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飛鳳山, 372m) - 태봉산(248m)
산 행 일 : ‘23. 12. 9(토)
소 재 지 : 경기도 안성시(죽산면·삼죽면)와 용인시(처인구 백암면) 경계
산행코스 : 산행코스 : 하삼마을(빌라)→석조삼존불상→능선→태봉산→비봉산→죽주산성→미륵당→봉업사지→죽산버스터미널(소요시간 : 8.66km/ 3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안성시(삼죽면·죽산면)과 용인시(처인구 백암면)의 경계에 놓여있는 산이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산이 품고 있는 유적들을 포함하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죽주산성은 물론이고 수많은 미륵불과 석탑들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 하나 더. 사람들은 안성을 일러 ‘안성맞춤’이라고들 한다. 광해군 때 ‘대동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안성의 맞춤형 유기가 인기를 끌면서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안성을 ‘미륵불(彌勒佛)의 고장’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만큼 석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번 비봉산 산행은 산행보다, 그 산이 품고 있는 여러 미륵불과 석탑의 답사가 주제가 되어 버렸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 산행들머리는 하삼마을 빌라(안성시 죽산면 두현리 : 하금길 42)
중부고속도로 일죽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안성방면으로 내려오다 두현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잠시 후 ‘하삼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정류장 맞은편 골목(하삼길)으로 들어가 첫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하얀색 빌라(3층)가 보인다. 참고로 우리는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죽산까지 온 다음, 택시를 이용해 이곳으로 왔다.
▼ 지도(청색 선)처럼 진행했다. 관음당에서 출발 태봉산·비봉산·죽산산성을 오른 다음 도로를 따라 (죽산)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도중에 석불과 석탑 등 문화재들을 둘러봤다.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해 ‘죽산향교’를 빼먹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산행을 시작하기 전 문화재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빌라 오른쪽 공터에 ‘두현리 석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안성시 향토유적(제40호)에 불과하지만, 불상을 보호각 안에 모셔놓는 등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마을주민 말로는 불상을 자신들이 보살핀다고 했다. 수시로 청소를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불상 주변은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갈했다.
▼ 불상은 마애불과 비슷한 형식으로 바위 면을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배치하여 좌우의 협시가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형태이다. 바위에 조각되었던 것을 떼어낸 듯이 보이는 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확한 장소는 불분명하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 고려시대(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불상은 세밀한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안내문을 참조하시길...
▼ 11 : 28. 빌라 뒤편 산비탈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정규 탐방로는 아니지만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 지름길이라선지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었다.
▼ 길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가파른 경사에 낙엽까지 수북이 쌓여 미끄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 11 : 42. 개척 산행을 하다시피 해가며 능선에 올라섰다. 그러자 정규 탐방로가 또렷이 나타난다. 죽산교회에서 올라오는 길이라고 한다.
▼ 11 : 46. 잠시 후 안부로 내려선다. 3개의 고갯길이 시작된다는 ‘아랫새 고개’인 듯. 왼쪽으로 제법 또렷한 길이 나있다. ‘위키백과’는 안성으로 가는 녹배고개와 삼죽면을 거쳐 백암으로 이어지는 뒤통말고개, 서낭당고개 등이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적고 있었다.
▼ 경제림 조성을 위한 벌목 덕분에 시야가 툭 터진다. 죽산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읍(邑)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고층건물들이 울쑥불쑥 솟아올랐다. 하나 더. 지도는 요 아래를 관음당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옛날 죽산에 문(門)이 만(萬)개나 되는 봉업사(奉業寺)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절의 관음당(觀音堂)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 지금 오르고 있는 ‘태봉산’은 높이라고 해봐야 248m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명색이 산인데 어찌 가파른 곳 하나 없겠는가. 산길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가파름을 더해간다.
▼ 그러다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는 버겁다싶을 정도로 가팔라진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까지 매달아놓았다.
▼ 12 : 0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태봉산’ 정상에 올라섰다. 웃자란 잡목에 둘러싸인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육산의 특징대로 특별한 볼거리가 없고,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하나 더. ‘태봉(胎封)’이란 지명은 왕족의 태(胎)를 묻었다(封)는 데서 유래된 게 보통이다. 태실(胎室)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산은 어디서도 그런 내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 오랜만에 만나는 표지기가 반갑다. 배창랑과 그 일행, 산여울(김명근), 맑음 등등... 산행보다는 트레킹으로 방향을 바꾼 지 벌써 5~6년, 그네들은 여전히 산을 오른다. 그리고 세상의 산들을 다 올랐음일까? 어쩌다 오른, 그것도 동네 뒷산에 불과한데도 어김없이 그네들의 표지기가 휘날린다.
▼ 다음은 ‘비봉산’이다. 북쪽 능선을 따라 100m쯤 걸으면 삼거리. ‘하삼 사거리’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비봉산 정상↑ 1.0km/ 구교동→ 0.5km/ 태봉산↓ 0.1km)는 오른쪽이 ‘구교동(죽산리)’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 12 : 18. 능선을 따라 잠시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이 이곳에서 ‘영남길’이 합쳐짐을 알려준다. ‘영남길’은 6개(삼남·의주·영남·평해·경흥·강화)로 구성된 ‘경기옛길’ 중 하나로 경기도와 충청도를 잇는 역사문화탐방로이다. 경기도에서는 비봉산 자락에 ‘죽주산성 길’이란 산책로를 내면서 ‘화려한 고려문화의 향기’라는 미사여구로 첨언을 하고 있었다.
▼ 길은 무척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 12 : 22. ‘서낭당고개(이정표에는 ‘뒷통말고개’로 적혀있다.)’로 여겨지는 안부사거리로 내려선다. 이정표(비봉산↑ 0.5km/ 죽산면사무소→ 1.4km/ 삼죽면 내장리← 0.5km/ 두현리 하삼↓ 1.2km)는 이 고개가 죽산면과 삼죽면을 이어주고 있음을 알려준다.
▼ 고개를 기점으로 길의 형편이 확 달라진다. 폭이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로등을 설치해 야간 등반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국도가 고속도로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 쉼터를 겸해 벤치를 놓아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 ‘암자 주변 풍경이 아닌가요?’ 함께 걷던 최군의 넋두리다. 맞다. 마을이나 암자 주변에서나 볼 법한 산죽군락이 비봉산의 정상 어림에 분포되어 있었다. 작고 연한 잎새가 이른 봄 덖어서 차라도 만들어 마시면 딱 좋겠다.
▼ 12 : 40 – 13 : 30.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5분(태봉산에서 35분). 비봉산 정상에 올라선다. 분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널찍한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왕벚나무와 산벚나무 그늘 아래 벤치와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 보면 인근 주민들이 자주 올라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식탁용 테이블은 등산객 차지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한 시간 가까이나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정상표지석은 모셔놓았다는 느낌. 도톰하니 대를 쌓고 그 위에 빗돌을 올렸다. 하지만 ‘비봉(飛鳳)’이란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다못해 산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지형이라는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아니면 봉황이 알을 품은 ‘봉황포란형’의 풍수지리설도 좋을 게고...
▼ 정상에서의 조망은 좋은 편이다. 동·남쪽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죽산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13 : 30. 이제 죽주산성으로 갈 차례이다. 아까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50m쯤 진행하면 삼거리(이정표 : 죽주산성← 1.2km/ 약수터→ 0.7km/ 비봉산 정상↓ 50m), 당연히 죽주산성 방향으로 간다.
▼ 50m쯤 더 가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죽주산성→ 1.1km/ 일죽면 방초리↑/ 비봉산 정상↓ 0.1km)가 나온다.
▼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나무계단에 이어 침목계단을 놓아야했을 만큼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 능선은 ‘원시의 숲’을 연상시킨다. 그 속에서 나는 억척스런 ‘삶의 현장’을 만난다. 이곳 안성은 ‘미륵불의 고장’. 그네들이 주장하는 ‘윤회사상’을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 죽어 나자빠진 참나무에서 아카시아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 원시의 숲속에서 원시인이 살아갈 것은 당연. 그러니 저건 네안데르탈인쯤 되겠다. 아무튼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간 우리네 조상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 14 : 03. 능선 안부로 내려선다. 죽산면 매곡마을과 같은 죽산면의 매산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일 것이다.
▼ 이정표(죽주산성↑ 0.2km/ 매곡마을→ 0.6km/ 비봉산 정상↓ 1.0km)는 이곳이 ‘장광고개’임을 알린다. 하지만 ‘장광저수지(매산리)’ 방향으로는 길도 나있지 않았다. 그러니 kakaomap처럼 ‘매곡 뒷고개’로 부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빼다 닮았다. 아니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건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두 줄기가 다시 합쳐진 경우이니 조금 옹색하긴 해도 ‘연리지(連理枝)’라며 고집해 보자.
▼ 밀도를 더해가는 바위군락도 잠깐의 볼거리로는 충분했다. 독특한 생김새로 나그네의 발길을 자꾸만 붙잡는다.
▼ 그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흔들바위’이다. 아랫도리만 살짝 걸려있는 모양이 손만 대도 금방 굴러가버릴 것 같다. 하지만 집사람과 최군이 있는 힘을 다해 밀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 14 : 12. 드디어 비봉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죽주산성’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는 죽주산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치열했던 격전지였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찾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선사하는 산책코스로 변했다.
▼ 죽주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내성·중성·외성 세 겹의 석성으로 물샐 틈 없는 위엄을 자랑한다. 2001년 이후 지표·발굴조사를 통해 죽주산성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의 유물이 수습되면서 중성은 삼국시대에, 내·외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됐으며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으로 성벽을 수축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 성벽(이정표 : 송문주장군 영각→ 0.2km/ 비봉산 정상↓ 1.2km)으로 올라선다. 외성(外城)의 서문지 근처 한 지점으로, 이후부터는 성벽의 위를 걷는다.
▼ 잠시 후, 이번에는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벽으로 올라선다. ‘중성(中城)’에 올라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 성벽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른 많은 문화재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과 달리, 죽주산성은 남한산성만큼이나 석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몽골군의 숱한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덕분에 우린 선조의 기개를 그대로 느낄 수 있고.
▼ 북벽(北壁)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우린 다른 이들이 주 탐방로로 삼았던 북벽으로 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14 : 24. 성벽이 마치 덧붙여 쌓기라도 한 것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간다. 중성의 ‘서남 치성’인 것 같은데, 꼭대기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참고로 치성(雉城)이란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쌓은 부분을 말한다.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싸울 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 죽주산성은 요즘 죽산 주민들의 ‘힐링 스폿’으로 통한다고 했다. 2010년부터 복원 공사가 이루어져 성벽·성문·포루 등의 복원과 함께,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산책로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가족단위로 산책 나온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북벽포루’인줄 알았다. 그러니 ‘나 홀로 나무’와 함께 감성 사진 하나쯤 찍어둘 것은 당연. 감성에 젖었던 때문일까? 난 ‘포루’의 유적이나 드라마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의심해보지도 못했다.
▼ 걸어온 길. 외성 쪽으로 뻗어나가는 성벽은 세월의 더께 없이 희고 매끈하다.
▼ ‘치성’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치성의 임무대로 봉업사지를 비롯한 죽산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동남 치성’으로 향한다. 중성을 따라 남문→동남치성→동문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이 15분쯤 이어지는데, 성벽 위를 걸으며 죽산리 전체를 조망하거나 한적한 숲속을 가로지르며 거닐 수도 있다.
▼ 중성의 ‘남문(南門)’이란다. 죽주산성은 1236년(고려 고종23) 몽골군을 격퇴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얼마나 많은 군사와 백성이 저 문을 드나들었을까?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킨 그네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몽골군은 청주와 충주로 향하는 두 길이 만나는 요충지였던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고려군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몽골군은 대규모로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큰 피해를 안은 채 철수했다고 한다. 그때 백성들과 함께 성을 지킨 이가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장군이다.
▼ 성벽 위로 내놓은 산책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잔디로 뒤덮인 것이 숫제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 14 : 34. 중성의 동남쪽 방어시설인 ‘동남 치성’에 이른다. 장대석으로 ‘ㄷ’자 모양의 방호벽을 쌓았다.
▼ 14 : 37. 성벽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서면 동문, 왼편으로 거짓말처럼 고즈넉한 평지가 분지처럼 펼쳐진다. 연못과 쉼터 등을 가미한 잔디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옛날에는 군사시설과 창고, 집들이 있었지 않나 싶다. 초지 너머 산자락에 띄엄띄엄 서너 채의 집이 보이는데 한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기와집이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이다.
▼ 가장 눈에 띄는 건 ‘연못’. 배수로가 연결된 계단식 연못은 무적의 산성을 유지할 수 있던 비밀병기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성을 포위해 공격할 때도 물이 있었기에 보름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14 : 42. 이왕에 왔으니 어찌 송문주(宋文胄) 장군을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5분쯤 걸으니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忠義祠)’가 나온다. 매년 음력 9월9일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제향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송문주 장군은 1236년(고종 23년) 몽고군 3차 침입 때 죽주방호별감으로 있으며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로, 안성의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 사당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저 정조 때 채제공 선생이 쓴 번암집의 ‘송장군묘비명’에 사당이 만들어진지 5~6백년이 지나 보수했다고 기록된 것을 내세워 송 장군 사후인 1200년대 후반에 지어졌을 거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또 다른 안내판은 체제공이 쓴 ‘송장군 묘비명’을 소개하고 있었다.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란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 현재 죽주산성의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중성의 동문(東門)은 차가 지나다녀도 될 정도로 컸다. 문 앞쪽은 아치형이지만 뒤쪽은 네모난 형태로 옆의 계단을 오르면 중성 동남치성을 만날 수 있다.
▼ 14 : 47. 동문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간다. 그런데 뭔가를 놓쳐버린 듯한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맞다. 죽주산성 제일의 ‘포토죤’이라는 ‘북벽 포루’를 들러보지 못한 것이다. ‘연모’, ‘옷소매 붉은 끝동’ 등 사극 촬영지로도 유명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잘못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 14 : 59. 잠시 후 도착한 산성주차장. 죽주산성 조형물이 반긴다.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은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이곳 ‘죽산’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방어와 관련하여 중요시되었다. 산성은 6세기 중반 신라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서울 지역과 대중국교역항이 있었던 당항진(남양만 일대)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 국도(17호선)에 이르니 도로변에 7~8개의 빗돌이 늘어서 있었다. 선정을 베푼 죽산현(竹山縣 : 고려 때는 竹州) 관리들을 칭송하는 송덕비(頌德碑)가 아닐까 싶다.
▼ 15 : 03. 이후부터는 국도를 탄다. 중앙분리대까지 있는 왕복 4차선이 이 도로의 교통량을 짐작케 해준다. 맞다. 예로부터 죽산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전략적 가치를 이어왔다. 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한양)로 가는 주요 도로 중 영남대로(장호원-안성)가 지나고 인근의 삼남대로(진천-용인)와도 교차한다.
▼ 15 : 12. 잠시 후 도착한 ‘미륵당’은 법정 동리인 매산리의 4개 자연부락(한평·상구산·하구산·미륵당) 중 하나다. 그런데 ‘문화재 마을’로도 불리는 모양이다. 하긴 미륵당(彌勒堂)이란 게 본디 미륵의 거처라는 뜻일지니. 요 아래에 있는 ‘태평미륵’이 가져다 준 지명이 분명하다.
▼ ’죽주산성 길‘ 안내판은 미륵당 한평마을의 이야기를 전한다. 한평(閑坪)은 토지가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는 드넓은 들녘을 품었다는 마을, 매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구산마을(웃지시미 및 아랫지시미)도 기름진 토지에서 질 좋은 쌀이 생산되어 고을 원님께 진상을 바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미륵당에 대한 얘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 15 : 15. 잠시 후 ‘매산리 석불입상’에 이른다. 미륵이 16구나 있다는 ‘석불의 고장’ 안성을 수식하는 주요 미륵불 중 하나로 ‘태평미륵(太平彌勒)’으로 불리면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숭상을 받아왔다. 높이도 5.6m에 이르러 안성지역의 미륵불 중 가장 크다. 그래선지 부처를 모실 누각을 세웠는가 하면 담장까지 빙 둘러 놓았다. 마을 이름도 태평미륵의 거처라고 해서 ‘미륵당’이 되었단다.
▼ 안에는 미륵불과 석탑을 함께 모셔놓았다. 높이가 1.9m인 ‘미륵당 오층석탑(향토유적 제20호)’은 고려 초기인 993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균형미가 떨어진다는 것(탑신이 사라진 2·3·4층은 지붕만 애처롭고, 5층은 아예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말고는 내력이나 생김새 등 특별한 게 하나도 없었다.
▼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2가지 성격으로 나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머리 위에 보개(寶蓋)를 쓰고 있는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목구비의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그때는 인간의 수명이 8만4000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찬단다. 그렇다고 아무나 미륵불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아 공덕을 쌓거나, 부처님에게 향화(香華)를 공양해야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 석불은 고려시대 몽골군을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장군과 김윤후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평미륵(太平彌勒)’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이곳에 있던 중앙관리들의 출장 숙소 ‘태평원(太平院)’에서 따왔다. 하나 더. 석상은 오른손에 두려움을 없애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에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는 모양새라고 했다. 민중의 숭배를 받아온 이유일 것이다.
▼ ‘미륵당’에서 나와 이번에는 ‘봉업사’로 간다. 200m쯤 걸으면 사거리. ‘봉업사’로 이름을 바꾼 옛 ‘용화사’에서 내건 팻말이 길을 인도해준다. 경기도 기념물 제189호인 ’봉업사‘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경내에 죽산리 삼층석탑과 죽산리 석불입상이라는 두 점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 15 : 25 – 15 : 45. 귀에 익숙한 이름에 끌려 들어간 봉업사. 시쳇말로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로운 오층탑이 보일 뿐, 떡하니 버티고 있어야 할 유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앉은 김에 쉬어가라’고 했던가. 양지바른 곳이 눈에 띄기에 아까 정상에서 먹다 남겨놓은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 15 : 45. 몸이 편하면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지나 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석불’이 절간 왼쪽 산자락에서 빼꼼이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 죽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연화대(불상을 안치하기 위한 연꽃모양의 받침대) 위에 놓여있는 높이 3.36m의 석불입상이다. 온화한 표정의 불상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귀가 특징이다. 몸체에 비해 머리와 손이 크게 표현되고, 육계(肉髻)와 타원형의 옷 주름 등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참! 옆에는 석탑도 하나 있었으나 안내판이 없어 내력은 알 수가 없었다.
▼ 석불은 죽주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다 세운 것이라고 한다.
▼ 15 : 51. 절간을 빠져나오다 ‘죽산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이라는 또 하나의 탑을 만났다. 높이 3.2m의 탑은 두꺼운 지붕돌과 4단의 옥개석받침 등 조형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탑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가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 탑은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다시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화차사(華次寺)’이던 신라시대에도 탑이 있었다는 자리다.
▼ 봉업사지로 가는 길 주변은 온통 논밭이다. 근처로 4차선의 국도가 지나가지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평면적인 풍경에 시야가 편안하다.
▼ 16 : 05. 그렇게 도착한 ‘봉업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435호)’은 유역 정비공사가 한창이었다. 국보(國寶)에 어울리는 매무새로 단장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높이가 6m인 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됐다. 여러 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위에 단층 기단을 두고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1층 탑신이 유난히 높은 점이 고려석탑의 특성을 잘 나타낸다고 한다.
▼ 죽산리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 당간지주는 당간(‘당’은 부처나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나타내는 깃발, ‘간’은 당을 거는 장대)을 고정해주는 두 개의 지주대로 절의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당간지주는 높이 4.7m(폭 0.76m, 두께 0.5m)의 돌기둥 한 쌍이 1m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경기도 3대 사찰이었다는 절간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나 할까?
▼ 이곳에 있던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사찰이었다고 한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다 이 절에 들러 태조 왕건의 초상화에 절을 했다고 전한다. 태조 왕건의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다는 얘기다. 신라시대 ‘화차사(華次寺)’였던 절은 고려시대에 봉업사(‘고려의 업을 일으킨 곳’이라는 의미)‘로 되면서 크게 번창했으나 1530년의 문헌에서는 기록조차 사라진다.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제435호), 봉업사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 봉업사지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에서 당시의 영화를 그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 16 : 08. 봉업사지를 빠져나오자 국도 17호선. 교통섬에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만드는 송문주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송문주 장군은 이 지역의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했다. 죽산면 주민들은 매년 송 장군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오는가 하면, 죽주산성과 봉업사지 터 앞을 지나는 도로를 ‘송문주로’로 명명하고 저 동상까지 세웠다.
▼ ‘서동대로’를 따라 죽산으로 들어간다. 죽주(竹州)로 불리던 죽산은 지리적으로 기호지방과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 죽산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을 건 당연. 신라 때 이미 죽주산성이 축성되었고, 조선말까지 도호부가 자리해 있던 경기·충청의 주요 행정구역이었다.
▼ 16 : 15. 죽산 버스터미널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8.66km를 찍고 있으니, 코스의 절반 이상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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