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수) - 6.5(수)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첫째 날 : 소피아(SOFIA)
특징 : 인천에서 이스탄불을 거쳐 도착하는 소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이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다. 푸른 숲의 공원이 많아 ‘녹색의 도시’로도 불리는 이 도시는 고대에는 트라키아인의 식민지였다. 29년 로마에게 점령된 후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는 군사근거지가 되었으며 이때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그 후 고트족(族)과 훈족에게 파괴되었으나,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특히 이곳은 슬라브족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성채로 큰 몫을 했다. 809∼1018년 불가리아 제1왕국, 1194∼1386년 비잔틴, 14세기 말부터는 투르크의 지배하에 놓여 발칸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지점이 되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에게 점령되었고, 이듬해 불가리아인에게 넘어가 79년 수도가 되면서 행정·사법의 중심을 이루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만큼 역사적으로 귀중한 유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유명한 건축물로는 6세기에 건축된 성 소피아성당,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성당, 회교사원 등 로마·비잔틴·투르크 등의 지배 하에서 건축된 유적들이 많이 있다.

▼ 소피아 여행의 시작은 대통령궁 근처에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근처 지하에서 발견된 ‘세르디카의 유적(Arheological Remains)’을 먼저 둘러보는 것으로 동선(動線)이 짜여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세르디카(Serdica)’는 트라키아 계열의 세르덴 사람들이 만든 도시로 현재 소피아 구도심 지역에 위치한다. 세르디카의 문화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마케도니아와 로마 문화에 흡수되었으며,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98-117) 때 전성기를 누렸다. 광장과 극장, 목욕탕 같은 공공건물이 들어섰고 사원도 세워졌다. 그리고 2세기 말에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도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지하에서 발견되는 유적 대부분은 기원후 로마시대 만들어진 것이다.


▼ 이 유적은 3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2~14세기, 이곳에는 ‘세르디카(Serdica)’라는 도시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유적은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되겠다.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니 말이다. 이들 유적은 현재 지하에 있다. 2004년 대통령궁과 정부청사 그리고 구 공산당 본부로 연결되는 지하도를 건설하다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동문으로부터 300m쯤 떨어진 곳에서 두개의 원형경기장이 발굴되기도 했다. 2세기에서 4세기까지 건설된 것으로, 5천에서 1만 명 사이의 관중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단다.

▼ 유적지 한켠에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곽의 모형과 발굴 작업에 대한 기록들을 전시해 놓았다.

▼ 유적지의 한쪽 귀퉁이에는 ‘성 페트카 지하교회(Sveta Petka Church)’가 있다. 구 공산당 본부 앞 광장에서 볼 때 지붕만 땅 위로 올라와 있는 건물이다. 이 교회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14세기에 건축되었는데 투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어졌다고 한다. 투르크인으로부터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소피아인들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라 하겠다. 교회 이름은 불가리아의 여성 성인인 ‘성 페트카’에서 따왔다고 한다. 창문도 없는 외관에 소박한 벽돌과 콘트리트 반죽으로 지어졌지만 고대 로마 사원을 기초로 해서 반원통형 돔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되어서 중세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도 손꼽힌다. 내부로 들어가면 소박한 외관과 달리 장식이 생각보다 화려하다. 15세기, 17세기, 19세기 때 그려진 예수의 일생에 관한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 반대편에는 ‘바냐바시 모스크(Banya Bashi Mosque)’가 있다. 1576년 터키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로 둥근 돔(dome)과 하늘 높이 치솟은 첨탑(minaret)이 누가 봐도 회교사원인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이 모스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참고로 ‘바냐바시’라는 이름은 건물 옆에 터키어로 목욕탕인 ‘바냐’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과거 소피아에는 70여 개의 회교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반야바시 모스크 하나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단다.


▼ 모스크 앞에는 분수공원이 있고 그 건너에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들어서 있다. 누가 봐도 궁전(宮殿)급으로 보이는 근사한 건물이지만 공중목욕탕인 ‘소피아온천(Mineral Bath of Sofia)’이라고 한다. 191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용도에 맞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수온 46.8℃짜리 온천수가 류머티즘과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참고로 우측의 길쭉한 기둥은 목욕탕 시절 사용하던 굴뚝이란다.


▼ 건물의 한쪽 귀퉁이에는 식수대(食水臺)를 만들어 놓았다. 오직 마시는 용도로만 사용하라는 경고판의 문구가 재미있다. ‘목욕과 세탁은 물론이고 설거지도 안 된단다(No bathing, no washing, and no washing-up)’, 사진에는 없지만 약수터도 만들어져 있었다. 커다란 물통에다 물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걸로 보아 식수(食水)로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다음은 광장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아치형 문을 통과하자마자 광장으로 연결된다.

▼ 광장으로 가는 길가에 부서진 바위덩이들이 널려있다. 근처에서 출토된 유물들일 것이다.

▼ 잠시 후 ‘스베타 네델리아 광장(Sveta Nedelya Square)’에 이른다. 과거에는 ‘레닌광장’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닌의 거대한 동상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화가 된 지금은 소피아 동상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광장의 이름도 ‘네델리아’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 소피아 여신상은 왼손엔 부엉이 오른손엔 월계관을 들고 있다. 부엉이는 어두운 밤에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둡고 보이지 않는 곳에도 지혜의 여신이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어색한 점도 보인다. 어깨에 올라앉아 있어야 할 부엉이가 여신의 팔뚝에 앉아 있는 것이다. 팔이 저릴 텐데도 말이다.

▼ 광장은 예로부터 소피아의 중심이었으며 지금도 주요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전차의 기점이 됨은 물론이다. 광장 주변에는 구공산당본부(아래 사진의 중앙)과 성 네델리아교회, 대통령궁과 쉐라톤호텔, 국영 백화점(TSUM) 등이 위치해 있다.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구(舊) ‘공산당본부(The Council of Ministers building)’는 현재 의원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공산당본부로 사용될 때에는 로켓 같은 첨탑의 꼭대기에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거대한 별이 매달려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단다. 1990년 민주화 시위 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 성 네델리아교회(Sveta Nedelya Cathedral)는 ‘불가리아정교회’의 예배당으로 1856년~1863년에 건축된 것이다. 네오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인 거대한 돔과 화려한 벽화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특징인 이 교회는 10세기경 처음 지어질 당시 자그만 목조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스만 왕조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나서 주변의 여러 교회와 신학교들이 모여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교회로 발전되었단다. 1925년에는 이곳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한 황제를 노려 폭탄을 설치한 것인데 무려 1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단다. 황제는 다행히 무사했다. 폭탄 사건 이후 망가진 교회는 다시 복원되었고, 정면 벽에는 테러 당시 희생자를 기리는 문구가 부착돼 있다. 참고로 ‘네델리아’는 일요일이란 뜻이란다.

▼ 다음은 비토사거리로 갈 차례이다. 이동 중에 대리석 석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불가리아 대법원(Palace of Justice)’이란다. 웅장한 외모의 건물 앞은 두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다. 사자는 불가리아를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우리가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듯이 이곳 불가리아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땅 모양이 사자처럼 생겼다고 여긴단다.


▼ 그런데 사자의 걸어가는 모양이 많이 어색해 보인다. 오른쪽 앞발과 뒷발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왼쪽 발들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멍청한 사자(idiot lion)’라고 적은 글을 본 것도 같다. 그는 작가의 실수로 인해 졸지에 멍청이가 되어버린 불쌍한 사자라고 적었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앞발과 뒷발을 번갈아가며 움직이는 게 정상이지만 어떨 때는 두 발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작가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기에 이론을 달아봤다.

▼ 거리는 20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1900년 전후의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도 가끔 보인다. 그런데 다른 류의 건물들이 혼재해 있는데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늦게 지어진 건물들도 하나같이 벽면에다 예술성을 더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옛 모습을 유지하려는 불가리아인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 아닐까 싶다.

▼ 대중교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트램(tram, 路面電車)이 지나가는 게 보인다. 이밖에도 지하철이나 버스, 트롤리버스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운행시간이 대체로 정확한데다 정류장도 도시 곳곳에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이용이 편리하단다.

▼ 명색이 관광지인데 ‘거리의 악사’라고 없겠는가. 이른 오후라서 인지는 몰라도 호응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앞에 놓은 바이올린 케이스도 텅 비어있었음은 물론이다.

▼ 잠시 후 ‘비토사(Vitosha)’ 거리에 도착했다. 소피아 구도심에서 남쪽으로 뻗은 이곳은 소피아 최대의 번화가로 명품 상가들과 토산품가게, 카페들이 밀집해 있다. 보행자 거리로 조성돼 산책도 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매우 쾌적한 장소다. 저녁에는 젊은이들의 생동감도 느껴볼 수 있다고 했는데, 한낮이어선지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 걷다보면 해발 2290m인 비토사산(Vitosha Mt.)이 조망된다. 거리의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누군가는 최고봉인 클라니체흐(Cherni Vrah)도 눈에 띈다고 했는데 어떤 봉우리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장미’로 만든 제품들을 파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장미비누’는 물론이고 ‘장미오일’과 ‘장미수’도 판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끄는 ‘장미오일’은 전 세계 생산량의 85%를 이곳 불가리아에서 책임질 정도란다. 불가리아의 별명이 '발칸의 붉은 장미'가 된 이유이다. 하지만 집사람의 관심은 불가리아의 또 다른 특산품인 ‘유산균’에 쏠려 있었다. 균(菌)이 아니라 알약을 팔고 있던 탓에 구입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 이 거리의 특징은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주문을 한 뒤, 화장실 이용 방법을 물어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스타박스에서 집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나는 물론 이 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는 ‘카메니차’ 맥주다. 슈멘스코와 자고르카, 스토리치노, 피린스코 등 불가리아에서 생산되는 맥주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가 ‘카메니차’이기 때문이다. 경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은 여행자라면 가격이 가장 싼 ‘피린스코’를 주문하면 된다. 참고로 이곳 불가리아는 기후적으로 맥주를 비롯해 와인 및 각종 주류의 맛이 뛰어나다고 유럽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국가 중 하나다. 불가리아 와인과 맥주는 높은 질에 비해 브랜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여타 유럽산 제품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 다시 돌아온 대통령궁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마음 내키는 곳을 찾아보라는 모양이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대통령궁과 쉐라톤호텔의 사이에 숨듯 들어앉은 ‘성 게오르기 교회(Rotunda Sveti Georgi Pobedonosets)이다.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목욕탕으로 태어나(2세기) 교회로 자랐고(5세기 역할변경) 시집가서 모스크로 살다가(16세기 튀르크에 정복당함), 이혼 후 교회로 돌아온 사연 많은 건물이다. 이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로마 제국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는 트라키아의 세르디족의 정착지였던 이곳에 매료되어 제국의 소도로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도로까지는 만들지 못하고 훌륭한 건축물들을 많이 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은 게오르기 교회 하나 밖에 없어 로마제국 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 되었다.

▼ 교회는 로마시대 목욕탕과 연결된 지름 9.5m에 높이가 13.8m인 원형 건물로 세워졌다. 수도와 난방시설이 잘된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귀족들의 휴게소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교회는 9세기 무렵 불가리아 사람들에 의해 ’성 게오르기 교회‘로 불리게 된다. 디아클레티아누스 때 박해를 받다 죽은 성인 게오르기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이때 교회 내부에 불가리아식 벽화가 그려졌고,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변해온 회화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 1183년까지 불가리아의 수호성인 이반 릴스키(Ivan Rilski)의 유해가 모셔지기도 했단다.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 대통령의 집무실이 들어있는 건물이다. ‘대통령궁(The Presidency building)’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도 썩 대단해 보이지 않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절반은 호텔로 쓰고 절반만 대통령 집무실로 쓴다고 한다. 소박한 국정운영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건물의 정면은 전통복장을 입은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매일 정오에 치르는 교대식이 볼만한 것으로 알려진다. 보초를 서고 있는 문의 위쪽에도 불가리아의 상징인 ‘사자문장’을 붙여놓았다.


▼ 이젠 소피아 투어의 종착지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로 갈 차례이다. 가는 길에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고고학박물관(National History Museum)’이다. 불가리아의 고대유적과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곳이란다. 그래서인지 연구소 앞에는 고대의 주춧돌, 기둥, 묘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BC 3,000~4,000년 전의 유물이 저곳에 전시되어 있는데도 가이드의 뒤꽁무니만 쫒다보니 눈도장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부터 알아왔더라면 자유 시간 때 들러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겠다.


▼ 두 번째는 ‘국립민속지리박물관(national ethnographic museum)’과 국립미술관 ‘national art gallery)’이다. 불가리아 왕궁이었던 건물인데 이곳에는 불가리아 고유의 인종 및 문화에 기여해 온 민속의상과 청동기, 금속 공예품, 목각화, 도자기, 직물 및 전통 자수품,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불가리아 출신 화가들의 작품도 물론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 거리는 중세풍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누군가는 특별히 지도를 들고 찾지 않더라도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기독교, 이슬람, 유대인들의 기념물을 함께 만날 수 있는 도시가 소피아라고 했다.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이 충돌했던 발칸지역 특성이 도시 전체에 남아있다면서 말이다. 그런 특성을 살리기라도 했었는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건물들까지도 중세풍의 외모를 지녔다.


▼ 그렇다고 모든 건물이 다 중세풍인 것은 아니다. 불가리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답게 현대식건물들도 즐비했다.

▼ 소피아는 '녹색의 도시'라는 별칭처럼 크고 작은 공원에 우거진 숲이 많아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로 가다 길에는 그런 공원도 지나게 된다. 공원에는 여러 종류의 조각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치켜 든 채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소망하는 동상이 보이는가 하면, 포즈가 가지각색인 군상(群像)도 세워져 있다. 머리를 숙이고 고뇌하는 사람, 한손을 이마에 대고 고민하는 사람, 두 손을 들고 소원을 비는 사람, 칼이나 막대기를 들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 어깨를 서로 감싸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들이다. 그 옆에는 깃발을 들고선 동상도 보인다.


▼ 길 건너편에는 왕관을 쓴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양손에 칼과 십자가를 든 형상인데 키릴문자로 적혀있어서 누군지는 알아 볼 수 없었다. 동상의 앞에 꽃다발이 놓여있는 걸로 보아 독립영웅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 공원 근처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는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물건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자수품과 의류, 그림, 오래된 시계나 카메라, 총·칼 같은 전쟁무기류 등을 팔고 있었는데, 특히 목판이나 동판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이콘(icon : 聖畵)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보다 좀 더 원색적이고 사실적이다. 예술성은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 조금 더 걷자 소피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Alexandar Nevski Memorial Church)’이 나온다. 러시아의 건축가 ‘알렉산더 포만체프’의 설계로 1912년에 지어졌는데,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발칸반도 최대의 사원이자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라고 한다. 40년이 걸려 완공된 이 건물은 높이 60m의 금색 돔을 비롯하여 12개의 돔으로 이루어진 비잔틴 양식이다. 불가리아 독립의 계기가 된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전사한 20만 명의 러시아 병사를 위령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단다.

▼ 12개의 돔으로 이루어지 성당의 외관은 아름답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빛을 뿜어내기까지 한단다. 전하는 얘기로는 금색 돔을 위해 러시아에서 금 20톤을 기증 받았다고 한다. 내부 장식 또한 화려하다. 이태리의 대리석, 이집트의 설화석고 브라질의 목재와 금으로 장식 되어 있다. 벽면에는 러시아와 불가리아의 유명화가들이 그린 성화들이 가득하여 보는 이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제대가 보인다. 가운데 문이 있고, 양 옆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림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동방정교에서 모두 그렇듯이 최후의 만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 제대 위에는 화려한 아치가 감싸고 있다. 성당 내부의 3개 돔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부는 하느님을 말하고 성자는 예수를 말한다. 성령은 하느님으로부터 예수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하늘로부터 뻗어내려 오는 빛의 형태로 표현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은 외적인 크기, 내적인 예술성 그리고 종교적인 위상 등에서 불가리아 최고의 성당이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알렉산더 네프스키성당 근처에는 ‘성 소피아 성당(St. Sofia Church)’이 있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Ayasofya)’과 동명인 이곳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초기 기독교의 교회당이다. 오스만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었고 지진 등으로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1900년 이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수도 소피아의 이름은 이 교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본래 ‘세르디카’였던 도시의 이름이 소피아로 개명된 계기는 동로마 제국의 황녀인 소피아와 관련이 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는 병약한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당대 온천도시로 유명했던 세르디카에서 요양한 후 치유된 것을 계기로 이 교회를 봉헌했고, 이를 계기로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gallery for foreign art)도 외관만 구경했다. 인도 고아지방의 독특한 미술작품과 일본의 전통목판화 등 해외 미술작품과 함께 불가리아의 유명 건축가. 미술가 편곡자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1888년 설립되었다는 소피아대학(Sofia University ‘Kliment Ohridski’)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저 건물은 프랑스의 건축가인 Breasson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Ephoria Evlogi와 Hristo Georgiev 형제의 후원으로 1937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학교의 이름은 키릴문자를 개발하는데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키릴(Cyril)과 메소디우스(Methodius) 형제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의 하나인 성 클레멘트 오흐리디스키(Kliment Ohridski, 840~916)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 에필로그(epilogue), 불가리아에서는 ‘예스’와 ‘노우’가 우리와 정 반대라고 한다. 그들은 ‘Yes’를 표현할 때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단다. 반대로 ‘No’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이는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침략과 정복을 당해 온 불가리아 역사의 집합체이자 결과물이란다. 불가리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 불가리아인들은 로마에 맞서 자신들의 영토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이에 대한 로마 군인들의 처벌은 잔혹했다. 체포된 포로의 입에 칼을 집어넣고 저항을 포기하면 살려준다고 설득하는 로마군인들에게 불가리아 전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는 것이다. 불가리아식 ‘No’가 만들어진 배경이란다. 로마인들 눈에는 그것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온몸으로 저항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단다. 그런 로마인들의 유적들도 불가리아는 자신들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단호하지만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우리가 배워야할 부분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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