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수) - 24(일)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 9.21(목)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 9.22(금)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 9.23(토)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첫째 날 : 아그라(Āgra)의 타지마할(Taj Mahal)
특징 :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Shah Jahan,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왕‘이라는 뜻, 1628-1658 재위)’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영묘(靈廟)이다. 시장에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팔고 있던 열아홉 살의 처녀 ‘바누 베감’을 보고 한눈에 반한 ‘샤 자한’은 그녀를 두 번째 황비(皇妃)로 맞아들이면서 ‘궁전의 꽃’이라는 의미의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타지마할(Taj Mahal)’은 ‘마할의 왕관’이란 뜻이다. 1612년에 결혼한 그들은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다. 전쟁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의 질투였을까, 이 세상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던 뭄타즈 마할은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함께 출정한 데칸고원의 전쟁터 근처 천막에서 아이를 낳다가 서른아홉이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17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 사이엔 14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 급작스러운 죽음에 ‘샤 자한’은 머리카락이 하룻밤 새에 하얗게 변해버렸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아내를 그리워한 황제는 2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고 사후세계에서의 재회를 기약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를 지어주겠다고 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2년간에 걸쳐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공사는 인도·페르시아·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타지마할의 중앙에는 정4각형 정원이, 남쪽에는 사암 출입구와 부속 건물이, 북쪽에는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모스크(mosque, 예배당)‘와 이와 완전 대칭을 이루는 '자와브(jawab, 영빈관)'가 있다.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고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1983년 타지마할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2007년에는 세계의 경이적인 문화유산 7개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더욱 더 유명세를 띠게 되었다.
▼ 버스는 우릴 타지마할(Taj Mahal)에서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다 내려놓는다. 타지마할은 대형버스의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록(1983년)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아닐까 싶다.
▼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전동차(電動車)를 타고 타지마할 동문으로 향한다. 주변에는 릭샤, 마차, 낙타 등이 줄을 서 있다. 모두가 타지마할로 가려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휘발유나 경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자동차는 보이지 않는다. 대형차량의 진입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재에 해가 되는 매연(煤煙)을 내뿜는 차랑 자체의 통행을 금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전동차라고 해서 남문 앞까지 곧장 가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200m정도는 ‘카라반 사라이(karavan sarai), 즉 상가지역을 통과해야만 남문에 이를 수가 있다.
▼ 길가에 코브라를 닮은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 봤다. 뒤편 벽면에는 액자도 하나 걸려 있다. 뭔가를 부조(浮彫)로 새겨놓았는데 무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힌두교가 본디 다신교(多神敎)인 점을 감안하면 뭔가를 바라며 만들어놓은 신단(神壇)일지도 모르겠다.
▼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요란스런 음악소리가 들리기에 봤더니 인도의 전통복장을 한 여성들이 뭔가를 머리에 인 채로 줄지어 가고 있다. 인도의 전통 축제인 ‘디왈리(Diwali)’를 준비하기 위한 행사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힌두 달력으로 여덟 번째 달(Kārtika, 카르티카) 초승달이 뜨는 날을 중심으로 닷새 동안 열리니, 그레고리력으로는 10월쯤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디왈리는 집집마다 수많은 작은 등불을 밝히고 힌두교의 신들을 맞이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힌두교 전통 축제로, 힌두교의 부와 행운의 여신 락슈미, 죽음과 파괴의 여신 칼리(Kali), 최고신 비슈누(Vishnu)의 여덟 번째 화신인 크리슈나(Krishna) 등을 숭배한다. 디왈리는 홀리(Holi), 두세라(Dussehra)와 더불어 힌두교 3대 축제로 손꼽힌다.
▼ 가이드가 나눠준 입장권과 덧버선을 챙겨들고 동문으로 들어선다. 특이하게도 남자와 여자가 따로 줄을 서고 있다. 검문·검색의 편의를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타지마할은 경비가 아주 엄격한 편이다. 소지품은 물론이고 신체까지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예 주무르다시피 해가면서 검색을 한다. 나이프나 송곳, 연필 등 건물에 해가되는 도구는 일체 금지되며, 음식물 또한 반입을 막고 있다. 아무튼 검색을 마치고 나면 우린 타지마할의 영역으로 들어선 셈이 된다.
▼ 타지마할 남쪽의 정문까지는 화단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간다. 그러나 길 양쪽으로 회랑(回廊)이 지어져 있으니 이를 따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아니면 투어를 마치고 되돌아 나오면서 이용해도 될 일이고 말이다.
▼ 붉은 사암(砂岩, sandstone)으로 지어진 회랑(回廊) 건물이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탓인지 무척 이색적이다.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의 눈에는 더욱 낯설었던 모양이다. 자꾸만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라고 우겨댄다. 자원공학(資源工學)을 전공했다는 것까지 들먹거려 보지만 가이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하긴 분명히 사암인 것을 어쩌겠는가. 아무튼 변화를 주어가며 만들어 놓은 회랑의 생김새를 눈여겨 봐가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잠시 후, 붉은 사암(砂岩)으로 지어진 정문(正門)에 이른다. ‘무케두아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사암 바탕에 흰 대리석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건물로, 타지마할의 여러 문들 가운데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이다.
▼ 정문의 앞은 널따란 광장(廣場)이 조성되어 있다. 이 광장은 앞과 옆으로 나있는 또 다른 출입문인 남문 및 서문과 연결된다.
▼ 정문인 ‘아케두아르’는 아치형의 문을 3개 만들고, 가운데 문에 또 다시 3개의 아치(arch)를 만든 다음, 가운데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또 문을 2층으로 만들고, 그 위 사방에 정자 형태의 차트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한다)를 설치했다. 가운데 지붕 위에는 작은 돔(dome) 11개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뒷면에도 11개가 있어 둘을 합할 경우 22개가 되는데, 이는 타지마할을 건설하는데 22년이란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 광장의 한켠에 자리 잡은 거대한 노거수(老巨樹) 한 그루가 쉼터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주고 있다. 동남아 여행 중에 자주 만났던 나무인데 이 나무는 유난히도 더 굵다.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수많은 나무줄기들이 흡사 인간의 수염을 닮았다. 그래서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신성하게 보이는 이유일 테고 말이다.
▼ 정문 앞에 타지마할의 평면도(平面圖)가 그려진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가이드의 눈초리가 빛나는가 싶더니만 전체적인 윤곽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흡사 물을 만난 고기마냥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자잘한 것까지 빠짐없이 늘어놓는다. 타지마할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고 한다. 그 중앙에는 한 변이 305m인 정4각형의 정원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그보다 약간 작은 2개의 직4각형 구역이 있다. 남쪽 구역은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mosque, 예배당)이며 동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jawab, 영빈관)'이다. 모퉁이에 8각형 탑이 솟아 있는 높은 벽이 북쪽 구역과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울타리 밖에는 마구간과 경비병 숙소가 있다.
▼ 출입문을 통과하자 갑자기 눈이 훤해진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하얀 대리석 건축물이 눈앞에 펼쳐진다. 스위스의 영화제작자 ‘베른하트르 베버(Bernard Weber)’가 이끄는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New7Wonders) 재단‘에서 새천년(AD 2000)을 기념하기 위해 인터넷 투표를 통해 뽑은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世界 七大 不可思議)‘에 여섯 번째로 이름을 올린바 있는 ’타지마할‘이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에는 좌우가 흐트러짐이 없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긴 수백 미터의 연못에 반영되는 ‘데칼코마니(decalcomanie, 일정한 무늬를 종이에 찍어 다른 표면에 옮겨 붙이는 기법)’조차 한 치의 어김없이 대칭이라는 칭송을 들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저 균형 잡힌 대칭의 안에는 수많은 비대칭들이 스며있을 것이다. 종교와 언어, 인종 등 무구한 역사의 끝없이 이어지는 비대칭들 말이다. 아무튼 타지마할은 순백색 대리석의 조화가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어느 시인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오로지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한 남자의 숭고한 사랑으로 가득한 건축물이 아닐까 싶다. 남녀 간의 깊은 애정은 때로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는 인도의 타지마할도 ‘세기적인 사랑’이 탄생시킨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백색의 진주’, ‘꿈의 궁전’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낮에는 흰색으로 보이지만 아침에는 자줏빛, 황혼녘에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시시각각 보랏빛과 푸른빛 등 그 색채가 수없이 변한다고 한다.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단다. 문득 영국 출신의 작가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이 이곳을 방문한 뒤에 적었다는 후기가 생각난다. ‘순수한 모든 것, 성스러운 모든 것, 그리고 불행한 모든 것의 결정이다. 이 건물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로 타지마할을 짓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단을 쌓을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타지마할의 건설 부지가 강둑의 부드러운 모래 지반이라서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토대를 다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건축기술자들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와 쇠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건축법은 20세기에 이루어진 조사에서야 겨우 밝혀졌을 정도로 신묘(神妙)한 기법이었다. 그만큼 토목공학적으로도 수작이라는 얘기이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구조물을 벽돌과 나무 받침대에 박은 쇠테로 보강한 아치가 지탱하고, 우물을 이용하여 타지마할을 야무나(Yamuna)강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단다.
▼ 영묘(靈廟, Mausoleum)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룬다.
▼ 정문에서 영묘(靈廟, Mausoleum)로 가는 길은 정원의 한가운데로 난 수로(水路)의 양쪽으로 난 길을 따르면 된다. 하지만 정원의 양쪽 끝자락을 따라 에둘러서 가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이때는 좌우로 나있는 회랑(回廊)을 따르면 된다. 그리고 회랑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원으로 내려선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능묘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이 코스를 이용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 타지마할의 정원은 무굴양식의 차르바그(char bagh)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차르바그’란 4개(char)의 정원(bagh)이란 뜻으로 천국의 정원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정원은 긴 변이 320m, 그리고 짧은 변이 300m인 직사각형인데, 4개의 정원 사이로 수로가 나있다. 가운데로 길게 판 수로는 코란에서 풍요로운 천국의 연못이라고 묘사한 카우사르(Kawthar)를 상징한단다. 원래 이 정원에는 장미와 수선화, 그리고 수많은 유실수들이 심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모습은 영국의 식민통치 이후 영국식 정원양식이 더해진 것이란다.(아래 사진은 수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만들어진 중앙 연못에서 바라본 정문이다)
▼ ‘후마윤의 무덤’에서 시도된 ‘사분정원(四分庭園)’이 타지마할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네모반듯한 정원을 십자형으로 교차되는 수로가 정확히 사등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맞다. 타지마할의 정원은 이슬람교의 낙원사상을 나타내는 사분정원(四分庭園)‘, 즉 ’차르 바그(Char Bagh) 형식’을 정확히 따른다. 네모반듯한 정원을 수많은 정사각형으로 쪼갠 후 그 사이사이에 수로(水路)를 내는 양식이다. 전체로 보건, 작게 쪼개 보건, 정사각형의 형태를 드러나게 만든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기하학적인 구도라 하겠다. 아무튼 네 개의 수로가 만나는 정중앙에는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네 개의 수로가 생명의 원천을 나타낸다니. 수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만들어진 중앙의 우물은 인간과 신이 만나는 영역쯤으로 여겨도 될 듯 싶다.
▼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정사각형으로 단(壇)을 쌓고 그 안에다 ‘연꽃 수조(水槽)’와 분수(噴水)를 들어 앉혔다. 학창시절 책에서 보았던 그 연못이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책에서 봤던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연못의 물결 위에 타지마할의 건물 그림자가 비춰져야 하는데도 그러지를 않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찍었기에 그런 그림이 만들어졌을까? 어쩌면 드론(Drone)을 이용해서 촬영했는지도 모르겠다.
▼ 연못의 네 곳 가장자리에는 각기 하나씩의 의자가 놓여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다이애나 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의 왕세자빈이었던 다이애나가 1992년 타지마할을 방문했을 때 앉았던 의자라고 한다. 그녀의 유명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포토죤으로 소문나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 중앙 연못이 있는 좌대에 오르면 사진에서만 보아오던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 펼쳐진다. 거대한 중앙 돔을 사이에 두고 4개의 작은 돔이 있고 기단(基壇)의 네 곳 끝에는 각각 미나레트(minaret)라고 부르는 첨탑이 자리하고 있다. 타지마할의 핵심은 완벽한 대칭과 돔과 아치가 보여주는 곡선미, 그리고 대리석 장식인 ‘피에트라 두라’를 꼽을 수 있다. 그중 완벽한 대칭을 확인해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참고로 영국 출신의 ‘우리 세계의 70가지 경이로운 건축물(The seventy architectural wonders of our world)’의 저자 ‘닐 파킨(Neil Parkyn)’은 영묘(靈廟, mausoleum)인 타지마할이 인도·이슬람 건축의 가장 완벽한 전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타지마할은 ‘샤 자한 가즈(80~82센티미터)’를 기준 단위로 삼아 측량함으로써 엄밀한 기하학을 구현할 수 있었고. 둘째, 대칭구도를 일관적으로 관철시켜 중앙 축을 중심으로 한 좌우동형 속에서 각 부분들을 통합했다. 셋째, 자재·형태·색채에서 아주 세밀한 장식에 이르기까지 질서를 부여했다. 즉, 누구나 감탄을 금치 않는, 좌우대칭의 균형미와 세련미가 넘치는 빼어난 예술적 건축물을 구현한 것이다.
▼ 중앙 연못에서 좌우로 뻗어나간 수로(水路)의 양쪽 끄트머리에는 똑 같은 모양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 지도에는 ‘나우밧 카나(naubat khana)’라고 적혀있는데 무슨 용도로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혹시 델리 소재의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인 ‘붉은 요새(Lal Qal⁽ah)’에 있는 ‘나우밧 카나’와 같은 용도로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황제나 왕자들이 지나갈 때 음악을 연주하던 장소로 말이다. 그나저나 지금은 동쪽은 휴게실(바로 아래 사진)로, 그리고 서쪽은 박물관(그 아래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 앞서 걷고 있던 가이드가 뭔가를 가리킨다. 네 개의 50미터짜리 미나레트(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를 자세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들은 후에 바라본 미나레트는 바깥쪽으로 약간씩 휘어져 있다. 원근법적(遠近法的) 효과를 고려해서 건축한 탓이란다.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지진(地震)을 대비한 조치인데, 그 결과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가운데의 영묘(靈廟) 쪽으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단다.
▼ 영묘(Mausoleum)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왼편에 있는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에 들러보기로 한다. 영묘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똑 같은 건물이 하나씩 들어섰는데 이 가운데 왼편이 모스크이다. 영묘와 모스크가 있는 기단(基壇)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만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실내도 아닌 실외에서까지 맨발로 걷든지 아니면 덧신을 신고 구경하도록 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우린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까 가이드가 입장권과 함께 나눠주었던 덧버선을 꺼내 신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 모스크는 우선 색깔과 감촉에서부터 옆에 있는 영묘와 확실히 구분이 된다. 순수한 하얀색 마크라나 대리석으로 지은 영묘와는 달리 붉은 시크리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에는 대리석을 두른 돔(dome)과 아키트레이브(architrave, 문틀과 벽면 사이, 창문틀의 테두리에 치장을 목적으로 대는 틀)가 있으며 일부 표면이 단단한 돌(pietra dura)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내부는 둘러볼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슬람 복장을 한 사람이 나가라며 큰소리로 외쳐댔기 때문이다. 예배시간만 아니면 입장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바닥에 반쯤 누운 자세로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광경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 붉은 사암으로 된 천정에는 아라베스크(arabesque, 아라비아 사람들의 창의로 이루어진 장식무늬의 일종)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곡면(曲面)인데도 불구하고 빈틈없이 기하학적으로 채워져 있는 게 신기하다. 다른 공간들은 캘리그래피(calligraphy) 등의 기법으로 채워져 있다.
▼ 타지마할을 측면에서 본 모습, 높이가 75미터, 돔 부분의 무게만 1만 3000톤 이상 나가는 타지마할은 건축 공학의 기적을 이룬 것은 물론 이슬람과 힌두교 문화,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해 당대 최고의 예술적인 완성도를 이룩한 건축물이다. 저 무덤의 주인공인 ‘뭄타즈 마할’은 한 남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의 증표를 받았다고 봐야 하겠다. 아무튼 가까이 접근한 탓인지 돔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 초승달까지 눈에 들어온다.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이슬람의 상징이며 ‘진리의 시작’을 의미한다. 즉 무하마드가 최초로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함께 떠있었고. 그때부터 하느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란다.
▼ 이젠 영묘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영묘와 모스크 사이에 있는 사각형의 얕은 수조(水槽)인 반사지(反射池)를 스쳐 지나면 영묘의 전면부로 연결된다. 영묘에 가까워지자 가슴에 와 닿는 뭔가가 느껴진다. 평소의 내 생각과 같은 의미를 지닌 공간에 들어섰다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을 싯귀(詩句)로 표현해 본 일이 있었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지라도 영원히 사랑하고 싶고’, 한걸음 더 나가 ‘천만 번 윤회(輪廻)를 거듭하더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부부간의 사랑을 아름다운 건축물로 표현한 곳이 바로 이곳 타지마할인 것이다.
▼ 영묘 정면은 기하학적 형태들이 차분하게 통일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대로 ‘피에트라 두라’ 기법으로 대리석 안에 반질반질한 장식용 돌들을 연결부 없이 집어넣은 ‘플로렌스 모자이크’와 반석에 새겨진 보주들은 페르시아의 모티프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 능묘의 출입문 주위는 아름다운 문양들로 가득하다. 흰색 대리석에 양각기법으로 꽃문양을 새겨 넣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상감기법으로 색상이 있는 꽃문양으로 벽면을 채워 놓았다. 출입문의 바로 옆 기둥에 그려진 문양들은 아마 코란 구절을 적어 놓았을 게다.
▼ 3면이 개방되어 있는 ‘이완(Iwan) 양식’ 출입구의 천장은 의외로 소박하다. 하얀색 마크라나(makrana,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 지방에 소재한 대리석 광산) 대리석으로 단순하게 마감처리 되어 있을 따름이다.
▼ 네 개의 작은 정자와 연결된 중앙홀로 들어가면 유골(遺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다. 중앙에 ‘뭄타즈 마할’의 석관(石棺)이, 그 왼쪽에 ‘샤 자한’의 석관이 놓여 있는 이 가묘는 지하에 있는 진짜 무덤의 도굴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진짜 유해는 한 층 아래의 지하묘에 안장되어 있다. 원래 샤 자한은 야무나강 건너편에다 타지마할 같은 자신의 묘를 검정 대리석으로 건설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견고한 황금다리로 타지마할과 연결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거창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말년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 뒤 숨을 거둘 때까지 유폐(幽閉)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시신을 영묘 중앙에 있는 어머니 석관 왼쪽에 안치했다. 이들의 석관을 장식하고 있다는 ‘천국을 찬미하는 코란의 경구’는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조명시설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지마할은 정원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그 대칭을 깨뜨리는 유일한 공간이 이곳 가묘이다. 원래는 중앙에 ‘뭄타즈 마할’의 석관을 놓아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었는데, 계획이 없던 ‘샤 자한’의 관이 추가됨으로써 그 대칭을 깨뜨려버린 것이다.
▼ 석관(石棺)은 보석을 넣어 정교하게 가공한 덩굴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명(照明)이 없으므로 빛이 투과되도록 정교하게 새겨진 병풍석이 공간을 신비스럽게 만드는데 빛의 흐름을 따라가면 가묘 주위에 박혀 있는 수많은 준보석들이 영롱하게 반짝거려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타지마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로, 이는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는 기법이다. 타지마할 내․외벽을 싸고 있는 대부분의 문양들은 식물과 꽃이다. 이슬람교 특성상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들은 모두 우상으로 취급되어 금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건 그렇고, 무덤을 지키는 관원(官員)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더니 안으로 들어와서 직접 보겠냐고 물어온다. 불도 켜주겠단다. 남들이 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게 부담스러워 거절을 했지만 응하지 못한 아쉬움은 꽤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그런 좋은 기회가 두 번 다시는 찾아올 것 같지 않아서이다.
▼ 능묘를 둘러보고 북쪽 피쉬타크를 통해 밖으로 나가면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은 타지마할의 기단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그 앞에 난간이 처져 있다. 난간 너머로는 야무나강이 동서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사실 타지마할은 현재처럼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정원을 지나 들어갈 수도 있지만, 북쪽 야무나강을 건너 바로 들어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왕족들은 강 건너 메탑 박(Mehtab Bagh: 달빛 정원)에서 놀면서 타지마할의 야경을 즐기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난간에 서면 타지마할의 완성을 위해 물길까지 돌려놓았다는 ‘야무나(Jamuna) 강’이 흐른다. 펼쳐지는 그림의 한쪽 귀퉁이에는 붉은 사암의 웅장한 ‘아그라성’이 웅크리고 있다. 저곳에 유폐되었던 ‘샤 자한’이 애달프게 바라보면서 느꼈을 그리움의 거리만큼이나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진다.
▼ 모든 출입문들은 이슬람 건축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완(Iwan)’, 즉 3면이 벽이고 마당으로 향한 쪽만 끝이 뾰쪽한 아치형으로 개방되어 있는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치(arch) 구조물은 기둥이나 벽 위에 반원 형태로 만드는데, 이완은 지지하는 기둥이나 벽을 따로 세우지 않고 양 옆이 평평한 타원 형태로 상층부에서 바닥까지 연결된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역별로 전통적인 장식 요소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라베스크(arabesque)의 추상무늬가 새겨진 백색 타일을 이용하여 장식하고, ‘캘리그래피(calligraphy)’와 일종의 상감기법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을 사용해 각종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로보아 페르시아지역의 유형을 따르고 있지 않나 싶다. 그물망 모양으로 만들어진 창문 또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 기단부를 따라 능묘를 한 바퀴 돌아본다. 이곳도 역시 부조(浮彫)와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피슈타크(Pishtaq,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직육면체 형태의 구조물)’, ‘캘리그라피(calligraphy)’ 등이 예술성을 더해준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답고 훌륭한 건축물이다. 그리고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참고로 타지마할은 모자이크의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피에트라 두라 기법은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후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은 것을 말한다.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색색의 이 돌들은 순백의 대리석과 어우러져 오묘한 빛을 발하며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고 한다. 문양(紋樣)은 주로 꽃을 표현했는데 이는 이슬람에서 동물이나 신상의 조각을 금지하기 때문이란다.
▼ 이완의 주위나 문틀의 주위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에 따라 인물과 동물을 형상화하지 못하자 대안 예술로 코란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 기법을 활용했다. 이슬람 캘리그래피는 이슬람 예술 중에서도 가장 숭고한 장르로서 아라베스크(arabesque, 아라비아 사람들의 창의로 이루어진 장식무늬의 일종)의 기하학 문양과 함께 어우러져 이슬람 예술만의 고유한 특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 서체인 쿠파체(Kufic script)를 비롯해 다양한 서체가 있다. 아! 하마터면 빼먹을 뻔 했다. 대리석에 양각으로 표현한 꽃과 식물들 말이다. 이들은 벽에 상당히 크게 양각되어 있고, 그것이 벽을 따라 나란히 서 있기 때문에, 건물의 아랫부분이 마치 꽃밭처럼 느껴진다.
▼ 밖으로 나오는 길에 아까 영묘에 들어가기 전에 들렀던 모스크와 똑 같이 생긴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동서(東西)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아니 타지마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 건물도 붉은 사암으로 만든 전형적인 무굴양식 건축이다. 이곳에도 역시 피에트라 두라 기법과 양각의 조각 등이 눈에 띈다. 그리고 기둥과 ‘피슈타크(Pishtaq)’에도 장식이 있다. 타지마할의 유명세에 밀려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지만 이곳 역시 대단한 건물임에는 분명이다.
▼ 회랑을 따라 되돌아 나오는 길에 나뭇가지 사이로 능묘가 나타난다. 백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건물은 지면에서 6~7미터 높은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기단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96미터인 정사각형이라고 한다. 영묘 건물 자체의 크기는 56.7미터의 정사각형이고 바닥 면에서 돔의 정점까지는 57미터에 달한다. 이중의 돔(양파껍질처럼 안쪽 덮개 위에 바깥 덮개가 있는 돔)은 페르시아 양식 그대로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벽돌에 흰 대리석을 씌운 것이란다. 벽돌은 당시 널리 사용하던 표준 크기인 19×12.5×3센티미터의 것을 사용했다. 벽돌을 주로 긴 쪽으로 쌓았지만 석회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른 다음 짧은 쪽으로 쌓기도 했다. 둥근 천장은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르고 동심원의 고리들을 만들어 쌓았다. 이 건축기법을 통해 내부에 강화벽을 세우지 않고도 반구형의 내부 돔과 공 모양의 외부 돔을 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 돔 위에는 9미터 높이의 작은 청동 뾰족탑을 얹었고 돔 전체에는 금박을 입혔다. 돔은 이스탄불 출신의 ‘이스마일 에펜디(Ismail Effendi)’ 작품으로 추정된다.
▼ 동문을 빠져나오니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 어차피 아까 버스에서 내렸던 장소까지 되돌아 나가야하니 한번쯤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옛날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차에 앉아 옛날 타지마할에서 일어났을 수많을 일들을 상상해보며 말이다.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공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설계자는 눈을 뽑아버렸단다.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을 만들려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란다.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으면 그런 괴담까지 생겨났겠는가. 하지만 그보다는 천하의 황제라도 사랑이 없을 경우 행복 또한 존재할 수 없음을 가슴에 새겨보자.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자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배우자의 존귀함을 결코 잊지 말자.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서도 나오겠지만, 그것을 보고 즐기는 사람에게서도 나오는 법이다. 비록 이곳 타지마할은 서글픈 사랑이야기로 끝을 맺지만 우린 행복한 사랑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자.
♧ 에필로그(epilogue),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무덤이라기보다는 성스러운 신전 같은 느낌을 준다. 이슬람 왕조의 황제들이 신전을 짓는 데 붉은색 사암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타지마할은 백색 대리석을 이용했는데, 이는 힌두교의 전통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부와 외부의 벽면은 보석과 준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이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런 화려함 때문에 끊임없는 약탈의 대상이 되어버렸으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값비싼 보석들은 도굴꾼과 침략자들에 의하여 사라졌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의 약탈은 특히 심했다고 한다. 거대한 돔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떼어내고 구리로 덮었으며, 은으로 된 출입문 대신 청동문을 달아놓았을 정도란다. 독립한 뒤 타지마할은 옛 모습을 되찾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보석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의 박물관과 개인저택의 문화공간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가슴이 싸해진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36년 동안이나 침탈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우리네의 현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네 후손에게만은 그런 아픈 역사를 물려주지 않도록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해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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