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후기

백두대간(죽령)

2005. 12. 1. 15:11

1월이면 우리의 산하는 눈꽃 세상입니다.
새해를 위한 희망의 여백이라도 되는 듯이… 새하얀 백지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공기 한 톨마다 생명수가 깃든 양, 수증기 한올한올 하얀 눈꽃으로 맺혀지는 겨울 산...
겨울산에 오르면 올 한해 뭔가 이뤄질 것 같아 기대를 가득 안고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여명조차 없는 저수령의 어둠 아래에선 랜턴에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늘어선 산사람들의 행렬로 랜턴은 반디불이처럼 곳곳에서 반짝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초반부터 우릴 반기는 비탈...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꿋꿋이 참은 건, 첫 고비만 넘기면 다음부터 완만한 능선이라는
산꾼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두번 속은 것도 아닌 뻔한 거짓말임에도 쉬이 넘어가는 난 아직 순진이가 아닐까요?
평탄하다는 능선은 찾을 수 없고 내리락 오르락... 그것도 보통 비탈이 아닙니다.


눈 쌓인 겨울산은 포근하지만 미끄러워 서럽습니다.
렌턴 불빛에 내 한몸 의지하고 한발두발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기만합니다.
‘쪼르르 쿵’ 서너번 넘어지고,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엉덩이로 내려가기로...
‘아~코!’ 산길은 역시 만만치 않은가 봅니다. 얼마 못가 돌뿌리에 꼬리뼈가 콩!
눈물 한방울 찔금거리고 냉큼 일어서 버립니다.


일곱시 못미쳐, 아직도 사위는 컴컴합니다.
그러나 이까짓 어둠정도로는 결코 두발로님의 배고픈 투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둘 짐을 풀어 버너를 피우고 라면을 끓입니다. 새벽 산행에서 먹는 라면 맛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공복에 흘러드는 구수한 라면 내음은 맛 이전에 끝내줍니다.
마지막으로 밥을 넣어 끓이는 개밥... 이것마저도 없어서 못먹습니다.


포만감에 젖을 즈음 동이 트기 시작하는군요.
어둠이 서서히 걷히자 주변의 사물이 드디어 제 색깔을 찾습니다. 온통 하얀색으로...
봄이면 연분홍 꽃을 피울 철쭉이 온통 하얀 눈송이를 머금고 있네요.
눈안개마저 뒤덮여 천지가 희뿌였습니다. 고대하던 설국의 경치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동녘의 하늘엔 어느새 해가 솟아있군요. 짙은 눈안개에 쌓인 뿌연 해가...
어둠을 벗은 산자락에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상고대... 겨울철의 열매입니다.
영하의 겨울 밤에 대기중의 수증기가 나뭇가지에 얼어붙으면서 생기는 눈꽃이지요.


난 다시 길을 나서지만 홀짝거린 몇잔 진도 홍주에 이미 다리가 풀려있습니다.
거기다 뱃속에 가득찬 개밥이 거친숨을 내품게 만듭니다.
혼자서 핵핵거리며 앞서간 구름나그네님을 쫒지만 어디 그게 쉬운일이겠습니까?
그나마 둥글이(맞나?)와 아라치를 제킨걸로 만족하고 속도를 늦추어버립니다.


혼자가는 종종걸음에 마주친 다람쥐님... 무척 힘들어하시는군요.
전에 다람쥐님을 보고 어찌 그리도 닉을 잘 지었나 할 정도로 날아다니던 님인데...
여자에 약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난, 부리나케 흑기사로 돌변해버립니다.
흑기사라 해봐야 기껏 말동무 뿐 달리 해드릴게 아무것도 없었지만요.


그리고 둘이서 그 지긋지긋한 봉우릴 지겹게 오르고 내렸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는 오지 않는 카메라를 외쳤고, 도솔봉에선 막걸리도 얻어 마셨지요
6㎞라 적힌 이정표를 보고 거짓말이라 투정도 해봤고, 먹는게 남는거라 이것저것 주념부리도...


하산길 눈길에선 다람쥐님의 엉덩이 썰매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밖에 없습니다.
초반에 당한 꼬리뼈가 하두 아파서 다시 탈 엄두를 낼 수 없거든요.


그래도 시간이 되니 죽령에 도착하는군요. 비록 12시간이나 걸렸지만...
추위에 난장 식사는 물건너 갔고, 그렇다고 후미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우선 지리산지기님의 홍어를 풀기로, 자기팀 주어야한다고 절반은 끝내 안 내놓네요.
우선 구름나그네님의 복분자술부터 비우고, 다음은 지리산지기님의 동동주...


식당에서 순번 기다리던 다람쥐님의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옵니다.
파전(이게 분명 전이 맞나요?)에 묵으로 막걸리 한 사발씩... 다음은 국밥으로 요길합니다.
아라치의 매실주를 끝으로 마루로 자릴 옮깁니다.


이쯤에는 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 가져온 고기에 야채에 코펠, 반아... 다 같이 모아 놓고 지지고, 볶고, 드러 붓습니다.
내가 구운 삼겹살 잘들 드셨지요? 그러나 난 어떻게 차에 오른지 아무 기억이 없습니다.
눈을 뜨니 교대역.... 오늘도 역시 난 결코 거름이 없이 술에 취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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