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재도(晩才島) 여행 첫날 : 마구산(큰산)과 물생산 트레킹

 

여행일 : ‘19. 5. 20()-21()

소재지 : 전남 신안군 흑산면 만재도리

트레킹 코스 : 내연발전소안부 삼거리오른쪽 마구산(등대) 왕복안부삼거리왼쪽 물생산 왕복안부 삼거리숙소(소요시간 : 2시간 정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만재도는 '먼데섬'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우리나라 섬 가운데 접근하기가 가장 어려운 섬이다. 무려 5시간여나 걸린다. 흑산도와 하태도, 가거도 등을 에둘러 돌아간 쾌속선이 맨 마지막에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해안선의 길이가 5.5인 이 섬의 주민(45가구 100여 명)들은 변변한 밭뙈기 하나 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간단다. 뭍에서 접근하기가 어려운 만큼 섬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자동차는 물론 오토바이도, 경운기도 없다. 간간이 들려오는 어선 엔진소리를 제외하면 온통 자연의 소리뿐이다. 하지만 최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단다. 예능프로그램인 ‘12삼시세끼-어촌편의 촬영지가 되면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방법

만재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목포 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하태도를 포함한 흑산면 소재의 섬들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만재도까지는 약 142km, 뱃길로 대략 5시간 정도가 걸린다. 참고로 이곳 목포연안여객선 터미널은 쾌속선이 바다를 향해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1980년 지어진 옛 건물이 낙후되자 총 사업비 250억 원을 들여 2005년에 새로 지었단다.




대합실에는 시화전(詩畵展)이 열리고 있었다. ‘8회 유권자의 날을 맞아 전남선관위에서 주관한 소녀시대 할머니의 선거이야기이다. 순천그림책도서관의 한글작문교실 할머니 회원들이 직접 참여하여 선거와 투표 참여의 중요성을 주제로 쓰고 그린 작품들이란다. 그중 자기가 선택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에 온 모든 손님들에게 홍어와 막걸리를 공짜로 제공했었다는 할머니의 작품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오전 810분에 출발하는 쾌속선(남해엔젤호)을 타면서 만재도 여행이 시작된다. 목포항을 출발한 이 배는 비금·도초도와 다물도, 흑산도, 상태도, 하태도, 가거도를 거친 다음 만제도에는 1330분에 도착한다. 참고로 이 배는 목포로 돌아갈 때는 가거도를 거치지 않는다. 운항사 또한 다르다. ‘남해고속훼리동양고속훼리두 회사가 짝수일과 홀수일에 번갈아가며 운항하기 때문이다.



가거도 선착장에 도착한 배는 40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만재도로 들어가는 승객들에게 하선(下船)의 자유가 주어짐은 물론이다. 4시간 10분을 배속에 갇혀있던 승객들에게는 달콤한 휴식이라 하겠다. 참고로 이곳 가거도의 옛 이름은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가가도'(嘉佳島, 可佳島)‘였다고 한다. '가히 살만한 섬'이란 뜻의 '가거도(可居島)'1896년 이후부터 불리게 된 이름이란다. 일제 때는 소흑산도(小黑山島)로 불리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40분이면 대리(가거1) 마을을 둘러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가거도는 ’1인 대리와 항리(2), 그리고 대풍리(3)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는 약 400여명, 그 중 대부분은 1구인 대리에 모여 살고 있다. 주민(住民)들의 주요 수입원(收入源)은 어업(漁業)인데, 찾아오는 관광객(觀光客)들이 늘어나면서 요즘에는 민박집이나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단다.




표지석에서 오른편으로 돌자 독실산(犢實山)으로 연결되는 가거도 탐방로 1구간의 들머리가 나온다. 능선을 끊어 생긴 절개지가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데 탐방로는 그에 기대어 나있다. ’김부연하늘공원으로 불리는 이 일대는 원래 채석장이었다. 1979년부터 30년간 돌을 채취했단다. 인구가 500명도 못되는 섬에 무슨 돌이 그리 많이 필요했을까 궁금하겠지만 풍랑 때문이란다. 20118월 태풍 무이파가 왔을 때는 방파제의 테트라포드가 가거항 광장까지 날아와 떨어졌을 정도였단다. 하나의 무게가 64톤이라는데 그런 어마어마한 무게를 날린 바람이다. 때문에 인간의 방파제는 수없이 깨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해왔고 가거항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이처럼 돌은 대부분 방파제와 가거도항에 쓰였다. 현재는 기능을 바꿔 전망 좋은 산책로로 제공되고 있다. 그렇다면 공원의 이름인 김부연은 누구일까. 가거도 출신 순국열사다. 그는 목포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서라벌예고 재학 중 4.19혁명에 동참했다가 19세에 순국했다. 국립 4.19민주묘지에 안장됐지만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공원에 이름을 남겼다. 출장소 앞에는 그의 흉상도 세워져 있단다.



절개지의 앞은 동개해수욕장이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에는 장군봉이 있다. 장군봉은 아래쪽에 작은 굴이 하나 있어서 굴섬이라고도 부르는데, 가거도항의 대표 풍경 중 하나다. 이 장군봉의 왼편에 분포되어 있는 몽돌해안이 동개해수욕장이다. 해안의 끄트머리에 있는 바위봉우리가 동개바위인데 해수욕장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해안은 300m 정도의 날렵한 유선형이고 장군봉과 동개바위가 양 끝을 아늑하게 막아주는 예쁜 해변이다. 그건 그렇고 가거도는 낚시 포인트가 많은 반면 해수욕장은 귀하다. 모래사장은 아니지만 한번쯤은 해안을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둣가에 서면 회룡산(回龍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담아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회룡산의 정상은 선녀봉이다. 이곳은 서·남해 용왕의 아들이 수도하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본의 아니게 방해한 이가 선녀들이다. 용왕의 아들은 선녀들의 아름다움에 취해 수도하는 것은 잊고 매일 놀러 다니기 바빴다. 이 사실을 안 용왕은 화가 치밀어 아들을 용산으로 만들어 버렸단다. 선녀들은 이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단다. 선녀봉에는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데 이를 선녀의 눈물이라 하고, 그들이 춤추고 놀던 곳을 가무작지(歌舞作地)라 한단다.



가거도를 출발하고 30분쯤 지나자 만재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첫 번째 절경은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이다. 각지고 검은 바위들이 거대한 해안절벽을 통째로 점령하고 있는 게 장관이라 하겠다. 그동안 국내에서 보아오던 수많은 주상절리 중에서 가장 큰 규모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주상절리 기둥이 마치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듯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지붕바위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볼거리는 코끼리바위이다. 코끼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렇다면 저 코끼리는 가슴까지 빠지는 물속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저 바위는 남대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니 기억해 두자.



그 외에도 작은 돌섬들이 바다에 널려있다. 그 하나하나가 기괴한 몸짓들을 하면서 말이다.



목포항을 출발한지 5시간 20분 만에 만재도(晩才島)‘에 도착했다. 아니 중간에 가거도에서 40분을 머물렀으니 정확히는 4시간 40분이 걸린 셈이다. 참고로 만재도소중간군도(小中間群島)‘의 주도(主島)이다. 이 군도(群島)는 만재도를 비롯하여 국도(菊島)와 삼태도(三苔島녹도(鹿島흑도(黑島외마도(外馬島내마도(內馬島백서(白島제서(濟島간서(間島) 등의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흑산도와 함께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해의 낙도군(落島群)이라고 보면 되겠다.




만재도에 발을 딛는 일은 상륙작전을 방불케 한다. 바다가 얕아서 선착장에 쾌속선을 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쾌속선이 바다에 멈추면 조그만 연락선이 승객과 짐을 태우러 온다. 이것은 만재도를 빠져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입도(入島)가 불가능하단다. 목포에서 142km쯤 떨어졌다는 만재도는 같은 흑산군에 소재하고 있는 가거도(145) 보다는 분명 가깝다. 하지만 섬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가거도보다 더 길다. 거기다 뭍으로 오르는 일도 훨씬 더 힘들다. 그러니 가거도보다도 더 외딴섬이라 하겠다.




선착장에는 화장실을 갖춘 대합실이 반듯하게 지어져 있다. 하지만 매표(賣票)는 배에서 하고 있단다. 그렇다고 화장실까지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화장지까지 비치해놓지는 않았지만 도회지 공중화장실보다도 더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었다. 민박집이 화장실 하나를 공동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고마운 시설이라 하겠다.



선착장에서 마을까지는 시멘트 포장길로 연결된다. 옛날 삼시세끼-어촌편의 출연진들이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끌며 힘들어하던 구간이다. 그런데 앞서 걷던 집사람이 헛웃음을 짓는 게 보인다. 엄청나게 멀리 보이던 방송과 현실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두 지점의 거리는 200m도 채 되지 않는다. 특히 경사도 거의 없다. 그들 정도의 젊음이라면 웃으면서 리어카를 이끌었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방송. 특히 삼시세끼같은 예능프로그램이라면 보다 자극적인 상황 연출과 반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마을 앞에는 널따란 해수욕장이 들어서있다. '앞짝지 해수욕장으로 앞산 밑에 위치한 '건너짝지'와 마을 남쪽 벼랑아래의 '달피미짝지' 등 세 곳의 몽돌해수욕장 가운데 대장격이라고 한다. 둥그런 반원을 그리며 돌아나가는 모양새가 너무나 정연하다. 그래서 반월도(半月刀)’를 닮았다는 표현을 쓰는가 보다.



마을은 온통 돌담 투성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집들은 하나같이 지붕만 살짝 보일 따름이다. 그만큼 바람이 세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최상복(TEl : 010-6262-7193)‘씨 집도 역시 그런 돌담 속에 갇혀있었다. 건물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배정 받은 방에다 짐을 풀자마자 트레킹을 나선다. 오늘은 만대도에서 가장 높다는 마대산(큰산)과 바위봉우리인 물생산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숙소를 빠져나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니 개의치 말로 오른편으로 향할 일이다.



동네에는 폐가(廢家)가 꽤 많아 보인다. 그중에는 담쟁이넝쿨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정도로 버려진지 오래된 곳도 눈에 띈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집들도 파도가 높은 겨울이면 비워지는 곳이 많단다. 많은 집들이 자식들이 사는 목포로 떠난다는 것이다. 고기 잡는 철이 아니어서 소일거리도 없거니와 아프기 쉬운 계절이라서 병원이 가까운 대처로 나갈 수밖에 없단다.




마을을 벗어나자 내연발전소가 길손을 맞는다. 이 섬에 전기가 들어온 지는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폐교된 만재분교에 발전기가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각 집에서는 전구만 켤 수 있었단다. 그것도 해진 후에서 자정까지로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7년 내연발전소가 완공되면서 전기는 더 이상 부족하지 않게 되었단다. 덕분에 TV는 기본이 되었고, 전자레인지와 세탁기·냉장고 등은 필수품이 되었다.



내연발전소의 앞은 할머니 당숲이다.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당제(堂祭)를 지내오며 신성시 여기는 곳이란다. 주민들이 이곳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숲의 바로 아래에 섬의 유일한 식수원인 샘이 있기 때문이란다. 당숲에는 후박나무가 지천이다. 위장병과 천식에 좋고 목재는 가구와 선박재로 사용되는 유익한 나무이다.



탐방로는 발전소 옆에서 열린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으나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단을 잠시 올라가면 이내 산책길이 이어진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작은 밭뙈기들이 몇 보인다. 척박한 땅이지만 고구마나 감자, 시호라는 약초 등을 재배하고 있단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시야가 뻥 뚫려버린다. 그리고 망망대해를 향해 뻗어나간 능선이 시선을 붙잡는다. 해안절벽으로 이루어진 경관이 자못 빼어나다.



마을에서 출발한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능선에 오른다. 만재도 사람들이 움틈개라고 부르는 곳이다. 안부인 이곳에서 길은 좌우로 나뉜다. 왼쪽은 물생산으로 연결되고, 오른편 능선은 등대가 있는 마구산(큰산)으로 이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가던지 정상을 답사한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움틈개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비경이다. 만재도의 새끼섬인 내마도(內馬島)와 외마도(外馬島)가 눈에 들어온다. 아까 만재도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다.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들던 코끼리바위는 외마도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 첫 모습은 두 섬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잠시 후에는 두 개로 나뉘지만 말이다, 아니 작은 암초들까지 합칠 경우 그 숫자는 두 배로 늘어난다.





먼저 등대가 있는 마구산부터 다녀오기로 한다. 억새 가득한 능선에는 마치 곱게 빗어 넘긴 가르마 같은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참고로 이 능선은 일몰 장면이 아름답기로도 소문난 곳이다.



억새밭을 지나자 산죽(山竹) 숲이 나오고, 이어서 산길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속으로 파고든다. 길은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길가의 잡목들이 잘 다듬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곳은 데크로 계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조금 더 오르자 또 다시 동백과 후박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아니 그 밀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큰산 아래쪽에 할아버지 당숲이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오래된 나이를 보여주는 굽어진 아름드리 둥치가 예사롭지 않다. 땔감이 부족한 섬이었지만 그 동안 주민들이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할머니 당숲과 함께 신령스럽게 모셔왔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지 30여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높이라야 176m 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만재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마구산이라는 이름 말고도 큰산으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정상에는 무인등대(無人燈臺)가 홀로 봉우리를 지키고 있다. 크지 않은 등대는 수풀에 가려져 더욱 왜소해 보인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등대가 정상석을 대신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모양이다.





등대의 너머는 아득한 낭떠러지이다. 그래선지 절벽 쪽으로 목제난간을 만들어 통행을 막고 있다. 이 절벽의 아래에는 만재도가 자랑하는 주상절리대가 있다. 직사각형의 바위를 차곡차곡 포개 놓은 모양새라는데 선상에서 봐야만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가 있단다. 눈대중이라도 해볼까 해서 난간을 넘으려는데 집사람의 날카로운 지청구가 뒤따른다. 아까 섬으로 들어오면서 본 풍경인데 위험까지 감수해가면서 다시 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기껏해야 곁눈질 정도라면서 말이다.



안부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물생산으로 향한다. 참고로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물생산물세이산‘, 물살이 센 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산봉우리 아래의 물길이 센데서 비롯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능선의 오른편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만재도의 해안은 다양한 형태의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졌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보두가 일품이다. 어느 하나 거대하지 않는 것이 없어 그 웅장함에 보는 이들이 압도당하고 만다.



물생산 쪽 능선에는 이동통신사(KT)의 중계시설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만재도에 처음으로 전화가 들어온 것은 1986년부터였다고 한다.




아찔한 벼랑 밑으로는 코끼리를 닮았다는 내마, 외마 두개의 섬이 나란히 붙어 서있다. ! 외마도 쪽으로 흘러내리는 가지능선으로도 길이 나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다른 이의 글로써 대신해본다. <우측으로는 마구산 해벽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물생산 해벽이 아찔하게 다가온다. 해안바위들이 특이하다. 악어들이 바다로 기어나가는 모습 같다. 가파른 절벽 위로 검은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가지능선 끝까지 가면 내마도와 외마도가 지척에서 내려다보인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이번에는 앞산으로 뻗어나간 바위능선이 손짓을 한다. 한 폭의 풍경화라 할 수 있겠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 만재도의 부속섬들도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앞산 능선의 오른편에 보이는 자그만 섬이 녹도이고, 앞산의 뒤쪽 왼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섬은 국도이다. 내일 앞산을 트레킹 할 때는 막상 볼 수가 없으니 가슴속에 잘 저장해 두자.



물생산의 정상은 험상궂은 바위능선으로 연결된다. 그동안 몇 명의 탐방객이 추락해 사망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 정도로까지 위험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른쪽은 천 길 낭떠러지인 반면에 왼쪽 사면(斜面)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사가 심한데다 바위를 붙잡고 용을 써야만 오를 수 있는 구간도 여럿 나오지만 주의만 조금 기울인다면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가 있다.



10년을 벼른 끝에 만재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이생진 시인’, 섬 여행가이자 섬 시인으로 불리는 그가 저서인 걸어다니는 물고기(2000년 펴냄)’에다 풀어놓은 물생산에 대한 느낌이 생각나 옮겨본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물생산은 험하면서도 자꾸 사람을 유인해 하늘로 끌고 갔다. 올라가면서 석양은 짙고 염소 우는 소리는 노을을 재촉했다. 절벽에 핀 천남성꽃이 절벽으로 올라오라 했다. 이런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뭍에서는 사람이 유혹한다. 하지만 섬에서는 꽃이, 새가, 나비가 유혹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 유혹에 조심해야 한다. 절벽은 험하고 무서울 정도다. ... 만재도의 새끼섬인 내마도, 외마도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 신비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초록빛 이마에 등갈색 암석이 내려지는 절벽, 절벽을 하늘 끝닿게 세워놓은 듯 눈이 빙 돈다>



안부를 출발한지 20분 만에 물생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두세 개쯤 되는 인근의 바위봉우리들이 다들 고만고만한데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표식까지 없는 탓에 헷갈렸지만 우리 부부는 그중 가장 높아 보이는 곳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지를 못하는 일행들도 꽤 많았다. 눈어림만으로도 엄청나게 위험해보였기 때문이다. 이생진 시인의 생각도 크게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금씩 끌리는 대로 올라간다. 물생산 정상에 올라왔다. 발 한 번 헛디디면 깊은 물속으로 떨어진다.>라고 쓴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에 서면 좌우 방파재 안에 들어선 만재마을의 포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오른편에는 기암괴석들이 용의 지느러미처럼 줄을 지어 늘어섰다. 그중 뽈록하니 튀어나온 바위가 미남바위이다.



더 이상의 진행을 그만두고 이쯤에서 하산하기로 한다. 이후부터는 좌우 양측이 모두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호랑이처럼 노려보고 있는 집사람의 눈길이 더 무서웠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태도(下笞島) 여행 둘째 날 : 상태도와 중태도

 

여행일 : ‘19. 3. 4()-6()

소재지 : 전남 신안군 흑산면 태도리

트레킹 코스 : 상태도중태도하태도 해안선 투어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흑산군도에 속해있는 태도군도(苔島群島)대흑산도로부터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섬들이다. 상태도와 중태도, 하태도 등 3개의 유인도와 여러 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은 민박집의 낚싯배를 빌려 상태도와 중태도를 둘러보기로 했다. 거기다 하태도는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일정이다. 목포로 나가는 배편이 취소된 덕분에 생긴 일정이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의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흑산군도(黑山群島)’는 대흑산도와 영산도, 대장도, 다물도, 대둔도, 홍도,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만재도, 가거도 등 유인도 11개와 무인도 89, 숨은 여() 187개 등 총 287개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섬의 무리이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뱃길이 끊겼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미세먼지와 안개가 섞이면서 뱃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시야를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흑산도만 하더라도 하루 수차례 쾌속선이 오간다. 하지만 이곳 하태도를 포함한 그 이후의 섬들은 하루에 한번 밖에 없는 쾌속선에 의지해야 한다. 끄래서 성질 고약한 먼 바다가 심술이라도 부릴라치면 제풀에 지쳐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어버렸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낚싯배를 빌려 태도군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마침맞게 민박집 주인장이 낚싯배를 갖고 있단다.





배가 하태도항을 벗어나자마자 강섬이 손짓을 한다. ‘흰여라고도 불리는데 하태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속 여()’이다. 나무는 물론이고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바위섬이니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흔적까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란다. 낚시꾼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강성돔의 입질이 워낙 좋다고 소문이 났을 뿐만 아니라 섬의 규모가 제법 커서 웬만큼 날씨가 나빠도 낚시가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15분쯤 달렸을까 제법 큰 규모의 섬이 길손을 맞는다. 중태도·하태도와 함께 태도군도(苔島群島)를 이루는 상태도(上苔島)’로 대흑산도에서 남쪽으로 약 29.5지점, 흑산도 본섬과 가거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면적 1.42에 해안선 길이가 10.2인 작은 섬이다. 섬의 최고(最高) 지점은 157m이며, 섬 전체가 하나의 산지를 이루고 있다. 취락은 섬의 남쪽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70명쯤 되는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단다.



선착장은 섬의 남쪽에 위치해있다. 배에서 내리니 흉상(胸像)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곳 상태도 출신으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이용석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원이던 그는 지난 20031026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며 분신했다. 이 씨의 분신은 그동안 가려져왔던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후 비정규직 철폐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노동계에서는 그를 열사로 부른다. 그는 분신한 지 37일 만에 광주 망월동 5.18시립묘역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흉상에서 오른편으로 돌자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나타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한 아름다운 해안이다.



안쪽에 선착장(船着場) 하나가 더 들어서 있다. 어선 두어 척이 정박되어 있는 걸로 보아 주민들의 전용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우릴 태운 배는 두 개의 방파제 가운데 바깥쪽에다 댔었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니 상태도 노인회관이 얼굴을 내민다. 상태도에 왔다는 것을 인증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니 놓치지 말 일이다. ‘상태도라는 지명이 적힌 표식은 노인정에 걸린 현판(懸板)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자 만()처럼 바다가 안쪽으로 움푹 들어와 있다. 깊이도 작은 배는 너끈히 들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깊어 보인다. 조금 전에 배를 대었던 방파제가 없었을 때에는 천연의 항구노릇을 톡톡히 수행했을 것 같다.



마을 정수장을 지나 건너편 능선으로 향한다. 이 길로 계속 가면 섬의 동북쪽 끝자락인 내연발전소까지 이어진다. 길 오른쪽은 시멘트 옹벽으로 낭떠러지다. 철제난간을 둘렀다. 이 부분은 땅이 아니라 철제로 바닥을 만들어 그 위에 시멘트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왼쪽 집 담벼락이 끝인데 이 옆으로 길을 새로 낸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섬의 동쪽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절벽이 바다와 맞닿으며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1997년에 만들어졌다는 내연발전소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길이 끊겨버린다. 바로 위 사진의 맨 끄트머리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이곳도 하태도와 마찬가지로 온통 붉은색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저 하태도의 바위들보다 훨씬 더 단단해 보인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명색이 등산 동호회원들이니 길이 끊겼다고 그만둘 리가 있겠는가. 없으면 뚫어서라도 진행하는 게 산꾼들의 습성이니 말이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절벽을 기어오르고 보는 이유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오른데 대한 보상은 쏠쏠한 편이었다. 주변에 널린 기암절벽들이 옥빛 바다와 어우러지며 빼어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옴을 이르는 말이니 지금의 상황에 딱 맞는 고사성어가 아닐까 싶다.







상태마을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산비탈에 기대에 들어선 마을은 1600년경 흑산도에 살던 김해 김씨가 섬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뒤를 이어 1800년경에는 박씨가 들어와 정착했단다. 지금은 46세대 83명이 살고 있다니 그동안 많이 커진 셈이다. 하긴 한때는 초등학교까지 들어서 있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아직도 학교건물이 남아있다고 한다. 1988년에 세워진 교회도 있단다. 하지만 눈으로 식별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로 상륙한 곳은 중태도(中苔島)’이다. 상태도(上苔島하태도(下台島)와 함께 태도군도(苔島群島)를 이루며 이들 중 가운데에 위치한다. 면적은 1.04이고, 해안선 길이는 4.5, 최고높이는 137m이며 이를 중심으로 섬 전체가 경사가 급한 구릉지를 이룬다. 섬에는 약초를 먹여 키운 흑염소가 사육되고 있으며, 해역에는 김·미역 등의 해조류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 대부분은 해조류 채취기간인 3월에서 10월까지의 기간에만 섬에서 살고 나머지 기간은 다른 곳에서 다른 일에 종사하며 생활한단다.



선착장에 내리면 중태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선착장이 있는 섬의 동쪽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1800년경 한양 조씨가 하태도에서 거주하다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현재는 11세대 24명이 거주하고 있단다. 하지만 선장님의 말로는 단 세 가구만 살고 있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한 집만 머물고 있단다. 북풍이 거세고 파도가 높아 바다일이 어려운 겨울철에는 다들 목포에 나가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 집이 가난해서 목포로 못 나간 것은 아니라는 선장님의 말씀이다. 기나긴 겨울철에 지루하지 않아도 될 만큼 문화시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육지로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의 충분한 지원 덕분이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중태도 역시 해안 전체가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저 마을이 들어서있는 동북쪽 해안만이 열렸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마을을 품은 산만은 나머지 두 섬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민둥산에 가까웠던 상·하태도와는 달리 온통 짙고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서는 흑염소를 방목(放牧)하는 게 아니라 사육(飼育)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무들이 염소들이 못 먹는 수종(樹種)이었을 것이고 말이다.






하태도로 되돌아오는 뱃속에서 느닷없이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선장님께서 섬을 한 바퀴 돌아주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유람선 노릇을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도착한 하태도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복잡했다. 북서쪽으로는 돌출부가 길게 뻗어있고, 남쪽으로는 깊게 만입되어 있다. 대부분이 암석해안으로 서쪽과 남쪽은 높고 가파른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해 있다.



바다는 온통 옥빛으로 빛난다. 파도가 갯바위에 부서질 때마다 마치 햇빛에 옥가루가 부서지는 듯하다.





눈에 들어오는 하태도의 해안은 온통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다. 해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해안가의 절벽이다. 절벽의 곳곳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파도가 만들어낸 동굴들로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바위벼랑에서 노닐고 있는 염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경사가 꽤 가파른 곳인데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내달리기도 한다. 염소들의 암벽등반 솜씨는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가 보다.




능선이 움푹 파여 있는 것이 대목쯤 되지 싶다. 대목이란 물새끝으로 가는 좁은 목이라는 뜻이란다. 어제 북서릉을 답사하면서 저곳에서 삼거리를 만났었다. 마을사람들의 생활로와 물새끝으로 가는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잠시 후 기괴하게 생긴 작은 바위섬이 하나 나타난다. 사막의 교통수단이라는 낙타의 등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제천의 둥지봉에서 만났던 새바위를 쏙 빼닮은 것 같기도 하다. 바닷가 기암괴석들 모두가 다 그렇듯 이 바위도 긴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고 비바람에 씻긴 끝에 만들어졌다. ‘시스택(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바위섬은 한국의 동해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마치 촛대의 형상을 닮았다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촛대바위라고 부른다.






옴팍하게 파인 바다에는 작은 어선 한 척이 떠있다. 이곳 하태도에도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20여 명이나 된다고 했으니 그녀들을 싣고 온 배가 아닐까 싶다. 그네들을 태워다주는 배가 세 척이나 된다니 말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주변의 바위들이 하나같이 희끗희끗하다. ‘가마우지 닷!’, 누군가의 환호성이 들려오면서 작은 소동이 인다. 바위 위에서 쉬고 있는 새들이 가마우지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꽤 많은 가마우지들이 앉아서 쉬거나 파도 위를 날고 있는 게 보인다.



조금 더 나아가자 제법 큰 섬이 나타난다. 나무 한 그루 눈에 띄지 않는 바위섬이지만 장축(長軸)170m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다. 그래선지 다라도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갖고 있단다. 높이가 30m쯤 되는 섬의 동남쪽 끝자락에는 무인등대가 올라앉아 있다. 이 등대는 가거도와 만재도 사이 수역을 지난 뒤 하태도 동편을 지나는 선박들의 항로표지가 되는 등대로 2015년에 신설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다라도는 특정도서로 지정되어 있다.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건축물이나 공작물의 신ㆍ증축, 야생 동식물의 포획ㆍ채취 등이 금지되는 국가보호지역이라는 얘기이다.




섬은 온통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주변의 바다는 크고 작은 암초(暗礁)들 세상이다. 그러니 주변이 온통 비경일 게 당연하다. 이곳 신안, 아니 대한민국 제일의 절경으로 알려진 홍도에 견주어도 하등 뒤질 것 같지가 않다. 한마디로 장관이라는 얘기이다. 그에 따라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내 손길도 역시 쉴 사이 없이 바빠진다.





배에서 바라보는 해안선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마다 예사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문득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이백(李白)이 쓴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오는 글귀로 별천지가 있는데 인간 세상이 아니다.’, 즉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산중문답은 이백이 당현종(唐玄宗)을 떠난 후에 지은 시로,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노래한 소박하면서도 도가적인 풍류가 스며있는 시다. 그가 정계에 대한 욕심을 버렸기에 이런 시가 가능했을 것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난 오늘 또 하나의 교훈을 배운다. ‘무릉도원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속된 욕심을 버리고 살면 바로 내가 기거하는 곳이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겠는가.’ 이는 곧 별유천지비인간이 별 것 아니라는 얘기이다. 아무튼 이왕에 거론했으니 문장 전체를 한번 읊어보고 가자.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에 인간 세상이 아닐세(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하태도(下笞島) 여행 첫날 : 남릉과 남동릉 트레킹

 

여행일 : ‘19. 3. 4()-6()

소재지 : 전남 신안군 흑산면 태도리

트레킹 코스 : 하태마을능선삼거리높은산남릉 왕복높은산임도큰산다라섬능선 왕복남동릉섬머리 끝하태마을(소요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2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태도는 음식점은 물론이고 그 흔한 자동차조차 없는 섬이다. 그러니 월척을 꿈꾸는 낚시꾼이라면 몰라도 관광객들은 굳이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객선의 접안시설이 설치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해안선의 아름다운 경관이 다른 유명 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낚시꾼들이 주요 고객이란다. 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깊어 어족자원이 풍부하기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남해와 서해의 빠른 물살이 수시로 교차하는 곳에 위치해서 서쪽바다와 남쪽바다의 고기들이 다 모여든다는 것이다. 거기다 썰물 때면 물 위에 드러난 갯바위마다 홍합과 돌김, 돌미역을 한 짐씩 짊어지고 있단다. 그 때문인지 우리가 머물렀던 민박집의 밥상은 온통 해녀들이 물질해온 것으로 보이는 자연산 해산물로 꾸며져 있었다.

 

여행 둘째 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트레킹을 나선다. 오늘은 어제 답사했던 북서릉을 제외한 나머지 능선들을 모두 둘러볼 계획이다. 그러니 트레킹의 시작은 어제와 같은 코스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어제와는 달리 짙은 안개로 인해 시야가 딱 막혀있기 때문이다.




마을 앞을 지나는데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너른 백사장이 몽환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장불해수욕장이라는데 태도군도에서 유일한 모래해변이란다. 길게 잡아야 300m도 채 되지 않으니 규모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어느 유명 백사장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곱고 보드라운 모래사장을 갖고 있다. 아쉬운 점은 해변 입구까지 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야영이 불가능한 점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이 백사장에는 어패류들도 서식하고 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채취했기 때문에 술안주로 충분한 양은 아니었지만 맛만은 그만이었다. 아니 그 부족한 안주를 백사장 가의 갯바위에서 채취한 거북손으로 채웠으니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민박집을 나선지 20분 만에 어제 서북릉을 답사하면서 길이 나뉘었던 삼거리에 이른다. 백사장의 분위기에 끌려 한눈을 팔다보니 어제보다 5분 가까이 더 걸린 모양이다.



어제와는 달리 왼쪽 능선을 탄다. ‘붉은 넙끝으로 이어지는 남릉이다. 이 능선도 역시 한쪽은 바위절벽, 그 반대편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흙 사면(斜面)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그 경사면이 소나무 숲으로 채워져 있다는 게 어제와 다르다고 보면 되겠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나온 풍경 뒤에서 어제 걸었던 북서릉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8분쯤 더 걷자 길이 둘로 나온다. 오솔길 하나가 왼편으로 나뉘는데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붉은넙끝0.76, 갈빈녀 0.76/ 지푸미0.82, 마을상부 0.8)가 눈길을 끈다. 작은 나뭇조각들에 손 글씨로 지명과 거리를 정성껏 적어 정감을 자아내게 만들고 있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붉은넙끝으로 향한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높은산(137m)에 올라선다. 정상에 세워놓은 쇠 파이프에는 아까와 같은 모양새의 정상표지판이 꽂혀있다. 아니, 근처 잡초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것을 산행대장이 되찾아 놓았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상표지판의 생명이랄 수 있는 높이는 적혀있지 않다.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산행대장은 그런 점까지도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높이가 적힌 정상표시지를 준비해 와 파이프에 걸어두었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하태마을의 풍경은 거의 환상적이다. 덩어리진 안개의 흐름에 따라 사라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에 흠뻑 빠져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짙은 안개가 더 이상의 조망을 허락하기 않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능선은 둘로 나뉜다. 일단은 오른편 능선을 탄다. ‘붉은넙끝으로 연결되는 남릉이다. 능선은 어제 답사했던 북서릉과 같은 풍경이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으로 인해 나무들이 자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섬 주민들이 놓아먹인다는 염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깔끔하게 시야가 트인다. 그러나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안개와 미세먼지가 합해지면서 시야를 가로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걷자 능선의 풍경이 확 바뀌어 버린다. 초지로 이루어진 지금까지와는 달리 바위들만 가득한 황무지(荒蕪地)로 변해버린 것이다. 좌우 벼랑의 경사도 갈수록 가팔라진다. 두 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진행이 불가능한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10분쯤 진행하다가 그만 되돌아나가기로 한다. 변화를 주지 못한 채 그게 그거인 주변 풍경들이 계속되는 것에 식상해졌기 때문이다. 아니 갈수록 험해지는 능선의 위험도를 감수하면서까지 진행할만한 풍경들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번 능선은 양 옆으로 거대한 해벽(海壁)이 늘어서있다. 안개에 가린 탓에 또렷하진 않지만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모양의 요철바위도 보이고, 수십 마리의 악어 떼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듯한 모양의 기암들도 눈에 들어온다.




높은산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큰산으로 향한다. 북서쪽으로 보이는 SKT 무선중계시설을 기점으로 삼아 진행하면 된다. 가파른 경사가 약간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 일단은 진행해볼 일이다. 그래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아까 높은산으로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삼거리까지 되돌아가면 될 일이고 말이다.




100m쯤 내려가자 임도가 나온다. 위에서 거론했던 삼거리로 연결되는 길일 것이다. 임도를 따라 잠시 걷다가 이동통신의 중계시설을 만난 뒤에는 진행방향에 보이는 또 다른 통신시설을 기점으로 삼아 진행하면 된다.



탐방로를 가꾸는데 꽤 정성을 들였나보다. 두어 곳에 벤치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어떤 곳에는 쓰레기통까지 설치했다. 그렇다면 저 휴지통은 과연 누가 치울까? 그게 힘들었던지 쓰러진 채로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벤치가 놓인 곳은 일류의 조망처이다. 벤치가 먼 바다를 바라보라는 배려라든 증거일 것이다. 벤치에 앉으니 하태마을 반대편 해안, 즉 기푸미(깊은만)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도 역시 움푹 들어간 만()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태마을 앞에 방파제가 없던 시절 북풍을 피하기 위해 배를 정박하던 쳔연의 항구였다고 하더니 그말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뒤에는 안개에 갇힌 하태마을이 들어앉았다. 마을은 깊숙이 파인 만()의 안에 들어서 있다. 북쪽 해안에 돌출한 2개의 갑() 사이로 깊숙한 만이 형성되어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든다. 천혜의 항구라 하겠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통신시설을 전면에 두고 바라보면 오른편에 산이 하나 뽈록하니 솟아올랐다. 해발이 157m라고 하니 이 섬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선지 버젓이 큰산이라는 이름까지 갖고 있다. 그러니 이런 산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을 헤치며 또렷하지 않는 산길을 찾아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니 드디어 큰산의 정상이다. 밋밋한 구릉(丘陵)처럼 생긴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줄 그 어떤 표식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산악회의 리본조차 보이지 않으니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가지 않았을 경우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라 하겠다. 아래 사진은 산행대장이 보내준 것을 게재했다. 미리 준비해 간 것을 붙여놓고 찍은 것이란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쪽만 트인다. 하태마을의 반대쪽 해안이 눈에 들어오지만 오늘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진행한다. 같은 길로 되돌아와야만 하는 썩 바람직하지 못한 코스이지만 이곳 하태도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다라섬을 빼먹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내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잡목과 웃자란 잡초로도 모자라 망개나무와 찔레 등 가시넝쿨들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대기는 기본이고 찔리고 할퀴기까지 하니 이를 견뎌 낼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15분쯤 진행하다가 발걸음을 돌린 이유이다.



임도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잠시 후 아까와는 다른 이동통신(KT)의 중계시설을 만난다. 이 부근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뉘니 기억해두자.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기로 한다. ‘섬머리끝으로 연결되는 북쪽 능선이다. 중간에서 되돌아 나왔지만 큰산의 산줄기를 답사하는 데는 45분이 걸렸다.



능선은 북쪽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망망대해, 왼쪽으로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바다 건너에 중태도와 상태도가 있으련만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만큼 미세먼지가 짙다는 증거일 것이다. 미세먼지를 피해 먼 바다까지 왔건만 공염불(空念佛)’, 다시 말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 셈이다.



능선은 가슴 아픈 상처를 보여주기도 한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듯 기둥만 남은 나무들이 능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아니 재선충(材線蟲) 같은 병충해로 인한 상처일지도 모르겠다.



앞서가던 집사람의 손이 분주해진다. 주변이 온통 달래 밭이라는 것이다. 달래 말고도 방풍나물과 엉겅퀴, 갓 등 자연산 나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단다. 그렇다고 마냥 나물 채취에 매달려 있을 여유는 없다. 육지로 나가는 배의 출항시간에 맞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능선이 끝나갈 즈음, 그리 높지 않은 하얀 등대가 세워져 있다. 직원이 상주하진 않지만 하태도의 출입구인 하태도항 바로 뒤편 언덕 위쪽에서 하태도항으로 입항하는 선박들에게 연안항로의 표지가 되어주는 고마운 등대이다. 특히 하태도 인근에 암초가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어민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등대 옆에는 특수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기상청에서 설치한 자료수집기와 전원공급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큰산갈림길에서 이곳까지는 40분이 걸렸다. 하지만 나물을 채취하느라 멈춘 시간이 만만찮았으니 큰 의미가 없다고 보면 되겠다.



등대의 바로 아래에는 내연발전소가 자리 잡았다. 지난 1996년에 준공되었단다. 그건 그렇고 첫날은 길을 찾지 못했지만 탐방로는 저 발전소를 지나 선착장으로 연결된다. 발전소의 담장을 왼편에 끼고 20m쯤 진행하면 발전소의 정문이 나오고, 이어서 조금 더 내려가면 선착장이다.



내연발전소를 지나면서 능선도 끝난다. 지도에 섬머리끝으로 표기된 지점인데 이곳도 역시 붉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긴 이곳뿐만이 아니다. 하태도는 마을이 위치한 북쪽 해안은 제외한 나머지는 온통 붉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닷가 갯바위들은 낚시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곳 하태도는 어족자원이 풍부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깊을 뿐만 아니라 남해와 서해의 빠른 물살이 수시로 교차하기 때문에 서쪽바다와 남쪽바다의 고기들이 다 모여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건 앉기만 하면 훌륭한 낚시터로 변한단다. 특히 강섬과 댕강여, 큰여, 다라도, 갈미여, 바닥여, 기둥여 등이 낚시 포인트라고 한다. 11월 중순부터 3월까지는 60이상의 감성돔이 줄줄이 올라온다니 낚시꾼들이라면 한번쯤 욕심 내볼만하겠다.



발전소 근처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는 길, 안개가 많이 걷혀있다. 덕분에 시야가 조금 트이면서 바닷가 풍경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 바다와 맞닿는 부분은 천애(天涯)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슴 속에 갈무리해 두었던 풍경화들을 다시 꺼내보며 어제 느꼈던 진한 감동을 다시 한 번 되살려본다. 행복하다. 그래 현재의 즐거움이 곧 행복이라 하지 않았던가.



얼마쯤 걸었을까 희미하나마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하나 나뉜다. 아마 이동통신의 중계탑과 발전소의 중간쯤 되는 지점일 것이다. 웃자란 잡초과 잡목들이 들어찬 오솔길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른 키만큼이나 웃자란 잡초들을 헤치며 5분 정도 내려서자 우리가 머물고 있는 민박집의 뒷담장과 연결된다. 트레킹이 종료된 것이다. 오늘 트레킹은 3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물을 뜯느라 많이 지체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큰 의미가 없는 시간이라 하겠다.



배가 들어오지 않아 하루를 더 머문 다음날 마을 뒤 능선에 다시 올랐다. 산나물을 조금 더 뜯겠다고 우겨대는 집사람의 성화를 배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날씨는 쾌청하기 짝이 없다. 미세먼지와 안개에 포위되었던 어제와는 천양지차인 것이다. 그 덕분에 주변 경관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한마디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만일 쾌속선이 정상적으로 운행했었더라면 저렇게 가슴 시린 풍경화를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는가 보다.



능선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하태마을이다. 파도 하나 일지 않는 잔잔한 바다가 옥빛으로 빛나고 있다. 옛 달력에서나 볼 법한 풍경화처럼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제 답사했던 북서릉도 놓칠 수 없다. 마을 앞바다가 저렇게 잔잔한 것은 저 능선이 먼 바다에서 들이치는 파도를 막아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물주가 그린 풍경화는 건너편에 위치한 상태도와 중태도가 완성시킨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단연 강섬이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바위섬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북서릉의 앞에 놓인 꼬맹이 섬 노은도는 물결 위에 동동 떠있는 모양새이다.



뭍으로 빠져나가지를 못한 자투리 시간은 꽤 길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이용해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도 역시 학교 건물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섬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흑산초등학교 하태분교장인데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란다. 그래선지 널따란 운동장은 천방지축 뛰어놀았을 어린이들 대신에 잡초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가은이라는 취학 아동이 생겨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하더니 그게 아니었던가보다. 아무튼 날씨가 풀리면 이곳은 백패킹이나 낚시를 온 사람들로 붐비기도 한단다. 텐트를 칠만한 곳이 이곳 말고는 딱히 눈에 띄지 않았으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 하태도는 2004년에 방영된 SBS-TV 드라마 섬마을 선생님의 촬영지였다고 한다. 천방지축 여주인공이 우연히 범죄 현장을 목격하면서 경찰과 함께 조폭을 피해 섬으로 들어가고 우연한 기회에 섬마을 선생님이 되면서 겪는 에피소드(episode)를 그린 드라마인데, 주인공인 김민종과 한지혜가 숨어들어온 섬이 바로 이곳 하태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하태분교장 역시 촬영지의 하나였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학교 안 어디에도 이곳이 드라마 촬영지였다는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학교뿐만이 아니라 섬 전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그만 홍보거리라도 있을라치면 이를 각색해가며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즘의 추세에 비추어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평화롭고 인심 좋은 섬 마을을 조직폭력배의 싸움 장소로 그려놓아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하태도는 상··하로 구성된 태도군도의 맏형이다. 79세대 152명이 거주한다니 나머지 두 섬의 주민들을 합한 숫자보다도 훨씬 더 많다. 그래선지 목포경찰서의 치안센터와 보건진료소도 이곳에 들어서 있다. 특히 이곳에는 매점도 있다. 하루를 더 머문 우리 일행이 마실 술의 양도 제대로 공급 못할 정도로 작은 규모였지만 먼 바다의 작은 섬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편의시설이라 하겠다.




어업인 안전쉼터라는 생소한 간판도 눈에 띈다. 마을회관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작업환경이 열악한 섬 주민들을 배려하는 시책이 만들어낸 편의시설이다. 폭풍우같이 험한 날씨에는 대피소로 평소에는 탈의실이나 세면장, 어업기자재의 보관창고 등으로 이용된다니 어민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또한 섬에는 교회도 있었다. 하태도교회로 1980년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니 30년 이상이나 된 교회다.


하태도(下笞島) 여행 첫날 : 북서릉 트레킹

 

여행일 : ‘19. 3. 4()-6()

소재지 : 전남 신안군 흑산면 태도리

트레킹 코스 : 선착장능선삼거리대목북서릉대목하태마을(소요시간 : 2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면적 2.31, 해안선 길이 11.8하태도(下苔島)’는 목포 남서쪽 120지점에 있으며, 주위에 있는 상태도, 중태도, 외도, 국흘섬 등과 함께 태도군도를 이룬다. 섬 주위에 돌김(石苔)이 많고 상태도와 중태도의 아래쪽에 있다 하여 하태도라 부른다. 드나듦이 복잡한 해안선은 북동쪽으로는 돌출부가 길게 뻗어 나갔으며 남쪽으로는 깊게 만입되어 있다. 서쪽과 남쪽은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취락은 북쪽 만입부 저지대에 밀집해 있는데 대흑산도에 거주하던 밀양 박씨1650년경에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주요 어획물로는 멸치와 전복, 장어 등이 있고, 전복 양식업도 행해지고 있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흑산도를 경유하여 운항된다.


 

찾아오는 방법

하태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목포 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하태도를 포함한 흑산면 소재의 섬들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하태도까지는 약 120km, 뱃길로 대략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참고로 이곳 목포연안여객선 터미널은 쾌속선이 바다를 향해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1980년 지어진 옛 건물이 낙후되자 총 사업비 250억원을 들여 2005년에 새로 지었다.



오전 810분에 출발하는 쾌속선(남해엔젤호)을 타면서 하태도 여행이 시작된다. 목포항을 출발한 배는 비금·도초도와 다물도, 흑산도, 상태도를 거쳐 1110분 하태도에 도착했다. 이 배는 가거도와 만재도를 거쳐 1410분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온단다. 내일 목포로 돌아갈 때 이용하면 되겠다. 같은 급의 쾌속선이지만 운항사는 다르다니 참고해 둔다. ‘남해고속훼리동양고속훼리두 회사가 짝수일과 홀수일에 번갈아가기 운항하기 때문이다.




목포항을 출발한지 정확히 세 시간 만에 하태도에 도착했다. 하태도는 태도군도(苔島群島)의 세 유인도(상태, 중태, 하태) 가운데 가장 큰 섬이다. ‘태도(苔島)’라는 지명은 섬과 바다가 한데 어울려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54명의 주민(2016년 기준)이 웃말, 고랑, 장골, 석멀에 나뉘어 산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배에서 내리니 하태도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하긴 배에서 내린 승객은 우리 일행이 전부였다. 그만큼 찾는 이가 드물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착장에는 화장실을 갖춘 대합실이 번듯하게 지어져 있다. 하지만 매표(賣票)는 배에서 하고 있단다. 그렇다고 화장실까지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화장지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민박집이 화장실 하나를 공동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고마운 시설이라 하겠다.



방파제에서 빠져나와 마을로 방향을 튼다. 양쪽으로 길게 형성된 물양장 주변은 그물과 부표 등 각종 어구들로 복잡하다. 숙소인 태양민박(010-9381-2437, 010-2213-2437)’은 선착장에서 1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 펜션 간판이 걸린 다른 숙소도 눈에 띄었으나 30명 가까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는 유일했다. 제공되는 식사도 훌륭했다. 특히 달래김치와 해초무침, 생선구이 등 이곳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사용해 만든 밑반찬들은 향이 짙으면서도 맛깔스러웠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트레킹에 나선다. 오늘은 물새끝으로 이어지는 북서쪽 능선이다. 탐방로는 마을 앞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른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마을을 지나 탐방로의 들머리에 이르자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생김새가 참 특이하다. 누군가는 악어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했다. 섬의 가장 북쪽이 길게 생긴 코끝이고 포구가 들어선 선착장은 입, 그리고 승선장이 있는 방파제가 톡 튀어나온 것이 마치 악어 이빨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그것도 큰 이빨과 작은 이빨로 나뉘어 있단다. 말발굽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음을 기억해두자. ! 한반도처럼 생겼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엉성하지만 한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탐방로는 마을 끝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데크계단이 길게 놓여있으니 들머리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100m쯤 올랐을까 오른편 대나무 숲 방향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뉜다. 물새끝으로 이어지는 북서릉으로 연결되는 샛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 서둘러 이 오솔길로 들어설 필요는 없다. 능선 위의 삼거리까지 일단 오른 다음 능선을 타고 물새끝까지 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이 길을 이용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하태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초등학교이다. 하태도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계단이 끝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만 속도를 줄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들다면 길가에 매어놓은 밧줄에 의지해서 쉬엄쉬엄 올라가면 된다.



그렇게 얼마간을 오르면 드디어 능선삼거리이다. 민박집을 나선지 15분 만이다. 이곳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물새끝으로 이어지는 북서릉이고, 왼편으로 가면 남동릉의 끄트머리에 있는 바람너리로 연결된다. 내연발전소가 있는 섬머리끝도 왼편 방향이다.



삼거리에서 바라본 왼편 능선, 가장 높은 곳이 높은산(147m), 그 오른편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능선은 붉은넙끝으로 연결된다. 위에서 말한 바람너리섬머리끝높은산에서 왼쪽으로 진행해야 만날 수 있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북서쪽 능선이다. 물론 아까 올라오면서 보았던 대나무 숲길로 되돌아가 잘 닦인 등산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절벽 위를 따르기로 한다. 경사가 제법 심할 뿐만 아니라 길의 흔적 또한 또렷하지 않지만 까짓 우리가 직접 뚫으면서 진행하면 되지 않겠는가.



내려오는 길에 뒤돌아본 반대편 능선, 아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능선은 좌우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왼편이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오른편은 비스듬한 경사의 육산(肉山) 형태이다. 그래선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등의 상록수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능선의 왼편은 수십 길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다. 하태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경사가 급한 해안절벽으로 해식애(海蝕崖, sea cliff, 파도의 침식 작용과 풍화 작용에 의해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와 파식대(波蝕台, wave-cut platform, 암석 해안이 침식 작용을 받으면서 해식애 아래에 형성되는 평평한 침식면)가 발달했다는 특징 말이다.




길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의 위로 나있지만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게 무섭다면 오른편으로 약간 비켜나서 내려서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에 대한 조망은 포기해야만 한다.




능선은 상당히 가파르지만 험하지는 않다. 오르내리는 게 버거울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걸음을 내딛을 때 한눈을 팔아서는 결코 안 된다. 왼편이 수십 길의 낭떠러지로 되어 있으니 목숨까지 담보로 걸 수야 없지 않겠는가. ‘수크렁처럼 생긴 잡초와 찔레넝쿨이 계속해서 발목을 휘감는 탓에 자칫 한눈이라도 팔 경우 엎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는 등산용 스틱이 필수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해안은 돌의 축제장이다. 생김새가 제각기 다른 기암괴석들이 곳곳에서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바위들이 거센 비바람과 파도 등에 시달리다보면 저런 기이한 모양으로 변하는가 보다.



요건 시스텍(sea stack)이 아닐까 싶다.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모양의 돌기둥, 즉 해식애(海蝕崖, sea cliff, 파도의 침식 작용과 풍화 작용에 의해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의 최후 과정 말이다.



능선은 요리조리 휘어있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달리며 꿈틀대는 모양새이다. 그 곡선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순리에 따라 생긴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면 움푹 파인 안부가 나타난다. 지도에 대목이라고 표기된 지점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 아까 계단을 오르면서 보았던 오솔길을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행 중에 바라본 북서릉, 거칠기 짝이 없는 능선이 끝 간 데 없이 길게 이어진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경관만은 그 어느 유명 섬에 비해도 하등 뒤질 게 없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기암괴석들을 눈에 담으며 봉우리 하나를 더 넘으니 아까 대목이라고 부르던 곳보다 더 깊게 파인 안부가 나온다. 물새끝으로 연결되는 북서릉이 본섬과 연결되는 허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위에서 말한 깊은 안부, 그러니까 능선을 탄지 35분 만에 오른편 사면(斜面)으로 난 길로 우회(迂廻)를 한다. 절벽의 가장자리로 난 길이 너무 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위험도가 생각보다는 높지 않기 때문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곧장 능선을 따라 끝자락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길에 사면길을 통과하는 것이 더 나아보였다.



이번에는 만()럼 움푹 파여진 하태마을의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 바다에 떠있는 바위섬 노은도와 작은 배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렇게 봉우리 하나를 우회한 후에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능선을 따라 물새끝까지 나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길에 사면길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이래야만 트레커(trekker)들이 가장 싫어하는 같은 길을 왕복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람이 거세서인지 몰라도 나무숲은 아예 없다. 아니 방목(放牧)된 염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십여 년 전에 올랐던 바래봉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바로 저랬으니 말이다. 염소들이 못 먹는 나무는 철쭉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후부터는 또 다시 능선을 따라 걷는다(사진은 뒤돌아본 풍경이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단조로운 코스이다. 왼편에 펼쳐지는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이 아니었더라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구간이라 하겠다. 오른편 사면을 점령하고 있던 나무숲이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선다. 낮게 깔린 잡초들이 바람 따라 춤을 추며 물결무늬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저 풀을 수크령(Pennisetum alopecuroides)’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다. 크기나 생김새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벼랑 아래 바다에서도 물결이 인다. 땅과 바다가 한 몸으로 합쳐지는 모양새이다. 영국의 소설가 에밀리 브란테가 폭풍의 언덕에서 보여줬던 풍경이 바로 저랬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수크렁은 아니지만 웃자란 잡초가 드넓은 초원에 가득한 풍경은 은빛 억새 물결 못지않은 장관을 연출한다.



능선의 위는 너른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져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풀밭과 주변의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며 장관을 이룬다. 꼭 제주의 오름을 걷는 기분이다. 다만 발목을 휘감는 가시넝쿨은 예외라 하겠다. 아무튼 이 초원은 염소들이 만들어놓은 게 분명해졌다. 아까 오는 길에 보았던 차단망(遮斷網)이 그 증거라 하겠다.




그렇게 한참을 더 진행하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만 되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능선의 끄트머리에 이르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했지만 새로운 볼거리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라는 게 더 옳은 이유였을 수도 있겠다. 능선의 잡초가 더 웃자랐을 뿐만 아니라 길의 흔적까지도 아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5, 능선을 타고나서 1시간이 지났다.



못내 아쉬운 발걸음은 이제 바다로 향한다. 서해에서 만나는 푸른 바다는 동해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쪽빛이 아니라 옥빛이다. 그리고 물결의 높이도 동해바다에 한참을 못 미친다.



이후부터는 사면 길을 따른다. 절벽의 위로 나있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을 들지 않는다. 절벽이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 경사까지도 날이 서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목에서 탐방로는 왼편 사면을 헤집으며 나있다. 아까 우리가 내려왔던 봉우리를 왼편으로 우회하는 것이다. 이 길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길이다. 하태도의 탐방로를 명품으로 만들고 있으니 천연기념물이나 다름없겠다.


후박나무 숲이 끝나면 산길은 산죽(山竹) 숲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한 점의 빛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어두컴컴한 산죽터널을 헤쳐 나가자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갈림길이 나타난다. 서북릉 트레킹이 끝난 것이다. 이젠 미리 주문해 놓은 싱싱한 생선회를 먹을 일만 남았다. 자연산 우럭을 12만 원에 먹을 수 있으니 저녁 내내 마셔댈 술안주로 부족함이 없겠다. 참고로 오늘 트레킹은 총 2시간 20분이 걸렸다.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거리가 왕복 6가 채 되지 않는 점을 감안할 때 꽤나 오래 걸린 셈이다. 그만큼 코스가 험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울릉도(鬱陵島)

 

여행일정 : 9.11~13(23)

여 행 지 : 울릉도 해안산책로 및 명소 투어, 독도, 죽도

 

같이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도동항 근처에는 마치 영화에서나 볼 듯한 아름다운 해안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도동항에서 저동의 촛대바위까지 이어지는데 해안의 절경을 100% 즐길 수 있는 멋진 코스이다. 도보여행가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풍경으로 꼽힌다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킬 만한 빼어난 절경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또한 '아아용암((aa lava. 표면이 울퉁불퉁한 요철凹凸 모양의 용암)‘이 빚어놓은 각주(角柱) 등 지질을 살피며 걷기에도 딱 좋단다. 초기 울릉도의 화산활동 특징을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울릉도와 독도는 국내 최초로 국가지질공원(國家地質公園, National Geoparks)‘으로 인증을 받았다. 신생대(460만 년~5천 년 전)에 일어난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화산섬으로 지구과학적 중요성과 우수한 경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울릉군청에서는 이런 장점을 살려 해설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고 있단다. 해설사와 함께 탐방로를 걸으며 그가 들려주는 지질과 생태, 역사, 문화 등에 관한 얘기를 듣는 프로그램이다. 이곳 행남 해안산책로는 하루에 2~3회 제공된다니 지질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알고 싶다면 한 번쯤 이용해볼 일이다. 시간을 선택한 후 이용 전일까지 전화(울릉군 환경산림과 054-790-6188) 또는 SNS(카카오톡ID : 울릉도독도국가지질공원)로 예약하면 된다.


 

행남 해안산책로의 시작은 도동 여객선터미널의 옥상에 만들어진 전망대이다. 도동항에서 전망대까지는 울릉관문교라는 다리로 연결된다. 릉도의 관문인 도동항 여객선터미널을 현대식으로 신축하면서 진입로용으로 놓은 고가도로 형태의 경관인도교라고 한다. ’게이트웨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사장교(斜張橋) 형식으로 지어진 다리에는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생들에게도 익숙한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이다. ’게이트웨이에서 힘차게 휘날리고 있는 저 태극기들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싶다.



다리는 길이 84.5m에 높이 4.5m의 규모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물 위를 지나지는 않는다. 그저 여객선터미널로 연결되는 보행자 전용 진입로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 그보다는 천혜의 도동해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보는 게 더 옳겠다. ! 옥상으로 오르는 초입에 울릉군관광안내도와 함께 울릉도에 서식하는 멸종위기종을 적어 넣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살펴보자. 그러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귀한 생명체에 해를 끼치는 걸 막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객선터미널의 3층은 환송공원이라는 아름다운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한편 탐방객들에게는 도동항의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공원에는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독도라고 적힌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독도를 시작으로 하늘로 휘감아 솟아오르는 태극의 모습을 통해 우리민족의 영원한 발전과 굳건한 독도 수호의지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그 뒤에는 독도의 수리적·행정적·지리적 위치를 적은 안내문과 역사적으로 독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사부와 안용복에 대한 안내문, 1903년 당시 울릉군수로 있던 심흥택과 독도의용수비대에 대한 안내문, ’삼국사기세종실로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는 독도관련 기록 등을 새긴 비석(碑石)을 세워 독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두었다.



뒤돌아보면 도동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울릉도의 관문이자 관광의 중심지이다. 뭍에서 울릉도로 들고 나는 배의 대부분이 망향봉과 행남동 사이에 위치한 이곳으로 들어온다. 또한 울릉도를 유람하는 배들도 이곳에서 떠나기에 도동항은 항상 들고 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도동에는 볼거리 또한 많다. 여행자들의 샘물 역할을 하는 도동약수, 울릉도 사람들의 개척 당시 생활을 보여주는 향토사료관, 독도전망대와 독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독도박물관, 해돋이전망케이블카 등이 모두 도동에 자리하고 있다.



난간에 서면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동항의 주변경관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반대편에는 기암절벽에 붙어 모진 풍파를 견뎌낸 향나무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야간에도 조명을 밝히고 있어 도동항의 밤바다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산책로 입구에는 철문을 만들어 놓았다. 기상악화로 파도가 높거나 또는 폭우로 인해 낙석이 염려될 때에는 출입문을 막겠다는 안내판도 세워두었다. 울릉도를 다녀온 어느 기자는 울릉도 여행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늘이 도와주면 하는 것이고 안 도와주면 못한다는 것이다. 철문 앞에 서니 그가 했던 말이 실감이 난다. ! 그 옆에는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에서 도동 해안산책로에 대한 안내판도 설치했다. 이곳 들머리에서 행남등대까지의 지도를 그린 다음, 그 위에다 해식동굴과 베개용암, 타포니 등 특수 지질을 표기해 놓았다.




이제 걸어야할 차례이다. ’행남 해안산책로는 울릉도 여행의 백미(白眉). 우리나라 최고의 해안산책로로 불리는 곳으로 바다가 손에 닿을 듯이 바다 가까이 만들어진 아름답고 좁은 해안산책로가 길게 이어진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발아래로 파도가 밀려와 비누거품처럼 포말을 만들며 부서진다. 맑은 물색이 물감을 푼 듯 진한 감청색이다. 손을 담그면 파랗게 물들 것만 같다. 낚싯대를 드리운 조사들도 곳곳에 보인다. 그만큼 입질이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첫 번째 안내판을 만난다. ’해식동굴(海蝕洞窟, sea cave)‘이란다. 해식동굴이란 암석의 연악한 부분이 파도에 깎여나가 만들어진다. 이곳에서는 뜨거운 마그마가 기존의 암석을 뚫고 올라와 식으면서 주변 암석에 많은 틈을 만들었고, 이 틈을 따라 암석이 파도에 계속 깎여나가면서 동굴이 만들어졌단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해식동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림과 글로 설명해 놓았다. 그저 경치에만 포커스(focus)를 맞출 게 아니라 지질공부도 하면서 걸어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잠시 후, 또 다른 해식동굴이 나온다. 그것도 두어 개가 연거푸 나타난다. 그래선지 이번에는 아예 해식동굴을 통과하도록 길을 내놓았다. 동굴을 통과하는 중에도 발아래에는 옥빛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는 마치 초록 잉크라도 풀어놓은 듯이 쪽빛으로 빛난다.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말이다.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기암 해벽들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도 시원스럽기 짝이 없다. 좋다. 그저 좋을 따름이다.





해식동굴을 통과하자 용궁이라는 제법 반듯한 규모를 갖춘 식당이 나타난다. 이집의 주 메뉴는 홍합탕이란다. 자연산 홍합에 해초만 넣고 끓인다는데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일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울릉도에서는 홍합밥과 따깨비밥도 유명하다. 청정해역에서 채취한 홍합과 각종 야채를 넣은 홍합밥은 잘근잘근 씹히는 질감도 좋지만 가득 품은 바다향기가 일품이다. 갯바위에 붙어 살아가는 따개비를 따서 알맹이만 골라 밥을 지으면 연초록의 찰진 따개비밥이 완성된다.



용궁횟집의 앞마당에는 이곳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수영으로 횡단했던 출발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간의 거리는 87.4km나 된다. 그런데 그렇게 먼 거리를 두 번이나 건넜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다. 2004년 혼성으로 이루어진 59명이 국내 최초로 건넜고, 2005년에는 33명의 여성들이 두 번째로 건넜단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한편, 정부와 국민들에게 독도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겠다는 사명감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해볼 수 없는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경의를 표해본다. 참고로 이 비석은 횡단 12주년인 2016년을 맞아 사단법인 영토지킴이 독도사랑회(회장 길종성)‘에서 세운 것이다. 회장인 길종성씨는 2004년 첫 번째 횡단에 참여해 28시간의 사투 끝에 횡단에 성공했던 인물이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도 역시 신천지가 펼쳐진다. 널디 너른 바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에메랄드빛으로 일렁거리고 해안의 날카로운 절벽은 한참 때처럼 혈기방장하다. 저런 혈기는 산봉우리를 타고 넘어 울릉도의 최고봉인 성인봉으로 이어질 것이다.




잠시 후 철제 다리로 연결된 꼬맹이 바위섬이 나온다. 파도나 바람이 절벽이나 바위를 공격하면 약한 부분이 부서지고 강한 부분만 남게 된다. 그 모양이 아치를 닮은 것은 '시아치(sea arch)', 지붕이 없는 것은 '시 스택(sea stack)'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저 섬은 바다의 굴뚝이라는 시 스택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시 스택이 조금 더 공격을 받을 경우 저렇게 허리가 잘려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울릉도는 해안 절벽과 더불어 해안의 다양한 바위가 여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기암괴석과 에메랄드 빛 바다색이 어우러져 함께 걷는 이들 모두가 감탄의 연속이다. 절벽으로 이어지는 바위와 바위 사이로 파도의 위력이 만들어낸 해식동굴이 눈길을 끄는가하면 산책로 다리 밑으로는 물고기들이 여유롭게 노닐고 있다. 누군가에 입에서 흘러나오는 ! 스쿠버다이버가 되어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자조 섞인 얘기가 내 동심을 자극한다. 그와 함께 나도 바다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뒤돌아본 풍경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해식동굴(sea cave)과 타포니(tafoni)가 번갈아가며 나타나면서 빼어난 풍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암석이 물리적·화학적 풍화작용을 받은 결과 암석의 표면에 형성되는 요형(凹型)의 지형을 풍화혈(風化穴)이라고 하는데, ’타포니는 풍화혈 중에서도 특히 암석의 측면(암벽)에 벌집처럼 집단적으로 파인 구멍을 가리키는 말이다. 국가지질공원에 이런 경관을 놓쳤을 리가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지질현상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아래 사진은 암맥(岩脈, dike)이다. 지하의 마그마가 지층의 틈새를 뚫고 올라와서 생성된 납작한 판 모양의 암석을 일컫는다. 이외에도 자가각력암등 다른 여러 지질현상도 만나게 된다. 점성이 높은 용암이 경사면을 따라 흐르다가 표면이 식으면 딱딱하게 굳지만 내부는 여전히 뜨거워 계속 흐르려고 한단다. 이때 표면의 굳은 용암이 깨어져 생긴 작은 조각들을 클링커라고 하는데, 클링커와 용암이 뒤섞여 만들어진 암석이 자가각력암이란다.



꽤나 긴 오르막 계단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현지인들이 이용한다는 옛길도 만난다. 하지만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안내판에는 긴급사태가 방생했을 때에 한해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산길이라고 적혀있다. 경사가 급한데다 낙석 및 추락위험까지 높아 관광객의 출입을 금()하고 있단다.




산책로의 폭은 1m 내외, 나름대로 넓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바닷물에서 불과 1-2m 밖에 높지 않아 위험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때로는 까맣게 높은 절벽으로 오르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어둡고 긴 바위동굴을 지나기도 한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을 헤집으며 길을 잘도 만들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덕분에 병풍처럼 펼쳐진 단애절벽과 기암괴석 그리고 넓은 수평선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이런 풍광을 바라보며 시간을 갖고 사색이라도 즐길 수 있다면 신선놀음도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출렁다리로 놓여있다. 길지도 그렇다고 서슬이 시퍼렇게 높지도 않지만 그 자태만은 사뭇 빼어나다. 주변 암벽과 잘 어우러지면서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그님브라이트(ignimbrite)’라고 적힌 안내판도 보인다. 화산활동으로 분출된 뜨거운 화산재가 쌓여서 굳으면 응회암(凝灰岩, tuff)이 된다. 응회암 중에서 화산재와 부석덩어리들이 고온(高溫)에서 눌리고 서로 엉겨 붙어 생성된 암석을 이그님브라이트라고 부른단다.



얼마쯤 걸었을까 거대한 바위벼랑 아래를 돌아가자 KBS-2TV의 인기 프로그램인 해피선데이-12의 인기도를 알려주는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길이가 50m 정도 되는 벽을 만들고 그 위에다 해안산책로의 풍경화를 그린 다음에 ‘12멤버들의 사진을 그려 넣었다. 그들이 이곳 해안산책로에서 놀다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맞다. ‘12의 출연진들은 지난 2016년에 이곳 울릉도에 들렀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신비의 섬 울릉도에서 공포 극복을 외치며 미션을 수행하는 용기 백배 웃음 백배의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었다. ! 벽화의 옆에는 행남산책로 안내도도 세워놓았다. 현 위치에서 대나무 숲을 통과하면 행남등대로 연결된단다. 지도를 가운데에 두고 울릉도의 이모저모와 행남의 유래를 좌우에 적어놓았다.





벽화 근처에는 횟집이 하나 들어서 있다. ‘행남 해안산책로는 이곳에서 해안가를 떠나 행남등대로 연결되는 능선의 허리를 넘도록 나있다. 쉽게 말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방향을 트는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등대 500m/ 촛대바위 1.62)에 반갑지 않은 안내판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소라계단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부터 길이 끊겼다는 것이다. 교량파손으로 인해 저동구간의 통행이 불가능하니, 정 가고 싶을 경우 1시간 정도 걸리는 저동옛길을 이용하란다.



그렇다고 도중에 탐방을 그만둘 내가 아니다. 하다못해 행남등대(杏南燈臺)’까지라도 다녀올 요량으로 철수네 쉼터옆으로 난 탐방로를 따른다. 하지만 이때부터 집사람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시작된다. 곧 저녁이 올 텐데 무리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300m 남짓 더 진행해봤지만 끝내는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소라계단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이르자 그녀의 의사표현이 아예 윽박지르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남성 호르몬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나이에 이르렀는데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참고로 1954년에 문을 연 행남등대는 무인등대로 운영되어오다가 1979년에 광력(光力)을 증강시키면서 유인등대로 전환했다. 독도 근해에서 조업을 하는 선박이 늘어나면서 연안표지시설의 필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란다.




도동항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또 다른 해안산책로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경관들 하나하나가 기기묘묘하기 짝이 없다. 왼편 저동방향으로 난 산책로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울릉도가 부서지기 쉬운 응회암질이라 파도(파랑)나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쪽도 역시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다만 금방 끝나버린다는 게 흠()이라 하겠다. 300m도 채 걷지 않아 철문으로 굳게 막혀있기 때문이다. 사동항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 그만큼 험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곳도 역시 눈을 돌리는 곳마다 바위절벽 아니면 바다뿐이다. 이게 바로 삼무오다(三無五多)의 섬으로도 불린다는 울릉도의 본모습이 아닐까 싶다. 뱀과 공해, 도둑이 없어 '三無'. 향나무와 바람, 미인, , 돌이 많아 '五多'라고 했다니 말이다. 섬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앞으로는 ()‘을 하나 더 넣어 '六多의 섬'으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엄청나게 비싼 물가(특히 먹거리)를 집어넣어 사무(四無)‘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집사람에게 농담했다가 격한 지청구에 꽤 오래 시달려야만 했다. 그녀는 이미 이곳 울릉도를 사랑하고 있나보다. 나보다 더...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해녀들이 잡아온 해산물을 파는 간이 횟집을 만나기도 한다. 탐방객들의 발걸음을 쉽게 옮겨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소이다. 우리 부부에겐 특히 더했다. 자칫 울릉도의 해산물을 맛보지도 못하고 울릉도를 떠날 처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울릉도에는 울릉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가 다양하다. 말린 오징어와 산 오징어를 통째로 찜을 하든가 구이를 하여 내장과 함께 먹는 산 오징어 통구이, 격자무늬 칼집마다 양념이 배인 오징어불고기 등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메뉴들이다. 하지만 오징어잡이의 부진에다 요 며칠간은 출어까지 못해 식당에서는 오징어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울릉도의 해산물을 맛보지도 못하고 울릉도를 떠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마침 우리를 태우고 갈 배가 울릉도를 떠나려면 자투리시간이 조금 남는다. 간이횟집에 자리를 잡는 이유이다. 하지만 물가가 비싸다는 울릉도의 특징은 이곳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5만 원짜리 모듬회한 접시를 시켰는데 손바닥만한 접시에 올라온 해산물은 오징어와 멍개, 소라 그리고 문어 몇 점이 전부이다. 결국 난 소주 한 잔에 안주 한 점씩 배정해가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소주 두 병이 고작이었지만...







산책로를 걷다보면 맞은편에 있는 울릉여객선터미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1987년에 지어진 기존의 노후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다 새로이 현대식 건물을 세웠는데 2013년 말에 문을 열었다. 지상 3층 규모의 터미널 1층에는 차량과 화물이 이동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이, 2층에는 승·하선 및 환승데크, 3층엔 전망데크(환송공원)’가 각각 들어서 있다. 또한 도동항 주차장에서 터미널까지는 보행자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경관 인도교가 설치되었다.


울릉도(鬱陵島)

 

여행일정 : 9.11~13(23)

여 행 지 : 울릉도 해안산책로 및 명소 투어, 독도, 죽도

 

같이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독도(獨島)는 우리나라 동쪽 끝에 위치한 섬으로 동도(東島)와 서도(西島) 등 비교적 큰 두 개의 섬과 주변의 암초들로 구성된 화산섬이다. 일반적으로 여러 차례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거대한 화산체 중에서 해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 즉 동도와 서도를 포함한 30여 개의 작은 암초들만을 일컫는다. 총면적은 0.188이다. 고문헌 속에서 확인되는 독도의 명칭은 여럿이다. 우산도(于山島)는 가장 오래 동안 독도를 부르던 명칭이다.‘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등의 옛 문헌에서 독도를 우산으로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성종 때에는 삼봉도(三峰島)라 불렸다. 섬이 세 개의 봉우리로 보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종실록(1476)’ 15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1794)’에는 가지도(可支島)에 가보니 가지어가 놀라 뛰어 나왔다라는 기록에서 독도의 또 다른 이름인 가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가지어는 물개의 일종인 강치를 우리말 가제로 음역한 것으로,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서식한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는 울릉도의 관할구역의 하나로 석도(石島)’가 등장한다. 여기서 석도란 독도를 말하는 것으로, ‘()’의 한글 표현이 이고, 돌의 남해안 사투리인 이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행정지명으로서 독도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는 돌섬독섬으로 발음되면서 독도(獨島)’로 표기가 되었는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섬돌섬을 혼용하고 있다. 참고로 독도는 2005년에야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비록 동도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그동안은 천연기념물(336)로 묶여 문화재보호법 제33조에 의거 일반인의 자유로운 입도를 제한해왔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는 저동항으로 이동한다. 독도로 가는 쾌속 유람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독도까지는 편도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기상 상황에 따라 도착 예정 시간이 지연되는 경우도 잦다고 한다. 울릉도를 출발해 독도 관람을 마치고 다시 울릉도에 돌아오는데 한나절이 소요되는 셈이다.




잠시 후 배는 바다로 나아간다. 독도에 가려면 극한의 뱃멀미를 각오해야만 한다. 어제 이곳 울릉도로 들어오면서 고생했던 탓인지 배가 출발하자마자 겁부터 난다. 하지만 뱃멀미는 없었다. 사방이 온통 수평선뿐인 망망대해이지만 파도가 높지 않았던 덕분이다. 아니 출발하기 전에 사먹은 뱃멀미약이 그 효능을 발휘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동항을 출발한지 1시간 40분 정도가 지나자 수평선 저 멀리에서 점 하나가 나타난다. 그리고 점점 커져간다. 드디어 독도에 도착한 것이다. 사람들은 수평선 위로 독도가 떠오르자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독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언제 뱃멀미에 고생했냐는 듯이 훌훌 털어버린다.



독도 여행은 배가 뜬다고 끝이 아니다. 출렁거리는 파도를 뚫고 나면 이제 접안(接岸)이 문제가 된다. 독도엔 방파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도가 조금만 일렁거려도 배가 선착장에 닿는 데 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단다. 그래서 그날 독도에 발을 디딜 수 있는지 없는지는 독도 근처에 도달한 후에야 알게 된단다. 선장이 독도 근처에 도착해 파랑, 바람, 기상 상태 등 다양한 조건을 고려한 뒤 접안할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접안이 불가능하게 될 때에는 접안 대신 독도 근처를 순회하는 것으로 대신한단다. 속살 대신에 겉모습만 볼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도 독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으니 독도행 배를 아예 타보지도 못한 사람들보다는 행운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동도에 만들어져 있는 선착장은 1,945(588) 규모로 500톤급 선박까지 접안할 수 있단다.



대한민국 만세다.‘ 드디어 독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도 오랫동안 덕()을 쌓아왔던 모양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독도에 갈 수 있다.’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독도 땅을 밟는 게 어렵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다른 한편으론 자연이 허락해야만 독도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 독도를 단 한 번의 시도로 들어왔으니 우리 조상들이 쌓아올린 공덕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동도는 최고봉이 98.6m로 비교적 경사가 급하며 북쪽 사면에 2개의 화구 흔적이 있다고 한다. 둘레가 2.8km인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가파른 해식애와 넓은 파식대지, 점점이 산재한 암도(岩島, sea stack의 일종) 등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 동도의 동남쪽에는 많은 해식동(海蝕洞)과 수중 아치가 있단다.



동도의 꼭대기에는 독도등대(獨島燈臺)‘가 자리 잡았다. 독도 주변해역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의 안전을 위해 1954년에 무인등대로 시작된 등대이다. 그러다가 1998년 광력을 증강하고 사람이 상주하는 유인등대로 전환했다. 현재의 독도등대는 백색원형콘크리트 구조로(높이15m) 백색 불빛이 10초에 한번 깜박이며, 46km의 먼 곳까지 불빛을 전한다. 등대 외에도 해양수산시설 대부분이 동도에 설치되어 있는데 빗물과 담수화(淡水化) 시설로 마련된 1,500의 물이 상주인원들에게 제공되고 있단다. 참고로 독도에는 주민 2명과 독도경비대원 40, 독도관리사무소 직원 2, 등대관리원 3명 등 모두 47명이 상주한단다.



형태적으로 봤을 때 독도는 거대한 기저부와 비교적 넓은 정상부를 가지는 평정해산 위에 소규모로 드러나 있는 일종의 성층화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조립질의 화산쇄설물로 구성된 암석의 특징상 강도와 밀도가 크지 않아 파랑이나 바람에 의한 침식과 풍화에 약하고 또한 단층선 및 절리의 밀도가 높아 해수 유입에 의한 지속적인 침식을 받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기묘묘한 꼬맹이 섬들이 생긴 이유일 것이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섬에도 식생(植生)은 존재하고 있었다. 소나무과와 노랑덩굴과, 장미과 등 목본식물 3종과 명아주과, 비름과, 질경이과 등 초본식물 50여 종이 자생한단다. 그밖에도 곤충 130여 종과 조류 160여 종이 서식한다. 특히 바다제비와 슴새, 팽이갈매기 등의 번식지는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도에도 포유류 동물이 있을까요? 누군가의 질문에 다를 고개를 내두른다.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이곳에는 꽤 많은 토기가 살고 있었다. 경비대에서 방사(放飼)한 육지의 토끼가 번식했기 때문이다. 독도의 자생종은 아니지만 동물은 동물 아니겠는가. 그러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식생(植生)이 파괴되는 역기능이 발생하자 모두 제거시켰다니 없다는 대답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현재로서는 옳은 대답이라 하겠다.



독도는 우리민족의 자존심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섬이면서 태평양으로 향하는 첨병의 섬이다. 더 이상 독도가 영토분쟁의 대상이 되지 말고 국민들이 가고 싶을 때 가고 더 머물 수 있는 섬, 새해 일출을 마음속의 붉은 수채화로 담는 추억의 섬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100m 남짓에 이웃하고 있는 동도와 서도를 출렁다리로 이어 서로 오갈 수 있고, 해안선을 걸으며 사색하고 몽돌해변에서 해수욕도 하고, 해저탐험도 가능한 그런 섬이었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독도 여행은 그렇게 자유롭진 않다. 관광객들은 마음대로 독도를 거닐며 풍광을 만끽할 순 없다. 동도에 있는 나루터에 내린 후 근처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래도 인증사진을 찍을만한 조형물은 있다.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라고 적혀있으니 기념사진을 찍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독도 이사부길이라고 적힌 표지판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 하겠다. 아무튼 독도에서 주어진 시간은 40분 여. 부지런히 주변 경관을 눈과 가슴에 담다가,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면 카메라에 담으면 된다. 그리고 기적소리를 신호로 타고 왔던 배에 다시 올라타면 된다.




건너편에는 서도(西島)가 우뚝하다. () 110~160m, 길이 330m인 물길(水道)이 동도(東島)와의 경계선 노릇을 한단다. 섬은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740로 정상부가 험준한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 주민숙소가 들어서 있어 어민들이 비상시에 대피소로 사용하고 있단다.



선착장 주변에만 머물러야 하므로, 독도의 섬 전체 윤곽을 감상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다와 하늘과 조화를 이룬 경관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여느 유명 관광지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코끼리를 닮은 독립문바위와 가제바위, 탕건봉 등은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기암 전시장이나 다름없다. 그 하나하나가 붙여진 이름에 걸맞게 그 빼어난 자태를 뽐낸다.





40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승선하라는 방송이 나오면 이젠 울릉도로 돌아갈 일만 남는다.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독도를 다녀온 기념품이라도 하나 챙긴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바로 독도명예주민증이다. 독도관리사무소 홈페이지에 방문해 관련 정보를 기재해 신청하면 된다. 이때 독도행 여객선 승선권 정보가 필요하니 승선권을 버리지 말고 꼭 보관해 두자. 신청을 마치고 나면 며칠 뒤 우편으로 독도명예주민증을 받게 된다. 모든 비용은 무료다. 독도명예주민증을 발급자에겐 혜택도 있다고 한다. 울릉도, 독도를 거치는 여객선에서 10~40% 할인받을 수 있으며 울릉도에 있는 일부 관광시설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도 있단다.



마지막 날은 죽도(竹島)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울릉도 동북쪽 해안에서 2정도 떨어져 있는데 출발지인 도동항에서 뱃길로 20분쯤 걸린다. 때문에 파도가 높을 경우에는 유람선이 뜨지 못하는 불상사도 발행한다. 걱정과는 달리 배는 예정대로 출발한단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물결이라도 높이 일어 뱃길이 끊긴다면 섬에서 납작 엎드려 바람이 멎을 때를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도로 가는 뱃머리에서 울릉도의 본 모습을 느껴볼 수 있다. 바다에서 본 화산섬 울릉도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찔한 해안절벽 위로 숲이 울창한 하나의 거대한 산이라는 느낌이다. 울릉도에 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이유일 것이다. 해안가와 산지가 대개 일정 거리를 두고 조화를 이루는 대부분의 섬들과는 달리 울릉도는 산의 위세가 워낙 드세 해안가조차 온통 산이 접수했다. 그 대장산은 높이 984m의 성인봉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본섬의 해안선이 끝나갈 즈음, 진행방향 저만큼에 죽도가 나타난다. 울릉도에 딸린 섬 가운데 사람이 살았거나 살고 있는 섬은 모두 3개이다. 가장 큰 독도와 그다음 규모인 죽도에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세 번째로 큰 섬인 관음도는 과거에 사람이 살았었다.



섬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려면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고생깨나 해야만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르는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고, 그래도 힘들면 잠시 쉬다가 다시 오르면 되기 때문이다. 쉬면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죽도는 물론이고 건너편에 있는 울릉도 본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깜빡 잊을 뻔했다. 섬에서 필요한 물품은 케이블카로 운송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등짐을 지고 사다리를 오르내렸다고 한다. 당시 일부 주민들이 소를 기르며 생활했는데, 송아지를 사와서 섬 밑에 이르면 송아지를 등에 업고 사다리로 올라가 키운 뒤, 소를 잡으면 다시 등짐을 지고 사다리를 내려와 팔았다고 한다.






배에서 내려 달팽이 계단을 오르면서 죽도 탐방이 시작된다. 달팽이관을 빠져나오자마자 죽도의 참모습을 만난다. 초입부터 신우대숲이 펼쳐지는 것이다. ‘죽도록 가고 싶은 섬’. 죽도 홍보물에 적혀 있는 문구이다.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이곳을 찾아오도록 만드는 그게 무엇일까라는 화두(話頭)를 갖고 투어를 시작한다.





잠시 후 관리사무소가 나타난다.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야외에서 작업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죽도의 주인은 산림청이다. 관리는 울릉군청의 죽도공원관리소에서 하고 있다. ! 관리사무소 뒤편에 죽도지구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마침 주어진 시간도 넉넉하니 꼼꼼히 살펴보고 투어를 나서보자. 그렇지 않아도 많지 않은 볼거리 가운데 하나라도 빼먹지 않으려면 말이다.




후박나무로 둘러싸인 곳으로 들어서자 궁전처럼 멋진 집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장인 김유곤씨가 길손을 맞는다. 직접 기른 더덕은 물론이고 그 더덕을 이용해 만든 음료를 팔고 있다. 그는 이곳 죽도를 세상에 알린 일등공신이다. 공중파 TV에서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세 번이나 소개했기 때문이다. KBS-1TV의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인간극장에서 2004년에 방영한 '부자의 섬'에서는 효심 깊은 서른여섯 순수총각 유곤씨가 아버지와 함께 더덕농사를 짓고 있었고, 2015년에 다시 찾아간 '죽도총각 장가가다' 편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맞아들인 신부 이유정씨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결혼소식은 MBC-TV에서 리얼스토리 눈를 통해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방송을 탔으니 사람들의 궁금증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겠는가. 독도에 오는 관광객들 대부분이 빼놓지 않고 이곳 죽도에 들르는 이유일 것이다. 소정의 입도료까지 물어가면서 말이다.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설마 여기가 섬일까 싶을 정도로 널따란 경작지가 나타난다. 김유곤씨가 더덕을 기르고 있는 밭이란다. 죽도의 탐발로는 이런 경작지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나있다. 참고로 죽도는 섬 전체가 깎아지른 듯한 수직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위쪽은 널찍한 평원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바윗덩이가 푸른 초원을 덮고 있는 모습이라 하겠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죽도에선 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빗물을 받아 작물을 기르고, 식수는 배로 실어와 사용한단다.




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잠시 걷자 작은 쉼터가 나온다. 데크로 좌대(座臺)를 만들고 그 위에 벤치를 놓았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관음도가 자못 빼어난데, 그 경관을 느긋하게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관음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본섬과 불과 1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으로, 한때는 주민이 살기도 했으나 지금은 무인도로 변해있단다. 울릉도 주민들은 관음도를 깍새섬(깍개섬)’으로 부른다. ‘깍새가 섬을 뒤덮을 정도로 많이 살았기 때문이란다. 깍새란 과거 울릉도 곳곳에서 무리지어 살던 슴새를 말한다. 깍새를 잡아 거의 주식처럼 이용했을 정도라면 얼마나 많았을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갈매기 떼가 메우고 있단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이층으로 지어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등대 모양으로 생긴 전망대에 오르면 조금 전에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본섬과 연결시킨 보행교(步行橋)가 눈에 들어올 정도로 관음도가 더 가까워졌다. 관광객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2012년에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다. 올해 말 울릉도 일주도로가 개통되면, 저동과 내수전 쪽에서 터널을 통해 섬목까지 차로 10여분이면 갈 수 있다지만, 아직은 1시간30분에 걸쳐 섬을 한 바퀴 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관음도 뒤편으로 삼선암(三仙岩)’이 보인다. 관음도에 있는 해식동굴인 관음쌍굴’, 공암(코끼리바위)와 함께 울릉도의 3대 비경(祕境)으로 꼽히는 명소이다. 삼선암에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모티브(motive)로 한 옛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왕의 아들인 왕자와 용왕의 딸인 용녀가 그 주인공인데 두 사람의 사랑은 육지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바다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간 자리에 바위 셋이 솟아올랐는데, 남쪽에 있는 바위는 왕자가 변한 아비바위이고, 중간에 있는 뚱뚱한 바위는 처녀가 변한 어미바위, 그리고 북쪽에 조금 떨어져 있는 바위는 왕자가 짚고 있던 지팡이가 변한 아들바위라고 한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죽도(竹島)는 조선시대부터 대섬 또는 죽도로 불려온 섬이다. 대나무(시누대)가 많은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이름에 걸맞게 섬은 시누대가 지천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누대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짙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저녁처럼 어두컴컴하다.



그렇게 얼마간을 더 걷자 이번에는 퉁소를 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조형물이 나온다. 아까 관리사무소에서 본 지도에는 이곳을 기념공원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산책로를 따르다보면 여러 가지 풍경을 만나게 된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절벽은 물론이고 곰솔숲과 시누대숲, 그리고 더덕밭들이 번갈아가며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이나 기념 등의 정원에서는 눈길을 끄는 조형물들도 만난다.




탐방로에는 아까 만난 전망대들 말고도 두어 곳에 전망대가 더 만들어져 있다. 본섬과 관음도를 향해 있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동해의 망망대해 방향으로 뻥 뚫려있다. 독도 방향이라 생각되어 눈을 치켜뜨고 살펴보았으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울릉도(鬱陵島)

 

여행일정 : 9.11~13(23)

여 행 지 : 울릉도 해안산책로 및 명소 투어, 독도, 죽도

 

같이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인 울릉도(鬱陵島)64.43km의 해안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섬은 신생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탓에 해안은 대부분이 절벽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내륙도 역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숫하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얘기이다. 울릉도 여행의 공식이랄 수 있는 육로관광은 이러한 경관들을 둘러보게끔 짜여있다.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과 독도를 구경한 뒤,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육로관광보통 ‘A’‘B’, 2개 코스로 나뉜다. ‘A코스는 도동에서 시작해 사동과 통구미를 거쳐 남양, 사자바위, 투구봉, 곰바위, 태하성하신당, 현포령, 현포고분, 송곳봉, 천부, 나리분지를 둘러보게 되는데 대략 한나절(3~4시간)이 소요된다. 반면에 반나절(2시간 내외)이 걸리는 ‘B코스는 도동에서 출발해 저동 촛대바위와 내수전망대, 봉래폭포를 둘러보는 코스이다. 투어는 미니버스를 타고 돌게 된다. 가이드는 따로 두지 않고 버스의 운전사가 이를 겸한다. 참고로 울릉도의 대중교통 수단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와 관광용 미니버스, 그리고 택시가 전부이다. 그런데 육지에서의 생김새와는 영 딴판이다. 버스는 하나같이 작고, 택시는 모두 스포츠형 다목적 차량(SUV)이다. 섬 내에 편평하고 넓은 도로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구절양장이 울고 갈 섬 길은 SUV나 미니버스가 아니고는 운행을 엄두도 내지 못한단다.

 

오늘은 육로관광의 ’A코스이다. 미니버스를 타고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가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송곳바위, 코끼리 바위, 거북바위, 매바위, 곰바위 등 가이드를 겸하고 있는 버스기사가 늘어놓는 이름들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화산활동과 풍화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도 다양한 바위들과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푸른 바다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말로만 듣던 남태평양의 산호초 섬같은 신비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버스가 첫 번째로 멈춘 곳은 울릉도 유일의 자연포구를 갖춘 통구미(通九味)이다. 일주도로를 따라 남양방면으로 향하다보면 만날 수 있다. 마을 양쪽으로 높은 산이 솟아있어 그 골짜기가 깊고 좁은 것이 흡사 긴 홈통과 같다고 해서 구미(구멍)‘을 합성해 만든 지명이 통구미(桶邱尾), 마을 앞 포구에 있는 거북 모양의 암석이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습에서 따온 이름은 통구미(桶龜味)이다. 현재의 이름인 통구미(通九味)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붙여놓은 이름이란다.





포구의 물양장(物揚場)으로 들어서니 청동으로 세 마리의 물개(강치)를 만들어 놓았다. 옛날에는 이곳을 가제바위라고 불렀다고 하던데 이를 알리기 위한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가제는 울릉도의 방언으로 바다사자 과()’의 해양포유류 동물인 강치(물개)를 말한다. 이곳에서 많이 서식했었으나 1970년대를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 강치가 다시 돌아오길 빌면서 이 조형물을 세웠다는 것이다.



통구미포구 근처의 우뚝 솟아있는 거북바위는 저동항의 방파제에 기대고 있는 촛대바위와 함께 울릉도를 대표하는 시 스택(sea stack)’이다. 파도나 바람이 절벽이나 바위를 공격하면 약한 부분이 부서지고 강한 부분만 남게 된다. 그 모양이 아치(arch)를 닮은 것은 '시 아치', 지붕도 없는 굴뚝 모양을 닮은 것은 '시 스택'이라고 부른다.



거북바위는 한 마리의 거북이가 육지를 향해 들어오는 모양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바위를 오르는 대여섯 마리의 거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이드는 물가로 내려가고 있는 새끼 한 마리에 더 주목하란다. 가장 잘생겼으나 말썽 또한 가장 많이 피우는 놈이란다.




거북바위는 비슷한 크기의 다른 바위들에 비해 비교적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물때가 맞으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다. 마침 물이 빠져있기에 한 바퀴 돌아보다가 이른 아침부터 낚시를 하고 있는 강태공들을 만났다. 이 부근이 손맛이 괜찮은 낚시터였던 모양이다. 하긴 바닷가에 물개의 조형물까지 만들어놓았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하지만 나이 지긋한 강태공의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오늘 하루만을 얘기하는지는 몰라도 입질이 별로라는 것이다.



서쪽으로 돌자 '라바 볼(lava ball)‘이라고 쓰인 팻말이 바위벽에 붙어있다. ’울릉도·독도 지질공원에서 내건 것인데, 팻말에는 끈적끈적한 용암과 암석조각들이 눈덩이처럼 뭉쳐지면서 만들어진 공 모양의 덩어리가 라바 볼(용암구)‘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 옆에는 점성이 높은 아아 용암이 흐르는 동안 표면이 식으면서 깨어져 생긴 조각이라는 크링거(clinker)’에 대한 안내판도 붙어 있다. 이 거북바위가 지질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을 뒤 바위벼랑의 푸르게 보이는 부분은 울릉도 향()나무의 자생지(自生地)라고 한다.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는 향나무의 원종(原種)이 자생하고 있는데, 특수한 환경에 적응된 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48)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단다. 이밖에도 통구미의 절벽 밑에는 섬벚나무와 섬국수나무, 말오줌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어 보전가치가 높단다.



아슬아슬하고 꼬불꼬불한 오르막길 무섭기도 하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무서움도 잠시 뿐이었다. 울릉도는 섬이기에 고만고만하려니 했는데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환상의 섬 신비의 섬 울릉도는 성인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산봉우리들,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쉬움이 있다면 미니버스를 타고 드라이브 형식으로 여행을 하다보이 사진을 많이 못 찍은 것이 못내 서운할 따름이었다. ! 비록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가는 길에 사자바위를 볼 수도 있었다. 이곳 울릉도를 정벌했던 이사부장군의 작품이란다.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군주로 있던 512년에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벌할 것을 계획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가 어려우니 계교를 써서 복속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리하여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투용 배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거짓말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들이 두려워 곧 항복했다고 한다.



울릉도는 화산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단방향 신호등이다. 터널에 신호등이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선 울릉도에는 터널이 아주 많다. 해안절벽에 도로를 내면서 곳곳에 터널을 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터널들 가운데 두어 곳은 교행(郊行)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아서 일방통행을 할 수밖에 없다. 그 터널들 앞에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호등을 한 번 놓치면 터널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야만 한단다. 하긴 편도인 터널 안에서 차량 두 대가 만났을 경우 어찌 낭패가 아니겠는가.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수층교도 재미있다. 길이 마치 달팽이처럼 나선형(螺旋形)으로 올라간다.



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울릉도의 또 다른 볼거리인 모노레일이 가끔 눈에 띈다. 보기에도 아찔한 경사진 밭 사이로 사람과 수확물을 싣고 나르는 용도인데, 멀리서 보면 놀이동산의 미니열차같다. 밭머리에는 솥도 놓여있다. 수확한 산나물을 삶기 위해서란다. 재배지와 거주지가 먼 주민들이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 생각해낸 불가피한 아이디어(idea)였을 것이다.



'열두구비' 길을 지나면 현포항(玄圃港)’이다. 낮은 분지와 해안선이 맞닿은 곳인데, 낙조가 아름답다고 알려지면서 울릉도의 일몰(日沒) 명소로 자리 잡았다. 버스는 이곳에서 두 번째로 멈춘다. 코끼리를 닮은 공암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참고로 현포(玄圃)’란 지명은 동쪽에 있는 촛대암의 그림자가 바다에 비치면 바닷물이 검게 보인다는 데서 유래됐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곳에 촌락기지 7개소와 석물, 석탑 등이 있다고 했다. 또한 성지와 선돌 같은 유물·유적이 많아 학자들은 이곳을 고대 우산국의 도읍지로 추정하고 있단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있는 태하마을은 들러보지를 못했다. 때문에 배를 띄우기 위해 바람 불기를 기다렸다는 대풍감 해안절벽과 울릉도(태하)등대, 동남동녀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성하신당 등을 눈에 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버스가 들러주지를 않아서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해외여행처럼 보여줄 곳을 미리 계약해 놓은 것도 아니니 항의해 볼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저 가이드의 처분에 따를 수밖에...



현포항에서는 코끼리바위로도 불리는 공암이 잘 조망된다. 울릉도가 품고 있는 시 아치(sea arch)가운데 하나인데 코끼리가 바다에 코를 담그는 듯한 모양새이다. ‘그 뒤에 있는 꼬맹이 바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가이드의 물음에 이은 해답은 코끼리의 배설물이란다. 쉽게 말해 상분(象糞)’인 셈이다. 참고로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코끼리바위는 전체가 주상절리로 덮여있다고 한다. 몸통은 부챗살 모양이고 코와 다리는 바둑판 모양이란다.




공암만이 아니다. 주변 바다에는 기이하게 생긴 다른 바위들도 여럿 보인다. ‘가리비바위멍게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모처럼 울릉도에 오셨으니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가이드의 우스갯소리와 함께 나타난 바위들이다. 내륙 쪽의 바위들도 만만치가 않다. 송곳산과 노인봉 등 갖가지 기암들이 인사하듯 차례차례 나타난다.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성불사이다. 울릉도가 자랑하는 비경 중의 하나인 송곳산(추산 또는 영추산으로도 불린다) 자락에 들어선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포항 옥천사 스님들과 전국 불자들이 신심을 합해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에 문을 열었다. 이때 만든 석조약사여래대불이 성불사의 랜드마크(landmark)’라고 한다.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를 지켜내려는 염원을 담은 호국불사(護國佛事)였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부처님의 시선 끝에 독도가 걸려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불사의 주불전은 삼성각이다. 작고 단아한 모습의 전각이지만 해발 430m의 수직 암봉(岩峰)인 송곳산과 어우러져 기막힌 풍경이 된다. 울릉도의 기()가 모두 모였다는 송곳산은 추산 또는 영추산이라고 불리는데, 송곳산이란 이름은 마치 뾰족한 송곳을 세워 놓은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인봉의 지맥이 미륵산을 타고 흘러 송곳산까지 이어져 그 절벽이 울릉도의 북쪽 바다에 무릎을 첨벙 담근 형상이란다. 이런 형상의 송곳산은 예로부터 지기(地氣)가 영험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를 알아챈 왜인들이 송곳산과 이 나라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정상에 쇠말뚝 세 개를 박아 놓았다고 한다. 해방이 되어 두 개는 제거가 됐지만 나머지 한 개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송곳산에 구멍 몇 개가 보인다. 예사로이 넘길 구멍들이 아니라니 가슴속에 담아보자. 울릉도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저 곳에 있는 구멍 네 개가 말세(末世)가 되면 두 가지로 용도가 나뉘게 된다고 한다. 구멍마다 하늘에서 밧줄을 내려주는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은 가장 큰 구멍을 통해 옥황상제에게로 올라가지만, 죄를 지은 사람들은 나머지 세 개의 구멍에 걸려 천상으로 못 간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숨은 그림, 아니 숨은 구멍 찾기라도 해봐야지 않을까 싶다. 구멍의 크기가 너무 차이 나서 금방 결론이 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큰 굴로 올라가는 길쯤은 마음속으로라도 그려놓아 두자.





삼성각과 대불의 사이에는 약수(藥水)가 있다. 돌 거북이의 입을 통해 꽤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나오는데 감로수(甘露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맛이 제법 뛰어나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이란 유교 사상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남녀유별을 난 절간에서 만났다. 남자와 여자의 화장실을 별개의 건물로 나누었으니 이게 바로 남녀유별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런 사상을 절간에서 보았다는 게 다소 의외라 하겠다.



반대편 산자락에는 교회도 보인다. 하긴 절간이 있는데 교회라고 없겠는가. 아무튼 저곳 어디쯤에 용출수(湧出水) 전기를 만드는 추산 수력발전소(水力發電所)’가 있다고 했는데 찾아보지는 못했다. 깔대기 모양의 성인봉 분화구에서 모인 지하수가 분지(盆地) 밑의 용출소로 한꺼번에 솟구쳐 나온 것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울릉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39, 저동천의 자연수를 이용한 수력발전소인 남면발전소가 민간자본으로 지어졌다. 추산수력발전소는 1966년에 완공되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섬에 수력발전소를 지을 정도로 물이 풍부한 것이 특이하다 하겠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수전에 있는 화력발전소의 발전량을 합치면 울릉도 전체가 쓰고도 남을 만큼 그 양이 충분하다는 점이다.



바다 방향에 독특한 외형의 건물이 보인다. 왼편은 6개의 날개가 소용돌이치는 모양새이고, 그 오른편의 건물도 지붕이 울룩불룩 한 것이 생동감이 넘친다. 지난 6tvN의 예능프로그램인 '프리한 19'에서 소개된바 있는 힐링 스테이 코스모스 리조트이다. 당시 방송에서는 '더 소문나기 전에 가야 할 틈새 투어' 중 하나로 코오롱 글로텍에서 세운 저 리조트를 꼽았었다. 지난해 10월에 오픈했다는데 풀빌라(11팀 숙박) 형식의 A코스모스(cosmos, 우주)’와 펜션 형태의 B떼레(terre, 지구)’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건물은 세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건축가 20인에 선정된바 있는 김찬중 건축가(경희대 초빙 교수) 등 전문가 집단이 기획은 물론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 울릉도의 자연환경과 천지의 기를 조화시킨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이다.



성불사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울릉도 바다의 풍경도 일품이다. 아름다운 해안선은 물론이고 파란 바다의 시원한 풍경이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절묘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코끼리바위가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송곳산 근처에는 가수 이장희의 울릉천국 아트센터도 있다. 비정기적으로 이장희의 상설 공연을 비롯해 송창식, 윤형주 등 쎄시봉 멤버들의 공연이 열리는데 지하 1층에 지상 4층으로 지어진 건물에는 분장실과 대기실을 갖춘 150명 규모의 공연장과 카페테리아, 전시홀 등을 갖췄다고 한다. 전시홀은 이장희가 보유하고 있는 쎄시봉 자료 등으로 꾸며졌단다. 가이드의 말로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붉은 건물의 뒤편 산자락에 들어앉았다는데 이곳도 역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울릉도 여행은 엿장수 마음대로가 아닌 운전사 마음대로였기 때문이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섬을 품었다 밀기를 반복하는 해안도로는 바다와 맞닿을 듯 시원스럽다. 어떤 구간은 꼬깃꼬깃 종이를 접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도로가 뱀처럼 구불구불한 현포령도 꽤나 기억에 남을 듯했다. 울릉도에 총 연장 44km의 일주도로가 개통된 것은 지난 2001년이었다고 한다. 연인원 25만 명을 투입하고도 39년이나 걸렸다면 얼마나 험난한 공사였을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일주도로가 뚫리면서 한때 후륜구동차량의 경우 거꾸로 산길을 올라야 했다던 태하령 구간 등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울릉주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들 입장에서는 진풍경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달리는 차속, 그것도 햇빛을 등지고 찍다보니 흑백사진이 되어버렸지만 아래 사진은 북면의 '악어터널'이다. 울릉도에서 가장 뛰어난 시 아치(sea arch)’로 알려져 있다. 아치의 생김새가 마치 악어가 입을 벌린 것처럼 생겼다는데 차를 멈추지 않아서 직접 확인은 못해봤다. 아무튼 차는 그 아래를 통과한다. 주민들 사이에는 이곳을 지나가면서 거짓말을 할 경우 악어가 입을 닫아버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닭다리처럼 생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니 참조한다.



잠시 후 버스는 천부항을 지난다. 조선시대 왜인들이 이곳에서 배를 만들고 울릉도의 나무들을 도벌하여 운반 하였던 곳이어서 왜선창이라고 불렸으며, 옛날부터 선창이 있었던 곳이라 예선창이라고도 불렸다. 한때는 울릉도 오징어잡이 배들의 중심 어항이었으나 현재는 많이 쇠락해 있단다. 바닷속 창문을 통해 수중 생태계를 엿볼 수 있다는 천부해중전망대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를 경우에는 삼선암과 관음도 등 울릉도의 또 다른 비경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나래분지로 향한다. 돌아가는 길에라도 들려줄까 기대했지만 가이드는 애초부터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얘기 한 토막 꺼내놓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나리분지로 가는 길에 본천부마을에 있는 섬백리향 제품 판매점에 들렀다. ‘섬백리향 영농조합법인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된 '섬백리향'이 가미된 화장품과 비누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참고로 백리향(百里香)은 한반도가 원산지로 높은 산꼭대기나 바닷가의 바위틈에 높이 3m~5m 크기로 자라 6월에 분홍색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 향기가 ‘100리 까지 간다.’고 해서 백리향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런 특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뱃사람의 길잡이가 됐다고 전해진다. 전초(全草 : ··줄기·뿌리 따위를 모두 갖춘 풀의 온전한 포기)는 한방에서 지초(地椒)’로 불리며 강장효과가 높고 우울증과 피로회복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백리향 가운데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게 섬백리향인데 백리향의 변종쯤으로 보면 되겠다. 백리향보다 줄기가 더 굵고 잎이 15로 백리향보다 다소 길다.





이젠 나리분지로 가볼 차례이다. 구절양장(九折羊腸)도 서러워할 만큼 꿈틀대고 있는 길은 반대편에서 차라도 내려올라치면 조금 넓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서로 비켜지나가야만 할 만큼 그 넓이까지도 좁다. ‘롤러코스트(roller coaster)를 타는 기분일 테니 미리 대비해두라는 가이드의 경고가 있었다면 대충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게 고갯마루를 넘으면 차창 너머로 나리분지가 내려다보인다. 성인봉 북쪽에 형성된 동서 길이 1.5에 남북이 2인 삼각형 모양의 칼데라(caldera)나리분지이다. 울릉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탄한 지역이라고 한다. ‘나리는 영어로 백합류의 꽃인 릴리를 대신하는 순 우리말이다. 지천에 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지구상의 다른 칼데라가 그러하듯 나리분지 주변에는 급경사의 언덕배기가 솟아있다. 성인봉 주변의 형제봉·미륵산·나리령 등이 그들이다.



안으로 들어선 나리분지는 그야말로 아늑한 고향마을. 바로 그것이다. 넓은 밭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과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너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교회 등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나래분지는 화산의 분화구(噴火口)이다. 제주도의 한라산 꼭대기에 있는 백록담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하지만 호수는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밭만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평야처럼 평평한 이 나래분지를 조금만 깊이 파면 맑고 상쾌한 물이 솟아오르는데 이 나래분지의 물이 울릉도 곳곳으로 흘러들어가 섬전체가 물이 부족한 곳이 없으니 사람 사는데 이만한 곳도 없지 않을까 싶다.



마을에는 투막집(국가민속문화재 제256)’이 보존·관리되고 있다. 하나는 억새로 다른 하나는 너와로 지붕을 덮었다. 울릉도 개척 당시(1883)에 사용하던 울릉도 재래의 집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들로 1940년대에 건축한 것이란다. 투막집은 울릉도의 전통가옥으로 바람과 폭설에 대비해 만든 이중벽 구조인 우데기(눈비나 바람을 막기 위해 집 바깥쪽에 둘러친 외벽)가 독특한 집이다. 본래 나리분지에는 고대 우산국 시절부터 사람이 살았으나 왜적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조선왕조가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폄에 따라 수백 년 동안 비워졌다. 그러다가 1882년 고종의 개척령에 따라 나리분지에 93가구 500여 명의 개척민들이 들어와 투막집을 짓고 살았다. ‘나리라는 지명은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섬말나리 뿌리를 캐먹고 연명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란다.








낮게 깔린 구름너머에는 성인봉(聖人峰)이 있다. 지도에서 보면 마치 여우머리처럼 생긴 울릉도의 정중앙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산은 앉은 터나 산세, 해발고도, 덩치 등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다. 또한 울릉도의 산들은 대부분 성인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이름을 성인(聖人)이라고 붙여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성스러운 사람을 닮았다고 해서 말이다. 참고로 울릉도에는 섬 전체를 포괄하는 산 이름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장군 이사부가 점령했다는 우산국의 우산이 성인봉과 다른 산·봉들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산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기억해두자.




나리분지를 둘러봤으면 이젠 왔던 길로 되돌아갈 차례이다. 해안 일주도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섬목부터 내수전사이의 4.4km 구간인데 현재 공사가 막바지라고 한다. 가이드의 말로는 내년쯤에는 되돌아가는 번거로움이 없어질 것이라는데 그의 말대로 예정된 날짜에 공사가 마무리되기를 바래본다. 아무튼 돌아오는 길에는 호박엿 공장에 들렀다. 코끼리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엿과 제리는 물론이고 조청과 빵, 더덕 진액 등 다양한 제품을 할인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아무튼 맛보기로 먹어본 호박엿은 참 신기했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중단하기가 어렵다던 지우(知友)의 얘기가 실감난다. 먹다보면 한자리에서 한 봉지를 다 비워버리는 사람까지 있다던 얘기 말이다. 울릉도 호박엿이 멀미까지 막아준다는 얘기도 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울릉도(鬱陵島)

 

여행일정 : 9.11~13(23)

여 행 지 : 울릉도 해안산책로 및 명소 투어, 독도, 죽도

 

같이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최단거리인 울진군 죽변에서조차도 130.3km나 떨어진 울릉도(鬱陵島)는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이다. 동서(東西)의 길이 96.3에 남북 길이 34.8, 면적은 72.86이다. 신생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탓에 섬 전체가 하나의 화산체이므로 해안은 대부분이 절벽을 이룬다. 특히 서남과 동남 해안은 90m 높이의 절벽으로 천연의 양항(良港)의 발달이 어렵다. 울릉도(鬱陵島)512(지증왕 13)에 우산국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군주이던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지금의 울릉도)를 정벌한 것으로 나온다. 우릉도(芋陵島우릉성(羽陵城울릉도(鬱陵島우릉도(于陵島무릉도(武陵島) 등을 섞어 쓰던 고려시대까지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펴오다가, 1694(숙종 20)부터 울릉도에 대한 순찰을 강화했고, 1882(고종 19)에는 울릉도 개척령이 공포되어 이민이 장려되었다. 1900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시켰고, 이후 경상남도(1906)를 거쳐 경상북도(1914)로 이관, 제주도와 함께 도제(道制)로 변경(1915)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현재의 경상북도 울릉군이 되었다.


 

울릉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묵호여객선터미널(강원 동해)까지 와야만 한다. 울릉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곳 말고도 강릉과 포항, 후포(경북 울진)에서도 출발하니 여객선터미널까지의 접근성과 울릉도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 등을 감안해서 출발지를 선택하면 될 것이다. 터미널에 이르니 울릉도로 떠나는 배를 타기위해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풍랑으로 인해 아침 배가 취소된 상황이었으니 오늘은 특히 심했을 것이다.



울릉도까지 태워다 주게 될 시스타호, 배는 바다를 매개로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하는데 불가결한 존재다. 하지만 배가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항해의 안전은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는 거대한 힘, 즉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닌 바다, 그 자체가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동해의 뱃길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특히 뭍에서만 살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3시간의 뱃길도 버거울 수밖에 없다. 그저 1천 원짜리 멀미약을 마시고, 바다를 믿을 수밖에... 하지만 바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1시간의 헛구역질,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구토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바다는 오전까지 계속되던 풍랑의 여파(餘波)를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3시간 이상을 높은 파도에 시달린 후에야 겨우 울릉도(사동항, 沙洞港)에 도착했다. 울릉도는 사동항 외에도 울릉도의 문호항인 도동항(道洞港), 아래 사진)과 저동항(苧洞港) 2개의 여객선 항구가 더 있으며 배편에 따라 도착하는 항구가 다르니 도착지를 미리 알아두면 여행계획을 짜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도동(道洞)‘이란 지명은 도방청(道方廳)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1882(고종 19) ’울릉도개척령을 발포하면서 개척민에게 면세(免稅) 조치를 내리자 사람들이 울릉도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울릉도에 세운 자치지휘소가 도방청이다. 후에 동() 이름을 정할 때 도방청에서 ()’자를 따와 도동(道洞)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도동항은 각종 상업 및 관광 시설이 밀집되어 있으며, 울릉군청과 경찰서, 우체국, 읍사무소 등 주요 공공기관들이 자리한 행정의 중심지이다. 뿐만 아니라 교통과 상업, 관광, 숙박시설 등 상업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도동은 독도 관광을 위한 진출입 관문지역이기도 하며 중간 기착지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빌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선지 포구에 작은 공원(公園)이 조성되어 있다. 배편이나 버스·택시 등의 교통수단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정자와 벤치를 만들어 놓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은 오징어 축제와 우산문화제 등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한쪽 귀퉁이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비까지 세워져있다.




사람들은 울릉도를 신비의 섬이라고 부르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면서 맞는 울릉도는 신비하기보다는 삶의 고달픔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곳으로 느껴진다. 깎아지른 좁은 공간에는 논이라곤 한 평도 찾기 힘든 곳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깃들었을까? 그래서 눈길을 돌린 게 바다였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성황을 이루었던 게 오징어잡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소공원에 세워진 저 조형물이 이를 증명하는 셈이고 말이다. 아무튼 이곳 울릉도에서 오징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나타내주는 상징물이지 싶다.



울릉도 하면 사람들은 호박엿과 함께 오징어를 떠올린다. 아니 호박엿보다도 오징어로 더 유명하다고 보는 게 옳겠다. 그런데도 울릉도의 밥상에는 오징어가 없었다. 횟집에나 가야 겨우 살아있는 오징어를 금값을 치르고 난 뒤에야 만날 수 있었고, 밥집의 메뉴판에서 찾아낸 오삼(오징어+삼겹살) 불고기는 재료가 없어 상을 차릴 수가 없다는 주인장의 공허한 목소리만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징어가 잡히지 않는데 요 며칠은 파도가 높아 그마저도 잡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귀한 오징어를 도동항의 부두에서 만났다. 그러니 어찌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울릉도에 도착하니 4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해가 질 때까지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육로관광을 나선다. 미니버스를 이용해 이동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방문지는‘B코스봉래폭포이다. 바닷가를 따라 울릉도를 한 바퀴 둘러보게 되는 육로관광은 ‘A’‘B’, 2개 코스로 나뉘는데 오늘은 도동항의 오른편인 ‘B코스’, 즉 저동항의 촛대바위과 내수전망대, 봉래폭포 등을 둘러보게 된다. 3~4시간이나 걸리는 ‘A코스에 비해 ‘B코스2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조금 서둘러야만 해 떨어지기 전에 숙소에 짐을 풀 수 있겠지만 말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봉래폭포(蓬萊瀑布)이다. 저동항에서 성인봉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약 1.5정도 오르면 울릉도 내륙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는 봉래폭포의 입구에 만들어진 주차장이 나온다. 폭포로 올라가는 들머리에 봉래폭포에 대한 종합안내도가 두 개나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서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제대로 보려면 폭포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쯤은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매표소를 지났는데도 두어 곳의 음식점들이 눈에 띈다. 호박, 더덕, 감자, 도토리, 산나물 등 하나 같이 이곳 울릉도의 특산물로 만든 메뉴들을 내걸고 있다.




돌무더기도 눈에 띈다.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쌓아 올렸으리라. 크고 작은 그네들의 소망들을 얹어서 말이다. 나 또한 조그만 돌맹이 하나 올려본다. 우리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꾹꾹 눌러 넣었음은 물론이다.



5분쯤 걸었을까 한여름에도 서늘한 냉기가 나온다는 풍혈(風穴)’이 나온다. 이곳 사람들은 자연냉장고라고도 하고 천연 에어컨이라고도 한다는데, 작년(2017)에는 KBS 2TV ‘생생정보pd의 고고고 여행에서도 소개해 이미 울릉도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풍혈이란 바위틈에 저장되어 있던 찬 공기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자연 구멍을 말하는데, 이곳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의 찬 공기가 바위틈으로 용출되어 내부 온도가 항상 섭씨 4를 유지한단다. 때문에 여름철 대기온도가 24이상 올라갈 때는 찬 공기로 느껴지고, 겨울철 대기 온도가 영하로 내려갈 때는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주민들은 이곳에 음식이나 과일 등을 저장하여 천연냉장고로 유용하게 활용했으며 휴식처로도 널리 사랑받던 곳이란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서고 본다. 그리고 아득한 세계에서 오는 바람을 맞는다. 그러자 단순히 여행객의 땀을 식히는 것 이상의 쾌감이 전신을 감싸온다. 마치 내 속에 있는 우주의 기운이 그 바람에 의해 다시 소름으로 돌출하는 느낌이다. 마침맞게 풍혈 안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잠시 후 거대한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울릉도에 들어서면서 첫 느낌은 참 바위가 많다였다. 해안이 온통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위를 이곳에서 또 만난 것이다. 그런 내 감정이 이입(移入)이라도 되었는지 집사람이 바위의 결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 같단다. 그녀의 추측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울릉도는 약 14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5단계에 걸쳐 화산활동을 거치며 탄생한 섬이다. 마지막 화산활동은 9300~6300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긴 나무계단을 올라서자 이번에는 울릉도의 무공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오른 삼나무 숲이 나타난다. 삼나무는 원래 배()를 건조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요즘은 삼림욕장으로 더 많이 활용되는 추세다. 삼나무가 사람 몸에 극히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피톤치드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점을 놓치지 않고 울릉군청에서도 이곳에다 삼림욕장을 조성해 놓았다.




얼마쯤 올랐을까 계곡 위로 설치된 아치(arch) 형태의 목조 전망대가 나타난다. 축대 형식으로 진입로 우측에 있던 당초의 전망대가 수해에 의해 무너지자 이를 복구하면서 기존의 협소함을 벗어나고 폭포의 전망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지금의 형태로 변경했다고 한다. 아무튼 목재 아치와 기둥, 데크가 조화된 전망대는 폭포에 대한 좋은 전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낙차가 30m에 이르는 3단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의 물은 북서쪽의 나리분지에 모인 강수(降水)가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지하에서 피압수(被壓水)가 되어 지표로 용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표로 솟은 다량의 물이 지형의 기복을 따라 흘러내림으로서 폭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매일 3,000톤 이상이 떨어져 내리는데 이 물은 울릉도의 도동과 저동을 비롯한 남부일대의 중요한 상수원이 된단다.




좁은 협곡 사이로 하나의 물줄기가 하얗게 떨어지고 있다. 섬에서 물은 바로 생명선일터, 섬에서 보는 폭포는 산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천상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에 민물이 고였다가 이처럼 아름답게 떨어지는 것일까?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문장 하나. 작은 감동이 큰 감성으로 연결되었는데도 끄집어낼 수가 없다. 이미 난 노쇠화의 길로 들어섰나 보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내수전 일출전망대(內水田 日出展望臺)이다. ‘내수전(內水田)이란 김내수라는 사람의 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일출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저동항에서 일주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내수전마을삼거리가 나온다. 계속해서 왼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수전 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일출전망대로 올라가는 들머리이다. 고갯마루에는 내수전일출전망대 안내판외에도 이정표(내수전~석포길 입구 0.4/ 내수전 버스정류장 1.3)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북면 석포마을까지 이어지는 트레킹코스의 진행방향을 알리는 이정표인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로 옆에 있는 일출전망대로 올라가는 방향표시까지 빼먹었다. 이정표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삼양주(三釀酒)’라는 이 지역 막걸리를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삼양주란 쌀과 누룩을 이용 밑술을 빛은 다음 덧술로 두 번을 더 빚어 발효시킨 술을 말한다. 울릉도의 청정수에다 주재료인 우리 쌀과 우리 밀 누룩에 부재료로 울릉도에서 생산된 호박과 마가목 열매를 넣어 유산균을 풍부하게 발효시켰다. 맛과 향이 뛰어나며 숙취가 없는 울릉도의 최고급 명주(銘酒)로 알려진다.



잠시 후 도솔암의 입구임을 알리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 곳에 암자(庵子)라니, 생소하지만 울릉도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일 진데 암자라고 없겠는가. 마침 조망까지 트이면서 저 멀리 관음도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 멀리 있는 관음도에 신경을 쓰다가 코앞에 있는 민가를 놓칠 뻔했다. 움막은 아니어도 가파른 산 능성에 마치 바닷가 바위너설에 붙은 따개비처럼 경사진 비탈에 가옥이 붙어있다. 약초나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밭은 그보다도 훨씬 더 경사가 심하다. 이곳 내수전은 제주도 대정 사람 김내수가 화전(火田)을 일구던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눈앞에 보이는 저 집이 바로 그가 살던 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바다에서의 삶이 늘 그렇듯이 섬 생활 역시 그럴 것이다.



이어서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옛말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는 말이 있듯이 자리만 잘 잡았더라면 이름표하나쯤은 넉넉히 챙겼을 법한 나무이다. 그 앞에는 건물 한 동이 인적이 끊긴 채로 방치되어 있다. 아니 흑염소와 마가목, 울금 등으로 만든 제품의 광고용 현수막을 걸어놨으니 방치되었다고는 볼 수 없겠다.




길가의 숲은 마가목(馬價木)이 군락을 이룬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도중에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마가목의 열매나 줄기는 동의보감에 소개될 정도로 여러 가지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채취할 일은 아니다. 대부분은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동의보감(동의보감)’은 마가목을 정공등(丁公藤)이라 하여 풍증과 어혈을 낫게 하고 늙은이와 쇠약한 것을 보하고 성기능을 높이며 허리힘, 다리맥을 세게 하고 뼈마디가 아리고 아픈 증상을 낫게 한다. 흰머리를 검게 하고 풍사(風邪)를 물리치기도 한다고 적고 있다.



해발이 기껏해야 440m, 거기다 고갯마루에서부터 시작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기로 했다. 마음이 가벼운데 구태여 짐으로 무게를 더할 필요는 없다. 생수병까지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팔랐던 것이다. 사실 초반은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정상 가까이에서는 계단을 설치해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길은 두 사람이 어께를 맞대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넓이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햇빛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우거져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할 지경이다. 그래선지 길가에는 가로등 삼아 키 작은 전등(電燈)을 설치해 놓았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올라가면 드디어 전망대이다. 직사각형의 전망데크를 만들고 가운데에는 앉을자리를 배치했다. 조망도와 망원경까지 설치했다. 그만큼 조망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난간에는 여행수첩용 스탬프를 넣어두는 함도 매달아 놓았다. 관광안내소에서 울릉도·독도 여행수첩을 발부 받은 후, 섬을 돌면서 스탬프를 찍어오면 되는데, 10개 이상을 찍어올 경우에는 울릉도 기념품을 준다니 한번쯤 시도해볼 만도 하겠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셈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참고로 도장은 총 17개이며 독도는 인증사진을 찍어오면 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빼어나다. 넓게 뻗은 수평선과 함께 우측의 저동항, 정면에는 죽도, 좌측의 관음도와 섬목(선창포) 일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해돋이를 조망하기에도 딱 좋다고 한다. 이름에 일출이란 단어를 붙인 이유이다. ! 날이 맑을 경우 독도도 관측된다기에 열심히 찾아봤지만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얼마나 더 좋아야 가능할지 모르겠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죽도는 경이롭다. 섬의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상층에 어찌 저런 평평한 마당이 생겼을까? 다양함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정말 신의 영역인가 보다. 죽도의 가파른 절벽을 동해의 맑디맑은 파도가 쓰다듬고 있다.



저동항 방향의 풍경, 저동의 명물인 촛대바위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사각뿔 모양의 북저바위는 또렷하게 눈에 든다. 북저바위는 복어를 가리키는 울릉도 사투리 뽁지바위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이 바위섬 부근에서 복어가 많이 잡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이곳 일출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저동항의 야경(夜景)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라니 참조한다.





성인봉 방향도 눈에 들어온다울창한 숲이 눈길을 끈다성인봉에는 저보다 훨씬 더한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뭍에도 '마지막 원시림등의 현란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숲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 찬사 내지 헌사일 뿐 성인봉에 견주면 분명 한 수 아래란다. 실제로 성인봉 정상 인근에는 섬의 태동기인 신생대 제3기와 4기 사이에서 지금까지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천연의 상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숲으로는 아주 드물게 지난 1967년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에필로그(epilogue),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 연락선을 타고 가면 울릉로라 뱃머리도 신이나서 트위스트 아름다운 울릉도...‘라는 노래처럼 기대와 멀미로 울렁대는 가슴안고 다녀 온 울릉도는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섬으로 남았다. 그만큼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다시 갈 때에는 묵호에서 배를 타고 싶지는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묵호에서는 결코 식사를 하고 싶지 않다. 묵호에서 겪었던 불쾌한 감정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다시피 이번 여행은 풍랑으로 인해 아침 배가 출항을 취소한 탓에 오후 1시 배를 탈 수밖에 없었다. 불가피하게 들어선 여객선터미널 앞의 식당에서 우리 일행이 선택한 메뉴는 그 집에서 제일 자신 있다는 된장찌개. 하지만 찌개는 물론이고 반찬까지 엄청나게 짜서 먹는 게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음식을 갖고 투정하는 건 아니다. 까짓 음식쯤이야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아줌마가 내뱉는 욕설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돈을 퍼주러 북한에 간다느니, 북한에 다 퍼준 탓에 쌀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다느니 하며 내뱉는 욕설이 시정잡배(市井雜輩), 아니 시정잡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욕설로 우리 일행의 밥상머리를 도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난 문재인대통령과 그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내 귀에도 역겨울 정도였으니 오죽 심했겠는가. 자고로 음식이란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라고 본다. 고로 만드는 사람이 마음을 곱게 가져야만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남의 트집이나 잡고 내뱉어야 할 욕설이나 고르는 사람이 만드는 음식이 어떻게 제대로 된 음식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묵호의 음식점 모두를 싸잡아서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나무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꽤 오래 영업을 해온 듯이 보이는 그 식당이 여전히 손님들을 맞고 있고, 또 여전히 욕설을 늘어놓고 있다면 주변에서 그녀를 용인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금당도(金塘島) 여행

 

여 행 일 : ‘18. 5. 14()

소 재 지 : 전남 완도군 금당면 육산리(陸山里), 차우리(車牛里), 가학리(駕鶴里)

여행코스 : 율포항남도갯길 들머리공산금당산가학재삼랑산오봉산세추목재(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완도군의 동쪽 끝에 위치한 면적 15.5의 섬으로 행정구역은 완도에 속하지만 거리상으로는 고흥과 더 가깝다. 1896년 이전에는 장흥군에 속했다고도 한다. 3개의 유인도와 15개의 무인도를 거느린 금당면의 중심 섬이며, 552세대 1,042(2017년 기준)이 살고 있으니 비교적 큰 섬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섬의 가장 큰 특징은 산들이 모두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공산과 금당산, 삼랑산, 오봉산, 봉자산 등 고도(高度) 2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는데, 대부분이 암릉이라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이곳 금당도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해안선 트레킹보다는 이 다섯 산을 종주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안의 경관이 뒤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해안에 형성된 기암절벽의 경관도 역시 뛰어나다. 조선 후기의 문인 위세직(魏世稷, 1655~1721)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금당별곡(金塘別曲)’이라는 기행가사(紀行歌辭)를 남겼을 정도다. 이 가사에 금당팔경으로도 불리는 금당도의 여덟 가지 절경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참고로 금당도는 한자로 '金堂島'였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金塘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금당(金堂)은 석가모니불을 모셔두는 곳을 말하기도 한다. 예전에 금이 많이 나서 ''자가 붙었다는 말도 있다. 금일도(金日島), 생일도의 금곡리(金谷里)처럼 금이 산출된 것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금댕이''금당'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찾아가는 길 : 일단은 녹동신항 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금당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녹동은 남해고속도로(순천-영암) 고흥 IC에서 빠져나와 15번 국도를 타고 고흥읍까지 들어온 다음 호형교차로(고흥군 고흥읍 호형리)에서 27번 국도로 갈아타면 된다. 시내를 통과한 후 바닷가에 이르면 연안여객선 터미널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장흥군 회진면 노력도에서도 금당도의 가학항을 오가는 철부선이 운항되고 있으니 참조한다. 노력항에서는 하루 5(06:30, 08:30, 11:30, 14:30, 17:00) 배가 뜨는데 시간은 대략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금당도까지는 차도선(車渡船)을 이용한다. ‘은해 페리호가 하루 4(06:00, 09:15, 13:00, 16:00), 울포항에서도 하루 4(08:00, 11:20, 15:00, 17:50) 왕복 운항하고 있다. 하지만 계절에 따라 운행시간과 횟수가 달라진다니 운항사인 평화해운(061-843-2300)’에 미리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금당도까지는 대략 45분 정도가 소요된다.



거금대교 아래를 지난 후 연홍도 사이를 빠져나오면 금당도가 길게 늘어서 있다. 하얀 바위섬은 마치 커다란 누에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배는 3개의 유인도와 15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금당면의 면소재지인 울포항으로 들어선다. 항구로 들어서자 녹색등대가 뱃길을 안내한다. 빨강등대와 흰색등대가 배를 맞는 다른 항구들과는 다른 풍경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빨강등대는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 항로의 오른쪽에 설치돼 항구가 왼쪽에 있음을 알린다. 반면에 흰색등대는 그 반대다. 녹색등대는 흰색등대 역할을 한다. 다만 흰색등대는 뭍에 설치돼 있고 녹색등대는 바다에 설치돼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색상이 보이지 않는 밤, 육상의 빨강등대는 붉은 빛을 흰색등대는 초록빛을 밝힌다. 참고로 빨강색과 검정색 조합의 등대도 있다. 주변에 암초지대()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란다. 그리고 빨간색이니 왼쪽으로 뱃길을 잡아야 한단다.




배에서 내리면 새 천년(千年)을 여는 완도군 금당면(莞島郡 金塘面)’이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碑石)이 길손을 맞는다. 표지석 아래에는 섬의 연혁에 대해 적어놓았다. 금당도에 다녀갔다는 인증사진을 찍기에 딱 좋은 조형물이지 싶다. 그렇다고 사진만 찍고 그냥 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빗돌의 뒷면에 금당팔경(金塘八景)’의 여덟 문장을 새겨 놓았으니 한번쯤 읽어보고 가자는 얘기이다. ‘금당팔경이란 금당별곡(金塘別曲)‘에 나오는 여덟 절경(絶景)들로서, 장흥 위씨(魏氏)’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첩()삼족당가첩(三足堂歌帖)’에 나오는 기행가사(紀行歌辭)이다. 이로 인해 위세보(魏世寶, 1669-1707)가 지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의 저서인 석병집(石屛集)에서 삼종형작 금당별곡(三從兄作 金塘別曲)’이라는 기록이 발견된 뒤부터 위세직(魏世稷, 1655-1721)으로 정정된바 있다. 세직(世稷)은 당쟁에 휘말려 장흥으로 유배 온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 장흥조(長興條) 편찬에도 참여한 선비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회령진 만호 조충배(趙忠培)의 초청을 받은 수우옹(守愚翁, 세직의 호)이 그의 셋째 동생 백신(伯紳)과 함께 금당도(金塘島)와 만화도(萬花島)를 거쳐 돌아오기까지의 자연경물을 서경적으로 읊은 일종의 해양기행가사이다. 참고로 금당별곡(金塘別曲)에 나오는 팔경(八景)은 공산제월(孔山霽月)과 사동효종(寺洞曉鐘), 기봉세우(箕峯細雨), 울포귀범(鬱浦歸帆), 적벽청풍(赤壁淸風), 화조모운(花鳥暮雲), 학잠낙조(鶴岑落照) 등이다.



선착장에는 작은 고깃배 몇 척이 정박해 있을 따름이다. 그만큼 한적한 항구라는 얘기일 것이다. 배들 너머로 보이는 섬은 비견도(飛見島)이다. 이곳 금당도 및 허우도와 함께 금당면을 구성하고 있는 3개의 유인도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앞바다는 위세적이 노래한 금당팔경(金塘八景)’ 가운데 제5경인 울포귀범(鬱浦歸帆)’의 배경지가 되겠다. ‘비견리 앞 작은 호수를 배경으로 돌아오는 황포돛배의 모습이 물 수반위에 놓인 꽃 봉우리처럼 아름답다는 그 바다 말이다.



울포항에 내리면 커다란 수협건물이 마주보고 서있다. 산행 시작점은 수협 건물 오른쪽으로 바로 올라갈 수도 있고, 마을을 지나서 면사무소 뒤로 오르는 길도 있다. 면사무소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수협건물의 왼편으로 들어선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마을안길 풍경을 담고 싶어서이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에는 눈요깃거리가 제법 많다. 길가 담벼락의 곳곳에다 원색의 벽화(壁畫)들을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낚싯대가 아닐까 싶다. 커다란 바닷고기를 끌어올리는 그림인데 아예 포토존이라고 적어놓기까지 했다.



7~8분쯤 진행하면 금당면사무소가 나온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곳에서는 무조건 면사무소의 마당으로 들어서고 봐야 한다. 마당에 늘어선 보건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복지회관 건물들을 차례로 지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들머리가 보인다. 초입에 등산로 종합안내도남도 갯길 6000리 경치좋은 길이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면소재지인 이곳 '울포(鬱浦)'는 술맛이 좋다고 해서 울금(鬱今)이라 호칭했으나, 이후 울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1770년 조선 영조 대에 인천 이씨가 금일읍 평일도에서 떼배를 타고 처음 들어왔으며 그 후 김씨 등이 이주하여 형성했다고 한다.



남도갯길 6000란 전라남도의 해안선을 따라 조성해 놓은 둘레길을 일컫는 말이다. 전라남도는 전국의 50%에 달하는 해안선(6419km)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영광에서 광양까지의 2500km, 6000리 구간에 탐방로를 내놓고 남도갯길 6000란 이름을 붙였다. 이 길에 포함되는 지역은 영광, 함평, 무안, 목포, 진도, 해남, 완도, 강진, 장흥, 보성, 고흥, 순천, 여수, 광양 총 14개 시군으로 우리나라 전체 갯벌의 44%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한 곳이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을 따라 발달한 남도 갯길은 겨울에도 풍부한 먹을거리를 자랑한다. 눈과 입이 함께 즐거울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수려한 경관과 희귀 동식물, 문화, 역사, 맛집 등을 걸으면서 느끼도록 설정된 도보 탐방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통나무 계단을 깔아놓은 산길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잠시 후 커다란 바위 옆을 지나자 산길은 능선에 올라선다. 이정표는 없으나 공산은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오솔길은 아까 수협 앞에서 오른편으로 갈려나갔던 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이 길손을 맞는다.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을 맴 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가득 고인다. 좋다. 아무래도 오늘은 행복한 산행이 될 것 같다.



능선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기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윗부분이 둥글고 반질반질하게 생긴 것이 스님의 머리를 빼다 닮았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스님바위’, 거기다 금당팔경(金塘八景)의 세 번째 자리에다 그 이름을 떡하니 올려놓았다. 이곳 금당도를 세상에 알린 것은 물론 위세직의 금당별곡(金塘別曲)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또 다른 여덟 곳 비경을 금당팔경(金塘八景)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금당도의 37km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기암괴석들인데, 파도와 비바람에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형상들이 하나같이 신비롭다면서 말이다. 아무튼 저 스님바위에다 병풍바위와 부채바위, 교암청풍, 연산호 군락지, 초가바위, 코끼리바위, 남근바위 등을 합쳐 금당팔경(金塘八景)이라 부르니 참조한다.



8분 후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공산(孔山)’이 얼굴을 내민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바위봉우리가 오르기도 전부터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위험스러워 보인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저 봉우리는 위세적이 거론했던 금당팔경(金塘八景) 가운데 제1경이다. 둥근 보름달이 공산 위에 걸치면서 사방이 달빛으로 가득한데 그 아래서 유림들이 도를 닦는다는 공산제월(孔山霽月)’이 바로 저곳인 것이다.



원시의 밀림을 방불케 하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5분 정도 더 걷자 차우고개가 나온다. 차우마을과 선착장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차우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도로로 내려섰다가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 이 구간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공산 가는 길/ 바닷가 가는 길)을 만난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금당팔경 가운데 하나인 부채바위와 병풍바위를 만날 수 있다는 해안산책로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참고로 차우리1640년 조선시대 인조 때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다고 한다. ‘진주 강씨가 고흥에서 처음으로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한 곳으로 마을 뒷산인 공산을 수리(독수리)가 넘어 왔다고 해서 '수리 넘어'로 불러오다가 언제부턴가 차우리(車牛里)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고쳐진 이유를 그 독수리가 다시 공산을 타고 넘어갔다는 데서 찾는 사람들도 있으나 나에겐 공허하게만 들린다. 한자음에 어울리는 접점을 찾을 수 없어서이다.




키 작은 소나무들이 늘어선 능선을 지난다. 왼편에 차우마을과 오른편에 오동도와 연홍도, 그 너머 육지를 닮은 거금도를 양 옆구리에 끼고 걷는 기분 좋은 산길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걷자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되면서 공산으로 오르는 바윗길이 나타난다. 멀리서 봤을 때는 우락부락한 바위산이었는데 막상 이르고 보니 생각보다는 순한 것 같다. 그저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고생할 일만 걱정하면 될 것 같다.



공산으로 오르는 길은 멀고도 멀다. 거기다 가파르기까지 하다.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하긴 이렇게 멋지고 웅장한 산이 그 귀한 몸을 어찌 쉽게 허락하겠는가. 이런 곳에서는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다. 길가에 매어놓은 밧줄난간에 의지해서 최대한으로 느릿느릿 오르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도 힘들다면 잠시 쉬어가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좌우로 펼쳐지는 섬 풍경들이 그 힘듦을 반감시켜줄 것이다.



숨이 턱에 찰 즈음에야 겨우 정상(138m)에 올라선다. 차우고개에서 18, 면사무소에서 산행을 시작한지는 31분이 지났다. 바위로 이루어진 공산의 정상은 비좁기 짝이 없는데, 정상표지석은 바위봉우리의 맨 꼭대기에다 올려놓았다. 그러다보니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끼리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이런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다들 행복한 표정들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주변 풍광들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거칠 것이 없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차우리를 가운데에 놓고 양쪽으로 바다가 펼쳐지는데, 그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수도 없이 떠있다. 솔섬과 대·소납다지, ··소화도 등 금당도의 섬들은 물론이고, 오른편으로는 오동도와 연홍도, 거금도 등 고흥군에 속하는 섬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조망을 실컷 즐겼다면 이젠 금당산으로 가야 할 차례이다. 올라왔던 반대편에 매어진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서면 될 일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바윗길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능선의 폭이 넓은데다 경사까지 완만하니 말이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될 따름이라는 얘기이다. 그저 좌우로 펼쳐지는 시원스런 조망을 즐기면서 느긋하면 걸으면 될 일이다.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금당산이 고개를 내민다. 한쪽 면을 떼어낸 채 위태롭게 서 있는 형상이다. 그 떨어진 곳을 바다에서 보면 부채바위처럼 펼쳐진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자 금당면사무소로 연결된다는 길 하나가 오른쪽으로 나뉜다. 물론 공산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놓은 이정표(쟁그랑산0.5Km/ 금당면사무소1.5Km/ 공산1Km)가 눈길을 끈다. ‘쟁그랑산이라는 뜬금없는 지명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금당산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쉼터를 지나자마자 이정표(가학산4.0Km/ 병풍바위 해변0.2Km/ 공산1.2Km)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오른편 갈림길로 진행할 경우 병풍바위 해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병풍바위라면 금당팔경(金塘八景)의 제1경이 분명할진데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200m만 가면 된다는데 말이다. 냉큼 들어서고 본다.





오른편으로 들어서서 3~4분쯤 진행하자 거대한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수백 길의 해안절벽이 널따랗게 펼쳐지는 것이다. 동릉을 타고 오는 길에 눈길을 끌던 그 거대한 바위 벼랑이 금당팔경(金塘八景)의 제1경인 병풍바위였던 것이다. 아니 이쪽 방향에 있다는 부채바위일지도 모르겠다. 부챗살을 활짝 펼쳐놓은 것 같이 생겼다는 새로운 금당팔경(金塘八景) 가운데 제2경이라는 그 부채바위 말이다. 아무튼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라는데, 아쉽게도 아래에서 올려다보거나 옆모습만 눈에 담을 수 있을 따름이다. 배를 탔을 때에나 전체적인 형상을 감상할 수가 있단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금당산으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 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그렇게 10분 남짓 오르면 능선은 분지처럼 널따랗게 변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금당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공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45분만이다.



서너 평 남짓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작은 바윗덩어리 몇 개가 널브러져 있어 어수선한 풍경이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은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다 세워놓았다. 금당산은 복개산이란 다른 이름이 있는가 하면 쟁그랑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름이 많다는 건 그만큼 사연도 많다는 얘기가 된다. 예전에 쟁그랑산 꼭대기에 바위 못이 있었는데 어느 스님이 복개를 띄웠더니 바람에 부딪혀 쟁그랑거렸다는 설화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단다. 그렇다고 못을 찾아보는 우()는 범하지 말자. 얘기는 얘기일 따름이니까 말이다. 다만 돌맹이 하나를 집어 들어 바위에 떨어뜨려보는 것쯤은 괜찮다. 재수 좋으면 쟁그랑산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쇳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주변이 잡목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것까지는 없다. 조금만 더 북쪽으로 나아가면 된다. 시야가 툭 트이면서 삼랑산과 오봉산으로 이어지는 섬 서쪽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온통 바위투성이로 이루어진 험상궂은 암릉이다.



하산은 육동마을 방향이다. 주능선은 북쪽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산길이 희미한데다 거칠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그저 10시 방향, 아니 삼산저수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얼마간 내려갔을까 산길이 왼편으로 크게 휘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길이 제법 또렷하게 나있어 진행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잠시 후 능선에 케언(cairn) 몇 기가 나타난다. 아까 금당산으로 오를 때도 만났었는데 그것 보다는 훨씬 더 규모 있게 쌓아올렸다. 바라는 바가 그만큼 간절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돌맹이 하나을 올려놓는 게 보인다. 장난기가 발동했는가 보다. 평소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던 돌탑에 관심을 표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니 눈앞에 펼쳐지는 바윗길에 오금이 저렸을 수도 있겠다. 그걸 잊기 위한 바람의 돌 하나쯤 올려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능선은 왼편으로 활처럼 휘어진다. 그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외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잘 생긴 암릉도 나타난다. 잘게 부서지는 바위들은 큰 너럭바위를 만들어 놓기도 하고, 고래등 같은 바위도 보여준다. 바위 이름이야 다 있겠지만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바위들이 웅장하지는 않지만 금당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어선지 신선함을 준다. 시야(視野)를 막는 것이 없으니 조망 또한 거칠 것이 없다. 한마디로 멋진 산길이라 하겠다.



그렇게 한참을 진행하던 산길이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 가파름이 자칫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탐방로 주변의 잡목들을 제거한 것으로도 모자라 길게 밧줄까지 매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상수도용으로 보이는 물탱크를 만난다. 금당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40분만이다.



물탱크를 지났다싶으면 탐방로는 도로를 따르게 된다.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나지만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첫 번째로 만나는 시멘트포장 도로에서는 왼편의 육동마을 방향이다. 곧이어 만나게 되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에서는 오른편 가학리방향이다. 이어서 10분 남짓 더 걸으면 도로가 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도로표지판(신흥리/ 가학항)을 참조하면 된다. 오른편 가학항으로 진행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이후부터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가학재에 올라선다. 절개지 꼭대기에 외롭게 서있는 소나무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갯마루이다. 가학재는 개기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고개 너머에 있는 개기마을(開基里)’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개기리란 금당도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말이다. 이후 마을의 전체적인 형세가 학() 모양으로 생겼다는 것과 그 학이 멍애 를 넘었다 해서 멍넘어라고 불리어 오다가 한자명으로 고치면서 가학리(駕鶴里)로 변했는데, 이에 따라 고개 이름도 가학재로 변했다. 물탱크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지루했던 구간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고갯마루의 맨 꼭대기에서 왼쪽으로 열린다. 초입에 이정표(오봉산2.5Km/ 가학산0.5Km/ 옥동마을1.5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서쪽 능선, 서릉(西陵)’을 따른다. 섬 북쪽 가학리와 육동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인 개기재에서 남쪽 봉자산까지 길게 뻗어 있다. 거리는 약 4.5km로 삼랑산, 오봉산, 봉자산을 넘는 기복이 심한 코스다. 대신 금당도 서쪽과 남쪽의 수려한 풍광이 계속해서 조망되는 등 눈이 한껏 호사를 누리게 되는 멋진 구간이다. 아무튼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임도처럼 넓다. 방화선으로 닦아놓았지 않나 싶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221m’봉에 올라선다. 잠시 후에 걷게 될 능선과 그 오른편에 있는 송아지목이라는 작은 섬이 조망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다. 그러다보니 정상표지석이 세워졌을 리가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돌맹이 몇 개를 모아놓고 그중 하나에다 금당도 221m이라고 적어놓았을 따름이다.



221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거칠어진다. 수풀에 가시덤불이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안부를 지나 바위지대가 시작되면서 고생은 끝이다. 능선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거의 없어 상쾌하고 시원하다. 그저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물론 경사는 좀 가팔라졌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에 취하다보면 그까짓 정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 다만 햇볕을 가려줄 그늘이 없다는 게 흠일 수도 있겠다.





금당도의 두 항구 가운데 하나인 가학항과 그 앞에 떠있는 도각도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양식장으로 가득한 섬 서쪽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재도, 질마도, 황도 등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수묵화 같은 풍광이 감동적이다. 그 뒤를 감싸고 있는 조약도와 금일도의 넉넉한 모습도 아름답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길죽하게 생긴 질마도가 아닐까 싶다. 무인도(無人島) 임에도 불구하고 우물이 있다고 해서 한때 부동산개발업자들의 타깃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금당 33가운데 하나로 꼽혀있으니 경관이 고움은 물론이다. 현재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몽골텐트 등의 임시시설을 지어놓고 회사 휴양지로 사용하고 있단다. 관광지로 개발하려 했으나 허가 절차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푸른 바다 위에 마치 구슬을 뿌린 듯 크고 작은 섬들이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을 이룬다. 바다 경치가 일품이다. 그래서 완도의 완()'빙그레 웃을 완' 자인지도 모르겠다. 완도에선 경치에 웃고, 맛에 웃고, 인심에 한 번 더 웃는다니 말이다. 이쯤에서 아재 개그하나쯤 하고 넘어가보자. 금당도는 한때 부자섬으로 불렸다고 한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海苔) 값이 금값이었을 때는 김의 수확, 가공작업을 하느라 바빠서 대변을 보고 뒷처리로 흘러넘치는 지폐 다발을 사용하면 부근을 어슬렁거리던 똥개들이 돈을 입에 물고 다녔단다.



암릉이 계속되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잡목이 우거진 숲길로 바뀌어버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당도에서 가장 높은 삼랑산(219.8m)에 올라선다. 가학재를 출발한지 45분만이다. 작은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는 정상은 아까 지나왔던 금당산과 비슷한 풍경를 보여준다.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을 세워놓은 것 또한 같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정상석의 앞에다 삼각점(거금 21)을 설치해 놓았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금당도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산릉들이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넓게 펼쳐진다. 이를 감싸고 있는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금당도의 본모습이 아닐까 싶다. 정면으로는 진행할 봉우리들이 늘어선 뒤로 하늘과 맞닿은 능선이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이 바다에 수를 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건 서쪽 바다 건너로 보이는 남도의 명산들이 아닐까 싶다. 장흥 천관산에서 해남 두륜산과 달마산, 완도 상황봉으로 이어지는 수려한 하늘금이 매혹적이다.




오봉산으로 향한다. 바윗길을 짧게 내려섰다가 반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바위봉우리인 ‘199m이다. 탐방로는 봉우리의 꼭짓점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한다. 그렇다고 이를 따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조망이 뛰어난 곳이니 꼭 올라가 보라는 얘기이다. 그것도 2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이니 말이다.



정상에 서면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한 너른 들녘이 내려다보인다. 간척공사로 인해 생겨난 농토, 즉 간척지(干拓地)일 것이다. 간척지가 생겼지만 여전히 바다는 금당도의 핵심이다. 누군가는 금당도 앞바다를 일러 여객선이 오가는 뱃길만 빼고 모두가 양식장이라고 했다. 미역, 다시마, 톳 어장이 광활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널따란 바다는 온통 양식시설임을 알리는 부표들로 덮여있다. 이곳 금당도가 동쪽의 고흥반도와 서쪽의 장흥반도 사이에 있는 탓에, 항상 파도가 잔잔하고 수온이 적당한 천혜의 어장이기 때문이란다. 집집마다 선외기(船外機) 한두 척은 부리고 있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금당도에는 육산리 외에도 차우리와 가학리 등 3개의 리에 크고 작은 마을 6개가 있으며 두 개의 항구가 있다. 동남쪽의 비견도를 바라보는 울포항과 북서쪽의 가학항이 바로 그것이다.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15분쯤 내려서면 안부 삼거리에 내려선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삼산마을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오봉산으로 가려면 곧장 능선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거기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꽤나 힘이 드는 구간이다. 아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이곳까지 오느라 체력이 고갈된 데다 때 이른 더위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오르면 드디어 오봉산(178m)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잡목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자산 방향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시야가 열린다. 진행방향에 우뚝 솟아오른 봉자산은 물론이고 금당도 남쪽 바다와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마디로 고운 풍경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바위손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정상 어림의 바위지대를 지나면 산길은 숲속을 파고들며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부담을 느낀 지자체에서 밧줄을 매어놓았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못하겠다. 매어놓은 위치가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닥에 깔려있어서 붙잡기가 마땅찮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세추목재

그렇게 16분 정도를 내려서면 깔끔하게 지어진 정자가 나오고, 곧이어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세추목재이다. 이왕에 온 김에 봉자산(188.6m)까지 올라가보라며 세워놓은 이정표(봉자산, 막끝/ 오봉산, 삼랑산, 금당산) 앞에서 넘어갈까 말까로 고민이 시작된다. 섬 여행은 항상 시간에 쫓긴다. 울포항까지 나가는 시간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그럴 필요가 없다. 아직도 3시간 정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택시를 부른다. 이미 지쳐버린 집사람의 얼굴표정이 그렇게 하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점심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실제로는 4시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아담한 섬 금당도는 곳곳에서 섬들이 수놓은 다도해의 풍경이 아스라이 내보인다. 그러나 금당도의 진짜 비경을 만나려면 역시 바다로 나가야 한다. 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다보면 여느 섬에서 볼 수 없는 장관이 바다에 떠있다.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에 씻기고 바닷바람에 깎인 해안절벽들이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병풍바위와 부채바위, 스님바위, 교암청풍, 금당절벽, 초가바위, 코끼리바위, 남근바위 등 섬 주민이 자랑하는 금당도 8경이 그 해안절벽에서 나왔으니, 그 천하의 절경을 어찌 감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금당팔경을 돌아보고 싶다면 고흥의 녹동항으로 가라는 것이다. 고흥군에서 시티 투어버스에다 금당팔경 유람선코스를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남의 관할에 있는 명승을 무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해서라도 절경을 구경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완도군에서는 그런 프로그램을 개발할 생각이 아직까지 없으니 말이다. 물론 금당도에 도착해서 유람선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10인 정원의 배를 이용하는 요금으로 20만원을 물어야하니 부담이 만만찮다. 거기다 정원을 못 채울 경우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차액까지 부담해야 한다.


초도(草島)

 

여행일 : ‘18. 3. 27()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초도리

트리킹 코스 : 대동선착장순환도로 일주정강재남서릉상산봉(339m)정자바람재북릉대동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에서 서남쪽으로 67, 거문도에서 북쪽으로 25지점에 위치한 면적 7.72의 작은 섬이자, 초도군도의 중심 섬이다. 예로부터 풀과 바닷새가 많다 하여 초도(草島) 또는 조도(鳥島)라고 불리어왔다. 중앙에 위치한 상산봉(上山峰, 339m)은 기복이 비교적 큰 산이지만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해안은 돌출한 갑()과 깊숙한 만()이 교대하며 이어진다. 이런 여건으로 인해 섬을 빙 둘러싸고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탐방로도 단순한 편이다. 최고봉인 상산봉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내놓은 일주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 트레킹코스와 정강재에서 올라 바람재로 내려오는 산행코스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초도 트레킹의 백미(白眉)는 상산봉 정상에서 즐기는 조망이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자체도 아름답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 경관이 빼어나다.


 

찾아오는 방법

초도로 들어오는 방법은 손죽도나 거문도와 같다고 보면 된다. 여수에서 출발하는 쾌속선이 거문도까지 들어가는데 이 배가 외나로도와 손죽도에 이어 초도에서 기항(寄航)하기 때문이다. 손죽도를 떠나 30분 정도를 달리니 초도(대동)항의 길게 이어진 방파제가 쾌속선을 맞는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방파제에는 쌍등이 있다. 가운데 방파제는 일자형으로 바다 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오른쪽은 노랑등대다. 배는 하얀등대와 빨간등대 사이의 뱃길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스며든다. 선착장에 내리면 상산봉과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대동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포근한 모양새를 갖췄다. 그래선지 이곳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살아간단다. 식량의 자급률이 높다는 것이다. 바다도 풍성한 편이란다. 인근 해역이 물살이 세지 않고 영양분이 많아 전복과 꾸죽(뿔소라), 홍합 등이 잘 자라며 미역과 가사리, , 돌김 같은 해조류와 배말, 성게 등 자연산 건강식들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특히 초도 홍합은 해녀들이 잠수해 채취하는데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하며 그 맛 역시 양식 홍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단다.




대동마을 포구는 그 크기만큼이나 물양장(物揚場)도 넓다. 웬만한 운동장도 이보다는 덜할 것 같다. 거기다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다. 웬만큼 큰 행사를 치른다고 해도 터가 부족할 일은 없겠다. ! 그러고 보니 이곳 초도에서 자연산 홍합을 비롯한 패류와 해조류 등 해산물을 테마(thema)로 한 섬마을 웰빙축제를 연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8년쯤 전의 기사인데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영등철 사리에 맞춰 바닷물이 갈라지는 3월에 연다고 했는데, 올해도 열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섬마을 축제를 여는 데는 이만한 장소도 없겠다. 참고로 대동마을은 구미, 읍동, 읍포, 큰마을 등으로 불리어왔다. 조선시대 말엽인 1896년에 신설되었던 돌산군(突山郡) 삼산면 시절에는 구미리라고 불렀다는데 이 시절에 편찬된 여산지(廬山志 : 1899년 돌산군수 서병수가 편찬한 읍지)’에서는 '읍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에 큰 마을이라는 의미를 한자말로 바꿔 부른 게 대동마을이라는 것이다. 마을 앞에 버티고 있는 깨끗하고 현대화된 복지회관과 어민회관이 이 마을이 초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것 같다.



배에서 내리니 민박집에서 보내준 트럭이 기다리고 있다. 배낭을 옮겨다준다는 것이다. 숙소가 마을이 아니었던 게 미안했던가 보다. 하긴 숙소가 건너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아무튼 오늘 저녁에 머무를 곳은 두산민박(전화 : 010-3566-6346)이다. 여행을 좋아하던 주인장 김성균씨가 초도에 여행 왔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주저앉게 되었단다. 당시 눈여겨 봐두었던 두산건설의 현장사무소 건물을 매입해서 민박집을 열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다른 민박집을 구해 머물렀으니 시설의 상태는 모르겠지만, 음식 하나만은 마음에 쏙 들었다. 가짓수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정갈스러우면서도 맛깔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긴 섬에서 직접 채취한 재료를 육지의 기법으로 만들어냈으니 어찌 맛이 있지 않았겠는가. 이는 여행을 같이 한 일행들 모두의 의견이었음을 첨언해 둔다.



짐을 풀자마자 트레킹에 나선다. 초도여행의 시작점은 쾌속선이 들고나는 대동마을이다. 초도에는 크게 대동리·의성리·진막리 등 세 개의 부락이 있는데 대동리에서 시작하는 일주도로가 이들 부락을 모두 아우른다. 섬 최고봉인 상산봉을 한가운데 놓고 빙 둘러서 내놓은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돈다고 보면 되겠다. 거리는 대략 7Km 내외, 2시간 정도가 걸린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초도중학교이다. 1967년에 문을 열었다니 벌써 50년도 더 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있다. 작년에 문을 닫았단다. 기껏해야 1년뿐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운동장에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인적이 끊겨버린 채 거문중학교장 명의의 서슬 시퍼런 경고판만 세워져 있을 따름이다. 전남교육감 소유의 시설물이니 무단사용하지 말란다. 아무튼 이곳도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점점 공도화(空島化) 되어가는 요즘의 추세를 말이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아픔은 요 아래에도 있다. ‘초도초등학교도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란다. 1937년에 문을 열었다니 중학교보다도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도 세월의 추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80년 영욕(榮辱)의 세월이 이젠 옛 이야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한때는 같은 섬에 있는 의성분교와 진막분교 외에도 손죽분교와 광도분교, 평도분교, 소거문도분교 등의 분교들을 거느리기도 했다는데 말이다.



20분 정도 걸었을까 바람재(이정표 : 의성마을1.5Km/ 상산봉1.5Km/ 대동마을1.0Km)가 나온다. 의성마을과 대동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인데, 상산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과 이곳에서 연결되니 유념해 두자. 참고로 바람재는 섬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바람으로 인해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샛바람이 불면 파도가 크게 일어 고기잡이뿐만 아니라 김, 미역, 톳 등을 따는 갯것도 힘들어 진다. 그 샛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바람재성()’이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대동마을은 겨울에도 항상 따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성마을 사람들은 대동 마을 사람들이 대동의 복()이 의성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람재성()’을 쌓았다고 믿고 있단다. 두 마을 사이에 갈등이 심했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삭막한 편이다. 바닷가 풍경은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날 뿐이고, 그마저도 나무숲에 가려 반의 반쪽으로 줄어들었다. 반대방향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산자락만이 계속해서 나타날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걷고 있는 지금이 이른 봄철이라는 점이다. 만일 여름철에라도 찾아왔다면 오뉴월 땡볕에 고생깨나 했겠다. 그늘을 만들어줄 가로수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남짓을 더 걷자 왼편 바닷가에 들어앉은 작은 포구(浦口)가 나타난다. 아까 바람재에서 거론했던 의성마을이다. ‘본동경촌이라는 두 개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원래는 이성(利成)’ 또는 '이성금(利成金)'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마을 공동묘지 부근의 '솜널이'란 지역의 바위 부근에서 철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914년 여수군으로 이관되면서 의성리라 부르게 되었단다. 마을로 내려가 볼까를 놓고 고민하다가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약속된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대신하여 마을 앞 바닷가에 세워진 석조기념비에 대한 사연을 옮겨본다. 1882년에 삼산면(초도,거문도, 손죽도)사람들 115명이 낡은 돛단배를 타고 바람과 해류를 이용해 울릉도까지 가서 생활하다가 새로운 배를 만들어 타고 귀환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울릉군지(2007.2.28.발행)’에도 나와 있는 사실인데, 주민들은 이 일을 목숨을 걸고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여 영토를 확보한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진막마을에 이르기 조금 전에 왼편으로 자그만 섬 하나가 나타난다. 아마 초도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목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섬은 돈키호테바위일 게고 말이다. 목섬까지의 거리는 200m, 한 달에 아홉 번 폭이 7~80m 정도로 물이 갈라지면서 '신비의 바닷길'을 연다고 한다. 이때 바닥이 드러나면서 멍게와 해삼, 전복, 소라 등의 다양한 해산물을 잡을 수 있단다. 싱싱한 갯것체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바닷가로 내려가는 건 사양하기로 한다. 물이 차있는 지금에야 그저 그렇고 그런 섬 가운데 하나일 따름일 테니까 말이다.



의성마을에서 3Km 남짓 더 걸으면 진막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진을 쳐 '진막(陣幕)'이라 불렀다는 마을인데 앞바다에 있는 안목섬으로 더 유명하다. 사리 때면 걸어서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바닷물이 갈라진 틈에서 웰빙해산물을 맘껏 채취할 수 있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마을 인근에 있는 몽돌찜질로 유명한 대풍해수욕장도 가족단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한다. 파랑에너지가 집중되는 헤드랜드(hedland)나 암석해안 주변의 만입부에 형성되는 자갈해안(pebble or shingle beach)의 일종인데,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몽돌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자갈의 크기가 콩돌보다는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 중간에 정강마을을 지나왔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초도에 있는 두 개의 해수욕장 중 나머지 하나가 있는 마을인데, 은빛모래와 깨끗한 바닷물이 자랑인 해수욕장이다.



오른편에 내연발전소가 보였다 싶으면 일주도로 트레킹은 끝난다. 웬만한 섬들은 육지에서 전기를 끌어오는데, 이곳 초도는 그게 어려웠던가 보다. 아니 손죽도에서도 얘기했지만 직접 발전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어서 일수도 있다.



둘째 날이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상산봉 산행에 나선다. 산행의 들머리는 정강재, 3Km 내외의 거리가 부담스러울 거라며 민박집 주인장께서 트럭으로 들머리까지 실어다 준다. 고마운 일이다. 그 덕분에 시간이 남아돌아 북릉까지 산행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들머리에는 이정표(의성마을1.6Km/ 상산봉1.5Km/ 진막마을1.6Km, 정강해수욕장 0.8Km)가 세워져 있다. 걸어서 왔더라도 들머리를 못 찾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철근을 엮어 만든 문이 나타난다. 문의 양 옆으로는 울타리가 처져있다. 어설프긴 하지만 뭔가의 통행을 막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문들은 산행 중에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상산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통나무계단이 놓여있어 오르는 데는 부담이 별로 없다. 아니 푸름에 겨운 주변 풍경에 도취하다보면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누군가 이곳 초도를 온화한 해양성기후라고 하더니 맞는 모양이다. 그는 이곳에 난대림이 자생하며, 또한 아열대성식물이 자생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에도 울타리를 치고 길에는 문()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소유주(所有主) 간의 경계를 나누는 울타리가 아닐까 싶다. 유해동물이 민가로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했다면 이런 능선에까지 울타리를 칠 이유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누군가 이곳 초도의 풍경을 적으면서 섬 곳곳에서는 소들이 드러누워 방목을 즐긴다.’고 했었는데 놓아먹이는 소들이 남의 땅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쳐놓았을 지도 모르겠다.



능선에 올라선 산길은 그 경사를 확 떨어뜨린다. 대신 커다란 바위들이 그 빈도(頻度)를 높여간다. 또 다른 특징은 주변이 온통 동백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때를 맞춰 찾아왔는지 나무들마다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동백나무는 12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 꽃을 피운다. 지금이 3월이니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적기에 찾아온 셈이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묵객이라면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란 이미지도 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새색시의 붉은 볼처럼 고운 꽃들만 눈에 차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가끔가다 커다란 바위들도 만난다. 놓치지 말고 꼭 올라가 볼 일이다. 하나 같이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초도는 육지와의 거리 때문에 외해성(外海性) 환경에 속한다. 이런 섬들에서는 파랑에 의한 침식작용이 강하기 때문에, 경사가 급한 암석해안이나 해식애, 해식동의 발달이 탁월하여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편이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정강마을의 해안인데, 그게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뒤에 보이는 섬은 바다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는 납대기섬일 것이다. 또 다른 낚시터인 밖목섬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꽃에 눈을 맞추다보면 어느덧 망금산에 이른다. 능선에 올라선지 5분만이다. 망금산은 산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면서도 밋밋한 바위봉우리이다. 그러다보니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리가 없다. 이정표도 물론 없다. 그러나 그 자태만은 빼어나다. 흐드러지게 핀 동백 꽃밭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형상이 귀엽기까지 한 것이다. 조망 또한 뛰어나다.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 외에도 이번에는 의성마을 포구까지 시야에 잡힌다.




상산봉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동백나무 숲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그 개체수를 많이 줄였다. 대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상산봉의 정상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산길이 가팔라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암릉 위로 올라서게 된다.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하는 곳이다. 또한 바다에 널린 수많은 섬들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어 포토죤(photo zone)으로도 사랑을 받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앞서 오른 일행들이 자리를 비워줄 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금이라도 더 예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절벽 옆으로 수평선이 보인다. 군데군데 이빨처럼 솟은 작은 섬들이 앙증맞다. 파도에 몸을 맡긴 채로 둥둥 떠 있는 섬. 외롭다. 섬은 외로움이다. 섬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바다를 지킨다. 그리고 나 같은 떠돌이 여행자들이 그 섬에 찾아든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떠있다. 초도를 한가운데에 두고 사방으로 널려있는 형상이다. 초도군도(草島群島)란다. 원도(圓島)와 장도(長島), 중결도(中結島), 대마도(大馬島), 용도(龍島)와 안목섬, 밖목섬, 둥글섬, 납대기섬, 술대섬, 취섬, 솔거섬 등 이름도 예쁜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의성마을 포구도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온다. 둥글게 감싸고 있는 포구에 평화롭게 들어앉은 마을 풍경이 오래오래 눈길을 붙잡는다. 그 오른편 끄트머리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섬은 솔거섬일 것이다. 왕볼락과 참돔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조망을 즐겼다면 이젠 정상으로 오를 차례이다. 바위에 기대여 설치한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상산봉이다. 정상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에다 전망데크를 만들고 아담한 정상표지석을 세웠다. 조금 좁기는 하지만 서로 간에 양보만 한다면 기념사진 찍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또 다른 바위에도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번엔 자연석에다 이름을 새겼다.



가슴에 별이 진 사람 초도로 가라로 시작되는 김진수 시인의 초도에 가면라는 시가 적혀있는 시판(詩板)도 보인다. ‘여수 참여연대라고 적어놓은 걸 보면, 요즘 직책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여수지부장자리보다 시민운동가라는 직책이 더 좋았던가 보다. 아무튼 그는 소바탕길로 상산봉에 오르면 낮고 낮은 햇살에도 퍼덕이는 금비늘을 볼 수 있다고 노래했다. 시선을 돌려본다. 바람이 이는 바다에 햇살이 쏟아지자 놀란 물결이 금비늘을 퍼덕이고 있다. 시인의 눈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금새 알아차린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상산봉이란 남해 일원의 여러 산 중 최상급에 속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이름에 걸맞는 조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선 북쪽의 예미로부터 대동마을과 남동쪽의 의성마을과 남서쪽의 진막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오고 안목섬과 밖목섬의 바닷길이 갈라지는 현상도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있다. 멀리 눈을 돌리면 삼산면에 속한 손죽도와 거문도, 백도가 짙푸른 바다와 함께 눈에 차오른다. 다른 이들은 청산도와 생일도, 거금도, 외나로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오늘 같이 시계가 좋은 날에도 확인이 안 된다면 내 눈이 나쁜 건가?



조금 전에 보았던 올망졸망한 섬들이 다시 한 번 나타난다. 하나같이 정겨운 이름을 갖고 있는 섬들이다. ‘둥글섬은 둥글게 생겼다 하여, ‘진대섬은 길다 해서, ‘구멍섬은 섬에 구멍이 나 있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일행 중 누군가 카프리섬에 온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아니 나도 그 섬에 가보았지만 내가 보았던 카프리섬보다 몇 배나 더 빼어났다. 카프리섬에서는 저렇게 고운 섬들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젠 산을 내려갈 때다. 발길을 돌리니 아까 올라올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맞은편 바위봉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그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다풍경이 더 눈길을 끌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해무(海霧)에 잠겨있는 섬들이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손죽도에서 보았던 삼각산 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저런 아름다운 경관을 보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정상 바로 아래의 이정표(대동마을2.5Km/ 정강해수욕장2.3Km/ 상산봉 정상)가 가리키고 있는 대동마을 방향으로 향한다. 쉽게 말해 바람재로 내려가는 능선을 탄다고 보면 된다. 능선길은 휘파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널찍하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광을 가슴에 담으며 내려서다보면 몸과 마음은 한껏 편안해진다.



고개를 돌리니 상산봉 정상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걸 보면, 아름다운 풍광에 반한 이들이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는 극한의 기쁨은 슬픔과 경계가 없다고 했다. 몰래 눈물 한 방울 톡 떨어뜨린 나 또한 그런 심정이었을 게다.



10분 정도를 내려오자 팔각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고운 잔디가 심어져 있는 주변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제부터 길은 엄청나게 넓어진다.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하겠다. 5분쯤 지나자 또 다른 정자를 만난다. 이번에는 동남아에서나 볼 수 있는 지붕을 씌워놓았다. 이곳도 역시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판석을 깔아놓았을 정도로 잘 정비된 길을 따라 15분 조금 못되게 걷자 바람재가 나온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30분 만이다. ‘바람재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계속해서 북릉을 탈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산행을 접을 것인가를 놓고서이다. 결론은 뻔했다. 점심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는데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어제 시간제약 때문에 꾹 참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바람재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의성과 대동 마을 사이에 갈등을 빚게 만들었던 바람재성()’이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성터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두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 즉 지금 내가 서있는 일주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단다. 제주(祭酒)와 제사 음식을 만들기 위한 물을 공급해주던 큰달샘(참샘)’도 저수지 공사로 없어져 버렸단다.



반대편 능선으로 향한다. 도로를 건넌 다음 대동마을 방향으로 몇 걸음만 내려가면 들머리가 나온다. 임도로 되어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도의 초입은 철문으로 막혀있다. 이번에는 아예 쇠사슬로 묶어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린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선다. 북릉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임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어찌 그냥 돌아설 수 있겠는가.



잠시 후 능선으로 올라선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밋밋한 능선이다. 거기다 펑퍼짐하게 퍼져있다 보니 조망도 별로이다. 그저 어쩌다 한 번씩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주변의 섬들과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정금나무의 붉은 열매가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하지만 등산로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이기도 한다. 길가에 동백나무를 새로 심어 놓은 걸 보면 말이다.



길을 걷다가 오른편 나무숲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풍경에 발길이 멈춰진다. 초도 주변으로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있는 것이다. 아까 정상에서 거론했던 정겨운 이름의 섬들, 즉 둥글섬과 진대섬, 구멍섬일 것이다. 또 다른 섬들은 솔대섬과 취섬이 분명하다.



반대편으로는 아까 올랐던 상산봉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완만한 구릉(丘陵) 모양으로 생겼다. 저래서 이곳 초도가 물이 많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다. 하긴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논농사까지 지었었고, 내연발전소가 들어오기 전에는 진막마을에 시간당 80kw를 생산하는 자그마한 수력발전소까지 있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주변에는 드릅나무들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채취는 금물이다. 민박집 주인장의 말로는 산주인들이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능선은 또 칡넝쿨들이 지천이다. 일부러 심어놓은 동백나무들이 몸살을 앓고 있을 정도이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일행 한 분이 간간히 넝쿨을 걷어내면서 걷고 계신다. 일흔을 넘기신 분의 모습이 보기 좋아 따라 해볼까 하다가 아서라로 마무리 짓고 만다.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귀찮은 넝쿨식물에 불과하지만,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 줄기, , 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갈근(葛根)이라 불리는 칡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전분을 공급하는 대용식이었으며, 갈근탕을 비롯한 여러 탕제(湯劑)에 쓰였고 질긴 껍질을 가진 줄기는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칡꽃(葛花)에 대한 효능도 적고 있다. ‘칡꽃(갈화)과 소두화(팥꽃)를 같은 양으로 가루를 내어 먹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줄 모른단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효능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4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북릉의 끝자락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하산을 시작하다보면 오른편에 예미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예미마을과 대동마을을 잇는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상산봉 종주산행이 끝난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상산봉 정상에서 30분 정도를 놀았으니 2시간30분이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나로도(고흥군 봉래면)에 있는 우주과학관에 들렀다. 거문도로 들어가지를 못한 여객선이 그냥 나로도로 귀항해버려 도착시간이 1시간 반이나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기상악화가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나보다. ‘나로우주 센터는 우리나라의 우주개발 현황과 우주의 비밀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대한민국이 자체 기술로 인공위성을 우주 공간으로 쏘아 올리기 위해 건설한 최초의 우주발사체 발사기지이다. 이곳에 있는 우주 과학관에는 다양한 첨단 과학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우주과학에 관한 기본원리, 로켓, 인공위성, 우주탐사 등을 주제로 한 작동 체험 전시품 32종을 포함한 90여 종의 전시품이 있다. 이곳에는 우주개발 4D영상관, 야외 로켓전시장, 정보 검색관, 별자리관측 체험관, 로켓발사 체험관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우주 과학 관련 교육 및 체험 학습이 가능하다. 또한, 야외 전시장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사한 우주 발사체인 나로호의 실물 크기만 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섬에다 조성하다보니 한쪽 면은 바다와 연결된다. 자잘한 몽돌들이 깔려있는 너른 바닷가는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여름철에는 해수욕장으로도 한몫을 톡톡히 수행할 것 같다. 납작한 몽돌이 찜질용으로 사용해도 충분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