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수) - 6.5(수)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첫째 날 :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
특징 : ① 불가리아(Bulgaria) : 발칸반도의 남동부에 있는 나라로 북쪽은 도나우강을 국경으로 루마니아와 접하고, 동쪽은 흑해, 남쪽은 터키와 그리스, 서쪽은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7세기 말 터키족의 일계인 불가스족이 볼가불가스왕국을 건설하였으나 터키의 동유럽 진출 통로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1396년부터 500년간 오스만투르크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18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결과 자치공국이 되었고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독립했다. 1945년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1991년 신헌법을 채택 현재의 불가리아 공화국(Republic of Bulgaria)이 탄생했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2007년 유럽연합(EU)에 가입했으며 우리나라와는 1990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현재 상설공관을 두고 있다. 주민은 불가리아인이 전체 인구의 83.6%, 터키인이 9.5%, 그밖에 집시·마케도니아인·아르메니아인·러시아인·그리스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불가리아어이며, 터키어·마케도니아어도 쓰인다. 종교는 불가리아정교가 82.6%, 이슬람교가 12.2%, 가톨릭이 1.7%이다.
②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 : ‘릴라산(Rila mt)’ 릴스키 마나스틸(Rilski Manastir)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10세기경 동방정교회(Orthodox Church)의 성자 반열에 오른 운둔자로 알려진 ‘이반 릴스키(릴라의 성요한)’가 설립했다. 그를 따르던 신자들과 순례자들이 그의 은신처 주변에 촌락을 이루면서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로 점차 변해 갔다. 이반 릴스키 성인은 치유 능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성인이었다. 그가 죽은 후 통치자들은 그의 유골을 손에 넣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유골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1459년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안치되었다. 14세기 초 큰 지진이 일어나 수도원 건물이 파괴되었는데 이 지방의 귀족인 프레리요 드라고보라가 견고한 요새 형식으로 다시 지었다. 1833년에는 대화재로 인해 수도원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어 지금에 이른다. 198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불가리아 여행은 소피아공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불가리아는 발칸국가들 중에서도 경제규모가 작은 나라에 속한다. 그래선지 나라의 관문이랄 수 있는 공항의 규모 또한 작다. 입국절차를 마치면 가장 먼저 환전소가 눈에 띈다. 이곳 불가리아는 자국 화폐(레프, 불가리아어로는 레바)만 통용된다고 봐야 한다. 가지고 온 유로나 달러를 현지화폐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공항에서 바꿀 필요는 없겠다. 시내의 환전소를 이용하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참! 우리나라의 원화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 소피아로 오는 도중 올 봄에 오픈했다는 ‘이스탄불 공항’에서 환승절차가 이루어졌다. 터키의 관문인 ‘아타튀르크 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을 대체하기 위해 건설된 신공항이자 터키 항공의 허브 공항이다. 새로 지어선지 비행기에서 내린 후 출국장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등 불편한 점도 있었으나 내부시설 만큼은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소피아로 가는 비행기도 역시 터키항공이다. 크기만 조금 작아졌을 따름이다.
▼ 공항을 빠져나오자 높디높은 산들이 눈길을 끈다. 이곳 소피아의 해발고도가 700-800m라니 저 산들은 2,000m는 너끈히 넘겠다. 그 증거는 아직까지도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비토샤산(Vitosha Mt.: 2,290m)과 ‘스타라플라니나(Stara Planina) 산맥’일 게고 말이다.
▼ 소피아 시내을 빠져나오는데 기괴하게 생긴 건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잡아봤다. 비스듬하게 기운 건물이 쓰러지기 직전인데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디자인이 만들어낸 착시효과였다. 똑바로 선 기둥이 안쪽에서 건물을 떠받히고 있었던 것이다.
▼ 외벽을 그림으로 채워놓은 건물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도시의 미관을 한결 돋보이게 만드는 작업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어수선한 그라피티(graffiti)도 자주 나타났다. 요즘은 예술로 뿌리를 내렸다고 하지만 나이 먹은 내 눈에는 아직까지 낙서로만 여겨지는 장르이다. 참고로 그라피티는 고대 동굴벽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저항적 구호나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태깅(tagging)이라고도 한다.
▼ 소피아에서 릴라까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2시간 가까이 소요되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도 들른다. 매장의 안을 통과해야만 이를 수 있는 화장실의 특성상 나올 때 커피 한잔쯤은 팔아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의 휴게소이다.
▼ 점심 식사는 릴라수도원 근처에서 했다. 계곡의 가장자리에 지어진 아담한 식당인데, 식사보다는 하룻저녁 묵어가고 싶은 외관을 지녔다. 장식용 소품들도 하나같이 고풍스러웠다. 음식 역시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예쁜 접시에 담긴 샐러드는 맛과 신선함을 함께 갖췄고, 콩 스프는 은은하면서도 맛이 깔끔했다. 다만 메인 요리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송어가 나왔다는 게 나로서는 불행이랄까. 다른 이들은 맛있게 먹었음은 물론이다. 앙증맞게 생긴 잔에 담겨져 나오는 디저트용 커피도 눈길을 끌었다.
▼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그리스 방향으로 117km쯤 더 가면 릴라 산이 있다. 산으로 들어서서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속세와 떨어진 한적한 수도원이 나타난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크다는 릴라 수도원이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서 유일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불가리아의 종교 및 문화 본거지였다고 한다. 수도원은 성당을 한가운데에 놓고 3~4층 건물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외부로 노출된 벽면의 창은 작게 만들었다. 1~2층의 것은 특히 작다. 첫 인상에서 요새(要塞)와 같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맞다. 14세 초, 큰 지진으로 건물이 파괴되자 이 지방의 귀족인 ‘흘렐리요 드라고볼라’가 외적인 공격이나 자연재해에도 끄떡없게끔 요새형식으로 견고하게 다시 지은 때문이란다.
▼ 수도원 방문은 성서로부터 시작된다는 느낌이다. 아치형 문의 천장이 성서의 내용을 담은 그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절의 역사부터 알아보자. 릴라수도원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수㎞ 떨어진 곳에 있던 원래의 수도원은 13세기에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단다. 흐렐류(Stefan Hrelyu)라는 이름을 가진 지방 봉건왕의 기부 덕택에 새로 지어졌는데 이때 터를 잡은 곳이 현재의 자리라는 것이다. 수도원은 성인의 유해가 옮겨진 1469년 이후 발칸 지역 전체의 순례지가 되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 불가리아 르네상스의 최고 세력 집단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이 기능은 계속되어왔다.
▼ 안으로 들어서자 판석(板石)으로 덮여있는 너른 마당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마치 유리처럼 윤기가 돌고 있다. 얼마나 많은 고행자들이 얼마큼 오랫동안 저길 거닐었기에 저런 모습으로 변했을까?
▼ 성과 같은 수도원 내부의 모습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부정형 회랑과 벽이 중정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 오묘한 자리에 그리스 십자가 모양으로 건축된 ‘성모탄생 교회(Cathedral of Our Lady of the Assumption)’가 들어앉았다. 그리스 십자 모양의 평면에 둥근 지붕 24개를 얹은 3랑식(三廊式) 성당이다. 얼룩말 무늬(흰색과 검은색의 가로줄)로 된 회랑(回廊)과 3개의 커다란 ‘펜던티브 돔(pendentive dome)’이 특히 눈길을 끈다. 펜던티브 돔은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처럼 기둥 없이 큰 공간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건축구조 양식이다. 그나저나 1842년 테살로니카(Thessalonica)의 아타나시오스 탈라두로(Athanasios Taladuro)가 설계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건물 너머의 거대한 산맥에 눈길이 간다. 깊은 숲 속에 들어앉은 수도원은 하나의 거대한 이콘처럼 느껴진다. 그래선지 현수도원을 한 바퀴 빙 도는데 그저 침묵만이 존재했다. 간간이 관광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수도사들도 보였다. 문득 상업적인 느낌을 받았다면 나만의 오해였을까? 신심 깊은 불가리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니 나만의 오해였음이 분명하다.
▼ 교회의 외부 벽면과 천정은 선명한 빛깔의 ‘프레스코화(fresco : 덜 마른 석회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채화하는 기법)’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다. 19세기에 그려졌다는데 그 숫자가 1,200여 점에 달한단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성서의 장면들과 수도원 근처의 생활 모습이 담겨있다고 한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신자들을 위한 방편으로 그려졌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옛날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이 프레스코화들은 자하리 조그래프와 디미타르 조그래프 형제 등 많은 화가들이 참여했던 걸로 전해진다.
▼ 프레스코화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내게로 마구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경이로운 그림들이다. 소멸될 뻔했던 저 성화들은 전국의 수많은 화가가 힘을 합해 복원했다고 한다. 다양한 사람의 노력이 모인 만큼 색과 형태 또한 다양하다.
▼ 수도원의 설립자인 ‘이반 릴스키(Ivan Rilski, 876-946)’를 그려놓은 인물화도 보인다. ‘릴라의 성요한’으로도 불리는 그는 불가리아의 동방 정교회 성인(聖人)이다. 오소고보 산맥(Osogovo) 기슭의 스크리노(Skrino)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에는 예수를 존경했다고 한다.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모두 나누어 주면서 수사가 되었다. 높은 산에서 수도 생활을 했지만 외부 세력의 침공으로 인해 릴라로 떠났고 밤낮으로 하느님에게 기도를 했다. 어느 날 목자가 이반을 발견한 뒤부터 이반을 경건히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성당과 수도원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자비로움과 기적을 행했던 이반은 불가리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 ‘성모승천교회’ 옆은 ‘흐렐류 탑’이 자리 잡았다. 1833년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수도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건축물이다. 덕분에 처음 만들어졌던 1335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외벽의 벽화 역시 처음 그대로 남아 있어 14세기의 종교화를 엿볼 수 있단다. 직접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높이가 25m인 ‘흐렐류 탑’의 5층은 그리스도의 변용(Transfiguration)에 바치는 예배당으로 꾸며져 있으며, 14세기 후반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단다.
▼ 수도원을 외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수도원 건물의 한쪽 귀퉁이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안으로 들면 4,100여 점의 서류와 필사본 그리고 기도문, 이콘 등의 수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사진촬영은 금지란다. 눈으로만 보고 가슴속에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12년(1790-1802)에 걸쳐 제작되었다는 ‘라파엘의 십자가’이다. 길이 50cm의 이 십자가에는 140여 개의 성서 장면들이 새겨져 있고, 등장인물만 해도 무려 15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십자가 양면과 측면 등 모든 부분을 얼마나 공 들여 섬세하게 조각을 했던지, 작가 라파엘은 십자가 조각을 마친 후 결국 눈이 멀고 말았단다. 이밖에도 비잔틴 전통의 계보를 잇는다는 십자가도 있었다. 릴라수도원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십자가는 내부를 깊이 파서 바탕을 만들고 예수 고상을 돋을새김으로 부조했다. 예수상의 형태는 비잔틴 시기의 ‘십자가 처형 상’의 원형이 되는 이콘(icon : 동방정교회에서 벽화나 모자이크, 목판 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을 닮았단다. 십자가의 명패는 키릴문자(Cyrillic alphabet : 동방정교회를 믿는 슬라브어 사용자들을 위해 개발된 표기체계)가 새겨져 있다.
▼ 박물관의 외벽이랄 수 있는 회랑의 벽면에는 역사적 이야기가 담긴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수도원의 역사는 그 훌륭한 외관에 뒤지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이 수도원은 은자들로 이루어진 수도원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이반 릴스키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치유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유명했으며, 그런 이유로 중세의 통치자들은 무척이나 그의 유골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단다. 유골은 1183년 에스테르곰으로 갔다가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를 거쳐 결국 1469년 릴라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도원 건물 자체도 빈번하게 약탈당하고 이를 다시 짓는 일을 계속해 오느라 유골에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나날을 보냈다. 현재의 건물은 불가리아가 강력한 부흥기에 들어섰던 시대인 1830년대에 건축됐다.
▼ 수도원은 성모승천대성당을 한가운데 두고 4층 건물이 빙 둘러 선 모양새이다. 4층 건물은 석조와 목조로 지어졌는데, 섬세한 난간 조각품과 얼룩말 무늬 아치형 기둥이 줄지어 미의 극치를 이룬다. 수도원 건물은 흐렐류 탑보다도 더 높다. 그래서 맨 위층에서 바라보는 수도원 내부의 모습이 일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금(禁)줄이 쳐져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수도원의 곳곳을 눈과 사진에 담아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 현재의 건물은 19세기에 새로 지은 것이다. 1833년 우연히 일어난 화재로 대부분이 불타버렸던 것을 1834년 오스만제국의 허가를 받아 30여 년의 복원작업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단다. 8,800㎡의 대지 위에 수사들의 독방 300개, 예배실 4개, 도서관,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손님용 방, 높이 22m에 이르는 굴뚝이 있는 수도원관리실 등을 건설했다.
▼ 침묵만이 허락된 곳, 이곳 릴라수도원은 '동방교회의 어머니'라 불린다. 발칸반도 최대의 수도원이기도 하다. 수도원 내에 성 요한의 유골이 안치돼 있어 신자들은 이곳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수도원을 둘러보는데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참고로 터키가 오랜 세월 불가리아를 지배하던 시절 기독교를 금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불가리아어로 된 서적을 읽는 것조차 제한했지만 릴라 수도원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그래서 불가리아 문화 지킴이 구실을 수행해온 이곳은 풍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역사까지도 아름다운 곳이다.
▼ 동상도 하나 세워져 있었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 하룻밤을 머문 ‘스위트호텔 소피아(Sofia Suite Hotel)’
소피아 외곽에 위치한 4성급 호텔이다. 깔끔한 느낌의 객실에는 면도기만 보이지 않을 뿐, 세면에 필요한 일회용품을 모두 비치되어 있었다. 드라이기도 보인다. 커피포트 곁에 티백(teabag)도 놓아두었으니 맘에 드는 걸로 한잔 마셔볼 일이다. 이곳 소피아의 수돗물은 식수로 가능하다니 구태여 페트병의 물을 일부러 사용할 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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