어오면서 그 아름다움이 더욱 세련된 모양이다. 한 폭의 그림, 그것도 아주 잘 그린 풍경화라 하겠다.
▼ 비경의 산길을 지나면 만선산이 사직되는 관문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린 자그마한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만선산을 둘러보게 된다. 만선산 풍경구는 크게 절벽장랑으로 유명한 곽량촌과 남평촌으로 나뉘는데 곽랑촌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신선들이 살고 있기라도 한 듯 신비로운 풍경이 자못 범상치가 않다.
▼ 만선산은 곽량촌을 거쳐서 가게 된다. 그런데 버스가 수천 길 높이의 바위벼랑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암벽 등반가들도 부담스러워 할 만큼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운 바위절벽인데도 말이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위들이 자주 일어나는 중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저곳에도 길이 나있었다. 절벽장랑(絶壁長廊)이란다. 절벽장랑은 말 그대로 ‘절벽 안에 있는 회랑’이라는 뜻으로 바위절벽의 바깥에 구멍이 뚫려 있는 동굴이다. 이 회랑은 고도가 1,700m나 되는 곳에 살고 있던 곽량촌의 주민 13명이 직접 뚫은 것이라고 한다. 1971년부터 시작해서 1977년까지 6년이 걸렸단다.
▼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덧 바위벼랑 속으로 파고든다. '세계 9대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인공터널 '곽량동(郭亮洞, 궈량동)'이다. 품고 있는 내력도 만만치 않지만 보여주는 풍광 또한 뛰어난 곳이지만 그것을 눈에 담을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잠시나마 차량을 멈추어주는 배려가 없이 그냥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가이드에게야 일상(日常)이겠지만 이방인인 우리로서는 선경(仙境)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부득이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올려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설명에 필요한 사진 몇 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예로부터 곽량촌(郭亮村, 궈량춘)’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 사다리길)' 뿐이었다고 한다.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했을 것이다. 이에 마을 서기였던 신명신(申明信, 선밍신)의 제의로 신신복(申新福, 선신푸), 왕휘당(王懷堂, 왕휘이당), 신복귀(申福貴, 선푸구이)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측정했고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상급기관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1971년 가을이다. 해머와 정(釘) 등 돌 깨는 장비를 구입한 마을 주민들은 13명의 '동굴 굴착 돌격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1972년 3월9일 본격적인 터널 공사에 들어갔다. 그들은 허리에 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 홍암절벽 곳곳에 일렬로 발파구를 만들었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단다. 당시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식비라고 해봐야 고작 ‘0.12위안’에 불과했다니 강냉이로 만든 죽이나 떡, 찜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을 것은 당연하다. 1975년 말에는 마을주민이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단다. 더 이상의 경비 조달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곽량촌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 절벽 중간에서 발파 작업을 하려면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어 집집마다 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단다. 그렇게 해서 절벽에는 길이 생겨났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2만6000㎥의 돌덩어리를 캐냈고, 정 12톤을 마모시켰으며, 8파운드짜리 쇠추 4000개를 소모했단다. 1977년 5월1일, 마침내 '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곽량터널’은 왕휘당(王懷堂, 왕휘이당) 등 희생자들을 남기고 공식 개통됐다. 터널이 완공된 뒤, 사람들은 이곳을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라 불렀다. 그리곤 ‘홍기거(紅旗渠, 홍치쥐)’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실례이자 가난한 민초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자리매김 했다.
▼ 절벽장랑이 끝나는 곳에는 ‘곽량촌(郭亮村, 궈량춘)’이 자리 잡았다. 해발 고도가 1700m나 되는 태항산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형성된 자연 부락으로 하남성(新鄕市 輝縣)의 태항산에 속해있지만 만선산(萬仙山)과 잇닿아 있고, 산서성(晋城市 陵川縣)과도 접해 있다. 현재 83가구에 32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곽량촌의 역사는 2천 년 전인 전한(前漢: BC206-AD8)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협(晋陜) 일대에 살던 이들이 난리를 피해 이동했고, 전한 말기부터 촌락을 형성했다고 전해진다. 왕망(王莽) 시대(AD8-23)에 후한(後漢, 25-220)의 장수 곽량(郭亮)은 관군의 공격에 태항산(太行山)까지 쫓겨 왔다고 한다. 이에 그의 부장 ‘주군(周軍, 조우쥔)을 매수한 관군은 산문을 봉쇄해 고사작전을 폈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현양뢰고(懸羊擂鼓)‘이다. 북(鼓)을 치고 산양(山羊)을 달리게 해 적군을 속이는 동안 군사를 산서성(山西省)으로 빼돌렸다는 것이다. 이에 분통이 터져 죽은 적장이 묻힌 곳은 '조우쥔장(周軍場)'이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단다. 후세 사람들은 곽량의 용기와 지략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주둔했던 절벽도 '곽량애(郭亮崖, 궈량야)'라 부른단다. 곽량촌에는 곽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말명초(元末明初), 수도인 남경((南京, 난징)에서 변방인 청해(靑海, 칭하이)로 쫓겨나게 된 ‘신씨’ 가문이 이곳 곽량촌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커다란 가마솥을 쪼개어 수백 명이 나눠가졌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원래대로 붙일 심산이었다. '큰 가마솥 신(大鍋申)씨'라 불리는 이유이다. 또한 그 후손들은 곽량동을 만드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항산 협곡을 끼고 온갖 풍파를 이겨낸 곽량촌은 '중국 제일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고 한다. ‘사진(謝晉, 셰전)’이 연출한 '청량사의 종소리(淸凉寺的鐘聲)' 등 40여 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하긴 텅 빈 세트장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골 마을이었으니 영상으로 옮기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었을 게 분명하다. 카메라만 돌려도 한 세대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곳을 어디서 쉽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를 태운 버스는 이곳도 역시 통과해 버린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조금 내주었으면 하는 우리의 가녀린 바램이 무참히 짓밟혀 버린 것이다. 가이드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게다. 하루에 천계산과 만선산, 왕망령에 단분구까지 둘러봐야하니 자투리 시간일지라도 어디 쉽게 쓸 수 있었겠는가. 값싼 패키지여행을 따라나선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 곽량촌을 지나쳐버린 버스는 잠시 후 곽량촌과 절벽장랑이 잘 조망되는 멋진 전망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전망대에는 ‘취곡단병(翠谷丹屛)’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붉은 병풍에 둘러싸인 비취빛 골짜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가잘 잘 표현한 이름이라고 하겠다.
▼ 난간으로 나아가면 바위절벽을 뚫고 지나간 절벽장랑(絶壁長廊)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까 차를 타고 지나오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았던 풍경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절벽장랑’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참고로 태항산 일대에는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저곳 절벽장랑 말고도 아까 지나왔던 비나리길(곤산터널)과 석애(錫崖, 시야)터널, 회룡(回龍, 후이롱)터널, 정저(井底, 징디)터널, 진가원(陳家園, 전쟈위안)터널 등이 있다고 한다.
▼ 조금 멀기는 하지만 곽량촌도 시야에 잡힌다. 그런데 마을의 풍경보다는 그 아래에 형성된 붉은색 절벽과 그 틈새에서 쏟아지고 있는 폭포가 더 눈길을 끈다. 다른 한편으론 절벽장랑이 뚫리기 전까지 저런 절벽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절벽의 높이가 인간이 내려오기에는 너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 만선산은 천계산보다 웅장한 멋은 덜하지만 아기자기한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이름처럼 신선이 노닐만한 풍경이라 하겠다.
▼ 만선산 투어는 달리는 버스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편이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만선산은 천계산과 비슷한 비주얼(visual)이라고 보면 되겠다. 수백 길 높이의 바위절벽들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태항산맥이 갖고 있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어떤 이들은 저런 풍경을 보고 칼봉, 칠형제봉, 호리병봉 등 봉우리의 이름들을 잘도 나열하고 있었지만 이곳 지리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저 신선들이 산다는 봉우리일 따름이다.
▼ 전망대를 출발한 셔틀버스는 절벽 허리춤으로 난 길을 따라 사정없이 달린다. 곡예를 하듯 달리는 차속에서의 스릴은 액티비티 스포츠(activity sports)와는 또 따른 느낌이자 여행만이 가질 수 있는 남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다. 스릴에 더해 아름다운 경관까지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 만선산의 기암괴봉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버스는 이내 산 아래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이른다. 이젠 만선산의 또 다른 명소인 단분구를 둘러볼 차례이다. 단분구(丹分構)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러 가지 풍광을 보여 준다. 높이 솟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펼쳐지는 풍경들, 그리고 우리가 지나왔던 곤산의 괘벽공로 터널 창들이 아득히 보인다. 그래선지 들머리에다 ‘선경(仙境)’이라고 적힌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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