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13구간(한반도 길)
여행일 : ‘23. 2. 18(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안남면과 안내면 일원
여행코스 : 안남면사무소→독락정→금정골→둔주봉→한반도전망대→점촌고개→화인마을→염수재(걸포마을)→신촌교(거리/시간 : 13km, 실제는 13.89km를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세 번째 구간인 ‘한반도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둔주봉이라는 산봉우리 하나를 오롯이 넘는다. 대신 금강의 물줄기가 만들어낸 절경, 즉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눈에 담게 된다. 구간 브랜드로까지 굳어진 이유이다.
▼ 들머리는 안남면사무소(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보은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옥천방면으로 12km쯤 내려오다 인포교차로(옥천군 안내면 인포리)에서 575번 지방도(안남로)로 옮겨 5km쯤 들어오면 안남면소재지인 ‘연주리’에 이르게 된다.
▼ ‘한반도길’이란 이름처럼 대청호의 상류, 즉 금강 물줄기가 꿈틀대면서 빚어놓은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눈에 담는 구간이다. 대신 전망대가 있는 ‘둔주봉(384m)’을 오롯이 넘게 된다. 이밖에도 200m 내외의 능선을 두 곳이나 더 넘어야만 한다. 구간 거리가 13km에 불과한데도 쉽지 않은 코스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 오백리길 13구간의 얼굴마담은 ‘한반도 지형’이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둔주봉(또는 등주봉)이라는 산봉우리부터 올라야만 한다. 면사무소 앞에 산행안내도를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오백리길은 독락정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금정골에서 정상을 향해 치고 오른다.
▼ 안남초등학교 앞(남쪽)으로 걸어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오늘 걷게 될 안남면과 안내면은 신라의 ‘아동혜현(阿冬兮縣)’에서 시작된다. 아(阿)는 ‘수(首)’의 뜻이고 동(冬)은 ‘읍(邑), 또는 고을’의 뜻을 지녔으니 고대부족국가의 통치자가 있었던 고을, 즉 ‘왕읍(王邑)’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러다 고려 초(940년) 안읍현(安邑縣)으로 이름을 바뀌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옥천군 안내면과 안남면이 되었다.
▼ 학교 앞 이정표는 직진 방향의 ‘독락정’으로 가란다. 하지만 반대편에 위치한 ‘인포리’도 함께 제시한다. 막 되먹은 탐방로(그만큼 거칠었다)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즉 둔주봉에서 한반도지형을 살펴본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 도로를 따라 인포리로 가라는 안내일지도 모르겠다.
▼ 도로변의 옛 우물은 지붕까지 올려 보존하고 있었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한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으로 살짝 덧씌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독락정(연주2리)’에 이르니 거대한 당산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초계주씨 집성촌으로 마을 옆 정자에서 이름을 따왔다. 아니 정자를 세운 독락옹(獨樂翁)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주몽득은 임진왜란 때 추령에서 왜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고, 1607년(선조40) 사답사(四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 1000명을 소환해오기도 했다. 1624(인조2)에는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는 공도 세웠단다.
▼ 내일은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하지만 농사일을 시작한다는 춘분(春分)은 한 달이나 남았다. 그런데도 부지런한 농부는 이미 논을 갈고 있었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 잠시 후 금강의 물줄기가 보이는가 싶더니 비탈진 언덕에 걸터앉은 ‘독락정(獨樂亭, 충북 문화재자료 제23호)’이 얼굴을 내민다. ‘영묘사’ 등 3개의 건물이 나란히 늘어섰는데, 인근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등 서원 구실을 했다는 독락정은 맨 끝에 있다.
▼ 정자 주변은 ‘초계주씨세거지비’와 시조인 한림학사 주황의 위령비, 독락옹 주몽득의 송덕비 등을 위시해 ‘초계 주씨(草溪 周氏)’ 가문의 여러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시조인 주황(周璜)은 주나라 왕손의 후예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냈다고 한다. 오계지란(五季之亂) 때인 907년(효공왕 11년) 신라로 건너와 초계에 정착했단다.
▼ 독락정은 1607년(선조 40년) 절충장군·중추부사 벼슬을 지낸 주몽득(周夢得)이 세운 정면 2칸(1965년 개축하면서 양쪽에 툇마루를 설치 3칸이 되었다)×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다. 정면에 당시 군수였던 심후(沈候)의 ‘독락정’이란 현판이, 마루에는 송근수(宋近洙)의 율시기문(律詩記文)을 비롯한 10여 점의 기문액자가 걸려 있다.
▼ 독락정을 살펴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도로변에 위치한 양수장의 축대에는 민화가 그려져 있었다. 강변에 둘러앉아 물고기를 관찰하는가 하면 남자아이들은 물고기를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 이제 오백리길은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강물을 왼편 옆구리에 차고 걸으니 ‘강변산책로’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강 건너는 한반도길(13구간)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낸 지형(한반도 모양의 串)이다. 그 끄트머리 백사장을 바라보며 옛 선비들이 느꼈을 풍취를 이입해 본다. ‘맑게 흐르는 강물은 십리 길의 깨끗한 모래 위에 거울처럼 열려있네’라는 독락정의 상량문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리면서...
▼ 강변에 기대어 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겨울철 긴 가뭄은 대청호 수위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덕분에 대청호의 얼굴마담인 호숫가 모래사장이 속살까지 보여주건만,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 굽이굽이 흘러온 금강은 도중에 지류를 품으면서 몸집을 한껏 부풀렸고, 그 큰 덩치 덕분에 낚시꾼까지 품었다. 저 낚시꾼은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옥천 제일의 경관을 찌 너머에 두었으니 입질이 조금 없다고 무슨 대수겠는가.
▼ 길은 차도에 가까울 정도로 넓다. 아니 지나다니는 차량이 제법 되는지 바퀴자국까지 나있다. 하지만 이 구간은 비가 많이 올 때는 진입이 통제된다. 대청호의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잠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오른편 산비탈은 온통 칡넝쿨로 덮여있다. 공생(共生)이라는 산림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하지만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줄기·잎·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식량을 대신했으며, 질긴 껍질은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됐다. ‘동의보감’은 칡꽃에 대한 효능도 적고 있다. 칡꽃과 소두화(팥꽃)를 같은 양으로 가루를 내어 먹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줄 모른단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효능이 아닐까 싶다.
▼ 강변의 산자락은 전형적인 육산, 하지만 물줄기가 휘돌아가는 곳에서는 암벽이 돌출되기도 한다. 그게 조화로웠던지 금강을 둘러싸고 있는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양봉 농가가 나온다. 벌통 수십 통을 뒤꼍에 두고, 앞마당에는 큰 평상과 경운기까지 놓여있다. 농가의 틀을 갖춘 모양새인데, 부업으로 고기까지 낚는지 강가에 고무보트도 한 척 묶여있었다.
▼ 주인장은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모양이다. 양봉의 규모가 제법 큰데도 천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굴뚝의 온기에 몸을 의탁하던 새 한 마리가 사람 소리에 놀라 후다닥 날아올랐다. 하지만 하릴없을 게 뻔한 주인장은 인기척도 내지 않는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고성삼거리’. 오른편은 금정골까지 에돌아가는 게 귀찮은 이들이 곧장 ‘등주봉’으로 치고 오르는 지름길이다. 아니 아까 마을(독락정)에서 만난 주민은 마을에서도 등주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고 했었다.
▼ 이정표(금정골↑ 1.0㎞/ 등주봉→ 1.9㎞/ 독락정↓ 2.2㎞)가 지시하는 금정골 방향으로 직진한다.
▼ 누군가의 불행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기생식물로 몸살을 앓는 나무들이지만, 우리 같은 나그네들에게는 강물과 어우러지는 멋진 풍광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 17분쯤 더 걸어서 닿은 ‘금여울 농원’에서는 주인장의 풍류를 엿볼 수 있었다. 금강을 마주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농원의 이름에 담았다. ‘錦江〈 금여울’. 누가 봐도 우리말의 한판승이다.
▼ 주인장의 멋은 ‘솟대’에서도 느껴졌다.
▼ 조금 더 걸으면 마지막 농가. 일구어놓은 텃밭이 제법 너른데도 움막에서는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풍광이 좋아 나 역시 홍천에다 농장을 마련했었다. 그게 벌써 20년이 되었고 틈틈이 일군 과수원도 틀을 갖췄다. 하지만 놀러 다니기 바쁜 난 고작해야 일 년에 열흘 정도 쉬다 올 따름이다. 내 나이 아직은 젊었음이리라.
▼ 이곳에서 길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농가의 맞은편 텃밭을 지나기만 하면 탐방로가 선연하게 나타난다.
▼ 길은 나있지만 편치는 않다. 무정한 잡목은 길까지 잠식해버렸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넝쿨식물이 발목을 휘감기도 한다.
▼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강변 풍경이 고와선지 고달프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 그렇게 5분 남짓 진행하자 또 다른 갈림길, 즉 ‘금정골삼거리’가 나온다. 곧장 직진하면 ‘피실’로 연결된단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동이면 석탄리의 ‘피실’, 즉 대청호로 인해 지금은 물에 잠겨버렸다는, 수몰을 피한 곳에 오토캠장(옥천 팜랜드)을 조성해놓았다는 그 마을과는 어떻게 다를까?
▼ 이정표(등주봉 정상→ 1.3㎞/ 피실↑ 1.4㎞/ 독락정↓ 3.2㎞)는 등주봉 정상을 향해 오른편 능선을 치고 오르란다.
▼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직선으로 치고 오르는 산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1.3km를 오르는 동안 고도를 300m 이상이나 끌어올리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 가끔은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산길로 들어선지 18분. 땀을 한바가지가 흘렸는데도 이정표(등주봉 정상 0.7㎞/ 금정골 0.6㎞)는 아직 절반도 못 올라왔단다.
▼ 이후에도 숨이 턱에 걸리도록 치고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오르막길은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는 게 상책이다. 수행자가 참선하듯이 마음을 비우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디게 옮겨본다.
▼ 구호지점표지판의 변신? 탐방로의 주요 지점에는 ‘안심위치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조재난이 주목적인 여느 산들과는 달리 ‘등산로 범죄예방’의 기능을 더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정상에 가까워지자 경사가 더 가팔라졌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일러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경사가 오죽 가팔랐으면 땅에다가 코를 박다시피 하며 오르겠는가.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둔주봉(屯駐峰, 또는 등주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상(384m)에서는 고진감래라는 고사성어도 남의 집 얘기일 따름이었다. 그 고생을 하며 올라왔건만 서너 평 남짓한 공터에 정상표지석(재경안내산악회에서 세웠는데 ‘登舟峯’으로 적고 있었다. 요 아래서 모여 사는 ‘초계주씨’들 족보에 그렇게 쓰여 있단다) 하나만 외로웠기 때문이다. 한 곳으로만 트이는 조망도 잡목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 정상에서 한 단을 내려와 이정표(전망대 0.8㎞/ 금정골 1.3㎞)가 가리키는 전망대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참! 또 다른 이정표는 이곳에서 ‘피실’로도 내려갈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 금정골 방향 10m 지점에서 ‘둔주봉 산성’이라는 또 다른 표석을 만날 수 있었다. 정상 주위에 150m 길이로 쌓았다는 삼국시대 토성이다. 산봉우리에는 ‘봉수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토성은 물론이고 봉수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 하산 길은 안전용 밧줄을 매어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 밧줄구간이 끝나는 안부에서 삼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정표(등산로입구↑ 1.6㎞/ 고성→ 1.9㎞/ 둔주봉정상, 피실↓ 0.9㎞)는 오른편이 고성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이 구간의 진입을 금한다는 안내판도 보인다.
▼ 삼거리를 지나서도 위험성은 가시지 않았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횡으로 째며 난 오솔길이 벼룻길처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한눈을 팔다간 자칫 큰 사고를 부를 수도 있겠다.
▼ 하산을 시작한지 18분. ‘한반도전망대’로 올라선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고 둔주봉정(屯駐峰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운치를 더했다. 벤치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우린 잠깐이지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독락정에서 금강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고 술잔을 나누었을 옛 선비들의 여유를 소환시켰음은 물론이다. 마침맞게, 둘레길 도반이자 갑장인 유사장이 육회까지 준비해 왔다. 옛 선비들이 바라봤을 풍경에 그들이 나누었을 술과 안주까지 갖췄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 난간에 서자 금강의 물길이 U자를 그리며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런데 강 건너 물길 안에 갇힌 땅이 영락없는 한반도가 아닌가. 하지만 그동안 보아오던 한반도 지형들과는 많이 다르다. 동과 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데, 이런 지형은 전국의 한반도지형 중 이곳이 유일하단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 다른 곳과 다르다는 특이성이 사람을 불러 모은다고나 할까?
▼ 상황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지형의 길이는 1.45km, 실제 한반도를 ‘980분의 1’로 축소시킨 크기라고 한다. 다만 동·서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아무튼 저런 상황에 아름다운 경관이 더해지면서 ‘옥천 제1경’이 되었다.
▼ 정자 앞에는 마법의 볼록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거울을 통해서 보면 동서가 제대로 된 한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산맥에 해안선까지 한반도를 쏙 빼다 닮았다.
▼ 비경에 쏙 빠져 있다가 아쉬운 듯 발걸음 옮긴다. 점촌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비단길이다. 울창한 침엽수림이 떨구어놓은 솔가리가 수북이 쌓여,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으로 걷게 된다.
▼ 솔향기가 물씬 풍기는 숲길 곳곳에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운치 있는 소나무 숲속에서 노닐며 힐링까지 얻어가라는 모양이다.
▼ ‘점촌고개’에 내려서기 직전 길은 ‘침목계단’으로 변한다. 요리조리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내는 곡선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 전망대를 출발한지 17분, ‘점촌고개’로 내려섰다. 제 구실을 못하는 이정표(안남면사무소→ 1㎞/ 피실나루터←/ 한반도전망대↓ 0.8㎞)가 오히려 길 찾기를 더 헷갈리게 만드는 지점이다. 양 방향 어디에서도 13구간의 표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로 가란 것일까?
▼ 핸드폰에 깔아놓은 gpx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피실 나루터’ 방향으로 3분쯤 내려가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가란다. 수몰되기 전 읍내 장과 연결시켜주던 피실 나루터는 직진이다. kakaomap은 요 아래 ‘점말골(‘안피실’로도 불릴 게다)’과 동이면(석탄리)의 ‘피실’이 금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 잠시 후 두어 채의 농가가 전부인 꼬맹이 마을(‘점촌마을’이 아닐까 싶다)을 지난다. 개가 세 마리나 지키고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길손이 반가운지 짖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꼬리까지 흔들어준다.
▼ 애국심은 저런 마음에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면서도 빈 집에 태극기를 게양해놓았다. 어디에 살던지 애국심까지 변할 게 있느냐는 듯이...
▼ 조금 더 올라 만나게 되는 대나무 숲은 많은 이들이 헷갈려하는 지점이다.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왼쪽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비슷한 풍경이어선지 오른편으로 들어섰다는 후기가 의외로 많았다.
▼ 대나무 숲을 지나자 잡목만이 가득한 야산이 나타난다. 길의 흔적을 찾기가 힘든 구간이다. 그런 흔적조차도 고도를 높여갈수록 더욱 약해져갔다. 그저 나뭇가지에 매달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를 등대삼아 오를 따름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gpx트랙과 일치하는 걸 보니. 그도 같은 앱을 다운받아 왔나보다.
▼ 갈 길을 방해하는 잡목은 그나마 양반이라 하겠다. 복분자(覆盆子)같은 가시넝쿨들이 들어찬 곳은 진입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을에 소주 몇 병만 챙겨오면 한겨울 넘기기는 일도 없겠다는 일행의 농담까지 썰렁하게 만들어버리는 고약한 풍경이라 하겠다.
▼ 깊은 산골 옹달샘. 멧돼지가 파놓은 작은 물웅덩이도 만난다. 산속에서 멧돼지와 만나면 어떻게 대응하라고 했더라?
▼ 대충 방향을 잡아가며 길 없는 길을 찾아나간다. 그렇게 올라선 능선(앱은 높이를 243m로 찍는다).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오백리길 표지판’이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반갑다. 오백리길 정비에 소홀하기 짝이 없는 옥천군청도 그냥 손 놓고 놀고 있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 20분(농가주택에서) 조금 못되어 오른 능선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5분쯤 능선을 타다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산을 내려간다.
▼ 하산 길도 역시 희미하다. 길안내를 해주는 낡은 산악회 표지기가 드문드문 보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참! 그중에는 대전발전연구원에서 매달아놓은 오백리길 표지기도 들어있었다. 옥천구간을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만났으니 이 아니 반가울 손가.
▼ 그렇게 6분쯤 내려오니 잘 가꾸어진 김녕김씨 묘역이 나타난다. 그런데 묘비만 가득할 뿐 봉분이 없다. 요즘 권장되고 있는 평장(平葬)인가 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5분. 묘역을 빠져나오면 임도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잘 닦인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 이때 이따가 통과하게 될 인포리가 시야에 잡힌다. 장령지맥의 끝자락 장계교와 멀리 금적지맥길이 아스라하다. 이 부분은 다른 이의 표현을 살짝 빌려왔다.
▼ 12분쯤 내려오자 갈림길 모서리에 ‘오대임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오대임도를 걸어왔던 모양이다. 아니면 앞으로 걷게 될 임도(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간다)가 오대임도라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 이후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온다. 구불구불 틀어대는 곡선미에 더해 단풍나무로 여겨지는 가로수까지 심어 운치를 더했다.
▼ 그 길에는 ‘오지빌리지’라는 캠핑장이 있었다. 이름처럼 오지마을에 꼭꼭 숨어있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간이 수영장까지 갖춘 품격 있는 캠핑장이었다.
▼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논두렁밭두렁 따라 꼬불꼬불 휘어지는 곡선미로 한껏 멋을 부린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35분. 화인마을(안내면 인포리)에 도착하니 3층으로 지어진 안내중학교가 우뚝하다. 그나저나 안내중학교의 학부모들은 마음이 놓이겠다. 외딴 곳에 지어진 탓에 땡땡이를 칠 수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 화인마을 앞 도로(575번 지방도)와 만나는 ‘화인삼거리’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인포리’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화인·걸포·관골) 중 하나인 ‘화인(化仁)’에서 이름을 따왔다. 참고로 화인마을에는 고려 때부터 역(驛)이 있었다고 한다. 출장 중인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화인원(化仁院)도 있었단다. 화인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연유이다.
▼ 삼거리에는 마을유래비와 함께 ‘관골’ 표지석도 세워놓았다. 조금 전 스치듯 지나온 작은 마을이 ‘관골(官谷)’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옛날 찰방(察訪)이 살았었다는 마을이다.
▼ 이정표(걸포리→ 1.2㎞/ 인포리 대청호반← 0.7㎞)가 가리키는 걸포리 방향(동쪽)으로 향한다. 300m쯤 걷다가 만나는 다른 삼거리에서는 왼쪽 임도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정표(걸포리 0.8㎞/ 한반도전망대/ 장계대교)는 한반도전망대 방향에도 13구간의 표시를 해놓고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본 다음 안남면사무소로 되돌아갔다가 도로를 따라 이곳으로 와도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경관 좋은 화인마을도 이농의 추세를 벗어날 순 없었던 모양이다. 도로변 농가가 줄줄이 비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임도로 들어선 오백리길은 고개 하나를 오롯이 넘는다. 그러다보니 꽤나 가파르게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 해발 168m까지 치고 올랐던 오백리길이 능선을 넘더니 아래로 향한다. 길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찬 옻나무단지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오싹한 구간이다. 염색약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연약한 피부를 가졌으니 어쩌겠는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4시간 5분, 고개 너머 ‘걸포(傑浦)’ 마을에는 ‘염수재(念修齋)’라는 ‘옥천육씨(沃川陸氏)’ 시조를 모시는 재실이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걸포’라는 지명은 갈대가 우거진 포구를 끼고 있었다는데서 유래됐다. ‘갈포’라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걸포’가 되었단다.
▼ 걸포마을을 빠져나오면 37번 국도를 만난다. 이어서 도로를 따라 안내교차로로 간다. 4차선 도로인데다 보행로가 따로 없으니 가드레일에 바짝 붙어서 걸을 일이다.
▼ 도로 아래로는 대청호가 드넓게 펼쳐진다. 하지만 긴 가뭄 탓인지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 안내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신촌교로 가는 575번 지방도의 오른편에는 ‘안내습지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안내천의 하류 3만㎡의 부지에 습지를 만들고 갈대·애기부들·고마리·창포 등의 수생식물을 심었다. 인근 유역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을 이곳에서 정화해 대청호로 방류하는 시스템이다.
▼ 날머리는 신천교(옥천군 안내면 현리)
안내천을 가로지르는 신천교를 건너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13구간이 끝나고 14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89km, 가파른 산길과 임도가 대부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 오백리길 14코스 ‘장고개구불길’은 이곳에서 강변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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