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봉(小南峰, 867m)–시루봉(959.9m)-호음산(虎陰山, 929.8m)
산행일 : ‘17. 8. 19(토)
소재지 :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위천면, 고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칡목재→소남봉→시루봉→호음산→원농산갈림길→모전갈림길→홍골→황산저수지→수승대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산행 내내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고 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 덕분에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호음산 정상을 제외하면 조망(眺望)까지도 꽉 막혀있다고 보면 된다. 흙산의 일번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대신 좋은 점도 있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부담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잡목들의 방해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산행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 하산 지점인 황산리에는 ’수승대‘라는 경승지가 있다. 산행에서 못한 눈요기는 수승대에서 하면 될 일이다. 한번쯤은 올라 봐도 좋을 산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하산 코스를 잡는 데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황산저수지로 내려가는 임도를 따를 경우 자칫 지옥구경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산지점을 원농산마을로 잡던지 아니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고 수승대관광지까지 내려가는 코스를 권하고 싶다.
▼ 산행들머리는 칡목재(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산 2-13)
대전-통영고속도로 지곡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안의면(함양군) 소재지까지 온다. 안의교차로(안의면 석천리)에서 3번 국도로 바꿔 타고 거창방면으로 달리다가 지동교차로(거창군 마리면 말흘리)에서 이번에는 37번 국고로 옮긴다. 이어서 무주방면으로 방향을 잡아 들어가다 신기교차로(거창군 고제면 개명리)에서 좌회전하여 1001번 지방도로 바꾼 다음 조금 더 들어가면 ’칡목재‘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무주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와 37번 국도를 연이어 타고 신기교차로까지 역방향으로 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오늘 타고 온 산악회 버스도 후자를 택했다.
▼ 고제면을 뒤에 두고 고갯마루의 왼편 절개지(切開地) 사면(斜面)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경사가 무척 가파르지만 굵직한 밧줄이 매어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부여잡기 쉽도록 매듭까지 만들어 놓았다. 밧줄이 끝나자마자 칡넝쿨이 길손을 맞는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우거져 있는 것이 ’칡목재‘라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 6분 정도의 고투(苦鬪)를 치루면서 능선에 올라서면 또렷한 산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웃자란 잡목들이 등산로까지 비집고 들어와 있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자꾸만 부여잡는다. 그래도 그 잡목(雜木)들 사이에 가시넝쿨 부류가 끼어있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아니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과 짧고 완만한 내리막길이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다만 가파른 오르막길이라고 해봐야 다른 산들에서 보아왔던 가파름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긴 평탄지(平坦地)가 끼어있다는 것도 이 산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능선안부에 내려선다. 다른 이들이 ’아랫 칡목재‘라고 표기하고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자신은 없다. 아무리 살펴봐도 길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물웅덩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야생동물이 헤집어 놓은 흔적일 것이다. 아니 저 정도의 크기라면 멧돼지의 작품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조금 피곤할 수도 있겠다. 어디서 튀어나올 지도 모를 멧돼지까지 걱정해가며 걸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난 지점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왼편은 ’하수내 마을(고제면 개명리)‘로 연결된다. 이정표(시루봉↑ 2.6km, 호음산 4.9km/ 하수내← 1.6km/ 윗칡목재↓ 1.3k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소정마을(북상면 소정리)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국제신문에서 이용했다는 그 답사로(踏査路) 말이다.
▼ 이어서 짧은 오름짓을 한 번 하고나면 4분 후에는 소남봉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만이다. 국제신문 근교산행팀은 이곳 호음산에 대한 취재기사에서 ’키가 큰 축인 900m급의 연봉이지만 초입지점의 고도(高度) 자체가 워낙 높아 어느새 능선에 올라붙었다‘고 적고 있다.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이곳 소남봉의 높이가 870m나 되지만 산행을 시작했던 칡목재의 높이가 이미 700m에 이르다보니 그 차이인 180m만 높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1.5Km나 되는 긴 구간에서 올리다보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소남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 두세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석이나 삼각점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다 산길까지도 정상을 가운데에 놓고 살짝 돌아서 나간다. 만일 ’3000산 오르기‘의 주인공인 한현우 선생의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마저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곳이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12년 10월 9일에 이곳을 다녀갔는데 3009번째 산이란다. 가끔 산행을 함께 하면서 산에 대한 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던 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리할 수 없어 안타깝다. 이미 고인(故人)이 되셨기 때문이다.
▼ 잡목으로 둘러싸인 정상은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출발을 재촉하는 이유이다. 소남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편안해진다. 오르내림의 차가 한층 더 작아진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바닥은 보드라운 황톳길이다. 산악마라톤 코스로 이용해도 충분하겠다.
▼ 언제부턴가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확성기를 통해 내보내고 있는지 소리가 온 산을 찌렁찌렁 울리고 있다. 완전한 소음(騷音) 그 자체라는 얘기이다. 집사람이 ‘울렁증이 난다’고 불평을 토로할 지경이라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자 숲속에 들어앉은 민가(民家)가 한 채 나타난다. 소음의 근원지인 모양이다.
▼ 능선을 따라 길게 철망(鐵網)이 쳐져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그 앞에다 ‘윤형철조망(Concertina wire)’까지 깔아 놓았다. 안에 귀한 약초라도 재배하고 있나보다. 이중의 보안장치에다 확성기까지 틀어 외인(外人)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 산길은 철조망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된다. 그렇게 7분쯤 진행하면 어느 이름 없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산악회의 리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첨부된 지도에 ’853m봉‘으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 산길은 또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등산로까지 비집고 들어온 잡목들이 갈 길을 방해하는 것 빼놓고는 순탄한 산행이 계속된다.
▼ 얼마쯤 걸었을까 왼편 굴참나무 사이로 시루봉이 살짝 나타난다. 뾰쪽한 것이 흡사 삿갓을 빼다 닮았다. ’나 같으면 시루봉이라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삿갓봉으로 짓겠다.’는 내 넋두리를 듣던 일행이 저 아래 마을에서 바라볼 때에는 시루처럼 생겼다면서 개명(改名)은 꿈도 꾸지 말란다. 그럴 것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어디 허투루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겠는가.
▼ 소남봉을 출발한지 35분쯤 지나면 갈림길이 없는 안부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대략 10분쯤 치고 오르면 시루봉 정상이다. 소남봉을 출발한지 45분 만이다.
▼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저 사제(私製) 이름표(시루봉 960m)를 매달고 있는 이정표(호음산 2.3Km/ 칡목재 3.9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 ‘원형 대삼각점(무풍24)’도 설치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정상은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제신문의 근교산행팀은 금원산과 덕유산 방향이 잘 조망된다고 적었었다. 그동안에 잡목들이 쑥쑥 자라버린 모양이다.
▼ 호음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이 구간도 역시 부담 없이 걷기에 딱 좋다.
▼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을 ‘백두호음지맥(白頭虎陰支脈)’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백두대간 갈미봉에서 분기(分岐)해 동남쪽 칡목재를 거쳐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짧은 산릉이 시루봉과 호음산을 올려 세우고 나서 수승대(搜勝臺)가 자리한 위천천(渭川川)에서 그 맥을 빠트린다고 한다.
▼ 산길은 능선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오르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봉우리는 심심찮게 우회(迂廻)를 시켜버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래의 사진보다 훨씬 더 높은 봉우리까지 우회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 시루봉을 출발한지 38분쯤 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호음산↑ 0.7km/ 온곡← 1.7km/ 삼층석탑→ 2.9km/ 칡목재↓ 5.2km)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온곡마을(고제면 농산리)로 연결된다. 2014년엔가 ‘제1호 천사마을’로 지정되었다는 기사가 떴던 마을이다. ‘천사마을’이란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캐치플레이즈(catch phrase)하에 조직된 ’거창 아림천사(1004)운동 본부‘에서 지정을 해주는데, 대부분의 마을 구성원들이 1구좌에 ’1004원‘씩 정기적으로 기부를 했을 때 마을 단위로 지정을 해준다고 한다. 십시일반으로 모아 사회적 약자들을 돕기 위한 운동인 모양인데 ’천사‘라는 칭호를 듣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 같다.
▼ 안부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상당히 가팔라져버린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마지막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6분쯤 치고 오르면 호음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기점인 칡목재를 출발한지 2시간10분만이다. 칡목재까지의 거리가 6.2Km인 점을 감안해 본다면 얼마나 산길이 편했는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1시간에 3Km 가까이를 걸은 셈이기 때문이다.
▼ 굵은 나무가 일절 없는 정상은 밋밋한 구릉(丘陵)의 형태이다. 그래선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황산↑ 5.5Km, 원농산 4.1Km/ 갈계→ 3.5Km/ 칡목재↓ 6.2Km) 외에도 삼각점(무풍 316)과 산불감시초소, 무인산불감시탑 같은 시설물들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호음산(虎陰山)’은 한자 ‘그늘 음(陰)’을 써서 산의 형세가 호랑이를 닮았다는 것을 표현했다. ‘소리 음(音)’을 쓰기도 하는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많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산기슭 큰골에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호음동(虎音洞)이란 지명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단다. 백두대간의 덕유산이나 지리산과 연결된 기맥으로 호랑이가 특히 많이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또 재미있는 것은 인근에 ‘개밥말산’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반도의 제왕 호랑이에게 쫓긴 개가 겁에 질려 옴짝 달싹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형국을 뜻한단다. 이로보아 호음산은 호랑이 산이 분명하다 할 수 있다.
▼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화강암으로 만든 호랑이상이다. 거창군에서 관내의 몇몇 산봉우리에다 그 봉우리의 특성을 연상시키는 조형물들을 세웠다고 들었는데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이곳 ‘호암산’은 응당 호랑이가 되었을 게고 말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시야(視野)를 가로막는 장해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국지성 호우(局地性 豪雨)가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위가 온통 안개 속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방금 지나온 시루봉과 소남봉까지도 희미하게 보일 따름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비를 맞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 아쉬움을 다른 이의 글로써 대신해 본다. <동쪽 끝에 덕유산이 보인다. 남덕유산에서 삿갓봉과 무룡산, 향적봉이 울처럼 조망된다. 그리고 위천천 너머에는 월봉산과 금원산, 현성산, 기백산이 조망된다.> 또 다른 글도 있다. <금원산과 남덕유산 그 뒤로 덕유산 서봉(장수덕유산)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까지 희미하게나마 실루엣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계속 조망이 가리는 숲속 능선길을 걷다가 천지사방으로 뚫린 봉우리로 올라서는 기분은 산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뭉클함을 알고 있을 것이다.>
▼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진행방향에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위풍당당하게 서있으니 참조한다. 하지만 선두대장을 맡았던 정사장의 말로는 이곳에서는 오른편 ‘갈계’ 방향의 능선을 타는 게 옳단다. 능선을 잠시 타다가 사면(斜面)을 따라 내려서면 지루할 수밖에 없는 임도 구간을 상당히 줄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 ‘방향표시지’를 따르지 않았냐는 지청구까지 함께 던졌으니 일종의 꾸중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보다 조금 앞서 가던 사람들이 방향표시지를 소나무가 서있는 방향으로 돌려놓아 버린 것을 말이다. 돌려놓은 사람들도 사연은 또렷하다.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지도에 그려진 코스는 물론이고, 산행을 시작하기 전 윤대장이 코스를 설명할 때에도 분명이 그리로 가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 아무튼 산길이 편하지만은 않다. 길은 또렷하지만 잡목들이 꽉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끔은 산초나무까지 섞여있어 가시에 찔리기까지 한다. 경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8분 정도를 내려서면 삼거리(이정표 : 황산→ 5.1Km/ 넘터↑ 3.4Km, 원농산 3.7Km/ 호음산↓ 0.4Km)가 나타난다.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지도에 표시된 대로 황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 황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 코스 보다는 원농산 방향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고 싶다. 지긋지긋하게 긴 임도에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경사가 거의 없는 산길이 계속된다. 잡목들의 방해만 아니라면 곱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만한 구간이다.
▼ 길가에 ‘취나물’이 꽃망울을 피워 올렸다. 아니 무리지어 피어났다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취나물 천지’라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심심찮게 ‘참취 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도 여러 번 만났음은 물론이다.
▼ 삼거리에서 내려선지 14분 만에 임도에 내려선다. 그런데 이정표(황산저수지→ 3.0Km/ 모전↑ 4.5Km/ 무월← 3.5Km/ 호음산↓ 0.9Km)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으니 문제다. 별 수 없이 우리가 내려온 방향에다 호음산을 맞추고 방향을 가늠해 본다. 그리고 오른편 방향의 임도를 따른다. 하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application)에서 보내오는 경고음은 옳은 길이 아니란다. 되돌아와 이번에는 계속해서 능선을 타기로 한다. 이정표를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잠시 후에 알게 되었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정표의 방향은 이해가 안 된다. 어쩌면 임도를 새로 내면서 옛길들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능선을 따라 3분 정도 진행했을까 또 다른 임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우린 제대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편 방향으로 난 임도를 따른다. 핸드폰의 앱(application)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다. 임도는 포장이 이미 끝난 구간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시멘트 타설(打設)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차량이나 가설물들을 피해가야 하는 등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임도의 경사를 누그러뜨리려고 구간의 길이를 엄청나게 늘려놓은 게 문제다. 그렇다고 옛길을 따를 수도 없다. 임도를 새로 내면서 옛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날씨라도 흐린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늘이 되어줄만한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데 만일 해라도 떴더라면 어땠을까 소름이 끼친다. 아무튼 이 코스는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 그렇게 35분을 걷고 나서야 황산저수지를 만난다. 가뭄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수지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다. 아니 임도 개설공사를 위해 물을 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저수지 제방에 ‘호음산등산안내도’와 이정표(호음산 3.9Km)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정표의 거리표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호음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1시간 20분이 걸렸다. 임도에서 길을 찾느라 헤맨 시간을 감안해도 1시간10분 동안을 오롯이 걸은 셈이다. 그런데도 3.9Km밖에 되지 않는다니 어찌 수긍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속보(速步)로 걸어왔는데 말이다. 어쩌면 옛길의 거리표시가 아닐까 싶다.
▼ 제방(堤防) 옆 웃자란 잡초(雜草)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비석 하나가 보인다. 초서(草書)로 적혀있어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지방의 정치인이었던 구암(龜岩) 신도성(愼道晟, 1918-1999)이 글을 쓴 것만은 분명하다. 이 지역의 명문인 ‘거창 신씨’ 출신으로 관선 경남지사와 국토통일원장관, 그리고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 산행날머리는 수승대주차장(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이정표의 거리표시는 저수지에서 끝을 맺지만 산행을 마치려면 아직도 멀었다. 이미 지긋지긋해져 버린 포장도로를 20분 남짓 더 걸어야만 산행 날머리가 되는 수승대 주차장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1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쯤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수승대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고택이 즐비하다는 황산마을은 들러보지 못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시멘트도로에 시달린 내 무릎이 이를 허락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마을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수승대로 그 아쉬움을 달래보기로 한다. 사람들은 ‘거창(居昌)’을 흔히 ‘산고수장(山高水長)’, 즉 산은 높이 솟고 물은 길게 흐르는 땅이라고 말한다. 뛰어난 명소를 많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중에서도 으뜸 명소는 단연 수승대(搜勝臺)가 아닐까 싶다. 주차장의 으리으리한 대문이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아무튼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이곳에서 구연(龜淵)이라는 맑은 소를 이루는 위천의 물줄기는 다시 너럭바위를 넘고 거북바위를 적시며 비경을 빚어낸다. 참고로 명승 53호로 지정된 수승대의 원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이었다. 여기서 쇠락해가던 백제가 신라로 가는 사신을 근심하며 보냈다고 해서 ‘근심 수’(愁)에 ‘보낼 송’(送)자를 썼다. 그러다 1543년 유람차 거창 일대를 찾은 퇴계 이황이 이 내력을 듣고는 ‘절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시를 지어 바꿔 부른 이름이 ‘명승지를 찾는다’는 의미의 수승대(搜勝臺)다. 퇴계는 그러나 급한 정무로 상경했고, 생전에 한 번도 이곳을 직접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 수승대로 향한다. 위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이태 사랑바위’에 관한 내용인데 맞은편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척수대라고도 불린다)에 얽힌 ‘유이태(劉以泰, 1652-1715)’라는 명의(名醫)의 얘기를 적어놓았다. 또한 안내판의 하단에다 MBC-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나왔던 '유의태'가 이 인물을 모티브(motive)로 삼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아무튼 젊은 '유이태'에게 여인이 나타나 입마춤을 하면서 구슬을 건네주었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건강을 해칠 정도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말이다. 이를 눈치 챈 훈장의 지시대로 구슬을 삼켜버리자 여인이 백여우로 변해 산으로 도망가 버렸고 이후 총기를 되찾은 유이태는 명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태사랑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연인은 사랑이 이루어지고, 자식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한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고 첨언해 두었다. 참고로 ‘이태 사랑바위’의 또 다른 이름인 ’척수대(滌愁臺)‘는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 사신이 각기 다른 나라에 가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근심을 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조금 더 올라가니 동네 어귀에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높이가 32m에 둘레가 6m에 이르며 수령(樹齡)은 500년이나 묵었단다. 그만큼 이 동네가 오래 묵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거창군에서 보호수로 지정․관리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이 마을에서는 약 10여 가구가 민박을 운영하고 있단다. 옛 선조들의 주거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 잠시 후 이번에는 물놀이장이 나타난다. 위천에 둑을 막아 물을 가두고 야외 수영장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수백, 이니 수천 명이 뛰어들어 놀아도 충분하겠다. 거기다 풀장의 중간쯤에 걸쳐놓은 현수교(懸垂橋)는 가히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아도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경승지에 아름다운 외모의 다리까지 더했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수승대관광단지’로 조성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는 봄에서 가을까지는 ‘오리 배’와 보트를 탈 수 있는 유선장을 운영하며 사계절 썰매장도 가동한다니 참조한다.
▼ ‘요수신선생장수지지(樂水愼先生藏修之地)’라는 편액(扁額)을 달고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수승대(搜勝臺)’ 탐방이 시작된다. ‘요수 신선생(樂水愼先生)’이란 이곳에 요수정(樂水亭)이란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요수 신권(愼權, 1501~1573)’을 나타낸다. 그의 호인 ‘요수(樂水)’란 요산요수(樂山樂水)로 공자사상의 핵심이 되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인자한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인자한 사람은 장수한다(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에서 유래한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걸어온 처사(處士) 신권의 인품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아호(雅號)가 아닐까 싶다. 하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직접 지어준 호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깜빡 잊을 뻔 했다. 대문 옆에 ‘수승대’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느니 꼭 읽어보고 경내로 들어서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 대문에 들어가기 전 오른편에 청송당(聽松堂)이 있다.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으로 청송(聽松) 신복행(愼復行 1533~1624년)이 공부하던 곳이다. 신복행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선생의 셋째 아들로 효행이 지극하고 우애가 남달랐으며 학문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북상면 농산리의 사라산 아래에 있었는데 유지관리를 위해 1987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청송당의 오른편, 돌로 지어진 비각(碑閣)의 안에는 ‘신동건 정려비(愼東建 旌閭碑)’가 들어앉아 있다. 신동건이라는 사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고종이 내렸다고 한다.
▼ 대문을 들어섰다 싶으면 저만큼에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이층의 누각이 나타난다. 요수정(樂水亭), 수송대거북바위와 함께 수송대 일원의 명승을 압도하는 ‘트리플 크라운’의 하나인 관수루(觀水樓)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계자난간을 두른 관수루는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문루(門樓)이다. 구연서원을 짓고도 한참이 지난 1740년에 건축됐는데, 누(樓) 아래는 출입문인 외삼문 역할을 하고 누 위의 마루는 주변경관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거나, 시회를 열고 강학하는 곳이다. 여기서 ‘관수(觀水)’는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상편의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觀水有術 必觀其瀾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학문을 ‘관수’, 즉 물의 흐름으로 보고 군자(君子)의 학문은 이와 같이 맥락을 읽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아무튼 맹자의 이 아포리즘(Aphorism, 격언)은 의성의 관수정 등 다른 누정의 현판들에서도 자주 보인다. ‘관수’ 외에도 ‘관란’, ‘영과’와 같은 현판이름들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겠다.
▼ 관수루를 지나 안으로 들면 ‘강학당(講學堂)’이 나타난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본 건물인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다. 좌우에 각각 방 한 칸을 두었고 나머지는 마루다. 강학당의 오른편에는 전사청(典祀廳 : 춘추 제향 시에 제수를 차리던 곳)이 그리고 마당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고 적힌 비(碑)와 ‘석곡성선생유적비(石谷成先生遺蹟碑)’, ‘황고신선생비(黃皐愼先生遺蹟碑)’가 남아있다. 이중 ‘산고수장(山高水長)’은 ‘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과 냇물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구연서원이 군자를 양성하고 기르는 장소라는 뜻이기도 하단다. 참고로 신권은 요수정을 건축하기 2년 전인 1540년(중종 35) 이곳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신권이 죽고 100년이 더 지난 1694년(숙종 20)에 지방 유림이 구연재 자리에 구연서원을 창건하고 신권을 배향(配享)했다. 이후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 효행이 뛰어나다고 해서 ’동몽교관‘에 천거되었으나 취임은 하지 않은 조선중기 문인)과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조선 영조 때의 노론계 학자)‘를 추가 배향한 뒤 이 지역 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 서원의 한켠에 있는 전사청(典祀廳 : 춘추 제향 시에 제수를 차리던 곳)을 둘러보고 나오니 관수루 옆에 ‘요수신선생장수동(樂水愼先生藏修洞)’라는 문구가 각자(刻字)된 '욕기암(浴沂岩)‘이라는 바위가 누워있다. ‘요수선생이 몸을 감추고 마음을 닦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밖에 낯선 글자들도 보인다. 이 지역의 두 명문인 ‘은진 임씨(恩津 林氏)’ 문중과 ‘거창 신씨(居昌 愼氏)’ 문중이 차곡차곡 새겨온 조상들의 이름이란다. 그렇다면 저 바위는 집단 묘비명인 셈이다. ‘물의 흐름’을 봐야한다는 ‘관수루’에서 수승대 바위를 전쟁터 삼아 시와 이름을 하나라도 더 새겨 넣어 주도권을 쥐어보겠다는 두 문중의 혈투를 요수 신권은 어떻게 봤을까. 그의 상대로 맞세워 놓은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은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처남이 아니었겠는가.
▼ 구연서원을 빠져나오자마자 왼편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이 경승지(景勝地)의 이름을 낳게 한 ‘수승대(搜勝臺)’라는 바위인데 ‘거북바위’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이면서 빚어놓은 커다란 천연 바위 대(臺)다. 높이는 약 10미터, 넓이는 50제곱미터에 이르며 생김새가 마치 거북 같아 ‘구연대(龜淵臺)’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거북바위에는 한시(漢詩)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그중 가장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수승대’로 이름이 바뀌게 만든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화답시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들은 이 지역의 두 명문(名門)인 거창신씨와 은진임씨의 주도권 쟁탈전의 흔적들이란다. 대표적인 예로 신씨 문중이 바위에 ‘요수장수지대(樂水藏修之臺)’라는 글자를 새겼다. 신권이 숨어서 수양하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임씨 문중이 나섰다. 퇴계의 시와 임훈의 화답시를 새겼다. 퇴계 시 옆에는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 새기고 임훈 시 옆에 ‘갈천장구지소(葛川杖屨之所)’라 새겼다. 갈천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끌던 곳이라는 뜻이다. 신씨문중이 ‘숨을 장’ ‘장수지대’라고 하자, 임씨문중은 ‘지팡이 장’자 ‘장수지소’라고 다소 시니컬(cynical)하게 대응한 것이다.
▼ 수승대 앞은 너럭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로 위천이 흐르는데 그 물길 위에다 다리를 놓았다. 구연교((龜淵橋)라는 돌다리인데 외관으로 보아 최근에 들어 설치한 것 같다. 아무튼 이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연반석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다. ‘장주암’의 한쪽에는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인 장주갑(藏酒岬)도 있단다. 이곳에 막걸리를 한 말 넣었다가 스승의 물음에 대답하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받아먹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근처에서 거북바위를 배경으로 선 집사람을 카메라에 담다가 3m가까이 되는 축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후부터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이 되어버렸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에 담아볼 여력이 있었겠는가.
▼ 구연교를 지나면 요수 신권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요수정(樂水亭)이 나타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자연 암반을 그대로 초석(礎石)으로 이용했다. 정자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 난간을 둘렀다. 마룻보가 있는 5량가로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 정연한 부채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했다. 세부 장식의 격조가 높으며 양반을 위한 정자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추운 산간 지역의 기후를 고려해 정자 내부에 방을 놓기도 하는 등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거창의 대표 건축물이란다. 혹자는 이 정자가 수승대의 경관을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구연대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 요수정에서 몇 걸음 더 내려가자 오래 묵은 한옥(韓屋)이 한 채 나타난다. ‘함양재(涵養齋)’라는데 신권선생이 세운 서고(書庫) 겸 강학당(講學堂)이란다. 신권은 요수정을 건축하기 2년 전인 1540년(중종 35)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다음해에는 함양재(涵養齋)를 짓고 그 다음해에 요수정을 지었다. 그만큼 제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물가 바위벼랑에 함양재(涵養齋)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 에필로그(epilogue), 잠깐의 방심으로 인해 화를 입은 불운한 하루가 되어버렸다. 절경에 취해 사진촬영을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딛고 만 것이다. 그만큼 빼어난 절경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니 반주로 마신 술이 과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산우(山友)와 술잔을 나누다가 그만 소주를 한 병 가까이나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취하기 마련인데 거기다 술까지 얼큰하게 취해버렸으니 어찌 사고를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억울하지는 않다. 당분간의 불편함 또한 기쁘게 참을 수 있다. 그 절경의 앞에 서있는 집사람을 카메라에 담다가 당한 사고였으니 말이다. 다만 함께 산행을 했던 일행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내 사소한 부주의가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글로서나마 미안한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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