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침대차

2004. 5. 14. 14:46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살포시 눈꺼풀을 열어본다.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천장은 언제나 보던 것이 아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지? 왜 내가 차 속에서 자고 있느냐고....

 

문득 대리운전 시킨 것을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찾아낸다.
회의를 겸한 저녁식사를 끝낸 후, 부족한 술의 정량을 채우려고 자리를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양주 한병을 채 비우기도 전에 만취해 버렸고, 대리기사를 부탁했다.

 

잠결에 아파트에 도착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기다리는 이 없으니 서두를 이유도 없어 조금 더 누워있던 것이 잠이 들어 버렸나보다.
넓은 면적에 안락한 쿠션, 구입할 때 조금 더 썼더니 잠자리 또한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전면 시계가 4시30분을 가르키고 있다.
사위는 아직 어슴프레한데 움직이는 것 자체가 귀찮아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차내엔 명성황후의 선율이 흐르고 있다. 어쩜 조수미가 부를걸?
며칠전에 이수영의 클래식을 넣었는데...취중에도 CD를 갈아 넣었나보다.

 

명성황후라... 美洲공연 때 명성황후 역은 이하원씨가 맡았었을 걸?
몇 년전 런던에 들렀을 때, 대사관의 배려로 뮤지컬 "왕과 나"를 관람하는 행운을 얻었고,
샴왕의 첫째 부인으로 나오는 이하원씨를 만나볼 수 있었다.
시차 적응이 안돼 로얄석에서 계속 하품만 해대는 실례를 저질렀지만....

 

날이 훤히 밝은 뒤에야 현관으로 들어선다.
문이 안 잠겨 있다. 도대체 도둑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집 풍경이다.
근육질 잘 발달된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집에 스스럼없이 들어올 도둑은 아마 없을 걸?
그것도 운동선수인 두놈들은 180㎝도 훨씬 넘으니 말이다.

 

덜렁 팬티 하나만 걸친 채로 싱크대 앞에 선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앉히고, 모처럼 아침상을 준비해본다.
오늘의 찌개는 우렁된장으로, 곱게 깎은 감자는 각지게 썰고, 청양고추 송송...
반찬은 현지에서 공수된 것으로 올려볼까? 울산의 표고짱아치, 돌산 갓김치, 보령 돌김...

 

식탁이 그득하니 마음까지 따라서 풍요로워진다.
잠결에 마주앉은 애들의 얼굴엔 짜증반 놀라움반...너무 오랫만이니까
아침운동을 거르더라도 가끔은 아침상을 차려야겠다. 저런 얼굴표정을 지워주기 위해서라도...

 

클럽에 들러 간단히 사우나만...
무스도 바르고, 오늘은 향수도 뿌려볼까? 오전에 회의를 주재해야하니까.
운동을 걸러 몸은 좀 찌부둥하지만 기분만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출근길 마주치는 사물마다 왜 이리 아름다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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