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피르고스(Pirgos) 마을
여행일 : ‘23. 3. 22(수)-29(수)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 두 번째 방문지는 ‘피르고스 칼리스티스 (Pirgos Kallistis)’. 줄여서 ‘피르고스’라 부르는데, 이아나 파라 마을은 항상 붐비는데 비해 피르고스는 덜 알려져 여유로운 관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인기가 높다. 19세기 초까지 산토리니의 수도였던 곳이라서 고전 건축물과 웅장한 교회 건물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산토리니 제일의 조망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처럼 생긴 산토리니는 푸른 바다, 하얀 벽, 파란 지붕, 그리고 절벽 가옥과 아찔한 골목으로 여행자의 심장을 쿵쿵 두드려주는 세기의 여행지다. 서쪽은 깎아지른 바위절벽, 반면에 오른쪽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해안선을 끼고 있다.
▼ 주차장에 내려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간다. 피르고스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러니 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함은 물론이다. 나중에는 숨이 찰 정도로 가팔라지기도 하지만.
▼ 골목길 바닥은 돌을 깔았다. 아니 바닥에 돌을 깔아놓고 그 틈새를 석회로 채웠다. 콘크리트를 타설하면서 자갈 대신 돌멩이를 넣었다고 여기면 될 듯. 그런 골목길을 잠시 오르자 커다란 교회가 고개를 내민다. ‘크리스토스 교회(Church Christos)’로 팔각 종탑이 눈길을 끈다. 이게 또 5층 높이라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저런 팔각 큐폴라(cupola)는 산토리니(유일하다)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건축학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단다.
▼ 관광객들이 모여드니 기념품 가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컵과 미니어처, 색체가 강렬한 그릇까지 어느 하나 욕심나지 않는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의 초반, 끓어오르는 구매욕을 꾸역꾸역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짐의 무게가 늘어날수록 여행이 힘들어지니까.
▼ 산토리니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마저도 신비롭다. 옛 유적을 본뜬 외관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이끈다. 아니 잔존 유적을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카페나 레스토랑이라고 빠지겠는가. ‘Cava alta’, 지중해 요리로 유명한 곳인데, 예약이 필수란다. 입구에 붙어있는 ‘Crazy donkey’ 팻말은 산토리니에 생산되는 맥주를 곁들이면 분위기 ‘업’된다는 얘기일까? 하나 더, 카페 입구에는 ‘들어올 때는 낯선 사람이지만 나갈 때는 친구이다’라는 글귀가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을 의미하는 ‘philoxenia’라는 단어와 함께 적혀 있었다.
▼ 산토리니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는 마을은 우리네의 옛 달동네처럼 집들이 산비탈에 기대어 지어졌다. 그래선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하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 같다.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옛 성터이자 정상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길을 잃고 말았다. 성채로 오르는 문을 놓쳐버린 탓에 성곽(비잔틴양식이라고 했다) 아래를 한참이나 헤매고 다녔다. 참고로 그리스어로 피르고스(Pirgos)는 ‘Tower’를 의미한다. 중세 때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비탈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그러다 해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성벽 바깥에도 마을이 형성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단다.
▼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성곽을 반 바퀴나 돌았다. 인적이 뚝 끊긴 길은 오랫동안 방치된 성채의 아래로 위태롭게 나있다. 하지만 그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정규 탐방로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특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요리조리 헤매다보면 암굴처럼 생긴 공간을 지나기도 한다. 주택의 아래로 난 통로가 영락없는 ‘굴다리’다.
▼ 벼랑에 기대듯, 아니 계단을 쌓아올리듯 지어놓은 주택은 하나같이 텅 비어있다. 기웃거려보니 텅 빈 공간에 틀만 남은 창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오래 전에 폐허가 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탁 트인 전망도 이 구간의 볼거리다. 산토리니의 북서쪽 끝자락에 들어앉은 이아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왼편에 있는 섬은 ‘티라시아’일 것이다.
▼ 들녘으로 이루어진 동쪽 해안도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의 섬은 ‘Anafi’일 것이다.
▼ 한참을 헤매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오니 관광객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쫓아 성채로 올라갔다.
▼ 옛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건물이 눈에 띈다. 맞다. 안내책자는 피르고스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저 건물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 ‘성 니콜라오스 성당(Agios Nikolaos)’이라고 한다. 1660년에 지어진 지붕이 돔형인 바실리카이며, 성당 입구의 빗돌은 산토리니 섬의 ‘전쟁 기념비’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이 성당은 길 찾기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성당 부근에 성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기 때문이다.
▼ 피르고스의 성채는 15세기에 세워진 산토리니의 다섯 성채 중 하나이다. 이 문은 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데, 외부의 침입이 있을 경우 문을 닫아 주민들을 보호했다.
▼ 피르고스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였고, 1980년까지는 산토리니의 행정 수도였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낡았다. 아니 정상 어림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듯 텅텅 비어있었다. 덕분에 골목을 걷다보면 중세시대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마을 꼭대기에는 ‘카스텔리 성(Kasteli castle)’이 있다. 아니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았다. 성은 15세기 후반 베네치아인들이 당시 지중해에 만연했던 해적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그 필요성이 소멸됐고, 이제는 폐허로 남아 관광객들의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 정상의 높이는 기껏해야 350m쯤 된다고 했다. 하지만 산토리니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란다. 덕분에 산토리니의 모든 방향을 파노라마처럼 둘러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보자. 여행이란 게 본디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가 아니겠는가.
▼ 툭 트인 조망은 산토리니의 칼데라(caldera)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 난간에 피라마을이 걸터앉았다. 남쪽 맨 끄트머리에는 ‘아크로티리’마을이 있다. 땅 속에 파묻혀있던 유적지가 인근에서 발견됐고, 이를 유료 박물관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 시선을 오른쪽, 즉 산토리니의 서북단 끄트머리로 옮기면. 선셋으로 유명한 이아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 반대편, 동쪽해안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평야지대다. 그래선지 공항이 들어서있고, 꽈리 튼 포도나무를 심어놓은 들녘도 눈에 들어온다.
▼ 정상에는 ‘세인트 조지 성당(Saint George Church)’이 있었다. 1680년에 지어진 아치형 바실리카로 예언자 엘리아스(Elias)의 수도원에 소속된 성당이라고 한다. 하나 더, 교회 입구에는 ‘Collection of icons and ecclesiastical objects of Pyrgos’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성당 내부에 이콘 및 성물 컬렉션이 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인기척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아쉬움은 입구의 예수님을 안은 성모상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 정상의 광장은 ‘카페 보르타고(Botargo)’가 야외 홀로 이용하고 있었다.
▼ 피르고스도 눈만 들면 교회다. 이 마을에는 48개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그것도 모두가 정교회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교회이기 때문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니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피르고스를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하이킹코스가 개설되어 있는 모양이다.
▼ 그리스 와인은 신화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특히 이곳 산토리니의 와인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그러니 어찌 와이너리 하나쯤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토리니의 포도재배 역사는 기원전 약 12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착 품종인 아시리티코(Assyritiko) 백포도가 재배되는데, 이로부터 얻어지는 와인은 강한 시트러스 향을 특징으로 한다.
▼ 산토리니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시음을 포함한 투어를 진행하므로, 제조 과정과 함께 신선한 와인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쿠초얀노풀로스 와이너리’. 4대에 걸쳐 와인을 제조하고 있는 쿠초얀노풀로스 가문의 와이너리로, 산토리니의 유명 와이너리답게 이곳도 역시 부설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 마당에는 와인생산에 사용되는 각종 기자재들을 전시해 놓았다. 덩치가 크다보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 박물관으로 안내해주는 저 조형물은 대체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여야 맞을 것 같은데, 하반신은 말이고 상반신만 인간인 ‘켄타우로스’를 닮았다. 신화 속 켄타우로스는 포도주를 마셨을 경우 엄청나게 취하는 것으로 나오던데...
▼ 박물관은 와인을 저장하던 지하 8m 아래 동굴에 만들어 놓았다. 1660년부터 1970년까지 300년간 와인 저장고로 사용하던 동굴에 포도주 제조과정의 단계와 기계류들을 연대순으로 전시했다.
▼ 미로처럼 얽힌 동굴을 걸으며 산토리니 와인에 대해 알아간다. 산토리니 와인의 역사와 재배업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각종 전시물을 배치했다.
▼ 산토리니 와인을 대표하는 ‘빈산토(Vinsanto)’를 담았던 통인가 보다. 산토리니 주민들은 수천 년 전부터 만들어왔던 전통방식을 재현해냈다. 화이트와인을 만드는 ‘아씨리티코(Assyrtiko)’ 품종의 포도를 바로 수확하지 않고 2주 정도 햇볕에 더 노출시켰다가 당도가 훨씬 높아졌을 때 수확한단다. 참고로 빈산토는 섬의 이름인 산토(Santo)와 와인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빈(Vin)’이 합성됐다. 산토리니에서 생산된 와인이 세계적 명성을 떨칠 때 원산지를 표시하기 위해 포장지에 적었는데, 이게 와인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 농원의 쟁기질, 포도나무 가지치기, 과실 수확, 포도 밟기 등 제조과정을 24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를 포함한 14개의 언어로 자동음성 안내를 해주는 번역기도 제공된다.
▼ 와이너리는 포도를 재배하고, 그 수확물로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그 와인은 마트나 카페로 판매된다. 하나의 기업인 셈이다. 그러니 이에 대한 기록은 필수, 박물관은 이때 생긴 기록물들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 이곳은 정교회의 나라. 와이너리를 이끌어온 조상들의 사진과 함께 성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 박물관 투어가 끝나면 20여 종류의 와인이 진열된 시음장으로 안내된다. 하지만 시음은 4가지 종류만 제공된다.
▼ 매장에서의 와인 구매로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함은 물론이다. 참고로 산토리니 와인은 한때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었다. 지금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밀려 지역 특산품쯤으로 취급되지만, 수천 년 전부터 빚어왔다는 전통 와인에 대한 산토리니 주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했다.
▼ 밖으로 나오면 포도밭, 이곳에서 우린 산토리니 특유의 포도나무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껏 보아온 선입견은 떨쳐버려야 한다. 포도나무의 높이가 무릎에도 차지 않을 정도인데, 그게 또 위나 옆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큰 새의 둥지처럼 원형으로 말아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친 바람과 강한 햇빛으로부터의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만들어낸 독특한 가지치기 방식(‘Koulara’ 재배법)으로 인해 생긴 형상이라고 한다.
▼ 와이너리를 빠져나오다 만난 꽃이 하도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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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고원길 1구간(마이산길)
여행일 : ‘24. 1. 6(토)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진안읍 및 마령면 일원
여행코스 : 진안 만남쉼터→마이돈 테마파크→연인의길→통천문→은수사→탑사→화전삼거리→원동촌마을→마령면사무소(거리/시간 : 12.9km, 실제는 14.51km를 4시간 2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 들머리는 ‘진안 만남쉼터’(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TG를 빠져나와 30번 국도(진무로)를 타고 진안으로 온다. 진안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월랑체육공원’, 그 입구에 ‘진안 만남쉼터’가 있다. 참고로 ‘월랑체육공원’은 성묘산 일대에 조성해놓은 근린공원이었으나 공설운동장·문예체육회관·테니스장·게이트볼장 등 각종 체육시설을 갖추면서 2010년 체육공원이 되었다. 하나 더. 월랑(月浪)은 백제 때 이곳에 있었다는 ‘난진아현(難珍阿縣)’이란 고을의 별칭이다(三國史記 및 高麗史). 마이산 자락을 비추는 달빛이 물결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카메라 조작 실수로 사진이 잘못 나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 고샅길·논둑길·밭둑길·숲길·물길·고갯길 등으로 이루어진 ‘진안고원 길’은 길목마다 자연의 속살이 숨어 있다. 14개 구간(총 길이 209km) 모두를 이으면 둥근 원 모양이 되는데, 길은 평균 고도 300m의 100개 마을 그리고 40개의 고개를 지난다.
▼ 1구간인 ‘마이산 길’은 읍내에 위치한 진안만남쉼터에서 출발,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의 한가운데를 넘고, 은수사와 탑사를 지나며 마이산을 둘러보는 길이다. 산을 직접적으로 오르지 않아 부담은 적으면서도 마이산의 핵심 지역을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최근 ‘진안고원 길’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며 코스를 변경했다. 마이산 초입에서 능선으로 올라 금남·호남정맥을 따르다가 탑재를 거쳐 마령면사무소까지 간다.
▼ 길을 나서기 전 ‘6.25참전호국영웅기념탑’에 묵념부터 드려본다. 우리가 웰빙·힐링을 외치며 전국의 산하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저 분들이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이곳 진안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옆의 ‘진안사랑가’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 10 : 19.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진무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용 길을 내놓았다.
▼ 10 : 22. 잠시 후 내려선 사양천의 둑길. 이곳에서 만나는 ‘성산수풀’은 수백 년 전부터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하도 숲이 짙다보니 마을 이름까지도 ‘수풀’이 되었다나? 이곳은 진안시가지가 진안천의 물길을 마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홍수 때 물길이 진안 읍내로 직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제림(防災林)’으로 보면 되겠다.
▼ 10. 26. 진안 읍내를 스쳐가는 초반. ‘근하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길이 ‘ㄷ’자로 휘기도 한다.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붙들어 매도 되겠다. 주요 포인트마다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 10 : 30. 또 다시 만난 하천. 아까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이름도 ‘진안천’에서 ‘사양천’으로 바뀌었다. 보여주는 풍광도 180도로 바뀐다. 밋밋한 시가지 대신 진안의 얼굴마담인 ‘마이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걷는다. 진안에서는 ‘월랑팔경(月浪八景)’ 가운데 으뜸으로 ‘마이귀운(馬耳歸雲)’을 꼽는다. 구름이 감도는 마이산의 자태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마이산이 오늘은 구름 대신 안개에 갇혀버렸다. 그렇다고 ‘마이귀운’까지 내팽개칠 필요야 있겠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을 허리에 두른 마이산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산속으로 파고든다. 참고로 ‘월랑팔경(또는 진안팔경)’의 나머지 일곱은 羌嶺牧笛(강령목적, 강령 목동들의 피리소리), 富貴落照(부귀낙조, 부귀산 저녁노을), 古林暮鐘(고림모종, 고림사 저녁종소리), 鶴川魚艇(학천어정, 학천 고기잡이 배), 牛蹄細雨(우제세우, 가랑비 내리는 우제들 풍경), 南樓曉角(남루효각, 남루의 새벽 고동소리), 羽化齊月(우화제월, 우화산에 둥실 솟은 밝은 달)’로 하나같이 진안읍의 아름다운 풍경을 강조한다.
▼ 탐방로는 ‘사양천’을 끼고 올라간다. 탐방로 곳곳에는 파고라나 벤치를 설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읍민들을 위한 체육공원도 눈에 띈다. 참고로 마이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은 사양저수지에 모인 다음, 사양천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진안천에 합류된다.
▼ 탐방로 바닥은 홍보의 장으로 활용했다. 홍삼과 고추 등 진안의 특산물들을 그 효능과 함께 소개한다. 구입할 수 있는 시기까지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 10 : 40.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길가 ‘마이산 태극길’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같은 이름의 이정표를 심심찮게 만났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태극무늬를 그리며 마이산을 넘도록 길을 내놓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 10 : 45. 잠시 후 ‘내사양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사양골’. 골짜기가 많은 곳, 즉 심심산골의 오지마을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다 ‘해도 명산인 마이산을 비켜간다’고 해서 ‘비킬 사(斜)’에 ‘볕 양(陽)’자를 써 ‘사양동’이 되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 서산에 걸친 해가 이 마을을 비추는 사양낙조(斜陽落照)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를 찾는 이들도 있다.
▼ 마을로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힐링하기 딱 좋은 공원이 걸터앉았다. 마이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니 한번쯤 꼭 올라가보자.(산악회의 배려로 귀경길에 들렀기에 일정이나 소요시간에서 제외시켰다)
▼ ‘미로공원’과 ‘돌담공원’으로 나누었는가 하면, 곳곳에 억새와 핑크뮬리 등을 심어 한껏 멋을 부렸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이산’에 대한 조망으로 더 유명하다. ‘암·수 마이루’ 정자에 오르면 마이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마이산(馬耳山)은 조선 태종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산의 모양새가 ‘말의 귀와 같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라시대에는 서대산, 고려 때는 용출산,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으로 불렸다. 계절마다 이름도 달라진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대를 닮아 ‘돛대봉’, 여름에 수목이 울창해지면 용의 뿔 같다 해서 ‘용각봉(龍角峰)’, 가을은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 된다.
▼ 마이산이 멀게 보인다는 것은 흠. 하지만 흐드러지게 핀 억새꽃을 가슴에 담다보면 그 아쉬움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하나 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차분하게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등 위로를 주는 표지판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 마이산 북부에 위치한 ‘내사양’ 마을은 ‘관광예술단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상가를 포함해 식당(대부분 진안의 명물 흑돼지를 판다)과 숙박업소가 주를 이룬다.
▼ 집사람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집단시설지구는 우리 부부처럼 다른 장소에서 각각 출발한 일행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 10 : 54. 집단 시설지구를 빠져나오면 ‘마이돈 테마파크’. 이름대로 돼지를 주제로 한 공원으로 곳곳에 개성 있는 돼지 조형물들이 있어 사진 찍기 딱 좋다. 돼지체험관에라도 들르면 소시지 만들기, 불고기피자 만들기, 홍삼 아이스크림 만들기 등의 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탐방로는 이 공원을 횡단한다.
▼ 공원 입구. 흑돼지 가족이 길손은 맞는다. 진안군은 ‘깜도야’라는 브랜드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자신들이 기르는 흑돼지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고원지대의 맑은 물과 낮과 밤의 일교차로 사육되기 때문에 육질의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20년쯤 전인가? 진안 흑돼지를 자랑하겠다는 이 고장 인사의 초대를 받았었고, 운장산 산행을 마친 후 회사 직원들과 함께 가마솥에서 통째로 끓인 흑돼지를 맛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때의 기억만 떠올려도 침이 자르르 흐른다면 짐작이 갈지도 모르겠다.
▼ 활짝 웃는 ‘황금 돼지’도 눈에 띈다. ‘웃으면 복 돼지’라나? 그래 오늘 저녁에는 저 돼지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보자. 돼지 자체만으로도 복덩어린데, 황금까지 뒤집어썼으니 ‘로또’ 1등의 번호라도 알려줄지 누가 알겠는가.
▼ 천사금척지향(天賜金尺之鄕)이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하늘이 금으로 된 자를 내려주신 고장’ 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꿈속에서 선인(仙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척(金尺)이 마이산을 뜻한다는 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 개국 후 궁중무용 1호인 ‘금척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 11 : 03. 공원 상부는 ’사양저수지‘. 1957년에 착공해 1962년에 준공한 시쳇말로 손바닥만 한 저수지이다. ‘사양(斜陽)’은 '햇빛이 비켜간다'는 뜻.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라서 빛 드는 시간이 짧았나 보다. 그 방죽은 지금 데크 산책로가 수면을 수놓고 있다. 하지만 난 바람개비가 팽팽 도는 둑길을 걷는다.
▼ 저수지는 생각보다 작았고, 수면은 명경처럼 잔잔했다. 이런 특징 덕분에 사양저수지는 마이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그나저나 두 귀를 쫑긋 세운 마이산이 물속에 잠기면서 커다란 꽃으로 변했다. 그것도 꽃봉오리를 활짝 열면서... 참! 누군가는 저 모양을 보고 수풀 속에 몸을 반쯤 감추고 날개를 펼친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다고 했다.
▼ 제방의 끝. ‘포룡대(鉋龍臺)’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저수지에서 지낸다는 ‘용왕제(龍王祭)’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일 년에 두 번 음력 정월과 7월 백중날에, 제방에 오방기를 세우고 4개의 호롱불을 켜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정오에 제를 올렸다니 말이다.
▼ 11 : 08. 저수지에서 100m쯤 내려오면(마이산의 반대 방향) ‘연인의 길’이 시작되는 ‘만남의 광장’을 만난다. 과거 ‘마이산 구 도로’로 불리던 길이 1.5km의 이 길은 2002년 경 ‘연인의 길’로 리모델링되었고, 마이산의 북부 진입로로 변했다. 또한 차를 타고 마이산 중턱까지 올라 다니던 길은 지금 오롯이 산책용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 길 아래는 진안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진안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용담댐 건설로 사라진 마을들과 이주민, 실향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밖에도 관광예술단지에는 진안홍삼스파, 산약초타운, 가위박물관 등 진안의 대표 관광시설이 밀집해 있다.
▼ 150m쯤 더 걸으면 ‘연인’이라는 간판을 내건 잘 지어진 이층집이 얼굴을 내민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길(1구간)’ 코스가 최근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코스는 이곳에서 ‘연인의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간다. 100만 관광지이자 입장료가 있는 탑사를 경유하는 것보다, 숲길이 좋은 마이산옛길로 변경하는 게 진안고원길의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하나 더. 거리도 12.9km에서 13.2km로 늘어났다.
▼ 연인의 길은 마이산을 모티브로 삼았다. 수마이봉과 암마이봉이 동·서로 솟아오른 ‘마이산’은 마치 부부가 나란히 서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세계 유일의 ‘부부 봉’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 연유이다. 그런 부부 봉의 모습을 착안해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리모델링했다.
▼ 탐방로 곳곳에 만들어놓은 연인을 테마로 한 다양한 조형물이 설렘과 재미를 선사한다. ‘만남의 광장’에는 연인의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하트트리, 핑거하트)이 세워졌고, 잠시 후 만나는 ‘스마일 Zone’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의 환한 미소가 펼쳐진다. 이후로도 연인의 발전단계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 다음은 ‘포옹 Zone’이다. 연인으로 만난 두 남녀, 서로 사귀기로 했으니 포옹쯤이야 허용되지 않겠는가.
▼ ‘뽀뽀 Zone’을 지나면 ‘키스 Zone’이 기다린다. 남녀 간의 사랑도 애교 수준의 뽀뽀를 넘어 이제 진한 애정 표현으로 변한다.
▼ 도중에 ‘마이산 북부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나뉘기도 했다. 하지만 왕복 460m라는 거리, 특히 눈앞에 나타난 가파른 나무계단이 부담스러워 다녀오지는 않았다. 게시된 사진은 ‘마이귀운(馬耳歸雲)’의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 11 : 35. ‘하트 Zone(하나 된 마음으로 사랑을 약속하는 형상)’을 지나자 ‘마이 열차(만남의 광장에서 이곳까지 왕복하는 전기차로 편도 3천원, 왕복 5천원의 탑승료를 받는다)’의 종점(상부 승강장)이다. 탑승시설 말고도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 사랑이 결실을 맺는 ‘사랑마당’은 ‘프로포즈 Zone’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꽃다발을 주며 미래를 약속하는 프로포즈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 이성계와의 인연은 조형물로 전한다. 마이산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신선이 나타나 금척을 주며 삼한의 영토를 잘 다스려보라고 했다는 전설이 깃든 산이다. 조선시대 왕의 의자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도 마이산을 남쪽에서 보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 ‘마이산 story’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 ‘연인의 길’ 안내,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는데, 그중에서도 돼지를 닮은 마이산 등산로가 눈길을 끈다.
▼ 이후부터는 비포장 산책로를 따른다. 이어서 100m 남짓 더 걸으면 사양저수지에서 계단을 따라 곧장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 탐방로는 이제 210개쯤 되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 협곡을 향해 길고 긴 오름길이 펼쳐진다.
▼ 11 : 42.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천왕문이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을 가로지르는 이곳은 은수사와 탑사로 통하는 관문이라 건물이 없어도 천왕문이라 불린다. ‘산태극수태극’의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금남·호남정맥의 주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두 물줄기가 마이산을 중심으로 태극을 이루기 때문이다.
▼ 숫마이봉과는 달리 암마이봉은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안전사고를 예방한다며 입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매년 11월 초부터 다음 해 3월 초까지 출입을 금지한단다.
▼ 반대편에 있는 ‘화엄굴’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숫마이봉의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라도 한 모금 마셔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반대방향(남쪽)으로 내려간다. 이 구간 역시 길고 긴 나무계단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계단의 수가 508개나 된다고 했다.
▼ 11 : 53 - 12 : 02. 계단을 내려서면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은수사(銀水寺)’가 반긴다. 조선 초기 상원사라 했는데 숙종 무렵 터만 남아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정명암(正明庵)’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어졌다가 1920년 사양동(진안읍 단양리)에 살던 이규헌(李圭憲)이 다시 지었는데, 이때 은수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은수사란 이름은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 천연기념물 제386호인 ‘청배실나무’는 은수사의 자랑거리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데, 지형의 특성상 산 밑에서 위로 바람이 불면 청실배나무의 잎이 흔들리며 서로 마찰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 청실배나무 밑동 옆에 물을 담아두면 가지 끝을 향해 역(逆) 고드름이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단다. 하나 더. 은수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380호인 ‘줄사철나무 군락’도 있다.
▼ 마이산(암마이봉) 절벽을 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타포니(taffoni : 풍화혈)라고 불리는 이 구멍들은 역암에서 자갈 사이를 메우고 있는 물질인 매트릭스가 자갈보다 빨리 풍화되는 차별침식으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생겼다. 타포니는 ‘벌집 모양의 자연동굴’을 지칭하는 프랑스 코르시카 섬의 방언으로 세계적으로 진귀한 지질 현상이다.
▼ 이제 돌탑으로 유명한 ‘탑사’로 갈 차례이다. 은수사가 탑사 보다 가파른 위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 12 : 09 – 12 : 28. 잠시 후 이갑용(李甲用, 1860~1957)이 세웠다는 ‘탑사(塔寺)’에 이른다. 1885년 마이산에 들어온 그는 솔잎을 생식하면서 탑을 쌓았다고 한다. 1920년대 초반 초가에 돌미륵불을 안치하고 불공을 드리다가, 1935년 목조함석지붕의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으면서 정식으로 부처님을 모셨다. 이갑용이 98세의 나이로 죽은 뒤, 손자 이왕선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됐단다. 1986년 인법당을 대웅전으로 고쳐 짓고, 1996년 나한전(현재의 영신각)을 지었으며, 1997년 종각과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 탑사는 이갑용 처사가 쌓은 돌탑으로 유명하다. 돌탑들의 형태는 일자형과 원뿔형이 대부분이고 크기는 다양하다. 이 돌탑들은 1800년대 후반 이갑용 처사가 혼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모두 108기의 탑을 만들었다는데, 100여 년이 지난 현재도 80여 기에 달하는 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 더. 탑사의 석탑은 섬세하게 가공된 돌들로 쌓은 여느 탑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막돌허튼식'이라는 조형 양식으로 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거센 강풍이 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그래선지 미국 CNN에서는 마이산 탑사를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사찰 33곳’에 포함시켰다.
▼ 암굴에 모셔놓은 이갑용 처사 상(像). 복전(福田)과 촛불 공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내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고, 깨우치면 부처’라고 했다. 그러니 이갑용 처사를 공양을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참고로 이갑룡은 25세 되던 해에 유·불·선 삼교에 바탕을 둔 용화세계 실현을 꿈꾸며 이곳에 들어왔다. 이어 사람들의 죄를 빌고 창생(蒼生)을 구할 목적으로 30년을 한결같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탑을 쌓았다고 한다.
▼ 섬진강의 발원지는 진안군(백운면 신암리) 원신암마을 상추막이골에 위치한 ‘데미샘’이다. 이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를 ‘천상데미’라 부르는데,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이다. 그런데 마이산의 탑사에 있는 ‘용궁’도 섬진강의 발원지 중 하나로 꼽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 물은 탑영제에서 잠시 머물다가 은천을 이루며, 데미샘에서 흘러 온 물과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만나 옥정호로 흘러간단다.
▼ 108개 탑은 하나같이 백팔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대웅전 뒤, 가장 높은 곳에는 ‘천지탑(天地塔, 전라북도 문화재 제35)’이 있었다. 이갑룡처사가 만 3년의 고행 끝에 완성(1917년)시켰는데, 기공법과 축지법에 가장 많은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부부탑(왼쪽이 음이고 오른쪽이 양)으로,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축조했다. 천지탑 주변 일자형의 33개 탑은 신장탑으로 천지를 감싸고 우주의 33천 세계를 의미한다나?
▼ 탑의 보존에 대한 무한의 의지를 담았다. 탑을 만지지도 말 것이며, 탑신에 돌을 올리지도 말라며 읍소를 한다. 소원을 올리려다가 자칫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대웅전 앞에는 ‘오방탑(五方塔)’이 있다. 사각모성에 서있는 5기의 일자형 신장탑으로 오행과 오방을 상징한단다. 이밖에도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 중앙탑(흔들탑)과 이 탑들을 보호하는 주변의 신장탑들이 제각기 이름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절간을 빠져나오는데 허호석의 ‘마이산’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참고로 1억 년 전, 진안고원은 호수였다. 호수로 쓸려온 모래와 자갈 따위가 물속에서 쌓여 2천m 두께의 역암층이 됐고 7천만 년 전쯤이 됐을 때 땅이 크게 흔들려 역암층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것이 마이산이다. 두 봉우리 중 풍만한 쪽이 암마이봉(해발 686m), 뾰족한 쪽이 수마이봉(680m)이다.
▼ 마이산은 ‘역암층’이다. 역(礫)은 ‘자갈 역’자다. 지각변동으로 자갈, 모래, 퇴적층이 뒤섞여 바위로 굳어지고 풍화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큰 구멍이 생겼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석탑을 쌓아올렸다. 저리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 마이산과의 첫 만남인 집사람. 덕분에 마이산을 3번이나 답사한바 있는 나까지 ‘진안고원 길’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겠다며 세계 일주까지 이어오고 있는 마당에 그녀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 탑사 아래는 작은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불교용품 판매점은 물론이고 식당까지 들어섰다.
▼ 12 : 28. 탑사는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지나야 한다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가람 수호를 하는 천왕문(天王門)이나 불국토로 들어간다는 불이문(不二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찰 3문이 통째로 없는 것이다. 환영의 문구를 담고 있는 저 입석 두 개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탑사를 빠져나오면 길이 둘로 나뉜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말고도 데크길이 숲속을 헤집는데 이용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튼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곳곳에 쉼터용 벤치가 놓여있는가 하면, 마이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안내판도 세웠다.
▼ 12 : 38.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마이산 부부공원’에 이른다. 조선 중기 한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나 부부가 되었다는 조선시대 유일의 부부 시인 담락당(湛樂堂) 하립(1769~1830)과 260여 편의 시를 남겨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를 기리는 공원이다. 남원 서봉방(捿鳳坊)에서 태어나고 생활하던 부부가 이곳 진안(마령)에서도 오래 살았다고 한다.
▼ 공원에는 부부의 시비가 여럿 세워져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 집안의 부부가 과거를 포기하고 진안 산골에서 자영농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집에 돌아가면 청계천 헌책방이라도 한번 들러봐야겠다. 그들의 시집이라도 찾아낼지 누가 알겠는가.
▼ 초입에는 부부의 영정을 모신 명려각(明麗閣)이 들어섰다. 명(明)은 낮과 밤의 음양. 즉 부부를 의미하고 려(麗)는 삼의당 시인의 시문이 너무나 미려(美麗)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옆에는 부부의 시비(詩碑)도 세워놓았다. 참고로 김삼의당과 하립은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둘은 18세 되던 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립은 과거를 위해 한양으로 떠나 오랜 시간 공부에만 매진했고(급제는 못했지만), 김삼의당은 그런 남편을 위해 남원에 머물며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를 조선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다.
▼ 돌탑을 쌓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가 돌멩이 하나 살짝 올려볼 수 있었다.
▼ 12 : 49. 공원을 벗어나면 탑영제(塔影堤)가 길손을 맞는다.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서천으로 유입되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인공호수로 오리배를 탈 수 있는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이 몽환적이기까지 한 호수에는 가장자리의 물 위로 떠 있는 데크길도 내놓았다.
▼ 이후부터는 벚꽃 길을 따른다. 전국에서 가장 늦게 피는 벚꽃으로도 유명한 마이산 벚꽃은 이산묘와 탑사를 잇는 2.5km 구간에 식재되어 있다. 진안고원의 독특한 기후로 인해 수천 그루의 벚꽃이 일시에 개화하여 그 화려함은 전국 최고의 명성을 자랑한다. 수령 20~30년의 마이산 벚꽃은 재래종 산벚꽃으로 깨끗하면서 환상적인 꽃 색깔로 유명하다.
▼ 탑영제 둑에서 바라본 풍광. 앞산이 암마이봉이고 뒤쪽에 상부만 보이는 봉우리가 수마이봉이다. 암수 한 쌍의 봉우리가 솟아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탑영지’는 탑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대로 마이산 봉우리가 호수에 거울처럼 비추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 이곳은 2012년 KBS-2TV에서 방영된 ‘내 딸 서영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주인공 서영이의 부모 고향이 진안군으로 설정되어, 진안의 다양한 명소가 촬영 장소로 활용되었다. 안내판은 MBC-TV의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적고 있었다.
▼ 날씨가 포근한 탓에 ‘역 고드름 현상’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참고로 마이산은 신비스러운 곳으로 알려진다. 그 신비 중 하나가 ‘역 고드름 현상’이다. 겨울철 탑사와 은수사 주변에 물을 그릇에 담아 놓아두면 물이 하늘을 향해 자라면서 기둥이 되어 언다는 것이다.
▼ 그 아쉬움을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으로 달래본다. 보라! 신기하지 않는가.
▼ 13 : 05. ‘금당사(金塘寺)’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하는데, 650년 고구려에서 건너온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자신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고금당(古金塘)’이라는 원래의 터는 이곳에서 1.5km쯤 떨어져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은 후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다. 하나 더. 814년 중국에서 온 혜감(慧鑑)이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화재로 금당사 괘불탱(보물 제1266호)와 목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을 갖고 있다.
▼ 13 : 10 - 13 : 45. 탐방로는 주차장에 닿기 전 집단시설지구부터 들른다. 등갈비를 숯불로 직접 굽는 모습으로도 부족해 코로는 그 냄새까지 솔솔 들어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주삼아 소주 한 병을 냉큼 비우고 일어서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마이산의 또 다른 명물인 ‘대왕꽈배기’다. 페이스트리로 되어 있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는데 이 또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꽈배기에 도너츠, 거기다 인삼튀김까지 두둑하게 챙기니 보는 즐거움에 먹는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이런 맛에 트래킹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 집단시설지구를 벗어나자 탐방로는 도로를 따라간다. 왕복 2차선의 도로는 통행량이 많은 편.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따로 내놓았다. 쉼터를 겸한 소공원을 여럿 만들었는가 하면, 마이산의 볼거리를 자랑하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했다.
▼ 14 : 00 – 14 : 10. 남부주차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이산묘(駬山廟,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가 나온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들이 친친계(親親契, 송병선 제자)와 현현계(賢賢契, 최익현 제자)를 구성하여 스승의 뜻을 기리고자 1925년 ‘이산정사(駬山精舍)’를 건립했다. 1900년대 의병활동 근거지였던 곳이다. 후에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비롯해 을사년 이후 순국한 애국선열, 조선의 명현들을 포함한 79위를 배향하면서 ‘이산묘’가 됐다.
▼ 이산묘에는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모시는 회덕전(懷德殿), 을사늑약 이후의 순국선열 34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 조선시대 명현 40위를 모신 영모사(永慕祠)가 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김구, 신익희 등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석과 편액, 암각서 등이 있다.
▼ 이산묘 입구, 거대한 바위절벽(용바위)은 암각서군(巖刻書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6호)으로 불린다. 용암(龍岩), 주필대(駐蹕臺), 마이동천(馬耳洞天), 비례물동(非禮勿動),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받는다.
▼ 마이동천(馬耳洞天)과 주필대(駐蹕臺). 주필(駐蹕)은 임금이 거둥할 때 잠시 머물거나 묵고 간다는 뜻으로 이성계가 왔다 간 것을 기념해 새긴 것이다.
▼ 구한말 항일지사인 송병선과 그 문인들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연재 송병선의 제자가 이산정사 설립을 발의한 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 더. 이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새겨진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은 해방 후 백범 김구선생이 쓴 글로 ‘대한민국이 해와 달처럼 오래오래 밝게 빛나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 절벽 앞에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湖南義兵倡義同盟團結成址)’란 빗돌도 세워져 있었다. 1907년 이석용 의병장이 이곳에서 항일 의병을 결성하면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란 단을 쌓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정재 이석용을 중심으로 진안·임실·순창·장수·남원 등에서 일어난 1000명 호남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기 위한 빗돌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석용은 동지들과 진안, 영광, 고창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일경에 체포돼 191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14 : 10 – 14 : 14, 이산묘 맞은편 충혼의 다리 너머에는 ‘독립유공자추모탑’이 세워져 있었다.
▼ 독립유공자추모탑 뒤편에서도 암각된 글자를 찾아볼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동(非禮勿動)’, 고종이 호남 유림에 내린 글씨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란다.
▼ 하지만 고종이 의병 창의를 독려한 의미로도 해석된다.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본을 되찾는 일이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뜻이란다.
▼ 탐방로는 ‘마이산남로’를 따라간다. 아니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길을 따로 내놓았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배려도 돋보인다. 곳곳에 쉼터와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마이산 타포니’, ‘마이산 백악기 역암’, 호남의병창의동맹단 터인 ‘용암’ 등 마이산과 관련된 풍물들을 소개하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 14 : 24. 엄청나게 넓은 주차장도 만난다. 남부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1km. 마이산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다. 어쩌면 벚꽃 구경을 온 상춘객들을 위한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 14 : 34. ‘화전교’를 건너면 ‘화전삼거리’이다. ‘마이산도립공원’의 입구이기도 한데, 아까 연인의 길 초입에서 헤어졌던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새로이 개설한 코스가 한남·금남정맥과 탑재를 넘고, 은천마을을 거친 다음 ‘은천’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 이후부터는 ‘은천천’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강둑 위로 시멘트포장길이 나있다.
▼ 오른쪽으로는 맑은 ‘은천(隱川)’이 흐른다. 진안읍 가림리에서 발원하여 마령면 강정리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10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원래 이름은 ‘음천(陰川)’, 냇물이 그늘진 곳으로 흐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말엽에 은천으로 바뀌었다. 아무튼 수량이 풍부한데다 타포니 현상의 벼랑까지 자주 만나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서 연출해준다.
▼ 마이산의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발달한 역암이다. 내부 팽창에 의한 차별침식으로 바위 표면에 움푹 파인 부분이 많다. ‘타포니 현상’이다. 그런데 저 바위는 움푹움푹 파인 것으로도 모자라 칼로 내리치기라도 한 듯이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 14 : 42. ‘중동촌교’ 다리를 건너면 길은 잠시 은천의 천변을 떠난다. 그리고는 사행천이 만들어놓은 자그마한 들녘의 가장자리를 따라 ‘원동촌마을’로 간다.
▼ 14 : 49. ‘원동촌마을’. 법정 동리인 ‘동촌리(東村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원동촌·서촌·화금) 중 하나로 마을의 역사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덕왕 때 ‘화전동(花田東)’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1413년 진안감무(鎭安監務)가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촌’으로 바꿨다고 한다. 하나 더. 마을 앞에는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듯 굵직한 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마을 숲’으로 불리는 방풍림이 아닐까 싶다. 아니 마을의 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일지도 모르겠다.
▼ 마을은 어딘가 먼 곳에서 꿈꿔오던 풍경을 보여준다. 담벼락은 마을 이야기와 문화를 담은 민화로 가득했고, 이끼가 가득 올라온 노거수들은 신령스러움까지 전해준다. 정월 초사흘에 찾아오면 당산제도 구경할 수 있단다.
▼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숨은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동촌 양곡정미소’이다. 마을 단위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지만 현재 가동을 멈춘 상태다. 그런데 그게 더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소음 하나 없는 교요함이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움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르겠다.
▼ 14 : 54. 마을 앞 ‘동촌교’ 다리를 건너 30번 국도(진무로)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진안고원 길’이 국도를 따르지는 않는다. 또 다시 ‘은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국도를 따라가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보다 10분이라도 먼저 도착하려면 은천의 둑길로 에돌아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산악회 운영진으로부터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지만...주어진 시간보다 15분 정도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 12 : 14. 날머리인 ‘마령면사무소’는 들러볼 수 없었다. 산악회버스가 면소재지 입구인 ‘마령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도착했다지만 식사까지 마친 회원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한가하게 면사무소까지 다녀올 수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아무튼 오늘은 4시간 25분을 걸었다. 앱이 14.5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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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 : ‘23. 3. 22(수)-29(수)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 첫 방문지는 ‘메사리아’마을이다. 3일 동안 머무를 호텔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섬의 동쪽 해변과 인접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있는데, 인근에 ‘산토리니 공항’이 위치하고 있다.
▼ 산토리니는 ‘에게 해’에 있는 작은 섬이다. 때문에 피레우스 항(아테네의 외항으로 최고의 산업항구다)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니 돈을 조금 더 쓰고 비행기(약45분)로 들어갈 수도 있다. 배도 급행 쾌속선(약4시간)과 완행 페리(약 8시간)로 나뉜다.
▼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처럼 생긴 산토리니는 푸른 바다, 하얀 벽, 파란 지붕, 그리고 절벽 가옥과 아찔한 골목으로 여행자의 심장을 쿵쿵 두드려주는 세기의 여행지다. 서쪽은 깎아지른 바위절벽, 반면에 오른쪽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해안선을 끼고 있다.
▼ 여행사는 이동수단 중 가장 싼 ‘완행 페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나눠주는 아침식사 대용 도시락(빵·쥬스·사과·생수)를 하나씩 챙겨들고 승선인원이 2,500명이나 된다는 초대형 선박 ‘블루 스타’에 오른다. 좌석은 이코노미. VIP나 침대석 등 선택의 폭이 넓으나 여행사는 이 역시도 가장 싼 좌석을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 안에 식당·카페·미니마켓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이용에 어려움은 없다.
▼ 완행 페리이어선지 산토리니로 가는 도중 두 곳을 경유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들른 섬은 ‘파로스(Paros)’. 에게 해에 있는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낙소스 다음으로 큰 섬이며, 반투명한 백색의 파리아 대리석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 이 섬은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한다. 신화 속 ‘파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던 메넬라오스가 탄 귀향선의 선장 이름이다. 그는 메넬라오스 일행이 풍랑에 밀려 이집트 연안의 섬에 표착했을 때 뱀에 물려 사망한다. 그리고 그 섬의 이름이 됐다.
▼ 선창은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배를 빠져나가는 차량들도 꽤 여럿이다. 참고로 블루스타 호는 사람 말고도 꽤 많은 숫자의 차량을 함께 태운다. 내부에는 간단한 음료를 즐길 수 있는 바와 레스토랑, 선물 용품점이 있으며 좌석은 흡연석과 금연석으로 구분된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구비돼 있어 배에서도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 두 번째로 들른 섬은 낙소스(Naxos).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의 미궁에서 빠져나온 테세우스가 잠든 아리아드네를 버려두고 간 섬으로 유명하다. 아리아드네는 축제와 술의 신이자 낙소스의 수호신인 디오니소스에게 발견되어 그의 아내가 된다. 죽은 뒤에는 제우스신의 배려로 ‘북쪽왕관자리’라는 별자리가 되어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 섬의 끄트머리에 떡하니 걸터앉은 저 유적은 아폴론 신전의 하나만 남은 문이라고 한다.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의 유적인데, 다른 부분은 다 무너져 돌무더기로만 남아있고 저 문만 온전하게 남아있다나? 아무튼 낙소스의 상징처럼 항구와 함께 그림 같은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패스트푸드로 때운 점심이 부실해 컵라면까지 소환할 수밖에 없었던 긴 여정, 잠을 청하려고 산 맥주는 소주까지 섞어가며 마셨다. 그렇게 8시간을 보낸 후에야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산토리니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 뱃전에서 만난 첫 도시는 ‘이아마을’이다. 산토리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산토리니 여행의 중심이 된다. 특히 저 마을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은 ‘세계 3대 일몰’로 꼽힌다.
▼ 두 번째로 얼굴을 내미는 건 산토리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피라마을’. 에게 해와 화산절벽이 만나는 칼데라 지형에 매달려 있다.
▼ ‘갈 지(之)’자를 써가며 항구(old port)로 내려가는 길이 선명하다. 피라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코스로, 대부분은 당나귀를 타고 저 길을 따라 바닷가까지 내려온다.
▼ 섬은 온통 바위, 그것도 서슬 시퍼런 절벽으로 이루어졌다. 화산 폭발로 인해 섬이 쪼개지면서 생긴 단애라고 한다.
▼ 수직의 바위절벽 위에 하얀 마을이 걸터앉았다. 잡티가 하나도 없는 순백의 마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 잠시 후 도착한 ‘아티니오스(Athinios)’항은 천 길 낭떠러지 아래 있었다. 절벽을 깎아 땅을 만들고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항구를 조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뒤로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가 보인다. 절벽을 깎아 길을 냈는데, 한 번에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올라간다.
▼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그 배를 타려는 또 다른 사람들로 선착장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민박집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우르르 몰려들기도 한다. 본격적인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이 정도라면 산토리니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섬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맞다. 성수기인 7~8월에는 저렇게 큰 페리인데도 좌석 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 항구에는 카페, 레스토랑,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호텔을 연결해주는 안내소도 눈에 띈다. 하지만 간판의 대부분은 ‘렌터카’가 차지하고 있었다. 산토리니에서는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깎아지른 바위절벽을 기다시피 오르고 있는 차량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굼벵이 걸음으로 기다시피 오르고 있다. 바위절벽을 깎아 길을 내가보니 폭에 한계가 있었나 보다. 거기에 조금 전 크루즈에서 내린 차량들이 한꺼번에 올라가면서 체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말이다.
▼ 숙소는 메사리아 마을에 있는 ‘칼마 호텔’이다. 3성급의 자그만 호텔이지만 화이트와 블루가 예술에 가깝게 어우러지는 조화, 산토리니가 자랑하는 시그니처 컬러이다. 거기에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뛰어난 ‘뷰’를 더했다.
▼ 제법 큰 수영장도 있었다. 하지만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물은 채워놓지 않았다.
▼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발코니도 자랑거리다. 덕분에 우린 몽키 맥주(옐로우·레드·크레이지가 출시되고 있었다)와 우조(Ouzo)로 피로연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우조의 야릇한 향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우조는 포도를 증류시킨 40도가 넘는 독주다. 거기에 아니스 향을 가미했다. 때문에 치약냄새가 나서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 발코니에서는 산토리니의 다양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구릉지는 기본, 황폐하지만 산도 있었고, 바다 방향으로는 작지만 들녘도 분포되어 있었다.
▼ 이제 메사리아 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메사리아는 시골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작은 마을이다. 베이커리나 카페, 슈퍼마켓, 렌터카서비스, 주유소, 문구점 같은 상점들도 사이좋게 하나씩 있을 정도, 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특히 레스토랑은 세 개나 눈에 띈다. 그게 메뉴 선택의 폭을 넓일 수 있었고, 홀 매니저가 추천해 준 메뉴(해산물과 육류를 각각 ‘믹스 그릴’로)로 품격 있는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맥주와 우조(그리스 전통주)로 반주를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 ’메사리아‘ 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이아나 피라 마을처럼 입소문을 탄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항이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일부 관광객들이 숙소로 이용하는 정도. 때문에 길거리도 텅 비었다. 자유 일정으로 편성된 우리 일행(30명이나 되었지만)이 전부였을 정도...
▼ 찾는 이들이 드물지만 이곳 역시 산토리니임은 분명하다. 하얀 마을로 대변되는 ‘산토리니’. 그래선지 공원의 나무들까지도 아랫도리를 하얗게 칠해놓았다.
▼ 가로수는 ‘유칼립투스 나무(올리브인줄 알았는데 일행이 고쳐준다)’라고 했다. 그나저나 수령이 얼마나 오래되었기에 저렇게 굵을까?
▼ 도로변 소공원을 지키는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영문 표기가 없는데다 물어볼만한 주민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튼 그리스를 여행하다보면 저런 동상들을 시도 때도 없이 만나게 된다.
▼ 안으로 들어가자 돌로 지은 화려한 주택이 여럿 눈에 띈다. 하지만 하나같이 텅 비어있었다. 창문도 떨어져나간 지 이미 오래다. 현지 가이드는 이곳에 고급 주택단지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폐허가 되었는지는 그녀도 모른다고 했다.
▼ 조금 더 들어가니 Feggaropetra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하단에는 traditional cave house라고 적어놓았다. Feggaropetra라는 이름의 전통 동굴 집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동굴 집’은 산토리니의 전통 가옥 중 하나다.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긴 연질의 암벽을 파서 집을 지었다.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 그러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얼마나 아름다운 장소였으면 6월의 탄생석인 월장석(moonstone)으로 이름을 삼았겠는가.
▼ 상상속의 집을 그려가며 잠시 오르자 연질의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바위벽에는 문도 여럿 달려있다. 동굴 가옥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산토리니는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긴 섬이다. 섬 주민들은 나무가 자라기 힘든 건조하고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나무로 지은 집 대신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지층을 파서 만든 동굴형 주택을 통해 그들만의 특별한 주거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 하지만 절벽 앞 공터는 웃자란 잡초로 무성했고, 눈에 들어오는 문들도 하나같이 유리가 없었다. 주민들이 떠난 지 이미 오래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저런 곳에서 살까 싶다. 그나저나 폐허로 변한 동굴가옥과 그 위에 지어진 현대식 주택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 마을에는 작은 공원이 여럿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올리브나무 그늘에서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쌍쌍으로 그네까지 타가면서...
▼ 담장 너머에서는 레몬이 무럭무럭 익어간다. 저 철망은 오가는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한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 반대편 골목도 걸어보기로 했다. 메사리아 마을은 작다. 하지만 아담한 것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골목을 돌아다니다보면 때맞춰 울리는 종소리도 들을 수 있다.
▼ 그리스정교회의 예배당 역시 하얀 벽에 파란 지붕, 산토리니의 시그니처를 고집한다. 그런데 교회가 많아도 너무 많다. 동네 골목까지 비집고 들어온 우리나라의 카페만큼이나...
▼ 또 다른 정교회. 그런데 하나같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안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교회는 크건 작건 간에 대부분이 하얀색 벽에 파란색 지붕 그리고 종 3개 또는 5개가 구멍마다 달린 종탑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저렇게 예쁜 디자인으로 교회의 모습을 통일적으로 짓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 이곳은 민주주의의 요람이라는 그리스, 민주주의는 획일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산토리니의 시그니처를 벗어난 순백의 교회 하나쯤 없겠는가.
▼ 하도 많다보니 교회끼리 겹치기도 한다. 맞다. 그리스는 국민의 98%가 ‘그리스정교’를 믿는다고 했다.
▼ 특이하게 생긴 교회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톨릭 국가에서야 흔하겠지만 그리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외형을 지녔다.
▼ 무턱대고 들어선 어느 예배당, 마당의 저 독수리 조형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 산토리니에서의 자유일정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오는 도중 또 한 번의 행운이 주어졌다. ‘블루 스타’호의 갑판에서 에게 해를 붉게 물들이며 사그라지는 해를 눈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해가 서서히 지면서 노을빛이 수평선을 따라 그려지는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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