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5코스
여행일 : ‘19. 2. 16(토)
소재지 : 울산시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과 동해면 일원
산행코스 : 호미곶(2.5km)→대보저수지(1.2km)→동호사(7.2km)→임도사거리(3.8km)→흥환보건소(거리 및 소요시간 : 14.7㎞, 실지거리 12.45㎞에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 15코스는 한반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호미곶 일대를 거닐며 바닷가 절경을 감상하는 코스다. 사진으로 이미 익숙해진 ’호미곶 해맞이광장‘은 물론이고 기암괴석들이 심심찮게 나타나는 바닷가를 따라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참고로 해파랑길 15코스는 최근에 새로 개설된 ‘호미곶 해안둘레길’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구간이다. 하지만 해파랑길 종주꾼 대부분은 처음에서 끝까지 ‘호미곶 해안둘레길’을 따른다. 내륙을 드나드는 ‘해파랑길’보다는 해맞이와 석양이 아름다운 천혜의 해안을 따라 기암절벽과 발끝에 닿을 듯한 파도와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는 ‘둘레길’이 더 입맛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 트레킹 들머리는 ’호미곶 해맞이 광장‘(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 포항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동해면(포항시 남구)소재지까지 온다. 이어서 929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대한민국 최동단이라는 ’호미곶(虎尾串)‘에 이른다. 우리나라를 호랑이로 비유했을 때, 지리상으로 꼬리 부분에 위치해 있어 '호미곶'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서로 돕고 사는 평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상생의 손‘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밖에도 해맞이광장을 비롯하여 등대까지 다양하고 풍성한 볼거리들을 갖춰 사시사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래 사진에서 맨 뒤에 보이는 독특한 생김새의 건축물은 ’새천년기념관‘이다. 3층 건물로 1층은 포항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문화, 미래 비전 등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2층은 바다화석박물관으로 조성되었다. 3층은 호미곶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이다.
▼ 먼저 광장의 풍경을 살펴보자. 해변으로 가는 방향의 좌측으로는 고래 모양으로 생긴 ’해안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고, 반대편의 잔디 광장에는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군상(群像)을 그려 넣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의 사이사이에는 홈을 파놓아 사람이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포토존(photo zone)인 셈이다. 그 뒤에는 높이 8m의 ‘연오랑·세오녀’ 청동상(靑銅像)’이 자리하고 있다. 두 사람이 정답게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인데, 그들이 딛고 있는 좌대는 두 사람을 일본에 싣고 간 바위를 암시한단다. 또 바닥 조형물은 영일만과 동해의 물결(파도)을 상징하며, 원형의 둥근 조형물은 이 땅을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을, 그리고 원형 조형물 중앙의 검은 부분은 일본에 전파한 선진문물인 비단을 의미한단다.
▼ 광장의 중심에는 왼쪽 손을 형상화한 커다란 청동 조형물이 배치되어 있다. ‘호미곶 해맞이 축전’의 상징물인 ‘상생의 손’으로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99년에 설치되었다. 참고로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한 ‘호미곶’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그 덕분에 2000년 및 2001년 1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국가지정 ‘해맞이 축전’이 개최되었음은 물론이고 해마다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성대하게 열려오고 있다. 이런 제반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 바로 ‘해맞이 광장’이다. 호미곶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소는 바다와 육지에 쑥 나와 있는 ‘상생의 손’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곳은 늘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 바닷가로 나아가자 또 다른 손 하나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왼손이었던 광장과는 달리 이번에는 오른손이다. 아니 두 손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왼손과 오른손을 함께 세움으로써 상생(상극의 반대)의 이념을 담았단다.
▼ 바닷가에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의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 ‘호미곶’이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이곳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또한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는 이곳을 우리나라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하였고,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한반도를 묘사하면서 일출 제일의 이곳을 조선십경(朝鮮十景)의 하나로 꼽았다.
▼ 바다 쪽으로 쭉 뻗어 나간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데크로드(deck road)를 따라 잠시 걷자 ‘돌문어’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돌문어가 이 지역의 특산품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음이리라.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물살이 센 덕분에 여기서 잡힌 돌문어가 전국에서 가장 맛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이곳에서 잡히는 돌문어는 타우린이 34%나 함유돼 시력회복과 빈혈방지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콜레스테롤계의 담석을 녹이는 작용을 하며, 돌문어에 많이 함유된 베타인(감칠맛) 성분은 간 해독을 촉진하고 항암작용과 세포복제 기능 등의 작용을 한단다.
▼ 돌문어상을 지나니 바다위에 마련된 전망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찬바람이 부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전망데크의 한가운데는 ‘희망의 해돋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나침판과 어린아이의 동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린이의 손가락은 대한민국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방향을 알려주려는 듯 먼 바다의 한 곳을 가르키고 있다. 또한 데크의 끝자락에는 투명유리를 깔아 바다 위를 걷는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했다. 찾는 이들이 수려한 바다 풍경을 맘껏 즐기도록 한 설계다.
▼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바다는 물론이고, 바닷속 '상생의 손' 조각과 국립등대박물관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이 그림엽서처럼 곱다.
▼ 육지의 끝자락에는 ‘호미곶 등대(虎尾串燈臺, 경상북도기념물 제39호)’가 자리 잡았다. ‘대보등대(大甫燈臺)’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등대로 1908년에 점등(點燈)했다. 8각형의 탑(塔)처럼 생긴 등탑(燈塔)의 높이는 26.4m이고 둘레는 밑부분이 24m에 윗부분은 17m이며 내부는 6층으로 되어 있다. 이 등탑은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올려, 오늘날의 건축 관계자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또한 이 등대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1901년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일본의 수산실업전문학교 실습선이 우리나라 연안의 해류, 어군의 이동상황, 수심 등을 조사하기 위해 대보리 앞바다를 지나가다 암초에 부딪쳐 전원이 익사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본은 사건의 책임을 고스란히 우리 정부에게 떠넘겼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빚까지 내가며 세운 등대가 바로 ‘호미곶 등대’라는 것이다.
▼ 등대의 옆에는 ‘국립등대박물관(國立燈臺博物館)’이 들어서 있다. 항로표지 100년(1893년 6월 도입)을 기념하고 산업 기술의 발달과 시대적 변화로 사라져가는 항로 표지의 시설과 장비를 영구히 보존·전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3,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1·2·기획 전시관과 야외전시장, 테마공원 등으로 이루져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저 독도등대와 화암추등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바다지킴이들의 미니어처(miniature)들이 전시되어 있는 테마공원을 눈에 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근처에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란 영일만을 끼고 동쪽으로 쭉 뻗은 트레킹 로드이다. 연오랑세오녀의 터전인 청림 일월(도기야)을 출발해서 호미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동해면 도구해변과 선바우길을 지나 구룡소를 거친 후 호미곶의 해맞이광장에 이르게 되는데 총 길이는 25km, 4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에 해파랑길 13, 14코스로 연결되는 구룡포항과 양포항, 경주와의 경계인 장기면 두원리까지 합치면 전체길이는 58km로 늘어나게 된다. 참고로 오늘 걷게 될 ‘해파랑길 15코스’는 두어 곳을 제외하고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3코스(구룡소길 : 발산1리∼구만리, 6.5㎞)와 4코스(호미길 : 구만리∼호미곶, 5.3㎞)를 그대로 따른다. 아니 기존의 해파랑길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따른다고 보면 되겠다.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하던 해안절벽에 안전시설을 갖춘 ‘둘레길’을 새로 내었기 때문이다.
▼ 호미곶등대를 왼편에 끼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오른편은 물론 동해의 너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대보항(大甫港)‘이다. 대보항은 돌문어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다. 국내 위판물량의 12%가 포항에서 출하되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이곳 대보항에서 나온단다. 매년 ’호미곶 돌문어 축제‘가 대보항에서 열리는 이유이고, 부둣가에 수북이 쌓여있는 둥그런 ’통발‘이 그 증거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대보항의 명물은 누가 뭐래도 길이 160m의 ’트릭아트(Trick Art)‘ 벽화라 하겠다. ’상생의 손‘을 주제로 그려졌는데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최상의 포토죤(photo zone)으로 이미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2014년 제작 당시의 기네스북 기록이 148.63m이었다니 세계 최장의 트릭아트인 셈이다.
▼ 이름은 비록 ’대보항(大甫港)‘이지만 북쪽방파제는 구만리에 터를 잡았다. 그 북쪽방파제에 다다를 즈음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탐방로임을 알리는 표식은 보이지 않으나 ’블랙피싱 낚시 점포‘를 오른편에 낀 골목길로 들어가면 된다. 반대편 해안으로 나가면 일렬로 늘어서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가 눈길을 끈다. 파도나 해일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콘크리트 블록이니 그만큼 이곳이 파도가 세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이 부근이 ‘까꾸리계(鉤浦溪)’라는 지명으로 불려왔을 정도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까꾸리계는 ‘구포계’라는 한자어 지명인데 ‘갈고리 구(鉤)’자를 써서 지은 것이란다. 포항 지역에서 가장 바람과 파도가 거칠다보니 풍랑이 칠 때면 청어 떼가 해안까지 떠밀려 와 갈퀴로 끌어 담을 정도였다고 한다.
▼ 구만리 해안을 지나다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등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평상시에도 거친 파도로 악명 높은 ’교석초(矯石礁, 다릿돌)‘에 외롭게 선 ’수증등대‘이다.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처럼 생긴 도드라진 지형 탓으로 바닷바람이 세게 몰아치는 곳이다. 다른 해안에 비해 파도가 높을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런데다 암초도 많단다. 그만큼 뱃길이 험하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호미곶 인근에는 바닷길을 밝히는 등대가 무려 5개나 된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수중등대‘인데, 암초가 많기로 소문난 구만리(九萬里) 앞바다에 자리 잡았다. 이 등대는 흰색과 빨간색이 보통인 여느 등대들과는 달리 파란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고로 항구의 대문격인 등대는 배가 포구에 들어올 때를 감안하여 오른쪽 빨간색이고 반대쪽은 흰색이다. 국제적으로 약속된 등대의 색깔이라고 한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구만리항(九萬里港)에 이른다. 구만리는 ‘범 꼬리’처럼 굽이친 지형인데다 거북이까지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구만(龜滿)’, 구릉지가 많다는 의미로 ‘구만(丘滿)’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섭슬끝의 처녀가 시집갈 때 까지 백미 3말을 못 먹고 간다’는 목장보슬말(牧場涉瑟末)의 유래에서 ‘섭슬골’이라고도 했단다. 다른 한편으론 계유정란(1452년) 때 황보인의 충복 단량(丹良)이 황보인의 손자 서(瑞)를 항아리 속에 넣어 도망가다 이곳에 이르러 보니 앞에는 바다라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그만 가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포구를 지나자 바닷가에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다. 그 옆에는 ’쾌응환 조난기념비(快應丸 遭難紀念碑)‘라고 적힌 빗돌이 버티고 있다. 1907년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주변을 조사하던 일본의 수산실습선(137ton급의 쾌응환호)이 거친 파도에 좌초하면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당한 사고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1926년에 세웠다고 한다. 해방 이후 파괴되었다가 1971년 재일교포에 의해 다시 세워졌단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수중등대‘도 이 사건으로 인해 설치되었다니 참조한다.
▼ 기념비 옆에는 데크 조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 아래 바닥에는 ’트릭아트(Trick Art)‘로 독수리를 그려놓았다. 근처 바닷가에 날개를 접고 앉은 독수리 형상의 기묘한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갯바위가 파도와 해풍에 깎이면서 저런 형상을 만들어냈단다. 조물주가 아니라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호미숲 해맞이터‘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기에 일단은 들어가 보기로 한다. 호랑이 꼬리에 위치한 숲에다 만들어 놓은 ’해맞이 터‘라면 일출(日出)의 명소일 게 분명한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특히 그 끄트머리에는 전망데크까지 만들어놓지 않았겠는가.
▼ 전망대에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해돋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바닷가에 놓여있는 소맷돌, 악어바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바닷가로 기어 나오고 있는 악어 형상의 바위를 찾아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악어‘ 모양으로 생겼다는 ’악어바위‘는 안내판에 그려넣은 사진을 참고하지 않고는 쉽게 찾아낼 수가 없었다.
▼ 조금 더 걷자 건너편에 작은 항구가 하나 보인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도로는 계속해서 산속으로 향하고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포항해경 동구만대행신고소’가 있는 저 항구로 내려서야 한다. ‘호미곶 해안둘레길’이 새로 뚫렸기 때문이다.
▼ 도로변에는 ‘월보 서상만(月甫 徐相萬)’의 시비(詩碑), '나 죽어서'가 세워져 있다. 2년쯤 전엔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구만리(호미곶면)의 생가터 앞 야트막한 언덕에 시비를 세운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곳을 말했던가 보다.
▼ 항구를 지나면 새로 내놓은 듯한 길이 나타난다. 절벽과 파도 탓에 얼마 전까지도 접근이 불가능했던 구간인데 절벽의 아랫도리를 돋우고 그 위에다 잔자갈을 깔았는데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생김새는 물론이고 걷기까지도 여간 편한 게 아니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새로 내면서 조성한 탐방로일 것이다.
▼ 육로(陸路)를 만들 수 없는 곳에는 데크로드(deck road)를 설치했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바위벼랑에 잔도(棧道)를 내었는가 하면 그마저도 불가능할 때에는 아예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다 다리를 놓았다. 두 명이 교차해 걸을 수 있을 만큼 폭이 여유로운 데크로드를 걷다보면 암초에 부서지는 흰 포말이 보면 볼수록 빨려들게 만든다. 그리고 내 마음속 잡념이 자신도 모르게 씻겨 내려간다.
▼ 얕은 바다 위에 조성한 덱(deck) 길을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푸른 동해의 풍경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기암절벽이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 풍경은 남미 칠레의 이스터섬(Easter Island)에 있다는 ‘모아이 석상’을 닮은 바위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다.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그 형상을 아래 사진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데크로드가 끝나면 이번에는 바닷가를 있는 그대로 이용했다. 무게에 짓눌린 듯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소나무 아래로 난 탐방로가 서정적인 구간이다. 다만 바닷물과 너무 가까운 탓에 파도라도 조금 높을라치면 탐방이 불가능해질 것 같다.
▼ 새로 내놓은 탐방로의 끝에는 ‘대동배 2리’가 있다. 독수리바위에서 35분 거리인데, 마을 앞에는 작은 항구가 들어앉았다. 파도를 가로막은 방파제 안의 포구는 평화롭다. 선창에 묶여 서로 몸을 기댄 작은 배들이 잔물결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 ‘대동배 2리’에서는 길이 둘로 나뉜다. 직진하면 ‘대동배 1리’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걷게 되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지방도로의 위험요소를 피해 조성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1.2㎞ 내내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거닌다지만 우린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심심찮게 오르는 산에서 맨날 보게 되는 소나무 숲보다는 코끝을 스쳐가는 비릿한 바닷바람이 더 그리웠기 때문이다.
▼ 15분 후 이번에는 ‘대동배 1리‘에 이른다. 신라시대에는 ‘동을배곶’(冬乙背串)이라 칭하여 봉수대의 이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1664년 경, 조정의 관리인 김상구(호 : 이필)가 이곳에 정착하여 작시한 ‘동해순토학달비(東海舜土鶴達飛)’라는 시구에서 연유하여 ‘학달비(鶴達飛)’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마을의 형상이 먼 바다에서 보면 날아가는 학의 모습을 닮아서란다. 1679년 경, 박현섭이라는 어부가 마을 뒷산이 달비 같다 하여 ‘한달비’(大達飛)‘라 불렀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이후부터는 호미곶 해안 둘레길 중 3코스인 ‘구룡소길’(6.5㎞)을 따른다. 마을에서 조금 더 걷자 아홉 마리의 용(龍)이 승천할 때 굴을 아홉 개나 뚫었다는 전설이 있는 구룡소(九龍沼)가 나온다. 이곳은 용추, 용수리, 용치기미로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벼랑 끄트머리에다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파도칠 때 그 굴로 유입된 바닷물이 용이 불을 뿜어내는 것 같고 그 소리가 천지를 울리듯 우렁차다고 하더니 조금 더 가까이서 느껴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 구룡소는 높이 40∼50m, 둘레 100여m의 움푹 팬 기암절벽이다. 전망대에 서면 그런 구룡소의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크고 작은 파도가 용이 살았다는 소(沼)를 휘감으면서 들락거리고 있다. 그러나 용이 뚫었다는 굴은 눈에 띄지 않았다. 참고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나 풍어제, 출어제를 지낸다고 한다.
▼ 이후에는 해안 절벽 위에 새로 내놓은 탐방로를 따른다. 비록 잠시지만 호젓한 산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제법 그럴듯한 바윗길을 올라서면 이번에는 폭신폭신한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를 친구삼아 거닐기에 더없이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 바닷가로 내려선 탐방로는 또 다시 산으로 기어오른다. 험하지도 그렇다고 구간이 길지도 않지만 이마에 배어나는 땀까지 막을 수는 없다. 산길은 역시 산길일 수밖에 없나보다.
▼ 또 다시 바닷가로 내려서니 상큼한 봄바람이 땀에 배인 이마를 훑듯 지나가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준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른다. 지층 단면을 드러낸 바위 절벽 아래 파도와 해풍에 깎인 갯바위와 자갈이 펼쳐져 있다. 파도에 휩쓸린 몽돌이 화음을 만들고,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 그렇게 50분 정도를 더 걷자 ‘발산 2리(發山 二里)’가 나온다. 발산2리의 또 다른 이름은 ‘여사(余士)’이다. 신라가 망한 후 망국의 한을 품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선비 행세를 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도 역시 작은 어선 대여섯 척이 정박해있는 어촌 마을이다. 참! 이 마을의 뒷산 어부 보안림에 있다는 ‘모감주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371호)’는 구경하지 못했다. 앞만 보고 걷다가 군락지로 연결되는 들머리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꽃이 만발하면 마치 황금비가 내리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기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쉽다 하겠다.
▼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지방도인 ‘호미로’의 축대 아래로 나있다. 멀쩡한 도로를 제켜놓고 찰랑거리는 바닷물 바로 옆에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길을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커다란 판석(板石)을 깔아 멋까지 더했다. ‘호미곶 해안 둘레길’이 낳은 명품 산책로라 하겠다.
▼ 잠시 후 장군바위가 길손을 맞는다. 투구를 쓴 장군이 아이를 업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내 눈에는 언젠가 보았던 촛대바위에 더 가깝다. 함께 걷던 친구는 ‘남근바위’라며 아예 한술 더 뜬다. 하긴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라고 하지 않았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 탐방로는 이후로도 바닷가를 따른다. 너른 바다가 끝 간데 없이 펼쳐지는데 바다를 향해 내닫다 그만 돌로 굳은 듯한 꿈의 파편들이 암초를 이룬 채 여기저기 흩어져 파도에 시달리고 있다. 왼편에 펼쳐지는 풍경도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기암절벽에 매달린 채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노송 몇 그루만으로도 훌륭한 풍경으로 성큼 다가온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더 걷자 ‘발산 1리’가 나온다. ‘발산(發山)’ 마을로도 불리는데 조선시대 세워진 흥인군 공덕비에는 발산(鉢山)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지형이 바랑처럼 생겼다고 해서 바랑골 또는 발미골이라 불렸다라고 볼 수 있으나, 언제부터 ‘쏠 발(發)’자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단다.
▼ 마을길을 걷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손질한 고기를 널고 있다. 그런데 이곳 포항의 명물인 과메기나 오징어가 아닌 ‘아귀’란다. 새로이 부각되는 특산품일지도 모르겠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도로를 해안도로를 따른다.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구간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내 눈이 한가해진 것은 아니다. 날머리가 가까워졌으니 이쯤에서 들어가 볼만한 횟집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닷가라선지 횟집은 꽤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문을 연 집은 거의 없었다. 성수기에만 문을 여는 모양이다. 그런 풍경은 날머리인 흥환리까지 계속됐다. 덕분에 우린 최근 이곳에서 많이 잡힌다는 오징어를 맛은커녕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 해안길을 따르다보면 왼편 언덕에 비각(碑閣) 하나가 보이기에 올라가본다.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 구간에 돌 울타리를 쌓고 군마 등을 키우고 관장했다는 ‘장기 목장성비(長䰇 牧場城碑)’가 모셔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興寅君) 공덕비’와 목장을 관장하던 ‘감목관(監牧官) 공덕비’ 등이 함께 세워져 있다.
▼ 트레킹 날머리는 흥환리 백년손님 마트(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발산리에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간이해수욕장이 있는 흥환리에 이르면서 해파랑길 15코스의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해파랑길의 ‘스탬프 함’은 흥환교 건너 ‘백년손님 마트’의 문 앞에 세워져 있다. 이정표는 해수욕장의 모래사장과 흥환보건진료소를 경유해 마트로 연결시키고 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929번 지방도까지 진행한 다음 흥환교를 건너는 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해파랑길 15코스의 공식적인 거리는 14.7㎞이다. 하지만 핸드폰의 깔아놓은 앱은 12.45㎞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두어 곳에서 해파랑길 대신에 ‘호미곶 해안둘레길’을 따랐던 탓일 것이다. 아무튼 12.45㎞ 3시간이 걸었으니 적당한 속도를 유지했다고 보면 되겠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결과이다.
'해파랑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위적으로 가꾸었지만 눈요깃거리가 널려있는 해파랑길 17코스(‘19.3.16) (0) | 2019.04.03 |
---|---|
신이 빚은 경관에 연오랑세오녀의 전설이 더해진, 해파랑길 16코스(‘19.3.2) (0) | 2019.03.25 |
아름다운 경관에 명품 먹거리까지 추가되는 해파랑길 13코스(‘19.1.5) (0) | 2019.01.15 |
송대말과 소봉대 등 절경들을 품은, 해파랑길 12코스(’18.12.15) (0) | 2018.12.26 |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을 배우며 걷는, 해파랑길 11코스('18.12.1) (0) | 2018.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