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화누리길 15코스-1(인제 북면길)
여행일 : ‘23. 11. 19(일)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일원
여행코스 : 원통교→어두원교→한계삼거리→정자문교차로→12선녀탕 주차장→만해마을→용대삼거리→미시령 옛길→미시령(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12선녀탕 주차장까지 13.37km를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를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 들머리는 원통교(인제군 북면 원통리)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면으로 50km쯤 올라오면 ‘원통리’에 이른다. 평화누리길 15코스의 출발점은 마을 앞 북천을 동서로 횡단하는 ‘원통교’이다. 참고로 ‘원통(元通)’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원통역’이라는 역참(驛站)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 북면 소재지(원통리)의 ‘원통교’에서 시작해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용대삼거리에서 옛길을 따라 ‘미시령’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구간거리는 자전거길 답게 28.1km. 라이더들이야 우습겠지만 걷기 여행자들이 하루에 걷기에는 벅찬 거리다. 때문에 우린 절반으로 나눠 오늘은 ‘십이선녀탕 주차장’까지만 걷기로 했다.
▼ 09 : 08. 15코스의 시점은 ‘원통교’의 동단(東端)이다. 이곳에서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천의 오른편 둑 위로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 강 건너 원통 시가지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맞다. 군대라도 갈라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며 눈시울을 적시던 ‘라때’ 시절, 이곳 원통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회자되던 고을이었다. 주민들보다 외출 나온 군인들이 더 많던 그런 첩첩산중 오지마을이 저런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니 어찌 낯설지 않겠는가.
▼ 세월과 함께 쇠락해가던 군사도시는 이제 군인과 상생하는 병영문화도시로 거듭났다고 한다. 4층 규모의 웰컴센터가 들어섰는가 하면 병영역사와 문화가 담긴 테마존, 특화된 먹자골목 등 볼거리·즐길거리·먹을거리가 즐비하단다. 그렇다면 길가의 저 참호는 옛 추억 소환용일지도 모르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그래, 언젠가 공연장에서 만난 고(故) 박동진(朴東鎭) 명창께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지 않던가.
▼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저 바람개비는 조경용? 아서라 저래 뵈도 의젓한 ‘풍력발전기’라고 한다. 친환경 분산형 전원 확대와 지자체 에너지전환 주도에 발맞추기 위해 개발된 소형발전기로, 주변 공공시설에 전력을 공급해주는 주민 편익시설이다. 하나 더. 하천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보(堡)를 막아 소수력발전을 하고 있었다.
▼ ‘코리아 둘레길’의 한 축을 담당하는 ‘DMZ 평화의 길’ 팻말이 눈에 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DMZ 평화의 길’은 비무장지대(DMZ)를 걸으며 분단의 현실을 체험하고 접경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만든 트레일(trail)이다. 강원 고성에서 인제·양구·화천·철원·연천·파주·김포를 경유해 인천 강화까지 접경지역의 9개 시·군을 횡단하는 길이 524km의 도보길이다.
▼ 09 : 19. ‘라때’의 추억을 소환해가며 걷기를 10분 남짓. 둑길이 끝나면서 2차선 도로(갈골로)로 올라선다.
▼ ‘나만큼이나 많은 풍파를 겪었나보다’ 함께 걷던 산수(傘壽)의 도반 손가락 끝에는 힘이 겨운 듯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는 노송 한 그루가 있었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는 ‘곡강시(曲江詩)’에서 ‘사람이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고 했다. 70세의 별칭이 고희(古稀)가 된 근원이다. 그런데 이분은 이미 80을 넘기셨다. 그의 손가락 끝에 놓인 소나무에게 경의를 보내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 왜가리는 철새? 결론은 ‘NO’이다. 원래는 철새였으나 기후변화와 강한 적응력 덕분에 현재는 완전히 텃새가 되었다. 하나 더. 옛 사람들은 왜가리를 ‘으악새’라 부르면서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을 ‘왜가리처럼 소리를 지른다’며 나무랐다고 한다. ‘으악-으악’하는 왜가리의 울음소리가 영 곱지 못했기 때문이다.
▼ 09 : 23. ‘갈골교’를 건너자 길이 둘로 나뉜다. 아까 도로(갈골로)로 올라섰던 탐방로가 다시 둑길로 내려서는 것이다.
▼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둑길은 왼편에 북천, 그리고 오른편에 둑을 쌓아 조성한 뜨락만큼이나 작은 들녘을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 명색이 ‘평화누리길’. 거기다 ‘DMZ 평화의 길’까지 더했는데 어찌 쉼터 하나 없겠는가. 정자는 물론이고 몸이라도 풀고 가라는 듯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커다란 견공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어 쉬기는커녕 다가가보지도 못했지만.
▼ 9 : 40. ‘어두원교’로 북천을 건넌다. ‘어두’라는 지명은 다리 건너에 있는 ‘어두원 마을(원통8리)’에서 빌려왔다.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골짜기가 깊어서 항상 어둡다는 오지마을이다. 그러니 한자로 변한하면 ‘음지(陰地)’쯤 되겠다. 그런데도 굳이 ‘어두리(魚頭里)’를 공식 지명으로 내걸고 있는 이유는 뭘까?
▼ ‘평화누리길’은 자전거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정표(용대삼거리 19.1km)도 자전거를 매달았다.
▼ 다리에서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안개가 걷히지 않아 파노라마로 펼쳐져야 할 설악산은 그 형상조차 가늠해 볼 수 없었다.
▼ 다리 건너는 ‘어두원마을’.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북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줄기를 왼편에 끼고 달려온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오른편에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 09 : 45. 100m쯤 더 걸으면 또 하나의 쉼터. 이번에는 반듯한 팔각정까지 지어놓았다. 그것도 북천의 벼랑에 걸터앉은 모양새로...
▼ ‘접경권 평화누리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용늪마을 자연생태학교, 냇강마을, 만해마을, 백담사, 인제산촌민속박물관 등 인제권역에서 만날 수 있는 주요 관광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 ‘평화누리길’은 자전거길. 그러니 자전거 거치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나 더, 왼쪽에 보이는 도로는 44번 국도(설악로)이다.
▼ 쉼터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난간에 서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북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발원해 남서방향으로 흘러 인북천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 탐방로는 44번 국도와 나란히 간다. 북천이 오른편에서 따라옴은 물론이다.
▼ 09 : 48. 설하관광농원 캠핑장에 이른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겐 함께 걷는 도반과 커피라도 한잔 나눌 수 있는 ‘cafe kanune’가 더 친근하다.
▼ 요즘은 한 달 살기가 유행이라고 했다. 그 정도는 머물러야 그 지역의 속살을 속속들이 느껴볼 수 있다나? 문득 올해 봄 다녀온 코카서스 3국이 생각난다. 조지아의 현지인으로부터 ‘한 해 살이’를 권유 받았고, 난 15일 정도의 여행기간 내내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다. 내 연금에 조금만 더 보태면 귀족처럼 살 수가 있다니 어찌 귀가 솔깃해지지 않았겠는가.
▼ 09: 54. ‘관벌교차로’라고 한다. 고원통(古元通)의 남쪽 들녘 옆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이곳에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 교차로를 빠져나오면 ‘설악휴게소’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하지만 이른 시간이어선지 인적은 뜸한 편이었다.
▼ 탐방로는 이제 ‘한계리(寒溪里)’로 들어간다. 망국의 한을 짊어진 신라 마의태자(麻衣太子)와의 인연을 들먹이는 마을이다. 10월 하순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이 한겨울에 이곳에 도착했고, 살을 에이는 추위와 몰아치는 눈보라를 겪으며 한계(寒溪)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란다.
▼ 이때 안개가 걷히면서 산줄기 하나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한석산(寒石山 : 1,117m)’이 아닐까 싶다.
▼ 10 : 02. ‘한계2교’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44번 국도의 ‘한계교’ 아래를 지난다. 직진하면 ‘한계삼거리 휴게소’. 하지만 오가는 차량들은 휴게소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새로 뚫린 국도를 따라 휭하니 사라질 뿐이다.
▼ 탐방로는 46번 국도를 향해 간다. 길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자전거길임을 알리는 하늘색 선이 그어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공명(共鳴)의 집’이란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사상이나 행동에 공감하며 그에 따르는 이가 산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 물체가 마주쳐야 울림이 난다. 산 위에서 ‘야호’하고 소리치면 반대쪽 산에 부딪혀 소리가 되돌아온다. 이처럼 자기가 내뱉은 말이나 행동은 결국은 시나브로 자기에게 돌아온다. 남을 욕하거나 저주하면 상대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남을 칭찬하고 장점을 말하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
▼ 오지 특유의 특산물들이 옛 추억을 다시 한 번 소환시킨다. ‘라때’ 시절 이곳 인제는 군인들이 가장 회피하던 지역 중 하나였다. 102보(지금은 해체됐다)에 걸린 것만으로도 서럽던 당시, 이곳까지 들어온 군인들은 빽 없는 부모들을 원망하며 ‘거꾸로 매달아도 세월은 간다’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빠삐용’의 한국판이었다고나 할까.
▼ 10 : 11. ‘고원통교’ 다리를 건넌다. 다리건너는 ‘고원통(古元通)’ 마을. 조선시대 역(驛)이 있었다는 곳이다(마을 중심을 원통으로 빼앗기고 이름표에 ‘옛 古’를 덧댔다나?). 인제읍지(1843)는 역마 1필, 복마 2필, 노 4명, 비 1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탐방로는 다리 건너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참! 왼편으로 가면 ‘내설악 예술인촌’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마을에 거주하는 유명 작가 및 관내 문화예술단체의 작품을 전시하는 ‘내설악 공공미술관’도 들어서있다니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 고원통 마을은 얼핏 유원지를 연상시킨다. 도로를 따라 꽤 많은 음식점과 숙박업소, 심지어는 호텔까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연 집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름 한철 장사라도 하는 것일까?
▼ 황태가공공장도 눈에 띈다. 인제의 겨울 풍경 중 단연 으뜸이라는 황태덕장이 인근에 있는 모양이다. 겨울의 추위와 볕에 의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쫀득하게 마르는 황태의 맛과 그것들이 가득한 덕장의 눈 덮인 풍경은 그야말로 겨울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 탐방로는 이제 ‘국도 46호선’을 따른다. 아니 4차선으로 확장한 46호선을 새로 냈으니 이젠 ‘46호선 옛길’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참고로 그동안 함께 달려오던 국도 44호선과 46호선은 이곳 ‘한계삼거리’에서 이별을 고한다. 44호선은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고, 46호선은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간다.
▼ 10 : 16. ‘고원통교차로’ 부근에서는 신·구 두 도로가 함께 가기도 한다.
▼ 10 : 26. 하지만 산을 꿰뚫어버리는 새 도로(미시령로)와는 달리 옛길(고원통로)은 북천 물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다. 때문에 한계터널 입구의 교각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 길은 양옆에 철제울타리를 둘렀다. 11코스 때 돌산령을 넘으면서 만난 울타리는 군 시설의 보호와 함께 북한에서 넘어오는 ASF(아프리카 돼지열병) 감염 멧돼지의 차단막을 겸한다고 했었다. 이곳도 비슷한 용도겠지?
▼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 구간은 ‘평화누리길’과 ‘DMZ 평화의 길’이 사이좋게 함께 쓴다. 힘차게 달려가는 라이더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이다.
▼ 얼마쯤 걸었을까 주변 풍경이 확 바뀐다. 기암괴석의 바위봉우리. 그리고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들. 설악산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아니 아직은 맛보기일지도 모르겠다.
▼ 오른편에서 따라오는 북천도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크고 작은 못은 물론이고, 집채 만한 바위부터 작은 돌멩이까지 조화롭게 깔린 내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
▼ 저건 숫제 ‘용(龍)’이다. 용이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덧씌운다면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변할 수도 있겠다.
▼ 길은 수없이 많은 ‘S’자형 곡선을 그리면서 이어나간다. 따라가고 있는 북천(北川)이 ‘감입곡류(嵌入曲流)’의 하천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물굽이가 심한 곳에는 모래톱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퇴적층이라선지 소나무가 숲을 이루면서 주변 산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 10 : 46. 산이 깊은 곳이니 물이 맑을 것은 당연.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간들이 이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저 ‘설악산수’ 공장이 그 증거이다.
▼ ‘쌍다리 쉼터’는 캠핑촌인 듯. 널따란 공터에 텐트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 국도 46호선 옛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심심산골을 향해 한없이 파고드는 모양새이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데, 아름답기로 소문난 북천이 함께 간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북천은 에메랄드빛 소(沼)와 담(潭)을 수없이 품었다. 한여름 최적의 가족 피서지로 꼽힐 만하다.
▼ 인제의 가장 큰 특징은 북한과 접경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래선지 결혼도 북한 출신 여성의 정보가 제공되고 있었다
▼ 11 : 07. ‘정자문교차로’에 이른다. 용대리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데, 이곳에도 화장실까지 갖춘 쉼터가 만들어져있었다. 참고로 ‘정자문’은 마을 앞 강가에 ‘정자’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길가에는 열녀정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정자나 정려문 모두 사라지고 없단다.
▼ 이곳도 조망의 명소이다. 용대리(남교마을) 앞들을 적셔주는 북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용대리에서 시작된 북천(北川)은 내설악 깊은 곳에서 흘러온 백담천까지 품고 웅장한 물길을 이어 간다.
▼ ‘설악 하이 트레킹웨이 종합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 일부 구간을 저렇게 부르는 모양인데. 인제휴게소(인제군 남면)에서 용대삼거리까지 44번과 46번 국도에 붉은 선을 그어놓았다. 주요 포인트들을 함께 표시해놓았음은 물론이다.
▼ 이곳 용대리가 ‘전국 제1의 청정지역’임을 자랑하는 조형물도 눈에 띈다.
▼ 이후부터는 북천의 강둑을 따른다. 북천과 북천의 물줄기가 빚어낸 작은 들녘을 양옆에 두고 둑길이 나있다.
▼ 도중에 만난 어느 민박집 원두막. 초겨울 찬바람에 시래기가 말라간다.
▼ 11 : 17. ‘한 숨 자고가면 백수(白壽)는 넉넉히 넘기실 것입니다’. ‘장수정(長壽亭)’을 만난 일행이 넉살을 떤다. 둘러메고 온 배낭을 퇴침삼아 홍루몽(紅樓夢)이라도 꿔보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서라’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할아버지의 통역을 거친 귀동냥을 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서관까지 찾아가 완독해봤지만, 결과는 항상 일장춘몽을 되뇌며 아쉬운 입맛만 다셔야했으니 말이다.
▼ ‘침대는 과학입니다’. 과학계를 난감하게 만들었던 광고도 이제 어색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비닐망으로 과수원을 통째로 둘러쳐야만 할 날이 오게 될 줄을 당시 사람들은 짐작이나 했을까 싶다.
▼ 북천의 물굽이가 빚어놓은 ‘개울 속 섬’에는 캠프촌이 들어섰다. 600명이 동시에 이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교육시설, 부대시설을 갖춘 사설 청소년수련원이다. 트래킹, 카약, 래프팅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도 함께 즐길 수 있다고 한다.
▼ 11 : 29. ‘용대교’를 건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십이선녀교’가 어서 오란다. 15코스를 절반으로 단축했으니 이제 그만 마칠 때가 되었다면서 말이다.
▼ ‘넝쿨식물 터널’이란다. 용대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했는데, 조롱박·색동호박·수세미·여주·환타지믹스 등 넝쿨식물들을 심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철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가 멋진 풍경을 연출해준다고 한다.
▼ 용대권역 농촌종합개발사업의 내력은 그림으로 전해준다. 문화·복지시설과 소득기반시설을 갖추었으며, 황태홍보전시관·습지생태자연학습장·약초재배체험장·장류체험장 등의 다양한 시설을 조성해 권역별 특성에 맞는 마을로 탈바꿈시키겠다나?
▼ 11 : 35. ‘남교마을’로 들어서면 ‘십이선녀교(十二仙女橋)’가 반긴다. 20년쯤 전, 저 건너에 있는 십이선녀탕 계곡을 지나 대승령으로 올랐고, 귀때기청봉과 대청봉을 거쳐 오색약수로 하산했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졌지만 연이어 나타나는 ‘현세 속의 선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답사를 이어가던 기억이 새롭다.
▼ ‘십이선녀교’를 건너지는 않는다. 탐방로는 다리를 지나쳐 ‘남교마을’로 들어간다. 아니 집단시설지구로 변한 ‘윗남교’라고 하는 게 옳겠다. 참고로 ‘남교(嵐校)’는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보안도(保安道)에 딸린 역참(驛站)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당시 남교역에는 복마가 3필, 노가 5명, 비가 3명 있었다고 한다.
▼ 시설지구답게 꽤 많은 펜션들이 들어서 있었다. 중세풍에 현대미를 더하는 등 개개의 외관도 하나같이 예쁘다. 그러니 멋진 정자 하나쯤 없겠는가. 하지만 개인소유였던 모양이다. 철망울타리를 둘러 출입을 막아놓았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아름다음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씨도 아름답다는 옛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나보다.
▼ 숙박업소에 이어 나타나는 주차장은 엄청나게 넓었다. 윗남교와 당정골 사이에 있다는 ‘이레가리’일지도 모르겠다. 7,000여 평에 달할 정도로 넓어, 소 한 마리로 갈 경우 7일이나 걸린다는 그 들녘 말이다.
▼ 주차장 초입, 전망 데크가 눈에 띈다. 스치듯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십이선녀탕’을 곁눈질이라도 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그러니 어찌 난간에 서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쉽게도 십이선녀탕계곡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북천의 물줄기가 발아래로 흘러갈 따름이다.
▼ 11 : 46. 집단시설지구의 널디너른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3.37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빨리 건넌 셈이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이들은 벌써 식사가 한창이었다. 아무래도 저들은 달려오다시피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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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40코스(법성포-구시포)
여 행 일 : ‘23. 11. 11(토)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법성 버스정류장→검산마을→홍농읍사무소→상삼마을→하삼마을→고리포→구시포해변(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4.23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0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지역(4km)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보안지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한다. 고창 땅에 있는 고리포와 구시포를 빼면 내놓을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 들머리는 법성 버스정류장(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22번 국고로 바꿔 법성포까지 온다. 복용삼거리에서 좌회전 842번 지방도(영광로)로 옮기면 잠시 후 법성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40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놓았다.
▼ 이번 구간은 전라 남·북도의 경계를 넘는 구간이다.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 구간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하지만 의미에 비해 볼거리는 빈약하다. 보안구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다시 만난 고창에서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길이는 13.7km,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짧은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2개(5개 가운데)인 이유일 것이다.
▼ 11 : 15. ‘법성3교’ 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갯벌을 돋우어 조성한 뉴타운(2009년 포구 앞, 속칭 ‘걸레바탕’을 매립한 뒤 공모로 뽑은 지명이다)과 구도심을 연결한 몇 개의 다리 중 하나이다.
▼ 물 빠진 법성포 앞바다는 갯벌만이 시커멓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저곳은 호수처럼 변한다고 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탓에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 되어왔던 이유이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데다, 다른 곳에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들이 들어서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해버렸다.
▼ 11 : 18. 다리 건너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은 굴비의 고장답게 이름까지도 ‘굴비로’이다. 무늬만 굴비인 게 아니다. ‘굴비’를 브랜드로 내건 도로답게 들어선 음식점이나 건어물가게의 이름도 하나같이 ‘굴비’를 내걸었다.
▼ 영광군은 신재생에너지 산업클러스터를 꿈꾸는 고장이다. 우리나라의 4개 원자력발전단지 중 하나가 이곳 영광에 있는가 하면, 드넓은 바닷가를 따라 태양광발전단지와 풍력발전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하지만 영광의 주민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해 세종시 정부청사 앞으로 달려가자는 걸 보면...
▼ ‘에이~ 조기가 아니라 갈치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다리(보행교인 ‘한두름교’)를 덧씌운 조형물이 갈치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각설하고 간이 잘 된 영광굴비는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질이 좋은 소금으로 염장하기 때문이란다. 재료가 되는 조기도 중요하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마다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고, 이게 최고의 굴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대부분이 잡혀버린다. 요즘은 수산시장을 돌며 사들인 조기가 굴비의 원료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염산면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으니 가히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그래선지 조형물도 굴비 일색이다. 그러니 어찌 굴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屈非)’는 고려시대 이자겸(李資謙, 미상~1126)이 만들었다. 딸 셋을 하나는 16대 예종(睿宗), 나머지 둘은 예종의 아들(자신에게는 외손자)인 인종(仁宗)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묘한 족보를 만들어버린 인물이다. 그가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하며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단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 11 : 25. 두 번째 다리(법성2교) 앞에서 ‘굴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연우로’로 들어간다. 도심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 조형물로 치장된 첫 번째 다리(한두름교)는 보행자 전용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은 법성포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이다. 보은의 두꺼비 전설이 있는 ‘철비’, 조선시대 동헌 등 주요 관아와 객사, 수령들의 선정비, 전라지역 12고을의 조창 터,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5박6일 동안 머물렀던 하촌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며 낙향한 훈련도정 이척이 지은 ‘제월정(영호정)’ 등을 만나볼 수 있다.
▼ 11 : 26. 행운당(도장집) 앞. 일행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춘 채 핸드폰의 앱을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좋은 길을 놓아두고 골목(행운당과 수산물가공업체인 ‘해미락굴비수산’의 사이)으로 들어서라는 서해랑길의 방향표시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 골목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에 비례하듯 경사도 가팔라져 간다.
▼ 11 : 30. 오름길의 막바지에서 엄청나게 굵은 느티나무(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1.0km)를 만났다. 나이도 법성포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듯. 이런 볼거리를 그냥 놓아 둘 지자체가 아니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 이곳은 법성포 시가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저 느티나무에 달이 걸리는 진풍경도 넘볼 수 있단다
▼ 11 : 32. 842번 지방도(연우로)가 지나가는 ‘동짓재(‘동깃재’로 부르는 지역민들도 있었다)’에 올라선다. ‘법성포 12경’ 중 일곱 번째인 ‘동령추월(東嶺秋月)’, 즉 가을철에 뜨는 둥근 달이 빼어나다는 고갯마루이다.
▼ 11 : 33. 도로로 내려서지는 않는다. 인의산(165.3m) 방향(오른쪽)의 언덕길로 잠시 진행하자 이 고장 출신 애국지사의 충용비(忠勇碑)가 얼굴을 내민다. 한국전쟁 때 법성면 일대의 수복을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려 광주로 가는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방위군 소위의 충용을 기리는 빗돌이다.
▼ 빗돌을 살펴본 다음 탐방로에서 잠시 벗어나본다. 굵직굵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것이 도로 건너에 있는 ‘법성진 숲쟁이’의 연장이 아닐까 싶다. 숲의 내력은 지난 39코스 때 설명했었다.
▼ ‘혜원 신윤복 선생이 그렸답니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이 일러주신다. 담벼락에 그려진 민속화가 김홍도의 작품인줄로만 알았다. 민속화는 무조건 김홍도라는 내 선입견 탓이었고, 그런 무지를 그가 정정해 준 것이다. 덕분에 난 오늘도 새로운 앎을 얻어간다. 공자님의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가 실감나는 하루라 하겠다.
▼ 11 : 36. 서해랑길은 842번 지방도(연우로)를 가로지른다. 이정표(종점까지 12.6km) 말고도 영광굴비특품사업단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영광굴비홍보전시관(문이 닫힌 듯해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른편에는 ‘서호농악회관’이 들어서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영광법성포단오제의 난장트기 행사 때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단체일 것이다. ‘서호’란 이름은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법성포 앞바다의 별칭에서 따왔을 것이고...
▼ 두 건물의 사잇길로 들어서자 폐허로 변한 마을이 나타났다. 하필이면 이런 황량한 풍경 속으로 길을 냈을까?
▼ 폐촌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밭에서는 알알이 여문 콩깍지가 타작을 기다린다.
▼ 왼쪽에는 ‘검산제’가 있다. 갈대밭과 수림을 배경삼은 풍경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한 저수지이다. 둑 너머에서는 ‘영광대교’가 자신도 있다며 좀 보아달란다.
▼ 11 : 42. ‘검산(撿山)’ 마을에 이른다. 도로(연우로)변에 버스정류장과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빠져나오자 ‘검산마을 경로당’. 쉼터용 정자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하지만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그럴 여유는 없다.
▼ 널디 너른 들녘이 마을 앞으로 펼쳐진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풍요의 상징이다. 그 너머 바다, 홍농읍과 백수읍 사이 해협을 ‘영광대교’가 가로지른다.
▼ 11 : 47. 정자를 지나 200m쯤 더 걸었을까 홍농읍과 법성면의 경계를 가르는 ‘구암천’이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종점까지 11.7km)는 둑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란다.
▼ 전남방조제로 물길이 막힌 ‘구암천(龜岩川)’은 너른 유수지로 변해있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습지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참고로 ‘구암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과치제에서 발원하여 두암저수지를 지나 전라남도 영광근 홍농읍 칠곡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총연장 15.29km의 지방하천이다.
▼ 구암천에는 ‘홍농교’가 놓여있다. 법성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다리를 건너 홍농읍으로 들어간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에 입간판까지 세워놓았다.
▼ 그렇다고 ‘홍농교’를 건너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은 옛 다리인 ‘연우교’를 이용한다. 1981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홍농교’가 놓이면서 효용가치를 잃은 연우교는 상판에 흙을 쌓은 도로공원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연우(蓮牛)’라는 이름은 이 고장 출신으로 박정희정권 때 내무부장관을 지낸 ‘박경원(朴璟遠)’의 호에서 따왔다. 고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던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지역민들 사이에 회자된다고 했다.
▼ 안내판은 이곳이 ‘줄 나룻터’였음을 알려준다. 연우교가 놓이기 전, 1910년대부터 1971년까지 주민들은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고 한다. 강 양편을 잇는 밧줄을 뱃사공이 끌어당기면서 나아가는 나룻배이다. 그 나룻배를 복원했다며 하단에 이용수칙까지 적어놓았다. 하지만 나룻배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무심한 지자체가 게으르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나룻배를 없애려면 안내판까지 함께 치웠어야 하지 않겠는가.
▼ 11 : 52. 다리 건너(이정표 : 종점까지 11.1km)에서 왼쪽 강둑을 탄다. 잠시 후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농로를 따른다.
▼ 12 : 01. ‘ㄷ’자 모양으로 난 길을 8쯤 걸으면 ‘842번 지방도’. 도로 양옆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가 걸어왔던 곳에 ‘신흥(新興) 마을’, 그리고 진행방향에는 같은 상하리(4구)인 ‘월봉(月峰) 마을’이 있단다.
▼ 잠시 후 이른 월봉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10.5km)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영광군청은 월봉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서 찾고 있었다. ‘미역섬’이라 불러오다 박도섬 등으로 바뀌었다고도 했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이곳이 섬이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월봉마을을 감싸듯이 돌아 나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홍농읍이 놓여있다. 그런데 고층아파트들이 울쑥불쑥 솟아오른 게 시골 소읍치고는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원자력발전소가 만들어 낸 변화가 아닐까 싶다.
▼ 12 : 07. 저 거대한 시설은 농협의 ‘벼 건조·저장센터’라고 했다.
▼ 저장센터 앞 버란계(버스정류장), 어느 선답자는 군청에까지 연락해 이곳의 정확한 지명이 ‘벌안개’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벌의 안쪽에 잇는 갯가라는 뜻일 게다.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고, 바닷일을 업으로 살던 어부들의 안식처였던 포구도 있었다나?
▼ 우람하게 치솟은 해주아파트를 오른편에 두고 ‘하봉마을(상하2리)’로 간다. 봉대산(峯大山) 아래에 위치하면서 망덕산(望德山) 줄기를 따라 위에 위치한 마을을 상봉(上峯),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하봉(下峯)이라 부른단다.
▼ 마을길은 꽃밭으로 꾸며졌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인가 보다.
▼ 12 : 25. 홍농로(이정표 : 종점까지 8.7km)로 올라서 홍농읍 저잣거리를 걷는다.
▼ 12 : 27. 잠시 후 ‘다온누리아파트’ 앞에서 도로를 건너 ‘하봉마을’로 간다. 다음 블록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상하길’을 따른다. 참! 아까 도로로 올라오기 전에 만난 농기계 보관창고에도 ‘하봉’이란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하봉마을의 중심가쯤 되겠다.
▼ 이 길(상하길)은 행정타운인가 보다. 파출소와 읍사무소는 물론이고 초·중학교가 모두 이 거리에 들어서있었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농협의 간판이 조금 이상하단다. ‘지명’을 브랜드로 내거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굴비’를 얼굴마담 삼았다는 것이다. 맞다. 영광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영광서 사게 되면 오만 원짜리도 영광굴비가 된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자린고비’도 영광에서는 남의 집 얘기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나저나 ‘자린고비’라는 뜻을 집사람은 알기나 할까? 반찬이 아까워 천장에 생선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요즘 내 연금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 번화가를 벗어나자 상점 대부분이 문이 닫혀있다. 요즘 TV만 켜면 불경기라는 뉴스가 뜨는데, 그 현장이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매서운 한파에 경기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 12 : 35. 홍농초등학교의 담벼락. ‘인성이 실력이다’라는 휘호가 눈길을 끈다. 맞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고루한 사고발상은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 잠시 후 만난 홍농중학교의 담벼락에선 장미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장미까지도 철이 바뀐 줄을 모르나 보다.
▼ 12 : 41. 도심을 빠져나오면 확·포장공사가 한창인 ‘홍농로’와 마주한다.
▼ ‘한수원사택’ 입구이기도 한 이곳에는 ‘119 안전센터’가 들어서 있다. 2년 전, 봉대산과 금정산을 답사하러 왔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어느새 현대적인 외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참고로 봉대산에는 백수 구수산의 ‘고도도 봉수대(古道島 烽燧臺)’에서 신호를 받아 상하면(고창군)의 고리포봉수대로 전하던 ’봉수대‘가 있었다. 고려 성종(981년) 때 시작되어, 조선 중종 때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성포의 조창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 이후부터는 영광(한빛)원자력발전소로 가는 ’홍농로‘를 따른다. 도중에 영광승마원과 영광테마식물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도 한다.
▼ 12 : 51. 서당마을 앞 ‘진덕삼거리’에서는 ‘한빛원자력본부’ 방향 직진이다. 오른쪽(구시포 방향의 ‘진덕로’)으로 가면 더 가까운데 도로를 피해 우회시킨다. 참고로 서당(書堂)이란 지명은 1870년경 밀양박씨의 입향조가 문맹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옛 서당은 현재 문중 재실로 변했단다.
▼ 10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난 농로로 들어간다.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7.4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런데 어느 축산농가 앞에서 길이 곤포 사일리지로 막혀있는 게 아닌가. ‘럼피스킨’이라는 소 피부병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 12 : 55. 조금 전 헤어졌던 ‘진덕로(이정표 : 종점까지 6.2km)’를 다시 만났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삼마을로 간다.
▼ 잠시 후 진덕리(眞德里)에 속한 자연부락 상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9km)에 이른다. 영광군청은 ‘상삼(上三)’이란 지명의 유래를 삼밭(蔘田)에서 찾고 있었다. 남원 땅에서 들어온 ‘남양방씨’가 삼밭을 경작했는데, 이 삼밭의 위에 마을이 위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이름인 ‘삼’자가 ‘인삼 삼(蔘)’이 아니고 ‘석 삼(三)’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 13 : 10. 상삼마을부터는 밭과 논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렇게 12분쯤 더 걸으면 ‘하삼마을’이다. 영광군청은 이 마을도 역시 삼밭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옥녀가 머리를 산발한 지형의 ‘옥녀산발’ 마을이 삼(蔘) 재배면적이 늘어나면서 ‘삼밭’ 또는 ‘갯삼밭’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이게 또 마을의 위치로 인해 ‘삼밭 아래’란 의미의 ‘하삼(下三)’이 되었고.
▼ 하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1km)은 개짓는 소리로 요란했다. 크고 험상궂게 생긴 개들이 이집 저집에서 윽박지르듯 짖어댄다. 개집이 천정까지 철망으로 막혀있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된다.
▼ 13 : 15. 마을을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진덕로2길(이정표 : 종점까지 4.6km)’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농로를 이용해 건너편 들녘으로 간다.
▼ 동아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수확을 끝낸 들녘은 텅 비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곤포 사일리지’조차도 논두렁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 13 : 21. 전라 남·북도의 경계에 놓인 ‘자룡천’의 강둑(이정표 : 종점까지 4.2km)에 올라선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참고로 자룡천(紫龍川)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흐르다 용대저수지를 지나 자룡리에서 서해로 스며드는 길이 6.13km의 지방하천이다.
▼ 방조제에 막힌 자룡천은 유수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 13 : 26. 진덕리(영광군 홍농읍)과 자룡리(고창군 상하면)의 앞바다를 막은 ‘동아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7km)’에 올라섰다. 둑 위로 2차선의 해안도로가 지나간다. 하나 더,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둑길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 ‘동아배수장’ 앞에서 바라본 바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와 안쪽에다 펑퍼짐한 바다를 만들어놓은 것이 영락없는 호로병인데, 바닷물이 들어오는 저 주둥이 부분도 남북으로 나뉜단다. 왼쪽은 전라남도(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반면에 오른쪽은 전라북도(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땅이다. 하나 더, 갈대밭이 들어선 바닷가는 철새도래지인 듯. 꽤 많은 왜가리들이 먹이활동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 13 : 33. 500m쯤 되는 방조제가 끝나면 길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왼쪽 구시포 쪽으로 간다.
▼ ‘가시연꽃길’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가면 ‘용대 가시연꽃군락지’가 나온다고 알려준다. 고창군에서 자연환경과 문화역사 자원을 담아 만든 ‘예향천리마실길’ 중 10코스인 가시연꽃길(13km)이 이곳으로 지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13 : 36. 300m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번에도 왼쪽(구시포 방향)으로 간다. 다만 길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뀔 따름이다.
▼ 이곳에서는 ‘1박2일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기네 식당에서 촬영했다는 듯 ‘거북선 숯불풍천장어’라는 상호를 두드러지게 적어놓았다.
▼ 이후부터는 바닷가를 따른다. 철제 난간까지 두른 멋진 산책로가 ‘고리포’까지 나있다. 하지만 길이 널찍한 것은 흠이 될 수도 있겠다. 승용차는 물론이고 트럭까지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내륙 방향, 1km도 더 되는 구간은 대하양식장 천지다. 소금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저곳에 염전이 들어서있었지 않나 싶다.
▼ 습지를 가득 메운 갈대밭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아니 근처에서 노닐고 있는 왜가리까지 더해줄 경우 흔치 않는 풍경으로 업그레이드된다.
▼ 바닷가 안내판은 고리포마을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 바닷가에 쳐놓은 저 그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호리병처럼 생긴 내만을 한 바퀴 둘러놓은 것 같은데...
▼ 13 : 56. 바닷가로 내려선지 21분. ‘고리포(古里浦)’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고리포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다. 마을은 봉군들이 머무르면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고리포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여m 지점의 안산(120m)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문헌은 영광군 홍농산(弘農山, 지금의 봉대산일 것이다)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소응포 봉수로 전달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 포구 앞, 작은 모래섬이 천혜의 항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맞다. 고리포는 현 고창 지역의 포구 중 유일하게 그 위치가 이동되지 않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포구라고 했다. 입지여건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10척도 못되는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란다.
▼ 고리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숯불풍천장어’는 거북선을 독채로 전세 냈다. 민박이 가능한 맛집으로 잔잔한 바다냄새와 함께 커다란 지붕이 열리며 파란 하늘을 덤으로 볼 수 있는 고창의 핫 플레이스라고 한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카메라 셔터 한번 누르고 그냥 지나칠 따름이다.
▼ 고리포를 지난 서해랑길은 ‘주씨고개’를 향해 가파르게 치고 오른다. 주씨고개는 40코스에서 가장 높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 14 : 06. 고갯마루를 넘자 발아래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1800년 무렵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구시포(仇時浦)’는 염전을 일구기 위해 설치한 수문의 모양새가 소의 구시통(구유의 방언)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선’에 뽑히기도 했다.
▼ 14 : 16. ‘구시포 해변(仇時浦 海邊)’은 고창 제일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명사가 십리에 펼쳐지는데다 송림까지 우거져 오토캠핑과 가족단위 캠핑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 해수욕장은 길이 1.7km에 폭이 2m인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송림이 뒤를 받치는가 하면, 나지막한 야산이 아늑하게 모래사장을 감싼다. 갯벌 한 점 없이 고운 백사장이 특히 돋보이는데, 바닷물이 빠지면 모래가 단단해져 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가족단위 피서지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하겠다.
▼ 이곳은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변 바로 앞에 바다낚시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가막섬’이 떠 있는데, 그 뒤로 펼쳐지는 저녁노을이 가히 일품이라고 한다.
▼ 저 갈매기들은 인간과의 공생을 추구하고 싶은 모양이다. 관광객들이 다가가도 도망가지를 않고 자리만 잠깐 내주고 있었다.
▼ 관광객들에 더해 캠핑족까지 몰려드는 곳에 어찌 조형물이 없겠는가. 움직임을 멈춘 그네는 생물권보전지역,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람세스 습지 같은 고창의 명소들을 가리키는 방향표지판까지 매달고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이들을 기다린다.
▼ ‘I ♡ 구시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토 죤이다. 이곳 구시포는 tvN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 시즌3의 첫 촬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만큼 화면발이 받쳐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구시포항은 여느 항구와 달리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가막도(可莫島)’라는 섬에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항구에 비해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선이 입·출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또한 항구를 와인 잔 모양으로 넓게 정비하면서 바다로 뻗은 800m의 긴 제방과 등대, 전망데크, 트릭아트, 공원 등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쾌적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 14 : 30. 서해랑길(40코스)은 고창군청의 이동봉사실 앞에 이르면서 끝을 맺는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2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클라이드 M 네레모어’는 그의 저서 ‘행복에로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행복한 삶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조차 없다. 사랑하는 집사람이 하루 24시간으로도 부족하다며 내 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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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산(紺岳山, 674.9m)
산 행 일 : ‘23. 10. 21(토)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의 경계
산행코스 : 출렁다리주차장→출렁다리→범륜사→묵밭쉼터→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비봉)→까치봉→묵밭쉼터(복귀)→출렁다리주차장(소요시간 : 6.78km/ 4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파주와 양주, 연천의 경계에 놓인 산으로 예로부터 화악산(가평)·송악산(개성)·관악산(안양)·운악산(포천)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신령스러운 산으로 일컬어졌다. 이름에 ‘악’자가 들어간 산은 대개 험한 편이다. 등산이 어렵고, 오른다 해도 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파주의 감악산만은 예외로 봐도 되겠다. 원래는 높고 깊고 가파른 산이지만 탐방로 공사를 잘 해놓아서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지자체가 서로 경쟁하듯이 시설물들을 설치한 것이 오히려 번잡스러운 흠으로 보였다고나 할까.
▼ 산행들머리는 감악산 시설지구(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세종·포천고속도로 안락 IC를 나와 ‘신평화로’를 타고 의정부시와 양주시를 통과한 다음, 회암교차로(양주시 회암동)에서 56번 지방도, 상수교차로(양주시 남면)에서 371번 지방도로 옮겨가며 달리다, 설마교차로(파주시 적성면)에서 ‘설마천로’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감악산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에 ‘감악산출렁다리 주차장’을 찍고 오면 편하다. 하나 더, 시설지구에는 ‘두부 만드는 집’이 즐비했다. 이 고장 특산물인 ‘장단콩’으로 만든 손두부·순두부·두부전골·두부부침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황태구이·감자전·능이닭백숙 등 다양한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 지도(청색 선)처럼 진행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범륜사 입구’.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묵밭쉼터’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 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을 차례로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이번에는 왼쪽 능선을 이용해 ‘묵밭쉼터’로 내려섰다. 이후는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 10 : 05. 출렁다리주차장(출구)에서 데크 계단을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숫자는 헤아려보지 않았지만 버겁다 싶을 정도로 긴 계단이다.
▼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입구의 안내판 정도는 살펴보도록 하자. 감악산을 둘러싼 20km 정도의 ‘순환형 둘레길’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주요 등산로가 그려져 있다. 참고로 둘레길 각 코스의 이름은 지역 학생들이 지었다고 한다. 청산계곡길·손마중길·천둥바윗길·임꺽정길·하늘동네길 등 생경하지만 정겨우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 보듬어보자. 이곳 설마리 일대는 6.25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위한 마지막 요충지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총공세에 맞서 최후의 한 명까지 싸웠고,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3일간이나 늦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설마리에 기념공원이 세워졌고, 감악산 출렁다리는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The Gloucester Heroes Bridge)’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
▼ 10 : 1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정자에 올라선다. 쉼터에 전망대를 더한 다목적 정자이다. 그러니 출렁다리의 전경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넣고 싶다면 잠시 들렀다 갈 일이다.
▼ 정자는 뛰어난 ‘뷰 포인트’이다. 난간에 서면 감악산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출렁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출렁다리 뒤로 펼쳐지는 감악산 전경은 보너스라 하겠다.
▼ 출렁다리 주변(힐링파크에서 운계폭포까지 약 1Km 구간) ‘신비의 숲’에서는 야간경관조명이 펼쳐진다고 했다. LED 투광등과 동물조명 등으로 밤하늘의 자연과 동물을 등산로 곳곳에 조형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고보조명·영상·음향 등을 가미해 산 이름인 감악(紺嶽)에 얽힌 스토리를 보다 재미있게 연출한단다.
▼ 요즘은 흔하디흔한 게 ‘출렁다리’다. 그렇다고 짜릿한 스릴까지 흔해지겠는가. 거기다 산악지형에 설치한 현수교로는 가장 긴 편에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다리는 70kg기준 900명이 동시에 올라가도 끄떡없이 지어졌단다. 초속 30m 강풍과 진도7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단다. 하지만 길이가 150m나 되는데 어찌 출렁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움직임에 몸을 내맡기고 맘껏 즐겨보자.
▼ 다리는 36m나 되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덕분에 출렁거림 속에서도 설마리, 설마천계곡 등 다리 주변의 풍경들을 눈에 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다리 건너. 범륜사로 올라가는 진입로는 상당히 가팔랐다.
▼ 10 : 28. 범륜사(梵輪寺)에 이른다. 참! 올라오는 도중 ‘운계폭포’로 내려가는 길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폭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절간 뒤 샛길로 가면 ‘운계전망대’가 나온다. 감악산 산행의 필수코스라지만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 감악산 중허리에 터를 잡은 ‘범륜사’는 한국불교태고종 종단의 사찰이다. 옛날 감악산에는 감악사·운계사·범륜사·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월의 풍화와 전쟁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의 ‘범륜사’는 1970년 금봉이라는 스님이 옛 ‘운계사(존재했다는 문헌만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터에 다시 세운 것이란다.
▼ 사찰 앞에 세워놓은 ‘세계평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사찰의 ‘점심 공양’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점심 공양과 저들이 원하는 세계평화가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절간 뒤 백옥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7m의 ‘관세음보살상’도 볼만하다. 중국 하북성의 아미산 백옥으로 현지에서 만들어 1995년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 감악산 역시 방문 목적은 등산이다. 산행은 범륜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널찍한 데다 바닥까지 야자매트로 깔려있어 산행기분은 나지 않는다.
▼ 작은 돌멩이들이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행운을 빌며 붙여놓은 것 같은데, 이게 흡사 자철석이라도 되는 양, 떨어지지 않고 처음 그대로 찰싹 붙어있다.
▼ 10 : 45. 탐방로는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여름철 집중 호우 때는 통행이 불가능할 듯. 그렇다고 우회로가 따로 나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 개울을 건너자마자 상황이 확 바뀌어버린다. 넓고 반반하던 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칠기 짝이 없는 너덜길로 바뀐 것이다.
▼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복원된 숯가마 터(이정표 : 묵은밭 0.2km/ 범륜사 0.6km)에 닿았다. 숯은 참나무로 구워낸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 이는 감악산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 11 : 00-11 : 05. 고역이라 할 수 있는 너덜길의 끝. ‘묵밭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을 위한 배려로 쉼터용 정자를 배치했다.
▼ 이정표(감악산 정상↑ 1,350m/ 까치봉← 1,000m/ 범륜사↓ 800m)는 길이 둘로 나뉨을 알린다. 그렇다고 고민하지는 말자. 어느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정상에 이르기는 마찬가지, 그저 한 바퀴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 11 : 08. 우리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정상 방향을 선택했다.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이어서 벤치가 놓여있는 곳(‘만남의 숲’이 아닐까 싶다)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붙는다. ‘악귀봉’부터 시작되는 바윗길을 제대로 타보기 위해서이다. 알다시피 바윗길이란 게 올라갈 때가 제멋 아니겠는가.
▼ 지능선이어선지 시작부터 가파르다.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못 올라갈 정도로 깔딱인 곳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 어려움을 지자체도 알았나보다. 밧줄난간을 세워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 11 : 35.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암봉에 올라선다. 수십 길 낭떠러지 위, 풍상에 시달리다 못해 몸을 비비꼬아대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 암봉의 자랑거리는 따로 있었다. 나무 사이로 파주의 산하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북한산이 그 걸출한 자태를 자랑한다.
▼ 내려오는 길은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소름끼칠 듯이 위험하지는 않으니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 되겠다.
▼ 감악산의 또 다른 특징은 단풍나무라 할 수도 있겠다. 설악산이나 내장산만큼은 아니지만 굵고 튼실한 단풍나무들이 능선을 뒤덮고 있었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감악산 정상↑/ 청산계곡→ 1,420m/ 법륜사↓ 1,570m)에서는 직진한다. 오른편은 보리암 돌탑을 거쳐 ‘출렁다리’로 연결되는 ‘감악능선계곡길’로 끄트머리에서 ‘청산계곡길(감악산 둘레길)’로 합류된다.
▼ 감악산에 ‘악(岳)’자가 그냥 들어갔겠는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서 바위지대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곳곳에 저런 나무계단을 놓았다. 오래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던 구간들이다.
▼ 단풍이 한층 더 무르익었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단풍이니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에 풍덩 빠져보면 어떨까?
▼ 11 : 52. 계단을 올라서면 ‘악귀봉(616m)’. 바위봉우리로 ‘돼지바위’라고 부른다고도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석은 파주시와 양주시가 공동으로 세웠다. 참고로 양주시와 파주시, 연천군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감악산은 비봉·임꺽정봉·장군봉·악귀봉이 양주시와 파주시가 어깨를 맞대고 있고, 형소봉은 오롯이 양주시 차지다(대신 까치봉은 파주시 차지다).
▼ 암봉의 특징대로 악귀봉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은 험상궂기만 하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탐방로는 바위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면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 이젠 장군봉을 오를 차례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야 할 길이 이어지는데, 초입의 삼거리(이정표 : 장군봉↑ 0.3km/ 감악산약수터→ 1.6km/ 악귀봉↓ 0.1km)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눈요기 삼아 오르면 될 일이다.
▼ 암릉답게 눈만 들면 구경거리가 달려온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통천문’이다. 하늘로 통하는 문답게 반대편은 천애의 낭떠러지다. 지리산이나 고성의 통천문처럼 통과해볼 생각을 버리라는 얘기다.
▼ 오른편에는 방금 올랐던 악귀봉의 능선이 놓여있다. 악귀봉에서 시작되는 암릉은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다리가 떨릴 정도이다. 그러나 일단 오르면 떠나기를 망설일 정도로, 소나무 등 주변 풍광과 어우러지는 암릉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하기 펼쳐진다. 어쩜 임꺽정은 저런 봉우리들에서 개성과 한양을 호령할 기개를 키웠을지도 모른다.
▼ ‘앗 곰이다’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손가락 끝에 곰 한 마리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양주 들녘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 이즈음 저 멀리 ‘임꺽정봉’의 거대한 암벽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찔한 절벽에는 잔도가 걸렸다. 오래 전, 중국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잔도는 험산을 끼고 사는 중국인들의 전유물인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도 잔도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웬만한 바위산마다 잔도 하나쯤은 보통이 되어버렸다.
▼ 잠시 흙길로 변했던 능선이 장군봉의 턱밑(이정표 : 장군봉↑ 0.1km/ 형소봉→ 0.2km/ 감악산주차장↓ 4.7km)에 이르자 다시 한 번 용트림을 한다. 거대한 암벽으로 변해 앞을 막아버린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우회하여 올라야하겠건만 다행이도 지자체에서 나무계단을 설치했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오른쪽 발아래서 솟아오른 저 암봉은 ‘형소봉’일 것이다.
▼ 계단은 바윗길로 바톤을 넘긴다. 오른쪽은 천 길 낭떠러지, 능선이 칼날처럼 생긴 탓에 왼쪽으로 당겨 걸을 수도 없다. 그저 철제난간을 붙잡고 조심조심 오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구간을 감악산 산행의 백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허공을 걷고 있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12 : 10. 암릉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장군봉(652m)’이 찍고 있었다. 동·서·남으로 시야가 뻥 뚫리면서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거침없이 달려온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이번에는 도봉산과 북한산의 헌걸찬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오른다.
▼ 장군봉을 내려서면서 위험구간은 대충 끝난다. 편안해진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안부(이정표 : 임꺽정봉↑ 0.1km/ 감악산 정상↖ 0.5km/ 장군봉↓ 0.1km)에서 임꺽정봉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감악산(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 올라야 할 ‘임꺽정봉’이다. 양주 쪽 산자락은 천애의 바위벼랑이지만, 파주 쪽은 부드러운 육산의 모양새이다. ‘도적’과 ‘의적’으로 나뉘는 ‘임꺽정’에 대한 평가를 닮았다고나 할까?
▼ ‘배낭걸이 대’라고 한다. 산이 좋아 전국의 산을 20년 이상 누비고 다녔지만, 내 기억에 저런 시설을 처음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임꺽정봉’의 턱밑(이정표 : 임꺽정봉 0.1km/ 얼굴바위 쉼터 0.3km/ 장군봉 0.1km)에서 신양저수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 12 : 21. 제법 긴 계단을 올라서면 임꺽정봉을 코앞에 둔 ‘삼거리(이정표 : 임꺽정봉 50m/ 감악산 0.4km/ 장군봉 0.2km)’. ‘임꺽정봉’의 기상을 흉내라도 내려는 듯 커다란 바위 하나가 위세를 자랑한다.
▼ 양주시에서 세운 안내판이 자기네 땅도 한번 들러보라고 유혹을 보낸다. 천애의 바위절벽에 길은 내놓았으니 스릴을 즐겨보라는 것. 하지만 파주 쪽에 차량을 세워놓은 탓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12 : 23. ‘임꺽정봉’에 올라선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중 하나인 임꺽정이 이곳 양주 출신이어선지 그 흔적으로 임꺽정봉과 임꺽정굴을 이곳에 남겨놓았다. 실존 인물인 임꺽정은 명종 14년(1559년) 임금의 명으로 임꺽정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했고 명종 17년(1562)에 되어서야 임꺽정의 무리를 소탕할 수 있었다. 그 기간(아니면 그 이전) 중 감악산에 머물렀을 수도 있겠다. 하나 더. 조선시대의 임꺽정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홍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임꺽정’ 덕분이다.
▼ 옛 이야기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감악산의 깊고 험한 산속 동굴에 기거했다고 전한다. 그 동굴이 있는 바위 정상이 지금의 ‘임꺽정봉’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임꺽정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무척 호쾌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장군봉의 암릉과, 남쪽의 절벽단애 아래로 펼쳐지는 신암저수지와 널따란 뜰이 자못 시원시원하다.
▼ 12 : 26. 그리도 뛰어난 조망이건만 막상 오래 즐기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좁은 정상이 등산객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아무튼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감악산’으로 향한다.
▼ 12 : 32-13 : 32.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점심상을 차렸다. 그리고 못다 한 얘기로 회포를 풀다 가기로 했다. 산꾼들이라기 보다는, 만나는 것 자체가 좋고, 그저 산에 드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수다로 한껏 여유를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인 ‘어름골재’로 올라선다. 이정표(감악산→ 120m/ 범륜사↑ 2.290m/ 장군봉← 220m/ 임꺽정봉↓ 160m)는 이곳이 사거리임을 알려준다. 곧장 고개를 넘으면 묵밭 근처의 ‘만남의 숲’. 왼편은 장군봉과 임꺽정봉의 중간에서 만났던 삼거리로 연결된다. 감악산의 정상은 물론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
▼ 12 : 33. 몇 걸음 더 걸으면 정자에 닿는다.
▼ 이곳도 조망의 명소 중 하나다. 양주벌판을 가운데 두고 동두천의 칠봉산과 양주의 천보산, 도락산, 불곡산(이 산에도 임꺽정봉이 있다) 등이 불쑥 솟아올랐다. 더 멀리로는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도봉산과 북한산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13 : 46- 13 : 54. 출렁다리 주차장에서 길을 나선지 2시간 45분 만에 감악산 정상에 도착했다. 웬만한 운동장이 부럽지 않을 만큼 널따란 정상에는 정상석과 감악산비, 고롱이 미롱이 마스코트, 각종 안내판 등 파주시·양주시·연천군에서 서로 경쟁하듯이 만들어놓은 시설물들로 가득하다. KBS중계소와 강우레이더 같은 공공시설도 들어서 있었다.
▼ 정상의 북쪽 가장자리,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어른 키 정도 되는 빗돌 하나를 앉혔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은 그 유래가 알려지지 않는데,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아 ‘몰자비’(글자가 죽은 비)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아예 글자를 새기지 않은 무자비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설인귀비나 빗돌대왕비(‘비석대왕비’라는 뜻으로 비석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된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2년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도 했으나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하다는 정도만 파악됐을 뿐이다.
▼ 정상석은 양주시와 파주시가 공동으로 만들었다. 연천군이 감악산의 공동 소유권자이긴 하지만 그 영역이 정상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이리라.
▼ 정상에 어깨를 걸치지 못한 연천군은 군 마스코트인 ‘고롱이 미롱이’와 ‘감악산 숲길’ 안내도만 달랑 세워놓았다. 고롱이와 미롱이는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구석기유적지(전곡리)를 품은 연천군에서 만든 원시인 캐릭터이다.
▼ 조망은 전문가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감악산 등산의 최고 기쁨은 뭐니 뭐니 해도 정상에서 만나는 스카이라인과 납작한 마을들 모습, 그리고 멀리 삐죽삐죽 올라와 있는 한국의 산 풍경이다. 남쪽으로는 동두천시 칠봉산, 양주시 도락산, 서울시 도봉산, 서울시와 고양시를 이어주는 북한산 등이, 북으로는 북한 개성시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 물론 날씨가 도와줘야 가능한 시계이지만, 그야말로 하늘과 공중과 산과 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광활한 풍경인 것이다.>
▼ 그건 그렇고 북쪽(연천)에서 뜬금없는 풍경이 잡힌다. 산꼭대기에 ‘성모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요것조것 뒤적여 봐도 누가 왜 만들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평화·통일의 마음을 담은 조형물로 유추해 볼 따름. 성모님의 시선이 북녘 땅을 응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 임진강, 한탄강 등 접경지역에 내리는 비를 관측할 수 있는 5층 높이의 대형 강우레이더도 들어서 있었다. 태풍·기상변동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상레이더와 달리 반경 125km 이내에서 지표에 근접하게 내리는 비의 양을 면적 단위로 집중 관측해 홍수예보에 활용한단다.
▼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이 그것도 이 늦가을에 말이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시작되는 시조를 읊었다. 뒤이어 나오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똥말똥하여라’라던 문구가 떠오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 13 : 54. 하산을 시작한다. ‘까치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인데, 이정표에는 감악산둘레길 중 ‘손마중길’로 적혀있었다. 레이더기지의 서쪽 울타리에 기대어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면 된다.
▼ 13 : 56. 몇 걸음 걷지 않아 멋진 ‘전망대’를 만났다. 시야가 툭 트이는 곳에 데크로 대를 만들어놓았다.
▼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파평산, 천덕산, 덕물산 진봉산 등 수많은 산들이 드넓은 들녘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물굽이를 이루며 흘러가는 임진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장단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에서 송악산과 극락봉 등,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의 산들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 탐방객들을 위해 배려도 잊지 않았다.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 13 : 59. 또 다른 조망처에는 아예 정자까지 들어앉혔다. 하지만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조금 전 들렀던 전망대와 똑 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아서이다.
▼ 팔각정(이정표 : 까치봉↑ 600m/ 객현리→/ 정상↓ 150m)에서는 까치봉 방향으로 간다. 정자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길고 긴 나무계단.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지만 곳곳에서 조망이 틔기 때문에 눈이 호사를 누리며 내려갈 수 있다.
▼ 14 : 18. 운계능선을 탄지 19분 만에 토끼봉에 올라섰다.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지는 멋진 산봉우리이다.
▼ 정상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현 위치를 까치봉으로 표시해놓은 ‘감악산 둘레길’ 안내도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그게 서운했던지 누군가가 안내도에 까치봉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놓았다.
▼ 까치봉 역시 멋진 조망처였다. 아까 정상 근처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낮아진 고도만큼만 좁아졌다고나 할까?
▼ 이후로도 나무계단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 14 : 51. 삼거리 안부(이정표 : 손마중길 740m/ 묵은밭 120m/ 감악산 정상 1,380m)에 내려선다. 직진의 운계능선은 운악산둘레길의 손마중길로 연결된다. 우리는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핑계 삼아 묵밭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 탈출로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 가파른 나무계단을 100m이상이나 내려간 뒤에야 묵밭에 이를 수 있었다. 이후부턴 아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
▼ 15 : 50. 똑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무료함을 견뎌가며 걷길 25분 드디어 출렁다리 주차장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6.78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하긴 집에 돌아온 집사람이 앞으로 산행은 사양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 에필로그(epilogue), 주차장에서 짐을 챙기다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악사(紺嶽祠)라는 사당이 없어졌다니 말이다. 내 나라 강산을 짓밟은 당나라, 그 군대를 이끈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모신다니 이를 말인가. 하긴 세상이 하 수상한데 무슨 꼴인들 못 보겠는가. 올 여름인가? 언론은 어느 얼간이가 광복절날 일장기를 문간에 내걸었다고 전했었다. 그러니 설인귀를 모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토착 왜구가 스스럼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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