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월) - 5.2(수)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 4.23(월)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 4.24(화)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 4.25(수) : 쿠스코(마추픽추)
○ 4.26(목)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 4.27(금)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 4.28(토)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카(와카치나 사막)
○ 4.29(일) : 나스카(나스카라인)
○ 4.30(월)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넷째 날 : 쿠스코(Cuzco)
특징 : ‘타완팅수우유(Tawantinsuyu, 잉카 제국의 정식 명칭)’의 수도로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페루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페루는 동쪽으로는 아마존, 서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칠레, 북으로는 에콰도르에 이르는 거대한 나라였으며 그 중심에 쿠스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결과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고 잉카로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의 쿠스코는 잉카의 고도(古都)라기보다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페인의 도시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고자 했던 스페인의 파괴 행태로 잉카 신전과 건축물 대신 광장과 대성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완전히 지우지 못한 잉카 제국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쿠스코는 해발이 3,399m나 되는 고산지대(高山地帶)에 자리하고 있으며 4,000m를 훌쩍 넘기는 높은 산들이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다. 그 덕분에 쿠스코는 적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었고, 거기다 우루밤바 강을 끼고 있어 비옥한 농경지의 확보까지도 가능했다. 이만하면 제국의 수도로 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하지만 쿠스코는 많은 여행자들이 고산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쿠스코는 198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바 있다
▼ 공항은 초라한 편이다. 세계 각국의 버킷리스터(bucket-list-er)들, 그것도 매년 백만 명도 훨씬 넘는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곳치고는 말이다. 하지만 공항을 빠져나오면 역시 유명관광지가 맞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행세깨나 한다는 기업의 광고용 간판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문명의 하나인 잉카 문명의 중심지 쿠스코! 안데스산맥의 고원에 있는 쿠스코에서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아르마스광장(Plaza de Armas)’이다. 도시의 중심지이자 쿠스코를 상징하는 대표적 볼거리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시대의 관청과 성당들이 잉카의 주춧돌 위에서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나저나 아르마스광장은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광장을 포함한 구시가지 전체를 관광버스 진입 금지구역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린 마추픽추에서 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도시의 외곽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광장을 향해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 잉카의 문명을 찾아가는 길이니 그들의 문명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잉카는 안데스산맥의 원주민인 케추아족의 언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잉카인들은 그들의 창조주인 ‘비라코차(Viracocha)’의 아들인 ‘인티(Inti)’를 태양신으로 모셨다. 태양신 인티는 지금 사는 세상, 즉 현세를 관장하는 신이다. 안데스산맥의 대지를 따뜻하게 품어 곡식을 맺게 해 주는 신이기에 잉카 농민들의 조상신이기도 하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잉카 인들은 마야나 아스텍 인들처럼 매일 지는 해를 에너지로 충전시켜 다시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 그런 의식을 통해 태양이 매일 다시 떠오르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한편으로 잉카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잉카인들은 마야 인들이 상형문자를 썼던 것과는 달리 문자 대신 ‘아마우타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사람들끼리 말로 전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역사를 이어가는 방법이다. 다른 보조 수단으로 ‘퀴프(quipu, 결승문자)’라는 것을 쓰기도 했단다. 한 가닥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직각으로 매단 것을 말한다. 잉카 인들은 그 퀴프의 색깔과 퀴프에 지어진 매듭의 숫자나 모양, 매듭이 지어진 위치 등으로 가구 수나 세금액 등을 계산했단다. 좀 엉성한 의사전달 방법 같아 보이지만 꽤나 정확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유럽인들이 이 퀴프를 해독하고 그 정확성에 매우 놀랐다니 말이다. 또 다른 특징인 뛰어난 석축기술은 잠시 뒤로 미뤄두자.
▼ 골목을 따라 10분쯤 내려가자 쿠스코에서 가장 넓다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is)’이 나온다. 스페인 문화권의 중앙광장으로서 원래는 군사용 광장이었으나 나중에 그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정치·군사·문화·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잉카제국 시대에는 태양신을 위한 축제 장소였으며 ‘아우카이파타(Haukaypata)’로 불리던 잉카의 중심지였다. 잉카인들은 이곳에서 여러 신성한 의식들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피사로가 쿠스코를 함락시킨 뒤 도시를 재정비 한다는 구실로 ‘아우카이파타(Haukaypata)’를 허물고 그 자리에다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is)’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광장 주변에는 대성당과 교회, 여행사, 선물상점, 레스토랑 등 다양한 삶들이 들어서 있다. 테라스(terrace)와 회랑(回廊)을 품은 고풍스런 건물들이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아름다운 품격을 한결 높여준다. 참고로 이곳 아르마스 광장의 야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잉카의 광장이었건만 지금은 스페인의 모습으로만 남았다. 스페인에 의한 식민지 시절 침략자들은 잉카제국의 궁전과 신전을 파괴하고 그 터의 초석위에다 바로크풍의 교회들을 건설했다. 비라코차(Viracocha) 신전이 있던 자리에는 대성당(Catedral)’을, 카파쿠 궁전 터에는 ‘라 콤파냐 헤수스 교회’를 지었다. 잉카유적지의 초석 위에 지어진 침략자들의 상징물들은 분명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400여 년이라는 시간은 이 특이한 조합마저 아름답게 재구성을 해놓았다. 그리고 중남미 여행객들에게 애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 광장의 동쪽, 그러니까 광장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는 ‘대성당(Catedral)’이 자리하고 있다. 키스와르칸차(Kiswarkancha)라는 비라코차(Viracocha)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성당으로 공식명칭은 성모승천의 대성당(The Cathedral Basilica of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이다. 1559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00년이 지난 후에야 완공할 수 있었다는 이 성당은 잉카의 흔적을 없애고 식민시대를 여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톨레도 대성당이나 세비야 대성당에 견줄 수는 없지만 제단을 만드는 데만 은 300t을 쏟아 부었다고 하니 잉카를 지우려는 정복자들의 대역사였던 셈이다.
▼ 스페인양식의 영향을 받은 직사각형 모양 대성당은 고딕·르네상스 양식으로 짓기 시작했으나 뒤에 바로크양식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대성당을 가운데에 두고 왼쪽에는 ‘헤수스 마리아(Jesús Maria) 성당’과 그리고 오른쪽의 ‘엘 트리운포(El Triunfo) 성당’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데, 이 중 엘 트리운포 성당은 1536년에 지어진 쿠스코 최초의 성당이다. 입장은 헤수스 마리아(Jesús Maria) 성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중앙제단 아래 지하실에는 쿠스코교구의 대주교 유해들이 안치되어 있고, 성당의 오른쪽 종탑에는 1659년에 주조된 마리아 앙골라 종(Maria Angola Bell)이 걸려 있다. 이 종은 2.15m 높이에 무게가 5,980kg이 나가는데, 20마일 밖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 성당의 내부는 관람이 가능하도록 개방되어 있다. 물론 유료(有料)이다. 하지만 사진촬영은 금지된다. 그래서 사진은 첨부하지 않고, 내가 본 실상과 다른 이들의 글을 참조해서 설명해 본다. 일명 ‘바로코 안디노(Barroco Andino)’라고 하는 페루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성당 내부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수많은 제대와 400여점이 넘는 종교화가 빈틈없이 성당을 채우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태양신의 황금관을 썼고, 예수상은 이곳 원주민처럼 검은 피부를 지녔다. 검은 예수상은 이곳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그을음으로 검은색이 됐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데, 그 후로 지진을 막아주는 신으로 숭상되고 있단다. 종교화 속의 악인들 그러니까 예수를 팔아먹은 배신자 유다라든가 성인을 핍박하는 로마 군인들이 스페인군으로 묘사된 점도 특이하다. 그러나 가장 재미있는 것은 마르코스 사파타라는 현지 민속 화가가 그렸다는 ‘최후의 만찬’이 아닐까 싶다. 만찬 속 음식이 이곳 페루의 가장 유명한 민속요리인 ‘꾸이’라니까 말이다. 이로보아 대성당은 겉으로는 지배자의 신앙인 가톨릭을 숭상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면면에는 잉카인의 저항과 토속적인 면모가 가미된 곳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그밖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지만 예술에 문외한이라서 내력이나 가치 등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 남쪽에는 바로크양식의 ‘라 꼼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Iglesia la compania de Jesus)’가 자리 잡았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좌우 대칭을 이루는 종탑과 섬세한 외벽 부조로 옆의 대성당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 교회는 15676년 착공했지만 1650년의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1688년에서야 완공을 보았다고 한다. 교회 내부에 마르코스 사바타, 디에고 데 라 푸엔테, 크리스토 부르고스 등의 벽화와 조각품 등이 있다고 하나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사진촬영이 되지 않은 곳까지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참! 원래 이곳에는 잉카제국의 11대 황제 ‘와이나 카팍(Huayna Capac)’의 궁전이었던 ‘아마루칸차(Amarucancha)’가 있었다고 하니 참조한다.
▼ 300㎞ 이상이나 떨어진 해안의 모래를 퍼다 조성했다는 광장에는 대성당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잉카제국의 제9대 왕이었던 ‘파차쿠텍(Pachacutec Inca Yupanqui, 1438~1471년)’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그는 부족국가로 남아있던 잉카를 제대로 된 왕국으로 바꾼 왕이었다. 수도 쿠스코의 정비와 함께 제국의 영토 확장에 힘써 수도로부터 약 4000㎞에 달하는 안데스의 영토를 지배하였으며, 당시 인구가 6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조세제도도 마련되었단다. 특히 케추아어를 공용어로 삼음으로써 실질적인 제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단다. 그건 그렇고 그가 치켜든 팔이 제국의 영광을 무너뜨린 자들을 향해 뭐라고 꾸짖는 것 같아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 제국의 신민들에게 옛 영광이 다시 돌아올 것임을 설파하려는 모양새일지도 모르겠다.
▼ 대성당과 헤수스교회의 사이에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가와 깔끔한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장식목공품과 보석 등의 기념품 외에도 페루의 특산품인 양탄자나 양털 스웨터(sweater) 등이 진열되어 있으니 기념으로 하나쯤 구입해 볼 일이다. 참! 스웨터를 짊어지고 다니며 파는 노점상도 보이니 아주 저렴한 가격을 원할 경우에는 이를 이용하면 된다.
▼ 이젠 ‘12각 돌’을 만나러 갈 차례이다. 잉카인의 석조 건축술을 가장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12각 돌’이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7~8분 거리에 있는데, 이곳으로 가고 싶을 경우 ‘아툰 루미위크 거리(Av. Hatun Rumiyoc)’를 찾으면 된다. 잉카인이 쌓아놓은 돌담들을 만날 수 있고, 특히 쿠스코에 간 사람들이 절대 빠트리지 않는다는 ‘12각 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과 헤수스교회가 대각선으로 만나는 사거리에서 대성당을 왼편에 끼고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 ‘아툰 루미위크 거리(Av. Hatun Rumiyoc)’를 잠시 걷다보면 ‘종교 예술 박물관(Museo de Arte Religioso)’이 나온다. 원래는 6대 황제인 ‘잉카 로카(Inca Roca, 1348-1378)의 궁전이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궁전을 허물고 그 석벽을 토대로 가톨릭의 대교구청 건물을 지어 사용해오다가. 지금은 종교 예술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건물 역시 잉카인들이 남긴 석축의 위에 지어졌다.
▼ 박물관의 담벼락 아래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다가가 보니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가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담벼락 앞에서 말이다. 돌의 크기만 조금 더 커졌을 뿐이라며 툴툴거리는데 이를 본 가이드가 가운데에 있는 돌의 면(面)을 한 번 세어보란다. 12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면서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거라면서 맞물린 돌들의 사이에 틈이 있는지도 살펴보란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렇다면 철을 사용하지 못했던 잉카인들은 어떻게 돌 자르는 기술을 갖게 됐을까?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히마타이트’라고 하는 매우 단단한 돌을 강가에서 주워 단단한 돌칼을 만들어 사용했단다. 다이아몬드 강도가 10이라면, 히마타이트의 강도는 대략 8정도가 된단다.
▼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의 특징은 돌과 돌의 사이가 종이 한 장 끼울 수 없이 정교하다는데 있다. 그리고 돌이 12각으로 다듬어져 있다는 게 두 번째 특징이다. 보다 많은 돌들이 서로 맞물림으로써 견고성을 높이려는 아이디어란다.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은 원인이고 말이다. 잉카의 석축기술은 고대로부터 이 지역을 흔들었던 강력한 지진의 산물이었다. 돌을 쌓기 위하여 다듬을 때 서로 맞물릴 수 있도록 한다거나 돌을 쌓아올릴 때 경사각을 적절하게 유지하였던 것인데, 잉카의 석공들은 네모난 돌이 서로 잘 들어맞아 전체와 통일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서로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찍 터득했던 모양이다.
▼ 골목에는 꽤 많은 기념품가게들이 들어서있다. 그런데 기웃거리는 사람들보다 뭔가 하나씩 들고 나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인다. 고풍스런 분위기에 취하기라도 했나보다.
▼ ‘12각의 돌’ 뿐만이 아니다. 근처의 담벼락들도 거의 비슷한 모양새이다. ‘12각의 돌’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그 정교함은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잉카의 만들어낸 건축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되어 있었다. 돌이 만들어낸 예술품의 전시장이자 축제의 마당인 것이다. 돌들은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이 없다. 돌의 원래 모양을 살려가면서 깎았기 때문일 것이다. 홈을 파거나 여기에 맞는 옹이가 달리도록 깎아 맞추었다. 정교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석조 벽이 만들어내는 쿠스코 골목길의 풍경이야말로 잉카의 도시에서만이 볼 수 있는 잉카의 ‘느낌’이 아닐까 싶다.
▼ 잉카 제국의 발달된 여러 문명과 기술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게 돌담, 즉 정교한 건축술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조그마한 틈새조차도 허용하지 않고 아귀를 맞추어 촘촘히 쌓아 올린 벽은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처음 모습 그대로 요지부동이며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똑같은 모양의 벽돌을 일렬로 맞춰 쌓는 현대의 방식과 다르게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돌들을 조금씩 엇갈리게 쌓으면서도 틈새를 정확히 맞추었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6각이나 8각.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은 각(角) 등 바위의 생긴 모양대로 각을 맞추어 쌓아올린 돌담은 아름다움을 넘어 차라리 경이롭다는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그 아래로 난 길의 바닥도 돌을 깔아놓았다. 길을 온통 돌이 차지해버렸다고나 할까?
▼ 거리에 돌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흙벽돌로 담을 쌓은 뒤에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발라놓은 곳도 보인다.
▼ 남쪽 방향의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산토도밍고 성당’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비교적 큰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된다. 가는 길에도 꽤 많은 특산품가게와 기념품가게를 만날 수 있으니 참조한다.
▼ 길가의 건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정한 특징을 갖고 있다. 아래에다 촘촘하기 짝이 없는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건축물들을 지어놓은 것이다. 돌 축대는 잉카인들이 쌓았고 건물은 스페인 사람들이 지었다고 한다. 잉카의 뼈에 스페인 정복자의 살이 붙었다고나 할까? 스페인의 침략자 피사로가 이 찬란했던 제국을 멸망시키고 300년 넘게 식민통치를 했지만 그 뼈대까지는 없애지 못한 셈이다.
▼ 한참을 걷자 성당이 나타난다. ‘산토도밍고 성당(Templo de Santo Domingo)’이다. 이곳에는 잉카의 또 다른 유적지인 ‘코리칸차(Coricancha)’ 터가 있다. 아니 코리칸차의 터에다 성당을 지었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쿠스코를 점령한 피사로는 태양의 신전을 완벽하게 부수고 그 위에다 성당을 세우려 했단다. 그런데 잉카인들이 쌓은 기단(基壇)이 너무나 견고해서 도저히 부술 수 없었다고 한다. 피시로가 잉카인들이 축조한 기단 위에다 ‘산토 도밍고 성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부수기는 쉬워도 새로 만들기는 어려운 법인데 얼마나 치밀하고 촘촘히 쌓아 올렸으면 난폭한 침략자들마저 손을 들었을까? 하긴 1950년과 1650년의 대지진으로 산토도밍고 성당이 많은 피해를 입었을 때에도 코리칸차의 초석은 끄떡없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산타도밍고 성당(Templo de Santo Domingo)이 세워진 곳은 잉카제국의 전성기 때 태양신전과 궁전으로 사용되던 ‘코리칸차’ 자리라고 한다. ‘코리칸차’는 케추아 어로 황금을 뜻하는 ‘코리’와 울타리를 의미하는 ‘칸차’를 합한 말이다. 이름의 뜻대로 코리칸차의 벽은 황금으로 덮여 있었고 광장은 황금으로 만든 나무와 식물, 동물 조각들로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광장을 꾸민 나무와 조각들을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 힘들겠지만 이는 사실이란다. 스페인에 있는 박물관과 자료관에 당시 스페인 군대를 따라 쿠스코에 왔던 역사학자와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해 놓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확인이 가능하단다. 아무튼 금으로 덮여있는 궁전을 본 침략자들이 그걸 그냥 두었을 리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금을 모두 녹여서 스페인으로 가져갔는데 어찌나 금이 많았는지 유럽경제가 혼란에 빠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 너무 견고하게 만들어져 부수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태양의 신전은 교회 바깥과 내부에 그 터와 일부 돌담만을 남기고 있다 한다. 스페인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비행기를 타야할 시간이 촉박하다는 가이드의 재촉이 그 원인이었다. 아니 잉카 최고의 축조물이라는 ‘12각의 돌’을 이미 보아버렸기에 또 다시 돌담을 본다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는 게 더 옳은 고백일 수도 있겠다. 참고로 ‘태양의 신전’ 터가 남아 있는 앞 광장에는 코리칸차 박물관(Museo de Sitio del Qoricancha)이 있는데 이곳에서 잉카 제국의 유물들과 외과수술이 행해진 해골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산타도밍고 성당 근처에서 만난 광장, 작고 예쁜 모습인데 이름은 모르겠다.
▼ 마추픽추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얀 예수상(Cristo Blanco)’이 있는 언덕에 올랐다. 쿠스코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상은 1945년 팔레스타인 기독교그룹이 난민신세가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받아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예수상이라니 쿠스코의 랜드마크(landmark)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 전망대답게 쿠스코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쿠스코는 한때 100만 명이나 살았다는 옛 ‘타완틴수요(Twantinsuyo)’, 즉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4방으로 뻗은 나라라는 뜻의 ‘타완틴수요’답게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에는 안데스를 중심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이 제국의 왕을 ‘잉카’라고 불렀는데, 유럽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제국의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쿠스코는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문자와 종이가 없었던 이 제국은 구전에 의해 그 역사가 전해오는데, 티티카카 호수에서 태어난 ‘만코 카팍(Manco Capac, 1198-1228)’과 그의 누이 ‘마마 오클로’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쿠스코가 타완틴수요라는 제국의 수도로 성장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438년 만코 카팍의 18세손인 ‘파차쿠티(Pachacuti.1438–1471)’ 왕 때부터이다. 그는 사피와 툴루마요 강에 수로를 만들고 그들이 신성시했던 퓨마의 형상을 따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총이나 말(horse)을 몰랐고 신(神)은 흰 피부를 지녔다고 믿었던 잉카인들은 불과 200명의 군대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 예수상 말고도 십자가 몇 개가 더 세워져 있다. 역시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는 나라답다. 그런데 십자가가 천 등으로 지저분하게 묶여있다. 마치 무당집 앞마당에 세워진 대나무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기독교 문화에 토속신앙이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 화려한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원주민이 사진촬영을 권한다. 집사람에게 추억을 갖게 해주고 싶어 이에 응하기로 했다. 원주민에 라마까지 배경으로 넣으니 집사람의 인물이 한결 돋보인다. 그래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 다시 돌아온 ‘쿠스코비행장’, 이번엔 리마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어제 아침에 도착했을 때의 들떴던 기분과는 사뭇 다른 결과가 초래되어 버렸다. 공항 대합실에서 1시간쯤 기다렸을까 비행기 정보 안내판을 보니 딜레이(delay)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행기를 타기는 탔다. 페루의 저가항공사들에게 한두 시간 정도의 딜레이는 돌출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얘기를 들은바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못 뜬다며 다시 내리라는 것이 아닌가. 대합실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캔슬(cancel)로 안내가 바뀌어버렸다. 맞은편 산자락이 짙은 구름에 잠겨있을 뿐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비행기는 내일 아침에나 출발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정은 어쩌란 말인가. 리마로 나가 오늘 저녁비행기로 멕시코시티까지 가서, 쿠바로 들어가는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망했다. 그리고 우린 끝내 쿠바에 들어가 보지를 못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 덕분에 우린 쿠스코에서 일박을 해야만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산병 증상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는 게 더 억울했다. 이렇게 비행기가 취소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시간이 없어 포기해야만 했던 유적지들을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위를 차곡차곡 쌓았으면서도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짜 맞춘 ‘사크사우아만(Sacsayhuamán) 유적지’는 물론이고, 잉카인들의 뛰어난 관개(灌漑) 기술을 엿볼 수 있다는 ‘탐보 마차이(Tambo machay)’, 잉카의 종교적 중심지 켄코(Qenqo) 등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지명들이 공허하게 내뱉는 한숨소리와 함께 허공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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