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목) - 8.24(수)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타토피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여섯째 날 : 에페수스(Ephesus)
특징 : 라틴어로 에페수스(Ephesus), 터키어로는 에페스(Efes)이자 성경에는 에베소로 표기되는 에페수스는 로마보다 더 로마답고,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 도시의 필수 요건인 목욕탕, 아고라, 신전, 항구와 연결되는 대로 그리고 원형극장 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Temple of Artemis)’과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인 ‘켈수스 도서관’은 그 가운데서도 백미라 하겠다. 로마시대의 에페수스는 소아시아에서 정치와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아 주재 로마 총독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에페수스라는 도시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하지만 기원전 1044년경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의 정복으로 20개 도시로 구성된 이오니아 동맹에 속하게 된다. 그 후 이 도시는 차례로 리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에페수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 중 하나가 바로 ’에페수스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빌라델비아, 사데, 라오디게아)‘가운데 하나가 에페수스교회였을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울이 죽은 후에는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돌보며 이곳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오늘날의 에페수스는 역사 유적뿐 아니라 기독교 성지순례를 함께 할 수 있는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이런 모든 점을 인정받아 201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에페수스의 탐방은 ‘어퍼 게이트(Uper Gate)’에서 시작된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마그네시아 문’이라고 부르기도 하니 참조한다. 그럼 반대편에 있는 출구는 자연스레 ‘로워 게이트(Lower Gate)’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에페수스의 탐방은 이곳 ‘어퍼 게이트’에서 시작해 ‘켈수스 도서관(Celsus Kütüphanesi)’을 내려다보며 ’쿠레테스 거리(Curates Street)’를 걸은 다음, ‘마블 거리(Marble Street)’와 ‘아르카디안 거리(Arcadian Street)’를 거쳐 ‘로워 게이트’로 빠져나오면 되겠다.
▼ 안으로 들어가면 ‘윗 아고라(Upper Agora)’ 또는 ‘스테이트 아고라(state agora)’라고 불리는 널따란 광장(Agora)과 주위에 날려 있는 건물들을 만나게 된다. 모든 종류의 정치 활동(선거, 모임, 집회 등)이 열리던 곳이다. 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안내판들을 깜빡 잊을 뻔했다. 에페수스의 지도와 함께 그 내력과 발굴과정들을 적어 놓았는데 한번쯤 읽어보고 투어를 시작해 볼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인데다 예습해온 내용들과 상이하기까지 해서 상당히 헷갈리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에페수스에는 아고라가 두 군데 있었다. 언덕으로 이루어진 에페수스의 위쪽인 이곳을 ‘위쪽 아고라(Upper Agora)’, 다른 쪽을 ‘아래쪽 아고라(Lower Agora)라고 부른다. 위쪽 아고라에는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Isis)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무너졌다고 한다.
▼ 안으로 들어서자 세 개의 아치가 눈에 들어온다. 2세기에 지어졌다는 ‘바리우스 욕장(Various Bath)’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저 아치들은 열탕(caldarium)과 온탕(tepidarium), 냉탕(frigidarium)으로 들어가는 입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욕장은 곁에 있는 체육관과 함께 복합적인 시설이며, 바닥 아래로 더운 공기를 통과시켜서 난방을 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로마의 목욕탕은 ‘로마법 대전’을 정리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남녀 혼욕을 금지하기 전까지 모두 혼탕이었다. 게다가 혼욕이 금지된 이후에도 남탕과 여탕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목욕탕의 입장시간을 오전에는 여자, 오후에는 남자 이런 식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로마의 목욕탕에는 남탕과 여탕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 근처 땅바닥 위로 물파이프의 잔해가 드러나 있다. 그 옆에는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파이프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기도 했다. 흙으로 만들어진 저 파이프는 세상에서 가장 진보된 물 공급 시스템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 탐방로의 좌우로는 토막 난 기둥들이 열을 지어 늘어서있다. 고린도 양식과 이오나아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일천한 내 지식으로는 두 양식을 구분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아고라(agora)나 바실리카(basilica)를 이루던 주랑(柱廊, peristyle)이겠거니 하는데, 곁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The phodian peristyle and the Prytaneum’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황제 통치 때 세워졌다는 ‘시청사(Prytaneum)’가 이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 기둥들로 장식된 주랑(柱廊)의 뒤에는 오데온(odeon)이 자리 잡았다. 2세기에 세워진 오데온은 도시의 행정관인 상원의원의 집회 장소였다고 한다. 때로는 연극이나 음악회, 시 낭송 같은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22층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객석은 1.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과 지붕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150년 경 에페수스의 귀족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Publius Vedius Antonius)’와 그의 아내가 세웠다고 한다.
▼ 오데온의 왼쪽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 때 세워졌다는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라는 공회당(시청) 건물이 있다. 로마는 속주(屬州)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므로 이 청사에서 에페수스의 통치권을 행사했다고 보면 되겠다. 발굴 당시 아르테미스 여신상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청 건물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프리타네이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에페수스를 지키는 성화를 보관하는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성화를 보관하던 장소가 프리타네이온의 안에 남아있단다.
▼ 잠시 후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오른편에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부조상이 눈에 띈다. 기원전 1세기 초,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었던 술라(Sulla)의 소아시아 평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손자 멤미우스가 건립한 멤미우스 기념비(Monument of Memmius)이다. 술라는 포에니 전쟁이 끝난 다음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공화정 로마’의 독재관인데, 그는 터키에 있던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왕의 침공을 막아낸다. 3만의 로마군이 20만의 폰투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폰투스 군은 로마의 속주였던 에페수스 일대의 옛 페르가몬 왕국 지역을 침공해 로마시민과 노예들을 무차별로 학살했었는데, 그 수가 8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비는 술라의 전승비인 동시에 학살당한 로마 시민들의 추모비이기도 하다. 기념비에 부조로 새겨진 인물은 멤미우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즉 술라와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
▼ 멤미우스 기념비 근처에 세워진 커다란 문 하나가 눈에 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Temple of Domitianus)으로 81년부터 96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도미티아누스(Caesar Domitianus Augustus) 황제를 봉헌한 신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유능했지만 독재 성향이 강했다. 로마시대는 선정을 베풀고 업적을 인정받은 황제는 그가 죽은 뒤에 수호신의 목록에 추가되고, 시민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향불을 피우며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살아있을 때부터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고, 본인 이름으로 신전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했다. 남을 시기하고 의심해 유력자를 처형하는 등 철권을 휘둘렀던 그는 결국 원로원들과의 관계가 악화된 후 암살을 당했고 자신에 대한 기록이 모두 말살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런 황제의 신전이라면 건립 자체부터가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에페수스에서는 그의 신전을 추앙받았던 황제이자 그의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우스 황제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원래대로 도미티아누스의 신전으로 부르고 있다. 아무튼 신전 건물은 앞부분은 문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나 뒤쪽에는 벽과 계단, 건물 내부의 구조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 그 옆에 보수공사가 한창인 건물은 ‘폴리오의 샘(Fountain of Pollio)’이란다. 아틸리우스(Atilius)가 섹스필루스 폴리우스(Sextilius pollius)의 이름으로 지은 건물인데 아치에 ‘폴리오’라고 적혀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도미티아누스 광장이 본디 상업의 중심지였다니 이 건물들은 물론 상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 멤미우스 기념비와 도미티아누스 신전 사이에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가 있다. 하얀 대리석 위에 부조로 새겨졌는데, 왼손의 월계관과 여신의 날개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여신은 그리스신화에서는 행운의 여신으로 나타난다. 로마에서는 포르투나여신으로 변하는데 영어 ‘Fortune(운)’은 이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나이키’의 브랜드명과 로고가 이 부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가 새겨진 돌도 보인다. 히포크라테스가 살던 당시의 병원표식인데 현재로 이 표시는 의술을 상징한단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병원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뱀은 껍질을 벗음으로서 젊어지거나 치유, 또는 재생된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상징하는 동물이 된 이유이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는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이라고 알려진다.
▼ 잠시 후 부조상(浮彫像)으로 채워진 기둥 두 개가 나타난다. 큐레테스거리(Curetes street)의 시작을 알리는 ‘헤라클레스 문(Heracles Gate))’으로 헤라클레스가 사자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원래는 여섯 개의 기둥에 아치가 있는 이층 구조였는데, 4세기경 두 개의 기둥만을 찾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도미티아누스광장(Domitian square)에 있는 니케의 부조상도 이 문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문은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해 기둥의 폭을 좁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로 인해 4세기부터는 ‘큐레테스거리’가 보행자 전용의 거리가 되었단다.
▼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면서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가 시작된다. 과거 이 거리에는 줄지어 늘어선 원형 기둥들 위로 지붕이 얹혀 있었으며, 그 뒤쪽으로 신전과 상점이 즐비했다고 한다. 참고로 쿠레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어린 제우스를 보호하던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존재들로 등장하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행정실무와 종교업무를 담당하던 사제들을 쿠레테스라고 불렀다. 쿠레테스 거리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매년 성스러운 불을 지키는 사제들의 행렬이 이 거리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란다.
▼ 오른편에 ‘트라야누스의 샘(Fountain of Trajanus)’이 보였다. 트라야누스의 님파에움(Nymphaeum)이라고도 불리니 참조한다. 오현제의 하나인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황제이다. 분수대의 중앙 받침대 위에는 12미터짜리 황제의 동상이 세워져있었다지만 지금은 발 부분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과거에는 동상의 발끝에서 흘러나온 물이 가정과 목욕탕으로 공급되었다고 한다.
▼ 왼쪽의 언덕위에는 고급주택가가 들어섰다. 고급 주택가는 발굴이 아직 덜 되었는지 양철지붕으로 막아 밖에서 볼 수 없게 해두었다. 한쪽에 일부 집들이 노출되어 있었는데, 다 무너져서 예전의 영화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로마시대에는 부유층이나 유력자들만이 이곳에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바닥에 깔려있는 모자이크 모양의 타일이 당시의 영화를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 무심코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다가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고 만다. 느닷없이 ‘바리우스 욕장(Varius Bath)’에 대해 적어놓은 안내판이 나타난 것이다. ‘학술원 골목(academy alley)’과 함께 쿠레테스거리의 북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보았던 시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의문은 하단에 적혀 있었다. 지어진 시기(1.5~2세기)나 이름은 아까와 같으나 확실히 다른 목욕탕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이름 또한 다르단다. ‘스콜라스티카(Scholasticia)’라는 크리스트교 여성이 대대적으로 개수를 하였기 때문에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3층 높이의 건물로 재건축되었는데, L자 형태의 구조로 안에 탈의실과 냉탕, 온탕, 열탕 등 완벽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차가운 물이 있는 냉탕인 프리지다리움(frigidarium)과 따뜻한 목욕탕인 테피다리움(Tepidarium), 그리고 증기실인 칼다리움(caldarium)과 탈의실인 아포디테리움(Apodyterium)은 전형적인 로마 목욕탕에 있는 네 개의 주요 부분이다.
▼ 그 옆에서 고린도 양식으로 지어진 ‘하드리아누스 신전(Hadrian temple)’이 자신도 있다며 손짓을 한다. 로마 5현제 중 하나로 추앙받는 하드리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서기 138년 지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최근에 복원된 모습이란다. 이 신전은 로마의 건축물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란다. 여러 황제와 아테나여신, 아르테미스여신 등 흥미 있는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입구 달걀모양의 아치 중앙에 새겨진 두상(頭像)은 ‘메두사’란다. 저런 무시무시한 조각을 하필이면 신성한 신전의 앞머리에다 새겼을까? 어쩌면 잡신들의 침입을 막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스리슬쩍 들어오려 해봐도 메두사 때문에 돌로 변해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형적인 예라고 보면 되겠다. 두 번째 입구의 박공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가 새겨져 있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것이 화려했던 제국의 영광을 짐작하게 해준다.
▼ 목욕탕과 하드리아누스 신전 사이엔 공중화장실(Lartin)이 있다. 벽면을 따라 이어진 대리석에 동그란 구멍들이 뚫려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것들의 정체는 바로 로마 시대의 좌변기로 당시 5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던 공중화장실이다. 목욕탕에서 사용된 온천수를 대리석 좌식 변기 아래로 흘려보내 대소변을 자동수세식 방식에 의해 자연친화적으로 처리하도록 설계된 점이 놀랍다. 변기는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고, 일을 본 후에는 발아래로 흐르는 물에 손을 씻을 수 있게 했단다. 그러니 물이 흘러 들어오는 위쪽은 이용료가 비쌌을 게 당연하다. 아무튼 생각해오던 것보다는 규모가 훨씬 더 크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멋을 냈고 옛날에는 중앙에 청동으로 된 동상까지 배치했었단다. 이 정도라면 은밀한 장소로 이해되는 ‘화장실’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사교의 장소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화장실은 남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용료도 지불해야 했단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어디서 일을 처리했을까? 그녀들 역시 나들이를 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많이 궁금하다.
▼ 켈수스도서관을 바라보며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이 나타난다. 둘로 나누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안내판을 보면 3층으로 지어진 하나의 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퍼레이드(parade)를 할 수 있는 중앙의 큰 문과 일반 보행자들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두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리스의 아테네에 있는 ‘하트리아누스의 문’과 흡사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참고로 로마의 14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임으로, 제국 전체를 직접 발로 뛰는 순행을 수차례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소아시아의 유력 도시였던 에페수스도 그의 121년 순행과 128년 순행에 포함되어 있었단다.
▼ 잠시 후 ‘켈수스도서관(Library of Celsus)’에 이른다. 에페수스 유적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건축물로 우리나라의 중학교 교과서 표지에까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한 고대의 유물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건물은 지진으로 파괴 됐다가 최근 땅 속에 흩어져 있던 돌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 현재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고고학적으로 복원기술의 최고 산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켈수스도서관은 서기 135년에 지어졌다. 110년 소아시아의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라(Gaius Julius Aquila)’가 소아시아의 집정관이자 애서가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Tiberius Julius Celsus Polemaeanus)’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도서관의 지하에 켈수스의 관을 모셨다고 한다. 그가 남긴 2만5천 데나리온은 도서관을 짓고 양피지로 된 1만2천권의 장서를 구입하고도, 도서관을 유지할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이 도서관으로서 용도를 갖게 되자, 세계 전역에서 걸출한 학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두루마리들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당시 파피루스를 수출하던 이집트에서 켈수스도서관이 너무 커지자 견제하기 위해 아예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해 버렸단다. 그러자 에페수스는 파피루스 대신 양피지로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양피산업과 양 관련 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양가죽은 터키제품을 최고로 평가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켈수스도서관의 책들과 건물은 서기 250년쯤 고트족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 경외의 마음에 잰걸음으로 켈수스 도서관에 다가선다. 코린트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이 혼합된 화려한 앞부분은 에페수스 유적 가운데 단연 압권이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에서 풍겨나는 묘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각각의 처마에 새겨진 꽃무늬 조각들이 한층 더 세련된 예술적 가치를 뽐내고 있다. 아홉 개의 넓은 계단을 올라 1층에 오르면 세 개의 입구가 나오는데 양쪽 옆의 벽감에는 왼쪽부터 지혜(Wisdom, Sophia), 덕(Virtue, Arete), 사고(Intelligence, Ennoia), 학문(Knowledge, Episteme)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진품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에페수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란다. 2층은 1층을 그대로 복제해 놓은 듯한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 내부는 생각했던 것 보다는 넓지 않았다. 이곳 켈수스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에 이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였던 점을 감안할 때 의외라 하겠다. 웅장한 외부의 모습과는 달리 왠지 허전해 보였지만 건축 당시만 해도 무려 12,000여권의 장서가 과학적인 구조에 의해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며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던 이 도서관으로 인해 에페수스는 학문의 중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찍이 에페수스에서 활동했던 희랍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학문 전통을 이어왔다. 성경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은 켈수스 도서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켈수스 도서관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2년간을 머무르며 복음을 강론했던 곳이기도 하다.
▼ ‘헬수스 도서관’의 오른편으로 아치형의 문이 보인다. 상업아고라로 들어가는 남쪽 문, 즉 남문이다. 노예였던 마제우스(Mazeus)와 미트리다테스(Mitridates)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바친 것으로서 아우구스투스의 문 또는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Gate of Mazeus and Mitridates)‘이라고도 한단다.
▼ 도서관을 둘러보고 나와 오른편 문으로 나가면 확 트인 광장이 나온다. 에페수스의 상업 아고라(Commercial Agora)로 항구와 가까운 곳에 조성되어 각지에서 들어온 물건이 총집합하던 거대한 국제 시장이었다. 상점들은 주랑을 따라 있었고, 상점들의 뒤쪽에는 둥근 원통형의 지붕으로 된 창고가 있었다. 또 해시계와 물시계가 아고라 중앙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사방 100m 넓이의 사각형 광장에 들어서면 온갖 물건과 다양한 인종들로 북적거렸을 고대 상업 아고라를 떠올려볼 수 있다.
▼ 쿠레테스거리가 켈수스도서관 앞에서 오른편으로 돌면서 시작하는 ‘마블 스트리트(Marble street)’는 원형경기장 앞에서 아카디아대로로 연결된다. 널찍한 사각형 대리석이 깔려 있어 보기도 좋고 걷기도 편한 대리석길의 양편으로는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그 옛날 이 기둥에 횃불을 걸어 가로등을 삼았다고 한다.
▼ 이곳에는 사창가도 있었다. 대리석거리(Marble street)를 걷다보면 바닥에 발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창가 입장을 제한하는 발의 사이즈라고 한다. 발의 크기를 보고 미성년자인지를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난히도 발이 작은 나에게 사창가는 화중지병(畵中之餠)일 수밖에 없었겠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사람이 바로 우리 집사람이 되었을 테고 말이다. 여기서 아재개그 하나, 광고업계에서는 저 발바닥 문양을 인류 최초의 광고물로 여긴다니 기억해 두자. 그나저나 도서관의 곁에 사창가가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아이러니하게 보이지만 공부하다 지치면 잠시 쉬어가면서 하라는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적당히 해소하는 게 인간의 본능일 테니까 말이다.
▼ 대리석 거리를 따라가면 만나게 되는 2만 4000석 규모의 초대형 ‘원형 경기장(Great Theater)’은 에페수스 방문의 절정을 이룬다. 수용인원이 2만 4000명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에페수스의 인구를 25만 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로마 시대 극장들이 도시 인구의 약 10%를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존재하던 극장을 로마 시대에 개축한 것으로, 세 개의 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 단의 일부는 아직 발굴·복원중이어서 철조망으로 막혀져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극장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의 야외 오페라 극장과도 같았다. 야구경기장의 홈베이스처럼 파인 중앙의 홈에는 당시 바닥에 깔았던 대리석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연극 등의 공연은 물론이고 검투사들의 경기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에는 기독교인들을 몰아넣고 사자를 풀어 놓기도 했단다. 지금도 가끔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리는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 전 객석으로 소리가 울릴 정도란다. 참고로 이곳은 아르테미스 신을 섬기던 데미트리우스와 장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며 바울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원형경기장에서 항구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아르카디안 거리(Arcadian street)’이다.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의 명령으로 복구 작업을 벌인 뒤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길이 600m(현재는 200m만 남아있다)에 폭이 11m인 이 거리는 길 양쪽으로 원형 기둥과 상점들이 늘어섰고, 밤에는 50여 개의 횃불로 가로등을 밝히기도 했단다. 과거 에페수스가 바다와 맞닿은 항구 도시였을 때, 배를 타고 에페수스에 도착한 사람들은 항구의 욕장에서 몸을 씻고 이 길을 따라 도시로 들어왔을 것이다. 상가거리를 뜻하는 ‘아케이드’란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으니 참고해두도록 하자.
▼ 아름드리 소나무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길을 따라 ‘로워 게이트(Lower Gate)’로 나가는 길에 엄청나게 많은 석관(Sarcophagi)들이 눈에 띈다. 근처에 고대의 대형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Necropolises)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무덤과 묘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도시를 둘러싼 성벽 바깥, 성문주위와 도로 양옆에 묘지를 썼다고 전해진다.
▼ 사진은 비록 후반부에다 배열했지만 에페수스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와인 마을로 유명한 ‘쉬린제(Sirince)’에 들렀다. 터키어로 ‘즐거움’을 뜻하는 쉬린제는 작지만 활기 넘치는 해발 700m의 산간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제국 당시 노예로 잡혀온 그리스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단다. 그들은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의 집을 짓고 포도와 올리브 등을 재배하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와 그리스가 주민을 맞교환 할 때 그리스에 살던 터키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전통적인 와인생산지로 그 이름이 굳어지게 됐다. 포도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석류로도 달콤한 와인을 빚는다. 한 병을 구입해서 그날 저녁 호텔에서 마셔봤는데 맛이 괜찮았다.
▼ 쉬린제마을의 투어는 너무 간단하다. 마을의 초입에 있는 ‘아르테미스 레스토랑’을 방문해보는 단출한 일정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시켜 먹을 만한 시간까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레스토랑의 지하에 내려가 와인을 시음해보는 것으로 투어가 끝나버린다. 그저 맘에 드는 와인이라도 있을 경우 한 병 사들고 나오는 시간 정도나 주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참! 눈요깃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고풍스런 건물의 1층에는 이곳의 역사를 이야기 하듯 작은 전시장이 만들어져 있다.
▼ 난간으로 다가가면 언덕을 따라 조성된 쉬린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흰 회벽에 붉은 기와지붕 모습을 하고 있다. ‘터키 속의 작은 그리스'라는 애칭을 얻게 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았던 탓에 골목길을 걸어볼 수는 없었다. 터키 블루로 장식된 창문이나 오브제처럼 비치된 다채로운 테이블, 담장 아래 놓아둔 앙증맞은 꽃 화분들이 마치 그리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 터키에서 로마유적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해서 찾아온 셀죽(에페수스의 현재 이름), 아주 작은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한식당(韓食堂)이 있었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애기일 것이다. 맞다. 기독교인들에게 이곳 에페수스는 빼놓지 않고 들르는 성지(聖地)가운데 하나이다.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머물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식당으로 들어서자 뒤편 언덕에 성(城)이 하나 보인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인 사도 요한을 기념해 지은 ‘성 요한 기념교회(John church)’가 있는 곳이란다. 여기서 요한이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의 그 ‘요한’이다. 이 도시의 옛날 이름인 ‘에페수스(에베소)’도 ‘에베소’서의 그 ‘에베소’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 바로 저곳이란다. 그렇다면 내 생에 처음으로 성지(聖地)라는 곳에 발을 디뎌본 셈이다. 하지만 우린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행사는 애초부터 방문 계획이 없었고, 그렇다고 자유시간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트하게 짜놓은 스케줄 때문이라니 별 수 없지 않겠는가. 볼거리가 많은 곳인데도 패키지여행을 따라온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참고로 이곳 에페수스에는 ‘마리아의 집’도 있다. 셀죽 근교인 부르부르산 중턱에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 하룻밤을 머문 ‘Ramada soma’
마니사 주(Manisa ili)에 속한 소도시 소마(soma)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특징은 없었다. 편의시설이나 제공되는 식사, 침실의 청결도 등이 터키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여느 호텔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얘기이다.
♧ 에필로그(epilogue), 부서진 옛 건물들이 수두룩한 에페수스는 기원전부터 시작하여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번영을 누렸던 고대도시이다. 유물의 시기도 매우 다양해서 정확하게 도시의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로마제국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긴 이후 많은 건축물이 세워지면서 전성기를 이뤘다. 로마의 그 유명한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체류하기도 했고 이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또 다른 문화를 접목시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곳은 도시 전체가 그대로 유물이요 고적이며 노천박물관이다. 그러한 유적들은 과거 에페수스의 영광을 한눈에 읽을 수 있게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관광객들은 그저 스치듯 지나가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대도시의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뜨거운 태양빛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있다.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가면서 그 유적들을 살펴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에페수스는 1863년부터 고고학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898년 독일의 고고학자 벤돌프가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전체 유적의 10%정도가 발굴되었다고 추정될 만큼, 유적의 발굴과 복원 작업의 진척은 미진하단다. 터키의 주요 수입이 관광인데 비해, 관광에 투자하는 비용은 아무래도 턱없이 부족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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