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사는 일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수족관처럼 따분한 일상에 때론 발광증이 치밉니다. 망둥이처럼 마음이 날뛰는 것이지요.


이럴 때면 그저 정든 주점에 들어앉아 낮술이나마 한 잔 진하게 걸치는 게 상책이지만,
이마저도 싱거워질 때가 있으니, 이럴 때 나는 쏘다닐 산이나 들을 찾아 두리번거려봅니다.
그저 바람이 등을 미는 대로 몸을 맡겨보려는 것이랍니다.


5일의 구정연휴... 바쁨이 몸에 배인 저에겐 연휴의 호사가 차라리 괴롭습니다.
무작정 산으로 피하기엔 가족이라는 굴레가 부담스럽고, 눈치보는 5일은 차라리 괴롭기만합니다.


수요 스키에서 몸 풀고, 목요 번개에선 목 풀고, 나는 드디어 한북정맥에 우뚝 섰습니다.
설원의 장쾌함과 눈꽃을 함께 볼 수 있어 등산의 백미로 불리우는 겨울산행을 말입니다.
탁 트인 시야가 묵은 체증 내리 듯 황홀하고, 색다른 낭만과 스릴을 제공하는 겨울산입니다


일동면 연곡리 군부대 앞, 군인들 모양 씩씩한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오늘은 제발 헤매지 말기를...한북정맥 4구간 내내 거르지 않고 아르바이트에 충실했거든요.
불땅계곡 입석을 지나며 왜 불땅일까? ‘불 나오는 땅?’ 눈 쌓인 계곡을 보니 아니랍니다.


늦은 겨울 불땅계곡의 숲은 고요합니다.
지난여름 계곡을 무섭게 훑어내리던 물줄기도 얌전하게 땅 밑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숲으로 아침 햇살이 낮게 기어들고, 인적 끊긴 숲엔 햇살 한 줌과 바람 한 올이 놀고 있습니다.


두 갈래 길입니다. 개울을 건너는 반지르르한 길과 발자국 하나 없는 오른편 길...
개울을 건너는게 정상이련만 우리의 고집스런 리더는 오른편 길을 택하고야 맙니다.
그리고 우린 죽었습니다. 럿셀에 낭떠러지... 안전한 깔딱고개가 차라리 더 반갑습니다.
체력소모가 하두 심해 만일 시산제 막걸리로 음복 안했더라면 초반부터 탈진했을 것입니다.


도성고개...예정보다 한시간이 늦었습니다. 벌써부터 힘들어하는 이가 보입니다.
‘春來 不春來’ 아직 봄이 안온 게 아니라, 봄이 아닌데도 봄은 우리곁에 와 있었습니다.
산행 초입에서부터 흘린 땀은 흐르다 못해 어느새 내의까지 흠뻑 젖게 만듭니다.
강씨봉... 예정보다 두시간이 늦어져갑니다.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자리를 잡습니다.
에너지 보충용으로 쐬주 몇잔 돌리다 누군가의 따끈한 정종, 아예 점심까지 해치워버립니다.


강씨봉, 한나무봉... 방화선을 따라 급경사가 지겹게 오르락내리락입니다.
급경사에 수북히 쌓인 눈, 저 넘어 내리막길에서 탈 엉덩이썰매를 상상하니 즐거워집니다.
앗뿔싸!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저버리고 내리막 양지에는 어디에도 눈은 없습니다.
비료부대 준비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질퍽거려 미끄럽기까지 한 게 심술보 산신령님?


귀목봉 삼거리...두개의 조그만 나무 벤치가 쉬어가라 우릴 반깁니다.
후미를 한참 기다리다, 귀목봉으로 향하는 방화선과 헤어져 청계산가는 숲으로 들어섭니다.
완만한 능선이 발걸음을 쉬이 가라 하는군요. 낙엽위에 쌓인 눈만 아니라면 금상첨환데...


집사람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못다한 얘기 나누며 지루한 능선길을 이어갑니다.
지루한 정적을 깨뜨리고 나타나는 뾰쪽한 청계산 봉우리... 봉우리 뒤에 해가 숨어있습니다.
갑자기 조급해집니다. 앞으로도 갈 길이 먼데 해가 서산에 걸려있다니요. 큰일입니다.
급경사 암벽과의 싸움 끝에 오른 정상... 진행을 멈추라는 아랫쪽 누군가의 외침입니다.


한명, 두명, 다들 도착했는데 한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헨펀도 불통...
일단은 늦드래도 하산지점을 노채고개로 잡습니다. 갈길은 먼데 다들 힘들어합니다.
후미의 전화가 오고 그 모습이 산 아래에 잡힙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시 출발합니다.
밧줄과 20여분 싸움 끝에 도착한 길매재... 하산지 때문에 또 다시 갈등이 시작됩니다.


가야할 길매봉은 암봉입니다. 검색한 후기마다 위험지역이란 경고가 널려있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위험해도, 아무리 어두워도, 결코 우리 리더의 발목을 붙잡지는 못합니다.
후미 그룹의 탈출소식을 접하자마자 “진격 앞으로!” 집사람 얼굴이 갑자기 울상으로 변하는군요.
거기다 저녁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웬지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빙판에 직벽입니다. 시킨이 없어도 다들 납작 엎드려 조심조심...
이마에 흐른 땀은 바닥에 깔린 눈으로 자동세척...앞선 집사람의 안전을 빌고 또 빌어봅니다.
정상에서부터는 헤드렌턴을 켜야합니다. 이미 사위는 컴컴해져 버렸거든요.
조심 또 조심...보이느니 절벽이니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보조자일을 사용하며 위험구간을 지나고야 긴장으로 잃었던 얘기소리가 간간이 들려옵니다.
눈길에 엉덩방아 몇번 찧다 보니 어느새 노채고개?
아니~ 한시간 30분 정도 걸렸으니 지루한 하산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군부대의 참호를 따라 내려온 끝자락, 이제 다 왔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앞의 봉우릴 하나 더 넘어야한다’는 말에 주저앉고만 싶군요.
더 이상은 한 걸음도 못 간다는 투정이 받아 들여졌는지 그곳이 바로 노채고개입니다.


약수터까지의 신작로는 잘 닦인 슬로프입니다.
집사람이 엉덩방를 찢건 말건 젊은이들의  눈썰매는 잘만 달립니다.
한 두대 눈썰매가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앗! 이인승 봅슬레이까지 등장합니다.
남녀 한조인걸 보니 듬직한 남자애의 등뒤엔 아마도 이쁜이가 꽉 붙어 있을 것입니다.
스키장 상급코스 보다도 더 긴 슬로프에 즐거운 비명의 메아리가 넘쳐흐릅니다.


수십개의 물통이 줄지어선 약수터에 도착, 한모금 약수로 목축이고 안도의 한숨 내쉽니다.
아침 9시30분에 출발하여 오후 7시30분 도착했으니 10시간, 눈길에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무사히 산행을 마치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오랜만에 감사의 기돌 드려봅니다.


어제의 산행여파로 힘든 월요일인데도 또 다시 다음 구간이 기다려지는 건 아마도?
산도 좋고, 사람도 좋고, 거기다 술이 넘치는(나에게만 해당?) 한북정맥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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