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8코스
여행일 : ‘19. 4. 6(토)
소재지 : 경북 포항시 흥해읍과 청하면, 송라면 일원
산행코스 : 칠포해변(3.3km)→오도리해변(7.8km)→월포해변(8.2km)→화진해변(소요시간 : 19.3㎞ 중 16.96㎞를 걷는데 3시간 5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칠포해수욕장을 출발하여 포항의 흥해읍과 청하면, 송라면의 어촌마을들을 지나 포항의 북쪽 끝자락인 화진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19.3㎞의 둘레길이다. 물 맑고 수심 얕은 여러 해변을 걷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칠포와 월포, 화진 등 백사장이 길게 늘어져 있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기암괴석들이 줄지어 있는 조경대 부근의 해안은 18코스의 백미(白眉)라 하겠다. 또한 칠포, 오도, 청진, 이가, 용두, 월포, 방어, 조사, 방석, 화진 등 10개의 크고 작은 어촌마을들을 지나며 그들의 삶과 숨결을 느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한 편이다.
▼ 트레킹의 시작은 칠포해수욕장(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112)
새만금-포항고속도로 포항 IC에서 내려와 영일만대로를 타고 영일만신항 방면으로 달리다가 우목터널(흥해읍 용한리 산 149-36) 부근에서 20번 지방도로 옮겨 북쪽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칠포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흥해읍이 자랑하는 멋진 해수욕장으로 해파랑길 17코스와 18코스가 이곳에서 나뉜다. 참고로 이곳 흥해(興海)는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먼 옛날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나 이 일대가 호수로 변해 있다가 동편 곡강(曲江) 어귀의 산맥이 절단되면서 물이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은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는 평야지대가 되었단다.
▼ 백사장 길이 2km에 폭이 70m인 칠포해수욕장은 하루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다. 왕모래가 많이 섞여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며 주변 바닷가에서는 바다낚시도 가능하다. 특히 이곳에서는 ’재즈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매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열리는데 꽤 많은 국내외 동호인들이 몰려든단다.
▼ 18코스의 들머리는 주차장의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바다시청·해양스포츠클럽 쪽으로 열린다. 해파랑길의 ’스탬프 함‘도 이곳에 만들어져 있다. 모래사장을 따라 얼마간 걷자 탐방로는 이내 산비탈로 파고든다. 벼랑 수준의 바윗길이지만 데크로 계단을 놓아 탐방객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방도를 따라 에둘러가야만 하는 불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능선에 올라서자 작은 데크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트레킹을 시작했던 칠포해수욕장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 바다는 끝 간 데 없이 넓고 푸르다. 거센 파도에 속살을 내주고 있는 칠포해수욕장의 긴 백사장도 시선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 능선을 내려서자 아담하고 아름다운 칠포2리 해변이 반긴다. 아직은 해수욕장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조용해서 텐트 치고 놀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장소로 보인다. 그건 그렇고 모래사장을 지나는데 우뚝 솟아있는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위 위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모습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썰렁한 느낌의 간이해수욕장을 단연 돋보이게 만드는 풍경이라 하겠다.
▼ 모래사장이 끝나자 단위부락인 ’강서(江西) 마을‘ 즉 ’칠포 2리‘이다. 고현천의 서쪽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칠포 1리‘인 ’강북(江北) 마을‘과 함께 법정마을인 ’칠포리(七浦里)‘를 완성한다. 마을이 끝나면서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칠포교(七浦橋)를 건넌다. 물이 제법 많은 하천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 다리를 건너면 ’강북마을‘, 즉 방파제 벽화가 아름다운 ’칠포1리‘ 포구이다. 조선 중종 5년(1510)에 쌓았다는 칠포성(七砲城)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니 원래의 칠포라 보면 되겠다. 이곳 칠포는 수군만호진이 있던 곳이다. 고종 8년(1870) 동래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군사 요새로서, 7개의 포대가 있는 성이라 하여 칠포성(七砲城)이라 불렀다 한다. 칠포(漆浦)라고도 부르는데 절골에 옻나무가 많아서, 또는 해안의 바위와 바다색이 옻칠한 듯 검은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현재의 지명인 칠포(七浦)는 1914년 강서와 강북 두 마을이 합쳐지면서 생겨난 이름이란다. 옛 얘기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칠포 앞바다는 현재 방파제를 쌓아 항구로 만들었다. 그것도 제법 너른 규모이다. 하지만 햇살이 고여 아늑한 항구에는 작은 어선 몇 척뿐이다. 옛 영화를 되살리는 게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 칠포를 지난 탐방로는 뽈록하니 튀어나온 해안가를 따른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오른쪽은 축대를 쌓아 파도를 막아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길이다. 동해와 평행하게 달리는 7번 국도의 명성에 가려진 이 길은 지방도이면서 마을 앞길이기도 하고, 바다와 마을 사이를 구분 짓는 방파제 길이기도 하다. 웬만한 지도에는 길 이름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이다.
▼ 바닷가 언덕 위, 언뜻 보면 신전 기둥을 떠올리게 하는 아치형 하얀 구조물이 눈길을 끈다. 작년 여름 터키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신전(神殿)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가씨에 이끌려 자세히 살펴보다가 헛웃음을 짓고 만다. 허물다만 폐건물의 기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없애는 것보다는 조형물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나아보였던 모양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변에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이 길손을 맞는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 마치 해골을 보고 있는 듯하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머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재작년 대만의 야류지질공원을 둘러보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던 바위들에도 하등 뒤질 게 없어 보이는 모양새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데크로드로 연결된다. 20번 지방도로 올려다놓는 오르막 계단이다. 계단의 들머리에는 ’연안녹색길(해파랑길 18구간)‘의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칠포리에서 오도리로 넘어가는 이 길을 새로 내면서 함께 세운 모양이다. 도로로 올라서서 100m쯤 더 걷자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가 나타난다. 해오름전망대란다. 해오름은 포항과 울산, 경주 등 3개 도시가 함께하는 동맹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3개의 도시는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다. 산업화를 일으킨 산업의 해오름 지역이라는 뜻과 경제 재도약의 해오름이 되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단다. 트레킹 들머리에서 이곳 해오름전망대까지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 전망대는 금방이라도 동해의 푸른 물살을 가르며 나아갈 것 같은 범선(帆船)의 모양새이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바닥은 금속으로 된 무늬창살 같아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집사람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것이다. 하긴 작년 가을 태항산에 갔을 때 100m도 넘는 바위절벽에 제비집처럼 걸쳐놓은 유리잔도(玻璃栈道)‘를 300m나 걸었으니 이를 말이겠는가.
▼ 전망대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툭 튀어나간 스카이워크 뒤로는 망망대해가 끝 간 데 없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방금 지나온 칠포2리 마을과 그 너머의 모래해안 풍경이 길게 펼쳐진다. 반대 방향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석해안이 저 멀리 오도리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군(軍)의 초소가 눈길을 끈다. 맞다. 아까 만났던 안내판에는 이 구간을 ’연안녹색길‘이라고 했었다. 과거 군사보호구역으로 해안경비의 이동로였던 곳을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볼 수 있게 조성해 놓은 길이란다.
▼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탐방로는 다시 해안으로 내려간다. 이어서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난다. 전망 좋은 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도 1리‘이다. 자연부락 이름으로는 ’섬목(島項)‘이 아닐까 싶다. ’섬목‘이라는 게 본디 ’오도리(烏島里)‘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겠는가. 그 증거가 바로 ’오도(烏島)‘라는 지명이라 하겠다. 부둣가에서 100m 거리에 위치한 3개의 커다랗고 질펀한 검정색 바위섬을 이르는 이름이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곳 오도리는 1914년 이곳 ’섬목‘과 ’한가심이‘, ’검댕이‘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마을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작은 포구가 만들어져 있다.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되어 있는 한가하기 짝이 없는 항구이다.
▼ 오도 1리 앞 바닷가는 간이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다. 칠포해수욕장처럼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하여 아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명소라고 한다. 바다는 풍파 없는 삶처럼 잔잔하고 햇볕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따스하다. 그래선지 텅 비어있어야 할 모래사장이 사람들을 품고 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이 보이는가 하면 텐트 옆에 주저앉은 여인은 뭔가를 끓이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 금빛 백사장과 오도(烏島)섬을 앞에 둔 마을에는 횟집과 카페, 펜션 등의 상가들이 빙 둘러 앉았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고래카페‘라 하겠다. 뽀얀 건물에 벽화와 소품이 예뻐 오도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직접 로스팅을 해주는 실력 좋은 카페라고 하니 한번쯤 들렀다 가볼 일이다. 참! 제주도의 돌담 분위기를 가져왔다는 카페 ’린도(Rin Do)‘도 권장 받을만하니 기억해두자.
▼ 간이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끝날 즈음 탐방로는 또 다시 데크로드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역시 언덕위로 올려놓는 오르막 계단이다.
▼ 언덕으로 올라 모퉁이를 돌은 다음 오도교를 건너면 이번에는 ’오도 2리‘이다. 큰 나루터가 있다는 데서 유래한 ’한가심이‘와 비구니들만 사는 금단(禁斷)의 절이 있다는 뜻의 지명이 변천한 ’검단(檢丹)‘이 함께 들어있다. 사람들은 이곳 ’오도 2리‘의 볼거리로 사방기념공원을 꼽는다. 한국 사방 100주년을 기념해 2007년 문을 연 이 공원은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1975년부터 5년간 연인원 360만 명이 투입되어 총면적 4,500ha를 단기간에 녹화한 전국 최대 규모의 사방사업 성공사례를 보여주는 외부공원과 사방사업 기술변천과 각종 자료를 모아 전시한 실내전시실로 나눠져 있다. 그 옛날 60·70년대 보릿고개 시절에 춘궁기를 넘기기 위해 사방사업에 종사하며 국토 녹화에 이바지한 사방기술인의 혼과 땀이 깃든 자료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를 둘러보지 못했다. 산악회에서 정해놓은 귀경시간에 맞추려면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해오름 전망대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 오도리를 지나면 탐방로는 또 다시 20번 지방도(이정표 : 이가리 간이해변↑ 3.4㎞/ 오도리 간이해변↓ 1.4㎞)로 올라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청진 3리‘인 ’보리진‘ 마을에 이른다. 오도리에서 10분이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청진 3리‘는 포이포, 포위진, 모진으로도 불리는데 임란 때 왜적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보리가 잘 되는 어촌이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1리인 ’대곶이‘와 2리인 ’푸나리‘와 함께 법정 마을인 ’청진리(靑津里)‘를 이룬다. 이곳 ’청진 3리‘부터 청하면이 시작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 마을도 역시 두어 척의 작은 어선이 전부인 작은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
▼ ’청진 2리‘로 가는 길, 아니 ’청진 1리‘까지는 마을과 바다를 갈라놓은 길을 따른다. 바다는 파도가 집으로 들이칠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깝다. 그러니 그 사이에 놓인 길은 방파제를 겸한 셈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청진 2리‘인 ’푸나리‘ 마을로 들어선다. 작은 포구를 끼고 있는 이 마을은 원래 길 서편 골짜기의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도 역시 ’송정‘이었다. 그러다가 바닷가로 이주하면서 ’푸른나리‘로 변했고, 언제부턴가는 이를 줄여 ’푸나리(靑津)‘로 부르기 시작했단다.
▼ 물이 맑고 수심이 얕은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청진 3리‘, 즉 ’대곶이‘ 마을이 나온다. ’죽관‘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마을 이름을 낳게 한 대나무 숲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청진3리에서 청진1리까지는 20분이 걸렸다.
▼ 해파랑길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여행자의 길이다.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 뼘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연인바위‘이다. 설화에 따르면 선사시대 때 이곳은 다른 부족과의 전쟁이 잦았다고 한다. 아버지인 부족장이 싸움에 패하자 그의 딸 해수기는 피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도중에 추격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마을 청년 무돌이 해수기를 구한 뒤 100여 일 동안 저항하지만 끝내 죽음을 맞았고, 두 사람은 바위가 되어 서로를 애틋이 지키고 있다. 죽어서라도 사랑을 꽃피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사랑의 위대함‘을 화두로 삼으며 외딴 모퉁이를 돌아서니 10분 만에 ’이가리(二加里)‘가 나온다. 해양경찰서의 파출소까지 설치되어 있는 걸 보면 제법 큰 마을인가 보다. ’이지로포‘나 ’이기로진‘으로도 불리는데 옛날 도 씨와 김 씨 두 가문이 길을 사이에 두고 각각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하나로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란다. 옛날 두 기생이 청진과 백암의 갈림길에 터를 잡고 살면서 늙도록 마을을 개척했다는데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여기서 백암은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자연부락이다. 참! 이곳 이가리에는 ’독도체험연수원‘라는 특이한 볼거리가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2017년 폐교한 이가초등학교 자리에 세웠는데,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까지 정하는 등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떼쓰는 현실에 비추어 큰 의미가 있는 시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시간에 쫒긴 우리 부부는 이번에도 안으로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 ’이가리‘를 벗어날 즈음 월포해변까지 3.3㎞가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다. 흔하디흔한 게 이정표이니 뭐가 신기하겠는가마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에 거론해본다. 이정표나 해파랑길 표식 모두가 왼쪽으로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해안가를 따라갈 것을 권한다. 제멋대로 생긴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이 부근이 해파랑길 18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아도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비하다. 그런 풍광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부근이라 하겠다.
▼ 볼거리가 널린 해안을 돌아가면 ’이가리 간이해수욕장‘이다. 이곳도 역시 칠포해수욕장에는 한참을 못 미친다. 크기뿐만 아니라 편의시설 또한 보잘 것이 없다. 하지만 아늑한데다 뒤에 울창한 숲을 끼고 있어 한적한 곳을 찾는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는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모래사장과 인근 소나무 숲속에는 수많은 텐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 간이해수욕장의 북쪽 끝에서 탐방로는 작은 언덕으로 오른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전망이 좋은 저 언덕은 ‘조경대(釣鯨臺)’라 불린다.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이 그의 유람기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에서 이곳의 아름다움을 읊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화단의 대표 화가 중 한 분인 겸재 정선도 청하현감으로 재직하며 2년간 머무를 때 이 부근의 풍광에 빠져 자주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 황여일(黃汝一)은 조경대에서의 풍광을 북쪽 바다 위의 하늘은 광활하고 서쪽 산엔 구름이 우거졌으며, 가까이에는 기이한 바위들이 빽빽하게 서있다고 읊었다. 그의 말마따나 바닷가에는 제멋대로 생긴 기암들이 수없이 늘어서있다. 화가나 시인이 꼭 아니더라도 그 기이한 풍광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겠다. 머리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바위도 보인다. 바위도 바위지만 단단한 곳에 뿌리를 내려 푸른 숨을 쉬고 있는 소나무의 의지도 대단하다.
▼ 소나무 숲길이 끝나면 엄청나게 널따란 모래사장이 길손을 맞는다. ‘용두리 해수욕장’인데 통행을 막고 있다. ‘포스코 패밀리’ 직원 및 가족의 전용시설이라며 출입을 삼가 해달라는 안내문까지 세워놓았으니 어쩌겠는가. 때문에 탐방로는 ‘포스코수련원’의 앞으로 난 20번 지방도로를 따른다. 이가리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포스코연수원을 지나면 ‘용두리(龍頭里)’이다. 이곳에도 해수욕장이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월포해수욕장’에 가려 빛을 못 보는 비운의 해수욕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북적이는 곳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격이라 하겠다. 부족한 편의시설은 이웃에 있는 월포해수욕장의 것을 이용하면 된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모래사장이 다소 투박하다는 점이다. 모래와 자갈이 뒤섞여 있어 어린이들이 뛰어놀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 용두리해변을 빠져나와 20번 국도로 올라선다. 그리고 서정천(西井川)에 놓인 용두교(龍頭橋)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포항의 공식 해수욕장 중 하나인 ‘월포 해수욕장’이 나온다. 백사장길이가 900m에 폭70m인 해수욕장은 하루 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단다. 출발지인 칠포해수욕장에 버금가는 규모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 민박시설이 다소 부족한 칠포에 비해 이곳은 민박과 펜션이 많아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 월포리(月浦里)는 청하면 연안최대의 마을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 작은 어선들이 정박했었다는 데서 유래한 ‘적은포(1리)’와 수군만호진영기가 설치되어 있던 ‘개포(2리)’, 그리고 고인돌군으로 추정되는 큰 어금니모습의 바위들이 있는 달이 뜨는 언덕이라는 뜻의 월아구(3리)와 개포 주둔 수군의 중군지휘소가 있었다는 중휘(3리)가 합쳐진 법정 마을이다. 월아구의 ‘월’자와 개포의 ‘포’자를 취해서 새로운 지명인 ‘월포’가 되었단다. 포스코해안에서 이곳까지는 20분이 걸렸다.
▼ 해수욕장의 끄트머리에서 청하천(淸河川)에 놓인 ‘월포다리’를 건너면 ‘방어리(方魚里)’이다. 마을 어귀 해변의 큰 바위가 말 같다고 해서 ‘말바윗골’이라 부르다가. 방어가 잘 잡히는 현 위치로 마을이 이동하게 된 후 방어진(方魚津)이라 부른 게 어원이 되었다. 방어리에는 포구를 두 개나 거느리고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작은 포구가 그중 하나고, 다른 하나는 도로(이정표 : 조사리 간이해변→ 3㎞/ 월포해변↓ 1㎞)로 잠시 빠져나왔다가 다시 해안으로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본 마을에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다. 방어진(方魚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다고 볼 수 있겠다. 그건 그렇고 방어리의 볼거리는 방파제 건너의 눈부시게 하얀 테트라포드라 하겠다. 테트라포드 위에 푸른 바다가 놓인 풍경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월포해변에서 이곳 방어리항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방어리에서 조사리로 넘어가려면 거친 구간을 잠시 지나가야만 한다. 바닷가를 따라야하는데 해안도로를 새로 놓는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사방에 널린 공사자재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진행하다보면 어느덧 ‘조사리(祖師里)’이다. 방어리항에서 20분 거리이다. 조사리라는 마을 이름은 고려 말 원각조사(圓覺祖師)가 태어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단다. 조사리도 역시 포구를 거느리고 있는데 정박되어 있는 어선들이 제법 많다. 참! 이곳 조사리부터 송라면(松羅面)이 시작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 조사리와 방석리 사이에는 매우 길면서도 넓은 백사장이 놓여있다. 광천(廣川)에 놓인 조사교(祖師橋)를 건너면서 시작되는데 모래보다 자갈이 많아서인지 아직까지 간이해수욕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제법 많은 펜션들이 들어서있고 백사장의 바로 뒤는 작지만 소나무 숲이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모래가 들어붙는 것이 싫은 사람들이라면 마음에 들 수도 있겠다. 자갈을 굴리며 들어오는 파도소리가 제법 들을 만하니까 말이다.
▼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해파랑길 트래킹에는 푹푹 빠지는 해변이 반가울리가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국토종단 동해안자전거길’이 나있는 해안도로를 따라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한참 더 멀뿐만 아니라 인도구분이 없는 차로에서 씽씽 달리는 차량들을 피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있었지만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것보다야 나았으니 올바른 선택이라 생각된다.
▼ ‘5명의 해병 순직비’라고 적힌 표지판이 세워진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방석리(芳石里)’에 이른다. 조사리에서 25분 거리이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가 많아서 꽃이 피면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다는 ’방화(芳花)‘와 마을 앞 바닷가에 검고 넓은 큰 바위가 하나 외로이 있다는 데서 유래한 ’독석(獨石)‘이 합쳐져 법정 마을인 ‘방석리(芳石里)’가 되었다. 이 마을은 포구를 둘러싸고 있는 방파제가 최고의 볼거리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해양 동물들을 보호하자는 의미에서 황제펭귄부터 붉은 바다거북, 북극곰, 고래상어, 범고래 등을 그려놓았다. 시간이 조금 남는다면 방파제 위로 올라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길쭉한 방파제 위에 트릭아트가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 길가 작은 숲속에 ‘5인의 해병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1965년 해룡작전 때 수색업무를 하다가 거센 파도에 휩싸여 순직한 해병들의 넋을 기리는 비(碑)라고 한다.
▼ 방석리를 빠져나오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화진리가 나온다. 그런데 주변 해변이 의외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우리나라 지형의 특성상 동해는 조금만 들어가면 수심이 급격히 깊어지곤 하는데도 멀리까지 아주 얕은 것이다. 그 바닷가에 널린 갯바위는 갈매기의 천국이다. 그만큼 고기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이 부근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곳이라서 동물성 플랑크톤이 많이 서식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조사리 부근에서는 낚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니 부산에서부터 이곳까지 해파랑길을 이어오는 동안 가장 흔하게 눈에 띄었던 풍경이 시간을 낚고 있는 강태공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곳에서 만난 낚시꾼들의 그물망 속에는 몇 마리의 수확물이 들어있었다. 이 부근에서는 꽁치와 놀래미가 많이 잡힌단다.
▼ 잠시 후 풍속화들이 마을의 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는 화진리(華津里)에 들어선다. 자연부락인 이진(耳津)과 대진(大津), 화산(華山)이 합쳐지면서 화진(華津)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포구의 모습이 귀를 닮았다는 ‘이진(耳津)’일 것이다. 마을 앞 포구에 이르니 반가운 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지난 17코스 때 마중을 나왔던 옛 동료가 다른 일정을 포기하면서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싱싱한 회를 사준다면서 말이다. 이쯤에서 트레킹을 마쳐야 하는 이유이다. 덕분에 우린 2㎞ 남짓 되는 구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다. 생략한 구간이 위험이 노출되는 차도를 걸어야만 하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 트레킹의 날머리는 회진해수욕장(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
지경리에서 물회로 점심을 마친 후 회진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해파랑길 18코스와 19코스가 이곳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또한 포항 구간의 끝이기도 하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화진리 구간을 건너 뛴 탓에 총 16.96㎞㎞를 걸었다. 3시간 50분이 걸렸으니 나름대로 빨리 걸은 셈이다. 옛 동료를 만날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이 걷겠다는 욕심이 작용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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