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첫째 날 : 아그라 성(Āgra Fort)

 

특징 :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과는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붉은 사암(砂岩, sandstone)의 성채와 내부의 하얀 대리석 건물이 어우러져 웅장함과 정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아그라가 무굴제국의 수도가 된 것은 1558년 제3대 황제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에 의해서다. 이때 만든 방어성(Fortress)이자 궁전(Palace)이 바로 아그라성이다. 악바르는 1556년 파니파트(Panipat) 전투에서 힌두교 왕 헤무(Hemu)를 물리치고 나서, 아그라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파괴된 성을 재건하기 위해 라자스탄 지역에서 나는 붉은 사암으로 성과 궁전을 짓기 시작했고, 1573년에 완성시켰다. 이후 그의 손자인 샤 자한(Shah Jahan)’이 타지마할(Taj Mahal)을 건축함과 동시에 이곳 또한 더욱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보다는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 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 더 유명하다. ‘샤 자한이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지내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아그라성은 바로 코앞이다. 거대한 성은 입구부터 찾아오는 이들을 압도해 버린다. 시선을 압도하는 붉은색 또한 무척 인상적이다. 높이가 20m에 이르는 저런 성벽이 2.5Km에 걸쳐 이중으로 쌓여있다고 한다. 아그라성은 첫눈에 봐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여겨진다. 악바르가 건설하던 당시 저 성은 대형의 요새였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샤 자한이 황제가 된 후 평화정책을 견지해 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궁전으로 기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근래 외벽 문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 마할샤 자한이 부활할 것이다.> 그들의 열렬했던 사랑의 흔적들은 타지마할뿐만 아니라 이곳에까지도 짙게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성의 둘레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10m 넓이의 해자(垓字, moat)로 둘러져 있다. 당시 저 해자에는 악어를 풀어 놓았었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해자를 건너기 위해서는 나무판으로 만든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이 다리를 위로 들어 문을 막으면 외적이 접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설사 나무다리를 통과했다고 해도 다는 아니다. 성문에도 좌우로 여닫는 철문(鐵門)이 만들어져 있다.

 

 

남문(南門)아마르 싱 게이트(Amar Singh Gate)‘로 들어서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아그라성에는 동서남북에 네 개의 문이 있는데, 현재는 이곳 남문과 서쪽의 델리 게이트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델리 게이트는 인도군 낙하산부대가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은 제한된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 아마르 싱 게이트악바르 문(Akbar Darwaza)‘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1568년 악바르가 이 문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란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남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또 다른 문 하나가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성채 본곽(本墎)에 내놓은 문이다.

 

 

두 번째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자그만 정원이 나오면서 관광객들은 자신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완전히 성안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성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을 더 통과해야만 한다. 아그라성은 이렇게 3중의 문을 통과해야만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요새이다.

 

 

세 번째 문은 하티 폴(Hathi Pol)‘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하티 폴코끼리 게이트라고도 불리는데 두 개의 높은 기둥이 문 양쪽을 받치고 있어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문루에는 몇 개의 방이 있는데 현재 작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이드의 뒷 꽁무니를 따라가기에 바빴기에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곧지를 않고 급하게 휘어져 있다는 것이다. 옛날 코끼리를 탄 적군이 성안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휘어놓았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세 번째 문을 지나면 아그라성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이 길 역시 양쪽으로 벽을 쌓아 들어오는 외적(外敵)을 위에서 공격할 수 있게끔 했다. 실제 외적이 두 개의 문을 돌파하고 들어올 경우에는 이 경사로에 기름을 부어 올라오는 것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고 한다. 원초적이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곳에서는 창이나 칼, 화살, 대포 같은 무기 보다는 펄펄 끓는 기름이 더 효과적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길의 끝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샤자한 게이트로 옛날 황제가 대중들을 알현하는 궁전인 디완 이 암(Diwan-i-Aam)‘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오른편에 있는 자한기르 마할‘ ’카스 마할(Khas Mahal)‘ 등 궁전 내부를 먼저 둘러보고 나올 때 저 문을 이용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널따란 잔디밭 너머로 자한기르 마할(Jahangir Mahal)‘이 나타난다.

 

 

자한기르 마할‘, 자한기르 궁전(Jahangir Palace)‘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 1542-1605 재위)‘가 힘겹게 얻은 아들인 자항기르(Jahangir, 1605-1627 재위)‘를 위해 벵갈 양식으로 지은 궁전이다. 자한기르가 주로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궁전은 아그라 성벽과 같은 붉은 사암으로 건설되었으며,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일품이다. 건물 벽면은 붉은 사암으로 지어 흰 대리암 상감을 입혔다. ’파사드(façade,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는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 양끝에는 차토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하는데, 우산을 닮은 작은 탑으로 이해하면 되겠다)가 올려져있다.

 

 

 

정원 한가운데에 돌로 만든 반구형 석조(石槽)가 놓여있다. 황태자였던 자한기르가 장미수(Rose water) 목욕을 했다는 욕조(浴槽)이다. 지름이 2.4m나 되는 커다란 목욕통인데 높이도 1.5m나 되어 욕조의 안과 바깥에 계단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다. 욕조 가장자리에 페르시아어로 자한기르 욕조(Hauz-i-Jahangiri)’라고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철책을 둘러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외관을 살펴봤다면 이젠 궁전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자한기르 궁전은 이름처럼 자한기르와 그의 부인 누르 자한(Nur Jahan)’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자한기르가 황제에 오른 것은 1605년이며, 그 후 1627년까지 이곳 아그라성에서 무굴제국을 통치했다. 이 궁전은 인도 양식과 중앙아시아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대칭과 개방성, 기하학적 문양, 그리고 건물 위 정자모양의 차트리 등을 주요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일부 건축가들은 이를 두고 단순성(Simplicity)과 명료성(Clarity), 완전성(Integrity)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부에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실내 풍경, 벽면이나 돔(dome)의 하부로 보이는 천장 등은 붉은색 사암(砂岩)으로 지어졌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흥취를 주지 못한다. 모양새이나 무늬에 얽힌 사연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내 앎이 거기까지이니 어쩌겠는가. 그냥 통과하기로 한다.

 

 

 

 

하지만 궁전의 중앙에 만들어 놓은 안뜰에 들어서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과학적인 논리까지 품고 있는 구조물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사암으로 만든 기둥이나 벽면은 물론이고, 차양을 받치고 있는 까치발에까지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남북의 홀은 기둥들보 구조로 되어 있다. 조금 전 들어올 때 보았던 외관(外觀)은 전형적인 아프칸 형식을 따랐으나, 궁전의 내부는 구자라트나 라자스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하라자(maharaja, 산스크리트어인 위대한이란 뜻의 mahatrājan이 합쳐진 것인데, 보통 왕의 위에 군림하는 힌두의 제왕을 의미한다)’들의 궁전과 비슷하다. 이는 자이푸르의 공주를 정실로 맞아들였을 정도로 힌두와의 융합을 중시했던 악바르의 영향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궁전은 악바르시대에 지어진 궁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꼽힌다고 한다.

 

 

반대편 건물로 들어서면 그 아름다움은 한층 더 짙어진다. 여성들이 머물던 공간이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공간에는 과학적인 원리까지 적용을 시키고 있다. 벽 속에 물이 흐르는 수도관을 넣어 여름철에도 찬바람이 실내로 전달되게끔 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에어컨(Air conditioner) 시설쯤으로 여겨도 될 듯 싶다. 아주 오래 전, 저런 원리를 소개하던 신문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세간의 화두(話頭)에너지절약이었을 때인데, 당시 기사에는 상수도관을 벽속에 넣음으로써 에너지를 쓰지 않고도 냉방을 하고 있다며 식당주인의 아이디어를 극찬하고 있었다.

 

 

 

 

사암으로 된 기둥에 조각된 무늬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마치 찰흙을 빚어 정교한 부조를 만들어 놓은 듯, 정교한 문양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새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을 정도로 아라베스크(arabesque : 원래 고대 그리스 공예가들에게서 유래했으나 1000년경 이슬람 공예가들이 종교적 이유로 새·동물·사람 등을 제외시킨 채로 정형화시킨 이슬람 장식 문화)’ 문양들이 향연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경이(驚異) 그 자체가 된다.

 

 

 

갑자기 대리석 방들이 나타난다. 아니 사암 위에 회칠을 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붉은 빛에서 하얀 빛으로 바뀐 것만 해도 새로운 아름다움인데, 거기다 온 벽면을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들로 채워놓아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켜 놓았다. 혹시 여성들이 침실로 사용하던 공간이지 않나 싶다.

 

 

 

 

궁전을 빠져나가면 또 다른 마당이 나타난다. 한쪽 면이 트여 있는 것이 테라스(terrace)를 염두에 두고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툭 터놓은 것은 아니다. 어른의 키보다 훨씬 더 높게 담장을 두르고 중간 중간에 사각의 구멍을 내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마당의 가운데에는 빗물을 모아두던 수조(水槽)가 있다. 그런데 임시로 빗물을 모아두는 시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을 갖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짓지 않는 당시의 건축술이 놀랍다. 아무튼 이 물은 그냥 버리지를 않고 생활용수로 다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구멍마다 관광객들이 몰려있기에 다가가 본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묘라는 타지마할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한기르 궁전이 끝나면 주위 풍경 또한 확 바뀌어 버린다. 사암(砂岩, sandstone)이 대리석(大理石, marble)으로 바뀌면서 색깔 또한 붉은색에서 하얀색으로 변한 것이다. 샤자한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지금 향하고 있는 공간을 그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1627년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등극한 샤자한도 1648년까지는 이곳 아그라성에 살았다. 당시 그는 북쪽 공간에 하얀 대리석 궁전을 지었는데, 대표적인 건물로는 카스 마할(Khas Mahal)’디완 이 카스(Diwan-i-khas)’, ‘디완 이 암(Diwan-i-Aam)’ 등이 있다. 참고로 샤 자한1648년 수도를 샤자하나바드(Shahjahanabad)로 옮긴다. 현재의 올드 델리(Old Delhi)’이다. 그리고 무굴제국이 몰락하는 1857년까지 200년 이상을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백색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건, 황금색 지붕으로 이루어진 골든 파빌리언(golden pavilion, 부속건물)’이다. ‘샤 자한의 두 딸 중의 하나인 로샤나라(roshanara)가 머무르던 공간이라고 한다. ‘카스마할을 가운데에 두고 왕자와 공주들의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그 곁에는 샤 자한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인 카스마할(Khas Mahal)’이 자리 잡았다. 1631년부터 1640년 사이 샤자한에 의해 건설된 카스 마할은 황제와 황후의 거처이다. ‘카스 마할이란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성스러운 궁전이란 뜻으로, 아그라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한다. ‘앙구리 박(Anguri Bagh)’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카스 마할 정면에 마당이 나타나는데, 마당 한가운데 수조(水槽)와 분수대가 있고, 그 앞으로 정면 5칸의 개방된 궁전인 카스마할이 버티고 있다. 당시 건축방식을 따라서 천장이 무척 높게 만들어져 있으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침실에서는 성 주변에 있는 야무나 강이 잘 조망된다.

 

 

 

궁전 내부는 인도의 궁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각(陽角)으로 조각한 벽장식, 화려하게 상감(象嵌)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그리고 격자창 등이 눈길을 끈다. 타지마할에서 보았던 양식들과 거의 비슷한 느낌들인데 다만 피에트라 두라의 상감기법은 그 색깔이 타지마할 보다 조금 약한 것 같다. 타지마할에서 사용했던 보석들을 이곳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스마할 앞마당은 파라다이스를 상징하는 사분정원으로 되어 있다. 화단과 수로, 그리고 연못과 분수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포도나무 정원으로 불리는 앙구리 박(Anguri Bagh)’인데, 현재는 포도나무 대신 화초들이 심어져 있을 따름이다. 정원은 가로 68m, 세로 52m의 직사각형이고, 가운데로 폭 5.5m 십자형 길이 나 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수조 형태의 단이 만들어져 있다. ‘앙구리 박의 남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에는 궁녀들의 거처인 쉬시 마할(Sheesh Mahal)’이 있다.

 

 

 

 

카스 마할옆에는 샤 자한의 또 다른 딸인 자하나라(Jahanara)’가 머물렀던 공간이 있다. 아들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 샤 자한은 야무나 강 건너에 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우랑제브가 아그라 성으로 공급되는 야무나 강줄기를 막아 버리자 소금기 많은 성안의 물로 한여름의 갈증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66674살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힘든 여생을 보내야했던 샤 자한을 곁에서 보살폈던 사람이 자하나라(Jahanara)’이다.

 

 

공주의 거주 공간 안에는 전망 좋은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건너편에 있는 타지마할을 조망(眺望)하기가 더 없이 좋지만 일부러 격자창 사이에다 카메라 렌즈를 대고 촬영해봤다.

 

 

카스 마할옆에는 8각형 탑의 형태로 지어진 무삼만 부르즈(Muthamman Burj)’가 있다. ‘포로의 탑이라는 뜻으로 건물 한가운데 가로 12.3m 세로 6.7m의 향수 분수가 있고, 그 둘레에 피에트라 두라로 장식한 기둥과 벽 그리고 방이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샤 자한이다. 하지만 말년에 그가 갇혀있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1658년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황제자리를 찬탈 당한 뒤, 1666년 숨을 다할 때까지 마지막 7년을 이곳에서 유폐생활을 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갇혀 지낼 감옥(監獄)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던 셈이다.

 

 

무삼만 부르즈(Muthamman Burj)’ 앞에는 이름이 적힌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그만큼 의미가 있는 건물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제 몸에서 나온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폐위된 샤 자한(Shah Jahan)’은 아그라성에 유폐되었다. 아그라성의 작은 방에서 저 멀리 보이는 타지마할(Taj Mahal), 구불구불 흐르는 야무나 강변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타지마할에 누워 있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다 최후를 맞게 된다. 여름 내내 짠맛이 나는 우물물만 마시게 했다는 아우랑제브의 학대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바라보며 죽어간 그는, 사랑의 추억에 행복했을까, 아니면 덧없는 인생의 영욕에 쓸쓸했을까.

 

 

내부 장식은 잠시 전에 보았던 카스 마할못지않게 화려하다. 그것은 카스 마할보다 보존이 잘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지금도 내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참고로 무삼만 부르즈의 한쪽에는 장식이 없는 작은 모스크가 있다. ‘메나 마스지드(Meena Masjid)’로 왕가의 사적인 예배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곳 역시 들어갈 수가 없다.

 

 

다음은 황제의 사적 업무 공간인 디완 이 카스(Diwan-i-Khas)’이다. 대신 및 외국 사신들과 만나는 외부의 개방된 홀과 황제의 집무실인 내부의 폐쇄된 홀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 역시 1635년 샤자한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페르시아의 한 시인이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는 시구(詩句)를 지어 바쳤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었다고 전해진다. 건설 당시만 해도 온 벽을 보석으로 치장했었다니 그랬을 만도 하겠다.

 

 

 

 

 

하지만 디와니카스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건물 안에 있던 옥좌, 일명 공작왕좌(孔雀座, Takht-I-Taus) 때문이다. ‘샤 자한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옥좌는 인류가 만든 어떤 옥좌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우선 단상까지 이르는 계단을 은으로 만든 데다 의자의 다리는 황금으로, 등받이는 다이아몬드와 루비 등으로 꾸며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공작왕좌는 의자의 등받이가 공작의 깃털 모양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공작좌는 1648년 수도를 델리로 옮기면서 델리의 레드 포트로 옮겨졌다.(디와니카스의 왼편에 보이는 탑은 샤자한이 갇혀 살았던 무삼 부르즈의 상징인 팔각 탑이다.)

 

 

디완 이 카스밖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중 검은색 판은 자한기르의 왕좌((Takht-I-Jahangiri)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맞은편에 있는 흰색 판은 대신이나 사신들이 앉았던 자리가 아닐까 싶다. 혹자는 왕비의 자리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디완이카스가 왕의 집무공간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더 이상 우겨서는 안 될 일이다.

 

 

 

 

디완 이 카스앞에는 2층짜리 마치 바완(Macchi Bhawan)’이 있다. 이 건물 가운데 잔디 광장이 있고, 그 주변을 아케이드 형태로 만들었다. 1층의 널따란 잔디광장은 여성 상인들이 무굴 왕실의 귀부인들에게 물건을 팔던 공간인 레이디 바자르이다. 궁녀들이 2층에서 내려와 물건을 사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 금남(禁男)의 구역이었을 게 분명하다. 참고로 마치 바완의 북서쪽 코너에는 궁녀들을 위한 사원인 나기나 마스지드(Nagina Masjid)’가 있다.

 

 

 

 

내부 궁전을 다 둘러봤다면 이젠 외부 궁전인 디완 이 암(Diwan I Am)’으로 나가볼 차례이다. ‘디완 이 암역시 건물이 서향(西向)으로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운동장을 설치한 형태다. 샤자한에 의해 1630년대 지어졌는데, 대중이 참가하는 공식적인 의전과 행사 장소로 사용되었고 한다. 궁전은 기둥이 정면 10, 측면 4줄이나 되는 개방형 건물이다. 그러므로 내부는 27개 공간으로 나눠진다. 여러 겹의 기둥들이 겹쳐진 듯 건물을 떠받치고 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어 내· 외부를 비롯하여 어느 각도에서 봐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외형을 보여준다.

 

 

내부 장식은 디완 이 카스카스 마할처럼 화려하지 않고 단순한 편이다. 전면에 어른 키 높이의 단상(壇上)이 만들어져 있는데 황제가 앉았던 자리란다. 그 앞에는 나지막한 좌대(座臺)가 놓여있다. 가이드가 신하의 자리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디완 이 암(Diwan I Am)’의 앞에는 정원을 꾸며놓았다. 바닥에 잔디를 깔고 관목(灌木)들로 조경을 했다. 그런데 운동장의 한가운데에 의외의 무덤 하나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인도 북서부 지방을 다스리던 부총독 존 러셀 콜빈(John Russel Colvin)’의 무덤이란다. 1857년 인도 1차 독립전쟁(세포이 항쟁) 당시 이곳 아그라성에서 죽었는데, 아그라성의 아름다움에 반한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일 것 같다. 만일 테라우찌(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하세가와(長谷川好道, 2대 총독)‘의 묘를 경복궁 뜰에 세운다면 가만히 있을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인도에 도움을 많이 준 인물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풍경이었다.

 

 

출구, 그러니까 샤 자한 게이트의 반대편 방향에 많은 숫자의 정자 형태 차트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한다)들이 보인다. ’샤 자한이 지은 아그라성의 공식 사원, 즉 진주사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모티 마스지드(Moti Masjid)‘일 것이다. 그런데 가이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밖으로 향해버린다. 시간이 없어선지, 아니면 원래부터 입장이 불가능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사원으로 알려져 있기에 구경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가이드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다. 패키지여행의 가장 좋지 않은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니 어쩌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마라.‘는 속담(俗談)이 있다.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배우는 법이니 항시 언행(言行)을 조심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오늘 아그라성을 둘러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위의 속담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건축물인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 자한(Shah Jahan)’은 제 몸에서 나온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폐위된 채 아그라성에 유폐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우랑제브를 패륜아(悖倫兒)로 손가락질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가 왜 폐륜아가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봤다. ‘샤 자한이 과연 옳은 아버지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망나니가 태어났을까 하는 의구심을 말이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샤 자한또한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료에 의하면 샤 자한은 그의 아버지 자항기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왕좌를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었다. 거사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아들인 다르 슈코흐아우랑제브를 아버지인 자항기르에게 인질로 보내고, ‘샤 자한자신은 은퇴하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부지한다. 나중 일이지만 왕좌 또한 그냥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형제들과 살육전을 벌이고 난 뒤에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그의 아들은 과연 뭘 배웠을까. 아우랑제브 역시 형제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인 끝에 1658년 무굴제국 6대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경쟁자였던 큰아들 다라 슈코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아그라성에 유폐시켜버린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속성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부모에게 배운대도 실행에 옮겼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샤 자한은 그가 저질렀던 업보(業報)를 그대로 되돌려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패륜아인 아그랑제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권좌를 차지한 아우랑제브는 90살까지 50년을 통치했다. 그러나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졌던 그는 제국 멸망의 원인이기도 했다. 선대왕들의 관용정책을 무시하고 비()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지즈야인두세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시크교 지도자를 잡아 잔인하게 처형하고 힌두교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30년 넘는 세월을 소진했다. 내란과 저항을 거듭하던 제국은 결국 때마침 쳐들어온 페르시아와 아프간 세력에 의해 18세 중엽 몰락당하고 무굴제국은 델리 주변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친구는 아예 나라를 거덜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