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목) - 8.24(수)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여덟째 날 : 블루 모스크(Blue Mosque)와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ı)
특징 : 정식 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이다. 오스만 제국 제14대 술탄인 ‘아흐메트 1세’에 의해 1609년 착공되어 1616년 완공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2만 1,000여 개의 푸른색 문양 타일로 장식된 내부로 인해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고도 불린다. 이 시기의 모스크는 대형 돔 1개와 반원형 돔 4개 사이에 조그만 돔 4개를 두어 균형감을 이루며, 4기의 미나레트(뾰족탑)를 세웠다. 블루모스크에는 6개의 미나레트가 있는데, 이는 맞은편에 위치한 ‘하기아 소피아’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아흐메트는 성소피아 성당을 이슬람교가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큰 모스크를 만들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소피아 성당 보다 한참 후에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돔(dome) 크기를 더 키울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소피아성당을 지은이들의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일 것이다. 모스크 내부는 높이 43m, 지름 23.5m의 돔과 260개의 푸른빛의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모스크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불린다.

▼ 다시 돌아온 이스탄불, 오늘은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블루 모스크(Blue Mosque)’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둘째 날 ‘성 소피아대성당’을 방문할 때와 같은 장소에서 멈춘다. 그만큼 두 건축물이 가깝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두 곳 모두 이곳 구시가지(술탄 아흐메트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곳 ‘술탄 아흐메트 지역’은 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토프카프 궁전과 블루 모스크, 성 소피아대성당 등이 있으며, 로마와 비잔틴, 오스만 시대를 거쳐 온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 오늘도 역시 거대한 성벽에 뚫어놓은 아치형 문을 지난다. ‘술탄 아흐메트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만 한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이 아닐까 싶다.

▼ 그렇게 잠시 걸으면 길이 둘로 나뉜다. 곧장 직진할 경우 ‘성 소피아대성당’으로 연결되니,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아치형 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 안으로 들어서면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모스크의 첨탑과 외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니 앞뜰 정도로 봐도 되기 않을까 싶다. 아니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공원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 이 광장의 특징은 블루모스크의 주요 볼거리들 가운데 하나인 첨탑(minaret, 이슬람교 사원의 외곽에 설치하는 첨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첨탑은 ‘미나레트’라고 부르며 뜻은 ‘빛을 두는 곳, 등대’이다. 초기에는 둥근 원통형이었지만 나중에 발코니를 두었다. 이곳 블루모스크에는 ‘미나레트’가 여섯 개나 된다고 한다. 모스크들은 대게 둘에서 넷 사이의 미나레트를 세우는 게 보통이고, 이슬람 성지(聖地)인 메카의 모스크만이 유일하게 여섯 개를 세울 수 있다는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나레트가 이슬람의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일정한 규칙이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단다. 물론 야사(野史)다. 터키어로 6은 ‘알투(Altu)’, 황금은 ‘알툰(Altun)’이다. 왕은 알툰, 즉 황금 미나레트를 세우라고 지시했는데, 건축가는 그걸 알투, 즉 여섯 개를 세우라는 말로 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 건축가의 귀가 어두워서 그리 된 걸까? 그렇지 않았다는 후문이 더 설득력 있다. 미나레트마저 황금으로 세우면 나라 곳간이 완전 바닥날 걸 염려한 건축가가 ‘알툰’ 대신 ‘알투’ 미나레트를 세웠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이슬람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메카의 모스크만이 미나레트가 여섯 개였기 때문에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사람들이 꾸며 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기왕 ‘미나레트’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용도에 대하여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흔히 미나레트는 기도시간을 알리는 장소라고 설명된다. 무슬림은 해뜨기 한 시간 반부터 해 뜰 때까지 한 번, 정오를 지나 15분쯤에 한 번, 정오가 3시간쯤 지난 뒤에 한 번, 해가 진 뒤 5분에서 한 시간 사이에 한 번, 잠들기 전에 한 번, 모두 다섯 번 기도를 해야 한다. 모든 모스크들은 사람들이 이 시간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게끔 ‘무아진(Muazzin)’이라고 하는 목청 좋은 독경사가 아잔(adhan, 신자에게 예배를 알리는 소리)을 불러 기도시간을 알려준다. 이때 아잔을 하기 위해 오르는 장소가 바로 미나레트인 것이다. 이런 미나레트는 압바스왕조 무렵 성소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 세우기 시작했으며, 그 전에는 모스크의 현관이나 지붕이 기도를 알리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대형 스피커가 무아진을 대신하고 있다니 참조해 두자.

▼ 그런데 모스크로 들어가는 주변 풍광이 전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히포드럼 광장으로 연결되 있었고, 정문(正門)을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갔었다. 또한 당시에는 문의 위쪽에 ‘ㅅ’자 모양으로 쇠사슬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술탄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행여 고개라도 들고 들어갈까 봐 조심하라고 걸어놓았다는 그 쇠사슬이 말이다. 그 줄까지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남문의 앞일지도 모르겠다.

▼ 입장시간을 기다리면서 바라본 ‘블루모스크’,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이었던 ‘아흐메트 1세’의 지시에 의해 지어진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다. 건축가 시잔의 제자인 ‘센테프카르 메흐메트 아가(Sentefkar Mehmet Ağa)’가 1609년 착공을 시작해 1616년 완공했단다. 그는 아야소피아 성당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는 한편 더욱 발전시켰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의 모스만제국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1606년은 합스부르크왕가가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제국과 13년간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져오던 전쟁을 마무리하는 ‘지트바토르크(Zsitvatorok)’ 협정을 맺은 해이다. 오스만제국이 유럽에서의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첫 번째 사례였다고 보면 되겠다. 자존심이 상한 술탄은 알라께 모스크를 바쳐 위안을 삼고 오스만제국의 위용을 널리 알리고자 모스크의 건립을 결심하게 된다. ‘성 소피아대성당’이 마주보이는 곳에다 위치를 선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유럽에 대한 우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막대한 재정 투입을 염려한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강행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 즉 ‘블루 모스크’이다.


▼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모스크의 내원(內園)이다. 상당히 넓은 뜰인데 작은 돔(dome)으로 이루어진 회랑(回廊)이 건물을 감싸고 있다. 뜰의 가운데는 육각형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샤드르반(sardirvan)’이 아닐까 싶다. 만일 저게 ‘세정시설(洗淨施設)’이었다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이다.

▼ 안으로 들어가니 무척 어수선한 풍경이다. 보수공사를 하느라 많은 부분을 장막으로 가려놓았기 때문이다. 첫날에 들렀던 ‘그랜드 바자르’도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던 걸로 보아 터키는 요즘이 보수공사 시즌인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스크의 문 앞에 길게 늘어서 있다. 우리들처럼 기도가 없는 틈새 시간을 이용해서 모스크의 내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기도가 있는 시간, 특히 금요일에는 이교도(異敎徒)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 회랑에는 각종 자료를 담은 패널(panel)들을 게시해 놓았다. ‘블루 모스크’의 내·외부 사진들이 실려 있는 걸로 보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전지식을 쌓아두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들어가느라 읽어볼 짬은 낼 수가 없었다.

▼ 이젠 기도 공간(실내)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하지만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신발을 벗어서 비닐봉지에 넣은 다음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들은 반드시 스카프로 머리를 감싸야 한다. 무릎이 나오는 차림도 안 된단다. 그렇다면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관광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스크에서 스카프와 긴 망토를 무료로 빌려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집사람은 이런 번거로움이 싫다며 아예 입장을 포기해버렸다.

▼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블루 모스크’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 게시되어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모스크는 354개의 크고 작은 돔들을 4단으로 배치하여 올린 다음, 마지막 네 개의 작은 돔(dome) 위에 직경 23.5m의 커다란 중앙 돔을 올렸다. 거대한 중앙의 돔이 차곡차곡 쌓인 수많은 작은 돔 위에 얹혀 있는 형태는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작은 돔들은 각각의 아치 위에 올렸고, 거대한 중앙 돔은 역시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 본당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중앙 돔의 까마득한 천청과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고색창연한 빛들의 축제이다. 빛 때문에 얼른 눈에 안 띄었지만 모스크 내부의 위쪽 벽은 대부분 푸른 색상의 타일로 덮여있다.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돔의 천정과 벽면은 21,043장의 청·녹·흑·홍색의 이즈니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단다. 한마디로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움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정교하고 현란한 무늬들은 안정된 조화와 대칭을 끊임없이 이루어내고 있다.



▼ 홀(hall)의 중앙에 서서 고개를 들어보면 가운데의 커다란 돔(dome)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arch)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 중앙 돔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이 눈에 꽉 찬다. 직경이 5m인데 사람들은 ‘코끼리 다리’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단다. 블루모스크는 중앙의 거대한 돔을 네 개의 작은 돔이 받치고 또 이 돔들을 그보다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는 형태로 지었다. 그렇게 하중을 분산시킨 뒤 결정적으로 네 개의 육중한 기둥으로 받쳐놓은 것이란다.

▼ 사원 중앙의 엄청나게 너른 홀은 딱 반으로 나눠서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예배를 보는 곳으로 구분해 놓았다. 기도공간은 관광객들이 넘어갈 수 없도록 얕은 칸막이로 금(禁)줄을 쳐놓았다.

▼ 관광객들에게 할애된 공간은 의외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도 보이나 이를 제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 이슬람의 모스크는 여전히 여성과 남성의 예배공간이 다르다. 블루모스크라고 다르지 않다. 여성의 예배장소를 2층에 배치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존을 위한다며 통행을 막아놓았다.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도 역시 막혀 있다. 물론 여성들의 기도처를 홀의 맨 뒤편에 재배치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모스크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현란한 아라베스크 문양들이다. 전문지식이 부족해서 다른 이의 글을 옮겨본다. <벽의 아래쪽에 붙어 있는 타일에 적힌 글씨는 오스만터키 최고의 서예가인 ‘세이드 카심 구바리(Seyyid Kasim Gubari)’의 솜씨라고 한다. 그리고 원형 판 위에 적힌 칼리프의 이름과 쿠란의 구절들은 17세기의 서예가인 ‘아메틀리 카심 구바리(Ametli Kasim Gubari)’가 썼다고 한다.>



▼ 투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출구에 미니어처(miniature)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블루 모스크’를 축소시켜 놓은 모양인데 화려하기 짝이 없다.

▼ 투어를 마치고 나오면 ‘성 소피아대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둘러본 ‘블루 모스크’를 지었던 ‘아흐메트 1세’가 앞지르고 싶어 했다는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성소피아성당을 능가하는 모스크를 지어보겠다는 황제의 꿈은 이뤄진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 크기 면에서 차이가 난다. 블루모스크의 중앙 돔의 지름은 23.5m, 높이는 43m다. 성소피아 성당은 지름이 33m에 높이가 56m다. 건물 전체로 봐도 블루모스크는 길이 51m에 너비가 53m고 성소피아 성당은 길이 77m에 너비 71.7m로 차이가 난다. 하중을 분산하는 등의 건축술 역시 1000년 전에 지은 성소피아 성당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품에 외형적 잣대를 들이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그저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것만으로 평가 받았으면 좋겠다.

▼ 지하궁전으로 이동하는 길에 모스크의 첨탑 몇 개가 눈에 들어온다. ‘블루 모스크’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신학교와 목욕탕, 시장, 병원 등의 사회시설들을 주변에 다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설을 ‘퀼리예(kulliye)’라고 부른다. ‘블루 모스크’도 이 같은 복합 시설을 갖춘 모스크였다고 한다.

▼ 이어서 찾아간 곳은 지하 저수지인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ı)’. 다른 이름으로는 ‘지하 궁전(Basilica Cistern)’이다. ‘블루 모스크’에서 걸어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영화 ’007 시리즈’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 저수지는 532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후에 유스티나누스 황제가 증축했다. 이곳으로부터 19km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 초원에서 발렌스 수도교를 거쳐 이곳까지 물을 끌어왔다. 당시 시민들의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무려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저수지였다. 일상적인 생활용수 공급 이외에도 포위 공격에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 아래사진은 출구 쪽 계단이다. 저수조로 들어오면서 찍은 사진이 흔들린 탓에 이걸 사용했는데 지하시설이다 보니 이런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올려봤다.

▼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진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거대한 돌기둥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거기다 터키 음악까지 잔잔하게 흐르니 흡사 동화나라에라도 들어선 느낌이다.

▼ 지하 저수지에는 코린트식 기둥 336개가 늘어서 있다. 이 공간 자체가 신비로운 모습이어서 ‘궁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기둥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각 기둥이 각기 다른 신전 등에서 운반되어 왔기 때문이란다. 당시로서는 최단 기간인 2년 만에 완성한 지하 건물로도 유명하다. 하긴 다른 곳에서 완성품 자재(資材)들을 옮겨왔으니 공사기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었을 만도 하겠다.

▼ 이곳은 오래 동안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백 년 동안 쌓여온 진흙과 오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인 끝에 1987년 멋진 관광지로 다시 태어났단다. 오늘날 이곳은 궁전처럼 수백 개의 둥근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저수지임에도 불구하고 물은 빠져있다. 하지만 보통 때는 물에 잠기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물 위에 만들어진 다리는 관광객들에게 큰 볼거리이다. 대단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영화 세트로 쓰이기도 하고, 이스탄불 예술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는 시청각 시설로 쓰이기도 한단다.

▼ 이곳은 배낭여행 프로젝트 제2탄으로 2013년에 방영된바 있는 tvN '꽃보다 누나'에서 소개되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꽃누나'들과 이승기가 크로아티아로 가는 길에 이스탄불을 경유하면서 이곳 지하궁전과 '아야 소피아 박물관' 등을 들렀었다. 그래선지 한국 관광객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인다. ‘터기 사람들 다음으로 많은 게 한국 사람들...’ 터키에 머무르는 내내 느꼈던 생각이다. 그만큼 낯익은 얼굴들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호객꾼들이 내지르는 언어 또한 귀에 익었다. ‘반에 반값에 줄게요.’ ‘나도 먹고 살아야지요’ 등등... 이게 바로 국력(國力)인가 보다. 90년대 후반에 유럽을 처음으로 찾았을 때에는 한마디로 들을 수 없었던 한국어가 이제는 스스럼없이 흘러나오니 말이다.

▼ 높이 9m에 폭 65m, 길이가 143m인 거대한 지하공간에 336개의 돌기둥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거기다 은은한 조명까지 비추이니 가히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습기에 젖은 돌기둥들을 만져보면 천년 세월 너머로 로마의 신비로운 숨결이 전해오는 듯하다. 참고로 예레바탄 사라이(터키어: Yerebatan Sarayı)는 ‘땅에 가라앉은 궁전’이란 뜻이란다. 바실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나 교회와는 상관이 없단다.

▼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뱀의 머리를 하고 두 눈을 부릅뜬 얼굴의 ‘메두사의 머리’를 볼 수 있다.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누어있는 게 인상적이다. 이 메두사 얼굴은 보수공사를 하는 도중에 발견된 것으로 그리스도들은 예수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교도의 신인 메두사를 기둥의 아래에다 깔아놓아 버렸단다.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 메두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이유와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부조물(浮彫物)들을 사용하다 보니 높이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비스듬히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가 전해지기도 한다.




▼ 지하라선지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로 시원하다. 밖은 30도를 훌쩍 넘기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선지 안에는 차이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어두는 일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터키의 전통복장을 입고 궁전세트에 앉아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길에 건넜던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 옛 이름은 ‘Hellespont’. 터키어로는 ‘차낙칼레 해협(Canakkale Boǧazi)’이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마르마라 해와 에게 해를 잇는 해협이자 태양이 떠오르는 곳 이라는 아나톨리아 (Anatolia)반도와 갈리폴리 반도 사이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 양쪽으로 나눈다. 길이는 62km이지만 폭은 1.2~8k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와 근대사 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분쟁이 자주 일어났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협 이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을 위해 이 해협을 건넜으며 비잔틴 제국에게도 이 해협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런 이 해협은 흑해를 통하여 지중해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그리고 이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수많은 분쟁 끝에 1841년 런던 조약이 체결되어 오늘날은 모든 나라에 개방되기에 이른다.

▼ 아시아지역인 ‘랍세키(Lapseki)’와 유럽지역에 있는 ‘겔리볼루(Gelibolu)’사이의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은 페리(Feribot)를 타고 건너게 된다. 배를 타고 가며 바라보는 해협은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도시와 바다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바다가 깊은 탓인지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는데 운이라도 좋은 날에는 돌고래의 묘기까지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난간까지 다가와 날개짓을 하는 갈매기의 재롱은 덤으로 여겨도 되겠다. 참고로 이스탄불까지는 앞으로 버스로 네 시간 정도를 더 달려가야만 한다.


♧ 에필로그(epilogue), 모든 종교와 모든 문화와 모든 종족이 어울려서 합성된 곳. 터키가 드러내는 얼굴은 다양하다. 동양도 서양도 포함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다신이 뒤섞여 있다. 획일적인 가치와 규격화된 규칙,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혔을 때 찾아보면 딱 좋은 곳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터키는 굴러다니는 돌조차 로마의 유적이고 문명의 흔적이라고들 말한다. 또한 아시아와 유럽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중심으로 갈라져 동양과 서양의 특징들이 미묘하게 뒤섞여있다. 이 역사와 지리적인 특징 덕분에 터키는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풍경을 만들어냈다. 한 골목 돌아설 때마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다양하고 정제되지 않은 삶의 단면 단면들이 이방인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터키를 돌아다니는 내내 느꼈던 생각이다. 그런 모든 것에 흠뻑 빠졌었나 보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지만 또 다시 찾아오고 싶은 욕망이 벌써부터 움트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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