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사천성(四川省)
여행일 : ‘16. 9. 24(토) - 29(목)
일 정 :
○ 9.25(일)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 9.26(월) : 구채구(九寨沟)
○ 9.27(화) : 황룡(黃龍)
○ 9.28(수)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쇼
특징 : 사천(四川, 쓰촨)은 중국 내륙에 위치한 성(省)이다. '쓰촨(四川)'이란 이름은 장강을 비롯해서 큰 강이 네 개나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천성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成都, 청두)로 와야 한다. 이때 국적기(國籍機)인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할 수 있으니 참조한다. 매운 음식으로 유명한 성도(成都, 청두)는 1억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는 사천성(四川省, 쓰촨성)의 성도(省都)이다. 또한 성도는 쓰촨 분지 및 그 너머로 뻗어 있는 양쯔강과 그 지류들이 지나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이다. 진나라 때 청두현이 세워진 이래 한, 촉, 당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가장 큰 상업도시의 하나가 되었고, 8세기말에는 제2의 수도가 되었다. 1952년 이후 충칭, 바오지, 쿤밍, 안캉, 샹판까지 가는 철도가 놓이자 남동부 전역에서 으뜸가는 철도중심지로 변했고, 1960년대 들어서는 알루미늄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비료·화공약품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업이 발전했다. 아무튼 이곳은 약 200만 년 전에 인류 활동이 시작되었고, 지금으로부터 2만5천 년 전에는 문명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삼성퇴 문명(三星堆文明)으로 대표되는 고도로 발달한 고촉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후 진(秦) 왕조가 사천을 통치한 이래 점차 중원(中原) 문화에 유입되기 시작하여 중국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참고로 사천성에는 세 개의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 World Cultural Heritage)’이 있다. 아미산(峨眉山)과 구채구(九寨沟), 그리고 도강언(都江堰)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구체구와 도강언을 둘러보게 된다.
▼ 호텔 앞 시가지, 성도(청두)는 흔히 ‘천부지국(天賦之國)’이라 불린다.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당대의 시인 이백(李白)이 ‘촉도난’이란 시에서 ‘아아, 촉(蜀)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은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라’며 그 지형의 험난함을 읊기도 했던 성도(청두) 일대가 먹을 것이 풍족한 땅이 된 데에는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도강언(都江堰. 두쟝옌)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도(청두)시는 디지털 기술을 육성하는 ‘하이테크(hightech) 단지’를 오래 전부터 조성해 우수한 인력과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다. 2200년 전에는 치수(治水)가 최고의 하이테크(hightech)였지만, 지금은 디지털(digital) 기술이 그에 해당된다며 말이다. 참고로 성도는 '천부의 자연풍경(天賦之國)' 외에도 '팬더의 고향', '이름난 역사문화의 도시'라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 이번 여행의 첫날 머물렀던 성도(청두)의 글로리아호텔(Felton Gloria Grand), 5성급 호텔답게 객실은 깔끔했고 욕실 또한 널찍했다. 특히 세면도구는 물론이고, 드라이기까지 갖추어 놓았다. 또한 뷔페식인 아침식사는 외국 관광객들을 배려해서인지 중국 특유의 향이 일절 배제되어 있었다.
여행 첫째 날 오전, 도강언(都江堰)
특징 : 도강언(Tu Chiang Yen , 都江堰)은 중국 촉(蜀) 지방의 유명한 제방으로서 강(江)의 물줄기를 나누기 위해 강 중간에 건설된 어취(魚嘴)형의 제방(隄防)과 이에 딸린 여러 제방과 수로(水路)를 총칭한다. 사천(四川省) 민강(岷江) 중류의 관현(灌縣)에 위치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도안현에 있었기 때문에 도안대언이라 불리다가, 송대 이후 도강언이 되었다. 민강은 쓰촨 성 북부의 송판(松潘, 쑹판) 고원에서 발원하며, 집수면적은 2만㎢가 넘는다. 강의 하류로 오면서 빗물뿐만 아니라 빙설이 녹아내린 물까지 합쳐져, 관현 근방에 이르면 연평균 유수량(流水量)이 158억㎥에 달하게 된다. 민강은 관현을 지나 성도(成都, 청두) 평원으로 유입되는데, 지세(地勢)가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그로인해 강바닥의 평균 경사도가 매우 완만하여 흐름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져 토사가 쉽게 쌓이고 제방이 쉽게 무너져 대규모 수해의 원인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시대 촉의 재상 개명이 옥루산을 파내어 수해를 없앴다고 한다. 진(秦) 소양왕 51년(BC 256)에 진이 서주를 멸하고 이빙(李冰)을 촉의 태수로 임명했는데, 천문지리에 능통했던 이빙이 그의 아들 이이랑(李二郞)과 함께 수리사업인 도강언 건설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개수(改修)를 거치면서 차츰 완성되어갔다. 중심이 된 공사는 백장제·도강어취·금강제·비사언·인자제·보병구 공사였다.
▼ 성도(청두) 시내를 빠져나온 관광버스는 1시간 여 만에 도장언의 너른 주차장에 도착한다. 약 2000년 전 민강(岷江)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은 매년 홍수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관리 이빙이 조사를 하니, 근처의 산에서 겨우내 눈 녹은 물이 급류로 유입되어, 유량이 넘쳐 물살이 완만한 곳에 이르면 둑을 터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댐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이빙은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수로(水路)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산에서 유입되는 물길을 다른 곳으로 터주고, 강물의 유량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인공 관개 수로를 제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건조한 청두 평원에 물을 대는 관개수로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이 관개사업은 긴 대나무로 짠 소시지 모양의 바구니에 돌을 채워 넣고, 나무로 삼각대를 만들어 대나무 바구니를 지지할 구조물을 제작함으로서 건설을 시작하였다. 공사는 완성되기까지 4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후 강은 더 이상 범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태고의 관개수로는 연중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온화하고 다습한 사천성의 기후와 함께 사천성을 중국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농경지대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홍수의 방지는 물론이고, 성도의 주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해 주는 등 오늘날에도 본래의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도장언은 이러한 역사성과 과학적 기술을 인정받아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소문난 관광지가 되었다.
▼ 입장권을 보여주고 안으로 들면 ‘관광안내도’가 눈에 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안내도를 살펴보는 여유를 부려본다. 그래야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강언의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다. 때문에 전체를 다 둘러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우리 같이 시간에 제약을 받고 있는 패키지여행자들이라면 더욱 어려울 게 분명하다. 이럴 경우에 꼭 필요한 것이 안내도가 아닐까 싶다. 꼭 가봐야 할 곳을 미리 정해 놓고 동선(動線)을 미리 숙지해 놓는 것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 널찍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길가 나무들 사이로 금강제(金剛堤)가 내다보인다. 강기슭을 내강의 물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방(隄防)이다. 제방 위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걸로 보아 도강언 관광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 잠시 후 알맞게 너른 광장에 이른다. 왼편 산자락에 누각(樓閣)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더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생김새가 영락없는 음식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음악제(Music Festival)’의 행사를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 성도(成都 , Chengdu)가 중국의 서부지역(Western China)이라서 ‘서부음악제(西部音樂祭)’라는 이름이 붙었나 보다. ‘어~ 왕조현이도 오는가 보네?’ 초청가수들의 사진과 이름이 실려 있는 것을 본 어떤 이가 부르짖는다. 음악제에 배우가 초청되는 것이 의아하기에 다가가보니 ‘왕조람(王祖蓝)’이다. 배우 겸 가수인데 MC로 활약하는 친구이다. 배우인 왕조현(王祖賢)과 거의 비슷한 한자라서 혼동을 했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다.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렇지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 왕조현(王祖賢)에다 비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오늘은 여행 첫날, 웃으면서 출발하자는 의미에서 거론해 봤다.
▼ 수리시설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야 한다. 안란삭교(安瀾索橋)라는 이름의 다리인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리는 것이 여간 위태롭지가 않다. 다리의 생김새도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줄로 연결시켜놓았지만 강의 양안(兩岸)에 만들어진 지지대(支持臺)가 영 시원찮게 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도강언은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이빙 부자 등 도강언과 관련된 인물과 설화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이왕묘(李王廟) 지구이고, 다른 하나는 민강 위에 놓인 흔들다리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수리시설이다. 지금 건너려고 하는 안란삭교가 바로 그 흔들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수리시설지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하지만 개의치 않고 건너기로 한다. 여자들도 희희낙락하며 건너고 있는데, 이 정도 갖고 겁은 낸다면 사내대장부의 체면을 구기지 않겠는가. 아무튼 다리는 의외로 건실했다. 위아래로 출렁거리기는 했지만 좌우로 흔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민강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안란삭교(安澜索橋)는 중국 5대 고교(古橋)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적교(弔橋, 흔들다리)는 아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속에서 수차 보수하면서 기존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이 적교가 있어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민강을 오간다. 다리의 길이는 261m로 옛 이름이 주포교(珠浦橋)였으나 송나라 때 중건하면서 평사교(評事橋)라 했다. 이후 명나라 때 전쟁으로 불탔던 것을 청나라 가경 8년에 이곳 사람인 하선덕 부부가 다시 중건해 양안의 사람들이 거센 물결을 안전하게 건너라는 의미로 안란교(安澜橋)라 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부부를 기려 부부교(夫婦橋)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부른다니 참조한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강줄기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민강(岷江)은 저 위에서 둘로 나뉜 뒤, 그중 한 줄기가 이 다리의 아래로 흐른다. 인력에 의해 만들어진 물줄기임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강한 물줄기이다. 하기는 이 정도는 되어야 경작지의 관개(灌漑)나 항운(航運)에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만리장성보다도 더 위대한 공사라는 칭호도 들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 다리를 건너면 금강제(金剛堤)이다. 민강(岷江)의 물줄기를 둘로 나누고, 강기슭을 강물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방(隄防)이라고 보면 된다.
▼ 안란삭교는 금강제(金剛堤)에서 끝난다. 아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강안(江岸)까지도 연결시켜 놓았다. 다만 현재는 사용을 하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어쩌면 안전성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 이정표에 보병구(宝瓶口)와 도강언(飛沙蝘)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옥루산(玉壘山)과 이퇴(離堆) 사이의 수로(水路)인 보병구(宝瓶口)는 너비가 20m에 높이는 30m, 길이는 100m로 벽 양쪽에 수량계와 수위기록계를 설치하여 내강에 흘러 들어오는 수량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보병구는 성도평원의 천연관개(天然灌漑) 관문이 된다. 또한 비사언은 제방(隄防)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내강(內江)에 쌓아올린 약 300m 길이의 낮은 제방을 말한다. 내강으로 많은 물이 들어와도 이 낮은 제방을 넘쳐 외강(外江) 쪽으로 흘러가도록 설계 되었단다.
▼ 어취(魚嘴)로 향한다. 잠시 후 수많은 인파에 부대끼고 있는 너른 광장(廣場)에 이른다. 어취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한가운데에다 어취를 설명해 놓은 빗돌(碑石)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한글로 된 설명문이 눈길을 끈다. 한자와 한글, 일본어 등 세 개의 언어로 되어 있는데, 자기들 언어인 한자의 바로 아래에다 한글을 배치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관광객들이 많다는 얘기겠지만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일본어보다 위에 적혀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난간으로 다가가면 강물이 넘어갈 수 있도록 낮게 쌓아올린 제방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돌을 넣은 대바구니로 만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시멘트로 바뀌었다. 아무튼 수리시설(水利施設)인 어취(魚嘴)는 물길을 둘로 나눈다고 해서 ‘어취분수재(魚嘴分水堤)’라고도 불린다. 저 시설(魚嘴)이 강(江)의 중간에 건설됨으로써 민강(岷江)의 흐름은 내·외 2개의 강으로 나뉘게 된다. 사진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외강(外江)은 민강 본래의 강줄기로, 남쪽으로 흘러 이빈(宜賓) 부근에서 양자강과 합해진다. 그리고 오른편의 내강(內江)은 옥루산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만든 보병구를 통과하여 주마(走馬), 푸양(蒲陽), 백조하(柏條河) 등을 거쳐 성도평원으로 흘러 들어가 경작지의 관개(灌漑)와 항운(航運)에 유용하게 이용된다. 내강은 민강과 침강(沱江)으로 나뉘어 흘러 들어간다.
▼ 어취(魚嘴)를 다른 말로 분수어취(分水魚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 말은 민강이 흘러내려 오는 곳에 물을 예전 물길인 외강과 홍수 예방과 가뭄을 방지하기 위해 수리시설로 새로 물길을 낸 내강으로 물을 나누어 흘려보내기 위한 첫머리라는 말일 것이다. 어취는 물고기의 부리라는 뜻으로 뾰족한 모양이 물고기의 주둥이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혹자는 반달을 빼다 닮았다고도 하지만, 물고기 입 모양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인공으로 댐을 쌓아 물을 두 갈래로 가르는데 물의 양은 내강과 외강의 비율이 4:6이고 토사는 2:8의 배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물의 양은 비슷하게 나누었지만, 토사는 내강에 쌓이지 않게 대부분 외강으로 그냥 흘려보낸 것으로 어취의 방향과 위치가 만든 과학적인 배분이란다. 어취 위에 보이는 섬처럼 생긴 제방은 백장제(百丈堤)란 곳으로 사람이 직접 쌓은 인공(人工)의 섬이다. 제방 앞에서 물의 양과 토사의 양을 미리 나누려는 목적으로 쌓았다고 한다.
▼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는 어취(魚嘴)를 쌓은 공법을 재현해 놓았다. 수십 미터 길이의 대나무를 김밥처럼 둥글게 엮고, 그 안에 호박돌을 채워 넣은 뒤에 강 가운데에 쌓아올리는 공법이다. 그 옆에는 목삼족가(木三足架)란 기구도 보인다. 나무를 세 가닥으로 묶어 물의 흐름에서도 지탱할 수 있도록 한 받침대이다. 제방이 터지면 임시로 이 시설을 이용해 물길을 돌리고 공사하거나 토사를 파낼 때도 사용하는 것으로 지금도 사용된다고 한다.
▼ 외강(外江)에는 다리가 놓여있다. 그리고 다리의 아래에다 갑문(閘門)을 만들어 외강으로 들어가는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갑문이 닫혀 있는 걸로 보아 현재 건기(乾期)라는 얘기일 것이다. 물이 적을 때는 경작지의 관개나 항운에 먼저 이용하는 게 경제적일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 안란삭교(安瀾索橋)로 되돌아가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거대한 빗돌(碑石) 하나를 만난다. ‘도강언(都江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강택민(江澤民) 주석’의 솜씨란다. 그나저나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길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심심찮게 그의 글씨를 만날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 비석(碑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수리문화전청(水利文化展廳)’이 나온다. 도강언의 건설에 관한 역사를 전시해 놓은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시대 촉(蜀)의 재상 개명(開明)이 옥루산(玉壘山)을 파내 수해를 없앴다고 한다. 결국 도강언의 대대적인 공사는 이빙이 했지만, 이미 그전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홍수 방지를 위해 여러 번 손을 댄 것으로 이빙이 이곳에 태수로 오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에 태수로 부임한 이빙은 이곳 백성들이 한결 같이 홍수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듣고 조사를 시작해 끝내 도강언을 완성한 것이다. 물이란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너무 많을 경우에는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에 어울린다고나 할까?
▼ 도강언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그리고 보병구(寶甁口)이다. 어취란 말 그대로 물고기의 주둥이를 뜻하는데, 이것은 민강을 두 줄기로 가르는 분수제(分水堤) 역할을 한다. 이곳을 통과한 강물은 민강 본류인 외강(外江)과 인공 수로라 할 수 있는 내강(內江)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내강으로 들어온 수량을 자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제방으로써 비사언을 만들었다. 곧 내강쪽으로 흘러온 물이 넘칠 경우 이 제방을 통해 다시 민강 본류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비사언을 넘지 않은 물은 보병구쪽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는데, 보병구란 보배와 같은 병(甁)의 주둥이라는 뜻으로써 곧 입수구(入水口)이다. 이것은 바위산을 파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곳을 지난 물은 넒이 약 10미터 정도의 인공 수로를 따라 빠르게 도강언시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보병구와 비사언 사이에는 이른바 이퇴(離堆)라는 곳이 있다. 이것은 비사언과 보병구의 기능을 보조하는 인공 유수지라고 할 수 있다. 보병구로 들어가기 전의 물은 잠시 동안이나마 회돌이 치면서 이곳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이퇴는 내강으로 흘러갈 퇴적물을 이곳에 쌓이게 한 다음 그것이 비사언으로 넘어가도록 만든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리적 특징과 물의 흐름, 그리고 고도의 기술이 결합된 정교한 시설이다.
▼ 되돌아 나오는 길, 건너편 옥루산(玉壘山) 자락에 지어진 진언루(秦堰樓)가 선연하게 나타난다. 도강언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모택동과 등소평, 강택민 등의 당과 국가 지도자들도 모두 저곳에서 도강언의 전경을 구경했다고 한다. 누각(樓閣)의 높이는 24.32m이며 5층의 구조로 되어 있다.
▼ 도강언을 빠져나와 구체구로 향한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수리시설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패키지여행의 특징 중 하나이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내 간절함이 뭔가를 이루어낸다. 아까 안란삭교를 건너면서 보았던 진언루(秦堰樓)를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가이드를 설득해 오른 진언루에서 도강언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전망대에 서면 왜 이곳에다 누각(樓閣)을 지었는지 금새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아래에 있는 어취분수재는 물론이고, 비사언과 이퇴(离堆), 옥루관(玉壘關), 안락삭교(安瀾索橋) 등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뒤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어쩌면 청성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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