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첫째 날 : 아그라(Āgra)의 시칸드라 묘역

 

특징 : 인도(Republic of India) : 힌두어로는 Bhārat 또는 Bhāratavarsha(전설적 현인군주인 '바라트의 땅'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은 면적을 갖고 있으며, 인구는 13억 이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중국, 북쪽으로는 네팔과 부탄, 서쪽에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동쪽에는 벵골 만, 남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와 맞닿아 있다. 인도는 매우 다양한 인종적 혈통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도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인도 대륙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 혹은 그 이후의 침입자들의 혈통이 뒤섞인 데서 기인한다. 공식 언어는 힌두어와 영어이고, 벵골어·카슈미르어·마라타어·우르두어 등이 포함된 다른 인도-유럽 언어들, 드라비다어, 그리고 수백 개의 다른 어군을 사용한다. 종교는 인도가 발상지(發祥地)인 힌두교(80이상)와 시크교(1%), 불교, 자이나교 외에도 이슬람교(11.4)와 그리스도교(1%) 등 다양하다. 화폐단위는 루피(rupee/Re)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는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일찍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로,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이미 인더스(Indus)강 유역에 청동기 도시문명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 무렵에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흥기하는 등 인도의 특색 있는 문화와 사회형태가 만들어졌다. 기원전 317년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해 강대한 상비군과 관료체제를 갖춘 마우리아(Maurya)제국이 인도의 통일제국을 이룩하였다. 이어 4세기 전반에 출현한 굽타(Gupta)제국이 북인도 일대를 지배하였고, 812세기에는 무슬림(Muslim) 세력들에 의한 무슬림왕조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인도의 정치적 통일과정은 1526년 무굴(Mughal)제국 성립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무굴제국의 건설은 제3대 악바르(Akbar, 재위 15421605)에 의해서 행해졌다. 그는 주위의 세력들을 무찌르고 무굴 세력을 확립하는 동시에 황제의 지위와 권력을 구축하였다. 무굴제국은 그 뒤 약 150년 동안 번영을 누렸으나, 18세기가 되면서 모든 지방의 세력들이 독립해서 분립하거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1498년 인도를 향한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수 세기에 걸쳐 계속된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 간의 무역 경쟁을 가져왔다. 18~19세기에 걸친 영국의 지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로 이어졌고, 1858년 대영제국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모한다스 간디(Gandhi,M.)’1947년에 영국의 지배를 종식(파키스탄과 분리해서 독립)시키는 데 기여한 이후, ‘자와할랄 네루가 인도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와 손자인 라지브 간디까지 삼대에 걸쳐 국가의 운명을 이끌게 된다. 물론 선거에 의한 집권이다. 우리나리와는 1962년의 영사관계를 거쳐 1973년 대사급으로 격상되었다.

 

아그라(Āgra) :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슈(Uttar Pradesh) ()’에 있는 도시로 델리의 남쪽 200km, ‘야무나 강(Yamuna River)’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16세기 초 로디왕조(Lodi Dynasty, 1451-1526)2번째 왕 시칸다르 로디(Sikander Lodi, 1489-1517 재위)’가 세웠으며 무굴왕조(Mughal dynasty, 1526~1857)3번째 왕 아크바르 대제(Akbar the Great, 1556-1605 재위)’가 강 왼편에 있던 도시를 오른편으로 옮기면서 무굴제국의 수도(1556-1658)가 되었다. 그의 아들 자항기르(Jahāngir, 1605-1627 재위)와 손자 샤 자한(Shāh Jahān, 1628~1658 재위)‘은 항상 여기서 살지는 않았으나 다수의 이슬람 건축물들을 건설함으로써, 아우랑제브(Aurangzeb, 1658~1707 재위)가 델리로 천도(遷都)할 때까지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8세기 말 자트족·마라타족·무굴인과 괄리오르의 통치자들에게 잇달아 점령당했으며 1803년에는 영국에게 넘어가게 된다. 한편 아그라는 타지마할(Taj Mahal)‘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 자항기르 마할(Jahangir Mahal)‘과 아크바르 황제가 건설한 흰 대리석의 진주사원(Moti Masjid)을 포함하고 있는 16세기 성채가 있다. 또한 대사원(Jami' Masjid)과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잘 알려진 훌륭한 능묘도 있다. 북서쪽 시칸드라(Sikandra)에는 아크바르의 무덤(Tomb of Akbar the Great)‘이 있다.

 

 

 

주차장에 내리면서 시칸드라 (Sikandra)’의 투어가 시작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유적지답게 널찍한 주차장을 조성해 놓았다. 시칸드라는 무굴제국의 세 번째 왕인 악바르(‘아크바르라 읽기도 하나 이하 악바르라 한다) 대왕의 무덤(Tomb of Akbar the Great)’이다. 무굴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영묘(靈廟, Mausoleum). 정식 명칭은 악바르 마우솔레움(Akbar’s Mausoleum)‘이다. 하지만 아그라의 타지마할에서 북서쪽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칸드라 공원의 안에 들어있다고 해서 현지에서는 시칸드라(Sikandra)‘라고 불린다.

 

 

 

 

 

 

매표소 앞에서 가이드의 안내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대학원까지 나왔다는 그는 한국에서 시집 온 형수의 권유로 한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체험을 겸한 생활언어를 읽힌 셈이다. 거기다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 연수까지 마쳤다고 한다. 문화재에 얽힌 비사(祕史)들까지 능수능란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매표소 앞에 오래 묵은 건축물 하나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고 본다. 하지만 누가 어떤 용도로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가이드의 답변을 듣고도 정리를 하지 못했으니 큰 의미를 둘만한 가치는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묘역(墓域)으로 들어가는 길은 제법 길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풍스런 옛 건축물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하긴 사치를 좋아하지 않던 왕의 성정에 따라 검소하게 만들어진 무덤보다도 오히려 무덤 앞의 정원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알려졌을 정도이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얼마쯤 걸었을까 진행방향에서 왼편으로 조금 비켜난 곳에 화려한 건축물 하나가 나타난다. 건물의 옆으로는 높은 담장을 쌓아 안에 있는 묘를 보호하고 있는 형세이다. 아무튼 이 건축물은 외관(外觀)만 놓고 볼 때에는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를 쏙 빼다 닮았으나 실제로는 문(, gate)이란다.

 

 

 

 

시칸드라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네 개로 동···북 방향으로 나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오직 남문(南門)만을 이용할 수 있으니 참조한다. 나머지 세 개의 문은 원래부터가 실제 출입구가 아닌 숙소용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란다. 쉽게 말해 가짜 대문인 셈이다. 이 네 개의 문들은 각각 다른 종교를 상징하는 형태로 독특하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와 화합을 추진하는 등 타 문화에 관용적이었던 악바르 대제의 마지막 안식처답게 그의 종교관이 건축 양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남문(south gate)은 거대한 이완(Iwan, 이슬람 건축에 표현되는 거대한 아치 형태의 출입구로 페르시아 지역의 모스크와 광장, 궁정 건축에서 볼 수 있다)의 형태를 보이며 옥상의 각 모서리에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전형적인 이슬람양식의 첨탑(尖塔), 즉 미나레트(minaret, 이슬람 건축에서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탑)가 높게 세워져 있다. 그 숫자가 넷인 걸로 보아 왕()이 지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5년 전쯤엔가 이스탄불에 출장 갔을 때 모스크들을 안내해주던 터키 상공회의소직원이 알려준 정보인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완(Iwan)은 앞뒷면 모두 화려한 문양(紋樣)으로 장식되어 있다. 출입구 바로 근처는 꽃무늬 장식, 그리고 그 주위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둘러싸고 있다.

 

 

 

 

무덤의 정문에 남아있다는 황제의 마지막 안식처를 암시하는 문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에덴의 가든이다. 영원히 머물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다.’라는 뜻이라는데 도대체 어디에다 적어 놓았는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힌두어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앙 아치의 내부는 미랍(mihrab, 이슬람교에서 설교자가 회중 앞에 서는, 벽 중앙에 움푹 들어가 비어있는 공간) 형태로 되어 있다. 화려한 외관에 비해 소박하기 짝이 없는 내부가 특히 눈길을 끈다.

 

 

대문을 들어서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정원 중앙부분에 묘() 건물이 있다. 대문에서 묘까지는 널따란 길로 연결된다. 양편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길의 한가운데에는 수로(水路)가 나있다. 양쪽 가장자리에도 보인다. 악바르의 묘가 큰 규모로 만든 사분정원(四分庭園)’의 중앙에 건설되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이슬람교의 낙원사상을 보여주는 사분정원의 특징이 네모반듯한 정원을 십자형으로 교차되는 수로가 사등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사분정원은 후마윤 묘건물의 사분정원과 함께 무굴 정원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중간쯤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종횡으로 배치된 좁은 수로(水路)가 교차되는 곳이다. 이 또한 사분정원(四分庭園)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사분정원(四分庭園)의 네 개로 갈라지는 수로를 생명의 원천이라고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 수로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이 연못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영역쯤으로 봐도 되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묘() 건물은 의외로 소박한 분위기다. 악바르가 후대 인도인들로부터 대왕이라는 칭호(Akbar the Great)를 부여받았을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임을 감안할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던 왕의 성정에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왕의 무덤이 입구에 해당하는 대문보다도 더 검소한 외형을 보이기에 거론해봤다. 아무튼 능묘(陵墓)의 공사는 악바르 자신이 시작했으나, 완공은 1613년 그의 아들 자한기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와 인도 양식을 융합시킨 무굴 건축양식의 건축물로, 이는 악바르가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했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관용은 각각 다른 종교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설계된 네 개의 문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아무튼 이 지방의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을 병치시킨 시도는 새로운 건축 방식이다.

 

 

()3층으로 지어졌다. 1층은 1변이 약 97m의 사각형이며 4면 중앙에는 높은 아치형 대문이 있고 그 좌우에는 5개의 아치가 줄지어 서 있다. 모서리 상부에는 8각형 정자가 설치되었다. 중앙에 있는 아치형 대문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2층은 1변이 56m의 사각형이며 1층 중앙에 있는 아치형 대문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에는 적색사암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3층은 갑자기 변하여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악바르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인 자항기르 황제가 이 부분을 만든 까닭이라 생각된다. 최상층은 회랑식으로 만들고 중앙에 특이한 묘석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건설공사는 기공한 후에 20년이 걸렸으며 완성된 것은 1613년이다. 이 묘 건물은 유례가 없이 웅대하며 특이한 건축물이나 남성적인 웅장함과 화려하고 섬약한 표현을 함께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이다. 악바르 황제 시대의 건축양식은 서방의 이슬람교적인 요소보다 오히려 힌두교적인 인도의 전통적 건축양식 요소가 많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악바르 황제의 정치적인 이념이 종교적 및 문화적 면에서 동서의 융합과 조화를 중요시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의 건축에는 적색사암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흰 대리석은 특히 강조할 부분에만 사용되었다. 색돌을 상감하여 장식하는 수법은 아직 많이 발전되지 않았다. 중앙에 높은 돔은 발보스(balbous, 마늘꽃봉오리) 형태로 만들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건설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던 악바르 대제는 자신의 무덤도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그가 건설한 다른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사암에 대리석 상감 기법으로 장식되었고, 내부는 벽화로 꾸며져 있다. 악바르 대제의 유해는 지하 1층에 안치되어 있다. 무덤의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만 한다. 왕을 알현하려는 것이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아치(arch)형의 천장은 그물형태의 무늬를 띈다. 이는 리브(rib, 서양 건축용어로 늑골이라는 뜻)의 구조적 이용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악바르 대왕이 영면(永眠)하고 있는 장소로 가려면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야만 한다. 경사로가 지하층의 묘실로 연결되는데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하지만 걷는 데는 조금도 부담이 없다. 계단 등 어둠의 천적들이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드디어 무덤의 안이다. 한 가운데에 석관(石棺) 하나만 놓여있을 뿐 단조로운 풍경이다. 석관의 앞에다 1불짜리 지폐를 놓고 두 손을 합장했더니 관을 지키고 있던 이슬람 복장의 사람이 코란을 읊조려 준다. 꽤나 큰 소리인데 읽는 게 아니라 흡사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참고로 석관의 주인인 악바르(Akbar the Great, 1556-1605 재위)‘는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는다.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였던 악바르 대제는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아소카(Ashoka) 과 함께 후대 인도인들에게 대왕이라는 칭호(Akbar the Great)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정복 전쟁으로 인도의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자인교 등 종교 대통합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성군(聖君)으로 존경을 받는다.

 

 

밖으로 빠져나오면 또 다른 석관(石棺)들을 만나게 된다. 묘로 들어가는 출입문 옆의 방들에 보셔놓았는데 악바르 대왕의 왕비와 두 딸의 유해가 아닐까 싶다.

 

 

 

 

건너편에 정문인 남문(南門)이 우뚝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묘역의 본전(本殿)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전의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악바르가 그의 결함을 채우기 위해서 예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그렇다면 그의 결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악바르는 글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후세 인도인들로부터 성군으로까지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임을 감안하면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밝혔듯이 묘역은 널따란 공원(公園)의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잘 다듬고 가꾼 탓인지 무척 아름다운 공원이다. 야자수가 펼쳐진 넓은 부지에서 사슴과 새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풍경은 야외 동물원을 연상시킨다. 특히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다가가는 관광객들까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들이 흡사 사파리(safari) 투어에라도 따라나선 느낌이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아마르호텔(Amar Hotel)

4층 건물에 60개 정도의 객실을 갖추었으니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규모이다. 깨끗하면서도 널찍한 객실에다 칫솔과 치약을 제외한 다른 일회용품은 다 비치되어 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식사도 괜찮은 편이었다. 몇 가지만 추려서 먹기는 했지만, 향신료가 조금만 들어가도 먹지를 못하는 내 입에까지 맞을 정도였으니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길들여진 음식들을 내놓지 않았나 싶다.

 

 

에필로그(epilogue), 악바르는 불과 13세에 무굴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당시의 무굴 제국은 여러 가지 위험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악바르가 치적을 이루는데 첫 번째 공로자는 바이람 칸(Biram Khah)’이었다. 그는 무굴 인은 아니었지만, 무굴의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노련한 정치인이자 유능한 장군이었다. 4년에 걸친 그의 보살핌으로 어린 악바르는 초기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무굴 제국의 위치를 북인도에서 확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악바르에 의해 살해된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후 40년 동안 제국은 악바르의 손에 좌우된다. 무굴 제국이 인도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인도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였다.

 

무굴은 단순한 제국이라기보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이는 어느 누구보다도 악바르의 업적에 기인한다. 1605년에 죽을 때까지 악바르는 북인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였고, 데칸과 벵골 만, 아라비아 해에 이른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악바르는 서북쪽에서 용맹스러운 병사들을 언제나 끌어들일 수 있었으며, 벵골의 풍부한 자원과 중동과의 무역에서 얻은 수익 등으로 안정된 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악바르의 업적은 소수의 외국인 집단(무슬림)의 지도자로서만 있지 않고, 모든 힌두 인들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일이다. 악바르는 힌두 인들을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대했다. 더욱이, 악바르는 자이푸트의 힌두 공주와 결혼하여 그의 자손들에게는 라지푸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그 밖에 각 지역의 라지푸트 족장은 자치권을 행사하였으며, 그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무슬림 귀족들과 동등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악바르는 무슬림 국가에서 비무슬림 교도가 납부하는 세금인 지즈야(Jizya) 제도도 폐지하였다. 이렇게 악바르는 결혼 정책, 회유와 교섭, 제휴 등의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힌두의 여러 세력을 무굴 제국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악바르의 또 다른 업적은 관료제적(官僚制的) 집권 지배(集權支配)의 조직화였다. 그것은 바로 만사브다르(Mansabdar) 제도에 의해 수행되었다. 위계(位階)에 따라 지방 행정을 관할하는 관료들을 총칭하여 만사브다르라 불렀는데, 전국 각지에 퍼져서 황제의 눈과 귀의 역할을 했으며, 제국 행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행정 관료임과 동시에 군사령관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악바르의 관료 체제는 군정일치(軍政一致)’적 성격이 강했다. 만사브다르들의 지위는 휘하의 병사들의 수에 따라 결정되었다. 10명에서 5,000명까지 거느리는 지위는 모두 33등급으로 나누어졌는데, 그중 5,000명을 거느리는 장군은 판츠-하자리(panch-hazari)라 불리며, 국가의 높은 관료로서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지위는 세습적이지 않고 각자의 공로에 따라 지명되고 승진되었다. 야망에 찬 젊은 귀족들과 사회 제반 분야의 젊은이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었던 셈이다. 그로인해 젊은이들은 폭동과 반란, 약탈 등으로 부귀영화를 구하는 대신에, 국가의 건설적인 사업에 젊음을 불태움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 업적은 인도에 제국의 관념을 재창조한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악바르는 제국의 신성한 관념을 부활시켰다. 그래서 악바르 통치 이후 회화에 나타난 무굴 제국 황제의 머리에는 신령스러운 광배가 그려지게 된다. 그는 종교적 절충주의를 정책에 반영하였다. 악바르는 힌두교와 무슬림을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묶는 것이 불가능하며, 어느 한 종교인을 다른 종교인으로 영원히 개종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전제 군주의 의식(儀式)을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그에게의 복종은 신성한 일이며, 불복종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하여 그 자신을 반() 신성시하였다.

 

악바르가 뛰어난 인격의 소유자임은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그는 문맹(文盲)이었지만, 왕성한 기억력과 날카로운 지혜의 소유자였다. 그는 서기를 통해서 사건들을 기록하게 했으며, 언제나 그 내용들은 대리인을 통해서 그의 귀로 들어갔다. 그는 힘과 용기를 지닌 훌륭한 장군이었다. 동시에 신하들로 하여금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고, 적으로부터도 그에게로의 존경심을 끄집어내는 인간적이고 도량이 깊은 매혹적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