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대산(德垈山, 573m)-금적산(金積山, 652m)
산행일 : ‘16. 11. 12(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수한면과 안내면, 삼승면의 경계
산행코스 : 문티재→전망대→덕대산→금능김씨묘→안부사거리→삼면봉→금적산→전망바위→원남리→삼승면사무소(산행시간 : 3시간 50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보은군에는 ‘보은 삼산(三山)’이라 불리는 세 개의 명산(名山)이 있다. ‘지아비 산(夫山)’이라 불리는 속리산(천왕봉)과 ‘지어미 산(婦山)’인 구병산, 그리고 그 둘을 부모로 둔 ‘아들 산(子山)’인 ‘금적산’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이라는 설정에 어울리지 않게 금적산의 지닌바 산세(山勢)는 완전히 딴판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로 이루어진 두 산과는 달리 금적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기 때문이다. 덕대산 역시 같은 모양새라고 보면 된다. 덕분에 내세울만한 산세(山勢)는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정상 어림에서 터지는 조망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등산로 또한 정비가 잘 안되어 있는 편이다. 속리산과 구병산에 비하면 그냥 내버려졌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좋은 점도 많다. 육산의 특징대로 보드라운 흙길은 폭신폭신하기 짝이 없고, 거기다 경사(傾斜)까지도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부담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모든 걸 포용해줄 것 같은 넉넉한 품성의 능선을 걸으며 사색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분류하고 싶다.
▼ 산행들머리는 문티재(보은군 수한면 거현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구간)의 보은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영동방면으로 잠시 진행하다 송죽사거리(보은군 삼승면 송죽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郡道 : 거현송죽로)로 옮겨 들어오면 ‘37번 국도’ 상의 ‘거현사거리(보은군 수한면 거현리)가 나온다. 이곳 사거리에서 옥천방면으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문티재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문티재는 보은군의 수한면 거현리 상문치에서 옥천군 안내면 가래치로 넘어가는 해발 320m의 고갯마루이다. ‘조선지지자료’에 <문치(文峙)는 수한면 문치리에 있다.>거나 '문치주막(文峙酒幕)'이란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았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하긴 지금도 이 고개는 사람들의 통행이 잦다. 다만 차량을 이용해서 넘나들지만 말이다. 당시 주막(酒幕)이 있던 자리는 지금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동진휴게소’가 들어서서 오가는 행인들의 쉼터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이 고개를 '문치(文峙)'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 쓰는 한자가 틀리기도 한다. ‘1872년 지방지도’의 보은편에는 '문치령(文峙嶺)'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반해, 같은 고지도의 옥천군에는 '문치(問峙)'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표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지명총람처럼 '문티령'이란 지명을 쓰기도 한다.
▼ 휴게소의 맞은편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니 산자락아래에서 길이 없어져 버린 것을 보면 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농로(農路)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아무튼 등산로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들머리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100m쯤 걸었을까 오솔길 하나가 오른편으로 열린다. 특별한 표식은 보이지 않으나 길이 제법 또렷하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잠시 후 무덤이 있는 능선에 올라선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길었지만 한순간으로 보면 된다.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기껏해야 5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능선을 따르게 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아니 완만하거나 내리막인 구간도 있기는 하다. 다만 그 거리가 아주 짧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길고 가파르게 올랐다가 짧게 내려서기를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산행은 수월한 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대부분이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솔향까지 짙다. 들이키는 숨결이 거칠어질수록 온몸으로 느끼는 청량감도 비례해서 높아만 간다.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이다.
▼ 가끔은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왼편 사면(斜面)을 깔끔하게 벌목(伐木)해 놓은 덕분이다. 보은군을 대표하는 속리산과 구병산의 산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 그렇게 30분 정도를 오르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535m봉에 올라서게 된다. 두세 평도 되지 않은 비좁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전망대’라고 쓰인 팻말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란 통나무 두 개를 걸친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느긋하게 조망을 즐겨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 하지만 조망(眺望)은 썩 뛰어난 편이 아니다. 전망대라는 팻말까지 세워 놓은 곳 치고는 말이다. 오른편(서쪽) 방향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겹을 이룬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재봉과 왕재봉이 들어앉은 산줄기가 분명하지만 어느 산인지는 알아차릴 수가 없다. 산에 대한 내 앎이 그만큼 일천한 탓일 게다. 반대편에도 속리산과 구병산이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숲이 더욱 짙어진 탓에 아까 능선을 타고 올 때만도 훨씬 못하다.
▼ 잠시 아래로 떨어지던 능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오름으로 변한다. 하지만 경사(傾斜)는 것의 없는 편이다.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하긴 40m 정도만 높이면 되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을 게다.
▼ 산행을 하다보면 ’금적지맥을 종주하시는 산님들 힘내세요.‘라고 적힌 팻말이 눈에 띄기도 한다.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팀’ 산행대장을 지냈던 최남준 씨가 ‘준.희’ 라는 아명( 雅名 )으로 매달아 놓은 팻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이 금적지맥(金積枝脈)이었나 보다. 금적지맥이란 속리산 천황봉에서 안성의 칠장산으로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이 구룡산 직전의 분기점(450m봉 부근으로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과 수한면의 경계에 있음)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쳐 충북 옥천군 청성면 합금리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5.5km의 산줄기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구룡산, 노성산, 국사봉, 거멍산, 덕대산, 금적산, 국사봉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아울러 이 산줄기의 동쪽에는 불로천과 항건천, 거현천, 오덕천, 보청천 등이 금강으로 흐르고 있고, 이 산줄기의 서남쪽에는 대청호가 있다.
▼ 그렇게 10분 정도를 오르면 덕대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5분 만이다. 덕대산(德垈山)의 원래 이름은 '덕대산(德大山)'이다. ‘해동지도(海東地圖)’ (보은)에 보은군 서니면과 옥천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라는 설명과 함께 '덕대산(德大山)'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게 근거이다. 또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와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覽)’에도 ‘덕대산(德大山)은 안내면 도율리에 있다.’와 '덕대산(德大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 '대(大)' 자를 '대(垈)'로 표기한 기록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 꽤나 너른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표지석 말고도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 안내도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지도(地圖)에 옥천군 지역의 등산로와 그에 따른 지명만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보은군 쪽 방향은 텅 비어 있다는 얘기이다. 어설픈 이기주의(利己主義)가 아닐 수 없다. 이곳 덕대산은 보은군과 옥천군의 경계에 놓여있는 산이다. 두 지자체간에 약간의 배려만 있었어도 저런 반쪽짜리 안내도는 태어나지 않았었을 것이다. 같은 도(道)에 속한 지자체들 사이에도 저렇게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더 큰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겨우 거현리(보은군)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리지만 그나마 한 뼘 정도의 넓이 밖에 되지 않는다. 짙은 연무(煙霧) 탓에 그마저도 시원치가 않다. 겹겹이 쌓인 산릉들이 실루엣(silhouette) 처리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허투루 넘길 일은 아니다. 채색(彩色)이 안 된 산하가 잘 그린 한 폭의 수묵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 금적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면 ‘김녕 김씨(金寧 金氏)’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우리 문중(門中)이여~’ 뒤에서 들려오는 김진수선배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 무척 반가우신 모양이다. 아니 묘비(墓碑)와 석등(石燈)에다 망주석(望柱石)까지 갖춘 의젓한 문중 묘를 만났으니 자랑스러웠을 만도 하겠다. 하지만 요즘은 ‘피보다 더 가까운 물’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기 때문이다. 길은 묘역의 앞에서 양쪽 귀퉁이로 하나씩 나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하나로 다시 합쳐진다.
▼ 우린 오른편 길을 택했다. 그것도 왼편으로 내려가다 다시 되돌아와서 선택한 결과이다. 왼편으로 내려가다 보니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쪽으로 진행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얼마쯤 그렇게 내려가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는다고 했다. 아무튼 우린 험하기 짝이 없는 길을 내려서야만 했다. 경사가 가파른데다가 잡목(雜木)들까지 우거져서 진행하기가 영 사나웠기 때문이다. 시간은 조금 절약되겠지만 권하고 싶은 코스는 아니다.
▼ 잠시 후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왼편 산자락을 깔끔하게 벌목(伐木)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연무(煙霧)로 인해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금적산과 함께 보은군의 삼대 명산을 형성하고 있는 속리산과 구병산의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진행방향에는 통신시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금적산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이 구간에서의 길 찾기도 수월한 편은 아니다. 구불구불한데다, 잡목(雜木)들 때문에 길의 흔적 또한 또렷하지가 않다. 웬만하면 헤치고 나아갈 만도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잡목들의 대부분이 아카시아나무이기 때문이다. 가시를 피하다보면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얘기이다. 이럴 때의 해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저 능선을 따른다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면 안부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물론 덕대산 정상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아무튼 이곳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거현리, 그리고 오른편은 동대리로 연결된다.
▼ 또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하지만 곧장 오르지를 않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누군가 이곳을 일러 ‘서낭당고개’라 하면서 지금도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 8분 정도 워밍업(warming up)을 하고 나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시간상으로 보아 425m봉이 아닐까 싶다. 이후로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다음에 오르게 될 ‘531m봉’과의 고도차(高度差)가 100m 이상이나 되기 때문에 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다.
▼ 그렇게 18분 정도를 더 치고 오르면 오래 묵은 묘역(墓域)이 나오고, 이어서 몇 발걸음 더 걷지 않아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봉우리인데도 광주의 산악인인 ‘백계남’씨가 리본(531m)을 매달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 나와 있는 ‘534m봉’이 바로 이곳인 모양이다.
▼ ‘534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다지 깊지는 않다. 떨어지는 거리가 짧다는 얘기이다.
▼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은 군(郡)의 경계이다. 오른편은 옥천군, 그리고 왼편은 보은군이다. 우리야 그저 흔하디흔한 하나의 능선에 불과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제2차 보은 군계종주’라는 리본이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안부로 떨어지던 산길이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무명봉에 올라선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밋밋한 봉우리로 그저 낡은 리본 몇 개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삼면봉(三面峰)’이라 부른다. 옥천군 안내면과 보은군 수한면, 삼승면 등 세 개의 면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좌측 수한면과 삼승면 경계를 이루는 지능선으로도 제법 또렷하게 산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마루금은 우측 안내면과 삼승면이 경계를 이루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 삼면봉에서는 아래로 내려가기 않은 채로 그냥 위로만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그것도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이곳도 역시 다음에 오르게 될 봉우리까지의 고도차(高度差)가 100m나 된다. 이를 극복하려면 별 수 없었을 게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쇠파이프로 울타리를 쳐놓은 묘역(墓域), 즉 지도에 634m봉으로 표기된 봉우리에 올라선다. 등산객들의 출입을 막으려고 둘러친 금(禁)줄인 모양인데, 다행이도 양쪽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닐만한 틈새를 열어놓았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묘역을 통과하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금적산의 정상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로프까지 매어져 있는 내리막으로 시작되지만 몇 걸음 내려서지 않아 끝나버리고, 이후부터는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거의 힘들이지 않고도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원남리 2.5Km/ 서원2리 1.9Km, 서원1리 2.8Km)를 만난다. 왼편으로 나있는 길은 서원리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정표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 후에 오르게 될 금적산에 대한 표기를 빼먹고 있기 때문이다.
▼ 정상에 가까워지자 눈요깃거리가 나타난다. 선돌(立石)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두꺼비를 닮기도 했다. 보은 들녘을 오가는 곤충들을 채기라도 하려는 모양으로 말이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무인산불감시탑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있는 금적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감시탑뿐만이 아니다. 정상에는 충북 남부지역을 수신범위로 하는 TV, FM라디오, DMB방송 등을 서비스하는 ‘방송 송출 중계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한다. 옥천군 청산의 ‘박달라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봉수대였단다. 지금 그 자리에는 KBS와 MBC의 방송 송신탑(送信塔)들이 들어서 있다. 세월이 지났어도 똑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봉수대나 송신탑 모두 소식을 받아서 전하기는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덕대산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45분이 지났다.
▼ 금적산에는 애처로운 옛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주인공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여느 전설(傳說)과는 달리 비극적인 결말이 특이한 이야기이다. 먼 옛날 이곳에는 금송아지의 정성어린 구애 끝에 결혼한 금송아지와 금비들기 부부(夫婦)가 금슬 좋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인 금송아지가 밭을 갈다가 넘어져 두 눈을 잃고 말았다. 아내인 금비들기는 눈먼 금송아지를 위하여 열심히 봉양하였으나 엄청난 금송아지의 식욕을 충족시키기에는 힘이 겨웠다. 해가 거듭될수록 금비들기는 지쳐갔고 끝내는 혼자 떠나 버리고 말았다. 홀로 남은 금송아지는 금비들기를 찾아 헤매다가 지친 나머지 쓰러져 죽고 말았단다. 후세 사람들이 금송아지가 죽은 산이라고 해서 금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금송아지가 죽을 때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꼬리는 남쪽으로 향하였는데, 지금도 꼬리 쪽인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에는 사금(砂金)이 많이 나오고, 머리를 두었던 북쪽인 보은군 삼승면 서곡리에는 부자(富者)가 많이 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보은 11)은 KBS와 MBC의 송신탑(送信塔) 사이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정상석의 옆에는 평상을 놓아 쉼터와 전망대를 겸하도록 했다. 아무튼 이곳 금적산에는 전 국민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보배가 묻혀 있다고 전해온다.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한없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들녘이다. 심심산골로 알려진 보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동쪽으로는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구병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웅장한 대청호반과 장계국민관광지, 북쪽으로는 보은군의 넓은 평야지대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 하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산을 내려서기 전에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곳에서 금적지맥이 나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려가고자 하는 원남리는 올라왔던 곳의 반대방향으로 열린다. 지맥은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꺾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이 길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심심찮게 바위지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암릉은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다. 하지만 바위지대에서의 방심은 금물이라 할 수 있다.
▼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오면 전망바위를 만난다. 아까 정상에서 바라보던 보은 방향의 들녘과 높고 낮은 산들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 전망대를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냥 내려서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다. 바닥이 흙길이지만 안전에 신경을 써야하는 구간이다.
▼ 능선이 잠시 편해지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위지대로 바뀌어버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흙길로 변한다. 능선은 그렇게 바윗길과 흙길을 번갈아가며 선보인다. 흙길이라고 해서 다 편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안전로프까지 매어 놓아야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나타난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면 또 다른 전망바위를 만난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아까 보았던 것보다는 한참이나 뒤떨어진다.
▼ 잠시 후 전망 좋은 묘역(墓域)에 내려선다. 삼승면 소재지인 원남리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수많은 묘(墓)들을 만난다는 점이다. 그것도 하나 같이 능선의 정중앙(正中央)을 차지하고 있는 묘들이다. 그만큼 이곳 금적산과 덕대산에 명당(明堂)이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는 금적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금송아지와 금비들기’ 전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 묘역을 지나서도 가파른 내리막길은 계속된다. 굵직한 안전로프 까지 매어져 있을 정도라고 하면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아무튼 더 이상의 위험한 구간은 없을 거라며 챙겨온 ‘위스키’를 꺼내놓던 김선배님의 바램이 무참하게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하산 구간이 위험하다 싶어 꾹 참고 내려오다가 이젠 안심해도 되겠거니 하고 주저앉은 곳이 방금 전의 전망 좋은 묘역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로프에 매달려 조심스럽게 얼마간 내려서면 이정표(금적산 제3등산로 입구→ 0.6Km/ 금적산 정상↓ 1.5Km)를 만난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 방향을 튼 산길은 다시 한 번 로프에 의지하게 만든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와진다. 경사가 거의 없이 느긋하게 고도를 낮추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능선을 따르던 산길이 느닷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능선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화광사로 내려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 하지만 방향표시지는 곧장 능선을 따르란다. 능선에다 금(禁)줄까지 쳐놓았는데도 막무가내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민가(民家)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송면 소재지인 원남리이다. 본격적인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면사무소까지는 아직도 2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
▼ 산행날머리는 삼승면사무소(충남 보은군 삼승면)
잠시 후 시멘트포장 임도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저수지가 나온다. 강태공(姜太公) 두어 명이 한가롭게 앉아 있는 걸 보면 입질은 제법 있나 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아까 임도에서도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아무튼 마을을 통과해서 502번 지방도와 만날 때까지는 여러 번에 걸쳐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일일이 방향을 나열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저 자동차도로까지 나간다고 생각하며 걸으면 된다. 그러다가 방향이 헷갈릴 경우에는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진행하다 502번 지방도를 만나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잠시 후 면사무소를 만나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고 50분 가까이나 푹 쉬었으니 순수하게 걸은 시간은 3시간 50분쯤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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