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타토피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일곱째 날 : 트로이 고고유적지(Archaeological Site of Troy)

 

특징 : 차낙칼레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트로이 유적은 우리에게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목마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대 도시이다. 전설 속의 도시로만 알려져 있다가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그 실체를 발견했다. 슐리만은 어렸을 때 들었던 일리아드가 전설이 아닌 사실이라고 믿고 트로이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1873년 이곳을 발견했다. 그는 발굴 작업을 통해 발견한 금은보화 등의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하여 베를린 박물관에 공개하였고, 이로써 트로이는 전설이 아닌 실존 도시임이 널리 알려졌다. 아홉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트로이 유적의 최하층은 기원전 4000년대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이 외에도 2층에서는 메가론식의 왕국으로 짐작되는 건물과 많은 금은보화가 발견되었다. 7층에는 호메로스 시대와 청기 시대 초기, 8층에는 아르카이크 시대, 맨 위의 9층에는 헬레니즘 시대 및 로마 시대의 유적이 있다. 첫 발굴 당시에는 2층을 트로이 유적이라고 여겼지만, 1930년대 미국의 재조사 결과 7층이 트로이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트로이 유적지의 발굴 작업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 유적지는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소마(Soma)를 출발한 버스는 대략 2시간30분 정도가 지나자 트로이의 고고유적지에 도착한다. ‘차낙칼레(Çanakkale) 시가지에서 남서쪽으로 30km쯤 떨어져 있는 이곳은 눈먼 음유시인 호메로스(Homeros)’가 지은 유럽문학의 효시 일리아스(Ilias)’오디세이아(Odysseia)’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의 논쟁으로 인해 발발된 전쟁에 휩쓸린 신화 속 영웅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설의 마당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정원을 만난다. 정원에는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옹기(pithos)들도 보인다. 이곳 히사를리크(Hisarlik, 요새지) 언덕에 고대 트로이의 유적이 있을 거라는 추측은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에드워드 다니엘 클라크, 찰스 맥클라렌 등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이를 믿고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뛰어들어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이는 독일의 부호이자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이었다. 1870년을 시작으로 20년에 걸쳐 진행된 슐리만의 발굴은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았으나 트로이에 존재했던 여러 도시 문명들의 유적을 잇달아 발견해냈고, 이는 당시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트로이 고고유적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트로이의 명물인 목마를 그냥 지나치는가 싶던 가이드가 작은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리고는 이곳 트로이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트로이는 서쪽으로는 에게 해를 두고 그리스와 마주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로 내려가는 해로가 있고,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너머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도시와 문명이 발달했다고 한다. 트로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4천년부터였단다. 기원전 3천년을 기점으로는 방어벽과 성채가 세워졌고, 기원전 2천년부터는 돌로 된 건물이 일반화되고 문화가 번성하면서 차츰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1350년경의 지진으로 한차례 파괴되었다 재건되었는데,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묘사한 트로이 전쟁과 화재는 기원전 13세기나 12세기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동안 버려졌던 도시는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의 모도시(母都市)로 추대돼 경제적 혜택을 누리기도 했단다.

 

 

한 시대 도시유적 위에 다음 시대 도시유적이 잇달아 쌓여 있는 모양새로, 일반적으로 9개의 층(時期)으로 나뉜다. 언덕 중심부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트로이 1(3000~2600 BC)는 유적지 내 최초의 거주 흔적이라 볼 수 있는데, 햇빛에 건조시킨 흙벽돌로 쌓은 방어벽이 남아있다. 그 위를 에워싸듯 포개져 있는 2(2600~2250 BC)에서는 돌과 흙벽돌을 함께 사용한 성채와 성벽, 청동기 시대의 거주지 흔적인 메가론(megaron)이 발견되었다. 슐리만이 발굴해 독일로 유출한,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이라 불리던 다수의 금재 장신구와 보석도 여기서 출토된 것이다. 3(2250~2100 BC)4(2100~1900 BC), 5(1900~1800 BC)에서는 이전 시대보다 발달된 기술이 적용된 규모가 큰 석재 건축물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6(1800~1300 BC)는 기원전 1350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에게 해의 대규모 도시 문명이다. 화재와 재건의 흔적이 보이는 7(1300~1000 BC)는 외부 침입으로 인한 큰 전쟁이나 지진이 있었던 시대로 추정된다. 슐리만은 발굴 당시 6기를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트로이라고 주장했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7기를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800년경 조성된 8기는 이주민들이 들여온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도시문명이다. 9기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의 유적으로 로마제국의 점령과 관련이 있다. 이 로마시대 구역 남쪽 가장자리에는 말발굽 형태의 건축물들인 극장 오데이온(Odeion)과 회의장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가진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이 남아있다. 이후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5세기 말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의외로 간단하다. 입구에 세워진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하면 유적지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제자리로 되돌아 나오도록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유적은 동문 성벽(east wall)’이다. ‘트로이 6의 유적으로 트로이전쟁 당시 트로이를 지배하던 사람들과 동일한 민족이 세운 성벽인데, 동문(東門)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보면 되겠다. 동문은 성벽이 겹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성문에 접근하려면 성벽을 양쪽에 끼고 나있는 폭이 2m정도 되는 좁은 통로를 지나야만 한다. 통로의 끝은 크게 휘어져 있다. 적군이 성문을 쉽게 부실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또 성문 양쪽에는 공격용 탑이 있어 적을 협공할 수 있었고, 두 성벽이 만나는 곳에는 나무로 만든 육중한 성문이 있었단다.

 

 

 

 

 

 

 

 

성문지(城門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폐허로 변한 유적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건물터로 보이나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아 당시의 용도는 알 수가 없었다.

 

 

트로이 6의 유적인 동북쪽 요새(northeast bastion)’로 나아가면 저 멀리 에게 해다르다넬스 해협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다와 이곳 성벽까지는 엄청나게 너를 벌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 군대가 저 벌판을 통해 쳐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 벌판 어디쯤에서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싸웠을 것이고, 트로이의 왕과 헥토르의 아내는 아킬레스가 전차에 매달려 끌려가는 헥토르의 시체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던 신화속의 영웅담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여행객에게 그런 호사는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 뒤쫓아 가야할 가이드의 등짝이 이미 보일락 말락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영웅 이야기는 귀국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하고 지금은 발걸음에 속도를 내보자.

 

 

 

 

북동쪽에는 헬레니즘-로마시대인 트로이 8~9유적인 아테나신전(Temple of Athena)‘의 터가 있다. 이 신전은 알렉산더대왕의 명을 받은 리시마코스(Lysimachos)‘가 최초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로마시대에 증축했으나 지금은 헬레니즘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파편들만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다. 제우스의 딸인 아테나(Athena)는 지혜와 전쟁의 신이다. 신화 속에서는 트로이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원인, 미의 논쟁에 참여했던 세 여신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신전에서 내려오면 천막이 쳐진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에는 흙으로 쌓은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안내판을 보니 트로이 2·3의 유적인 성채 벽(citadel wall)’이란다. 청동기시대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백색 흙벽돌과 복원된 붉은색 벽돌이 선명하게 대비되는데, 토성은 흙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견고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냥 흙이 아니라 흙에다 낙타의 젓과 계란의 흰자를 섞은 반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선지 요즘도 성벽에는 벌이 많이 살고 있단다.

 

 

 

 

성채 벽(citadel wall)’이 축조된 트로이 2BC 2,600~2,250년 사이에 존재했으며, 옛 주거지와 같은 개념의 도시이다. 1기보다 성벽이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주거지와 궁전지역이 격자형으로 되어 있어 계획적으로 설계된 도시임을 알 수 있다. 궁전인 메가론과 그 주변 지역에서 프라이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장신구들과 수많은 보물들이 발견되었다. 이왕에 보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짚어보고 넘어가자. ‘트로이 유적지를 보려면 터키로, 트로이 유물의 진수를 보려면 러시아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슐리만은 분명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독일로 슬쩍해갔다. 그런데 왜 러시아로 가라는 얘기일까?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이 살짝 빼돌렸기 때문이란다. 그 유물들은 모스크바의 푸시킨박물관에 보관되어 왔지만 러시아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트로이 유물에 대해 시치미를 뚝 떼고 존재 자체를 부인했었다. 물론, 지금은 '프리아모스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전시 중이란다.

 

 

 

 

다음은 메가론(Megaron)이다. ‘트로이 2·3시대인 BC 2,290~2,200년 사이에 만들어진 흙벽돌 구조물로 성채 벽의 안쪽에 세웠는데 현재 1.5m(높이) 정도가 남아 있단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의식을 치르던 장소로 추정된다고 한다. 흙담의 유실을 막기 위해선지 간이 지붕을 덮어 보존해 놓았다. 참고로 트로이 2기는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이름을 붙인 황금 장신구를 발굴한 층이다. 큰 규모의 집터와 보물들 때문에 슐리만은 이곳이 일리아드의 트로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트로이 2는 청동기를 사용하던 이곳 최초의 번영기였다.

 

 

 

 

 

 

근처에는 트로이 1의 유적이라는 성채 벽(fortification wall)‘도 보인다. 그런데 돌로 쌓아올린 성벽이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2·3의 성벽이 흙벽돌로 축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잠시지만 오뉴월 땡볕을 피할 수 있는 곳도 나온다. 트로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무화과나무라고 한다.

 

 

근처에는 트로이 2의 유적인 귀족 거주지(Aristocratic residence)’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과연 귀족들이 선호했을 만도 한다. 하지만 그냥 보아서는 집터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유적이 파괴된 상태였다.

 

 

다음에 나타난 유적은 슐리만의 참호(Schlimann's Trench)’이다. 슐리만이 파놓은 구덩이인데 트로이 1·2의 주거지라고 한다. 이 가운데 ‘1의 집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라는데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슐리만이 자신이 생각대로 마구잡이 발굴을 한 탓이란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 옆에는 유적지를 파헤쳐진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도 있다. 시대별로 표시를 해놓아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우물터도 보인다. 아테나 여신에게 제사 드릴 때 올리는 물을 뜨던 샘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성()의 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즉 옛날에 마차가 드나들었을 경사로(Ramp)’가 나타난다. ‘트로이 2의 유적인데 성채의 둥근 벽이 경사로 양 옆으로 뻗어 있다. 석회암과 흙을 사용해 1~4m 높이로 쌓은 경사로는 1992년에 처음 발견된 상태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곳은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부르던 유물을 발견한 장소라고 한다. 슐리만이 발굴했던 황금잔과 목걸이 왕관 등은 현재 모스크바에 있는 푸시킨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단다. 슐리만이 독일로 빼돌렸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베를린에 진주한 러시아가 슬쩍 해간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왕궁이 있던 곳으로 보이는 터(palace house VIM)도 보인다. ‘트로이 6때의 유적이라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배경이 되는 왕궁이었겠다. 그렇다면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나오는 프리아모스(Priamos)가 살던 궁전이라 할 수 있겠다. 아버지인 라오메돈을 계승하여 왕이 된 그는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라는 뜻으로 다르다넬스해협을 이르는 말이다)까지 지배권을 넓힌 왕이었다. 그는 아리스베(예언자 메롭스의 딸)와 헤카베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가 가장 아끼는 헥토르와 파리스는 헤카베의 소생이다.

 

 

 

탐방로는 잠시 후 트로이 8·9의 유적인 성역(Sanctuary)’으로 인도한다. 고고유적지의 남서쪽에 위치한 성역은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최근 발굴된 아우구스투스 시절의 대리석 제단(祭壇) 등 당시 제단으로 사용하던 장소와 우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커다란 지지벽과 더 오래된 제단들은 트로이 6·7인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은 목욕탕이 있던 자리란다.

 

 

트로이고고유적지는 현재진행형이다. 발굴과 복원, 탐방로 정비 등의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을 고고유적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오데이온과 보울레우테리온(Odeion and bouleuterion)’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오데이온(Odeion)트로이 9인 로마시대(BC 85~AD 400)에 지어진 실내극장이다. 보존 상태가 좋은데 크기로 보아 당시의 트로이는 상당히 작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보울레우테리온(bouleuterion)’은 이곳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장소를 이르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참고로 보울레우테리온(bouleuterion)’의 보울레(Boule)란 직접 민주주의를 위해 조직하는 의회를 일컫는다. 보울레 의원들이 모여 회의도 열고 민회 안건을 준비하며 찬반 표결도 벌이던 장소를 그리스어의 장소 접미사 (-on)’을 붙여서 보울레우테리온이라고 부른다.

 

 

맨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유적은 남문(south gate) 이다. 남문은 트로이의 정문이었다. 넓이가 3.3m쯤 되는데 비교적 넓은 오르막길이 있었고, 성문의 양 옆에는 넓이 7m의 아름다운 방어용 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 문이 바로 헥토르와 아킬레우스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기다리던 스카이아문(Skaia gate)’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에서 궁정이 있던 언덕까지 잘 포장된 오르막길이 길게 뻗어있었단다.

 

 

고고유적지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성벽의 모습이다. 흙벽, 조개가 들어있는 벽, 돌벽, 벽돌 등이 각 층의 시대를 말해주고 축성방법, 건축기법, 건축 양식 등도 각 시대마다 다르다. 이 중 제 2층인 B.C 2500년부터 B.C 2200년까지의 유적에서 견고한 성벽과 웅대한 성문이 있는 메가론식건물 흔적이 발견됐다. 슐리만은 처음에 가장 큰 두 번째 층을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단정했는데, 이후 제 7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 돌아온 트로이 목마(Trojan horse)’ 1970년대에 신화속의 토로이 목마를 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고증에 따라서 형태의 크기를 정했다기보다는 어린이 방문객을 위한 서비스에 가깝다.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가 보면 목마의 내부는 두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의외로 사람들이 앉아 있을 만한 공간도 있고 목마의 뚫린 창으로 손을 내밀며 기념 촬영하는 사람도 많다.

 

 

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는 뛰어난 목수이자 권투선수였던 에페이오스가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은 전쟁에서 철수하는 체하고 근처의 테네도스 섬에 정박하고 있었다. 뒤에 남은 시논은 트로이인들에게 이 말이 트로이를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든 아테나 여신에게 받치는 제물이라고 말했다. 라오콘과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인들은 이 말을 성 안으로 들여놓았으며, 말 안에 들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은 그날 밤 성문을 열어 그리스군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트로이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다. 이후로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목마 근처에는 기념품 숍(shop)이 들어서있다. 미니 트로이 목마 열쇠고리가 인기 품목. 어린이들에게는 그리스 병사들 인형이 더 먹힐 것 같다. 트로이 당시의 복장을 빌려주는 곳도 보인다. 목마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어보라는 유혹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고대도시 트로이(Troy)에 대한 기대는 금물이다. 지명도에 비해 볼거리가 거의 없다. 볼만한 건축 유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은 이미 오래 전 외부로 반출된 상태다. 예전에 도시 앞까지 닿았다는 해안선도 수밖으로 밀려나 잘 보이지 않는다. 눈길을 잡아끄는 유적도, 시원한 바다 풍경도 없다는 얘기이다. 무용담을 펼치던 영웅들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그려왔던 트로이의 환상은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하겠다. 입장료를 내고 트로이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면 군데군데 돌무더기뿐이다. 성벽과 주거지, 신전 등이 발굴돼 있는데 제대로 원형을 갖춘 유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로마 시대 민회와 공연이 열리던 소규모 원형극장이 그나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 발굴지마다 컬러 그림에 영문과 독일어 설명이 곁들여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트로이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도 떠올려보자. 그리스 여신인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최고 미녀의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였는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 시험에 들고 말았다. ‘누가 가장 아름답냐?’는 질문에 그는 요령도 없이 아프로디테를 택했던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파리스 왕자에게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선물로 주며 고마움을 표했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가 가만있을 리 없다. 그리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해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아내를 되찾기 위해 시작된 길고 지루했던 전쟁. ‘()의 논쟁이 이런 피를 흘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튼 그리스는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전쟁을 끝냈다. 이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