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만리장성(萬里長城)


특징 : 만리장성은 하북성 발해만이 있는 산해관(山海關)의 천하제일관에서 시작하여, 감숙성 고비사막이 있는 가욕관(嘉峪關)의 천하제일웅까지 장장 6,700km를 말한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제()나라가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을 쌓은 것이 장성의 효시이며, 그 후 각 제후국마다 나름대로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BC 221)한 후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각 제후국이 쌓아 놓은 장성을 연결하였다. 이후 흉노족 계열인 몽고가 원나라를 건국하면서 만리장성의 존재가치가 없어졌으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몽고족들이 다시 쳐들어올까 하는 생각에 장성을 튼튼하게 다시 쌓았다. 현존의 만리장성은 명나라시대에 최종 완성된 것으로 보면 된다.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볼 만한 곳은 팔달령과 거용관, 수관 등 3곳인데, 그 중에서 사통팔달로 다닐 수 있는 팔달령이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요즈음 서로 경쟁적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가장 비싼 팔달령보다 거용관이나 수관을 이용하기도 하나, 게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다는 프리미엄 때문에 팔달령이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편이다. 참고로 만리장성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이름이 높으나, 다른 한편으론 지역 주민들이 집의 재료나 관광객에게 판매하기 위해 장성의 벽돌을 가져간 탓에 파괴가 지속되었다. 또한 댐 공사로 인해 일부가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20064월에 열린 중국의 학술단체인 중국장성학회의 조사 결과보고서에 만리장성이 안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지역은 전체의 20% 이하이고, 일부만 존재하는 지역이 30%, 그리고 나머지 50%는 모습이 사라졌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얼마나 엄중한 상태인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국정부가 만리장성을 중요한 역사적 문화재로서 보호하면서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베이징 도심에서 1시간을 달려 팔달령(八達嶺)’의 발치에 이른다. 오늘의 일정이 베이징 북부의 팔달령(八達嶺)에 위치한 만리장성을 돌아보도록 짜여있기 때문이다. ‘팔달령 장성(八达岭长城)’은 만리장성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라고 한다. 수도인 베이징에서 8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지리적 장점과 함께 용()이 춤을 추는 듯한 역동적인 형상 때문이란다. 

 


만리장성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5,000~6,000km에 이르는 길이 일 것이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릴 정도이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하지만 만리장성이 각기 다른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 그리고 돌 등을 이용해 외세를 잘 막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지형마다 성벽의 높이를 달리했고 폭도 지역에 따라 모두 다르게 했다. 아무튼 주변의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웅대한 장성(長城)의 경관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팔달령 장성이다.



만리장성 투어의 시작은 케이블카에 올라타면서 시작된다. 산성(山城)이란 게 본래 산마루에 쌓아올린 걸로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걸어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지레짐작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소형 케이블카가 장성 턱밑까지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세 살 먹은 아이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누구나 장성투어를 할 수 있다고 하더니 맞는 말이었나 보다 

 

 

 



상부 탑승장에서부터는 걸어야만 한다. 성벽 위 계단을 오르내리며 망루(望樓)와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일은 순전히 관광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팔달령을 비롯한 현재의 장성은 대부분 명대(明代)에 축조된 것이다. 장성은 축조 초기인 진(), () 시대에는 현재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거란(契丹)과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 위치로 남하했다. ()나라 시대에는 장성 너머까지 중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방어선으로서 의의가 상당 부분 축소되기도 했었다. 참고로 명나라 때의 성벽은 과거와는 달리 요새(要塞)뿐만 아니라 통상로(通商路)로도 이용되었다. 19세기 초 중국주재 나폴리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는 ‘15미터 높이의 성벽 상부에 말 다섯 마리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안전한 길이 있었다고 했다. 만리장성이 왕래의 중추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설명으로, 출입구 부분에는 시장도시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성벽(城壁)에 올라선다. 이제 난 진정한 남아대장부가 된 셈인가? 중국의 혁명지도자이자 정치가였던 마오쩌둥(毛澤東, Mao Zedong)만리장성에 올라가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 非好漢)’라고 말했다니 말이다. 마우쩌둥의 이 말은 장성과 주변 풍경의 아름다움을 대변한 것일 게다. 그의 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인류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이 거대한 역작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유산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TV나 책을 통해서나 볼 수 있었던 만리장성을 실제로 보다니 감개무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성벽 위를 오가는 관광객들뿐이다.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비가 시야를 꽉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장성에 발을 디딘다는 설렘에 잠까지 설쳤는데 억울하기 짝이 없다.

 

 


성벽의 위는 온통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벽돌로 바닥을 깔았고, 난간 역시 벽돌을 쌓아 올렸다. 하나같이 구운 벽돌들이다. 성벽의 폭은 5~6미터 쯤 되지 않나 싶다. 참고로 만리장성은 지형에 따라 벽의 높이가 3미터에서 8미터까지 다양하였으며, 하단부의 너비는 7미터쯤 되는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그 너비가 4~6미터로 줄어든단다. 요철형의 흉곽 길이는 안으로 1미터, 밖으로 2미터란다. 아무튼 성벽의 위는 넓다. 말 다섯 필이 횡렬로 서서 지날 수 있을 만큼 큰 폭이란다. 그런 성벽이 끝도 없이 뻗어나간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끝에 구름 한 점 두둥실 띄워보자. 용틀임을 하던 성벽은 시야가 멀어짐에 따라 실오라기처럼 얇아지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는가.

 


이왕에 성벽에 올랐으니 최소한 망루(望樓)까지는 다녀와야 한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르막길은 꽤나 길다. 거짓말 좀 보태서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런 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휘적휘적 거침없이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오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봉()에 의지한 채로 한 계단 한 계단씩 엉금엉금 발을 옮기고 있다. 뭔가를 꼭 봐야겠다는 열망이 크지 않다면 저렇게까지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리장성하면 진시황제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진시황제가 처음으로 만리장성을 건설한 건 아니다. 장성의 시작은 춘추전국시대에 현재의 산둥지방에서 일어났던 제()나라이다. 중원에 있는 각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그 후 화베이(華北)에 세력을 가진 연()나라와 초()나라 등 여러 나라가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장성을 건설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유목민족 흉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이미 건설되었던 각국의 성벽을 보강하고 연결했을 따름이다.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흉노(匈奴) 기마부대의 위협을 받던 진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하여 잃어버린 땅을 회복한 후 기존에 건설되어 있던 장성들을 연결하도록 했다. 기존의 장성을 보수하고 장성이 없는 지역에는 새로이 성벽을 쌓으면서 10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완성했다고 한다. 흉노가 쳐들어오지 않으면 진나라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진시황제가 보인 평화 정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얼마쯤 걸었을까 망루(望樓)가 나타난다. 서로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마다 12미터의 높이의 탑()을 세웠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리고 그 탑은 무기고나 초병(哨兵)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망루 근처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성벽 위라고 해봐야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어 아래로 내려가 본다. 제법 너른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옛날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쉼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성벽은 규격에 맞춰 다듬은 돌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상부의 난간은 벽돌을 쌓아 놓았다. 지역에 따라 흙과 벽돌, 돌 등의 다양한 재료로 건설되었다고 하더니 이곳 팔달령 부근은 벽돌과 돌이 사용되었나 보다. 본래의 장성(長城)은 사람 키 정도로 참호(塹壕)를 파고 그것을 수비하기 위해 쌓아올리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을 방어만 하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성을 쌓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변해 있는 것이다. 



거대한 성벽을 바라보며 이를 쌓아올린 힘없는 백성들을 떠올려본다. 두고두고 한탄했을 그네들의 고달픈 인생을 말이다. 당시 성을 쌓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쌓다가 죽으면 시체를 다른 곳에 묻기 힘들어 바로 그 곳에 묻어버렸단다. 만리장성을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고 산해관에 있는 맹강녀(孟姜女)의 사당이 이를 증명한다. 맹강녀는 진나라 때 사람인 범기량(范杞梁)의 아내로서, 만리장성 축조에 징발된 남편이 제물로 바쳐져 성벽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알고, 며칠 간 대성통곡하니 성벽이 무너져 남편의 시체가 나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무튼 맹강녀는 시신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되돌아 내려가는 길, 누군가는 만리장성을 일러 인류가 만들어 낸 유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자랑스럽고, 가장 값진 문화유산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누군가는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보이는 것이라곤 만리장성 뿐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위대함은 힘없는 민초들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이 없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장성투어의 백미(白眉)는 누가 뭐라고 해도 끝도 없이 뻗어나간 장성의 모습일 것이다. 망루(望樓)에서라도 바라볼라치면 흡사 용()의 몸통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용 한 마리가 길고 긴 몸을 이끌고 구불구불한 산마루를 기어가다 일순간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성벽 위를 오르내리는 관광객들뿐이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빗속에 장성을 올랐기 때문이다.

 


아무튼 만리장성은 기마민족(騎馬民族)에 대항한 한족(漢族)의 오랜 고뇌의 산물이기도 하다.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하던 한족에게 유목 생활을 하던 북방의 기마민족은 늘 두통거리였다. 산업화(産業化)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빛살같이 빠른 기마부대에 맞설 방법이 전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그런 공포가 중국인들에게만 해당 되는 건 아니었다. 중국은 물론 유럽 전역에 숱한 공포심을 안겨주며 세계사를 뒤바꿔놓곤 했으니까 말이다.