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39코스(답동마을-법성포)
여 행 일 : ‘23. 10. 28(토)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및 법성면 일원
여행코스 : 답동 버스정류장→가자봉→노을전시관→영광대교→백제불교 최초도래지→법성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3km, 실제는 노을카페부터 16.28km를 4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9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코스 대부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백수해안도로’를 따른다. 덕분에 동해를 닮았다는 서해바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해거름이 아니어서 백수해안도로의 하이라이트인 ‘노을’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 들머리는 답동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백수읍 홍곡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겨 백수읍까지 온다. 대전리교차로에서 우회전 7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면 잠시 후 답동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38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 이번 구간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아홉 번째라는 ‘백수해안도로’를 주축으로 한다. 그저 초반 4.5km를 해안도로 대신 구수산의 능선으로 바꾸고, 후반부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를 구경시키는 정도라고나 할까? 길이는 16.3km, 4.5km가 산길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4개(5개 가운데)나 되는 이유일 것이다.
▼ 오늘 걷게 될 ‘백수해안도로’가 ‘제1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자연경관 최우수상을 받았단다. 이름조차 낯선 상인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4개 유형(시가지․역사문화․농산어촌·자연)의 뛰어난(건축물·공공공간·주변환경 등이 종합적으로 잘 어우러진) 경관을 발굴·홍보하기 위해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기획한 행사라고 했다.
▼ ‘동해 같은 서해의 최고 해안길’이란다. 동해의 파도, 청청한 남해, 서해의 끝없는 갯벌로 대변되는 우리네 바다는 어디가 더 좋다고 평할 수 없을 만큼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서해바다는 쓸쓸한 갯벌이 질펀하고, 사연을 간직한 섬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야 하며, 안내판에서 저런 표현은 사라져야만 한다.
▼ 11 : 50. 트레킹은 ‘백암 해안전망대’에서 시작했다. 영광에서 노을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39코스 시점에서 77번 국도(홍농 방향)를 따라 2km쯤 가다 ‘Cafe 노을’로 내려가면 된다. 참고로 이곳 ‘백수(白岫)’는 아흔아홉 개의 산봉우리를 이르는 지명이다. 그런 특징을 직접 느껴보라는 듯 39코스의 초반은 구수산 줄기인 가자봉과 뱀골봉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난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이미 답사를 마친 길을 또 다시 걷기보다는 ‘백수해안도로’의 명소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 확·포장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건너자 ‘Cafe 노을’이 나온다.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커피가 일품으로 알려진 곳이다. 서해바다를 마당삼은 덕분에 최고의 ‘오션 뷰’를 보여준단다.
▼ 맞다. 카페에서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영화 ‘마파도’의 촬영지인 ‘동백마을’. 바다를 내려다보며 밭일을 하던 장면 등이 저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절벽 같은 길을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은, 어느 집에서나 문을 열면 비경의 바다와 바로 마주할 수 있단다. 영화촬영지가 된 이유일 것이다.
▼ 반대편에는 ‘가자골’이 있다. ‘백수해안공원’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 ‘해안전망대’라는 이름을 낳게 한 정자는 바다와 맞닿은 벼랑 가장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다가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자를 에워싼 잡목들이 서해바다에 대한 조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망은 카페 주변에서 실컷 즐기도록 하자.
▼ 12 :00. 전망대를 빠져나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재골(백암리1구)’에 이른다. 영화 ‘황해’에서 하정우가 살인청부 받은 인물의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만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던 시골 버스승강장이 이곳일 것이다.
▼ 12 : 00-12 : 10. 가재골(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백수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왜구에게 붙잡힌 어부를 기다리다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모자바위’도 있다.
▼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지나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난간에 서면 칠산도와 안마도, 송이도 등 칠산 앞바다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 이곳은 전설이 빚어놓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어부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촛대를 들고 나가 바닷가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돌이 됐다. 바다에서 익사한 남편은 거북이가 됐고, 촛불을 보고 바닷가로 돌아와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보라! 거북이 한 마리가 촛대처럼 생긴 바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지 않는가.
▼ 벼랑에 걸치듯 내놓은 계단도 놓치지 말자.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고두섬’ 같은 또 다른 볼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안공원의 얼굴마담격인 ‘모자바위(母子岩)’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를 업은 엄마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공자는 ‘나이 70이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종심(從心)이라 했다. 하지만 칠십에 이른 나에게 도란 아직도 남의 얘기일 따름인가 보다.
▼ 12 : 18.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어 ‘대리골(백암리1구)’에 이른다.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대나무를 ‘다리’로 착각해서 ‘교동(橋洞)’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 이곳은 영화 ‘황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하정우가 하룻밤을 묵어갔던 민박집인데 지금은 동명(황해)의 펜션으로 변해있다. 그저 영화 초반 스치듯 지나가던 ‘고두섬’만이 옛 모습 그대로라고나 할까? 퀭한 얼굴로 아침밥을 먹던 하정우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사진은 사라져버린 울주횟집(현 황해펜션) 대신 고두섬을 배경삼은 ‘프로방스 펜션&글램핑’을 게재했다.
▼ 바다 건너 송이도에 ‘고두섬 끝’이라는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송이도에 삼천갑자 동방삭을 능가하는 ‘고두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곳 백수해안에서 뜀박질 한 번으로 송이도에 이를 정도로 도력이 엄청났다나? 저 ‘고두섬’을 당시 그가 발판으로 삼았었을 지도 모르겠다.
▼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입소문을 탄 ‘백수해안도로’는 연간 방문객이 76만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니 주차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 안내판은 ‘칠산갯길 300리’ 중 2코스인 ‘노을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법성포터미널에서 출발 영산성지·모래미해수욕장·열부순절지 등을 거쳐 동백마을에 이르는 23.39km의 둘레길이다.
▼ 12 : 24. 이번에는 ‘순아골’이란다. 백암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다.
▼ 12 : 32. ‘Farm Voree(‘rural convergence industry’로 포장했지만 카페가 옳다)’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 백수해안도로는 정말 아름다웠다. 바다를 끼고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도 그렇거니와 앞바다도 거칠 것 하나 없이 탁 트여 파란 수평선만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게 약간은 흠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 커피 향 가득한 작은 도서관 ‘뭉클’이란다. 1층은 카페와 도서관, 2층은 테라스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커피 향을 즐기며 독서를 즐겨보라는 듯. 하지만 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이제나저제나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쩌겠는가.
▼ 12 : 40. 덕산마을 앞 삼거리에 이른다. ‘홍농읍’으로 연결되는 77번 국도는 직진, 백수해안도로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 이곳은 구수산의 산줄기를 넘어온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로로 내려서는 지점에 구수산등산로 안내판과 함께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1.8km/ 시점 4.5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 걸은 내 트랙에는 3.68km가 찍혀 있었다.
▼ 서해랑길은 덕산마을(대신리)을 거쳐 ‘정유재란열부순절지(旌酉再亂烈婦殉節地)’로 간다. 그렇다고 트랙을 꼭 따를 필요는 없겠다. 곧장 순절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는데 구태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붉은 양귀비가 매혹적이라던 주변이 온통 황량한 풍경으로 변해있는 게 아닌가. 꽃이 시들자 내년을 기약하며 밭을 갈아엎었나 보다.
▼ 사적비를 기웃거리다 ‘도해문(蹈海門)’으로 들어가니 모열사(慕烈祠)가 반긴다. 칠산바다에 투신한 아홉 열녀를 기리는 사당이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에 살던 동래정씨(東萊鄭氏)·진주정씨(晋州鄭氏) 문중의 부인들이 전쟁을 피해 지금의 묵방포(墨防浦)까지 왔으나 결국 왜적들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 1681년(숙종 7) 나라에서는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비각(碑閣)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 옥개석을 올렸다. 바다를 배경으로 오른쪽에 8열부의 비각, 왼쪽에 정등(鄭燈)의 처 밀양박씨의 비각이 같은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 열부순절지(이정표 : 종점까지 11.5km)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런 다음 ‘데크 로드’를 따라 스카워크로 간다. 줄을 지어 늘어서있는 검붉은 갯바위에 걸치듯 길을 내놓았다.
▼ 험상궂지 않다고 해식애가 아니겠는가. 천년 세월 모진 풍파를 견디다보니 영험함까지 띠게 되었나 보다. 기(氣)라도 받으려는 듯 푸짐하게 상까지 차려놓은 무당이 뭔가를 열심히 빌고 있었다.
▼ 12 : 48. 다시 올라선 도로(해안로). 도로변 공터에서 주말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지역 특산물로 여겨지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힘이라도 실어주려는 듯 ‘천빛예술봉사단’이 공연으로 흥을 돋운다.
▼ 12 : 50. 스카이워크 형식으로 지어진 ‘노을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 스카이워크의 끝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이라는 멋진 조형물이 장식하고 있었다. ‘칠산바다’의 상징인 괭이갈매기(천연기념물 제389호)의 날개를 형상화한 최고의 ‘포토 스팟’이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백년해로의 기원을 담았다니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생샷 하나 건져보면 어떨까.
▼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선지 시선이 수평선과 일직선이다. 문득 아까 혀를 차게 만들던 동해바다답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주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안마군도의 섬들이 아스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야를 가리는 섬 또한 서해바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 가야할 방향의 언덕은 카페와 펜션으로 한 가득이다. 이곳 백수해안도로가 그만큼 유명세를 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언덕을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영광의 아름다운 노을 풍경을 전시하고 있는 ‘노을전시관’이 놓여있다.
▼ 노을전시관 부근 바닷가, 갯바위에 걸터앉은 ‘대신등대’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낭만적인 노을을 볼 수 있는 해넘이 명소다. 곁에 노을전시관을 두었을 만큼 낙조가 아름다워 관광객뿐만 아니라, 등대를 배경으로 노을 사진을 찍으려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13 : 05-13 : 10. 노을전시관은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전시관이다. 노을의 원리부터, 노을 사진, 노을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등을 모두 보여주는 오로지 노을을 위한, 노을에 의한 공간이다.
▼ 노을이 생기는 원리는 물론이고, 노을을 테마(사진·음악·문학)별로 나누어 전시했는가 하면, 빛의 색·성질·산란 등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빛의 과학적 이해를 도와주는 학습장이라고나 할까?
▼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2층)도 만들어놓았다. 탁 트인 칠산바다에 가라앉는 붉은 해를 비롯해 주변 경관을 구경하기 딱 좋겠다.
▼ 전시관 앞.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로 널리 알려진 가수 조미미의 노래비가 있었다. 뒷면은 대표 앨범 3장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았다. 조미미는 1947년 영광에서 태어났고, 1965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남진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가수였으며, 후덕한 외모와 맑은 목소리로 '바다가 육지라면' '단골손님' '서산 갯마을' '해지는 섬포구' 등 섬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 근처 광장에서 후배 가수들이 ‘버스킹’을 열고 있었다. 저 젊은이들은 조미미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을까?
▼ 13 : 15. 노을전시관부터는 ‘데크로드’를 걷는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노을 종’을 만났다. 노을이 되어 어머니 곁을 지키는 효심을 담은 종이다. 구전에 따르면 먼 옛날 ‘도음소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비바람이 심한데도 아들은 소금가마를 지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에 소금이 녹아버렸고, 아들은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을 더 바깥에서 머물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급기야 아들을 찾아 나섰고,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대로 돌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약을 지어 돌아오던 이들이 돌이 돼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구슬프게 울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아들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믿는단다.
▼ 한 번 치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면 행복할 일이 생긴다는 스토리를 입혔다. 다만 칠 때마다 ‘맥놀이’를 들어야 한단다. 여기서 맥놀이는 몸으로 종의 진동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 ‘사랑의 자물쇠’도 눈에 띈다. 노을종을 친 다음 소원을 담아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놓으면, 웃음·사랑·행복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나?
▼ 오랜만에 보는 멋진 안내도이다. ‘백수해안 노을 길’ 지도를 바탕삼아, 꼭 찾아봐야 할 주요 포인트는 사진까지 게시했다. 다음 행선지의 거리를 하단에 적음으로써 이정표의 기능까지 더했다.
▼ ‘앗! 벌통이다’ 이를 본 동갑네기 도반은 벌통을 따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서라’다. 오래전 일이지만 산청의 석대산에서 말벌에 쏘였었고, 고통과 염증에 시달리던 난 식사까지 거른 채 산청의료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 탐방로는 너무 높지 않은 해안절벽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 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차라리 생경스럽다. 저 멀리 서너 개의 작은 섬이 수평선을 갉아먹고 있을 뿐 갯벌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동해바다와 서해바다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 13 : 28- 13 : 46. 모처럼 만난 전망대. 하지만 누군가의 돗자리가 다가가는 걸 부담스럽게 했다. 하긴 우리 역시 간식을 먹느라 벤치 하나를 독차지해버렸지만...
▼ 칠산정(백수해안도로 최고의 전망대라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아래 설치된 목책산책로인 ‘건강365계단’은 1년 365일 건강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오르는 계단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강해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 바닷가 벼랑을 따라 잔도처럼 길을 냈다. 바위절벽은 아니어도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찔하다.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길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이다. 하지만 바닷가에 널린 기암괴석들도 그에 못지않은 매력을 준다. 일상에 지친 가슴을 뻥 뚫어지게 만든다고나 할까?
▼ 산책로는 생태탐방로를 겸한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숲속에서 자라는 여러 식물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저 ‘털머위 꽃’도 그중 하나이다.
▼ 이 길은 ‘백수해안 노을길’로 불린다. 곳곳에서 석양이 만들어내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두어 곳에 바다로 내려가는 길과 함께 해안 절벽 끝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 14 : 03. ‘도음소도(주민들은 ‘돔배섬’이라고 한다)‘를 마주보는 모퉁이를 돈다. 이어서 법성포로 연결되는 내만(內灣)으로 들어서자 바다 건너 금정산 자락이 해안풍경과 함께 조망된다. 참고로 도음소도는 ‘도 닦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올 때 불상을 처음 내려놓았던 곳으로 알려진다.
▼ 내만이어선지 파도가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서해’답지 않게 놀라울 만큼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에 떠 있는 돔배섬(왼쪽에서 살짝 머리만 내미는 곳)과 괭이섬(가운데), 쥐섬(작은 바위섬)까지, 곱디고운 풍광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다.
▼ 14 : 09. 천천히 바다 풍광을 즐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삼미랑 어촌체험관’에 닿는다. 카페와 펜션을 함께 운영하는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길에서 만난 둘레길 나그네의 말에 의하면 ‘서해랑 카페’를 겸하기 때문에 ‘두루누비’ 회원이 들르면 5천원 상당의 커피를 제공한다고 했다.
▼ 14 : 10-14 : 15. 70m쯤 더 걸어 도착한 ‘제8주차장’. 바다를 향해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포토 죤’도 세 개나 배치했다. 눈앞에 펼쳐질 풍경을 믿고, 바라보고, 사진 찍어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 전망대 아래는 방파제 등대(칠산타워를 형상화했단다)가 있는 ‘대신항’이다. 대신마을 어민들은 저 포구에서 배를 타고 칠산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늦봄부터 여름까지는 민어와 백합, 가을에는 꽃게와 새우가 잡힌다고 했다. 일부 어민들은 낚싯배를 운영해 짭짤한 소득을 올리기도 한단다.
▼ 난간에서면 두고두고 꺼내볼만한 빼어난 풍경이 펼쳐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작은 물굽이(灣)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대신항 너머로 나타나는 영광대교는 차라리 덤이다.
▼ 대신항으로 내려서면, 탐방로는 또 다시 데크 로드로 연결된다. 호리병처럼 내륙으로 파고든 칠산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 14 : 26. 데크로드와 이별을 고한다. 이후부터는 도로(해안로)를 따른다.
▼ 14 : 30. 잠시 후 도착한 대초마을 앞 삼거리. ‘옥당박물관’이 잠깐 들렀다가란다. 아주 오래된 토기와 석기가 전시돼 있으며, (동국·해동)통보에서부터 1원·5원짜리 지폐까지 화폐의 역사도 함께 엿볼 수 있단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영광의 얼굴을 빛낸 사람(수은 강항, 소태산 박중비, 공옥진)에 대한 기록도 만날 수 있다나?
▼ 편액 없는 제각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으면. 이후부터는 영광대교를 마주보며 걷게 된다.
▼ ‘영광대교’는 영광군 백수읍과 홍농읍을 잇는다.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두 읍간의 이동시간이 20분 이상이나 단축되었다고 한다.
▼ 영광대교 부근은 도로 확·포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참! 다리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모래미해수욕장’이 있었다. 해안선이 짧은데다 폭까지 좁지만, 백사장의 모래가 곱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기에 들러보지는 않았다.
▼ 다리 남단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광대교 표지돌과 기념조형물(영광의 속뜻인 ‘신령스러운 빛’을 형상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박경숙 시인의 ‘영광대교’를 적은 시비를 세워놓았다.
▼ 14 : 51. 2016년에 준공했다는 ‘영광대교’를 건넌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인 주경간격이 320m에 달하는 현수교이다.
▼ 15 : 00.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4.5km)에서 빠져나와 국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숲속을 헤집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 15 : 08. 목맥마을(木麥, 홍농읍 칠곡리) 앞 ‘목넹기 방조제’로 내려선다. 1925년 전남농장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해서 ‘전남방조제’로도 불리는데 둑 위로 도로(칠곡로)가 나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까지 4.1km) 앞에서 도로를 횡단해 습지로 내려선다.
▼ 탐방로는 목맥마을과 자갈금마을(법성면 진내리)을 잇는 ‘목넹기 방조제’를 따른다. 아니 둑 아래, 그러니까 제방과 유수지 사이에 보행로를 따로 내놓았다.
▼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모래등 들’에는 갈대가 한가득인 유수지가 들어섰다. 고창 땅에서 흘러온 ‘구암천’이 방조제에 막히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범위도 무척 넓었다. 그런 장점을 지자체가 놓칠 리가 없다. 데크 탐방로가 갈대밭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 유수지에는 꽤 많은 철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담수호와 넓은 농경지가 풍부한 먹이를 제공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15 : 17. 제방 끝(이정표 : 종점까지 3.5km)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자갈금 어민들이 사용하는 선착장일 것이다. 참고로 오래 전, 고깃배 선단이 들어오면 법성포 물길의 입구이던 ‘목넹기’에 파시가 선다고 했다. 그 목넹기가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 탐방로는 이제 데크 로드를 따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로 간다.
▼ 15 : 27. 잠시 후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 이른다. 법성포(法聖浦)는 ‘불법(佛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이곳 법성포에 발을 디디며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테마파크를 조성해놓았다.
▼ 도래지에는 고대 인도의 ‘탁트히바히 사원’ 주탑원을 본떴다는 탑원((塔園)을 비롯해 간다라유물관(2~5세기 불상·불전도·부조 등을 전시), 간다라 양식의 사면대불상, 부용루(참배 및 조망용 누각) 등이 들어서 있다. 찬란한 간다라 불교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 탐방로는 ‘탑원’의 뒤 언덕(이정표 : 종점까지 2.6km)을 넘는다. 그리고는 ‘숲쟁이 꽃동산’을 헤집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꽃과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 법성포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 할 수 있는 구간이다.
▼ 15 : 43. 울창한 숲과 꽃, 거기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포구를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주차장(이정표 : 종점까지 2.2km)이다. 아니 온갖 이름 모를 꽃들로 단장된 것이 꽃동산의 연장이라 함이 더 옳겠다.
▼ 15 : 47. 주차장을 지나 잠깐이지만 숲속으로 난 데크로드를 따른다. 이어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정표 : 종점까지 2.1km)으로 들어선다. 물론 주차장 사잇길이나 메인도로(백제문화로)를 따라도 된다.
▼ 몇 걸음 더 걸어서 만난 ‘법성사’의 담벼락은 다양한 바닷속 풍경을 담았다. 절간답게 부처님도 빼놓지 않았다. 하나 더, 이곳(법성진성 조형물이 세워진 지점)에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들머리에 ‘법성진성’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함께 세워놓은 조형물이 조금 이상하다. 성(城)이 아니라 포구를 드나들었음직한 돛단배를 형상화했다.
▼ ‘길이 왜 이따위야?’ 오솔길의 형편은 고창에서 왔다는 둘레길 나그네의 한마디로 대변된다. 이정표 등의 특별한 표식이 없는 들머리는 찾기조차 힘들었고(‘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가는 사람이야 문제없겠지만), 정비되지 않은 산길은 웃자란 잡초 때문에 걷는 게 영 사나웠다.
▼ 15 : 53. 오솔길을 빠져나오니 전망대를 겸한 이층의 누각이 반긴다. 그 앞에 이정표(종점까지 1.9km)와 ‘법성진성’ 안내판을 세웠다. 진성(鎭城)은 지방의 각 진영을 성벽으로 둘러싼 방어용 시설이다. 법성진성은 전라도 일대의 세곡을 모으던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인 1514년에 축조했다. 내부에는 동헌, 객사 등 관아시설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관련된 창고시설도 있었다고 한다.
▼ 법성진성(전라남도 기념물)의 성곽을 따라간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성벽에는 축성에 동원된 전라도 관내 군·현의 이름과 쌓은 길이, 그리고 축성책임자·재정담당자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했다. 하나 더, 300m도 채 되지 않는 성벽을 걷는데 12분이나 걸렸다. 주위가 온통 달래 밭이었기 때문이다. 서방님께 달래장을 만들어 올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 16 : 08.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쟁이(이정표 : 종점까지 1.5km)’로 내려선다. ‘숲쟁이’란 숲정이의 사투리이다. 남도에서 ‘쟁이’는 ‘재’, 다시 말해 성(城)을 뜻하는 어휘로도 쓰였다. 그러니 ‘숲으로 된 성’으로 보면 되겠다. 맞다. 숲쟁이는 1514년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법성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숲으로, 법성진성의 북벽과 연결되어 동쪽으로 이어진다. 남도의 대표 숲으로 인정받아 1988년 전라남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명승 제22호’로 승격되었다.
▼ ‘숲쟁이’는 방풍림의 역할을 수행한다. 포구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은 덤이다. 2006년에는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에 지정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단오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3호, 2009년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등 각종 민속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 이후부터는 진내리의 고샅길을 걷는다. ‘서해랑길’의 특징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조작 실수로 두루누비(코리아둘레길) 앱을 활용할 수 없었던 나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서해랑길’ 리본을 확인하며 걷다가 삼거리와 마주쳤는데, 갈려나가는 골목의 초입에 있어야 할 리본이 직진방향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100m남짓 걷다가 되돌아오기는 했지만(리본이 보이지 않아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 더덩실 더덩실, 벽화 속 주민들은 풍물놀이 삼매경이다. 조선 중기에 시작되었다는 법성포 단오제, 그 행사의 한 장면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 16 : 18. 골목을 누비다가 ‘비석군(碑石群)’을 만났다. 이곳 법성진성을 다스리던 관리(수군절제사나 첨사였을 것이다)들을 칭송하는 빗돌인데, 앞에 주인공의 약력과 공적을 적어놓은 게 특이했다. 부근에는 독립운동가인 고경진선생의 생가 터도 있었고, 법성진성이 축성된 지 500년이나 되었음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띄었다.
▼ 굴비의 본고장답게 셀 수 없이 많은 굴비판매장과 굴비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법성1교’를 건넌다. 갯고랑 건너는 갯벌을 메워 만든 ‘인공 섬’이다. 현재 뉴타운이 들어서 있다.
▼ 이곳 법성포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조창(漕倉)이 개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 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 갔다고 한다. 조창과 조운(漕運)의 기능은 이 마을을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까지 번성시켰다. 하지만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저런 작은 어선들만이 정박해있을 따름이다.
▼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바다와 맞닿은 도로를 따른다. 뉴타운답게 굵직굵직한 건물들이 도로변에 들어서 있다.
▼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법성포 앞바다는 호수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대서호(大西湖)’로 불린다고 했다. 또한 중국의 동정호에 버금가는 풍광을 보여준다고 해서 ‘소동정(小洞庭)’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 지금은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매어있는 배들이 하나같이 작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억새꽃이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린다. 맞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10일 밖에 남지 않았다.
▼ ‘법성포’ 조형물은 굴비 두름을 담았다. 황금빛 조기들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굴비로 새롭게 변신하는 고장. 문헌에 나오는 법성포의 내력들도 함께 적어 넣었다. 하나 더. 굴비라는 이름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인종 때 법성포로 귀양 온 이자겸이 그 맛에 반해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된 도리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녀 ‘굴비(屈非)’라고 불렀다고 한다.
▼ 16 : 35. 법성 버스정류장에 이르면서 39코스 걷기가 종료된다. 서해랑길(영광 40코스) 안내판은 터미널 왼쪽 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6.28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 누군가 그랬다. 영광 법성포에서 거시기 해지면 굴비에 잎새주 한 잔을 하라고. 술을 마시지 않는 여자들도 멜랑꼴리해진 마음이 중화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종점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안함을 글로서나마 집사람에게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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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도(文甲島)
여행일 : ‘23. 10. 6(금)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문갑도리
트레킹 코스 : 문갑도선착장→당너머갈림길→처녀바위→깃대봉→중이절골 갈림길→농막→문갑마을→문갑도선착장(소요시간 : 4.89km/1시간 55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덕적군도(德積群島)의 중심 섬인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는 면적 3.49㎢에 해안선 길이가 11km쯤 되는 작은 섬이다.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섬의 생김새가 선비의 문갑과 같다 하여 문갑도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평평한 문갑(文匣)과는 달리 섬 전체가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경지 면적이 귀하다. 이로보아 ‘투구를 쓴 장수’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독갑도(禿甲島)’가 오히려 설득을 얻을 듯. 때문에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연근해에서 꽃게를 비롯한 조기·새우·민어·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김·굴·조개류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 찾아오는 방법
덕적도를 가는 뱃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고속훼리(코리아나호 또는 스마트호)를 타거나 대부도(화성시)에 있는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차도선(車渡船)을 이용하면 된다. 산악회에서는 운임이 싼 방아머리선착장을 출발지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개별 도착일 경우에는 바람직하지 않을 듯. 주차시설이 협소해서 차량 댈 곳을 찾다가 타고가야 할 배편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 우리를 싣고 갈 ‘대부 고속페리 3호’. 400명의 승객(구명복 숫자. 차량은 별도)을 태울 수 있는 차도선으로 덕적도까지 하루 2번(8:00, 12:30) 운항하며 요금은 성인 기준 11,700원이다. 하나 더, 선내에 매점이 있어 라면이나 간식, 주류, 음료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참고로 문갑도는 덕적도(진리항)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고 들어가야 한다.
▼ 덕적도(진리항)까지는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예정보다 20분이나 늦은 셈이다. 먼 바다로 나오면서 배의 피칭(pitching)이 심해지더니 파도가 높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데려다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풍랑이나 해무(海霧) 등 수시로 변하는 바닷길 사정은 종잡을 수 없는 게 보통인데도 무사히 도착했기 때문이다. 사실 작년에는 안개가 짙다는 이유로 배가 뜨지 않아 덕적도에서 빈둥대다가 돌아간 일도 있었다.
▼ 오늘은 ‘문갑도’를 찾아볼 계획이다. 8개의 유인도와 33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덕적군도(德積群島)’에 속한 자그만 섬이기 때문에 본섬인 덕적도(진리항)에서 출발하는 다른 배로 갈아타고 들어가게 된다.
▼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도착이 늦어진 대신, 타고 온 배와 타고 갈 배가 바톤 터치를 하는 이점도 있었다. 덕분에 우린 부두를 방황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 덕적도 선착장에서 다시 한 번 승선권을 사야만 했다. 우리가 타고 갈 배는 나래호(대부고속훼리와 같은 차도선이다). 이곳 진리항을 출발, 홀수일 기준 문갑도·굴업도·백야도·율도·지도·문갑도 순으로 덕적군도를 한 바퀴 돌아온다. 짝수일은 반대방향으로 도니 참조한다. 하나 더, 문갑도는 갈 때는 물론이고 돌아올 때도 들른다. 둘의 간격은 2시간 30분. 하루 일정으로 왔다면 이 시간 안에 문갑도 트레킹을 끝마쳐야 한다.
▼ 나래호는 여러 명품 섬을 들른다. 특히 용아장성이 부럽지 않다는 바위섬 백아도(白牙島)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는 개머리언덕으로 유명한 ‘굴업도(掘業島)’는 덕적도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그러니 트레커나 백패커들로 붐빌 것은 당연. 연휴인 7~9일은 표가 이미 매진되었다는 저 안내판이 증거이다.
▼ 11 : 40. 문갑도에 도착했다. 문갑도(文甲島)는 선비의 책상인 문갑(文匣)을 닮았다는 섬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문갑(文甲)으로 변했다나? 섬은 ‘물갑도’란 별명도 갖고 있단다. 비탈진 산이 대부분이나 계곡에 물이 많기 때문이란다. 예전에는 논농사까지 지었다고 하나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하긴 인력이 부족해 계절노동자까지 들여오는 요즘 누가 논농사를 짓겠는가.
▼ 문갑도를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등산이고, 다른 하나는 산자락을 헤집으며 내놓은 둘레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면서 해안의 명소들을 눈에 담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 보기 위해서는 2일 정도의 시간이 요구된다.
▼ 배에서 내리자 화유산 능선이 실루엣처럼 펼쳐진다. 300m에도 못 미치는 섬 산인데도 우람하면서도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처녀바위(231m)를 왼쪽에 두고 가운데가 깃대봉(277.6m), 그 오른쪽에 왕재봉(248m)인데, 오늘은 처녀바위를 거쳐 깃대봉 정상에 오른 다음 마을로 내려올 것이다. 시간이 충분할 경우 왕재봉까지 다녀올 것이고.
▼ 마을표지석이 반기는 선착장. 그 옆에는 ‘어루정’이라는 정자도 있었다. 덕분에 우린 스틱을 펴는 등 편하게 산행 준비를 할 수 있었다.
▼ 정자 뒤, 사람 얼굴을 쏙 빼닮은 갯바위가 눈길을 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의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헐크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 11 : 45. 문갑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선착장 초입에는 나그네 쉼터인 ‘여행자센터’가 들어섰다. 문갑도의 특산물인 무화과쥬스와 한월리 모래로 끓인 샌드커피 등을 판매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이왕에 국민의 혈세를 들여 지어놓았으면, 취지에 맞게 잘 운영해 주었으면 좋겠다.
▼ 선착장에서 100m쯤 떨어진 ‘데크 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문갑도에서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 섬 전체를 둘러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니 둘레길을 따라 해안 경관을 보던가. 아니면 화유산 등산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내 결정은 화유산 깃대봉(277.6m)이었고,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참고로 화유산은 문갑도 유일의 산이고, 깃대봉은 화유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감기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도,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하지만 집사람의 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고, 겨우겨우 깃대봉 정상에 올라설 수는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초죽음 상태가 되어있었다.
▼ 데크계단이 끝나자 이번에는 침목계단이 상당히 가파르게 이어진다. 3분이면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길은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갈림길이 나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 12 :00, 좌우로 길이 나뉘는 첫 번째 포인트를 지난다. ‘어루재’라는 고갯마루로 오른쪽은 문갑마을, 왼쪽은 ‘어루너머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참고로 어루너머(넘어)해수욕장은 아주 작은 모래해변이라고 한다. 나만을 위한 ‘비밀의 해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은밀하고 예쁘단다.
▼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이정표를 만났다. 방향표시는 기본, 하단에 ‘문갑도 해안누리길’ 지도를 그려 넣은 다음 현재 위치를 표시했다.
▼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아예 소화기함까지 매달았다. ‘라이터 등 화기휴대·취사·흡연 금지’라는 경고판도 눈에 띈다. 주요 기점의 이정표마다 소화기함을 매달아놓았는데, 산불예방 차원이겠지만 다른 섬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라 하겠다.
▼ 모노레일도 설치되어 있었다. 마을과 화유산의 산자락에 들어앉은 엄나무 농장(마을기업에서 공동으로 운영한단다)을 잇는데, 인력이 귀한 섬의 애로를 해소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아무튼 500Kg의 적재량은 물론이고 사람도 3명이나 탈 수 있다니 섬 주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다.
▼ 능선이 상당히 가팔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진 농부들이 이 능선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모노레일이 그들을 대신한다.
▼ 능선 곳곳에는 모노레일의 수혜 대상인 ‘엄나무 농장’이 들어서 있었다. 매년 봄 우리네 식탁에서 마주하는 ‘벙구나물(또는 개두릅)’은 저 엄나무에서 채취된다.
▼ 염소 서너 마리가 초지에서 노닌다. 그런데 하나같이 목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불법 방목된 염소들이 식생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농작물까지 해친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이곳 문갑도는 그런 걱정이 필요 없겠다.
▼ 농장 덕분에 시야가 뻥 뚫렸다. 바다에는 마치 조물주가 공기놀이하다 던져 놓은 것처럼 올망졸망한 섬들이 사방으로 분산하고 있다. 그 빼어난 풍경에 나도 몰래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 농장지대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짙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농장을 지났는데도 길은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지난주가 추석, 조상님 묘역 벌초하듯이 정성들여 탐방로를 정비했던 모양이다. 주민들에게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우리가 오르고 있는 ‘깃대봉’은 3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해수면에서 산행이 시작되므로 그 높이만큼 오롯이 올라야 한다.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 12 : 10. 두 번째 포인트인 ‘당너머해변 갈림길’에 이른다. 오른쪽은 마을, 그리고 왼쪽은 ‘당너머 해변’으로 연결된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 이정표는 ‘문덕뿌리 낚시터’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하나 더, 이곳이 해누리길 1코스와 2코스, 5코스가 나뉘는 ‘당너머 분기점’이 아닐까 싶다. 첨부된 지도는 이 부근에 ‘당너머분기점’을 표시하고 있지만, 조금 전의 ‘당너머해변 갈림길’과 이곳을 빼고는 다른 갈림길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 오늘은 ‘문갑도 해누리길’의 1코스 및 5코스를 걷게 된다. 문갑도의 둘레길이라 할 수 있는 ‘해누리길’은 총 15.14km로 조성됐다. 여객선을 타고 온 탐방객들을 위한 당일치기 코스(4.25km, 선착장을 기점으로 깃대봉과 마을을 거치는 1시간 30분짜리 노선으로 첨부된 지도의 자색과 진녹색 선으로 칠해진 부분)과 문갑도를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는 5시간짜리 노선(12.55km)으로 구분해 조성했다. 참! 사자바위 같은 명품 경관들을 잇는 4개의 연계코스가 나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서서히 가겠다며 자신을 떨쳐놓고 가라 했을 정도로 버거워했던 구간이다. 오르는 도중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정표 ; 깃대봉↑ 0.9km/ 마을→/ 선착장↓ 1.6km)을 만나기도 한다.
▼ 12 : 18.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났다. 전망 좋기로 유명한 ‘처녀바위’로 오인 했을 정도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 바위에 오르면 굴업도, 가도, 각흘도, 선갑도, 백아도, 부도, 지도 등 덕적군도의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박씩을 투자해가며 굴업도와 백아도는 다녀왔다. 다음 차례로 꼽는 건 ‘선갑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배경이 되었다는 무인도이다.
▼ 길은 가파름의 연속이다. 감기로 인한 체력저하로 힘들어하는 집사람으로서는 죽을 맛이고...
▼ 12 : 25. 이정표(깃대봉↑ 0.5km/ 마을→/ 등산로↓)가 ‘문갑풍월’이란 팻말을 달았다. 섬의 외형이 글을 읽는 선비의 책상을 닮았다는 문갑도(文匣島). 당연히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을 게고, 이는 ‘문갑풍월(文匣風月)’이란 사자성어를 만들었다.
▼ 방향표시야 없지만 왼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있다. 초입에는 ‘처녀바위’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나들이 갈만한 곳이 없던 섬 처녀들이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색동치마를 입고 춤추며 놀았다나?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처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총각들이 거센 풍랑을 이겨내며 잘 돌아오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저 바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 깃대봉 제일의 핫 플레이스인 ‘처녀바위’는 20m쯤 위에 있었다. 바위는 소문난 조망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아름다운 덕적군도의 바다를 배경삼아 인생샷이라도 한 장 건지고 싶은 모양이다.
▼ 집사람이라고 해서 그 대열에서 빠지겠는가. 모두 빠져나간 뒤에 한 컷...
▼ 총각을 기다리는 처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북쪽 깃대봉 방향을 제외한 동서남쪽 바다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올라오는 도중 만났던 두 곳의 조망처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합쳐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올망졸망한 섬들이 몰려있는 덕적군도의 풍경이다.
▼ 반대편은 덕적도와 소야도로는 모자란다는 듯. 자월면의 수많은 섬들이 빈 여백을 가득 메운다. 대·소이작도, 상·하승경도, 승봉도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탐방을 마친 섬들이다. 특히 대이작도는 처가댁 형제들의 가족모임을 겸해서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 북쪽은 바다 대신 ‘깃대봉’이 조망된다.
▼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나 혼자서 오르기로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집사람이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며 혼자서 정상을 다녀오라 했기 때문이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따라 하산하겠다는 것이다.
▼ 12 : 32. 문갑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 안부’에 이른다. 이정표(깃대봉↑/ 중이절골←/ 마을→/ 처녀바위↓)는 왼쪽으로 내려가면 ‘중이절골’에 닿음을 알려준다. 참! 홀기재로 내려가는 하산 길이 막히다시피 한 탓에 이곳으로 되돌아와 문갑마을로 내려갔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 ‘중이절골’이 어디를 이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누리길’ 순환코스와 연결된다는 것쯤을 알겠다. 그렇다고 내려가 볼 생각은 없다. 시간도 없지만 ‘월간 산’의 기사를 이미 섭렵했으니 말이다. 대신 해당 글을 옮겨본다. <이중삼중으로 덤불이 앞을 막다가도 다시 걸을 만한 길이 되길 반복했다. 엄나무가 특산인 섬답게 도깨비 방망이의 무자비한 가시가 난무했다. 땅바닥엔 간간이 뱀이 있어 긴장감은 갈수록 절정으로 치달았다. ‘100m 걷기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싶었으나, 되돌아가기엔 늦었다. 둘레길치곤 오르내림이 커서 최대 100m 이상 고도를 올렸다 내리기도 했다.>
▼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정상에서의 환희를 맛보려면 턱 밑의 오르막길에서 땀 좀 흘려야 한다. 하나 더,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가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채 가지만 앙상하다는 점이다. 2021년 8월 일어난 산불 탓이란다. 산행대장 말로는 어느 등산객이 버린 담뱃불 탓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12 : 38-43. 드디어 깃대봉 정상에 올라섰다. 깃대봉은 문갑에서 가장 높다. 때문에 섬을 세부측량하면서 이곳에 깃발을 꽂았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깃대봉’이란 이름을 붙였다.
▼ 정상은 현재 전망대로 꾸며졌다. 시야를 넓히려는 듯 일단은 대를 올렸다. 그런 다음 바위에 걸터앉은 정상석을 가운데 두고 데크로 빙 둘러 난간을 만들었다. 그나저나 난 ‘블랙야크 섬&산 100 인증’ 챌린지가 싫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이들로 인해 부지하세월로 순서를 기다려야만 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들 덕분에 집사람이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 문갑 제일봉답게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다. ‘황해 제일경’으로 꼽힌다는 소문처럼 덕적군도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0년여 전에 들른 조도(鳥島). 하도 섬이 많아 새 때가 몰려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었다. 이곳 깃대봉도 그에 못지않은 풍경을 보여준다. 선갑도, 울도, 지도, 백야도, 각흘도, 굴업도 등등...
▼ 반대편 바다도 온통 섬. 섬의 천국인 ‘덕적군도’로도 모자라다는 듯, 이번에는 자월면의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를 수놓는다. 덕적도, 소야도, 흑도, 자월도, 대·소이작도 등등...
▼ 지자체의 배려도 돋보인다. 양 방향에 조망도를 세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그림과 대비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 하산을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정표(누적바위←/ 홀기재→)가 가리키는 ‘홀기재’ 방향에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진행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자칫 길이라도 잘못 들 경우 돌아가는 배를 타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12 : 47. ‘중이절골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문갑마을 쪽으로 내려간다. 산길은 가파르게 떨어진다. 하지만 흙길에다 폭까지 넓어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다.
▼ 12 : 50. 잠시 후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는 세워놓지 않았지만 홀기재에서 내려오는 길이지 싶다. 그런데 길이 의외로 또렷한 게 아닌가. 아까 깃대봉 정상에서 약간의 모험을 감행했더라면 별 어려움 없이 내려왔겠기에 하는 말이다.
▼ 12 : 55. 가파른 내리막길은 농막을 만나면서 끝난다. 이후부터는 산자락을 옆으로 째며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가세요’. 초청이 내심 반가웠지만 배를 타야 한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친다. 충분히 배를 탈 수 있다며 다시 권했지만 소심한 우리 부부는 고맙다는 인사만 드리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산행대장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배가 10~20분 정도 빨리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다고 고지된 출항시간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니 어쩌겠는가.
▼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중간에 갈림길(이정표 : 문갑마을↑/ 처녀바위→/ 홀기재↓)을 만나기도 한다.
▼ 이 구간의 볼거리는 ‘돌탑’이다. 누군가가 작은 돌탑 수십 기를 길가 곳곳에 쌓아 놓았다.
▼ 13 : 05. 그렇게 10분쯤 걸어 임도로 내려선다. 이후부터는 포장길을 따라 마을로 간다. 이 구간에서도 갈림길(이정표 : 선착장↑/ 2코스 분기점→/ 깃대봉↓)을 만난다.
▼ 13 : 10. 5분쯤 더 걸으면 문갑마을에 이른다.
▼ 마을 뒤 삼거리에서는 오른쪽으로 갔다. ‘윗말’이 아닐까 싶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뜬금없는 풍경을 만났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린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디다 버려야 할지로 고민해도 모자랄 소라껍질이 멋진 조형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누가 저런 기발한 발상을 했을까?
▼ 궁금증에 이끌려 소라껍질을 따라가 봤다. 그리고 갯일을 하는 아낙네들로 벽면을 가득 채운 민가를 만났다.
▼ 문간에 서니 ‘문갑도 아! 옛날이여’라는 현판이 반긴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야 없는 노릇. 마실 나온 이웃 주민에게 내부 구경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더니(동네 박물관쯤으로 생각했기 때문). 친절하게도 주인장을 불러 내 의중을 전해주신다. 주인장도 맘껏 둘러보라고 했음은 물론이다.
▼ 집안은 옛 물건들로 가득했다. 농기구나 가구는 물론이고 학용품까지 우리네가 써오던 추억의 물건들이다. 옛 추억을 소환하는 사진도 몇 점 걸었다. ‘문갑도 역사박물관’이라고나 할까?
▼ ‘문갑도 아 옛날이여’, ‘문갑도의 추억’, ‘가난한 어부의 아들’ 등 주인장의 솜씨로 여겨지는 작품도 몇 점 걸려있다. 귀경해 검색해보니 옹진군 ‘갈매기소식지’의 ‘옹진 그리고 사람’ 코너에 실렸던 글이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김용준’씨가 아니었을 까 싶다. 아무튼 멋진 주인장 덕분에 소중한 옛 추억을 불러올 수 있었다.
▼ 13 :15. 미몽에서 깨어나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양짓말’에 이른다. 아래 사진은 문갑마을 전경이다.
▼ 주민이라고 해봐야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자그만 섬이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행정지원센터, 경찰파출소, 물류보관소(우체국 대신) 등등...
▼ 마을 앞 방파제는 ‘문갑도의 역사’를 담았단다. 하지만 그림이 적어 그 내용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 민박 및 식당(운영은 않는 듯)을 겸한 매점은 전화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모양이다. 캔 맥주로 목이라도 축일까 해서 들어갔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내 낌새를 보고 뒤쫓아 온 산행대장이 주인장은 조개 잡으러 갯벌에 나갔단다. 산행대장에게 돈을 치루고 맥주를 건네받았지만, 자칫 전화로 주인장을 부를 뻔했다.
▼ 마을 앞 ‘문갑해수욕장’은 길이 700m에 너비가 50m나 되는 고운 모래사장을 갖고 있었다. 끝자락의 언덕을 넘으면 한층 더 뛰어난 ‘한월리해수욕장’이 나온단다. 단단한 모래질 해변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 해수욕장들의 인기가 높아 덕적군도의 5개 나래호 항로 중에서 굴업도 다음으로 많은 여행객이 문갑도를 방문한단다.
▼ 인천시 ‘토탈디자인 빌리지 조성사업(마을 단위의 종합적인 경관 조성)’의 지원을 받아 동네를 단장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는 예쁘장한 ‘연못(유수지공원이라나?)’도 눈에 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천주교 문덕공소’이다. 참! 섬에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감리교회도 있다고 했다.
▼ 13 : 20. 주변 풍광에 빠져 있다가 선착장으로 간다. 마을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다도해 풍광을 눈에 담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저 수조의 물은 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들을 위한 담수일까, 아니면 갯벌에 일 나갔다가 돌아오는 주민들을 위한 바닷물일까?
▼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은 곡선미가 무척 고왔다.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있는 바다는 물론이고,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바위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 도로 개설 때 생긴 생채기 곳곳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화분이 만들어졌다.
▼ 조잡하지만 의젓한 삭도(索道)다. 절벽을 처마삼아 제비집처럼 둥지를 튼 절간이나, 강원도의 석탄광(지금은 사라졌지만)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초라한 모습으로 변신해 여행객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준다.
▼ 제법 큰 해식동굴도 눈에 띈다. 저 안에 호랑이라도 한 마리 앉히고, 스토리텔링으로 포장하면 멋진 관광 상품이 될 텐데...
▼ 13 : 35. 선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시간 55분을 걸었다. 앱은 4.89km를 찍고 있다. 산행인데다 집사람의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문갑도의 볼거리는 ‘문갑8경’으로 집약된다. 한얼리해변·처녀바위전망대·문턱뿌리사자바위·병풍바위자연조각공원·진모래·할미염전망대·당공바위·벼락바위 등 수억 년의 세월이 빚고 파도와 바람이 만든 자연의 걸작들이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고작 ‘처녀바위전망대’가 전부다. 다시 한 번 문갑도를 찾아와야 할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에필로그(epilogue) : 주민들은 문갑도의 옛날을 ‘풍요와 인심’으로 꼽았다. 어족자원이 풍족하고 마을에 장사꾼이 찾아오면 먹던 밥그릇을 내줄 정도로 인심 넘쳤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풍부하던 어족자원은 사라졌고, 대신 펜션에 민박, 행정기관까지 들어섰다. 하지만 넘치는 인심은 조금도 변치 않았나 보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커피 한잔 권하는 게 스스럼없었고, 뜨내기 불청객인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안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할 또 다른 이유다. 하룻밤 머물며 문갑팔경을 꼼꼼히 둘러보고, 주민들이 개발했다는 ‘열흘밥상’까지 받아본다면 이 아니 좋을손가. 섬의 특산물인 벙구나물, 빨간감자, 고사리, 갱(고동) 등으로 만들었다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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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화누리길 12코스(양구 펀치볼길)
여행일 : ‘23. 10. 8(일)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일원
여행코스 : 돌산령터널(해안입구)→DMZ자생식물원→만대리→오유리→해안면사무소→양구통일관→후리(백두대간트레일 시점)→양구·인제경계→453번 지방도 다릿골시험장입구(거리/시간 : 14km, 실제는 만대리부터 다릿골시험장 입구까지 13.31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를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 들머리는 해안입구(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중앙고속도로 춘천 IC에서 내려와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읍까지 온다. 송청교차로(국토중앙면 죽리)에서 31번 국도(양구·해안방면), 임당삼거리(동면 임당리)에서 453번 지방도(해안방면)로 옮기면 ‘돌산령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12코스 시점인 해안입구에 이르게 된다.
▼ 해안면의 입구(돌산령 터널)에서 시작해 양구(해안면)와 인제(서화면)의 경계에 이르는 길이 14km의 구간. 해안면의 산하를 오롯이 횡단한다고 보면 되겠다. 문제는 종점인 양구·인제 경계에 버스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최소 453번 지방도의 다릿골시험장 입구까지 3.6km를 더 걸을 수밖에 없다.
▼ 실제는 시점(돌산령 터널)에서 3km쯤 떨어진 ‘만대리(萬垈里)’ 마을회관 앞에서 출발했다. 인근 북녘 땅에 들어선 선전마을에 대응하기 위해 주택 20여 채를 지으면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1972년의 일인데, 전선 방어에 기여하기 위한 ‘재건촌’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모두가 북향이었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북쪽에서 항상 볼 수 있도록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했단다.
▼ 만대리는 들녘이 넓어 만호(萬戶)가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동네다. 이는 옛사람들의 이상향이 만들어낸 지명이 아닐까 싶다. 50년대 ‘라때’만 해도 한 집에 대여섯의 자녀는 기본. 부모까지 합치면 호(戶)마다 최소 일곱 명(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빼고도)이 된다. 마을 하나에 7만(萬)이라니 그게 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10 : 20. 2차선 도로인 ‘만대로’를 따라 현리(해안면소재지) 방향으로 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산행대장은 마을회관 앞 샛길로 들어가 ‘평화누리길’과 만나라고 했다. 하지만 우린 만대로와 겹치는 ‘DMZ평화의길’을 따르기로 했다. 볼거리가 더 많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오늘은 찬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 아침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고, 더 추워지기 전에 추수를 마쳐야 하는 부지런한 농부는 눈코 뜰 새가 없다. 벼 베기가 끝난 저 들녘이 그 증거라 하겠다.
▼ 불그스레 익어가는 사과도 가을을 재촉한다. 그런데 작고 귀여운 게 우리가 익히 아는 사과와는 많이 다르다. 나도 모르게 ‘능금’이란 단어가 툭 튀어나온 이유일 것이다. 어린 시절 달지만 너무 강한 신맛에 얼굴을 잔뜩 찡그려가며 먹던 추억 속의 과일이다.
▼ 가을의 전령이라는 구절초(낙동구절초)도 한 몫을 거든다.
▼ 들녘은 온통 인삼밭에서 세운 차양막을 뒤덮였다(농경지의 60%를 차지한단다). 예로부터 인삼 하면 ‘개성’이었다. 한국전쟁 후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가 ‘금산’에 자리를 잡더니, 세월이 흘러 다시 북상, 이곳 펀치볼에 새 둥지를 틀었나 보다.
▼ 10 : 28. 가을 풍경에 도취되어 걷다보면 어느덧 ‘만대리 3반’. 법정 동리인 ‘만대리’의 자연부락(산촌·평촌·내동·운전) 중 하나인데 어느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새마을’이라는 마트의 상호가 옛 추억을 소환해 줄 따름...
▼ 버스정류장에는 ‘양구군 관광안내도’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관할 읍·면이 5개뿐이다. 접경지역 지자체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 10 : 33. 453번 지방도(펀치볼로)로 올라섰다.
▼ 코너에 ‘농산물가공지원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전처리실과 증숙실, 세척실, 포장기 등 시래기 레토르트(retort) 작업을 위한 장비를 갖췄다고 한다. 저 시설을 거처 ‘펀치볼 시래기’가 브랜드화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양구군은 시래기 수요 확대를 위해 시래기 순대, 시래기 불고기, 시래기 만두, 시래기 막걸리 등의 개발도 병행한단다.
▼ ‘DMZ평화의길’ 이정표는 우리가 ‘28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평화누리길(12코스)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해안면소재지에 있는 여러 명소(통일관, 전쟁기념관 등)를 둘러보려고 일부러 ‘DMZ평화의길’을 따랐다. 펀치볼 분지의 들녘을 가로지르는 ‘평화누리길’은 면소재지를 에두르며 나있기 때문이다.
▼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오유리(五柳里)’에 이른다. 오리나무가 많다고 해서 ‘오류동’ 또는 ‘오릿골’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운천리(雲川里)를 병합하여 ‘오유리’가 되었다.
▼ ‘펀치볼 하우스’라는 브랜드를 쓰는 농가는 펀치볼 시래기의 장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천혜의 자연조건(깨끗한 땅과 가을철 높은 일교차)에서 길러 높은 하늘 바람에 말려냈다는 것이다. 참고로 식감이 부드러운 시래기는 비타민 B·C와 미네랄, 철분, 칼슘, 식이섬유 등이 풍부해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겨울철 웰빙 식재료다. 그런 시래기를 말리는데 이곳 펀치볼 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고산분지 지형으로,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분지 안에서 맴돌기 때문이란다.
▼ ‘DMZ펀치볼 둘레길’ 4개 노선 중 하나인 ‘평화의 숲길’도 이곳을 지나는 모양이다. ‘평화누리길’에 ‘DMZ평화의길’, ‘DMZ펀치볼 둘레길’까지, 펀치볼은 가히 둘레길 세상이라 하겠다.
▼ 10 : 45. 오유 1·2리를 지났다싶으면 해안면 소재지인 현리(縣里)가 마중 나온다. 원래 해안소(亥安所)가 있었던 곳(지명에 ‘縣’자가 들어간 이유가 아닐까 싶다)으로 춘주(춘천)부에 딸려 있다가 조선 세종 6년(1424년) 양구군으로 이속되었다. 191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월·상평 등을 병합해 해안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 초입에서 만난 ‘해안중학교’ 앞에는 ‘외솔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옛날 이곳에는 수령이 1,000쯤 되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또한 ‘외솔백이’였다나? 2005년 새농촌운동을 추진하면서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저 쉼터를 조성하고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 해안면사무소. 이곳 해안면은 엄격한 통제를 받던 지역이었다. 까다로운 입주심사를 거친 후에도 기본적인 자유가 제한되었다. 1996년 해안면의 출입제한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는 출입증 없이는 오갈 수도 없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시골 면소재지 치고는 꽤 번화한 모습이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숙박업소, 식당, 마트, 상점 등 웬만한 편의시설을 다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여의도 면적의 여섯 배쯤 되는 해안면은 ‘펀치볼(Punch Bowl)’과 궤를 같이 한다. 미군 종군기자의 눈에 화채를 닮는 그릇으로 보였다는 분지(盆地)가 통째로 ‘해안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 해안(海安)으로 불리던 마을은 뱀이 들끓어 바다 '해(海)'를 돼지 '해(亥)'로 바꾸고, 집집마다 뱀과 상극인 돼지를 기르면서 뱀이 사라졌다고 한다.
▼ ‘시래기·사과 축제’의 입점 부스를 모집하는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해안면은 고지대(해발 400-500m)의 분지다. 그러니 고랭지채소가 잘 자랄 것은 당연, 주민들은 실한 가을무에서 수확한 무청으로 ‘시래기’를 만든다고 했다. 그게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우리네 식탁에 올라올 것이고...
▼ 해안면의 인구는 1,200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천주교는 공소가 아닌 본당이 들어서 있었다. 규모도 제법 크다. 가톨릭의 교세가 그만큼 실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메인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학교를 시작으로 면사무소, 우체국, 119지역대, 파출소, 농협 등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하나 더, 이곳 해안면은 무주지(無主地)로 골머리를 앓던 곳이다. 전후 입주한 주민들이 고생해서 땅을 일궈도 주인이 나타나면 빼앗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번에 해결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감정평가를 실시한 뒤 평가금액에서 개간비를 뺀 나머지 금액으로 토지를 주민들에게 매각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 ‘해안재건비(亥安再建碑)’란다. 해안면은 ‘6.25 전쟁’ 최대의 격전지이다. 70여 년 전, 참혹한 고지전(高地戰)을 치르면서 폐허가 됐던 곳이 새롭게 태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마을 앞 텃밭은 무가 주인이다. 맞다. 전쟁이 끝난 뒤, 펀치볼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은 남겨진 지뢰를 피해가며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그 밭에서 지금 무와 배추 등이 자란다.
▼ 11 : 01. ‘현리교’ 앞 이정표. 엉터리니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지시대로 가면 엄청나게 돌게 되니 말이다. 우리 일행은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80m쯤 가다 되돌아왔다.
▼ 다리 건너에는 ‘성황지(城隍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인공호수를 파고 호반을 따라 산책코스를 만들었다.
▼ 성황지는 흙탕물 저감을 위한 ‘침사지’다. 그간 이곳 펀치볼 지역은 한강수계 수질오염의 범인 중 하나로 꼽혀왔다. 강우 때마다 많은 양의 흙탕물이 하천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황천에 가동보(성황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 11 : 08. 몇 걸음 더 걸으면 ‘회전교차로’. ‘DMZ평화의길’은 2시 방향의 453번 지방도(해안서화로)를 따른다.
▼ 초입에 ‘펀치볼 시래기광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안에는 시래기 오픈갤러리도 조성되어 있단다.
▼ 하지만 보건지소와 복지회관을 양옆에 낀 ‘힐링하우스’만 보일 뿐, 특별히 눈에 담을 볼거리는 없었다. 하나 더, 힐링하우스는 외국인 계절노동자를 위한 숙소이다. 타국에 와 열심히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해결하기 위해 건립했단다.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농촌이 유지될 수 없다는 요즘 현실이 반영된 시설이라 하겠다.
▼ 다음은 ‘DMZ펀치볼 둘레길’의 안내센터. 국토정중앙 최북단이라는 상징성과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주제로 조성한 73.2km의 숲길이다. 4개 코스(평화의숲길·오유밭길·만대벌판길·먼멧재길)로 이루어져 있고, 2021년 지리산둘레길·백두대간트레일·대관령숲길과 함께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 하나 더, 이 길은 민간인 출입통제지역 안에 조성된 숲길로, 미확인 지뢰지역과 인접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전문제 동의서 작성 및 숲길등산지도사의 동반과 안내에 따라야 한다. 또한 1일 2회, 하루 200명(선착순, 2인 이상)만 탐방 허용하고, 단체 예약은 전화 상담 우선, 숲밥 신청은 일주일 전 전화 예약이 필수이다.
▼ ‘평화의 길’ 표지석. 이곳 펀치볼 분지가 천지(天地 : 하늘과 땅)를 품었고, 천지(天池 : 백두산 산정에 있는 자연 호수)를 닮았단다.
▼ 11 : 15. 진열된 무기를 기웃거리다 ‘전투전적비’를 만났다. 도솔산지구와 펀치볼지구 전투를 함께 기념한단다. 맞다. 이곳 양구는 6·25전쟁 당시 동북방 최대 격전지였다. 전쟁 전에는 북한 지역이었으나 국군과 연합군이 38선을 돌파하면서 비로소 자유 대한민국 품으로 편입됐다. 국군은 양구지구 9개 전투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여 연전연승을 거뒀는데, 특히 해안은 도솔산·대우산·가칠봉·펀치볼 등 4개 전투가 벌어졌을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 도솔산지구전투(6.4-6.20간)는 귀신 잡는 ‘무적해병’ 신화를 창조했다. 미 해병대가 성공하지 못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를 우리 해병대가 교체 투입돼 탈환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도솔산을 방문해 목숨을 걸고 고지를 탈환한 해병대에 ‘무적해병’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하사했다. 펀치볼지구전투(8.31-9.20)는 한미 해병대가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전투력을 재정비한 북한군2군단을 격퇴하면서 펀치볼과 주변 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전투다.
▼ 11 : 19. 이어서 양구통일관이 길손을 맞는다. 통일에 대비하여 국민에게 북한 실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통일의지를 고취시키는 등 통일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한 시설이다. 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 사무실과 을지전망대·제4땅굴의 매표소도 같은 건물에 들어서 있었다.
▼ 을지전망대·제4땅굴의 매표소는 휴관이란다. 관련 자료라도 얻을까 해서 들어가니 뜬금없다(휴관 중인데 왜 들어왔냐는 듯)는 얼굴로 직원이 맞는다. 자료도 ‘청춘양구’라는 양구군의 관광용 팸플릿이 전부였다.
▼ 통일전시관은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통일교육을 강화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건전한 안보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본 전시관은 20%쯤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생활용품과 수출품,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네 60-70년대 것들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그런지가 궁금해 전시관에 대한 팸플릿이 있는가 물어봤지만 없다는 대답이다. 그럼 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 남북관계의 현실은 물론이고, 그동안의 정책 변화 등도 알리고 있었다.
▼ 윤석열 정부의 통일·대북 정책도 소개하고 있었다. 이를 강조하고 싶었음인지 사진까지 첨부했다. 통일정책은 그동안 몇 차례 큰 변화를 거쳤다. 당시 변화의 중심에 있던 대통령들의 사진도 함께 게시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북한말 따라잡기, 북한 그림 짝 맞추기 등의 체험공간도 만들어져 있었다.
▼ 통일관 앞의 그리팅맨(greeting man)은 오늘도 고개 숙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유영호 작가의 작품이라는데, 그는 2011년 지구 반대편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15도로 고개 숙인 초대형 알루미늄 조각상 ‘그리팅맨’을 설치해 왔다. 그리팅맨은 문화와 인종, 시간을 초월해 인사를 건네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단다.
▼ 11 : 25. 양구전쟁기념관은 9개 전투를 상징하는 기둥(상징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공사가 한창이라며 금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2000년 개관한 양구전쟁기념관은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을 벌인 양구지역의 9개 전투(도솔산·피의능선·펀치볼·백석산·가칠봉·대우산·크리스마스고지·949고지·단장의능선)의 전쟁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건립했다.
▼ 기념관은 9개의 전시 공간으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전쟁 발발부터 휴전협정까지의 과정 설명·전사자 명단과 함께 참전 군인들의 개인 유품·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고, 도솔산전투 디오라마·영상실·생존자 증언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 통일관 광장에는 ‘DMZ평화의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28코스의 종점이자 29코스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 11 : 28-44 : 전쟁기념관 우측에 있는 ‘DMZ조이나믹 체험관’은 놀이형 체험시설이라고 한다. 트렘펄린, 모험놀이, 터널놀이, 네트 놀이대, 조합 놀이대, 곡선형 짚와이어 등의 체험시설을 갖췄단다.
▼ 준비해 온 간식으로 요기를 때운 뒤, 다시 길을 떠난다. ‘평화의길’은 체험관 앞 광장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산비탈에 기대놓은 데크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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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44. 하지만 하시라도 빨리 ‘평화누리길’과 만나고 싶었던 우린 계속해서 453번 지방도를 따르기로 했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도열해 있는 길은 한마디로 예뻤다. 샛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이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되겠다.
▼ 길가 벌통은 지극히 한산하다. 벌들도 가을준비를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 갔나보다.
▼ 해안면의 ‘쥬키니 호박’은 철이 가는지도 모르나보다. 한로가 지났는데도 튼실한 열매를 키워내고 있었다. 최근 양구상회의 호박찐빵이 입소문을 타고 있던데...
▼ 12 : 01. 그렇게 16분쯤 걸으면 작은 공원이 있는 ‘삼거리’. 평화누리길은 이곳에서 지방도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임도를 따라 산자락으로 들어간다. 참! 오는 도중 우측에서 오는 만대벌판길과 평화누리길을 만나기도 했다. 참! 산행대장 말로는 지방도를 따라가도 된다고 했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 이곳에도 토사유출을 저감시키기 위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만대천을 막아 침사지를 만들고, 그 주위에 산책로를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 아까 조이나믹체험장에서 헤어졌던 ‘DMZ평화의길’이 다시 합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나 더, 체력을 감안해야 한다며 간식도 거른 채 조이나믹체험장을 지나쳤던 80대 노익장 도반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15분이나 쉬다가 온 우리보다도 더 늦게 도착했다함은 그만큼 에둘러 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 12 : 09-18. 침사지 호반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 신경 써서 조성한 것 같으나. 내가 보기엔 10%쯤 부족한 듯.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곳에서 ‘평화의길’로 진행하신 도반도 기다릴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 ‘그것! 당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입니까?’ 경고판의 문구가 심상치가 않다. 미확인 지뢰와 불발탄이 산재한 곳이니 산나물 채취나 동식물 포획, 불법 개간 등을 한답시고 철조망을 넘지 말라는 것이다.
▼ 백두대간트레일 안내판도 눈에 띈다. 후리(後里) 시점에서 논장교까지의 1구간(평화염원길, 21km)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두대간트레일은 양구 후리에서 홍천 불발령까지 총 10개 코스 159.5km로 조성돼 있다. 2021년 산림생태적·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 물골교로 ‘만대천’을 건넌다. 펀치볼(해안면 분지)에 떨어지는 빗물은 모두 저 물길을 따라 ‘인북천’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물골’이라 부른다.
▼ 12 : 25. 150m쯤 더 걸었을까(물골교에서) 또 하나의 삼거리가 나온다. 평화누리길 종합안내판과 위험지구임을 알리는 경고판 등 번거로울 정도로 많은 안내판들이 이곳이 중요 기점임을 알려준다. 이정표도 평화누리길(인제 경계 2.5km/ 돌산령 8.5km)과 DMZ평화의길, 백두대간트레일 등 3개나 세워놓았다. 하나 더, 이 구간은 ‘DMZ펀치볼둘레길’ 중 ‘먼멧재길’과도 겹친다고 했다.
▼ 왼쪽으로 올라서서 숲길을 탄다. 울창한 숲속을 구불구불한 임도가 헤집으며 지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길 양옆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 철조망에 걸린 ‘지뢰 표지판’은 이곳 해안면에 미확인 지뢰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음을 나타낸다.
▼ 12 : 30. 차단기(이정표 : 인제군경계 2.0km/ 돌산령 9.0km)가 차량은 출입 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엄중함을 알리려는 듯 초소도 세워놓았다. 군사시설보호지역, 지뢰 매설지역 등을 알리는 경고판도 서너 개나 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산림유전자원보호지역’. 신갈·찰피·들메나무 등 희귀식물 자생지이자 유용식물 원생지라고 한다.
▼ 길은 미확인 지뢰로 뒤덮인 지역을 헤집으며 나있는 모양새다. 덕분에 길 주변은 희귀 동식물의 낙원이 되었단다. 천연기념물 금강초롱을 비롯한 희귀식물과 산양·독수리·하늘다람쥐 등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 12 : 40. 걷기 여행자들에 대한 지자체의 배려도 돋보인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오르막길임은 분명하니 쉬엄쉬엄 가라는 듯 정자를 지어놓았다.
▼ 차량 한 대가 겨우 갈 수 있는 비포장 길은 구불구불 나있다. 구절양장 같은 이 길은 쉽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길을 일러 인제로 넘나들던 해안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했다.
▼ 자연석으로 만든 도로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상황이 바뀔 때 ‘천천히’라는 글씨나 화살표로 나타난다. 시쳇말로 ‘라때’는 표지판이 다 저랬는데...
▼ 13 : 00. 두 번째 정자. 준비해 온 간식이라도 먹으라는 듯 식탁까지 놓아두었다.
▼ ‘이 뭣꼬?’ 드럼통을 방호벽처럼 쌓아올렸다. 그것도 겹으로. 아무러면 어떤가. 삭막한 드럼통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예쁜 들국화를 피워 올렸다.
▼ 13 : 02. 잠시 후 만난 사거리. 인제군과 양구군의 군계(郡界)란다. 좌우로 나뉘는 임도(평화누리길은 왼쪽 임도를 따른다) 외에도 맞은편 산자락을 치고 오르는 산길이 하나 더 나있다. 펀치볼둘레길의 ‘먼멧재길’이다.
▼ 이정표(양구·인제 경계/ 돌산령 11.0km)의 방향표시가 없는 지명이 이곳이 두 지자체의 경계임을 알려준다.
▼ 먼멧재길 이정표는 이곳을 ‘숲밥 쉼터’로 적고 있었다. 펀치볼의 자랑거리로 입소문을 탄 ‘숲밥’은 지역민이 재배하고, 정성껏 준비한 다양한 산채 음식 등을 탐방객이 있는 숲길까지 찾아가서 뷔페식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로, KBS ‘한국인의 밥상’에서 강원도의 맛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역특산물인 시레기·인삼·머위·우산나물·두릅 등 10여 가지의 찬이 제공되는데, 탐방 일주일 전 신청하면 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시간에 맞춰 갖다 준다고 했다. 하나 더, 20인분 이상만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평화누리길 12코스인 ‘펀치볼길’은 이곳 양구·인제 경계에서 끝을 맺는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13코스인 ‘서화길’을 따른다.
▼ 13 : 20. 먼멧재(멧돼지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삼거리에 이른다. ‘DMZ평화의길’과 ‘접경권 평화누리길’의 안내판들이 이곳이 중요 기점임을 짐작케 해준다, 이정표도 평화누리길(원통 36km/ 군시설/ 양구 1km)과 백두대간트레일(양구 후리 3.5km/ 홍천 광원리 109.5km)에서 따로 세웠다.
▼ 대암산으로 가는 임도는 자바라 문을 쳐놓았다. 이정표는 그 쪽에 군사시설이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출입을 통제하던 초소는 군인들이 떠난 지 이미 오래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요즘은 핵심 시설만 출입을 통제하고 있나보다.
▼ 평화누리길 12·13코스의 경계는 인제·양구 경계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안내판(13코스인 서화길)은 1km쯤 더 걸어야 하는 이곳 ‘먼멧재 삼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유가 뭘까?
▼ 이후부터는 숲길이 아닌 시멘트포장 임도가 이어진다. 길 중간 중간에 평화누리길 안내판 서있고 자전거도로 표시와 시그널도 보인다.
▼ 지자체도 그늘 하나 없는 딱딱한 시멘트길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파고라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내리막이라서 조금도 부담이 없다. 그저 진행방향에 펼쳐지는 백두대간(설악산 구간) 능선을 볼거리삼아 걸으면 된다.
▼ 13 : 53. 다릿골시험장(국방기술품질원) 진입로가 갈려나가는 지점에도 자바라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8분 전쯤 사격장 입구에서도 자바라 문을 만났었다). 문 앞에는 라이더들을 위한 쉼터도 마련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자전거를 둘러메고 옆으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겠다.
▼ 길가 빗돌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새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사자성어다. 뒷면은 초전필승(初戰必勝, ‘라때’는 초전박살이라 했던 것 같은데)을 넣어 군에서 만든 것이란 걸 입증시킨다.
▼ 도로를 폐쇄하겠다는 공고문. 도로를 내면서 사유지가 들어간 모양인데 보상이 안 됐나 보다. 라이더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 14 : 15. 인북천에 놓인 다리(후평교)를 건넌다.
▼ 인북천(麟北川, 인제의 북쪽에 있다는 뜻)은 가까이는 해안면(펀치볼), 멀리는 백두대간의 향로봉, 무산봉을 지난 도솔지맥 분기봉인 북한의 매자봉 1174m에서 내려온 물길이다. 이 물은 소양강과 한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 14 : 17. 잠시 후 453번 지방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초입에 ‘다릿골시험장’의 입구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3.3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해안면소재지의 통일관련 시설물 등 볼거리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도로변의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쉬운 길(지방도 이용)과 어려운 길(우리가 걸어온 길)로 나누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 경우 3.78km쯤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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